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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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재유 (건국대 강사)

대학 시간 강사 제도 발생과 재생산의 구조적 원인

?대한민국 건국 초에 대학강사와 교수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1949년의「교육법」제73조에(서) 교원은 ‘학생을 직접 지도?교육하는 자’였고, 제75조에(서) ‘대학 교원으로 총?학장, 교수, 부교수, 강사, 조교를 둔다’고 되어 있어 강사는 교원이자 교육공무원에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통성 없이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정권이 비판적 지식인의 언로를 통제할 수 있는 ‘절대반지’를 손에 쥐자 대학강사의 지위는 급락하였다.

1962년, 박정희 정권은 「국?공립대학및전문대학강사료지급규정」을 만들어 그 제3조2항에서 ‘시간강사료는 시간강의를 담당한 자에게 실지로 강의한 시간 수에 의하여 지급한다’는 시간당 강의료 지급 근거를 설치하였다. 1963년에는 「교육공무원법」제27조를 손질하여 교육공무원에 드는 강사의 범위는 예전대로 두었지만 총?학장이 임면하는 강사를 전임강사로 국한시켰다. 10월 유신이 단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72년 12월 16일에는 「교육공무원법」의 교육공무원 정의에 전임강사란 단서를 달아버렸다.

마침내 1977년 12월 31일, 「교육법」 제75조에서 ‘교원에 포함되었던 강사를 전임강사로 바꾸어 버려 강사들의 교원지위를 박탈’하였다(홍영경, 2003). 지식인을 통제하려는 최고 권력자의 야욕이 오늘날의 시간강사 문제를 야기시킨 것이다. 1980년대에 집권했던 전두환?노태우 군부 정권은 국민들의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고자 대학과 대학생의 수를 대폭 늘렸다. 이 과정에서 전임교원을 별로 충원하지 않아도 대학을 운영할 수 있게 해 주어 오늘날 부실 대학의 초석을 확고히 다져 주었다.

**이상은 2007년 8월 23일 국회 정책 토론회 자료집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문민 정부와 국민의 정부 기간 동안 대학 교육 개혁이 화두로 제기되며 무수한 개혁 정책들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무 것도 없었다. 새로 들어온 참여 정부 또한 또 다른 대학 교육 개혁을 시행했다. 그러나 겉모양만 바꾸면서 기존의 방식 그대로 시행되거나 근본적인 사항을 고치지 않은 채, 대학 개혁 정책이 시행될 때 그것은 또 다른 교육 ‘개악’이 될 뿐이다. 다른 어떤 것보다 대학 부문에서는 대학 강사 및 비정규 교수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교육 개혁은 고사하고, 대학 교육의 정상화도 가능하지 않다.

오늘날 대학 강사 및 비정규직 교수에 대한 문제는 크게 몇 가지 문제로 이야기될 수 있다. 먼저, 대학 강사와 비정규직 교수들이 대학 강의의 절반 이상을 담당한 지가 오래되었지만, 강의 여건이 거의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가 비정규직 교수의 임금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도 힘들만큼 열악하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교수의 한 달 임금은 평균 80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규직 교수와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정도의 차이가 나는 수준이다.

사실상, 정규직 교수와 강사와 비정규직 교수는 동일한 자격을 가지고 동일한 노동을 하지만, 사회적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교수 사이의 차이는 극심하다. 예를 들면, 정규직 교수(전임 교수)는 금융 기관의 신용도가 A등급이며, 온갖 사회 보장이 되어 있고, 안정적인 연구와 교육이 가능하다.

그러나 강사 및 비정규직 교수(비전임 교수)는 금융기관의 신용은 無이며, 온갖 사회 보장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으며(기본적인 4대 보험만이라도 적용해 달라는 것이 비정규직 교수들의 바람이다), 안정적인 연구와 교육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비정규직 교수들이 전임 교수를 지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에 무리를 해서라도 교수가 되고자 하고, 채용 비리가 없어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비리와 같은 부당함이 당연시되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사회에 나가서도 사회의 부당함과 불평등을 당연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이 정의가 숨쉬는 곳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대학 강사 및 비정규직 교수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세 번째는 비정규직 교수의 신분이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비정규직 교수는 ‘교원 노동자로서의 법적 신분’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고등교육법 시행령] 제 7조에 따르면 시간 강사를 단지 “교육 과정의 운영상 필요한 자”로서 일용 잡급직의 한 형태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4대 사회 보장 보험 적용 대상에서도 빠져 있다.

헌법에서 교원들의 지위에 대해 법률로 정하도록 한 것은 교원들의 신분이 안정되어야 보다 좋은 교육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 강의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지위를 전혀 부여하지 않는 것은 대학 교육을 방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대학 강사 및 비정규직 대학 교수들에게 ‘교원 근로자로서의 법적 지위’를 하루 빨리 부여해야 한다.

네 번째는 이러한 것들로부터 발생하는 문제이다. 즉 학생들의 학습권이 엄청나게 침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학 교육의 절반 이상(평균치:53% 정도)을 담당하고 있는 비정규직 교수들이 자신의 생존 문제에 얽매이게 될 때, 학생들에게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게 됨으로써 학생들의 의문을 제때 풀어주지 못하여, 학생들의 학습 의욕을 상당히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교수들은 대학 교육의 한 주체이면서도 능동적으로 대학 교육에 참여하지 못하고 강의만 할 뿐, 교육 과정을 설계하고 입안하는 일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 있으며, 학생 지도와 상담을 사실상 할 필요가 없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학 교육을 담당하는 한 사람으로서 상당히 가슴 아픈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섯 번째는 신분상의 불안정과 경제적 어려움이 연구와 교육에 집중하는 것을 힘들게 하고, 그리하여 보다 나은 교육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전반적으로 대학 교육의 질을 저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곧 어처구니없게도 이 사회의 모토라고 할 수 있는 ‘경쟁력 강화’에 위배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교육 개방이 이루어지면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뜻 있는 비정규직 교수들은 ‘한국비정규직교수 노동조합’을 만들어 힘을 모으고 있다. 한국비정규직대학교수노동조합(이하 비정규직교수노조)은 1인 시위 및 집회, 정규직 교수 단체와 연대투쟁, 국회 토론회 참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 언론매체와 인터뷰, 기고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7만 대학강사들이 대학교육의 절반 이상을 맡아 실질적으로 교원의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이를 인정받지 못한 채 온갖 부당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는 실태를 적극적으로 알려 나갔다).

이와 함께 강사의 법적 교원 지위 부여 및 강사의 처우개선 대책을 해당 정부부처에 끈질기게 요구함으로써 40년 이상 방치된 대학강사의 문제를 그들이 이제는 더 이상 방관하거나 서로 책임을 전가할 수 없도록 여론을 조성하였다.

먼저 강사 문제의 1차적인 해결은 강사들이 자신의 역할과 능력에 걸맞게 법으로 교원근로자임을 보장받는 것이다. 이러한 법적인 보장을 통해서 다음 표와 같이 강사를 비롯한 비정규직 교수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비전임교원 제도 문제의 해결 수준]

 

다른 한편 학생들의 수업권 강화에 힘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수업권 강화는 강사들과 비정규직 교수들의 노동 조건 개선, 생존과 유기적이고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100명이 넘는 대형 강의실에서의 강의는 거의 일방적인 강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설사 토론식 수업이 이루어져도, 그 수업에 참여하는 인원은 소수의 학생들뿐이기 때문에, 나머지 학생들은 단순히 구경꾼으로만 전락하게 될 수밖에 없다.

수업은 모든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수업 인원 수가 줄어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학생들이 수업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며, 다른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수업 시간에 능동적으로 체험하고 학습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대학이 민주 시민을 양성해 낸다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지게 되어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학문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대학 본연의 모습을 가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이것은 곧 강사들과 비정규직의 노동 조건 개선과 생존의 보장을 위한 교원의 법적 지위 쟁취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될 수 있다.

하나의 수업 당 학생 수가 줄어든다는 것은 강좌 수가 그만큼 늘어난다는 것이며, 늘어나는 강좌 수만큼의 임금이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자면, 임금의 증대는 곧 대학으로 하여금 정규직과 비슷한 임금을 주면서 법정 교원 수에 포함되지 않는 강사를 교원으로 인정하여 한 교수 당 학생 인원 수 비율을 낮춤으로써 교육인적자원부의 지원을 더 많이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한편으로, 학생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게끔 하여, 자신들의 개성을 드러내는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교육자들의 임무이자 권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곧 대학의 학문의 발전을 가져오게 될 것이며, 따라서 연구자와 교육자의 연구 역량을 배가시킬 수 있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대학 본연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자리를 잡게 될 것이며, 이는 동시에 교육자들의 목적이자 권리를 쟁취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각 수강 과목이 어떤 관련성도 없이 개별화되어 있는 것을 각 수강 과목이 보다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게끔 수강 과목들 사이의 교류화(inter-discipline)를 꾀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학생들은 보다 폭넓은 안목을 가지게 되고, 그리하여 보다 많은 논의와 연대의 틀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대학교의 모든 공간이나 시설들은 학생들의 자치적인 학술 활동에 맞춰지게 될 것이며, 존재하는 모든 곳에서 사람을 만나려고 하며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며 만들어가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가령 예를 들자면, 그들은 그들의 삶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학습의 목록을 만들고, 서로 의견을 교환한 후에 적정한 학습 커리큘럼을 짠다. 그리고 그 커리큘럼에 따라 서로가 서로에게 교육한다. 그리고 그 커리큘럼의 내용을 풍부하고 새롭게 만들어 나갈 것이다.

이들은 일정 기간 학습하고 교육한 성과물을 다른 사람에게 발표하고,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 비판은 곧 자기 자신들의 삶에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삶의 시야를 넓혀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삶의 경이로움을 배운다.

그들의 학습, 교육의 장은 하나의 과나 단대를 넘어서서 대학 전체 차원으로 넓혀 간다. 그래서 그들은 일 주일 정도 학술 포럼 축제를 벌인다. 그 기간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교에서 먹고, 자고, 논쟁하고 토론하며 그들의 삶을 즐긴다. 매년마다 학술 포럼의 주제를 정해 모든 학회나 소모임, 동아리들은 그 주제에 맞게 학습하고 교육하여 학술 포럼 축제 때 자신들의 역량을 내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학술 포럼 축제의 실질적인 주체가 되어 연대의 아름다움을 맛보게 될 것이며, 스스로 자기 삶의 주체임을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학술 포럼 축제를 전국적인 차원으로, 그리고 세계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켜 나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세계화일 것이다.

이러한 방향으로 비정규직의 권익 옹호와 대학 교육의 민주화, 학문의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역사는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 주고 있다.

우리의 권리를 스스로 쟁취하기 위한 어렵고 힘든 길을 가는 비정규직 교수들에게 정규직 교수님들의 따뜻한 격려와 연대의 지지를 간곡하게 바란다. 비정규직 교수들은 대체로 정규직 교수님들의 후학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생 여러분들의 따뜻한 격려와 힘찬 연대의 지지를 너무나도 간절히 바란다. 학생 여러분들은 대학 교육의 다른 한 주체이자, 앞으로 노동자가 될 소중한 동지들이기 때문이다.

 

난청환자 정부와 대학의 파리아들 – 대학의 비정규직 교수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난청환자 정부와 대학의 파리아들

– 대학의 비정규직 교수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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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종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

소음성 난청 환자인 정부

6월 14일 ‘사커시티’에서 개막한 남아공 월드컵에는 ‘부부젤라’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커시티’가 위치한 요하네스버그의 남서쪽 타운십(South West Townships, 약자 Soweto)은 흑인 집단거주지로서 이번 월드컵의 개막전과 폐막식이 열리는 곳이다.

그런데 1976년 6월16일, 같은 장소에서 ‘부부젤라’대신 총성이 울려 퍼졌다. 당시에 강제적 언어정책에 반대하던 학생들과 대치하고 있던 것은 흑인을 물도록 훈련받은 개와 무장한 백인 경찰들이었다. 그 속에서 13살의 헥터 피터슨이 사살되었다. 피터슨을 죽였던 총소리는 월드컵 기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려 퍼지는 ‘부부젤라’에 묻히고 말았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대표팀이 탈락하기 전까지 월드컵의 ‘부부젤라’ 소리가 우리의 삶 곳곳에서도 날마다 울려 퍼지고 있었다. 청력이 좋은 사람은 40만 가지의 소리를 구별해낸다고 한다. 그런데 현 정권은 4대강 삽질의 소음에 너무나 장시간 노출된 탓에 청각기관의 세포가 손상되었는지 난청 환자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정부가 40만 가지의 소리를 듣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안타까운 일은 난청 환자가 되어 버린 정부가 이제 사람의 소리조차도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뜩이나 난청환자인 정부가 언론 정책까지 정부의 입맛대로 재편함으로써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 길조차 막아서고 있다. 다시 말해서, 4대강 삽질의 ‘부부젤라’ 소리에 이미 난청환자가 되어버린 정부가 MBC 장악, KBS 수신료인상 등을 통해 언론까지 장악함으로써 아예 귀를 막아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부와 자본은 각기 나름대로의 ‘부부젤라’를 불어댄다. 그 속에서 이 땅의 ‘노동자이면서 노동자 아닌 존재들’의 외침 또한 ‘부부젤라’의 소리에 가려져 버렸다. 현 정부는 국민의 그 어떤 목소리와도 소통하지 않고 ‘단절젤라’를 불고 있다. ‘2010년 하반기 경제정책방향’에서 정부는 올해의 경제성장률이 5.8%에 달할 것이며 150억 달러의 흑자를 낼 전망이라는 나팔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면서 이명박 대통령은 6월14일 대국민 연설에서 6.2 지방 선거를 통해 드러난 4대강 사업에 대한 국민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4대강 사업은 “하루라도 빨리 투자를 시작해야 하는 기업들에게도 더 이상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며 “4대강 살리기는 미래를 위한 투자이지만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몇 년 뒤면 그 성과를 볼 수 있는 사업”이라고 하였다. 여전히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막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필연적으로 ‘수난당하는 자들’을 확산시킬 뿐이다. 그런데 마치 정부의 정책에 맞장구치듯이, 6.18일 경영계는 최저임금 10원 인상이라는 ‘십원젤라’로 추임새를 넣었다.

이러한 것이 MB말하듯 “대한민국은 지금 올바른 길로 가고”있는 것인가? 접입가경이다. 또한 서울 양천경찰서에서는 피의자에 대한 소위 ‘통닭구이’, ‘날개 꺾기’라는 고문이 자행됐음이 밝혀졌다. 영화 ‘살인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고문의 추억’이다. 공포의 정치이다. 이들이 불어대는 것이 싸구려 중국산 ‘부부젤라’이기 때문인지 그 소음은 국민의 삶에 더욱 견디기 힘든 소음으로 들려온다.

정부는 공포의 정치를 동반하면서 사회적 양극화를 부채질하고 있다. 자유주의의 주창자인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의 삶에서 ‘죽음의 손’으로 되살아난 듯하다. 최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한국전쟁 60주년 특별기획전 ‘아! 6.25’에서 2000원을 내면 ‘발칸 사격 체험장’에 참가할 수 있다고 한다. 최근의 상황을 보편서, 그 총부리가 우리들을 겨누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섬뜩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대학의 파리아(Paria)

복지의 축소와 노동의 유연화로 집약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이 ‘죽음의 손’은 소외받고 가난한 이들의 목줄을 옥죄고 있다. 그리고 난청환자가 되버린 정부는 대학 시간강사들의 죽음의 소리, 대학 내 청소용역 노동자들의 질곡의 외침을 듣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비정규 교수’이면서 교원이 아니고 고등교육법 적용 대상이므로 비정규직 노동자도 아니다. 또한 대학의 청소용역 노동자들 역시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니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닌 것이다. 정부는 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고 죽음의 낭떠러지로 몰아붙이며 ‘배제젤라’를 힘껏 불어대고 있을 뿐이다.

약 7만 명의 시간 강사 중 대학 강의의 약 절반가량을 담당하는 80%는 평균 주 4.2시간의 강의로 월 평균 40만 6,000원의 강의료를 받는다고 한다. 또한 대학 내 미화노동자는 파견근로법 시행 이후 하청업체의 소속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로 생활하면서 점심 값을 위해 폐지를 주워 생활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이 바로 사회의 최하층을 형성하고 있는 파리아(Paria)이다.

파리아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을 의미한다. 원래 이 말은 힌두교의 카스트 계급제도에서 그 모든 계급 보다 아래에 속하는 하층민들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한다. 노동하며 살아가지만 노동자 계급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대학 내에서의 ‘노동자 아닌 노동자들’이 우리 삶의 ‘파리아’인 것이다. 파리아가 인도에서 길거리 청소, 구식 화장실 변 처리를 하듯이 미화노동자들도 학교에서 같은 일을 하는 가난한 노동자들이다.

결국 “이들의 삶의 형태가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니다.” 라는 것은 ‘모순’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모순의 형식은 ‘A는 B이면서 동시에 非B이다.’로 표현할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모순을 규정하는 핵심이 무엇인가이다. 자본과 노동처럼 양 극단에 있으면서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부정하는 것들 사이의 관계만을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양 극단의 존재가 부정하지 않는 관계에 있는 것은 모순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정규직 노동자’라는 말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다른 한 극인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말을 필요로 하지만 정규직 노동자는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관계가 갈등의 관계에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순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난청환자의 치료를 위하여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개인적 단자로 만들어 연대의 힘을 파괴할 뿐이다. 과거 남아프리카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이라는 인종분리정책을 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마땅히 생존을 보장받아야만 하는 국민이지만 국민이 아닌 국민을 만들어내는 ‘국민분리정책’을 펼치고 있다. 이 배제의 정책 속에서 버림받은 자들 중 하나가 대학의 파리아들이다.

이러한 배제의 정책 속에 내재하는 현실의 실재적 대립, 그 모순의 핵심에는 노동과 자본이 자리하고 있다. 모순을 자본과 노동으로 파악할 때만이 노동이 적대성을 띠어야 할 대상이 자본임을 파악할 수 있다. 결국 자본 앞에서 우리 모두는 노동자계급일 뿐이다. 이러한 적대성을 상실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적대성 속에서 노동자로서의 권리 쟁취라는 보편적 이념을 견지하면서 현재의 상황을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탈락하기 전까지 연일 월드컵 응원의 광고로 “Shouting korea”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현실에서 Shouting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비판의 외침이 그것이다. 한나라당은 참여연대의 천안함 사건의 안보리 검토 요구에 대해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려 한다. 또한 국무총리실의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이명박의 BBK사건을 블러그에 올린 민간인을 불법 사찰했다. 이들은 ‘처벌벨라’를 불어댄다.

난청환자인 정부와 한나라당의 귀에도 희한하게도 ‘비판의 외침’은 잘 들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이 여전히 인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난청환자들이기 때문에 치료가 필요하다. 난청을 치료하는 방법은 소음을 줄이는 것이다. 줄여야할 소음은 국토를 가득채운 삽질의 소음, 자본의 수탈의 굉음이다. 이것이 난청환자가 되어버린 정부가 치료받는 길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지금까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이러한 처방전은 효과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난청을 치료하는 다른 한 가지는 약물 치료를 하는 것이라 한다.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민중의 외침에 귀 막아버린 권력에게 약물은 역설적으로 인민의 외침밖에 없다. 대학의 파리아들, 이들은 노동자이면서 노동자가 아닌 존재이다. 이러한 모순의 규정자는 노동과 적대적일 수밖에 없는 자본이다. 그런데 자본은 노동 없이 증식할 수 없다. 마치 식중독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세균과 달리 감염력이 뛰어나지만 자체 증식이 불가능해서 반드시 숙주가 있어야 증식·전파할 수 있듯이 말이다.

생명의 유지를 위해서는 건강한 세포와 암세포의 모순 사이에서 건강한 세포를 죽이지 않기 위해 암세포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학에서 버림받은 파리아들은 죽어야 할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이들을 파리아로 만든 존재가 바로 암세포이며 죽여야할 존재이다.

결국 자본 앞에서 우리는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 불안정한 노동자일 뿐이다. 모든 저항의 힘은 결핍에서 온다. 노동자이지만 실질적인 노동자가 아닌 ‘결핍’, 그 ‘결핍’을 메우는 길 위에 우리 모두는 함께 서 있을 뿐이다.

 

성미산과 홍익학원 간의 이해 상충과 공생의 길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성미산과 홍익학원 간의 이해 상충과 공생의 길

글: 홍영두 (건국대 학술교수)

* 이 글은 마포구의 지역 현안 문제인 성미산을 둘러싼 홍익학원측과 성미산 주민들간의 이해관심의 충돌을 해결하는 데 이바지하고자 하여 쓴 것이다.

마포구 유일의 자연숲 성미산

마포구 성산동에 자리잡고 있는 성미산은 언덕이라고 불릴만한 작고 낮은 산이다. 그렇지만 성미산은 북한산에서 한강으로 이어지는 생태 축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2001년 생태보전시민모임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성미산 지역 대부분이 서울시가 구분한 비오톱(biotop, 야생 동식물의 안정된 서식지 즉 자연생태계가 기능하는 공간) 등급 중 “대상지 전체지역에 대하여 자연보호가치가 있는” 1등급에 해당된다고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성미산에는 천연기념물인 붉은배새매와 서울시가 지정·고시한 보호종인 오색딱다구리를 비롯해 박새, 꾀꼬리, 족제비 등이 서식하고 있다. 그래서 2009년에는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주관한 “꼭 지켜야 할 자연유산 – 이곳만은 꼭 지키자” 시민공모에 보존대상지로 선정되어 산림청장상을 받기도 했다.

성미산은 성산동 및 주변 인근 지역의 남녀노소가 아침 저녁으로 운동하는 곳이자 쉼터이며 어린이들의 놀이터이자 어린이집 아이들이 매일 오전마다 체험하는 생태학습장이다. 그래서 성산동 및 주변 지역 주민들은 홍익학원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땅까지 포함하여 성미산 전체를 자연숲 그대로 보존하여 생태공원화하자고 서울시에 요구해 왔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주민의 요구가 관철되기 어려울 성 싶다.

성미산은 2000년 이후 몇 번의 위기를 겪었지만 주민들의 슬기로운 대처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다. 2001년부터 주민들의 성미산 지키기 운동은 개시되었다. 이 운동은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가 성미산을 기습 벌목하며 성미산 정상부에 ‘배수지(수돗물 수압을 높이기 위한 거대한 물탱크)’를 건설하려고 나섰던 2003년, 주민들의 단결된 힘으로 배수지 공사를 막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다른 한편, 서울시의 배수지 공사와 맞물려 성미산 남사면 일대의 사유지를 둘러싼 끊임없는 개발 욕구가 분출되었다. 정상부를 제외한 성미산 대부분의 땅은 한양재단 소유였다. 한양재단은 서울시의 배수지 공사를 계기로 삼아 남사면 일대에 아파트 개발을 꾀했다. 하지만 배수지 공사 자체가 주민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자 한양재단은 2006년 8월경 성미산부지 대부분을 중견 건설업체 두 곳에 매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웅상사 등 건설사들은 한양학원으로부터 소유권 이전등기를 한 바로 그날(2006년 11월 28일) 몇 시간의 시간차이를 두고 홍익학원에 되팔았다.

2007년 홍익학원은 성미산으로 홍대 부속 초중고를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전 계획이 발표되자마자 성미산을 지키고자 하는 마을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가 뒤따랐다. 주민 만명 이상이 학교 이전 반대와 생태공원화를 요구하는 서명에 참여했다.

그 결과 2008년 6월 27일 서울시는 성미산 체육시설부지를 학교시설로 변경해달라는 홍익학원의 요청을 마포구로 되돌려 보내며 재검토를 요구했다. 그 당시 서울시 자문기구인 녹색서울시민위원회(공동위원장 오세훈, 윤준하 등)는 성미산을 자연숲 그대로 보전하는 생태공원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결정을 했고, 학교부지 문제는 여러 기관들이 지혜를 모아 슬기롭게 대안을 모색해보자고 제안했다. 위원회는 이런 취지의 공문까지 발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결과 지난 3여 년간 성미산을 지키고자 희구한 주민들의 반대 때문에 홍익학원은 홍익대 사범대학 부속 초중고의 이전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다.

성미산 남사면 일대를 파괴하기 시작한 홍익학원

그러나 현재 성미산 남사면 일대는 홍익학원의 신축공사 때문에 생태환경 파괴의 위기에 노출돼 있다. 홍익학원은 6·2 지방선거가 진행중이었던 지난 5월 20일 서울시 교육청으로부터 기습적으로 건축허가를 받아 냈고 5월 28일 공사 착공에 들어갔다.

홍익학원 시공사 쌍용건설의 포클레인은 주민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1주일 동안 쓰레기만 치우다가 드디어 6월 8일 성미산에 들어와 평탄화 작업을 위해 언덕을 깎기 시작했다. 그 결과 10여 그루의 나무가 뿌리째 뽑혀 쓰러졌다. 그래도 그만한 상태에 그친 것은 성미산 주민 50여명이 나무가 쓰러진 지점 바로 위에 성미산대책위 비상행동 텐트를 아슬아슬하게 치고 포클레인을 온몸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현재 성미산대책위 텐트는 포클레인에 의한 성미산 파괴를 저지하기 위해 홍익학원의 포클레인 및 관련 당사자들과 대치중이다.

10여 그루의 나무가 쓰러진 그날부터 성미산 생태계의 교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성미산 산새들이 온종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성미산을 파헤치자 들쥐들이 동네 집집으로 도망해 숨어들기 시작했다. 6월 13일부터 홍익학원측은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성미산 남사면 일대를 철망으로 둘러쳤다. 마을 주민들은 이 철망이 나무에 상처를 입히고 성미산 생태계의 순환을 방해할 것을 걱정하고 있다. 홍익 초중고가 들어설 자리는 원시림을 방불케 할 정도로 생태적 보존 가치가 높은 아름다운 자연숲이 형성되어 있는데, 신축공사 때문에 자연숲이 완전히 사라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신축공사가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면적상으로도 성미산의 약 4분의 1이 사라질 것이며, 성미산 일대에 흩어져 있는 홍익학원 소유의 남은 땅까지 암암리에 개발된다면 성미산은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 여하튼 성미산을 지키기 위한 마을 주민들의 지난 9년간 피눈물나는 노력은 하루 아침에 물거품이 될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성미산과 홍익학원 간의 갈등은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인가?

현재의 대립 상황은 성미산을 지키고자 하는 주민 비상대책위와 신축공사를 강행하고자 하는 홍익학원측 간의 이해관심이 충돌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 같은 이해관심의 충돌을 피하고 양자의 이해관심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해법은 없을까?

홍익학원측은 성미산을 지키고자 하는 주민 비상대책위원회를 불의와 불법의 단체로 규정하고 있을 뿐, 성미산 주민 및 공사현장 바로 옆에 위치한 성서초등학교 학부모와 공사중 뒤따르는 위험과 안전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협의도 거부하고 있다. 홍익학원측은 공사현장과 바로 맞닿아 있는 도로 및 자전거도로를 통해 통학하는 인근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안전 문제에 대해서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홍익학원측은 신축공사를 강행하겠다는 의지만 표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 의지 표명의 근거는 서울시 교육청으로부터 건축허가를 받아 냈다는 것이다. 건축허가의 근거는 1) 홍익학원이 성미산 남사면 일대에 대해서 소유권을 갖는다는 점, 2) 홍익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열악한 교육 환경 및 건전하지 못한 주변 여건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성미산 비상대책위와 홍익학원이 갈등을 빚는 대립 지점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야 해결의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립 지점은 2)가 아니라 1)이다. 성미산 대책위도 홍익 초중고등학생들의 학습권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립 지점이 ‘홍익학원이 성미산 남사면 일대에 대해 갖는 소유권’과 ‘성미산의 고통을 대변하는 주민의 이해관심’ 간의 충돌에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홍익학원측은 성미산 대책위가 학생들의 학습권을 무시하는 듯 허위 선전을 하고 있다. 성미산을 파괴하는 신축공사를 반대하는 대책위의 행위가 학생들의 학습권을 무시하는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목적과 수단은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홍익학원측이 목적과 수단을 슬쩍 바꿔치기하여 주민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주민들간의 반목을 조장하고 있다.

홍익학원측의 의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여 신축공사의 목적이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는 데 있다고 한다면 그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은 성미산을 파괴하는 신축공사일 것이다. 성미산 대책위는 홍익학원측이 표방하는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 갖는 문제점을 지적하며 그 수단적 행위인 건축공사를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정당한 목적을 가진 행위라고 하더라도 그 수단이 정당하지 못하다면 그 수단은 재고되어야 한다.

신축공사로 인한 성미산의 생태환경 파괴의 위기, 학생들의 통학안전권 확보 미흡, 신축공사 후 발생할 초등학생들간의 위화감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성미산을 파괴하는 신축공사 행위는 정당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홍익학원은 홍익 초중고의 이전을 위한 신축 공사를 즉각 중지해야 한다.

홍익학원측은 학생들의 학습권 보장이라고 하는 교육 공익성의 가면을 쓰고서 자연숲 성미산을 사라지게 만드는 신축공사의 비공익적 행위를 목적 달성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익학원측은 비공익적 신축공사를 교육의 공익성이라는 가면 속에 포장하려고 획책해 왔다. 이 같은 홍익학원측의 태도가 얼마나 비교육적인지 잘 알 수 있다.

홍익부속여자중학교장은 성미산을 파괴하는 신축공사 행위에 대한 주민들의 동의를 강요하면서 ‘친환경 명품학교’를 건축하겠다는 이율배반적 언명을 서슴지 않고 있다.(2010. 6. 14. 홍익여자중학교장 명의의 유인물 참고) 교장의 말씀은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의 실용주의 노선과 일치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학교의 교장이 어떻게 이토록 비생태적이며 반환경적인 주장을 스스럼없이 행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학생들의 학습권은 어떻게 존중되어야 할까? 홍익학원측은 홍익 초중고의 이전을 위한 대체부지를 평지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홍익 초중고 학생들의 학습권과 자연숲 성미산의 보존은 공생할 수 있다. 대체부지는 당인리 화력발전소, 구 마포구청, 상암동 등지에서 마련될 수 있다고 주민들은 말한다.

홍익학원의 저의는 무엇일까?

홍익학원이 진정 참다운 교육사업을 지향하고자 한다면, 학생들의 학습권과 생태환경권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홍익학원측은 대체부지 확보를 위해 서울시 교육청과 서울시청에 건의서라도 제출해야 했을 것이다. 홍익학원이 그랬던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만약 건의서조차 제출한 적이 없다면, 홍익학원측의 신축공사 목적은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미산 남사면 일대에 대한 소유권 행사를 통한 사적 이익 추구에 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홍익학원의 모습은 자본주의적 기업들의 사적 이익 추구욕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홍익학원은 교육의 공익성을 재성찰해야 하겠다.

우리는 인류가 파괴해온 자연 환경이 오늘날 인간과 사회에 복수하고 있는 점을 뼈저린 교훈으로 되새기고 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지구상에서 살아가야 할 인류의 시간을 걱정하며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중요한 윤리 덕목으로 교육하고 있다. 이 말은 성미산에도 해당된다. 한번 무너진 성미산은 다시 원상태로 회복 불가능하다.

홍익학원측은 생태환경의 가치가 그 어떤 가격도 매길 수 없다는 점을 깨닫고 있는지 묻고 싶다. 이 점을 자각하지 못한 채 학생들의 학습권을 앞세우는 것은 후안무치한 태도다.

홍익학원측이 성미산 남사면 일대에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적 소유권의 행사는 정의로워야 한다. 오늘날까지 영리추구를 위해 자연환경을 파괴해 왔던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기업들이 자연환경 파괴에 대해 그 어떤 대가도, 그 어떤 환경비용도 치루지 않고 공짜로 생태환경을 이용해 왔던 사실은 오늘날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비판받고 있다. 이 교훈에 따르면 홍익학원측은 성미산에 홍익초중고 이전을 통해 막대한 환경 파괴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성미산을 공짜로 이용하고자 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성미산 남사면 일대의 천연숲은 개인의 소유권만을 지상의 가치로 여기는 소유 개인주의의 희생물이 더 이상 되어서는 안 되는 공유지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 곳은 어린이들이 생태환경의 중요성을 체험하는 생태학습장이다. 공익성이 강한 교육 공간을 황폐화시키면서 친환경적인 명품학교를 건축하겠다는 발상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임을 홍익학원측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파괴한 환경 비용을 오늘날 개발도상국들에게 전가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홍익학원도 이 잘못을 범하고 싶어하는 것일까? 홍익학원은 성미산 개발에 따른 환경 파괴 비용을 얼마 있지 않아 성미산 주민에게 고스란히 전가할 것이다. 이런 문제점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는, 사적 소유권의 행사가 생태환경적 가치의 보존이라고 하는 공익과 충돌을 빚을 경우 그 사적 소유권의 행사는 중지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진행중인 홍익학원측의 신축공사는 즉각 중지되어야 마땅하다.

홍익학원이 성미산 남사면 일대를 사들인 580억은 성미산 파괴 때문에 생기는 환경비용을 상쇄할 수 있는 금액인가? 580억 가지고서는 홍익학원측이 파괴할 성미산 남사면 일대의 자연환경적 가치를 회복할 수 없다. 홍익학원측은 자신이 주장할 수 있는 소유권 이상으로 막대한 환경 피해 비용을 증가시키고 있다.?

홍익학원측의 580억은 성미산 남사면 일대를 간직하고 보존할 수 있는 권리, 말 그대로의 소유권일 뿐이다. 홍익학원측이 파괴시킬 자연숲을 복구하는 비용은 1000억을 넘는 비용, 자연숲은 금액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다. 뭇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해야 할 성미산을 착취하고 환경 파괴를 자행하면서까지 친환경 명품학교를 건축겠다는 발상은 소유 개인주의의 발로다. 이런 행태는 사학재단이 영리 추구를 위해 교육사업을 행한다는 세간의 비판과 맞물려 있음을 우리 모두 직시해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반환경적 성격을 갖고 있다. 중심부 자본주의 국가들은 인간을 착취하는 전 세계 체제를 유지해 왔듯이 지구의 자원도 약탈해 왔으며, 오늘날 생태 환경 위기의 대명사인 지구온난화 문제를 일으킨 주범이다. 지구온난화 문제는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환경 오염 비용을 물지 않고 자연 환경을 파괴한 결과다.

홍익학원이 자연환경 파괴의 비용에 대해서 아무런 부담도 느끼지 않고 건축 공사를 감행하고자 하는 행위는 바로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자원 약탈 행위 및 환경 비용의 약탈과 동일한 종류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환경영향 평가를 무시하고 교육을 빌미로 영리를 추구하는 것은, 홍익 재단이 이미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다. 홍익학원은 자본의 폭력성을 교육 현장에서 재현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자연 환경과 인간 사회 간의 공생은 생태 환경 교육의 중요한 주제로 이슈화되어 있다. 자연과 인간이 공생하는 사회적 신진대사야말로 생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근본 처방이다. 그러나 자본 축적의 논리가 이 처방을 방해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생태 환경의 공익성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도 모자랄 판에 사학재단이 마포구 유일의 자연 숲을 훼손하면서까지 교육 시설을 건축하겠다는 발상은 비교육적이며 비공공적이다.

학생들의 학습권을 핑계로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것은 기만이다. 미래 세대의 자원인 자연 환경을 파괴하는 홍익 재단이 미래 세대를 교육할 수 있는 자질과 소양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홍익학원은 스스로 반성해야 한다. 홍익학원은 그 이름에 걸맞은 행위를 하지 못하고 있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은 건국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온 교육 이념이다. 그 뜻은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홍익학원은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행동해야 한다.

서울시 교육감과 서울 시장에게 바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이번에 새로 선출된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은 서울시 교육감 권한대행이 지방선거 이전에 결정한 홍익학원 시설계획 변경 승인과 건축 허가를 재심의해야 한다. 이와 동시에 서울시 교육감은 즉각 신축공사 중지를 명령해야 한다. 그리고 서울 시장과 함께 홍익학원의 사범대 부속 초중고를 이전하기 위한 대체부지 마련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통해 성미산 남사면 일대의 자연환경적 가치를 보존함과 동시에 홍익 초중고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홍익학원의 신축 공사 중지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성미산과 그 주민들만의 것이 아니다. 성서초등학교 학부모들 사이에서도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성서초등학교는 홍익초중고가 들어설 자리와 맞붙어 있는 학교다. 이 학교 학부모들도 홍익학원의 학교 건축계획안을 검토 후 학생들의 통학로 안전권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하여, 지난 2월 말에 학부모 비상대책위를 꾸려 활동해 왔다.

이러한 성서초교 학부모들의 반대와 마포구청의 재협의 요구로 서울시교육청은 홍익학원에 건축계획안을 수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홍익학원은 건축계획안을 수정 제출하였으나, 학부모 비상대책위는 이 수정안 역시 통학 안전권이 보장되지 않는다 하여 반대하였다. 학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자전거도로와 통학로에 등하교 시간 차량 출입이 극심할 것으로 예측되는 두 개의 차량 출입구가 생기는 것은 학생들의 안전에 위협을 준다는 이유 때문이다. 더욱이 홍익 초중고의 정문을 성서초등학교 앞 왕복3차로의 좁은 도로편에 내겠다고 계획이 잡혀 있는데, 이는 아이들의 자전거 통학 및 도보상의 안전을 완전히 무시한 폭력이다.

그리고 공사 진행중에 발생하는 소음과 먼지는 홍익학원의 학교부지와 맞닿아 있는 성서초등학교 아이들의 학습권 및 환경권을 심각하게 침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홍익학원이 주장하는 홍익학원 학생들의 학습권을 보장하는 것은 바로 성서초등학교 아이들의 학습권 침해를 필연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는 이해 상충을 낳고 있다.

홍익 초중고 학생들은 현재 위치한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새 건물이 세워지면 이사하는 정도에 그치기 때문에 학습권 침해는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학습권의 공백도 없다.

그에 비해 성서초등학교 아이들은 공사가 진행되는 1년 6개월 동안 거의 학습권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어느 한 편의 권리의 보장이 다른 한 편의 일방적인 권리의 희생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은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형평성 없는 교육 행정 때문에 균형 있는 권리 행사가 실종될 위기에 놓여 있다.

교통 체증 문제도 심각한 수준이다. 홍익 초등학교는 6대의 스쿨버스를 운행하고 있으며 초등학생의 50% 이상이 자가용으로 등하교를 하고 있다. 이들 초등학생을 포함하여 대략 2300여명 이상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이전해 올 경우 성서 초등학교 앞의 도로 사정은 극히 혼잡할 것이다. 학생들의 안전 문제는 비단 성서초등학교뿐만 아니라 홍익 초중고등학교에게도 똑같이 보장하기 어렵다.

성서초등학교 학부모들 중에는 공립 초등학교 바로 옆에 사립 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성서초등학교 학생들이 위화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불안한 심정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있다. 그래서 중고등학교는 이전되더라도 초등학교까지 이전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을 갖고 있는 분들도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여 오세훈 서울 시장은 대체부지 확보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2008년 약속을 이행하기 바란다. 또 서울시 교육감은 신축공사 중지 명령부터 내리고 이전 결정을 재심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미산이다!

“나는 산이다.” 이 문장은 6월 12일 홍익재단 신축공사를 반대하는 주민들의 집회 당시 퍼포먼스 행위를 연출한 어느 학부모의 등에 붙어 있던 문구다. “나는 산이다.”는 문장은 인간과 자연 간의 물질적 신진대사, 인간과 자연 간의 공생을 단적으로 표현해준다. 이처럼 성미산 주민들은 6월 중순 마을축제 기간 동안 성미산의 고통을 호소·대변해 왔다. 포클레인에 의해 나무가 잘려나갔을 때 성미산의 산새들이 온종일 울어젖혔던 것처럼 성미산 주민도 아파했다.

성미산 남사면 일대가 파괴되면 될수록, “나는 산이다”는 구호는 점점 주민들의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우리는 성미산이다”는 외침으로 울려 퍼져 나갈 것으로 보인다.

지금 성미산 주민들은 도시재개발 사업과도 같은 홍익학원의 초중고 이전 계획의 실행이라는 무자비한 폭력이 성미산 마을 전체를 통째로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을 갖고, 성미산을 깎아 없애려는 홍익학원에 맞서고 있다.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가면을 쓴 사학재단의 폭력성을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을지 새로운 실험을 성미산 주민들은 행하고 있는 셈이다. 성미산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개발의 폭력성을 막을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반면에, 신축공사를 통해 개발 이익이 파생할 것이라 보는 주민들도 있다. 하지만 홍익학원이 표방하는 친환경 명품학교 건축을 통해 마포구 주민, 아니 서울 시민은 얻을 것보다 잃을 것이 더 많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환경 파괴로 인해 입을 손해가 개발 이익을 상회한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홍익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상업적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더 큰 생태환경적 가치를 지닌 자연숲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당장은 이 점을 실감하지 못하겠지만 얼마 있지 않아 이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자연환경적 조건을 떠나서 인류는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의 목숨은 교육보다 선결되어야 할 문제다. 자연환경이 우리에게 주는 산소 없이, 생물종의 다양성 없이 교육이 가능하겠는가? 성미산 주민을 비롯한 마포구 주민은 성미산으로부터 은연중에 많은 혜택을 받아 왔다. 성미산 남사면 일대의 파괴로 인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누렸던 혜택을 이제 누릴 수 없게 될 것이다.

목전의 이익에 눈이 멀어, 멀리 내다봐야 할 환경 문제를 등한시한다면 성미산은 친환경 명품학교와 성미산 주민에게, 더 나아가 서울시민에게 분명코 복수할 것이다.

이와 같은 불행한 사태를 방지하고자 한다면, 성미산을 지키고자 하는 주민들은 학생들의 학습권을 존중하여 홍익초중고 이전을 위한 대체부지 마련을 서울 시장에게 촉구해야 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성미산을 지키고자 하는 주민들은 신축공사 중지를 서울시 교육감에게 청원하여 대체부지 마련을 위한 길을 닦는 데 앞장 서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성미산 전체를 자연숲 그대로 보전하여 생태공원화하는 길이 현실화될 것이다.

*성미산대책위원회 네이버 블로그 주소: http://blog.naver.com/supsubi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대학 – 대학과 자본 간의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대학

– 대학과 자본 간의?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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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박종성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

대학의 이념과 현실, 대학 없는 대학

흔히 우리는 대학을 전문적인 고등 교육과 연구를 함께 하는 기관이라고 한다. 교육과 학습은 대학의 이념이다. ‘교육’(敎育)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교(敎)는 ‘본’을 상징한다. ‘본’은 ‘본뜨다’, 즉 “본보기로 삼아 그와 똑같이 하다”는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본따다’, 즉 “남의 것을 배워서 따라하다”에서처럼 이상(理想)을 뜻하는 가치론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 가르치는 것은 배우는 사람이 본을 보고 따라하고 제대로 따라하지 못하고 틀릴 때 매로 살짝 쳐서 틀린 것을 고쳐서 제대로 따라하도록 하는 것이다. 육(育)은 우리말로 ‘기리는’것이다. 그러니 ‘교육’은 본받음을 기리고 칭찬해서 더 잘 본받게 하는 것이다.

학습(學習)은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학(學)은 구(臼)와 효(孝)와 경(?)과 자(子)로 구성된 문자이다. 구(臼)는 ‘두 손으로 받들다’는 뜻이고 효(孝)는 ‘본’의 상징이며, 경(?)과 자(子)는 ‘어린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안으로’의 뜻이다. 즉 학(學)은 ‘배우는 사람이 효를 받들어 자신 안으로 본받다’는 의미이다. 습(習)은 ‘익히다’란 뜻으로 기림을 받아 신명이 나서 본받은 바를 자꾸 연습하여 몸에 버릇이 되고 익숙하게 됨이다.

그러나 현실의 교육은 이러한 본래의 이념과는 큰 간극을 드러내고 있다. 대학에서 교육의 이념, 즉 본받음을 기리고 칭찬해서 더 잘 본받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현실의 대학은 이미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제 대학이 본뜨고 본따야 하는 것, 즉 존재론적이고 가치론적인 이데아(idea), 형상(eidos)은 ‘자본’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인간은 물화되었고 인간의 가치또한 교환가치로 환원되고 있다. 더욱이 교육 과정에서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학생 모두 자본의 가치 추구에 의해 생존을 규정받는다. 우리는 이로부터 그리 자유롭지 않다.

살아 있는 것이든 죽은 것이든 모든 것을 교환가치로서 취급하고 강제하는 체제는 비정규직 교수의 삶을 양산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비정규직 교수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대학을 자본의 논리로 운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화되고 있으며 이에 저항하는 이는 배움의 장에서 쫓겨난다.

예를 들어 지난해 12월 중앙대학교의 학과 통폐합을 예고하는 구조조정 과정 중에서, 학교 정문 앞 공사장 크레인에서 대학의 기업화에 반대하는 농성을 하던 이 대학 독어독문학과 학생 노영수 씨가 최근 퇴학당했다. 그리고 상지대학교에서는 비리로 인해 실형을 선고받았던 전 이사장의 복귀 움직임이 노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3월에는 고려대 김예슬 학생이 교육이 없는 학교를 거부하며 대학을 떠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대학의 이념과 현실에 대해 반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미 대학은 경제논리로 지배되고 있다. 돈 안되는 학과는 폐지하고 통합하는 기업적 발상의 구조조정이 전면화되고 있다. 이러한 대학의 교육 속에서 인간의 욕망은 획일화되어 간다. 자본주의적 인간형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무엇인가? 이는 돈이다. 이를 위해 대학에 가야만 한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은 취업이 잘되는 학과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호모이코노믹스’의 ‘욕망의 경제학’이다. 호모이코노믹스는 이기적 인간의 욕망을 기초로 운동한다. 결국 자본은 대학생들의 욕망을 이기적인 원자적 욕망으로 재편성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이제 대학생들의 삶의 이상형은 ‘자본이 바라는 욕망을 자기 자신의 욕망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자본의 논리가 정치를 포섭하고 있는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과거 소크라테스나 프로타고라스는 교육의 내용에 있어서는 다른 입장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모든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열쇠로 보았다. 이는 교육이 그만큼 새로운 사회구성을 위한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새로운 공동체의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 것이 대학의 본연의 자리일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이와는 너무 다르다. 자본이 추구하는 가치를 ‘본받고자’ 하는 대학은 있다. 그러나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을 ‘길러내는’ 대학은 없다.

나를 지배하는 자본의 욕망

영화 [왕의 춤]이 기억난다. 이 영화에서 루이 14세는 절대주의 체제의 확립을 위해 궁정문화를 만들고 이를 통해 귀족과 성직자 등 상층집단을 제압하고 민중을 승복시키고자 했다. 국왕은 인민에게 자신의 힘을 표상시키고 상징적으로 재현하고자 예술을 종속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루이 14세는 프랑스 아카데미를 장악하여 사상과 학문을 통제하고자 했다.

[왕의 춤]은 우리 시대에 “자본의 춤”으로 등장한다. 자본의 상징적 재현이 지금의 교육 현실이고 이를 통해 모든 가치를 표상한다. 자본으로 군림하는 힘의 표상은 대학의 기업화를 통해 주조되고 있다.

인간은 타인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해 간다. 그런데 대학이 기업의 논리로 운영되면서 자본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새로운 나르키소스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자기 아름다움에 대한 도취에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의 길이 아니라 자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대체하면서 살아가는 길은 모든 가치를 차디찬 경쟁과 이익 계산의 논리 속에 빠질 뿐이다.

자본의 가치를 제외한 모든 가치가 허무주의라는 강물에 빠져 죽었다. 오직 살아있는 가치는 교환가치만이다. 인간과 자연 모두를 교환가치라는 추상적 동일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이 4대강 사업, 대학의 기업화, 체제의 재생산을 위한 출산 정책이며, 언론의 자유를 자본 운동의 자유로 만드는 것이다.

결국 교환가치로 환원 가능한 것만이 존재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자본은 새로운 주체로 등장하여 교환가치로 환원 가능하지 않는 것들을 자본의 타자로 규정하면서 배제한다. 효용성이라는 생산성의 원리 하에서 교육과 자연 모두가 도구화되어 간다. 칸트 식으로 말하면, 이때 자본이 요구하는 것은 자율적인 지성적 인간이 아니라 명령에 복종하는 오성적 인간이다.

외적인 자본의 욕망이 인간의 욕망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 결국 우리 내부의 욕망을 구성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주류 가치관인 이 욕망의 실현이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와 훌륭함의 기준이 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나’를 찾는 길은 환상으로 규정된다.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환상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 오히려 환상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환상 속에 있는 이들은 사회에서 도태되었다고 규정된다. 자본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상적 자아로 ‘착각’하게 만드는 대학의 기업화는 인간을 ‘자신이 아닌’ 자본의 욕망에 매혹되어 살아가게 한다.

이러한 자본의 효과는 생산성 원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게 만드는 사회는 생산성의 원리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획일화된 욕망을 통해 사회적 통제를 효과적으로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영어의 university에 해당하는 라틴어 ‘universatas’는 ‘종합’을 의미한다. 이는 다양한 가치에 대한 종합적이고 비판적인 사유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은 다양한 가치를 음미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의 가치, 즉 자본의 가치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화하고 있다.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것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욕망은 ‘나’의 욕망이 아니며 외부의 욕망, 자본의 욕망이며 도착된 욕망이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는 욕망의 위험함을 감지하여 그와 관련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이유는 교육이 사회 속에서 인간을 자유롭고 책임 있는 존재로 변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본성과 교육은 유사하다. 왜냐하면 교육은 인간을 변형시키며, 변형시키면서 새로운 본성을 만들기 때문이다.”[단편 33] 그의 주장은 하나의 욕망, 즉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게 만드는 우리의 현실에서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 교육은 인간의 욕망을 자본의 욕망과 일치하는 하나의 욕망으로 변형시켜 다른 욕망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욕망과 무질서에서 벗어나 자신을 변형시키는 것은 교육이 갖는 특별한 정치적 성격이다. 무엇보다도 교육은 이렇게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 내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때 자유로운 연구와 비판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지금 자본의 욕망이 교육의 지향성을 대체시키고 있는 현실은 인간 존재를 자본의 욕망과 맞서 살아가지 못하게 한다. 이렇듯 교육은 양날의 칼이다. 한편의 칼날은 불평등과 자유의 억압에 대한 해방의 인간형을 만들고 다른 한편의 칼날은 차별과 억압, 무비판적 인간형을 만든다. 후자는 비판적 교육을 청산하고 체제의 추종자를 만들어낸다.

나의 욕망을 지배하는 나의 욕망

자본의 욕망은 물적이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물적이지만은 않다. 인간의 욕망을 물질적인 것으로만 취급하는 것은 인간의 소외 문제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상품-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인간의 욕망을 물질적인 것으로 취급하여 결국 인간관계를 물적관계로 뒤바꿔놓기 때문이다.

인간을 물화시키는 자본주의 사회 통제는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만을 조장하는 소비문화를 통해 구성된다. 소비문화의 전시상이 되어 버린 대학가, 박제된 혁명가 체 게바라의 표정을 입은 티셔츠도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타자가, 즉 자본이 우리들을 욕망하고 있다고 오인하는 도착적 증세는 자본주의적 상품 경제 속에서 구조화되면서 자아 형성의 공간을 새롭게 구성한다. 이 공간의 중심적 자리에 대학이 자본의 운동을 위한 매개체로 놓여있다. 이 장소는 우리의 자아를 끊임없이 자본의 욕망과 동일화시켜내면서 ‘자기 소외’를 강제하는 훈육의 공간이다. 그리고 이 상품경제의 체제 속에서 우리는 타인의 삶을 향해 자본의 욕망을 욕망할 것을 강요한다.

그러나 자본의 욕망 속에 던져진 우리들은 우리 내면의 자신의 욕망이 갈구하는 목소리와 갈등 관계 속으로 들어가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욕망이라고 간주되었던 욕망이 결국은 자본의 욕망에 불구하며 진정으로 내가 바라는 욕망의 지향성은 참혹한 자본의 논리 속에서 금지된다는 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극의 인식이 ‘대학을 그만둔다’라는 구호와 실천으로 드러난 것이다.

결국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우리들은 포이어바흐가 말하듯이 “참된 현재적 삶과 그것에 관한 그의 견해, 표상간에 존재하는 간격 위에, 그리고 그의 영혼과 공허 위에 당나귀가 넘어지던 미래의 바보다리를 세운다.”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욕망을 빼앗는 것임을 인식해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자본의 욕망은 우리들에게 증오와 투쟁의 대상이 된다. 우리에게는 한편으로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고자 하는 자아가 존재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자본의 욕망이 우리의 진정한 욕망을 갉아먹는 대립물이라고 인식하는 자아도 존재한다. 자본의 욕망은 상상적 동일화이다. 그러나 자아가 욕망하는 것도 상상적 동일화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반론할 수 있다. 우리의 욕망도 상상적 동일화일 수 있다.

인간이 자신의 자아의 욕망을 상상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본의 욕망에 의해 구성되고 환원되는 욕망과는 달리 자신의 반성과정을 통해 자아의 상상적 동일화를 구성한다. 양자는 너무나 다른 지향성을 갖는다. 이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자아의 갈등과 감정의 교체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 이러한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의식하고 실천하는 것이 관건이다. 왜냐하면 이 속에서 자본의 욕망이 아닌 인간의 욕망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맑스가 말하듯 이러한 의식이 “대중을 사로잡을 때 바로 물질적 힘으로 전화되는 것이다.”

투쟁의 방식은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대학을 떠나는 방식이 있을 수도 있고, 대학 속에서의 투쟁 또한 있을 수 있다. 어느 것이 다른 방식보다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는 않다. 문제는 자본의 욕망으로 굳어진 낡은 질서를 균열 내는 공간에서 때로는 개별적인 때로는 연대를 통한 저항이 중요한 것이다.

자본이라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동일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찾아 지난한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자본의 거울에 비친 모습 속에 나의 모든 것을 던져 버리고 내맡기는 것은 ‘자본이라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자신의 지배를 받는다’라고 착각하는 자신은 나 자신이 아닌 자본에 투영된 나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자본의 욕망에 지배당하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대부분의 욕망은 외부에서 온다. 따라서 우리의 욕망 구조를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욕망을 구성하는 자본주의적 체제라는 ‘외부’의 틀을 전환시키는 것이 필연적이다. 교육과 학습은 분리될 수 없다. 그리고 자본의 욕망을 욕망하게 만드는 교육의 내용을 변혁하기 위해서는 교육자와 학습자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

근대계몽주의의 일방적 교육방식을 비판한 철학자 칼 맑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교육과 학습간의 일방적 관계를 지양한다. 교육자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육과 학습은 어느 한 쪽이 없이는 성립불가능하다. 술을 ‘거르’듯 우리는 허섭스레기가 되어가는 교육의 획일성을 거르는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사유의 형태에 국한되지 않으며 마치 술을 ‘거르’는 일처럼 물질적이다.

다시금 우리는 자신 내면에서 숨죽이며 꿈틀대고 있는 양심의 울림에 귀 기울려야 한다. 우리가 기름진 땅위에서 메마른 땅을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는지, 양심의 소리에 귀 막고 타인의 산물을 꼭꼭 숨기고 받아먹고 있지는 않는지.

어떤 이가 배부르다는 것은 어떤 이가 가난하다는 것이다. 사회의 기름진 옥토를 ‘기리는 것’은 우리네 책무이며 삶 그 자체이다. 교육이 우리네 삶에 아로새기고자 하는 것은 우리네 삶을 지탱해 온 것들을 위해, 그 노고와 땀을 위해 조금이나마 빚을 갚은 과정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너무나 거를 것이 많다. 이 일의 시작은 자본의 거푸집 속의 우리 자신부터라는 양심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중앙대를 바라본다 – 대학과 자본 간의 문제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중앙대를 바라본다

?-? 대학과 자본 간의 문제 –

글: 강경표 (중앙대학교 박사과정수료)

2008년 5월 중앙대를 두산그룹에서 인수한다는 사실이 공표되었다. 수많은 언론의 집중과 관심 속에서 거대 자본과 결합한 대학이 또 하나 나타난 것이다. 1996년 삼성에 인수된 성균관대를 시작으로 기업에 의해 운영되는 학교는 몇 개 있지만 유독 중앙대가 주목을 받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먼저 자본주의가 팽배해진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단행된 대학 인수라는 점과 둘째로 두산의 일방적 개혁으로 인한 학내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했다는 점, 셋째로 발생한 문제의 비민주적 처리과정이 그것이다.

중앙대학의 구조조정 일지

두산그룹의 중앙대 인수 이후 두산그룹은 중앙대에 개혁의 칼날을 드리웠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학내에서 ‘천원 재단’으로 불렸던 김희수재단과의 불협화음 속에서 중앙대의 위상은 실추될 만큼 실추된 것이 사실이다. 이에 두산의 중앙대 인수는 학내에서도 반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2009년 4월 ‘구조계획위원회’가 발족되고, 같은 해 11월 교지 [중앙문화]사태 이후 학내 여론은 급속도로 바뀌기 시작한다.

같은 해 12월 ‘1차 구조조정안’이 발표되면서 시각차는 대립으로 표출되기 시작한다. 때마침 일련의 보수언론에서 중앙대 구조조정을 찬양하는 글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학과 통폐합”(동아일보 2009.12.30), “중앙대의 학과 통폐합은 시대조류에 맞다”(세계일보 2009.12.31), “대규모의 학과 통폐합 나선 중앙대의 실험에 주목한다”(중앙일보 2009.12.31)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보수 언론의 공통된 논조는 교수사회를 철밥통으로 매도한다는 점과 학과제를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은 학생들이다. “의혈 중앙 구조조정에 대한 학생대표자 기자 회견문”을 비롯한 “학생 긴급 토론회”회를 시작으로 학내에는 구조조정 반대를 외치는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학교 측에서는 총학생회 주최의 “새내기 새로 배움터”를 불허했다.

또한 교수협의회는 토론회 및 “중앙대학교 학문단위 및 운영체계에 대한 재조명”에 대한 기자회견을 통해 구조정의 불합리성를 전달하려 했고, 이것은 본관 앞 천막 농성으로 이어지지만 2010년 4월 8일 구조조정 최종안이 이사회를 통과하게 된다.

두산효과와 박용성이사장을 바라보는 두 시선

사실 중앙대가 학내 개혁을 시도한 것은 2003년 “DRAGON2018” 계획이 수립되면서 부터다. 현 “CAU2018+”의 전신인 “DRAGON2018” 계획은 개교 100주년을 맞는 2018년에는 세계 100대 대학에 진입한다는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희망을 담고 있다. 그리고 이 희망은 “CAU2018+” 계획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두산의 중앙대 인수 이후 이 잿빛 희망은 현실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산과 중앙대가 체결한 양해각서(MOU)만으로도 2009년 대학입시에서 신입생 백분위가 1% 높아진 것이다. 뛰어난 인재 확보라는 측면에서 “두산효과”는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자본의 힘을 증명하는 하나의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두산효과” 이후 나타난 또 하나의 현상을 꼽자면 박용성이사장의 발언 수위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재계에서 “Mr 쓴소리”라는 애칭을 가진 박용성이사장은 본인의 경제관이 투영된 교육관을 강하게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2008년 6월 10일 “이사장 취임사”에서 그는 “중앙대, 이름만 빼고 바꿀 수 있는 것은 전부 바꾸겠다”는 말로 대대적인 개혁이 있을 것임을 시사했다. 중앙대의 실질적 개혁을 누구보다도 원했던 중앙인들은 그 당시만 해도 그의 말에 대부분 찬동하는 분위기였고, 지난 재단의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자본 없는 개혁의 허망함 앞에 박용성이사장의 행보에 반대보다는 찬성의 표를 던져 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009년에 들어오면서 박용성 이사장의 발언은 수위를 넘어 중앙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을 하게 된다. “기업이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야 판매가 되듯 대학도 사회가 원하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중대신문 2009.5.24), “주인의식을 갖는 것과 주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르며, 대학 사회에 경계를 넘어서는 과도한 주인의식이 퍼져 있는 게 아닌가 여겨진다”(중앙일보 2009.8.28).

학생을 제품으로 교수를 직원으로 바라보는 박용성이사장의 태도와 주인의식에 대한 비하 등은 중앙인의 가슴에 상처로 남기에 충분했다. 또한 학생들의 주인의식이 학교재정의 등록금 의존도가 높은 까닭에서 기인한다는 그의 분석은 중앙대가 아닌 중앙인에 대한 분석을 제대로 수행했는가에 대한 의문만을 남기게 되었다.

장덕진 교수는 “일등 기업의 대학 개혁”(경향신문 2010.4.14)이라는 칼럼을 통해 일등과 일류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두산을 사류기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중앙대에서 벌어지는 두산의 정신적 폭력과 비민주적 행태를 꼬집었다. 며칠 후 박용성이사장은 “중앙대 개혁의 외풍”(경향신문 2010.4.18) 이라는 제목으로 중앙대가 처한 환경과 문화를 모르는 사람들의 간섭을 외풍론으로 간주하며 당당하게 맞선다.

그러나 박용성이사장이 중앙대가 처한 환경과 문화를 운운하려면 최소한 기업의 논리를 떠나 중앙대의 특수성을 좀 더 고려해야 했다. 사실 중앙인들 스스로는 지난 김희수 재단을 썩은 뿌리라고 생각하고, 지난 재단과의 단절을 강력하게 소망하였고 강력한 투쟁을 벌여왔다. 그리고 지난 재단의 무기력함 속에서도 지금까지 중앙대가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에는 중앙인의 주인정신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중앙대 인수과정에서 드러난 지난 재단과의 관계 또한 중앙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중앙대에 직접적으로 1200억을 투자한 것이 아니라 지난 재단에 1200억을 넘겨준 사실은 박용성 이사장이 진정으로 중앙대 개혁에 의지가 있는 교육자인지 아니면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기업인에 불과한 것인지 의문을 갖게 만든다.

비민주적 절차를 통한 학과 통폐합


자본의 논리가 현실적으로 막강한 힘을 지녔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의 거의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역할이 경제적 파이를 키우는 것이라는 점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의 힘이 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그 절차가 비민주적이라면 그것을 따를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중앙대 구조조정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사건들은 중앙대 개혁에 있어 드러나는 비민주적 처리과정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학내 반대여론을 주도한다는 명분 아래 [중앙문화]와 [녹지]의 예산을 삭감한 것과 학내 언론 검열, 총학생회 주최의 “새내기 새로 배움터”의 불허, 자연대 학생회장의 징계 파문 등과 함께 민주적 절차에 따른 구조조정을 내세우면서도 제대로 된 의견수렴 절차가 없는 것 또한 그렇다.

이에 천막농성이 진행되는 가운데 “중앙대 학문단위 일방적 재조정 반대 공동 대책 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천막은 강체 철거되고, 의견수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한 박용성이사장의 개혁에 찬동하는 보수 언론들이 철밥통을 언급하며 개혁을 의심하거나 반대하는 교수들의 발언을 원천 봉쇄하고 나선 것도 자본과 결탁한 언론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또한 2010년 4월 8일 구조조정 최종안이 이사회를 통과하고 확정되던 날 불거진 고공크레인 점거 사건에 가담한 몇몇 학생들에 대한 처리문제는 기업식 대학운영에 있어 보여지는 독단을 여실히 드러냈다. 교육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할 학생의 계도 문제가 퇴학이라는 극단적 선택으로 나타난 것이다.

사실 일련의 중앙대 사태를 바라보며 우리가 유심히 지켜봐야 하는 것은 중앙대 개혁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이 아니라 그 본질이다. 지난 김희수 재단과의 단절을 가슴 깊이 갈망해온 2만5천 중앙인들은 대체적으로 박용성 이사장의 개혁에 찬성한다. 그러나 그 개혁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이루어지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대 개혁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과정들은 기업을 앞세운 자본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대학이 있음을 보여줄 뿐이다.

자본과 대학 그리고 기업

중앙대 개혁에서 나타나는 본질적인 문제는 자본과 대학의 문제이다. 이것은 기업의 대학 운영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며, 수많은 진통을 겪고 있다. 한 신문의 칼럼에 따르면 “100여 년간 변하지 않는 한국의 대학들을 세계시장과 경쟁하는 대학으로 만들려면 검증된 기업식 개혁이 정답일 것”(한국경제 2010.05.09)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따져 묻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의 기업을 통해 검증된 사실은 과연 무엇인가? “파우스트의 거래”로 일컬어지는 대학의 기업화 속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까지 받아온 교양중심의 대학교육이 정말 그렇게 문제가 많은 것일까? 효율성과 생산성이 떨어지는 인문학은 사라져야만 하는가?

이러한 일련의 질문들은 대학교육의 위상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근대를 모델로 한 민주 세력을 양성하기 위해 대학 교육은 교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세력들은 이러한 교양중심의 교육이 현대 사회에는 적용되지 않는 낡은 교육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면에는 “절대 자본”(이명원 “자본주의와 대학” 2007) 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신자유주의가 있다.

교양중심의 대학교육이 근대의 체계를 반영한다면 신자유주의는 어느 역사시대를 반영할 까? 신자유주의는 현대사회에 부합하는 최첨단 유행인가?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검증된 기업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신자유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실자본주의”에 가까운 한국적 신자유주의 모델은 이미 봉건적이다. 독단적 자본가의 의지에 따라 모든 것이 재편되어 있다. 자본가는 왕이며 그의 의지에 따라 효율성이 없다고 간주되는 것은 사라지면 그만이다. 그의 의지에 동의하는 것 말고는 어떠한 민주적 절차도 소용은 없다. 우리는 이러한 독단성을 효율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대학교육에서 자본의 역할은 경제적 파이를 키워주는 것이다. 기업 출신의 CEO들은 분명 그 역할을 탁월하게 수행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파이의 조각들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는 민주주의 교육에 부과된 몫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학 교육에는 스스로 민주주의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교육이 지속되어야만 하고, 민주적 절차를 중시할 필요가 분명히 있다.

이런 의미에서 중앙대를 포함한 대학 개혁에 있어 인문학과의 무분별하고도 일방적인 통폐합은 문제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다. 인문학은 민주주의 교육의 산실이기에 인문학의 생산성과 효율성의 문제를 경제적인 시각에서 재단하려는 일련의 시도들이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진정한 인문학의 생산성과 효율성은 그들이 만들어 내는 사회적 담론에 있다. 비록 당장은 경제적 가치가 없어 보이고, 잡음을 일으키고, 개혁을 주도하는 세력에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인문학이 지닌 민주주의를 지속하려는 의지는 계속해서 만들어져야 하며, 앞으로도 만들어질 것이고, 이것이 인문학의 생산성과 효율성의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민주적 담론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다양한 인문학적 시각이 필요하며, 이것이 인문학을 함부로 통폐합 할 수 없는 이유이다. 다시 말해 다양한 담론이 형성될 수 있는 다양한 장소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사회가 EU라고 하는 경제적 단위로 통합되어 있다고 해서 유럽의 문화가 통합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다양한 인문학적 사고를 유사학과 통폐합이라는 무딘 칼날로 재단하려는 시도 자체가 인문학적 효율성과 생산성을 궁극적으로 떨어트리는 결과만을 초래할 뿐이다.

주인과 주인의식 그리고 중앙인

“절대 자본”의 세계에서는 자본이 생명력을 갖는 근본인 것처럼 보인다. 자본이 조직을 창출하며, 그 조직은 리바이어던적 체계를 부여받으면서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체계 내에서는 생명체가 갖는 근본적 노동력은 상품 또는 교환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그 위에는 자본의 주인인 자본가만이 있다.

진정으로 주인의식과 주인이 다른 것이라면, 그래서 서로의 역할 구분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면 자본이 갖는 생명력 또한 진정한 생명과는 다른 유사체일 뿐이므로, 주인은 유사 생명체의 주인일 뿐 주인의식을 가진자들의 주인은 아니다. 그러므로 중앙대라는 이름만으로는 중앙인을 하나로 묶을 수도 없을 것이며, 통제할 수도 없고, 주인의 권리를 내세워 주인의식을 가진 자들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

또한 자율적 주인의식이 없는 노예의 도덕을 가진자들을 육성하는 것이 대학의 목표라면 그것은 분명 재고되어야만 한다. 네 것과 내 것을 확실히 구분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모델 속에서도 애사심이나 애교심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없다면 탁월한 효율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주인의식을 갖는 것 또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덕목이며, 대학교육의 일부이다.

그러나 중앙대 개혁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사태들은 자본과 대학 그리고 기업과의 관계에 있어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재단의 선택과 강요되는 침묵은 자본 앞에서 무력해지는 대학의 현실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더더욱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은 중앙대 개혁 모델을 따르려는 또 다른 사립대학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앙일보의 한 사설의 제목은 “대규모의 학과 통폐합 나선 중앙대의 실험에 주목한다”라고 되어 있다. 2만5천 중앙인이 실험대 위에 올라있는 것이다. 대규모의 사회적 실험을 아무런 비판 없이 찬양하는 글을 보면서 우리가 진정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 2만천의 중앙인이 실험대 위에 서 있어야 하는 실험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만약 실패한다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여기에 중앙인의 한사람으로서 중앙대를 바라보는 시각과 인문학을 전공하는 내 생각을 적어본다.

 

혁명과 통약불가능성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혁명과 통약불가능성

글: 이규성 (이화여대)

과학사상가 페이어아벤트(Paul Feyerabend)는 서로 환원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사고 모델이 공존하는 상황을 과학사에서 확인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그러한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을 사회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레닌과 모택동과 같은 혁명적 지식인들은 그러한 현상을 예리하게 파악했다고 지적했다. 그와 대부분의 과학사가들에 의하면 근대과학의 수리 물리적 법칙은 현재 순간인 지금(now)의 동일한 연속을 전제하고서 성립한 것이다.

이러한 전제는 과학 법칙이 과거 현재 미래에 상관없이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시간의 가역성(reversibility)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제는 이미 아인슈타인이 어느 곳 어느 시점으로도 순간적으로 갈 수 있다는, 순간에서의 무한 속도를 전제하는 것과 같다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논의들은 서양 근대 과학의 무반성적인 형이상학적 전제가 동일성이라는 사실을 서양 지성사에 각인시켰다.

이러한 논의의 맥락에서 페이어아벤트는 뉴턴-유클리드적 시­공간 좌표를 전제한 사고 유형과 이를 전복할 수 있는 전혀 다른, 그래서 통약불가능한 새로운 사고 유형이 균일하지 않게 병존하는 현상을 주목하였다. 이러한 ‘불균등발전’은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며, 그럼에도 만일 근대 과학적 사고 모델을 유일한 합리적 모델로 통용시키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고의 독재이다. 혁명사에서는 그러한 동일성에 근거한 환원주의적 태도는 교조주의적 인식 방식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갖는 맹목성은 그로 인한 실천적 패배를 보여 준다.

한 동안 한국에서도 유행했던 논리 실증주의와 칼 포퍼의 사고 모델은 근대와 현대에 걸쳐 합리적인 것으로 통용되는 것으로 믿고 있는 과학적 방법을 교조주의적으로 옹호하는 것이었다.[최근 번역된 『파르메니데스의 세계』(K. Popper, 이한구 옮김, 2010)는 근대적 동일성을 옹호하는 『동일성과 실재』(Identity and Reality, 1908)의 저자인 과학철학자 에밀 메이어슨(E. Meyerson)을 존경하고 계승하는 관점의 결정판이다.] 이렇게 보면 페이어아벤트의 『방법에의 도전(Ageinst Method)』(정병훈 옮김, 1987)은 지성사에서의 사고의 억압에 대한 폭동(revolt)을 옹호하는 셈이 된다.

정치 경제적 억압과 착취가, 철학과 과학이 비판적, 논리적 사고라는 미명하에 가하는 억제와 함께 이루어져 왔다는 것을 한국 철학도들만큼 겪어온 이들도 드물 것이다. 철학을 왜하냐? 라는 물음에 대한 응답을 망설이는 것은 조건 없이 주어진 신기한 외래 철학과 과학에 주눅이 들어 고생하고 있는 것이 이미 응답으로 되어 있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다. 지성사에도 이들을 항복시켜 수오지심을 유발한 위정자와 교육자 학술관료, ‘승냥이、돼지、남루한 개들'(레닌)이 있다.

서양 전통의 합리적 사고 모델이 생리적 불건강을 초래한 것에 저항한 니체가 “교회, 국가, 군대 이 개들이 언제 죽고자 했는가?”라고 염세적으로 반문한 것은 인간 지성의 부단한 자기 비하적 편집증이 사상과 심리, 사회조직에서 부단히 재생산되는 현상을 문제 삼은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함께 진화해온 개를 측근에 두면서도 비난의 상징으로 쓰는 것은 자신처럼 순치된 것에 대한 심적 저항과 분열일 것이다. 이러한 저항적 분열자체가, 순치된 비폭력 사회에 욕이 많듯이, 심성의 불균등발전의 한 사례일 것이다. 심성의 불균등현상이 없다면, 심리학과 정신 분석학도 없었을 것이다.

페이어아벤트는 맑스에서 모택동과 알튀세르에 이르는 급진 사상가들이 언급하는, 역사에서의 다양한 불균등현상을 주목한다. 예를 들어 맑스는 구 생산관계를 앞지르는 예술 사상이 구제도를 이끌어 갈 수도 있음을 언급하였고, 트로츠키는 사회 내 각 제도적 층위들이 평행선상에서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그러한 현상의 철학적 배경에 대해서는 모택동의 『모순론』이 훌륭하게 설명한다고 보았다. 레닌은 20세기 초부터 시작한 중국 혁명과 유럽을 비교하면서, 유럽의 부르주아 계급이 노동계급의 저항을 두려워하여 중세적인 것을 다시 들여와 그것에 안주하려고 하는 반면, 젊은 아시아는 역동적 혁명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보았다.

사실 중국 혁명은 교조주의와의 투쟁사이기도 했는데, 모택동의 사회철학은 중국 사회의 불균등발전 현상(봉건 군벌과 봉건적 유산의 잔존, 광범위한 농업과 도시 자본주의의 공존, 제국주의와 민족 자본가의 공존 등)을 모순이라는 변증법적 개념을 활용하여 예리하게 인식하였다. 그는 어떤 모순의 어느 측면이 지배적으로 작용하는가에 따라 변동해가는 역사를 분석함으로써 그의 사회과학적 안목을 입증하였다.

모순이란 반대 방향의 힘들이 동시에 서로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면서 공존하면서도 서로 알력을 생산하는 관계[대립의 통일]를 의미한다. 이 힘들은 두 개 이상일 수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계급모순은 기본 모순이지만, 과정에 있는 사회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과거의 봉건적 모순일 수 있으며, 새로운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모순이 다른 모순들을 지배할 수도 있다. 그때그때의 사회성격을 지배하는 모순은 주요모순이라 부르고, 자본주의의 공통된 모순인 계급모순은 그것에 의해 ‘중첩'(李大釗)된다. 이러한 융통적 인식은 중국의 혁명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지식이 되었다.

이처럼 불균등발전은 사회의 개조를 더디게 하는 요인이면서도 그것을 성공시키는 이점이 되기도 했다. 레닌에 의하면 그러한 불균등현상은 맑스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역설’이나 ‘변증법적 수수께끼(conundrum)’로 보일 것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제로 자연계에서나 사회에서나 생의 모든 단계에서 생존하고 있는 새로운 것은 남아 있는 옛 것의 잔재와 맞부딪히게 된다. 그리고 맑스는 부르주아적 권리의 잔재를 독단적으로 공산주의에 끼워 넣었던 것이 결코 아니며, 자본주의라는 자궁에서 출현한 하나의 사회에 있어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불가피한 것이 무엇인가를 지적했던 것이다.”(『국가와 혁명』, 김영철 옮김, 1988)

여기서 불가피한 것이란 상공업자 독재 사회에서의 민주주의적 인권과 권리를 의미한다. 비록 추상적 평등이지만 그 민주주의는 로베스피에르의 혁명 유산으로서 정치적 해방의 원리였으며, 혁명적 경제 해방을 추구하는 단계에서도 필수적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필수적인 것은 ‘보다 민주적인’ 국가로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국가는 파리 콤뮨을 모델로 한 것으로 시민 각자가 국가 경영자가 될 수 있는 능력이 갖추어 지고, 공직자가 반민주적인 경우에는 소환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 국가이다.

민주주의는 그 구체적 형태가 발전하는 가운데 그것이 지향하는 최상의 이상이 이루어져, 계급과 민중이라는 언어가 소멸될 때까지는 보존되고 발전되어야 하는 정신이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는 함께 간다. 그러나 레닌 자신도 지키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기존의 혁명사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대립시킴으로써 민주주의를 자유주의 쪽으로 보내었고, 그에 따라 자유주의 체제는 사회주의를 정치적 독재로 인식하게 하였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평등을 의미한다.”(『국가와 혁명』) 부자유가 불평등을 의미한다면, 평등은 자주적 평등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지구상의 어느 국가도 민주주의를 수사적으로만 사용해 온 것이 될 것이다. 억압 기구들의 복합체인 국가가 그 언어를 수식 도구로 오염시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그에 따라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개방적 관계가 칸트적인 내적 양심으로 내면화되는 것도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민주주의가 정치적 양심으로 내면화된 것은 현대 사회의 불균등현상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이 점에서 새로운 정치학은 인간 내면도 정치의 장으로 인식하는 내면의 정치학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테르미도르 반동 직전, 빵을 요구하는 평민과 그것을 줄 수 있는 산업 부르주아로부터 고립된 로베스피에르의 고뇌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장차 인민들이 부르주아의 노예로 될 것임을 예감하고, 빵만으로 살 것인가 라는 성서적 논쟁을 벌이게 된다.

그가 사라진 후 빵을 주체로 한 자유와의 절충품이 나왔는데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이다. 중국 혁명사도 중국적 형태로 그러한 현상을 보였다. 원리상으로만 보면 문화대혁명은 생산력 결정론과 의지주의적 실천론 사이의 대립, 혹은 상 시몽에 연원하는 ‘기술 공학주의’와 ‘루소적이면서도 맹자적인 평등주의’ 사이의 대립(B. Schwartz)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상화나 관료주의와 같은 봉건 잔재와 봉건문화의 폭력적 파괴 등 여러 요인들로 인해 실패로 끝났지만, 그 강렬한 평등에의 갈망에도 불구하고, 문화대혁명은 주자파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스탈린주의의 핵심 요소인 국가자본주의적 기술관료 지배체제로 귀결되었다. 민주주의는 다시 내적 양심으로 내면화되었다.

기존의 혁명사에 대한 이러한 개괄적 이해로 보면, 외적 투쟁의 상황에 있어서나 내면적 양심화에 있어서나, 폐쇄와 개방, 속박과 해방, 이른바 옛 것과 새 것 사이의 분열과 항쟁이 있다. 이러한 불균등현상을 혁명적 사상가들은 차이(差異)라기보다는 모순(矛盾)으로 표현했는데, 그들은 모순을 우주의 보편적 생성의 원리로도 확대하였다.

모택동에게도 나타나는 이러한 존재론적 우주관은 엥겔스의 근대적 우주관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자연 변증법에 의하면 무한히 계속되는 자연의 진화사는 생명체의 생과 사, 그 총체적 절멸, 지구와 성운들의 파괴를 동반하면서 범우주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현상계의 보편적 전변 과정은 근대 과학이 세운 물질과 그 에너지의 항존성과 동일성의 법칙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동일성은 과학적 법칙들의 항구적 동일성을 보장해 주는 근대적 합리성의 공준으로 간주되었다. 심지어 그것은 인식론적 관념론과 물질의 소멸 가능성을 언급했던, 그래서 볼셰비즘의 비난의 표적이 되었던, 포앙카레나 마하주의자들과 아인슈타인도 궁극적으로는 버릴 수 없었던 근대적 신념이었다.

그러나 기존의 혁명적 세계관의 이러한 근본적 신념은 유럽의 지성사적 문맥에서 보면 하나의 강경한 형태의 합리적 사고 모델을 관철시키는(,) 그래서 또 다른 새로운 세계상과 충돌할 수 있는 여지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메리카와 한국의 부드러운 형태의 과학주의도 생산력주의에 기대고 있다는 측면에서는 중국과 러시아의 기술 공학주의와 궤도를 같이 한다.]

근 현대의 볼셰비즘적 형태이건 자유주의적 형태이건, 과학주의적 세계상은 세계에 대한 자연주의적이고 객관주의적 태도에 대한 무비판적 신앙 때문에 자신들의 시야 안에서의 일관성에만 집착하였다. 이러한 일관성은 자기 폐쇄적인 통약가능성을 전제한 의사소통과 합의 가능성을 이성적 사고라고 선전하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 신념은 자신들의 구태의연한 태도가 인간의 또 다른 심각한 인식 방법과 통약불가능성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였다. 이 인식 방법은 인간의 ‘내감에서의 자기의식’이 이해하는, 기억과 연속된 느낌들과 의지、상상과 열망의 영역으로서, 이른바 질적 경험과 통찰의 영역이다.

외감에 주어진 감각만으로 내감을 채우는 칸트의 무미건조한 지성, 그러한 감각을 계기로 실재론적 인식론이나 관념론적 인식론을 구성하는 레닌, 모택동과 마하주의의 현대적 후예들은, 그러한 질적 자기의식의 차원이 인간과 생명의 진화를 포함한 자연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지평을 열 수 있다는 심원한 사실을 다룰 능력이 없었다. 이러한 무능에 속류 유물론의 한 형태인 물리주의적 심성론이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산업의 도구인 수량화와 질적 자기의식의 광대한 차원 사이의 불가통약성에 대한 주의 깊은 성찰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또 다른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 줄 수 있다. 이에 따라 그것은 인간의 의지와 상상에 기초한 혁명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가능하게 한다. 혁명의 보편적 핵심인 자주적 평등에 대한 자연사적 발생 근거와 함께 그 주체적 기초에 대한 이해는 내감에서의 의식이 감행하는 경험의 심화에서 그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와 베르그송(B. Bergson)이 지성의 ‘객관화하고 고체화하는 습성’과 ‘내감에서 알려지는 의지나 생명’ 사이의 전혀 종류가 다른 불균등이 있음을 알고, 그러한 통약불가능성과 역설을 회피한 것을 서양 문명의 퇴폐성과 파괴성으로 암시한 것은 다시 상기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존 생 철학의 낭만주의적 성격이 지나치게 부각된 것이, ‘폐쇄적 고체의 논리에 고착되는 경향성’과 ‘개방적 유동성을 표현하는 경향성’ 사이의 불균등이 집약된 존재가 생명체이고 인간이라는 것을 망각하게 했다. 그럼에도 생 철학은 자연사의 부단한 진화가 개방적 유동성의 힘인 자유의 충동이 나타나려는 노력이며, 인간의 존재 의미는 그 노력에서 확인된다는 것을 음미하게 한다. 그리고 그 노력은 인간이 만든 온갖 도구들을 불평등의 도구로 폐쇄화하는 계급의 분화를 타파하는 개혁이나 혁명으로도 나타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잊혀진 조선 후기의 동학혁명의 세계상이 다시 환기될 필요가 있다. 최시형은 혁명을 개벽(開闢)으로 이해했다. 개벽은 내적 성찰에서 경험되는 심층적 생기(生氣)가, 고정되고 형해화된 사회 구조와 심리 구조를 용해시키면서, 보편적으로 ‘표현(表顯)’되는 전환점을 의미한다.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본성[性]을 구성하는 생기는 ‘약동불식(躍動不息)’하는 힘으로 우주를 생성시키고, 응고된 인성과 사회를 혁신해 나간다. 유동성과 개방적 소통성을 가진 그 본연의 성품은 자유로이 그리고 평등한 방식으로 자연과 인생사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진정한 주체성이란 이러한 우주적 연대성의 원리를 억압의 시대를 돌파하여 표현하는 행동에서 표현된다.

원래 『周易』에 연원하는 개벽은 양성의 생기(生氣)가 문을 열고 자신을 실현해 보이는 과정적 운동을 통해 음성의 정체적 상태가 약화되는 전변의 시간을 의미한다. 최시형(崔時亨)은 자신의 이름처럼, 이러한 시간을 결정적인 ‘형통(亨通)’의 시간[時]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소통적 공감의 힘이자 활력인 생기를 자기성찰의 노력을 통해 이해하고, 그 생동성이 이끄는 내적 필연성에 따라 실천하였다.

동학의 사상이 비록 역사적 사회에 대한 사회과학적 인식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 역동적 심성론은 고체화된 사회를 혁신하는 혁명적 인성론의 이념형을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생 철학이 제기한 고체적 수량화의 논리와 유동체에 대한 내적 경험의 통약불가능성이 사회를 새 것으로 변동시키는 혁명적 세계관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암시해 주고 있다.

러시아 혁명과 중국 혁명이 결국은 기술 공학주의적 통제 사회로 되고, 아메리카와 함께 군산복합체 사회로 나아가는 오늘의 역사를 볼 때, ‘진정한 민주주의는 평등’이라는 테제는 실로 어려운 사상임을 실감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황야와 숲에서 온 저 고대의 성인들이 고통과 번뇌 속에서도 인생의 진리로 제시한 이래로, 일상의 번민에서는 물론 수많은 폭동과 혁명에서 나타났다가는 사라진, 그리고 사라졌기 때문에 더욱 진실된 역설의 사상이다. 그것은 분명 야성의 이념으로서, 순치되고 강경해진 문명과 역(逆)운동을 하는 세력을 창조해 낼 것이다. 그리고 이 세력은 자신의 젊은 생기로 내적 양심의 사상을 구체적인 물질적 삶에서 실현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하고자 할 것이다.

 

광주를 기억하는 철학적 가이드라인 [썩은 뿌리 자르기]

[썩은 뿌리 자르기]

광주를 기억하는 철학적 가이드라인

글: 최종덕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직접 감정의 용기와 간접 반성의 용기

동물에게 감정이 있다면 감각에 기반한 신체 신진대사율의 만족스러움과 불만스러움이라는 단순감정일 것이다. 감정 수준이라기보다는 외부조건을 지각하는 기초적인 자극반응 양식이다. 그러나 인간은 만족과 불만족의 기초 감정을 확장하여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다양한 감정을 발현한다.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화내고, 노여워하고 슬퍼하며 두려워하고 미워하거나 좋아하고 싫어하거나 욕망하는 감정 등이 그것이다.

인간 감정의 발현은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 감정의 단계는 더 상승한다. 불쌍한 이를 보면 측은해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부끄러워하고 미안해하기도 하고 나쁜 것을 보면 울컥하거나 피하기도 하며, 옳고 그른 것을 가를 줄 아는 마음도 생긴다. 불행하게도 인간 마음에는 이런 유형 말고도 시기하거나 집착하고 사기치며 속이고 아부하고 업신여기며 이기적인 마음의 유형도 도사려 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의 유형을 넘어서는 더 높은 단계의 마음이 가능하다. 숭고함과 이타성이 그것이다.

이렇게 마음의 수준은 다층적이다. i) 반응적 감각 수준, ii) 소위 칠정七情과 같은 직접 감정의 마음, iii) 사단四端과 유사한 판단하고 사유하는 간접 반성의 마음, 그리고 iv) 간접 반성의 마음으로부터 직접 창출의 마음으로 되돌려 발현되는 숭고함이나 이타성의 마음도 있다. 이렇게 마음의 수준이 다층적으로 겹쳐 있다.

용기는 간접 반성의 마음에 해당하기도 하지만 용기가 실천되는 과정에서는 오히려 직접 발현의 감정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다. 불의를 보고 나도 모르게 저항을 하는 경우이다. 어떤 나쁜 상황에 부딪쳤을 때 즉자적으로 용기가 발현되는 경우 말고 삶속에서 연습되고 간접적으로 교육된 용기의 발현도 가능하다. 전자를 ‘직접 감정의 용기’라고 말할 수 있다면 후자를 ‘간접 반성의 용기’라고 부를 수 있다.

반면 나쁘거나 잘못된 것을 보아도 잠자코 있는 사람도 많다. 나쁘고 잘못된 것, 즉 직접 감정의 마음 수준을 분명히 느꼈는데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다면, 용기가 없거나 아니면 그것에 동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동조하지 않는다면 용기를 내어 고쳐야 하지만, 나부터 그런 용기를 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나쁜 깡패정치꾼, 독재자에게 미리 알아서 기는 주변 아부꾼들 그들을 가만히 두고만 본다면, 결국 나는 그들과 한패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공포에 맞섰던 광주의 용기

한반도 근현대사를 치욕으로 물들게 한 일제의 역사는 해방의 한 순간으로 되돌려지지 않았다. 일제의 흔적을 그대로 이식한 채,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다. 한마디로 말해서 깡패들의 정권이었다. 정치깡패들의 무소불위 횡포는 315부정선거로 폭로되었으며, 정권의 총체적 부정은 419 민주혁명으로 막을 내렸다. 1960년 길거리로 나선 학생들의 용기가 있었기에 정치깡패들의 무법천지를 붕괴시킬 수 있었다. 올해는 419민주혁명의 50주년이기도 하다. 불의를 참지 못한 학생들의 촉발로 모아진 시민의 힘은 막장 부패정권을 붕괴시켰다. 직접 감정의 용기가 모아진 시민 자생의 힘이었다.

불행하게도 419 민주혁명 직후 어수선한 틈을 타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들이 정권을 탈취해갔다. 그렇게 박정희 군사정권의 독재 시대가 시작되었다. 1979년 무지막지했던 독재정권이 자멸하고, 20년 가까운 기나긴 악몽의 터널이 무너지나 했더니 또다시 기회를 잽싸게 도둑질해간 새끼 악동들이 등장하여 국민들을 또 다시 공포에 빠뜨렸다.

그러나 공포에만 떨고 있지 않았다. 공포에 맞서 용기를 내는 일상의 사람들이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이 저항만이 앞으로 갈 길이었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30년 전 일상의 시민들이 혁명의 피를 흘렸던 광주, 바로 그 길거리에 오늘 우리들이 와 있다.

은폐된 병증들

용기를 낼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우리는 용기가 요구되는 시대에 처절하게 살고 있다. 30년 전의 무장 독재세력은 아니지만 더욱 정교화된 자본의 독재는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달콤한 계엄사령부를 운영하고 있다. 한반도 산하의 강줄기를 틀어막아 부수고, 지맘대로 종교를 통제하며, 기업에게는 행정권력의 전권(올마이티 티켓)을 선물하고, 방송사를 장악하고, 교육비리 척결 명분으로 오히려 교육환경 격차를 늘려놓고, 서민의 빈 주머니마저 쥐어짜면서 빚잔치로 희롱하고, 색깔논쟁의 메카시 선풍을 재조직하면서 최후에 남은 선량한 시민들의 마지막 상식을 뒤집어엎는 중이다.

전두환에서 박정희에 이르는 공포의 군부독재 증세를 보여주고 있다. 더 나아가 50년 전 419 민주혁명 전야의 깡패자유당 전염병 증상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는 듯하다. 문제는 지금의 증상이 통증을 직접 수반하지 않고 마약에 취한 환각 증상과 유사하다는 데 있다. 이런 환각 증상은 신자유주의의 전형적인 병증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앓고 있는 병증의 진짜 심각성은 권력에 의해 병증들이 은폐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억의 스위치

은폐된 병증은 ‘직접 감정의 용기’를 직접 끌어당기지 않는다. 증상을 빨리 눈치채는 사람들의 마음은 마음의 스위치를 하나 더 거쳐서 겨우 도달하는 ‘간접 반성의 용기’로 이어지기는 하지만, 쉽지 않다. 전염성 강한 신자유주의 병증의 원인은 자본 바이러스이다. 직접 감정의 용기를 차단하는 자본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용기의 저항력을 회생해야 한다. 그리고 희미해진 용기의 저항력을 되살리려면 심했던 그 전염병을 힘들게 이겨낸 저항 면역력을 기억해내야 한다.

감기 면역이 얼마간 지속되듯 말이다. 감기에 한번 걸리고 난 후 같은 감기에 당분간은 안 걸린다. 전염병 중에서 홍역 같은 것은 한번 걸리고 나면 평생 다시 안 걸릴 정도로 그 기억은 아주 오래 가기도 한다. 우리의 몸, 우리 몸의 저항력이 내 몸을 크게 힘들게 했던 기존의 감기 바이러스나 홍역 바이러스 등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기억이 가능한 것은 희소하나마 내 몸 림프구에 존재하는 기억세포들 덕분이다. 건강한 몸은 자신의 기억세포를 다시 활성화시키는 일을 잘한다.

그래서 저항력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저항의 기억은 내 몸 안에 저장되었던 직접 감정의 용기를 켜는 스위치 구실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서 사라져버린 것 같은 저항의 면역력, 우리 안에 아주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저항의 기억을 회생시켜야 한다.

기억은 용기의 스위치다. 기억의 스위치를 켜야 할 때이다. 한편 스위치를 켜기 위해 필요한 불빛도 있어야 할 터인데, ‘간접 반성의 용기’가 그 구실을 잘 할 수 있다. 나 같은 지식인 행사나 조금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직접 창출의 용기가 부족한 편이다. 이것 재고 저것 재면서 ‘현장과 순간’에서 발을 빼는 경우가 많다. 좋다. ‘현장과 순간’을 놓쳤다면 ‘역사와 기억’을 통해 주변의 불특정 다수에게 용기의 마음을 이입해야 한다. 간접 반성의 용기란 그런 감정이입에서 드러난다.

광주는 기억의 공간이다. 이렇게 30년 잠재된 기억을 다시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

** 이 글은 2010년 5월 27일 ‘518민주항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션에서 발표했던 것입니다.(편집자)

정직을 생각하며 [썩은 뿌리 자르기]

하나.

바야흐로 정직이 문젯거리인 시대다. 삼성의 비리를 고발한 김용철 변호사가 쓴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사, 2010)의 마지막 대목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이들에게 “정직하게 살라”고 권해도 불안하지 않은 사회가 되면 좋겠다. “정직하게 살면 손해 본다”는 생각이 현명한 것으로 통하고 “손해 보더라도 정직해야 한다”는 생각은 순진한 어리석음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운 아이들이 커가는 일을 차마 지켜볼 자신이 없다. (447쪽)

삼성그룹의 전 회장인 이건희가 이 글을 미리 보았는지는 모르겠다. 어떻든 이건희는 이 책이 출판되기 얼마 전인 금년 2월 초에 한 공개 석상(‘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었다고 한다)에서 다음과 같은 기가 막힌 발언을 했다.

“거짓말 없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모든 국민이 정직했으면 좋겠다.”

이 말을 전해 듣고는 나도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정말 어이없어 했다. 쓴웃음이 아니라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조지 부시가 전쟁 없는 세상을 바란다고 말하는 것보다, 이명박이 부동산 투기가 없는 사회를 바란다는 것보다 더 황당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냥 웃어버리기에는 이 실소(失笑)의 끝이 어째 좀 찜찜했다. 도대체 이건희는 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이 후안무치(厚顔無恥)의 말이 겨냥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리라고 본 것일까?

얼마 후 나는 위에 인용한 김용철 변호사의 글을 읽다가 다시 이건희의 말을 떠올렸다. 그 순간 머릿속이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혹 이건희는 진짜 자신이 정직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마치 조지 부시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전쟁을 일으키면서 스스로를 정의의 편이라고 굳게 믿었듯이, 또 이명박이 온 나라의 강바닥을 파헤치면서 자신을 불철주야(不撤晝夜) 국가를 위해 일하는 진정한 일꾼이라고 굳게 믿고 있듯이 말이다. 만일 그렇다면, 이건희가 염두에 두는 정직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는 삼성에 몸담고 있다가 자신을 고발한 김용철 변호사가 오히려 부정직하다고 생각하고 그를 비난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또 김용철 변호사에 동조하여 자신을 비판하는 국민들도 대부분 자기 배반적이고 자기 모순적인 부정직함을 범하고 있다고 얘기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닐까?

이건희의 발언을 웃어넘길 수 없는 것은 거기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이 발언으로 고립되거나 곤란에 처하지 않았다. 한편에선 오히려 그 발언이 이건희의 화려한 복권 선언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미 그는 유례가 없는 1인 사면의 방식으로 법률상 훌륭하게 복권하지 않았는가. 이건희는 이제 범죄자가 아니라 당당한 승리자다. 일부의 질시와 배신, 그리고 허울뿐인 법의 부질없는 핍박을 뚫고 다시 무대의 전면으로 돌아온 사회의 진정한 주인이다. 기다렸다는 듯 경쟁적으로 아부하는 매스컴의 행태가 이런 점을 입증해준다. 이건희와 그 가족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다. 누구를 만나고 어떤 표정을 지었으며 어떤 옷을 입었는지가 기사가 된다.

누군가는 작금의 우리 사회를 이명박과 강호동이 지배하는 세상이라고 했지만, 이는 겉보기의 묘사에 그친다. 낮에는 이명박이, 밤에는 강호동이 깃발을 들고 설친다면, 밤이건 낮이건 그 깃발이 나부끼는 방향을 조종하는 건 이건희와 같은 부류다. 그렇다면, 그의 복권은 명실상부(名實相符)함을 요청하는 현실의 세력관계가 작용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건 맑스의 생각대로 경제관계가 법을 지배하고 의식(意識)을 지배하는 사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이건희의 ‘정직’ 발언은 이런 사태의 한 표현(表現)일 수 있다. 그 발언은 이건희가 이 사회의 법망만이 아니라 윤리적 의식까지 장악하고 지배하려 함을 드러내준다. 모름지기 사회의 지배자라면, 무엇이 바르고(正) 곧은(直)지를, 즉 무엇이 정직(正直)인지를 내세울 수 있어야 하며, 그에 따라 무엇이 거짓말이고 무엇이 참말인지를 판가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문제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는 사태가 있다. 이건희와 삼성을 비판하는 칼럼이 그래도 비판적 신문에 속한다는 [경향신문]에 실리지 못한 것이다.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가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를 소재로 삼아 쓴 정기 칼럼 원고가 제 날짜에 게재되지 않았다. 김상봉 교수는 거부당한 원고와 그 경위를 설명하는 글을 대표적인 인터넷신문 가운데 하나인 [오마이뉴스]에 보냈으나 석연찮은 이유로 그곳에도 싣지 못하고 결국 다른 인터넷 신문인 [프레시안]과 [레디앙] 등을 통해 겨우 발표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다. 아직도 유력 일간지들에는 [삼성을 비판한다]의 책 광고조차 실리지 못한다.

이 모든 사태의 중심에는 이건희와 삼성이 대중 매체들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대부분의 언론마저 장악한 이건희와 삼성의 경제적 힘이 도사리고 있다. 김상봉 교수의 칼럼 거부와 관련하여 논란이 일자, 경향신문이 사과 기사와 함께 실은 다음과 같은 해명의 말(2010년 2월 24일자)은 이 점을 직접 드러내준다.

“2007년 말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자금을 폭로한 사건을 집중 보도한 것을 계기로 삼성으로부터 2년 이상 광고를 받지 못했고,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정부 및 공공기관의 광고 수주액이 크게 떨어지면서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어 왔다.”

삼성그룹의 광고가 전체 신문광고에 차지하는 비중은 액수 기준으로 전체의 10%를 훨씬 웃돌며, 규모가 작은 신문이나 방송일수록 그 비중은 더 커진다고 한다. 이런 지경이면 광고 수익에 경영을 의존하는 언론사로서는 삼성의 눈치를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건희가 감히 정직까지 들먹일 수 있게 된 바탕에는 이 같은 사정이 자리 잡고 있다.

둘.

이건희도 아마 정직에 대한 자기 기준이 있을 것이다. 스스로는 기준에 충실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 잣대로 보면 유죄판결을 받으면서까지 자신에게 충성을 보이는 이학수나 김인주 같은 가신(家臣)은 곧고 바른 반면, 삼성의 녹(祿)을 먹다가 비리를 공개하고 나선 김용철은 비뚤어지고 굽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세상에는 이런 식의 잣대가 먹혀들기도 한다. 혹자는 아직도 김용철의 숨은 동기를 의심하며 손가락질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것은 사실 깡패 같은 집단에나 통용되는 논리다. 자기 보존과 자기 이익에 급급한 집단은 그 충실성의 기준을 내부에, 그것도 폭력적인 중심에 둔다. 이들에게 법이나 도덕규범 같은 외부의 잣대는 타넘거나 이용하여야 할 대상일 뿐이다. 내부의 기준이 외부의 사회적 기준과 어긋나면 어긋날수록 이런 집단은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폭력적이 된다. 그래서 내부자의 고발이나 양심선언은 대개 큰 위험 부담을 지니기 마련이다. 그러나 깡패 집단은 그 존속을 자기 집단 밖에서 정당화하기 어렵다. 그래서 내부의 고발은 외부로부터 강력한 원군을 얻을 수 있다. 이럴 때 정직이나 정의의 기준은 집단 안이 아니라 그 밖에 있게 된다.

삼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김용철의 폭로와 고발을 삼성이라는 집단의 기준 내에서, 나아가 이건희 일가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이건희가 말하는 정직은 사회에 대한 정직이나 충실성과 다를 뿐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 상반된다. 이건희의 정직 운운이 실소를 자아내는 것은 사회의 기준에서 볼 때 그의 말이 정녕 가당치 않기 때문이다. 법원 판결로 명시된 것만 227억의 배임죄를 저지르고 수천억 원의 세금을 포탈했으며 천문학적 비자금을 조성하여 사회의 구석구석을 오염시킨 인물이, 또 노조설립 시도를 온갖 수단을 동원해 탄압하고 산업재해를 은폐하는 기업집단의 지배자가 정직을 운위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것은 깡패가 의리(義理)를 말하고 폭력배가 ‘바르게 살자’를 외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물론 다른 점이 있다. 가장 큰 것은 삼성의 경제력이다.

삼성그룹의 매출은 2009년에 대략 200조원, 우리나라 GDP의 약 20%다. 올해 정부 예산(약 293조원)의 3분의 2가 넘는 액수다. 국내 고용 인원만 30만 명에 가깝다. 주력기업인 삼성전자는 2009년에 매출액 기준(1183억 달러)으로 세계 최대의 전자업체가 되었으며, 영업이익만 10조를 넘게 남겼다. 이것이 삼성의 힘이며, 여전히 삼성에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이건희와 그 일족의 힘이다. 이런 힘 덕택에 그들은 자기 집단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자신의 존립을 정당화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다.

삼성이 망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게다가 우리 사회는 삼성과 이건희 일가를 구분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삼성 그룹 주식의 반 이상이 외국인 소유고 이건희 일가의 지분은 1% 남짓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렇다. 삼성 그룹을 키워온 것은 이병철이고 이건희이니 그 소유권과 지배권은 그들 일가가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직접 생산을 담당하고 일터를 일궈온 당사자가 이건희 일족과 몇몇 가신들이 아니라 무수한 근로자였음에도 그렇다.

더구나 김용철 변호사가 그 일각(一角)을 폭로했다시피, 삼성은 이 사회에서 힘깨나 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나 돈을 뿌렸다. 그렇게 하여 인맥을 관리하고 언로(言路)를 제어하며 정보를 장악한다. 자신들의 촉수를 사회 곳곳에 박아 넣는다.
이런 방식으로 한 집단과 사회가 결합되면 그 집단 내부의 기준이 사회의 기준으로 파급될 여지가 생긴다. 설사 그 기준이 전근대적이거나 편파적이라 하더라도 먹혀들어갈 수 있다. 사회 곳곳을 뇌물과 촌지로 오염시켜 놓으면, 그러한 흐름이 암묵적으로 용인되고 정직이나 정의의 기준은 그 바탕 위에서 작동하게 된다. 전 사회의 깡패화, 전 사회의 삼성화가 이룩되는 것이다.

하긴, 왜 삼성과 이건희뿐이겠는가. 이건희는 대표주자고 그래서 대표적으로 뻔뻔한 것이라 해야 옳을지 모른다. 한화의 이승연은 가죽장갑을 낀 채 권총을 들고 설치는 깡패의 면모를 몸소 선보였지만, 오염된 법망을 통과해 여전히 회장님으로 잘 지내고 있다. 물론 태광의 박연차 같은 경우도 있으니 모두가 형편이 같은 것은 아니다. 깡패들의 세계에서처럼 여기도 약육강식이 판친다.

셋.

사정이 이러니 대책이 쉽지 않다. 원론적인 말을 하자면, 삼성을 비롯한 거대 경제 집단이 자기중심적이고 자의적(恣意的)인 기준에 따라 다른 영역을 장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마이클 왈쪄(Michael Walzer) 같은 자칭 자유주의자의 말에 따르더라도, 한 영역의 힘이 다른 영역들마저 장악하게 되면 사회는 부정의해지기 십상이다. 정치 영역이 경제 논리에 휩쓸려서도, 법의 영역이 돈의 위력에 짓눌려서도 안 된다. 하물며 일족의 자기중심주의나 깡패 논리가 판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공정성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기업이나 경제 영역에서도 나름의 기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이미 말했던 것처럼, 삼성의 광고를 마다할 수 있는 언론사는 거의 없다. 몇몇 사람들이 삼성 불매운동을 외치지만, 그 효과는 미지수다. 당장 이 글을 쓰는 데 사용하고 있는 공용(公用) 컴퓨터와 모니터가 삼성 것이고 내 책상 위에 놓은 전화기에도 삼성 로고가 선명하다. 그러니 어떻게?

어려워도 안 할 수 없다. 김상봉 교수의 말처럼 이것은 시대적 과제다. 경향신문이 김상봉 교수의 글을 거부한 사태가 아무런 파문 없이 끝나지 않았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은 광고 지면을 얻지 못해도 이미 수십만 부가 팔려나갔다. 삼성이 진정한 반성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한, 삼성의 제품을 사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렇고, 이 글을 읽는 독자도 그 중 한 사람일 것이다. 이건희가 경영에 복귀하고 그 일족이 지배권을 고스란히 이어받는 사태를 그냥 용인해서는 안 된다.

철학을 하는 사람에게 이런 과제는 더 무겁다. 삼성은 안 되고 LG는 된다는 식의 문제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자본의 지배, 돈의 지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더욱 본질적인 문제가 깔려 있다. 솔직히 말해 나는, 김상봉 교수가 ?내가 경향을 비난하지 않는 까닭?([경향신문], 2010년 3월 9일)이라는 칼럼에 썼던 것처럼, 밥벌이나 경제적 고려가 우리 삶을 이끄는 본질적인 사안이 아니라고 얘기할 자신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제와 맞서 싸우지 않는 한 이건희의 정직과는 다른 정직을 쉽게 입에 올릴 수 없다는 건 안다. 정직은 이건희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성원(부산대) / admin@admin.com

삼성의 발견 [썩은 뿌리 자르기]

맑스는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서 “자본은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경제적 권력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부르주아(토지에 묶여있던 농노와는 달리 성 안에 살며 상공업에 종사했던 자유인들)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불리는 이유입니다. ‘삼성공화국’은 자본주의 사회의 예외적 현상이거나 비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궁극적 실현태입니다. 자본이 초국적화되어 세계를 주도하는 권력이 되는 현상인 ‘세계화’도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적 필연입니다.

1. 1인 1표의 민주주의와 1주 1표의 기업의 근본적인 충돌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의 투표로 그 정치적 리더를 뽑습니다. 반면에 기업은 노동자의 투표가 아니라 주주의 투표로 그 기업의 리더를 뽑습니다. 국민 투표는 1인 1표를 원칙으로 합니다. 모든 사람이 재산이나 성별, 학력 등에 상관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1표를 행사하도록 돼있습니다.

그러나 주주 투표는 1주 1표를 원칙으로 합니다. 따라서 여기에서 평등의 단위는 사람이 아니라 돈입니다. 돈이 많아 주식을 많이 사서 최대주주가 되면 누구라도 그 기업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기업의 주인이 주주입니다. 그 주주들이 모여 주식회사의 총회를 엽니다. 여기서 주주를 대신해서 경영을 담당할 이사들과 대표이사를 뽑습니다. 또한 이들 경영진을 감시할 감사를 뽑습니다. 따라서 최대주주의 의사대로 회사는 움직이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기업은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적이지 않습니다.

장하준 교수의 말대로 국민주권이 중심이 된 민주주의와 주주주권(본질적으로 자본주권 또는 돈의 민주주의)이 중심이 된 시장은 근본적으로 충돌하게 돼있습니다. 사람의 민주주의와 돈의 민주주의는 이처럼 대립합니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그렇게 민주주의를 비판한 이유도 민주주의가 돈의 민주주의(금권정치)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까닭입니다.

2. 삼성그룹의 제왕적 지배체제

삼성이라는 기업과 그 총수인 이건희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이러한 기업의 비민주주의적 지배구조의 원칙을 알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2010년 3월 24일자 프레시안의 이건희 회장의 “제왕적 지배 체제”가 완벽히 복원되었나를 다룬 뉴스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1주 1표의 기업의 지배구조 원칙과 제왕적 지배 체제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같은 날 경제개혁연대의 ?이건희 회장 복귀에 대한 논평?이라는 보도자료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이건희 회장의 전격적인 복귀와 전략기획실 사실상 부활은 삼성그룹이 자신의 지배구조 상 문제를 스스로 치유할 능력과 의지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삼성의 잘못된 지배구조에 따른 비용이 이건희 회장 일가에게만 귀속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닐 지도 모른다. … 삼성의 지배구조 문제는 국민경제 전체의 시스템 리스크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 전체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삼성의 잘못된 지배구조는 이건희 회장의 제왕적 지배체제를 일컫는 표현입니다. 김진방 교수에 의하면 삼성그룹의 지배구조는 세 가지 점에서 다른 재벌그룹과 다릅니다. 첫째, 총수일가(동일인 + 8촌 이내 혈족 + 4촌 이내 인척)의 지분이 유난히 적습니다. 둘째, 금융회사를 통해 비금융회사를 소유하고 지배합니다. 셋째, 소속회사들이 교차출자와 순환출자로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둘째와 셋째는 첫 번째이자 가장 근원적인 문제점인 총수일가의 적은 지분으로 삼성그룹을 절대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도입된 방법들인 것입니다.

김상조 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와 승계구도는 공정거래법 제11조(계열금융기관의 의결권 제한), 금융산업구조개선법 제24조(동일계열 금융기관의 다른 회사 주식 소유 제한), 금융지주회사법, 보험업법 상의 자산운용규제 등 금융관련법에 의한 규제는 피해갈 수 없다는 점이 문제인 것입니다. 삼성그룹의 이건희 회장은 돈의 민주주의 원칙마저 저버린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이건희 회장이 불법 로비와 비자금 조성 등 실정법을 위반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제왕적 지배체제라는 말이 의미가 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시장과 민주주의의 상호발전이라고 불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마저도 위협하는 세력이 된 것입니다.

3. 대한민국을 뒤흔드는 또 다른 국가, 삼성공화국

경제개혁연대가 삼성공화국을 비판하는 핵심은 “삼성이 경제환경 변화에 탄력적으로 적응하는 기업조직의 차원을 넘어, 경제환경을 왜곡하고 오염시키는, 그럼으로써 그 자신의 조직적 탄력성은 물론 국민경제의 동태적 활력마저 질식시키는 경제권력으로 변모하였음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건희 회장은 단순히 삼성그룹의 제왕이 아닙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사면령이 아니었다면 이번의 이 회장 복귀는 불가능합니다.

이와 같이 국가권력이 불법을 저지른 삼성그룹의 총수를 비호하게 만든 막강한 정치력과 경제력으로 인해 국가 안의 또 다른 국가라는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에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게 된 이유기도 합니다. 따라서 삼성공화국이 국내를 지배하는 절대 권력이 되었다면 이런 삼성공화국의 제왕인 이건희 회장이 국민이 선거로 뽑은 대통령보다 은밀하지만 더 강한 권력을 지니게 됩니다. 이런 권력이 불법과 비리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 삼성그룹과 이건희 회장의 아킬레스건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이건희 회장의 복귀 발표일 날 조선일보마저도 ?이건희 회장의 복귀와 삼성의 책무?라는 사설에서 “삼성은 글로벌 기업이면서 한국 기업이다. 글로벌 규칙도 지켜야 할뿐더러, 투명 경영과 사회적 공헌을 통해 계층·지역의 구별 없이 한국 국민 전체의 사랑을 받는 기업이 되어야 한다. 삼성은 도요타자동차처럼 ‘1등의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미래를 대비해 나가야 한다. 이 회장은 삼성이 다음 세대, 그리고 그 다음 세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경제적 유산과 함께 도덕적 토대도 함께 물려주어야 한다.”고 요구했습니다.

조선일보는 이회장의 복귀의 대가로 삼성그룹의 윤리성 회복을 주장한 것입니다. 반면에 경제개혁연대는 이회장 복귀를 반대하며 삼성그룹의 윤리성 회복을 주장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윤리성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돈의 민주주의가 정한 규칙을 따르는 것이 그 윤리성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 준수로부터 곧바로 사람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하준 교수의 통찰처럼 “진보를 자처하는 노무현 대통령이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선언했다. 그런 정치는 사표를 내야 한다. 권력을 준 것은 시장을 통제하라는 것인데,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고 하는 것은 직무유기이다. 우리나라 담론 구조가 시장을 풀어주는 것이 민주화라고 돼 버렸다.” 이러한 지적은 조선일보나 경제개혁연대의 논리상의 문제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돈의 민주주의는 진정한 민주주의에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삼성공화국이라는 말이 입증합니다. 따라서 국가가 시장의 논리에서 벗어나야 민주주의는 그 진정한 실현의 기초를 다질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일보나 경제개혁연대의 주장의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민주주의와 시장은 근본적으로 대립적 모순에 해당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을 망각한 사회적 자유주의 또는 좌파 신자유주의(영국의 블레어주의와 한국의 노무현주의)가 정치적으로 실패하게 된 것입니다. 기업과 시장의 권력을 견제할 건강한 정치공동체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4. 국내에는 삼성공화국, 세계에는 세계시장공화국

민주주의와 기업의 기본 주권구조가 원칙적으로 다르고 서로 대립한다는 점은 이미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한 국가에서 국내시장의 형성이 곧바로 국내공동체의 형성으로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꾸로 시장권력의 비대화가 국내 정치공동체의 위협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삼성공화국의 사례를 통해 잘 알게 됐습니다.

삼성공화국의 사례는 실제로 대우주의 소우주 모델에 해당합니다. 대우주는 세계화의 사례입니다. 세계화는 자본의 세계시장의 출현입니다. 세계시장이 출현했다고 해서 세계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거꾸로 이 세계시장이 개별국가의 힘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각국의 정치공동체의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삼성공화국은 글로벌스탠더드를 위반한 사례가 아니라 세계시장공화국이라는 글로벌스탠더드의 진정한 회원입니다.

세계시장공화국이란 일단 자본과 금융이 주도하는 제왕적 지배체제입니다. 데이비드 헬드에 의하면 모든 나라의 경제정책의 기준이 전지구적 금융시장에 대한 적응입니다. 세계화의 신자유주의적 특징은 시장이 더 잘 작동하도록 시장에 대한 탈규제를 강조하는 데서 잘 드러납니다. 이로써 각 국가 안에서 그리고 국가 사이에서 불평등이 증가하고, 이는 정치적 자유가 크게 위축됨을 의미하고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결정적으로 정치공동체의 위축은 시장 견제 세력의 사라짐으로 나타나 시장의 독주를 통한 극도의 경제위기를 산출할 가능성 증대로 이어지는데, 이는 초국적 금융투기꾼으로 유명한 조지 소로스 같은 사람마저도 세계금융시장의 규제를 요구하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경고를 무시한 미국의 부시행정부를 비롯한 주요국가의 신자유주의를 표방한 정부들에 의해 2008년 미국발 세계금융위기가 출현하게 됐습니다. 세계금융위기는 세계시장공화국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며, 이 강력한 힘 앞에서 세계정치공동체의 구성 없이는 각국의 정치공동체도 크게 훼손될 수 있다는 점을 드러냈습니다.

삼성공화국 문제는 단순히 삼성만의 문제이거나 국내적 문제가 아닙니다. 시장주도의 세계화가 가져다주는 문제의 축소판입니다. 우리는 삼성공화국을 통해 시장이 주도하는 세계가 어떤 미래를 가질 수 있는지를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장하준 교수는 세계금융자본은 국내 재벌을 더 압박하는 것을 좋아하고, 가장 돈이 많은 국제 금융자본의 뜻대로 우리나라 경제가 개조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제금융자본의 경영권 위협 앞에서 삼성의 이건희 회장을 비롯한 국내 재벌들이 시장논리를 수정해 경영권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한다면 삼성공화국도 세계시장공화국에서는 약자에 불과합니다. 그 약자가 살기 위해 불법과 비리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국내 재벌은 세계금융자본에 맞서 싸우며 우리 경제를 선진화하기 위한 투사라는 이미지가 그려지게 됩니다. 19세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라는 대립적 구도가 21세기 세계화 시대에도 다른 형태로 잔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라는 구도에서 본다면 현재 우리 정치공동체를 위협하는 실질적인 진정한 적은 삼성공화국보다 세계금융자본입니다. 다만 삼성공화국이 이 세계금융자본의 국내 침략의 첨병노릇을 하는 선교사로 전락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이건희 회장의 이번 복귀는 그 진통에도 불구하고 삼성공화국이 국내적으로 여전히 강건함을 보여준 사례인 동시에 삼성공화국도 세계시장공화국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합니다.

국내에서든 세계에서든 돈의 민주주의에 기초한 시장공화국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건강한 정치공동체의 최대의 적에 해당합니다. 각국의 정치공동체의 발전을 통한 세계정치공동체의 형성이야말로 세계시장공화국을 견제하며 인간과 인간의 조화와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룩할 수 있는 길입니다. 시장공화국의 길은 결코 우리가 걸어가야 갈 길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정치공동체의 발전이 삼성공화국을 견제하며 올바로 서게 하는 첩경입니다. 시장은 민주주의로 가는 길이 결코 아닙니다.

김성우(상지대 겸임교수) / admin@admin.com

낙태, 주체의 공백과 이데올로기 [썩은 뿌리 자르기]

낙태 문제를 둘러싼 일련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지난 3월6일 대학로에서 ‘세계 여성의 날’ 행사가 있었다. 그 행사에서 눈에 들어온 것은 “여성의 임신, 출산 및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에 대한 선언이다. 이 선언은 현재 낙태 문제에 대한 정부 정책과 프로라이프 의사회(옛 ‘진오비’, 이 단체는 ‘임신유지가 모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의학적 사유가 명백한 경우’에 한해 낙태를 허용하고자한다.)의 주장이 여성 주체성을 공백으로 남겨둔 채, 여성의 배제 속에서 낙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문제제기이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에 앞서 잠시 낙태 문제에 대한 논의 배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1973년 정부는 높은 출산율(71년 4.54명)에 대한 인구 증가 억제 정책을 위해 형법상 금지된 낙태 시술을 일부 허용하는 법, 즉 부모가 우생학적· 유전학적 질환이 있을 경우, 강간으로 임신을 했을 경우, 모체 건강이 위협받는 경우에 낙태를 허용하는 모자보건법을 제정했다.

그 후 과거와는 다르게 저출산 문제가 등장하자 낙태율을 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주장이 2009년 초 전재희 보건복지부장관의 입을 통해 나왔다. 유엔인구기금(UNFPA)이 내놓은 ‘2009 세계 인구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으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5년 동안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세계 평균인 2.54명의 절반도 안 되는 1.22명 이라고 한다. 같은 해 10월 진오비(진정으로 산부인과를 걱정하는 의사들 모임)는 낙태 근절 운동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11월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가 개최한 ‘제1차 저출산 대응 전략회의’에서 전재희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이 “낙태 (반대) 캠페인도 중요하지만 주무부처로서 낙태를 단속할 수 있다”며 단속 가능성을 드러냈다.

2010년 2월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불법으로 낙태 시술을 한 병의원 3곳을 검찰에 고발하였다. 그리고 3월 1일 보건복지가족부는 ‘불법 인공임신중절 예방 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 피임 교육 강화, 미혼모 지원 등을 제시하였지만, 정부의 의도를 잘 드러내는 것은 ‘불법 낙태 시술기관 신고센터’의 설립이다. 이것은 낙태 단속을 강화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와 더불어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3월 24일 ‘2010 태아 살리기 범국민 대회’를 개최하여 ‘낙태 근절을 위한 5대 우선 정책 과제’의 시행을 촉구하는 100만 명의 서명을 6개월 내에 받아 정부에 제출하겠다고 했다. 5대 과제의 내용 중 대부분의 것은 금전적 지원과 관련된 사항이며 생명의 출산은 곧 행복이라는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단체의 시각에서 보면, 낙태 문제에 대한 프로라이프와 정부의 접근방식은 여성에 대한 성적 착취 구조, 계급적 착취 구조, 그리고 10대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는 구조를 외면하는 것이다. 결국 낙태 문제에는 여성에 대한 3중의 착취구조가 중첩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성관계나 임신 처리과정에서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간과되면서 임신에 대해서는 모든 책임이 여성에게 전가된다. 보자보건법에 따르면 남성에게 낙태 시술의 동의를 요구하지만, 정작 불법 낙태에 대한 처벌 대상은 여성과 산부인과 의사만으로 한정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은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 시술 의료인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것은 낙태 문제가 가난한 여성에게 더욱 가혹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경제 위기 이후 저소득층 중심으로 가족 해체가 이루어지면서 연애, 동거하는 10대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낙태의 문제는 10대들의 삶을 억압하게 된다. 즉 10대들은 임신을 하면 퇴학을 강요받아 학습권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에 대한 정부는 미혼모, 미혼부에게 월 12만4000원의 지원금을 지급하는 방안을 내놓고 있다.

여성 주체의 물질적 공백

결국 정부나 프로라이프는 낙태 문제를 한 축으로는 ‘단속’으로 다른 축으로는 ‘돈’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정부의 정책은 단속 강화와 더불어 미혼모에게 일시적인 수혜적 지원으로 낙태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낙태 문제를 둘러싼 여성의 삶의 기반인 물질적 토대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자본의 횡포 아래 비정규직 확산의 중심에는 여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단체가 ‘사회·경제적 사유로 인한 경우’까지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다.

2009년 11월 ‘제1차 저출산 대응전략회의’ 다음날인 26일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9개 여성단체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여성위원회, 민주노총 여성위원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인권위원회는 성명서를 발표해 낙태 방지 정책 철회를 촉구하면서 “한국에서 이뤄지는 낙태 건수 90%이상이 사회·경제적 이유로 발생한다”고 지적하였다. 결국 낙태 문제는 생명을 낳아 키울 수 있는 물질적 토대, 즉 출산, 양육, 교육, 나아가 주택의 문제에 총체적으로 접근하는 방향에서 논의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제1차 저출산 대응전략회의’에서 정부는 저출산의 주된 요인인 자녀 양육부담 경감을 위해, ‘초등학교 입학연령을 1년 앞당기는 방안(노동력 조기투입을 통한 국가경쟁력 향상), 다자녀 가구의 셋째 자녀부터 고등학교 수업료와 대학 학자금 우선 지원, 취업시 우대 혜택 부여, 다자녀 가구 부모 정년연장(다자녀 가구 인센티브 부여)’을 제시했다.

정부의 정책에서 알 수 있듯이 양육부담을 줄이는 방안은 모두 ‘국가경쟁력 향상’으로 수렴되고 있다. 이 점에 주목해서 낙태 정책의 문제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양육의 문제는 교육과 분리할 수 없다. 그러나 국가가 제시한 저출산 대응 전략은 간단히 말해서 ‘노동력 조기투입’을 통한 안정적 노동력 확보이다. 이는 자본주의의 안정적 재생산체제를 만들어 내기 위한 목적성의 정치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정치 속에서 논의되고 있는 낙태 문제 해결책은 필연적으로 ‘국가경쟁력 향상’에 종속된 아이와 여성의 도구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개화기 초 여성의 교육은 산업사회의 재생산을 위한 구국의 현모양처 양산을 위한 것이었다. 산업화 과정에서는 외국 자본을 끌어와서 여성의 노동력을 기반으로 산업화를 이루었다. 결국 우리 사회는 멸시적으로 호명되었던 ‘공순이’의 희생으로 만들어졌음을 부정할 수 없다. 현재의 국가주의 정책도 이러한 맥락에 속에 있다. 더욱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밀고나가는 현실에서 비정규직 문제의 중심에 있는 여성의 삶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 상황에서의 출산 장려 정책은 그 자체로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낙태 단속과 신고센터를 통해서 출산율을 증가시키려는 것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조건과 환경에 선차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적 재생산을 위해 노동력을 어떻게 조속히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발상에서 나온 정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상에서는 여성의 주체성도 여성의 삶의 물질적 기반도 고려되지 않는다.

‘인간생명’ 이데올로기

두 번째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측면이다. 먼저 생명의 가치를 종교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많은 한계점을 노정한다. 생명의 가치를 논할 때 종교적 해결책에 의존한다면, 그 논의는 설득력을 잃는다. 왜냐하면 종교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는 생명의 가치 논의는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사례가 그 경우에 해당된다. ‘태아의 생명을 존중’하는 것을 그 중심에 두고 있는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3월 24일 ‘2010 태아 살리기 범국민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하늘이 준 생명이므로 부모일지라도 그 아이를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며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단체가 말하는 “생명”은 무엇을 의미할까? 태아의 생명을 의미할 것이다. 낙태 논쟁의 핵심은 ‘태아를 인간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은가’인데, 이 단체는 태아를 인간으로 보고 있다. 이 단체가 ‘태아는 인간이다’라는 태도를 갖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배경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기독교의 신학적 동기, 즉 “생명은 하느님이 창조해 준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의 소유”라는 것에 대한 인정이다. 그리고 앞 명제로부터 도출되는 것은 생명을 준 것이 하느님이기 때문에 인간이 낙태를 하는 것은 하느님의 권리를 박탈하는 죄를 범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주장하듯이 남의 노예를 죽이는 것이 그 노예를 소유한 주인에게 죄가 되듯이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하느님에게 죄가 된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이러한 신학적 동기가 그 자체로 형성되었다기보다는 노동 긍정을 통해 자본주의적 노동력 확보라는 근대적 패러다임 속에서 나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이들이 말하는 생명에는 인간생명 이외의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 원래 프로라이프 (Pro Life)의 넓은 의미는 ‘친(Pro)’ ‘생명(Life)’이다 . 따라서 이 단체가 명칭대로 활동 한다면, 생명체를 죽이는 4대강 사업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런 주장은 들어 본적이 없다. 나아가 만약 이 단체가 주장하는 것이 ‘생명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라면, 고기를 먹기 위해 태아보다 더 발달된 형태의 생명을 끊어버리는 사회를 동시에 비판해야만 할 것이다.

낙태 문제에 한정해서 보자면, 이 단체가 말하는 생명은 사람의 생명이다. 현재 인간의 생명이 신성하다는 주장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있긴 하다. 하지만 서구 문명의 기원을 보면 이러한 태도는 보편적이지 않다.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족의 구성원이라는 것이 생명을 보장해주지 않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 입장을 취했다.

그런데 이렇게 인간의 생명을 신성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의 생명을 방어하기 위한 상황에서 타인의 생명을 죽일 수 없다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낙태를 좁은 기준에서 금지하자는 주장은 인간의 생명이 다른 생물의 생명과는 다른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다른 생명과 구별되는 인간 생명의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는 ‘인간’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먼저 염색체를 통한 종족의 구성원이라는 측면에서 태아는 인간이다. 이렇게 되면 장애를 가진 태아, 무뇌증 태아도 인간이다. 따라서 이러한 태아를 죽이는 것은 인간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프로라이프는 ‘임신유지가 모체의 생명을 위협하는 의학적 사유가 명백한 경우’에 한해 낙태를 허용하자고 한다.

여기서 국제적인 낙태 기준 7가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1.임부의 생명이 위독한가.
2.임부가 육체적으로 위험한가.
3.임부의 정신적 건강이 위험한가.
4.성폭행을 당해 임신했거나 근친상간의 경우인가.
5.기형 등 태아에 이상이 있는가.
6.사회,경제적인 이유로 임부가 아이를 기르기 힘든가.
7.임부가 낙태를 원하는가([시사IN], 131호. 참조)

또한 세계 69개국은 임부가 어리거나 가난하거나 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도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결국 프로라이프는 국제적인 낙태 기준 7가지 중에서 “1.임부의 생명이 위독한가”라는 기준만을 낙태 조건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첫 번째 기준만을 적용하는 국가는 4개국뿐이다.

나아가 이 단체는 “보건복지부장관 또는 시장·군수·구청장은 원하는 자에게 피임시술을 행하거나 피임약제를 보급할 수 있다”, “의사는 불가피한 경우에 한하여 본인과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 인공임신중절수술을 할 수 있다”는 ‘모자보건법’ 14조 2항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이는 낙태의 여지를 더욱 좁혀놓고 있다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종족 구성원으로서만 규정되지는 않는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는 프로라이프의 주장을 비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플레처(Joseph Fletcher)의 ‘인간성의 지표’(자의식적, 미래감, 타인과 관계를 맺는 능력 등)라는 규정 속에서 볼 때, ‘태아는 인간인가’라는 질문에 “아니다”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서 ‘태아는 인간인가’라는 질문에 상반되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호모 사피엔스라는 생물학적 종족 구성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체(person)라는 의미규정(자의식적이거나 합리적인 존재: [옥스포드 사전])도 감안해야만 한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낙태가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반면에, 후자의 입장에서는 낙태가 일정정도 인정된다. 이처럼 ‘인간’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낙태 문제에 대한 다른 접근과 행위가 가능하다.

여성이라는 야누스적 얼굴, 그 존재론의 전환

흔히 여성의 정체성은 생물학적 측면과 사회 제도적 측면에서 규정할 수 있다. 여성의 정체성을 생물학적으로 환원해 버린다면, 여성의 정체성은 본질론으로 빠질 수 밖에 없다. 이는 여성의 정체성을 ‘고정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정체성은 존재를 구속할 뿐이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여성은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때 여성의 정체성은 ‘모성’으로만 규정된다. 모성만으로 여성의 정체성을 규정하면, A라는 여성은 “여성은 ‘어머니’이다”라는 명제를 부정할 수 없다. 이 명제는 바로 A를 낙태를 하면 안 되는 어머니로 ‘고정’시킨다.

위의 명제는 다음과 같이 바뀌어야 한다. 즉 “여성은 여성이면서 동시에 ‘어머니’가 아닐 수 있다.” 이때 여성은 앞의 명제에서 말하는 여성이 아닌, 다른 정체성을 갖는 여성이다. 곧 열려 있는 여성의 정체성이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다는 생물학적 특성으로 여성의 정체성을 고정화시키는 순간에 여성의 다른 잠재성은 축소되거나 폐기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여성의 정체성이 ‘희생적인 어머니’상을 만들어 낸다. 더불어 이러한 ‘어머니의 상’은 본받아야 할 것이 되고, 결국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삶은 자신의 존재를 일차원적으로 고정시킨다. 즉 본성적 모성이라는 사회적 세뇌의 구조화를 통해 여성의 정체성이 굳건히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출산이 사회 유지의 전제 조건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출산의 문제 때문에 그동안 여성은 어머니라는 고정화된 정체성에 갇히게 되었고, 결국 이러한 정체성은 여성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작동되어 왔다. 따라서 모성은 사회적인 것이다. 이 문제는 남성의 문제임과 동시에 사회적 문제이다.

여성의 정체성은 여성을 분절화하고 파편화하고 폐쇄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사회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형성되어야 한다. 곧 여성을 ‘모성’으로만 규정함으로써 안정적 노동력 재생산을 꾀하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말이다. 여성을 고려하는 체하면서 배제하는 힘에 의한 규정됨에서 여성 자신이 스스로를 규정함으로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논어]의 구절 ‘화이부동’(和而不同)에서 화(和)는 평화, 공존을 의미하고, 부동(不同)은 흡수, 지배, 합병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낙태 논쟁을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는 세력은 ‘화’를 거부한 채 ‘동’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

박종성(한국방송통신대학교 강사) / admin@ad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