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금문제 해결방안이 교육재정 돌려막기? [썩은 뿌리 자르기]

이원혁(건국대 대학원)

사그라진 줄 알았던 등록금 촛불이 7월 9일, 열흘만에 다시 켜졌다. 이번 학생들의 문제제기는 많은 이슈들 사이에서도 쉽게 묻히지 않고 있다. 그만큼 그들은 절박하고 또 그만큼 정치권에서도 민감해진 ‘장사거리’다. 핫이슈는 정치권에서만 잘 팔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문제를 진단하고 나름의 처방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중 얼핏 들으면 옳은 소리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딘가 불편한 진단과 처방책이 있다. 대학이 너무 많아 나랏돈이 허튼곳에 쓰이니 대학구조조정을 통해 정부지원금을 절약하고 그 돈으로 소위 잘 나가는 학교들에 등록금 지원을 하자는 제안이 진보, 보수 진영을 넘나들면서 무릇 사람들의 귀를 쫑긋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진단에서는 등록금문제의 원인을 ‘과잉된 대학교육’때문으로 보는데 여기의 숨은 전제는 교육의 시장화를 부추길 뿐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예전부터 아니 처음부터 대학은 소위 잘난 곳이었다. 동양에서 최고 학문기관인 대학은 대중적 교육기관이 아니었다. 다산 정약용은 “대학공의”에서 본래 대학은 왕의 아들들이나 삼공의 맏아들이 지도자교육을 받던 곳으로 보편적 앎이 아닌 엘리트 교육의 장으로 역할을 해왔다고 말한다. 서양에서도 대학은 지적귀족의 사교장으로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대학이 적어도 한국에서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성장했다.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고등교육이 오래 전부터 자리 잡은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은 개천에서 유일하게 용이 나올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대학을 꿈꿨고 대학은 점차 선택에서 필수가 되어갔다. 여기에 폐단도 많았다.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능력여하와 상관없이 정상적인 직장과 수입을 가지기가 힘들어졌다. 따라서 혹자는 대학의 문제를 학벌사회의 병폐로 보고 대학과잉을 문제 삼는다. 굳이 대학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대학으로 보내는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가 해결되면 소수의 수요자만 대학에 가고 등록금문제와 같은 대학의 문제는 쉽사리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그 말을 당장 누구한테 할 것인가? 이미 한국사회에서 대학은 대중적 교육기관으로서 자리 잡았다. 그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엘리트만의 전당으로서 대학은 한국에서는 이미 누구나 넘볼 수 있는 대중적 지적교류의 장이다. 누구나 최고등교육을 받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 최고등교육이 시장성, 효율성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 문제다. 다시 말해 공장노동자가 될 사람이 대학을 다니는 것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대학교육이 취업훈련으로만 대체되는 것이 문제다. 대학교육의 과잉을 말하는 사람의 상상력은 오후에 퇴근한 노동자가 저녁에 대학에서 세익스피어를 읽는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사회에는 적정수를 유지해야하는 것이 있는 반면 사회에 흘러 넘쳐도 과하지 않는 것이 있다. 교육의 질을 위해서 대중교육의 자리를 제한하는 발상은 그 교육의 질이 어디를 또 누구를 향하는 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7월 5일 대학구조개혁위원회(이하 위원회)가 첫 회의를 했다. 이들은 거세지는 반값 등록금 요구에 부응하여 정부가 내놓은 방책이다. 위원회는 교과부 장관의 자문기구로 출범·운영하지만 `사립대학 구조개선의 촉진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되면 법적 심의기구가 된다. 이들은 부실 사립대 퇴출과 국공립대 통폐합 등을 주요 주제로 활동하게 된다. 홍승용위원장은 ‘지방대학, 소규모대학 죽이기는 아니다.’라고 단언하지만 사실 위원회의 칼날은 모두 이들을 향해있다. 학생 충원율과 등록금에 대한 재정의존도, 취업률을 기준으로 부실대학과 그를 바탕으로 퇴출대학의 명단을 만든다고 한다. 물론 재학생 수를 조작하고 재단비리가 많은 학교는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한다. 위원회는 이러한 문제학교를 조정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위원회의 출범배경이이다. 국가 재정이 열악한 상황에서 빗발치는 등록금인하 요구를 받아들이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나온 ‘교육재정 돌려막기’의 일환이 이 위원회의 숨겨진 미션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집에 돈이 없다고 말하실 때와는 달리, 이번 정권이 돈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마음을 울리지 못한다. 나라님이 세도가들 세금 깎아주고 살아있는 강물을 세금으로 메우고 이 때문에 재정이 바닥나 등록금인하 요구에 대응하지 못 하는 현실은 정상적인 ‘돈 없는 집안’이 아니다. 실제로 2008년 2725억이었던 시도교육청의 지방채는 2009년 2조1316억으로 훌쩍 늘어났다.(2009교육과학기술부자료 권영길의원실분석) 그러지 않아도 감세와 4대강공사 등으로 전입금을 줄어 적자인 교육재정에 반값등록금은 정부의 정책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애당초 무리였다. 위원회의 목적이 ‘돈 아끼기’로 정해진 이상 부실대학 구조조정은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로 진행될 여지가 있다. 위원회의 부실대학 판단기준 중 하나는 등록금의존율인데 우리나라 대학의 평균 등록금 의존율은 80%에 다달 한다. 서울의 주요 사립대는 70%정도인데, 주요 사회적 기부금을 국립대와 서울의 주요 사립대들이 싹쓸이하는 현실과 일본의 대학등록금의존율이 13%, 영국이 26%(등록금의존율 자료-한국일보 2011.6.16 사회면 4면3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도토리 키 재기다. 물론 등록금의존율이 극단적인 몇몇 학교도 있지만 이들 학교만을 정리한다해서 실질적인 등록금인하가 가능한 금액이 산출되지는 않는다. 전체의 문제를 일부의 문제로 만드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한다. 대학 줄 세우기와 이로 인해 만들어진 순위대로, 어쩌면 할당된 수대로 대학을 처분한다면 그 학교를 배움의 터로 삼고 있는 학생들을 다시 한 번 좌절하게 만든다. 대학을 줄여나가며 대학교육을 제한함으로써 등록금위기를 돌파하겠다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다. 위원회의 칼날은 살생부에 의한 꼬리 자르기가 아닌 대학 전반에 대한 손질이 되어야한다. 등록금의존율 80%인 학교가 문제라고 해서 70%, 60%인 학교가 정상이거나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등록금의존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학교를 퇴출시킴으로써 다른 학교의 변화를 유도한다지만 지방대, 소규모대학과 소위 서울명문대 간의 간극이 유지되는 한 그러한 변화는 요원하다.

등록금문제는 보편적 복지의 관점에서 해결되어야한다. 더 이상 한국에서 대학은 선택적 엘리트교육이 아니다. 대학입학자의 비율이 고교 졸업생의 80%에 이르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대학이 많은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은 대학의 문제를 소수의 문제로 치부하거나 소수의 영역에 감히 침범한 대중을 나무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현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20대의 다수에게 대학은 일상이다. 그 일상이 등록금과 생활비에 눌려있다. 일상의 문제를 특수한 문제로 치부하니 현실적인 해결책이 나올 리 만무하다. 보편적 복지는 그 혜택의 제한이 없다. 누구나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려야 하는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이 보편적 복지다. 국민의 일상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그것이 국민의 행복추구권에 건전하게 부합한다면 이는 당연히 보편적 복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학생들의 등록금 인하 요구는 건전하게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자하는 청년들의 자연스런 요구이다. 하지만 대학구조조정을 통해 등록금문제를 해결 하고자는 것 300만이 넘는 대학생의 문제를 보편복지가 아닌 시혜적 정책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는 대학을 엘리트만의 비밀장소로 남겨 두려하는 것이거나 교육을 시장과 자본의 논리에 맡겨두겠다는 의미로 읽혀 질 수밖에 없다.

등록금문제가 학생들에게 단순하게 금전의 문제를 넘어서는 이유는 이 문제가 학생들로 하여금 대학이성과 진리보다는 시장논리에 훨씬 더 친숙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등록금 속에서 학생들은 대학에 학문이 아닌 미래의 돈을 기대한다. 취업 후 상환이라는 무책임한 대학등록금 대책 덕택에 대학생들은 취업에 서두를 수밖에 없다. 당연히 학생들은 소수의 취업이 잘되는 과로 모이고 그러한 몇몇 과는 항상 과잉으로 전문인력을 배출한다. 학생들이 규격화된 욕망 속에서 서로 경쟁하다보니 당연히 취업은 쉽지 않아지고 자본은 노동과 교육을 모두 지배하는데 용이해졌다. 교육의 시장화는 만성적 청년실업과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절대 우위를 유지하게 한다. 그런데 정부가 대학구조개혁위원회를 통해 진행하는 구조조정은 이러한 시장화에 대한 고민이 결여되어 있다. 취업률과 대학등록금의존율을 통한 대학구조조정은 사실상 학벌사회에서 대학 줄세우기의 공식화의 다름이 아니다. 대학등록금의존율은 낮을수록 좋다. 하지만 소위 잘나가는 학교들의 오너가 대기업이 경우가 많고 명문대가 정부 주관사업이나 사회적 기부금을 과점하는 것은 지방, 하위대학들이 못나서만은 아니다. 대학에 대한 구조조정의 압박이 강해질수록 대학과 학생은 대학에서 직접 금화를 찍어내는 학문에만 치중하게 될 것이며 이는 대학의 시장화를 더욱 가속화시킬 뿐이다.

좀 더 솔직해지자. 한국사회에서 대학의 위상은 이제 존귀한 지성의 장도, 취업의 지름길도 아니다. 둘 다 실패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에서 대학은 종합적 교양인을 양성하며 그 속에서 젊은 청춘들이 꿈을 가꾸는 곳이다. 더 이상 신성한 곳도 아니며 금화를 건네는 곳도 아니다. 대중적 지성의 교류의 장으로서 사회 전체의 교양을 함양시키는 보편적 교육기관이다. 물론 이곳에서 미래의 금화를 가꾸고 준비할 수도 있겠지만 대학생 누구도 자신의 대학생활을 취업준비로 가득 채우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대학에서 기대하는 낭만과 추억은 사회가 기대하는 사회전체의 교양과 연계된다. 학생들의 등록금인하요구는 대학교육의 사회성, 보편성을 요구하는 것이지 이의 선택적 제한이 아니다. 대학의 등록금문제는 사회전체의 지적성숙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학내 계급과 등록금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박선정(한신대 일반대학원 사회과학 통합과정)

올 초부터 시작된 등록금 투쟁이 장마가 시작된 지금까지도 그 열기가 식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3월에 시작해서 5월이 오기전에 끝난다고 해서 개나리 투쟁이라고 부리던 대학 등록금 투쟁이 이렇게 전국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다. 또한 이번 투쟁은 그동안 각 학교안에서 투쟁을 벌이던 형식에서 벗어나, 학생당사자와 등록금 문제를 동의 하는 대중들이 거리로 나와 범국민적인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앞서 말한 이 두가지 현상은 모두 등록금문제가 더 이상 한가정이나 개인의 문제가 아닌 전사회적인 문제라는 라는 것을 말해준다.

역사적으로 대학이라는 공간이 사회적으로 모두 똑같은 기능과 구성원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국 사회의 대학은 필수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기 위한 관문이 되었다. 그러나 대학에 대한 접근성은 필수적으로 졸업을 해야 하는 상황과 달리 경제적 조건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현재 고졸자 10명 중 8명 정도가 대학에 입학을 한다. 이것은 대학 교과과정이 더 이상 소수의 몇몇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공간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대학 교과과정이 일반적이고 보편화된 상황에 반해 등록금은 연간 천만원이라는, 소위 ‘미친 등록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게다가 2010년 334개교의 대학들 중 국·공립대는 14%의 낮은 비율을 보이고 있는 반면, 학생들에 대한 등록금 의존율이 국립대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사립대학은 86%라는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적인 국립대 서울대는 현재 법인화 문제를 겪으며 대학이라는 공간이 결코 자본의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대학은 필수로 나와야 하지만 누구나 대학을 쉽게 갈수 없는 사회. 대학은 넘쳐나지만 국? 공립대는 전체대학 중 14%에 불가한 현실 이처럼 대학 등록금 문제는 우리사회가 필수적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등록금 문제는 단순히 등록금을 내리거나 지원해주는 형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이는 사회안에서 대학 졸업의 자격 조건이 강화되는 것과 사립대학의 비정상적인 증가, 이를 둘러싼 대학등록금 인상이, 모두 자본주의 사회안에서의 교육 상품화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의 위기와 신자유주의의 도래는 교육마저 상품화 시켰다. 수업은 화폐와 교환되어지고, 이는 대학졸업과 함께 특정한 자격의 형태로 드러난다. 그리고 대학의 서열을 통해 그 자격들은 사회 경쟁체제에서 힘으로 작용된다. 이는 대학이 단순한 교육기관이아닌 교육이라는 서비스를 생산하고 이윤을 만들어 내는 기업으로 변모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등록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시대에서 대학이 어떤 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그 안에 어떠한 구성원들이 있고, 그 구성원들이 각각 어떤 계급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보고, 대학의 근본적인 구조를 바꿔내는 것이 중요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학이라는 공간은 공장처럼 생산수단의 소유를 통한 계급관계의 대립이 극명하지 않다. 하지만 대학 이전의 교육과정(물론, 초?중?고 안에도 노동관계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존재한다.)과는 차이를 보이는 학내의 구성단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학내 구성단위들은 학내에서 서로 조금씩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다. 이는 계급적으로 대립될 수도 있고 노동의 종류와 위치는 다르지만 같은 계급적 이해관계를 가질 수도 있다.

맑스의 노동자 계급 개념을 보았을 때 학내노동자(교수, 교직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임금을 받고 노동을 하는 임금 노동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잉여가치를 창출하지는 않는다. 맑스는 ‘생산적 노동’이라는 정의를 “임금으로 주어지는 생활 수단의 전체가치를 자기자신을 위해 생산할 뿐 아니라 부르주아를 위해 이윤을 함께 생산하는 노동자.” “자본을 생산하는 노동자만이 생산적인 노동”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비생산적 노동’은 “자본과 교화되지 않는 노동이며 자본이 아니라 수입과 교환되는 노동”이라고 정의한다. 이때 수입이란 임금 또는 이윤을 의미하고 여기에는 이자 및 지대 같이 부르주아의 이윤으로서 취득되는 다양한 범주를 포함 한다. 이런 ‘비생산적 노동’을 하는 ‘비생산적 노동자 계급’에는 공무원, 학교 교직원 등이 포함 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노동자 계급이란, ‘생산 관계에서 생산 수단을 갖지 못하는 자’, ‘노동력을 팔아 임금으로 생활하는 자’라는 결론을 추론해 낼 수 있다. 이처럼 학교 안에서 교수와 교직원은 노동자의 계급적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학교의 이러한 학내 노동자(교수, 교직원)들이 만들어낸 이윤을 착취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등록금과 같은 사안을 놓고 투쟁을 벌일 때 흔히 벌어 질 수 있는 논쟁이고 학내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책임이 전가되어지는 수단이기도 하다. 이는 곧 우리가 누구를 대상으로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직결된다. 이는 앞서 이글의 서두에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교육이 상품화 되고 이윤을 창출해 내기는 하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자본주의의 생산방식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그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리고 대학이 국립과 같이 공적공간의 성격이 강한 것부터 시작해서, 법인, 완전한 개인소유까지 다양한 형태가 존재한다. 국립을 제외한다면 학교를 소유하는 재단이 학교의 이윤을 착취하는 가장 일반적이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가 심화되고 교육 상품화의 성격이 명확해 질수록 재단의 기업적 형태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학교운영(정책)의 주체이다. 학교는 일반적으로 재단이 소유하지만 교수들 또한 학교의 운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교수는 학내에서 이윤 생산의 주체임과 동시에 학교운영의 결정권 또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노동자로만 규정할 수 없는 교수집단의 성격이다. 중간 관리적 성격을 가진 교수 집단은 학교를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고 이윤을 착취하지는 않지만 운영과정에서 대학을 상품화 시키는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 등록금 인상 또한 중간 관리를 담당하는 교수진의 동의를 통해 이루어 진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싸워야 하는 학교당국이라는 의미에는 이러한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 교수집단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대학이라는 공간은 학내노동자를 통한 잉여의 착취보다는 등록금을 내는 당사자(학생)에게 높은 등록금을 부과하는 형식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교육을 상품화 시키고 등록금을 올리는 논리는 필연적으로 교수와 교직원의 노동환경 변화를 수반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등록금 인상은 단순히 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 문제는 대학 내 노동 또한 예외가 아니다.(이미 대학 내 시간제 강사들에 노동권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공론화 되었다.) 이러한 노동 억압적 요소들은 더 이상 대학을 민주적인 공간으로 존재할 수 없게 한다. 실제 교수사회에서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정교수를 거쳐 중간관리자까지 가지위해서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고, 이런 과정들은 점점 더 권력화 되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학위를 이수한 교육노동들이 이러한 교수사회에 편입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로 인해 교수집단이 학내에서 한편으로는 권력을 가진 중간관리자로 다른 한편으로는 빠른 속도로 프롤레타리아화 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학내의 노동유연화는 이윤 생산에 더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교수집단 보다 교직원집단에서 더욱 빠르게 일어난다. 청소나 경비와 같은 행정주변부의 간접고용을 시작으로 행정 중심부의 노동유연화 또한 가속화 되고 있다. 이윤추구 중심의 대학운영은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업무들을 만들낸다. 흔히 학내에서 등록금 투쟁의 주체는 학생들인 경우가 많다. 등록금을 직접 부담해야 하는 당사자이기 때문에 물론 당연하다. 하지만 임금을 학교로부터 받기 때문에 교수와 교직원이 당연히 등록금 투쟁과 거리가 멀다는 인식은 다시 한번 재고해 보아야 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등록금 인상의 원인인 신자유주의는 학내 노동자의 노동권과도 분명연관 이 있기 때문이다.

등록금 해결을 위한 정책들의 실효성에 대한 찬반이 뜨겁다. 반값등록금을 외치고는 있지만 실현될지, 혹은 실현 가능한지에 대한 논란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등록금 문제를 제외하고 대학을 둘러싼 문제들이 매우 많고, 그와 과련 된 교내의 여러 계급들이 존재 하는데도 부과하고 여전히 학교밖에서 학생들의 힘으로만 싸움이 진행되는 것 또한 아쉽다. 등록금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들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현재 대학이라는 공간이 어떤 의미이고 그 안에서 어떤 구조와 계급들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대학이라는 공간을 지켜내기 위해 비단 학생 뿐만이 아니 그안에 구성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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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록금을 통해 축적된 이윤을 학교와 임노관계인 교수가 직접적으로 착취하는 형태를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이것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권력과 힘으로 연결되는 지에 관한 논쟁은 학교를 계급적으로 분석함에 있어 더 이야기 해볼만 한 여기가 매우 높다.

세일러문의 국가[썩은 뿌리 자르기]

양정진(한국철학사상연구회)

1.‘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에 이어 복지국가 열풍이 찾아왔다. (행성X와 혜성 엘레닌을 사랑하는 음흉한 나에게는, 정의론 중에서도 왜 하필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인가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뇌내망상의 세계를 만들어낼 신나는 구실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지금 현재 사람들이 마음 속 깊이 정의를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부인하기가 힘든 것 같다. 그리고 무지개의 끝에 숨겨져 있는 줄만 알았던 그 정의가, 복지국가라는 이름의 오색 빛깔 스펙트럼으로 공중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조지 레이코프 식으로 말하자면 과거 우리의 ‘엄격한 아버지’께서조차도 우리에게 복지국가를 실현시켜 주시고자 했던 것뿐이라고 그의 생물학적 딸이 주장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이제 진보는 국가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국가 자체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장치라고 폄하하던 과거의 태도를 버리고, 공공선과 정의를 실현시킬 수 있는 하나의 주체로서 국가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더 나아가 마르크스주의의 기획은 현실적으로 실패했으며 시장과 국가를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식의 ‘역사의 종말’ 론을 반복하는 경향으로도 나타난다. 내용상 딱히 새로울 것은 없는 주장일 것이다. 다만 이러한 주장들이 하필 샌델의 정의론 열풍과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다는 점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으로 보인다.

2.복지국가, 좋다. 더 이상 아무도 크레인에 올라갈 필요가 없고 분신할 필요도 없는 세상이 온다면, 살갑게 돌봐 온 배추를, 소와 돼지를, 아이를 가슴에 묻지 않아도 된다면, 점심 먹을 시간 좀 달라고 했다는 이유로 쫓겨나지 않을 수 있다면, 학생 신분이라는 게 사치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죄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 그게 어떤 이름을 갖고 있든 대체 무슨 상관일까. 누구 말마따나 국내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헌법에 명시된 기본권만 제대로 보장될 수 있어도, 최소한 그것만으로도 무척이나 가슴 벅찰 듯하다.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처절하게 행복한 상상들이 정의라는 관념과 연결될 때, 또 복지국가라는 이념이 정책적으로 실현되어야 하는 상황일 때, 이 상상들은 단일한 입장으로 좁혀지기가 쉽지 않다. 정의를 말하기 위해서는 ‘정의란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누구의 정의인가’,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를 물어야 하고, 정책을 입안하고 실시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의가 더 우선인가’에 대한 세부적 논의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3.이에 대한 진지한 논의 없이 단지 ‘현존하는 긴급한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앞뒤 자르고 무조건 진보가 뭉쳐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명백하게 현존하는 위험(CPD)’을 제거해야 한다는 냉전 시대 미국의 논리와 닮아 있다. 미국은 바로 이 논리를 확장하여 9.11 이후 애국자법을 발효시켰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과거에는 매카시즘으로, 현재에는 이슬람교도와 이민자들을 제물로 삼는 희생제의로 나타났다. 즉, 미국은 악을 제거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제거했다.

악을 제거하겠다는 수단은 그렇게, 정의의 실현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제치고 스스로 목적이 된다.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수단은 용납된다. 선과 악의 이 이분법적 구도 안에서, 악의 반대가 곧 정의라는 이 단순한 논리 안에서, 악의 제거를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지 않는 사람들은 악으로 규정된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지난 몇몇 선거에서 어떤 진보 정당은 악으로 규정되기도 했고, 또 어떤 진보 정치인은 ‘정치 생명이 끊어졌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제는 누가 진보인지, 무엇이 진보인지도 헛갈릴 지경이다. 이러한 이분법을 깨지 않는 한, 민주주의도 복지국가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악만 일단 제거하고 나면 공공선과 정의가 실현되는 이상 국가가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은 혁명이 일단 성공하고 나면 이상적 사회 건설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과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국경 따위 가볍게 뛰어 넘는 국내외 거대 자본 및 잃어버린 십 년을 보상 받고 그들만의 천년왕국을 준비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기득권 세력에 맞서 점진적으로 공공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과연 정말로 혁명을 일으키는 것보다 더 현실적이고 더 쉽고 더 빠른 방법인지 나로서는 판단이 서질 않는다. 현재 이곳의 이 누더기 같은 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다음 선거를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기다리고, 기다릴 수 없는 사람은 그냥 해고는 살인이라고 외치면서 죽든지 텅 빈 축사에서 목을 매든지 반도체 공장에서 암에 걸리든지 4대강 공사 현장에 묻혀버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건지, 혹시 ‘현실’이라는 이름 아래 현실 감각이 마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4.어차피 둘 다 이상적이긴 매한가지다. 더구나 둘 다 ‘그 이후’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사실상 마찬가지다. 둘 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 이후의 세계를 합의하고 구성해나가야만 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를 바 없다. 어떤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어떤 것은 너무 이상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최종 근거 따위는 역사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혁명론자라는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다. 나의 현재 정치적 입장을 굳이 설명하자면 슬프지만, 무뇌형 변신박쥐라고 해야 적절하겠다.)

그러므로 국가 자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며 보다 현실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은, 그리하여 시장과 국가를 자연화 하는 데까지 이르는 주장은, 그다지 정당해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어떤 입장이 더 이상적이고 어떤 입장이 더 현실적인지가 아니다. 거칠게 단순화하자면 다 그냥 이상일 뿐이다. 이상으로서 그 의미를 갖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이상을 꿈꿀 것인가이다. 즉, 문제는 정의라는 이념의 내용을 채우는 일이다.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는 그 이상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를 논할 때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5.이상이나 이념이 현실에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 이상이 현실에 대한 규준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이상을 갖는지에 따라, 현실을 얼마만큼 바꿔내야 할 것인지, 어디에서 만족하고 변화를 멈출 것인지가 결정된다. 개혁이 됐든 혁명이 됐든 변화의 최종 목적지를 설정해 주는 것이 바로 이상이다. 모두가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고 모두가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가운데 이들 사이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지점 중 하나는 바로 이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가일 것이다. 목적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따라 수단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바로 여기서 물어야 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이다. 각자가 취하는 이상, 각자가 설정하는 최종 목적지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래서 그 최종 목적지에서 내버려지는 것은 누구인지를 물어야 한다. 시장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은 자신의 이상을 자본주의 내부에 설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이상은 아무리 깜찍한 말로 포장해도 자본주의 체제 그 바깥으로 절대 나아갈 수 없다. 기껏해야 그러한 이상이 도달할 수 있는 최종 목적지에서는 단지 중산층의 삶이 얼마나 부유해졌는지, 빈곤이 얼마나 줄어들었는지 등을 통계적으로 제시하고 한 사람 당 한 표의 권리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만족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목적지에서는 화폐 한 장 당 한 표의 권리가 있다는 것은 용납될 수 있는 사실이고 그래서 잘 은폐되어야 하는 사실일 수밖에 없다. 좋은 삶이 곧 돈을 많이 가진 삶을 의미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것만 잘 은폐된다면 달리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대화를 통해 해결하면 된다. 해결되면 좋고 해결 안 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냥 해결될 때까지 열심히 대화해야 한다. 대화에 낄 수 없는 존재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문제를 대신 말해 주는 시혜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6.마이클 샌델의 공화주의적 정의론 역시 다르지 않다. 샌델이 정치를 도덕과 결합시켜야 한다고 말할 때 그 도덕은 선거에서 보다 많은 표를 획득할 수 있는 도덕이다. <왜 도덕인가>에서 샌델이 미국 국민 전체의 의지이자 미국 국민이 원하는 도덕을 드러내는 지표로서 설정하는 것은 선거의 결과인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미국의 특수한 선거제도의 문제점 중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것이 바로 선거에 반영되는 의지가 대체로 기득권층의 의지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샌델이 말하는 도덕은 백인 남성 기독교인으로 대변될 수 있는 어떤 사람들의 공동선이지, 미국 사람들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보편적인 공동선일 수는 없다. 더구나 샌델이 묘사하고 있는 미국 내 인권 확대의 역사가 정치 엘리트 및 백인 남성들의 역사라는 점 또한 샌델의 정의가 누구를 위한 정의인지를 드러내 주는 부분이라 할 것이다.

이 점은 미국의 현재 상황을 고려할 때 더욱 두드러지는 듯하다. 9.11 테러 이후 누군가는 ‘예외상태’가 상례화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또 누군가는 이슬람교도와 같은 특수한 사람들이 희생양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국제적 연대보다도 공동체의 정체성 및 이웃의 정치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샌델의 논의는 단순히 개인과 공동체가 맺는 긴밀한 관계에 대한 윤리라고만 읽기에는 찜찜한 구석이 있다. 샌델이 세계화된 자본에 맞서 공공영역을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순간에조차도, 샌델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미국 중산층의 재산과 안위이지 빈곤 계층이나 유색 인종의 행복은 아니라는 의심을 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7.그리고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수용되는 방식은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샌델의 정의론이 놓여 있는 미국의 역사적 맥락이나 사상적 맥락이 잘려나간 채로 <정의란 무엇인가>가 소비되고 있는 현실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곳은, 대기업에 심각하게 프랜들리한 정부가 샌델의 책을 선전하는, 샌델 자신조차도 경악할 만한 어이없는 상황이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미국에서 출간된 2009년에 같은 하버드대 교수인 아마르티아 센의 <정의라는 아이디어>도 출간되었고 미국에서는 센의 책이 보다 더 주목을 받았지만, 그러나 2010년 우리의 서점가를 점령한 것이 센델의 책이라는 사실은 자못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그렇게 샌델 열풍을 타고 우리는 샌델이 해석해낸 공리주의와 샌델이 해석해낸 칸트와 롤스를, 샌델이 규정하는 정의와 공동선을 흡수하고 있다.

맥락이 잘려나간 샌델이 현재 활용되고 있는 대표적인 방식은 ‘나의 주장은 곧 국민의 뜻’이라는 정치인들의 상투어구를 ‘나의 정의가 곧 보편적 정의’라는 새로운 미사여구로 바꿔놓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웃어넘길 수 있다. 두려운 것은 샌델의 논의가 ‘정의’를 공동체에 대한 ‘충직’이나 ‘애국심’과 결합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안 그래도 인권에 대한 감각이나 타자에 대한 관용에조차 익숙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샌델의 개념은 공동체나 애국심을 강조하는 논리로, 국가를 신화화하는 논리로 도용되려 하고 있다. 샌델의 논의가 가질 수 있는 미덕은 잘려나가고 이 몇몇 개념들만이 자의적으로 남용될 때, 그 결과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의 강화, 또는 전체주의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8.때문에, 자신의 정의가 보편적 정의라고 외치며 정의의 이름으로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것이 애국이라는 어떤 복지국가론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누구를 위한 정의인가는 묻지 않고 현실에 존재하는 다수를 따르라는 말을 현실을 인정하라는 말로 바꿔치기하는 그 복지국가가, 합의를 실천하지 않고 합의를 종용하는 그 복지국가가, 과연 보편적 복지를 실행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해일이 밀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고 타박하는 복지국가가 민주주의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염려된다.

만일 그 복지국가가 먹고사니즘을 내세우며 FTA를 밀어붙이고 삼성공화국을 연장시키는 국가라면, 새만금 간척지에 골프장을 세우는 것이 사회 서비스라고 생각하는 국가라면, 나는 그 복지국가 절대 반대다. 머나먼 아프리카의 어린이를 돕느라 자기 자식들의 눈물은 훔쳐 주지 않는 어머니가 제대로 된 어머니 맞냐는 샌델의 논의를 착실하게 따라, 해외 파병 따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복지국가라면 나는 반대다.

자본에 친절한 국가와 벌거벗은 존재[썩은 뿌리 자르기]

박종성(건국대학교 강사)

우리는 자본의 운동을 원활히 진행시키고자 여러 장치들을 고안하는 국가가 벌거벗은 자들로 배제시키고 있는 존재들이 증가하고 있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생존은 자본의 운동에서 야생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고용의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실업자의 증대, 사회보장의 축소, 생존권의 와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경쟁의 원리로 방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에서 드러나는 혼란을 제압하기 위해서 국가는 강권적인 태도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국가는 자본의 운동을 통해 부의 사유화를 지향하며 폭력의 조직화를 실현시키 나가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적 원리가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현실에서 국가의 폭력성은 감소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다시금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현재의 국가는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가?라는 물음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기존의 국가관에 대한 고찰을 동반한다.

‘국가란 도대체 무엇인가?’ ‘국가’ 그 자체는 눈으로 보거나 만질 수 없는 비가시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국가가 비가시적인 존재라고해서 국가를 무시할 수는 없다. 국가라는 고유의 존재성은 “폭력과 관련된 운동”으로 개념화될 수 있다. 국민국가가 추구하는 보편성은 동일성에 근거한 배제와 맞닿아 있다. 주민 전체의 동일성에 의해 국가의 폭력이 규범화되는 국민국가 형태에서는 폭력이 독선과 광신으로 귀결될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주장들은 동일성에 근거한 배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G20회의장 무슬림 접근금지”, “동남아 마약상 같은 연예인” , “주요 20개국(G20) 회의장 반경 2㎞ 이내에 무슬림 애들 접근금지시켜야 한다. 혹시나 모를 테러를 대비해서 접근시 전원 사살해버려라.” , “외국 여자와의 국제결혼을 부추겨서 농촌에는 혼혈아들이 엄청나게 태어나고 있고, 이것은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가져올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에이즈나 성병 등의 정보가 전혀 없다. 이들은 범법자다. 체류 외국인으로서 기본적인 체류의 법을 어긴 준법정신의 기초가 심히 의심스러운 자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난해 10월 한달 동안 국가인권위원회가 인터넷 공개 블로그, 이미지, 댓글, 동영상 등을 모니터링한 결과이다. 이러한 사실 중에 모두 210건의 인종차별 사례를 수집했다고 5월 9일 밝혔다. 이러한 조사를 바탕으로 인권위는 법무부 장관에게 인터넷상의 인종차별적 표현을 개선하는 방안을 포함할 것을 권고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이사회 의장에게는 인터넷상으로 인종차별을 하거나 이를 조장하는 표현물이 유통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내용의 의견을 표명했다고 한다. 또한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2007년 민족 단일성을 강조하는 것이 서로 다른 민족 간의 이해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우리 정부에 대해 교육·문화·정보 등의 분야에서 이를 개선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권고한 바 있다고 한다.

국민국가는 탄생/혈통을 내세워 국가의 구성원을 주장한다. 이것은 사람들을 동일화(identify)하는 인종주의와 관계 맺는다. 그런데 인종주의는 생물학적인 종으로서의 혈통뿐만 아니라 도덕, 신앙, 근면함, 범죄율의 높고 낮음, 문명이나 야만의 정도 등을 포함하는 문화적인 혈통도 포함한다. 인종주의는 민족주의보다 넓은 의미이다. 민족주의는 인종주의를 통해 민족적 동일성을 확립하는데 바로 여기에 배제의 제도화가 존재한다. 국민과 외국인이라는 차이가 확인되는 것은 동일성이 구축되는 방식에 있는 것이다. 동일화의 과정은 차별화의 과정에 선행한다. 다시 말해 국민 공동체 밖에 존재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가혹한 폭력을 자행하게 된다. 국민국가에서 평등주의는 국적이나 국민성이라는 특정한 동일성을 전제하기 때문에 결국 보편적 인권의 개념에 저항한다. 보편적 인권 개념은 국가로의 귀속없이, 특정한 동일성을 가지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권리를 향유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낭시에르가 말하는 ‘아무개와 아무개의 평등’, 즉 ‘근원적 평등 개념’이 현실적으로 요청되어야함을 의미한다.

민족/혈통에서 동일성에 의한 배제의 원리는 비단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와 국가의 관계에서 국가는 자본에 친절한 국가의 성격으로 확장된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는 이러한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다시 말해 국가는 자본의 운동을 보다 효율적으로 만드는 일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벌거벗은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본의 흐름을 보장하는 전제가 된다. 이러한 현상들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6월 12일로 158일째 농성을 진행 중인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투쟁이 바로 이러한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동일성에 의한 배제의 논리는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국가 안에 살면서 국가에 속하지 않고 배제된 존재들은 공동체의 외부로 밀려나게 되었다. 12일 오후 4시 40분경 빈민촌인 포이동266번지(개포동1266번지)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7시간 만에 불은 진화되었고 96가구 중 74가구가 전소했다. 이곳은 1981년 정부가 도시 빈민을 ‘자활근로대’라는 이름으로 강제이주시키면서 형성된 빈민촌이라고 한다. 불법점유자가 된 주민들은 주민등록까지 말살당했고 지난 2009년 강남구청은 주민등록을 인정하고 현 주소지를 인정했다고 한다. 유성기업지회(금속노조 유성기업 아산?영동지회)의 ‘주간연속2교대제 및 월급제 쟁취’를 위하여주간조가 2시간 부분파업을 하였다. 13일 현재 회사는 27일째 ‘공격적 직장폐쇄’를 했다. 파업 후 7일만에 경찰병력이 투입해 전부 연행했고, 노동조합의 지회장과 쟁의부장이 구속된 상황이다.

이러한 현상은 국가와 자본주의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사회복지와 생존권을 방치하는 국가의 형태는 자본의 축적을 쉽게 하기 위하여 자본 운동의 주도성을 강조한다. 결국 자본주의 실현의 모델은 고용 보호, 사회보장제도를 축소하는 국가 형태, 즉 작게 보이는 국가는 자본의 흐름을 방해하는 요소를 가혹한 폭력으로 제거해 나간다. 따라서 작게 보이는 국가는 가장 억압적인 국가일 수 있는 것이다. 소위 세계화라는 현실에서 국가의 쇠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본의 세계적인 운동 속에서 국가는 복지정책을 포기하는 모델로 전화되고 있다. 이러한 모델은 우리의 현실과도 그대로 일치하는 현상이다. 국가라는 단일성, 동일성 속에 들어오지 않는 불법체류자들의 삶 또한 동일성의 배제 논리가 적용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국가가 공공부문에서 퇴각하는 것을 국가 권력으로부터의 탈출로 파악하여 국가의 힘이 약해지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권위는 ‘아래에서부터 위로’다.[썩은 뿌리 자르기]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대진대 강사)

“옛사람들은 백성과 더불어 여러 사람이 함께 즐겼습니다. 이 때문에 능히 즐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 백성이 그와 더불어 함께 망하고자 한다면 비록 화려한 관저와 아름다운 연못과 관상용 동물들이 넘쳐난들 어찌 홀로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맹자(孟子)』「양혜왕장구 상(梁惠王章句 上)」)

지금으로부터 약 2300년 전 맹자가 군주인 양혜왕을 찾아가 한 얘기다. 맹자는 양혜왕이 자신의 화려한 동산을 둘러보며 자랑스러워하자 고대 주나라 문왕(文王)의 예를 들어서 임금의 권위는 화려하고 웅장한 부차적인 것들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 아니라 백성과 소통하고 백성과 함께 하는 바탕이 있어야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위정자들의 정치행위와 권위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기를 경계한 것이 요점이다.

이 대화의 내용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 알려 전해지고는 있지만 과거나 현재의 인간이 사고하는 틀은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다. 인식의 방법과 대상은 무한히 변화하지만 그 인식하는 개체의 사고형태는 지극히 구태의연하다. 특히 역대 정치인들에 있어서는 더욱 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은 권위적 인간을 거부하면서도 또 그러한 권위주의를 일상화하는 지도 모른다. 일종의 자포자기의 심정이랄까?

권위와 권력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부딪히면서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개념어는 아마 ‘권위(權威, authority)’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부류의 권위들을 만난다. 정치경제를 비롯한 일상의 사회생활이라는 하위분류에서부터 상위분류로서 문화적 심리구조 같은 관념화된 영역에까지 말이다. 따라서 권위라는 개념을 오로지 한 방향으로 해석하기는 불가하다. 왜냐하면 상황에 따라 여러 다른 뉘앙스로 쓰이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학문?학술의 영역이나 미시적인 사회의 기능적이고 세세한 부분에 관여하는 전문영역에 있어서 권위는 순작용을 한다. 권위가 한 사안을 관통하는 일련의 과정에 개입하여 긍정적 결과를 도출하는데 일조하는 대표모델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사회구성원들의 승인을 받아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렇지 못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대부분 정치, 행정 같은 국가와 관련한 권력의 형태에 있어서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권위=권력(power)으로 인식한다.

사회학자 배링턴 무어(Barrington Moore)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서의 권위와 불평등』에서 권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권위라는 말은, 명령이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신념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자발적 복종이 있음을 뜻한다. 만약 이 도덕적 요소가 없다면, 권위는 강제와 기만이 되고 말 것이다.” 고금(古今)을 통틀어 어떤 조직이나 사회를 막론하고 그 구조적형태는 반드시 계급과 계층을 구분하게 되는데, 상층계급의 존립근거는 국가를 유지할 만한 도덕성이 충분하다는 피지배 하층계급의 승인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고 이 때 발생하는 권위는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아래에서 발생하여 위로 부여된 권위이다. 권력의 발생은 아래, 즉 민중으로부터 시작한다. 과거 중국 사회주의의 대중노선도 이와 같은 맥락이고 이런 슬로건은 『서경(書經)』에 “하늘이 보는 것은 우리 백성들을 통해서 보고, 하늘이 듣는 것은 우리 백성들을 통해서 듣는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는 문구를 기반으로 한다.

그런데 지금 위정자들이 하고 있는 정치적 권위에 대한 기본 인식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 문제다. 특히 집권 말기에 들어선 이명박 정부의 권위주의적 태도는 심각한 수준이다. 현 정권의 가장 큰 문제는 능력을 떠나 도덕성의 문제이다. 이미 이명박 대통령의 전과사실은 각설하더라도 각 정부 요처의 기관장들이 청문회에서 보여준 위장전입, 투기, 탈세, 병역기피는 이제 기본이 됐다. 강남의 부자교회 장로출신 최고 지도자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신이 용인하고 도와준다고 착각하는 것일까? 그 이후 속속 드러나는 전시행정과 심지어 충청권 과학벨트와 관련하여 라디오 방송에서 “그 공약은 내가 지난 대선 때 충청권의 표를 얻기 위해 했던 공약으로, 지금 공약대로 이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라고 발언했다. 자신의 대선 공약이 단순히 선거승리를 위한 옵션이라고 인정한 것인데 여기까지 오면 정말 할 말이 없다. 한마디로 권위를 완전히 상실한 상태이다.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도 문다. 권위를 상실했지만 오히려 남북한 위기상황을 통해 껍데기만 남은 권위를 더욱 공고히 하려고 한다. 경제위기를 들먹이고 전쟁위협을 등장시키는 것은 대중의 공포심리를 이용한 공포정치의 한 단면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정권이 정권 초반부터 항상 강조했던 법과 규범의 준수를 통한 사회질서 확립은 상실한 권위를 스스로 강제하고 국민들에게 강요하는 권위주의적 발상이며 특히 국민에 대한 강요는 대중에 대한 국가 폭력과 마찬가지다.

‘아래에서부터 위로(自下而上)’

2011년 현재 대한민국 정권의 정치적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졌고 권위 아닌 권위가 계속 강요되는 뻔뻔한 현실에서 민중이 위정자의 권위에 대한 동의를 바탕으로 권력을 보장해주었다는 논설은 다시금 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런 논설을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원목(原牧)」에서 밝힌 바 있다. “목민자(牧民者)가 백성을 위해서 있는 것인가, 백성이 목민자를 위해서 있는 것인가?” 이것은 다산의 문제제기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백성이 과연 목민자를 위하여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건 아니다. 목민자가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옛날에야 백성이 있었을 뿐 무슨 목민자가 있었던가. 백성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한 사람이 이웃과 다투다가 해결을 보지 못한 것을 공언(公言)을 잘하는 장자(長者)가 있었으므로 그에게 가서야 해결을 보고 사린(四隣)이 모두 감복한 나머지 그를 추대하여 높이 모시고는 이름을 이정(里正)이라 하였고, 또 여러 마을 백성들이 자기 마을에서 해결 못한 다툼거리를 가지고 준수하고 식견이 많은 장자를 찾아가 그에게서 해결을 보고는 여러 마을이 모두 감복한 나머지 그를 추대하여 높이 모시고서 이름을 당정(黨正)이라 하였으며, 또 여러 고을 백성들이 자기 고을에서 해결 못한 다툼거리를 가지고 어질고 덕이 있는 장자를 찾아가 그에게서 해결을 보고는 여러 고을이 모두 감복하여 그를 이름하여 주장(州長)이라 하였고, 또 여러 주(州)의 장(長)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어른으로 모시고는 그를 이름하여 국군(國君)이라 하였으며, 또 여러 나라의 군(君)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어른으로 모시고는 그 이름을 방백(方伯)이라 하였고, 또 사방(四方)의 백(伯)들이 한 사람을 추대하여 그를 우두머리로 삼고는 이름하여 황왕(皇王)이라 하였으니, 따지자면 황왕의 근본은 이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백성을 위하여 목민자가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 지금의 수령(守令)이 옛날로 치면 제후들인데 …… 거만하게 제 스스로 높은 체하고 태연히 제 혼자 좋아서 자신이 목민자임을 잊어버리고 있다 …… 그리하여 ‘백성이 목민자를 위하여 존재하고 있다.’란 말이 나오게 되었지만 그것이 어디 이치에 닿기나 하는가? 목민자가 백성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또 「탕론(湯論)」에서는 『맹자』를 인용하여 문제제기하고 자답한다. “탕왕(湯王)이 걸(桀)을 추방한 것이 옳은 일인가. 신하가 임금을 친 것이 옳은 일인가. 이것은 옛 도(道)를 답습한 것이요 탕 임금이 처음으로 열어놓은 일은 아니다.” “그를 끌어내린 것도 대중(大衆)이고 올려놓고 존대한 것도 대중이다.” “한(漢) 나라 이후로는 천자가 제후를 세웠고 제후가 현장을 세웠고 현장이 이장을 세웠고 이장이 인장을 세웠기 때문에 감히 공손하지 않은 짓을 하면 ‘역(逆)’이라고 명명하였다. 이른바 역이란 무엇인가. 옛날에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추대하였으니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추대한 것은 순(順)이고, 지금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세웠으니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세운 것은 역이다.”

「원목」과 「탕론」은 아래에서 위로의 ‘자하이상(自下而上)’의 정치학 원론이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다. 다산이 비판한 것은 민중이 통제받고 제약받는 모순적인 현실은 고증하자면 잘못된 것이며 ‘자하이상(自下而上)’의 체제는 회복해야할 대상이다. 다시 말해서 군주와 같은 통치자의 존재는 아래에서 위로 추대된 존재로서 민중을 위한 필요성의 가치에 한정되어 있던 것이지, 결코 그 위치나 지위가 자신을 위한 전권(全權)행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내용이 다산이 제시한 주권재민적(主權在民的) 정치이념의 근거이다.

쓰르라미는 봄?가을을 모른다.

다산의 입장에서 본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잘못 규정되고 강요된 ‘가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가짜 세상에서 사실상 국민의 동의를 상실하여 빈껍데기 권위를 가지고 강제적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가짜가 국가권력의 정점에 있으니 암울하기 이를 데 없다. 따지고 보면 이명박 정부에서 권위를 내세우는 진짜 이유는 집권 세력의 이익에 있다. 신문기사에서는 2011년에 무역수지 20억불 흑자가 예상된다고 떠들어대지만 지금 국가부채와 가계부채는 뚜렷하게 상승하고 있다. 특히 주택담보대출을 비롯한 가계의 부채상환 능력은 가계저축률이 높은 일본에 비해 엄청나게 떨어진다. 5월 9일자 뉴스에서는 은행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28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고 신용대출 금리는 인상되고 대출금리 감면 혜택도 없어져 이명박 정권이 확실히 규정한 이른바 ‘서민’들의 고통스러운 삶은 물론이고 중산층의 도미노몰락도 예견되며 결국 대기업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뻔하다.

「탕론」의 마지막에서 다산은 『장자(莊子)』의 구문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莊子曰 ??不知春秋) 여름만 살고 가는 쓰르라미가 봄과 가을이 있다는 것은 알 턱이 없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풍경이 온 세상 전부인 줄 착각한다. 지금 가짜 권위를 차고 있는 자들이 그렇다. 변화는 없고 권력은 끝나지 않을 줄 안다. 그러면서 세상을 망치고 있다. 그런데 다산이 이 말을 마지막에 둔 것은 단지 위정자만 염두에 둔 비판이 아니다. 당시 전제군주제의 속류 지식인들이 식견이 고루하여 고금의 변화를 알지 못함을 지적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서 지금을 살고 있는 지식인들은 과연 나 자신이 가짜가 아닌지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특히 대학교수의 경우 대학사회에서 알량한 보직교수의 유혹이나 개인의 대외적 명예, 금전적 이익 때문에 학문연구나 학생지도를 태만히 하면서 학문의 상아탑이라는 대학문화를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할 것이다. 언제나 대학의 문화는 한 나라의 문화를 규정해 왔고 기반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그 대학의 문화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바로 교수들이다. 평생직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구나 알다시피 대한민국의 교수사회는 투명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며 가깝게는 대학재단 이사회, 넓게는 문화 보수세력의 첨병이기도 하다. 지식계층이라는 사회적 권위를 누리면서 사회에 대해 외면하거나 무책임한 낙관론만 내뱉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이 여름 한철을 온 세상으로 아는 쓰르라미는 아닌지 자문해야한다.

권위주의의 개념의 현재성 비판을 위해[썩은 뿌리 자르기]

강성국(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권위주의(authoritarianism)는 한국사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권위주의라는 개념이 수사적 표현으로 한국처럼 폭넓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곳도 없을 것 같다. 권위주의라는 묵직한 개념을 학계뿐만 아니라 언론과 대중들도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한국의 특수한 역사에 기인한다. 한국은 독립과 함께 현대적 정치체제(보다 정확하게는 대통령제)를 구성 하게 되었는데, 그 시기는 2차 대전 직후 전지구적 격변기였으며 한국은 체제간 대립의 최전방에 위치한 국가였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부터 시작해서 정적들을 숙청하는 폭력적인 정권 찬탈이 이루어 졌으며 박정희와 전두환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획득했다. 한국사회구성원들은 이러한 정치과정들을 통해 약 30년간 독재의 실재를 경험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독재의 종식. 민주화. 이와 같은 일련의 역사를 거친 후 권위주의라는 개념은 한국사회에서 널리 쓰이는 개념이 되었다. 물론 그 쓰임의 목적은 비판적이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권위주의라는 표현의 대상이다. 우리는 독재정권에서 경험했던 이미지들, 또는 효율성 위주의 정치과정을 경험할 때 정권을 향해 권위주의적이라고 말한다. 독재의 어렴풋한 기시감(旣視感)에 대한 일종의 강박증적 반응으로 말이다.

김대중과 노무현, 지난 두 정권의 시기에 권위주의라는 말은 정부나 대통령을 향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헌데 2008년 이후 우리는 이명박 정부를 권위주의적 정부라고 한다. 이명박은 유권자들의 투표를 통한 정당한 절차를 거쳐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독재로 규정할 수 있는 어떠한 정치적 행위도 보인 적이 없는데 말이다. 그럼 도대체 이명박이 권위주의적이란 말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수백만 국민이 참여한 촛불정국을 거스른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때문에? 집회 및 시위에 대한 강경진압 때문에? 밀실적인 협상과정을 거친 FTA(free trade agreement)들 때문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의 물고를 튼 것은 한미 FTA의 추진과정이었고, 한미 FTA가 체결된 것은 노무현 정권 시기였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에는 집회와 시위에 대한 강경진압이 없었던가? 2001년 대우자동차 사태는 경찰의 폭력이 심각했고 따라서 수많은 중상자가 나왔다. 2005년 농민대회에서 역시 폭력적인 진압으로 농민 2명이 사망했다. 그런데도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탈권위주의적 정권으로 평가 받으며, 이명박 정권은 권위주의적으로 평가 받는다. 하나의 비극적 아이러니.

오늘 날 민주주의 제도들은 선출된 대표자와 다수의 의석을 차지하는 정당에게 일종의 제한된 독재적 지위를 부여한다. 이 독재적 지위는 다른 말로 민주적 정당성(legitimacy)에 기반 하는 권력, 즉 권위(authority)라고 할 수 있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모든 정권은 이런 권위를 부여받는다. 노무현도 마찬가지였고 이명박도 그렇다. 그리고 위에서 간략하게 예를 든 것과 같이 정책을 추진하며 반대자들에 대한 관리수단으로서 동일하게 폭력을 동원하거나 관료주의적으로 정보를 통제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이 권위주의적이라고 평가 받는 것은 모순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순의 근원은 무엇인가? 권위주의란 개념의 비판적 사용을 80년대 후반 한국의 민주화를 경험한 특정 세대와 그 세대에 기반 하는 정치집단들이 전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권위주의적 정권은 단순히 정적(政敵)을 가리킨다. 그들은 정적들을 너무 쉽게 그렇게 호명하는데, 그럼으로써 그 정적에게는 너무 쉽게 권위주의의 온갖 폭력적, 또는 비민주주의적 이미지들이 덧 씌워진다. 또한 그럼으로써 자신들에게는 너무도 쉽게 반권위주의(anti-authoritarianism)의 투사적 이미지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들이 “권위주의적인” 그들의 적을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하기에는, 위에서 드러나다시피 그들의 적과 자신들의 공통점이 너무 많다.

권위주의는 정치적 권위의 소유주체를 평이하게 비판하는 단일한 개념이 아니다. 권위주의는 권위의 발생과 그 권위를 몰이성적으로 그리고 무비판적으로 인식하는 태도, 그리고 그에 기반 하는 사회적 행위에 대한 비판적 개념이다. 즉 비판적 개념으로서 권위주의의 대상은 권력 주체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 대중 현상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오히려 무게 중심이 쏠리는 것은 권력 주체가 아닌 사회 현상으로서 권위주의 일 것이다.

과거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와 아도르노(T. W. Adorno)가 분석한 권위주의의 전형은 파시즘(fascism)으로 귀결되는 권위와 카리스마에 대한 대중들이 보였던 사회심리적 일체화 경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비판을 따른다면 한국에서 권위주의 개념을 전용하는 소위 민주화 세대라는 특정 세대와 정치집단은 오히려 권위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그들은 김대중과 노무현이라는 민주화의 상징에게 상식 이상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개념이 그들에게 전유되는 이상 권위주의 개념의 그 비판적 본질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비판적 개념으로서 권위주의 개념을 부활시키는 것은 권위주의의 현재성을 재설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권위주의는 과거의 전형을 보이지 않는다. 또한 권위주의 현상을 경험한 사회에서는 그것이 또 다시 재현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만무하다. 그렇다면 권위주의는 경험으로서 극복되는, 통과 의례적 성격을 지닌 어떤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이제 권위주의는 보다 은폐된 현상으로 존재하며 개인 내면에 내재된다. 부르주아 국가와 법체계는 항상 역사 속에서 경험된 가시적 폐해를 은폐시키고 내재화하는 방식으로 기만적인 자기정화(self purification)과정을 반복해 왔다. 역사적으로 권위주의는 항상 자본주의 사회, 또한 각각의 해당 사회의 특수한 욕망에 기생했다. 권위주의의 현재성을 재설정 하는 것의 시작은 이 사회의 욕망, 즉 우리의 욕망을 보다 깊게 관찰하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누구나 불안한 시대의 단상 [썩은 뿌리 자르기]

김정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그야말로 불안의 시대이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모두 열심히 일만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꿈을 삼키며 덩치를 키워왔다. 신자유주의는 그 결정판이라 할 만 하다. 서점에 널린 자기개발서에는 저마다의 방식대로 살아가면 장밋빛 미래가 있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런데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그들이 말하는 승리의 방정식 뒤에는 ‘경쟁’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다른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만 하는 현실은 어쩔 수 없다는 변명 속에, 패배자들을 돌아볼 여유 따위는 없다. 목표를 이루더라도 당장 승리한 현실을 지키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는다. 당연히 승리자도 불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한 편에는 패배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성공을 위한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드는 만큼 실패자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간다. 경쟁률 증가를 멈출 줄 모르는 공무원 입시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불안’의 시대에 ‘안정’은 점점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꿈을 좇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완전히 빠져서 당장의 생활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아무리 좋아하는 음악을 열심히 만들고 좋아하는 글을 써도 힘겨운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은 왜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들은 분명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꿈’ 역시 ‘돈’에 따라 줄을 세운다. 사람들은 꿈을 좇는 그들이 얼마나 행복할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돈 안 되는 일에 미쳐 있는 철없는 사람들로 취급할 뿐이다.

이는 TV의 드라마만 봐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의 상위 몇%에 해당하는 재벌과 그들의 가족은 이미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된지 오래이다. 행복의 열쇠를 ‘돈’이 쥐고 있는 한, 드라마 속의 재벌가 주인공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생활수준의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눈앞의 불안을 단숨에 제거할 사람은 재벌가의 사람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보통사람들이 재벌을 만날 기회는 그리 흔하지 않다.

– 불안의 원인

불안은 불확실한 요인에서 비롯된다. 알랭 드 보통은 이 불확실한 요인들을 변덕스런 재능과 운, 고용주와 그들의 이익, 세계경제 등으로 나누어 말한다. 재능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운도 마찬가지다. 운은 찾아올 수도 있고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개인의 생계는 고용주가 지급하는 소득에 달려 있다. 그러나 고용주는 이익을 추구하려 하고, 이익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개인의 생계는 불안해진다. 고용주도 불안하기는 똑같다. 세계 경제의 불안이 주요 원인이다. 그러니 불안의 공포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중산층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조차 자신의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불안의 해결은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시장 기능에 의존하여 복지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무모한 발상이다. 이미 사회는 양극화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으며, 가정은 구성원을 보살피는 역할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무조건적인 경제 성장의 추구가 물질적 풍요를 가져다 줄 거라는 믿음은 이미 깨진지 오래다. 현 정권의 대선 홍보문구였던 747 공약은 이미 이룰 수 없는 목표가 되어버렸다. 상당수 사람들의 희생으로 일군 가파른 성장이 영원할 수는 없다. 이제는 무엇이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인지 고민할 때가 온 것이다. 세계 경제 위기는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최근의 복지국가 담론의 열풍은 이렇게 불안이 팽배한 사회에서 보편적인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의 열망이 담겨있다.

– 사회복지의 개념과 고대 동아시아 세계

복지란 무엇일까? 글자만 살펴보면 그냥 ‘행복’이고, 사전에서도 ‘행복한 삶’이라고 정의한다. 복지제도의 대상은 누구일까? 당연히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다. 행복이란 주관적인 가치이지만,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누려야할 기본적인 권리들이 있다. 이것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바로 ‘사회복지’이다. 위켄덴(E.Wickenden)의 정의를 보면 더 명확하다. “사회복지는 주민들의 안녕에 기본적이라고 생각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사회질서가 더 잘 기능하도록 하기 위하여, 보조 조치들을 확실하게 해주거나 강화시켜주는 법들, 제도들, 혜택들과 서비스를 포괄한다.”

정치의 근본이 백성의 기본적인 삶의 충족이라는 견해는 고대 동아시아 세계에도 존재했다. 제나라 관중은 이렇게 말했다. “창고가 가득차면 예절을 알게 되고, 입고 먹는 것이 족하면 영욕을 알게 된다. 백성들이란 근심과 고생을 싫어하니, 나는(군주는) 그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한다. 백성들이란 가난과 비천함을 싫어하니, 나는 그들을 부유하고 귀하게 해주어야 한다. 백성들이란 위험에 떨어지는 것을 싫어하니, 나는 그들을 안전하게 보존해야 한다. 백성들이란 자신이 죽고 후대가 끊기는 것을 싫어하니, 나는 그들이 수명을 누리고 후대를 잇도록 화육해야 한다.”(“倉?實則知禮節, 衣食足則知榮辱… 民惡憂勞, 我佚樂之. 民惡貧賤, 我富貴之. 民惡危墜, 我存安之. 民惡滅絶, 我生育之.” 『管子』 「牧民」) 정치의 주체가 군주로 한정되어 있던 춘추 시대 인물의 말이지만 현대의 복지국가론에 비하더라도 전혀 손색이 없다. 예절이나 명예도 우선 기본적인 삶을 충족되고 나서야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주관적이고 추상적이지만,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최소 조건은 먹고 사는 문제의 충족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예기』에서 공자는 유학의 이상향을 이렇게 표현했다. “큰 도(道)가 행해지는 세상에서는 천하를 공(公)으로 여긴다. 현인을 뽑고 능력자에게 일을 주어, 믿음을 키우고 화목을 닦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만을 부모로 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 노인은 말년을 잘 마칠 수 있게 하고 젊은이는 잘 쓰일 수 있게 하며, 어린이는 잘 자랄 수 있게 하고, 홀아비 과부 고아 무자식 노인과 장애인은 모두 부양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남자는 일정한 직분이 있고, 여자는 시집갈 곳이 있게 한다… 이것을 대동이라고 한다.” (“大道之行也, 與三代之英, 丘未之逮也, 而有志焉. 大道之行也, 天下爲公. 選賢與能, 講信修睦, 故人不獨親其親, 不獨子其子, 使老有所終, 壯有所用, 幼有所長, 矜寡孤獨廢疾者, 皆有所養. 男有分, 女有歸… 是謂大同.” 『禮記』「禮運」) 큰 도가 행해지는 세상이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어떠한 차별이나 소외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학의 이상향은 종교에서 말하는 내세관이나 또 다른 세계를 상정하지 않는다. 행복도 이 세상에 있고, 불행도 이 세상에 있다. 대동의 세계는 바로 우리가 서 있는 땅 위에서 이루어진다.

맹자의 말은 한결 더 구체적이다. 그는 백성들에 대해 “일정한 수입(恒産)이 없으면 평상심(恒心)도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곧 관중의 말과도 유사하다. 선비는 학문과 수양을 통해 일정한 수입이 없어도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지만, 평범한 백성들은 그렇지 않다. 기본적인 삶이 충족되지 않으면 평상시의 마음을 잃게 된다는 말이다. 맹자는 누구나 같은 넓이의 농지를 분배받아 경작을 하고 세금을 내는 형식의 정전론(井田論)를 내세워 기본적인 삶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러한 균등 분배와 조세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보았다. 물론 맹자가 제시한 이상향은 모든 법도가 잘 이행되었던 주(周)나라를 내세워 한 말이다. 그러나 정치를 담당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임무는 오늘날 복지국가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치의 담당자가 군주에서 의회 정치로 바뀌었을 뿐이다.

최근 복지의 선별과 보편 논쟁은 가치보다는 재원 확보의 측면에 더 중심이 쏠려 있다. 선별과 보편은 다른 말로 풀어보면 차별과 평등 문제이다. ‘선별’이라는 말은 결국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잘 만든 제도라도 사각지대는 존재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기준에 의한 ‘자격미달’은 상황에 따라 커다란 박탈감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복지의 뜻이 행복이라면 행복을 누려야할 권리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 서구의 복지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서구에서 ‘복지국가’라는 용어는 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이 나치 독일의 ‘전쟁국가’ 또는 ‘권력국가’와 대비하여 연합국 측의 전후 재건 목표로 ‘복지국가’를 내세우면서 등장했다. 그러나 시장 경제에서 발생하는 빈곤문제 해결에 관한 논의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 16세기 영국에서는 구빈법을 제정했고, 19세기 말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 세력의 성장을 막고 중상층 노동자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사회보험제도를 도입했다. 결국 복지제도의 시작은 기존 자본주의에서 발생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보수언론들은 이 사실을 들어 복지의 원조가 보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복지제도가 시작되는 시점만을 살폈을 뿐, 현대적인 의미의 복지국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현대 복지국가는 정치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이하 사민주의)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사민주의는 독일사회민주당에서 베른슈타인이 제기한 수정주의 제안이 받아들여진 뒤 그 틀을 갖추었고, 1951년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결성과 독일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이념적 좌표를 세웠다. 선거와 민주 등 기존 장치들을 사회주의 실현의 도구로 삼는다는 점에서 혁명을 앞세우는 사회주의론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사민주의는 노동운동의 확대?발전과 더불어 발전했으며, 현재까지도 그 영향력이 적지 않다.

– 한국의 복지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한국의 복지 상황은 어떠한 특징을 갖는가? 앞서 말한 서구의 사례와는 전혀 다르다. 한국의 복지정책은 1960년대와 1970년대까지는 경제성장을 우선하는 가운데 이루어졌으며,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노동정치의 영향을 받았다. 그 뒤 IMF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분배와 관련된 복지정책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OECD 가입국 가운데 GDP 대비 복지예산 비율은 여전히 최하위 수준에 머물러 있다. 한국의 복지는 장기적으로 보편복지 시스템을 지향할 필요가 있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노동운동의 기반이 북유럽 국가들에 비해 크게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복지 논쟁에서 어떤 정책이 옳은가에 대한 판단은 그들 각각의 지향과 방법을 살펴야 가능하다. 첫째 재정 확보 방법을 명확하게 살펴야 한다. 물론 현재 국가재정 구조를 개혁하는 것만으로도 복지 수준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높일 수 있겠지만,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장기적으로 진정한 의미의 보편 복지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증세에 대한 부분이 반드시 설명되어야 한다. 똑같은 공약인데, 재정확보에 대한 설명이 명확하지 않다면, 현재 보편 복지론을 공격하는 주요 근거인 일본과 남미의 복지병 사례를 극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지금도 우리는 겉으로는 ‘친서민’을 외치면서 실상은 전혀 다른 정권을 경험하고 있다. 진정한 포퓰리즘은 허울뿐인 복지다.

둘째 기존 경제 시스템에 대한 비판과 개혁에 대한 의지를 살펴야 한다. 현행 복지제도만 바꾼다고 해서 바로 복지 전체가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반드시 조세 개혁과 다른 구조적인 문제의 개선도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증세도 기존 경제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강행하게 되면 당장의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의 반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지금처럼 비정규직 일자리가 넘쳐나고 당장의 처지가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늘어난 세금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 제도의 개혁은 기존 시스템이 가진 맹점을 보완하는 일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맹자는 노인을 위해 나뭇가지를 꺾는 일과 태산을 옆구리에 끼고 북해를 넘는 일에 빗대어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경우(不爲者)와 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경우(不能者)를 구분했다. 한국 정치는 해방 이후 줄곧 일부 편중된 정치세력의 주도 아래 역사를 거듭해왔고, 그래서 다른 형태의 정치 경험은 매우 부족하다. 게다가 당장 먹고살기 급급하기에, 정치판을 연예계 가십거리만도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무시하는 일도 적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 맹자의 말은 당시 통치권자인 군주를 설득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 그의 말은 변화를 갈망하면서도 허망하게 앉아만 있는 한국 국민들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는 할 수 있는데 그동안의 경험만으로 변화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현실에 체념하면서 오히려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자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 결국 정치 주도 세력의 변화도 우리에게 달려 있고, 연대로 힘을 실어주는 일 역시 우리에게 달려 있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다고 단정할 이유가 없다. 북유럽 복지국가 건설의 원동력이 노동 운동의 결집과 세력화였다는 점을 우리는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문화복지 실현이 가능한가? [썩은 뿌리 자르기]

박선정(한신대학교 대학원 노동정책 및 사회정책(협) )

2011년 상반기 우리나라는 예술계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로 술렁였다. 첫 번째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석 달 사이에 일어난 인디밴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럼’의 이진원씨와 시나리오작가 최고은씨, 이 두명의 젊은 예술 작가에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이 두명의 예술가는 21세기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는 믿지 못 할 생활고로 인해 세상을 마감했다. 이러한 사건은 ‘예술은 배고프다’, ‘배고파야 예술한다’, ‘예술이 노동이냐?’ 등 아직 예술을 직업이나 노동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회적 인식과 문화산업은 고도로 발전하여 사회적으로 많은 부를 창출하지만, 그것의 기회나 분배가 결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두 번째 사건은 유명한 성악가이자 서울대 음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김인혜교수의 제자 폭행사건이다. 처음에는 수업과정에서의 과도한 폭력행사로 시작하였지만, 그동안 공공연한 비밀들이 인터넷을 통해 드어나면서 사건은 일파만파가 되었다. 그리고 이는 예술계 내의 만연한 비리와 권력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두가지 사건으로 만 봐도 우리사회에서 문화?예술의 현실이 얼마나 상업적이며 비민주적인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문제와 달리, 문화의 향유를 권리로 보는 시각이 보편화 되면서 문화복지라는 큰 틀에서의 지원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1년 업무보고를 통해 ‘희망대한민국’ 프로젝트(157개사업)로 1,600만명에게 공연관람 등 문화예술 프로그램 지원, 국립박물관 무료관람, 문화?관광?체육바우처로 3년간 소외계층 78만여명에게 혜택 (문화바우처 74만명, 여행바우처 2만여명, 체육바우처 2만3천여명), 문화취약계층 대상 공연관람 지원, 5,436개 초?중?고교에 예술강사 4,156명, 1,200개 사회복지시설에 예술강사 850명 지원으로 393만명 교육 혜택 등의 문화복지 정책들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정책들이 실제로 문화소외계층에게 문화권을 얼마나 실현 시킬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실질적인 효과성을 제외하고도, 우리 사회 안에서 예술가들이 경제적 이유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권력적 구조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현실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한 문화권의 실현이 과연 어떠한 의미인지 좀 더 고민해 봐야한다.

2009년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 발표한 ‘문화예술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문화예술인의 창작활동 관련 월평균 수입이 ‘없음’(37.4%), ‘201만원이상’(20.2%), ‘101~200만원’(13.8), ‘51~100만원’(10.8%), ‘21~50만원’(6.9%), ‘10만원이하’(5.1%), ‘11~20만원’(2.6%)의 순서로 나타났다. 이 결과는 다른 직업군과 비교하지 않고 사회일반적인 시각으로만 보더라도 평균적으로 매우 낮은 수준이다. 이는 예술과련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노동자의 노동권이 보장되고 있지 않다는 것과 그로인해 여러 가지 사회적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문화상품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2008년 발표된 국민여가활동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들이 최종소비지출에서 오락문화에 지출하는 비용은 2000년 약23조에서 2007년 33조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상품과 그에 따른 소비는 늘고 있는데, 문화예술을 만들어내는 주체인 예술관련 노동자는 기본적인 소득조차 보장 받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 매우 비상식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 향유의 질은 누가 얼마나 좋은 문화상품을 어떠한 비용으로 소비했는가와 등가 한다. 이는 상품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화?예술은 살아남기 어려우며, 비용을 치룰 수 없는 사람은 문화를 일상적으로 향유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상품으로 환원되지 않는 문화를 생산하는 예술가는 당연히 생활고에 시달리고 문화를 상품으로만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은, 상품으로 개발되지 않는 문화는 접근조차 어렵다. 예술가가 자신의 예술상품을 재화로 생산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통시키기 위해 권력구조에 굴복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문화?예술을 둘러싼 사회의 문제들은 문화상품의 생산과 유통, 소비라는 사회시스템과 모두 연결되어있다. 이것은 문화?예술 분야의 시장화가 예술가들의 사회보장과 사회구성원들의 문화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다.

하지만 정부는 이러한 사회문제를 매우 단순한 정책논리로 해결하려 하고 있다. 문화를 자체적을 생산하지 못하거나 구매를 통해서도 향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러한 상품을 지원해 주면 되는 것이고, 시장에서 낙오된 예술가들은 그 대상자가 시장안에서 경쟁력을 갖추도록 단기적으로 지원하면 되는 것이다(하지만 지원을 거치고도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여쩔 수 없는 일이다.). 문화예술의 시장화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나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우리사회가 진정한 문화권을 실현하게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문화는 근본적으로 다양해야한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 다른 취향을 갖고,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니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이 좋은것이라고 강요되어서도 안되며, 일방적으로 선택된 것이 주어주는 것도 옳지 않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사회에서 다양한 문화가 건강하게 생성되고 유통되어야 한다. 이는 예술노동자들에 노동성과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 사회안에 예술 노동자들이 기본권을 보장받고, 즐겁게 일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다양한 문화가 만들어 질 수 있다. 다양한 문화가 생성되었다면 그것을 우리사회의 구성원이 균등하게 접근할 수 있게 유통시켜야 한다. 이는 시장을 문화?예술의 시장화의 문제에서 오는 불평등과 양극화를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정책을 통해 진정으로 우리사회의 문화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와같은 문제를 반드시 고민하고 해결해야 할 것 이다.

문화는 인간이 진화하여 공동체를 이룸과 동시에 필연적으로 탄생했고 발전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삶에서 단지 본능적으로 요구되는 욕구이외에 의미를 찾는 존재이며 문화는 이러한 의미추구를 하도록 하는 핵심적 기능을 갖고 있는 만큼 삶에서 불가분의 존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문화를 통해서 정체성과 사회적 귀속감을 갖게 되고, 삶의 가치나 윤리적 규범을 익히며, 창조적 자기 표현의 기회를 갖는다. 따라서 문화는 반드시 사회적 성격을 가지며, 사람들이 공유하고 함께 누리는 삶의 터전으로 역할을 한다. 다양한 형태의 문화를 인정하고 보호하며 독점하기 보다는 공유하고 향유 할 때 문화는 더욱 풍요로워 질 것이다.

슈퍼우먼(Super Women)을 바라는 그대들에게 [썩은 뿌리 자르기]

나래(한신대학교 대학원 노동정책및사회정책(협) 대학원생)

올해도 어김없이 참아온 ‘그 날’

개나리가 먼저 꽃을 피우기 전에 봄이 왔음을 알리는 날이 찾아왔다. 그 날은 바로 올 해 3월 8일에 103주년을 맞이하는 ‘3.8 세계여성의 날’이다. “임금을 인상하라!”, “10시간만 일하자!”,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보장하라!”,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달라!” 등의 요구로 시작된 세계여성의 날은 지금으로부터 103년 전 1908년 3월 8일, 미국의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1만 5천 여명의 여성노동자들이 무장한 군대와 경찰에 맞서 싸운 투쟁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여성들의 봉기는 비단 미국뿐만이 아니라 유럽대륙까지 번졌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물가가 오르자 ’주부들의 봉기‘는 점점 빈번해졌고 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 독일로 퍼져나갔다. 여성노동자들은 시장의 상품 진열대를 부수거나 사악한 상인들을 위협하는 것으로 생계비용을 내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정부의 정책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행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여성의 참정권이 필수적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여성노동자들의 저항을 기억하고, 나아가 전 세계 여성들의 연대를 강화하고자 1910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국제여성노동자회의에서는 ’세계 여성노동자의 날‘을 정하기로 하였다.

이처럼 세계여성의 날은 여성들의 집단적인 저항의 가능성을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으며 이 날 이후 더 많은 여성들이 사회주의당과 노동조합에 가입을 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날은 노동자들의 국제연대를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즉 여성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싸움에 있어서 여성의 날은 필수적인 날로 자리매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여성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1908년에 시작된 임금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 여성 선거권 부여 등의 요구는 현재 전부 보장되고 있는가? 103번째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현실을 둘러봐야 한다. 목숨을 건 여성 노동자들의 싸움이 진정한 여성해방을 맞이하였는지, 아니면 더 어두운 오늘을 맞이하였는지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슈퍼우먼일 수밖에 없다?

2009년에 방영된 모 기업의 주유소 광고는 현재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여성 정책의 목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광고의 내용은 간단하다. ‘이 세상의 모든 엄마는 가정 일도 잘하고, 아이들 교육도 잘 시키고, 나이가 들수록 늘어지는 살과 늘어나는 주름을 열심히 가꾸고, 남편 내조도 잘하고, 직장에서 일도 열심히 하는 슈퍼 우먼(Super Women)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한 명의 여성이 책임져야하는 역할이 이렇게 많을 수 있을까? 그리고 문제는 그냥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잘’ 해야 한다. 그래야 슈퍼 우먼(Super Women)의 칭호를 받을 수 있다. 또한 드라마나 영화, 소설과 같은 매체에서도 남편과 자식들밖에 모르는 어머니의 모습이 구태의연해보이고 한물 간 등장인물 캐릭터 같지만 여전히 많은 시청자들과 독자를 감동하게 하는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여성의 상은 비단 이 광고에만 국한 되는 내용일까? 그렇지 않다. 얼마 전 모 방송국의 유명한 예능 프로그램에 페미니즘 여성작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공지영 작가가 출연을 했다. 어떻게 작가가 되었고 그동안 숱하게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그녀는 자신의 작품보다 세 번의 이혼경력과 성이 다른 세 명의 아이를 키운다는 사실이 한국 사회에 밝혀지며 본인이 원하던, 원치 않던 여성들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여성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프로그램의 대미를 장식하는 부분에서 공지영 작가는 이야기한다. 자신이 긴 공백 기간을 접고 다시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본인이 책임을 져야하는 세 명의 아이를 둔 어머니였기 때문이었다고 말이다. 경제적인 문제에서 그녀 역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작품보다 이혼경력으로 더 유명해졌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다시 펜을 잡아야했던 그녀 역시도 이 시대에서 슈퍼 우먼(Super Women)임을 스스로 자처해야했던 여성인 것이다.

이처럼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교묘하게 결합한 한국 사회는 한없이 희생적인 어머니의 상과 노동자로서도 충실하게 기능하는 유능한 노동자의 상을 계속해서 요구하고 있다. 결국 국가와 정부가 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하는 교육 문제와 보육의 문제, 여성의 노동권 등에 대한 부분을 가족에게, 특히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자본주의 사회와 이명박 정부는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스스로 슈퍼우먼(Super Women)임을 자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여성 노동자의 투쟁은 10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현장에서의 여성들은 어떤 상황일까? 한국에서 노동시간이 10시간에서 8시간으로 단축되었고, 민주노조가 창설되었고, 여성에게도 참정권이 부여된 오늘날이지만 노동현장에서의 여성들은 저임금, 불안정한 노동조건, 성희롱 등에 무방비로 노출된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2009년 현대자동차 아산공장 금양물류에서 벌어진 성희롱 사건은 1908년 여성 노동자들이 외쳤던 요구가 정책적인 변화만을 가져왔을 뿐 여전히 노동현장에서는 그 형식적인 정책들 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회사명만 수차례 바뀐 회사에서 14년동안 일을 했던 여성피해자는 금양물류의 남성 조장과 소장에게 수차례에 이르는 문자, 전화통화 성희롱부터 피해자의 엉덩이를 무릎으로 치고, 어깨와 팔을 주물럭거리는 등의 육체적 성희롱을 당해왔다. 결국 성희롱 사실을 알린 피해자는 사측으로부터 징계해고를 당하고 말았다. 이혼 후 세 명의 아이를 양육해야했던 피해자는 그동안 회사에서 당했던 성희롱 사실을 사내하청지회에 가입하여 제보하였고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내는 등 자신이 당한 부당한 처사를 알리고 징계해고를 철회하기 위해 싸움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원청회사인 현대자동차에서는 이 사건을 외면하고 있다.

이 외에도 2007년부터 시작해 투쟁 1,000일을 훌쩍 넘긴 재능투쟁부터 진보교육감인 김상곤 교육감이 당선되었다고 숱한 화제를 뿌렸지만 실제론 임시강사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고 있는 경기도임시강사투쟁, 하루 10시간 동안 열심히 일해도 한 달 75만원이라는 저임금과 임시직 또는 간접고용 형태로 불안정한 조건에 시달리며 일을 해야 했던 홍대청소용역노동자들의 투쟁은 103주년을 맞이한 3.8 세계여성의 날에도 여전히 계속 되고 있다.

성장과 고용, 복지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는 2020 국가고용전략

작년 10월 이명박 정부는 ‘성장·고용·복지의 선순환을 위한 2020 국가고용전략’을 내놓았다. 경제위기와 함께 저출산, 고령화 등에 따른 인구구조 위기에서 벗어나 성장과 고용이 동행할 수 있는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는 추진배경 아래 일자리 희망 5대 과제에 따른 고용 정책이 제시되었다. 그 가운데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 정책은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일자리를 확대한다는 목표로 다양한 추진방안이 계획되어 있다. 주된 내용은 공공부문 영역을 시작으로 민간부문까지 시간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계획과 육아휴직과 연계한 시간제 일자리 창출 확대 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명박 정부가 내놓은 이러한 정책은 여성들의 해방을 앞당겨 주는 정책들인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국가고용전략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동안 수없이 문제가 되었던 저임금, 비정규직, 간접고용 형태 등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마련 없이 여성들의 가정에 대한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져야하는 부담을 더욱 가중시킬 뿐이다. 그리고 국가고용전략에서 핵심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저임금과 단시간, 불안정한 노동정책은 여성 노동자들 뿐만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또 다른 피해자인 남성노동자들에게까지 확대되어 모든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게 될 것이다.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물가와 자녀들에게 들어가는 막대한 교육비 등을 부담하기 위해 집안 일만 잘하면 된다라는 과거의 여성과 어머니들에 대한 상은 이제 구태의연한 이미지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이제는 조금이라도 가정에 도움이 된다면 저임금과 불안정한 노동은 물론이고 성희롱을 참아가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수많은 여성노동자들에게 지금의 이명박 정부는 진정한 대안이 아닌 자본의 배를 더욱 불려줄 자본의 대안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노동과 삶의 권리를 위해 여성, 이제는 행동이다!

임금인상과 노동시간 단축 요구, 여성 참정권 요구 등을 내세우며 시작된 여성 노동자들의 싸움은 소름끼치도록 한국 사회에서 똑같이 재현되고 있다. 그것은 비단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돈과 권력이 중심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1914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여성노동자의 날에는 여성노동자들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주장이 자연스럽게 짜르의 독재 권력을 몰아내자는 요구로 확대되었다. 이처럼 103주년 3.8 세계의 날을 맞이하는 우리들 역시 이명박 정부의 반여성적 노동 정책에 대한 저항을 넘어서 자본주의 사회에 전면적으로 투쟁을 벌일 수 있는 가치와 철학을 담은 요구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3.8 세계여성의 날을 150년째 맞이하더라도, 200년째 맞이하더라도 여전히 여성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 폭력에 노출 될 것이다.

103주년 3.8 세계여성의 날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외친다! “노동과 삶의 권리를 위해 여성, 이제는 행동이다!”

구제역이라는 정치적 질병[썩은 뿌리 자르기]

“한 마리의 죽음은 대수롭지 않았지만 100만 마리의 죽음은 비극”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데 우리는 너무도 많은 시간을 써버렸다. 300만이 넘는 생명을 빼앗은 지금에서야 인간이라는 어리석은 동물은 다시금 반성의 동물인 양 살처분이 구제역의 대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한다. 아니 최소한 매몰이라는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 인간의 얄팍한 속성 때문일까? 우리는 구제역에 걸린 소를 먹어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말과 함께 흘러나오는 대량 살처분이 의심스러우면서도 그들이 흘린 피가 땅에서 솟아오르기 전까지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무시무시한 구제역 이야기를 들으며 살처분이 정당화되는 사회구조 속에서 도대체 “구제역이 어떤 질병이기에 그토록 많은 생명을 빼앗은 것일까?”라는 물음과 함께 “살처분은 어떻게 구제역을 통제하는 명약이 되어버렸을까?”라는 물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이 글은 부족하지만 본인이 찾아 본 그에 대한 간략한 답변이다.

구제역(Foot and Mouth Disease)

구제역 증상에 대한 기술은 1514년 이탈리아의 수도승 프라카스토리우스(H. Fracastorius)가 베로나(Verona)에서 유행한 소전염병에 대한 것이 최초다. 그 후 1897년에 독일의 뢰플러(F. L?ffler)와 프로시(P. Frosch)에 의하여 병인체가 최초로 증명되었다. 우리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왕조실록의 우역(牛疫)에 관한 기록들과 허균의 『한정록』에서 그 증상을 찾을 수 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일제강점기 1911년과 1934년 구제역에 관한 기록들이 있다. 사실 여기서 언급된 소전염병, 우역, 구제역은 모두 같은 질병은 아니다. 현대적인 분류에 따르면 우역(rinderpest)은 폐사율이 100%에 달하는 질병으로 구제역과 구분되지만 당시의 과학적 수준을 생각할 때 이러한 기록들 속에 구제역도 포함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구제역은 과연 어떤 질병인가? 말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구제역은 ‘발과 입에 걸리는 질병’이다. 정확하게 말해 소와 돼지, 양 등 발굽이 둘로 갈라진 우제류(偶蹄類)에게 발굽이나 혀에 수포 또는 괴사병변이 일어나는 질병이다. 폐사율은 성체의 경우 1~3%이고, 어린 동물의 경우 최대 55% 정도로 알려져 있다. 미생물 분류학적으로 구제역 바이러스(FMDV)는 피코르나바이러스과(Picornaviridae) 아프토바이러스속(Aphthovirus)에 속하는 아주 작은 RNA 바이러스이다. 또한 구제역 바이러스의 혈청형(血淸型)에는 A, O, C, SAT-1, SAT-2, SAT-3, Asia-1 등 7가지의 기본형과 53~80여 가지의 아형(亞型)이 있다. 사람에게도 실험적으로 감염된 예가 있지만 그다지 큰 증상과 병소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인수(人獸) 공통 전염병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간단하게 말해 구제역은 그렇게 심각한 질병이 아니라는 얘기다. 어린 동물이 치사율이 높은 이유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면역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구제역의 진원지는 중동이나 인도 정도로 추정을 하고 있지만 사실 구제역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질병이다. 전라도 사투리로 ‘아구창’이라고 불리는 이 질병은 치료만 잘하면 나을 수 있는 질병이다. 서양 사람들은 병이 돌기 시작하면 농장 입구에 죽은 양이나 소의 머리를 매달아 가축 상인이나 방문객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런 다음 나머지 소들에게 따듯한 쇠죽과 부드러운 건초를 먹이고 깔짚을 갈아주었다. 병든 짐승들이 쓰라린 상처를 핥지 않도록 발굽에 타르를 발라주고 타마린드, 칠리고추, 혹은 물에 불린 인도 머구슬나무 잎사귀로 수포를 치료했다. 허균의 『한정록』양우(養牛)편에는 “우역은 훈김[熏蒸]에 서로 전염되는 수가 많으니 다른 소가 있는 곳에 데려가지 말고 나쁜 기운을 제거하면서 약을 쓰면 살릴 수도 있다”고 썼다. 다시 말해 예전부터 잘 보살피면 나을 수 있는 병으로 취급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제역이 심각한 질병으로 취급을 받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먼저 구제역 바이러스의 감염 경로가 감염 동물이나 오염된 가축 또는 축산물, 해외여행자의 신발, 의복, 지참물을 통해서 감염이 이루어 질뿐만 아니라 공기로도 전염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사안은 치료약이 없다는데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자연치유가 가능한 질병임에도 불구하고 대량 확산과 치료약이 없다는 이유가 대량 살처분을 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여기서 잠시만 판단을 유보하고 살처분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살처분 정책(Stamping Out)

살처분의 역사는 조금 더 흥미롭다. ‘란치시 칙령(Lancisi’s Recommandation)’이라고도 불리는 살처분은 18세기 유럽 로마 부근에서 전염병으로 소들이 떼죽음을 당하자 교황 클레멘트 11세(Papa Clemente XI)가 주치의에게 해결책을 찾아보라고 지시한 것에서 유래한다. 당시 주치의였던 란치시(G. M. Lancisi)는 병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교역을 제한하고, 정기적으로 육류 검역을 실시하고, 병든 가축은 석회를 뿌려 매장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아울러 통제된 방식의 살처분을 통해 병이 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시 이 통제된 방식의 살처분이란 병든 가축을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방법이었다. 또한 소상인이 이 규칙을 어기면 목을 매달고, 내장을 꺼낸 다음 사지를 찢어 죽였다. 신부나 승려가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노예선으로 보내버렸다.

이런 방법을 통해 당시에 비교적 빠르게 전염병을 막을 수는 있었다. 그리고 ‘란치시의 칙령’은 잔인하고 살벌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도 가축 전염병을 통제하는데 근간이 되는 방법으로 인정받고 있고, 우리는 현재 그것을 살처분 정책(Stamping Out)이라고 부른다.

란치시의 칙령이 현대의 살처분 정책과는 다르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내용을 비교해 볼까 한다. 살처분 대상 가축을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일은 분명 현대에는 없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 살처분 조치로 총으로 쏘거나 천자(Pithing-칼로 척수를 자르는 행위)를 시행했다. 우리의 경우 안락사 약제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생매장을 했다(생매장이 곤봉으로 때려죽이는 것보다 좋은 점이 있다면 누군가 나에게 설명해 주길 바란다). 살처분을 거부하는 농부에 대한 능지처참은 분명히 사라졌다. 그러나 또 다른 종류의 형벌이 기다린다. “살처분 명령 위반농가는 가축전염병예방법 규정에 의거 3년 이하의 징역 및 1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으며, 살처분 보상금 삭감(최소 20%이상) 등 불이익을 받게 된다.”우리의 농가가 대부분 영세농이라고 가정하면 이러한 형벌은 사형에 가까운 처사이거나 강제로 명령을 이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또한 살처분에 동원된 공무원들은 정신적 충격과 스트레스, 과로사까지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분명 자연 치유가 가능한 구제역이라는 질병을 살처분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그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헛소리(Foot in Mouth Disease)

구제역과 살처분이 환상의 짝꿍이 된 또 다른 이유에는 영국의 종축업자들이 있다. 의회 의원 겸 영국왕립농업학회 회원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르던 종축업자들은 구제역에 특히 순혈종의 소들이 큰 피해를 입은 반면, 일반적으로 우유와 고기를 생산하는 품종은 피해가 덜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영국의 종축업자들은 구제역 때문에 사료 소비가 늘고 우유생산량이 줄어들고 유전적으로 균질적인 순혈종 가축의 성장 기간이 길어진다는 이유에서 영국 정부에 압력을 행사했고, 영국 정부는 1871년 이 병을 신고의무 질병으로 지정했다. 이 후 영국은 스스로 만든 ‘구제역 청정국’의 지위를 이용해 무역을 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구제역 청정국’지위란 무엇일까?

간단하게 말해 ‘구제역 청정국’지위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육류 무역업자들을 위한 것이다. ‘구제역 청정국’은 간단한 절차에 의해 육류 무역을 할 수 있는 반면 오염국의 경우 절차가 까다롭다. 또한 오염이 되고 나면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청정국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고, 오염국이 되고 나면 다른 오염국의 축산물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아니면 제소를 당할 수도 있다. 백신이 개발되었지만 백신 사용을 꺼리는 이유도 이 청정국 지위와 관련된다. 살처분 매몰 방식은 마지막 구제역 발생 이후 3개월 동안 구제역 발병이 없으면 청정국의 지위가 회복되는 반면 백신접종은 고비용일 뿐만 아니라 100% 확실한 예방법도 아니고 또한 접종 중단 뒤 1년 후에 청정국 지위를 회복할 수 있다는 이유도 포함된다.

이러한 헛소리를 바탕으로 구제역과 살처분 정책은 지금도 병행이 되고 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면 구제역이라는 정치적 질병이 가진 허구성이 들어난다. 먼저 구제역은 자연 치유가 가능한 질병이다. 소의 면역력만 충분하다면 구제역은 자연 치유된다. 둘째, ‘구제역 청정국’지위가 없어도 국내에서는 육류 판매가 가능하다. 먹어도 건강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는 것도 그 이유다. 셋째, 돼지를 출하하는데 최소 1년, 소를 출하하는데 최소 3년이 걸린다고 일반적으로 가정하면 청정국의 지위를 상실하더라도 3개월에서 1년이면 회복할 수 있는 ‘구제역 청정국’지위는 그야 말로 헛소리에 불과하다. 또한 우리의 경우 육류 수출량이 아주 미비한 수준이다.

사실 구제역은 조류독감이나 기타 여러 가축 전염병과는 달리 식품 안전이나 인간의 건강을 전혀 위협하지 않는다. 또한 구제역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치명적인 형태로 진화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비록 구제역 바이러스가 강력한 살생 능력을 지니지는 못했지만 가축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고열이 나고 동물의 발톱과 입에 수많은 수포가 생긴다. 이 병에 걸린 가축은 발과 입이 몹시 아파 먹지도 못하고 발을 절뚝거린다. 새끼를 밴 짐승의 경우 유산을 하고 젖이 마른다. 원래 몸이 약하거나 나이 어린 짐승은 열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하지만 치사율은 약 1%정도이고 합병증이 있는 경우 최대 55%가 될 수 있다. 그 밖의 짐승들은 면역력이 약해진 탓에 수포가 박테리아에 감염되지 않는다면 보름 안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그러나 구제역이 한번 휩쓸고 지나가면 고기와 우유 생산량이 15~20% 정도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 생산성이 감소한다.

결국 문제는 산업 논리이자 정치 논리였던 것이다. 구제역을 정치적 질병(political disease) 또는 경제적 질병(economic disease)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픈 짐승을 잘 보살피는 데에는 그 만한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 백신 값은 비싸고 효율성도 떨어진다. 백신을 투약해도 소는 대략 85%의 항체가 생기지만 돼지는 40%미만이다. 게다가 지속적이지도 못하다. 결국 값싼 원료와 값싼 고기만을 생산하려는 공장식 축산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방식인 것이다. 생산성은 줄어드는데 비용을 들일 수는 없다는 반복되는 자본의 논리 속에서는 더 이상 대안이 없다.

그러나 2010년 11월 구제역 발생 이후 기르던 가축을 매몰해야만 하는 농민 그 누구도 자신의 소와 돼지를 땅에 묻으며 슬퍼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매몰 작업에 내몰린 공무원들도 충격을 받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에 불과하다”는 스탈린의 말을 생각해 본다. 이제 우리에게 300만은 더 이상 통계가 아니다.

강경표(중앙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