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의 시대 [시대와 철학]

전호근(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장)

 

불의의 시대라 계절도 더딘가 싶더니 어느덧 겨울이 문턱이다. 예전 이맘때면 나뭇잎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가난한 이들의 창에는 서리가 하얗게 서려왔다. 그러나 추운 계절을 탓할 일은 아니었다. 겨울이 깊으면 봄을 기약하는 낭만이 있었고 가난한 삶에도 따뜻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 어느 구석에도 겨울의 낭만은커녕 봄이 올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가난 때문이 아니다. 바로 푸른 기와집에서 귀신과 작당하는 너희 때문이다.

 

너희는 지금이 옛날보다 낫다하나 나는 믿지 않는다.

옛날의 간신은 군주를 속였는데 지금의 간신은 백성을 속인다.

옛날의 탐관오리는 백성을 마소로 여겼는데, 지금의 탐관오리는 백성을 개돼지로 여긴다.

옛날의 무당은 뒷문으로 드나들며 주문을 외웠는데 지금의 무당은 정문으로 드나들며 연설문을 고친다.

옛날의 어두운 군주는 충신을 죽였는데 지금의 어두운 군주는 아이들과 농민을 죽인다.

 

이러니 지금의 간신이 옛날의 간신만 못하고 지금의 탐관오리가 옛날의 탐관오리만 못하고 지금의 무당이 옛날의 무당만 못하고 지금의 어두운 군주가 옛날의 어두운 군주만 못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 지금이 옛날보다 낫다는 너희의 말은 거짓이 아니더냐. 내말이 틀렸느냐?

 

자고로 나라가 망하려면 귀신의 말을 듣는다했다. 그래, 너희의 귀에 귀신이 소곤거리는 말은 들리고, 자식과 부모를 잃고 찢겨진 가슴, 피눈물로 울부짖는 민초의 모습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단 말이냐?

 

두말 할 것 없다. 당장 너희 모두 그 자리에서 내려와라. 그 자리는 백성의 아픔을 돌보기 위해 있는 자리다. 그러니 너희 같이 무능하고 거짓을 일삼으며 귀신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있을 곳이 아니다.

 

이제 이 땅의 백성은 드러내놓고 너희를 죽이려 할 것이고 너희가 믿는 귀신조차 어둠 속에서 너희를 죽이고자 모의할 것이다. 신라 때만 최치원이 있는 줄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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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절망을 환상의 횡단으로 [시대와철학]

김성우(한국철학사상연구회 ⓔ 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의 10년간을 상실의 시대로 규정하고 집권한 뉴라이트 계열의 MB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10년간이야말로 진정한 상실의 시대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뉴라이트는 기존의 보수주의보다 신자유주의적인 시장 만능주의를 지향하며 대기업과 금융자본에 유리한 정책을 추구하는 새로운 보수주의이다. 뉴라이트의 이러한 면모는 MB의 “기업 하기 좋은 나라”, 박근혜 대통령의 신탁적 표현인 “규제는 암 덩어리”라는 말로 대변된다.

 

MB 정부는 뉴타운 열풍으로 대표되는 부동산 투기 붐이 만든 환상적 매트릭스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매트릭스는 초거대 인공지능이 광대한 컴퓨터 네트워크로 만든 가상 세계에 대한 명칭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매트릭스는 인간의 생체 에너지를 전원으로 이용하기 위해 인간을 배터리로 만들었다. 결국, 이러한 설정은 매트릭스가 인간의 욕망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온 국민의 부동산 욕망이 MB 정부를 지탱하는 에너지였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환상을 연장하고 싶은 노장년층과 보수층의 욕망으로 지탱되고 있는 매트릭스였던 것이다. 물론 인간 박근혜는 생물학적인 존재자로서도 아니며 검증된 사회적인 인물로서도 아닌, 영화 <향수>에 나오는 절대 향수와 같은 숭고한 대상으로 여겨진다.

 

그 영화에서 절대 향수는 욕망의 원인이 되는 대상이다. 다시 말해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그것이다. 즉, 스타 철학자 지젝이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의 말을 빌려 표현한 ‘오브제 프티 아’(작은 대상 a)인 것이다. 지젝 식으로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박정희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대통령 후보로서의 박근혜는 도올 선생이 그렇게나 외친 스펙을 통한 지도자로서의 능력 검증을 거칠 필요가 없으며 생물학적인 여성이라는 한계와도 무관한 환상적인 매트릭스가 된다. 물론 이러한 매트릭스를 만들고 확장하는 데에 새누리당과 아울러 보수 언론과 보수 인사들이 지대하게 기여했다. 다시 말해 이들이 공모하여 자신들의 권력 연장을 위해 MB 정부의 실정에 실망한 국민에게 새로운 환상의 매트릭스를 제공한 것이다.

 

이러한 환상의 매트릭스는 처음부터 대단히 깨지기 쉬운 연약한 것이어서 이를 방어할 방패막이 필요했다. 그래서 종북과 안보는 현 정권의 마법적인 부적이 되었다. 이 부적을 내세워 국가의 공익과 국민의 안전은 뒤로 한 채, 권력의 사유화가 극도로 진행되어 국가 시스템이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로 인해 국가 시스템이 심각하게 마비되고 현 정부가 극도로 무능한지가 드러났다. 이로 인해 국민은 국가의 부재를 느끼며 ‘각자도생’이라는 웃기도록 서글픈 신조어가 탄생했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라서 옥시 같은 회사의 가습기 살균제로 소중한 아이들이 죽어가도, 폭스바겐 같은 회사의 연비조작으로 환경이 오염되더라도, 대기업의 이윤을 위해 차별과 착취의 비정규직이 늘어가더라도 정부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구나 세월호 사건 때나 농민 백남기 님의 죽음 앞에서 실제로 이러한 일이 벌어지게 한, 궁극적인 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이나 실무 책임자들도 유가족과 국민에게 슬픔과 책임감을 표하기는커녕, 책임 회피를 위해 비정한 태도로 사건을 조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온 국민이 알아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드디어 최순실과 관련된 박근혜 대통령 게이트가 터지면서 온 국민이 설마설마하면서도 마주하고 싶지 않던 현 대통령의 트라우마적인 리얼한 민낯에 직면하고 말았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매트릭스에서 분리되어 인간이 배터리가 되어 매트릭스에 봉사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한 것처럼 말이다.

 

지젝은 이를 ‘리얼(실재)이라는 사막’이라고 부른다. 그 뜻은 환상에서 깨어날 때 만나게 되는 진실이 트라우마를 일으킬 정도로 무의미한 폭력적인 야만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정신분석학에서 치유란 환상에서 벗어나 불편한 진실인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을 용기 있게  대면하는 것이다. 지젝은 여기서 더 나아가 환상의 횡단과 아울러 프레임의 재구성이나 변형을 추구한다. 환상은 주체의 욕망을 유지하는 프레임이기 때문이다.

 

지젝에 의하면 현실이란 리얼한 것이 아니다. 현실이란 환상의 프레임을 바탕으로 인간에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이 그동안 숭고한 대상으로 박근혜 대통령을 바라본 것은 우리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환상을 제거해버리면 현실까지 상실되고 만다. 아마도 지금 우리 국민이 느끼는 ‘상실의 시대’는 이러한 상태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환상은 제거가 되지 않는다. 횡단이 요구된다. 환상을 횡단하는 것은 헤겔 식으로 표현하면 부정적인 것을 감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환상의 프레임에서 벗어나려면 욕망의 원인대상을 먼저 상실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이는 ‘오브제 프티 아’(objet petit a)라는 숭고한 대상을 포기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포기가 부정의 과정이다.

 

본래 상실이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을 의미하므로 슬픈 사건이다. 상실의 시대란 국가 시스템이 마비되어 국가가 더는 국민의 안전망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통치 권력의 무능이 드러나고 통치자의 권위가 사라짐과 아울러 국민이 이러한 상황에 대해 한숨짓고 절망하는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상실이 부정적인 것이라고 해서 절망한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의 배신과 몰락을 경험한 구 유고슬라비아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토대로 상실을 순전히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이러한 상실의 부정성을 견디며 박정희 시대라는 환상을 횡단하고 환상의 기존 프레임을 다시 변혁하고 재구성해야 함을 지적한다.

 

숭고한 대상으로서의 박근혜 대통령과 그 리얼한 사막인 ‘헬조선’(지옥 같은 한국)과 관련된 기존 제도와 국가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누가 권력을 잡을 것인가라는 프레임에 지배받지 않고 앞으로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통치의 방향과 이념을 정립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박근혜 대통령과 박정희 시대라는 숭고한 대상에 대한 포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마침 그 숭고한 대상의 민낯이 드러난 이상, 이에 공모한 공모자들에 대한 준엄한 사법적 처벌과 역사적 심판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대적인 과제를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기존의 숭고한 매트릭스의 배터리인 우리의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서구화의 욕망, 상업화의 욕망, 부동산 투기의 욕망, 승자독식의 욕망, 차별적 구별 짓기의 욕망 등을 포기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상실의 시대가 꼭 나쁘지는 않다. 박근혜 정부는 우리의 뉴라이트적인 욕망이 공모한 환상의 매트릭스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상실된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이랴! 이제 문제는 뉴라이트라는 욕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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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저 너머에 [피켓2030]

이진섭(자유기고가)

 

“Mulder, Where are you?” (멀더, 어디에요?)

“Scully, The Truth is Out There.” (스컬리, 진실은 저 너머에 있어요.)

 

30대 이상은 위 대사를 모를 리 없다. 1993년부터 2002년까지 미국에서 방영된 TV 드라마 <The X-Files>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로, 우리나라에서는 KBS가 수입하여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안방에 날라다 주었다. <The X-Files>는 FBI 수사관인 멀더(데이비드 듀코브니)와 스컬리(질리언 앤더슨)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미해결 사건 등을 추적하는 X-File이라는 부서에서 겪는 일을 줄거리로 하는 TV 시리즈물로, 전 세계적인 마니아층을 형성하기도 했다. 매회 오프닝에 스산한 배경음악과 함께 화면에 나타나는 문구이자, 남자 주인공 멀더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를 마주할 때마다 되뇐 말이 바로 ‘The Truth is Out There(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다.

2016년 8월 26일, 검찰 출두를 앞둔 롯데 그룹 부회장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진실을 파헤치려는 수사 기관과 이를 감추고 싶은 또는 감추어야만 하는 자 간의 대결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일단락된 모습이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했던가. 그의 죽음으로 진실도 함께 묻혔다. 언론에서는 스스로 몸을 던진 망인을 두고 ‘충신(忠臣)이다. 의리 있다’는 식으로 치켜세우는 분위기다. 이런 걸 보면 ‘우리 사회, 전체를 위해 희생한 고인에 대한 마지막 예의 하나만큼은 정말 깍듯하다’는 생각을 한다. 진실을 묻어두고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행동을 미덕 또는 충성으로 여기는 사회, 또 그런 사람에게 뒤늦게 최대한 예우를 해주는 사회, 이것이 그 옛날 우리가 배운 동방예의지국의 실체인가 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진실 위에 서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진실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누군가의 목숨까지 제물로 바쳐가며 지켜져야 하는 걸까. 이런 식으로 계속 지켜질 수는 있는 것일까. 또 누구를 위한 진실일까 등등. 위와 같은 언론의 태도로 보아 부회장이 당당하게 검찰에 출두해서 인정에 휘둘리지 않고 거짓말 못하는 기계처럼 양심선언이라도 했다면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과거 실제 사례가 있으니 굳이 위 사건을 가지고 가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2005년 노회찬 의원이 들추어낸 이른바 ‘삼성 X파일’과 2007년 김용철 변호사(당시 삼성 법무팀장)의 삼성 비자금 폭로 사건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안기부(현 국정원) 도청 녹취록 ‘X파일’에 등장하는 ‘삼성 떡값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한 죄로 기소된 노회찬 의원은 2013년 결국 의원직을 상실했다. 내부고발자 김용철 변호사는 이후 빵집(뚜레쥬르)을 운영하기도 했다. 뇌물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로 둔갑했으며 이들의 비위 행위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만 집단 괴롭힘을 당한 것이다. 그래, 이것이 바로 동방예의지국에서 진실을 끄집어내려는 예의 없는 자들이 감당해야 할 여정이다. 과연 어떤 진실이기에 그들은 마주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추락을 각오해야 한다면 그래서 필사적으로 진실을 숨겨야 한다면 그런 진실 위에 쌓아온 성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신들이 만들어 온 ‘진실’을 스스로 부정해야만 지금 자신의 존재가 성립할 수 있다면 이런 모순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는 것일까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저 너머에 있는 바다에서 올라오지 않는 이유도 동방예의지국의 고유한 분위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진실을 파헤치거나 누설하려는 자들이 예의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현상은 세월호 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영문도 모른 채 자식을 잃어도 참는 게 미덕이고 입 다물고 가만있는 게 예의다. 덕성도 예의도 없으니 ‘진실한’ 언론으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만약 지금이라도 정부에서 주는 보상금을 받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언론에서는 유족들을 유공자 수준으로 끌어올려 일제히 찬사를 보낼 것임이 분명하다. 이번 롯데 사태에서 보았듯이 진실을 저 너머에 고이 묻어준 대가로, 통 큰 결단으로 사회를 살렸다면서. 2010년 천안함 사건의 진실도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한다. 2013년 1월에 제기된 18대 대선 부정 개표 소송을 떠안은 대법원도 진실 앞에서 머뭇거린다. 2014년 소위 ‘성완종 리스트’ 의혹도 흐지부지되어 몸통들은 처벌받지 않고 덮였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그 어떤 진실도 제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얼마나 대단한 진실이기에.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건국절 논란도 이러한 물음을 피해갈 수 없다. 대한민국의 시작을 1948년으로 정하겠다는 건 무엇을 위함일까. 또 누구를 위함일까. 1948년 이전 한반도에는 얼마나 대단한 진실이 뿌려졌기에 이를 모조리 거둬들이려는 것일까. 1948년을 나라의 기점으로 주장하며 진실을 수거하려는 자들은 일각에서 일제강점기에 항일과 친일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 조짐을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차단하려 한다. 1948년 이전 이 땅에 자신과 조상들의 행적에 관해 숨기고 싶은 ‘진실’이 있기 때문에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는 걸 두 팔 걷어붙이고 막으려는 것이다. 롯데와 삼성이 보여주듯, 세월호와 천안함에서 보듯. 여기에 딴죽을 걸면 예의가 없다는 이유로 충성심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매매를 맞고, 진실을 수호한 자는 영광을 얻는다. 여기서 진실이란, 양의 탈을 쓰고 있는 그들이 사실은 늑대였다는 점이다. 가해자이면서 가증스럽게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그들의 진실이란 그런 것. 전 국민이 알면 경천동지할, 그래서 지우고 싶은 이 ‘진실’ 위에 시멘트 반죽을 붓고 한 층이라도 더 올리려는 그들의 시도는 결국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것일까.

진실 앞에서 침묵을 강요받는 모습은 저 멀리 재벌권력이나 정치권력에서 보듯 대규모의 조직적 차원으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장삼이사인 우리의 평범한 일상도 다를 바 없다. 대학 강사가 학교 측으로부터 받은 부당한 대우를 폭로하면 학교 측은 물론이요 동료·선후배 강사들까지 손가락질하며 그를 내친다. 내부 문제를 밖에 알려 학교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분란을 일으킨 죄로 핀잔을 듣고 왕따를 당한다. 웃기지 않은가. 자신들을 대신하여 싸워준 동료 강사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구성원 전체의 처우가 개선될 수 있는데도 고맙다고는 못할망정 그를 욕하고 발로 차는 모습이. 그러면서 학교를 걱정하는 모습이. 마치 쥐새끼가 고양이 생각하는 것 같다. 쥐가 고양이에게 예의를 갖추는 이러한 모습은 동방예의지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이런 사회에서 예의를 갖추지 않고 진실을 폭로하는 쥐는 가혹한 뒤탈을 감수해야만 한다. 노회찬 의원이나 김용철 변호사, 세월호 유족처럼. 혹은 예의를 갖추고 진실을 지켰다는 공로로 자자손손 명예를 독차지할 수 있는 여정을 택할 수도 있다. 롯데그룹 부회장처럼. 이도 저도 싫다면 살아 있는 머리에 진실을 가둔 채 입 다물고 사회가 강요한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그리고 묵묵히 걸어가면 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러한 ‘진실’로 무장한 길을 걷다보면 우연히 ‘진실’과 마주하기도 한다. 진실이 스스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 거리 곳곳에서 갑자기 땅이 꺼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며 어느 날 백화점이 붕괴되고 한강다리가 끊기기도 한다. 자신을 녹색으로 드러낸 4대강과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모두 스스로 민낯을 드러내며 대국민 사기극임을 커밍아웃한다. 다른 쪽에서는 핵발전소가 폭발하면서 스스로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존재임을 과시하기도 한다. 이러한 진솔한 현실에 기초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상상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강남의 10억 원짜리 집과 아무도 살지 않는 10원짜리 집은 무엇이 다른가. 그 집이 10억이라는 건 진실인가. 지진이 나서 무너지는 꼴을 봐야 그제야 깨닫는다. 10억짜리 집이나 10원짜리 집이나 다 같은 시멘트와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했음을. 먹고 자고 싸는 데 불편함이 없으면 다 같은 집이라는 사실을. 경매에서 1억 2천만 원에 낙찰된 900g의 송로버섯은 정말 1억 2천만 원인가. 전쟁이 발발해 먹을 게 귀해지면 땅콩 한 알도 1억 2천만 원의 값어치를 할 것이다. 우리가 굳건히 믿고 있는, 발 딛고 서 있는 진실이란 고작 이와 같은 것이다. 지키면 지킬수록 모래성처럼 점점 약해진다. 이런 걸 지키겠다고 이 난리다. <진실 앞에서 무너지는 사회, 무너져야 진실이 드러나는 사회> 이것이 우리가 만들어온 사회요, 진실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진실을 수호해보지만 종국엔 무너지면서 우리의 민낯이 드러난다. 부조리와 몰상식, 비합리와 오류로 가득한 볼품없는 그 민낯 말이다. 이처럼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동시에 우리 바로 곁에 있기도 하다. 진실은 아무 데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있다.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미국의 한 고속도로가 차량 정체로 꽉 막힌 적이 있었다. 교통경찰이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결국 맨 앞까지 가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놀랍게도 시범 운행 중인 무인차가 한 대 있었으니… 범인은 무인차였다. 무인차가 규정 속도를 정확히 지킨 탓에 고속도로가 차량으로 몸살을 앓았던 것. 그렇다면 그동안 고속도로가 막히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은 여태 사람차가 속도를 위반해서 달렸기 때문이다. 무인차가 ‘저 너머에 있던 진실’을 고속도로로 끌고 와 스스로 예의 없는 공익제보자가 된 것. 인정에 손발이 묶인 사람이 못 하는 양심선언을 인공지능은 아주 자연스럽게 해낸다. 이렇듯 뭔가 일이 터져야 그간 꾹꾹 눌려왔던 진실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아무리 애써도 ‘진실’에 다가가지 못하고 그 주변만을 맴돌던 인간에게 인공지능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진실’을 들춰내 보여준다.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인간 세상의 토대가 되어 온 온갖 추한 ‘진실’을 해체하는 역할을 담당할지 모른다. 양심선언은 인공지능의 태생적 조건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이와 같은 양심선언은 추한 진실과의 조우를 통해 인간인 나 자신을 우리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동안 규정 속도를 위반한 운전자 각자는 깨달았을 것이다. 저 너머로 진실을 던져보지만 동시에 내 안에 동일한 진실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렇듯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듯 보이지만 바로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이다.

젠장,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필자 또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어렸을 적 가게에서 쥐포, 껌, 사탕 등을 훔친 적이 있다. 몇 번 있다. 당시엔 CCTV가 없던 시절이라 나만 알고 있는 ‘진실’이다. 당시에 누가 이를 알고 가게 주인에게 이른다고 했다면 나는 필사적으로 막았을 것이다. 물어뜯어서라도. 마치 롯데처럼, 삼성처럼, 정부처럼, 학교의 비정규직 강사들처럼, 황우석 박사처럼. 진실이 밝혀지면 무너지는 나의 모습과 대면해야 하니까. 나 역시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진실 앞에서 무너지는 개인, 무너져야 진실이 드러나는 개인, 이러한 개인들이 모인 집단인 사회 역시 마찬가지일 수밖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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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서 ‘교육용’ 전기 요금이었구나 [피켓2030]

이진섭(자유기고가)

 

와, 요즘 진짜 공부 많이 한다. 유전자조작식품(GMO), 청년수당,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둥지 내몰림), 사드(THAAD)에 전기 누진제까지. 가만있어 보자.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것 같은데…맞다. 2005년엔 황우석 박사 덕분에 ‘줄기세포’ 전문가가 되더니 2008년엔 MB(이명박) 덕분에 광우병 지식인으로 거듭나고… 다시 공부 시즌이 돌아왔다. 무더운 여름 정부가 우리에게 또 다시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오늘은 날씨만큼이나 뜨겁게 달아오른 전기 누진제 얘기를 해보겠다. 펄펄 끓는 ‘가마솥’ 더위가 이어지면서 학교에서도 전기 요금 폭탄을 우려해야 한다는 뉴스를 접하고 매우 의아했다. 학교에 공급되는 전기 요금 체계엔 또 무슨 꼼수가 숨어 있기에 저런 뉴스가 나오는 걸까. 요즘, 주택용/산업용 전기는 언론에서 뭇매를 맞고 있어 자주 접하던 차에 교육용 전기는 또 뭔가 싶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는 주택용, 산업용, 일반용(상가), 기타로 구분하여 요금을 부과하는데 교육용/농업용/가로등이 기타 항목에 포함된다고 한다. 학교에서 사용하는 전기엔 누진제가 적용되진 않지만 교육용 전기의 독특한 요금 구조 탓에 높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폭염에 괴로워해도 학교 재정이 어려우면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숨이 턱턱 막히는 무더위를 그냥 참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때 필자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아, 이래서 교육용이구나”. 학교에 공급하는 전기를 ‘교육용’이란 딱지를 붙여 별도로 취급하는 이유는, 애초부터 고비용의 요금 구조로 설계함으로써 ‘참는 게 미덕’임을 가르칠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더워도 참아야 하느니라’ 이것이 바로 교육용 전기 요금을 고비용으로 설계한 이유였던 것이다.

 

학교 밖에서의 교육이라고 다를까. 우리 주변에는 <참는 게 미덕이다>를 떠올리게 해주는 사례들이 즐비하다. 정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희롱 예방 교육에서 강연자가 “성희롱을 당하면 78.4%가 참고 넘어간다. 이게 미덕 아니겠는가” 라고 말한다. 섬마을에서 학부형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여자 교사도 참는 게 미덕이다. 교수가 되고 싶은 대학원생은 지도 교수의 성희롱은 물론 논문 가로채기를 당해도 꾹 참아야 한다. 병원에서 간호사는 서열에 따라 순번대로 임신을 해야 한다. 신입 간호사는 임신을 하고 싶어도 참는 게 미덕이다. 한편 일터에서의 노동자 역시 회사 측의 부당한 요구와 강압에 맞서 싸우면 안 된다. 소위 엘리트라 불리는 검사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자고 일어나면 귀에서 흘러나온 피에 베개가 젖을 정도로 상사로부터 폭언·폭력에 시달려도 참는 게 미덕이다. OECD 최하위권의 노조 조직률 12.3%(2015년)가 이를 잘 말해준다. 최저임금조차 못 받고 퇴직금마저 떼여도 참는 게 미덕이다. 팥빙수 장사가 잘 되어 상가 임대료가 오르면 임차인인 자영업자는 억울해도 참고 나가야 한다. 우리나라에선 이런 게 다 미덕이다.

 

사드가 들어와도, 핵발전소가 세워져도 참는 게 미덕이다. 허술한 공권력으로 아이를 잃은 부모도 징징대면 안 된다. 이유도 모른 채 바다에서 자식을 잃어도 정부로부터 금전적 보상을 받고 울음을 그치는 게 미덕이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역시 ‘악악’대며 시위를 하면 안 된다. 정부에서 1인당 5,000만 원씩 준다고 할 때 얼른 받아 챙기고 입 다무는 게 미덕이다. 정부가 서울시의 청년수당 정책에 제동을 걸어 청년의 삶까지 직권 취소해도 참는 게 미덕이다. 노인들 역시 죽을 만큼 힘들어도 참고 뙤약볕 아래서 폐지를 주워 하루 1만 원이라도 건지는 게 미덕이다. 혹여 기업이 만든 치명적인 가습기 살균제를 흡입하여 폐 손상으로 평생 산소통을 달고 살아간다 해도 참는 게 미덕이다.

 

미덕이 여기서 멈출 순 없다. 횡단보도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에게 금연을 요청했다가 뺨을 맞아도 참는 게 미덕이다.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어도 참고 마시는 게 미덕이며, 아랫집 혹은 윗집으로부터 담배 연기가 스며들어도 참고 사는 게 미덕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누군가가 겨울 내내 난방비가 한 푼도 나오지 않도록 조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더라도, 그리하여 설사 내가 부당하게 요금 폭탄을 뒤집어쓰더라도, 이를 발설하지 않고 참는 게 미덕이다. 교육부 공직자로부터 공개적으로 개·돼지 취급을 받아도 참는 게 미덕이다. “왈왈” 또는 “꿀꿀”대며 짖는 것도 잠시일 뿐 너무 더워서 짖을 힘도 없다. 더워도, 배고파도, 몸이 아파도, 모욕을 당해도 참는 게 미덕이다. 이제 똥·오줌도 참는 게 미덕이라는 말이 나올 날도 머지않았다. 참, 이미 병원에서는 인력 부족으로 간호사들이 화장실도 제 때 못 간다고 하니 지금 현실에 비추어 봐도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이렇게 학교 안팎에서 <참는 게 미덕이다>라는 가르침을 교과서를 벗어나 현장 위주의 실습 교육으로 제공해주시니 우리나라가 교육 강국의 반열에 오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도 우리나라 교육을 본받아야 한다고 수차례 언급하지 않았던가. 문득 궁금해진다. 누가 국가 차원에서 이런 식의 대국민 교육을 조직적으로 기획할 수 있을지. 필자는 이른바 ‘민중 개·돼지’ 발언의 주인공인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씨가 그 정점에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감히 누가 국민을 개·돼지 취급하겠다는 금기어를 발설할 수 있단 말인가. 이건 국정원도 못하는 일이다. 대통령도 못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나라의 컨트롤타워는 국정원이 아니라 교육부임이 틀림없다. 국정원 위에 교육부 있다. 이런 교육부에게 아직 교육 컨텐츠가 남아 있을까. 물론이다. 이들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교육해줄 내용은 ‘민영화(民營化)’가 아닐까 싶다. 전기·가스·수도·철도와 같은 공공부문의 사영화(私營化) 또는 영리화(營利化) 말이다. 그렇다면 대장정의 교육이 막을 내린 후엔 무엇이 이어질까. 정책기획관 출신 나향욱씨는 어디서 또 무엇을 기획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필자는 우리나라가 민영화 교육을 마지막으로 교육 강국으로서의 찬란했던 영광을 뒤로 하고 축산 강국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갈 것으로 확신한다. 이미 지난 7월 8일 이후 우리는 개·돼지로 살고 있다는 점을 벌써 잊었는가.

 

가끔 이런 생각을 하지.

집에서 기르는 개를 보면서

저 개가 내 말을 알아들으면 얼마나 편할까얼마나 좋을까

당신의 글자는 위정자와 지배층에 그렇게 이용될지도 모른다.

무릇 백성은 어리석어 보이나 지혜로써 속일 수 없다 했어.

허나, 그 말은 어쩌면 오히려 어리석기 때문에 속일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혜가 없는 산이나 바위를 속일 수 없는 것처럼.

헌데, 너의 글자로 지혜를 갖게 된 백성은 속게 될 것이다.

더 많이 속게 될 것이고 이용당하게 될 것이야.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개새끼처럼.

–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2011) 최종회, 세종과 독대하는 정기준(윤제문 분)의 최후의 대사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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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해이 vs. 도둑적 해이 [피켓2030]

이진섭(자유기고가)

맴맴맴매~엠~

매미들이 목청이 터져라 울어댄다. 낮에도 밤에도 아침에 눈을 떠도 울고 있다. 매미들은 잠도 안자나. 어제 울던 그 놈들이 아직도 울고 있는 건가. 모르겠다. 내가 알게 뭐냐, 지들도 사람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데. 하긴 그럴 만도 하다. 7년을 땅 속에서 보내고 올라온 매미에게 지상에서 허락된 시간은 단 2주. 그들에겐 오직 짝짓기만 있을 뿐. 사람이 안중에 있을 리 없다.

그래도 그렇지. 연일 이어지는 불볕더위에 매미까지 종일 울어대니 짜증이 날 만도 하다. 뭐 어쩌겠는가. 자연이 언제 사람 사정 봐가면서 돌아가더냐. 화산 폭발도 지진 발생도 제멋대로 예측불허다. 쓰나미도 사람 봐가며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그냥 무심하게 다 쓸어버린다. 고3 수험생이 있는 동네라고 해서 매미가 조용조용 눈치 보며 울지 않는 것처럼. 자연은 이렇게 무심하다.

그런데 우리 곁에 자연 말고도 무심한 자들이 또 있다. 우리에게 유심(有心)하겠노라 약속한 자들, 즉 공직자들이 그들이다. 공직자들이 우리에게 무심한 것도 그냥 넘겨야 할까. 지들끼리만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박 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마치 매미가 시끄럽게 울어대며 짝을 구하는 과정과 같다고 치부하며 관심을 꺼도 될까. 하루에 38분 꼴로 한 명씩 자살을 하든 말든, 175만 명의 노인들이 뙤약볕 아래서 1kg에 46원하는 폐지를 주워 연명하든 말든, 배가 뒤집혀서 학생들이 죽든 말든, 중동에서 이상한 바이러스가 국내로 들어와서 곳곳을 들쑤시든 말든, 산업 현장에서 연간 2,000명의 노동자가 사고로 목숨을 잃든 말든, 검사/간호사가 일터에서 폭언·폭력에 시달리든 말든, 그로인한 극심한 스트레스에 자살을 하든 말든, 밤낮을 가리지 않는 빚 독촉으로 사람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든 말든… 공공을 돌보는 일을 업으로 삼는 공직자들은 마치 자신이 자연인 양 무심하다.

그런데 얼마 전, 평소엔 이처럼 무심한 정부가 청년들의 취업을 지원하기 위해 시행하는 서울시의 정책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최근(2016년 8월) 서울시가 청년수당을 지급하자 기다렸다는 듯 보건복지부가 시정 명령에 이어 직권 취소 처분을 내린 것인데, ‘식물’ 정부가 명민한 촉으로 동물적 감각을 발휘하며 우리를 놀라게 했다. 여기서 직권 취소란, 쉽게 말해 서울시에서 시행하는 청년수당 사업은 무효이고 이미 지급한 수당은 다시 환수하라는 의미다. 정부는 서울시의 청년수당 사업을 두고 ‘무분별한 현금 살포다’, ‘지급받은 돈으로 술을 마시는 등 도덕적 해이를 조장할 수 있다’, ‘국민이 낸 세금이 허투루 쓰일 수 있다’, ‘돈의 용처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아 애초부터 수긍하기 어려운 사업이었다’, ‘서울시가 돈 있다고 함부로 할 문제는 아니다’ 등의 이유를 들며 악착같이 달라붙어 흠집을 내고 있다.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아차! 내가 그동안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청년들을 포함한 온 국민의 삶에 무심한 정부’,라는 그간 나의 생각은 맥을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임을 깨달았다. 청년들에게 이렇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깊은 우려를 해온 정부를 자의적으로 매도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꼼꼼하고 세심한 지적을 하는 유심(有心)한 정부를 무심하다고만 간주했으니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그래서 나도 이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정부를 향한 유심한 마음을 담아 진지한 관심과 애정을 표하고자 한다. 나의 자의적 판단은 완전히 배제하고 오로지 정부 그대들이 제시한 논리에만 입각하여.
‘도덕적 해이’ 운운하며 청년들이 지급받은 수당을 술 마시는 데 사용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는데, 나 역시 여기에 동의한다. 그리하여 나는 그런 말을 하는 그대들이 속한 집단의 ‘도덕적 해이’, 아니 ‘도둑적 해이’를 걱정한다. 아무렴 6개월 동안 월 50만 원씩 받는 사람이 낭비하는 세금 액수가 국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너희 도둑놈들이 헤쳐 먹는 세금과 비교가 될까. 서울시에서 지급하는 청년수당 90억 원 전액이 음주에 쓰인다 해도 자원외교 비리 22조 원을 비롯한 수십조 원에 이르는 고관대작들의 그간 도둑질에 비할 바가 못 된다. 다른 한편으로, 구직 청년이 6개월간 받는 수당으로 혹시 술을 마시진 않을까 걱정하면서 평생 세금으로 꼬박꼬박 월급을 타가는 부장 판사가 술을 처마시고 명백한 불법 행위인 성매매를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묻고 싶다.

돈 있다고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역시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니 한번 물어보자, 개**놈아. 지방정부가 청년들에게 현금을 살포한다 한들 중앙정부가 구제금융이란 명목으로 부실 은행과 기업에 꽂아주는 수십조 원의 대규모 현금 살포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터.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법인에게 주면 현금 지원, 사람에게 주면 현금 살포인가. 나아가 현금 살포는 안 되고 현물 살포는 허용되는 것인지도 묻고 싶다. 우리가 낸 세금에서 나온 물대포 살포로 납세자를 혼수상태에 빠뜨리는 건 권장할 일이고, 청년들에게 지하철을 타거나 도시락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라며 현금을 살포하는 건 함부로 해선 안 될 짓으로서 지양해야 할 일인지.

그리고 돈의 용처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예산을 편성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하시니 나도 한 마디.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그대들에게 월급이 지급되는데, 그 월급의 사용처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는지 자못 궁금해진다. 그렇게 말하는 그대들은 납세자에게 사용처를 제시하고 월급을 받아가고 있는가.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국민의 세금으로 설마 술을 마신다거나 성매매를 할 목적으로 강남의 오피스텔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 그대들의 말마따나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니 앞으론 현직 판사를 포함한 모든 공직자들은 매월 예상 음주와 성매매 횟수를 포함하여 자신이 받아가는 월급의 사용처를 납세자에게 제출해 주길 바란다.

그대들의 말이 다 맞다. ‘무분별한 현금 살포로 인한 도덕적 해이’, ‘돈의 용처가 명확하지 않아 애초부터 성립하기 어려운 사업’ 전적으로 공감하고 수긍한다. 담뱃세를 올린 첫 해인 작년(2015년)에 2014년 대비 3.6조 원이 추가로 걷혔다고 한다. 올해엔 2014년 대비 6조 원이 국고로 더 들어올 것으로 전망한단다. 우리가 이렇게 돈을 갖다 바치는데 어찌하여 삶은 점점 팍팍해지고 빚만 늘어갈까. 도대체 우리가 낸 세금이 어디에 쓰이길래. 늘 궁금했는데 이번에 정부의 입장 표명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정부를 향해 무분별한 현금 살포를 한 탓에 이를 집행하거나 국가 행정을 돌보는 공직자들의 ‘도둑적 해이’가 심화한 것이라는 자성 아닌 자성이 내부로부터 흘러나온 것. 그대들이 내세운 논리가 맞는다면 조세 행정 역시 거둬들인 돈의 용처가 명확하지 않아 애초부터 성립하기 어려운 사업이다. 돈 있다고 함부로 할 일이 아니라는 그대들의 주장처럼 돈 있다고 함부로 세금을 납부할 일이 아니다. 세금을 거둬 수중에 돈을 쥐고 있는 자들이 그 돈을 어디에 쓸 줄 알고 우리가 감히 세금을 낼 수 있겠나. 그대들이 징수한 세금의 용처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으니 우린 이제 납세의 의무로부터 자유다.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니라 그대들이 카메라 앞에서 공식적으로 밝힌 바다. 공무원인 그대들이 자발적으로 방송을 비롯한 각종 언론을 통해 세금 납부, 즉 그대들을 향한 우리들의 현금 살포 행위에 사실상 정당성이 없다는 근거를 조목조목 제시하며 커밍아웃을 해주셨다. 때마침 사법부에 몸담고 계신 판사께서도 온몸으로 나서 행정부의 발표와 보조를 맞춰 주시니 한층 호소력이 있었다. 무심한 줄로만 알았는데 남몰래 뒤에서 이런 세심한 배려를 해주시다니.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그대들을 보니 7년간 어두운 땅 속에 있다가 한여름에 양지로 올라와 잠시 머물다 가는 매미가 생각난다. 맴맴맴매~엠~.

사진출처 : www.flickr.com 참여연대.

사진출처 : www.flickr.com – 참여연대

지하 대학생의 며칠 [피켓2030]

이번 [피켓2030]에서는 특별히 소설 한편을 올립니다. ‘문과여서 죄송하다’말이 ‘문송’이라는 신조어로 굳어질 정도로 험난한 이 시절에, 철학과를 졸업하고도 감히 작가를 꿈꾸는 한 작가 지망생의 일상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시대 청춘들의 일면을 잘 드러내주는 글인 것 같아 전편을 모두 올립니다. 스크롤의 압박을 느끼시겠지만 그래도 읽어보시면 정말 잼납니다.ㅎㅎ


지하 대학생의 며칠

정승우(작가 지망생)

 

바닥까지 왔다는 생각을 했던 때가 어느 정도 지난 지금, 분명 나는 그 때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고 있다. 눈을 뜨는 새로운 아침마다 더 깊은 밑바닥을 맛본다. 이제 좀 그만 일어나자. 침대에서 일어나자는 게 아니다. 잠에서 깨어나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 이정도면 죽어도 되잖아. 하지만 이건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눈을 떠야하고 눈을 뜨면 나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먹고 살아야한다. 일을 해야 하고 꽤 괜찮은 사람이 돼야한다. 빌어먹을. 귀찮다.

어제 마신 술 때문에 머리가 지끈 아파온다. 사실 엄청 아프지는 않다. 이것도 내성이 생겨선지, 예전 같았으면 머리가 아프다며 침대에서 마구 뒹굴었을 것이다. 이젠, ‘아프다’ 한 마디 하고 말아버린다. 익숙해진 걸까. 뭐가 뭔 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다지 아프지 않으니 다행이다. 대신, 몸에 힘이 너무 없어 움직일 수가 없다. 이렇게 인간이 힘이 없어도 될까 생각을 하다가 마치 내가 한 마리의 벌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일부러 온 몸을 최대한 오므리고 벽에다 붙는다. 벌레라면, 벌레의 마땅한 모습을 해야지. 최하의 인간이 된 것 같다.

해는 모습을 감췄다.

여기, 반 이상 땅으로 들어가 있는 조그만 한 칸의 방은 자연의 순환을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모습, 아니 자신의 속성만을 끊임없이 고수한다. 어두움.

어두움으로 가득한 이 한 편의 지하세계는 그 이름에 걸맞게 죽음을 데려오려 한다. 여기에 갇힌 나는 이곳 밖의 사람들 보다 더 빨리 죽어간다.

이 어두움의 공간 속에서 내 몸의 열은 슬며시 빠져나가버리고 다시 그 열을 채워줄 해는 이곳에 닿을 수 없기에, 나에게 남은 것은 그저 빠져나감들 뿐이다. 열기의 빠져나감, 욕망의 빠져나감, 생명의 빠져나감. 

나는 이 어두운 구석에 눕혀져 이 한마디만을 되풀이한다. “살려주세요.”

어젯밤, 술을 마시고 들어와 노트에 끄적댄 글이다. 뭐, 이런 걸 썼지. 하긴, 반-지하 방에서 2년 정도 살다보면 어둠이 지긋지긋해지기 마련이다. 지금 시계가 한시쯤을 가리키고 있지만, 내 방은 아직도 컴컴하다. 작은 창문이 하나 있으나, 그것이 왜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내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빛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이곳으로 환풍이 되는 것 같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밖에 볼 만한 뭔가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창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반대쪽 똑같은 반-지하 방의 창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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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마, 일어나 봐라. 뭐 좀 먹자.”

친구 한 녀석이 침대 밑에서 여전히 잠을 자고 있다. 이 친구는 일주일에 두 번은 이렇게 내 방에서 뻗어있다. 불을 켜야지. 녀석이 새우잠을 자고 있다. 아까 내가 벌레 모양을 한 것과 비슷한 모양이다. 최하의 인간이 나 뿐만은 아닌 것 같다. 안도감.

“용건아, 좀 일어나라 인마.”

그제야 친구는 눈을 뜨고, 우리는 세수도 하지 않은 채 자다 일어난 꼴 그대로 내 방을 나온다. 밖에는 햇살이 뜨겁게 내리 쬐고 있다. 동굴에서 세상으로 나가는 것 같은 기분. 왠지 새롭게 태어나는 것 같다.

우리는 백반 집에 들어가서 제육볶음 하나와 순두부찌개 하나를 시켜 노나 먹는다. 참 맛있다. 평생의 끼니를 이것으로 충당한다고 해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 두 개를 먹는 데에 만천원이라는 돈밖에 들지가 않는다. 정말 평생 동안 이것만 먹는다고 해보자. 돈을 많이 안 벌어도 되겠네.

“야, 어제 나 술 먹고 뭐 안 했냐?” 용건이 매일 하는 질문을 어김없이 한다.

“뭐, 별 거 없었지. 늘 하던 대로.”

“또, 술 먹고 난리쳤어 그럼?”

“뭐, 늘 하는 정도로”

“술 그만 마시자, 이제”

“늘 그래야지.”

이정도가 우리가 나누는 대화다. 시답잖은 편이지. 용건이 계산을 한다. 일종의, 하룻밤을 내 방에서 묵은 대가다. 나는 장사꾼이 된 것 같단 생각이 들지만, 기분이 좋다. 용돈을 타 쓰는 이에게 밥 한 끼 값이 굳는다는 건 꽤나 큰 기쁨이다. 아, 세시 수업을 가야하는데. 뭐, 가야지. 우리는 다시 내 방에 들러, 가방만 든 채 나온다. 씻는 거야, 늘 보는 애들이니 이렇게 하루쯤 씻지 않아도 큰 무리는 없다. 무엇보다 그 친구들에겐 씻지 않은 내 모습이 무척이나 익숙하니, 더욱더 큰 무리가 없다고 봐야지.

문과대로 가는 길에 용건은 학교 호수를 바라보며 연신 감탄을 한다. 정말 예쁘지 않느냐고 계속해서 물어보지만, 나는 귀찮아 대답을 넘겨버렸다. 처음엔 꼬박 대답을 해주었지만, 똑같은 물음을 계속해대니 나도 별수가 없다. 이번이 몇 번짼지. 여러 해를 봐온 호수인데, 용건은 매일 술을 마시며 호수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 매일 호수가 예쁠 수 있는 거겠지. 어쩌면, 그게 더 좋은 것일 수도 있다. 똑같은 것을 보고서 매번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다면, 다른 아름다운 것을 찾을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러면 귀찮을 일이 없지. 아. 나도 술을 마시고 아름다운 모든 걸 다 까먹어버렸으면. 그럼 모든 걸 다 아름다워 할 수 있을 텐데. 나이가 들수록 익숙해지는 것이 늘어나고, 그렇게 아름다운 것들이 조금씩 사라진다. 주변 모든 것들이 아침 알람처럼 짜증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봤을 때, 박쥐는 전혀 나쁜 놈이 아니야. 오히려 나쁜 놈들은, 싸움을 일으킨 놈들이지. 만약에 싸움을 일으킨 놈이 새들의 두목이랑 육지 동물의 두목 그 둘이라면, 그 두 놈이 나쁜 놈들이야. 우선, 싸우면 안 돼. 굳이 왜 싸워. 다투는 건 이 세상에서 필요가 없다는 거야. 그리고 그 두 놈이 싸움을 일으켰으면 그 둘이서 해결해야 하는 거지, 왜 모두를 싸우게 만드느냔 말이야. 뭐, 그 둘이 싸움을 일으킨 게 아니라고 쳐. 그러면 새들, 육지 동물들 안의 어느 무리끼리 서로 시비가 붙었었겠지. 그러니까 싸움이 났을 거 아니야. 이 때도 똑같아. 자기들끼리 싸웠으면 자기네들끼리 싸워야지. 왜 모두 싸움을 하게 해. 일단, 이게 난 맘에 안 들어. 물론, 이건 그냥 푸념 식으로 하는 이야기고, 이제 중요한 걸 말해줄게. 들어봐. 박쥐는 그런 모습으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야. 태어나 보니 육지 동물과 새의 모습 중간을 하고 있었던 거지. 그리고 전쟁이 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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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헛소리 하네 인마.”
“헛소리가 아니고, 들어보라고. 그러니까, 박쥐는 폭력을 당했어. 전쟁 중에 박쥐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겠지. ‘너는 어느 편이야?’ 박쥐에게 그 물음은 이런 것과 똑같아. ‘너는 어느 편이 될 거야? 너는 어떤 유(類)가 될 거야? 어서 정해. 그리고 잘 정해야 할 거야. 어떤 유가 되냐에 따라 너는 우리의 적이 될 테니까.’ 박쥐는 그냥 자기 모습 그대로 살고 싶었을 거야. 이편, 저편이 아니라 그냥 박쥐로 말이야. 그런데 육지 동물과 새들은 전쟁 중이라는 그 상황에서 서로 이기기 위해 박쥐에게 강요를 한 거지. ‘너는 우리가 되어라.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는 끝이다.’ 박쥐는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거야.”
나는 열이 나게 이야기를 하고, 토를 하러 갔다. 소주를 너무 많이 마셨다.


또 다시 눈을 떴고, 역시 내 방 침대에 나는 벌레처럼 누워있다. 오늘 있는 일 교시 수업을 한 번 더 빠지면 나는 F를 받게 된다. 그리고 눈을 뜬 지금은 12시 무렵이다. 수업은 이미 끝났을 것이고, 이제 나는 그 수업에서 F를 받겠지. 분명, 어제 용건에게 이 말을 하며 일찍 방에 들어가자고 했었지만, 당연한 결과다. 방은 여전히 컴컴하고, 이 녀석은 역시 새우잠을 자고 있다. 한편으론, 고맙다. 니체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인생을 편하게 살고 싶으면, 무리지어 다니라!’
여기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 것 같다.
첫째, 무리 지어 다니면 생각을 할 겨를이 별로 없다. 그러니 고민이 없어지므로 아니, 고민을 할 시간이 없으므로 인생이 편해진다.
둘째, 무리지어 다니면 알게 된다. 나만 이런 등신이 아니구나. 인생이 편해진다.
제기랄. 그래도 나는 인생이 편하지가 않다. 이놈저놈 몰려다니는 데도 쓸데없는 생각이 끊임이 없다. 그래, 용건이 저렇게 자고 있는 것을 보며 한편으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곧, 또다시 오만가지 생각이 들겠지. 니체가 틀렸다. 그래, 모든 걸 알 순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역시 제육볶음과 순두부찌개를 먹었고, 역시 용건이 계산을 했다. 그리곤 각자 집으로 갔다. 나는 방에 들어와서는 곧바로 침대에 누워 블루투스 스피커의 전원을 켜고, 노래를 들었다. 이 음악 저 음악이 흘러나오지만, 딱히 내키는 것은 없다. 소리는 계속 흘러나온다. 그것은 내 귀로 들어오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소리가 음악이 되기 위해선 그것이 단순하게 일정한 음률을 지니는 것으로 만족되지 않는다. 스피커에서 나오는 그 소리는, 지금 냉장고에서 세어 나오는 소음과 별 다를 것이 없다. 나의 집중은 그것에 가있지 않다. 내겐 둘 다 똑같이 윙윙 거릴 뿐이다.
밤이 되자 또다시 친구들의 연락이 왔다. 물론, 술을 마시자는 연락이다. 나는 잠깐 고민했다. 오늘은 방에서 쉴까, 아니면 언제나 그랬듯이 술이나 마실까. 그리고 나는 역시 술이나 마신다. 술자리에 도착하니 친구 두 놈과 여자애 하나가 있다. 나는 모르는 앤데.
“야, 왜 이렇게 오는 데 오래 걸려.”
“빨리 온 거니까 조용해라.”
“얘는 올해 신입생이야.”
“안녕하세요, 철학과 신입생 신나리입니다.”
“어, 안녕하세요.”
“이름 말해줘야지 인마.”
“이제 보지도 못 할 텐데, 됐어. 저는 그냥 4학년이에요.”


일학년 여자애가 잠깐 화장실에 갔다.
“야 저렇게 어린애를 네가 어떻게 아냐?”
“일학년 수업 안 들은 거 있어서 들으러 갔다가 예뻐서 봐뒀지. 예쁘지 않아?”
“몰라 인마. 진현아, 넌 근데 요즘 뭐하냐?”
“취업준비하지 뭐. 넌 돈 벌 준비 안 해? 그러다 쫄딱 굶는다. 돈을 벌어야 나중에 행복하게 산다. 형님 말씀 들어라.”
“아, 뭐 어떻게 되겠지. 야, 너도 취업준비 하고 있냐?”
“난 휴학해서 아직 3학년이잖아. 내년부터 하던가 해야지.”
재미없는 이야기들. 나는 술이나 마신다. 이 얘기도 별로, 저 얘기도 별로.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나는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셨다.
정말 나는 필름이 끊겼고, 눈을 떠보니 내 방 침대였다. 분명 턱을 괴고 소주잔을 들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떻게 눈을 한 번 깜빡이니 방인 거지? 핸드폰을 보니 정수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와있다. 어젯밤에 전화한 거네.
“야, 나 어제 잘 들어갔냐?”
“그럼, 아주 잘 들어갔지. 내가 여자 있을 때 너 부르나 봐”
“왜 내가 뭐 했는데?”
“나리가 어제 너 부축해서 데려다준다고, 둘이 같이 간 거 기억 안 나?”
“몰라, 기억 안 나. 근데 걔가 왜 날 데려다줬는데”
“네 방이랑 같은 방향이라고 뭐 그러더라고. 하여튼, 허튼 짓 했기만 해봐라. 죽일 거다 내가.”
“아 몰라, 헛소리 할 거면 끊어.”
여자에 눈이 먼 놈, 나는 욕을 했다.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뭐 그렇다 해도, 관심도 없는 애에게 내가 뭘 했을까봐 저렇게 유난인 걸까. 그 때, 메시지 하나가 왔다. 모르는 번호다.
‘안녕하세요, 오빠. 저 어제 같이 자리에 있었던 신나리에요. 속은 괜찮으세요?’
사진 두 개가 첨부된 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
‘멋있는 말 같아서 찍었어요. 다음에 밥 사줘요, 오빠’
사진을 보니, 내 수첩을 찍은 것이었다.

숨김없음. 계속해서 밖으로 밀고 나가는 힘. 그게 긍정이다.

책임의 문제가 거대한 공포로 다가오는 순간이 있다. 그 때 그 순간은, 얼마나 많은 일들이 판단된 것들 혹은 예측된 것들의 범위를 벗어난 일들과 연관되어 있는 지를 보여준다. 우주적 차원에서, 책임을 지겠다는 표현은 행위들이 발생하게 되는 질서에 대한 무지에서 나오는 한낱 일종의 자신감이자, 자만이다.

이딴 게 멋있다니. 술에 취해 언젠지도 모르고 썼던 말들이다. 그런데, 얘는 내 번호를 어떻게 안 거지? 또 수첩은 허락도 없이 봤네. 기분이 불쾌했다. 한 마디 할까했지만, 됐다. 그 아이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것으로 그냥 넘긴다.


숙취에 오늘 하루를 멍하게만 보내고, 시계를 보니 어느덧 밤이었다. 뭐, 여긴 언제나 밤이지. 아니, 밤이라기 보단 언제나 어둠이다. 밤은 아름다운 것이잖은가. 내 방은 아름답지가 않다. 생각해보면, 밤이 아름다운 건 낮이 있기 때문이다. 또 낮이 값진 것은 밤이 있기 때문이고. 그런데 내 방은 그런 반대편이 없다는 거야. 여긴 그냥 어둠밖에 없어. 이것밖에 없는데, 아름답고 아니고 할 게 없는 거지. 내 방은 아름다운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고 그저 어두움, 무(無)다. 갑자기 파르메니데스가 생각난다.
‘ex nihilo nihil fit’
‘무에서는 어떤 것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덜컥 겁이 나, 방 안에 켤 수 있는 모든 불을 켰다. 그런다고 안심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정말로 지금 나한테서는 어떤 것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만들어내지 않는 무다. 어둠 속에서 지낸 2년여의 시간 동안 나는 서서히 어둠이 돼버렸다.

아, 이 어둠의 끝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시간은 흐르고 여기 이 땅은 해를 맞이하여 불을 켜지만 우주는 언제나 어둠인 것을, 대체 이 어둠의 끝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끝없는 어둠의 자궁 속에 희미한 빛을 집어넣어준 것은 사정을 위해 들어온 남근이었거늘, 나는 이 어둠의 끝을 위해 아니, 한 순간의 짧은 이 어둠의 잊힘을 위해 어떤 천박한 것을 기다려야 한단 말입니까. 나는 죽어야 합니다. 그 끝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탯줄이 잘리며 한 존재가 드디어 자궁 속을 벗어나듯, 이 목숨을 잘라 이 우주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야, 나는 이 어둠을 끝낼 수 있을 겁니다.

언제 잠이 들었던 걸까. 시간을 보니 새벽 7시다. 머리맡에는 수첩이 있고 저런 글이 쓰여 있다. 또, 헛소리나 적어놨구나. 나는 반쯤 감은 눈으로, 써놓은 메모를 연극 톤으로 읊어본다. 팔을 이렇게 하늘로 들고,
“아! 이 어둠의 끝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됐다, 집어치우자.
하늘로 뻗었던 팔은 그 상태 그대로다. 잠깐만. 나는 세상의 신비 중 하나를 알고 있다. 누운 상태에서 팔을 하늘로 뻗어 누워 있는 몸과 정확히 수직인 상태로 만든다면, 아무리 팔을 오래 들고 있다고 해도 아프지가 않다. 이건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해왔던 것이기 때문에 확실히 안다. 이것은 확실하다. 이 부분에서는 내가 니체보다 낫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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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쯤, 방에서 아침을 대충 챙겨먹으려는데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글 같은 건 취업을 하고 나서도 쓸 수 있으니, 직장 구할 생각을 좀 해보라고 한다. 글 같은 거라. 글을 쓰는 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그 글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세계다. 그리고 글을 읽는다는 건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 이 세계의 내용들이 쓰이지만, 글이 써지는 순간 글은 이 세계와 분리돼 하나의 세계가 된다. 다만, 그것들은 이 세계와 공통의 언어란 것으로 연결돼 있다. 근데 어떻게, 이 방대한 일을 돈을 벌면서 부업으로 할 수 있단 거지? 물론, 나는 게으르다. 그래, 부지런한 누군가는 다 해내겠지. 핑계를 대는 건 좋은 것이 아니라고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배워왔다. 대개, 부모님 말씀 중엔 틀린 게 없지. 아니다. 부모님 말씀은 대개 틀리지 않다고 말하기보다는, 대개 충고는 틀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여기서 잠깐, 나는 세상의 신비를 하나 더 알고 있다. 그건 이것이다. 이 세상 어떤 충고도 사실 틀릴 수가 없다는 것. 이유는 간단하지. 왜냐하면, 이 세상 어떤 충고도 실현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바보라도 남의 충고 따위를 따를, 그 정도의 멍청이는 아니다.
그래서 나는, 마치 전화가 오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아침을 차려 먹었다. 스팸을 굽고 반숙으로 계란 후라이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하얀 밥. 사람들은 흔히 밥을 먹기 위해 반찬으로 스팸과 계란을 먹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스팸과 계란을 맛있게 먹기 위해 밥이 필요한 것이다. 스팸의 짠 맛을 흰 쌀이 중화시키며, 그것을 보다 맛나게 한다. 계란 후라이의 경우는 스팸과 조금 다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와 같다. 밥은 주식이라기 보단 서포터 단연, 최고의 서포터다.
생각을 해보면 이 세상에는 거꾸로 된 것들이 꽤 있다. 밥을 먹기 위해 돈을 버는 것임에도, 돈을 벌기 위해 밥을 굶는다던가. 친구와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임에도, 어느새 술을 마시기 위해 친구와 시간을 보낸다던가. 살기 위해 행복하려는 것임에도, 행복하기 위해 산다던가. 아니면, 존재하고 난 뒤 형상이 드러나는 것임에도, 형상이 있고 존재가 등장한, 아 몰라. 생각을 그만둔다.


나는 대충 씻은 뒤,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행정관 앞에서 조그마한 집회가 있다. 최근, 문과계열의 전공을 통폐합 하려는 학교의 움직임 때문이다. 예전부터 있어왔던 문제이지만, 최근에 몇 개의 과가 급작스럽게 통폐합되면서 이 문제가 다시금 대두됐다. 때문에 sns 상에서도 수많은 글들이 올라온다. 이럴 때가 되면 다들 하는 말들이 있다. ‘무엇이 올바른가. 대학교의 올바름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위해 대학을 다니나. 지금 대학이 행하고 있는 것이 대학의 존재 목적과 상응하는 것인가.’ 내 성격이 모난 것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뭔가 그런 것들이 아니꼽다. 그곳에 가면 아마 진현도 있을 거고 정수도 있겠지. 내가 그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곳과 그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방을 나왔다. 역시 해는 밝았다. 나는 다시 한 번 더 새로운 태어남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새롭게 태어나기를 갈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생각엔, 문제가 생겼을 때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해결 방법은 모든 걸 갈아엎어 버리는 것이다. 특히 문제가 복잡하면 할수록 더 그렇다. 창세기 6장7절이 떠오른다. 문제로 가득 찬 세상을 홍수로 쓸어버리는 신을 보면서, 뭔가 어긋났을 땐 ‘역시 새로 시작하는 게 최고인가’ 하는 생각을 이전에 한 적이 있다. 꼬인 것을 하나하나 풀기보다는 그냥 잘라버리기.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뭐가 그렇게 문제인 걸까. 잡생각을 하면서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는데, 폐휴지를 주우시는 아저씨가 옆을 지나갔다. 이틀에 한 번은 보는 아저씨다. 누가 보아도 거지꼴을 하고 있는 이 아저씨는 항상 입으로 무언가 중얼중얼 거리며 수레를 끄신다. 불쑥, 저 아저씨도 새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실까 궁금하다.
행정관 앞에는 역시 진현과 정수가 있었다. 그들은 제일 앞줄에 서서 열심히 대학의 올바른 나아감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정수 옆에는 그 때 만난 신입생 여자애가 있었다. 순간 그 애가 내가 있는 쪽을 쳐다봤고,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불편한 마주침은 하고 싶지 않다. 행정관 앞은 학생들로 가득했다. 너나 할 것 없이 이곳으로 몰려든 것 같다. 대단하다. 이 광경이 대단한 것인지, 그들 하나하나가 대단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광경이 대단한 것인가? 확실히 이런 풍경은 낯설다. 8,90년대 대학에서야 이런 모습이 흔했겠지만, 간혹 교수님들이나 어른들이 자랑하듯 그 때의 모습을 툭 내뱉기도 한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여 어떤 하나의 일을 꾸린다는 게 예삿일이 아니니, 이 만큼의 인원이 뱉어내는 어떤 힘 비스무리한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들 하나하나가 대단한지는 역시 모르겠다. 정수가 그 여자애 어깨에 손을 걸치는 모습이 보인다.
“형, 왜 이제 와.”
“야 깜짝이야. 뭐, 이정도면 빨리 온 거 아니냐?” 병환이 갑자기 나타나 나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놀라 대답했다.
“우린 아침 일찍부터 와서 이러고 있었어.”
“얌마, 지금도 아침이긴 해.”
“아무튼, 빨리 나 따라와. 앞으로 가야지.”
“어, 어.”
병환은 사람으로 가득 차 틈이라곤 없어 보이는 곳을 손을 비집으며 들어가 앞으로 나아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주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는 그 녀석의 모습을 보니, 한 명의 투사 같았다. 굳이 내가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도 안 하는 것 같아, 나는 그 뒤를 따르는 척 하다가 몰래 옆으로 빠져 나왔다. 이곳이 뭔가 답답했다. 집회가 다 끝나고 저녁쯤이 되면 술을 마시자고 또 연락이 오겠지. 그 때, 사람들 얼굴이나 보던가 해야겠다. 지금은 그냥 방에 다시 들어가 쉬고 싶다.


방에 들어가는 길에, 폐휴지 줍는 아저씨를 또 마주쳤다. 그 아저씨는 역시 허공에다 혼자 중얼거리며 수레를 끌고 있었고 나 혼자서 아저씨를 바라봤다. 방에 들어왔다. 침대에 눕자마자 나는 ‘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편안함. 몸의 편안함보다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난 편안함. 어둠이 좋은 게 하나 있긴 하군. 이 안에 있으면 어떤 것도 느낄 수 없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무엇이 있다 해도 느낄 수가 없지. 불을 켠다는 건 한편으로 위험해.
밤이 됐나보다. 시간을 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다. 병환에게서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후문으로 와, 형”
“응”
쉽게 대답을 해버렸다. 휴, 나가야지 뭐.
대략 10명쯤 있었다. 모두가 마구 술을 들이붓고 있었다. 나도 얼른 자리에 앉았고 꽤나 마셨다. 술자리는 곧 2차로, 다시 곧 3차로 바뀌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집회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지만, 그런 건 쉽사리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건 농담인 것 같다. 농담들이 난무한다. 웃음들이 퍼지고, 나는 그 소음 속에서 멍하니 소주잔을 바라봤다. 순간, 누군가 날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 신입생 여자애가 대각선 위치에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 옆엔 정수가 딱 달라붙어있다. 나는 또다시 얼른 눈을 돌렸다. 둘은 언제 온 거지.
“네가 뭘 아냐.” 갑자기 과열된 언성이 들렸다.
옆 테이블을 보니, 교성이형이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누구한테 그러는 거야. 나는 고개를 앞으로 살짝 뺐다. 대상은 2학년 남자애였다.
“네가 그 책을 읽으면 이해를 할 수 있냐고. 이해도 못 할 거 읽어서 뭐하게 인마. 때려치워라 그냥.”
“조금이라도 이해해보려고 읽는 거죠.”
“조금? 읽어서 교수님정도로 이해도 못 할 거면, 쓸모없는 거 아니야?
저 형이 술에 취해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구나. 농담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렇게, 농담이 정작 있어야할 때는 대개 자리에 없다. 모두가 교성이형 눈치만 보고 있다. 낮에만 해도 투사가 돼서 학교에 맞서 소리 지르던 인물들인데, 밤이 되면 그 기운들이 빼앗겨 버리는 건지 아니면 해가 그런 기운들을 잠시 줬던 것뿐인지. 모두들 말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다. 정작 지금이야말로 투사가 필요한 때인데 말이다.
“그만해요, 형. 이해 못 한다고 책을 읽으면 안 되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입을 뗐다.
“뭐라고 인마?”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죠. 내 생각엔 형 생각이 잘못된 것 같은데요.”
“이 새끼가.”
형이 애들을 밀치며 나에게 다가오려고 했다. 물론, 말리는 이들이 있었다.
“둘 다 그만해 좀.”
“뭘 그만해. 저 새끼가 지금 말을 싸가지 없이 하는데.”
“형이 헛소리하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야, 너도 형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지.”
잠깐의 소란. 오래가진 않았지만, 이미 분위기는 꽤나 어색해졌고 술자리는 여기서 끝이 났다. 그 자리는 교성이형이 계산을 하기로 했었고, 모두들 형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나서 각자의 집으로 갔다. 나는 형이 계산을 하는 동안,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갔다. 그 2학년 남자애는 역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형을 기다렸다. 내 눈엔 다들 멍청해보였다.
다음날,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문자가 와 있었다. 단체 문자 한 통과 몇몇 애들의 문자였다. 오늘도 집회가 있다며, 얼른 나오라는 내용들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다시 투사들이 되신 건가. 올바름을 물으며 행정관 앞에서 열심히 싸움을 하겠지. 역시, 그들 하나하나가 대단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집단, 집합이 대단한 걸까? 대단하지 않은 것들이 모여서 어떻게 대단한 것이 될 수 있지? 처음부터 그곳에 대단한 건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 하고 계속 누워있다. 옆으로 눕기 위해 몸을 옆으로 돌렸다. 쿵. 순간, 어떤 추락이 느껴졌다. 실제로 내 몸이 떨어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내 몸은 단지 옆으로 돌려졌을 뿐. 하지만, 난 분명 추락하는 기분을 느꼈다. 뭐지. 내 밑바닥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내 몸이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걸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아래에 있다. 그리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조금 더 아래에 있겠지. 이 추락은 언제 끝이 날까. 잠깐만. 내 추락은 언제 시작 된 거지? 그리고 왜? 그래. 내가 궁금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나는 왜 추락을 시작했는가. 그리고 이 물음의 끝엔 내 추락이 언제 끝나는지에 대한 답이 자연스럽게 있을 것이다. 나는 왜 추락하는가.
추락은 부정이다. 내가 아래로 떨어질수록, 나는 더욱 더 나를 부정한다. 또한, 내가 나를 부정할수록 나는 더욱 더 아래로 떨어진다. 지금 내 모습은 어떻지? 4학년. 곧 졸업. 취업준비는 해놓지 않았고. 이전에 글을 써본 적도 없다. 잘생기지도 않았고, 부모님이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다. 물론, 천재도 아니고. 겨우, 서울권 대학에 들어와 다녔다. 고등학교 때를 생각해보자. 물론, 대학에 가기 위해 꽤나 열심히 공부를 했다. 밤을 새가면서 한 적도 있고. 아니, 나는 더 밤을 샜어야 해. 중학교 때를 보자. 그 때, 왜 그렇게 나는 멍청한 생활들을 했을까. 퍽 하면 친구들과 놀이터에 앉아, 죽고 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하며 이상한 이야기나 해댔다. 학원은 빠지기 일쑤였고. 초등학교 때는? 기억도 안 나네. 그냥 놀았다. 왜 그땐, 미래를 생각하지 못 했을까. 누군간 분명 그 때부터 훗날을 생각했겠지. 그럼 유치원 때는? 아기 때는? 시발. 나는 그냥 그렇게 살아왔던 거지. 내가 추락하게 된 건 내 잘못이다. 좀 더 열심히 했어야 했다. 부모님 말씀을 들었어야 했나. 나는 늘 부족했다. 그렇다면, 내 추락의 위기는 언제나 당연한 것이었고, 그 위기가 지금 드러난 것뿐이다. 홍수야 일어나라. 아니, 잠깐만. 아기 때는 도대체 어떤 잘못을 했었을까. 어떻게 내가 갓난아기시절을 보내왔기에 내가 이렇게밖에 성장하지 못한 건가. 홍수야 일어나라.
이 위대한 생각을 하는 중에, 갑자기 배가 고팠다. 쳇. 생각이 뭐가 중요하겠어. 그래, 배나 채워야지. 나는 제육볶음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다. 역시 해가 높이 떠있다. 골목을 나오니 폐휴지 줍는 아저씨가 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빵조각을 뜯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살아간다면 아니, 내 추락이 끝나는 지점이 된다면, 나도 언젠가 저런 사람이 되어있을까? 고개를 절며 나는 얼른 밥집으로 들어갔다. 제육볶음을 주문하는데, 아차. 큰 일 났다. 통장에 잔고가 얼마나 남았지? 핸드폰으로 확인을 해보니 2천 원가량이 남아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나는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제육볶음은 빵 쪼가리 보다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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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건에게서 연락이 왔다. 물론, 술을 한 잔 하자는 것이었다. 아직 채 술이 다 깨지도 않은 것 같지만, 나는 마다하지 않았다.
‘마실 날이 있을 때, 최선을 다해야지. 근데, 사주냐?’ 답장을 보냈다.
‘이 등신이. 과방으로 와.’ 답장이 왔다.
등신이라, 날 정확히 봤군. 나는 픽 웃었다.
용건을 만나러 가기 위해 과방으로 출발했다. 해가 참 쨍쨍했다. 반-지하방에서 나온 사람에게, 그 정도의 해는 꽤나 부담스럽다. 해가 아무리 쨍쨍하면 뭐하리. 결국 나의 방으로는 조금도 들어오지 못 하는 것을. 갑자기 궁금했다. 우리에겐 밝음이 자연스러운 것일까, 아니면 어두움이 자연스러운 것일까. 어둠이 본래 깔려 있고, 빛이 들어와 그곳을 밝히는 걸까? 아니면 빛이 본래 깔려 있고, 어둠이 들어와 그곳을 덮어버리는 걸까? 이런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병환과 마주쳤다.
“어, 형! 어디 가는 거야. 어젠 잘 들어갔어?”
“그렇지 뭐. 지금 용건이나 만나려고. 너는 어디 가냐?”
“형 또 술 마시게? 정신 좀 차려. 허구한 날 술만 마셔 무슨. 난 행정관 앞에 가는 중이지. 형도 쓸데없는 거 하지 말고, 나랑 같이 거기나 가자. 좋은 일 좀 해.”
“너나 많이 해라. 난 간다.”
병환은 빠른 걸음으로 나를 지나쳐갔다. 갈 곳 있는 이의 걸음은 저렇게나 빠르다. 저 친구의 눈엔 난 항상 쓸데없는 것을 하는 사람인가보다. 어쩌면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기분이 조금 언짢은 건 어쩔 수가 없다.
과방에 들어서니, 여러 사람들이 있었다. 신입생들은 소파에 앉아 자기네들끼리 속닥속닥 거리고 있었고, 몇몇 고학번들은 직사각형의 테이블을 두르고 있는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거나, 책을 훑어보고 있었다. 과방에는 그 때 만난 신입생 여자애도 있었다. 나는 조금 불편했다. 용건은 날더러 과방으로 오라고 해놓고서는 정작 본인이 없었다. 아직 오는 중인가보다 생각하며, 나는 의자에 앉았다. 아는 애들도 없고 할 것도 없어, 나는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 때, 또 어떤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신입생 여자애가 어제 술집에서처럼 날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엔 옆에 여자애에게 귓속말을 하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기분이 불쾌해져 과방 밖으로 나왔다. 복도 끝에서 용건이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어제 넌 왜 안 왔냐?” 나는 삼겹살을 구으며 용건에게 물었다.
“그런 술자리 불편하다고 했잖아. 가면, 정치얘기만 아주 주구장창 해대.”
“안 그래도, 거기서 술 마시다가 교성이형이랑 싸웠다.”
“들었어. 애들이 안 좋게 말하던데.”
“누구를?”
“너.”
“아, 등신들.”
“됐어, 술이나 마셔 인마.”
소주를 한 잔 마시고, 삼겹살을 한 점 먹는다. 결코, 소주를 마시기 전에 삼겹살을 먹지 않으며, 소주를 먹고 삼겹살을 먹어도 결코 한 점 이상을 먹지 않는다. 그게 딱 나에게 적절하다. 그런데, 용건 이 놈도 나와 비슷하다. 그러다보니 우리 둘이서 술을 마시면 안주가 많이 남는다. 한참 전에 불판 위에 놓인 삼겹살은 이미 새까맣다. 우리는 고기가 그렇게 타도록 내버려둔다. 타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우리 입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소주의 양은 정해져 있고 삼겹살은 그에 비해 넘친다.
정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용건에게 말하고 우리가 있는 곳을 정수에게 말해줬다. 정수는 금방 왔다.
“너 어제 왜 그랬어?”
“오자마자 그 소리냐.”
“어제 좀 심했어, 너.”
“심하긴 뭘 심해.”
“이번엔 둘이 싸우기라도 하려고? 정수야 술이나 받아.”
정수는 고기를 왜 태우고 있냐고 우리를 나무라며, 고기를 더 시켰다. 배가 고팠던 건지, 정수는 잘도 먹었다. 술병이 생각보다 늘어났다.
“너 근데 나리한테는 왜 그랬어?”
“그건 또 뭔 소리야.”
“나리한테 다 들었어.”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둘이 나 모르는 소리 할래?”
“나도 무슨 소린지 몰라.”
“네가 나리한테 밥 사준다고 그러면서 껄떡댔다며.”
“걔가 그랬어?”

“어쨌든, 일들 잘 책임져서 풀어. 사람들이 너 못난 놈이란다.”
기분이 이상했다. 화는 딱히 나지 않았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네요.’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그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참,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네요.
우리는 처음 있던 자리에서 끝까지 술을 마셨고, 그 고깃집에서 나왔을 땐 모두 만취한 상태였다. 용건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그날따라 용건이 자기 집으로 간다고 해서 택시를 태워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 학교호수를 따라 잠시 걸었다. 오늘따라 무척이나 호수가 아름다워 보이네. 웬일일까. 어쩌면, 용건이 호수를 늘 예쁘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내가 생각했던 게 아닐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것에서만 아름다움을 느끼는 게 아니다. 이 호수는 내가 이미 알고 있던 호수지만, 오늘 아름답다.


나는 목이 말라 도중에 잠에서 깼다.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물은 다 마시고 없었다. 아. 나는 옷을 대충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편의점은 내 방 바로 근처에 있다. 새벽 공기가 꽤 차다. 나는 물을 사자마자 벌컥벌컥 마셨다. 살겠다. 이 때 마시는 물만한 물이 없지. 나는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골목으로 들어섰다. 새벽부터 폐휴지 줍는 아저씨가 가로등 근처에 계셨다. 가로등은 환했다. 그 아저씨는 가로등 쪽으로 걸어왔고, 이젠 가로등을 등진 채로 서 있다. 술이 덜 깨선지, 가로등의 불빛이 그 아저씨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예전에 봤던 예수 그림이 떠올랐다. 불현 듯 생각이 들었다. ‘저 분에게는 지금의 당신 삶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다시 자려고 누웠을 때,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가로등 앞에 선 폐휴지 아저씨의 모습이 계속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아저씨는 뭘까. 추락의 끝에 신이 된 건가? 나는 뭘까? ‘못난 놈.’ 오늘 내가 들은 내 모습이다. 나는 왜 못난 놈인 거지? 내가 그렇게 불릴만한 일을 했어? 내가 한 거라곤 잘 알지도 못하는 애한테 온 연락을 무시한 것, 술에 취해서 이상한 소릴 하는 형에게 대꾸한 것 그리고 현재를 잊고 미래만 바라는 정의로, 뭉쳐 있는 곳에 가는 걸 거부한 것뿐인데. 대체 내가 왜 못난 놈인 거지. 나는 내가 닥친 상황에서 마땅히 할 만한 것을 했을 뿐인 걸. 그럼 어떡하라는 거야. 연락이 오면 무조건 대꾸를 하고, 형이 말하면 무조건 가만히 있어야 하며 함성이 있는 곳엔 무조건 가야하는 건가? 무조건?
그 때 나는 알았다. 추락은 없었구나. 나는 지금도,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 시절도 그리고 갓난아기 시절에도, 그 어떤 때에도 잘못 행한 것 없이 충만했다. 나는 추락하지 않았구나. 아니지, 이렇게 말해야 할 거야. ‘나는 나를 추락시킨 적이 없었구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 그 주위에서 끊임없이 내비치는 어떤 유형, 틀. 그리고 그것을 거부했을 때 가해지는 비난과 부정. 그것들이 나를 추락하는 인간으로 꾸며낸 것뿐이구나. 그래야 하는 것은 없다. 의무가 없는 곳에 굳이 부정이 있을 필요가 없지. 그랬었구나. 그랬구나. 그렇구나. 이게 내 모습일 뿐이구나.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나다. 당신들에게 말해야지. 미래의 내 모습을 기대하지 말아달라고. ‘미래의 나는 만날 수 없어요. 언제나 곁에 있는 것은 현재의 나입니다.’
나는 수첩을 찾아 펜을 들었다. 그리곤 이내 잠들었다.

나는 홍수를 일으켰다.

박지용의 복직투쟁 이야기 [침몰하는 대학]

박지용의 복직투쟁 이야기

박지용(한철연 회원)

즐거운 방학, 우울한 시간강사

또! 방학이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학생 신분인 모든이들은 방학을 기다린다. 학생들만큼이나 초등학교 선생님부터 대학교수들까지도 방학을 기다린다. 모두 방학을 즐겁게 기다린다. 방학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그들은 시간강사들이다. 계절학기를 하지 않고서는 강의가 있을리 만무하고 강의가 없으니 수입이 없다. 대학에서는 1년 열두 달 동안 방학이 네 달이나 된다. 그러니 시간강사들에게는 삼분의 일 이상의 정기적인 무직상태를 견뎌내는 나름의 생존기술과 지혜가 요구된다. 스님들이 동안거 하안거를 하듯이 일상적인 사회관계를 최소화해서 지출을 줄여야 한다.

대학 생태계 질서에는 정년을 보장받았거나 곧 받게 되는 전임교수들이 있고 강의만 하고 강의수당을 받는 시간강사들이 있다. 시간강사에서 전임교수의 간격은 냉혹하게 말하면 급여와 연금, 4대보험이다. 신분변동에 따른 자존감 상승 따위의 비경제적 효능은 신경쓰고 싶지 않다. 승자에게 주어지는 경제적인 보상에 패자들은 부러워할 수밖에 없다. 오랜 번데기 생활을 견뎌내 나비로 변신한 친구는 첫 달 급여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고서야 전임교수가 되었음을 실감했다고 한다. 이 과정을 폄하하거나 무시할 생각은 없다. 그야말로 경쟁의 승자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좋을까, 부럽다.

교육당국과 대학의 밀약에 의해서 대학 생태계의 어떤 변화가 생겨났다. 대학은 큰 돈 들이지 않고 전임의 머리수로 셀 수 있으면서 대학 평가에도 점수를 올릴 수 있는 OO교수를 만들어 냈다. 특임, 초빙, 연구, 객원, 강의전담 등등 그 명칭은 각양각색이지만 기본범주로는 비정년교수 혹은 비전임교수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대학을 대상으로 통계를 내면 통계학자마저도 한 눈으로는 전체를 이해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복잡하다. 핵심은 간단하다. 대학평가 기준과 요건이 시시각각 바뀜에 따라서 대학의 주판이 튕겨지고 잡다한 OO교수의 직함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전임교수와 시간강사의 차별이 달라지지 않듯이, OO교수들은 그저 OO일 뿐이다. 오히려 뻔데기가 나비가 될 확률만 더 줄어들고 큰 뻔데기 작은 뻔데기만 많아질 따름이다.

 

큰 뻔데기에서 작은 뻔데기로, 작은 뻔데기에서 큰 뻔데기로

어릴 적 읽은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의 한 대목이 기억난다. 꼭대기까지 올라간 뻔데기가 나비가 되어 “저 꼭대기까지 가보아도 아무 것도 없어”라고 말한 장면이 인상 깊게 남는다. 이제 나비가 될 수 없다. 이 상황이 비장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비들이 여전히 부럽다. 지금은 시간강사로 강요된 하안거 기간을 보내며 최소식단의 섭생과 금욕을 실천하고 있다.

대학에서 4년간 OO교수로 적힌 명함에 방학에도 급여를 받고 4대보험과 퇴직금을 받은 적이 있다. 보수에 비해 노동조건이 열약했다는 점을 다시 시간강사가 되고서야 절감하게 될 정도로 일이 많았다. 다행히 현재로서는 순수 시간강사(참으로 낭만적인 단어다)가 된 지금이나 그때나 연간 급여총액에서는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물론 한시적인 호황일따름이다.

2015년 3월 경기 지방노동위원회에 여섯 명의 동료가 부당해고를 문제 삼아 복직투쟁을 시작했다. 사건의 피해당사자는 거의 삼배수였지만 대학이라는 특수 노동환경 탓에 어렵사리 시작한 투쟁이다. 절친한 선배는 하지 말라고 했다. 아내는 아무 말 없었지만 말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현재 진행형인 이 싸움에서 아직 외면적으로는 그 누구와도 언쟁 한 번 없었다. 그야 말로 조용한 싸움, 싸움 같지도 않은 답답한 싸움이다. 해당 보직교수(학장)와의 협의 자리에서도 아메리카노를 아이스로 마실지 설탕을 넣을지를 물어가며 웃으며 얘기했다. 기껏해야 한겨레신문에 사건보도 기사를 하나 내는 정도였고 그마저도 동료들과 겨우 협의를 이끌어낼 정도였다. 사건을 맡은 담당 노무사가 답답해서 화를 내기도 했다. 경기 지방노동위원회에서 승소했지만 대학은 중앙노동위원회로 재심을 신청했고, 8월 말 즈음 중앙노동위원회에서도 승소하게 되었다. 주문 내용은 원직복직과 해고 기간 동안의 임금차액을 배상하라는 것이었다.

노동위원회의 최종적인 행정명령에 대해 학교측은 법원에서는 달리 판단할 것이라 생각하여 행정소송을 진행시켰다. 노동위원회가 국가 행정기구이므로 행정명령의 법적인 정당성은 행정법원에서 심판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참조인의 신분이 되었다. 학교는 원고가 되고 노동위원회가 피고가 되고 우리는 피고의 참조인이었다. 노동위원회의 법률 담당자는 관례상 우리도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이 좋다고 해서 각출하여 변호사를 샀다. 행정소송도 삼심제인 상황이므로 지방행정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으로 절차적으로 이어진다. 2016년 5월, 1심에서 의외로 패소하게 되었다. 패소 판정이 나자마자 노동위원회 법률 담당자가 원고가 되어 다시 항소할 것이라는 의사를 우리에게 전달했다. 우리는 법률적인 신분이 참조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변호사와 계약서를 작성하고 비용을 각출했다. 이제 사건은 고등법원에 접수된 상황이며 9월에 심리가 열릴 예정이다. 대법원에서 이긴다하더라도 주위에서는 글쎄라고 다들 말한다.

 

연대를 가로막는 것들

아내가 이전에 같이 활동했던 선배 하나가 책을 낸 적이 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로 해고투쟁 일지를 출간한 것이었다. 아내는 그 선배가 동지애적인 결혼관계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혼을 했다고 말했다. 순간 겁이 났지만 대범한 척 잠자는 아들을 품에 안았다. 나는 내년에 오십이 되지만 내 아이는 네 살이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사건을 처음 시작하면서 더 많은 동료들과 뜻을 같이하고자 했다. 다들 연령대, 전공분야가 다른 만큼이나 가치관이나 판단기준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이 명백하게 해고자복직투쟁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도 있었지만, 1년 반 정도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기대하고 예상했던 것과도 조금은 다르다. 조금 더 느슨하게 말하자면, 이 시대에 노동자의 계급의식이라는 게 쌍용자동차의 투쟁이나 현재 금속노조의 투쟁에 있기나 한 것인가?

시간강사 노동자는 강의선택의 기회에서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학기 말 들려오는 핸드폰에서 학교 번호가 떴을 때 통화음을 누르는 손이 떨린다고들 한다. 학과장인 선배도 미안해서 직접 전화하지 못할 것이기에 학과 조교가 강사해촉 통보를 내린다. “아, 네. 그래요? 할 수 없죠. 알겠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다.

다행히 강의를 맡게 될 영광을 안고 뿌듯한 마음으로 강의 준비를 한다. 교양강좌든 전공강좌든 철학을 업으로 삼은 이들에게 삶의 문제를 비켜갈 수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철학의 문제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총체로서의 삶, 굴곡있는 시간을 관통하여 충만한 삶, 그것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을 담아 아이들과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철학자의 행복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의 지혜와 용기, 절제의 미덕을 칭송한다.

아래 한겨레 관련기사 참조

“[단독]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들에 ‘계약해지’ 일방통보 논란”
http://v.media.daum.net/v/20150909013006307?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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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돼지 취급이라도 해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를 새로 시작합니다.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본 코너의 정치적인 의견이나 입장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본 웹진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알립니다.


개·돼지 취급이라도 해주시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진섭(자유기고가)

“민중은 개·돼지로 보면 된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

주지하듯,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47) 공무원의 발언입니다. 2016년 7월 8일 저녁 한 신문사의 보도로 알려진 이 발언은 민중의 뒤통수를 제대로 내리쳤고 이튿날 내내 비난과 조롱, 풍자를 낳으며 포털 사이트를 뜨겁게 달궜습니다.

“99%의 개·돼지가 주는 세금으로 밥 처먹고 사는 놈이…”, “당장 파면해라”, “고위직 인사들 대부분이 이런 생각을 할 듯”, “기득권의 비밀을 누설하다니 승진은 물 건너갔군”, “교육부 폐지하고 농림축산식품부만 있으면 되겠다. 개·돼지만 있는 나라에 교육부가 웬 말?” 등등 인터넷에는 그야말로 격분한 민중들의 목소리가 빗발쳤습니다. 진부하지만 밤길 조심하라는 진심어린 충고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이번 주 출근길에는 각자 죽창이라도 들고 나올 기세입니다.

그런데 저는 생각이 좀 다릅니다. ‘좀’이 아니라 ‘많이’ 다릅니다. 민중을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라도 해주시겠다면 그저 성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38분마다 1명꼴로 하루에 3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나라 민중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어 먹고 살게 해주시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신은 2014년 궁핍한 생활고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한 이른바 ‘송파 세모녀’를 기억하는 가슴이 따뜻한 공무원임에 틀림없습니다. 국가도, 시장도, 이웃 주민도, 아무도 남을 돌보지 않는 이 사회에서 “먹고 살게 해주겠다”며 민중의 삶을 책임지겠다고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신은 노인빈곤율 49.8%를 자랑하는 이 나라에서 폐지 줍는 175만 명의 노인들 또한 갸륵하게 여기실 줄 아는 공직자임에 틀림없습니다. 뙤약볕 아래서 하루 종일 1kg에 46원하는 폐지를 주우며 한 달에 고작 10만~20만 원을 손에 쥐는 자들의 고통에 공감하시지 않고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발언임을 저희 개·돼지들은 잘 알고 있답니다.

이뿐이겠습니까. 2년 전(2014년) 납득할 만한 이유도 모른 채 바다에서 마지막 숨을 거둔 영혼들의 억울함도 잘 알고 계시리라 확신합니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 해주신다는 말에서 개·돼지가 당하는 죽음보다 못한 죽음은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결기가 느껴집니다. 적어도 상위 1%에 계신 고관대작들께서 잡아먹지도 않을 거면서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저희 민중을 해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소신 발언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개·돼지로 봐 주신다면 적어도 저희가 죽임을 당하는 이유는 분명할 테니까요.

이번엔 2015년 여름 자고 일어나기가 무섭게 메르스(MERS) 바이러스가 곳곳에서 출몰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 해주신다니 인수(人獸)공통 전염병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자부합니다. 메르스 사태처럼 숨도 마음대로 못 쉬고 억울하게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나아가, 구제역(口蹄疫)이 창궐해도 개·돼지 같은 저희 민중을 도살 처분하지 않으실 테죠. 지금까지는 구제역만 돌면 저희가 인간 취급을 받느라 진짜 개·돼지들이 땅 속에 매몰되었잖아요. 이제 모두 개·돼지가 되었으니 개·돼지 같은 저희들이 아프면 무상으로 치료도 해주시면서 먹고 살게 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경상남도 도지사께서 공공병원인 진주의료원을 폐쇄한 이유도 당신의 발언을 접하니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위한 병원 한 개보다는 개·돼지를 위한 수많은 공공병원을 짓기 위함임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당신이 칭찬받아야 할 이유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정부는 지난 10년간 저출산·고령화에서 벗어나고자 무려 152조 원을 투입했지만 효과가 없었습니다. 이게 다 ‘내 코가 석 자’에서 비롯한 현상이거든요.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해 연애와 결혼과 출산은 꿈도 못 꾸던 차에 단비 같은 소식을 접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제 개·돼지처럼 먹고 살게 해주시겠다니 그동안 못 낳은 새끼도 많이 낳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 벌써 배가 부풀어 오르는 것 같습니다. 나향욱 정책기획관님 덕분에 처음으로 희망이란 걸 가져봅니다. 모돈(母豚)이라고 하여 평생 애만 낳다가 죽는 어미돼지처럼 살 수 있다는 꿈이라도 가져볼 수 있어 행복합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애도 못 낳고 일찍 죽는 불상사가 인간 세상에 얼마나 많았습니까. 앞으론 저희 개·돼지 같은 민중의 출생률이 급격히 높아져 국익(國益)에도 도움이 되겠죠. 그리고 저희 개·돼지는 인간처럼 자연 수명이 길지 않습니다. 오래 살아봤자 20년입니다. 그러니 이제 고령화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겁니다. “민중을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 해주겠다”는 발언은 바로 며칠 전 정부에서 발표한 새로운 국가 브랜드인 ‘Creative Korea’를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발상이라고 확신 또 확신합니다.

이젠 젊은이들 보고 중동으로 가라는 말도 안 나오겠죠. 네 발 달린 짐승이 무슨 수로 중동까지 간단 말입니까. 중동가기 싫어하는 청년들의 마음을 간파하시어 개·돼지로 보고 이 땅에서 먹고 살게 해주신다고 하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더 놀라운 점은, 해당 발언이 보도되고 회자된 시점이 때마침 우리나라에서 제16차 ‘기본소득’ 국제대회가 열리고 있던 기간이었다는 점입니다(7.7.~7.9. 서강대학교). 기본소득(Basic Income)은 노동 여부, 소득·자산의 액수와 무관하게 무조건 일정 소득을 모두에게 보장해 주는 제도로서, 누구든 기본적으로 먹고 살 걱정은 없어야 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아시아 국가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열린 이번 행사 기간에 맞춰 나온 당신의 발언은 기본소득의 정신과 그 궤를 같이 한다는 걸 저는 곧바로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자동화 및 인공지능 등으로 인간의 일자리가 급격히 대체되고 있는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여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사도 바울의 옛 말씀이 설득력을 잃고 있는 요즘,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 해주면 된다”는 말씀은 ‘노동과 소득의 단절’이라는 시대 정신을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대기 발령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신을, 서울시·성남시 등 지방자치단체의 자율적인 복지 정책에 제동을 걸며 지방 재정에 목줄을 걸고 있는 중앙정부의 ‘기본수탈’의 정신과 정면으로 맞서는 ‘기본소득’의 적극적인 지지자로 임명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저는 결혼수당과 출산수당 지급 등의 공약을 내 건 허경영 후보 못지않게 민생(民生)을 최우선으로 삼는, 아니 견생(犬生)과 돈생(豚生)을 택한 매력적인 당신에게 제 한 표를 드리고 싶습니다.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고 하시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오늘은 간만에 네 다리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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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타클의 사회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는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이번 글은 건국대 철학과 전공과목에서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 영역본을 함께 읽었던 학생이 기말 과제로 제출한 글입니다. 


스펙타클의 사회

정승우(건국대 철학과)

우리는 풍요로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시대를 거치면서 문명과 과학 등의 발달로 인간의 권리는 계속해서 신장되고, 절대적인 재화의 양은 증가했다. 삶의 조건은 점진적으로 나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단적인 예로, 자취를 하고 있는 나에게 세탁기가 없는 삶보다 세탁기가 있는 삶이 훨씬 살기가 편하다. 그런데, 그것들과 비례하게 우리의 삶의 행복 또한 늘어나고 있는가? 나의 견해로, 행복의 절대량은 늘지 않았다. 수백 년 전 시대보다 삶의 여건이 무수히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보다 결코 현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이 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왜 그런 것일까? 외부 환경이 변화하고 있음에도, 왜 내적인 환경은 변화 혹은 나아지지 않는 것일까?

“스펙타클의 사회” 1장은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이란 책의 서문으로 시작한다. 그 서문은 기호가 기호화된 대상을, 복사본이 원본을 그리고 외양이 본질을 대체하는 것을 비판한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 또한 그와 같다. 아주 단순화 시켜, 이미지로 말할 수 있는 스펙타클이 개인의 삶 전체를 대체하고 있다. 1테제(“현대적인 생산조건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삶의 모든 것이 스펙타클들의 거대한 축적물로 나타난다.”)에서부터 34테제(“스펙타클은 이미지가 될 정도로 축적된 자본이다.)에 이르기까지 기 드보르는 ‘스펙타클’과, 스펙타클이 만연하고 있는 ‘스펙타클의 사회’에 대해 서술한다.

1테제에서 말하는 현대적인 생산조건이 지배하는 사회는 곧, 자본주의 사회를 말한다. 여기서 스펙타클은 자본주의와 병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이 모든 것이다. 사용가치는 사라져버리고 교환가치만이 중시된다. 모든 것에 값이 측정되어 본래 목적에 대한 고려는 사라지고 오직 그 값의 규모에 따라서만 가치가 매겨지는 것이다. 자본이 모든 것인 자본주의의 유일한 목적은 오로지 자본의 증대이다. 사실, 이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 권리의 신장과 함께 등장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서 개인들은 소유한 자본의 양에 따라 계급이 나누어진다. 특히 생산수단의 소유 유무로 개인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나뉘는데, 자본을 생산할 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노동자는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노동을 교환가치로 내세우며 자본가 아래에서 일을 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 ‘자본을 더 소유하는 순간 너는 언제든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다’는 자신의 특수한 논리를 통해, 그러한 계급의 나뉨을 정당화한다. 이 사회 속에서 개인은 ‘having’ 소유를 통해서만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다. 즉, 모든 것의 가치가 자본으로 매겨지는 사회 속에서, 인정 혹은 사회적 선망은 자본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에 개인이 적응하는 순간, 소외가 시작된다. 이 체제 안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되고, 노동의 과정에서 또한 소외되며, 인간으로부터도 소외되고 마지막으로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된다. 소외된 노동자의 비참한 삶은 자본가를 선망하게 된다. 즉, 자본을 선망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는 더욱 자신의 삶과 멀어진다. 자신과 자신의 삶의 분리, 자기 소외가 완전하게 실현되는 것이다. 개인들의 그와 같은 소외에 힘입어, 자본주의는 더욱 단단해지고 발전한다.

이 자본주의가 계속해서 자가 발전을 하여 스펙타클의 사회가 도래하게 된다. 이전의 자본이 하던 기능, 목적 등은 스펙타클이 그대로 이어받는다. 다르게 말하면, 자본이 축적되어 스펙타클이 된다. 이제 ‘having’ 소유는 ‘appearing’ 보여져야하는 것이 된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것이 자본 혹은 교환가치로 둘러 쌓여있었듯이,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모든 것은 스펙타클로 둘러 쌓여있다. 쉽게 말해, 교환가치로 환원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이미지화된다. 이제 노동자는 단순히 자본을 쫓지 않고, 자본이 보여주는 이미지를 쫓는다. 즉,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가상을 쫓는다. 하지만 그 가상은 동시에 물질적으로 환원된 실재이다. 스펙타클의 사회라고해서 이 세상과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얼어붙은 호수 위에 눈이 내려앉아 하나가 되듯, 스펙타클은 현실과 분리돼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존재한다. ‘벤츠’를 얻는 것이 벤츠를 사는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듯.

스펙타클의 사회는 파편화된 개인의 삶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스펙타클은 그러한 개인의 삶을 그자체로 통합해버린다. 자본주의 안에서는 모든 것이 돈으로 통합되었듯이, 모든 것은 스펙타클로 통합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때의 통합은 진정한 개인의 삶의 통합이 아니라 찢긴 채 분리된 삶을 단순히 획일적으로 뭉쳐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스펙타클에 의해 통합된 개인의 삶은 더 이상 생생한 삶이 아니라 허위의 삶이다. 왜냐하면 스펙타클 자체가 기만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이 단지 소유되는 대상이 아니라 노동자 혹은 개인의 삶을 지배하기에까지 이르는 자립적인 존재였듯이, 스펙타클 또한 단순히 수동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지 않고 자립적으로 움직이며 개인의 삶을 잠식한다. 스펙타클과 개인의 삶이 전도되는 것이다.

스펙타클에 의해 개인의 삶이 잠식된다는 것은, 개인의 삶이 부정됨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스펙타클은 보이는 것, 시각을 제외한 그 외적인 부분들을 부정해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개인의 실현은 ‘appearing’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자기 자신을 오직 시각적으로만 드러낼 수 있는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스펙타클을 통해서만 드러내진다. 그래서 스펙타클은 일종의 지도이다. 어떤 장소를 찾아가기 위해서 지도를 봐야하듯이, 스펙타클의 사회 안에서 개인들은 행위 하기 위해 스펙타클을 통해야한다. 스펙타클에 의한 삶의 잠식 혹은 전도는 스펙타클이 더 이상 허위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현실이 되어버렸다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제 ‘벤츠’가 없이는 더 이상 벤츠는 벤츠일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 스펙타클이 개인의 실제 삶의 부정이라는 것 혹은 개인의 삶을 점점 해체시킨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스펙타클은 자본주의가 발전함으로써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의 목적은 오로지 스펙타클 자체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스펙타클은 오로지 자본의 증대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회의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총체적인 것으로서 스펙타클을 보면, 그것은 자본주의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합리적 도구다. 즉,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결과이자 프로젝트이다. 자본은 소비를 통해 더욱 축적된다. 스펙타클은 바로 그 소비를 조장하고 정당화시킨다. 자본가는 스펙타클을 만들어서 개인들의 욕망을 부추긴다. 하지만 그 때의 욕망은 자본가에 의해 투여된 거짓 욕망이다. 개인의 실제 삶이 부정된다는 것은, 생생하게 경험되는 삶이 부정된다는 것이다. 생생하게 경험되는 것이 부정된다는 것은 스펙타클의 사회 안에서는 스펙타클 혹은 이미지만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스펙타클을 자본주의의 합리적 도구로 봤을 때, 스펙타클 혹은 이미지는 자본가에 의해 장치된 것이므로 이는 곧 개인의 삶이 자본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으로 나아간다. 개인의 주도적 선택은 이제 소멸돼버린다. 그렇게, 개인은 점점 자기로부터 소외되고 종국에는 개인의 삶이 산산조각난다. 이처럼 스펙타클은 권력 자체이다. 스펙타클의 사회는 자본주의 안에서 드러나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틈 혹은 모든 문제들을 더욱 더 견고하게 벌려 놓는다. 스펙타클은 개인의 일상에까지 침투하고 노동자는 더욱 더 스펙타클에 그리고 자본에 종속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안에서 군림하며, 스펙타클을 도구로 사용하는 자본가는 과연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실제 스펙타클은 자본주의에 갇혀진 의미를 초월한다. 스펙타클은 이미지 일반이다. 그런데 이미지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한편으로 이미지다. 칸트의 인식론에서처럼, 물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칸트는 지각을 통해 받아들인 대상을 ‘인식의 틀’을 통해 인식한다고 말하는데, 그렇게 받아들여진 모든 것이 물자체에 대한 인식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모든 것은 이미지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근접함의 정도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한 이미지는 본래 자립적이며 지배적이다. 최초로 받아들인 이미지는 우리의 인식을 통하여 떠올린 것이라고 하더라도, 한 번 만들어진 그 후로는 독립적으로 사고를 지배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새로운 사람을 보고 A라는 이미지를 가졌다고 가정하자. 이제 그 A라는 이미지는 내가 떠올리려고 하지 않아도 그 사람을 볼 때 저절로 떠오르게 되고, 그것이 그 사람에 대한 나의 판단에 계속해서 개입한다.
개인적 인식의 차원에서의 이미지가 아니라, 통합되어 칸트 식의 ‘인식의 틀’ 자체에 영향을 끼치는 이미지들이 있다. 중세의 ‘신’, 근대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현대의 ‘스펙타클’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들은 ‘인식의 틀’에 직접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마치 개인의 주체성을 건드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것들이 전혀 작용하지 않는 완벽한 주체성이란 것이 가능한가? 토마스 쿤은 과학 이론은 패러다임 속에 존재하며, 그 패러다임은 모든 과학적 탐구에 영향을 끼친다고 언급한다. 만약 현재의 패러다임이 무너진다면, 그것으로 패러다임은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패러다임이 무너지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그 패러다임을 대체한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인간에게 생생하게 경험되었던 삶이란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뿌연 연기 속에서 소외된 상태로 존재해왔다.

그런데 이 통합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 자신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그러한 통합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기인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한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결핍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러한 결핍을 외부의 무언가로 채우려고 한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 중 하나인 외로움을 생각해보자. 인간은 항상 외로움을 느낀다. 그리고 타인을 만나면서 잠시 그 외로움을 잊는다. 하지만 타인이 떠나면 다시 혼자 남게 되고 외로움은 여전하다. 그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다시 타인을 찾는다. 여기서 타인이 바로 통합 이미지 곧, 스펙타클이다. 스스로 존재함에 대한 불완전함 혹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인간은 외부에 무언가를 상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은 외부로부터 만족을 바라는 태도, 인간의 수동성이 통합 이미지, 스펙타클의 기원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가 자립적으로 움직이도록 하며 그것에 지배받는 것, 그 모든 과정은 인간 스스로의 선택이다.

다시, 자본가는 스펙타클로부터 자유로운가? 자본가조차 스펙타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가는 자본주의 속에서 자신들만큼은 능동적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소수의 자본가가 스펙타클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스펙타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스펙타클을 전면에 부각시키는 것뿐이다. 자본의 이미지화인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자본가는 단지 노동자에 비해 자본을 많이 가졌다는 것, 생산수단을 소유하여 노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똑같은 처지에 놓여있다. 자본가들이 자본을 추구한다는 그 자체가 그들이 결핍을 채워줄 외적인 존재, 즉 ‘스펙타클’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의 발전 혹은 삶의 조건의 발전과 개인의 행복이 무관한 것은 앞서 언급한 것들에서 비롯된다. 행복의 절대량이 증가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삶의 불완전성을 외부로부터 채우려는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나 해결하려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이 언젠가 사라지더라도 또 다른 ‘스펙타클’이 그 자리를 대체할 것이다. 하지만 스펙타클의 사회는 금방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스펙타클은 매우 강력하다. 그 강력함은 곧, 불완전한 인간의 소유욕과 비례한다. 인간은 자본주의가 발생시키는 많은 부조리한 것을 보면서도, 자본주의를 쉽게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의 소유욕을 개인적 차원에서 가장 잘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자본이 있는 자는 무엇이든 소유할 수 있다! “스펙타클의 사회”에서 말하는 이미지 또한 인간의 결핍, 소유욕을 채워주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자기실현은 언제나 ‘having’ 소유였다. 단, 그 소유의 대상이 달라진 것일 뿐.

과연 우리는 스펙타클 혹은 통합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의문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결핍이 없는 존재로 여길 수 있느냐, 실존 자체만으로 우리 삶을 만족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느냐로 귀결된다. 인간은 사회 구조를 끊임없이 인간 권리를 지향하는 쪽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무엇을 위해서인가. 바로 삶의 만족 혹은 행복한 삶을 위해서가 아닐까. 하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행복 혹은 만족은 외부에서 채울 수 없다. 집단 형성을 통한 혁명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능동적으로 보이는 이조차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다. 물론, 부조리를 받아들이고 개인적 차원으로 모든 것을 돌리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실존 자체에 대한 만족이 없다면, 인간은 끊임없이 외부로 시선을 돌릴 것이고 소외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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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피켓2030]

[피켓2030] 코너를 새로 시작합니다. 20대/30대의 사회에 대한 분노와 고발의 목소리를 담아내려 합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주변의 젊은 지인들에게 많은 소개 부탁드립니다. 리포트로 작성한 글이든, 페북이나 다른 SNS에서 썼던 글이든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나름의 전망을 제시하는 글이 있다면 언제든 추천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본 코너의 정치적인 의견이나 입장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견해이며, 본 웹진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알립니다.


나는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 한병철의 ‘피로사회’로 바라본 내 자신 –

최민국(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3학년)

하루하루가 피곤하다. 언제부터인가 이 피로감은 가실 생각을 하질 않는다. 잠을 푹 자고 일어나도 피곤이 몸에 걸린 족쇄처럼 나를 따라 다닌다. 이 피로는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무것도 제대로 하고 있는 건 없다. 모든게 귀찮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 공부도 노는 것도 전부 귀찮다. 그냥 매대에 널린 생선들처럼 침대에 가만히 누워 빈둥대고 싶다. 뭔가를 한다는 것에 대한 의욕이 없어 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내 자신이 한심해지고, 내 자신을 구박한다. 남들과 나를 비교하고 초라해진다.

왜일까? 나는 왜 이렇게 변해 버린 걸까? 시간을 거슬러 고등학교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그때는 하나의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대학에 가는 것. 수능을 잘 보는 것. 이 두 가지 목표만을 향해 나를 채찍질 해왔다. 가끔은 내가 이렇게 공부해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을 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그렇게 나를 다그쳐 달려온 길에는 몇 가지 타이틀이 놓여졌다. 그리고 그 길은 그 곳이 끝이었다. 그 길은 내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전혀 알려주지 못했다. 나는 내가 정작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알지도 못했고 그저 이 허울만을 위해 달려 왔던 것이었다. 그때는 거창한 목표였던 줄 알았던 그것이 실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목표를 이루게 되면 나의 삶도 자연스레 다음 과정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다. 나는 어느새 사회의 한가운데 덩그러니 던져져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아이와 같이 어디로 갈지를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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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온 인생은 어쩌면 한병철이 제시한 ‘성과주의의 피로사회’에 충실한 삶이 아니었나 싶다. 내게 세상은 언제부터인가 ‘너는 할 수 있다.’ 라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천에서 용 나듯 바닥부터 시작하여 성공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며 너희도 노력하면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프다하면 ‘힐링’이라는 명목으로 다 괜찮다고 말했다. 그때는 원래 아픈 거라면서. 노력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회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하도록 재촉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뒤쳐지고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성공과 실패에 대해 나는 ‘노력’이 부족한 나 자신을 탓하게 됐다. 성과에 매몰된 삶을 살았던 나는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사회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 이전에 나의 결점을 찾게 된 것이었다. 처음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똑바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더하여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일들을 해 가는데 있어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전혀 고려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자신에 대한 성찰도 없이 그저 사회가 제시한 목표를 따라 충실하게 일을 수행하는 그런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또한 이런 삶속에서 내 자신을 끊임없이 착취했고 그 끝에 탈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된 상태까지 도달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한병철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사색할 여유를 가지고 긍정적 피로를 만들어 낸다면 더 이상 이러한 성과에 집착하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좀 아쉽다. 지금 이 사회를 살아가는 청년들이 자기 자신의 성찰과 사색이 부족해서 이렇게 성과를 만들어 내는데 집착하는 것일까?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돌아 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좌절하는 모습을 보았다. 왜 그렇게도 노력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자신의 꿈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야하는 것일까? 이러한 상황은 성과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구조가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도 합당한 보상을 받을 수도 없는 환경에서 사색을 통한 성찰만이 힘을 발휘하기는 어렵다. 쉽게 말하자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더라도 돈벌이가 안 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 일만을 하면서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사회는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 마치 대기업에 들어가거나 사회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을 이상적인 삶의 형태로 만들어내고 사람들이 그 방향을 향해 달려나가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사회가 제시하는 주류에 속하는 길은 너무도 좁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길에 들기 위해 열심히 경쟁하고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밟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 길에 들어서지 못한다면 삶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사회와 기업의 좋은 부품이 되기 위한 레이스같다.

이런 치열한 레이스 속에서 내가 여유롭고 싶다고 여유로워 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한 가지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사회 구조를 하나하나씩 바꾸어 나가는 것. 말로는 너무나 쉽다. 하지만 요즘 들어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이러한 구조가 바뀔 수 있냐는 의문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을 모르고 구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왜 움직이지 못하고 이러한 상황을 바꾸지 못하는 것일까? 결국은 자신이 당장 먹고 살길이 없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하루 살기 급급한 상황에서 결국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내 눈앞에 던져진 문제들뿐일 것이다. 더 큰 문제들을 알더라도 애써 그것들을 무시하고 다시 일상의 문제들로 눈을 돌린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이다. 무척이나 절망적인 상황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절망할 수는 없다. 이 상황 속에서 적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지는 않다. 먼저 우리는 이 문제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들이라고 치부해 버릴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이 문제들을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질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불씨라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사회를 똑바로 보고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잘못된 것들에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잘못된 것들을 잘못된 줄 모르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은 없게 하여야 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해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서서히 작은 일상의 사소한 부분부터 바꾸어 나간다면 지금 당장 바뀌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의 미래가 그리 절망적이진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성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한다고 말하였다. 즉 우리가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에만 어떤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다. 우리가 변화 하지 않으면 바뀌는 것은 없다. 나는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가? 오늘도 질문을 던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