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를 바라본다 – 대학과 자본 간의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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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뿌리 자르기]

중앙대를 바라본다

?-? 대학과 자본 간의 문제 –

글: 강경표 (중앙대학교 박사과정수료)

2008년 5월 중앙대를 두산그룹에서 인수한다는 사실이 공표되었다. 수많은 언론의 집중과 관심 속에서 거대 자본과 결합한 대학이 또 하나 나타난 것이다. 1996년 삼성에 인수된 성균관대를 시작으로 기업에 의해 운영되는 학교는 몇 개 있지만 유독 중앙대가 주목을 받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먼저 자본주의가 팽배해진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단행된 대학 인수라는 점과 둘째로 두산의 일방적 개혁으로 인한 학내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는 점, 셋째로 발생한 문제의 비민주적 처리과정이 그것이다.

중앙대학의 구조조정 일지

두산그룹의 중앙대 인수 이후 두산그룹은 중앙대에 개혁의 칼날을 드리웠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학내에서 ‘천원 재단’으로 불렸던 김희수재단과의 불협화음 속에서 중앙대의 위상은 실추될 만큼 실추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두산의 중앙대 인수는 학내에서도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2009년 4월 ‘구조계획위원회’가 발족되고, 같은 해 11월 교지 [중앙문화]사태 이후 학내 여론은 급속도로 바뀌기 시작한다.

같은 해 12월 ‘1차 구조조정안’이 발표되면서 시각차는 대립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때마침 일련의 보수언론에서 중앙대 구조조정을 찬양하는 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학과 통폐합”(동아일보 2009.12.30), “중앙대의 학과 통폐합은 시대조류에 맞다”(세계일보 2009.12.31), “대규모의 학과 통폐합 나선 중앙대의 실험에 주목한다”(중앙일보 2009.12.31)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보수 언론의 공통된 논조는 교수사회를 철밥통으로 매도한다는 점과 학과제를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은 학생들이다. “의혈 중앙 구조조정에 대한 학생대표자 기자 회견문”을 비롯한 “학생 긴급 토론회”회를 시작으로 학내에는 구조조정 반대를 외치는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학교 측에서는 총학생회 주최의 “새내기 새로 배움터”를 불허했다.

또한 교수협의회는 토론회 및 “중앙대학교 학문단위 및 운영체계에 대한 재조명”에 대한 기자회견을 통해 구조정의 불합리성를 전달하려 했고, 이것은 본관 앞 천막 농성으로 이어지지만 2010년 4월 8일 구조조정 최종안이 이사회를 통과하게 된다.

두산효과와 박용성이사장을 바라보는 두 시선

사실 중앙대가 학내 개혁을 시도한 것은 2003년 “DRAGON2018” 계획이 수립되면서 부터다. 현 “CAU2018+”의 전신인 “DRAGON2018” 계획은 개교 100주년을 맞는 2018년에는 세계 100대 대학에 진입한다는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희망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희망은 “CAU2018+” 계획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두산의 중앙대 인수 이후 이 잿빛 희망은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산과 중앙대가 체결한 양해각서(MOU)만으로도 2009년 대학입시에서 신입생 백분위가 1% 높아진 것이다. 뛰어난 인재 확보라는 측면에서 “두산효과”는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자본의 힘을 증명하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두산효과” 이후 나타난 또 하나의 현상을 꼽자면 박용성이사장의 발언 수위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재계에서 “Mr 쓴소리”라는 애칭을 가진 박용성이사장은 본인의 경제관이 투영된 교육관을 강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2008년 6월 10일 “이사장 취임사”에서 그는 “중앙대, 이름만 빼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전부 바꾸겠다”는 말로 대대적인 개혁이 있을 것임을 시사했다. 중앙대의 실질적 개혁을 누구보다도 원했던 중앙인들은 그 당시만 해도 그의 말에 대부분 찬동하는 분위기였고, 지난 재단의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자본 없는 개혁의 허망함 앞에 박용성이사장의 행보에 반대보다는 찬성의 표를 던져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09년에 들어오면서 박용성 이사장의 발언은 수위를 넘어 중앙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을 하게 된다. “기업이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판매가 되듯 대학도 사회가 원하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중대신문 2009.5.24), “주인의식을 갖는 것과 주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며, 대학 사회에 경계를 넘어서는 과도한 주인의식이 퍼져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진다”(중앙일보 2009.8.28).

학생을 제품으로 교수를 직원으로 바라보는 박용성이사장의 태도와 주인의식에 대한 비하 등은 중앙인의 가슴에 상처로 남기에 충분했다. 또한 학생들의 주인의식이 학교재정의 등록금 의존도가 높은 까닭에서 기인한다는 그의 분석은 중앙대가 아닌 중앙인에 대한 분석을 제대로 수행했는가에 대한 의문만을 남기게 되었다.

장덕진 교수는 “일등 기업의 대학 개혁”(경향신문 2010.4.14)이라는 칼럼을 통해 일등과 일류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두산을 사류기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중앙대에서 벌어지는 두산의 정신적 폭력과 비민주적 행태를 꼬집었다. 며칠 후 박용성이사장은 “중앙대 개혁의 외풍”(경향신문 2010.4.18) 이라는 제목으로 중앙대가 처한 환경과 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의 간섭을 외풍론으로 간주하며 당당하게 맞선다.

그러나 박용성이사장이 중앙대가 처한 환경과 문화를 운운하려면 최소한 기업의 논리를 떠나 중앙대의 특수성을 좀 더 고려해야 했다. 사실 중앙인들 스스로는 지난 김희수 재단을 썩은 뿌리라고 생각하고, 지난 재단과의 단절을 강력하게 소망하였고 강력한 투쟁을 벌여왔다. 그리고 지난 재단의 무기력함 속에서도 지금까지 중앙대가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중앙인의 주인정신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중앙대 인수과정에서 드러난 지난 재단과의 관계 또한 중앙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중앙대에 직접적으로 1200억을 투자한 것이 아니라 지난 재단에 1200억을 넘겨준 사실은 박용성 이사장이 진정으로 중앙대 개혁에 의지가 있는 교육자인지 아니면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기업인에 불과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만든다.

비민주적 절차를 통한 학과 통폐합


자본의 논리가 현실적으로 막강한 힘을 지녔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의 거의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역할이 경제적 파이를 키우는 것이라는 점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의 힘이 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그 절차가 비민주적이라면 그것을 따를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중앙대 구조조정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중앙대 개혁에 있어 드러나는 비민주적 처리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학내 반대여론을 주도한다는 명분 아래 [중앙문화]와 [녹지]의 예산을 삭감한 것과 학내 언론 검열, 총학생회 주최의 “새내기 새로 배움터”의 불허, 자연대 학생회장의 징계 파문 등과 함께 민주적 절차에 따른 구조조정을 내세우면서도 제대로 된 의견수렴 절차가 없는 것 또한 그렇다.

이에 천막농성이 진행되는 가운데 “중앙대 학문단위 일방적 재조정 반대 공동 대책 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천막은 강체 철거되고, 의견수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박용성이사장의 개혁에 찬동하는 보수 언론들이 철밥통을 언급하며 개혁을 의심하거나 반대하는 교수들의 발언을 원천 봉쇄하고 나선 것도 자본과 결탁한 언론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또한 2010년 4월 8일 구조조정 최종안이 이사회를 통과하고 확정되던 날 불거진 고공크레인 점거 사건에 가담한 몇몇 학생들에 대한 처리문제는 기업식 대학운영에 있어 보여지는 독단을 여실히 드러냈다. 교육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할 학생의 계도 문제가 퇴학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일련의 중앙대 사태를 바라보며 우리가 유심히 지켜봐야 하는 것은 중앙대 개혁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아니라 그 본질이다. 지난 김희수 재단과의 단절을 가슴 깊이 갈망해온 2만5천 중앙인들은 대체적으로 박용성 이사장의 개혁에 찬성한다. 그러나 그 개혁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대 개혁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과정들은 기업을 앞세운 자본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대학이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자본과 대학 그리고 기업

중앙대 개혁에서 나타나는 본질적인 문제는 자본과 대학의 문제이다. 이것은 기업의 대학 운영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며, 수많은 진통을 겪고 있다. 한 신문의 칼럼에 따르면 “100여 년간 변하지 않는 한국의 대학들을 세계시장과 경쟁하는 대학으로 만들려면 검증된 기업식 개혁이 정답일 것”(한국경제 2010.05.09)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기업을 통해 검증된 사실은 과연 무엇인가? “파우스트의 거래”로 일컬어지는 대학의 기업화 속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까지 받아온 교양중심의 대학교육이 정말 그렇게 문제가 많은 것일까? 효율성과 생산성이 떨어지는 인문학은 사라져야만 하는가?

이러한 일련의 질문들은 대학교육의 위상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근대를 모델로 한 민주 세력을 양성하기 위해 대학 교육은 교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세력들은 이러한 교양중심의 교육이 현대 사회에는 적용되지 않는 낡은 교육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면에는 “절대 자본”(이명원 “자본주의와 대학” 2007) 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신자유주의가 있다.

교양중심의 대학교육이 근대의 체계를 반영한다면 신자유주의는 어느 역사시대를 반영할 까? 신자유주의는 현대사회에 부합하는 최첨단 유행인가?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검증된 기업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신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실자본주의”에 가까운 한국적 신자유주의 모델은 이미 봉건적이다. 독단적 자본가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이 재편되어 있다. 자본가는 왕이며 그의 의지에 따라 효율성이 없다고 간주되는 것은 사라지면 그만이다. 그의 의지에 동의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민주적 절차도 소용은 없다. 우리는 이러한 독단성을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대학교육에서 자본의 역할은 경제적 파이를 키워주는 것이다. 기업 출신의 CEO들은 분명 그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파이의 조각들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는 민주주의 교육에 부과된 몫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학 교육에는 스스로 민주주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교육이 지속되어야만 하고, 민주적 절차를 중시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이런 의미에서 중앙대를 포함한 대학 개혁에 있어 인문학과의 무분별하고도 일방적인 통폐합은 문제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인문학은 민주주의 교육의 산실이기에 인문학의 생산성과 효율성의 문제를 경제적인 시각에서 재단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진정한 인문학의 생산성과 효율성은 그들이 만들어 내는 사회적 담론에 있다. 비록 당장은 경제적 가치가 없어 보이고, 잡음을 일으키고, 개혁을 주도하는 세력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인문학이 지닌 민주주의를 지속하려는 의지는 계속해서 만들어져야 하며, 앞으로도 만들어질 것이고, 이것이 인문학의 생산성과 효율성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민주적 담론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인문학적 시각이 필요하며, 이것이 인문학을 함부로 통폐합 할 수 없는 이유이다. 다시 말해 다양한 담론이 형성될 수 있는 다양한 장소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사회가 EU라고 하는 경제적 단위로 통합되어 있다고 해서 유럽의 문화가 통합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인문학적 사고를 유사학과 통폐합이라는 무딘 칼날로 재단하려는 시도 자체가 인문학적 효율성과 생산성을 궁극적으로 떨어트리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주인과 주인의식 그리고 중앙인

“절대 자본”의 세계에서는 자본이 생명력을 갖는 근본인 것처럼 보인다. 자본이 조직을 창출하며, 그 조직은 리바이어던적 체계를 부여받으면서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체계 내에서는 생명체가 갖는 근본적 노동력은 상품 또는 교환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그 위에는 자본의 주인인 자본가만이 있다.

진정으로 주인의식과 주인이 다른 것이라면, 그래서 서로의 역할 구분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면 자본이 갖는 생명력 또한 진정한 생명과는 다른 유사체일 뿐이므로, 주인은 유사 생명체의 주인일 뿐 주인의식을 가진자들의 주인은 아니다. 그러므로 중앙대라는 이름만으로는 중앙인을 하나로 묶을 수도 없을 것이며, 통제할 수도 없고,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주인의식을 가진 자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또한 자율적 주인의식이 없는 노예의 도덕을 가진자들을 육성하는 것이 대학의 목표라면 그것은 분명 재고되어야만 한다. 네 것과 내 것을 확실히 구분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모델 속에서도 애사심이나 애교심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없다면 탁월한 효율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주인의식을 갖는 것 또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덕목이며, 대학교육의 일부이다.

그러나 중앙대 개혁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사태들은 자본과 대학 그리고 기업과의 관계에 있어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재단의 선택과 강요되는 침묵은 자본 앞에서 무력해지는 대학의 현실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더더욱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은 중앙대 개혁 모델을 따르려는 또 다른 사립대학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앙일보의 한 사설의 제목은 “대규모의 학과 통폐합 나선 중앙대의 실험에 주목한다”라고 되어 있다. 2만5천 중앙인이 실험대 위에 올라있는 것이다. 대규모의 사회적 실험을 아무런 비판 없이 찬양하는 글을 보면서 우리가 진정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 2만천의 중앙인이 실험대 위에 서 있어야 하는 실험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만약 실패한다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여기에 중앙인의 한사람으로서 중앙대를 바라보는 시각과 인문학을 전공하는 내 생각을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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