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금문제 해결방안이 교육재정 돌려막기? [썩은 뿌리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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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건국대 대학원)

사그라진 줄 알았던 등록금 촛불이 7월 9일, 열흘만에 다시 켜졌다. 이번 학생들의 문제제기는 많은 이슈들 사이에서도 쉽게 묻히지 않고 있다. 그만큼 그들은 절박하고 또 그만큼 정치권에서도 민감해진 ‘장사거리’다. 핫이슈는 정치권에서만 잘 팔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문제를 진단하고 나름의 처방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중 얼핏 들으면 옳은 소리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어딘가 불편한 진단과 처방책이 있다. 대학이 너무 많아 나랏돈이 허튼곳에 쓰이니 대학구조조정을 통해 정부지원금을 절약하고 그 돈으로 소위 잘 나가는 학교들에 등록금 지원을 하자는 제안이 진보, 보수 진영을 넘나들면서 무릇 사람들의 귀를 쫑긋하게 하고 있다. 이러한 진단에서는 등록금문제의 원인을 ‘과잉된 대학교육’때문으로 보는데 여기의 숨은 전제는 교육의 시장화를 부추길 뿐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도저히 보이지 않는다.

예전부터 아니 처음부터 대학은 소위 잘난 곳이었다. 동양에서 최고 학문기관인 대학은 대중적 교육기관이 아니었다. 다산 정약용은 “대학공의”에서 본래 대학은 왕의 아들들이나 삼공의 맏아들이 지도자교육을 받던 곳으로 보편적 앎이 아닌 엘리트 교육의 장으로 역할을 해왔다고 말한다. 서양에서도 대학은 지적귀족의 사교장으로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대학이 적어도 한국에서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성장했다.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고등교육이 오래 전부터 자리 잡은 우리나라에서는 대학은 개천에서 유일하게 용이 나올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누구나 대학을 꿈꿨고 대학은 점차 선택에서 필수가 되어갔다. 여기에 폐단도 많았다.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능력여하와 상관없이 정상적인 직장과 수입을 가지기가 힘들어졌다. 따라서 혹자는 대학의 문제를 학벌사회의 병폐로 보고 대학과잉을 문제 삼는다. 굳이 대학교육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까지 대학으로 보내는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가 해결되면 소수의 수요자만 대학에 가고 등록금문제와 같은 대학의 문제는 쉽사리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그 말을 당장 누구한테 할 것인가? 이미 한국사회에서 대학은 대중적 교육기관으로서 자리 잡았다. 그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엘리트만의 전당으로서 대학은 한국에서는 이미 누구나 넘볼 수 있는 대중적 지적교류의 장이다. 누구나 최고등교육을 받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 최고등교육이 시장성, 효율성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 문제다. 다시 말해 공장노동자가 될 사람이 대학을 다니는 것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대학교육이 취업훈련으로만 대체되는 것이 문제다. 대학교육의 과잉을 말하는 사람의 상상력은 오후에 퇴근한 노동자가 저녁에 대학에서 세익스피어를 읽는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사회에는 적정수를 유지해야하는 것이 있는 반면 사회에 흘러 넘쳐도 과하지 않는 것이 있다. 교육의 질을 위해서 대중교육의 자리를 제한하는 발상은 그 교육의 질이 어디를 또 누구를 향하는 가를 의심하게 만든다.

7월 5일 대학구조개혁위원회(이하 위원회)가 첫 회의를 했다. 이들은 거세지는 반값 등록금 요구에 부응하여 정부가 내놓은 방책이다. 위원회는 교과부 장관의 자문기구로 출범·운영하지만 `사립대학 구조개선의 촉진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되면 법적 심의기구가 된다. 이들은 부실 사립대 퇴출과 국공립대 통폐합 등을 주요 주제로 활동하게 된다. 홍승용위원장은 ‘지방대학, 소규모대학 죽이기는 아니다.’라고 단언하지만 사실 위원회의 칼날은 모두 이들을 향해있다. 학생 충원율과 등록금에 대한 재정의존도, 취업률을 기준으로 부실대학과 그를 바탕으로 퇴출대학의 명단을 만든다고 한다. 물론 재학생 수를 조작하고 재단비리가 많은 학교는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한다. 위원회는 이러한 문제학교를 조정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위원회의 출범배경이이다. 국가 재정이 열악한 상황에서 빗발치는 등록금인하 요구를 받아들이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나온 ‘교육재정 돌려막기’의 일환이 이 위원회의 숨겨진 미션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집에 돈이 없다고 말하실 때와는 달리, 이번 정권이 돈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마음을 울리지 못한다. 나라님이 세도가들 세금 깎아주고 살아있는 강물을 세금으로 메우고 이 때문에 재정이 바닥나 등록금인하 요구에 대응하지 못 하는 현실은 정상적인 ‘돈 없는 집안’이 아니다. 실제로 2008년 2725억이었던 시도교육청의 지방채는 2009년 2조1316억으로 훌쩍 늘어났다.(2009교육과학기술부자료 권영길의원실분석) 그러지 않아도 감세와 4대강공사 등으로 전입금을 줄어 적자인 교육재정에 반값등록금은 정부의 정책기조가 바뀌지 않는 한 애당초 무리였다. 위원회의 목적이 ‘돈 아끼기’로 정해진 이상 부실대학 구조조정은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로 진행될 여지가 있다. 위원회의 부실대학 판단기준 중 하나는 등록금의존율인데 우리나라 대학의 평균 등록금 의존율은 80%에 다달 한다. 서울의 주요 사립대는 70%정도인데, 주요 사회적 기부금을 국립대와 서울의 주요 사립대들이 싹쓸이하는 현실과 일본의 대학등록금의존율이 13%, 영국이 26%(등록금의존율 자료-한국일보 2011.6.16 사회면 4면3단)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도토리 키 재기다. 물론 등록금의존율이 극단적인 몇몇 학교도 있지만 이들 학교만을 정리한다해서 실질적인 등록금인하가 가능한 금액이 산출되지는 않는다. 전체의 문제를 일부의 문제로 만드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한다. 대학 줄 세우기와 이로 인해 만들어진 순위대로, 어쩌면 할당된 수대로 대학을 처분한다면 그 학교를 배움의 터로 삼고 있는 학생들을 다시 한 번 좌절하게 만든다. 대학을 줄여나가며 대학교육을 제한함으로써 등록금위기를 돌파하겠다는 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다. 위원회의 칼날은 살생부에 의한 꼬리 자르기가 아닌 대학 전반에 대한 손질이 되어야한다. 등록금의존율 80%인 학교가 문제라고 해서 70%, 60%인 학교가 정상이거나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등록금의존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학교를 퇴출시킴으로써 다른 학교의 변화를 유도한다지만 지방대, 소규모대학과 소위 서울명문대 간의 간극이 유지되는 한 그러한 변화는 요원하다.

등록금문제는 보편적 복지의 관점에서 해결되어야한다. 더 이상 한국에서 대학은 선택적 엘리트교육이 아니다. 대학입학자의 비율이 고교 졸업생의 80%에 이르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대학이 많은 것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은 대학의 문제를 소수의 문제로 치부하거나 소수의 영역에 감히 침범한 대중을 나무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현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20대의 다수에게 대학은 일상이다. 그 일상이 등록금과 생활비에 눌려있다. 일상의 문제를 특수한 문제로 치부하니 현실적인 해결책이 나올 리 만무하다. 보편적 복지는 그 혜택의 제한이 없다. 누구나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려야 하는 권리를 보장하자는 것이 보편적 복지다. 국민의 일상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그것이 국민의 행복추구권에 건전하게 부합한다면 이는 당연히 보편적 복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학생들의 등록금 인하 요구는 건전하게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고자하는 청년들의 자연스런 요구이다. 하지만 대학구조조정을 통해 등록금문제를 해결 하고자는 것 300만이 넘는 대학생의 문제를 보편복지가 아닌 시혜적 정책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는 대학을 엘리트만의 비밀장소로 남겨 두려하는 것이거나 교육을 시장과 자본의 논리에 맡겨두겠다는 의미로 읽혀 질 수밖에 없다.

등록금문제가 학생들에게 단순하게 금전의 문제를 넘어서는 이유는 이 문제가 학생들로 하여금 대학이성과 진리보다는 시장논리에 훨씬 더 친숙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높은 등록금 속에서 학생들은 대학에 학문이 아닌 미래의 돈을 기대한다. 취업 후 상환이라는 무책임한 대학등록금 대책 덕택에 대학생들은 취업에 서두를 수밖에 없다. 당연히 학생들은 소수의 취업이 잘되는 과로 모이고 그러한 몇몇 과는 항상 과잉으로 전문인력을 배출한다. 학생들이 규격화된 욕망 속에서 서로 경쟁하다보니 당연히 취업은 쉽지 않아지고 자본은 노동과 교육을 모두 지배하는데 용이해졌다. 교육의 시장화는 만성적 청년실업과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절대 우위를 유지하게 한다. 그런데 정부가 대학구조개혁위원회를 통해 진행하는 구조조정은 이러한 시장화에 대한 고민이 결여되어 있다. 취업률과 대학등록금의존율을 통한 대학구조조정은 사실상 학벌사회에서 대학 줄세우기의 공식화의 다름이 아니다. 대학등록금의존율은 낮을수록 좋다. 하지만 소위 잘나가는 학교들의 오너가 대기업이 경우가 많고 명문대가 정부 주관사업이나 사회적 기부금을 과점하는 것은 지방, 하위대학들이 못나서만은 아니다. 대학에 대한 구조조정의 압박이 강해질수록 대학과 학생은 대학에서 직접 금화를 찍어내는 학문에만 치중하게 될 것이며 이는 대학의 시장화를 더욱 가속화시킬 뿐이다.

좀 더 솔직해지자. 한국사회에서 대학의 위상은 이제 존귀한 지성의 장도, 취업의 지름길도 아니다. 둘 다 실패하고 있지 않은가. 한국에서 대학은 종합적 교양인을 양성하며 그 속에서 젊은 청춘들이 꿈을 가꾸는 곳이다. 더 이상 신성한 곳도 아니며 금화를 건네는 곳도 아니다. 대중적 지성의 교류의 장으로서 사회 전체의 교양을 함양시키는 보편적 교육기관이다. 물론 이곳에서 미래의 금화를 가꾸고 준비할 수도 있겠지만 대학생 누구도 자신의 대학생활을 취업준비로 가득 채우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대학에서 기대하는 낭만과 추억은 사회가 기대하는 사회전체의 교양과 연계된다. 학생들의 등록금인하요구는 대학교육의 사회성, 보편성을 요구하는 것이지 이의 선택적 제한이 아니다. 대학의 등록금문제는 사회전체의 지적성숙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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