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Too운동에 토를 다는 그대들에게 [피켓2030]

<#MeToo운동에 토를 다는 그대들에게>

 

이나연

 

현재 한국에서는 성폭력 사실을 고발하는 #MeToo운동이 한창이다. 영화계, 문학계, 예술계, 정치계, 교육계까지. 여태껏 얼마나 많은 피해가 ‘피해가 아닌 일’로 치부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피해자들이 혼자서 참아냈어야 할 그 울분을, 상상만 하더라도 고통스럽다. 나도 성폭력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가해자는 연인 관계에 있던 자였고 그때 나는 애인 사이의 ‘강간’이 범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에 고소도 하지 않았다. 갑작스레 주어진 괴로움 앞에서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일이라 생각하며 자책하는 것이 내가 당시에 할 수 있던 것의 전부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것이 분명한 범죄라는 것을 깨달았고 이후 나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개적으로 그를 고발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받았다. “나, 네 글 보고 충격 받았어. 우리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전혀 몰랐다는 듯이 뻔뻔하게 연락을 남긴 그를 보며 나는 또다시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지금 #MeToo운동을 하며 피해 사실을 알린 피해자들 또한 가해자들의 태연한 부인 앞에서 나와 같은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녀들을 그리고 나를 피해자로 만든 일이 분명 그 하나만이 아닐 거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더욱 화가 난다. 만일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이 높은 사회에서 살았더라면, 여성들이 당당하게 고소하고 나섰을 일이 더욱 많았을 테다. 한 명의 피해자로서 내가 그러지 않았던 건 신고해봤자 피해 사실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나만 더 답답하고 힘들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경찰이 내게 2차 피해를 줄 것 같다는 두려움, 재판을 위해 돈을 들였어도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할 거라는 불신 그리고 이 일을 진행하며 오롯이 내가 감당해야 할 신체적, 정신적 스트레스. 이 모든 걸 견디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운이 좋지 않아 생긴 일이라고 넘긴 일들이 무수하다.

그러나 중요한 건, 이는 결코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내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더라도, 성폭력을 겪었으나 가해자를 처벌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나처럼 사법기관을 믿지 못해 법적으로 처리할 생각조차 안 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고민 끝에 경찰서에 신고를 한 사람들도 “이런 일은 너무 사소해서 사건으로 처리되지 않는다, 관련 법이 없어서 처벌할 수 없다, 소문나면 어차피 당신만 손해니 고소하지 말고 그냥 ‘좋게’ 합의해라” 등의 소리나 해대는 경찰들로 인해 또 다른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당연해지면서 피해자는 점점 더 가해자를 고발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은 고소하지 않은 것인가, 못한 것인가? 그들이 그때 신고하지 않았던 게 정말 괜찮아서 그랬던 것인가?

이처럼 한국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신고했을 때, 그들이 법적으로 합당한 처벌을 받을 거란 믿음을 전혀 주지 못하는 사회였다. 그렇다면 사적인 처벌이 가능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털어놓으면 비난의 화살은 피해자를 향했고 가해자는 가해자들끼리 만든 방패 속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랬기에 많은 여성은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걸 두려워했던 것이다. 한국처럼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이 척박한 곳에서 가해자를 고발하는 일에는 엄청난 용기와 그 일련의 과정에서 지치지 않을 힘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일을 거뜬히 해낼 수 있는 이가 많지는 않았을 테다. 그러므로 지금 성폭력 피해 사실을 제보하는 피해자들에게 “그때 말했어야지, 왜 이제 와서 그래?”라고 비난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현재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 건, 여성들의 폭로가 실질적인 처벌로 이어지는 것을 목격하며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을 제대로 징벌할 수 있을 거란 가능성을 엿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이제는 전처럼 내게 있었던 일을 말하더라도 나를 책망할 사람들보다 내 편이 되어 함께 싸워줄 이가 많을 거라는 믿음이 싹트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남성들은 그들의 더러운 편의를 위해 의도적으로, 암묵적으로 ‘그들만의’ 무죄의 기준을 만들어냈다. 자기들 멋대로 여성을 갖고 놀기 위해 서로의 죄를 눈감아주고 감싸줬다. 그렇게 남성들은 그들이 저지른 범죄를 범죄가 아니라고 밀어붙이며, 범죄자이면서도 안일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헤아릴 수 없는 피해자들의 억울함과 울분을 양산했다. 그러나 그들의 뻔뻔함을 보며 참지 않는 여성들의 움직임에 의해 그 기준은 점차 바뀌어나갈 것이다. 천박한 그들의 결속이 만들어낸 결백이, 더는 통하지 않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목소리를 낼 것이다.

 

 

고독 [피켓2030]

고독

 

201778일 촬영

MODEL 이나연

PHOTO 신영빈

 

 

 

#1. 체념

나연 : 생의 마지막 순간, 끝내 놓치고 싶지 않은 아름다움을 눈에 담으며 떠날 것인가 아니면 절망과 혐오 속에서 눈감을 것인가. 지금의 나로서는 어떠한 것도 기대할 수 없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것을 떠올리며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영빈 ; 누구나 한번쯤은 자기만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는 순간이 있지

그렇지만 나는 제자리로 오지 못했어. 되돌아 나오는 길을 모르니

너무 많은 생각과 너무 많은 걱정에 온통 내 자신을 가둬두었지.

이젠 이런 내 모습 나조차 불안해보여. 어디부터 시작할지 몰라서

– 임재범 <비상> 中

 

 


#2. 이면

나연 : 사람들은 나를 보며 태어났을 때부터 사랑만 받고 자란 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지 못하는 자들의 무지한 착각일 뿐이다. 나는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이다.

 

영빈 : 스포트라이트가 켜지면 비로소 집중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 평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지나치던 흔해빠진 모습도, 빛이 비춰지고 그림자가 드리우자 그 이면을 알 수 있을 때가 있다.

 


 

 

#3. 이면

나연 : 쓰레기 더미 옆에 있더라도 나는 악취를 맡을 수 없다. 내가 풍기는 고약한 냄새에 나의 코는 이미 마비된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영빈 : 스스로 빛나길 원한다면 화려하고 높은 곳에서 내려와 볼 필요가 있다. 세상의 낮은 곳에서 나의 이면을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4. 이면

나연 : 너를 경멸하는 듯한 나의 시선도 결국 나를 향하는 것이었다.

 

영빈 : 그의 눈을 봐. 눈은 내면의 창이래. 눈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아.

 


 

 

#5. 이면

나연 : 사라지는 연기를 보며 나는 언제쯤 이곳에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없어질 수 있을지 생각한다. 죽기 전에도 내가 이곳을 떠나면 슬퍼할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 우습다.

 

영빈 : 가면을 벗어던지는 순간, 어떤 시선으로부터도 억압되지 않는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그의 이면을 엿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6. 고독

나연 : 나는 그들에 의해 그리고 나에 의해 가공된 조화의 삶을 살았을 뿐이었다. 내게는 쾌락도, 변화도, 쇠퇴도 허락되지 않았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들이 날 끼워맞춘 틀 속에서 말라 비틀어 죽는 것.

 

영빈 : 온통 ‘나’에게만 집중하던 생활이 서서히 주변으로 시선을 옮기기 시작할 때. 사소한 것들마저 기억에 담고 싶을 만큼 만족스럽거나, 사소한 것들만큼 부질없이 느껴지는 삶에 한탄하거나.

청춘이 뭐길래 [피켓2030]

이나연(건국대 철학과)

 

편집자님께 청춘의 입장에서 글을 써주면 좋을 것 같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청춘, 청춘이라. 도대체 청춘이란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 글들은 하나같이 사전에 써져있는 정의를 말하고 가기에 나도 그래보겠다. 청춘의 뜻은 ‘만물이 푸른 봄철이라는 뜻으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에 걸치는, 인생의 젊은 나이’란다. 아, 좋다. 날마다 봄과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따사로운 노란 빛의 햇살과 사방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예쁜 물감으로 칠해놓은 듯한 꽃들의 인사. 청춘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런 풍경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어른들은 사전적 정의에서 청춘에 해당하는 10대와 20대인 우리들의 삶도 그렇게 밝고 푸를 것이라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나는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들은 우리들이 청춘이라며, 청춘은 무엇이든지 도전할 수 있고 그렇기에 아름다운 것이라며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들먹인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쓰러져도, 다쳐도, 고통스러워도 청춘이니 다시 일어나라고 종용한다. 이제 그런 말을 듣는 것조차 지겹다. 지겨워서 그냥 귀를 막고 퍼질러 누워있고 싶다. 그런 말을 듣느라고 내 뇌 용량을 쓰느니 시끄러운 락을 들으며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드는 게 낫다. 어른들의 착각과 달리 나는 10대 후반과 20대의 나이가 어떻게 보면 가장 지칠 수 있는 때가 아닌가 싶다. 만일 푸른색이 우리 나이 대를 대변한다면 피어나는 새싹과 같아서 푸른 것이 아닌 여기저기 멍이 들어 푸른 것 때문은 아닐까.

 

 

요새는 예전과 달리 초중고라는 정규교육이 필수가 되었다. 이렇게 필수가 되고 나니, 그걸 원치 않는 이들이, 맞지 않는 이들이 이를 거부할 힘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억압적인 학교의 시스템을 인지하는 이들도 ‘제대로’ 학교를 나오지 않으면 받는 차별을 떠올리며 두려워한다. 주입식 교육에 흥미가 없는 이들도 그것이 무서워 학교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여유롭게 사교육을 받을 여건이 되지 않아 성적이 잘 나오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공부를 해야 한다. 이처럼 원치 않는 체제에서 탈출하지 못한다면 어디에 있든 지옥처럼 느껴질 것이다. 아마 그래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10대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란다. 그것도 9년째 말이다. 2015년 자살한 청소년은 모두 708명, 암으로 사망한 경우보다 2.5배 많다고 한다. 사회는 우리가 그런 가시밭길을 지나가고 있는 걸 알면서도 그 길만이 옳다고 하며, 그렇기에 싫어도 버텨야 한다며 그곳에 우리를 밀어 넣고 있다. 그래서 거의 모든 10대가 발에 피를 흘리며 걸어가고 있다. 그래도 공부해놓으면 쓸 데가 있다는, 꿈을 이루려면 일단 대학은 가야한다는 협박을 들으며 말이다. 그래서 멍 하나가 들었다.

 

 

자, 학교라는 지옥에서 벗어나기 전 이제 수능을 볼 차례이다. 제정신으로 살아남기 힘든 이곳에서 자살하지 않은 약 60만 명의 10대가 수능을 치른다. 그 60만 명은 시험 한 번으로 내 인생이 결정될 것이란 어른들의 말을 들으며 시험장에 들어간다. 그런데 아뿔싸, 시험을 망쳐버렸다. 그래도 돈 있는 10대는 사정이 낫다. 부모님의 든든한 후원을 받으며 재수학원에 들어가면 된다. 돈 없는 10대에게는 선택권도 없다. 재수는 사치다. 나온 점수에 맞춰 그나마 나은 대학 중에 ‘골라’ 가야 한다. 그러나 이때 그들의 선택은 결코 선택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대학을 가더라도 집안에 돈이 없으면 하고 싶은 공부도 못한다. 비싼 등록금을 내주는 부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나보다는 집안을 위한 학과와 학교를 택한다. 즉, 그들은 취업이 잘 되는 과 혹은 빨리 졸업해서 사회에 나갈 수 있는 전문대를 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와중에 등록금을 벌기 위해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한다. 사장 비위 맞추랴 손님 비위 맞추랴, 하루하루 스스로에게 말 걸 시간조차 없이 흘러간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타인에게 맞추는 삶을 살 때, 우리는 또 아플 수밖에 없다. 갈 곳 없는 원망만이 내 머릿속을 떠돌다가 결국 나에게 도착한다. ‘나는 왜 이런 집에서 태어난 거지. 왜 우리 부모님은 돈이 없지. 아니야. 이렇게 대학까지 보내주셨는데 내가 이런 생각하면 안 되지. 내가 참 못났다.’ 불평등한 사회 구조로 인해 발생한 문제는 결국 개인이 자기혐오를 하게끔 만든다. 이때 멍 하나가 더 늘어났다.

 

 

여차저차 이제 대학을 졸업했다. 약 1000만원에서 3000만원이 넘는 빚을 떠안고 우리는 사회로 나왔다. 그 빚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진다. 나의 능력과 재능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도 없었는데 회사들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무엇을 느끼고 배웠는지에 대해 써내라고 한다. 그때서야 우리는 우리의 삶을 되돌아본다. ‘내가 지금까지 뭐했지. 별로 한 게 없다. 아니, 한 것은 많지만 그게 회사가 좋아할 것인지는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억지로 지원서 작성을 끝낸다. 지원 동기는 당연히 돈을 벌어 빚을 갚기 위해서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회사를 찬양하는 내용을 써야 한다. 다 쓰고 보니 내가 써내려간 자기소개서인데도 내 이야기 같지가 않다. 그래도 그나마 날 뽑을 것 같은 회사에 일단 지원서를 넣어본다. 결과는 불합격이다. 남들만큼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돌아오는 결과는 불합격뿐이다. 있지도 않았던 자존감이 이제는 마이너스가 되어버린다. 친구들이 싫은 소리를 하며 직장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조차 버겁다. 누구는 다니고 싶어도 못 다니는데 배부른 소리하는 것처럼만 느껴진다. 이젠 그런 친구들도 싫고 은근히 눈치를 주는 부모님도 싫고 가끔 볼 때마다 잔소리를 하는 친척들도 다 싫다. 무엇보다도 모든 걸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내가 제일 싫다. 또 그렇게 멍이 든다.

이게 바로 어른들이 말하는 청춘의 실제 삶이다. 세상에 이리저리 치여 멍으로 얼룩져서 푸른 삶이다. 청춘이 쓰는 글이란 이런 것이다. 더 이상 청춘에게 환상을 갖지 말라. 당신들이 볼 땐, 밟히고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청춘이니 이런 대접을 받아도 괜찮은가?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누구도 이렇게 아파서는 안 된다. 그리고 청춘이라고 해서 이런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어른들은 청춘이니 괜찮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회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직시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역량 부족 따위 때문에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불합리한 사회라면 어쩔 수 없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래서 사회를 바꾸자고 말하지 못하겠다면 아무 말 말고 가만히 있기만 해라. 그럼 반이라도 가니깐. 비정상적인 사회에서 힘들다고 외치는 청춘들의 목소리를 죽이려 하지 말라. 청춘들에게 ‘그래도’ 살아야지, 라고 하는 것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최소한 ‘살 만하다’고 느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고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청춘이란 단어는 그저 사전 속에만 존재하는 죽어있는 단어에 불과할 것이다.

 

 

아픈 이야기 [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

지벼리

출판사에서 일하는 나는 오늘 다음 날 있을 출판사 총판 회의에 필요한 자료 준비와 출시될 도서들을 정리하느라  저녁 식사도 거르고 10시 30분까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밥도 못 먹고 온 나에게 신랑은 안쓰러운지 옷도 갈아 입지 않은 내게 빨리 소파에 앉으라며 테이블에 늦은 저녁을 차렸다.
몇 번을 데웠는지 모른다는 따근한 두부찌개. 나랑 같이 먹으려고 신랑은 김치볶음밥으로 우선 먹었다고…

신랑의 전매특허 두부찌개는 늘 맛있다. 오늘은 더 맛있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더 맛있다. 목마름이 밀려와 맥주 한 캔 마시고 싶다고 했더니 내가 오기 전에 담배 사러 나갔다가 맥주도 사서 미리 냉장고에  뒀노라고.
이렇게 말하면 신랑은 집에서 살림만 하는 남자로 오해받을까? 살짝 걱정도 되지만 내 남자는 그런 거에 개의치 않는다. 무엇이든 잘~ 하는 사람이 하면 된다고 한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년에 사들인 텔레비전에서는 세월호에 관한 101분 기록으로 이야기를 다시 꺼내 영상으로 보여준다. 신랑과 나는 세월호  이야기에 대해  “이제 좀 그만하자.”고  말하는 사람들과  목에 핏대 세우며 싸울 준비가 되어있다. 남의 고통은 어찌 그리 쉽게 잊자고들 하는지 되려 묻고 싶다. “교통사고 같은 거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정의 내리면 쉬운 표현이라 그리 했는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개탄스럽다. 나와 신랑 사이에는 아이가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살고자 약속한 부분도 있고… 나이도 이제 마흔 중반에 생각도 많다. 사실 아이를 키우며 살 자신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랑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나는 아동 전문 출판사에서 일을 하고 있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세월호 탑승자 중에 가족이 있느냐고… 분노하는 내가 그렇게 비쳤는가 보다.

우리가 연결하면 연결 안 되는 고리가 있던가?
그렇다. 나도 내 아버지에게 들은 충격적인 사실이 있다.
가족 여행으로 세월호를 탔다가 엄마, 아빠, 형 모두 잃은 요셉이는 나의 먼 친척이었다.
내가 평소 친척으로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어서 몰랐지만, 아버지는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그 주에 친인척들 모임이 있었는데  당시 사고로 인해 모임을 취소했고, 그 안타까운 사연을 뉴스로만 들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니… 주변 왈 그래서 네가 그렇구나… 세상에!
우리 다 같은 국민 아닌가?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일을 안타까워하며 목소리 좀 냈다고…
그런 관계들이 있어서 내가 그러는 것이라고 이런 취급을 당하는 건 사건보다 더 아픈 또 하나의 사건이다.
‘세월호’에 직접 탑승했거나 탑승한 가족이 있어야만, 또 다른 어떤 관계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란 말인가?

다만 그 아이들은 우리의 아이들이고 우리의 미래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꼭 했어야 하는 일들이 지금은 미련으로 남았을 그 꿈 많은 아이들을… 우리는 그 찬란한 미래를 무참히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사고였다’라고 말한다. 진실은 어디에도 없고 변명만이 소란하다. 비겁한 변명들을 듣고 있노라면 화가 치밀어 올라 참을 수가 없다.

맛있게 먹던 밥을 짧게 마무리한다. 맥주를 벌컥벌컥! 목이 메어와 숨쉬기가 곤란하다. 목 아픔을 참고 있는데… 난데없이 눈물 줄기가 참아지질 않는다. 그 부모들의 속은 어찌할꼬. 그 영상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니면서… 미처 공개하지 못했던 어느 부분은 정말이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고 자기들은 빠져나가겠지?”, “지난번에도 그랬었잖아”, “아~ 이러다가 혹시 죽는 거 아니겠죠?”, “마지막이 될지 모르니 부모님께 하고 싶은 말 남겨야지. 엄마, 아빠 사랑해요.”, “커튼이 이 만큼 들렸다는 건 그만큼 기울었단 말이겠죠.”, “물이 들어와요.”, “아~~~ 안돼! 정말 화가 나서 욕을 하고 싶은데 이 영상 어른들이 볼 거라 욕은 못하겠고… 아… 나는 꿈이 있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대로 죽을까 봐 걱정돼요. 아~~~.”

아프다.
많이 아프다.
그 영상 속 우리 아이들이 혹시나 했던 말들은 그리 되어 버렸다.

핸드폰 영상으로 담으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기록했을 우리 아이들의 희망을…
우리는 끊어 버렸다.

선장과 선원들은 상황실 신호도 끊고,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은 채 ‘패닉 상태였다’라고 말하며 살고자 허둥지둥 세월호 밖으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 모습은 참으로 초라했고, 비겁했다.
또 그들을 구한 해경들은 선장인지, 선원인지 몰랐다고 했다.

선장답지 못했고, 선원답지 못했고, 해경답지 못했고, 어른답지 못했고, 인간답지 못했다.

상황실은 각각 보고만 잘 하고 있으라고…
해경들은 그 모습들을 보고도 퇴선 명령은 없다.
관저에서는 ‘세월호가 물속으로 빠져 들어간 모습을 보고 싶어’  하시니 사진으로 찍어 빨리 보고 하라고…
보고 싶어 하신다고…
민간 민박 선원들이 보다 못해 뛰어들자 해경은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한다.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1분 1초를 불안해하며 말을 이어가는 학생들과 선생님, 그리고 사연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 어느 것이 생명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인가?
아이들의 목소리는 다급한데…
상황실 보고하는 목소리는 여유가 있고 웃음도 있고…
참으로 비통하다.

아이들은 밀려오는 공포 속에서도  다른 객실에 있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걱정한다.
부모님께 보내는 메시지에는 곧 구하러 온다고 했으니 염려 말라고 안심시킨다.
선장이나 선원들이 아무런 지시 사항도 내리지 않고 그저 선내 방송으로 ‘움직이지 말고 그대로 가만히 있으라’라고  반복 방송을 하고 있다.  스피커에서 되풀이 되는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을 듣는 아이들은 위급한 상황임을 직감하고 그 지시에 따른다. 보통 다른 날이었더라면 어른들이 하는 말에 의문을 가졌을 법 한데… 이 날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끼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 맞다 생각해서 아마 그들 전부가 그렇게 행동한 것 같다. ‘내가 움직이면 배가 더 기울어져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라고 생각한 아이들이  선내 방송의 지시에 의문을 품기보다는 그대로 따른게 아닐까 싶다. 어찌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아이들은 스스로 구명조끼를 나눠 입고 못 입은 친구들을 챙기며 불안한 감정들을 서로 다독인다.

그 공포와 불안 속에서도 웃음을 보이던 아이들은 그 상황이 그대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아마 그리도 천진난만한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도 혹자는 ‘애들이 철이 없어서 그런다’라고 한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이것은 그것과 다르다.
그냥 비판을 위한 비판인 것이다.
내 자식을 그렇게 수장시킨 부모들도 그리 말할까? 철이 없다고?
그 부모들을 대신해서 마구마구 싸워주고 싶다.

길게 끌어 봐야 국민들 세금만 더 늘어난다고 말하는 그들은 끝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다시 시작이다.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

그 누구도 억울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 상태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나는 책을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것도 어린이 책!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순간순간 고민이다.
내 모든 힘을 다 동원해서…
인성이 바로 서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꼭! 그래야만 한다.
내가 나에게 내리는 주문이다.

다시 봄이 찾아왔다.
세월호에 탑승했던 모든 사람들과 그 가족들, 그들을 도왔던 민간 잠수부와 민간 선박 선원들에게 이제 봄은 없다.
아픔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들이 맞는 봄이 새롭기를 희망하며 글을 마친다.

p.s  서로 나누고, 도우며… 함께 살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픈 마음으로 글을 올립니다.

하물며 일본의 ‘아베’도 해낸 연금 통합 우리도 해내자![썩은 뿌리 자르기]

아래 글은 회원이 자발적으로 투고한 글입니다.  약소하지만 소정의 원고료가 지급되며, 글의 주장은 전적으로 필자의 입장입니다. 


 

하물며 일본의 아베도 해낸 연금 통합 우리도 해내자!

:김형모가 쓴 누가 내 국민연금을 죽였나?

나태영

소득대체율 학살의 한국현대사
소득대체율이란 국민연금 가입자가 40년간 국민연금 보험료를 냈을 경우 나중에 자신이 벌던 월급의 몇 프로를 매달 연금으로 받는 것을 이른다. 쉽게 말해서 내가 40년간 한 달에 200만원을 벌어서 매달 수입에 맞게 정해진 국민연금 보험료를 40년간 냈다면 소득대체율이 50프로 경우 죽을 때까지 매달 100만원을 받는다. 20년간 냈다면 소득대체율이 50프로 경우 죽을 때까지 매달 50만원을 받는다.

1977년 노태우 정부 때 소득대체율은 70프로였다. 첫 번째 학살은 김대중 정부 때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을 받던 1997년 행해졌다. 나라 전체 재산이 갑자기 절반으로 줄어든 때이니 이해가 된다. 소득대체율이 60%로 떨어졌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7년 여야는 60%였던 소득대체율을 2008년 50%로 10% 낮추고, 2009년부터 2028년까지 20년 동안은 매년 0.5%씩 낮춰 40%로 하기로 법을 고쳤다. 국민연금 지급 개시연령도 원래 60세였지만 2013년부터 5년 단위로 1세씩 올려 2033년에는 65세가 된다.

국민연금 대상자는 호구? 특수직연금 대상자는 정승?
2017년 현재 국민연금 보험금 지급을 국가가 보장하지 않는다. 2014년 국회에서 새누리당 인간들이 억지로 막아서 그리되었다. 국민연금 대상자들은 이래저래 국가로부터 버림받는데 공무원, 학교 선생님, 군인 등 특수직연금 대상자들은 국가의 사랑을 듬뿍 받는다.

‘2013년 기준 … 48만 명의 공무원 등 특수직연금 수령자가 받는 연금액은 총 15조원이고, 나머지 750만 명(일부 중복수령 포함)이 넘는 국민연금 및 기초연금 수령자가 받은 연금액은 17조 1천억원이다.’(『누가 내 국민연금을 죽였나?』 58쪽)

특수직연금 대상자들은 대체로 길게 일한다. 월급도 조금씩 더 늘어난다. 2017년 현재 젊은 층에서 교직원, 공무원, 직업군인이 되려고 안달하는 까닭중 가장 큰 까닭은 수명은 90대 전후로 늘어가는 상황에서 기타 직업으로는 45세 이후가 불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 같은 국민연금 대상자들은 한 직장에서 또는 한 업종에서 저들보다 더 짧게 일한다. 매달 버는 돈은 대략 45세 이후부터 팍 줄어든다. 반대로 들어갈 돈은 더 늘어난다. 나는 우리 나이로 올해 쉰 넷이다. 딸 쌍둥이가 지금 고3이다. 나는 재작년 연봉 약 1천 5백 만원, 작년 연봉 약 2천 만원, 올해는 운 좋게 1월부터 3월까지 한 달에 250 만원 정도 벌었다. 한울님! 고맙습니다.

우리 형은 91년부터 어린이(초등)학교 선생님 일을 했다. 두 딸 중 큰 딸은 올해 졸업했다. 둘 대학 등록금은 무이자 대출로 월 80만원씩 갚기로 했단다. 무이자 대출이라 나는 많이 부러웠다. 2년전에 형한테 들었다. 매달 연금보험료 본인부담 50만원, 국가부담 50만원해서 100만원 낸단다. 1년에 미래를 위해서 1천 2백 만원 낸단다. 내 입이 벌어졌다. 너무도 부러웠다. 나는 우리집 서울시 토지 사용료 매달 25만원, 이자로 나가는 돈이 매달 50만원인데!

또한 변변한 직장 다니지 못하는 사람이나 지역가입자는 국민연금 보험료를 다 본인이 부담해야한다. 내 경우도 연금 보험료 낸 기간중 약 90프로 기간동안 다 내 부담이었다.

1990년대 후반 김대중 정부는 건강보험 통합을 이뤄냈다. 반발이 컸다. 보기를 들자면 돈 많은 직장의료보험 노동조합이었다. ‘의보통합반대 100만인 국민서명운동’과 총파업 투쟁을 했다. 김대중 정부는 뚝심 있게 국민건강보험 통합을 이뤄냈다. 결국 국민건강보험 재분배기능을 높이고 효율성과 보장성을 키우는 효과를 거뒀다. 박수!

천덕꾸러기 국민연금과 특수직연금을 통합하여 ‘국민연금 하나로’ 이뤄내자! 아베도 했는데 어찌 우리가 못해내겠는가. 다수가 이 땅 중산층인 특수직연금 대상자들 반발이 심할 것이다. 그래도 이뤄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소득대체율을 50%로 올리자!

국민연금에 살아 숨 쉬는 소득재분배의 마술!
A값은 전체가입자 3년간 평균 소득을 뜻한다. 2015년 3월부터 적용되는 A값은 198만 1천 975원이다. B값은 가입 기간 중 당사자의 생애평균소득을 뜻한다.

‘홍길동의 가입 기간 평균 소득이 300만원이고, 연금을 받기 시작 시작할 때 가입자평균소득(A값)이 200만원이며, 소득대체율이 40%라 한다면’(『누가 내 국민연금을 죽였나?』 28쪽)

300만원의 40%인 120만원과 200만원의 40%인 80만원을 더하면 200만원이 된다. 이를 2로 나눈 결과인 100만원이 300만원인 평균소득자 홍길동의 연금 수령액이다. B값이 100만원인 사람의 경우 위 공식대로 계산하면 연금액이 60만원이 된다. 결국 실제 소득대체율은 40%가 아니라 60%프로가 된다. 전체가입자 3년간 평균 소득인 A값이 198만 1천 975원 이하인 사람은 그만큼 덜 내고도 더 많이 가져가게 된다. 이는 낸 만큼 받아가는 사보험 연금과 다른 국민연금의 강점이다.

“단순히 내 월급에서 떼어간 만큼만 나중에 연금을 돌려주는 게 아니라 나와 ‘함께 가입한 모든 이들’의 평균소득(일명 ‘A값’)이, 나 자신의 국민연금 지급액에 50%나 영향력을 미친다. 즉 ‘모두 함께’라는 공동운명체의 원리가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세대내 연대’와 노동에 종사하는 세대가 노인층인 세대를 부양하는 ‘세대간 연대’도 포함한다.(『누가 내 국민연금을 죽였나?』 62쪽)

따라서 서민일수록 길게 조금씩이라도 끈질기게 국민연금 가입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서민들은 피하고 강남 아줌마들은 임의가입을 통해 국민연금 재테크를 한다. 저들은 국민연금이 사보험 연금보다 수익률이 상당히 높다는 사실을 예민한 촉수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사보험연금에서는 물가인상이 반영되지 않는다. 보험금이 30만원이면 10년 뒤나 30년 뒤나 숫자 그대로 30만원 받는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물가인상이 반영되어 지금 30만원 받는 경우 10년 뒤에는 40만원이나 45만원 받아서 지금 돈 가치 30만원이 평생 보장 된다.

김형모는 주장한다. 국민연금 강화 핵심은 다음 세 가지라고!

첫째, ‘A을 높인다.

둘째, 가입기간을 늘린다.

셋째, 소득대체율을 인상한다.

 

튼튼 국민연금을 만드는 길은 무엇일까?
국민연금 금고로 들어오는 돈이 국민연금 금고에서 나가는 돈보다 많으면 ‘튼튼 국민연금’이 가능하다. 독일 벤츠 회사 자동차 조립 공정의 로봇화 즉 자동화율이 97%이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 이러니 일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일자리 늘리는 길은 무엇일까? 하루 노동시간을 우선 7시간으로 줄이고 50년 뒤에는 6시간으로 줄일 필요가 있다. 윤구병 선생이 사장으로 일하는 보리출판사는 50년 앞서서 하루 노동 시간을 6시간으로 한다. 월급은 똑같이 하고서 말이다. 하루 노동시간 7시간 제도를 우선 공무원, 학교 선생님, 군인,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제1 하청 정규직 노동자에게 실시할 필요가 있다. 월급은 지금 월급의 95프로로 줄일 필요가 있다. 이들에게 40세부터 임금 피크제를 실시하고 대신에 이들의 정년을 67세로 늘려줄 필요가 있다. 가늘고 길게 전략이다.

내가 사는 ‘성미산마을’에 망원시장과 월드컵시장이 있다. 망원시장 ‘부산어묵’ 사장님과 가족과 직원은 하루 14시간 일한다. 보통 자영업자 하루 노동 시간이 10 – 14시간이다. 이분들에게 하루 노동 시간 7시간은 무릉도원 이야기이다. 이분들이 하루 노동 시간을 20프로 줄이면 한 달에 40만원, 40프로 줄이면 80만원을 국가가 지불해줄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하루 노동 시간 7시간이 뜻있는 길이 될 것이다.

또한 고졸자 4년후 임금과 대졸자 첫 임금 차이가 95대 100이 된다면 대학 진학률이 더 낮아져 사교육 비용이 줄어들 것이다. 그만큼 이 땅 월급쟁이들의 지갑이 두둑해질 것이다.
위와 같은 정책이 시행되면 국민연금 금고로 들어오는 돈이 더 늘어날 것이다. 튼튼 국민연금이 이루어질 것이다.

참조>

국민복지연금법
제1장 총칙

제1조(목적) 이 법은 국민의 노령⦁폐질 또는 사망 등에 대하여 연금급여를 실시함으로서 국민의 생활안정과 복지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실록 국민의 연금』 482쪽)

가짜뉴스와 혐오발언의 공통점 [시대와 철학]

♦ 아래 글은 [건대신문]  3월호에도 동시 게재되는 칼럼입니다.  칼럼으로 게재할 수 있게 흔쾌히 원고를 보내준 필자에게 감사드립니다. 

 


강지은(건국대학교 강사, 전임 편집주간)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말들은 혐오스럽다. ‘촛불은 바람불면 꺼진다’ 당시 새누리당의 김진태 의원이 뱉은 막말이다. 최순실의 국정농단과 박대통령의 이루 셀 수 없는 실정에 분노한 국민들이 광화문에서 뜨겁게 촛불로 마음을 모을 때 도대체 김진태는 무슨 생각으로 막말을 쏟았을까. 막말의 정점은 박대통령 대리인단의 김평우 변호사다. 김평우 변호사는 국민을 기만하는 막말을 마구 쏟아내며 탄핵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생채기를 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몇 가지 김평우의 막말을 되새겨보자.

 

“탄핵 인용시 시가전이 벌어지고 아스팔트 길이 피와 눈물로 덮일 것”

“요즘 우리나라 언론을 보면 소위 정계 원로, 법조계 원로라는 분들이 전부 무조건 헌재 결정에는 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무조건 승복해라, 이게 조선시대입니까? 지금 우리가 양반이 복종하라고 하면 복종하는 노예입니까?”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대통령 그것도 여자대통령에게 뭐했냐고 한다. 이건 웃기는 일”

 

판사를 지냈다는 법조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다. 나열하자면 끝도 없다. 또 스물스물 퍼져나가는 가짜뉴스들, 박사모 집회에서는 또 그 뉴스를 확인도 없이 너도나도 마구 쏟아내고 있다. 사실 시대적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막말에든 가짜뉴스에든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팩트와 진실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울 만큼 배운 저 엘리트들이 왜 저런 혐오발언들을 쏟아내며 막말 정치인, 막말 법조인이란 욕을 듣고도 멈추지 않는 것일까. 목에 태극기와 성조기를 번갈아 두르며 광장에 나오는 박대통령 대리인단의 서석구 변호사, 막말 파문 때문에 부친인 소설가 고 김동리 선생까지 언론에 오르내리는 대리인단의 김평우 변호사는 혐오발언들을 쏟아내기 위해 마이크를 잡았다. 사실 난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에서 느낀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소위 엘리트인 그들이 막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이유는 한 가지이다. 가짜뉴스와 혐오발언의 목적이 행동을 생산하는 수행성의 정치이고 그만큼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발언>>(2016, 알렙, 265쪽)에서 ‘언어는 몸의 행위이며 수행문의 힘은 육체적인 힘과 절대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서장(16쪽)에서 모리슨을 인용해 ‘언어의 폭력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포획하려는 노력, 따라서 그것을 파괴하려는 노력’이라고 쓰고 있다.

 

막말의 정치인들과 법조인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촛불민심에 대한 상처내기와 광장에 모인 박사모들과 숨어있는 박대통령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데에 있다. 사실 이 두 효과 중 막말은 박대통령 지지자들을 더 열광하게 했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나름의 마이크 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고 그 마이크에서 쏟아지는 혐오스러운 발언과 스멀스멀 SNS를 통해 퍼지는 가짜뉴스들은 팩트가 어떻든 자신들이 지지하는 권력에 힘을 더해주는 수행성의 정치를 열심히 하고 있다.

 

사진출처 – 프레시안

이재용 삼성 부회장 구속영장 기각에 대한 유감과 분노 [시대와 철학]

이정호(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누군 3만원의 떡을 감사표시로 줘도 범법이고

누군 400억의 돈을 갖다 바쳐도 범법이라 단정할 수 없다니

형식논리적 법적용의 배후에 여전히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네요.

 

역사와 현실, 시대정신을 망각한 지식 모리배들에게

논리는 그저 탐욕의 노예일 뿐입니다.

역사는 그들의 부역을 심판할 것입니다.

 

2500년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플라톤의 <국가> 338c)라고 외친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의 망령에 맞서

약자들이 싸워온 정의의 역사에

왜 피가 배어있는지 새삼 뒤돌아 보게 되는 오늘입니다.

 

정의의 씨앗

열매를 맺지 않아도 이어지는 그  알 수 없는 신비!

아마도 불멸의 투쟁과 연대 그리고 희망 때문일 것입니다.

끝내 우리는 정의의 열매를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끝내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spes immortalis

-희망은 불멸이다

 

 

시대에 대한 성찰, 사회적 유대, 다시 민주주의 [시대와 철학]

2017년 정유년 새해를 맞이하여 각오를 다짐하는 한철연의 신년회. 이를 기념하기 위해 두 편의 시평을 연달아 게재합니다.  이 두 편의 글은  모두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학술지 [시대와 철학] 27권 4호에도 동시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신년회에 참석하시기 전 미리 한번 읽어오시면, 함께 토론하며 한철연의 앞길을 의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시대에 대한 성찰, 사회적 유대, 다시 민주주의

 

박종성(호원대학교)

 

“세상에서 행세하는 것 중에 황금처럼 고약한 것도 없다.
폭리로 돈을 벌게 해 주고 국가를 뒤집어 폐허로 만들며
사람들을 파산하게 하며;
나쁜 물로 교화시켜 도덕을 등지게 만들고
올바른 사람을 유혹하여 죄의 수렁에 빠지게 하며…….
죽을 운명의  그 육체에게 사악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며
저주받을 일을 하도록 만든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시대에 대한 성찰: “이게 국가냐”

“정말 이건 사람 사는 나라가 아니지 않냐”, 집회 나온 할머니의 말이다. “순실”의 시대에 우리는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이러려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왔는지 “자괴감”도 들었다. 그러나 민중은 자괴와 상실만을 하지는 않았다. 상실의 시대에 민중들은 다시 촛불의 희망을 들었다. 7차 집회까지 연인원 700만을 넘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서울, 부산, 거제, 광주 등 전국 곳곳에서, 런던, 파리, 베를린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도, 어린이, 대학생, 노인들에 이르는 민중의 모습은 우리의 시대에 대한 촛불의 거대한 시대의 성찰이자 주권자의 실천이었다. 촛불 혁명이었다. “오늘 이곳으로부터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나니, 우리는 바로 그 탄생의 현장에 서 있다.” 괴테가 1792년 프랑스 혁명군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군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 발미 전투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우리는 촛불 혁명으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였고, 그 탄생의 현장에 시민들, 학생들, 노동자들이 있었다. 광장의 정치, 그 목소리는 다양했고, 정치의 참여는 자발적이고 평화로우며 축제 분위기였다. 가정주부는 답답하여, 학생들은 정유라 부정입학에 대한 분노로,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부모는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기 위하여, 노동자도 그렇게 광장으로 나왔다.
촛불 혁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는 이화여대 학생들은 정의롭지 못한 입학에 분노하였고 정의를 원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정의(justice)는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평등의 원리, 각자는 각자의 공헌에 따라 분배받는 것인 분배적 원리이다. 정의롭지 못한 것, 공헌에 따라 분배받지 못한 정유라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렇듯 시민들, 학생들은 자신의 시대에 대해 성찰하고 비판하였다. 광장의 정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탄생이며, 유신 잔당들의 해체와 종식을 알리는 새로운 역사이어야 한다. 그런데 87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광장정치가 그야말로 텅 빈 기표로 남지 않기 위한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새로운 역사의 탄생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는 공적인(publica) 것(res)의 파괴이다. 공적인 것의 파괴와 사적인 것이 지배하는 국가, 바로 그런 지금의 국가(republic)에 대한 성찰이 촛불 혁명을 만든 것이다. 촛불 혁명은 탄생하였다. 그 성장의 과정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성찰이 없는 삶은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그에게 철학은 논박(elenchos)을 통해 궁극적으로 상대방을 당혹스러운 상태(aporia)에 처하게 하여 무지를 자각하는 과정을 말한다. 현실에서 시민은 논박보다는 촛불을 들어 통치자의 무지 자각을 일깨우려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박근혜는 당혹스러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죽을 운명의 인간이 죽음을 대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느냐는 근원적인 물음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과거의 유신 망령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폭정, 불의, 강도 짓을 일삼던 자들의 영혼, 즉 오늘날 망령, 독재의 유령은 이들의 영혼이 정화되지 못한 삶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로 인하여 망령은 현실에서 배회한다. 하지만 시민들은 정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 그것을 성찰하고 행동으로 선택하였다. 민중들은 정의롭지 못한 국가, 사회에 대해 다시 물음을 던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현재 박근혜와 그 부역자들에게, 곧 부, 명성, 명예의 획득에만 혈안이 된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 수백만의 민중들은 묻고 있다. 세월호 참사, 사드 배치, 국정원 선거 개입, 교육부 국정 교과서, 한일군사협정, 부정 입학, 국정 농단, 성과연봉제 등등 국정 전반에 대해 “이게 국가냐”고 말이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총체적” 질문이었다. 민중들은 충분히 철학적이었다.
둘째, 탐욕과 시기는 나라가 망하는 두 요소라고  플라톤은 말했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은 화폐였다. 요약하자면 이번 사태의 핵심은 사적인 인간의 화폐에 대한 탐욕이었고 이것을 정치권력이 두둔하고 은폐하였다는 것이다. 공적인 혈세는 사적인 인간의 부의 증대로 둔갑하였다. 맑스가 말하는 “치부욕”에, 곧 사적인 인간의 치부욕에 우리들의 혈세가 쓰인 것, 민중들은 이것에 대해 분노하였고 자신의 현실적 삶의 성찰을 통해 거대한 촛불 혁명을 만들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국민을 믿지 않고 재물의 신인 플루토스(Plutus)를 믿는다. 맑스는 재물의 신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을  사회의 “경제적 · 도덕적 질서의 파괴자”라고 비난했었다. 그렇다, 국정을 농단한 결과는 도덕적 질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질서까지도 파괴하였다. 헌법 119조 2항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 경제 및 안정과 적절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며, 시장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이 조항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가의 역할을 다시금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부의 불평등이 가속화되는 시대에 경제민주화를 위해 절실히 요구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민주주의를 더욱 절실히 요구하는 것이다. 고삐 풀린 자본을 위한 국가는 변혁되어야 할 대상이다.
플루토스를 추구하는 근대사회는 “자신의 고유한 생활원리를 눈부시게 비춰주는 화신(Inkarnation)을 자신의 황금 성배(Goldgral)로서 환영한다.”고 맑스는 말한 바 있다. 맑스는 『자본』에서 화폐형태는 일반적인 등가형태가 사회적 관습에 의해 특정한 상품의 특수한 현물형태(Naturalform)로 전환되어 상품소유자들의 공동의 행위 때문에 특정한 상품의 배타적 기능이 되고, 일반적 등가물로 간주한다. 화폐는 “추상적 부의 물적 현존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일은 “자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의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난다.”는 점이다. 오물을 흘리면 태어난 자본주의에서 민중들은 천박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민중이 권력을 갖는 그런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요구는 촛불 혁명이라는 광장의 정치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강화로 인하여 죽어간 구의역의 한 젊은이를 추모하는 발길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추모에서도 알 수 있다. 민중들은 자본이 생명의 가치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사회에 대해 성찰한다.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이들이 만들에 낸 국정농단 사태, 그곳에는 자신을 성찰하는 수백만의 민중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 민중은 철학적이었다.

사회적 유대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의 목적성을 “함께 존재함의 행복”이라고 하였다. 곧 한 정치 공동체를 위해 행복을 창출하거나 보존하는 행위를 하려는 경향을 정의로 보고 있다. 맑스의 진지한 고민은 “사회 구성원 누구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풍요로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는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다. 함께 존재함의 행복은 신자유주의와 상반된다. 신자유주의는 소득 불평등의 확대와 ‘고용 없는 성장’으로 귀결된다. ‘일자리를 줄이는 경기회복’(Jobloss Recovery)이라는 사이렌의 소리는 새로운 불안한 계급들을 유혹하여 그 존재를 난파시키고 불안정한 삶으로 그들을 구속하며, 끝끝내 삶 자체를 침몰시켜버린다. 경제적 불안은 부의 불평등을 가속하고 그러한 불평등은 불안한 자들의 불안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불만으로, 자신의 좌절을 경제적 약자에 대한 적대로 드러낸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유대는 깨져 버린다. 이 시대의 철학은 사회적 유대를 파괴하는 것에 저항할 것을 요구한다. 이번 촛불혁명은 바로 사회적 유대의 강화를 보여준다.
플라톤이 말하는 “고상한 거짓말”을 대한민국에서도 확인하였다.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국가의 태도에 민중들은 분노하였다. 청와대의 국정 운영의 방식에서 세월호 참사를 여객선 사고로 규정했다. “창조경제”, “국민행복 시대”라는 고상한 거짓말, 먼저 이 고상한 거짓말이 정치에서 의미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도시를 결속시킬 만큼 강력한 힘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는 끊임없는 고상한 거짓말을 한다. 그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감력을 약화하면서 보수단체를 이용하여 참사의 본질을 은폐하거나 희석하려고 하였다. 문제는 그러한 사유 틀이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과 반사회성이다.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자신의 안락인 이기주의, 타자의 고통인 악의를 버리고 타인의 안일을 원하는 동정(Mitleid)을 주장하였다. 동정은 타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에 참여하는 것이다. 루소 또한 동정(pity)을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사회적 유대는 비단 이성만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죽음에 대한 여러 추모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동정의 사회적 유대이다.
민주주의를 선점한 자본으로부터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것,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을 파괴하고 집어삼킨 국가의 모습에서 새로운 민주적 국가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우리는 증오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부정적 계열에 속하는 정념인 증오를 사회적 유대를 해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사랑과 증오라는 정념들의 양가성을 인정한다. 공동선에 대한 사랑, 하지만 공동선을 피하려는 악에 대한 증오가 그것이다. 정의에 대한 사랑과 불의에 대한 증오이다. 촛불 혁명은 바로 공동선을 피하려는 악에 대한 증오로서의 사회적 유대이다.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증오할 것인가? 그 정념의 역량을 분출하고 시민의 권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언제나 민주 vs. 반민주

결국 민주주의의 다시금 회복시켜 자본에 종속된 권력을 민중에게로 재전유하는 것이다. 아테네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병사로서 참여하여 정치에 참여하는 과정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민주주의이다. 이후 민주주의는 “좋은 외투, 좋은 모자를 쓰고 온 가족이 번듯한 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권리”로서 나타난 “보통 선거권”의 확대에서 드러나듯이 자원의 배분과 관련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그렇다, 주권(sovereign)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는(superus) 최고의 권력(power)이다. 그러나 현실 민주주의에서 주권의 원리와 대표자는 일치하지 않는다. 결국, 주권의 원리와 대표자는 불일치, 그 틈을 메웠던 것이 촛불혁명이다. 그런데 대의민주주의에서 이 틈은 여전히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 메워진 틈을 더 좁히는 일이다. 결국, 대표성을 강화하는 것, 이것을 모색하여 더욱 더 민주주의의 본래성을 강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 이유는 결국 민중의 삶은 자원배분의 문제, 곧 민주주의의 역사라는 사실과 직접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갈등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갈등을 없애는 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분노가 투표를 통해 정부를 정당하게 해임하는 것이다. 결국, 갈등은 민주주의에 핵심 동력이다. 문제는 그러한 갈등을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탄압하는 반면에, 민주주의 질서에서는 갈등을 드러내고 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촛불은 갈등의 사회화 과정에서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쟁점은 언제나 민주 vs. 반민주이다. 이는 마치 호남 vs. 비호남과 같은 지역적 문제로 정치적 쟁점을 대체하거나 조직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민주화 과정이다. 민주주의를 강화하고자 하는 이들은 대의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결함인 대표성과 주권 원리의 불일치, 그 틈을 더욱더 메워 주체화하는 일이 과제로 남는다. 왜냐하면 더욱 더 자본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국가는 국민을 대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상위 1%의 부가 하위 99%의 부를 넘어서는 시대에 계급 간의 불평등은 정치에 있어서 너무나도 강력한 정치적 갈등이므로 더욱더 지역을 넘어선 철저한 계급투표를 진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는 삶의 문제이다. 주권의 대표성을 강화하여 자원의 재분배에 참여하는 것, 그리하여 그야말로 민중(demos)의 권력(kratia)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촛불로 “죽 쒀서 개주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민주주의를 살려내는 길 위에 있으며, 그 길은 멀고도 험할 것이다. 데리다가 말하듯, 민주주의를 탈(재)전유(exappropriation)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재전유하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고유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과거가 될 민주주의라는 미래를 위하여, 자본이 선점한 민주주의를 재전유하기 위하여 민중들은 민주주의라는 현재를 잡은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비전유(expropriation)할 때의 지배성의 위험을 너무나 쓰라리게 경험하였다. 플라톤의 말은 현재 우리의 모습이었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잡아라)

 

신이 침묵하는 시대 [시대와 철학]

2017년 정유년 새해를 맞이하여 각오를 다짐하는 한철연의 신년회. 이를 기념하기 위해 두 편의 시평을 연달아 게재합니다.  이 두 편의 글은  모두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학술지 [시대와 철학] 27권 4호에도 동시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신년회에 참석하시기 전 미리 한번 읽어오시면, 함께 토론하며 한철연의 앞길을 의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신이 침묵하는 시대

 

이병창(동아대학교 명예교수)

 

1) 이행의 시기
최근 이 나라에서 미증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의 길거리에 무려 200백만 명의 시민이 모여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얼마 전에는 미국에서 트럼프가 정권을 거머쥐고 말았다. 그는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이단파 출신이라 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럽연합을 파괴하는 그렉시트, 브렉시트라는 사태가 발생했다. 전자는 불발로, 후자는 작은 미동에 그쳤다.
이 모든 사건들이 지진의 고리처럼 연이어 발생하니, 그 밑에 거대한 지진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자아낸다. 아직은 예진에 그치지만, 이것이 앞으로 얼마나 큰 지진으로 발전하게 될지 사람들은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다.
어쩌면 한 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시대가 탄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황혼과 여명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는 것일까? 지나가는 시대라면 신자유주의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 그럴 것 같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신자유주의가 비틀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시대는 설렘보다는 당혹감이, 기쁨의 노래보다는 오히려 절망의 비명이 더 크게 들리고 있다.
도대체 이런 대지진 끝에 어떤 세계가 도래할 것인가, 예측은 어렵지만, 추측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헤겔은 역사가 ‘규정적인 부정(die bestimmte Negation)’에 의해 지나간다고 한다. 그것은 앞의 시대가 총체적으로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앞의 시대를 지배했던 핵심 규정이 부정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앞의 시대가 지닌 지배적인 규정이 어떤 것인지를 알면, 다가오는 시대가 어떤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2) 신자유주의 경제적 위기
그렇다면 우선 신자유주의 시대부터 검토해보자. 대체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무엇이며 무엇이 문제인가?
1986년 수립된 WTO체제는 전 세계가 신자유주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을 알리는 징표가 된다. 흔히 WTO체제는 자유무역 체제라 간주되며, 전 세계가 자유무역을 통해 하나로 통합된다고 찬양되고 있다. 소위 국가를 넘어선 글로벌리제이션이라는 아름다운 환상이 신자유주의를 미화해 왔다.
자유무역 체제라는 측면만 본다면 WTO체제가 굳이 그 이전의 국제통상체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굳이 신자유주의 시대로 새롭게 규정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신자유주의 시대라고 특별하게 규정한다면 그 이유는 WTO체제가 가진 다른 고유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그 특성은 무엇인가? 바로 금융자본의 재갈이 풀렸다는 것이다. WTO체제는 개별 국가가 자본의 출입에 대해 가하는 모든 규제를 철폐하도록 했다. 특히 국제 금융자본은 주로 개도국에게 강력한 금융개방을 요구했으니, 개도국의 자본시장 즉 증권과 채권시장이 국제금융자본의 새로운 먹이가 되었다.
그 후 세계는 글로벌리제이션, 세계화라는 환상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동안 은밀하게 활동을 전개하던 금융자본이 자신의 전모를 폭로하게 된 것은 그 뒤 20년이 지난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였다. 이 사건을 통해 폭로된 금융자본의 행태를 보면 한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금융사기라고 말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금융자본은 대중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그 채권을 미리 할인해서 다시 자본을 마련한다. 그리고 이 자본으로 다시 돈을 빌려주고, 이런 식으로 되풀이 하여 가공자본을 늘렸다. 이런 가운데 악성채권이 우후죽순 생겨났으며, 이런 악성채권을 양성채권 속에 끼워 넣어 패키지로 팔아먹었다. 그 결과 엄청난 가공자본을 창출했으니, 모든 것의 목적은 엄청난 금융수입이었다. 이 금융수입은 제조업이 사라진 미영 금융제국의 부를 증식시켰다.
이 간단한 금융사기 뒤에는 여러 가지 부대조건이 있었다. 우선 금융자본으로부터 돈을 빌린 채무자는 누구인가? 미영 금융자본은 이미 가진 자본으로 자국 내에서 부동산 투자에 나섰다. 자국 내에서 은행이 투자할 만한 성장가능성 있는 기업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융자본이 부동산 투자에 나서게 되자 부동산의 가격이 상승되었다. 미영의 일반 대중들도 덩달아서 여유의 돈을 여기에 투자했고 나중에 가서는 금융자본으로부터 빚을 내서 부동산에 투자하게 되었다. 부동산 가격의 폭등 때문에 대중은 자신의 투자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은행 역시 자신이 획득한 채권이 얼마나 악성인지 알지 못했다.
한편으로 금융자본은 대규모 이익을 얻었고 이를 통해 소위 금융자본에 종사하는 노동자 역시 혜택을 보았다. 그러나 금융자본이 부동산에 투자되고, 자국의 제조업을 기피하는 동안 국제 금융제국의 국내 제조업이 몰락했다. 남은 국내용 기업의 일자리도 상대적으로 열악하기 짝이 없었으니, 자국의 노동자를 스스로 기피했다. 그 자리를 찾아 이주노동자가 급증했다.
그럼, 미영 금융제국이 획득한 가공자본은 어디에 투자되었는가? 미영 금융자본은 자국에 투자를 기피하면서 개도국에 투자했다. 이런 투자는 제국주의 시대처럼 개도국에 직접 공장을 건설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투자는 주로 개도국의 증권 및 채권 시장이라는 자본시장에 투자되었다.
개도국으로서는 부족한 자본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국제 금융자본의 자본이 저절로 굴러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개도국 자본은 쉽게 대자본을 형성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수출산업을 육성했다. 수출산업 종사 노동자들은 성장하는 수출산업 덕분에 생활의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국제 금융자본이 이윤율이 높은 수출 산업에 투자되는 동안 국내의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하청기업화하면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중소기업 제품은 또 다른 개도국에서 쏟아져들어 오는 값싼 제품들과 경쟁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으니, 금융제국과 유사한 결과가 나타났다. 여기서도 중소기업은 몰락하면서 중소기업 노동자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도국 자본이 일정 정도 성장하면 이윤율이 떨어지게 되어 있고 그러면 자동적으로 금융자본이 빠져나가면서 다른 이웃 개도국에 투자되기 시작한다. 이제 개도국은 이중으로 위기에 빠진다. 한편으로 자본이 빠져나가며 다른 한편으로 이웃 개도국과 경쟁이 격화되면서 기존의 수출 산업조차 무너지고 총체적 경제위기에 빠져들게 된다.

3) 신자유주의 정치적 위기
결국 이 국제 금융사기는 언젠가 터지도록 되어 있었다. 그것이 2008년 미국 금융위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로 어느새 8년이 지났지만 신자유주의의 문제가 해결되었는가? 그렇지는 않다. 미국의 금융위기는 미국 국민이 세금으로 금융자본의 손해를 보충함으로써 일단 봉합될 수 있었으나 이제 위기는 국가로부터 착취당한 대중으로 전가되고, 경제적 장을 넘어서 정치적인 장으로 확산되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브렉시트이고 미국의 트럼프 당선이다. 이런 정치적 사건들이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위기와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가, 이를 이해하려면 정치적 영역에서 전개된 특이한 계급 대립구도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대립을 일반화하자면 미국이나 영국이나, 전통적으로 대립의 축을 이루던 보수와 진보라는 틀이 깨졌다는 것이다.
보수는 두 파로 나누어졌다. 보수의 주류는 국제 금융자본을 옹호하는 세력이다. 이에 대항하여 보수의 이단파가 등장했다. 이 파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면서 자국 제조업의 보호, 이주노동 반대 등을 외친다. 이 이단파의 주요 지지 기반은 자국의 제조업의 부활을 꿈꾸는 몰락한 제조업 자본가 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진보 역시 두 파로 나누어졌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진보의 주류는 이미 영국의 토니 블레어나 미국의 빌 클린턴 등으로 대표되는 세력이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체제를 옹호하면서 주로 금융산업에 종사하는 고급전문 노동자층에 기반을 둔다. 이에 대립해서 진보 좌파가 부활했다. 진보좌파는 몰락한 전통 제조업을 그리워하는 실직자, 남아 있는 국내용 기업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층을 바탕으로 하면서 주로 복지 담론을 중심으로 재규합된 세력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이 있다. 과거 계급연합은 프랑스 혁명 이래 혁명적 공화파와 노동계급의 연합이며 흔히 인민전선 또는 민주진보 연합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 연합세력이 독점부르주아 세력과 대항하는 것이 전통적인 계급대립 구도였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이 연합이 깨졌다. 이제 새로운 계급적인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보수 주류와 진보 주류가 금융자본과 신자유주의 옹호라는 입장에서 서로 가까워졌다. 반면 보수의 이단파와 진보좌파 세력이 신자유주의 반대라는 입장에서 서로 가까워졌다.
더구나 이런 새로운 계급 대립구도에서는 진보좌파의 세력도 쉽게 보수 이단파의 주장에 협력한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트럼프가 당선된 배경에는 아마 샌더스를 지지했던 세력이 트럼프를 지지한 결과도 한몫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영국의 브렉시트가 가결된 배경에도 노동당 좌파 즉 코빈 지지 세력이 노동당 주류인 블레어 세력에 대립해서 오히려 브렉시트를 암암리에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계급 대립의 현상을 보자면, 그 바탕에 신자유주의가 일으킨 변동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금융자본의 본산인 영국과 미국을 금융자본 중심으로 재편시켰다. 그 결과 국내 전통 제조업은 몰락했으며, 해외로 이전했다. 금융자본 종사자에게는 초과이윤이 배분되었고 그들은 금융자본의 존속에 사활을 걸었다. 반면 전통 제조업에 종사하던 노동자는 몰락하면서 이들은 차라리 인종적 색채가 다분하지만 자국의 제조업을 보호하자는 보수 이단파에 협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4)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위기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몰락하면서 문화 이데올로기적인 지형도 변화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등극했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과거 근대 자유주의와 기본적으로 동일한 자유의 개념에 기초한다. 즉 자기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자유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근대적 자유주의가 일정한 정도 사회현실의 법칙적 제약을 인정하는 반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자유에 대한 어떤 제한도 인정하지 않고 무제한적인 자유를 긍정한다는 데 있다. 이와 같은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라는 시대적 현실을 전제로 한다. 신자유주의 시대, 사회는 파편화되면서 한 사회의 차원에서 어떤 법칙적 제약도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니, 무제한적 자유가 긍정된 것이다.
철학적으로 본다면 포스트모던 자유주의를 정당화하는 여러 철학적 이론이 그 사이에 발전되었다. 대표적이 논리가 바로 푸코나 데리다가 중심이 된 후기 구조주의이다.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적 인식을 강조하면서 이 구조가 사회문화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더구나 하나의 텍스트에는 다양한 구조가 중첩되어 있어서 서로 알레고리적인 관련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이런 후기 구조주의에 이르게 되면 객관적 진리나 가치도 사라질 뿐만 아니라 전기 구조주의에 남아 있던 칸트적 보편과학조차도 사라지고 만다.
이런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의 이론에는 독일의 하버마스나 미국의 존 롤스가 미친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이들은 사회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 즉 인권에 기초하여 재구성하려 하였다. 사회적 제도는 모두 합의에 기초하는 것이어야 하며 다만 이런 합의가 공정하고 또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하버마스는 의사소통 이론을 전개하고 롤스는 공정한 합의의 조건으로서 무지의 베일을 제시했다. 이미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위기가 폭로되기 전에,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어 왔다. 무엇보다도 자유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있다. 자유라는 개념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는 자유이다. 하지만 이런 자유선택은 다만 머릿속에서 그치는 자유가 아닐까? 정말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가? 의문이다. 왜냐하면 욕망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욕망은 변덕스러운 힘이다. 욕망은 자연발생적으로 어떤 사람을 지배하면서 그가 마음속으로 원하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게 한다. 욕망의 힘은 의지를 통해 실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음속 사유 자체도 지배하고 만다. 즉 욕망의 힘은 마치 그것이 마음속으로 자유롭게 원한 것이라는 자기기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사실은 변덕스러운 자연의 힘에 의해 강제된 것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는 환상을 동반한다는 것이다.
자유 개념이 가지고 있는 이런 한계는 자유가 무제한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포스트모던 자유주의에 이르면 더욱 노골화된다. 포스트모던 자유주의가 유행하는 가운데 오히려 파시즘적인 폭력과 외적인 침략이 난무했다는 것은 미국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라크 침략이 미국이 욕망이었으며, 백인 경관의 흑인 살해가 또 미국의 욕망이었다.

5) 박근혜 정권의 몰락
브렉시트나 트럼프 당선이란 신자유주의 경제적 붕괴를 알리는 경고이다. 이 경고는 신자유주의의 축이라할 금융제국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한국과 같은 개도국에서도 출현했으니, 그것이 곧 박근혜 정권이 몰락하게 된 근본 원인일 것이다.
그동안 금융자본의 지배 아래 한국은 소위 수출 산업 중심으로 또한 10대 산업(전자, 자동차, 조선 등)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한국의 수출 산업은 국제 금융자본이 요구하는 이윤율을 달성하기 힘들어졌다. 이미 국제금융자본은 한국의 증권, 채권 시장을 버리고 중국으로 이동하면서 한국은 성장하는 중국산업과의 경쟁에 밀려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다. 조선산업과 해운산업에 밀어닥친 구조조정, 해고의 바람이 바로 그 증상이라 하겠다.
이런 수출산업의 위기는 노동자의 대량실업을 가져왔으니, 이것이 정치적 영역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그 일차적 현상이 지난 총선에서 영남수출산업 벨트에서 새누리당의 몰락이었다. 영남의 대체세력인 민주당은 수출산업을 옹호하는 노동자층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리고 수출산업 중심 발전에서 배제된 중소기업과 농민 역시 한미 FTA 이후 지속적으로 분노감을 품고 있었다. 그것이 국민의 당이 부상한 기반이다. 이 두 세력은 모두 재벌 중심 새누리당 세력에 반발했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한 지지와 반대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상호 대립적이니 분열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지진은 이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또 하나 거대한 지진이 폭발했으니, 그게 바로 이번 박근혜 정권의 몰락이라 하겠다. 박근혜 정권의 몰락은 최순실의 국정농단이라는 엽기적인 사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분노를 부채질한 감정적 원인에 속할 뿐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재벌과 권력의 유착관계이다. 사태의 본질은 재벌이 생존을 위해 권력의 보호를 요청했다는 것에 있다. 이것은 그만큼 재벌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더구나 박근혜 정권이 벌린 그 이상한 문화산업이란 것도 사실은 10대 수출산업의 몰락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경제를 호도하기 위한 권력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이제 한계에 처한 수출산업은 이미 획득한 부를 달리 사용할 데가 없었다. 이 부는 거의 대부분 부동산으로 투자되었다. 박근혜 정권 시대 부동산 거품은 생활비용을 앙등시켰으니, 이미 대중은 여름에 전기값조차 지불하기 힘들 지경이 되었다. 대중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상대적 박탈감에 더욱 시달려야 했다. 이런 여러 원인들이 겹겹이 충첩된 가운데 최순실의 국정농단은 국민의 이런 분노를 폭발시켰던 것이라 하겠다.
차라리 박근혜 개인의 실정이나 최순실의 국정농단 때문에 박근혜가 몰락했다면 이는 일시적이고 정권의 교체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위기가 근본적으로 한국자본주의 체제 내부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단순한 정권교체로 문제가 해결될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존재한다.

6) 철학의 시대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이후의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아무도 새로운 시대가 어떤 시대가 될지 알지 못한다. 다만 더 이상 금융자본의 국제적 지배라는 체제는 사라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금융자본의 지배가 사라진 이후, 과연 브렉시트나 트럼프가 원하듯이 국제 금융제국은 자국의 산업, 제조업을 회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렉시트를 포기하고 국제 금융자본의 지배체제 아래서 재생하기 위해 노력하는 남유럽 국가들을 따라가야 하는 것인가? 그리스, 포르투갈, 이태리는 과연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그 어느 것도 불확실한 것처럼 보인다.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한때는 복지담론으로 우르르 달려갔다가, 또 한때는 안철수 식 공정성장이 각광을 받다가 또 한때는 다시 박정희 식 경제개발이라 해서 이명박, 박근혜를 향해 달려갔다. 그 어느 것도 희망을 보여주는 것은 없으니, 국민의 절망은 더욱 깊어졌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이 시대는 과거 20세기 초 반복되는 경제공황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던 시대와 마찬가지 시대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도 미래를 알지 못했고 사람들은 깊은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런 시대는 바로 묵시록에 예고된 신이 침묵하는 시대이다. 이 침묵 그리고 그 앞에서의 절망감은 항상 파시즘의 온상이 된다. 이미 브렉시트나 트럼프를 보면 파시즘적인 인종주의가 상당히 위협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의 경우 이미 박근혜 정부 초기에 국민들에게 종북몰이라는 현상으로 이런 절망감이 표출된 바가 있다.
다행히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기회가 주어진 것만은 틀림없다. 이 기회는 보수가 정권을 잡은 브렉시트나 트럼프와 달리, 민중이 주도가 된 혁명이라는 점에서 희망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남유럽 국가들처럼 다시 신자유주의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때야말로 다가오는 존재의 소리를 경청하는 철학자와 시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B급 문화와 B급 철학 [피켓2030]

아래 글은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최근 출판한 [B급 철학](알렙, 2016)을 읽고 대학교 2학년 학생이 보내온 서평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 다른 측면에서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쓰고 싶으신 분들도 언제든 대환영이니 원고를 보내주시면 검토해서 게재하고 약소하지만 소정의 원고료도 드립니다.


권유리(건국대 건축학과 2학년)

2014년 1000만 관객을 이끌어낸 <겨울왕국>. 이 애니메이션에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열광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겨울왕국의 주인공 ‘엘사’와 엘사의 테마곡 ‘Let it go’는 이미 아이들에게 영웅과 다름없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이들의 이런 공감을 이끌어 냈는가? 이처럼 질문을 갖는 것이 바로 대중문화를 제대로 마주하게 되는 첫걸음이다. 밤늦게까지 학원을 다니는 학생들, 집안일과 회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들에게 주인공 ‘엘사’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부르는 ‘Let it go!’는 그들의 억압된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을 대신해준다. 많은 사람들은 ‘엘사’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엘사’라는 캐릭터는 [피로 사회](한병철 저)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안 되는 ‘규칙사회’에서 모든 것이 가능한 ‘성과사회’로 전환된 사회에서 느끼는 현대인들의 단절감, 우울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공감하며 때론 멀리 떨어진 입장에 서서 캐릭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자신도 모르게 제시한다.

정해져 있는 결말과 흔한 스토리, 한회만 봐도 앞뒤 내용까지 이해할 수 있는 드라마 <상속자들>을 보자. 안방에 앉아 동생과 보고 있자면 현실과 동떨어진 드라마 속 상황에도 분개하며 “재는 왜 저래?”, “친아빠 맞아?” 라는 말을 주고받는 것은 흔한 모습이다. 이런 단순한 질문 속에서 우리는 공자의 ‘효 사상’과 연결고리를, 또 ‘부의 추구’에 대한 연결고리를 스스로 찾아 낼 수 있을까?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대중매체를 접할 때 주체가 아닌 하나의 소비자가 될 뿐이다.

일본 만화 <진격의 거인>은 기괴한 스토리와 암울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수많은 독자들을 가지고 있다. 인간을 잡아먹는 거인과 이를 막기 위해 거대한 장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 정말 생존을 위해 살고 있는 만화 속 캐릭터들에게 정의와 선(善) 같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는 무시될 수밖에 없다. 언제라도 잡아먹힐 수 있다는 공포에 떠는 인간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방법은 소수들에 의한 철저한 지배이다. 비현실적이고 잔인한 설정에도 많은 사람들이 전율을 느끼며 계속해서 이 애니메이션을 찾는 이유는 일본과 한국인 속에 잠재되어있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 단 한가지의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마치 황제군의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진격의 거인>은 사람들 속에 잠재되어있는 피해의식을 자극한다.

지금과는 다르게 오랜 시간동안 문화는 대부분이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 즉 부르주아 계층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현재는 기술, 미디어, 언론, 오락, 드라마, 영화 등의 발달로 문화는 훨씬 더 널리 보급되었고 일부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산유물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아직도 클래식과 오페라, 전통음악은 고급문화로, 소위 말하는 대중문화는 깊이가 덜한 문화로 무의식중 인식된다. 친구와 함께 카페에서 칸트의 [순수 이성비판]과 쇼펜하우어, 헤겔을 찾는다면 지적인 대화이고, 어제 저녁에 보았던 드라마를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수준 낮은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문화에 A급과 B급으로 나눌만한 척도가 있는 것일까?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문화는 다름의 차이일 뿐 더 우월하고, 더 낮은 문화는 없다. 오히려 대중문화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시뮬라시옹’의 프레임으로 우리를 이끌어 다양한 공감과 동질감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만화와 게임, 영화, 애니메이션 같은 대중문화를 문화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수고가 따른다. 바로 ‘자기화’의 과정이다. 대중문화는 좁게는 자신을 넓게는 대중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이 거울을 바로 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왜?”라는 질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중문화는 필자의 말처럼 햄버거 포장껍데기처럼 단순 소비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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