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대학 – 대학과 자본 간의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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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뿌리 자르기]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대학

– 대학과 자본 간의?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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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종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

대학의 이념과 현실, 대학 없는 대학

흔히 우리는 대학을 전문적인 고등 교육과 연구를 함께 하는 기관이라고 한다. 교육과 학습은 대학의 이념이다. ‘교육’(敎育)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교(敎)는 ‘본’을 상징한다. ‘본’은 ‘본뜨다’, 즉 “본보기로 삼아 그와 똑같이 하다”는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본따다’, 즉 “남의 것을 배워서 따라하다”에서처럼 이상(理想)을 뜻하는 가치론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 가르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이 본을 보고 따라하고 제대로 따라하지 못하고 틀릴 때 매로 살짝 쳐서 틀린 것을 고쳐서 제대로 따라하도록 하는 것이다. 육(育)은 우리말로 ‘기리는’것이다. 그러니 ‘교육’은 본받음을 기리고 칭찬해서 더 잘 본받게 하는 것이다.

학습(學習)은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학(學)은 구(臼)와 효(孝)와 경(?)과 자(子)로 구성된 문자이다. 구(臼)는 ‘두 손으로 받들다’는 뜻이고 효(孝)는 ‘본’의 상징이며, 경(?)과 자(子)는 ‘어린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안으로’의 뜻이다. 즉 학(學)은 ‘배우는 사람이 효를 받들어 자신 안으로 본받다’는 의미이다. 습(習)은 ‘익히다’란 뜻으로 기림을 받아 신명이 나서 본받은 바를 자꾸 연습하여 몸에 버릇이 되고 익숙하게 됨이다.

그러나 현실의 교육은 이러한 본래의 이념과는 큰 간극을 드러내고 있다. 대학에서 교육의 이념, 즉 본받음을 기리고 칭찬해서 더 잘 본받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현실의 대학은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제 대학이 본뜨고 본따야 하는 것, 즉 존재론적이고 가치론적인 이데아(idea), 형상(eidos)은 ‘자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인간은 물화되었고 인간의 가치또한 교환가치로 환원되고 있다. 더욱이 교육 과정에서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학생 모두 자본의 가치 추구에 의해 생존을 규정받는다. 우리는 이로부터 그리 자유롭지 않다.

살아 있는 것이든 죽은 것이든 모든 것을 교환가치로서 취급하고 강제하는 체제는 비정규직 교수의 삶을 양산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비정규직 교수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대학을 자본의 논리로 운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으며 이에 저항하는 이는 배움의 장에서 쫓겨난다.

예를 들어 지난해 12월 중앙대학교의 학과 통폐합을 예고하는 구조조정 과정 중에서, 학교 정문 앞 공사장 크레인에서 대학의 기업화에 반대하는 농성을 하던 이 대학 독어독문학과 학생 노영수 씨가 최근 퇴학당했다. 그리고 상지대학교에서는 비리로 인해 실형을 선고받았던 전 이사장의 복귀 움직임이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3월에는 고려대 김예슬 학생이 교육이 없는 학교를 거부하며 대학을 떠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의 이념과 현실에 대해 반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미 대학은 경제논리로 지배되고 있다. 돈 안되는 학과는 폐지하고 통합하는 기업적 발상의 구조조정이 전면화되고 있다. 이러한 대학의 교육 속에서 인간의 욕망은 획일화되어 간다. 자본주의적 인간형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무엇인가? 이는 돈이다. 이를 위해 대학에 가야만 한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취업이 잘되는 학과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호모이코노믹스’의 ‘욕망의 경제학’이다. 호모이코노믹스는 이기적 인간의 욕망을 기초로 운동한다. 결국 자본은 대학생들의 욕망을 이기적인 원자적 욕망으로 재편성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이제 대학생들의 삶의 이상형은 ‘자본이 바라는 욕망을 자기 자신의 욕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자본의 논리가 정치를 포섭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과거 소크라테스나 프로타고라스는 교육의 내용에 있어서는 다른 입장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모든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열쇠로 보았다. 이는 교육이 그만큼 새로운 사회구성을 위한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새로운 공동체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 대학의 본연의 자리일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이와는 너무 다르다. 자본이 추구하는 가치를 ‘본받고자’ 하는 대학은 있다. 그러나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을 ‘길러내는’ 대학은 없다.

나를 지배하는 자본의 욕망

영화 [왕의 춤]이 기억난다. 이 영화에서 루이 14세는 절대주의 체제의 확립을 위해 궁정문화를 만들고 이를 통해 귀족과 성직자 등 상층집단을 제압하고 민중을 승복시키고자 했다. 국왕은 인민에게 자신의 힘을 표상시키고 상징적으로 재현하고자 예술을 종속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프랑스 아카데미를 장악하여 사상과 학문을 통제하고자 했다.

[왕의 춤]은 우리 시대에 “자본의 춤”으로 등장한다. 자본의 상징적 재현이 지금의 교육 현실이고 이를 통해 모든 가치를 표상한다. 자본으로 군림하는 힘의 표상은 대학의 기업화를 통해 주조되고 있다.

인간은 타인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해 간다. 그런데 대학이 기업의 논리로 운영되면서 자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새로운 나르키소스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기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길이 아니라 자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대체하면서 살아가는 길은 모든 가치를 차디찬 경쟁과 이익 계산의 논리 속에 빠질 뿐이다.

자본의 가치를 제외한 모든 가치가 허무주의라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 오직 살아있는 가치는 교환가치만이다. 인간과 자연 모두를 교환가치라는 추상적 동일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4대강 사업, 대학의 기업화, 체제의 재생산을 위한 출산 정책이며, 언론의 자유를 자본 운동의 자유로 만드는 것이다.

결국 교환가치로 환원 가능한 것만이 존재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자본은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여 교환가치로 환원 가능하지 않는 것들을 자본의 타자로 규정하면서 배제한다. 효용성이라는 생산성의 원리 하에서 교육과 자연 모두가 도구화되어 간다. 칸트 식으로 말하면, 이때 자본이 요구하는 것은 자율적인 지성적 인간이 아니라 명령에 복종하는 오성적 인간이다.

외적인 자본의 욕망이 인간의 욕망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 결국 우리 내부의 욕망을 구성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주류 가치관인 이 욕망의 실현이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와 훌륭함의 기준이 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나’를 찾는 길은 환상으로 규정된다.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환상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 오히려 환상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환상 속에 있는 이들은 사회에서 도태되었다고 규정된다. 자본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상적 자아로 ‘착각’하게 만드는 대학의 기업화는 인간을 ‘자신이 아닌’ 자본의 욕망에 매혹되어 살아가게 한다.

이러한 자본의 효과는 생산성 원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게 만드는 사회는 생산성의 원리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획일화된 욕망을 통해 사회적 통제를 효과적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영어의 university에 해당하는 라틴어 ‘universatas’는 ‘종합’을 의미한다. 이는 다양한 가치에 대한 종합적이고 비판적인 사유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은 다양한 가치를 음미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의 가치, 즉 자본의 가치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화하고 있다.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것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욕망은 ‘나’의 욕망이 아니며 외부의 욕망, 자본의 욕망이며 도착된 욕망이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욕망의 위험함을 감지하여 그와 관련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이유는 교육이 사회 속에서 인간을 자유롭고 책임 있는 존재로 변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본성과 교육은 유사하다. 왜냐하면 교육은 인간을 변형시키며, 변형시키면서 새로운 본성을 만들기 때문이다.”[단편 33] 그의 주장은 하나의 욕망, 즉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게 만드는 우리의 현실에서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교육은 인간의 욕망을 자본의 욕망과 일치하는 하나의 욕망으로 변형시켜 다른 욕망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욕망과 무질서에서 벗어나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은 교육이 갖는 특별한 정치적 성격이다. 무엇보다도 교육은 이렇게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 내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때 자유로운 연구와 비판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지금 자본의 욕망이 교육의 지향성을 대체시키고 있는 현실은 인간 존재를 자본의 욕망과 맞서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 이렇듯 교육은 양날의 칼이다. 한편의 칼날은 불평등과 자유의 억압에 대한 해방의 인간형을 만들고 다른 한편의 칼날은 차별과 억압, 무비판적 인간형을 만든다. 후자는 비판적 교육을 청산하고 체제의 추종자를 만들어낸다.

나의 욕망을 지배하는 나의 욕망

자본의 욕망은 물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물적이지만은 않다. 인간의 욕망을 물질적인 것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인간의 소외 문제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상품-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인간의 욕망을 물질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결국 인간관계를 물적관계로 뒤바꿔놓기 때문이다.

인간을 물화시키는 자본주의 사회 통제는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만을 조장하는 소비문화를 통해 구성된다. 소비문화의 전시상이 되어 버린 대학가, 박제된 혁명가 체 게바라의 표정을 입은 티셔츠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타자가, 즉 자본이 우리들을 욕망하고 있다고 오인하는 도착적 증세는 자본주의적 상품 경제 속에서 구조화되면서 자아 형성의 공간을 새롭게 구성한다. 이 공간의 중심적 자리에 대학이 자본의 운동을 위한 매개체로 놓여있다. 이 장소는 우리의 자아를 끊임없이 자본의 욕망과 동일화시켜내면서 ‘자기 소외’를 강제하는 훈육의 공간이다. 그리고 이 상품경제의 체제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삶을 향해 자본의 욕망을 욕망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자본의 욕망 속에 던져진 우리들은 우리 내면의 자신의 욕망이 갈구하는 목소리와 갈등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욕망이라고 간주되었던 욕망이 결국은 자본의 욕망에 불구하며 진정으로 내가 바라는 욕망의 지향성은 참혹한 자본의 논리 속에서 금지된다는 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극의 인식이 ‘대학을 그만둔다’라는 구호와 실천으로 드러난 것이다.

결국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우리들은 포이어바흐가 말하듯이 “참된 현재적 삶과 그것에 관한 그의 견해, 표상간에 존재하는 간격 위에, 그리고 그의 영혼과 공허 위에 당나귀가 넘어지던 미래의 바보다리를 세운다.”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욕망을 빼앗는 것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의 욕망은 우리들에게 증오와 투쟁의 대상이 된다. 우리에게는 한편으로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고자 하는 자아가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본의 욕망이 우리의 진정한 욕망을 갉아먹는 대립물이라고 인식하는 자아도 존재한다. 자본의 욕망은 상상적 동일화이다. 그러나 자아가 욕망하는 것도 상상적 동일화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반론할 수 있다. 우리의 욕망도 상상적 동일화일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자아의 욕망을 상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본의 욕망에 의해 구성되고 환원되는 욕망과는 달리 자신의 반성과정을 통해 자아의 상상적 동일화를 구성한다. 양자는 너무나 다른 지향성을 갖는다. 이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자아의 갈등과 감정의 교체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 이러한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식하고 실천하는 것이 관건이다. 왜냐하면 이 속에서 자본의 욕망이 아닌 인간의 욕망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맑스가 말하듯 이러한 의식이 “대중을 사로잡을 때 바로 물질적 힘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투쟁의 방식은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대학을 떠나는 방식이 있을 수도 있고, 대학 속에서의 투쟁 또한 있을 수 있다. 어느 것이 다른 방식보다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는 않다. 문제는 자본의 욕망으로 굳어진 낡은 질서를 균열 내는 공간에서 때로는 개별적인 때로는 연대를 통한 저항이 중요한 것이다.

자본이라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동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찾아 지난한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자본의 거울에 비친 모습 속에 나의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내맡기는 것은 ‘자본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자신의 지배를 받는다’라고 착각하는 자신은 나 자신이 아닌 자본에 투영된 나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자본의 욕망에 지배당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대부분의 욕망은 외부에서 온다. 따라서 우리의 욕망 구조를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욕망을 구성하는 자본주의적 체제라는 ‘외부’의 틀을 전환시키는 것이 필연적이다. 교육과 학습은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게 만드는 교육의 내용을 변혁하기 위해서는 교육자와 학습자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근대계몽주의의 일방적 교육방식을 비판한 철학자 칼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교육과 학습간의 일방적 관계를 지양한다. 교육자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육과 학습은 어느 한 쪽이 없이는 성립불가능하다. 술을 ‘거르’듯 우리는 허섭스레기가 되어가는 교육의 획일성을 거르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사유의 형태에 국한되지 않으며 마치 술을 ‘거르’는 일처럼 물질적이다.

다시금 우리는 자신 내면에서 숨죽이며 꿈틀대고 있는 양심의 울림에 귀 기울려야 한다. 우리가 기름진 땅위에서 메마른 땅을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는지, 양심의 소리에 귀 막고 타인의 산물을 꼭꼭 숨기고 받아먹고 있지는 않는지.

어떤 이가 배부르다는 것은 어떤 이가 가난하다는 것이다. 사회의 기름진 옥토를 ‘기리는 것’은 우리네 책무이며 삶 그 자체이다. 교육이 우리네 삶에 아로새기고자 하는 것은 우리네 삶을 지탱해 온 것들을 위해, 그 노고와 땀을 위해 조금이나마 빚을 갚은 과정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너무나 거를 것이 많다. 이 일의 시작은 자본의 거푸집 속의 우리 자신부터라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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