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 주체의 공백과 이데올로기 [썩은 뿌리 자르기]

낙태 문제를 둘러싼 일련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지난 3월6일 대학로에서 ‘세계 여성의 날’ 행사가 있었다. 그 행사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여성의 임신, 출산 및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에 대한 선언이다. 이 선언은 현재 낙태 문제에 대한 정부 정책과 프로라이프 의사회(옛 ‘진오비’, 이 단체는 ‘임신유지가 모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의학적 사유가 명백한 경우’에 한해 낙태를 허용하고자한다.)의 주장이 여성 주체성을 공백으로 남겨둔 채, 여성의 배제 속에서 낙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이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잠시 낙태 문제에 대한 논의 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1973년 정부는 높은 출산율(71년 4.54명)에 대한 인구 증가 억제 정책을 위해 형법상 금지된 낙태 시술을 일부 허용하는 법, 즉 부모가 우생학적· 유전학적 질환이 있을 경우, 강간으로 임신을 했을 경우, 모체 건강이 위협받는 경우에 낙태를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을 제정했다.

그 후 과거와는 다르게 저출산 문제가 등장하자 낙태율을 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2009년 초 전재희 보건복지부장관의 입을 통해 나왔다. 유엔인구기금(UNFPA)이 내놓은 ‘2009 세계 인구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으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5년 동안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세계 평균인 2.54명의 절반도 안 되는 1.22명 이라고 한다. 같은 해 10월 진오비(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 모임)는 낙태 근절 운동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11월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가 개최한 ‘제1차 저출산 대응 전략회의’에서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낙태 (반대) 캠페인도 중요하지만 주무부처로서 낙태를 단속할 수 있다”며 단속 가능성을 드러냈다.

2010년 2월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불법으로 낙태 시술을 한 병의원 3곳을 검찰에 고발하였다. 그리고 3월 1일 보건복지가족부는 ‘불법 인공임신중절 예방 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 피임 교육 강화, 미혼모 지원 등을 제시하였지만, 정부의 의도를 잘 드러내는 것은 ‘불법 낙태 시술기관 신고센터’의 설립이다. 이것은 낙태 단속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와 더불어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3월 24일 ‘2010 태아 살리기 범국민 대회’를 개최하여 ‘낙태 근절을 위한 5대 우선 정책 과제’의 시행을 촉구하는 100만 명의 서명을 6개월 내에 받아 정부에 제출하겠다고 했다. 5대 과제의 내용 중 대부분의 것은 금전적 지원과 관련된 사항이며 생명의 출산은 곧 행복이라는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단체의 시각에서 보면, 낙태 문제에 대한 프로라이프와 정부의 접근방식은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 구조, 계급적 착취 구조, 그리고 10대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는 구조를 외면하는 것이다. 결국 낙태 문제에는 여성에 대한 3중의 착취구조가 중첩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성관계나 임신 처리과정에서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간과되면서 임신에 대해서는 모든 책임이 여성에게 전가된다. 보자보건법에 따르면 남성에게 낙태 시술의 동의를 요구하지만, 정작 불법 낙태에 대한 처벌 대상은 여성과 산부인과 의사만으로 한정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 시술 의료인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것은 낙태 문제가 가난한 여성에게 더욱 가혹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경제 위기 이후 저소득층 중심으로 가족 해체가 이루어지면서 연애, 동거하는 10대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낙태의 문제는 10대들의 삶을 억압하게 된다. 즉 10대들은 임신을 하면 퇴학을 강요받아 학습권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대한 정부는 미혼모, 미혼부에게 월 12만4000원의 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내놓고 있다.

여성 주체의 물질적 공백

결국 정부나 프로라이프는 낙태 문제를 한 축으로는 ‘단속’으로 다른 축으로는 ‘돈’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정부의 정책은 단속 강화와 더불어 미혼모에게 일시적인 수혜적 지원으로 낙태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낙태 문제를 둘러싼 여성의 삶의 기반인 물질적 토대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자본의 횡포 아래 비정규직 확산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단체가 ‘사회·경제적 사유로 인한 경우’까지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

2009년 11월 ‘제1차 저출산 대응전략회의’ 다음날인 26일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9개 여성단체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여성위원회,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는 성명서를 발표해 낙태 방지 정책 철회를 촉구하면서 “한국에서 이뤄지는 낙태 건수 90%이상이 사회·경제적 이유로 발생한다”고 지적하였다. 결국 낙태 문제는 생명을 낳아 키울 수 있는 물질적 토대, 즉 출산, 양육, 교육, 나아가 주택의 문제에 총체적으로 접근하는 방향에서 논의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제1차 저출산 대응전략회의’에서 정부는 저출산의 주된 요인인 자녀 양육부담 경감을 위해, ‘초등학교 입학연령을 1년 앞당기는 방안(노동력 조기투입을 통한 국가경쟁력 향상), 다자녀 가구의 셋째 자녀부터 고등학교 수업료와 대학 학자금 우선 지원, 취업시 우대 혜택 부여, 다자녀 가구 부모 정년연장(다자녀 가구 인센티브 부여)’을 제시했다.

정부의 정책에서 알 수 있듯이 양육부담을 줄이는 방안은 모두 ‘국가경쟁력 향상’으로 수렴되고 있다. 이 점에 주목해서 낙태 정책의 문제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양육의 문제는 교육과 분리할 수 없다. 그러나 국가가 제시한 저출산 대응 전략은 간단히 말해서 ‘노동력 조기투입’을 통한 안정적 노동력 확보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안정적 재생산체제를 만들어 내기 위한 목적성의 정치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정치 속에서 논의되고 있는 낙태 문제 해결책은 필연적으로 ‘국가경쟁력 향상’에 종속된 아이와 여성의 도구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개화기 초 여성의 교육은 산업사회의 재생산을 위한 구국의 현모양처 양산을 위한 것이었다. 산업화 과정에서는 외국 자본을 끌어와서 여성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산업화를 이루었다. 결국 우리 사회는 멸시적으로 호명되었던 ‘공순이’의 희생으로 만들어졌음을 부정할 수 없다. 현재의 국가주의 정책도 이러한 맥락에 속에 있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밀고나가는 현실에서 비정규직 문제의 중심에 있는 여성의 삶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 상황에서의 출산 장려 정책은 그 자체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낙태 단속과 신고센터를 통해서 출산율을 증가시키려는 것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조건과 환경에 선차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적 재생산을 위해 노동력을 어떻게 조속히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발상에서 나온 정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상에서는 여성의 주체성도 여성의 삶의 물질적 기반도 고려되지 않는다.

‘인간생명’ 이데올로기

두 번째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측면이다. 먼저 생명의 가치를 종교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많은 한계점을 노정한다. 생명의 가치를 논할 때 종교적 해결책에 의존한다면, 그 논의는 설득력을 잃는다. 왜냐하면 종교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생명의 가치 논의는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사례가 그 경우에 해당된다. ‘태아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을 그 중심에 두고 있는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3월 24일 ‘2010 태아 살리기 범국민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하늘이 준 생명이므로 부모일지라도 그 아이를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며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가 말하는 “생명”은 무엇을 의미할까? 태아의 생명을 의미할 것이다. 낙태 논쟁의 핵심은 ‘태아를 인간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은가’인데, 이 단체는 태아를 인간으로 보고 있다. 이 단체가 ‘태아는 인간이다’라는 태도를 갖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배경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기독교의 신학적 동기, 즉 “생명은 하느님이 창조해 준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의 소유”라는 것에 대한 인정이다. 그리고 앞 명제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생명을 준 것이 하느님이기 때문에 인간이 낙태를 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리를 박탈하는 죄를 범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주장하듯이 남의 노예를 죽이는 것이 그 노예를 소유한 주인에게 죄가 되듯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하느님에게 죄가 된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이러한 신학적 동기가 그 자체로 형성되었다기보다는 노동 긍정을 통해 자본주의적 노동력 확보라는 근대적 패러다임 속에서 나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이들이 말하는 생명에는 인간생명 이외의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 원래 프로라이프 (Pro Life)의 넓은 의미는 ‘친(Pro)’ ‘생명(Life)’이다 . 따라서 이 단체가 명칭대로 활동 한다면, 생명체를 죽이는 4대강 사업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런 주장은 들어 본적이 없다. 나아가 만약 이 단체가 주장하는 것이 ‘생명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라면, 고기를 먹기 위해 태아보다 더 발달된 형태의 생명을 끊어버리는 사회를 동시에 비판해야만 할 것이다.

낙태 문제에 한정해서 보자면, 이 단체가 말하는 생명은 사람의 생명이다. 현재 인간의 생명이 신성하다는 주장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긴 하다. 하지만 서구 문명의 기원을 보면 이러한 태도는 보편적이지 않다.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의 구성원이라는 것이 생명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 입장을 취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의 생명을 신성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의 생명을 방어하기 위한 상황에서 타인의 생명을 죽일 수 없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낙태를 좁은 기준에서 금지하자는 주장은 인간의 생명이 다른 생물의 생명과는 다른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다른 생명과 구별되는 인간 생명의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는 ‘인간’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먼저 염색체를 통한 종족의 구성원이라는 측면에서 태아는 인간이다. 이렇게 되면 장애를 가진 태아, 무뇌증 태아도 인간이다. 따라서 이러한 태아를 죽이는 것은 인간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프로라이프는 ‘임신유지가 모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의학적 사유가 명백한 경우’에 한해 낙태를 허용하자고 한다.

여기서 국제적인 낙태 기준 7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임부의 생명이 위독한가.
2.임부가 육체적으로 위험한가.
3.임부의 정신적 건강이 위험한가.
4.성폭행을 당해 임신했거나 근친상간의 경우인가.
5.기형 등 태아에 이상이 있는가.
6.사회,경제적인 이유로 임부가 아이를 기르기 힘든가.
7.임부가 낙태를 원하는가([시사IN], 131호. 참조)

또한 세계 69개국은 임부가 어리거나 가난하거나 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결국 프로라이프는 국제적인 낙태 기준 7가지 중에서 “1.임부의 생명이 위독한가”라는 기준만을 낙태 조건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첫 번째 기준만을 적용하는 국가는 4개국뿐이다.

나아가 이 단체는 “보건복지부장관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원하는 자에게 피임시술을 행하거나 피임약제를 보급할 수 있다”, “의사는 불가피한 경우에 한하여 본인과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는 ‘모자보건법’ 14조 2항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이는 낙태의 여지를 더욱 좁혀놓고 있다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종족 구성원으로서만 규정되지는 않는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는 프로라이프의 주장을 비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플레처(Joseph Fletcher)의 ‘인간성의 지표’(자의식적, 미래감, 타인과 관계를 맺는 능력 등)라는 규정 속에서 볼 때, ‘태아는 인간인가’라는 질문에 “아니다”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태아는 인간인가’라는 질문에 상반되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호모 사피엔스라는 생물학적 종족 구성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person)라는 의미규정(자의식적이거나 합리적인 존재: [옥스포드 사전])도 감안해야만 한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낙태가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반면에, 후자의 입장에서는 낙태가 일정정도 인정된다. 이처럼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낙태 문제에 대한 다른 접근과 행위가 가능하다.

여성이라는 야누스적 얼굴, 그 존재론의 전환

흔히 여성의 정체성은 생물학적 측면과 사회 제도적 측면에서 규정할 수 있다. 여성의 정체성을 생물학적으로 환원해 버린다면, 여성의 정체성은 본질론으로 빠질 수 밖에 없다. 이는 여성의 정체성을 ‘고정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정체성은 존재를 구속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여성은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때 여성의 정체성은 ‘모성’으로만 규정된다. 모성만으로 여성의 정체성을 규정하면, A라는 여성은 “여성은 ‘어머니’이다”라는 명제를 부정할 수 없다. 이 명제는 바로 A를 낙태를 하면 안 되는 어머니로 ‘고정’시킨다.

위의 명제는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즉 “여성은 여성이면서 동시에 ‘어머니’가 아닐 수 있다.” 이때 여성은 앞의 명제에서 말하는 여성이 아닌, 다른 정체성을 갖는 여성이다. 곧 열려 있는 여성의 정체성이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다는 생물학적 특성으로 여성의 정체성을 고정화시키는 순간에 여성의 다른 잠재성은 축소되거나 폐기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여성의 정체성이 ‘희생적인 어머니’상을 만들어 낸다. 더불어 이러한 ‘어머니의 상’은 본받아야 할 것이 되고, 결국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삶은 자신의 존재를 일차원적으로 고정시킨다. 즉 본성적 모성이라는 사회적 세뇌의 구조화를 통해 여성의 정체성이 굳건히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출산이 사회 유지의 전제 조건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출산의 문제 때문에 그동안 여성은 어머니라는 고정화된 정체성에 갇히게 되었고, 결국 이러한 정체성은 여성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되어 왔다. 따라서 모성은 사회적인 것이다. 이 문제는 남성의 문제임과 동시에 사회적 문제이다.

여성의 정체성은 여성을 분절화하고 파편화하고 폐쇄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사회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형성되어야 한다. 곧 여성을 ‘모성’으로만 규정함으로써 안정적 노동력 재생산을 꾀하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말이다. 여성을 고려하는 체하면서 배제하는 힘에 의한 규정됨에서 여성 자신이 스스로를 규정함으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논어]의 구절 ‘화이부동’(和而不同)에서 화(和)는 평화, 공존을 의미하고, 부동(不同)은 흡수, 지배, 합병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낙태 논쟁을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는 세력은 ‘화’를 거부한 채 ‘동’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박종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 / admin@admin.com

4대강 토건사업의 실체[썩은 뿌리 자르기]

권력 횡포와 역사적 오류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이라면 한결같이 넌더리를 내는 말이 있다. ‘까라면 깐다는 것이다.’ 까라면 깐다는 것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상징적으로 수사한다. 군사독재 문화와 개발지상주의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개발독재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나는 이를 “까깐 정권유형”이라고 부른다.

까깐 정권유형에는 몇몇 법칙 아닌 법칙이 담겨 있다. 첫째, 일인 중앙권력구조가 나름대로 정형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합리적인 토론이나 합의가 아니라 일방향적 명령체계만이 있다. 과거 군사독재권력이 만들어 놓은 비운의 부산물이다. 둘째 권력독점 명령체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국민들이 마치 자발적인 것처럼 반응하도록 유인한다.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사이비 이념교육을 끊임없이 수행해 왔다는 점이 유인책의 핵심이었다. 그 방법론으로는 우리도 미래에는 잘 살 수 있으니까 현재는 힘들어도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식의 허구적인 유토피아 이념 교육이 지속되어 왔다.

출처:네이버 카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이러한 까깐 정권유형의 대표적인 병증이 바로 현 MB 정권의 4대강 개발사업이다. 4대강 개발사업은 아이디어를 내놓은 출발부터가 억지춘향이었다. 대운하 사업을 공표했다가 국민의 대대적인 반대로 인해 좌초하자, 갑자기 정책을 급선회하여 4대강 사업이라는 희한한 정책을 급조하여 만들어 놓았다. 현 정권이 운하사업을 강행하려고 할 때만 해도 4대강 사업이라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사업을 변경하였다. 갑작스런 변경에 따르는 계획을 만들려고 하다보니 현 정권의 개발권력자들이 말하는 4대강 사업계획의 대부분이 급조되고 변조되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급조와 변조의 논리는 단순한 언어적 파괴논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생태적 역사를 파괴하는 반역사적 행위가 되어간다. 언어횡포는 다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쳐질 수도 있지만, 한번 건드린 생태적 파괴를 복구하려면 최소한 몇 백년이 지나야 겨우 될까 말까한 수준이다.

급조의 논리

그들의 급조는 국가재정법, 하천법이나 환경영향평가법, 문화재보호법 등의 실정법들을 무시하고 그들 마음대로 토건 왕국의 권력을 휘두르는 한 단편이다.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환경영향평가조차도 제대로 한 것이 없을 정도이다. 형식적으로 환경영향평가를 한다고 했지만 지나치게 서두르다보니 계절의 변화를 무시한 채 한두 달의 짧은 평가기간으로 겨우 형식만 채웠을 뿐이다. 어느 누구도 그런 보고서를 믿을 수 없다.

이와 같이 급조된 계획은 그 내부에 공통점이 있다.

첫째 자연의 시간적인 흐름을 무시하고 자연생태계를 마치 공장 재건축하듯이 다룬다는 점이다.

둘째 현장에 대한 철저한 실사조사도 없고 주변검토도 없이 사무실에서 기존의 계획서를 참조하여 적당한 수정작업을 거쳐 계획을 수립하여 너무 안이하게 발표한다는 점이다. 계획을 일단 수립하기만 하면, 수립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이후부터 시행 프로그램은 강권적 행정권력에 맡기면 되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셋째 급조된 계획의 대부분은 지출예산을 넉넉하게 잡는다는 점이다. 급조하여 만든 일들은 미래 상황에 대한 예측범위와 예측능력에서 매우 협소하며, 그리고 조사되지 않은 조건들로 인한 부가적 상황이 많아진다. 이러한 미예측적 부가 상황에 대비하기 위하여 그들은 무작정 예산을 늘려 놓고 본다. 그래서 사업예산이 고무줄처럼 늘어난다는 점이 급조된 계획의 일치된 공통점이다. 그렇게 예산과 관련한 미래상황을 끼워 맞추다보니 예산책정 과정이 투명하지 않고 예산계획이 거의 책상머리에서 꾸며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국민들의 세금이 탕진될 뿐이다.

넷째 급조되었다는 의구심을 상쇄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권력형 홍보를 한다는 점이다. 그 홍보비만으로도 대형 국가사업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름대로 최상의 감각적 매체를 동원하여 미화하고 당위성을 반복한다. 또한 감정적 호소를 동원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개발사업을 강행해야 한다고 토건권력은 귀를 막고 종달새처럼 반복한다. 오히려 물러서는 것은 개발논리의 에이비씨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들이 과연 누구에게 항변하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현실의 진실들, 이미 수없이 제기된 합리적인 판단들 그리고 국민의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는 진실의 논리가 아닌 까라면 까야 한다는 권력의 논리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변조의 논리

요즘 대학입시를 위해 논술고사를 시행하는 대학이 많아졌다. 그만큼 대학 측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논술문제를 내느라 고심한다. 논술의 논리학 가운데 중요한 것이 ‘사실 변조’와 상대입장의 ‘과대포장의 오류’이다. 이것은 상대의 논변을 공격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달성하기 위하여 상대방의 입장을 극단적으로 몰고가서 그런 잘못된 논변으로 상대의 입장을 무력화시키는 언어적 횡포를 의미한다. 논술시험에서는 그런 오류를 논리적으로 지적하면 그만이지만 현실생활에서 그런 오류가 발생한다면 재생불가능할 정도로 파국을 맞게 되기도 한다. 불행히도 권력이 주도하는 이런 언어적 횡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4대강 개발사업에서 벌어지고 있다.

4대강 사업을 추진하는 그들의 그럴듯한 목표는 하천정비와 홍수방재 및 그에 따르는 용수확보와 지역경제 회생이라는 언어유희로 요약된다. 그런 목표를 설정하려면 먼저 그 이전에 현재의 하천이 이미 홍수 방재기능을 상실했고 하천 주변 환경이 나쁘다는 전제가 깔려야 한다. 그들의 억지 가설은 4대강의 하급 수질과 용수 부족을 선전하기 위한 거짓 논리로 이어진다. 일부러 오도시킨 전제와 논리가 있어야만 비로소 4대강 죽이기 사업을 추진하는 그들의 전략이 그나마 홍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목표를 설정하기 위하여 4대강과 관련한 현재의 사실을 왜곡하고 변조하기 시작했다.

우선 물이 부족하다는 행정권력의 교묘한 선전이다. 물 부족 국가라는 선전을 하기 위하여 날조된 수치를 도입한다. 통계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국민 1인당 사용량을 추정해야 하는데, 여기서 그들이 원하는 목표가 설정되도록 수치를 날조하게 된다. 정부 4대강 사업본부 보고서에 의하면 1인당 1일 생활용수 수요량을 453리터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추정치의 근거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한국인 1인이 453리터씩이나 필요한 만큼 우리는 물이 부족하여 댐(수중보)을 많이 앃아 부족한 물을 충당하자는 논리이다.

그들이 추정한 453 리터는 현재 일본인 수요량 평균인 350리터보다 100리터나 과다하게 책정되어 있다. 일종의 조작에 해당한다. 물 수요량을 절약하자는 국가적 수요관리정책을 펴는 유럽국가의 일인당 평균 수용량 150리터(국가마다 달라서 50에서 300리터 정도가 되지만 우리의 추정치와는 너무 차이가 난다)에 비교한다면 4대강 죽이기 사업 추진세력이 왜곡한 수치는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 좋다. 부족하다고 치자. 그런데 부족한 지역은 4대강 주변이 아니라 지천과 계곡이다. 홍수가 나도 큰 강가가 아니라 산세 지형의 계곡과 지천에서 난다는 뻔한 사실을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다.
4대강 개발사업비가 무려 22조원으로 책정되었다. 그런 천문학적 비용은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부터 나온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돈인 양 엄청난 돈을 대형 개발업자에게 선심쓰는 계획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면서 지역경제 운운하고 있다. 당장 여주 하천 둔치의 거대한 공사장을 가보시라. 대형건설사 소속 굴착기와 대형트럭만이 밤을 새워 가며 공사를 하고 있다. 실제로 지역 주민에게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저들의 주장과는 딴판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변조된 정보는 의외로 많다. 4대강 사업계획서와 무관한 환경부의 기존문서 [생태하천 만들기 10년 계획, 2006∼15]에는 매년 계획된 수중보 철거 및 폐기를 통해서 생태보전 및 수질 향상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도 2009년 환경부에 제출한 [기능을 상실한 보 철거를 통한 하천생태통로 및 수질개선효과]라는 연구보고서에서 수중보 철거로 수질도 매우 좋아졌고 하천생태계도 회복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급조한 4대강 사업의 핵심은 오랜 연구 시간을 통해 얻어진 기존의 보고서와 딴판으로 바닥을 훑고 거기에 보를 놓고 제방을 쌓는 일이다. 결국 4대강 사업을 강행하려고 하다 보니 행정은 조급하고 계획은 억지춘향이 되어, 급조와 변조의 계획을 맞추려고 각종의 근거자료를 아전인수 격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앞뒤가 안 맞는 정보를 억지 선전하게 된 것이다. 변조 현상의 공통된 증상들이다.

오류는 더 큰 오류를 낳는다

급조와 변조는 오래 갈 수 없다. 사람들은 그런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급조와 변조를 무마하고 숨기려고 한다면 더 많은 오류가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급조와 변조가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지도록 기존의 일을 강행한다. 이는 권력을 쥔 자들의 일반적인 행위로서 이미 급조되고 변조된 행위를 자신들의 권력을 통해 합리화시키느라 더 많은 향후의 오판을 낳는다. 실제로 이런 일이 현재 4대강 유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준설작업은 야간 조명등을 밝혀놓으면서까지 강행하고 있다.
급조와 변조의 문제가 있더라도 기왕의 일을 일정 수준까지 강행해 버린다면 결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그들의 까라면 알아서 까는 충성어린 판단 때문이다. 공사 중 유적지가 발견될 경우, 문화재보호법 저촉 여부와 관계없이 일단 강행하고 본다는 심리가 개발업자에게 심어지고 있다. 개발업자에게 그런 생각을 심어주고 개발행위를 맘껏 하도록 비호해주는 행정권력이 자기증식하여 결국 급조와 변조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게 한다. 그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진행 중인 급조와 변조 자체를 겁내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볼 때 이런 현상은 권력 말기의 현상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사람들의 욕심을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 그 많은 반대의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건너서는 안 될 선까지 사업을 강행하고 있다. 준설토의 양이 심각할 정도여서 주변 둔치는 준설토의 큰 산으로 변했다. 최고 성능의 기계를 동원하여 하루 밤 사이에 주변 지형을 바꿔 놓을 지경이다. 준설 이후 곧 수중보를 바닥에 지으려 할 터인데 그때부터 우리의 강은 시멘트 제방에 썩은 호수로 될 것이다. 자전거 꽃길을 따라서 이쁜 자전거를 타고, 강 따라 물 따라 유람선을 타고 유유자적하는 홍보용 뽀샵한 사진 한 장이면 그깟 반대 목소리쯤이야 깨끗이 잠재울 수 있다고 그들은 자부한다.

우리의 땅과 강을 죽이고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대신 오로지 토건기업만을 살리려는 현 정권의 권력은 브레이크 없이 벼랑으로 달려가고 있다. 다른 권력형 사업은 중도에 접으면 원래 상태로 되돌릴 여지가 그나마 어느 정도 있다. 그러나 4대강 죽이기 사업은 한번 시작하고 나면, 몇 백년 이내로는 되돌리기가 어렵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미친 듯 앞으로만 가는 파괴행위는 인간의 욕망으로 시작하였으나 그 끝은 인간의 뜻대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되돌릴 수 없는 파괴의 땅에 살게 될 우리 후손을 생각한다면 생태가치만이 아니라 경제가치도 없는 4대강 사업을 끝까지 막아내야 한다.

최종덕(상지대, 철학) / admin@ad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