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열정 또는 광기의 줄다리기[시대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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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열정 또는 광기의 줄다리기[시대와 철학]

박민철(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하나의 유령,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이 유명한 알레고리를 다시금 떠올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을 듯해서이다. ‘하나의 유령, 붉은 악마라는 유령이 한반도를 떠돌고 있다.’ 붉은색이라면 마치 알레르기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던 나라에서 붉은색이 현 시기를 상징하는 색이 되어버렸다는 점을 볼 때, 이 유령은 19세기 초 유럽을 뒤흔들던 공산주의만큼이나 대한민국을 뒤흔들고 있다.

전자의 알레고리는 그 동안 굉장히 많이 인용되어온 맑스의 말이다. 그는 19세기 당시 ‘공산주의’에 대한 전 유럽의 적대적 반응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런데 최근 대한민국의 상황은 이와 좀 다르다. 이 유령에 대한, 즉 월드컵에 대한 광적인 열광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 광적인 열광은 지나치게 뜨겁게 느껴지고, 그만큼 위험해 보인다. 거대한 열광의 흐름에 순응하지 못하는 마이너리티의 자괴감인지 아니면 열광적인 응원이 요구하는 강요가 싫어서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이 불편한 감정은 맑스의 목소리가 전달하는 그것과 다르지 않다.

월드컵에 대한 불순한 생각들

 

박노자는 월드컵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광에서 파시즘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이 불순한 발언들로 인해 그는 큰 곤욕을 치러야만 했지만, 그의 말은 ‘정확하게 얘기해서’ 맞는 얘기다. 역사적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예컨대 무쏠리니는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파시즘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했다. 시간이 지나도 이 고유한 틀은 남아 있다.

월드컵 경기는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의 총성 없는 전쟁으로 묘사되고, 그 속에서 우리 유령들은 ‘우리나라’인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인 그리스,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를 밟아주길 고대한다. 이러한 ‘배타적 민족주의와 강한 애국주의를 부추기는 월드컵’이라는 의견은 월드컵에 대한 불순한 생각들 중 하나이다.

또한 월드컵을 거대자본의 논리에 물든 공허한 행사로 바라보는 불순한 의견도 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수 십 개의 월드컵 공식 후원기업이 있고, 그들의 광고는 월드컵 경기장 안의 광고판에서 뿐만 아니라 띄엄띄엄 주어지는 쉬는 시간에 TV를 통해서도 보여진다. 거대 기업들은 월드컵에 대한 열정 속에 은밀하고 치밀하게 자본의 논리를 집어넣는다. 그 결과, 월드컵에 대한 열정은 자본에 희석되고 마침내 자본을 위해서 열정이 존재하는 전도된 상황에 놓이고야 만다.

기업들은 점점 더 우리의 열정을 조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최신 과학기술의 집합체로 여겨지는 월드컵 공인구가 사실상 제 3세계 어린 아이들의 절실한 바느질로 탄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즉 스포츠는 이제 그 고유한 순수성을 잃고 거대산업자본의 논리에 따라 이윤을 창출하는 대리체로 전락하고 만다.

이 관점에서는 월드컵에 대한 대한민국의 열광 역시 체제화된 자본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으로 코드화된 열광인 것이다. 예컨대, 서울 광장에서의 거리 응원전만 하더라도 월드컵의 후원기업인 현대자동자의 주관과 SK의 참여로 이루어지지 않는가.

이 밖에도 고리타분한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월드컵은 국가권력의 스포츠를 통한 우민화 장치라는 불순한 의견도 있다. 이것 역시 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천안함 사건, 4대강 사업, 사회적 자본의 민영화 등과 같은 굵직굵직한 국가적 관심사들은 온갖 미디어가 주야장천 보도하는 월드컵의 내용에 묻혀 잊혀져버렸다. 월드컵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 국가권력의 작업 속에서 우리들의 관심은 온통 월드컵에만 쏠려있다. 결과적으로 월드컵에 대한 대한민국의 열광에는 이러한 국가적 관심사에 대한 무관심이 수반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불순한 생각들을 통해 규정한 월드컵의 성격을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것일까? 누군가에겐 월드컵이 배타적 민족주의의 선동방법이며 누군가에겐 거대한 자본의 시장이며, 누군가에겐 국가권력의 지배 장치임을 다시금 지적하고 강조하는 건 이제 별 쓸모가 없을 듯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진부하다고 생각하여 개의치 않거나, ‘그래서 어쩌라구?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라는 식의 반응들을 보여줄 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점들은 ‘월드컵에 대한 나의 자발적인 참여’ 부분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월드컵을 미시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월드컵 행사 자체의 성격에 대한 거시적인 논의보다는, 월드컵에 대한 사람들의 자발적인 열광을 인정하고 그 열광을 추동하는 우리들의 욕망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필요하다.

일탈의 욕망이 부추기는 강요된 열광

 

월드컵에 대한 미시적 관점은 내가 응원하고 있는 나라가 이기길 바라는 ‘욕망’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미시적 관점은, 예컨대 파시즘에 동조하고 파시즘을 만들어가는 대중의 심리적 과정을 욕망과 관련시켜 분석한 빌헬름 라이히의 방식처럼, 월드컵과 월드컵 응원에 대한 우리들의 열광이 어떻게 배타적인 민족주의와 공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조금 더 미시적으로 들어가서 월드컵에 대한 열광, 그 열광을 부추기는 우리들의 욕망 자체를 알아보는 것이 더 절실해 보인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에서 월드컵에 대한 열광은, 거리응원을 위해 유아기에 벗어던진 기저귀를 다시 차며 16강 진출의 감격을 한강 투신으로 표현하듯 이제 광적인 상태로 들어섰다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6월 23일 새벽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대한민국을 소리쳐 외치며, 입간판을 발로 차고, 온갖 괴성을 질러댔다. 이것은 마치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려고 하는 개개인의 욕망이 표현되는 것처럼 보인다. 도덕, 법, 성별, 나이, 정파, 계급, 신분, 지역 등의 정해진 틀과 그 틀에 의한 구속은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일탈의 욕망이 자라게 한다. 그리고 모든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하나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을 추동한다.

다시 말해 월드컵에 대한 광적인 응원은 정해진 틀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일탈의 욕망이 현상적으로 가장 농도 짙게 표현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탈의 욕망에서 무엇이 문제가 될 수 있는가? 일탈의 욕망이 추동하여 생긴,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은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첫째는, 일탈의 욕망 그 자체가 갖는 ‘무의미함’과 ‘거짓됨’이며, 둘째는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이 역설적으로 포함하게 되는 ‘강제성’과 ‘유아성’이다.

일탈의 욕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욕망 자체가 아니라 일탈이다. 욕망이 중심에 설정된 것이 아니라 일탈이 중심에 설정되어 있다. 여기서는 일탈이 목적이고 욕망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월드컵의 광적인 열광을 추동하는 욕망은 가타리의 말처럼 ‘탈 영토화되고 탈 영토화하는 유목적 욕망’의 해방적 가능성으로만 그려질 순 없다.

욕망이 중심에 설정되고 그것에 맞는 내용과 특징, 의미 등이 수반될 때에만 욕망 자체가 담보하고 있는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에 주목할 수 있다. 욕망이 중심이 아닌 경우 ‘내’가 있을 공간이 없게 되어 욕망의 표현은 무의미한 반복행위로 전락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인 욕망의 고유한 흐름 역시 고정된 틀에 갇히게 된다.

월드컵의 광적인 열광에 주목했던 우리들은 2002년 이후 그것이 어떠한 자유와 해방의 가능성으로도 표현되지 않았던 사실에 실망하지 않았던가.

또한 욕망이 포함하는 내용, 특징, 의미 등이 수반되지 않을 경우, 그것은 유사(類似)욕망, 또는 거짓욕망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것이 욕망의 내용과 특징, 의미 등에 대한 강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욕망이 특정한 시점에 마주하게 되는 내용, 특징, 의미 등을 도외시하고, 욕망을 단순히 일탈에만 고정시킨다면, 생생한 흐름과 역동적인 가능성을 내포하는 욕망은 단순한 일탈의 수단과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 월드컵 16강 진출을 축하하기 위해 한강에 뛰어든 사람들처럼, 거짓욕망은 극단적인 욕망 분출 행위로 나타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탈의 욕망이 추동하는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은 반대로 ‘자유롭지도 못하고 서로 어울리지도 못하는 열망’으로 변하게 된다.

일탈의 욕망은 일탈이라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해진 틀과 구속으로부터 탈출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일탈의 욕망은 이내 자본, 국가권력, 미디어가 정해놓은 강요된 공간속으로 ‘자유롭게 서로 어울리고픈 강렬한 열망’을 밀어 넣는다. 즉 일탈의 욕망은 자신의 고유한 자유로움 속에 있지 못하고 다시금 정해진 틀과 구속에 의해 자리 잡혀지게 되면서 역설적이게도 ‘강제성’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일탈의 욕망은 내 의지와 욕망과는 상관없이 월드컵에 열광케 하고, 나아가 그 열광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을 마치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매국노이거나 놀 줄 모르는 숙맥이거나 특이한 돌연변이로 취급한다. 그리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붉은 옷을 걸치고 ‘대~한민국!!’이라는 공허한 구호를 외치도록 강요한다.

이러한 강요된 열광과 함께, 일탈을 욕망하는 주체들은 각 개인들이 보여줄 수 있는 해방과 자유의 가능성을 잃게 되고, 고립되고 독선적인 주체로 전락하게 된다. 월드컵의 광적인 열광 속에서는 타자의 욕망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다. 거짓욕망의 거대한 장에서 타인의 특수한 욕망은 거짓욕망의 블라인드에 갇히게 되고, 단 하나의 욕망만이 허용될 뿐이다. 여기에는 ‘응원의’, ‘응원에 의한’, ‘응원을 위한’ 욕망만이 허용된다.

이 절대적인 강제성으로 인해 타자의 욕망이 자리 잡을 공간이 없어지게 되면서 동시에 타자의 존재성, 타자의 타자성 역시 고려될 공간이 없다. 즉, 월드컵에 대한 광적인 응원에는 주위 사람들의 존재를 배려하도록 허용된 공간이 없다. 기간의 과정을 살펴보면, 무의미하고 거짓된 일탈의 욕망은 독선적이고 강압적인 열광을 낳았고, 그것이 우려스럽게도 대한민국의 광적인 응원으로 나타나고 있는 건 아닐까.

일탈의 욕망에서 욕망의 일탈로. 욕망의 상호인정으로서 월드컵

 

월드컵 기간 대한민국에서 나타난 광적인 열광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욕망이 지닌 특수한 조건들을 인식함으로써 극복될 수 있다. 이것은 일탈의 욕망을 ‘욕망의 일탈’로 바꾸는 것에서 가능할 것이다. 욕망의 일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일탈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이다. 욕망 그 자체가 목적이고 일탈은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욕망의 일탈에는 ‘욕망하는 내’가 중심에 있다.

욕망이 시작되는 최소한의 출발지점으로서 ‘나’는 내 삶을 규정하는 최소한의 내용, 특징, 의미 등을 가지고 있다. 이제 내 삶의 내용과 특징, 의미를 통해 규정된 ‘나’의 욕망은 일탈이라는 과정을 통해 보다 다양한 내용과 의미 등을 담보하게 된다. 예컨대 일탈의 욕망이 광적인 월드컵 응원에서 그 목적을 다하게 된다면, 욕망의 일탈은 단순히 월드컵만을 위한 광적인 응원을 넘어서 일탈이라는 수단을 통해 금지된 다양한 의미와 가치 등을 욕구하게 된다.

또한 욕망의 일탈에는 타인과 타인의 욕망을 향한 배려가 자리 잡을 공간이 있다. 나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대상, 객체, 타자와의 매개를 통해 충족되기 때문이다. 욕망의 충족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타자가 요구된다는 것은 내 욕망이 충족되기 위해선 타인의 욕망도 충족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때 타인의 욕망을 인정하면서 나의 욕망도 인정받게 되는 욕망의 상호인정이 가능하다. 욕망의 일탈이 추동하는 욕망의 상호인정 가능성은 일탈의 욕망이 갖지 못한 소통과 해방, 자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우리들의 강요된 열광을 조직하는 환상적인 틀, 즉 국가, 자본, 미디어로부터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하고 이것들의 영향을 제한할 수 있는 토대는 바로 일탈의 욕망을 욕망의 일탈로 전환했을 때 마련된다. 즉 우리자신들의 욕망이 갖는 특수한 조건들을 인식할 때, 욕망이 갖는 해방의 가능성은 마련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일탈의 욕망을 욕망의 일탈로 바꾸는 것을 통해 월드컵은 ‘우리인 나, 나인 우리’를 가능하게 해주는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필요하다. 내 욕망의 조건들 속에는 타인의 욕망이 전제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인 각성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다. 월드컵에 동참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사회적 차원의 공간을 마련해줘야만 한다.

‘붉은 악마’는 더 이상 ‘붉은 악마’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색을 담을 수 있는 ‘회색 악마’가 되어야 한다. 또한 욕망의 일탈이 유지되기 위해선 우리들의 욕망이 갖는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 우리들의 순수한 욕망을 지키기 위해선 거대기업과 자본이 유도하는 거리응원도, 국가권력이 정해놓은 서울광장도, 미디어의 온갖 부추김도 단호하게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자본, 국가, 미디어를 향해 이제 그만 사라져 주길 요구해야만 한다.

어쩌면 우리들은 월드컵이라는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그 동안 떨어져있던 타인을 부둥켜안고 싶어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철저한 개인주의 사회에서 서로가 소통하고자 하는 몸부림. 극단적인 애정결핍의 또 다른 반작용으로서 타인과 부대끼고 싶어 하는 몸부림. 다시 말해 애초부터 이미 우리들은 월드컵을 통해 욕망의 일탈을 꿈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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