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대학 – 대학과 자본 간의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대학

– 대학과 자본 간의?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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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종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

대학의 이념과 현실, 대학 없는 대학

흔히 우리는 대학을 전문적인 고등 교육과 연구를 함께 하는 기관이라고 한다. 교육과 학습은 대학의 이념이다. ‘교육’(敎育)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교(敎)는 ‘본’을 상징한다. ‘본’은 ‘본뜨다’, 즉 “본보기로 삼아 그와 똑같이 하다”는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본따다’, 즉 “남의 것을 배워서 따라하다”에서처럼 이상(理想)을 뜻하는 가치론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 가르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이 본을 보고 따라하고 제대로 따라하지 못하고 틀릴 때 매로 살짝 쳐서 틀린 것을 고쳐서 제대로 따라하도록 하는 것이다. 육(育)은 우리말로 ‘기리는’것이다. 그러니 ‘교육’은 본받음을 기리고 칭찬해서 더 잘 본받게 하는 것이다.

학습(學習)은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학(學)은 구(臼)와 효(孝)와 경(?)과 자(子)로 구성된 문자이다. 구(臼)는 ‘두 손으로 받들다’는 뜻이고 효(孝)는 ‘본’의 상징이며, 경(?)과 자(子)는 ‘어린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안으로’의 뜻이다. 즉 학(學)은 ‘배우는 사람이 효를 받들어 자신 안으로 본받다’는 의미이다. 습(習)은 ‘익히다’란 뜻으로 기림을 받아 신명이 나서 본받은 바를 자꾸 연습하여 몸에 버릇이 되고 익숙하게 됨이다.

그러나 현실의 교육은 이러한 본래의 이념과는 큰 간극을 드러내고 있다. 대학에서 교육의 이념, 즉 본받음을 기리고 칭찬해서 더 잘 본받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현실의 대학은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제 대학이 본뜨고 본따야 하는 것, 즉 존재론적이고 가치론적인 이데아(idea), 형상(eidos)은 ‘자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인간은 물화되었고 인간의 가치또한 교환가치로 환원되고 있다. 더욱이 교육 과정에서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학생 모두 자본의 가치 추구에 의해 생존을 규정받는다. 우리는 이로부터 그리 자유롭지 않다.

살아 있는 것이든 죽은 것이든 모든 것을 교환가치로서 취급하고 강제하는 체제는 비정규직 교수의 삶을 양산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비정규직 교수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대학을 자본의 논리로 운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으며 이에 저항하는 이는 배움의 장에서 쫓겨난다.

예를 들어 지난해 12월 중앙대학교의 학과 통폐합을 예고하는 구조조정 과정 중에서, 학교 정문 앞 공사장 크레인에서 대학의 기업화에 반대하는 농성을 하던 이 대학 독어독문학과 학생 노영수 씨가 최근 퇴학당했다. 그리고 상지대학교에서는 비리로 인해 실형을 선고받았던 전 이사장의 복귀 움직임이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3월에는 고려대 김예슬 학생이 교육이 없는 학교를 거부하며 대학을 떠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의 이념과 현실에 대해 반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미 대학은 경제논리로 지배되고 있다. 돈 안되는 학과는 폐지하고 통합하는 기업적 발상의 구조조정이 전면화되고 있다. 이러한 대학의 교육 속에서 인간의 욕망은 획일화되어 간다. 자본주의적 인간형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무엇인가? 이는 돈이다. 이를 위해 대학에 가야만 한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취업이 잘되는 학과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호모이코노믹스’의 ‘욕망의 경제학’이다. 호모이코노믹스는 이기적 인간의 욕망을 기초로 운동한다. 결국 자본은 대학생들의 욕망을 이기적인 원자적 욕망으로 재편성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이제 대학생들의 삶의 이상형은 ‘자본이 바라는 욕망을 자기 자신의 욕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자본의 논리가 정치를 포섭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과거 소크라테스나 프로타고라스는 교육의 내용에 있어서는 다른 입장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모든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열쇠로 보았다. 이는 교육이 그만큼 새로운 사회구성을 위한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새로운 공동체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 대학의 본연의 자리일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이와는 너무 다르다. 자본이 추구하는 가치를 ‘본받고자’ 하는 대학은 있다. 그러나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을 ‘길러내는’ 대학은 없다.

나를 지배하는 자본의 욕망

영화 [왕의 춤]이 기억난다. 이 영화에서 루이 14세는 절대주의 체제의 확립을 위해 궁정문화를 만들고 이를 통해 귀족과 성직자 등 상층집단을 제압하고 민중을 승복시키고자 했다. 국왕은 인민에게 자신의 힘을 표상시키고 상징적으로 재현하고자 예술을 종속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프랑스 아카데미를 장악하여 사상과 학문을 통제하고자 했다.

[왕의 춤]은 우리 시대에 “자본의 춤”으로 등장한다. 자본의 상징적 재현이 지금의 교육 현실이고 이를 통해 모든 가치를 표상한다. 자본으로 군림하는 힘의 표상은 대학의 기업화를 통해 주조되고 있다.

인간은 타인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해 간다. 그런데 대학이 기업의 논리로 운영되면서 자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새로운 나르키소스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기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길이 아니라 자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대체하면서 살아가는 길은 모든 가치를 차디찬 경쟁과 이익 계산의 논리 속에 빠질 뿐이다.

자본의 가치를 제외한 모든 가치가 허무주의라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 오직 살아있는 가치는 교환가치만이다. 인간과 자연 모두를 교환가치라는 추상적 동일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4대강 사업, 대학의 기업화, 체제의 재생산을 위한 출산 정책이며, 언론의 자유를 자본 운동의 자유로 만드는 것이다.

결국 교환가치로 환원 가능한 것만이 존재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자본은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여 교환가치로 환원 가능하지 않는 것들을 자본의 타자로 규정하면서 배제한다. 효용성이라는 생산성의 원리 하에서 교육과 자연 모두가 도구화되어 간다. 칸트 식으로 말하면, 이때 자본이 요구하는 것은 자율적인 지성적 인간이 아니라 명령에 복종하는 오성적 인간이다.

외적인 자본의 욕망이 인간의 욕망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 결국 우리 내부의 욕망을 구성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주류 가치관인 이 욕망의 실현이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와 훌륭함의 기준이 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나’를 찾는 길은 환상으로 규정된다.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환상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 오히려 환상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환상 속에 있는 이들은 사회에서 도태되었다고 규정된다. 자본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상적 자아로 ‘착각’하게 만드는 대학의 기업화는 인간을 ‘자신이 아닌’ 자본의 욕망에 매혹되어 살아가게 한다.

이러한 자본의 효과는 생산성 원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게 만드는 사회는 생산성의 원리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획일화된 욕망을 통해 사회적 통제를 효과적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영어의 university에 해당하는 라틴어 ‘universatas’는 ‘종합’을 의미한다. 이는 다양한 가치에 대한 종합적이고 비판적인 사유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은 다양한 가치를 음미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의 가치, 즉 자본의 가치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화하고 있다.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것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욕망은 ‘나’의 욕망이 아니며 외부의 욕망, 자본의 욕망이며 도착된 욕망이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욕망의 위험함을 감지하여 그와 관련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이유는 교육이 사회 속에서 인간을 자유롭고 책임 있는 존재로 변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본성과 교육은 유사하다. 왜냐하면 교육은 인간을 변형시키며, 변형시키면서 새로운 본성을 만들기 때문이다.”[단편 33] 그의 주장은 하나의 욕망, 즉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게 만드는 우리의 현실에서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교육은 인간의 욕망을 자본의 욕망과 일치하는 하나의 욕망으로 변형시켜 다른 욕망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욕망과 무질서에서 벗어나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은 교육이 갖는 특별한 정치적 성격이다. 무엇보다도 교육은 이렇게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 내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때 자유로운 연구와 비판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지금 자본의 욕망이 교육의 지향성을 대체시키고 있는 현실은 인간 존재를 자본의 욕망과 맞서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 이렇듯 교육은 양날의 칼이다. 한편의 칼날은 불평등과 자유의 억압에 대한 해방의 인간형을 만들고 다른 한편의 칼날은 차별과 억압, 무비판적 인간형을 만든다. 후자는 비판적 교육을 청산하고 체제의 추종자를 만들어낸다.

나의 욕망을 지배하는 나의 욕망

자본의 욕망은 물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물적이지만은 않다. 인간의 욕망을 물질적인 것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인간의 소외 문제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상품-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인간의 욕망을 물질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결국 인간관계를 물적관계로 뒤바꿔놓기 때문이다.

인간을 물화시키는 자본주의 사회 통제는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만을 조장하는 소비문화를 통해 구성된다. 소비문화의 전시상이 되어 버린 대학가, 박제된 혁명가 체 게바라의 표정을 입은 티셔츠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타자가, 즉 자본이 우리들을 욕망하고 있다고 오인하는 도착적 증세는 자본주의적 상품 경제 속에서 구조화되면서 자아 형성의 공간을 새롭게 구성한다. 이 공간의 중심적 자리에 대학이 자본의 운동을 위한 매개체로 놓여있다. 이 장소는 우리의 자아를 끊임없이 자본의 욕망과 동일화시켜내면서 ‘자기 소외’를 강제하는 훈육의 공간이다. 그리고 이 상품경제의 체제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삶을 향해 자본의 욕망을 욕망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자본의 욕망 속에 던져진 우리들은 우리 내면의 자신의 욕망이 갈구하는 목소리와 갈등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욕망이라고 간주되었던 욕망이 결국은 자본의 욕망에 불구하며 진정으로 내가 바라는 욕망의 지향성은 참혹한 자본의 논리 속에서 금지된다는 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극의 인식이 ‘대학을 그만둔다’라는 구호와 실천으로 드러난 것이다.

결국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우리들은 포이어바흐가 말하듯이 “참된 현재적 삶과 그것에 관한 그의 견해, 표상간에 존재하는 간격 위에, 그리고 그의 영혼과 공허 위에 당나귀가 넘어지던 미래의 바보다리를 세운다.”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욕망을 빼앗는 것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의 욕망은 우리들에게 증오와 투쟁의 대상이 된다. 우리에게는 한편으로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고자 하는 자아가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본의 욕망이 우리의 진정한 욕망을 갉아먹는 대립물이라고 인식하는 자아도 존재한다. 자본의 욕망은 상상적 동일화이다. 그러나 자아가 욕망하는 것도 상상적 동일화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반론할 수 있다. 우리의 욕망도 상상적 동일화일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자아의 욕망을 상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본의 욕망에 의해 구성되고 환원되는 욕망과는 달리 자신의 반성과정을 통해 자아의 상상적 동일화를 구성한다. 양자는 너무나 다른 지향성을 갖는다. 이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자아의 갈등과 감정의 교체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 이러한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식하고 실천하는 것이 관건이다. 왜냐하면 이 속에서 자본의 욕망이 아닌 인간의 욕망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맑스가 말하듯 이러한 의식이 “대중을 사로잡을 때 바로 물질적 힘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투쟁의 방식은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대학을 떠나는 방식이 있을 수도 있고, 대학 속에서의 투쟁 또한 있을 수 있다. 어느 것이 다른 방식보다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는 않다. 문제는 자본의 욕망으로 굳어진 낡은 질서를 균열 내는 공간에서 때로는 개별적인 때로는 연대를 통한 저항이 중요한 것이다.

자본이라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동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찾아 지난한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자본의 거울에 비친 모습 속에 나의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내맡기는 것은 ‘자본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자신의 지배를 받는다’라고 착각하는 자신은 나 자신이 아닌 자본에 투영된 나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자본의 욕망에 지배당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대부분의 욕망은 외부에서 온다. 따라서 우리의 욕망 구조를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욕망을 구성하는 자본주의적 체제라는 ‘외부’의 틀을 전환시키는 것이 필연적이다. 교육과 학습은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게 만드는 교육의 내용을 변혁하기 위해서는 교육자와 학습자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근대계몽주의의 일방적 교육방식을 비판한 철학자 칼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교육과 학습간의 일방적 관계를 지양한다. 교육자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육과 학습은 어느 한 쪽이 없이는 성립불가능하다. 술을 ‘거르’듯 우리는 허섭스레기가 되어가는 교육의 획일성을 거르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사유의 형태에 국한되지 않으며 마치 술을 ‘거르’는 일처럼 물질적이다.

다시금 우리는 자신 내면에서 숨죽이며 꿈틀대고 있는 양심의 울림에 귀 기울려야 한다. 우리가 기름진 땅위에서 메마른 땅을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는지, 양심의 소리에 귀 막고 타인의 산물을 꼭꼭 숨기고 받아먹고 있지는 않는지.

어떤 이가 배부르다는 것은 어떤 이가 가난하다는 것이다. 사회의 기름진 옥토를 ‘기리는 것’은 우리네 책무이며 삶 그 자체이다. 교육이 우리네 삶에 아로새기고자 하는 것은 우리네 삶을 지탱해 온 것들을 위해, 그 노고와 땀을 위해 조금이나마 빚을 갚은 과정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너무나 거를 것이 많다. 이 일의 시작은 자본의 거푸집 속의 우리 자신부터라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중앙대를 바라본다 – 대학과 자본 간의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중앙대를 바라본다

?-? 대학과 자본 간의 문제 –

글: 강경표 (중앙대학교 박사과정수료)

2008년 5월 중앙대를 두산그룹에서 인수한다는 사실이 공표되었다. 수많은 언론의 집중과 관심 속에서 거대 자본과 결합한 대학이 또 하나 나타난 것이다. 1996년 삼성에 인수된 성균관대를 시작으로 기업에 의해 운영되는 학교는 몇 개 있지만 유독 중앙대가 주목을 받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먼저 자본주의가 팽배해진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단행된 대학 인수라는 점과 둘째로 두산의 일방적 개혁으로 인한 학내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는 점, 셋째로 발생한 문제의 비민주적 처리과정이 그것이다.

중앙대학의 구조조정 일지

두산그룹의 중앙대 인수 이후 두산그룹은 중앙대에 개혁의 칼날을 드리웠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학내에서 ‘천원 재단’으로 불렸던 김희수재단과의 불협화음 속에서 중앙대의 위상은 실추될 만큼 실추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두산의 중앙대 인수는 학내에서도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2009년 4월 ‘구조계획위원회’가 발족되고, 같은 해 11월 교지 [중앙문화]사태 이후 학내 여론은 급속도로 바뀌기 시작한다.

같은 해 12월 ‘1차 구조조정안’이 발표되면서 시각차는 대립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때마침 일련의 보수언론에서 중앙대 구조조정을 찬양하는 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학과 통폐합”(동아일보 2009.12.30), “중앙대의 학과 통폐합은 시대조류에 맞다”(세계일보 2009.12.31), “대규모의 학과 통폐합 나선 중앙대의 실험에 주목한다”(중앙일보 2009.12.31)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보수 언론의 공통된 논조는 교수사회를 철밥통으로 매도한다는 점과 학과제를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은 학생들이다. “의혈 중앙 구조조정에 대한 학생대표자 기자 회견문”을 비롯한 “학생 긴급 토론회”회를 시작으로 학내에는 구조조정 반대를 외치는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학교 측에서는 총학생회 주최의 “새내기 새로 배움터”를 불허했다.

또한 교수협의회는 토론회 및 “중앙대학교 학문단위 및 운영체계에 대한 재조명”에 대한 기자회견을 통해 구조정의 불합리성를 전달하려 했고, 이것은 본관 앞 천막 농성으로 이어지지만 2010년 4월 8일 구조조정 최종안이 이사회를 통과하게 된다.

두산효과와 박용성이사장을 바라보는 두 시선

사실 중앙대가 학내 개혁을 시도한 것은 2003년 “DRAGON2018” 계획이 수립되면서 부터다. 현 “CAU2018+”의 전신인 “DRAGON2018” 계획은 개교 100주년을 맞는 2018년에는 세계 100대 대학에 진입한다는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희망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희망은 “CAU2018+” 계획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두산의 중앙대 인수 이후 이 잿빛 희망은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산과 중앙대가 체결한 양해각서(MOU)만으로도 2009년 대학입시에서 신입생 백분위가 1% 높아진 것이다. 뛰어난 인재 확보라는 측면에서 “두산효과”는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자본의 힘을 증명하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두산효과” 이후 나타난 또 하나의 현상을 꼽자면 박용성이사장의 발언 수위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재계에서 “Mr 쓴소리”라는 애칭을 가진 박용성이사장은 본인의 경제관이 투영된 교육관을 강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2008년 6월 10일 “이사장 취임사”에서 그는 “중앙대, 이름만 빼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전부 바꾸겠다”는 말로 대대적인 개혁이 있을 것임을 시사했다. 중앙대의 실질적 개혁을 누구보다도 원했던 중앙인들은 그 당시만 해도 그의 말에 대부분 찬동하는 분위기였고, 지난 재단의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자본 없는 개혁의 허망함 앞에 박용성이사장의 행보에 반대보다는 찬성의 표를 던져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09년에 들어오면서 박용성 이사장의 발언은 수위를 넘어 중앙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을 하게 된다. “기업이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판매가 되듯 대학도 사회가 원하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중대신문 2009.5.24), “주인의식을 갖는 것과 주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며, 대학 사회에 경계를 넘어서는 과도한 주인의식이 퍼져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진다”(중앙일보 2009.8.28).

학생을 제품으로 교수를 직원으로 바라보는 박용성이사장의 태도와 주인의식에 대한 비하 등은 중앙인의 가슴에 상처로 남기에 충분했다. 또한 학생들의 주인의식이 학교재정의 등록금 의존도가 높은 까닭에서 기인한다는 그의 분석은 중앙대가 아닌 중앙인에 대한 분석을 제대로 수행했는가에 대한 의문만을 남기게 되었다.

장덕진 교수는 “일등 기업의 대학 개혁”(경향신문 2010.4.14)이라는 칼럼을 통해 일등과 일류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두산을 사류기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중앙대에서 벌어지는 두산의 정신적 폭력과 비민주적 행태를 꼬집었다. 며칠 후 박용성이사장은 “중앙대 개혁의 외풍”(경향신문 2010.4.18) 이라는 제목으로 중앙대가 처한 환경과 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의 간섭을 외풍론으로 간주하며 당당하게 맞선다.

그러나 박용성이사장이 중앙대가 처한 환경과 문화를 운운하려면 최소한 기업의 논리를 떠나 중앙대의 특수성을 좀 더 고려해야 했다. 사실 중앙인들 스스로는 지난 김희수 재단을 썩은 뿌리라고 생각하고, 지난 재단과의 단절을 강력하게 소망하였고 강력한 투쟁을 벌여왔다. 그리고 지난 재단의 무기력함 속에서도 지금까지 중앙대가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중앙인의 주인정신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중앙대 인수과정에서 드러난 지난 재단과의 관계 또한 중앙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중앙대에 직접적으로 1200억을 투자한 것이 아니라 지난 재단에 1200억을 넘겨준 사실은 박용성 이사장이 진정으로 중앙대 개혁에 의지가 있는 교육자인지 아니면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기업인에 불과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만든다.

비민주적 절차를 통한 학과 통폐합


자본의 논리가 현실적으로 막강한 힘을 지녔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의 거의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역할이 경제적 파이를 키우는 것이라는 점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의 힘이 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그 절차가 비민주적이라면 그것을 따를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중앙대 구조조정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중앙대 개혁에 있어 드러나는 비민주적 처리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학내 반대여론을 주도한다는 명분 아래 [중앙문화]와 [녹지]의 예산을 삭감한 것과 학내 언론 검열, 총학생회 주최의 “새내기 새로 배움터”의 불허, 자연대 학생회장의 징계 파문 등과 함께 민주적 절차에 따른 구조조정을 내세우면서도 제대로 된 의견수렴 절차가 없는 것 또한 그렇다.

이에 천막농성이 진행되는 가운데 “중앙대 학문단위 일방적 재조정 반대 공동 대책 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천막은 강체 철거되고, 의견수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박용성이사장의 개혁에 찬동하는 보수 언론들이 철밥통을 언급하며 개혁을 의심하거나 반대하는 교수들의 발언을 원천 봉쇄하고 나선 것도 자본과 결탁한 언론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또한 2010년 4월 8일 구조조정 최종안이 이사회를 통과하고 확정되던 날 불거진 고공크레인 점거 사건에 가담한 몇몇 학생들에 대한 처리문제는 기업식 대학운영에 있어 보여지는 독단을 여실히 드러냈다. 교육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할 학생의 계도 문제가 퇴학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일련의 중앙대 사태를 바라보며 우리가 유심히 지켜봐야 하는 것은 중앙대 개혁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아니라 그 본질이다. 지난 김희수 재단과의 단절을 가슴 깊이 갈망해온 2만5천 중앙인들은 대체적으로 박용성 이사장의 개혁에 찬성한다. 그러나 그 개혁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대 개혁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과정들은 기업을 앞세운 자본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대학이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자본과 대학 그리고 기업

중앙대 개혁에서 나타나는 본질적인 문제는 자본과 대학의 문제이다. 이것은 기업의 대학 운영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며, 수많은 진통을 겪고 있다. 한 신문의 칼럼에 따르면 “100여 년간 변하지 않는 한국의 대학들을 세계시장과 경쟁하는 대학으로 만들려면 검증된 기업식 개혁이 정답일 것”(한국경제 2010.05.09)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기업을 통해 검증된 사실은 과연 무엇인가? “파우스트의 거래”로 일컬어지는 대학의 기업화 속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까지 받아온 교양중심의 대학교육이 정말 그렇게 문제가 많은 것일까? 효율성과 생산성이 떨어지는 인문학은 사라져야만 하는가?

이러한 일련의 질문들은 대학교육의 위상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근대를 모델로 한 민주 세력을 양성하기 위해 대학 교육은 교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세력들은 이러한 교양중심의 교육이 현대 사회에는 적용되지 않는 낡은 교육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면에는 “절대 자본”(이명원 “자본주의와 대학” 2007) 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신자유주의가 있다.

교양중심의 대학교육이 근대의 체계를 반영한다면 신자유주의는 어느 역사시대를 반영할 까? 신자유주의는 현대사회에 부합하는 최첨단 유행인가?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검증된 기업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신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실자본주의”에 가까운 한국적 신자유주의 모델은 이미 봉건적이다. 독단적 자본가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이 재편되어 있다. 자본가는 왕이며 그의 의지에 따라 효율성이 없다고 간주되는 것은 사라지면 그만이다. 그의 의지에 동의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민주적 절차도 소용은 없다. 우리는 이러한 독단성을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대학교육에서 자본의 역할은 경제적 파이를 키워주는 것이다. 기업 출신의 CEO들은 분명 그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파이의 조각들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는 민주주의 교육에 부과된 몫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학 교육에는 스스로 민주주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교육이 지속되어야만 하고, 민주적 절차를 중시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이런 의미에서 중앙대를 포함한 대학 개혁에 있어 인문학과의 무분별하고도 일방적인 통폐합은 문제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인문학은 민주주의 교육의 산실이기에 인문학의 생산성과 효율성의 문제를 경제적인 시각에서 재단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진정한 인문학의 생산성과 효율성은 그들이 만들어 내는 사회적 담론에 있다. 비록 당장은 경제적 가치가 없어 보이고, 잡음을 일으키고, 개혁을 주도하는 세력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인문학이 지닌 민주주의를 지속하려는 의지는 계속해서 만들어져야 하며, 앞으로도 만들어질 것이고, 이것이 인문학의 생산성과 효율성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민주적 담론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인문학적 시각이 필요하며, 이것이 인문학을 함부로 통폐합 할 수 없는 이유이다. 다시 말해 다양한 담론이 형성될 수 있는 다양한 장소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사회가 EU라고 하는 경제적 단위로 통합되어 있다고 해서 유럽의 문화가 통합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인문학적 사고를 유사학과 통폐합이라는 무딘 칼날로 재단하려는 시도 자체가 인문학적 효율성과 생산성을 궁극적으로 떨어트리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주인과 주인의식 그리고 중앙인

“절대 자본”의 세계에서는 자본이 생명력을 갖는 근본인 것처럼 보인다. 자본이 조직을 창출하며, 그 조직은 리바이어던적 체계를 부여받으면서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체계 내에서는 생명체가 갖는 근본적 노동력은 상품 또는 교환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그 위에는 자본의 주인인 자본가만이 있다.

진정으로 주인의식과 주인이 다른 것이라면, 그래서 서로의 역할 구분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면 자본이 갖는 생명력 또한 진정한 생명과는 다른 유사체일 뿐이므로, 주인은 유사 생명체의 주인일 뿐 주인의식을 가진자들의 주인은 아니다. 그러므로 중앙대라는 이름만으로는 중앙인을 하나로 묶을 수도 없을 것이며, 통제할 수도 없고,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주인의식을 가진 자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또한 자율적 주인의식이 없는 노예의 도덕을 가진자들을 육성하는 것이 대학의 목표라면 그것은 분명 재고되어야만 한다. 네 것과 내 것을 확실히 구분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모델 속에서도 애사심이나 애교심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없다면 탁월한 효율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주인의식을 갖는 것 또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덕목이며, 대학교육의 일부이다.

그러나 중앙대 개혁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사태들은 자본과 대학 그리고 기업과의 관계에 있어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재단의 선택과 강요되는 침묵은 자본 앞에서 무력해지는 대학의 현실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더더욱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은 중앙대 개혁 모델을 따르려는 또 다른 사립대학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앙일보의 한 사설의 제목은 “대규모의 학과 통폐합 나선 중앙대의 실험에 주목한다”라고 되어 있다. 2만5천 중앙인이 실험대 위에 올라있는 것이다. 대규모의 사회적 실험을 아무런 비판 없이 찬양하는 글을 보면서 우리가 진정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 2만천의 중앙인이 실험대 위에 서 있어야 하는 실험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만약 실패한다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여기에 중앙인의 한사람으로서 중앙대를 바라보는 시각과 인문학을 전공하는 내 생각을 적어본다.

 

혁명과 통약불가능성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혁명과 통약불가능성

글: 이규성 (이화여대)

과학사상가 페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는 서로 환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사고 모델이 공존하는 상황을 과학사에서 확인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그러한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을 사회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레닌과 모택동과 같은 혁명적 지식인들은 그러한 현상을 예리하게 파악했다고 지적했다. 그와 대부분의 과학사가들에 의하면 근대과학의 수리 물리적 법칙은 현재 순간인 지금(now)의 동일한 연속을 전제하고서 성립한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과학 법칙이 과거 현재 미래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시간의 가역성(reversibility)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제는 이미 아인슈타인이 어느 곳 어느 시점으로도 순간적으로 갈 수 있다는, 순간에서의 무한 속도를 전제하는 것과 같다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논의들은 서양 근대 과학의 무반성적인 형이상학적 전제가 동일성이라는 사실을 서양 지성사에 각인시켰다.

이러한 논의의 맥락에서 페이어아벤트는 뉴턴-유클리드적 시­공간 좌표를 전제한 사고 유형과 이를 전복할 수 있는 전혀 다른, 그래서 통약불가능한 새로운 사고 유형이 균일하지 않게 병존하는 현상을 주목하였다. 이러한 ‘불균등발전’은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며, 그럼에도 만일 근대 과학적 사고 모델을 유일한 합리적 모델로 통용시키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고의 독재이다. 혁명사에서는 그러한 동일성에 근거한 환원주의적 태도는 교조주의적 인식 방식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갖는 맹목성은 그로 인한 실천적 패배를 보여 준다.

한 동안 한국에서도 유행했던 논리 실증주의와 칼 포퍼의 사고 모델은 근대와 현대에 걸쳐 합리적인 것으로 통용되는 것으로 믿고 있는 과학적 방법을 교조주의적으로 옹호하는 것이었다.[최근 번역된 『파르메니데스의 세계』(K. Popper, 이한구 옮김, 2010)는 근대적 동일성을 옹호하는 『동일성과 실재』(Identity and Reality, 1908)의 저자인 과학철학자 에밀 메이어슨(E. Meyerson)을 존경하고 계승하는 관점의 결정판이다.] 이렇게 보면 페이어아벤트의 『방법에의 도전(Ageinst Method)』(정병훈 옮김, 1987)은 지성사에서의 사고의 억압에 대한 폭동(revolt)을 옹호하는 셈이 된다.

정치 경제적 억압과 착취가, 철학과 과학이 비판적, 논리적 사고라는 미명하에 가하는 억제와 함께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한국 철학도들만큼 겪어온 이들도 드물 것이다. 철학을 왜하냐? 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을 망설이는 것은 조건 없이 주어진 신기한 외래 철학과 과학에 주눅이 들어 고생하고 있는 것이 이미 응답으로 되어 있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다. 지성사에도 이들을 항복시켜 수오지심을 유발한 위정자와 교육자 학술관료, ‘승냥이、돼지、남루한 개들'(레닌)이 있다.

서양 전통의 합리적 사고 모델이 생리적 불건강을 초래한 것에 저항한 니체가 “교회, 국가, 군대 이 개들이 언제 죽고자 했는가?”라고 염세적으로 반문한 것은 인간 지성의 부단한 자기 비하적 편집증이 사상과 심리, 사회조직에서 부단히 재생산되는 현상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함께 진화해온 개를 측근에 두면서도 비난의 상징으로 쓰는 것은 자신처럼 순치된 것에 대한 심적 저항과 분열일 것이다. 이러한 저항적 분열자체가, 순치된 비폭력 사회에 욕이 많듯이, 심성의 불균등발전의 한 사례일 것이다. 심성의 불균등현상이 없다면, 심리학과 정신 분석학도 없었을 것이다.

페이어아벤트는 맑스에서 모택동과 알튀세르에 이르는 급진 사상가들이 언급하는, 역사에서의 다양한 불균등현상을 주목한다. 예를 들어 맑스는 구 생산관계를 앞지르는 예술 사상이 구제도를 이끌어 갈 수도 있음을 언급하였고, 트로츠키는 사회 내 각 제도적 층위들이 평행선상에서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그러한 현상의 철학적 배경에 대해서는 모택동의 『모순론』이 훌륭하게 설명한다고 보았다. 레닌은 20세기 초부터 시작한 중국 혁명과 유럽을 비교하면서, 유럽의 부르주아 계급이 노동계급의 저항을 두려워하여 중세적인 것을 다시 들여와 그것에 안주하려고 하는 반면, 젊은 아시아는 역동적 혁명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사실 중국 혁명은 교조주의와의 투쟁사이기도 했는데, 모택동의 사회철학은 중국 사회의 불균등발전 현상(봉건 군벌과 봉건적 유산의 잔존, 광범위한 농업과 도시 자본주의의 공존, 제국주의와 민족 자본가의 공존 등)을 모순이라는 변증법적 개념을 활용하여 예리하게 인식하였다. 그는 어떤 모순의 어느 측면이 지배적으로 작용하는가에 따라 변동해가는 역사를 분석함으로써 그의 사회과학적 안목을 입증하였다.

모순이란 반대 방향의 힘들이 동시에 서로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면서 공존하면서도 서로 알력을 생산하는 관계[대립의 통일]를 의미한다. 이 힘들은 두 개 이상일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계급모순은 기본 모순이지만, 과정에 있는 사회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과거의 봉건적 모순일 수 있으며, 새로운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모순이 다른 모순들을 지배할 수도 있다. 그때그때의 사회성격을 지배하는 모순은 주요모순이라 부르고, 자본주의의 공통된 모순인 계급모순은 그것에 의해 ‘중첩'(李大釗)된다. 이러한 융통적 인식은 중국의 혁명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지식이 되었다.

이처럼 불균등발전은 사회의 개조를 더디게 하는 요인이면서도 그것을 성공시키는 이점이 되기도 했다. 레닌에 의하면 그러한 불균등현상은 맑스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역설’이나 ‘변증법적 수수께끼(conundrum)’로 보일 것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제로 자연계에서나 사회에서나 생의 모든 단계에서 생존하고 있는 새로운 것은 남아 있는 옛 것의 잔재와 맞부딪히게 된다. 그리고 맑스는 부르주아적 권리의 잔재를 독단적으로 공산주의에 끼워 넣었던 것이 결코 아니며, 자본주의라는 자궁에서 출현한 하나의 사회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가피한 것이 무엇인가를 지적했던 것이다.”(『국가와 혁명』, 김영철 옮김, 1988)

여기서 불가피한 것이란 상공업자 독재 사회에서의 민주주의적 인권과 권리를 의미한다. 비록 추상적 평등이지만 그 민주주의는 로베스피에르의 혁명 유산으로서 정치적 해방의 원리였으며, 혁명적 경제 해방을 추구하는 단계에서도 필수적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필수적인 것은 ‘보다 민주적인’ 국가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국가는 파리 콤뮨을 모델로 한 것으로 시민 각자가 국가 경영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 지고, 공직자가 반민주적인 경우에는 소환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 국가이다.

민주주의는 그 구체적 형태가 발전하는 가운데 그것이 지향하는 최상의 이상이 이루어져, 계급과 민중이라는 언어가 소멸될 때까지는 보존되고 발전되어야 하는 정신이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함께 간다. 그러나 레닌 자신도 지키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기존의 혁명사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대립시킴으로써 민주주의를 자유주의 쪽으로 보내었고, 그에 따라 자유주의 체제는 사회주의를 정치적 독재로 인식하게 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평등을 의미한다.”(『국가와 혁명』) 부자유가 불평등을 의미한다면, 평등은 자주적 평등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상의 어느 국가도 민주주의를 수사적으로만 사용해 온 것이 될 것이다. 억압 기구들의 복합체인 국가가 그 언어를 수식 도구로 오염시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에 따라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개방적 관계가 칸트적인 내적 양심으로 내면화되는 것도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민주주의가 정치적 양심으로 내면화된 것은 현대 사회의 불균등현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이 점에서 새로운 정치학은 인간 내면도 정치의 장으로 인식하는 내면의 정치학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테르미도르 반동 직전, 빵을 요구하는 평민과 그것을 줄 수 있는 산업 부르주아로부터 고립된 로베스피에르의 고뇌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장차 인민들이 부르주아의 노예로 될 것임을 예감하고, 빵만으로 살 것인가 라는 성서적 논쟁을 벌이게 된다.

그가 사라진 후 빵을 주체로 한 자유와의 절충품이 나왔는데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이다. 중국 혁명사도 중국적 형태로 그러한 현상을 보였다. 원리상으로만 보면 문화대혁명은 생산력 결정론과 의지주의적 실천론 사이의 대립, 혹은 상 시몽에 연원하는 ‘기술 공학주의’와 ‘루소적이면서도 맹자적인 평등주의’ 사이의 대립(B. Schwartz)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상화나 관료주의와 같은 봉건 잔재와 봉건문화의 폭력적 파괴 등 여러 요인들로 인해 실패로 끝났지만, 그 강렬한 평등에의 갈망에도 불구하고, 문화대혁명은 주자파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스탈린주의의 핵심 요소인 국가자본주의적 기술관료 지배체제로 귀결되었다. 민주주의는 다시 내적 양심으로 내면화되었다.

기존의 혁명사에 대한 이러한 개괄적 이해로 보면, 외적 투쟁의 상황에 있어서나 내면적 양심화에 있어서나, 폐쇄와 개방, 속박과 해방, 이른바 옛 것과 새 것 사이의 분열과 항쟁이 있다. 이러한 불균등현상을 혁명적 사상가들은 차이(差異)라기보다는 모순(矛盾)으로 표현했는데, 그들은 모순을 우주의 보편적 생성의 원리로도 확대하였다.

모택동에게도 나타나는 이러한 존재론적 우주관은 엥겔스의 근대적 우주관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자연 변증법에 의하면 무한히 계속되는 자연의 진화사는 생명체의 생과 사, 그 총체적 절멸, 지구와 성운들의 파괴를 동반하면서 범우주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현상계의 보편적 전변 과정은 근대 과학이 세운 물질과 그 에너지의 항존성과 동일성의 법칙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동일성은 과학적 법칙들의 항구적 동일성을 보장해 주는 근대적 합리성의 공준으로 간주되었다. 심지어 그것은 인식론적 관념론과 물질의 소멸 가능성을 언급했던, 그래서 볼셰비즘의 비난의 표적이 되었던, 포앙카레나 마하주의자들과 아인슈타인도 궁극적으로는 버릴 수 없었던 근대적 신념이었다.

그러나 기존의 혁명적 세계관의 이러한 근본적 신념은 유럽의 지성사적 문맥에서 보면 하나의 강경한 형태의 합리적 사고 모델을 관철시키는(,) 그래서 또 다른 새로운 세계상과 충돌할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메리카와 한국의 부드러운 형태의 과학주의도 생산력주의에 기대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기술 공학주의와 궤도를 같이 한다.]

근 현대의 볼셰비즘적 형태이건 자유주의적 형태이건, 과학주의적 세계상은 세계에 대한 자연주의적이고 객관주의적 태도에 대한 무비판적 신앙 때문에 자신들의 시야 안에서의 일관성에만 집착하였다. 이러한 일관성은 자기 폐쇄적인 통약가능성을 전제한 의사소통과 합의 가능성을 이성적 사고라고 선전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 신념은 자신들의 구태의연한 태도가 인간의 또 다른 심각한 인식 방법과 통약불가능성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였다. 이 인식 방법은 인간의 ‘내감에서의 자기의식’이 이해하는, 기억과 연속된 느낌들과 의지、상상과 열망의 영역으로서, 이른바 질적 경험과 통찰의 영역이다.

외감에 주어진 감각만으로 내감을 채우는 칸트의 무미건조한 지성, 그러한 감각을 계기로 실재론적 인식론이나 관념론적 인식론을 구성하는 레닌, 모택동과 마하주의의 현대적 후예들은, 그러한 질적 자기의식의 차원이 인간과 생명의 진화를 포함한 자연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 수 있다는 심원한 사실을 다룰 능력이 없었다. 이러한 무능에 속류 유물론의 한 형태인 물리주의적 심성론이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의 도구인 수량화와 질적 자기의식의 광대한 차원 사이의 불가통약성에 대한 주의 깊은 성찰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또 다른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 줄 수 있다. 이에 따라 그것은 인간의 의지와 상상에 기초한 혁명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혁명의 보편적 핵심인 자주적 평등에 대한 자연사적 발생 근거와 함께 그 주체적 기초에 대한 이해는 내감에서의 의식이 감행하는 경험의 심화에서 그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와 베르그송(B. Bergson)이 지성의 ‘객관화하고 고체화하는 습성’과 ‘내감에서 알려지는 의지나 생명’ 사이의 전혀 종류가 다른 불균등이 있음을 알고, 그러한 통약불가능성과 역설을 회피한 것을 서양 문명의 퇴폐성과 파괴성으로 암시한 것은 다시 상기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존 생 철학의 낭만주의적 성격이 지나치게 부각된 것이, ‘폐쇄적 고체의 논리에 고착되는 경향성’과 ‘개방적 유동성을 표현하는 경향성’ 사이의 불균등이 집약된 존재가 생명체이고 인간이라는 것을 망각하게 했다. 그럼에도 생 철학은 자연사의 부단한 진화가 개방적 유동성의 힘인 자유의 충동이 나타나려는 노력이며, 인간의 존재 의미는 그 노력에서 확인된다는 것을 음미하게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인간이 만든 온갖 도구들을 불평등의 도구로 폐쇄화하는 계급의 분화를 타파하는 개혁이나 혁명으로도 나타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잊혀진 조선 후기의 동학혁명의 세계상이 다시 환기될 필요가 있다. 최시형은 혁명을 개벽(開闢)으로 이해했다. 개벽은 내적 성찰에서 경험되는 심층적 생기(生氣)가, 고정되고 형해화된 사회 구조와 심리 구조를 용해시키면서, 보편적으로 ‘표현(表顯)’되는 전환점을 의미한다.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본성[性]을 구성하는 생기는 ‘약동불식(躍動不息)’하는 힘으로 우주를 생성시키고, 응고된 인성과 사회를 혁신해 나간다. 유동성과 개방적 소통성을 가진 그 본연의 성품은 자유로이 그리고 평등한 방식으로 자연과 인생사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진정한 주체성이란 이러한 우주적 연대성의 원리를 억압의 시대를 돌파하여 표현하는 행동에서 표현된다.

원래 『周易』에 연원하는 개벽은 양성의 생기(生氣)가 문을 열고 자신을 실현해 보이는 과정적 운동을 통해 음성의 정체적 상태가 약화되는 전변의 시간을 의미한다. 최시형(崔時亨)은 자신의 이름처럼, 이러한 시간을 결정적인 ‘형통(亨通)’의 시간[時]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소통적 공감의 힘이자 활력인 생기를 자기성찰의 노력을 통해 이해하고, 그 생동성이 이끄는 내적 필연성에 따라 실천하였다.

동학의 사상이 비록 역사적 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 역동적 심성론은 고체화된 사회를 혁신하는 혁명적 인성론의 이념형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생 철학이 제기한 고체적 수량화의 논리와 유동체에 대한 내적 경험의 통약불가능성이 사회를 새 것으로 변동시키는 혁명적 세계관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이 결국은 기술 공학주의적 통제 사회로 되고, 아메리카와 함께 군산복합체 사회로 나아가는 오늘의 역사를 볼 때, ‘진정한 민주주의는 평등’이라는 테제는 실로 어려운 사상임을 실감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황야와 숲에서 온 저 고대의 성인들이 고통과 번뇌 속에서도 인생의 진리로 제시한 이래로, 일상의 번민에서는 물론 수많은 폭동과 혁명에서 나타났다가는 사라진, 그리고 사라졌기 때문에 더욱 진실된 역설의 사상이다. 그것은 분명 야성의 이념으로서, 순치되고 강경해진 문명과 역(逆)운동을 하는 세력을 창조해 낼 것이다. 그리고 이 세력은 자신의 젊은 생기로 내적 양심의 사상을 구체적인 물질적 삶에서 실현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하고자 할 것이다.

 

광주를 기억하는 철학적 가이드라인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광주를 기억하는 철학적 가이드라인

글: 최종덕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직접 감정의 용기와 간접 반성의 용기

동물에게 감정이 있다면 감각에 기반한 신체 신진대사율의 만족스러움과 불만스러움이라는 단순감정일 것이다. 감정 수준이라기보다는 외부조건을 지각하는 기초적인 자극반응 양식이다. 그러나 인간은 만족과 불만족의 기초 감정을 확장하여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발현한다.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화내고, 노여워하고 슬퍼하며 두려워하고 미워하거나 좋아하고 싫어하거나 욕망하는 감정 등이 그것이다.

인간 감정의 발현은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 감정의 단계는 더 상승한다. 불쌍한 이를 보면 측은해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기도 하고 나쁜 것을 보면 울컥하거나 피하기도 하며, 옳고 그른 것을 가를 줄 아는 마음도 생긴다. 불행하게도 인간 마음에는 이런 유형 말고도 시기하거나 집착하고 사기치며 속이고 아부하고 업신여기며 이기적인 마음의 유형도 도사려 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의 유형을 넘어서는 더 높은 단계의 마음이 가능하다. 숭고함과 이타성이 그것이다.

이렇게 마음의 수준은 다층적이다. i) 반응적 감각 수준, ii) 소위 칠정七情과 같은 직접 감정의 마음, iii) 사단四端과 유사한 판단하고 사유하는 간접 반성의 마음, 그리고 iv) 간접 반성의 마음으로부터 직접 창출의 마음으로 되돌려 발현되는 숭고함이나 이타성의 마음도 있다. 이렇게 마음의 수준이 다층적으로 겹쳐 있다.

용기는 간접 반성의 마음에 해당하기도 하지만 용기가 실천되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직접 발현의 감정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불의를 보고 나도 모르게 저항을 하는 경우이다. 어떤 나쁜 상황에 부딪쳤을 때 즉자적으로 용기가 발현되는 경우 말고 삶속에서 연습되고 간접적으로 교육된 용기의 발현도 가능하다. 전자를 ‘직접 감정의 용기’라고 말할 수 있다면 후자를 ‘간접 반성의 용기’라고 부를 수 있다.

반면 나쁘거나 잘못된 것을 보아도 잠자코 있는 사람도 많다. 나쁘고 잘못된 것, 즉 직접 감정의 마음 수준을 분명히 느꼈는데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다면, 용기가 없거나 아니면 그것에 동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동조하지 않는다면 용기를 내어 고쳐야 하지만, 나부터 그런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나쁜 깡패정치꾼, 독재자에게 미리 알아서 기는 주변 아부꾼들 그들을 가만히 두고만 본다면, 결국 나는 그들과 한패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공포에 맞섰던 광주의 용기

한반도 근현대사를 치욕으로 물들게 한 일제의 역사는 해방의 한 순간으로 되돌려지지 않았다. 일제의 흔적을 그대로 이식한 채,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다. 한마디로 말해서 깡패들의 정권이었다. 정치깡패들의 무소불위 횡포는 315부정선거로 폭로되었으며, 정권의 총체적 부정은 419 민주혁명으로 막을 내렸다. 1960년 길거리로 나선 학생들의 용기가 있었기에 정치깡패들의 무법천지를 붕괴시킬 수 있었다. 올해는 419민주혁명의 50주년이기도 하다. 불의를 참지 못한 학생들의 촉발로 모아진 시민의 힘은 막장 부패정권을 붕괴시켰다. 직접 감정의 용기가 모아진 시민 자생의 힘이었다.

불행하게도 419 민주혁명 직후 어수선한 틈을 타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들이 정권을 탈취해갔다. 그렇게 박정희 군사정권의 독재 시대가 시작되었다. 1979년 무지막지했던 독재정권이 자멸하고, 20년 가까운 기나긴 악몽의 터널이 무너지나 했더니 또다시 기회를 잽싸게 도둑질해간 새끼 악동들이 등장하여 국민들을 또 다시 공포에 빠뜨렸다.

그러나 공포에만 떨고 있지 않았다. 공포에 맞서 용기를 내는 일상의 사람들이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이 저항만이 앞으로 갈 길이었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30년 전 일상의 시민들이 혁명의 피를 흘렸던 광주, 바로 그 길거리에 오늘 우리들이 와 있다.

은폐된 병증들

용기를 낼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우리는 용기가 요구되는 시대에 처절하게 살고 있다. 30년 전의 무장 독재세력은 아니지만 더욱 정교화된 자본의 독재는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달콤한 계엄사령부를 운영하고 있다. 한반도 산하의 강줄기를 틀어막아 부수고, 지맘대로 종교를 통제하며, 기업에게는 행정권력의 전권(올마이티 티켓)을 선물하고, 방송사를 장악하고, 교육비리 척결 명분으로 오히려 교육환경 격차를 늘려놓고, 서민의 빈 주머니마저 쥐어짜면서 빚잔치로 희롱하고, 색깔논쟁의 메카시 선풍을 재조직하면서 최후에 남은 선량한 시민들의 마지막 상식을 뒤집어엎는 중이다.

전두환에서 박정희에 이르는 공포의 군부독재 증세를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50년 전 419 민주혁명 전야의 깡패자유당 전염병 증상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는 듯하다. 문제는 지금의 증상이 통증을 직접 수반하지 않고 마약에 취한 환각 증상과 유사하다는 데 있다. 이런 환각 증상은 신자유주의의 전형적인 병증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앓고 있는 병증의 진짜 심각성은 권력에 의해 병증들이 은폐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억의 스위치

은폐된 병증은 ‘직접 감정의 용기’를 직접 끌어당기지 않는다. 증상을 빨리 눈치채는 사람들의 마음은 마음의 스위치를 하나 더 거쳐서 겨우 도달하는 ‘간접 반성의 용기’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쉽지 않다. 전염성 강한 신자유주의 병증의 원인은 자본 바이러스이다. 직접 감정의 용기를 차단하는 자본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용기의 저항력을 회생해야 한다. 그리고 희미해진 용기의 저항력을 되살리려면 심했던 그 전염병을 힘들게 이겨낸 저항 면역력을 기억해내야 한다.

감기 면역이 얼마간 지속되듯 말이다. 감기에 한번 걸리고 난 후 같은 감기에 당분간은 안 걸린다. 전염병 중에서 홍역 같은 것은 한번 걸리고 나면 평생 다시 안 걸릴 정도로 그 기억은 아주 오래 가기도 한다. 우리의 몸, 우리 몸의 저항력이 내 몸을 크게 힘들게 했던 기존의 감기 바이러스나 홍역 바이러스 등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억이 가능한 것은 희소하나마 내 몸 림프구에 존재하는 기억세포들 덕분이다. 건강한 몸은 자신의 기억세포를 다시 활성화시키는 일을 잘한다.

그래서 저항력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저항의 기억은 내 몸 안에 저장되었던 직접 감정의 용기를 켜는 스위치 구실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서 사라져버린 것 같은 저항의 면역력, 우리 안에 아주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저항의 기억을 회생시켜야 한다.

기억은 용기의 스위치다. 기억의 스위치를 켜야 할 때이다. 한편 스위치를 켜기 위해 필요한 불빛도 있어야 할 터인데, ‘간접 반성의 용기’가 그 구실을 잘 할 수 있다. 나 같은 지식인 행사나 조금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직접 창출의 용기가 부족한 편이다. 이것 재고 저것 재면서 ‘현장과 순간’에서 발을 빼는 경우가 많다. 좋다. ‘현장과 순간’을 놓쳤다면 ‘역사와 기억’을 통해 주변의 불특정 다수에게 용기의 마음을 이입해야 한다. 간접 반성의 용기란 그런 감정이입에서 드러난다.

광주는 기억의 공간이다. 이렇게 30년 잠재된 기억을 다시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 이 글은 2010년 5월 27일 ‘518민주항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션에서 발표했던 것입니다.(편집자)

정직을 생각하며 [썩은 뿌리 자르기]

하나.

바야흐로 정직이 문젯거리인 시대다. 삼성의 비리를 고발한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사, 2010)의 마지막 대목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이들에게 “정직하게 살라”고 권해도 불안하지 않은 사회가 되면 좋겠다. “정직하게 살면 손해 본다”는 생각이 현명한 것으로 통하고 “손해 보더라도 정직해야 한다”는 생각은 순진한 어리석음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운 아이들이 커가는 일을 차마 지켜볼 자신이 없다. (447쪽)

삼성그룹의 전 회장인 이건희가 이 글을 미리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어떻든 이건희는 이 책이 출판되기 얼마 전인 금년 2월 초에 한 공개 석상(‘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었다고 한다)에서 다음과 같은 기가 막힌 발언을 했다.

“거짓말 없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

이 말을 전해 듣고는 나도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정말 어이없어 했다. 쓴웃음이 아니라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조지 부시가 전쟁 없는 세상을 바란다고 말하는 것보다, 이명박이 부동산 투기가 없는 사회를 바란다는 것보다 더 황당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냥 웃어버리기에는 이 실소(失笑)의 끝이 어째 좀 찜찜했다. 도대체 이건희는 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이 후안무치(厚顔無恥)의 말이 겨냥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리라고 본 것일까?

얼마 후 나는 위에 인용한 김용철 변호사의 글을 읽다가 다시 이건희의 말을 떠올렸다. 그 순간 머릿속이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혹 이건희는 진짜 자신이 정직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마치 조지 부시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전쟁을 일으키면서 스스로를 정의의 편이라고 굳게 믿었듯이, 또 이명박이 온 나라의 강바닥을 파헤치면서 자신을 불철주야(不撤晝夜) 국가를 위해 일하는 진정한 일꾼이라고 굳게 믿고 있듯이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건희가 염두에 두는 정직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는 삼성에 몸담고 있다가 자신을 고발한 김용철 변호사가 오히려 부정직하다고 생각하고 그를 비난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또 김용철 변호사에 동조하여 자신을 비판하는 국민들도 대부분 자기 배반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부정직함을 범하고 있다고 얘기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이건희의 발언을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은 거기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이 발언으로 고립되거나 곤란에 처하지 않았다. 한편에선 오히려 그 발언이 이건희의 화려한 복권 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미 그는 유례가 없는 1인 사면의 방식으로 법률상 훌륭하게 복권하지 않았는가. 이건희는 이제 범죄자가 아니라 당당한 승리자다. 일부의 질시와 배신, 그리고 허울뿐인 법의 부질없는 핍박을 뚫고 다시 무대의 전면으로 돌아온 사회의 진정한 주인이다. 기다렸다는 듯 경쟁적으로 아부하는 매스컴의 행태가 이런 점을 입증해준다. 이건희와 그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다. 누구를 만나고 어떤 표정을 지었으며 어떤 옷을 입었는지가 기사가 된다.

누군가는 작금의 우리 사회를 이명박과 강호동이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했지만, 이는 겉보기의 묘사에 그친다. 낮에는 이명박이, 밤에는 강호동이 깃발을 들고 설친다면, 밤이건 낮이건 그 깃발이 나부끼는 방향을 조종하는 건 이건희와 같은 부류다. 그렇다면, 그의 복권은 명실상부(名實相符)함을 요청하는 현실의 세력관계가 작용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건 맑스의 생각대로 경제관계가 법을 지배하고 의식(意識)을 지배하는 사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이건희의 ‘정직’ 발언은 이런 사태의 한 표현(表現)일 수 있다. 그 발언은 이건희가 이 사회의 법망만이 아니라 윤리적 의식까지 장악하고 지배하려 함을 드러내준다. 모름지기 사회의 지배자라면, 무엇이 바르고(正) 곧은(直)지를, 즉 무엇이 정직(正直)인지를 내세울 수 있어야 하며, 그에 따라 무엇이 거짓말이고 무엇이 참말인지를 판가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문제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는 사태가 있다. 이건희와 삼성을 비판하는 칼럼이 그래도 비판적 신문에 속한다는 [경향신문]에 실리지 못한 것이다.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가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를 소재로 삼아 쓴 정기 칼럼 원고가 제 날짜에 게재되지 않았다. 김상봉 교수는 거부당한 원고와 그 경위를 설명하는 글을 대표적인 인터넷신문 가운데 하나인 [오마이뉴스]에 보냈으나 석연찮은 이유로 그곳에도 싣지 못하고 결국 다른 인터넷 신문인 [프레시안]과 [레디앙] 등을 통해 겨우 발표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아직도 유력 일간지들에는 [삼성을 비판한다]의 책 광고조차 실리지 못한다.

이 모든 사태의 중심에는 이건희와 삼성이 대중 매체들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대부분의 언론마저 장악한 이건희와 삼성의 경제적 힘이 도사리고 있다. 김상봉 교수의 칼럼 거부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자, 경향신문이 사과 기사와 함께 실은 다음과 같은 해명의 말(2010년 2월 24일자)은 이 점을 직접 드러내준다.

“2007년 말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자금을 폭로한 사건을 집중 보도한 것을 계기로 삼성으로부터 2년 이상 광고를 받지 못했고,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정부 및 공공기관의 광고 수주액이 크게 떨어지면서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어 왔다.”

삼성그룹의 광고가 전체 신문광고에 차지하는 비중은 액수 기준으로 전체의 10%를 훨씬 웃돌며, 규모가 작은 신문이나 방송일수록 그 비중은 더 커진다고 한다. 이런 지경이면 광고 수익에 경영을 의존하는 언론사로서는 삼성의 눈치를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건희가 감히 정직까지 들먹일 수 있게 된 바탕에는 이 같은 사정이 자리 잡고 있다.

둘.

이건희도 아마 정직에 대한 자기 기준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는 기준에 충실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 잣대로 보면 유죄판결을 받으면서까지 자신에게 충성을 보이는 이학수나 김인주 같은 가신(家臣)은 곧고 바른 반면, 삼성의 녹(祿)을 먹다가 비리를 공개하고 나선 김용철은 비뚤어지고 굽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세상에는 이런 식의 잣대가 먹혀들기도 한다. 혹자는 아직도 김용철의 숨은 동기를 의심하며 손가락질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것은 사실 깡패 같은 집단에나 통용되는 논리다. 자기 보존과 자기 이익에 급급한 집단은 그 충실성의 기준을 내부에, 그것도 폭력적인 중심에 둔다. 이들에게 법이나 도덕규범 같은 외부의 잣대는 타넘거나 이용하여야 할 대상일 뿐이다. 내부의 기준이 외부의 사회적 기준과 어긋나면 어긋날수록 이런 집단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폭력적이 된다. 그래서 내부자의 고발이나 양심선언은 대개 큰 위험 부담을 지니기 마련이다. 그러나 깡패 집단은 그 존속을 자기 집단 밖에서 정당화하기 어렵다. 그래서 내부의 고발은 외부로부터 강력한 원군을 얻을 수 있다. 이럴 때 정직이나 정의의 기준은 집단 안이 아니라 그 밖에 있게 된다.

삼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김용철의 폭로와 고발을 삼성이라는 집단의 기준 내에서, 나아가 이건희 일가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이건희가 말하는 정직은 사회에 대한 정직이나 충실성과 다를 뿐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상반된다. 이건희의 정직 운운이 실소를 자아내는 것은 사회의 기준에서 볼 때 그의 말이 정녕 가당치 않기 때문이다. 법원 판결로 명시된 것만 227억의 배임죄를 저지르고 수천억 원의 세금을 포탈했으며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하여 사회의 구석구석을 오염시킨 인물이, 또 노조설립 시도를 온갖 수단을 동원해 탄압하고 산업재해를 은폐하는 기업집단의 지배자가 정직을 운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것은 깡패가 의리(義理)를 말하고 폭력배가 ‘바르게 살자’를 외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물론 다른 점이 있다. 가장 큰 것은 삼성의 경제력이다.

삼성그룹의 매출은 2009년에 대략 200조원, 우리나라 GDP의 약 20%다. 올해 정부 예산(약 293조원)의 3분의 2가 넘는 액수다. 국내 고용 인원만 30만 명에 가깝다. 주력기업인 삼성전자는 2009년에 매출액 기준(1183억 달러)으로 세계 최대의 전자업체가 되었으며, 영업이익만 10조를 넘게 남겼다. 이것이 삼성의 힘이며, 여전히 삼성에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이건희와 그 일족의 힘이다. 이런 힘 덕택에 그들은 자기 집단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자신의 존립을 정당화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다.

삼성이 망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게다가 우리 사회는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구분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삼성 그룹 주식의 반 이상이 외국인 소유고 이건희 일가의 지분은 1% 남짓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렇다. 삼성 그룹을 키워온 것은 이병철이고 이건희이니 그 소유권과 지배권은 그들 일가가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직접 생산을 담당하고 일터를 일궈온 당사자가 이건희 일족과 몇몇 가신들이 아니라 무수한 근로자였음에도 그렇다.

더구나 김용철 변호사가 그 일각(一角)을 폭로했다시피, 삼성은 이 사회에서 힘깨나 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돈을 뿌렸다. 그렇게 하여 인맥을 관리하고 언로(言路)를 제어하며 정보를 장악한다. 자신들의 촉수를 사회 곳곳에 박아 넣는다.
이런 방식으로 한 집단과 사회가 결합되면 그 집단 내부의 기준이 사회의 기준으로 파급될 여지가 생긴다. 설사 그 기준이 전근대적이거나 편파적이라 하더라도 먹혀들어갈 수 있다. 사회 곳곳을 뇌물과 촌지로 오염시켜 놓으면, 그러한 흐름이 암묵적으로 용인되고 정직이나 정의의 기준은 그 바탕 위에서 작동하게 된다. 전 사회의 깡패화, 전 사회의 삼성화가 이룩되는 것이다.

하긴, 왜 삼성과 이건희뿐이겠는가. 이건희는 대표주자고 그래서 대표적으로 뻔뻔한 것이라 해야 옳을지 모른다. 한화의 이승연은 가죽장갑을 낀 채 권총을 들고 설치는 깡패의 면모를 몸소 선보였지만, 오염된 법망을 통과해 여전히 회장님으로 잘 지내고 있다. 물론 태광의 박연차 같은 경우도 있으니 모두가 형편이 같은 것은 아니다. 깡패들의 세계에서처럼 여기도 약육강식이 판친다.

셋.

사정이 이러니 대책이 쉽지 않다. 원론적인 말을 하자면, 삼성을 비롯한 거대 경제 집단이 자기중심적이고 자의적(恣意的)인 기준에 따라 다른 영역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마이클 왈쪄(Michael Walzer) 같은 자칭 자유주의자의 말에 따르더라도, 한 영역의 힘이 다른 영역들마저 장악하게 되면 사회는 부정의해지기 십상이다. 정치 영역이 경제 논리에 휩쓸려서도, 법의 영역이 돈의 위력에 짓눌려서도 안 된다. 하물며 일족의 자기중심주의나 깡패 논리가 판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공정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기업이나 경제 영역에서도 나름의 기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이미 말했던 것처럼, 삼성의 광고를 마다할 수 있는 언론사는 거의 없다. 몇몇 사람들이 삼성 불매운동을 외치지만, 그 효과는 미지수다. 당장 이 글을 쓰는 데 사용하고 있는 공용(公用) 컴퓨터와 모니터가 삼성 것이고 내 책상 위에 놓은 전화기에도 삼성 로고가 선명하다. 그러니 어떻게?

어려워도 안 할 수 없다. 김상봉 교수의 말처럼 이것은 시대적 과제다. 경향신문이 김상봉 교수의 글을 거부한 사태가 아무런 파문 없이 끝나지 않았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은 광고 지면을 얻지 못해도 이미 수십만 부가 팔려나갔다. 삼성이 진정한 반성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한, 삼성의 제품을 사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렇고, 이 글을 읽는 독자도 그 중 한 사람일 것이다. 이건희가 경영에 복귀하고 그 일족이 지배권을 고스란히 이어받는 사태를 그냥 용인해서는 안 된다.

철학을 하는 사람에게 이런 과제는 더 무겁다. 삼성은 안 되고 LG는 된다는 식의 문제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자본의 지배, 돈의 지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더욱 본질적인 문제가 깔려 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김상봉 교수가 ?내가 경향을 비난하지 않는 까닭?([경향신문], 2010년 3월 9일)이라는 칼럼에 썼던 것처럼, 밥벌이나 경제적 고려가 우리 삶을 이끄는 본질적인 사안이 아니라고 얘기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와 맞서 싸우지 않는 한 이건희의 정직과는 다른 정직을 쉽게 입에 올릴 수 없다는 건 안다. 정직은 이건희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성원(부산대) / admin@admin.com

삼성의 발견 [썩은 뿌리 자르기]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자본은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경제적 권력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부르주아(토지에 묶여있던 농노와는 달리 성 안에 살며 상공업에 종사했던 자유인들)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삼성공화국’은 자본주의 사회의 예외적 현상이거나 비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궁극적 실현태입니다. 자본이 초국적화되어 세계를 주도하는 권력이 되는 현상인 ‘세계화’도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적 필연입니다.

1. 1인 1표의 민주주의와 1주 1표의 기업의 근본적인 충돌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의 투표로 그 정치적 리더를 뽑습니다. 반면에 기업은 노동자의 투표가 아니라 주주의 투표로 그 기업의 리더를 뽑습니다. 국민 투표는 1인 1표를 원칙으로 합니다. 모든 사람이 재산이나 성별, 학력 등에 상관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1표를 행사하도록 돼있습니다.

그러나 주주 투표는 1주 1표를 원칙으로 합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평등의 단위는 사람이 아니라 돈입니다. 돈이 많아 주식을 많이 사서 최대주주가 되면 누구라도 그 기업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기업의 주인이 주주입니다. 그 주주들이 모여 주식회사의 총회를 엽니다. 여기서 주주를 대신해서 경영을 담당할 이사들과 대표이사를 뽑습니다. 또한 이들 경영진을 감시할 감사를 뽑습니다. 따라서 최대주주의 의사대로 회사는 움직이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기업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적이지 않습니다.

장하준 교수의 말대로 국민주권이 중심이 된 민주주의와 주주주권(본질적으로 자본주권 또는 돈의 민주주의)이 중심이 된 시장은 근본적으로 충돌하게 돼있습니다. 사람의 민주주의와 돈의 민주주의는 이처럼 대립합니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그렇게 민주주의를 비판한 이유도 민주주의가 돈의 민주주의(금권정치)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까닭입니다.

2. 삼성그룹의 제왕적 지배체제

삼성이라는 기업과 그 총수인 이건희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이러한 기업의 비민주주의적 지배구조의 원칙을 알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2010년 3월 24일자 프레시안의 이건희 회장의 “제왕적 지배 체제”가 완벽히 복원되었나를 다룬 뉴스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1주 1표의 기업의 지배구조 원칙과 제왕적 지배 체제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같은 날 경제개혁연대의 ?이건희 회장 복귀에 대한 논평?이라는 보도자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이건희 회장의 전격적인 복귀와 전략기획실 사실상 부활은 삼성그룹이 자신의 지배구조 상 문제를 스스로 치유할 능력과 의지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삼성의 잘못된 지배구조에 따른 비용이 이건희 회장 일가에게만 귀속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 삼성의 지배구조 문제는 국민경제 전체의 시스템 리스크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 전체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삼성의 잘못된 지배구조는 이건희 회장의 제왕적 지배체제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김진방 교수에 의하면 삼성그룹의 지배구조는 세 가지 점에서 다른 재벌그룹과 다릅니다. 첫째, 총수일가(동일인 + 8촌 이내 혈족 + 4촌 이내 인척)의 지분이 유난히 적습니다. 둘째, 금융회사를 통해 비금융회사를 소유하고 지배합니다. 셋째, 소속회사들이 교차출자와 순환출자로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둘째와 셋째는 첫 번째이자 가장 근원적인 문제점인 총수일가의 적은 지분으로 삼성그룹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도입된 방법들인 것입니다.

김상조 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와 승계구도는 공정거래법 제11조(계열금융기관의 의결권 제한), 금융산업구조개선법 제24조(동일계열 금융기관의 다른 회사 주식 소유 제한), 금융지주회사법, 보험업법 상의 자산운용규제 등 금융관련법에 의한 규제는 피해갈 수 없다는 점이 문제인 것입니다.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은 돈의 민주주의 원칙마저 저버린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건희 회장이 불법 로비와 비자금 조성 등 실정법을 위반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제왕적 지배체제라는 말이 의미가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시장과 민주주의의 상호발전이라고 불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마저도 위협하는 세력이 된 것입니다.

3.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또 다른 국가, 삼성공화국

경제개혁연대가 삼성공화국을 비판하는 핵심은 “삼성이 경제환경 변화에 탄력적으로 적응하는 기업조직의 차원을 넘어, 경제환경을 왜곡하고 오염시키는, 그럼으로써 그 자신의 조직적 탄력성은 물론 국민경제의 동태적 활력마저 질식시키는 경제권력으로 변모하였음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단순히 삼성그룹의 제왕이 아닙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면령이 아니었다면 이번의 이 회장 복귀는 불가능합니다.

이와 같이 국가권력이 불법을 저지른 삼성그룹의 총수를 비호하게 만든 막강한 정치력과 경제력으로 인해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라는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에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된 이유기도 합니다. 따라서 삼성공화국이 국내를 지배하는 절대 권력이 되었다면 이런 삼성공화국의 제왕인 이건희 회장이 국민이 선거로 뽑은 대통령보다 은밀하지만 더 강한 권력을 지니게 됩니다. 이런 권력이 불법과 비리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 삼성그룹과 이건희 회장의 아킬레스건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이건희 회장의 복귀 발표일 날 조선일보마저도 ?이건희 회장의 복귀와 삼성의 책무?라는 사설에서 “삼성은 글로벌 기업이면서 한국 기업이다. 글로벌 규칙도 지켜야 할뿐더러, 투명 경영과 사회적 공헌을 통해 계층·지역의 구별 없이 한국 국민 전체의 사랑을 받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 삼성은 도요타자동차처럼 ‘1등의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미래를 대비해 나가야 한다. 이 회장은 삼성이 다음 세대, 그리고 그 다음 세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경제적 유산과 함께 도덕적 토대도 함께 물려주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조선일보는 이회장의 복귀의 대가로 삼성그룹의 윤리성 회복을 주장한 것입니다. 반면에 경제개혁연대는 이회장 복귀를 반대하며 삼성그룹의 윤리성 회복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윤리성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돈의 민주주의가 정한 규칙을 따르는 것이 그 윤리성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 준수로부터 곧바로 사람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하준 교수의 통찰처럼 “진보를 자처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선언했다. 그런 정치는 사표를 내야 한다. 권력을 준 것은 시장을 통제하라는 것인데,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하는 것은 직무유기이다. 우리나라 담론 구조가 시장을 풀어주는 것이 민주화라고 돼 버렸다.” 이러한 지적은 조선일보나 경제개혁연대의 논리상의 문제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의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에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입증합니다. 따라서 국가가 시장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민주주의는 그 진정한 실현의 기초를 다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나 경제개혁연대의 주장의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민주주의와 시장은 근본적으로 대립적 모순에 해당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을 망각한 사회적 자유주의 또는 좌파 신자유주의(영국의 블레어주의와 한국의 노무현주의)가 정치적으로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기업과 시장의 권력을 견제할 건강한 정치공동체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4. 국내에는 삼성공화국, 세계에는 세계시장공화국

민주주의와 기업의 기본 주권구조가 원칙적으로 다르고 서로 대립한다는 점은 이미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한 국가에서 국내시장의 형성이 곧바로 국내공동체의 형성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꾸로 시장권력의 비대화가 국내 정치공동체의 위협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삼성공화국의 사례를 통해 잘 알게 됐습니다.

삼성공화국의 사례는 실제로 대우주의 소우주 모델에 해당합니다. 대우주는 세계화의 사례입니다. 세계화는 자본의 세계시장의 출현입니다. 세계시장이 출현했다고 해서 세계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꾸로 이 세계시장이 개별국가의 힘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각국의 정치공동체의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삼성공화국은 글로벌스탠더드를 위반한 사례가 아니라 세계시장공화국이라는 글로벌스탠더드의 진정한 회원입니다.

세계시장공화국이란 일단 자본과 금융이 주도하는 제왕적 지배체제입니다. 데이비드 헬드에 의하면 모든 나라의 경제정책의 기준이 전지구적 금융시장에 대한 적응입니다. 세계화의 신자유주의적 특징은 시장이 더 잘 작동하도록 시장에 대한 탈규제를 강조하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이로써 각 국가 안에서 그리고 국가 사이에서 불평등이 증가하고, 이는 정치적 자유가 크게 위축됨을 의미하고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결정적으로 정치공동체의 위축은 시장 견제 세력의 사라짐으로 나타나 시장의 독주를 통한 극도의 경제위기를 산출할 가능성 증대로 이어지는데, 이는 초국적 금융투기꾼으로 유명한 조지 소로스 같은 사람마저도 세계금융시장의 규제를 요구하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경고를 무시한 미국의 부시행정부를 비롯한 주요국가의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정부들에 의해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가 출현하게 됐습니다. 세계금융위기는 세계시장공화국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며, 이 강력한 힘 앞에서 세계정치공동체의 구성 없이는 각국의 정치공동체도 크게 훼손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냈습니다.

삼성공화국 문제는 단순히 삼성만의 문제이거나 국내적 문제가 아닙니다. 시장주도의 세계화가 가져다주는 문제의 축소판입니다. 우리는 삼성공화국을 통해 시장이 주도하는 세계가 어떤 미래를 가질 수 있는지를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장하준 교수는 세계금융자본은 국내 재벌을 더 압박하는 것을 좋아하고, 가장 돈이 많은 국제 금융자본의 뜻대로 우리나라 경제가 개조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제금융자본의 경영권 위협 앞에서 삼성의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국내 재벌들이 시장논리를 수정해 경영권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한다면 삼성공화국도 세계시장공화국에서는 약자에 불과합니다. 그 약자가 살기 위해 불법과 비리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국내 재벌은 세계금융자본에 맞서 싸우며 우리 경제를 선진화하기 위한 투사라는 이미지가 그려지게 됩니다. 19세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라는 대립적 구도가 21세기 세계화 시대에도 다른 형태로 잔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라는 구도에서 본다면 현재 우리 정치공동체를 위협하는 실질적인 진정한 적은 삼성공화국보다 세계금융자본입니다. 다만 삼성공화국이 이 세계금융자본의 국내 침략의 첨병노릇을 하는 선교사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이건희 회장의 이번 복귀는 그 진통에도 불구하고 삼성공화국이 국내적으로 여전히 강건함을 보여준 사례인 동시에 삼성공화국도 세계시장공화국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합니다.

국내에서든 세계에서든 돈의 민주주의에 기초한 시장공화국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건강한 정치공동체의 최대의 적에 해당합니다. 각국의 정치공동체의 발전을 통한 세계정치공동체의 형성이야말로 세계시장공화국을 견제하며 인간과 인간의 조화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룩할 수 있는 길입니다. 시장공화국의 길은 결코 우리가 걸어가야 갈 길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정치공동체의 발전이 삼성공화국을 견제하며 올바로 서게 하는 첩경입니다. 시장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결코 아닙니다.

김성우(상지대 겸임교수) / admin@admin.com

낙태, 주체의 공백과 이데올로기 [썩은 뿌리 자르기]

낙태 문제를 둘러싼 일련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지난 3월6일 대학로에서 ‘세계 여성의 날’ 행사가 있었다. 그 행사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여성의 임신, 출산 및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에 대한 선언이다. 이 선언은 현재 낙태 문제에 대한 정부 정책과 프로라이프 의사회(옛 ‘진오비’, 이 단체는 ‘임신유지가 모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의학적 사유가 명백한 경우’에 한해 낙태를 허용하고자한다.)의 주장이 여성 주체성을 공백으로 남겨둔 채, 여성의 배제 속에서 낙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이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잠시 낙태 문제에 대한 논의 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1973년 정부는 높은 출산율(71년 4.54명)에 대한 인구 증가 억제 정책을 위해 형법상 금지된 낙태 시술을 일부 허용하는 법, 즉 부모가 우생학적· 유전학적 질환이 있을 경우, 강간으로 임신을 했을 경우, 모체 건강이 위협받는 경우에 낙태를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을 제정했다.

그 후 과거와는 다르게 저출산 문제가 등장하자 낙태율을 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2009년 초 전재희 보건복지부장관의 입을 통해 나왔다. 유엔인구기금(UNFPA)이 내놓은 ‘2009 세계 인구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으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5년 동안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세계 평균인 2.54명의 절반도 안 되는 1.22명 이라고 한다. 같은 해 10월 진오비(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 모임)는 낙태 근절 운동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11월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가 개최한 ‘제1차 저출산 대응 전략회의’에서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낙태 (반대) 캠페인도 중요하지만 주무부처로서 낙태를 단속할 수 있다”며 단속 가능성을 드러냈다.

2010년 2월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불법으로 낙태 시술을 한 병의원 3곳을 검찰에 고발하였다. 그리고 3월 1일 보건복지가족부는 ‘불법 인공임신중절 예방 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 피임 교육 강화, 미혼모 지원 등을 제시하였지만, 정부의 의도를 잘 드러내는 것은 ‘불법 낙태 시술기관 신고센터’의 설립이다. 이것은 낙태 단속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와 더불어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3월 24일 ‘2010 태아 살리기 범국민 대회’를 개최하여 ‘낙태 근절을 위한 5대 우선 정책 과제’의 시행을 촉구하는 100만 명의 서명을 6개월 내에 받아 정부에 제출하겠다고 했다. 5대 과제의 내용 중 대부분의 것은 금전적 지원과 관련된 사항이며 생명의 출산은 곧 행복이라는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단체의 시각에서 보면, 낙태 문제에 대한 프로라이프와 정부의 접근방식은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 구조, 계급적 착취 구조, 그리고 10대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는 구조를 외면하는 것이다. 결국 낙태 문제에는 여성에 대한 3중의 착취구조가 중첩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성관계나 임신 처리과정에서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간과되면서 임신에 대해서는 모든 책임이 여성에게 전가된다. 보자보건법에 따르면 남성에게 낙태 시술의 동의를 요구하지만, 정작 불법 낙태에 대한 처벌 대상은 여성과 산부인과 의사만으로 한정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 시술 의료인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것은 낙태 문제가 가난한 여성에게 더욱 가혹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경제 위기 이후 저소득층 중심으로 가족 해체가 이루어지면서 연애, 동거하는 10대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낙태의 문제는 10대들의 삶을 억압하게 된다. 즉 10대들은 임신을 하면 퇴학을 강요받아 학습권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대한 정부는 미혼모, 미혼부에게 월 12만4000원의 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내놓고 있다.

여성 주체의 물질적 공백

결국 정부나 프로라이프는 낙태 문제를 한 축으로는 ‘단속’으로 다른 축으로는 ‘돈’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정부의 정책은 단속 강화와 더불어 미혼모에게 일시적인 수혜적 지원으로 낙태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낙태 문제를 둘러싼 여성의 삶의 기반인 물질적 토대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자본의 횡포 아래 비정규직 확산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단체가 ‘사회·경제적 사유로 인한 경우’까지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

2009년 11월 ‘제1차 저출산 대응전략회의’ 다음날인 26일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9개 여성단체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여성위원회,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는 성명서를 발표해 낙태 방지 정책 철회를 촉구하면서 “한국에서 이뤄지는 낙태 건수 90%이상이 사회·경제적 이유로 발생한다”고 지적하였다. 결국 낙태 문제는 생명을 낳아 키울 수 있는 물질적 토대, 즉 출산, 양육, 교육, 나아가 주택의 문제에 총체적으로 접근하는 방향에서 논의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제1차 저출산 대응전략회의’에서 정부는 저출산의 주된 요인인 자녀 양육부담 경감을 위해, ‘초등학교 입학연령을 1년 앞당기는 방안(노동력 조기투입을 통한 국가경쟁력 향상), 다자녀 가구의 셋째 자녀부터 고등학교 수업료와 대학 학자금 우선 지원, 취업시 우대 혜택 부여, 다자녀 가구 부모 정년연장(다자녀 가구 인센티브 부여)’을 제시했다.

정부의 정책에서 알 수 있듯이 양육부담을 줄이는 방안은 모두 ‘국가경쟁력 향상’으로 수렴되고 있다. 이 점에 주목해서 낙태 정책의 문제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양육의 문제는 교육과 분리할 수 없다. 그러나 국가가 제시한 저출산 대응 전략은 간단히 말해서 ‘노동력 조기투입’을 통한 안정적 노동력 확보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안정적 재생산체제를 만들어 내기 위한 목적성의 정치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정치 속에서 논의되고 있는 낙태 문제 해결책은 필연적으로 ‘국가경쟁력 향상’에 종속된 아이와 여성의 도구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개화기 초 여성의 교육은 산업사회의 재생산을 위한 구국의 현모양처 양산을 위한 것이었다. 산업화 과정에서는 외국 자본을 끌어와서 여성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산업화를 이루었다. 결국 우리 사회는 멸시적으로 호명되었던 ‘공순이’의 희생으로 만들어졌음을 부정할 수 없다. 현재의 국가주의 정책도 이러한 맥락에 속에 있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밀고나가는 현실에서 비정규직 문제의 중심에 있는 여성의 삶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 상황에서의 출산 장려 정책은 그 자체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낙태 단속과 신고센터를 통해서 출산율을 증가시키려는 것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조건과 환경에 선차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적 재생산을 위해 노동력을 어떻게 조속히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발상에서 나온 정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상에서는 여성의 주체성도 여성의 삶의 물질적 기반도 고려되지 않는다.

‘인간생명’ 이데올로기

두 번째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측면이다. 먼저 생명의 가치를 종교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많은 한계점을 노정한다. 생명의 가치를 논할 때 종교적 해결책에 의존한다면, 그 논의는 설득력을 잃는다. 왜냐하면 종교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생명의 가치 논의는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사례가 그 경우에 해당된다. ‘태아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을 그 중심에 두고 있는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3월 24일 ‘2010 태아 살리기 범국민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하늘이 준 생명이므로 부모일지라도 그 아이를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며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가 말하는 “생명”은 무엇을 의미할까? 태아의 생명을 의미할 것이다. 낙태 논쟁의 핵심은 ‘태아를 인간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은가’인데, 이 단체는 태아를 인간으로 보고 있다. 이 단체가 ‘태아는 인간이다’라는 태도를 갖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배경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기독교의 신학적 동기, 즉 “생명은 하느님이 창조해 준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의 소유”라는 것에 대한 인정이다. 그리고 앞 명제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생명을 준 것이 하느님이기 때문에 인간이 낙태를 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리를 박탈하는 죄를 범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주장하듯이 남의 노예를 죽이는 것이 그 노예를 소유한 주인에게 죄가 되듯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하느님에게 죄가 된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이러한 신학적 동기가 그 자체로 형성되었다기보다는 노동 긍정을 통해 자본주의적 노동력 확보라는 근대적 패러다임 속에서 나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이들이 말하는 생명에는 인간생명 이외의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 원래 프로라이프 (Pro Life)의 넓은 의미는 ‘친(Pro)’ ‘생명(Life)’이다 . 따라서 이 단체가 명칭대로 활동 한다면, 생명체를 죽이는 4대강 사업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런 주장은 들어 본적이 없다. 나아가 만약 이 단체가 주장하는 것이 ‘생명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라면, 고기를 먹기 위해 태아보다 더 발달된 형태의 생명을 끊어버리는 사회를 동시에 비판해야만 할 것이다.

낙태 문제에 한정해서 보자면, 이 단체가 말하는 생명은 사람의 생명이다. 현재 인간의 생명이 신성하다는 주장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긴 하다. 하지만 서구 문명의 기원을 보면 이러한 태도는 보편적이지 않다.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의 구성원이라는 것이 생명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 입장을 취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의 생명을 신성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의 생명을 방어하기 위한 상황에서 타인의 생명을 죽일 수 없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낙태를 좁은 기준에서 금지하자는 주장은 인간의 생명이 다른 생물의 생명과는 다른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다른 생명과 구별되는 인간 생명의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는 ‘인간’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먼저 염색체를 통한 종족의 구성원이라는 측면에서 태아는 인간이다. 이렇게 되면 장애를 가진 태아, 무뇌증 태아도 인간이다. 따라서 이러한 태아를 죽이는 것은 인간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프로라이프는 ‘임신유지가 모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의학적 사유가 명백한 경우’에 한해 낙태를 허용하자고 한다.

여기서 국제적인 낙태 기준 7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임부의 생명이 위독한가.
2.임부가 육체적으로 위험한가.
3.임부의 정신적 건강이 위험한가.
4.성폭행을 당해 임신했거나 근친상간의 경우인가.
5.기형 등 태아에 이상이 있는가.
6.사회,경제적인 이유로 임부가 아이를 기르기 힘든가.
7.임부가 낙태를 원하는가([시사IN], 131호. 참조)

또한 세계 69개국은 임부가 어리거나 가난하거나 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결국 프로라이프는 국제적인 낙태 기준 7가지 중에서 “1.임부의 생명이 위독한가”라는 기준만을 낙태 조건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첫 번째 기준만을 적용하는 국가는 4개국뿐이다.

나아가 이 단체는 “보건복지부장관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원하는 자에게 피임시술을 행하거나 피임약제를 보급할 수 있다”, “의사는 불가피한 경우에 한하여 본인과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는 ‘모자보건법’ 14조 2항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이는 낙태의 여지를 더욱 좁혀놓고 있다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종족 구성원으로서만 규정되지는 않는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는 프로라이프의 주장을 비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플레처(Joseph Fletcher)의 ‘인간성의 지표’(자의식적, 미래감, 타인과 관계를 맺는 능력 등)라는 규정 속에서 볼 때, ‘태아는 인간인가’라는 질문에 “아니다”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태아는 인간인가’라는 질문에 상반되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호모 사피엔스라는 생물학적 종족 구성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person)라는 의미규정(자의식적이거나 합리적인 존재: [옥스포드 사전])도 감안해야만 한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낙태가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반면에, 후자의 입장에서는 낙태가 일정정도 인정된다. 이처럼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낙태 문제에 대한 다른 접근과 행위가 가능하다.

여성이라는 야누스적 얼굴, 그 존재론의 전환

흔히 여성의 정체성은 생물학적 측면과 사회 제도적 측면에서 규정할 수 있다. 여성의 정체성을 생물학적으로 환원해 버린다면, 여성의 정체성은 본질론으로 빠질 수 밖에 없다. 이는 여성의 정체성을 ‘고정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정체성은 존재를 구속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여성은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때 여성의 정체성은 ‘모성’으로만 규정된다. 모성만으로 여성의 정체성을 규정하면, A라는 여성은 “여성은 ‘어머니’이다”라는 명제를 부정할 수 없다. 이 명제는 바로 A를 낙태를 하면 안 되는 어머니로 ‘고정’시킨다.

위의 명제는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즉 “여성은 여성이면서 동시에 ‘어머니’가 아닐 수 있다.” 이때 여성은 앞의 명제에서 말하는 여성이 아닌, 다른 정체성을 갖는 여성이다. 곧 열려 있는 여성의 정체성이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다는 생물학적 특성으로 여성의 정체성을 고정화시키는 순간에 여성의 다른 잠재성은 축소되거나 폐기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여성의 정체성이 ‘희생적인 어머니’상을 만들어 낸다. 더불어 이러한 ‘어머니의 상’은 본받아야 할 것이 되고, 결국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삶은 자신의 존재를 일차원적으로 고정시킨다. 즉 본성적 모성이라는 사회적 세뇌의 구조화를 통해 여성의 정체성이 굳건히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출산이 사회 유지의 전제 조건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출산의 문제 때문에 그동안 여성은 어머니라는 고정화된 정체성에 갇히게 되었고, 결국 이러한 정체성은 여성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되어 왔다. 따라서 모성은 사회적인 것이다. 이 문제는 남성의 문제임과 동시에 사회적 문제이다.

여성의 정체성은 여성을 분절화하고 파편화하고 폐쇄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사회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형성되어야 한다. 곧 여성을 ‘모성’으로만 규정함으로써 안정적 노동력 재생산을 꾀하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말이다. 여성을 고려하는 체하면서 배제하는 힘에 의한 규정됨에서 여성 자신이 스스로를 규정함으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논어]의 구절 ‘화이부동’(和而不同)에서 화(和)는 평화, 공존을 의미하고, 부동(不同)은 흡수, 지배, 합병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낙태 논쟁을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는 세력은 ‘화’를 거부한 채 ‘동’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박종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 / admin@admin.com

4대강 토건사업의 실체[썩은 뿌리 자르기]

권력 횡포와 역사적 오류

군대 갔다 온 사람들이라면 한결같이 넌더리를 내는 말이 있다. ‘까라면 깐다는 것이다.’ 까라면 깐다는 것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상징적으로 수사한다. 군사독재 문화와 개발지상주의를 함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개발독재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나는 이를 “까깐 정권유형”이라고 부른다.

까깐 정권유형에는 몇몇 법칙 아닌 법칙이 담겨 있다. 첫째, 일인 중앙권력구조가 나름대로 정형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합리적인 토론이나 합의가 아니라 일방향적 명령체계만이 있다. 과거 군사독재권력이 만들어 놓은 비운의 부산물이다. 둘째 권력독점 명령체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국민들이 마치 자발적인 것처럼 반응하도록 유인한다.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사이비 이념교육을 끊임없이 수행해 왔다는 점이 유인책의 핵심이었다. 그 방법론으로는 우리도 미래에는 잘 살 수 있으니까 현재는 힘들어도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식의 허구적인 유토피아 이념 교육이 지속되어 왔다.

출처:네이버 카페 <강을 모시는 사람들>
이러한 까깐 정권유형의 대표적인 병증이 바로 현 MB 정권의 4대강 개발사업이다. 4대강 개발사업은 아이디어를 내놓은 출발부터가 억지춘향이었다. 대운하 사업을 공표했다가 국민의 대대적인 반대로 인해 좌초하자, 갑자기 정책을 급선회하여 4대강 사업이라는 희한한 정책을 급조하여 만들어 놓았다. 현 정권이 운하사업을 강행하려고 할 때만 해도 4대강 사업이라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사업을 변경하였다. 갑작스런 변경에 따르는 계획을 만들려고 하다보니 현 정권의 개발권력자들이 말하는 4대강 사업계획의 대부분이 급조되고 변조되어 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급조와 변조의 논리는 단순한 언어적 파괴논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의 생태적 역사를 파괴하는 반역사적 행위가 되어간다. 언어횡포는 다음부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쳐질 수도 있지만, 한번 건드린 생태적 파괴를 복구하려면 최소한 몇 백년이 지나야 겨우 될까 말까한 수준이다.

급조의 논리

그들의 급조는 국가재정법, 하천법이나 환경영향평가법, 문화재보호법 등의 실정법들을 무시하고 그들 마음대로 토건 왕국의 권력을 휘두르는 한 단편이다.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환경영향평가조차도 제대로 한 것이 없을 정도이다. 형식적으로 환경영향평가를 한다고 했지만 지나치게 서두르다보니 계절의 변화를 무시한 채 한두 달의 짧은 평가기간으로 겨우 형식만 채웠을 뿐이다. 어느 누구도 그런 보고서를 믿을 수 없다.

이와 같이 급조된 계획은 그 내부에 공통점이 있다.

첫째 자연의 시간적인 흐름을 무시하고 자연생태계를 마치 공장 재건축하듯이 다룬다는 점이다.

둘째 현장에 대한 철저한 실사조사도 없고 주변검토도 없이 사무실에서 기존의 계획서를 참조하여 적당한 수정작업을 거쳐 계획을 수립하여 너무 안이하게 발표한다는 점이다. 계획을 일단 수립하기만 하면, 수립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이후부터 시행 프로그램은 강권적 행정권력에 맡기면 되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셋째 급조된 계획의 대부분은 지출예산을 넉넉하게 잡는다는 점이다. 급조하여 만든 일들은 미래 상황에 대한 예측범위와 예측능력에서 매우 협소하며, 그리고 조사되지 않은 조건들로 인한 부가적 상황이 많아진다. 이러한 미예측적 부가 상황에 대비하기 위하여 그들은 무작정 예산을 늘려 놓고 본다. 그래서 사업예산이 고무줄처럼 늘어난다는 점이 급조된 계획의 일치된 공통점이다. 그렇게 예산과 관련한 미래상황을 끼워 맞추다보니 예산책정 과정이 투명하지 않고 예산계획이 거의 책상머리에서 꾸며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국민들의 세금이 탕진될 뿐이다.

넷째 급조되었다는 의구심을 상쇄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권력형 홍보를 한다는 점이다. 그 홍보비만으로도 대형 국가사업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름대로 최상의 감각적 매체를 동원하여 미화하고 당위성을 반복한다. 또한 감정적 호소를 동원하여 합리적인 판단을 흐리게 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개발사업을 강행해야 한다고 토건권력은 귀를 막고 종달새처럼 반복한다. 오히려 물러서는 것은 개발논리의 에이비씨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그들이 과연 누구에게 항변하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현실의 진실들, 이미 수없이 제기된 합리적인 판단들 그리고 국민의 진정한 행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는 진실의 논리가 아닌 까라면 까야 한다는 권력의 논리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변조의 논리

요즘 대학입시를 위해 논술고사를 시행하는 대학이 많아졌다. 그만큼 대학 측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논술문제를 내느라 고심한다. 논술의 논리학 가운데 중요한 것이 ‘사실 변조’와 상대입장의 ‘과대포장의 오류’이다. 이것은 상대의 논변을 공격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달성하기 위하여 상대방의 입장을 극단적으로 몰고가서 그런 잘못된 논변으로 상대의 입장을 무력화시키는 언어적 횡포를 의미한다. 논술시험에서는 그런 오류를 논리적으로 지적하면 그만이지만 현실생활에서 그런 오류가 발생한다면 재생불가능할 정도로 파국을 맞게 되기도 한다. 불행히도 권력이 주도하는 이런 언어적 횡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4대강 개발사업에서 벌어지고 있다.

4대강 사업을 추진하는 그들의 그럴듯한 목표는 하천정비와 홍수방재 및 그에 따르는 용수확보와 지역경제 회생이라는 언어유희로 요약된다. 그런 목표를 설정하려면 먼저 그 이전에 현재의 하천이 이미 홍수 방재기능을 상실했고 하천 주변 환경이 나쁘다는 전제가 깔려야 한다. 그들의 억지 가설은 4대강의 하급 수질과 용수 부족을 선전하기 위한 거짓 논리로 이어진다. 일부러 오도시킨 전제와 논리가 있어야만 비로소 4대강 죽이기 사업을 추진하는 그들의 전략이 그나마 홍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그들의 목표를 설정하기 위하여 4대강과 관련한 현재의 사실을 왜곡하고 변조하기 시작했다.

우선 물이 부족하다는 행정권력의 교묘한 선전이다. 물 부족 국가라는 선전을 하기 위하여 날조된 수치를 도입한다. 통계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국민 1인당 사용량을 추정해야 하는데, 여기서 그들이 원하는 목표가 설정되도록 수치를 날조하게 된다. 정부 4대강 사업본부 보고서에 의하면 1인당 1일 생활용수 수요량을 453리터로 추정하고 있는데, 그 추정치의 근거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한국인 1인이 453리터씩이나 필요한 만큼 우리는 물이 부족하여 댐(수중보)을 많이 앃아 부족한 물을 충당하자는 논리이다.

그들이 추정한 453 리터는 현재 일본인 수요량 평균인 350리터보다 100리터나 과다하게 책정되어 있다. 일종의 조작에 해당한다. 물 수요량을 절약하자는 국가적 수요관리정책을 펴는 유럽국가의 일인당 평균 수용량 150리터(국가마다 달라서 50에서 300리터 정도가 되지만 우리의 추정치와는 너무 차이가 난다)에 비교한다면 4대강 죽이기 사업 추진세력이 왜곡한 수치는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다. 좋다. 부족하다고 치자. 그런데 부족한 지역은 4대강 주변이 아니라 지천과 계곡이다. 홍수가 나도 큰 강가가 아니라 산세 지형의 계곡과 지천에서 난다는 뻔한 사실을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다.
4대강 개발사업비가 무려 22조원으로 책정되었다. 그런 천문학적 비용은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부터 나온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돈인 양 엄청난 돈을 대형 개발업자에게 선심쓰는 계획을 서두르고 있다. 그러면서 지역경제 운운하고 있다. 당장 여주 하천 둔치의 거대한 공사장을 가보시라. 대형건설사 소속 굴착기와 대형트럭만이 밤을 새워 가며 공사를 하고 있다. 실제로 지역 주민에게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저들의 주장과는 딴판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변조된 정보는 의외로 많다. 4대강 사업계획서와 무관한 환경부의 기존문서 [생태하천 만들기 10년 계획, 2006∼15]에는 매년 계획된 수중보 철거 및 폐기를 통해서 생태보전 및 수질 향상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도 2009년 환경부에 제출한 [기능을 상실한 보 철거를 통한 하천생태통로 및 수질개선효과]라는 연구보고서에서 수중보 철거로 수질도 매우 좋아졌고 하천생태계도 회복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런데 급조한 4대강 사업의 핵심은 오랜 연구 시간을 통해 얻어진 기존의 보고서와 딴판으로 바닥을 훑고 거기에 보를 놓고 제방을 쌓는 일이다. 결국 4대강 사업을 강행하려고 하다 보니 행정은 조급하고 계획은 억지춘향이 되어, 급조와 변조의 계획을 맞추려고 각종의 근거자료를 아전인수 격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보니 앞뒤가 안 맞는 정보를 억지 선전하게 된 것이다. 변조 현상의 공통된 증상들이다.

오류는 더 큰 오류를 낳는다

급조와 변조는 오래 갈 수 없다. 사람들은 그런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급조와 변조를 무마하고 숨기려고 한다면 더 많은 오류가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급조와 변조가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지도록 기존의 일을 강행한다. 이는 권력을 쥔 자들의 일반적인 행위로서 이미 급조되고 변조된 행위를 자신들의 권력을 통해 합리화시키느라 더 많은 향후의 오판을 낳는다. 실제로 이런 일이 현재 4대강 유역에서 발생하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준설작업은 야간 조명등을 밝혀놓으면서까지 강행하고 있다.
급조와 변조의 문제가 있더라도 기왕의 일을 일정 수준까지 강행해 버린다면 결코 되돌릴 수 없을 것이라는 그들의 까라면 알아서 까는 충성어린 판단 때문이다. 공사 중 유적지가 발견될 경우, 문화재보호법 저촉 여부와 관계없이 일단 강행하고 본다는 심리가 개발업자에게 심어지고 있다. 개발업자에게 그런 생각을 심어주고 개발행위를 맘껏 하도록 비호해주는 행정권력이 자기증식하여 결국 급조와 변조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게 한다. 그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진행 중인 급조와 변조 자체를 겁내지 않는다. 인류 역사에서 볼 때 이런 현상은 권력 말기의 현상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사람들의 욕심을 이야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 그 많은 반대의 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미 건너서는 안 될 선까지 사업을 강행하고 있다. 준설토의 양이 심각할 정도여서 주변 둔치는 준설토의 큰 산으로 변했다. 최고 성능의 기계를 동원하여 하루 밤 사이에 주변 지형을 바꿔 놓을 지경이다. 준설 이후 곧 수중보를 바닥에 지으려 할 터인데 그때부터 우리의 강은 시멘트 제방에 썩은 호수로 될 것이다. 자전거 꽃길을 따라서 이쁜 자전거를 타고, 강 따라 물 따라 유람선을 타고 유유자적하는 홍보용 뽀샵한 사진 한 장이면 그깟 반대 목소리쯤이야 깨끗이 잠재울 수 있다고 그들은 자부한다.

우리의 땅과 강을 죽이고 우리의 삶을 파괴하는 대신 오로지 토건기업만을 살리려는 현 정권의 권력은 브레이크 없이 벼랑으로 달려가고 있다. 다른 권력형 사업은 중도에 접으면 원래 상태로 되돌릴 여지가 그나마 어느 정도 있다. 그러나 4대강 죽이기 사업은 한번 시작하고 나면, 몇 백년 이내로는 되돌리기가 어렵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미친 듯 앞으로만 가는 파괴행위는 인간의 욕망으로 시작하였으나 그 끝은 인간의 뜻대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되돌릴 수 없는 파괴의 땅에 살게 될 우리 후손을 생각한다면 생태가치만이 아니라 경제가치도 없는 4대강 사업을 끝까지 막아내야 한다.

최종덕(상지대, 철학) / admin@admin.com

거리의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적 성찰[시대와 철학]

거리의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적 성찰[시대와 철학]

홍영두( 경희대 외래교수)

 

‘거리의 정치’는 2008년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전면 개방을 저지하기 위해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권력에 맞서면서부터 시작되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전면 개방 반대를 위한 촛불 집회는 그 당시 정치학자들에 따르면 6월 민중항쟁에 비견할 만한 사건이라고 평가되었다. 87년 6월 항쟁은 거리의 정치를 보여주는 대명사였다. 하지만 87년 6월항쟁과 비교해 볼 때 2008년 촛불 집회는 새로운 양상의 거리 정치였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대규모 인원이 참가한 가운데 평화적 방식으로 집회와 시위가 진행되었던 특징이 있다.

그 당시 정치학자들은 거리의 정치가 ‘일탈’이 아니라 ‘정상’이라고 보았다. 이런 시각을 가진 정치학자들은 거리의 정치가 한국 정치 변화 과정에서 파국을 초래하기보다는 정치 발전의 커다란 원동력이 된다고 평가했다. 이와 반대되는 시각도 있다. 지난 5월 18일 이명박 대통령은 5.18 민주화운동 30주년 기념사를 통해 “권위주의 정치가 종식되고 자유가 넘치는 나라가 되었지만, 우리는 아직 민주사회의 자유에 걸맞은 성숙한 민주주의를 이루었다고 말하기 어렵다”며, “법을 무시한 거리의 정치와 무책임한 포퓰리즘에 기대는 일이 적지 않다”고 강조했다. 이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에 대한 이 대통령의 불편한 심경을 직접 드러낸 것이라고 프레시안 인터넷 뉴스기사가 보도한 바가 있다. 거리의 정치를 바라보는 상반된 시각 차이는 정치와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정반대의 견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2008년,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요구하는 촛불 시위가 방방곡곡에서 벌어졌다. 그로부터 4년 후인 2012년에도 미국에서 네 번째 광우병 소가 발견되면서 다시 촛불 시위가 벌어졌다. 사진은 2012년 5월,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미국산 쇠고기 수입 중단’ 촉구 시위. ⓒ프레시안(최형락)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협상에 시민이 거리의 정치를 통해 직접 나섰다. 촛불집회·시위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기반한 정당정치의 한계를 표출시키고 이를 넘어선 사건이었다. 촛불시위로 인해 이명박 정부는 재협상을 거치면서 “한국 소비자의 신뢰가 회복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아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금지하는 민간 수출업자의 자율규제를 도입하였다. 이는 국회 안에서 해결할 수 없었던 일을 거리의 정치를 통해 달성한 시민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촛불집회는 보수정당이 지배하는 ‘정치권’이 갈등의 중재·조정에 실패하면서 시작된 ‘거리의 정치’ 현상이며, 그 점에서 현 정치권에 대한 ‘불신임’이자 대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드러낸 사건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당 정치와 거리의 정치 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또 양자는 민주주의와 어떤 관련을 맺는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은 거리의 정치가 성숙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법을 무시하는 무책임한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했다. 거리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하등의 관련을 맺고 있지 않는 포퓰리즘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존재한 이래 합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민주주의’가 상이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대립된 의미를 갖는다는 관념을 합의했다는 정도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란 인민의 지배를 뜻했다. 반면에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정부 형태가 아니라 그저 제멋대로 하길 바라는 사람들의 전제(專制)일 뿐이라고 말했다. 근대에 들어와서 앞에서 말한 합의가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근대 자유민주주의, 대의제 민주주의 하에서 통치형태 또는 통치 기술을 가리키며, 권력을 정당화하는 형태를 가리키기도 하고 권력행사의 양상을 가리키기도 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정당 정치는 대의 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에 기반한 정당 정치란 제도권 안의 권력 정치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자유민주주의의 대의제에 기반한 정당 정치는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적 용어를 빌려 표현하면 정치를 공동체의 삶을 지도하는 기술, 민주주의적 다자의 법을 공동체적 삶의 원리로 전환하는 기술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당 정치의 본질은 하나임, 공통되게 있음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근대 자유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발원한 인민의 지배라는 어원적 의미와 거리가 멀다.

반면에 거리의 정치는 제도권 밖의 정치이다. 제도화된 공간, 관습적 사고에서는 나타나기 힘든 창조의 공간이 거리에서 형성되고 있다. 이 거리의 정치에서는 과거의 조직적 위계적 운동에서 자발적이고 다양한 운동으로, 거대담론의 정치에서 생활정치로 전환하는 추세를 보이며 인터넷의 정치적 역할이 부각되고 엄숙함보다는 발랄함이 지배하는 분위기 등이 주목받고 있다. ‘거리’의 의미가 과거 가두투쟁보다는 훨씬 확장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 거리의 정치야말로 인민의 자기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리의 정치란 랑시에르의 표현을 빌리면 공동체를 지도하는 기술이 아니라 이견(異見)을 제시하는 인간 행동 행태이며, 인간 집단의 결집과 명령을 작동시키는 규칙들에 대한 예외를 뜻하는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는 통치 형태도 사회적 삶의 방식도 아니며 정치적 주체들이 존재하기 위해서 거치는 주체화의 양식일 뿐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법을 무시한 거리의 정치’라는 발언은 치안의 논리에 따라 행해진 것이다. 치안의 논리는 정치가 아니다. 치안의 논리는 일반 국민을 통치의 수동적 대상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간주한다. 국가는 인민주권을 구현한다거나 인민의 의지를 실행한다고 자처하기를 그만둘 수밖에 없다. 이는 민중 없이 통치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며, 민중의 분열도 없다는 뜻이므로 정치 없이 통치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통치에서 이런 사례를 수없이 목격해 왔다.

87년 이후 선출된 민주 정부는 자유민주주의의 정상화를 목표로 삼았을 뿐이지 사회경제적 영역에까지 민주주의를 확장시키지 못했다. 이런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는 민주 정부에 의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수용과 최근 FTA 협상 과정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IMF 위기 이후 민주 정부들이 신자유주의적 시장지상주의 이념과 가치를 수용한 것은 외부적 압력의 강제에 의해 선택의 여지가 완전히 닫혀 있었던 상황의 산물이라기보다 민주 정부 스스로 적극적으로 그것을 선택한 결과였다. 민주 정부의 선택이 성장주의, 시장 효율성, 시장합리성, 시장주권의 이념과 가치를 강력한 헤게모니로 자리잡게 만든 가장 큰 요인중의 하나이다. 그런 선택의 결과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 전체에 대해 심각한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에 이르렀다. 민주 정부들이 시장원리를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탈정치화와 정치의 축소에 앞장섬으로써 스스로 권력과 사회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퇴행했던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커다란 역설이다. 그런 점에서 87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배반당한 민주주의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은 현 정권에 들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그러던 것이 촛불을 통해 거리의 정치로 한국 민주주의가 회복되어 가고 있다. 거리의 정치는 일탈과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이다. 여기서 정치란 곧 민주주의, 즉 인민의 자기 통치다. 따라서 거리의 정치를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선동 정치형태로서의 포퓰리즘으로 매도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거리의 정치는 민주주의를 그 주체에게 돌려주며, 이는 정치 주체에게 정당 정치가 행하지 못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거리의 정치는 가시적인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개입이며, 이러한 개입을 위해서 요구되는 정치의 중대한 작업은 정치 주체들의 세계, 그리고 정치가 작동하는 세계를 보이게 만드는 데 있다. 이처럼 거리의 정치는 두 세계가 하나의 유일한 세계 안에서 현존하는 불일치와 불화를 현시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거리의 정치는 단순히 정당 정치의 한계라는 문제점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어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는 일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거리의 정치의 정당성을 묻는 물음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 2008년~2009년 들어 정부 기관이 촛불시민들에 대한 민형사상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가 증가하는 추세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소송은 촛불시민을 상당히 위축시키는 전략적 봉쇄소송의 성격을 갖고 있다. 전략적 봉쇄소송이란 그 소송이 수반하는 비용, 시간 및 정신적 부담 등을 그러한 발언을 하고 참여한 시민들에게 부과하여 결과적으로 한 시민에게 제기된 소송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의 발언과 참여를 위축시키는 효과를 가져오는 소송을 가리킨다. 이에 대해서 집회나 시위 과정에서 생긴 피해에 대해 손해배상 청구가 민법 해석에는 충실할지는 모르지만 헌법의 원리에는 위배되며 민법질서라는 것도 헌법의 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며 손해배상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있다. 결사, 집회, 시위의 권리는 민주적 삶의 방식을 조직화할 수 있도록 보장받는 것, 즉 국가의 지배권역으로부터 독립된 정치적 삶의 방식을 보장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촛불집회 및 그 참여는 공익적 성격을 갖는 시민의 권리로서 보장받아야 하며, 손해배상 소송 자체가 위헌적 성격을 갖는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란 기이하고 불안정하게 작동하는 방식을 통해서 지금 이곳에 평등지향적 관계들의 총체를 그려낸다. 앞으로 거리의 정치를 민주적 공간으로 지켜가는 것이 한국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거리의 정치가 새로운 정치적 실천의 가능성을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모색이 필요할 것이다. 이를 통해 거리의 정치는, 시민 사회의 의사를 조직해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정당 정치의 역할을 계속 변화시킬 것이며 탈권위주의를 향한 중요한 매개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