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맞이하며 [시대와 철학]

개혁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맞이하며

 

정동훈(2018-시민대학 수강)

 

조인성 주연의 ‘더 킹’은 검찰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영화의 주인공 태수는 목포를 기반으로 하는 건달의 아들이며 동네에서 알아주는 ‘양아치’이다. 어느 날 태수는 한 주먹도 아까워 보이는 검사에게 아버지가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공권력의 무서움을 실감하며 검사의 꿈을 품는다. 우여곡절 끝에 검사가 된 태수는 결의를 다지며 정의로운 검사로 살아가려 노력한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과 막막한 현실의 벽에 굴복한 태수는 결국 정치검찰의 길을 선택한다. 영화는 주인공 태수라는 인물을 통해 그동안 현대사에서 검찰이 어떻게 권력과 유착하여 기득권을 수호하고 민중을 탄압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검찰의 모습이 마치 영화 ‘더 킹’의 한 장면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대한민국 검찰의 문제를 요약하면 ‘너무 많은 권한’과 ‘견제를 받지 않는 집단’이라는 점에 있다. 대한민국은 건국 이래 근대적인 검·경찰 제도를 도입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경찰인력을 대부분 일제 치하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을 그대로 대거 활용했다. 친일파가 가득한 경찰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 당시 한국의 제도를 만들던 인물들이 선택한 방법은 인원이 적은 검찰에게 강력한 권력을 주어 경찰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최선의 방법이었을지 모르나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선택은 검찰을 막강한 힘을 가진 괴물로 만들었다. 검찰은 총 2천여 명 남짓한 인원으로 11만 명이 넘는 경찰을 지휘·감독하며 수사, 영장, 기소, 공판 등등 사실상 법조의 전 영역에 있어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검찰은 견제 받지 않는다. 정치권력은 서로가 서로를 감시한다. 의회가 정부를 정부가 의회를 견제한다. 또 정치권력은 궁극적으로 시민의 선출이라는 방법을 통해 평가를 받고 감시를 받는다. 하지만 검찰은 선출직이 아니다. 그렇기에 선거라는 민주사회의 가장 큰 시험으로부터 자유롭다. 형식상 법무부의 지휘·감독을 받지만 형식일 뿐이다. 검찰을 통제할 정치권력은 언제든 수사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기에 건드리기 어렵고 시민에게 검찰은 개인에게는 감히 저항조차 두려운 공권력이기 때문이다. 마치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마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검찰이 검이라면 검을 쥘 존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선택지는 두 가지다. 협력 혹은 개혁이다. 전자는 보수정부의 선택이었다. 민주화 이전 독재정부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지난 보수정부만 생각해도 검찰이 얼마나 권력과 유착하여 공생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후자는 노무현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검찰에게 개혁은 개혁이라고 들리지 않는다. 전쟁을 하자는 말로 들릴게 당연한 일이다. 자신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힘을 없애겠다는 말이니까. 노무현의 검찰개혁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그는 다시금 유착한 권력과 검찰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다시 검찰개혁을 선언한 정부가 집권했고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고 있다. 그리고 검찰은 다시 한 번 전쟁을 시작했다.

 

현대적인 사법체계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선 사적제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사적제제를 인정하는 순간 사회는 폭력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펼쳐질게 뻔하다. 대신 국가는 ‘국가형벌권’을 인정하며 개인의 ‘복수’를 금지하는 대신 직접 나서서 범죄를 ‘처벌’한다. 검찰은 이러한 국가형벌권을 담당하고 실현하는 기관이다. 검찰은 선량한 시민을 범죄로부터 보호하며 악을 처벌하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정의를 수호하는 막중한 의무를 지고 있다. 그래서 그토록 강력한 권한을 검찰에게 준 것이다. 하지만 누차 말했듯 그동안 검찰은 자신의 권한을 사유화하고 권력과 유착하여 결과적으로 국가형벌권의 남용이라는 비극을 불러왔다.

 

전직 대법원장의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이 사법부의 문제를 담고 있다면 스폰서검사, 떡값검사 등의 부패검사들 그리고 검사 출신 전관예우 변호사들의 모습은 검찰의 문제를 그대로 담고 있다. 수사 과정부터 재판까지 하나의 사건에 있어서 검찰의 권한은 때로는 대통령의 그것보다 강력하기에 그 자체가 비리와 유착을 부르는 원인이다. 또한 견제 받지 않기 때문에 내부의 비리가 고발된다 한들 언제든 제 식구 감싸기가 작동한다. 설사 비리로 인해 스스로 옷을 벗게 만든다 해도 그 자체가 전관 출신 변호사가 되어 활개치고 다닐게 뻔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며 권력의 원천은 국민이라고 헌법은 천명하고 있다. 국가기관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던 상관없이 국민의 것이다. 국가기관은 국민을 향해야한다. 검찰도 예외일 수 없다. 검찰의 주인은 국민이고 검찰은 국민의 검찰이어야 한다. 하지만 국가권력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지만 동시에 그 작용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여지가 있다. 그렇기에 민주국가의 헌법은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해두었다. 바로 권력분립이다. 국가권력을 나누어 견제와 균형을 꾀하고 그 권한과 책임의 한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려는 기본원리이다. 권력분립의 입각해서 볼 때 검찰은 어떠한가? 너무도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견제 받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검찰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이미 그 권한의 행사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이 과도하게 침해 될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존재한다.

 

물론 검찰개혁엔 다양한 쟁점들이 있다. 검찰 스스로가 개선해야할 부분도 있지만 제도 자체를 개선해야 하는 문제들이 있다. 검찰 권력의 문제가 너무 많은 권한과 견제 장치의 부재로 요약된다면 제도 개선의 쟁점도 ‘권한을 나누고’ ‘견제 장치를 만든다’로 요약할 수 있다. 전자의 대안이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다. 이것은 2018년 행안부와 법무부 사이에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관련 법률이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다. 후자는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 이른바 ‘공수처’의 설치이다. 이것도 어려운 산이다. 제 1야당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 다 포기할 수 없지만 둘 다 얻기 어려운 아주 힘든 상황이다.

 

아직 검찰은 무서울 것이 없다. 검찰개혁은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했고 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와 여당의 힘이 점점 빠져가기 때문이다. 자신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제 1야당이 아직 버티고 있으며 혹여나 그들이 정권을 탈환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승승장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아도 칼은 칼이다. 내가 휘두르기만 하면 모든 것을 도륙할 능력이 있어도 휘두르는 사람도 얼마든지 베일 수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두 명의 전직 대통령들을 생각한다면 알 수 있다. 검찰은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재벌도 차가운 감옥으로 아니 죽음으로도 내몰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힘이 있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정치인도 재벌도 무서울 게 없는 존재라면 그들만큼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일반 국민들은 얼마나 나약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을지. 검찰개혁의 명분과 출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하는 이유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노무현의 한을 풀기 위해서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다. 검찰이라는 거대한 권력기관 앞에 항변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쓰러질 바로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내가 불행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피켓2030]

내가 불행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작별을 고하며

 

이영주

 

. 지금의 나는 어떤 상태일까?

첫 수업시간에 스무 살이라는 시를 교수님이 칠판에 적으셨다.

너무 행복해서 길에 있는 돌멩이에다가도 입맞춤을 하고 싶었다는 스무 살, 나의 스무 살은 어땠던가. 나는 그때쯤 정말 많은 책을 찾아 읽었었다. 스무 살, 나에게 있어 처음으로 예상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삶이 흘러갈 수 있다고 알게 해준 시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의 말씀을 잘 따르던 그저 평범한 ‘옆집 착한 딸’ 중 한명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입학하기 전까지 나는 항상 또래집단에서 ‘우월한’ 쪽에 속했다고 자부할 수 있다. 딱히 하고 싶었던 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부모님은 의사가 되길 원하셨고, 나도 나쁠 것이 없어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의사가 될 줄 알았다. 고등학교, 처음으로 조금 더 큰 세계로 한 발짝 나아갔고, 나는 그곳에서 정말 많은 다양한 출신지의 친구들을 만났다. 나와는 다르게 뚜렷한 목표가 있던 친구들도 많았고, 돈과 시간, 어느 쪽이고 열심히 서포트 해주시는 부모님을 가진 친구들도 있었다, 매일이 경쟁이라던 고등학교 시절 친했던 친구와 필기 하나로 틀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나에게 버팀목은 가장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공유하던 친구들이었다. 그런 친구들과 정말 사소한 오해와 시간이 쌓여 멀어지고 나서, 세상의 전부와 같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 안의 생활이 과연 행복할 수 있었을까? 고등학교 3학년이었지만, 미래를 위한 공부보다는 내일의, 아니 오늘의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이 쉽지 않았던 열아홉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어느새 스무 살, 성인이 되어있었다.

내가 책을, 그중에서도 자기 계발 서에 집중해서 읽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냥 이렇게 스무 살을 보내면 안 될 것 같았고, 그렇다고 어떤 것을 시작하기에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에게는 어떠한 자격증도 없었고, 하고 싶었던 것, 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나보다 더 오랜 삶을 산,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읽는 그 책의 저자 중 하나쯤은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내가 그 책을 통해서 인생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책으로의 도피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행은 채 3개월을 가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 이렇게 대학생이 되어 서 있다. 나는 지금 행복한 것일까? 아니면 불행한 것일까?

 

.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누가 만들까? – 우리 사회는 왜 아플까

짧은 인생동안 가장 중요한 이벤트였던 것이 수능이었기 때문에, 이번 이야기 역시 수능과 관련해서 시작해보고자 한다. 고3이었을 때, 수시 원서를 넣으면서 친구들과 만약 원하는 대학에 붙지 못하고 하향해서 대학을 가야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재수는 없다! 라고 이야기했던 것에 비해 어떤 친구는 1년이라는 시간을 더 투자해서라도 원하는 대학에 가는 것이 의미가 있다, 혹은 학교를 다녀보고 다시 공부할지 생각해본다는 친구도 있었던 것처럼 각자의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맞춰서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우리가 어떤 특정 사건에 대해 각자의 기준으로 그것을 판단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행복도 마찬가지 아닐까? 행복과 불행에 대해 갖는 나의 의문점은 크게 두 가지이다.

1)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어떤 것일까? 2) 행복하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꼭 불행일까? 그리고 행복하지 않은 삶은 문제가 있는 삶일까?

첫 번째, 즉 행복과 불행의 기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면, 나는 우리사회에 만연하게 사용되고 있는 헬조선이라는 단어, 그리고 그 단어에서 말하는 우리 사회가 왜 헬조선인지 규정하는 기준은 과연 누가 정했는지 궁금하다. 나는 모든 감정은 상대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왜 모두 헬조선이라는 말에 이렇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사회는 한정된 자원으로 인해 인적 자원을 통한 성장을 이룬 나라이다. 나라의 교육 역시 성적의 서열화, 즉 줄 세우기를 통해 평가하고, 남들보다 위에 있어야하는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더 좋은 성적을 받아야 하고, 대기업이나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기업이 원할만한 남들보다 더 많은 스펙을 가지고 자신을 마케팅 해야 한다. 끊임없이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에 의해 얼굴도 모르는 엄마의 친구, 아빠의 직장동료들의 자식들과 비교당하고, 그 아이들은 커서 사회에서 비교를 당하고, 자신의 자식들에게 자신들이 겪었던 비교를 반복할 것이다. 사회의 큰 변화가 있어서 이러한 사회구조가 변화하기 전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와 같이 타인의 행복의 기준에 맞추어서 자신의 삶을 바라보면 어떤 삶을 살더라도 만족하기 쉽지 않고, 헬조선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각자의 행복의 기준이 다르고, 각 나라별로 사회구조와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행복의 기준이 우리나라에서는 유동적이지 않게 적용되는 것은 아닐까?

잠깐 동안 내가 학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재수생도 아닐 때 주변에서는 나를 걱정한다고 하고 부모님께, 그리고 나에게 ‘뭐 해먹고 살래’와 같은 걱정과 같은 부담을 주곤 했다. 부모님은 그 시기동안 정말 하고 싶은 것 –공부가 아니어도 좋으니-를 찾으라고 했었지만, 사실 정말 오랜 시간 내가 뭘 잘하고, 좋아하는지를 잊고 살았더니 어떤 것을 내가 앞으로 배우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커져갔다. 결국 다시 공부를 택해서 이렇게 대학생이 되긴 하였지만, 앞으로 남은 생이 이렇게 긴데 그 짧은 시간동안 고민해서 어떤 일을 배웠다고 내가 그 일을 평생 즐겁게 하면서 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여전히 자신하지 못한다. 공부는 나에게 일종의 도피처로 작용되긴 하였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나는 대학에 진학함으로써 더 많은 경험의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나의 행복의 기준으로 본다면 나는 장기적인 나의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결정하고 결과를 얻는 과정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니 행복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두 번째, 행복하지 않다고 그것이 꼭 불행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사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나는 행복과 불행, 이러한 감정이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지 않아서 느끼는 이 불행이라는 감정을 마냥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잔병을 앓으면서 병원에 자주 가고, 이를 통해서 큰 병을 예방하기도 하는 것처럼, 삶에 있어서 불행은 때로는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데 좀 더 행복해지기 위한 삶의 방향을 재정비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읽었던 에세이 중에서 인상 깊었던 ‘스물아홉 생일, 일 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라는 책에서 주인공 아마리는 스물아홉 자신의 생일날 자신의 불우한 처지, 오랜 시간 사귄 남자친구와의 결혼이 불확실해 지고, 파견직 직원으로 살아가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여자로서의 삶이 끝났다고 생각해 정확히 일 년 뒤, 서른 살의 자신의 생일이 오면 죽기로 결심했던 사람이, 죽음을 결심하고 나서 자신의 개인적인 다짐 –라스베이거스에서 인생을 건 한판- 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면서 점차 자신의 삶에 애정을 가지고 마침내 게임에서 이기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엔딩을 보면서, 그녀에게 있어서는 죽음까지 생각했던 그러한 이유들이 나에게는 빈약하다고 느끼는, 개인의 기준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이 다를 수 있다는 생각과, 끝을 정해두고 나서 다시 자신의 삶의 소중함을 느끼고 열심히 살 것이라는 원동력을 부여받는 것을 통해, 가장 불행했던 순간에서 그동안의 자신을 뒤돌아보고, 재정비함으로써 결국 앞으로의 행복한 삶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우리사회는 구조적으로 많은 문제를 가진, 개개인이 불행함을 느끼는 아픈 사회임은 맞다. 하지만 그 사회를 이루는 개개인이 진정한 자신의 삶의 행복과 불행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사회도 변화하고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 그래서 나는 충분히 잘 삽니다

세 번째 단락의 제목은 내가 좋아하는 광고의 카피문구에서 따왔다. 여전히 내 주변에는 현재의 나의 위치가 아쉽다고, 너는 더 큰 잠재력을 가진 아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권유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지금 내가 어떤 공부를 하고 있고, 그것에 대해 어떤 마음인지 스스로에게도 확신이 서지 않아서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이야기 하지 못하는 부분은 분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충분히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굳이 하고자 하는 이유는, 내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나 스스로에게 가장 많은 관심이 있다고, 나는 지금 어쩌면 지쳐서 쉬어가고 싶은 마음에 내 스스로에게 행복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는 부분까지도 고려해서 행복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 이렇게 바쁘게 과제를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친해지고,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나를 위해 하루하루 지내는 이 시간이 나에게는 너무 소중하다. 남들이 봤을 때는 성공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앞으로 힘들 일이 많을 수도 있고, 고민도 생기겠지만, 그 상황 역시 나에게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에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들을 다루고 있다.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에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여자와 평범한 남자의 사랑을 정신과 의사인 여자주인공은 그들의 사랑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사랑을 응원한다고 이야기 하는 부분이 있다. 미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그녀는 왜 그들의 사랑을 응원한다고 이야기했을까? 비록 행복한 미래가 기다리는 관계가 아니더라도, 분명 중간중간 두 사람에게 쉽지 않은 시간들이 지나가겠지만, 서로를 사랑하고 지금의 관계에서 행복감을 느낀 그들에게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현재 그들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볼 이유가 있을까? 다가오지 않을 미래를 그들이 어떻게 해쳐나갈지 우리는 알 수 없는데 미리 걱정한다는 명목으로 그들에게 불안함만 심어주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러니 정말 나를, 누군가를 위한다면 걱정과 불안보다는 믿어주고 응원하는 것이 그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는 방식이라고 이야기 해주고 싶다.

 

. 내가 불행하다고 말하는 이들과 안녕하기

웃기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동굴 속의 죄수들처럼, 매트릭스 영화에서 주인공 네오를 배신한 사이퍼의 선택을 이해하고 존중한다. 진실을 알고 선구자가 되어 후대의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는 그러한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지금의 나의 평온함과 행복을 깨고 불안하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세계에 발을 딛는 것이 과연 쉬운 선택일까? 진실을 알고서도 덮고 현재에 안주하는 사람에게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현실은, 물론 부정할 수 없고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 현실을 향해 다 같이 나아갈 것이다. 삶에 있어서 큰 변화이기도 하고, 우리가 선택하고 마주해야 할 진실이기도 하겠지만 우리가 당장 그 현실과 같은 불안을 안고 매일을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경험은 우리에게 깨달음을 준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나를 더 나은 선택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현실적인 말,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걱정을 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마지막으로 내가 여전히 불행한 상황이라고 말하는 그들과 작별하려고 한다. 이 ‘안녕’은 그들과의 헤어짐과 동시에 나 스스로의 평온함, ‘안녕’을 추구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길게 행복과 불행,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이야기 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나를 가장 잘 아는 지금 나의 선택을 존중하고, 불안과 불행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들과 거리두기 -작별하기- 를 선택한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쩌면 지금 이 선택에 대해 미래에 후회할 수 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진정 필요한 사람은 나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임을 말하고 싶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미리 불안에 떨지 않는 것, 이것이 나의 행복의 기준이다.

나는 단지 지금의 나에게 충실하며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싶을 뿐이다.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⑤ 권리 대 권리의 충돌, 이율배반과 비판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⑤

 

권리 대 권리의 충돌, 이율배반과 비판

 

박종성(한철연 회원, 건국대)

 

 

새해가 밝았다. 우리는 새해가 되면 서로에게 인사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러나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인사를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은 시혜적이지 않는가! 마치 무슨 은혜라도 받으라는 것으로 들린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회보장은 국가, 사회가 우리에게 무엇을 베풀어주는 것, 시혜, 은혜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의무, 책무이다. 사회계약론적 관점에서도 그러하다. 이런 이유로 오래 전부터 나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 대신에 “새해 복 많이 만드세요.”라는 말로 새해 인사를 한다. 내가 나를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과연 ‘나는 나인가’라는 의문 때문이기도 하다.

잠시 신문 기사를 상기해 보자. “지난 11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내년 8월 1일부터 시행되는 강사법은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는 대학과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강사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온 문제다. (<교수신문> 946호, 2018년 12월 3일 자 참조)”

 

모순과 이율배반

 

위 신문에 나오는 강사법과 관련된 상반된 주장을 정리해 보자. 먼저 대학의 주장은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 이 주장에 대항해서(contra/Wider) 강사들은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diction/spruch). 권리 대 권리의 충돌, 곧 모순(contradiction/Widerspruch)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상품교환이라는 틀 속에서 노동력의 구매자(학교)와 판매자(강사)는 각각 주장과 주장, 옳음과 옳음, 각각의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는 주장, 곧 권리(nomos)와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주장, 곧 권리(nomos)는 상품교환의 규칙 속에서 이율배반(Antinomie)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양자의 관계는 적대관계(Antagonismus)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모습을 칼 맑스는 자본의 일반정식(M-C-M′)에서 ‘평균 노동일’을 둘러싼 구매자의 권리와 판매자의 권리의 충돌로 드러나는 모순과 이율배반을 밝히고 있다. 노동력을 구매한 학교는 노동력의 지출을 늘리는 방향을 취할 것이고 노동력을 판매한 강사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함부로 쓰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전자는 노동력의 지출을 늘려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고자 하기 때문이고, 후자는 잘못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했다가는 다시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품교환 틀 속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말하자면 강사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함부로 사용하게 되는 것은 착취로 나타날 것이고 대학의 입장에서 구매한 노동력의 지출은 잉여가치로 간주될 것이다. 같은 사건이 착취와 잉여가치라는 두 가지 입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맑스가 잉여가치를 착취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상품교환의 규칙 또한 당파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맑스는 이러한 이율배반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먼저 권리와 권리의 충돌, 그 모순을 재판하는, 혹은 판단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더 이상 이성(logos)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다. 다시 말해 더 이상 논리(logos)가 작동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본의 일반정식(M-C-M′)에 자기 증식하는 가치라는 자본은 허위이고 가상이라는 점이다. 맑스가 변증법(Dialektik)을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가상과 허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가상의 이면에는 노동력의 지출을 둘러싼 투쟁이 있다. 노동시간을 둘러싼 적대관계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강사법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의 문제를 모순, 이율배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순의 해소는 ‘힘’이라는 맑스의 견해와 지난 3일 부산대 시간강사 파업 17일 만에 ‘고용안정’ 합의안을 도출하였다는 기사는 공명하고 있다. 한 쪽의 힘이 커지면 다른 쪽의 힘은 작아진다. 이것이 모순이다.

 

역설과 비판

 

그런데 우리는 강사법을 둘러싼 모습 속에서 역설(paradox)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사법과 관련하여 대학의 견해(doxa)는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이다. 이것에 대항해서 반대방향, 다른 방향(para)의 견해, 이를테면 강사들의 견해인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생겨나는 것, 이것이 역설(paradox)이다. 다시 말해 강사법은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것이고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다양성의 저해’이고 ‘교육의 질 향상’이다. 한 쪽의 견해가 커지면 다른 쪽의 견해도 커진다.

이 역설을 통한 비판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삶의 위기(crisis) 때문에 비판을 하는 것이다. 18세기 유행어였던 ‘비판’(criticism, critique, Kritik)의 어원은 그리스어 krino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구별하다(differentiate), 선택하다(select), 판단하다(judge), 결정하다(decide)”이다. 우리의 삶의 위기에 대해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비판과 위기를 생활화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고’,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며, 어떠한 비판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인지 ‘판단하여’,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비판은 삶을 교정하는 비판임과 동시에 삶을 넘어서는 이행으로서의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전 맑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체”를 강조하였다. 현재 우리 사회는 바로 그러한 시간성과 역사성 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맑스가 역설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단순히 ‘교정’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역설을 보여주었듯이 말이다.

 

가치의 거울에 비친 강사들의 삶

 

일찍이 맑스는 가치형태에 대한 연구에서 등가형태에 대한 착각을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설탕 한 봉지의 무게가 추에만 있는 고유한 성격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설탕 한 봉지의 무게는 설탕 한 봉지와 추와의 사회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적 관계인가에 따라 설탕 한 봉지의 가치가 변화되듯이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강사들, 곧 비정규직의 삶의 가치는 사회적 관계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강사법을 둘러싼 힘의 관계는 그러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상품 세계의 한 시민이 되기 위해 살아간다. 그러면서 상품으로서의 우리들의 가치는 등가형태인 ‘가치의 거울’, ‘대상성’, ‘가치영혼’, ‘유령적 대상성’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나의 가치로 마주하고 있는 ‘대상성’이 자연적 속성과 상관없듯이, 강사들은 그 자신의 자연적 속성으로 비정규직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비정규직이다.”라는 것은 ‘나=비정규직’인데, 이는 내가 비정규직의 유전자를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가 비정규직이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상품으로서의 강사들이 일반적 가치형태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맑스의 비유로 말하자면, “개인 A가 개인 B에게 왕으로 섬김을 받으려면 B의 눈에 왕이 A의 몸으로 나타나야”한다. 이것은 B의 포기, 굴복이다. 달리 말하면 상품-가치-일반적 등가형태는 시민-주권-군주(정부)의 모습과 유사하다. 상품의 가치 표상이 일반적 등가형태이듯 시민의 주권 표상은 군주(정부)이다. 이 관계에서 시민의 주권 표상이 곧 군주라는 것은 군주에 시민이 복종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번 강사법과 관련된 권리들의 충돌 속에서, 강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강사들은 상품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가치를 ‘불안정 노동자’로 표현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나마 ‘상품 강사들’은 능동적이다. 반면에 대학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강사들)가 자신의 가치를 ‘불안정 노동자’로 인정받으면서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명확히 수동적이다.

베드로가 바울을 통해서 자신을 마주했듯,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무엇을 마주하고 있는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우리네 삶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나의 결단인가, 아니면 비정규직이라는 단일한 등가형태로 우리네 삶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나의 굴복인가?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의 글귀가 떠오른다. “나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다른 한편에선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프레디 머큐리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④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④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한길석(한철연 회원, 가톨릭대)

 

나는 2008년 박사 학위를 수료한 상태로 지방의 모 국립대학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했다. 박사 학위 소유자가 아니면 강단에 설 수 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운 좋게도 나는 선배들의 배려로 강단에 설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국립대학의 강사료는 사립대학의 그것보다 훨씬 후하다. 더구나 당시에는 정부에서 강사들의 생계 안정을 위해 국립대 강사료를 시간당 10만원 수준까지 인상한다는 정책 목표를 추진하고 있었던 덕에 나의 주머니 사정은 타 강사들에 비해 조금 나았다. 그래도 한 해 수입은 2천 만 원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전북 지역에 있는 대학에 출강할 때는 9시 강의에 맞추려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첫 차를 타고 근 3시간을 달려가야 했다. 그날 강의를 마치면 다음날 강의를 위해 값이 헐한 모텔에서 하룻밤 묵고 또 아침 첫 강의를 시작하곤 했다. 강의료의 일부는 늘상 약값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생활이었지만 생계와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면 늘 다음 학기에 강의를 할 수 있을지 노심초사하곤 했다. 방학 동안에는 아무런 수입이 없어 외출을 극도로 자제하는 일이 많았다. 덕분에 공부에 전념하게 되었지만 편한 마음으로 학문에 전념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은 언제든 맞게 마련이다. 한 학기가 지날 때마다 담당 강좌 시수가 줄어들더니 2012년이 되자 내가 출강하던 모든 대학에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 ‘드디어 박사 논문에 전념할 수 있는 기회가 왔구나’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자 했지만, 불현 듯 눈앞이 캄캄해 지는 건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한 학기동안 손가락만 빨고 지내다가 선배들의 주선으로 집에서 그다지 멀지않은 수도권의 모 대학에 출강할 수 있었다. 덕분에 박사 논문을 마치고 전임교원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생계 걱정은 다소 접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늘 두렵고 불안했던 시절이었다. 만성피로와 스트레스로 통증을 달고 살았다. 저축은 생각지도 못했고 결혼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생계를 위한 강의를 하다 보니 교육에 대한 열정과 학문에 대한 사명감은 사그라들고 말았다. 연이은 강사들의 자살 소식에 마음은 무거워져 갔다. 외롭고 춥고 비참한 시절이었다.

어느 결에 강사법이 제정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한 편으로는 반가웠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걱정스러웠다. 제2의 비정규직 보호법이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많은 강사들이 강사법 제정을 반대하는 역설적 상황이 몇 해간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진통 끝에 강사법이 통과되었다. 교육부에서는 관련 예산을 편성하면서 강사법의 실행에 대학들이 협조하기를 바라고 있지만 대학들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하다. 대량 해고가 필연적이라는 전망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면서 어느덧 강사 해고는 불가피한 현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를 잡아 나가고 있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현실인 양 간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강사 대량해고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이다. 대량해고에 대한 예상은 그것의 현실화를 위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비극을 전망하는 것이다. 불길한 예언의 쓸모는 들어맞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긋나게 함에 있다.

우리가 알고 있고 살고 있는 사실은 이러하다. 강사법이 마련되었다. 만족스럽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은 방학이 두렵고 불안하기만 한 강사들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를 명령하고 있다. 근대 사회에서 법은 당사자들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한 실증적이고 강제적인 힘이다. 일단 법으로 제정된 이상 강사들을 쉽게 내치지는 못한다. 아무런 무기도 없던 강사들에게 드디어 의지해 볼만한 합법적 무기가 생긴 것이다. 이제 강사들이 할 일은 변변찮음을 탓하며 힘들게 마련된 무기를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손에 익도록 활용하는 것이다. 이미 여러 학교에서 이 무기를 들고 대학에 맞서고 있다. 부산대에서는 강사들이 파업에 나섰으며, 고려대에서는 강사법을 핑계로 추진하려 했던 대학 구조조정 방안을 무산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정치적 실천 운동과 함께 할 때 법의 효력이 구현된다는 점을 잘 보여준 사례다. 입헌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은 각자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자 하는 정치적 실천 없이는 만들어지지도 강제력을 집행하지도 못한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일을 불가피한 현실인 양 여기는 어리석음은 일어나지 않은 비극의 힘을 과대하게 키울 뿐이다. 할 일은 한 가지다. 강사법이 명령하는 바를 대학 사회에 뿌리내리게 하는 정치적 실천을 지속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운동의 조직적 실천은 2019년 5월에 마련될 시행령에서 강사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반영시킬 수 있는 실질적 힘이 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시행령의 싸움에서 밀리게 되면 애써 마련한 강사법이 유명무실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따라서 강사들은 학내에 강사법의 관철을 위한 정치적 실천 거점을 조직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파리 목숨에 불과한 강사들의 처지에서 보자면 이런 운동에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대량해고가 불을 보듯 뻔하다면 강사법 관철을 위한 운동에 나서지 못할 이유는 없다.

정치적 실천 활동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강사 이외의 구성원들과의 연대에 힘 써야 한다는 점이다. 학생과 전임교원들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이 싸움은 ‘밥 그릇 지키기’로 폄하될 것이다. 따라서 운동의 이슈를 강사들의 고용 안정에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질을 저하시키고 전임교원들의 근무 여건을 악화시키는 일방적 대학 구조조정 방안에 대한 비판으로 넓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조정 방안을 감행하게 하는 대학의 지배 및 경영 구조의 개혁에 관한 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

강사법은 아직 불행한 현실을 몰고 오지 않았다. 대량해고는 엄포에 불과하다. 대학이 대량해고의 소문을 흘리는 이유는 강사들에게 대학에 저항할 합법적 도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도구는 쓰면 쓸수록 손에 익는 법이다. 강사들이 할 일은 강사법이라는 도구를 손에 익도록 활용하여 그것이 실제적 효력을 발휘하게끔 노력하는 것이다.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하자.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③ 개정된 강사법의 시행령 확정에 앞서, 교육부의 단호한 의지를 촉구한다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③

 

※ 이 글은 필자의 2018년 가을 학단협 연합 심포지엄 발표문의 일부입니다. 필자의 동의로 게재함을 밝힙니다.

 

개정된 강사법의 시행령 확정에 앞서, 교육부의 단호한 의지를 촉구한다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연구협력위원장)

 

시간강사 문제에 대한 내부의 시선 교원으로서의 지위 획득과 시간강사로서의 처우 개선 사이에서

 

여름 방학부터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딸아이가 건강보험에서 떨어져 나가 직장 건강보험 가입대상이 되었다. 1년 일하면 퇴직금도 준다고 한다. 기가 막힌다. 이른바 4대 보험 가입자가 된 것이다. 지난 추석에는 의기양양하게 선물 세트도 받아왔다. 20년 이상 시간 강사 경력 동안 한 번도 누려본 적이 없는 처우를 그렇게 쉽게 받을 수 있는 것인지 몰랐다. 어느 시간강사가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에 대한 처우보다 대학의 시간강사 처지가 더 열악하다고 강변한 현실을 딸과의 비교를 통해서 실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대학의 시간강사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이후 몇몇 분들의 헌신적이고 끈기 있는 투쟁 덕분에 국회에서 시간강사법 제정에 이르는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시간강사의 교원지위 획득은 흔들릴 수 없는 전략적 목표이다. 그렇기에 그간의 성과가 매우 소중하다. 일각의 주장대로 부족한 점은 추후 개선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보완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간강사법은 몇 년째 유예되고 있는 상황이다. 아마도 이번 년도에는 실시가 확정되어 내년부터 효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듯도 하다.

시간강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에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여기서는 그 어떤 주장이 옳고 그른지를 일일이 살펴 따질 생각은 없다. 전략적 목표가 같다면 전술적인 방법은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각자가 경험한 부당함의 내용에 따라 시급한 현안에 대한 방점도 다른 곳에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첨언하고 싶은 것은 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을 가벼이 여겨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목표 수립에만 매달리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가에 대해서 숙고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노무현 정권 초반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공청회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 당시 필자는 입법적 조치가 필요한 목표는 장기적으로 추진하더라도 강사료 현실화라고 하는 문제부터 압박해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당시 그러한 의견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취급되었다. 교원지위만 확보되면 그에 따르는 처우 개선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논지에 강사료 현실화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비하면 강사료가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20년 가까이 차이 나는 세월을 비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나마 국공립대의 경우에만 강사료가 대폭 올랐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대학의 강사료는 한 번 정해지면 최소 5,6년은 동결이 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동안 이슈가 되었던 반값 등록금 문제는 강사료 인상을 방해하는 대교협의 또 다른 명분이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필자가 십 수 년 전의 일을 다시 거론하는 것은 결과론적으로 그 때 필자가 했던 주장이 옳지 않았느냐 하는 점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시간강사법이 제정되고 유예를 반복한 마당에 지금이라도 강사 처우 개선에 대한 문제도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현재 주변의 후배들 중에는 강사료 소득만으로는 연간 소득 2,000만 원 이하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비단 철학 전공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구체적인 통계자료를 확인해 봐야 정확한 추계를 할 수 있겠지만 시간강사들의 수입을 연간 500만 원 정도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림잡아 3,500억 원의 예산이 들 것으로 생각한다. 이는 전국의 강사 수를 대략 7만 명으로 고려한 수치이다. 이를 정부와 전국의 400여개 대학이 공동으로 부담한다고 생각하면 그리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학문 후속세대 관련 지원 예산 등을 통합 관리하고 정부의 고용 안전 자금 예산과 유사한 방식의 지원을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일자리 안정을 위한 정부 예산이 민간 기업에도 지원이 되는데 공공적 성격이 강한 대학의 일자리에는 적용이 안 되는 것인지 그 원칙에 대한 문제도 제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영업자도 지원하고, 유치원도 지원하고, 중소기업에도 지원하는 데 시간강사는 이등 국민이라 지원하지 않는 것인가?

사실 앞서 언급한 공청회에 참석한 당시 교육부 관계자의 언급은 이러한 방식의 문제 해결 가능성을 비추기도 했었다. 당시 노무현 정부의 교육부에서는 국립대학 기준 시간당 강사료 100,000원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사립대의 경우도 강사료를 현실화하는 방식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법률 제정이 필요한 요구에 대해서는 속도를 조절해달라는 요구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강사의 교원 지위 보장에 대한 요구 역시 그 때도 느긋한 사안은 아니었기에 교육부 당국자의 발언은 고려의 대상조차 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공청회 자리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서 관료의 발언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유리한 모든 것은 일단 챙기고 봐야 전술적 목표도 전략적 목표도 모두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강사료 올려주었다고 해서 교원 지위 보장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간 시간강사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대학들은 ‘대학교육협의회’를 중심으로 담합에 가까운 대응을 보여 왔다. 비정년트랙이라는 제도를 만드는가 하면, 겸임교수, 연구교수, 강의전담교수, 초빙교수 등의 여러 가지 변형된 형태의 비정년 강의자를 양성해 왔다. 여기에는 어김없이 시장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기도 하다. 사장의 논리가 좋다면 시장의 논리 안에서도 싸울 수 있어야 한다. 강사료 현실화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면 너무 추상적이다. 일반적인 노동 시장에서 비정규직이 요구하는 기준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다. 하지만 이는 시장의 논리에 맞지 않는다. 상품 이용의 측면에서 단기 임대 재화는 시간당 이용료가 더 비싸게 책정된다. 카메라 한 대를 몇 년간 렌트해서 이용할 바에는 아예 구매하는 것이 더 경제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 상품 역시 단기 사용 노동에 대해서는 시간당 보수를 더 책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시장의 원리에 맞다. 따라서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기준은 불합리하다. 오히려 비정규직 우대임금이라고 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강사료 현실화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현재 전임교수들에게 지급되는 인건비에서 강의에 대한 수고에 해당하는 금액만 따져 봐도 현재의 강사료보다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 될 것이다. 강사료의 현실화는 무엇보다 대학의 강사들도 생활인이고 자식을 교육시켜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실존을 인정하면 당연하게 성취해야 할 목표인 것이다. 자신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자기 자식의 대학 진학에 앞서서는 등록금 걱정부터 해야 하는 처지의 강사들이 부지기수일 것이다. 뿐만 아니다. 강사들은 금융 이용에서도 많은 제한을 받는다. 하기야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봐야 갚을 처지도 못될 수도 있긴 하다. 대학의 강사는 더 이상 전임교원으로 가기 위한 중간 과정이 아니다. 대부분의 강사들은 직업 활동을 강사로서 마치게 된다. 그것도 아무런 노후대책도 없이… 어쩌면 학위기는 운전면허증보다도 자부심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아닐까.

2018년 현재 강사료는 국립대의 경우도 10만원이 못되고, 사립대의 경우는 더더욱 빈약하다. 강사료 현실화 없는 교원지위 보장은 자칫 속빈 강정이 될 수 있다. 지금도 많은 대학들은 강사료 인상 없이 방학 중에도 급여를 지급한다는 명목 하에 8개월분의 강사료를 12로 나누어 지급하는 술책을 실시하거나 획책 중이다. 국가는 대학의 강사들을 이등 국민으로 생각하고 대학은 강사들을 원숭이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대학이 강사를 고용하는 경제적 부담이 클수록 안정적인 교원으로서의 전환을 더욱 재촉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말고 그들

 

개정된 고등 교육법, 이른바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많은 대학들은 강사 수를 줄이기 위한 각종 편법을 강구하고 있다. 강사법 시행에 따른 대학의 재정 부담 가중을 부풀리면서 대규모 강의를 늘리고, 전임교수들의 강의 시수를 늘이고, 졸업 이수 학점을 줄이는 방식 등으로 강사 수를 줄이려고 한다는 사실은 대학 스스로 학문의 전당이라고 하는 정체성을 부정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또한 대학의 그러한 술책에 동조하고 동의하는 대학 구성원들 역시 대학의 본령은 망각하고 자신들의 직장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대학이 그러한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자 한다면 먼저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우리들의 돈벌이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고백을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현재 재학 중인 대학원생들에게 하루 빨리 학업을 중단하고 다른 길을 알아보라고 권고해야만 그나마 양심적이라는 평가를 들을만할 것이다.

대학의 졸렬한 대응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부의 의지가 중요하다. 강사법을 무력화하기 위한 시도를 하는 대학들에 대해서 교육부는 단호한 방침과 의지를 가지고 불이익을 주어야 할 것이다. 대학에 지원되는 재정의 불이익을 주고 교육부가 주관하거나 한국연구재단을 통해서 지원하는 프로젝트 선정 과정에서도 불이익을 주어야 한다는 방침을 마련하면 된다. 그로인한 불이익의 크기는 강사법의 취지를 무력화해서 얻는 이익보다 훨씬 크게 설계하면 대학은 강사법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쉽사리 결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 문제에 대해 교육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한다면 교육부는 학문 생태계 파괴의 궁극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강사법을 무력화하는 시도는 학문 후속세대의 단절을 야기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할 것이다. 더구나 학문 후속세대 문제는 비단 시간 강사들만의 문제일 수 없다. 앞으로는 현재 학위 과정에 있거나 박사 수료 후 현직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후학들의 문제는 더 심각해질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는 없다. 강사법이 실시 적용되면 교원 지위를 획득하게 될 강사들의 경우는 1년 단위로 계약하고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3년간의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이후의 후학들이 그나마 강사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은 더더욱 희박해질 것이다. 강사라는 신분으로 버틸 수 있던 연구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들의 미래는 더욱 비관적이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 과거 전임 교수들이 강사 문제에 무관심했듯이 교원이 된 강사들이 무관심해도 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했으면 한다. 힘은 없다. 전임 교수들도 그랬다. 하지만 강사 문제 해결을 수십 년 동안 방해한 사람들은 전임 교수에서 총장이 되고, 이사장이 되고, 교육부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이다. 힘이 없어서 못한다고 하는 사람은 힘이 있어도 못한다. 진정한 학문 후속 세대는 우리가 아니다. 현재의 강사들은 학문 후속세대가 아니라 대개는 중견 연구자들이다. 이 글에서도 학문 후속세대 하면 시간 강사들을 먼저 떠올리는 방식으로 다루어 왔다. 하지만 그것은 틀렸다. 진정한 의미의 학문후속세대들은 그들이 겪어야 할 고통의 첫 맛도 보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니고 그들이다.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② 강사법 시행에 관한 단상 [침몰하는 대학]

고려대 민동 강사법관련 구조조정 저지 대자보

※ 위 링크는 고려대학교 민주동우회에서 지난 11월 28일 발표한 대자보 PDF 파일입니다. 메인 이미지 대자보 사진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저작자와 성명단체의 허락을 받아 게재하게 되었음을 알립니다. 게재를 허락한 저작자와 고려대학교 민주동우회에 감사드립니다.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②

 

강사법 시행에 관한 단상

 

박지용(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사업1부장)

 

하나, 대학 내 시간 강사와 강사법

2018년 11월 28일, 7년이나 유예된 강사법이 다시 법사위를 통과했다. 그 다음날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28일, 29일 거의 실시간으로 김영곤 선생님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통과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랜 진통 끝에 2019년 8월 1일부로 강사법이 시행되게 되었다. 강사법 시행과 관련하여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분은 김영곤, 김동애 두 부부 선생님이시다. 전국강사노조는 11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회 앞 텐트 농성으로 강사법 시행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해 충분한 여론을 형성해 왔다.

김영곤 선생님은 고려대학교에서 오랫동안 전공선택 과목을 가르치다가 2009년 대학 측의 해고통보로 강사직을 잃고 복직 투쟁을 하셨다. 당시 학교 당국은 박사 학위가 없는 시간강사들의 강의를 네 학기로 제한함으로써 ‘비정규직 보호법’을 피하려 했고, 이 결정에 따라 88명의 시간 강사들이 해고되었다. 비정규직 보호법은 2년 넘게 계약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법적인 취지와 달리 비정규직의 고용 상황을 더 열악하게 만들게 되었다. 김영곤 선생님의 복직 투쟁은 결과적으로 법원에서 패소함으로써 끝났지만, 이 과정에서 사립대학이 공적인 교육기관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기업일 뿐이라는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고려대학은 복직 소송에 패소한 김영곤 선생님께 천만 원의 법률비용을 청구했다. 일 년 동안 학교가 지급한 강사료가 천만 원도 안 된다는 사실은 학교 당국이 잘 알고 있다. 통상 기업들이 강고한 노동조합을 무력화하려고 써먹는 수법을 일개 대학 강사에게 적용했다는 사실이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결과적으로 법원이 학교 당국의 법률비용 청구가 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으로 종결되기는 했다.

김영곤 선생님은 고려대학교 본관 앞에서 텐트를 치고 농성해왔지만, 학교의 압력으로 그 텐트는 교양관 앞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강의하러 교양관을 들락날락하면서 항상 그 텐트는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몇 해 전 첫눈이 왔던 추운 어느 날, 텐트 앞에서 김영곤 선생님과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당시 나는 대법원 판결에 따라서 복직 판결을 받았고, 선생님은 밝게 웃으시며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셨다. 큰 틀에서 보자면 강사법 투쟁 또한 노동자 권익을 위한 투쟁이었다. 강사법은 국회와 정치인들이 약자를 포용해야 한다는 정의로운 가치에 따라서 시혜적으로 통과된 것이 아니다. 권익을 위한 투쟁은 항상 약자들 스스로 희생과 노력을 요구한다. 강사법 시행에 이르기까지, 권리를 향한 단결 투쟁이 제도 변화를 낳은 가장 큰 동력이었다는 원론적인 관점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둘, 사학 자본의 민낯

자본주의는 노동착취를 통해 이윤을 낳는다. 대기업이 쌓아둔 영업이익이나 사립대학이 쌓아둔 재단적립금의 실체적인 원천은 같다. 노동자들의 착취가 대학과 대기업이 쌓은 이익의 원천이다. 이제 강사법은 방학 중 임금 지급과 4대 보험 지급의 의무를 고용기관인 대학에 부과한다. 그런데 대학 측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비용을 법으로 강제하다니!’라는 억울함을 피력하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대학은 돈이 없다고, 정부에서 지원하지 않으면 다른 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다고 강사들을 협박한다. 이런 사립대학의 뻔한 대응을 예견한 사람들은 법 시행 주체인 사립대학이 각종 대응책을 미리 마련할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 목소리는 다시금 강사법 시행의 부당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대학은 예상한 그대로, 비용지출을 최소화할 목적으로 대학 졸업 학점을 대폭 낮추고 강좌를 줄이는 식으로 구조조정 전략회의를 했고 또 현재 진행 중이기도 하다.

사립 유치원장이 정부지원금으로 명품가방을 샀다는 기사가 시민들의 공분을 샀다. 많은 사립대학들은 재단적립금을 부당하게 주식투자로 돈을 날렸다는 이야기도 나돈다. 이런 상황에서도 한국 사회의 교육정책이 나가야 할 방향은 정치권에서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보다는 공공성이 더 강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립 유치원보다 국공립 유치원이 더 신뢰도가 높고 안전하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점차적인 공공성 확대를 지향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우리 사회의 다수가 동의하고 있지만, 그 실현과 관련해서는 넘어야 할 난관도 분명하다. 교육의 사회적인 공공성에도 불구하고 사학재단에 대한 구조조정을 정치적으로 결단하는 데에는 정당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다. 대의 민주주의적 의사결정 구조 안에서 사립 교육기관 대 교육 공공성 사이의 딜레마가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힘들다.

국립대학에 대한 예산은 현재 강사 수준을 조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미 결정되었다. 그러니 국립대학 교수들과 총장들은 사립대학이 구조조정 없이 시행하라고 편하게 말한다. 하지만 사립대학은 정부지원금이 없으면 추가비용을 들일 수 없다고 대응한다. 이 과정에서 한 예로 11월 14일 고려대학교에서 구조조정과 관련한 교무회의 비공개 문서가 언론에 드러났다. 곧바로 강사법 구조조정을 저지하기 위한 공동대책 위원회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항의 방문을 단행했다. 나는 내가 가입해 있는 고려대학교 민주동우회에 이 사안과 관련하여 성명서를 발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직접 이해관계 당사자가 아니라도 졸업생들의 입장에서 민주동우회는 모교의 부당한 결정에 반대하여 공동대책위원회와 연대 투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이후 고려대학교는 12월 3일 강사법 관련 구조조정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목소리를 반영하여 전면 유보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투쟁 역시 잠정적인 승리일 뿐 정작 강사법 시행을 실행해야 할 시점이 되어서는 어떤 입장 변화가 있을지 주시해야 한다.

김동애 선생님은 한 회의에서 강사법 투쟁을 위해 그 오랜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서정민 열사의 억울한 죽음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 하셨다. 그러니 더욱 강사법으로 인해 다시 극단의 희생자가 생겨서는 안 된다. “해고는 살인이다!”

 

셋, 사립대학은 강사법 시행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

벌써 몇 주 전부터 2019년 1학기 강의 시간 배정과 관련해서 선배, 후배, 동료들의 불편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A 대학에서는 4대 보험을 다른 곳에서 들고 있는 강사들만을 남기고 정리를 했다고 한다. B 대학에서는 한 강좌만 하던 강사들은 정리했다고 한다. C 대학은 교양과목의 강사들을 모두 정리했다고 한다. 이 모두 정리해고 되는 경우들이다. 해고 통지를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듯이 감정의 변화들을 감내하는 것이 무엇보다 힘들다. ‘그래, 이게 현실이라면 화가 나도 받아들여야지. 달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하지만 장기화된 해고 상태가 개선되지 않은 채 지속하면 어떤 불행한 사태들이 나타날지 모두 알고 있다. 시간강사들의 열악한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가 더 심각한 상황을 낳아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그 불안한 징후는 벌써 현실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박사 학위를 눈앞에 둔 학문 후속세대들의 위기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이 불안정성을 해결하기 위한 세심한 대책이 더욱 필요하다.

강사법 시행을 위한 정부 예산안이 국립대와 사립대에 불균형적으로 배정되어 사립대의 대량 해고를 막아낼 수 없는 현시점에서, 강사노조 단체들은 다시금 사립대학의 구조조정에 맞서 전체 시간강사들의 불이익을 최소화할 수 있는 실천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2019년 8월 1일부로 시행되는 강사법에서 시간강사들의 전체 규모가 현저히 낮아지지 않도록 교육부에 사립대학 지원과 관련한 명확한 지침을 요구해야 한다. 가령 교육부가 전면에 나서서 구조조정의 실행 여부와 그 규모에 따라서 대학이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을 분명히 해 두어야 한다. 교육부는 눈앞의 비용 절감을 위한 구조조정을 실행한 학교들을 전수조사하고 철회를 분명히 강제해야 하며, 이를 이행하지 않을 시 단 한 푼의 지원금도 받을 수 없다는 점을 명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2018년 12월 14일.


☞ 2019년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우리사회와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과 문제들을 드러내어 그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자문하고 대답을 듣기 위한 취지에서 릴레이 기고를 기획했습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기고문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다양하고 많은 얘기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1.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① ‘몫이 없던 자들’의 외침이 대학가에도 울려 퍼지길!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① ‘몫이 없던 자들’의 외침이 대학가에도 울려 퍼지길!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①

 

♦ 아래 글은 [건대신문]에 12월 4일자로 게재된 칼럼입니다. <이 시대와 철학>에 칼럼으로 게재할 수 있게 흔쾌히 원고를 보내준 필자와 게재를 허락한 건대신문사 측에 감사드립니다.

 

‘몫이 없던 자들’의 외침이 대학가에도 울려 퍼지길!

 

조은평(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모교인 건국대에서 수업을 할 때면, 늘 마음 한편이 무겁다. 10년 내내 강사료가 49,700원이여도, 또 4대 보험과 6학점 강의를 보장해준다며 강사료를 6개월로 쪼개주는 기형적인 형태로 초빙교수를 뽑을 때도 아무 말 못했던 나. 심지어 성적입력이 늦을 경우 강사에게만 유독 가혹하게 1년 간 강의금지라는 조항을 신설할 때도 가만있었고, 그 대가가 부메랑처럼 마침 독감에 걸려 입력이 하루 늦은 내게 되돌아왔을 때도 머릿속으로만 저항하며 안으로 골병들어가던 내 모습이 죄책감처럼 따라붙기 때문이다.

철학자 랑시에르는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확보하는 문제가 서양 정치철학의 핵심적인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특히 몫이 없던 자들이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요구하면서 기존의 안정화된 제도적 질서를 비집고 비로소 ‘정치’가 출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늘 정치철학은 안정화된 정치질서를 유지하려고 실제로는 몫이 없는 자들이 나름의 몫을 누리고 있다고 여기도록 잘못된 셈법을 고안해왔지만 말이다.

이런 지적은 우리 현실에도 그대로 되풀이된다. 대학이라는 작은 단위의 사회만 보더라도 이 말은 여전히 진실이다. 대학의 주인은 누구일까? 과연 대학의 구성원들은 모두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지니고 있을까? 정말 그럴까?

내년 시행될 강사법에 대비해 이미 대학들은 강좌수를 줄이거나 대형 강의로 통폐합하고, 졸업학점을 줄이면서 시간강사를 대량 해고하는 전략에 돌입한 것 같다. 강좌의 절반 정도를 담당하면서도 전체 강좌비용의 1~3% 정도만 지불되는 강사의 인건비. 그런데도 교원지위보장과 방학 중 강사료 지급, 4대 보험 등을 핵심으로 하는 법 시행을 앞두고 몇몇 대학은 앞으로 부담할 비용이 엄청나다는 근거 없는 괴담을 퍼트릴 뿐, 정작 학생을 위한 교육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모양새다.

고맙게도 랑시에르는 잊어서는 안 될 교훈 하나를 전해준다. 노예들의 반란 이야기. 스키타이족은 노예들의 두 눈을 멀게 해 길들였다. 하지만 주인인 전사들 대부분이 다른 나라로 원정을 떠난 사이, 노예의 자식들이 하나 둘 늘어나 멀쩡한 두 눈을 갖게 된 노예 후손들은 자신들도 전사로서 주인과 맞설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마침내 주인들이 고향에 돌아왔을 때, 노예들은 성 주변에 해자를 파고 전사로서 주인과 대적했다. 그런데 웬걸 주인인 전사들이 창을 버리고 예전처럼 채찍을 들고 달려들자 모두 식겁해서 도망쳤다고 한다.

대학의 구성원인 우리들도 어쩌면 이런 노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시간강사인 우리는 더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이 없었다는 걸 자각하면서 함께 연대해야 한다. 하지만 위 교훈처럼 단지 싸울 수 있다는 것만 깨닫는 게 아니라, 모두가 이미 대학의 구성원이자 ‘정치’를 실현하고 구성할 수 있는 평등한 사람들이라는 점도 깨달아야 한다. 아울러 그런 권리를 실현할 정치적 기반과 통로도 마련해 나가야 한다.


☞ 2019년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우리사회와 대학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과 문제들을 드러내어 그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우리에게 자문하고 대답을 듣기 위한 취지에서 릴레이 기고를 기획했습니다. 앞으로 차근차근 기고문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다양하고 많은 얘기가 나오길 기대합니다.

 

#MeToo운동에 토를 다는 그대들에게 [피켓2030]

<#MeToo운동에 토를 다는 그대들에게>

 

이나연

 

현재 한국에서는 성폭력 사실을 고발하는 #MeToo운동이 한창이다. 영화계, 문학계, 예술계, 정치계, 교육계까지. 여태껏 얼마나 많은 피해가 ‘피해가 아닌 일’로 치부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피해자들이 혼자서 참아냈어야 할 그 울분을, 상상만 하더라도 고통스럽다. 나도 성폭력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연인 관계에 있던 자였고 그때 나는 애인 사이의 ‘강간’이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고소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주어진 괴로움 앞에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일이라 생각하며 자책하는 것이 내가 당시에 할 수 있던 것의 전부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분명한 범죄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후 나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개적으로 그를 고발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받았다. “나, 네 글 보고 충격 받았어. 우리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전혀 몰랐다는 듯이 뻔뻔하게 연락을 남긴 그를 보며 나는 또다시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 #MeToo운동을 하며 피해 사실을 알린 피해자들 또한 가해자들의 태연한 부인 앞에서 나와 같은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을 그리고 나를 피해자로 만든 일이 분명 그 하나만이 아닐 거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더욱 화가 난다. 만일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높은 사회에서 살았더라면, 여성들이 당당하게 고소하고 나섰을 일이 더욱 많았을 테다. 한 명의 피해자로서 내가 그러지 않았던 건 신고해봤자 피해 사실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나만 더 답답하고 힘들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경찰이 내게 2차 피해를 줄 것 같다는 두려움, 재판을 위해 돈을 들였어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할 거라는 불신 그리고 이 일을 진행하며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할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 이 모든 걸 견디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운이 좋지 않아 생긴 일이라고 넘긴 일들이 무수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는 결코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내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더라도, 성폭력을 겪었으나 가해자를 처벌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나처럼 사법기관을 믿지 못해 법적으로 처리할 생각조차 안 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고민 끝에 경찰서에 신고를 한 사람들도 “이런 일은 너무 사소해서 사건으로 처리되지 않는다, 관련 법이 없어서 처벌할 수 없다, 소문나면 어차피 당신만 손해니 고소하지 말고 그냥 ‘좋게’ 합의해라” 등의 소리나 해대는 경찰들로 인해 또 다른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당연해지면서 피해자는 점점 더 가해자를 고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은 고소하지 않은 것인가, 못한 것인가? 그들이 그때 신고하지 않았던 게 정말 괜찮아서 그랬던 것인가?

이처럼 한국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신고했을 때, 그들이 법적으로 합당한 처벌을 받을 거란 믿음을 전혀 주지 못하는 사회였다. 그렇다면 사적인 처벌이 가능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털어놓으면 비난의 화살은 피해자를 향했고 가해자는 가해자들끼리 만든 방패 속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랬기에 많은 여성은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걸 두려워했던 것이다. 한국처럼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척박한 곳에서 가해자를 고발하는 일에는 엄청난 용기와 그 일련의 과정에서 지치지 않을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일을 거뜬히 해낼 수 있는 이가 많지는 않았을 테다. 그러므로 지금 성폭력 피해 사실을 제보하는 피해자들에게 “그때 말했어야지, 왜 이제 와서 그래?”라고 비난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현재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 건, 여성들의 폭로가 실질적인 처벌로 이어지는 것을 목격하며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을 제대로 징벌할 수 있을 거란 가능성을 엿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제는 전처럼 내게 있었던 일을 말하더라도 나를 책망할 사람들보다 내 편이 되어 함께 싸워줄 이가 많을 거라는 믿음이 싹트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성들은 그들의 더러운 편의를 위해 의도적으로, 암묵적으로 ‘그들만의’ 무죄의 기준을 만들어냈다. 자기들 멋대로 여성을 갖고 놀기 위해 서로의 죄를 눈감아주고 감싸줬다. 그렇게 남성들은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범죄가 아니라고 밀어붙이며, 범죄자이면서도 안일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헤아릴 수 없는 피해자들의 억울함과 울분을 양산했다. 그러나 그들의 뻔뻔함을 보며 참지 않는 여성들의 움직임에 의해 그 기준은 점차 바뀌어나갈 것이다. 천박한 그들의 결속이 만들어낸 결백이, 더는 통하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고독 [피켓2030]

고독

 

201778일 촬영

MODEL 이나연

PHOTO 신영빈

 

 

 

#1. 체념

나연 : 생의 마지막 순간, 끝내 놓치고 싶지 않은 아름다움을 눈에 담으며 떠날 것인가 아니면 절망과 혐오 속에서 눈감을 것인가. 지금의 나로서는 어떠한 것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것을 떠올리며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영빈 ; 누구나 한번쯤은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순간이 있지

그렇지만 나는 제자리로 오지 못했어. 되돌아 나오는 길을 모르니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걱정에 온통 내 자신을 가둬두었지.

이젠 이런 내 모습 나조차 불안해보여. 어디부터 시작할지 몰라서

– 임재범 <비상> 中

 

 


#2. 이면

나연 : 사람들은 나를 보며 태어났을 때부터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지 못하는 자들의 무지한 착각일 뿐이다. 나는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영빈 :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면 비로소 집중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 평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지나치던 흔해빠진 모습도, 빛이 비춰지고 그림자가 드리우자 그 이면을 알 수 있을 때가 있다.

 


 

 

#3. 이면

나연 : 쓰레기 더미 옆에 있더라도 나는 악취를 맡을 수 없다. 내가 풍기는 고약한 냄새에 나의 코는 이미 마비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영빈 : 스스로 빛나길 원한다면 화려하고 높은 곳에서 내려와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의 낮은 곳에서 나의 이면을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4. 이면

나연 : 너를 경멸하는 듯한 나의 시선도 결국 나를 향하는 것이었다.

 

영빈 : 그의 눈을 봐. 눈은 내면의 창이래. 눈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아.

 


 

 

#5. 이면

나연 : 사라지는 연기를 보며 나는 언제쯤 이곳에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없어질 수 있을지 생각한다. 죽기 전에도 내가 이곳을 떠나면 슬퍼할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 우습다.

 

영빈 : 가면을 벗어던지는 순간, 어떤 시선으로부터도 억압되지 않는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그의 이면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6. 고독

나연 : 나는 그들에 의해 그리고 나에 의해 가공된 조화의 삶을 살았을 뿐이었다. 내게는 쾌락도, 변화도, 쇠퇴도 허락되지 않았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이 날 끼워맞춘 틀 속에서 말라 비틀어 죽는 것.

 

영빈 : 온통 ‘나’에게만 집중하던 생활이 서서히 주변으로 시선을 옮기기 시작할 때. 사소한 것들마저 기억에 담고 싶을 만큼 만족스럽거나, 사소한 것들만큼 부질없이 느껴지는 삶에 한탄하거나.

청춘이 뭐길래 [피켓2030]

이나연(건국대 철학과)

 

편집자님께 청춘의 입장에서 글을 써주면 좋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청춘, 청춘이라. 도대체 청춘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 글들은 하나같이 사전에 써져있는 정의를 말하고 가기에 나도 그래보겠다. 청춘의 뜻은 ‘만물이 푸른 봄철이라는 뜻으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란다. 아, 좋다. 날마다 봄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따사로운 노란 빛의 햇살과 사방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예쁜 물감으로 칠해놓은 듯한 꽃들의 인사. 청춘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런 풍경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어른들은 사전적 정의에서 청춘에 해당하는 10대와 20대인 우리들의 삶도 그렇게 밝고 푸를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나는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우리들이 청춘이라며, 청춘은 무엇이든지 도전할 수 있고 그렇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며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들먹인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쓰러져도, 다쳐도, 고통스러워도 청춘이니 다시 일어나라고 종용한다. 이제 그런 말을 듣는 것조차 지겹다. 지겨워서 그냥 귀를 막고 퍼질러 누워있고 싶다. 그런 말을 듣느라고 내 뇌 용량을 쓰느니 시끄러운 락을 들으며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드는 게 낫다. 어른들의 착각과 달리 나는 10대 후반과 20대의 나이가 어떻게 보면 가장 지칠 수 있는 때가 아닌가 싶다. 만일 푸른색이 우리 나이 대를 대변한다면 피어나는 새싹과 같아서 푸른 것이 아닌 여기저기 멍이 들어 푸른 것 때문은 아닐까.

 

 

요새는 예전과 달리 초중고라는 정규교육이 필수가 되었다. 이렇게 필수가 되고 나니, 그걸 원치 않는 이들이, 맞지 않는 이들이 이를 거부할 힘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억압적인 학교의 시스템을 인지하는 이들도 ‘제대로’ 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받는 차별을 떠올리며 두려워한다. 주입식 교육에 흥미가 없는 이들도 그것이 무서워 학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여유롭게 사교육을 받을 여건이 되지 않아 성적이 잘 나오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공부를 해야 한다. 이처럼 원치 않는 체제에서 탈출하지 못한다면 어디에 있든 지옥처럼 느껴질 것이다. 아마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1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란다. 그것도 9년째 말이다. 2015년 자살한 청소년은 모두 708명, 암으로 사망한 경우보다 2.5배 많다고 한다. 사회는 우리가 그런 가시밭길을 지나가고 있는 걸 알면서도 그 길만이 옳다고 하며, 그렇기에 싫어도 버텨야 한다며 그곳에 우리를 밀어 넣고 있다. 그래서 거의 모든 10대가 발에 피를 흘리며 걸어가고 있다. 그래도 공부해놓으면 쓸 데가 있다는, 꿈을 이루려면 일단 대학은 가야한다는 협박을 들으며 말이다. 그래서 멍 하나가 들었다.

 

 

자, 학교라는 지옥에서 벗어나기 전 이제 수능을 볼 차례이다. 제정신으로 살아남기 힘든 이곳에서 자살하지 않은 약 60만 명의 10대가 수능을 치른다. 그 60만 명은 시험 한 번으로 내 인생이 결정될 것이란 어른들의 말을 들으며 시험장에 들어간다. 그런데 아뿔싸, 시험을 망쳐버렸다. 그래도 돈 있는 10대는 사정이 낫다. 부모님의 든든한 후원을 받으며 재수학원에 들어가면 된다. 돈 없는 10대에게는 선택권도 없다. 재수는 사치다. 나온 점수에 맞춰 그나마 나은 대학 중에 ‘골라’ 가야 한다. 그러나 이때 그들의 선택은 결코 선택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대학을 가더라도 집안에 돈이 없으면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한다. 비싼 등록금을 내주는 부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나보다는 집안을 위한 학과와 학교를 택한다. 즉, 그들은 취업이 잘 되는 과 혹은 빨리 졸업해서 사회에 나갈 수 있는 전문대를 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와중에 등록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한다. 사장 비위 맞추랴 손님 비위 맞추랴, 하루하루 스스로에게 말 걸 시간조차 없이 흘러간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타인에게 맞추는 삶을 살 때, 우리는 또 아플 수밖에 없다. 갈 곳 없는 원망만이 내 머릿속을 떠돌다가 결국 나에게 도착한다. ‘나는 왜 이런 집에서 태어난 거지. 왜 우리 부모님은 돈이 없지. 아니야. 이렇게 대학까지 보내주셨는데 내가 이런 생각하면 안 되지. 내가 참 못났다.’ 불평등한 사회 구조로 인해 발생한 문제는 결국 개인이 자기혐오를 하게끔 만든다. 이때 멍 하나가 더 늘어났다.

 

 

여차저차 이제 대학을 졸업했다. 약 1000만원에서 3000만원이 넘는 빚을 떠안고 우리는 사회로 나왔다. 그 빚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나의 능력과 재능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도 없었는데 회사들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무엇을 느끼고 배웠는지에 대해 써내라고 한다. 그때서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본다. ‘내가 지금까지 뭐했지. 별로 한 게 없다. 아니, 한 것은 많지만 그게 회사가 좋아할 것인지는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억지로 지원서 작성을 끝낸다. 지원 동기는 당연히 돈을 벌어 빚을 갚기 위해서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회사를 찬양하는 내용을 써야 한다. 다 쓰고 보니 내가 써내려간 자기소개서인데도 내 이야기 같지가 않다. 그래도 그나마 날 뽑을 것 같은 회사에 일단 지원서를 넣어본다. 결과는 불합격이다. 남들만큼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돌아오는 결과는 불합격뿐이다. 있지도 않았던 자존감이 이제는 마이너스가 되어버린다. 친구들이 싫은 소리를 하며 직장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조차 버겁다. 누구는 다니고 싶어도 못 다니는데 배부른 소리하는 것처럼만 느껴진다. 이젠 그런 친구들도 싫고 은근히 눈치를 주는 부모님도 싫고 가끔 볼 때마다 잔소리를 하는 친척들도 다 싫다. 무엇보다도 모든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내가 제일 싫다. 또 그렇게 멍이 든다.

이게 바로 어른들이 말하는 청춘의 실제 삶이다. 세상에 이리저리 치여 멍으로 얼룩져서 푸른 삶이다. 청춘이 쓰는 글이란 이런 것이다. 더 이상 청춘에게 환상을 갖지 말라. 당신들이 볼 땐, 밟히고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청춘이니 이런 대접을 받아도 괜찮은가?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누구도 이렇게 아파서는 안 된다. 그리고 청춘이라고 해서 이런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어른들은 청춘이니 괜찮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회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역량 부족 따위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불합리한 사회라면 어쩔 수 없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사회를 바꾸자고 말하지 못하겠다면 아무 말 말고 가만히 있기만 해라. 그럼 반이라도 가니깐.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힘들다고 외치는 청춘들의 목소리를 죽이려 하지 말라. 청춘들에게 ‘그래도’ 살아야지, 라고 하는 것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최소한 ‘살 만하다’고 느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고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청춘이란 단어는 그저 사전 속에만 존재하는 죽어있는 단어에 불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