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인권 조례를 학생 손으로 – 학생 인권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학생 인권 조례를 학생 손으로

– 학생 인권 문제-?

글: 김영삼 (성동글로벌경영고등학교 교사)

2009년 사회적 논란 속에서 시작되었던 경기도 교육청의 학생 인권 조례 제정 작업이 2010년 2월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자문위원회 결과 보고서’ 제출로 마무리 되었다. 학생인권선언이 아닌 조례 제정이라는 원대한 목표는 조례가 통과되지 않아 최종적인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학생 인권 문제와 관련된 제반 사항들 하나하나를 근본적으로 검토하고 해결 방향을 제안했다는 것만으로도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연극의 1막에 불과했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 제정 자문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곽노현 교수가 서울시 교육감 후보로 출마하였고 덜컥 당선이 된 것이다. 이제 학생 인권 조례는 경기도라는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어 진보 교육감이 진출한 6개 시도에서 공통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특별한 한 교육감의 튀는 제안이 아닌 우리사회 학생 인권의 사회적 통념과 상식의 기준을 새로 만드는 일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체벌금지로 수면위로 올라온 학생인권 문제

최근 서울 한 초등학교의 일명 ‘오장풍’ 교사 폭력 사건이 사회적 공분을 불러일으키자 이를 계기 삼아 서울시 교육청이 2학기부터 모든 학교에서 체벌을 전면 금지하겠다고 발표 했다. 그러자 진보 교육감과 대립각을 세우려 준비하고 있었던 조중동이 중심이 되고 일부 교원?학부모 단체까지 합세한 소위 보수(?) 세력이 일제히 서울시 교육청의 조치를 비난하고 나섰다. 그들은 체벌 금지 조치를 서울시 교육청발 ‘학생인권조례 제정’의 수위를 가늠해 볼 사안으로, 학생인권조례 제정의 속도를 높이기 위한 조처로 받아들이고 있는 모양이다.

흘러간 옛 노래 같은 체벌 논쟁이 다시 벌어지는 상황이 우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엄연히 존재하는 우리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격차를 어떻게 좁혀 나갈 것이냐는 집권 세력(?)으로서의 고민도 함께 갖게 된다.

우리 사회 민주주의 발전과 한참 동떨어진 학교 현실

경기도 학생인권조례안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논쟁은 이미 한 차례 지나갔다. 그러나 서울시 교육청이 추진하는 학생인권조례 내용 역시 경기도의 고민으로부터 출발할 것이기에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체벌과 두발규제를 금지하고, 복장의 자유를 허용하고 방과 후 학습에서 학생의 선택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했다. 학생들이 수업시간 외에 평화적 집회를 열고, 학칙 제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도 부여했다. 인권 침해 문제를 다룰 학생인권옹호관과 학생인권심의위원회, 학생참여위원회도 두기로 했다. 논란이 되었던 조항들만 몇 가지 나열했는데 이를 보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87년 이후 20여 년 동안 진행되어온 우리 사회 여러 분야의 민주적 발전은 우리 사회의 통념과 상식의 기준을 바꿔왔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도 이런 상식을 벗어난, 이미 지나간 일로 생각했던 구시대적 행태들이 다시 등장했기 때문 아닐까.

2010년의 사회적 기준과 상식으로 학생인권을 보장하겠다고 논의하고 있는 내용들을 살펴보자. 체벌, 두발, 복장 규제 등 이미 오래전에 해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내용들이 논의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90년대에 태어난 학생들만 재학하고 있는 현재의 학교가 80년대 이전 상황에 머물러있다는 기막힌 현실을 발견하게 된다. 도무지 우리는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

체벌은 개인이 아닌 구조의 문제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전교조조차도 체벌 금지를 조직적 자기 입장으로 발표하지 못했던 것이 우리 교육운동의 현실이다. 물론 조직적 입장 정리는 되어있지 않지만 많은 교사가 체벌없는 교육활동을 위한 변화를 모색하고 또 실천하고 있어 전혀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명 ‘오장풍’ 교사 사건과 같은 체벌이 아닌 폭력에 해당하는 무지막지한 상황이 주기적 혹은 반복적으로 보도되는 것은 우리 교육 현장이 체벌과 관련해 구조적으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체벌 문제를 교사 개인의 교육관, 철학으로 간주한다면 교사들에게 생각을 바꿀 것을 요구하고 교사 집단이 자성을 통해 의식을 바꾸는 것으로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체벌 문제는 개인의 의식까지 지배하는 구조적 문제이기에 그 해결책 역시 사회적 논의와 제도 개선을 통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이 과정의 가치를 상실하고 결과(입시 성공)의 성패에 모든 가치를 두고 있는 현실, 그래서 학생들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가 학교와 교사의 능력으로 인정받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니 관리의 가장 효율적 수단으로 체벌이 사용되는 것은 당연시될 수 밖에 없다.

‘아니 학교가 아직도 저래’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입시라는 오래된 과제에 발목 잡혀있는 우리 교육의 현실을 생각해 보시라. 바뀌지 않은 교육적 상황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익숙하고 지속적으로 이어져오는 대처 방안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입시와 체벌은 오래된 앙상블이다. 다음으로는 교사 무한책임 시스템을 살펴봐야 한다. 현재 학교에서는 학급 운영, 수업, 생활 지도 등 모든 부분에 대한 교육적 책임이 개별 교사의 몫으로 귀결되고 있다. 무한책임의 시스템 속에서 교사는 자신의 교육활동 중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 상황에서 즉각적인 해결사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그래서 교사는 고독하고 외롭다. 그 상황을 개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면 무능한 교사로 취급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기본적으로 여러 명의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해야 하는 교육 노동의 특성상, 문제 상황에서 역할 분담을 통해 그 책임을 나눌 수 있는 지원 체계를 구축하는 것은 매우 필요하고 시급한 과제이다. 다른 학생들의 수업권을 방해하는 몇몇 학생들에 대한 교육적 조치를 분담해줄 수 있는 별도의 지원체계를 갖추어야 교사가 즉각적이고 충격적인 개입(대체로 체벌)을 통해 그 상황을 정리하고 모두의 수업권을 지켜야 하는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러한 시스템의 부재 역시 명백한 구조적 문제이다.

마지막으로 학교 생활규정(좁혀 말하면 학생 생활규정) 문제이다. 등교 시간 학교 교문에서 시작되는 교사와 학생의 실랑이는 학교 생활 규정의 용의복장 관련 조항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두발, 복장 규정은 학생들의 기대를 벗어나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자기 표현의 욕구를 규제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의 불만과 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학교와 교사들의 요구 사이에 만성적이고 구조적인 충돌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교육부의 일관된 입장은 학교 구성원들(교사, 학생, 학부모)이 합의를 통해 두발, 복장에 대한 규정을 결정하라는 것이다. 10년째 반복되고 있는 이 처방은 현장 갈등 상황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 2005년 대만에서는 모든 중고등학교에서의 전면적인 두발 자유화 조치를 시행하였다. 개별 학교 구성원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기준과 원칙을 제시하여 갈등 발생 원인을 제거한 것이다.

여전히 수직적 권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학교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할 것이라고 말하는 우리나라 교육부의 무책임하고 무성의한 대처가 학교 구성원들간의 긴장을 유발시키는 구조적 원인인 것이다.

구조와 문화를 바꾸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

이상 몇 가지 요인들이 현실적으로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는 구조적 장애물들이다. 그래서 체벌 금지를 교육청이 나서서 해결하려 하고 학생 인권 조례를 만들어 학교 생활규정을 둘러싼 오래된 갈등 구조를 해소하려 하는 것이다. 개별학교 개별교사에게 무책임하게 맡겨 놓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분명 의미있는 사회적 논의 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언과 지침을 통해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제도 개선과 학교(교육) 문화 바꾸기라는 긴 호흡과 강한 걸음이 필요한 사안이라는 긴장감을 늦춰서는 안된다. 학생 인권조례가 되었든 체벌 금지가 되었든 우리에게 익숙한 기준을 새로운 사회적 기준으로 만들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으론 사회적 변화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어설픈 선언과 준비되지 않은 실행은 쉽지 않은 역풍을 맞아 지지부진한 상황만을 지속시킬 수 있다는 긴장감을 가지고 차분하고 의미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앞에서 체벌과 관련해서 구조적 문제로 제기한 사항들에 대한 대책 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첫째 교사 교육활동을 직접 도울 수 있는 학교 교육 지원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
둘째 학생 개개인에 대한 차별화된 지원과 접근이 가능한 교육체계 구축을 위해 싸구려 교육을 탈피하기 위한 적극적 투자가 필요하다.
셋째. 학습, 연수, 교육을 통한 지속적인 자기 변화의 과정을 학교 구성원 모두가 가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긴 호흡과 강한 걸음이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은 학생의 자치와 참여로

그러나 진정 중요한 것은 현재 어른들이 말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 체벌 금지 등의 논의가 직접 당사자인 학생 청소년들의 적극적인 문제제기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동안에 여러 가지 움직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학교에 묶여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학생인권, 체벌 금지 문제를 자기 문제로 인식하고 있을지 모르나 그것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사회화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출발은 소위 진보교육감이 그 역할을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동력은 바로 직접 당사자인 학생 청소년들의 더욱 적극적인 진출이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학교 밖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광장을 마련해 주는 것과 함께 개별 학교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주인되어 자치와 참여의 학교 교육을 통해 주체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모아갈 수 있는 학교 교육의 변화, 이것이 미래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학생인권조례의 진정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학생이 하게 하라!

학생인권을 어떻게 볼 것인가? – 학생인권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학생인권을 어떻게 볼 것인가?

– 학생인권 문제 -?

글: 김성우 (상지대학교 교양학부 겸임교수)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느 곳에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정치 상태가 충만한 전개에 도달한 경우에 인간은 사유와 의식 속에서만이 아니고 현실과 삶 속에서도 (천상과 지상의) 이중적인 존재를 영위한다. 인간은 자신을 공동 존재(공적인 시민)로 여기는 정치 공동체 속에 살면서, (동시에) 단지 사적인 개인으로서 활동하며 다른 이들을 수단으로 취급하고 자신도 단순한 수단의 역할로 강등되어 낯선 권력의 장난감이 되는 시민(부르주아) 사회 속에 살고 있다.”(맑스, 『유태인의 문제』)

학생도 인간이다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은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관련해서 “체벌을 전면 금지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두발 및 복장을 자율화하고, 강제적인 야간 자율학습을 폐지시키는 내용이 인권조례의 골자가 되는 방향으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또한 “학교생활 규정을 만드는 데 학생이 주인이 돼야 하는데 그동안 학생들은 자신이 동의한 적이 없는 규정에 의해 규제를 받아왔으나 학생들이 입법 과정에 참여할 경우 그만큼 자율규제 능력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 자유주의는 로크 이후로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며 독립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체와 재산의 자유를 지닌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한국의 자유주의자는 일례로 종부세 부당성을 강조하는 등 재산의 자유는 늘 강조되면서도 재산권의 기초가 되는 더 기본적인 신체의 자유는 특히 군대와 학교에서 규율이라는 이름아래 권위주의적으로 억압받고 있는 것을 용인한다는 점에서 극히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 제정준비중인 경기도학생인권조례안은「헌법」 제31조, 「유엔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교육기본법」 제12조 및 제13조, 「초ㆍ중등교육법」 제18조의4에 근거하여 학생인권이 학교교육과정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한국의 인권역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학생인권이라 함은 「헌법」 및 법률에서 보장하거나 「유엔 아동의 권리에 관한 협약」 등 대한민국이 가입?비준한 국제인권조약 및 국제관습법에서 인정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 중 학생에게 적용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말한다.

본래 인권은 ‘인간’의 자연적 권리라는 점에서 주로 근대의 정치철학과 법철학에서 논의되었고, 기본권은 이 자연적 권리가 국가의 실정법체계에 편입되어 헌법적 가치를 지니게 된 것으로, 근대적 국민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포괄하는 용어로 헌법 담론에서 주로 쓰인다.

이러한 인권개념의 철학적 기초는 서구 근대의 자연법론과 사회계약론이다. 자연법론에 따를 때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천부의 권리를 당연히 지니고 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역사적으로 1776년 미국 버지니아 인권선언 그리고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이러한 근대의 자연권 개념을 실정법적으로 표현한다. 특히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양도불가능한 신성불가침한 권리들”을 엄숙히 선언하면서(전문),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며 생존한다”(제 1조)고 천명한다.

기본권이라는 표현은 독일의 바이마르헌법에서 비롯되는데, 기본권 개념은 “자연권에 기초를 두고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여러 자유와 권리에 관한 규범체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본권은 자연적 인간의 권리와 근대적 국민국가의 국민의 권리를 동시에 담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학계와 헌법재판소도 이런 맥락에서 기본권을 사용하고 있다.(박성철, 『헌법줄게 새법다오』)

이번의 학생인권조례안은 학생도 인간이고 따라서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기본권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이 조례안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부터 군사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학생인권이 부당하게 침해당했던 현실에 대한 대응일 뿐이다. 그리고 이는 근대의 법적이고 정치척인 담론에서 지극히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인권과 기본권의 회복을 의미할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 상식 이상의 의미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현직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70% 이상의 교사들이 이 조례안에 대해 반대한다고 응답했다. 주로 학생인권을 존중하면 학습 분위기가 저해되거나 학생지도가 어려워지고 학교 단위의 자율성이 침해될 것이라는 우려를 이유로 제시한다.

그런데 교사들의 우려 뒤에는 학생을 ‘피교육자’, ‘약자’, ‘지시를 따라야 할 자’, ‘보호의 대상’, ‘미성숙한 자’ 등으로 보는 관점이 깔려 있다. 이는 교사를 비롯한 교육 관계자들이 ‘학생인권’ 자체를 교권에 대한 도전이나 교권침해로 간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제시대 이후로 생성된 권위주의의 영향으로 학교에서도 권위주의가 지배적인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낸 준다. 이런 문화에서 학생지도는 일방적 통제나 지시, 타율과 획일성을 그 원리로 삼게 된다.

1주 1표라는 비민주주의적인 의사결정을 원리고 삼고 있는 기업마저도 팀제니 리더십이니 하며 수평적 조직구성에 힘쓰고 있는데도 미래의 민주시민을 길러내고 민주주의의 중심장이 되어야 할 학교는 여전히 수직적인 관리방식을 선호하고 있다는 이 역설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은 것인가? 왜 우리나라의 교사들은 학생을 삶의 주체나 헌법적 권리주체로 인식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일례로 ‘나이어린’ 학생들에게 체벌을 금지하거나 두발과 복장의 자유를 부여하거나 야간학습 및 보충수업에 대해 선택권을 주고 휴대전화를 소지할 자유를 주고 집회의 자유를 주면 학교운영이 힘들어지고 나라의 법질서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국가주의와 자유주의의 두 얼굴을 한 공교육

원래 프랑스 혁명 이후에 공교육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새로운 공교육의 방식을 규정한 사람은 백과전서파의 철학자 콩도르세이다. 그에 의하면 교육의 목적은 현 제도의 추종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비판하고 개선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며,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상의 자유’, ‘교수의 자유’, ‘학습의 자유’가 모두 다 중요하며 이는 ‘인간의 본성에서 유래한 모든 권리로서의 인권’과 마찬가지로 옹호되어야 한다.

이와는 달리 일본이나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처음에는 근대화 조기달성이라는 명분 아래 국가주의가 지배하였고 현재는 선진화라는 명분 아래 자유주의를 여기에 도입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교육의 국가주의는 국가관리형 관리 시스템과 암기식 위주의 강압적 학습이라는 정형을 낳았다.

이런 문제점 때문에 국가주의는 대중교육이라는 명분 아래 개방적 자유주의로 전환되지만 이는 소비자/수용자 중심의 교육이라는 허울을 쓴 채 교육내용의 질을 현저히 떨어뜨린다. 기존의 국가주의적 암기식 교육보다 개방된 교육의 질이 더 떨어지는 기이한 현상을 보여주게 된다. 거기다가 무너진 권위와 자유주의의 바람은 학생지도의 어려움으로 이어지고 이에 따라 교실이 붕괴되고 교권이 무너지는 사건들이 심심치 않게 보도되고 있다.

그런데 국가주의적 획일화는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자유주의적 획일화에 의한 출세주의, 실용주의 및 소비주의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후자가 은밀하게 전 사회구성원의 건전한 이성을 마비시키고 개방과 소비자주의라는 미명 하에 학력의 저하를 초래하고 초중등의 공교육을 파괴하고 고등교육의 교양교육과 인문학을 움츠러들게 하였다.

교육의 국가주의나 자유주의는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구의 근대성의 전체화/개별화라는 단일적 구조의 다른 양태일 뿐이다. 마치 정치에서 자유주의와 전체주의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역사적 쌍둥이인 것처럼.

인권에도 종류가 있다

로크의 자유주의 인권 개념은 수학에서 추상적으로 동일적인 단위(하나)를 전제하듯이 사회에서 추상적으로 동일적인 단위인 개인을 전제하고 있다. 개인에 해당하는 라틴어 인디비둠(individuum)은 원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원인 아톰(atom)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것인 기본 단위를 의미한다. 단순 관념의 순열과 조합을 통해 복합 관념이 만들어지듯이 개인들이 기계적으로 합쳐져서 사회가 생성된다. 이때 개인은 수의 하나와 마찬가지로 동질적인 추상적 동일성을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개인은 형식적으로 동등한 자유롭고 평등한 성격을 부여받는다.

이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세계가 바로 로크가 말하는 ‘자연상태’이다. ‘자연상태’는 아직 정치사회(로크는 이 정치사회, 즉 국가를 시민사회와 동일시한다)를 형성하기 이전의 사회다. 이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누구나 천부적으로,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에 대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

이처럼 로크의 자유주의 인권사상은 분명히 개인을 전통과 권위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고 평등하고 독립적인’ 존재자로 상정했다는 면에서 인류의 보편적 성취의 한 단계를 구성한다. 하지만 변증법적 시각에서 보면 이는 아직 추상적 단계(헤겔)이고 기만적 단계(마르크스)이다. 자연상태가 추상적이라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거꾸로 되어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결과를 원인으로 잘못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크의 ‘자연상태’란 국가로부터 논리적으로 추상화한 결과이지 국가의 선행원인이 아닌 것이다. 이탈리아 정치철학자 보비오의 말대로 “자유주의 국가 이론의 형성 순서는 (실제 역사와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최초의 가설적인 자유의 상태를 이론적인 출발점으로 설정함으로써 인간은 자연적으로 자유로웠다고 전제한 뒤 지배자의 권력에 제한을 가하는 사회인 하나의 정치 사회의 형성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권 이론은 역사적인 사건들의 실제 진행 방향을 반대로 뒤집어 놓고 있다. 즉 역사적으로 결과인 것을 시발 또는 선행상태로서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자유주의와 민주주의』)

한편 로크는 시민사회를 정치사회, 즉 국가와 동일시한다. 이는 그가 시민사회의 경제적 측면과 국가의 공론적(더 나아가서는 인륜적인 이념적) 차원을 혼동하여 그 각각의 특성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 있다. 이점은 그가 국가형성의 목적을 재산보호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특히 잘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정치적 차원과 경제적 차원을 혼동하고 있으며 정치를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 수단으로 삼는 전형적인 자유주의적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부르주아’와 ‘공민’을 혼동하고 있다. 로크는 공동 존재로서 정치 공동체에 참여하는 ‘공민’과 사적 개인으로서 살아가는 ‘욕망기계’(들뢰즈와 가타리)로서의 ‘부르주아 시민’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러한 무구분의 상태가 헤겔이 말하는 ‘직접성’의 단계이다. 이러한 직접성이 가장 잘 드러난 개념이 ‘인격’이다. 인격은 수의 단위와 마찬가지로 추상적 동일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공민이나 시민이 ‘법적인 주체와 대상’의 추상화된 직접성의 형태로서 제시된 것이 자유주의적 인격 개념이 된다.

이 ‘인격’ 개념과 ‘개인’ 개념이 차이가 나는 것은 법적인 것과의 연관성 여부이다. 자연 상태의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재산보존을 위해 통치 계약을 통해 국가로 들어가서 자신들이 신탁한 그 대표자가 제정한 법률에 따라 인정받는 ‘권리’를 지닌 법적 주체이자 ‘책무’를 지닌 법적 주체이자 대상인 법적인 개인이 된다. 이 법적 개인이 바로 인격이다.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한 역설적인 장치가 바로 인격이다.

인격은 권리를 위해 자유를 제한한다는 자유주의의 딜레마를 잘 드러내주는 개념이다. 더 나가 로크 인권 개념의 중심줄기는 역시 재산권이다. 그는 생명과 자유와 자산을 모두 재산이라고 부르며 이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서 국가를 언급한다는 점에서 그의 권리 개념은 분명히 재산권에 편중되어 있다. 그에게는 ‘시민’과 ‘인격’은 존재하지만 ‘공민’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위에서 언급한 대로 헤겔은 로크의 권리와 인격 개념의 추상성을 지적하는 반면에 마르크스는 그 개념의 이중성, 즉 기만성(인간성 소외와 억압)을 폭로한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절대로 인권이라는 개념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부르주아적 권리 개념을 비판한 것이지 권리 일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인권에 대한 오해하게 된 이유는 경제적 자유를 대표하는 재산권과 사상과 사회경제적 약자의 권리보호를 중시하는 시민권 개념의 차이를 간과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인권의 탄생이래로 시민권을 주창하는 인권의 민주주의의 담론은 재산권중심의 인권담론과 갈등과 충돌을 일으켜 왔다. “재산권과 인권의 긴장은 바로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의 탄생부터 느껴져 왔다. 17세기 올리버 크롬웰은 그 당시 평등한 법적 권리에 관한 급진적 개념을 지지하던 수평파 운동과 대결해야 했다.”(Bowles & Gintins, Democracy and Capitalism) 이런 점을 파악하려면 오늘날 자유주의적인 권리 중심적인 학파들 내부에서도 재산권을 중시하는 노직 류의 자유지상주의와 약자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중시하는 롤즈 류의 수정자유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학생들의 인권은 모두 소중하다

경기도학생인권조례안은 기본적으로 자유권을 중심에 놓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자유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 학교관계자들은 여전히 권위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우리 헌법에서 가장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인 자유주의적 권리마저 부정하고 있다.

자유주의를 좌파라고 한다면 우리 한국에서 권위주의적 수구 외에는 모두 좌파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학교는 민주화 이전의 권위주의 시대의 유물이다. 토플러가 말한 대로 기업이 100마일로 뛴다면 학교는 5마일 이하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학생들도 인간으로서 권리의 주체이고 삶의 주체라는 단순한 이 사실을 부정하지 말자. 시민으로서의 그들에게 기본적인 자유권을 보장해야 한다. 또한 학생들 중에는 사회적 약자들도 존재하므로 공민으로서 그들의 사회권 보장에도 적극 힘써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조례안에 장애학생이나 이주민이나 다문화 가정의 학생 그리고 성적소수자 학생이나 빈곤층의 학생 등을 고려한 조항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학생지도의 어려움이라는 명분 아래 주로 자유권이 쟁점화되면서 이러한 조항들이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학생들이 학교에서 인간답게 교육받을 수 있게 해야 하며 학교가 차별의 기원지가 아니라 차별을 사라지게 하는 출발지가 될 수 있도록 문화적 분위기를 바꾸어야 한다.

 

학생인권조례가 학교에 질문하는 것 – 학생인권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학생인권조례가 학교에 질문하는 것

– 학생인권 문제 –

 

글: 조영선(경인고 교사)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두고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소극적으로는 ‘학교현장과 맞지 않다.’는 견해부터 ‘교권침해 우려’, 적극적으로는 ‘촛불 홍위병을 만들려는가’까지 반론의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인권’은 보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일까? 학생인권조례는 정말로 학교를 망칠 만한 것인가? 이런 반론은 학생인권조례가 제기하는 문제들에 합당한 것인가?

학생인권조례는 학교 질서를 엉망으로 만들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권고하는 내용은 보편적인 인권과 헌법에 보장된 권리에 비추어 학생들에게 신체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인권을 침해하는 각종 생활규정의 폐지’, ‘체벌과 모욕적인 발언 금지’, ‘집회와 시위의 자유 보장’ 등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인권을 침해하는 각종 생활규정의 폐지’와 ‘체벌과 모욕적인 발언 금지’가 학교질서를 엉망으로 만들 것이라는 의견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학교의 질서가 ‘인권을 침해하는 각종 생활규정’과 ‘체벌과 모욕적인 언행’으로 유지되어왔음을 의미한다. 즉, 서로의 자유를 평등하게 보장하기 위해 있어야 할 생활규정이 사실은 학교의 억압적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아침마다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혹시 걸리지 않을까?’ 긴장하며 학교에 오게 하는 교문지도는 교칙을 잘 지키는 학생에게도 학교에 대한 반감을 일으킨다. 교사가 학생의 잘못을 가르쳐주겠다는 이유로 체벌을 하면서 동급생에게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학교폭력예방 교육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학생들의 폭력을 예방하는 교육을 하는 교사들이 학생에게 폭력의 한 형태인 체벌을 실시해서는, 그 교육이 효력을 거둘 수 없다는뜻이다. 이런 억압적인 장치들이 겉으로는 학교의 권위를 지켜주는 것 같아도 다른 한편으로는 학교 교육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있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는 교권 침해다?

어떤 교사가 담임에게 욕하는 카페를 만드는 아이들에게 인권의 이름으로 비행의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라고 말하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 학생들은 왜 담임을 욕하는 카페를 만들었을까? 학생지도를 하다보면 학생의 의견과 반(反)하게 교육적으로 지도해야 할 경우가 있다. 중요한 것은 왜 그렇게 지도할 수밖에 없는지 설명하고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권의 이름으로 대부분의 경우 동의는커녕 체벌 등의 강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학생들의 의견을 공식적으로 낼 통로가 없다보니 학생들이 음성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는 카페를 만들고, 그것이 음성적이다보니 ‘인신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적인 지도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즉 학생과 교사의 의사소통이 보다 현실화되면 음성적으로 교권을 침해하는 사각지대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혹 그런 공간이 존재한다면 ‘공식적으로 너희들의 의견을 내지 않고 이렇게 인신공격을 하는 것은 인권침해’라고 교육할 수 있다. 즉 학생인권조례는 오히려 교권존중의 바탕이 될 것이다. ‘너희들의 권리를 보장받는 만큼 너희도 교사, 학부모 등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라’고 가르칠 수 있는 근거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지도하려고 하다보면 학생의 진정한 ‘동의’ 없이 무엇을 교육하기 어려워진다. 학생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교사는 다양한 수업 방법을 구안할 수밖에 없고 교육과정이 아닌 서로가 참여하는 교육 속에서 교사와 학생이 그 의미를 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입시 위주, 지식 교과 위주의 교육 과정이 침해해왔던 교사의 교육과정 편성권 및 평가권을 확보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학생인권조례는 미성숙한 학생들을 촛불 홍위병을 만들려는 것이다?

사회 교과서는 학생들에게 정치에 참여하라고 끊임없이 가르친다. 특히 자신의 생활과 관련된 지역 사회의 정치에 참여하여 의정활동을 참관하고 의견을 내고 지방 선거에서 후보의 공약을 비교해보는 것이 교과서에 제시된 학습활동이다. 자신의 기본적인 생활과 관련된 학교의 여러 규정의 제정 과정에 참여하고 토론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민주시민 교육이다.

그런데 미래의 민주 시민이 될 학생들에게 유엔 아동권리협약과 헌법이 보장한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하는 것이 특정한 정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비판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가? 오히려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편적인 인권을 인정하지 못하는 특정 정치 이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개별적으로 미성숙한 학생들이 존재하지만 그만큼 미성숙한 어른들도 많다. 즉 성숙과 미성숙은 나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경험과 사고의 폭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미성숙한 존재를 성숙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경험과 타인과의 의사소통 훈련을 통해서이다. 그런데, 지금의 학교는 유의미한 경험들을 전화할 수 있는 시도의 기회를 박탈하고 금지함으로써 학생의 성숙을 지연시키고 있다.

이 사회가 학생인권조례를 두려워한다면 그 이유는 학생들의 다양한 시도와 그로 인한 사고의 확장을 인정하는 가운데 대화하고 토론할 자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학생들이 현재 학교의 지도에 반항해왔던 이유는 학생지도 방식이 교사나 학교에 따라 너무나 자의적이고 주관적이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가장 많은 반발을 사왔던 두발 지도의 기준은 ‘학생답게’였고 체벌의 기준은 ‘교육적으로 필요할 때’였다. 이러한 모호한 기준 속에 진행되어온 학생 지도는 지도의 권위를 잃고 폭력만을 남기게 되었고 학생들은 이에 반항하여 지도를 거부하거나 태업하는 형태로 저항해왔던 것이다. 즉 불합리한 지도 관행에 발목을 잡혀 정말 필요한 권위조차 짓밟히게 된 상황인 것이다.

두발 지도의 근본은 타인의 신체적 자유를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체벌의 근본 역시 ‘잘못이 있다면’ 폭력으로 그것을 가르쳐줄 수 있다는 것이다. 경쟁적인 입시 지도의 근본은 ‘나를 위해서라면’ 남을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질서가 일상적으로 작동하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교사들을 존중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힘센 교사들이 학생들의 잘못을 체벌로 다스리듯 자신을 짜증나게 하는 약한 학생들과 심지어 어린 여교사들의 교육적 행위에도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입시에 들어가지 않는 수업 정도는 간단히 무시하는 것이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이라는 걸 일찍부터 알기 때문에 딴짓과 태업을 일삼는 것이다.

학생인권조례가 현 교육에 진정으로 질문하는 것들

지금까지 학교가 권위를 유지해왔던 방식은 피교육자의 기본적인 인권을 제한하는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두발과 용의복장 지도는 아침마다 교문 앞에서 감시의 시선에 학생들의 몸을 조아리게 만들었고 , 체벌은 권력자의 폭력은 합법적일 수 있다는 공권력의 이치를 가르쳐왔다. 학생인권조례는 이러한 철학에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개인의 신체에 대한 권리를 양도받아 관리하는 형식이 교육의 수단이 될 수 있는가?’

‘채찍과 당근이라는 행동주의적 방식이 인간을 진정으로 교육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가?’

‘보호와 참여 중 어느 것이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가?’

‘진정한 권위를 위해 권력은 필요한가?’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의는 사실 이런 토론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렇듯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논의가 지금까지 수월성 교육에 밀려 뒷전이었던 인간과 교육에 대한 물음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고등교육법을 개정하라! – 대학의 비정규직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고등교육법을 개정하라!

-? 대학의 비정규직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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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광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1000일이 넘어간 농성장의 외침

지난 6월 2일로 1000일이 된 농성장이 있다. 고등교육법 개정을 통해 시간강사에 대한 교원자격의 회복을 요구하는 국회 앞 농성장이다. 솔직히 이 농성이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농성이 시작될 당시 17대 국회에는 최순영?이상민?이주호의 3개 법안이 상정되었으나 17대 국회의 종료와 더불어 사장되었다. 나는 일단 농성이 거기서 잠시 쉬었다가 18대 국회가 시작하면서 다시 시작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김동애?김영곤 선생님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농성장을 지금까지 지키고 계신다.

투쟁단위가 있지만 두 선생님을 구체적으로 거론하는 것은 이 농성은 두 선생님이 이어온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요구는 단순하다. 고등교육법 일부 개정을 통해 77년에 박탈된 시간강사의 교원지위를 회복하자는 것이다!

수업의 1/3 이상을 담당하지만 무권리자인 시간강사

개인적으로 대학언저리를 ‘방황’하다보니 시간강사 선후배와 어울릴 기회가 자주 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20학점 넘게 강의하는 선배들에게 ‘강사재벌’이란 자조적인 농담을 한다. 대학 다닐 때 한 학기에 20학점을 따라가기도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 선배들의 전국투어가 얼마나 힘든 길인지 느낄 수 있다.

전봇대를 부여잡고 ‘너는 한 곳에 있기라도 하지’라며 흐느꼈다는 말을 들으면 저절로 분위기가 숙연해진다. 반면에 강의가 적은 선배들의 경우 나마저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래서 학기말과 초에는 어디서 강의를 얼마나 하는지를 묻는 것이 예의가 아닌 예의가 되었다.

박사학위자의 경우 후속연구와 경력차원, 비박사학위자의 경우 논문준비와 강의경험이란 차원에서 보면 시간강사제도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현실은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원래 취지에서 벗어나 오늘날 시간강사는 하나의 직업이며 대학교육의 중요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공개한 ‘2010년도 대학별 시간강사 시간당 강의료 지급단가’에 따르면, 4년제 일반대학 186곳의 시간당 강의료는 평균 3만6천400원이다. 학교별로 보면 시간당 2만원(신경대)부터 6만 4천원(상지대)으로 편차가 매우 심하다. 한나라당 임해규 의원이 공개한 ‘2008학년도 시간강사 현황’에 따르면 2008년도 시간강사 평균 연봉(주당 9시간 기준)은 999만원으로 전임강사 평균연봉인 4123만8000원에 대략 4분의 1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간강사가 담당하는 수업시간은 34%정도에 달한다. 일부 지방대의 경우는 의존도가 심해서 50% 전후를 담당한다. 시간강사가 없다면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을 정도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즉 시간강사는 대학교육의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있지만,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각 교육주체들이나 정부도 많은 노력을 해왔다. 정부는 한국학술진흥재단 등을 통해 각종 연구지원 사업을 펼쳤고, 각 대학도 비정규직 트랙이지만 각종 형태의 교수를 채용하여 시간강사의 부담을 줄이려 노력했다. 그러나 시간강사제도 자체에 대한 대안은 지지부진했다.

포장만 화려한 정부정책

지난 5월 25일 조선대 서모 시간강사가 자살하면서 시간강사의 현황과 제도적 문제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이에 지난 6월 23일 교육과학기술부는 시간강사 지원대책을 발표했다.

핵심은 전업시간강사 가운데 일부를 비정년 강의전담교수로 채용하고, 시간강사료는 전임강사 대비 50%수준까지 인상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첨예한 쟁점인 시간강사의 법적인 교원 지위 회복에 대해서는 전업시간강사 일부를 비정년 강의전담교수로 전환하면서 교원지위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먼저 시행할 것으로 보이는 국립대의 경우 공무원보수규정에 따른 보수와 연금을 적용할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5년 동안 매년 4백 명씩 총 2천명을 채용할 것으로 보이며, 평균연봉은 2천600만원 수준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4대 보험도 적용되어 국립대의 경우 국가가, 사립대의 경우 법인의 사업자부담금을 정부가 지원할 예정이다.

또 국립대의 경우 시간강사료는 5년 이내에 4만3천원에서 단계적으로 8만원까지 인상할 계획이다. 그리고 사립대의 경우 최저 시간강사료를 책정하는 방식으로 강의료 인상을 유도하는 정책을 시행할 예정이다.

일그러진 정부정책에 어그러지게 반응하는 교육주체들

그 동안 나왔던 어떤 정책보다 시간강사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이해당사자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우선 논의를 촉발시킨 대통령 직속 사회통합위원회의 ‘대학 시간강사 대책 소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은 고형일 교수(전남대 교육학)가 “국공립은 물론 사립대학에 편파적으로 이익을 주고, 시간강사뿐만 아닌 대학의 교수요원 전체에 막대한 불이익을 주려는 친대학·반교수·반시간강사의 음모가 있다고 의심케 한다”며 위원장직을 사임하였다.

나아가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과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투쟁본부’ 등 전국 시간강사들이 사회통합위원회의 대책에 대해 ‘땜질식 처방’, ‘또 다른 시간강사 트랙’이라며 거센 반발을 하며 잇달아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전국교수노동조합’, ‘학술단체협의회’ 등의 교수단체들도 사회통합위원회의 대책은 ‘시간제 교원’, ‘반쪽짜리 교원’ 도입이라며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도대체 왜 정부의 정책은 시작하기 전부터 비난을 받을까? ‘한국비정규교수노조’가 지난달 24일 발표한 ‘교육과학기술부는 기만적 미봉책으로 국민을 호도하지 마라!’란 성명서를 보자.

“교과부 대책안 중 비정년 강의전담교수는 전국 국공립대에서 매년 400명을 뽑는다고 하지만 전국에 국공립대가 40여개 있으니 한 학교당 10명 정도 배정되는 셈”이며 “이는 기간제 근무를 하는 비정규직 교수들을 계층화하여 10% 정도만 간택하고 나머지는 현 상태로 내버려 두면서 분할지배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이번 정부의 대책을 국립대부터 시작하려 해도, 강의전담교수 채용비용 외에도 국립대 시간강사료 6만원 인상에 350억원, 4대보험 적용에 365억원, 공동연구실 지원금 300억원 등이 확보되어야 한다. 위 성명서를 보면 “교과부가 내 놓은 강의료 인상안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며 “2001년 4월 24일 대통령 보고 자료에서도 거의 같은 내용의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고 2003년에도, 2007년에도 거의 매년 인상안을 내 놓았지만 관철된 것은 거의 없다”며 정부정책의 실천의지를 의문시했다.

화려한 포장 속에 숨은 원하지 않는 선물

제일 의문시되는 것은 대학의 주요 평가지표인 교원확보율에 강의전담교수를 포함한다는 점이다. 물론 정부는 무분별한 강의전담교수의 확대를 막기 위해 전체전임교원의 10%로 제한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미 겸임교수, 초빙교수, 강의교수 등 다양한 형태로 비전임 교원을 20%까지 인정해주고 있다.

따라서 정부의 정책은 시간강사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한다기 보다는 대학교원 임용의 다변화 전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특히 교육과학기술부가 발표한 강의전담교수는 재임용 기회가 원칙적으로 제한된다. 임용형태는 2~3년마다 계약제로 임용되며, 5년의 범위내에서 계약기간이 연장된다. 사립대가 운영하고 있는 비정년트랙 교원의 경우 재임용 심사 신청권을 갖지만, 강의전담교수의 재임용 기회는 법적으로 제한된다.

물론 개별 시간강사의 경우 강의전담교수 중에 전임교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몇 명이 그럴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이번 정부정책은 시간강사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보다는 정년을 보장하는 전임교원의 10%를 비정년트랙으로 전환하여 교수노동시장 체계를 유연화하려는 목적이 뚜렷한 것이다.

시간강사제도의 첫 단추는 1000일이 넘는 요구에 답하는 것으로!

지난 2004년 국가인권위에서는 시간강사의 처우를 전임 교수에 비례하게 하여 차별을 없애라고 당시 교육인적자원부에 권고했었다. 그러나 당시 교육인적자원부는 재정을 핑계로 이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17대 국회에서 시간강사의 교원화를 골자로 하는 고등교육법 개정안이 발의되었으나 상임위조차 통과하지 못하고 임기 만료로 폐지되었다. 그리고 현 18대 국회에서 다시 2개의 법안(이상민, 김진표 대표발의)이 국회에 제출됐지만 역시 계류 중이다.

여기에 정부도 개정안을 제출했다. 입법취지 중 하나가 교수, 부교수, 조교수, 전임강사로 되어있는 14조(교직원의 구분) 2항에서 전임강사를 조교수로 통합한다는 것이다. 그 사유가 재미있다. “전임강사인 교원의 경우 ‘강사’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어 해당 교원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입법취지를 읽으면서 강사는 교원이 아니라는 정부의 시각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어 씁쓸했다.

‘대학강사교원지위회복과 대학교육정상화 투쟁본부’의 김동애?김영곤 선생님은 77년에 삭제된 고등교육법상 시간강사의 교원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1000일이 넘게 농성을 하고 계신다. 고등교육법상의 교원지위가 시간강사제도 문제점을 해소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에 강사료를 올리고, 시간강사의 일부를 비정년트랙 교원으로 채용하는 것으로 시간강사제도의 문제점을 해소하는 것도 아니다. 현실적으로 전자의 경우 대학 당국과 교수들의 반발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더 어려운 길이다.

그럼에도 김동애?김영곤 선생님의 투쟁을 지지하는 것은 시간강사가 ‘보따리 장사꾼’이 아니라 하나의 직업이 되었으며 대학교육의 중요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강사의 교원지위 회복은 잃어버린 권리를 되찾는 것임과 동시에 우리 대학현실을 인정하는 것이며, 시간강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첫 단추이다.

 

 

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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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재유 (건국대 강사)

대학 시간 강사 제도 발생과 재생산의 구조적 원인

?대한민국 건국 초에 대학강사와 교수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1949년의「교육법」제73조에(서) 교원은 ‘학생을 직접 지도?교육하는 자’였고, 제75조에(서) ‘대학 교원으로 총?학장, 교수, 부교수, 강사, 조교를 둔다’고 되어 있어 강사는 교원이자 교육공무원에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통성 없이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정권이 비판적 지식인의 언로를 통제할 수 있는 ‘절대반지’를 손에 쥐자 대학강사의 지위는 급락하였다.

1962년, 박정희 정권은 「국?공립대학및전문대학강사료지급규정」을 만들어 그 제3조2항에서 ‘시간강사료는 시간강의를 담당한 자에게 실지로 강의한 시간 수에 의하여 지급한다’는 시간당 강의료 지급 근거를 설치하였다. 1963년에는 「교육공무원법」제27조를 손질하여 교육공무원에 드는 강사의 범위는 예전대로 두었지만 총?학장이 임면하는 강사를 전임강사로 국한시켰다. 10월 유신이 단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72년 12월 16일에는 「교육공무원법」의 교육공무원 정의에 전임강사란 단서를 달아버렸다.

마침내 1977년 12월 31일, 「교육법」 제75조에서 ‘교원에 포함되었던 강사를 전임강사로 바꾸어 버려 강사들의 교원지위를 박탈’하였다(홍영경, 2003). 지식인을 통제하려는 최고 권력자의 야욕이 오늘날의 시간강사 문제를 야기시킨 것이다. 1980년대에 집권했던 전두환?노태우 군부 정권은 국민들의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고자 대학과 대학생의 수를 대폭 늘렸다. 이 과정에서 전임교원을 별로 충원하지 않아도 대학을 운영할 수 있게 해 주어 오늘날 부실 대학의 초석을 확고히 다져 주었다.

**이상은 2007년 8월 23일 국회 정책 토론회 자료집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문민 정부와 국민의 정부 기간 동안 대학 교육 개혁이 화두로 제기되며 무수한 개혁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무 것도 없었다. 새로 들어온 참여 정부 또한 또 다른 대학 교육 개혁을 시행했다. 그러나 겉모양만 바꾸면서 기존의 방식 그대로 시행되거나 근본적인 사항을 고치지 않은 채, 대학 개혁 정책이 시행될 때 그것은 또 다른 교육 ‘개악’이 될 뿐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대학 부문에서는 대학 강사 및 비정규 교수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교육 개혁은 고사하고, 대학 교육의 정상화도 가능하지 않다.

오늘날 대학 강사 및 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문제는 크게 몇 가지 문제로 이야기될 수 있다. 먼저, 대학 강사와 비정규직 교수들이 대학 강의의 절반 이상을 담당한 지가 오래되었지만, 강의 여건이 거의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가 비정규직 교수의 임금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도 힘들만큼 열악하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교수의 한 달 임금은 평균 80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규직 교수와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정도의 차이가 나는 수준이다.

사실상, 정규직 교수와 강사와 비정규직 교수는 동일한 자격을 가지고 동일한 노동을 하지만, 사회적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교수 사이의 차이는 극심하다. 예를 들면, 정규직 교수(전임 교수)는 금융 기관의 신용도가 A등급이며, 온갖 사회 보장이 되어 있고, 안정적인 연구와 교육이 가능하다.

그러나 강사 및 비정규직 교수(비전임 교수)는 금융기관의 신용은 無이며, 온갖 사회 보장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으며(기본적인 4대 보험만이라도 적용해 달라는 것이 비정규직 교수들의 바람이다), 안정적인 연구와 교육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비정규직 교수들이 전임 교수를 지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무리를 해서라도 교수가 되고자 하고, 채용 비리가 없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비리와 같은 부당함이 당연시되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사회에 나가서도 사회의 부당함과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이 정의가 숨쉬는 곳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대학 강사 및 비정규직 교수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세 번째는 비정규직 교수의 신분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비정규직 교수는 ‘교원 노동자로서의 법적 신분’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 7조에 따르면 시간 강사를 단지 “교육 과정의 운영상 필요한 자”로서 일용 잡급직의 한 형태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4대 사회 보장 보험 적용 대상에서도 빠져 있다.

헌법에서 교원들의 지위에 대해 법률로 정하도록 한 것은 교원들의 신분이 안정되어야 보다 좋은 교육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 강의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지위를 전혀 부여하지 않는 것은 대학 교육을 방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대학 강사 및 비정규직 대학 교수들에게 ‘교원 근로자로서의 법적 지위’를 하루 빨리 부여해야 한다.

네 번째는 이러한 것들로부터 발생하는 문제이다. 즉 학생들의 학습권이 엄청나게 침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 교육의 절반 이상(평균치:53% 정도)을 담당하고 있는 비정규직 교수들이 자신의 생존 문제에 얽매이게 될 때, 학생들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됨으로써 학생들의 의문을 제때 풀어주지 못하여, 학생들의 학습 의욕을 상당히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교수들은 대학 교육의 한 주체이면서도 능동적으로 대학 교육에 참여하지 못하고 강의만 할 뿐, 교육 과정을 설계하고 입안하는 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학생 지도와 상담을 사실상 할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학 교육을 담당하는 한 사람으로서 상당히 가슴 아픈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섯 번째는 신분상의 불안정과 경제적 어려움이 연구와 교육에 집중하는 것을 힘들게 하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교육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전반적으로 대학 교육의 질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어처구니없게도 이 사회의 모토라고 할 수 있는 ‘경쟁력 강화’에 위배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교육 개방이 이루어지면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뜻 있는 비정규직 교수들은 ‘한국비정규직교수 노동조합’을 만들어 힘을 모으고 있다. 한국비정규직대학교수노동조합(이하 비정규직교수노조)은 1인 시위 및 집회, 정규직 교수 단체와 연대투쟁, 국회 토론회 참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 언론매체와 인터뷰, 기고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7만 대학강사들이 대학교육의 절반 이상을 맡아 실질적으로 교원의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이를 인정받지 못한 채 온갖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실태를 적극적으로 알려 나갔다).

이와 함께 강사의 법적 교원 지위 부여 및 강사의 처우개선 대책을 해당 정부부처에 끈질기게 요구함으로써 40년 이상 방치된 대학강사의 문제를 그들이 이제는 더 이상 방관하거나 서로 책임을 전가할 수 없도록 여론을 조성하였다.

먼저 강사 문제의 1차적인 해결은 강사들이 자신의 역할과 능력에 걸맞게 법으로 교원근로자임을 보장받는 것이다. 이러한 법적인 보장을 통해서 다음 표와 같이 강사를 비롯한 비정규직 교수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비전임교원 제도 문제의 해결 수준]

 

다른 한편 학생들의 수업권 강화에 힘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수업권 강화는 강사들과 비정규직 교수들의 노동 조건 개선, 생존과 유기적이고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100명이 넘는 대형 강의실에서의 강의는 거의 일방적인 강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설사 토론식 수업이 이루어져도, 그 수업에 참여하는 인원은 소수의 학생들뿐이기 때문에, 나머지 학생들은 단순히 구경꾼으로만 전락하게 될 수밖에 없다.

수업은 모든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수업 인원 수가 줄어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학생들이 수업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며,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수업 시간에 능동적으로 체험하고 학습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대학이 민주 시민을 양성해 낸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어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학문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대학 본연의 모습을 가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것은 곧 강사들과 비정규직의 노동 조건 개선과 생존의 보장을 위한 교원의 법적 지위 쟁취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될 수 있다.

하나의 수업 당 학생 수가 줄어든다는 것은 강좌 수가 그만큼 늘어난다는 것이며, 늘어나는 강좌 수만큼의 임금이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자면, 임금의 증대는 곧 대학으로 하여금 정규직과 비슷한 임금을 주면서 법정 교원 수에 포함되지 않는 강사를 교원으로 인정하여 한 교수 당 학생 인원 수 비율을 낮춤으로써 교육인적자원부의 지원을 더 많이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한편으로,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게끔 하여, 자신들의 개성을 드러내는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교육자들의 임무이자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곧 대학의 학문의 발전을 가져오게 될 것이며, 따라서 연구자와 교육자의 연구 역량을 배가시킬 수 있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대학 본연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자리를 잡게 될 것이며, 이는 동시에 교육자들의 목적이자 권리를 쟁취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각 수강 과목이 어떤 관련성도 없이 개별화되어 있는 것을 각 수강 과목이 보다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게끔 수강 과목들 사이의 교류화(inter-discipline)를 꾀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학생들은 보다 폭넓은 안목을 가지게 되고, 그리하여 보다 많은 논의와 연대의 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대학교의 모든 공간이나 시설들은 학생들의 자치적인 학술 활동에 맞춰지게 될 것이며,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사람을 만나려고 하며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며 만들어가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그들은 그들의 삶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학습의 목록을 만들고, 서로 의견을 교환한 후에 적정한 학습 커리큘럼을 짠다. 그리고 그 커리큘럼에 따라 서로가 서로에게 교육한다. 그리고 그 커리큘럼의 내용을 풍부하고 새롭게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들은 일정 기간 학습하고 교육한 성과물을 다른 사람에게 발표하고,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 비판은 곧 자기 자신들의 삶에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삶의 시야를 넓혀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삶의 경이로움을 배운다.

그들의 학습, 교육의 장은 하나의 과나 단대를 넘어서서 대학 전체 차원으로 넓혀 간다. 그래서 그들은 일 주일 정도 학술 포럼 축제를 벌인다. 그 기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에서 먹고, 자고, 논쟁하고 토론하며 그들의 삶을 즐긴다. 매년마다 학술 포럼의 주제를 정해 모든 학회나 소모임, 동아리들은 그 주제에 맞게 학습하고 교육하여 학술 포럼 축제 때 자신들의 역량을 내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학술 포럼 축제의 실질적인 주체가 되어 연대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될 것이며, 스스로 자기 삶의 주체임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학술 포럼 축제를 전국적인 차원으로, 그리고 세계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켜 나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세계화일 것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비정규직의 권익 옹호와 대학 교육의 민주화,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역사는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다.

우리의 권리를 스스로 쟁취하기 위한 어렵고 힘든 길을 가는 비정규직 교수들에게 정규직 교수님들의 따뜻한 격려와 연대의 지지를 간곡하게 바란다. 비정규직 교수들은 대체로 정규직 교수님들의 후학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생 여러분들의 따뜻한 격려와 힘찬 연대의 지지를 너무나도 간절히 바란다. 학생 여러분들은 대학 교육의 다른 한 주체이자, 앞으로 노동자가 될 소중한 동지들이기 때문이다.

 

난청환자 정부와 대학의 파리아들 – 대학의 비정규직 교수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난청환자 정부와 대학의 파리아들

– 대학의 비정규직 교수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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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종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

소음성 난청 환자인 정부

6월 14일 ‘사커시티’에서 개막한 남아공 월드컵에는 ‘부부젤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커시티’가 위치한 요하네스버그의 남서쪽 타운십(South West Townships, 약자 Soweto)은 흑인 집단거주지로서 이번 월드컵의 개막전과 폐막식이 열리는 곳이다.

그런데 1976년 6월16일, 같은 장소에서 ‘부부젤라’대신 총성이 울려 퍼졌다. 당시에 강제적 언어정책에 반대하던 학생들과 대치하고 있던 것은 흑인을 물도록 훈련받은 개와 무장한 백인 경찰들이었다. 그 속에서 13살의 헥터 피터슨이 사살되었다. 피터슨을 죽였던 총소리는 월드컵 기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려 퍼지는 ‘부부젤라’에 묻히고 말았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대표팀이 탈락하기 전까지 월드컵의 ‘부부젤라’ 소리가 우리의 삶 곳곳에서도 날마다 울려 퍼지고 있었다. 청력이 좋은 사람은 40만 가지의 소리를 구별해낸다고 한다. 그런데 현 정권은 4대강 삽질의 소음에 너무나 장시간 노출된 탓에 청각기관의 세포가 손상되었는지 난청 환자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정부가 40만 가지의 소리를 듣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안타까운 일은 난청 환자가 되어 버린 정부가 이제 사람의 소리조차도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뜩이나 난청환자인 정부가 언론 정책까지 정부의 입맛대로 재편함으로써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길조차 막아서고 있다. 다시 말해서, 4대강 삽질의 ‘부부젤라’ 소리에 이미 난청환자가 되어버린 정부가 MBC 장악, KBS 수신료인상 등을 통해 언론까지 장악함으로써 아예 귀를 막아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부와 자본은 각기 나름대로의 ‘부부젤라’를 불어댄다. 그 속에서 이 땅의 ‘노동자이면서 노동자 아닌 존재들’의 외침 또한 ‘부부젤라’의 소리에 가려져 버렸다. 현 정부는 국민의 그 어떤 목소리와도 소통하지 않고 ‘단절젤라’를 불고 있다. ‘2010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서 정부는 올해의 경제성장률이 5.8%에 달할 것이며 150억 달러의 흑자를 낼 전망이라는 나팔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면서 이명박 대통령은 6월14일 대국민 연설에서 6.2 지방 선거를 통해 드러난 4대강 사업에 대한 국민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4대강 사업은 “하루라도 빨리 투자를 시작해야 하는 기업들에게도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며 “4대강 살리기는 미래를 위한 투자이지만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몇 년 뒤면 그 성과를 볼 수 있는 사업”이라고 하였다. 여전히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필연적으로 ‘수난당하는 자들’을 확산시킬 뿐이다. 그런데 마치 정부의 정책에 맞장구치듯이, 6.18일 경영계는 최저임금 10원 인상이라는 ‘십원젤라’로 추임새를 넣었다.

이러한 것이 MB말하듯 “대한민국은 지금 올바른 길로 가고”있는 것인가? 접입가경이다. 또한 서울 양천경찰서에서는 피의자에 대한 소위 ‘통닭구이’, ‘날개 꺾기’라는 고문이 자행됐음이 밝혀졌다. 영화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고문의 추억’이다. 공포의 정치이다. 이들이 불어대는 것이 싸구려 중국산 ‘부부젤라’이기 때문인지 그 소음은 국민의 삶에 더욱 견디기 힘든 소음으로 들려온다.

정부는 공포의 정치를 동반하면서 사회적 양극화를 부채질하고 있다. 자유주의의 주창자인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의 삶에서 ‘죽음의 손’으로 되살아난 듯하다. 최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한국전쟁 60주년 특별기획전 ‘아! 6.25’에서 2000원을 내면 ‘발칸 사격 체험장’에 참가할 수 있다고 한다. 최근의 상황을 보편서, 그 총부리가 우리들을 겨누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섬뜩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대학의 파리아(Paria)

복지의 축소와 노동의 유연화로 집약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이 ‘죽음의 손’은 소외받고 가난한 이들의 목줄을 옥죄고 있다. 그리고 난청환자가 되버린 정부는 대학 시간강사들의 죽음의 소리, 대학 내 청소용역 노동자들의 질곡의 외침을 듣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비정규 교수’이면서 교원이 아니고 고등교육법 적용 대상이므로 비정규직 노동자도 아니다. 또한 대학의 청소용역 노동자들 역시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니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닌 것이다. 정부는 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죽음의 낭떠러지로 몰아붙이며 ‘배제젤라’를 힘껏 불어대고 있을 뿐이다.

약 7만 명의 시간 강사 중 대학 강의의 약 절반가량을 담당하는 80%는 평균 주 4.2시간의 강의로 월 평균 40만 6,000원의 강의료를 받는다고 한다. 또한 대학 내 미화노동자는 파견근로법 시행 이후 하청업체의 소속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로 생활하면서 점심 값을 위해 폐지를 주워 생활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이 바로 사회의 최하층을 형성하고 있는 파리아(Paria)이다.

파리아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원래 이 말은 힌두교의 카스트 계급제도에서 그 모든 계급 보다 아래에 속하는 하층민들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한다. 노동하며 살아가지만 노동자 계급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대학 내에서의 ‘노동자 아닌 노동자들’이 우리 삶의 ‘파리아’인 것이다. 파리아가 인도에서 길거리 청소, 구식 화장실 변 처리를 하듯이 미화노동자들도 학교에서 같은 일을 하는 가난한 노동자들이다.

결국 “이들의 삶의 형태가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니다.” 라는 것은 ‘모순’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모순의 형식은 ‘A는 B이면서 동시에 非B이다.’로 표현할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모순을 규정하는 핵심이 무엇인가이다. 자본과 노동처럼 양 극단에 있으면서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부정하는 것들 사이의 관계만을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양 극단의 존재가 부정하지 않는 관계에 있는 것은 모순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정규직 노동자’라는 말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 극인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말을 필요로 하지만 정규직 노동자는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관계가 갈등의 관계에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순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난청환자의 치료를 위하여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개인적 단자로 만들어 연대의 힘을 파괴할 뿐이다. 과거 남아프리카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이라는 인종분리정책을 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마땅히 생존을 보장받아야만 하는 국민이지만 국민이 아닌 국민을 만들어내는 ‘국민분리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 배제의 정책 속에서 버림받은 자들 중 하나가 대학의 파리아들이다.

이러한 배제의 정책 속에 내재하는 현실의 실재적 대립, 그 모순의 핵심에는 노동과 자본이 자리하고 있다. 모순을 자본과 노동으로 파악할 때만이 노동이 적대성을 띠어야 할 대상이 자본임을 파악할 수 있다. 결국 자본 앞에서 우리 모두는 노동자계급일 뿐이다. 이러한 적대성을 상실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적대성 속에서 노동자로서의 권리 쟁취라는 보편적 이념을 견지하면서 현재의 상황을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탈락하기 전까지 연일 월드컵 응원의 광고로 “Shouting korea”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현실에서 Shouting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비판의 외침이 그것이다. 한나라당은 참여연대의 천안함 사건의 안보리 검토 요구에 대해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려 한다. 또한 국무총리실의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이명박의 BBK사건을 블러그에 올린 민간인을 불법 사찰했다. 이들은 ‘처벌벨라’를 불어댄다.

난청환자인 정부와 한나라당의 귀에도 희한하게도 ‘비판의 외침’은 잘 들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이 여전히 인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난청환자들이기 때문에 치료가 필요하다. 난청을 치료하는 방법은 소음을 줄이는 것이다. 줄여야할 소음은 국토를 가득채운 삽질의 소음, 자본의 수탈의 굉음이다. 이것이 난청환자가 되어버린 정부가 치료받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이러한 처방전은 효과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난청을 치료하는 다른 한 가지는 약물 치료를 하는 것이라 한다.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민중의 외침에 귀 막아버린 권력에게 약물은 역설적으로 인민의 외침밖에 없다. 대학의 파리아들, 이들은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닌 존재이다. 이러한 모순의 규정자는 노동과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자본이다. 그런데 자본은 노동 없이 증식할 수 없다. 마치 식중독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세균과 달리 감염력이 뛰어나지만 자체 증식이 불가능해서 반드시 숙주가 있어야 증식·전파할 수 있듯이 말이다.

생명의 유지를 위해서는 건강한 세포와 암세포의 모순 사이에서 건강한 세포를 죽이지 않기 위해 암세포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학에서 버림받은 파리아들은 죽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을 파리아로 만든 존재가 바로 암세포이며 죽여야할 존재이다.

결국 자본 앞에서 우리는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불안정한 노동자일 뿐이다. 모든 저항의 힘은 결핍에서 온다. 노동자이지만 실질적인 노동자가 아닌 ‘결핍’, 그 ‘결핍’을 메우는 길 위에 우리 모두는 함께 서 있을 뿐이다.

 

성미산과 홍익학원 간의 이해 상충과 공생의 길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성미산과 홍익학원 간의 이해 상충과 공생의 길

글: 홍영두 (건국대 학술교수)

* 이 글은 마포구의 지역 현안 문제인 성미산을 둘러싼 홍익학원측과 성미산 주민들간의 이해관심의 충돌을 해결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하여 쓴 것이다.

마포구 유일의 자연숲 성미산

마포구 성산동에 자리잡고 있는 성미산은 언덕이라고 불릴만한 작고 낮은 산이다. 그렇지만 성미산은 북한산에서 한강으로 이어지는 생태 축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2001년 생태보전시민모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미산 지역 대부분이 서울시가 구분한 비오톱(biotop, 야생 동식물의 안정된 서식지 즉 자연생태계가 기능하는 공간) 등급 중 “대상지 전체지역에 대하여 자연보호가치가 있는” 1등급에 해당된다고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성미산에는 천연기념물인 붉은배새매와 서울시가 지정·고시한 보호종인 오색딱다구리를 비롯해 박새, 꾀꼬리, 족제비 등이 서식하고 있다. 그래서 2009년에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주관한 “꼭 지켜야 할 자연유산 – 이곳만은 꼭 지키자” 시민공모에 보존대상지로 선정되어 산림청장상을 받기도 했다.

성미산은 성산동 및 주변 인근 지역의 남녀노소가 아침 저녁으로 운동하는 곳이자 쉼터이며 어린이들의 놀이터이자 어린이집 아이들이 매일 오전마다 체험하는 생태학습장이다. 그래서 성산동 및 주변 지역 주민들은 홍익학원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땅까지 포함하여 성미산 전체를 자연숲 그대로 보존하여 생태공원화하자고 서울시에 요구해 왔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주민의 요구가 관철되기 어려울 성 싶다.

성미산은 2000년 이후 몇 번의 위기를 겪었지만 주민들의 슬기로운 대처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2001년부터 주민들의 성미산 지키기 운동은 개시되었다. 이 운동은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가 성미산을 기습 벌목하며 성미산 정상부에 ‘배수지(수돗물 수압을 높이기 위한 거대한 물탱크)’를 건설하려고 나섰던 2003년, 주민들의 단결된 힘으로 배수지 공사를 막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다른 한편, 서울시의 배수지 공사와 맞물려 성미산 남사면 일대의 사유지를 둘러싼 끊임없는 개발 욕구가 분출되었다. 정상부를 제외한 성미산 대부분의 땅은 한양재단 소유였다. 한양재단은 서울시의 배수지 공사를 계기로 삼아 남사면 일대에 아파트 개발을 꾀했다. 하지만 배수지 공사 자체가 주민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자 한양재단은 2006년 8월경 성미산부지 대부분을 중견 건설업체 두 곳에 매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웅상사 등 건설사들은 한양학원으로부터 소유권 이전등기를 한 바로 그날(2006년 11월 28일) 몇 시간의 시간차이를 두고 홍익학원에 되팔았다.

2007년 홍익학원은 성미산으로 홍대 부속 초중고를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전 계획이 발표되자마자 성미산을 지키고자 하는 마을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가 뒤따랐다. 주민 만명 이상이 학교 이전 반대와 생태공원화를 요구하는 서명에 참여했다.

그 결과 2008년 6월 27일 서울시는 성미산 체육시설부지를 학교시설로 변경해달라는 홍익학원의 요청을 마포구로 되돌려 보내며 재검토를 요구했다. 그 당시 서울시 자문기구인 녹색서울시민위원회(공동위원장 오세훈, 윤준하 등)는 성미산을 자연숲 그대로 보전하는 생태공원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결정을 했고, 학교부지 문제는 여러 기관들이 지혜를 모아 슬기롭게 대안을 모색해보자고 제안했다. 위원회는 이런 취지의 공문까지 발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지난 3여 년간 성미산을 지키고자 희구한 주민들의 반대 때문에 홍익학원은 홍익대 사범대학 부속 초중고의 이전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다.

성미산 남사면 일대를 파괴하기 시작한 홍익학원

그러나 현재 성미산 남사면 일대는 홍익학원의 신축공사 때문에 생태환경 파괴의 위기에 노출돼 있다. 홍익학원은 6·2 지방선거가 진행중이었던 지난 5월 20일 서울시 교육청으로부터 기습적으로 건축허가를 받아 냈고 5월 28일 공사 착공에 들어갔다.

홍익학원 시공사 쌍용건설의 포클레인은 주민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1주일 동안 쓰레기만 치우다가 드디어 6월 8일 성미산에 들어와 평탄화 작업을 위해 언덕을 깎기 시작했다. 그 결과 10여 그루의 나무가 뿌리째 뽑혀 쓰러졌다. 그래도 그만한 상태에 그친 것은 성미산 주민 50여명이 나무가 쓰러진 지점 바로 위에 성미산대책위 비상행동 텐트를 아슬아슬하게 치고 포클레인을 온몸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현재 성미산대책위 텐트는 포클레인에 의한 성미산 파괴를 저지하기 위해 홍익학원의 포클레인 및 관련 당사자들과 대치중이다.

10여 그루의 나무가 쓰러진 그날부터 성미산 생태계의 교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성미산 산새들이 온종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성미산을 파헤치자 들쥐들이 동네 집집으로 도망해 숨어들기 시작했다. 6월 13일부터 홍익학원측은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성미산 남사면 일대를 철망으로 둘러쳤다. 마을 주민들은 이 철망이 나무에 상처를 입히고 성미산 생태계의 순환을 방해할 것을 걱정하고 있다. 홍익 초중고가 들어설 자리는 원시림을 방불케 할 정도로 생태적 보존 가치가 높은 아름다운 자연숲이 형성되어 있는데, 신축공사 때문에 자연숲이 완전히 사라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신축공사가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면적상으로도 성미산의 약 4분의 1이 사라질 것이며, 성미산 일대에 흩어져 있는 홍익학원 소유의 남은 땅까지 암암리에 개발된다면 성미산은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 여하튼 성미산을 지키기 위한 마을 주민들의 지난 9년간 피눈물나는 노력은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될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성미산과 홍익학원 간의 갈등은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인가?

현재의 대립 상황은 성미산을 지키고자 하는 주민 비상대책위와 신축공사를 강행하고자 하는 홍익학원측 간의 이해관심이 충돌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같은 이해관심의 충돌을 피하고 양자의 이해관심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해법은 없을까?

홍익학원측은 성미산을 지키고자 하는 주민 비상대책위원회를 불의와 불법의 단체로 규정하고 있을 뿐, 성미산 주민 및 공사현장 바로 옆에 위치한 성서초등학교 학부모와 공사중 뒤따르는 위험과 안전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협의도 거부하고 있다. 홍익학원측은 공사현장과 바로 맞닿아 있는 도로 및 자전거도로를 통해 통학하는 인근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안전 문제에 대해서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홍익학원측은 신축공사를 강행하겠다는 의지만 표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의지 표명의 근거는 서울시 교육청으로부터 건축허가를 받아 냈다는 것이다. 건축허가의 근거는 1) 홍익학원이 성미산 남사면 일대에 대해서 소유권을 갖는다는 점, 2) 홍익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열악한 교육 환경 및 건전하지 못한 주변 여건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성미산 비상대책위와 홍익학원이 갈등을 빚는 대립 지점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야 해결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립 지점은 2)가 아니라 1)이다. 성미산 대책위도 홍익 초중고등학생들의 학습권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립 지점이 ‘홍익학원이 성미산 남사면 일대에 대해 갖는 소유권’과 ‘성미산의 고통을 대변하는 주민의 이해관심’ 간의 충돌에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홍익학원측은 성미산 대책위가 학생들의 학습권을 무시하는 듯 허위 선전을 하고 있다. 성미산을 파괴하는 신축공사를 반대하는 대책위의 행위가 학생들의 학습권을 무시하는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목적과 수단은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홍익학원측이 목적과 수단을 슬쩍 바꿔치기하여 주민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주민들간의 반목을 조장하고 있다.

홍익학원측의 의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여 신축공사의 목적이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그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은 성미산을 파괴하는 신축공사일 것이다. 성미산 대책위는 홍익학원측이 표방하는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 수단적 행위인 건축공사를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정당한 목적을 가진 행위라고 하더라도 그 수단이 정당하지 못하다면 그 수단은 재고되어야 한다.

신축공사로 인한 성미산의 생태환경 파괴의 위기, 학생들의 통학안전권 확보 미흡, 신축공사 후 발생할 초등학생들간의 위화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성미산을 파괴하는 신축공사 행위는 정당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홍익학원은 홍익 초중고의 이전을 위한 신축 공사를 즉각 중지해야 한다.

홍익학원측은 학생들의 학습권 보장이라고 하는 교육 공익성의 가면을 쓰고서 자연숲 성미산을 사라지게 만드는 신축공사의 비공익적 행위를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익학원측은 비공익적 신축공사를 교육의 공익성이라는 가면 속에 포장하려고 획책해 왔다. 이 같은 홍익학원측의 태도가 얼마나 비교육적인지 잘 알 수 있다.

홍익부속여자중학교장은 성미산을 파괴하는 신축공사 행위에 대한 주민들의 동의를 강요하면서 ‘친환경 명품학교’를 건축하겠다는 이율배반적 언명을 서슴지 않고 있다.(2010. 6. 14. 홍익여자중학교장 명의의 유인물 참고) 교장의 말씀은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의 실용주의 노선과 일치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학교의 교장이 어떻게 이토록 비생태적이며 반환경적인 주장을 스스럼없이 행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학생들의 학습권은 어떻게 존중되어야 할까? 홍익학원측은 홍익 초중고의 이전을 위한 대체부지를 평지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홍익 초중고 학생들의 학습권과 자연숲 성미산의 보존은 공생할 수 있다. 대체부지는 당인리 화력발전소, 구 마포구청, 상암동 등지에서 마련될 수 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홍익학원의 저의는 무엇일까?

홍익학원이 진정 참다운 교육사업을 지향하고자 한다면, 학생들의 학습권과 생태환경권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홍익학원측은 대체부지 확보를 위해 서울시 교육청과 서울시청에 건의서라도 제출해야 했을 것이다. 홍익학원이 그랬던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만약 건의서조차 제출한 적이 없다면, 홍익학원측의 신축공사 목적은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미산 남사면 일대에 대한 소유권 행사를 통한 사적 이익 추구에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홍익학원의 모습은 자본주의적 기업들의 사적 이익 추구욕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홍익학원은 교육의 공익성을 재성찰해야 하겠다.

우리는 인류가 파괴해온 자연 환경이 오늘날 인간과 사회에 복수하고 있는 점을 뼈저린 교훈으로 되새기고 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지구상에서 살아가야 할 인류의 시간을 걱정하며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중요한 윤리 덕목으로 교육하고 있다. 이 말은 성미산에도 해당된다. 한번 무너진 성미산은 다시 원상태로 회복 불가능하다.

홍익학원측은 생태환경의 가치가 그 어떤 가격도 매길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있는지 묻고 싶다. 이 점을 자각하지 못한 채 학생들의 학습권을 앞세우는 것은 후안무치한 태도다.

홍익학원측이 성미산 남사면 일대에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적 소유권의 행사는 정의로워야 한다. 오늘날까지 영리추구를 위해 자연환경을 파괴해 왔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기업들이 자연환경 파괴에 대해 그 어떤 대가도, 그 어떤 환경비용도 치루지 않고 공짜로 생태환경을 이용해 왔던 사실은 오늘날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고 있다. 이 교훈에 따르면 홍익학원측은 성미산에 홍익초중고 이전을 통해 막대한 환경 파괴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성미산을 공짜로 이용하고자 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성미산 남사면 일대의 천연숲은 개인의 소유권만을 지상의 가치로 여기는 소유 개인주의의 희생물이 더 이상 되어서는 안 되는 공유지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 곳은 어린이들이 생태환경의 중요성을 체험하는 생태학습장이다. 공익성이 강한 교육 공간을 황폐화시키면서 친환경적인 명품학교를 건축하겠다는 발상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임을 홍익학원측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파괴한 환경 비용을 오늘날 개발도상국들에게 전가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홍익학원도 이 잘못을 범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홍익학원은 성미산 개발에 따른 환경 파괴 비용을 얼마 있지 않아 성미산 주민에게 고스란히 전가할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사적 소유권의 행사가 생태환경적 가치의 보존이라고 하는 공익과 충돌을 빚을 경우 그 사적 소유권의 행사는 중지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진행중인 홍익학원측의 신축공사는 즉각 중지되어야 마땅하다.

홍익학원이 성미산 남사면 일대를 사들인 580억은 성미산 파괴 때문에 생기는 환경비용을 상쇄할 수 있는 금액인가? 580억 가지고서는 홍익학원측이 파괴할 성미산 남사면 일대의 자연환경적 가치를 회복할 수 없다. 홍익학원측은 자신이 주장할 수 있는 소유권 이상으로 막대한 환경 피해 비용을 증가시키고 있다.?

홍익학원측의 580억은 성미산 남사면 일대를 간직하고 보존할 수 있는 권리, 말 그대로의 소유권일 뿐이다. 홍익학원측이 파괴시킬 자연숲을 복구하는 비용은 1000억을 넘는 비용, 자연숲은 금액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다. 뭇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해야 할 성미산을 착취하고 환경 파괴를 자행하면서까지 친환경 명품학교를 건축겠다는 발상은 소유 개인주의의 발로다. 이런 행태는 사학재단이 영리 추구를 위해 교육사업을 행한다는 세간의 비판과 맞물려 있음을 우리 모두 직시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반환경적 성격을 갖고 있다.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들은 인간을 착취하는 전 세계 체제를 유지해 왔듯이 지구의 자원도 약탈해 왔으며, 오늘날 생태 환경 위기의 대명사인 지구온난화 문제를 일으킨 주범이다. 지구온난화 문제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환경 오염 비용을 물지 않고 자연 환경을 파괴한 결과다.

홍익학원이 자연환경 파괴의 비용에 대해서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고 건축 공사를 감행하고자 하는 행위는 바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자원 약탈 행위 및 환경 비용의 약탈과 동일한 종류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환경영향 평가를 무시하고 교육을 빌미로 영리를 추구하는 것은, 홍익 재단이 이미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홍익학원은 자본의 폭력성을 교육 현장에서 재현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자연 환경과 인간 사회 간의 공생은 생태 환경 교육의 중요한 주제로 이슈화되어 있다.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사회적 신진대사야말로 생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근본 처방이다. 그러나 자본 축적의 논리가 이 처방을 방해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생태 환경의 공익성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도 모자랄 판에 사학재단이 마포구 유일의 자연 숲을 훼손하면서까지 교육 시설을 건축하겠다는 발상은 비교육적이며 비공공적이다.

학생들의 학습권을 핑계로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은 기만이다. 미래 세대의 자원인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 홍익 재단이 미래 세대를 교육할 수 있는 자질과 소양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홍익학원은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홍익학원은 그 이름에 걸맞은 행위를 하지 못하고 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은 건국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온 교육 이념이다. 그 뜻은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홍익학원은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

서울시 교육감과 서울 시장에게 바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번에 새로 선출된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은 서울시 교육감 권한대행이 지방선거 이전에 결정한 홍익학원 시설계획 변경 승인과 건축 허가를 재심의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서울시 교육감은 즉각 신축공사 중지를 명령해야 한다. 그리고 서울 시장과 함께 홍익학원의 사범대 부속 초중고를 이전하기 위한 대체부지 마련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통해 성미산 남사면 일대의 자연환경적 가치를 보존함과 동시에 홍익 초중고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홍익학원의 신축 공사 중지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성미산과 그 주민들만의 것이 아니다. 성서초등학교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성서초등학교는 홍익초중고가 들어설 자리와 맞붙어 있는 학교다. 이 학교 학부모들도 홍익학원의 학교 건축계획안을 검토 후 학생들의 통학로 안전권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하여, 지난 2월 말에 학부모 비상대책위를 꾸려 활동해 왔다.

이러한 성서초교 학부모들의 반대와 마포구청의 재협의 요구로 서울시교육청은 홍익학원에 건축계획안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홍익학원은 건축계획안을 수정 제출하였으나, 학부모 비상대책위는 이 수정안 역시 통학 안전권이 보장되지 않는다 하여 반대하였다.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자전거도로와 통학로에 등하교 시간 차량 출입이 극심할 것으로 예측되는 두 개의 차량 출입구가 생기는 것은 학생들의 안전에 위협을 준다는 이유 때문이다. 더욱이 홍익 초중고의 정문을 성서초등학교 앞 왕복3차로의 좁은 도로편에 내겠다고 계획이 잡혀 있는데, 이는 아이들의 자전거 통학 및 도보상의 안전을 완전히 무시한 폭력이다.

그리고 공사 진행중에 발생하는 소음과 먼지는 홍익학원의 학교부지와 맞닿아 있는 성서초등학교 아이들의 학습권 및 환경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홍익학원이 주장하는 홍익학원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는 것은 바로 성서초등학교 아이들의 학습권 침해를 필연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는 이해 상충을 낳고 있다.

홍익 초중고 학생들은 현재 위치한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새 건물이 세워지면 이사하는 정도에 그치기 때문에 학습권 침해는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학습권의 공백도 없다.

그에 비해 성서초등학교 아이들은 공사가 진행되는 1년 6개월 동안 거의 학습권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어느 한 편의 권리의 보장이 다른 한 편의 일방적인 권리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형평성 없는 교육 행정 때문에 균형 있는 권리 행사가 실종될 위기에 놓여 있다.

교통 체증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홍익 초등학교는 6대의 스쿨버스를 운행하고 있으며 초등학생의 50% 이상이 자가용으로 등하교를 하고 있다. 이들 초등학생을 포함하여 대략 2300여명 이상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이전해 올 경우 성서 초등학교 앞의 도로 사정은 극히 혼잡할 것이다. 학생들의 안전 문제는 비단 성서초등학교뿐만 아니라 홍익 초중고등학교에게도 똑같이 보장하기 어렵다.

성서초등학교 학부모들 중에는 공립 초등학교 바로 옆에 사립 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성서초등학교 학생들이 위화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불안한 심정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있다. 그래서 중고등학교는 이전되더라도 초등학교까지 이전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는 분들도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오세훈 서울 시장은 대체부지 확보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2008년 약속을 이행하기 바란다. 또 서울시 교육감은 신축공사 중지 명령부터 내리고 이전 결정을 재심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미산이다!

“나는 산이다.” 이 문장은 6월 12일 홍익재단 신축공사를 반대하는 주민들의 집회 당시 퍼포먼스 행위를 연출한 어느 학부모의 등에 붙어 있던 문구다. “나는 산이다.”는 문장은 인간과 자연 간의 물질적 신진대사, 인간과 자연 간의 공생을 단적으로 표현해준다. 이처럼 성미산 주민들은 6월 중순 마을축제 기간 동안 성미산의 고통을 호소·대변해 왔다. 포클레인에 의해 나무가 잘려나갔을 때 성미산의 산새들이 온종일 울어젖혔던 것처럼 성미산 주민도 아파했다.

성미산 남사면 일대가 파괴되면 될수록, “나는 산이다”는 구호는 점점 주민들의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우리는 성미산이다”는 외침으로 울려 퍼져 나갈 것으로 보인다.

지금 성미산 주민들은 도시재개발 사업과도 같은 홍익학원의 초중고 이전 계획의 실행이라는 무자비한 폭력이 성미산 마을 전체를 통째로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을 갖고, 성미산을 깎아 없애려는 홍익학원에 맞서고 있다.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가면을 쓴 사학재단의 폭력성을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을지 새로운 실험을 성미산 주민들은 행하고 있는 셈이다. 성미산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개발의 폭력성을 막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반면에, 신축공사를 통해 개발 이익이 파생할 것이라 보는 주민들도 있다. 하지만 홍익학원이 표방하는 친환경 명품학교 건축을 통해 마포구 주민, 아니 서울 시민은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환경 파괴로 인해 입을 손해가 개발 이익을 상회한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홍익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상업적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더 큰 생태환경적 가치를 지닌 자연숲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당장은 이 점을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얼마 있지 않아 이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자연환경적 조건을 떠나서 인류는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의 목숨은 교육보다 선결되어야 할 문제다. 자연환경이 우리에게 주는 산소 없이, 생물종의 다양성 없이 교육이 가능하겠는가? 성미산 주민을 비롯한 마포구 주민은 성미산으로부터 은연중에 많은 혜택을 받아 왔다. 성미산 남사면 일대의 파괴로 인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누렸던 혜택을 이제 누릴 수 없게 될 것이다.

목전의 이익에 눈이 멀어, 멀리 내다봐야 할 환경 문제를 등한시한다면 성미산은 친환경 명품학교와 성미산 주민에게, 더 나아가 서울시민에게 분명코 복수할 것이다.

이와 같은 불행한 사태를 방지하고자 한다면, 성미산을 지키고자 하는 주민들은 학생들의 학습권을 존중하여 홍익초중고 이전을 위한 대체부지 마련을 서울 시장에게 촉구해야 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성미산을 지키고자 하는 주민들은 신축공사 중지를 서울시 교육감에게 청원하여 대체부지 마련을 위한 길을 닦는 데 앞장 서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성미산 전체를 자연숲 그대로 보전하여 생태공원화하는 길이 현실화될 것이다.

*성미산대책위원회 네이버 블로그 주소: http://blog.naver.com/supsubi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대학 – 대학과 자본 간의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대학

– 대학과 자본 간의?문제?-

?

글: 박종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

대학의 이념과 현실, 대학 없는 대학

흔히 우리는 대학을 전문적인 고등 교육과 연구를 함께 하는 기관이라고 한다. 교육과 학습은 대학의 이념이다. ‘교육’(敎育)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교(敎)는 ‘본’을 상징한다. ‘본’은 ‘본뜨다’, 즉 “본보기로 삼아 그와 똑같이 하다”는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본따다’, 즉 “남의 것을 배워서 따라하다”에서처럼 이상(理想)을 뜻하는 가치론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 가르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이 본을 보고 따라하고 제대로 따라하지 못하고 틀릴 때 매로 살짝 쳐서 틀린 것을 고쳐서 제대로 따라하도록 하는 것이다. 육(育)은 우리말로 ‘기리는’것이다. 그러니 ‘교육’은 본받음을 기리고 칭찬해서 더 잘 본받게 하는 것이다.

학습(學習)은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학(學)은 구(臼)와 효(孝)와 경(?)과 자(子)로 구성된 문자이다. 구(臼)는 ‘두 손으로 받들다’는 뜻이고 효(孝)는 ‘본’의 상징이며, 경(?)과 자(子)는 ‘어린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안으로’의 뜻이다. 즉 학(學)은 ‘배우는 사람이 효를 받들어 자신 안으로 본받다’는 의미이다. 습(習)은 ‘익히다’란 뜻으로 기림을 받아 신명이 나서 본받은 바를 자꾸 연습하여 몸에 버릇이 되고 익숙하게 됨이다.

그러나 현실의 교육은 이러한 본래의 이념과는 큰 간극을 드러내고 있다. 대학에서 교육의 이념, 즉 본받음을 기리고 칭찬해서 더 잘 본받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현실의 대학은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제 대학이 본뜨고 본따야 하는 것, 즉 존재론적이고 가치론적인 이데아(idea), 형상(eidos)은 ‘자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인간은 물화되었고 인간의 가치또한 교환가치로 환원되고 있다. 더욱이 교육 과정에서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학생 모두 자본의 가치 추구에 의해 생존을 규정받는다. 우리는 이로부터 그리 자유롭지 않다.

살아 있는 것이든 죽은 것이든 모든 것을 교환가치로서 취급하고 강제하는 체제는 비정규직 교수의 삶을 양산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비정규직 교수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대학을 자본의 논리로 운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으며 이에 저항하는 이는 배움의 장에서 쫓겨난다.

예를 들어 지난해 12월 중앙대학교의 학과 통폐합을 예고하는 구조조정 과정 중에서, 학교 정문 앞 공사장 크레인에서 대학의 기업화에 반대하는 농성을 하던 이 대학 독어독문학과 학생 노영수 씨가 최근 퇴학당했다. 그리고 상지대학교에서는 비리로 인해 실형을 선고받았던 전 이사장의 복귀 움직임이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3월에는 고려대 김예슬 학생이 교육이 없는 학교를 거부하며 대학을 떠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의 이념과 현실에 대해 반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미 대학은 경제논리로 지배되고 있다. 돈 안되는 학과는 폐지하고 통합하는 기업적 발상의 구조조정이 전면화되고 있다. 이러한 대학의 교육 속에서 인간의 욕망은 획일화되어 간다. 자본주의적 인간형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무엇인가? 이는 돈이다. 이를 위해 대학에 가야만 한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취업이 잘되는 학과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호모이코노믹스’의 ‘욕망의 경제학’이다. 호모이코노믹스는 이기적 인간의 욕망을 기초로 운동한다. 결국 자본은 대학생들의 욕망을 이기적인 원자적 욕망으로 재편성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이제 대학생들의 삶의 이상형은 ‘자본이 바라는 욕망을 자기 자신의 욕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자본의 논리가 정치를 포섭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과거 소크라테스나 프로타고라스는 교육의 내용에 있어서는 다른 입장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모든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열쇠로 보았다. 이는 교육이 그만큼 새로운 사회구성을 위한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새로운 공동체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 대학의 본연의 자리일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이와는 너무 다르다. 자본이 추구하는 가치를 ‘본받고자’ 하는 대학은 있다. 그러나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을 ‘길러내는’ 대학은 없다.

나를 지배하는 자본의 욕망

영화 [왕의 춤]이 기억난다. 이 영화에서 루이 14세는 절대주의 체제의 확립을 위해 궁정문화를 만들고 이를 통해 귀족과 성직자 등 상층집단을 제압하고 민중을 승복시키고자 했다. 국왕은 인민에게 자신의 힘을 표상시키고 상징적으로 재현하고자 예술을 종속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프랑스 아카데미를 장악하여 사상과 학문을 통제하고자 했다.

[왕의 춤]은 우리 시대에 “자본의 춤”으로 등장한다. 자본의 상징적 재현이 지금의 교육 현실이고 이를 통해 모든 가치를 표상한다. 자본으로 군림하는 힘의 표상은 대학의 기업화를 통해 주조되고 있다.

인간은 타인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해 간다. 그런데 대학이 기업의 논리로 운영되면서 자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새로운 나르키소스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기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길이 아니라 자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대체하면서 살아가는 길은 모든 가치를 차디찬 경쟁과 이익 계산의 논리 속에 빠질 뿐이다.

자본의 가치를 제외한 모든 가치가 허무주의라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 오직 살아있는 가치는 교환가치만이다. 인간과 자연 모두를 교환가치라는 추상적 동일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4대강 사업, 대학의 기업화, 체제의 재생산을 위한 출산 정책이며, 언론의 자유를 자본 운동의 자유로 만드는 것이다.

결국 교환가치로 환원 가능한 것만이 존재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자본은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여 교환가치로 환원 가능하지 않는 것들을 자본의 타자로 규정하면서 배제한다. 효용성이라는 생산성의 원리 하에서 교육과 자연 모두가 도구화되어 간다. 칸트 식으로 말하면, 이때 자본이 요구하는 것은 자율적인 지성적 인간이 아니라 명령에 복종하는 오성적 인간이다.

외적인 자본의 욕망이 인간의 욕망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 결국 우리 내부의 욕망을 구성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주류 가치관인 이 욕망의 실현이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와 훌륭함의 기준이 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나’를 찾는 길은 환상으로 규정된다.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환상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 오히려 환상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환상 속에 있는 이들은 사회에서 도태되었다고 규정된다. 자본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상적 자아로 ‘착각’하게 만드는 대학의 기업화는 인간을 ‘자신이 아닌’ 자본의 욕망에 매혹되어 살아가게 한다.

이러한 자본의 효과는 생산성 원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게 만드는 사회는 생산성의 원리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획일화된 욕망을 통해 사회적 통제를 효과적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영어의 university에 해당하는 라틴어 ‘universatas’는 ‘종합’을 의미한다. 이는 다양한 가치에 대한 종합적이고 비판적인 사유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은 다양한 가치를 음미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의 가치, 즉 자본의 가치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화하고 있다.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것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욕망은 ‘나’의 욕망이 아니며 외부의 욕망, 자본의 욕망이며 도착된 욕망이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욕망의 위험함을 감지하여 그와 관련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이유는 교육이 사회 속에서 인간을 자유롭고 책임 있는 존재로 변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본성과 교육은 유사하다. 왜냐하면 교육은 인간을 변형시키며, 변형시키면서 새로운 본성을 만들기 때문이다.”[단편 33] 그의 주장은 하나의 욕망, 즉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게 만드는 우리의 현실에서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교육은 인간의 욕망을 자본의 욕망과 일치하는 하나의 욕망으로 변형시켜 다른 욕망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욕망과 무질서에서 벗어나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은 교육이 갖는 특별한 정치적 성격이다. 무엇보다도 교육은 이렇게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 내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때 자유로운 연구와 비판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지금 자본의 욕망이 교육의 지향성을 대체시키고 있는 현실은 인간 존재를 자본의 욕망과 맞서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 이렇듯 교육은 양날의 칼이다. 한편의 칼날은 불평등과 자유의 억압에 대한 해방의 인간형을 만들고 다른 한편의 칼날은 차별과 억압, 무비판적 인간형을 만든다. 후자는 비판적 교육을 청산하고 체제의 추종자를 만들어낸다.

나의 욕망을 지배하는 나의 욕망

자본의 욕망은 물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물적이지만은 않다. 인간의 욕망을 물질적인 것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인간의 소외 문제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상품-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인간의 욕망을 물질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결국 인간관계를 물적관계로 뒤바꿔놓기 때문이다.

인간을 물화시키는 자본주의 사회 통제는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만을 조장하는 소비문화를 통해 구성된다. 소비문화의 전시상이 되어 버린 대학가, 박제된 혁명가 체 게바라의 표정을 입은 티셔츠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타자가, 즉 자본이 우리들을 욕망하고 있다고 오인하는 도착적 증세는 자본주의적 상품 경제 속에서 구조화되면서 자아 형성의 공간을 새롭게 구성한다. 이 공간의 중심적 자리에 대학이 자본의 운동을 위한 매개체로 놓여있다. 이 장소는 우리의 자아를 끊임없이 자본의 욕망과 동일화시켜내면서 ‘자기 소외’를 강제하는 훈육의 공간이다. 그리고 이 상품경제의 체제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삶을 향해 자본의 욕망을 욕망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자본의 욕망 속에 던져진 우리들은 우리 내면의 자신의 욕망이 갈구하는 목소리와 갈등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욕망이라고 간주되었던 욕망이 결국은 자본의 욕망에 불구하며 진정으로 내가 바라는 욕망의 지향성은 참혹한 자본의 논리 속에서 금지된다는 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극의 인식이 ‘대학을 그만둔다’라는 구호와 실천으로 드러난 것이다.

결국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우리들은 포이어바흐가 말하듯이 “참된 현재적 삶과 그것에 관한 그의 견해, 표상간에 존재하는 간격 위에, 그리고 그의 영혼과 공허 위에 당나귀가 넘어지던 미래의 바보다리를 세운다.”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욕망을 빼앗는 것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의 욕망은 우리들에게 증오와 투쟁의 대상이 된다. 우리에게는 한편으로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고자 하는 자아가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본의 욕망이 우리의 진정한 욕망을 갉아먹는 대립물이라고 인식하는 자아도 존재한다. 자본의 욕망은 상상적 동일화이다. 그러나 자아가 욕망하는 것도 상상적 동일화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반론할 수 있다. 우리의 욕망도 상상적 동일화일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자아의 욕망을 상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본의 욕망에 의해 구성되고 환원되는 욕망과는 달리 자신의 반성과정을 통해 자아의 상상적 동일화를 구성한다. 양자는 너무나 다른 지향성을 갖는다. 이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자아의 갈등과 감정의 교체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 이러한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식하고 실천하는 것이 관건이다. 왜냐하면 이 속에서 자본의 욕망이 아닌 인간의 욕망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맑스가 말하듯 이러한 의식이 “대중을 사로잡을 때 바로 물질적 힘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투쟁의 방식은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대학을 떠나는 방식이 있을 수도 있고, 대학 속에서의 투쟁 또한 있을 수 있다. 어느 것이 다른 방식보다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는 않다. 문제는 자본의 욕망으로 굳어진 낡은 질서를 균열 내는 공간에서 때로는 개별적인 때로는 연대를 통한 저항이 중요한 것이다.

자본이라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동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찾아 지난한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자본의 거울에 비친 모습 속에 나의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내맡기는 것은 ‘자본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자신의 지배를 받는다’라고 착각하는 자신은 나 자신이 아닌 자본에 투영된 나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자본의 욕망에 지배당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대부분의 욕망은 외부에서 온다. 따라서 우리의 욕망 구조를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욕망을 구성하는 자본주의적 체제라는 ‘외부’의 틀을 전환시키는 것이 필연적이다. 교육과 학습은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게 만드는 교육의 내용을 변혁하기 위해서는 교육자와 학습자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근대계몽주의의 일방적 교육방식을 비판한 철학자 칼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교육과 학습간의 일방적 관계를 지양한다. 교육자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육과 학습은 어느 한 쪽이 없이는 성립불가능하다. 술을 ‘거르’듯 우리는 허섭스레기가 되어가는 교육의 획일성을 거르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사유의 형태에 국한되지 않으며 마치 술을 ‘거르’는 일처럼 물질적이다.

다시금 우리는 자신 내면에서 숨죽이며 꿈틀대고 있는 양심의 울림에 귀 기울려야 한다. 우리가 기름진 땅위에서 메마른 땅을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는지, 양심의 소리에 귀 막고 타인의 산물을 꼭꼭 숨기고 받아먹고 있지는 않는지.

어떤 이가 배부르다는 것은 어떤 이가 가난하다는 것이다. 사회의 기름진 옥토를 ‘기리는 것’은 우리네 책무이며 삶 그 자체이다. 교육이 우리네 삶에 아로새기고자 하는 것은 우리네 삶을 지탱해 온 것들을 위해, 그 노고와 땀을 위해 조금이나마 빚을 갚은 과정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너무나 거를 것이 많다. 이 일의 시작은 자본의 거푸집 속의 우리 자신부터라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중앙대를 바라본다 – 대학과 자본 간의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중앙대를 바라본다

?-? 대학과 자본 간의 문제 –

글: 강경표 (중앙대학교 박사과정수료)

2008년 5월 중앙대를 두산그룹에서 인수한다는 사실이 공표되었다. 수많은 언론의 집중과 관심 속에서 거대 자본과 결합한 대학이 또 하나 나타난 것이다. 1996년 삼성에 인수된 성균관대를 시작으로 기업에 의해 운영되는 학교는 몇 개 있지만 유독 중앙대가 주목을 받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먼저 자본주의가 팽배해진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단행된 대학 인수라는 점과 둘째로 두산의 일방적 개혁으로 인한 학내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는 점, 셋째로 발생한 문제의 비민주적 처리과정이 그것이다.

중앙대학의 구조조정 일지

두산그룹의 중앙대 인수 이후 두산그룹은 중앙대에 개혁의 칼날을 드리웠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학내에서 ‘천원 재단’으로 불렸던 김희수재단과의 불협화음 속에서 중앙대의 위상은 실추될 만큼 실추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두산의 중앙대 인수는 학내에서도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2009년 4월 ‘구조계획위원회’가 발족되고, 같은 해 11월 교지 [중앙문화]사태 이후 학내 여론은 급속도로 바뀌기 시작한다.

같은 해 12월 ‘1차 구조조정안’이 발표되면서 시각차는 대립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때마침 일련의 보수언론에서 중앙대 구조조정을 찬양하는 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학과 통폐합”(동아일보 2009.12.30), “중앙대의 학과 통폐합은 시대조류에 맞다”(세계일보 2009.12.31), “대규모의 학과 통폐합 나선 중앙대의 실험에 주목한다”(중앙일보 2009.12.31)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보수 언론의 공통된 논조는 교수사회를 철밥통으로 매도한다는 점과 학과제를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은 학생들이다. “의혈 중앙 구조조정에 대한 학생대표자 기자 회견문”을 비롯한 “학생 긴급 토론회”회를 시작으로 학내에는 구조조정 반대를 외치는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학교 측에서는 총학생회 주최의 “새내기 새로 배움터”를 불허했다.

또한 교수협의회는 토론회 및 “중앙대학교 학문단위 및 운영체계에 대한 재조명”에 대한 기자회견을 통해 구조정의 불합리성를 전달하려 했고, 이것은 본관 앞 천막 농성으로 이어지지만 2010년 4월 8일 구조조정 최종안이 이사회를 통과하게 된다.

두산효과와 박용성이사장을 바라보는 두 시선

사실 중앙대가 학내 개혁을 시도한 것은 2003년 “DRAGON2018” 계획이 수립되면서 부터다. 현 “CAU2018+”의 전신인 “DRAGON2018” 계획은 개교 100주년을 맞는 2018년에는 세계 100대 대학에 진입한다는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희망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희망은 “CAU2018+” 계획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두산의 중앙대 인수 이후 이 잿빛 희망은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산과 중앙대가 체결한 양해각서(MOU)만으로도 2009년 대학입시에서 신입생 백분위가 1% 높아진 것이다. 뛰어난 인재 확보라는 측면에서 “두산효과”는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자본의 힘을 증명하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두산효과” 이후 나타난 또 하나의 현상을 꼽자면 박용성이사장의 발언 수위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재계에서 “Mr 쓴소리”라는 애칭을 가진 박용성이사장은 본인의 경제관이 투영된 교육관을 강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2008년 6월 10일 “이사장 취임사”에서 그는 “중앙대, 이름만 빼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전부 바꾸겠다”는 말로 대대적인 개혁이 있을 것임을 시사했다. 중앙대의 실질적 개혁을 누구보다도 원했던 중앙인들은 그 당시만 해도 그의 말에 대부분 찬동하는 분위기였고, 지난 재단의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자본 없는 개혁의 허망함 앞에 박용성이사장의 행보에 반대보다는 찬성의 표를 던져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09년에 들어오면서 박용성 이사장의 발언은 수위를 넘어 중앙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을 하게 된다. “기업이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판매가 되듯 대학도 사회가 원하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중대신문 2009.5.24), “주인의식을 갖는 것과 주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며, 대학 사회에 경계를 넘어서는 과도한 주인의식이 퍼져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진다”(중앙일보 2009.8.28).

학생을 제품으로 교수를 직원으로 바라보는 박용성이사장의 태도와 주인의식에 대한 비하 등은 중앙인의 가슴에 상처로 남기에 충분했다. 또한 학생들의 주인의식이 학교재정의 등록금 의존도가 높은 까닭에서 기인한다는 그의 분석은 중앙대가 아닌 중앙인에 대한 분석을 제대로 수행했는가에 대한 의문만을 남기게 되었다.

장덕진 교수는 “일등 기업의 대학 개혁”(경향신문 2010.4.14)이라는 칼럼을 통해 일등과 일류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두산을 사류기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중앙대에서 벌어지는 두산의 정신적 폭력과 비민주적 행태를 꼬집었다. 며칠 후 박용성이사장은 “중앙대 개혁의 외풍”(경향신문 2010.4.18) 이라는 제목으로 중앙대가 처한 환경과 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의 간섭을 외풍론으로 간주하며 당당하게 맞선다.

그러나 박용성이사장이 중앙대가 처한 환경과 문화를 운운하려면 최소한 기업의 논리를 떠나 중앙대의 특수성을 좀 더 고려해야 했다. 사실 중앙인들 스스로는 지난 김희수 재단을 썩은 뿌리라고 생각하고, 지난 재단과의 단절을 강력하게 소망하였고 강력한 투쟁을 벌여왔다. 그리고 지난 재단의 무기력함 속에서도 지금까지 중앙대가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중앙인의 주인정신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중앙대 인수과정에서 드러난 지난 재단과의 관계 또한 중앙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중앙대에 직접적으로 1200억을 투자한 것이 아니라 지난 재단에 1200억을 넘겨준 사실은 박용성 이사장이 진정으로 중앙대 개혁에 의지가 있는 교육자인지 아니면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기업인에 불과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만든다.

비민주적 절차를 통한 학과 통폐합


자본의 논리가 현실적으로 막강한 힘을 지녔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의 거의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역할이 경제적 파이를 키우는 것이라는 점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의 힘이 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그 절차가 비민주적이라면 그것을 따를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중앙대 구조조정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중앙대 개혁에 있어 드러나는 비민주적 처리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학내 반대여론을 주도한다는 명분 아래 [중앙문화]와 [녹지]의 예산을 삭감한 것과 학내 언론 검열, 총학생회 주최의 “새내기 새로 배움터”의 불허, 자연대 학생회장의 징계 파문 등과 함께 민주적 절차에 따른 구조조정을 내세우면서도 제대로 된 의견수렴 절차가 없는 것 또한 그렇다.

이에 천막농성이 진행되는 가운데 “중앙대 학문단위 일방적 재조정 반대 공동 대책 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천막은 강체 철거되고, 의견수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박용성이사장의 개혁에 찬동하는 보수 언론들이 철밥통을 언급하며 개혁을 의심하거나 반대하는 교수들의 발언을 원천 봉쇄하고 나선 것도 자본과 결탁한 언론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또한 2010년 4월 8일 구조조정 최종안이 이사회를 통과하고 확정되던 날 불거진 고공크레인 점거 사건에 가담한 몇몇 학생들에 대한 처리문제는 기업식 대학운영에 있어 보여지는 독단을 여실히 드러냈다. 교육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할 학생의 계도 문제가 퇴학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일련의 중앙대 사태를 바라보며 우리가 유심히 지켜봐야 하는 것은 중앙대 개혁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아니라 그 본질이다. 지난 김희수 재단과의 단절을 가슴 깊이 갈망해온 2만5천 중앙인들은 대체적으로 박용성 이사장의 개혁에 찬성한다. 그러나 그 개혁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대 개혁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과정들은 기업을 앞세운 자본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대학이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자본과 대학 그리고 기업

중앙대 개혁에서 나타나는 본질적인 문제는 자본과 대학의 문제이다. 이것은 기업의 대학 운영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며, 수많은 진통을 겪고 있다. 한 신문의 칼럼에 따르면 “100여 년간 변하지 않는 한국의 대학들을 세계시장과 경쟁하는 대학으로 만들려면 검증된 기업식 개혁이 정답일 것”(한국경제 2010.05.09)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기업을 통해 검증된 사실은 과연 무엇인가? “파우스트의 거래”로 일컬어지는 대학의 기업화 속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까지 받아온 교양중심의 대학교육이 정말 그렇게 문제가 많은 것일까? 효율성과 생산성이 떨어지는 인문학은 사라져야만 하는가?

이러한 일련의 질문들은 대학교육의 위상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근대를 모델로 한 민주 세력을 양성하기 위해 대학 교육은 교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세력들은 이러한 교양중심의 교육이 현대 사회에는 적용되지 않는 낡은 교육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면에는 “절대 자본”(이명원 “자본주의와 대학” 2007) 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신자유주의가 있다.

교양중심의 대학교육이 근대의 체계를 반영한다면 신자유주의는 어느 역사시대를 반영할 까? 신자유주의는 현대사회에 부합하는 최첨단 유행인가?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검증된 기업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신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실자본주의”에 가까운 한국적 신자유주의 모델은 이미 봉건적이다. 독단적 자본가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이 재편되어 있다. 자본가는 왕이며 그의 의지에 따라 효율성이 없다고 간주되는 것은 사라지면 그만이다. 그의 의지에 동의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민주적 절차도 소용은 없다. 우리는 이러한 독단성을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대학교육에서 자본의 역할은 경제적 파이를 키워주는 것이다. 기업 출신의 CEO들은 분명 그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파이의 조각들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는 민주주의 교육에 부과된 몫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학 교육에는 스스로 민주주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교육이 지속되어야만 하고, 민주적 절차를 중시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이런 의미에서 중앙대를 포함한 대학 개혁에 있어 인문학과의 무분별하고도 일방적인 통폐합은 문제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인문학은 민주주의 교육의 산실이기에 인문학의 생산성과 효율성의 문제를 경제적인 시각에서 재단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진정한 인문학의 생산성과 효율성은 그들이 만들어 내는 사회적 담론에 있다. 비록 당장은 경제적 가치가 없어 보이고, 잡음을 일으키고, 개혁을 주도하는 세력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인문학이 지닌 민주주의를 지속하려는 의지는 계속해서 만들어져야 하며, 앞으로도 만들어질 것이고, 이것이 인문학의 생산성과 효율성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민주적 담론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인문학적 시각이 필요하며, 이것이 인문학을 함부로 통폐합 할 수 없는 이유이다. 다시 말해 다양한 담론이 형성될 수 있는 다양한 장소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사회가 EU라고 하는 경제적 단위로 통합되어 있다고 해서 유럽의 문화가 통합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인문학적 사고를 유사학과 통폐합이라는 무딘 칼날로 재단하려는 시도 자체가 인문학적 효율성과 생산성을 궁극적으로 떨어트리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주인과 주인의식 그리고 중앙인

“절대 자본”의 세계에서는 자본이 생명력을 갖는 근본인 것처럼 보인다. 자본이 조직을 창출하며, 그 조직은 리바이어던적 체계를 부여받으면서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체계 내에서는 생명체가 갖는 근본적 노동력은 상품 또는 교환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그 위에는 자본의 주인인 자본가만이 있다.

진정으로 주인의식과 주인이 다른 것이라면, 그래서 서로의 역할 구분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면 자본이 갖는 생명력 또한 진정한 생명과는 다른 유사체일 뿐이므로, 주인은 유사 생명체의 주인일 뿐 주인의식을 가진자들의 주인은 아니다. 그러므로 중앙대라는 이름만으로는 중앙인을 하나로 묶을 수도 없을 것이며, 통제할 수도 없고,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주인의식을 가진 자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또한 자율적 주인의식이 없는 노예의 도덕을 가진자들을 육성하는 것이 대학의 목표라면 그것은 분명 재고되어야만 한다. 네 것과 내 것을 확실히 구분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모델 속에서도 애사심이나 애교심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없다면 탁월한 효율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주인의식을 갖는 것 또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덕목이며, 대학교육의 일부이다.

그러나 중앙대 개혁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사태들은 자본과 대학 그리고 기업과의 관계에 있어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재단의 선택과 강요되는 침묵은 자본 앞에서 무력해지는 대학의 현실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더더욱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은 중앙대 개혁 모델을 따르려는 또 다른 사립대학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앙일보의 한 사설의 제목은 “대규모의 학과 통폐합 나선 중앙대의 실험에 주목한다”라고 되어 있다. 2만5천 중앙인이 실험대 위에 올라있는 것이다. 대규모의 사회적 실험을 아무런 비판 없이 찬양하는 글을 보면서 우리가 진정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 2만천의 중앙인이 실험대 위에 서 있어야 하는 실험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만약 실패한다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여기에 중앙인의 한사람으로서 중앙대를 바라보는 시각과 인문학을 전공하는 내 생각을 적어본다.

 

혁명과 통약불가능성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혁명과 통약불가능성

글: 이규성 (이화여대)

과학사상가 페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는 서로 환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사고 모델이 공존하는 상황을 과학사에서 확인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그러한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을 사회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레닌과 모택동과 같은 혁명적 지식인들은 그러한 현상을 예리하게 파악했다고 지적했다. 그와 대부분의 과학사가들에 의하면 근대과학의 수리 물리적 법칙은 현재 순간인 지금(now)의 동일한 연속을 전제하고서 성립한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과학 법칙이 과거 현재 미래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시간의 가역성(reversibility)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제는 이미 아인슈타인이 어느 곳 어느 시점으로도 순간적으로 갈 수 있다는, 순간에서의 무한 속도를 전제하는 것과 같다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논의들은 서양 근대 과학의 무반성적인 형이상학적 전제가 동일성이라는 사실을 서양 지성사에 각인시켰다.

이러한 논의의 맥락에서 페이어아벤트는 뉴턴-유클리드적 시­공간 좌표를 전제한 사고 유형과 이를 전복할 수 있는 전혀 다른, 그래서 통약불가능한 새로운 사고 유형이 균일하지 않게 병존하는 현상을 주목하였다. 이러한 ‘불균등발전’은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며, 그럼에도 만일 근대 과학적 사고 모델을 유일한 합리적 모델로 통용시키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고의 독재이다. 혁명사에서는 그러한 동일성에 근거한 환원주의적 태도는 교조주의적 인식 방식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갖는 맹목성은 그로 인한 실천적 패배를 보여 준다.

한 동안 한국에서도 유행했던 논리 실증주의와 칼 포퍼의 사고 모델은 근대와 현대에 걸쳐 합리적인 것으로 통용되는 것으로 믿고 있는 과학적 방법을 교조주의적으로 옹호하는 것이었다.[최근 번역된 『파르메니데스의 세계』(K. Popper, 이한구 옮김, 2010)는 근대적 동일성을 옹호하는 『동일성과 실재』(Identity and Reality, 1908)의 저자인 과학철학자 에밀 메이어슨(E. Meyerson)을 존경하고 계승하는 관점의 결정판이다.] 이렇게 보면 페이어아벤트의 『방법에의 도전(Ageinst Method)』(정병훈 옮김, 1987)은 지성사에서의 사고의 억압에 대한 폭동(revolt)을 옹호하는 셈이 된다.

정치 경제적 억압과 착취가, 철학과 과학이 비판적, 논리적 사고라는 미명하에 가하는 억제와 함께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한국 철학도들만큼 겪어온 이들도 드물 것이다. 철학을 왜하냐? 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을 망설이는 것은 조건 없이 주어진 신기한 외래 철학과 과학에 주눅이 들어 고생하고 있는 것이 이미 응답으로 되어 있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다. 지성사에도 이들을 항복시켜 수오지심을 유발한 위정자와 교육자 학술관료, ‘승냥이、돼지、남루한 개들'(레닌)이 있다.

서양 전통의 합리적 사고 모델이 생리적 불건강을 초래한 것에 저항한 니체가 “교회, 국가, 군대 이 개들이 언제 죽고자 했는가?”라고 염세적으로 반문한 것은 인간 지성의 부단한 자기 비하적 편집증이 사상과 심리, 사회조직에서 부단히 재생산되는 현상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함께 진화해온 개를 측근에 두면서도 비난의 상징으로 쓰는 것은 자신처럼 순치된 것에 대한 심적 저항과 분열일 것이다. 이러한 저항적 분열자체가, 순치된 비폭력 사회에 욕이 많듯이, 심성의 불균등발전의 한 사례일 것이다. 심성의 불균등현상이 없다면, 심리학과 정신 분석학도 없었을 것이다.

페이어아벤트는 맑스에서 모택동과 알튀세르에 이르는 급진 사상가들이 언급하는, 역사에서의 다양한 불균등현상을 주목한다. 예를 들어 맑스는 구 생산관계를 앞지르는 예술 사상이 구제도를 이끌어 갈 수도 있음을 언급하였고, 트로츠키는 사회 내 각 제도적 층위들이 평행선상에서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그러한 현상의 철학적 배경에 대해서는 모택동의 『모순론』이 훌륭하게 설명한다고 보았다. 레닌은 20세기 초부터 시작한 중국 혁명과 유럽을 비교하면서, 유럽의 부르주아 계급이 노동계급의 저항을 두려워하여 중세적인 것을 다시 들여와 그것에 안주하려고 하는 반면, 젊은 아시아는 역동적 혁명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사실 중국 혁명은 교조주의와의 투쟁사이기도 했는데, 모택동의 사회철학은 중국 사회의 불균등발전 현상(봉건 군벌과 봉건적 유산의 잔존, 광범위한 농업과 도시 자본주의의 공존, 제국주의와 민족 자본가의 공존 등)을 모순이라는 변증법적 개념을 활용하여 예리하게 인식하였다. 그는 어떤 모순의 어느 측면이 지배적으로 작용하는가에 따라 변동해가는 역사를 분석함으로써 그의 사회과학적 안목을 입증하였다.

모순이란 반대 방향의 힘들이 동시에 서로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면서 공존하면서도 서로 알력을 생산하는 관계[대립의 통일]를 의미한다. 이 힘들은 두 개 이상일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계급모순은 기본 모순이지만, 과정에 있는 사회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과거의 봉건적 모순일 수 있으며, 새로운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모순이 다른 모순들을 지배할 수도 있다. 그때그때의 사회성격을 지배하는 모순은 주요모순이라 부르고, 자본주의의 공통된 모순인 계급모순은 그것에 의해 ‘중첩'(李大釗)된다. 이러한 융통적 인식은 중국의 혁명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지식이 되었다.

이처럼 불균등발전은 사회의 개조를 더디게 하는 요인이면서도 그것을 성공시키는 이점이 되기도 했다. 레닌에 의하면 그러한 불균등현상은 맑스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역설’이나 ‘변증법적 수수께끼(conundrum)’로 보일 것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제로 자연계에서나 사회에서나 생의 모든 단계에서 생존하고 있는 새로운 것은 남아 있는 옛 것의 잔재와 맞부딪히게 된다. 그리고 맑스는 부르주아적 권리의 잔재를 독단적으로 공산주의에 끼워 넣었던 것이 결코 아니며, 자본주의라는 자궁에서 출현한 하나의 사회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가피한 것이 무엇인가를 지적했던 것이다.”(『국가와 혁명』, 김영철 옮김, 1988)

여기서 불가피한 것이란 상공업자 독재 사회에서의 민주주의적 인권과 권리를 의미한다. 비록 추상적 평등이지만 그 민주주의는 로베스피에르의 혁명 유산으로서 정치적 해방의 원리였으며, 혁명적 경제 해방을 추구하는 단계에서도 필수적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필수적인 것은 ‘보다 민주적인’ 국가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국가는 파리 콤뮨을 모델로 한 것으로 시민 각자가 국가 경영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 지고, 공직자가 반민주적인 경우에는 소환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 국가이다.

민주주의는 그 구체적 형태가 발전하는 가운데 그것이 지향하는 최상의 이상이 이루어져, 계급과 민중이라는 언어가 소멸될 때까지는 보존되고 발전되어야 하는 정신이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함께 간다. 그러나 레닌 자신도 지키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기존의 혁명사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대립시킴으로써 민주주의를 자유주의 쪽으로 보내었고, 그에 따라 자유주의 체제는 사회주의를 정치적 독재로 인식하게 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평등을 의미한다.”(『국가와 혁명』) 부자유가 불평등을 의미한다면, 평등은 자주적 평등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상의 어느 국가도 민주주의를 수사적으로만 사용해 온 것이 될 것이다. 억압 기구들의 복합체인 국가가 그 언어를 수식 도구로 오염시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에 따라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개방적 관계가 칸트적인 내적 양심으로 내면화되는 것도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민주주의가 정치적 양심으로 내면화된 것은 현대 사회의 불균등현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이 점에서 새로운 정치학은 인간 내면도 정치의 장으로 인식하는 내면의 정치학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테르미도르 반동 직전, 빵을 요구하는 평민과 그것을 줄 수 있는 산업 부르주아로부터 고립된 로베스피에르의 고뇌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장차 인민들이 부르주아의 노예로 될 것임을 예감하고, 빵만으로 살 것인가 라는 성서적 논쟁을 벌이게 된다.

그가 사라진 후 빵을 주체로 한 자유와의 절충품이 나왔는데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이다. 중국 혁명사도 중국적 형태로 그러한 현상을 보였다. 원리상으로만 보면 문화대혁명은 생산력 결정론과 의지주의적 실천론 사이의 대립, 혹은 상 시몽에 연원하는 ‘기술 공학주의’와 ‘루소적이면서도 맹자적인 평등주의’ 사이의 대립(B. Schwartz)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상화나 관료주의와 같은 봉건 잔재와 봉건문화의 폭력적 파괴 등 여러 요인들로 인해 실패로 끝났지만, 그 강렬한 평등에의 갈망에도 불구하고, 문화대혁명은 주자파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스탈린주의의 핵심 요소인 국가자본주의적 기술관료 지배체제로 귀결되었다. 민주주의는 다시 내적 양심으로 내면화되었다.

기존의 혁명사에 대한 이러한 개괄적 이해로 보면, 외적 투쟁의 상황에 있어서나 내면적 양심화에 있어서나, 폐쇄와 개방, 속박과 해방, 이른바 옛 것과 새 것 사이의 분열과 항쟁이 있다. 이러한 불균등현상을 혁명적 사상가들은 차이(差異)라기보다는 모순(矛盾)으로 표현했는데, 그들은 모순을 우주의 보편적 생성의 원리로도 확대하였다.

모택동에게도 나타나는 이러한 존재론적 우주관은 엥겔스의 근대적 우주관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자연 변증법에 의하면 무한히 계속되는 자연의 진화사는 생명체의 생과 사, 그 총체적 절멸, 지구와 성운들의 파괴를 동반하면서 범우주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현상계의 보편적 전변 과정은 근대 과학이 세운 물질과 그 에너지의 항존성과 동일성의 법칙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동일성은 과학적 법칙들의 항구적 동일성을 보장해 주는 근대적 합리성의 공준으로 간주되었다. 심지어 그것은 인식론적 관념론과 물질의 소멸 가능성을 언급했던, 그래서 볼셰비즘의 비난의 표적이 되었던, 포앙카레나 마하주의자들과 아인슈타인도 궁극적으로는 버릴 수 없었던 근대적 신념이었다.

그러나 기존의 혁명적 세계관의 이러한 근본적 신념은 유럽의 지성사적 문맥에서 보면 하나의 강경한 형태의 합리적 사고 모델을 관철시키는(,) 그래서 또 다른 새로운 세계상과 충돌할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메리카와 한국의 부드러운 형태의 과학주의도 생산력주의에 기대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기술 공학주의와 궤도를 같이 한다.]

근 현대의 볼셰비즘적 형태이건 자유주의적 형태이건, 과학주의적 세계상은 세계에 대한 자연주의적이고 객관주의적 태도에 대한 무비판적 신앙 때문에 자신들의 시야 안에서의 일관성에만 집착하였다. 이러한 일관성은 자기 폐쇄적인 통약가능성을 전제한 의사소통과 합의 가능성을 이성적 사고라고 선전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 신념은 자신들의 구태의연한 태도가 인간의 또 다른 심각한 인식 방법과 통약불가능성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였다. 이 인식 방법은 인간의 ‘내감에서의 자기의식’이 이해하는, 기억과 연속된 느낌들과 의지、상상과 열망의 영역으로서, 이른바 질적 경험과 통찰의 영역이다.

외감에 주어진 감각만으로 내감을 채우는 칸트의 무미건조한 지성, 그러한 감각을 계기로 실재론적 인식론이나 관념론적 인식론을 구성하는 레닌, 모택동과 마하주의의 현대적 후예들은, 그러한 질적 자기의식의 차원이 인간과 생명의 진화를 포함한 자연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 수 있다는 심원한 사실을 다룰 능력이 없었다. 이러한 무능에 속류 유물론의 한 형태인 물리주의적 심성론이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의 도구인 수량화와 질적 자기의식의 광대한 차원 사이의 불가통약성에 대한 주의 깊은 성찰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또 다른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 줄 수 있다. 이에 따라 그것은 인간의 의지와 상상에 기초한 혁명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혁명의 보편적 핵심인 자주적 평등에 대한 자연사적 발생 근거와 함께 그 주체적 기초에 대한 이해는 내감에서의 의식이 감행하는 경험의 심화에서 그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와 베르그송(B. Bergson)이 지성의 ‘객관화하고 고체화하는 습성’과 ‘내감에서 알려지는 의지나 생명’ 사이의 전혀 종류가 다른 불균등이 있음을 알고, 그러한 통약불가능성과 역설을 회피한 것을 서양 문명의 퇴폐성과 파괴성으로 암시한 것은 다시 상기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존 생 철학의 낭만주의적 성격이 지나치게 부각된 것이, ‘폐쇄적 고체의 논리에 고착되는 경향성’과 ‘개방적 유동성을 표현하는 경향성’ 사이의 불균등이 집약된 존재가 생명체이고 인간이라는 것을 망각하게 했다. 그럼에도 생 철학은 자연사의 부단한 진화가 개방적 유동성의 힘인 자유의 충동이 나타나려는 노력이며, 인간의 존재 의미는 그 노력에서 확인된다는 것을 음미하게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인간이 만든 온갖 도구들을 불평등의 도구로 폐쇄화하는 계급의 분화를 타파하는 개혁이나 혁명으로도 나타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잊혀진 조선 후기의 동학혁명의 세계상이 다시 환기될 필요가 있다. 최시형은 혁명을 개벽(開闢)으로 이해했다. 개벽은 내적 성찰에서 경험되는 심층적 생기(生氣)가, 고정되고 형해화된 사회 구조와 심리 구조를 용해시키면서, 보편적으로 ‘표현(表顯)’되는 전환점을 의미한다.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본성[性]을 구성하는 생기는 ‘약동불식(躍動不息)’하는 힘으로 우주를 생성시키고, 응고된 인성과 사회를 혁신해 나간다. 유동성과 개방적 소통성을 가진 그 본연의 성품은 자유로이 그리고 평등한 방식으로 자연과 인생사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진정한 주체성이란 이러한 우주적 연대성의 원리를 억압의 시대를 돌파하여 표현하는 행동에서 표현된다.

원래 『周易』에 연원하는 개벽은 양성의 생기(生氣)가 문을 열고 자신을 실현해 보이는 과정적 운동을 통해 음성의 정체적 상태가 약화되는 전변의 시간을 의미한다. 최시형(崔時亨)은 자신의 이름처럼, 이러한 시간을 결정적인 ‘형통(亨通)’의 시간[時]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소통적 공감의 힘이자 활력인 생기를 자기성찰의 노력을 통해 이해하고, 그 생동성이 이끄는 내적 필연성에 따라 실천하였다.

동학의 사상이 비록 역사적 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 역동적 심성론은 고체화된 사회를 혁신하는 혁명적 인성론의 이념형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생 철학이 제기한 고체적 수량화의 논리와 유동체에 대한 내적 경험의 통약불가능성이 사회를 새 것으로 변동시키는 혁명적 세계관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이 결국은 기술 공학주의적 통제 사회로 되고, 아메리카와 함께 군산복합체 사회로 나아가는 오늘의 역사를 볼 때, ‘진정한 민주주의는 평등’이라는 테제는 실로 어려운 사상임을 실감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황야와 숲에서 온 저 고대의 성인들이 고통과 번뇌 속에서도 인생의 진리로 제시한 이래로, 일상의 번민에서는 물론 수많은 폭동과 혁명에서 나타났다가는 사라진, 그리고 사라졌기 때문에 더욱 진실된 역설의 사상이다. 그것은 분명 야성의 이념으로서, 순치되고 강경해진 문명과 역(逆)운동을 하는 세력을 창조해 낼 것이다. 그리고 이 세력은 자신의 젊은 생기로 내적 양심의 사상을 구체적인 물질적 삶에서 실현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하고자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