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망각의 사이에서[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9

기억과 망각의 사이에서

 

김재현(경남대 철학과 교수)

 

모든 생명체들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계절의 변화에 따른 더위와 추위, 장마와 태풍 등 자연이 주는 시련을 겪어야 하고 우리 인간들은 여러 가지 경험을 하고 힘든 상황과 고통을 겪고, 견뎌내면서 살아나간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전문)

 

사진-강지은

사진-강지은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으며 꽃을 피우는 식물처럼 우리도 여러 가지 시련을 겪으며 성장해 간다. 고통과 시련은 삶에서 되도록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이지만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거치는 우리의 삶은 어쩔 수 없이 고통과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다.

‘세월호 참사’로 소중한 자식, 가족,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엄청난 슬픔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는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을, 앞으로도 가슴 아픈 삶을 살아가야 할 유가족들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기성세대로서, 희생된 수많은 학생들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사고 중에 보여줬던 무책임하고 무력했던 선장 및 선원들, 해양경찰청 등 관련 기관과 정부의 한심한 대처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깊은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런데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어처구니없는 희생과 쓰라린 경험, 고통, 분노의 표출을 통해 조금씩 발전해 왔으며, 이러한 경험을 계기로 한국 사회도 돈보다 생명가치를 중시하는 인간적인 사회로 발전해 나가리라 믿는다. 그리고 이를 실현해 나가는 것이 수많은 젊은이들의 억울한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고, 유가족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며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인간들은 한편으로 과거의 고통스런 경험이나 사건들을 기억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쓰라린 기억을 망각하고자 하는 경향도 있다. 왜냐하면 고통스런 기억 자체가 우리 삶을 힘들고 지치게 하며 또한 우울하게 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과거의 고통스런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고, 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쓰라린 경험들을 항상 오래도록 기억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과거의 상처를 잊고,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으며, ‘현재(the present)’를 ‘선물(the present)’로 받아들여 하루하루 활기차고 충실하게 사는 것이 생활의 ‘지혜’이며 ‘행복’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건들과 경험들도 있다. 특히 사회적, 역사적으로 함께 겪은 고통에 대해서, 그리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잊지 말아야 할 사건들이 바로 그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사회의 미래를 위해 결코 망각되어서는 안 될 사건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개인들에게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라고 강요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 그렇다면 기억과 망각의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사회, 국가의 관계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 개인의 삶, 가족의 삶은 사회적 환경에 의해 지배받으므로 사회적 조건이나 구조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어떤 성격의 국가인가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소외받고 힘없는 국민들에게 거짓말을 다반사로 하며, 기득권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부(국가)가 지배하는 사회에 사는 개인들은 돈과 권력이 없으면 인간으로서의 인정과 대접을 제대로 받을 수 없다. 또한 전쟁 중인 사회에서, 빈부격차가 심해 사회적 갈등이 심각한 사회에서, 대형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불안전한 사회에서 개인들이 과연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는가?

사회적 조건이나 사회구조가 우리 개인들의 삶에 큰 영향을 주므로,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개인들이 타자의 고통받는 모습에 대해 공감하면서, 자신도 그러한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자각을 통해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적 현실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참여를 통해 우리 자신이 보다 인간적이 되고 성숙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개인의 자각만으로는 힘겹고 부족하므로 여러 개인들이 함께 노력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 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도종환, <담쟁이> 전문)

 

개인들의 자각과 실천이 담쟁이 같은 연대와 네트워크로 모아질 때 거대한 벽도 조금씩 허물거나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개인들과 조직들의 사회적 연대를 토대로 사회와 국가는 보다 민주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해서 제대로 된 ‘특별법’ 제정을 통해 사고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 처벌 등을 통해 사회적 정의를 세워야 하며, 원칙을 존중하고 생명을 중시하는 안전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사회시스템 차원에서의 개혁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기억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지속할 수 있도록 제도의 확립이 필요하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 미래로 가는 길이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8

세월호 특별법 제정이 미래로 가는 길이다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 같은글이 <오마이뉴스>에도 실려 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22597

 

새민련이 의원총회에서 세월호 특별법 합의안을 부결했다. 박영선 비대위 대표 측도 재협상이나 추가협상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중간과정이야 어떻든 잘한 선택이다. 유가족과 국민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세월호 특별법을 임의로 합의 처리하기는 힘들다. 문제는 비대위 위원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바로 여당과 합의한 박대표의 입지점이 대단히 취약해졌다는 점이다. 새민련 내부에서도 그렇고 여당과의 협상 입지도 좁아졌다. 유가족과 참사 대책위의 시선도 좋은 편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예측 가능했음에도 왜 박대표가 협상안에 합의했냐는 점이다. 박대표의 현실 인식이 너무 안이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국민 대다수가 이른바 세월호 피로증을 앓고 있고, 조만간 교황이 방문하고 얼마 안 있어 추석으로 이어지면서 더는 이 상황을 끌어가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게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수사권과 기소권이라는 명분을 고집하기 보다는 일단 조사위를 유리하게 구성해서 진행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인식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것은 결정적으로 불가능하다.

 

첫째, 세월호는 정치인들이 입맛에 맞게 요리할 수 있는 의제의 수준을 넘어서 있다. 그동안 교통사고니 시체 장사니 하면서 세월호 참사의 가치를 떨어뜨리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세월호는 한국사회의 불법적, 비도덕적 관행으로 인한 안전과 구호 시스템이 붕괴되면서 수백 명의 어린 학생들과 국민들이 죽어간 사건이다. 이와 관련한 의혹도 부지기수로 생산되고 있다. 해경과 안행부의 조기 대책, 유병언의 도피와 관련한 김기춘 비서실장의 관계, 유병언의 죽음의 진실의 문제, 박대통령의 7시간 행방의 문제, 세월호 주인과 관련한 국정원의 관계, 향후 대책 수립과 제도 정비 문제 등 어느 것 하나 적당히 덮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정치인들이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세월 호 참사는 시대적 과제이고 역사적 문제이다.

 

▲http://www.jabo.co.kr/ 16일 침몰한 세월호(전라남도 수자원과 제공)

▲http://www.jabo.co.kr/
16일 침몰한 세월호(전라남도 수자원과 제공)

둘째, 사안이 중차대하기 때문에 세월호 참사 이전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같은 상태로 있을 수 없다. 9.11사태를 경험한 미국이 안전과 테러와 관련해 Before 9.11/After 9.11로 시대 구분을 하는 것처럼, 대한민국도 세월호 참사와 그 대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Before 4.16/After 4.16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역사의 향방이 그렇게 짜여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만일 정치인들이 안일하게 세월호 문제를 여타의 다른 사건 정도로 무마하려고 하면 할 수록 이 문제를 처리하는 사회적 비용과 시간, 그리고 국론 갈등 등의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 특히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의 정치적 지혜가 필요하다. 하물며 야당 대표가 적당 수준에서 합의해 처리할 수 없다. 지난 80년대 한국 사회가 광주의 희생을 해결하는 데 얼마나 큰 시간과 노력을 들였고, 사회적 진통을 겪었는가를 교훈삼아야 한다.

 

셋째, 박 대표는 세월호 정국이 오래 가다 보니 이른바 항간에 나도는 세월호 피로증과 같은 현실주의적인 인식을 했을지 모른다. 세월호의 여파는 경제를 비롯한 사회 각 부문들에 깊은 충격으로 남아 한국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피로증은 여권 핵심이 세월호 참사를 일반 국민들과 분리시키려는 고도의 책략 중 하나이다. 참사가 발생한지 120일이 되었지만 정치권에서 해결한 것은 하나도 없고, 오로지 유가족들과 국민들의 고통만 가중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사회의 진보와 보수 간에 국론 갈등도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무력하고 무능한 야당은 문제 상황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여권의 분리 전략에 말려든 셈이다. 이런 분리전략은 이미 80년도에 전두환 군사정권이 성공적으로 써먹은 경험이 있다. 피로증은 문제가 답보 상태에서 갈등만 심화될 때 나온다. 해결의 책임은 현 정부를 꾸려 나가고 있는 여권의 책임이고 순전히 대통령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지난 120일간의 여정을 돌이켜보면 과연 이렇게 무능한 대통령이 있을까 할 정도이다. 세월호가 서서히 수장되는 골든 타임에 대통령은 무엇을 했는가? 오죽하면 청와대에서 실종된 7시간이 논란이 될 정도이다. 배를 버리고 도망 나오는 선장들과 선원들을 보고 살인자라고 역정을 내고, 슬픔에 잠긴 유족들에게 특별법과 특검을 약속해 놓고서도 하나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유병언을 검거하라고 닦달만 했지 정작 그의 시신은 유골이 돼서 일반인에 의해 발견되었을 뿐이다. 지금 이 무능한 대통령은 청와대 가신들의 뒤로 숨어 있을 뿐이다. 여의도 정치의 실종을 개탄하면서 민생을 이야기할 때 보면, 과연 대통령이 현 정국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고 국민의 고통을 이해하는 대통령인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한국 사회가 지난 97년의 금융위기를 비교적 빠른 시간에 잘 헤쳐 나온 데에는 정권교체와 김대중이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고, 국민들이 믿음을 갖고 따라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여러 후유증들이 없지 않았지만, 커다란 경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그의 과단성 있고 지혜로운 행동이 큰 역할을 했다. 지금 우리가 박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것도 이런 지도자의 역할이다. 세월호 피로증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약속도 식언하는 믿지 못할 대통령, 세월호 참사의 역사성도 인식 못하는 멍청한 대통령, 난맥처럼 얽혀 들어가는 세월 호 정국을 방치만 하고 있는 무책임한 대통령이자 무능한 대통령 때문이다.

 

넷째, 아마도 박대표가 협상안을 성급하게 받아들인 데는 보궐선거에서의 참패로 인해 야권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보궐선거에서 야권이 참패한 것은 분명한 현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세월호 정국에서 김한길/안철수로 대표되는 야당의 무기력한 대응과 잘못된 공천, 호남 정치인들의 안이한 판단 때문이다. 국민이 야당에게 원하는 것은 그런 모습이 아니다. 국민은 정권을 비판할 수 있는 강한 야당, 개혁을 주도할 수 있는 비전 있는 야당, 참사를 해결할 수 있는 책임 있는 야당의 모습을 원했다. 야당이 참패한 것은 그런 모습과 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대표가 이전 대표들의 무기력한 모습을 반복하면서 현 정국을 돌파할 여력이 없다고 주저앉는다면, 그것은 야당의 본분을 망각한 처사이고 정치인으로서 역량이 의심스러운 모습이다. 그의 협상안은 8월 11일 새민련 의원총회에서 바로 부결되었고, 재협상을 시사하는 발언이 나오고 있다. 이로 인해 박대표의 입지도 더욱 좁아졌고, 때문에 현 시점에서 박대표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도 제한되어 있다. 먼저 박대표는 유가족과 국민이 동의하지 않는 협상안은 물 건너갔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다시 좌고우면한다고 혼선을 일으키면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조차 위태로워질 수 있다. 지금의 협상 정국 돌파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대표직이 아닌 의원직 총 사퇴까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협상 정국의 단축을 위해 대통령과 직접 협상을 유도해야 한다. 지금 정국을 풀 수 있는 것은 오직 대통령의 결단 뿐이다. 다른 어떤 해결 방안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과 같이 대통령에게 막중한 권한이 실려 있는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는 생활 정치, 민생 정치의 물꼬를 트는 역할도 대통령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여의도에서 정치가 실종되었다고 말을 하기 전에 그들이 정치를 정상적으로 가동할 수 있도록 물꼬를 터 주어야 한다. 그 물꼬는 세월 호 문제를 접근하고 풀어나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데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온갖 갈등과 분열,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은 세월 호 정국으로 집중되어 있다. 여기서 물꼬를 트지 못하기 때문에 정치가 실종되고, 국민들이 피로증에 걸려 분열되고 있다. 이 물꼬는 오직 성역 없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마련하는 일에서만 풀 수 있다. 대통령은 여당만을 위한 대통령이 아닌 국정의 총책임자이다. 요즘 항간에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영화 [명량]은 나라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한 이순신 장군의 명량 대첩에 관한 영화다. 장군이 말하지 않던가?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고 하면, 살 것이다”고. 박대표도 그렇고, 박대통령도 마찬가지이다. 특별법을 제정하면 여권에 엄청난 부담이 되리라고 생각을 해서 막고 있다면 그건 오산이다. 정권의 생명은 약간 연장될지 몰라도, 대한민국의 미래는 여전히 구태와 관행, 분열과 갈등 속으로 실종될 것이다. 만일 대통령이 죽으려는 자세로 푼다고 하면, 그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여는 대통령, 역사에 기록되는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다. 이런 기로에 서 있기 때문에 대통령의 정치적 지혜를 요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 대표도 안이한 현실 인식에 안주해서 살려고 하면 그의 정치 생명은 오래갈 수 없다. 우리는 과거 그런 정치인들을 너무 많이 보아 왔다. 박 대표도 이미 한 차례 경험하지 않았는가? 정치인들의 인기는 아침이슬과 같고, 물거품과 같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신뢰감과 책임감이 있는 정치인이다. 그가 죽으려 한다면 반드시 박 대표의 죽음의 길에 국민이 같이 동반할 것이고, 죽어가는 야당도 국민이 다시 살릴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월호 특별법을 조건 없이 만들어라![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7

세월호 특별법을 조건 없이 만들어라!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 같은글이 <오마이뉴스>에도 실려 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19987

 

세월호 특별법 제정 문제로 시작된 유가족 단식 농성이 벌써 21일을 넘겼다. 평소 단식을 하지 않던 사람이 이 더운 날에 거리에서 이 정도로 단식을 한다면 생명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벌써 몸 상태가 현저하게 나빠져 외부 접촉을 막고 있다고 한다. 유가족들의 이런 상태를 걱정한 시민들이 현재 광화문에서 연좌 농성에 진입했다고 한다. 도대체 이 정권은 무엇이 두려워서 특별법 제정을 막고 있는 것이고, 도대체 무능한 야권은 무엇이 힘들어서 계속 머뭇거리고만 있는 것인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생으로 저 바다에 수장시킨 것도 원통한데, 그 부모들까지 나서 이렇게 배를 곯아 가며 청원해야 하는가? 특별법 문제는 박근혜 대통령이 눈물까지 흘려가며 국민들에게 약속한 것이 아닌가? 우리 국민은 그 당시 대통령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참으로 어린 학생들의 죽음을 비통해하면서 흘린 눈물이라고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이 있고서 벌써 100일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진척이 없을 뿐, 원통한 부모들만 거리에서 목숨을 걸고 단식을 하루 하루 이어가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이 국민들은 언제까지 대통령의 무능한 판단과 느려 터진 결정으로 고통을 겪어야 한단 말인가? 당신들은 참으로 유가족들이 거리에 쓰러져 다 죽어버리기를 바라는 것인가? 이미 죽은 아이들의 혼이 구천에 떠돌면서 원통해하는 데도 당신들은 그런 울부짖음이 들리지 않는단 말인가?

 

특별법은 특정 정당이나 정권의 정략적 산물이 될 수 없다. 세월호 참사는 현 정권 만의 잘못도 아니다. 물론 사고 책임의 직접적 당사자들과 책임 범위 안에 있는 관료들의 문제는 중차대하다. 하지만 관피아와 해피아 같은 문제들은 지난 수 십 년 간 한국사회가 앞만 보며 달려 오면서 누적된 문제들이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밝히고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는 일은 현 정권에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풀어야 할 역사적인 과제이다. 성역없는 수사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현정권의 책임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대한민국, 우리 자손들이 살아갈 대한민국을 올곳이 세우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세월호 참사를 이렇게 역사적 과제로 생각한다면 도대체 당신들이 두려워할 것이 무엇인가? 정권은 유한하지만 우리 민족과 후손이 살아갈 대한민국은 영원하다. 그런 국가를 바로 세우는 문제에서 왜 당신들은 정권의 안위만 생각하고, 정략적으로만 문제를 보는가? 대통령은 이미 오래 전에 정권에 기초한 권력의 무상함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대통령은 그런 권력의 무상함을 또 다시 경험하고 싶은가, 그리하여 세월호 문제를 정략적 미봉책으로 해결하려다가 자자손손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하나의 오점으로 남고 싶은가? 당신들은 역사가 두렵지 않은가?

 

사진-민중의 소리

사진-민중의 소리

4.16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백일이 훨씬 지났고, 그 부모들의 단식도 21일이 지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조사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일에 한 치의 걸음도 내딛고 있지 못하다. 대통령은 이렇게 조사가 늦어지고 대책 수립이 지연되다보면 그냥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럴수록 부모들의 원한의 감정은 하늘을 찌르고, 국민들의 갈등과 분열의 골도 메우기 힘들 정도로 깊어질 것이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조사를 미룰수록 항간에 떠도는 세월호 관련 의혹들은 더욱 비등할 것이고, 그 모든 화살은 정치권과 청와대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그리고 그 여파는 경제를 비롯한 사회 각 부문들에 깊은 충격으로 남아 우리 사회의 발목을 더욱 더 과거에 묶어두게 될 것이 아닌가?. 이 모든 책임은 정부의 수반이고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안이한 현실 인식과 무능한 판단에 있다는 것을 결코 모른단 말인가? 대통령은 과거 어느 대통령보다 대일 관계에서 과거사 청산을 따지고, 대북관계에서 진정성과 신뢰를 문제 삼고 있지 않은가? 과거의 불행한 문제들이 청산이 안 되고, 서로 간에 신뢰가 부재하다면 결코 미래의 발전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대통령이 왜 세월호 참사를 가볍게 생각하는가? 왜 그것을 조삼모사 식의 정략적 판단으로 호도하려고 하는가? 왜 국정의 최고 책임자의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했던 이야기를 뒤집어 버리려고 하는가? 세월호 참사로 야기된 문제들을 조사하고 최소한 미래에 다시 반복되지 않을 정도의 대책을 마련하기 전까지는 대한민국은 한 치도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대통령은 참으로 모른단 말인가? 혹여 대통령은 지난 보궐선거의 압승 결과를 믿고 이제는 세월호의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안이하게 판단하는 것은 아닌가? 만일 대통령이 선거결과를 그렇게 이용하려 한다면 이제 국민들은 무능한 야당에 대한 불신을 넘어 정치권 전반을 불신하는 엄청난 사태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정치인들은 벌써부터 보상금을 가지고 유가족들을 회유하고 분열시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부모가 자식의 목숨값을 가지고 흥정을 하려 하겠는가? 부모가 죽으면 청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 부모들의 비통한 마음을 위로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원한의 감정만 심으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정치가 아니겠는가? 아, 어떻게 이다지도 어리석은 정치인들을 우리 손으로 뽑았단 말인가? 정녕 대통령은 정치 전체가 불신되고, 국민들의 갈등과 분열이 막심해지는 시대의 대통령이 되고 싶은 것인가?

 

대한민국 헌법 제 1조는 분명히 적고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만약 주권자인 국민이 선출권력들 앞에서 좌절과 절망을 느끼고, 그들을 더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는가? 국민과 대립하는 국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헌신짝 취급하는 국가, 국민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거나 위로하지 못하는 국가, 국민의 원한 감정만 자극하는 국가, 그런 국가가 과연 국민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도대체 그런 국가가 언제까지 국민에게 국가에 대한 의무를 강조할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해보라. 봄날에 화창하게 핀 꽃같은 아들과 딸들이 수학여행을 간다고 집을 나선지 몇 시간이나 되었는가? 그런 그들이 배에 갇혀 구조의 손길 한번 받아 보지 못한 상태로 서서히 저 차가운 바다로 수장된 모습을 지켜본 부모들의 비통한 심정을 어떤 언어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너무나 기가 막히고, 너무나 황당해서 말이나 할 수 있겠는가? 지금도 컴컴한 바닷 속에서 시신이라도 거두어주기를 바라는 영혼들이 있는데, 그런 부모들이 무얼 그렇게 심한 걸 원한다고 하는가? 시체장사를 한다고, 자식팔아 영화를 누리려 한다고, 심지어 유가족 충이라는 막말까지 들어가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 대단한 것인가? 그들은 단지 정확한 진상규명이고, 그것을 위해 성역없는 수사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수사권을 가지고 수사를 하더라도 음해하고 저항하는 세력들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그 결과를 가지고 법원의 공정한 판단을 받는다는 것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을 터인데, 그런 판단이 있더라도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무수한 장애들이 또 다시 앞을 가로 막을 터인데, 그런 사이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가면서 유가족들의 가슴은 한 없이 타들어갈 터인데, 어찌 국민의 녹을 받고 있는 국회와 국정의 총책임자인 대통령은 첫 단추를 꿰는 일에서부터 이토록 유가족의 애를 태우는가?

 

이제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자. 우리들의 어린 자식들이 구조의 손길도 받지 못하고 서서히 수장되어갈 때, 다들 안타까워하고 분노하던 마음으로 돌아가자. 그 때 누가 좌우를 따졌고, 여야를 따졌고, 진보와 보수를 따졌는가? 그 수장되어가던 순간에 한 마음 한 뜻으로 안타까워하지 않았던가? 구조의 손길을 펼치기 위해 전력투구해야 할 골든 타임을 놓친 것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자책하고 분노를 했던가? 그 시간을 놓치고서 얼마나 많은 생명을 잃었던가? 그 시간을 놓치고서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장비를 투여했고, 얼마나 많은 국민의 세금이 투입되었는가? 그 시간을 놓치고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고통스러워했는가? 그 시간을 놓치고서 국민 경제와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얼마나 큰 충격을 받고 있는가? 그런데 다시 우리는 그 시간을 놓쳐 국민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미래의 대한민국의 기틀을 흔들어 놓으려고 한다. 이 땅의 정치인들이여, 그리고 대통령이여. 당신들은 또 다시 그런 골든 타임을 놓치고, 외면하고, 무시함으로써 역사의 죄인이 되려 하는가? 국민은 더는 그런 어리석음을 보고 싶지 않다. 다시 한 번 호소한다. 세월호 특별법을 정략적으로 바라보지 마라. 역사의 눈을 의식하면서 조건없이 신속하게 처리하라. 그래서 더는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눈에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하라. 더는 국론을 분열시키지 마라. 더는 국민들이 이 고통 속에서 한 없이 좌절하지 않게 하라. 비온 뒤의 땅이 더 굳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간절히 부탁한다. 부디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고통을 생각하라. 부디 갈라진 국론을 하나로 합칠 것을 생각하라. 부디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하라. 부디 역사의 눈을 생각하라. 정권은 유한하지만 대한민국의 역사는 유구하다는 것을 생각하라.

 

문창극의 ‘하나님의 뜻’은 도착증 환자의 환상일 뿐이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6

<문창극의 ‘하나님의 뜻’은 도착증 환자의 환상일 뿐이다>

김성우(ⓔ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이 글은 <프레시안>과 공동게재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유로우려면 신이 존재해야 할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아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하여 사르트르는 무신론을 택한다. 그의 실존주의는 신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야 인간에게 미리 정해진 본질(시나리오)이나 규범이 없게 될 테니까? 다시 말해서 인간이 살아가면서(실존하면서) 자신의 시나리오(본질)를 써 가는 작가가 된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인용해서 인간의 자유를 선포한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러나 슬라보예 지젝은 현대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라캉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는 이러한 말로 정치적인 전체주의의 병리적인 현상을 설명한다. 진정한 스탈린주의 정치가는 인류를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끔찍한 정화(숙청)와 집행(학살)을 수행한다. 그의 마음은 그 일을 하면서도 찢어지는 듯이 아프다. 그렇지만 그는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일이 인류의 진보를 향한 그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책임이 없다. 그는 단지 ‘역사적 필연성’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전형적인 도착증 환자의 태도이다.

꾸미기_유럽2013.01 462도착증의 대표적인 유형은 가학증인 사디즘과 피학증인 마조히즘이다. 도착증의 전형적인 태도는 자신을 ‘큰 타자의 도구’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큰 타자는 주체에게 그 상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가에게는 ‘국민의 뜻’, 기업가에게는 ‘소비자의 욕구’, 일신교도들에게는 ‘신의 뜻’, 민족주의자에게는 ‘민족의 사명’, 관료에게는 ‘조직의 명령’ 등이 그것이다. 도착증 환자의 대표적 사례인 사디스트는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면서도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느낀다. 그는 자신을 ‘큰 타자의 뜻’을 성취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는, 도착증에 전형적인 부인(disavowal)에 해당한다.

지젝은 이러한 도착증의 범주를 가지고 정치적 전체주의는 물론 테러리즘에 빠져든 종교적 근본주의까지 해명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정적을 살해하거나 표적물을 죽일 때도 역시 ‘알라신의 뜻’에 호소한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나자 이완용은 세 차례에 걸쳐 경고문을 <매일신보>에 실었다. 특히 5월 29일에 기고한 제3차 경고문에서 그는 조선이 일본에 식민지가 된 것도 다 ‘상천(上天, 유교의 하나님)의 뜻’이라고 썼다. 따라서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망령된 행위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매국도, 제국주의적 침략도 정당화하는 마법 지팡이이다.

혹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의 ‘하나님의 뜻’에 관한 발언도 이러한 도착증적인 증상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유명해진 그의 온누리 교회 강연록(국무총리실 제공)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자.

ⓒ한국방송공사(KBS) 화면 갈무리

ⓒ한국방송공사(KBS) 화면 갈무리

“그때도 그러면 왜 그럼 우리나라를 보호해 주셨으면 일본한테 합방하지 않게 하시지, 하나님은 왜 이 나라를 일본한테 이렇게 당하게 식민지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우리가 항의할 수 있겠지, 속으로. 그런데 저는 아까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야. 우리한테 너희들은 이조 500년 허송세월을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 너희들은 고난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그 고난 속에서 우리가 36년을 지나고 난 다음에야 마치 광야의 40년 생활을 하고서 우리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갈 수 있듯이 36년의 고난을 거치고 난 다음에 대한민국에게 독립을 허용하신 거예요. 그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 이거예요.”

종교적 근본주의의 특징은 일종의 논리적인 합선(short-circuit)이다.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을 제멋대로 합선시켜 구사하는 것이다. 광신주의적 살인마는 표적물이 된 사람에게 보낸 협박 편지를 신의 분노로 포장한다. 그는 교묘히 세속적인 협박 편지가 주는 공포와 최후의 심판 때 신의 분노를 마주할 때 일어나는 두려움을 섞는다. 문창극 후보자의 논리에도 이러한 합선이 존재한다. 학술적이거나 객관적인 근거도 없이 우리의 민족사와 신성한 섭리를 뒤섞어 민족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식민 지배, 더 나아가 분단과 6·25라는 민족적 비극의 역사를 단 한마디로 풀어낸다. 이런 사건 모두 다 우리 민족을 단련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나님은 너희들은 안 되겠다. 다시 고난을 더 가져라, 그래서 분단을 시켰어요. 그것뿐입니까? 6·25까지 만들어 주셨어요. 이 6·25까지 주신 거야. 우리 생각에는 이야, 하나님 참 너무 하다, 이럴 수가 있냐. 어떻게 6·25를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6·25가 저는 이렇게 얘기하면 지가 죽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6·25를 또 저렇게 미화한다는. 6·25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단련이 된 거예요, 6·25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논리적 합선에 대해 기독교계 일부에서도 문제를 삼고 있다. 광주 기독교연합회(NCC·CBS·YMCA·YWCA)는 “문 후보자는 역사에 대한 자신의 자의적 해석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킨 비성경적이고 반신학적인 인사“라고 규정한다.

물론 또 다른 기독교 인사들은 문 후보자의 논리를 두둔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종윤 원로목사는 “우리가 당한 고난의 길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한 것이다. 따라서 문 후보의 교회에서 강연은 모든 것이 하나님 뜻 안에서 이루어짐을 강조한, 지극히 성경적 표현인 것”이라고 평했다. 심지어 전광훈 목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4백년 애굽종살이나 70년간의 바벨론 포로도 하느님의 주권적 섭리”로 해석되는 것처럼 “한국 근대사에서 긍정적 내지 부정적 모든 사건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안에서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며 “세상 정치인들이나 언론들에서 교회 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적 관점에서 이를 재단하는 것은 잘못이자 교회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대로 기독교 신앙적 관점과 세상적 관점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유대교적인 관점과 기독교적인 관점의 구분도 중요하다. 문 후보자를 비롯한 그를 비호하는 목사들의 해석은 세상적인 것에 기독교적인 관점과 심지어 유대교적인 관점까지도 뒤섞어버린다. 이는 테러와 침략을 신의 뜻으로 해석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 및 미국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BBC 방송에 따르면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신의 계시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처럼 “나는 신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라고도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은 이들의 정신세계에서는 라캉의 말처럼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과연 테러, 학살, 침략을 이렇게 신의 계시, 신이 주신 사명으로 해석하는 것이 지극히 이슬람적인 관점이거나 기독교적인 관점인가? 가해(加害)를 신의 명령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나와 같은 비신학자가 보아도 당연히 비신학적이고 비성경적인 해석이다. 마찬가지로 피해(역사적 비극)를 신의 섭리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우리나라의 민족사와 유대교의 민족사를 마구 뒤섞는 것도 마찬가지로 비신학적이고 비성경적인 해석이다. 신약성서의 어디에 예수가 이스라엘에 대한 로마의 지배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곳이 있는가? 예수는 도리어 “가이사(로마의 황제인 케사르)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로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뒤섞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지배한 것도 일본에게 주신 신의 뜻인 것인가? 이러한 해석이 앞선 말한 도착증 환자의 논리적 합선에 해당한다. 가해를 신의 뜻으로 본다면 이는 사디즘적인 도착증과 유사하고 피해를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한다면 이는 마조히즘적인 도착증과 유사한 것이다.

더군다나 왜 문 후보자는 애국적인 투사인 안중근도 아닌, 김구도 아닌 매국노의 대표자인 윤치호의 글을 인용한 것인가? 더군다나 비판적인 자세가 아니라 공감적인 자세로 인용한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또 버전 업을 시켰느냐 하면, 이 윤치호라는 사람은. 조선유학생들이 일하기가 싫다, 이거야. 그리고 앉아서 순 말로만 하는 것 좋아한다 이거야.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고 이게 아주 우리 민족의 DNA로 남아 있었던 거야. …… 그러니까 우리나라 그 이조 말기에 우리 민족들의 피에는 공짜로 놀고 먹는 게 아주 그냥 몸에 박혀 있었대요. 하여튼 이런 나라였어요.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고 그런데 그런 나라에 선교사님들이 와가지고 변화를 시킨 거야.”

이완용ⓒWikimedia Commons

이 인용문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한데 선교사가 와서 변화를 시킨 것이다. 여기에는 극단적인 자기 폄하와 서구 중심주의가 깔려 있다. 이러한 자기 폄하는 일제의 식민 사관에서 가장 강조하는 핵심적인 주제이며 유럽의 식민 사관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자기 폄하와 외부에서 구원자를 찾는다는 것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매국노의 기본 논리이다. 그래서 친일은 필연적으로 친서구로, 종국적으로는 친미로 귀결된다.

“6·25전쟁이 그렇게 났으면 우리는 소련이나 중공 밑에서 그 후원을 받은 북한에 우리 다 지금 다 흡수되고 말았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안 되겠다, 너희들 붙잡아야겠다. 너희들 어떻게 붙잡느냐. 미국을 못 가게 만들어 주겠다. 하나님이 미국을 우리 딱 붙잡아 주셨어요. 미국이 6·25 사변이 끝나면서 우리하고 안보조약을 맺었어요. 상호안보조약을 맺었어. 그건 뭐냐. 우리나라가 침략을 당하면 미국이 침략을 당한 것처럼 도와주고 미국이 침략을 당하면 우리가 침략 당한 것처럼 또 미국을 도와준다. 우리가 무슨 미국을 도와줄 힘이 있습니까? 괜히 미국에 조약을 맺기 위해서 그러는 거지. 그 안보조약을 맺었어요. 그것 때문에 지금 까지 그 조약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가 살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것 때문에 지금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한국에 미군이 없는 한국을 한 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러한 친일과 친미적 사관이 기독교적인 사관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그러면 예수는 친(親)로마적인 매국노인가? 아니면 반(反)로마적인 민족 투사인가? 아니면 이런 정치적인 것과는 무관한 종교적 구원자인가?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아마도 세 번째의 예수의 모습을 기독교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도착증 환자라면 첫 번째나 두 번째의 예수의 모습을 선택할 것이다.

도착증 환자의 가장 큰 특징은 진실을 부정하는 방식에 있다. 지젝에 의하면 부정(Verneinung)은 무의식의 저항이다. 일종의 방어 메커니즘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형태의 부정, 즉 억압(Verdr?gung), 부인(Verleugnung) 그리고 거부(Verwerfung)가 있다. 이러한 부정의 세 가지 심리 메커니즘은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이라는 진단 범주들에 상응한다. 신경증적인 부정은 억압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주전자를 빌린 후에 다시 깨진 주전자를 돌려줄 때 세 가지 형태로 부정하는 발언들이 존재한다. “난 결코 네가 요구하는 주전자를 빌린 적이 없다.” 이런 발언이 전형적인 억압적인 부정이다. 또한 물신주의적인(도착증적인) 부인은 다음과 같다. “난 그것을 온전한 상태로 너에게 돌려주었잖아.” 마지막으로 정신병적인 거부(Verwerfung, foreclosure)의 사례는 상징 질서인 큰 타자를 배제하고 있어서 비(非)논리적으로 발언한다. “어쨌든 그것은 구멍이 있었어.”

이와 유사하게 문 후보자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발언의 변화를 살펴보자. 채널A 방송에 따르면 처음에 문창극 후보자는 출근길에 교회에서의 강연 내용에 대해 사과할 생각이 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사과는 무슨 사과냐?”고 반문했다. 청문회 준비단과 회의를 한 후에는 “종교인으로서 교회에서 한 강연이 일반인의 정서와 거리가 있을 수 있으며 오해의 소지가 생겨 유감”이라고 표명했다. 하지만 반나절이 지나 청문회 준비단은 왜곡된 보도를 하는 언론사에는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힌 이후에 문 후보자도 퇴근길에서 “(강력 대응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사실을 왜곡했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다음 날, 몇몇 기독교 목사들은 문 후보자의 해석이 지극히 성경적이라고 두둔했다. “어쨌든 그것은 성경적이었어.” 이러한 태도는 처음에 인용한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게 허용된다.”는 식이다.

부디 우리나라 기독교계를 이끄시는 분들 가운데 몇 분이 혹시라도 도착증 증세가 심해지거나 심지어 정신병으로 발전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기만이 가득하군[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

기만이 가득하군[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

최종덕(한철연 회원)

단 하루, 어제 신문에 오른 사회면 뉴스만 대충 집어보련다

문창극 총독 지명자는 대학원 다니고 박사학위 다 할만 했으니까 한 거라고

송광용 신임 비서관은 논문 표절 아니라구 허구

노대래 공정위원장은 손석희 아나운서를 빨갱이라고 하니

이 세상 빨갱이 천지가 되었고

전광훈 목사는 서울시민들을 정신병자로 몰아세우질 않나,

하기야 그 목사만 그런 게 아니니까

박상은 국회의원은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는 개그까지 하고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은 “언론은 모두 입을 다물라“고 대국민 협박을 하고

박유하라는 교수는 위안부를 매춘부로 묘사한 책을 냈다니,

교수들은 신림동 좌판 나물 파는 우리 할머니에게 머리 조아리라

끔찍한 일베의 살인인증사진과 더불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직원들의 댓글달기를 몰랐다는 판결이 났다고 하는데,

글쎄 누가 믿을까

거짓말들,

어제 하루치 신문에만 뜬 거라고.

하루하루가 이런 뉴스들로 가득 채워져 가고 있으니,

온갖 거짓이 횡행하더라.

기만이 땅에 가득차고 뻔뻔함이 하늘을 찌르니

신도 혼미해졌는지 교회까지 자기 속임수에서 허우적거리는거군.

기만은 자기 이익만을 크게 하려니,

부끄럼 한 점 없다고 당당한 위선의 몸짓까지 흉내낸다

기만을 성공시키려니

첫째가 뭇 사람들이 내 속임수를 눈치 챌 수 없도록 속임수를 세게 가는 거야

둘째는 네가 혹시 내 속임수를 의심하고 있는지 아니면 잘 속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잔머리도 늘어나는 거지.

기만꾼들은 남들이 내 기만에 마음을 놓고 속아 주도록 주도면밀함까지 있다구.

거기다 대통령이 받쳐준다고 생각하니,

든든한 마음에 허세 또한 당당해져

그보다 기만에 더 능한 자들이 여기저기,

자기 자신도 자기가 하는 기만을 기만으로 생각하지 않는 기만들이 많거늘,

그런 기만을 자기기만이라 하더라.

남들에 마법을 피우기 전에 나 자신에게 기만의 주술을 거는 거야.

그리고 나서야 남을 더 잘 속일 수 있기 때문이지.

기만자는 자기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고 끝까지 우기는 거야.

신문에서 날마다 보듯이 말이지.

인간중독이 아니라 자기중독이라서, 그건 약도 없어.

그렇다고 치료 불가능은 아닌데, 일단 왕권력을 바꾸고 봐야겠지.

거짓을 탐지하고 알아채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런 사기꾼들이 없어지는 것이고

우리들이 기꺼이 속아주면 기만자들은 놀랄 속도로 자기증식하니깐

그렇다고 치료 불가능은 아닌데, 믿음은 지식권력의 수단일 뿐임을 아는 거지.

교회나 절에 나가는 신도는 믿음은 강한데, 그런 믿음도 권력지식의 노예니깐

자기기만 병증이 샤머니즘이나 주술의 향을 타고 이 땅을 질식키려는데,

원래가 교회권력이나 독재정권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행동양상인거지

다행히 우리 몸속에는 기만을 알아채는 생리적 능력이 있으니 그런 능력을 잘 발휘해야겠지

발휘하면 뭐하나, 눈 부릅뜨고 행동으로 보여줘야지

신문 좀 편하게 봐야지.

 

대통령의 악수와 소통의 문제[이종철의 세상보기철학]

대통령의 악수와 소통의 문제 [이종철의 세상보기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1.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는데 거부하는 나라..어이가 없네. 사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보통 사람도 악수를 청했는데 거절 당하면 불쾌한데,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인데…이쯤되면 막나가자는 것이 아닌가? 이걸 그냥 둬, 말어. 권위주의 시대도 아니기 때문에 잘 못 건드리면 또 벌떼 처럼 달려붙을 텐데…사실 이 부분만 따로 떼어 놓고 비난할 일도 아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 시절 그를 얼마나 희화화했는가? 현 권력의 핵심 실세는 아예 정신병자 취급하면서 싸이코라고 부르기도 하고,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배우 분장을 하고 그런 싸이코적 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아랫것들이라고 배우지 말란 법이 있는가? 모 눈에는 모만 보인다고, 서로 막말이나 막가는 태도로 상대를 깍아 내리다 보니 이제 막 돼먹은 집의 망나니같은 아이들의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모 그런 것을 정색하듯 따지나…그래도 대한 민국의 미래를 해서 탈 권위주의 시대의 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해보자.?

박 근혜 정부를 ‘불통정부’라 부르는 이가 많다. 국민과의 소통이 적고 권위주의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굳이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많은 리더들이 이런 비판에 대하면서 억울해 할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아랫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려 노력했고, 또 그들보고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노력을 했어도 아래 사람들이 별로 이야기를 하려고 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말 해, 얼마든지, 다 들어 줄께.” 말은 그렇게 하지만, 왠지 고압적이고 권위적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말 잘못하면 경을 칠 일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자리 깔아줬다고 함부로 입을 나블대다 가는 신세 조질 수도 있다. 그러니 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느냐를 먼저 판단할 일이다. 종종 TV를 통해 청와대에서 고위 공직자들을 모아다 놓고 회의하는 장면을 보면 가관이다. 수첩 공주 흉내를 내느라고 다들 열심히 펜을 들고 받아쓰기 하는 모습이다. 그들은 회의 참석 전에 관련 문건들을 검토도 하고 오지 않는지 궁금하다. 웬만한 기업이면 다들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모든 문건들을 등급별로 공유하고 있다. 청와대의 내부 시스템은 다른 어떤 기업들보다 최상급일 텐데 그들은 여전히 종이와 연필을 들고 대통령의 목소리를 받아쓰는 데 정신이 없다. 이쯤 되면 대통령의 목소리는 가신들의 영혼에 각인되는 아버지 남성의 목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2012년 대선 시 연세대 심리학과의 황상민 교수가 박근혜 후보보고 “생식기만 여성”이라는 말을 했다가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고위 공직자들도 제 말을 못하는 분위기에서 국민들의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말로는 연일 소통하자고 하지만 그야말로 꽉 막혀 있다. 불통이 되다 보면 오해도 심해지고 갈등도 많아진다.

?그림을 한 번 보자. 유명한 Matisse의 그림이다. 그림 속의 남자는 고압적으로 서서 여자를 내려다 보고 있다. 반면 여자는 의자에 앉아서 남자를 올려다 보고 있다. 이런 눈높이의 차이는 권력 관계를 반영하기도 한다. 시선으로 제압할 때는 대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볼 때이다. 그래서 팽팽한 기 싸움 할 때 상대방 보고 눈 내리까라고 겁준다. 게다가 남자의 손은 주머니 속에 꽂혀 있다. 여자에게 다가 가려는 태도가 아니다.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데서 그만큼 여자의 감정까지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보인다. 그렇길래 여자는 의자에 갇혀서 남자의 처분만 기다리는 것 같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그림의 제목은 대화(Conversation)이다. 대화라면 당연히 서로의 눈높이도 맞추고, 거리도 줄이고, 주머니에서 손도 빼 상대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이 그림은 역설적으로 ‘대화의 부재’를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여자는 그런 고압적인 분위기에서 남자의 일방통행 식의 하명을 거부할 도리가 없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침묵하는 것뿐이다. 이런 여자의 마음은 분위기로, 즉 그들 간의 마음이 교류되는 창의 창살로 표현된다. 창살에는 non이 표시되어 있다. 당신이 아무리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도 내 마음은 ‘아니예요’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 역설적인 그림을 통해 대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대화는 소통이다.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아니 그 전에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어야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오랫동안 불통인 상황에서 갑자기 고압적으로 손을 내미는 것은 폭력일 수도 있지 않은가? 무조건 말하자고, 네 말을 다 들어주겠다고 말만 하지 말고 말을 할 수 있는 눈높이, 거리, 자세를 먼저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이 그림이 주제에 충실하려면 남자가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여자의 손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갑자기 그런 제스처를 취하기 힘들면 적어도 다른 의자를 가져와 무릎을 맞대고 서로의 눈을 맞추면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종종 강한 자가,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그렇게 하면 밑에서 올려다 보는 사람은 더 감동할 수 있지 않을까??

무릇 소통은 되먹임이고 순환이다. 순환이란 높은 것이 낮아지고 낮은 것이 올라가는 것, 혹은 외부가 내부로, 내부가 외부로의 전환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정체는 이런 입출력의 균형이 깨어질 때 나타난다. 맛있는 것을 죽도록 많이 먹어도 변비로 배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을 맛이리라. 로마의 귀족들은 아래로 배설이 안되니까 어거지로 구토를 유도하기도 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성찬을 즐기면서 바로 옆에다가 그것을 토하는 행위를 반복했다. 하지만 입출력의 자연스러운 균형이 파괴되면 신체의 건강도 깨진다. 현대인의 비만은 대개는 좋은 것을 너무 많이 먹으면서 너무 적게 배설하는 데서 나온다. 나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늙은 생명의 죽음도 그렇게 이해한다. 이런 입출력의 균형이 깨어지면 사회 생태계도 깨질 수밖에 없다. 오래 사는 것이 능사일 수는 없다고 본다. 좋은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좋은 삶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이다. 그것이 반드시 오래 사는 것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2. 동양의 오랜 철학서인 <주역>에도 이런 소통에 관한 괘가 있다. <주역>은 점서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중국인들의 오랜 경험이 녹아진 자연관, 우주관을 특별히 괘(卦)라는 일종의 이미지(象)를 통해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이미지는 마구잡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극에서 음과 양이 나오고, 이 음양으로부터 4상이 나오고 하는 식의 ‘이치 논리’의 일정한 규칙을 띠고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총 64가지의 괘가 만들어지고, 이 괘를 통해 인간사와 우주 자연사를 설명한다. 이 중에 ‘천지비'(天地否)(왼쪽 그림)와 ‘지천태'(地天泰)(오른 쪽 그림)라고 하는 두 가지 괘가 있다. 이 두 괘는 모두 하늘과 땅이 중첩된 형상을 하고 있다. 천은 하늘이고, 남자이고, 왕이고 하는 것이다. 반면 곤은 땅(地)이고, 여자이고, 백성이고 한다. 만일 우리가 자연의 질서를 고려한다면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남자가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식이다. 왕은 위에서 다스리고? 백성은 아래서 다스림을 받는다. 그래서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괘가 천지비이다. 그런데 이 괘를 설명한 것을 보면 象曰 天地不交이다. 천지가 불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괘를 얻으면 아주 좋지 않다. 불통이라 함으로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폐색되어 있다는 의미다. 장 폐색 때문에 장이 썩는 질병을 생각하면 얼마나 나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입출력이 이루어지지 않고,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것이 오히려 불통해서 폐색한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은가? 반면 이 괘를 뒤집어 놓은 것이 지천태이다. 이것은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모습이다. 오히려 이것은 자연의 질서, 사물의 질서, 사회의 질서 등이 전도된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이 괘의 설명을 보면 이렇다. 象曰 天地交泰 상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화합하여 태평하다. 전도된 형태가 오히려 화합과 교류가 잘 이루어져 태평하고 번성한다는 의미다. 이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천지의 관계, 임금과 백성의 관계, 남자와 여자의 관계, 강자와 약자의 관계는 오히려 정상적 형태의 관계 보다는 전도되고 역전된 관계에 있을 때 더 소통이 잘 된다고 하는 것이다.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그 원리는 아주 단순하다. 양기는 위로 올라가고 음기는 아래로 가라 앉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을 상징하는 하늘이 아래에 있고, 음을 상징하는 땅이 위에 있다면, 양기는 위로 올라가고 음기는 아래로 내려와서 서로 소통할 수 있지 않은가? 인간을 위시한 우주 만물의 모든 건강은 이런 자연스런 소통에 기초해 있다.

 

머리를 차게 하고 발을 따뜻하게 하라는 것도 이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동양의 모든 양생 수련법은 수승화강(水升火降)이 기초다. 즉 물의 기운인 음기는 위로 끌어 올리고, 불의 기운인 양기는 아래로 내리는 것이다. 이런 소통이 잘 이루어질 때 신체의 건강이 유지될 수 있다. 책을 많이 보거나 머리를 많이 쓰면 머리에 열이 많이 난다. 열이 나면 골도 아프고 잠도 잘 오지 않는다. 수행을 잘 못 하다 보면 이렇게 양기가 위로 뻗쳐 며칠씩 잠을 못 자서 나중에 머리가 도는 경우가 있다. 주화입마(走火入魔)나 상기증(上氣)이 그것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그렇게 미친 사람들을 몇 번 본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런건지 옛날 선비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책을 한 권 마칠 때마다 반드시 책 걸이 행사를 한다. 이 책 걸이는 음주가무로 노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공부 때문에 위로 뻗친 기를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는 작업이라 해도 좋다. 특히 이런 기가 머리로 뻗쳐서 통제가 안 될 때는 육체 노동을 강도 있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대 문호 톨스토이는 통제할 수 없는 이런 양기(성욕)를 풀기 위해 생활공동체를 운영하면서 강도 높은 노동으로 대신했다. 그래서 종종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은 육체노동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은 독서나 음악 감상 등 정신노동으로 푸는 것이 이상적이다. 정신과 육체의 통일의 원리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런데 양과 음은 사물의 고정불변하는 속성이 아니다. 양과 음은 관계 속에서 주어지며, 이러한 속성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과 소멸을 반복한다. 우리 태극기를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음이 커지면 양으로 변하고, 양이 커지면 음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 논리 속에서 음과 양의 지위가 결정되는 것이다. 남자는 존엄하고 여자는 비천하다는 남존여비의 사상도 남과 여를 불변적 속성으로 생각하는 데서 나온 오류이다. 동양의 전형적인 새옹지마의 논리가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지천태의 좋은 괘도 방심하면 나빠질 수 있고, 천지비의 나쁜 괘도 대비를 하고 개혁을 하면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는 절대적으로 나쁜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좋은 것도 없다. 정치에서 여-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여이지 불변하는 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선거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언제든지 야가 될 수 있으며, 야 또한 불변하는 야가 아니다. 국민의 지지 여하에 따라 여야의 관계가 결정된다. 그런데 종종 정치인들은 이런 권력의 속성을 절대 불변하는 것으로 착각해서 자신의 지위가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권력을 장악하면 일방 통행 식으로 행사하려 하고, 그 권력을 상실하면 한없이 조롱하고 희화화한다. 이런 형태로는 권력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만이 있을 뿐이다. 정작 국민의 지지로 탄생한 그 권력이 진정 국민을 위하는 생산적 권력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 부를 가진 자가 국민과 법 위에 군림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먼저 하심하고, 낮은 데로 임하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여야간의 소통, 국민과의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제는 정치인들도 국민이라는 바탕 위에서 서로 상대방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다시 소통과 대화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니까 직립 감읍해서 두 손으로 받들어야 한다는 것은 권위주의 시대의 관념이다. 그런 일방 통행 식의 권위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상당 부분 의미가 퇘색했을 뿐더러 희화화되기도 했다. 그런 상태에서 정치인들의 일방통행 식의 악수를 거절했다고 어이없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요즘 세대에게는 더 어이없어 보일 수도 있다. 50대가 보수 꼴통이 되는 것은 이런 변화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몸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남북 정상 회담할 때 김장수 국방장관이 김정일과 악수를 할 때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고 꼿꼿장수로 칭송을 받은 적이 있다. 북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그것도 어이상실이고 패륜이다. 제왕 같은 지도자 동지 앞에서 감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악수를 하다니. 하지만 우리 국민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탈 권위주의 시대에 중요한 선거관리 직무를 보는 사람들이 갑자기 직립 도열해서 악수를 해야 한다고 하는 모습이 더 이상할 수 있다. 물론 악수를 거절하는 모습을 무조건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맺힌 마음에 악수를 거절했다면 그것을 비난하기 보다는 먼저 그 아픈 마음을 쓰다듬으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는 그런 장면을 포착해서 이상한 시각으로 전달하는 언론이 더 문제이고, 별 생각 없이 그런 비난에 동조하는 태도도 문제인 것 같다. 그것은 언론의 공정성을 상실한 채, 선거의 효과를 노린 일종의 악마의 앵글이고 편집이 아닐까?

 

교수와 강사수업에 수업료 차등적용으로 대학의 기만적 구조 드러내자[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3

교수와 강사, 수업료 차등적용으로 대학의 기만적 구조 드러내자[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3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지난 호에 이어서

숭고한 이상으로 수업하고 시궁창같은 현실에 좌절하는 대학강사

셋째, 강사들은 자신들의 허위의식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강사들은 머리는 하늘의 별을 향해 있지만 몸은 시궁창 속에 빠져 있는, 이 시대의 가장 분열된 존재입니다. 학생들을 가르칠 때 그들의 정신은 한 없이 숭고합니다. 하지만 강의실을 벗어나는 순간 품위와 명예를 존중하던 그들은 한없는 굴욕감과 분노를 곱씹을 뿐입니다.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그들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냐, 나에게는 이상이 있어. 전임만 되면 이 모든 굴욕을 한꺼번에 벗어던질 수 있어”라고 자위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이 현실 속에서 좌절될 때 그들은 또 다시 허탈해하고 좌절하다가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 시궁창 같은 구조를 벗어나기 위해 교수들의 수족 같은 노예 역할을 하고, 또 때로는 교수나 재단이 채용을 이유로 비정상적인 금품을 요구하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도 합니다. 생계를 위해 지식 보따리를 들고 이 대학 저 대학을 떠돌고, 오전에는 이 도시 오후에는 저 도시로 미친 듯이 차를 몰고 다니며 강의를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열심히 뛰어 다니면서도 최소한의 경제적 삶을 보장받기가 힘들고, 그런 세월이 반복되다 보면 연구할 시간도 확보하지 못해 나중에는 학자로서 자긍심마저 잃게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이미 수많은 강사들이 그런 전철을 밟아가면서 상아탑을 쌓는 무덤들이 되었습니다. 사실이지 오늘날 강사 문제는 개인의 역량과 크게 상관없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대학교육의 40% 이상을 담당하고, 수많은 연구 단체, 학회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인력의 60-70%가 강사와 무늬만 교수인 강의 전담, 비 정년 트랙 등 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한국의 대학은 그들을 사회적 루저(Loser)로 취급하고 굴욕감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지적 호기심으로 연구에 몰두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을 천직으로 삼고 있는 이 땅의 강사들과 연구자들이 그런 취급을 받을 이유는 결코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이러한 수탈구조를 통해 자신들의 성장과 발전을 꾀하려는 대학들의 부도덕과 불공정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작 피해 당사자인 대학 강사들이 이런 현실이 드러나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하고 있습니다.

 

전국단위 토론대회 3연속 우승 – 수업의 질, 강사와 교수 간 크게 차이 없어

대학 안에서 가장 착취 받는 그들이 자신들의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비판하고 개혁하려 들지 않는 한 누구도 이 시궁창 같은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들은 보호받지 못한다는 말처럼,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과 허위의식을 깨뜨리려 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강사문제, 대학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적극적으로 ‘나는 강사’라고 밝힌다고 해서, 아니 그렇게까지 나서지 않더라도 학생들이 강사라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나요. 이미 학생들도 강의하는 선생이 강사인지 아닌지 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 뿐이지요. 그렇지만 분명한 차이는 있습니다. 학생들이 강사의 수업을 들을 때는 그에 해당하는 수업료를 차별 지급하라고 하는 것이고 그 혜택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이 운동이 현실화된다면 강사들은 이 왜곡된 대학 현실 속에서 학생들을 참으로 위하는 진정한 스승으로, 저임금과 신분차별 속에서도 학생들에 대한 열정과 책임을 다하는 진정한 스승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이지 강의실에서 만나는 선생과 학생의 관계는 저임금이나 신분 차별과는 상관없습니다. 오로지 배우려는 열의와 가르치려는 열정으로 만나는, 순수한 영혼과 영혼의 불꽃 튀는 만남이 있을 뿐입니다. 필자가 강의하는 대학의 토론 관련 수업에서는 수강생들이 전국 단위의 토론대회에서 내리 2년간 3연속 우승하는 진기록을 낳기도 했습니다. 강사냐 교수냐는 수업의 질과 크게 상관없습니다. 문제는 야바위꾼 같은 대학들이 이런 순수한 열정을 악용해서 현재의 착취구조를 영속화하려는 기도에 있고, 이 착취 구조 하에서 자신들이 대단한 역량을 가진 듯 당연히 이 착취의 수혜 물을 향유하고 동료 학자들의 비참한 현실을 방관하는 교수들에 책임이 있습니다.

 

대학교수, 동료 강사의 부당한 차별에 대해 분명한 책임 있어

그렇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 교수들은 대학에서 부당 차별을 받고 있는 동료 학자이자 강사들에 대해 분명한 책임이 있습니다. 한정된 파이에서 한 쪽이 다른 쪽에 비해 현저하게 많이 가져간다면 결과의 부정의를 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처럼 강사들의 비참하고 불공정한 현실이 대학의 왜곡된 착취구조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한다면, 이 구조의 수혜집단인 대학교수들도 큰 책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운동은 합리적인 시장 논리에 의해 교수들 역시 현재의 수탈 구조 하에서 그들 역시 수탈의 하수인 역할을 하고 있고, 그 수혜 집단임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물론 지금의 상황을 비판하고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양심적인 소수의 대학교수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개개인들의 양심과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대다수의 교수들은 그들이 누리는 향유와 특권이 그들 자신의 개인적 역량 때문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현재 대학들에서 자행되고 있는 부도덕과 불공정의 하수인이고 협력자들입니다. 그들 역시 동료 학자들의 비참한 상황을 유지·존속한 것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마치 식민지 체제의 안정과 유지에 성실하게 노력한 자들이 그 체제 하에서 고통 받던 대다수의 주민들의 고통에 책임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고액 연봉, 그들이 안식년을 가서 편안하게 즐기는 여유, 그들이 우아하게 연구실에서 차를 마시며 하는 작업의 이면에는 저임금에 시달리는 강사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점철된 고통이 있습니다. 때문에 교수들 역시 이런 현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작금의 강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대학 사회에서는 강사들을 동료 학자로 존중하지 않고 한낱 하수인 정도로 생각하는 철부지 부도덕한 교수들도 많습니다.

 

대학의 건물은 우후죽순 늘었지만 대학발전의 한 축인 강사를 위한 공간은 턱없이 부족

지금까지 강사들은 법적 지위를 개선하고 강사료 문제를 현실화시켜 달라고 부단히 요구해왔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오히려 강사들의 비참한 현실만을 부각시켜 그들을 루저로 만들고 시혜의 대상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강사 문제는 결코 시혜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 교육의 정상화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파행적이고 불공정한 현실이 온존함으로써 그 피해는 고스란히 대학생들에게 가고 있고, 대학의 미래, 사회의 미래, 나아가서는 국가의 미래에도 그대로 악영향을 줄 것입니다. “강의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 운동”은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대학의 기형적 구조의 진실을 밝히고 대학을 혁신하는 문제와도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 운동은 왜곡된 구조의 원인 제공자라고 할 대학들이 실제로 얼마나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행태를 일삼고 있는가를 깨닫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태를 합법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법 이전에 도덕과 정의의 문제입니다. 대학의 건물은 30년 전에 비해 엄청 늘어났지만, 강사들에게는 최소한의 연구와 휴식 공간마저 허용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대학의 고도성장의 당당한 주역이라고 할 강사들의 흔적은 대학 발전사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들은 다만 무한 희생과 무한 고통만 강요당하는 소모품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학자로서의 최소한의 품위와 존엄도, 최소한의 경제적 삶과 행복도 인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강사들에게는 방학 중에는 연구를 위해 필수 요소인 도서관 출입과 접속도 끊어버리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들을 헌신짝 취급하는 대학들이 과연 이 땅의 인재들의 미래 교육을 말할 수 있을까요? 대학의 교직원들도 이 기막힌 현실의 부역자이자 수혜자라는 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불공정하고 부도덕한 주체였던가를 깨닫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더는 이런 현실을 관행으로 덮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부정의와 부도덕이 온존해 있는 한 대학은 결코 자유를 외칠 수 없고, 진리와 양심의 상아탑을 자처할 수 없습니다. 대학사회는 이제 비판의 화살을 자신들의 심장으로 돌려야 할 것입니다. 대학 사회의 힘 있는 주체들은 분명하게 자신들의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현실을 깨닫고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지난 수 십 년 간 대학들은 이 땅의 경제 발전을 위해 귀중한 인재들을 배출해왔습니다. 또 사회 민주화를 위해 대학 사회의 수많은 주체들이 용감한 목소리를 내왔고 헌신적으로 희생을 감수해왔습니다. 이 땅의 강사들은 이 모든 공로와 희생에 절반 이상의 기여를 해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쌓아 올린 대학이 지금은 사회 어느 곳보다 극심한 차별을 당연시하고,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온갖 편법과 불법을 감행하는, 가장 부도덕하고 부정의한 집단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이런 부끄러운 고리를 끊기 위해 결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당장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겠지만, “강의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하자!”는 우리의 운동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첫 걸음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참으로 시작은 미미하겠지만, 대학과 사회의 도덕적 공분과 정의에 대한 열망이 들불처럼 타오를 것입니다. 강사 여러분들, 대학생 여러분들, 학부모 여러분들, 비정규직 노동자 여러분들,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애쓰는 이 땅의 모든 양심적 시민들, 우리들 스스로가 이 들불을 당기는 횃불을 높이 치켜듭시다!

 

하나, 강의 실라버스에 직급(강사냐 교수냐) 실명제를 도입하자!

 

하나, 직급에 따라 수업료를 차등 지불하자!

 

 

-끝-

교수와 강사의 연봉차이….부도덕한 자본주의 대학의 폭리[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2

교수와 강사의 연봉차이….부도덕한 자본주의 대학의 폭리[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2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지난 호에 이어서 게재합니다

▲ 장래가 없는 박사 과정…대한민국의 미래라면? ⓒ김영곤-프레시안사진

▲ 장래가 없는 박사 과정…대한민국의 미래라면? ⓒ김영곤-프레시안사진

대학들은 오랫동안 이런 부당행위들을 통해 엄청난 폭리를 취해 왔습니다. IMF 이후 우리 사회 곳곳이 생존의 고통을 겪고 있을 때도 한국의 대학들, 특히 메이저 대학들의 양적인 규모는 비약적으로 성장해왔습니다. 비싼 등록금을 내고 들어온 학생들은 4년 내내 공사 판 같은 대학 캠퍼스에서 소음에 시달리며 학습권을 침해받고 있습니다. 이는 어떤 특정 대학에 국한된 현상이 아닙니다. 대학이 이런 양적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비싼 등록금으로 인한 학부모들의 고통과 저렴한 강사료로 무자비하게 착취당하는 강사들, 그리고 용역 회사로 넘겨진 학내 비정규 저임금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학들의 간판급 연구소들도 실정을 알고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대학의 모든 연구소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앵벌이 시스템에 가깝습니다. 연구원들은 거의 대부분이 비정규직 강사들로 채워져 있고, 그들이 국가 기관이나 기타 등등에서 연구비 지원받는 프로젝트를 따와야만 돌아가는 형태입니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연구원들은 앵벌이들처럼 다시 밖으로 나가서 연구 프로젝트를 따와야 합니다. 대학은 그 수수료를 펀딩 받아 운영하고, 그 연구 업적을 대학의 이름으로 자랑합니다. 대학의 대부분의 연구소들에 대학 자체적으로 지급하는 유급 연구원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바로 이런 앵벌이 시스템 때문이라는 것은 그렇게 놀랄만한 것도 아니지요. 이렇게 강사들의 절대적인 도움을 받고 있으면서도 대학들은 강사들을 소모품처럼 활용하는 데만 급급하다가 아무런 통보 없이도 해고해버리고 대체품을 찾습니다. 강사들은 수 십 년 동안 한국 대학들의 고도성장의 가장 큰 역군을 담당해왔으면서도 그들의 공적이나 흔적은 대학의 발전사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성장의 역사의 뒤안길에서 오직 사회적 루저(Loser)로만 기억되고 있을 뿐입니다. 시장을 감시 감독해야할 공정거래 위원회 같은 교육부는 오히려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하면서 대학의 그런 관행들을 오랫동안 방치하고 두둔해왔습니다. 만약 소비자들이 그 내막을 안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당연히 분노하고 그런 부당거래의 관행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학은 오랫동안 학생들의 순수한 구매 욕구를 이용해왔고, 연구와 강의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하는, 너무나 멍청할 정도로 순수한 딸깍발이 서생(書生)들의 처지를 악용해왔습니다. 멍청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전전 긍긍할 뿐이었습니다. 몇몇 용감한 강사들이 부당한 현실을 고발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몸짓은 메아리 없는 광야의 외침으로 그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동안 이처럼 불공정하고 부당한 처사에 대해 곳곳에서 문제제기도 하고 항의도 해봤지만 판매업자들이나 관리 감독청들은 외면하고 묵살해 왔습니다. 너무 큰 폭리가 그들의 도덕 감정을 막고 있기 때문에 결코 해결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제안을 해보고 싶습니다. 소비자가 알고 결정하도록 하자는 것이지요. 시장이 자율적으로 적정 가격을 찾아가도록 하자는 것, 불공정한 대학에서 분배 정의를 찾을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것이죠. 모두가 짐작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백일하에 드러내자는 것입니다. 모든 상품은 원산지 증명이라는 것이 따라가고, 하다못해 음식점에서 먹는 고기 한 점, 반찬 한 가지에도 호주산인지 칠레 산인지 아니면 중국산인지 밝혀야 됩니다. 원산지 증명은 소비자들에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한 때 광우병 우려로 미국 산 소고기와 관련해 촛불 시위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적이 있었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소비자들의 건강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비싼 등록금을 지불하는 대학의 강의에서도 강사들 강의인지 교수들 강의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아주 저렴하게 고용한 강사들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당연히 저렴하게 수업료를 지불하고, 교수들의 강의에는 고 비용의 대가에 대해 당연히 높은 수준의 수업권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제는 더 이상 대학의 기만적이고 야비한 술책이 불공정하고 부도덕하게 실행될 수 있도록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예산 타령을 하고 경제 논리를 앞세우는 대학 당국과 교육부의 요구대로 투명하게 시장의 논리에 맡기는 것입니다. 이 시장에서 부당 거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착취와 폭리가 어떻게 발생하고, 그 모순이 누구에게 전가되는지를 아주 투명하게 시장 논리대로 밝혀서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실라버스 직급 공개는 원산지 증명과 원가 공개를 요구하고, 차등 구매 비용에 따른 차등 지불을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당연한 권리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 요구 운동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고 또 어떤 파장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첫째는 강의 실라버스에 직급을 공개하고 수강료를 차등화하자고 했을 때 그 혜택은 무엇보다 소비자들인 학생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앞서 예로 든 중국산 덤핑 물건과 달리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강사들의 강의 상품은 상품 자체의 질(質) 면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질(質) 좋은 똑 같은 상품이 1/10 가격도 안 되게 팔릴 수밖에 없는 이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현실이 기가 막힐 뿐입니다.)

교육 상품의 소비자라고 할 수 있는 대학생들이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구매한 상품이 떨이 덤핑으로 구입한 상품이고, 도덕적으로도 불공정한 상품이라는 현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요? 대학들은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할지 몰라도 말하자면, 법 이전에 상 도덕적으로 불공정하고 부당하다는 비난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커피나 양탄자의 생산과정에서 아동 노동력이 심하게 착취되는 현실을 알 때, 혹은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걸치는 값비싼 모피가 동물의 고통과 희생이라는 것을 알 때 소비자들은 분노하고 불매 운동을 펼치기도 합니다. 그와 비슷한 행태가 대학 안에서, 자신들을 가르치는 선생들에게 가해지는 현실에 대해 대학생들도, 그리고 비싼 등록금으로 등골이 휘는 학부모들도 똑 같이 분노하고 또 개선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의 대학 구조상 강사들이 수탈당하는 고통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이전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이 기형적인 착취 구조 하에서 강사들 및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똑 같이 피해를 당하고 있는 당사자의 한 편입니다. 현재 자녀 1인을 4년제 대학 졸업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1억 이상이 소요됩니다. OECD 국가들 중 네 번째로 높은 한국 대학의 등록금은 가계 부채의 가장 큰 이유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싼 등록금은 앞서 이야기했듯 대단히 불공정하게 책정된 것입니다. 가계부채가 국가 경제를 위협하는 현실에서도 적립금과 부동산을 산처럼 쌓아 놓고 있는 대학들이 정작 학생들의 비싼 등록금과 강사들의 저임금을 외면하는 이 기형적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실라버스 직급 공개와 수업료 차등 지불 운동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반값 등록금 운동이 결코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정당하고도 합리적인 요구임을 드러내줄 것입니다.

둘째, 이 운동은 무엇보다 대학들의 부도덕한 정책에 큰 타격을 입힐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대학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강사들에게 법적 교원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조차 거부합니다. 아무런 법적 자격도 없는 사람들한테 어떻게 학생들을 가르치게 할 수 있을까요? 강사들의 강의 역량이나 학문적 능력이 미덥지 못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오늘 날 대부분의 대학들은 넘치는 박사 인력으로 인해 박사학위 소지자를 강사 자격의 기본 요건으로 삼고 있습니다. 게다가 강사 문제가 개인의 학문적 역량과 별 상관없이 하나의 구조적인 문제가 되고 있어 이제는 오랜 경력 강사가 강사로 정년퇴임 한다는 이야기가 낯설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법적 자격 부여를 거부하는 것은 오로지 1/10도 안 되는 저렴한 비용으로 고용하기 위해서, 강의 외에 어떤 비용도 지불하지 않기 위해서, 아무 때나 저들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해고를 쉽게 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맹자(孟子)는 제 아무리 좋은 명분과 허울을 두르고 있는 자들이라도 인(仁)을 해치는 자는 그저 도적에 불과하고, 의(義)를 해치는 자는 한낱 강도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대학들은 대학 강사들을 싸구려 소모품 정도로 취급하고 착취함으로써 인(仁)을 해치는 도적이 되었고, 강사와 교수 간에 불평등과 신분차별을 구조화함으로써 의(義)를 해친 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만일 한국의 대학들이 이런 부도덕과 불공정을 개선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제 그들을 대학 도적이고 대학 강도로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일반인들의 상식으로 보아도 어떻게 이런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일이 진리와 자유를 추구한다는 상아탑 안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도무지 이해가 안 갈 것입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국가적 재앙의 근본 원인에는 자본의 논리에 입각한 무한경쟁시스템에 있었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5

‘국가적 재앙의 근본 원인에는 자본의 논리에 입각한 무한경쟁시스템에 있었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5

김선이(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정독도서관 사서)

 

얼마 전, 큰 충격을 준 세월호 사고(2014.4.16)는 우리사회의 총체적 난국을 보여준 국가 시스템의 구조적인 부조리가 그대로 드러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희생자 가족뿐만 아니라 결코 잊지 못할 국가적 재앙으로 국민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세월호 사고는 분명히 인재였다.

사고의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의 논리에 입각한 경영체계’와 자본가와 국가가 결탁한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사고 수습과정에서 보인 정부의 태도를 보면 자본주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대대적인 시민단체가 연합하여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를 꾸리고 국민들은 슬픔과 분노를 함께하며 ‘노란 리본달기 ’등으로 자발적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사고원인에 대한 근본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해양수산부를 폐지하는 등 저급한 대중요법을 처방하고 있다.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최형락)

 

이러한 상황에서 6.4 전국동시 지방선거의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세월호 사태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정치인은 없을 것이다. 정치인들은 세월호 사고를 선거 공세나 정쟁의 소재로 삼아 정치적 이득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반성과 성찰하는 자세로 이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한다. 그럼에도 이번 세월호 사고는 국가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국민들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 진도 앞바다에서의 세월호 침몰 사고를 잊지 못할 것이다.

안산 단원고 2학년 학생들의 명복을 빈다. ‘미처 피워보지도 못한 꽃망울들아, 너무 미안하다.’

 

 

교수와 강사의 연봉차이….최악의 불공정 거래[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1

교수와 강사의 연봉차이…..최악의 불공정거래[세월호의 또다른 이름-대학]1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김영곤 선생님, 안녕하세요.

불철주야, 풍찬 노숙하면서 이 땅의 대학 강사들을 위해, 대학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헌신하는 선생님 내외분에게 한없는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오늘 날 한국의 대학 강사들은 유례없이 수탈당하는 집단이라 생각됩니다. 21세기 현대판 지식 노예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고급의 노동자이면서도 가장 저급한 대우를 받고 있고, 부당 처사에 대해 아무런 항변도 못하는 무력한 집단이지요. 지난 수 십 년 간 대학들이 양적으로 질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전임 교수들 못지않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공과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고, 대학 교원이라는 최소한의 법적 지위도 부여받지 못한 유령 같은 존재입니다.

한국의 대학은 외형적 성장만 일삼는 거대한 괴물이 되었습니다. 재단의 소수 인물이 이끄는 그 괴물은 대학교수와 교직원들을 하수인으로 부리고 있지요. 그들은 하수인이면서도 기득권자라는 이율배반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지요. 반면 대학 강사와 비정규직 노동자, 학생들은 이 거대 괴물의 피 수탈 집단이고요. 학생들은 이제 4년 동안 교육서비스를 구입할 수 있는 뜨내기 고객들로 취급될 뿐입니다. 대학 강사와 청소직등 비정규직 노동자는 거대 기계를 돌리는 부품이자 소모품 취급도 못 받고요. 대학 강사들은 실질적으로 대학 교육의 40%이상을 담당하면서도 법적으로는 무자격자입니다. 똑같이 학위를 받고 똑같이 연구를 하고 똑같이 논문을 쓰면서도 시급 알바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면서 부당한 대우에 대해 전혀 항의도 못하고 경력 인정도 거의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제가 작금의 부당한 강사제도의 개선을 위해 제안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이 제안은 강사의 현실적 지위 뿐 아니라 대학생들의 가장 큰 관심사인 반값 등록금 운동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름 아니라 강의 실라버스에 직급 실명제를 도입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교수의 강의를 들을 때와 강사의 강의를 들을 때 등록금을 차등 지불하자는 겁니다. 소비자 입장에서 값싼 물건과 값비싼 물건에 대해 똑 같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시장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안의 이면에 놓인 논리는 현재와 같은 대학의 기만적이고 부도덕한 수탈 정책을 폭로함으로써 교수와 강사 간의 형평을 찾자는 것이고, 대학교육에 기여한 강사들의 정당한 노고를 인정받자는 것입니다. 게다가 대학생들도 자신들의 비싼 등록금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아야 하고, 정당한 수업권의 보장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학 강사들의 열악한 상황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다음 세대의 학문을 담당해야할 젊은 연구자들의 학문적 전망은 더욱 더 불투명하고 불안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은 현재의 강사 제도와 강사료가 합법적이라고 강변하면서 후안무치를 일삼고 있습니다.하지만 이것은 법 이전에 정의와 형평의 문제이고 도덕적 정당성의 문제입니다.

현재 대학교수 1명을 채용할 때 들어가는 비용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적어도 강사10명 이상의 비용이 들어갈 것입니다. 예를 들어 7천만 원의 연봉을 받는 대학 교수와 시간 당 5만원의 강사가 주당 9시간을 강의하는 경우를 단순 비교해보지요. 강사의 경우는 45만*4=180만원이고, 1년을 똑 같이 강의한다고 할 경우 강사들은 한 학기 4개월이므로 1년이면 8개월이고, 따라서 1,440만원이 됩니다. 매학기 강의 확보의 불안에 시달리는 강사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정도의 강사는 거의 A급이라 해도 과언이 아님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 교수의 경우 7천만 원 연봉 외에도 연구실 운영비용, 6년 강의 후 7년째 주어지는 안식년 비용, 연금과 퇴직금 정립,방학 중 연수비용, 4대 보험 그리고 입시철마다 떨어지는 특별 수당 등까지 합친다면 거의 1억4천만 원 정도로 계산해도 많지 않다고 할 수 있죠. 그렇다면 강사1인을 고용할 때 들어가는 비용에 비해 거의 10배 수준이 될 것입니다. 며칠 전 트위터에 프랑스에서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고 명문 이화여대에서 대단위 강좌를 운영한 모 강사의 11년 간 총 수령액이 7천만이었다고 하던데, 이는 해당 대학 교수 1년 치 연봉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강사 10명이 교수 한 명 수준도 안 된다는 계산이 틀리지 않죠. 명문 사립대학이 이 정도이니 다른 대학은 이보다 못하면 못하지 결코 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10배 이상의 수입 차이가 나는 대학교수와 강사들이 대학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함께 공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의 격차는 경제적인 것뿐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경제적인 차이, 봉건시대도 아닌 21세기의 대학에서의 신분적 차별이 더 심각할 수가 있습니다.

예, 자본주의 사회에서 연봉 차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회사의 평사원과 CEO의 연봉이 같을 수 없겠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봉 격차가 커서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을 적용하자는 비정규직의 노동자들의 한 맺힌 구호가 나올까요? 그런데 이런 격차도 사회에서는 평균적으로 70%이고, 더 크게 잡아도 50%수준을 넘지 못하죠. 만약 특별한 사유가 없이 그 이상이 된다면 그것은 착취이고 수탈에 가깝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성의 전당이라고 하는 대학 사회에서는 똑 같은 학생들을 데리고 한 학기, 1년을 강의하면서, 그리고 똑 같은 강의 평가 기준을 적용하면서도 무려 10배 이상의 임금 차별과 신분 차별을 받고 있습니다. 대학교수들과 강사들의 임금 산정 방식이 다르고,또 교수들은 과 행정, 학교 행정 등의 일도 담당한다고 강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점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런 행정과 관련된 일이 현재의 임금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요? 교수들의 행정과 관련된 일은 보직과 출세에 도움 되는 것이고, 또 연봉 외 수당도 받는 일입니다. 그것이 강사들의 현저한 부당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사실 이 정도 임금 차별은 사회에서는 시급 알바 생 하고 임원들의 차이에서나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일하는 방식이나 내용, 그리고 책임 정도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차이를 문제 삼지 않지요. 그런데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은 전혀 그런 차이가 없습니다. 강의실에 들어오는 학생도 동일 대학 학생이고, 강의 내용의 수준도 강사라고 해서 봐주는 것 없습니다. 오히려 강사들은 교양과 관련한 대단위 강좌를 운영하는 경우가 많아 학생들 관리도 힘들고 성적 처리나 리포트 피드백 등을 감안한다면 소규모 전공 강의를 운영하는 교수들의 노고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어떤 이들은 전공과 교양 수업 간에 강의 준비와 운영상의 난이도가 크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학 강의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저학년 교양 강의이고 그 다음이 전공 강의이며, 끝으로 대학원생들 데리고 하는 세미나 강의가 가장 쉬운 강의라는 사실은 대학 사회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죠. 그런데도 강의 평가 기준을 똑 같이 적용하고, 교수들과 달리 평가가 나쁜 강사들은 바로 해고해버립니다. 학생들은 자신들을 가르치는 사람을 강사로 생각하고 강의실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사실상 학생들에게는 강사나 교수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고, 다만 강의 내용이 좋고 들을만한가 또 들어서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는 강의인가만이 중요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강의와 관련해서는 임금 수준에 관계없이 똑 같이 강의하고, 대학도 유독 강의와 관련해서는 교수나 강사를 똑 같이 취급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학생들하고 관련된 강의 및 평가에서는 교수와 강사 간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임금과 신분상에서, 경제적으로나 법적으로 큰 차이와 차별이 존재할까요??이렇게 한 치의 차이가 없음에도 교수와 강사 간의 연봉 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동일 노동에 대해 어떻게 이런 엄청난 차별,?부당하고 불공정한 차별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학생들 입장에서도 비싼 등록금을 내고 구입한 교육 상품(?)이 이렇게 불공정하게 가격이 책정되었다는 사실을 안다고 하면 놀랍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할 것입니다. 학생들은 어렵사리 구매의 자격을 얻어 고급의 매장에서 고급의 브랜드가 붙은 상품을 비싸게 구입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구매를 하는 과정은 너무 경쟁이 심해 눈물겹기도 합니다. 해서 구매가 확인되는 순간 학생들은 자신들의 현명한 결정에 대해 감격해하기 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매한 상품이 하나는 정상적인 통로를 통해 정상 가격으로 책정된 상품이지만 다른 하나는 전혀 비상식적인 방식으로(법적인 교원 자격도 부여하지 않고 달랑 4개월짜리 계약서 하나를 가지고), 전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매집한 상품에다가 자신들의 브랜드를 붙여 판매한 상품인 것입니다. 좀 거친 비유를 든다면 부도 직전의 회사나 값싼 노동력으로 만든 중국산 덤핑 물건을 뒷골목 시장에서 구입 해다가 신세계나 롯데 등의 고급 백화점 매장에서 고급 브랜드를 붙여 판매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판매업자인 대학들은 무려 10배 이상의 폭리를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도처에 널려 있는 이처럼 싸구려 덤핑 물건들을 값싸게 사들여 자신들의 매장의 거의 40%이상을, 더 심한 곳은 70%까지 진열해 놓고 있습니다. (예, 거친 비유이겠지만 오늘날 한국의 대학 강사들의 질(質)은 전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가격 면에서는 중국산 싸구려 수입품이나 부도 회사의 덤핑 물건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강사 문제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자 교육부는 점차적으로 강사 비율을 줄이고 교수 비중을 늘리겠다고 합니다. 교원 비율에 따라 대학 평가와 지원을 달리하겠다고 압박도 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편법의 달인들인 한국의 대학들은 비 정년 트랙, 강의 전담 전임 계약직 교원들을 대거 뽑아 들여 이전에 강사가 담당하는 강의를 비슷하거나 낮은 비용으로 훨씬 많은 강의를 떠넘기고 있습니다. 명색이 대학의 전임 교수인데 월150만원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서울의 종합 대학들에서도 비일비재합니다. 어떤 경우는 2학점짜리 80명 단위의 수업을 8개씩이나 강의하면서도[한 학기에 80*8=640명] 연봉이 3천이 되지 않고, 그것도 2년 지나면 재계약을 빌미로 용도 폐기시킵니다. 그러니까 대학의 입장에서는 시간 강사들에 들어가는 정도의 비용으로 무늬만 전임들을 고용할 수 있으니까 교육부 평가도 높이고 지원책도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손 안대고 코푸는 야바위꾼들의 사기행위와 같은 이런 편법을 이용해서 대학들은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행태를 진리의 상아탑 속에서 부끄럼 없이 일삼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교육부는 전임 비율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달리 한국의 대학에는 초빙, 외래, 대우, 강의 전담, 비정년 트랙 등 당사자들도 헷갈리는 직급이 많지만 본질은 하나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시간 강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이런 원천적 착취와 수탈 구조 속에서 오늘 날 한국 대학에서 강사들, 비 정년 트랙 전임들,계약직 강의 전담들의 강의 비중은 40%를 훨씬 상회합니다.) 이런 실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이 취하는 폭리를 그들의 탁월한 장사 솜씨 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대학의 탁월한 솜씨가 아니라 기만이고 사취이고 협잡일 뿐입니다.

아주 예외적인 사정이 아니라면 모든 시장가격에는 상품과 관련한 어느 정도의 공정 가격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다른 진열대에 있는 똑 같은 상품들에 비해 무려 1/10일 수준으로 구입해서 똑 같이 판매한다면 이것은 상도덕 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사기이자 기만입니다. 그것도 고급 백화점들과 같은 대학들이 말입니다. 만일 신세계나 롯데 백화점에서 이런 상행위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날로 문을 닫아야 할 만큼 여론의 질타와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얼마 전 이마트에서 직원들의 노동행위를 규제하기 위해 불법 감시를 하다가 언론에 노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마트에 대한 사회적 비난으로 인해 최고 책임자까지 앞장서서 사죄하는 상황이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이런 행위들은 법 이전에 도덕적 공분의 대상이며, 우리 사회가 그런 불공정과 부도덕을 묵인할 만큼 불감증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지성과 진리의 상아탑이라고 하는 대학에서는 이런 야바위꾼들의 협잡과 같은 행위들이 지금까지도 낯 뜨겁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대학들과 그 부역자들이 과연 사회를 향해 비판과 양심의 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 다음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