자본의 지배, 그 세련된 가면을 벗겨라-게오르그 루카치[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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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지배, 그 세련된 가면을 벗겨라-게오르그 루카치[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⑥

 

강사 :?이성백(시립대교수)
후기 : 이원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열다

19세기말 20세기 초, 소위 혁명의 시기에 마르크스의 깃발을 든 돌격대는 세계 곳곳에서 그의 함성을 남겼다. 마르크스의 사도 바울, 레닌에서부터 순교자 로자 룩셈부르크까지.. 그러나 그 시기가 격동의 시대여서 그런지 돌격대에 비해 본진에서 보급부대의 역할을 하는 혁명가는 드물었다. 그람시의 진지도 적진 깊숙이 있지 않았던가. 게오르크 루카치의 혁명과 투쟁은 레닌이나 마오쩌둥처럼 찬란하지도, 로자나 그람시처럼 처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역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론적 재정립을 시도한 이론적 보급부대로서 투철한 혁명가이다.

<마르크스주의사상사> 6번째 강연에서 이성백 서울시립대 교수와 함께 게오르크 루카치(1885~1971)와 그의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루카치는 스파르타쿠스단을 통해 독일에서, 그리고 인민위원으로서 소비에트 공화국이 시도된 헝가리에서 봉기에 가담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모스크바로 망명 한 뒤 훗날 헝가리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재정립을 시도한 학자이다.

이성백 서울시립대 교수 ⓒ교수신문

한국에서는 70년대 문학 평론, 미학 등에서 많이 다루며 변혁의 이론으로 많이 소개되었으나 그 후 소련의 교조적 마르크스주의가 수입되자 도식적인 규정으로 루카치는 기회주의나 헤겔주의의 관념적 편향으로서 치부되어 과소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 후 서구의 프랑크푸르트학파 등이 주목받자 국내에서도 다시금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이성백 교수는 루카치를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정초를 닦은 인물로 평가하면서 그가 없었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철학 자체가 발전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라 평한다. 그러면서 오늘날 루카치에 대한 재평가와 새로운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이날의 강연을 열었다.

 

세련된 자본의 미시적 지배

아도르노(1903~1969)가 2차 대전을 경험한 후 ‘어떻게 인류가 이런 야만의 상태로 빠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 속에 『계몽의 변증법』등을 펴내며 사회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드러낸 것과 마찬가지로 이 교수는 이에 앞서 루카치 역시 1차 대전이라는 악몽 속에서 절망을 느끼며 ‘누가 우리를 서구 문명으로부터 구해 줄 것인가?’라는 절박한 문제에 직면했다고 말한다.

후진 러시아는 혁명에 성공한 반면 객관적 조건이 성숙한 서구는 오히려 혁명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상황은 루카치에게 많은 고민을 던져주었다. 훗날 그람시와 알튀세가 ‘강제와 이데올로기 생산을 통해 스스로 지배당하게 한다’는 것을 지적했고 푸코는 국가권력이 아닌 미시권력이 노동자를 지배한다고 지적했다. 또 들뢰즈가 인간의 무의식인 욕망까지도 자본이 포획하고 그래서 노동자는 자본에 대한 저항을 하지 못한다고 봤다. 그러나 이 교수는 루카치가 이미 이들에 앞서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국가권력이 아니라 미시적 지배 장치가 작동하고 있음을 선지적으로 간파했다고 말한다.

이 교수에 따르면 루카치는 당시 혁명 운동의 위기의 근원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의 위기,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를 지니지 못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위기보다 뒤쳐져 있는데서 찾고 있다고 한다. 이 교수는 루카치가 아직 그 빈자리에 지배이데올로기가 들어온다는 것을 못 봤지만 이데올로기의 위기를 진단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했다.

루카치는 베른슈타인류의 수정주의나 카우츠키류의 이른바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모두 실천적 기회주의와 이론적 실증주의에 빠져 있으며 이것들이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적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 교수는 마르크스주의가 낡을 수도 있지만 내용을 담는 그릇으로써 방법론인 변증법은 변하지 않는 가치를 가지며 그것만이 정통성을 가지는데 루카치는 이러한 정통성을 유지하는 마르크스주의자라 평했다.

루카치가 보기엔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주의를 진화론과 같은 것으로 봄으로써 목적론에 매몰되어 변증법을 진화론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전락시켰다. ‘인간이 추구하든 말든 사회주의로 가게 돼있다’는 식의 진화론은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실천의 역할을 상쇄시키고 관념적 운명론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 교수는 베른슈타인은 이러한 배경에서 목적론과 법칙을 상정하지 않고 눈앞에 현실적 문제에 천착하게 된 것이라 말했다. 그러나 이 교수는 루카치는 이 둘을 모두 비판하면서 역사는 이미 정해진 법칙을 따라 자동으로 공산주의로 가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눈앞에 있는 것을 자의적으로 실천하는 것도 옳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변증법을 주장했다고 말한다. 이에 루카치는 주체와 객체의 상호작용과 통일로써 변증법을 말하는데 이 교수는 루카치가 역사를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 따라서 형성되는 것으로 둘 간의 관계는 대립, 선택이 아니라 상호결합의 결과로 본다고 설명했다.

 

마르크스 적통의 인장, 변증법

루카치는 이러한 주객의 변증법을 통해 총체성의 관점을 취한다. 이 교수는 총체성에 관한 루카치의 관점은 헤겔에 대한 그의 이해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헤겔은 세계를 하나의 구조로 보고 그 안에 많은 개체들을 어떻게 긴밀하게 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에 주목했는데 루카치는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면서 부분에 대한 인식이 전체를 구성하며 그 역도 성립함을 주목한다. 이에 루카치는 주체와 객체의 유기적인 상호관계를 보고 총체성을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루카치는 구조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있을 때 총체적 실천과 혁명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헤겔은 인간의 의식을 즉자적 의식과 대자적 의식으로 나누었다. 즉자적 의식은 일상적이며 개체적 인식인 데 반해, 타자와의 비교를 통해 자기반성을 고려하는 것이 대자적 의식이다. 이 교수는 루카치가 이런 헤겔의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도 구분되는 것으로 보았다고 말한다. 프롤레타리아트 개개인이나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이 지닌 일상적 의식과 진정한 계급의식이 그 두 가지인데 루카치는 자본에 대한 총체적 의식이 없으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일상적 의식에 머무는 것으로 본다. 그렇게 되면 사적이해에 매몰되고 혁명에 나서지 못한다. 이에 반해 프롤레타리아트가 자본주의 경제에 대한 참된 의식인 진정한 계급의식을 가지면 비로소 혁명에 나선다고 루카치는 말한다. 이 교수는 루카치의 이런 시각이 혁명에 관한 선구적인 지적으로 보았다. 혁명을 위해 필요한 것은 프롤레타리아트가 혁명의 필요성을 자각하는 하는 것인데 지식인의 역할은 그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른바 이데올로기의 진지전인데 이는 그람시에 앞서 이미 루카치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의식화라는 것은 사회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는 것인데 이는 스스로 볼 수 있는 비판의식이다. 루카치의 총체성 개념은 훗날 리오타르와 아도르노에게 있어 비판받지만 이러한 비판의식은 아도르노를 통해 비판이론으로 계승되어 더욱 빛을 발한다.

주체와 객체 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주목으로서 루카치의 총체성은 리오타르와 포스트구조주의에서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1980년대 이 후 서구를 포함한 진보진영은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상실하고 이론의 안개 속에서 헤매는데 이는 루카치의 총체성이 그 지위를 상실한 뒤 그의 대체자를 찾지 못한 결과이다.

 

새로운 신을 발견하다

마르크스의 물신숭배는 이제 너무 익숙한 마르크스의 대표적 이론이지만 루카치 당시만 하더라도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던 이론적 주변부였다. 그러나 루카치는 『자본』에 나오는 상품물신숭배에 주목함으로써 무력이 아닌 또 다른 지배자를 발견해낸다. 마르크스의 물신은 원시종교에서 사물에 초자연적 힘이 있다고 믿고 이를 숭배하는 것인데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그 사물의 역할을 상품이 대신하는 것이다. 루카치는 마르크스의 상품물신성을 자본이 노동자를 지배하고 그들 은폐하기 위해 작동하는 메커니즘으로서 자신의 언어인 사물화로 바꾸어 부르며 강조한다. 이를 통해 지배가 은폐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은 더욱 일상성 속에 갇힌다. 이 교수는 ‘물 속의 젓가락은 휘어 보이지만 물 속에 있는 사람은 그 휘어있음을 볼 수 없는 것’에 비유하며 사물화로 인해 은폐와 지배를 설명했다.

사물화는 돈, 상품 자체가 가치가 있다는 의식에서 시작한다. 이 교수는 상품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단순히 상품 그 자체가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노동의 투여되어야 비로소 가치를 가진다는 아담 스미스, 리카도와 같은 고전경제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설명했다. 사회와 상품은 인간의 노동과 생산에 의해 창조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대상이 그 스스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착각하고 그것에 매달리는데 이가 바로 루카치가 말하는 사물화다. 이런 사물화는 일상성에 사람들을 매몰시킴으로써 노동자들의 마이카(My car) 열풍과 같이 ‘나도 갖고 싶다.’라는 생각, ‘돈에 대한 집착’을 만들어내 자본주의에 대한 극복의지를 잠재운다. 자본주의의 지배방식은 페르시아 대왕의 채찍과 다르다. 이 교수는 루카치가 지적한 대로 자본의 지배 방식은 세련되게 사람들을 포섭하여 스스로 혁명하지 않게 만든다고 말했다. 그러면 혁명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교수는 루카치도 완전히 자신있어 하지는 않아 보인다고 말한다. 다만 루카치는 일상성을 극복하고 참된 계급의식만 심어주면 혁명이 가능해진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본의 지배는 계속해서 세련되어진다는 문제가 있다.

 

모두가 법정스님이 되긴 힘들어

이 교수는 루카치가 사물화를 말하고 이데올로기적 지배를 밝혀 자본의 지배 양식과 그 은폐를 폭로했지만 이로 인해 마르크스주의 진영에 엄청난 선입견이 생겨버렸다ㅗ 지적하며 루카치의 한계에 대해 설명했다. 루카치는 일상성을 참된 계급의식에 대한 인식을 가리는 ‘나쁜 것’으로 규정했는데 이 교수는 이것이 엄청난 부작용을 낳았다고 비판했다. 즉 먹고 사는 것은 일상의식으로 나타나는데 일상의식이 폄하되니깐 노동자의 일상적 삶이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소수의 성직자를 제외하고 일상적 소유와 욕망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 어디 많겠는가? 이 교수는 흔히 진보진영에서의 결정적인 분기점인 베른슈타인과 급진주의는 일상에 대한 긍정과 일상에 대한 부정의 대립에 다른 이름이기도 한데 이 분열로 인해 오히려 혁명운동을 긍정하는 노동자가 줄어들었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개량이냐 혁명이냐라는 이분법을 극복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이어 노동자에게 일상을 버리고 참된 의식만 가지라는 것은 공상으로 갈뿐이라 충고한다. 일상과 결합되지 않는 참된 의식은 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일상성을 긍정하면서도 어떻게 변혁으로 갈 것인가에 대한 이론적 재구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 교수는 베른슈타인과 같은 개량과 계급의식에 대한 폐기를 경계하면서도 이들이 주목한 일상성을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요소로 본 것이다. 이 교수의 말을 듣다보니 인간해방에 대한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마르크스가 바로 이런 일상성과 참된 계급의식의 일치를 꿈꾼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교수의 말대로 자본의 지배는 너무도 세련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한편 강연을 통해 더 혼란스러워지기도 했다. 왜냐면 외부의 전선이 흐려져 적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는 시대인데 내적인 전선마저 흐려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루카치 이래로 내적인 전선은 일상성에 대한 적대로 어쩜 명확했다. 그러나 내 안에 고민해야하는 일상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것에 대한 공감이 들자마자 전선은 내외적으로 오히려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았다. 사물화와 일상성에 대한 구분 혹은 정리는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했다. 그러나 일상성에 대한 이 교수의 주목은 결국 변혁은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원점에서 공감이 갔다. 그렇기 때문에 변혁은 더욱 어려워 보이며 그 전망은 항상 가리어져 있었지만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마침 그날은 4.11총선의 다음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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