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 등록금 투쟁, 그 미완의 싸움 [썩은 뿌리 자르기]
이현기(한신대 등록금 투쟁위원회)
2011년 상반기 대학가의 가장 큰 이슈는 “등록금” 이었다. 이 대학생들의 등록금에 대한 외침은 매년 연례행사처럼 있어왔던 등록금투쟁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었고, 한국사회에 뿌리내린 모순을 향한 싸움이었다. “반값 등록금” 구호를 외치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각종 미디어를 타고 전국으로 퍼지면서, 등록금 문제는 대학생들만의 문제가 아닌 이 사회의 문제로 인식될 수 있었다. 우리 한신대학교(이하 한신대)의 2011 등록금투쟁도 이러한 과정 안에서 큰 역할을 했다.
올해 한신대 안에서 등록금 투쟁이 시작된 시점은 “2011 등록금투쟁위원회(이하 등투위)” 가 출범한 3월 말이다. 다른 학교들이 등록금 투쟁을 끝낼 시점인 3월 말에 투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총학생회(이하 총학)의 부재였다. 한신대에서는 2010년 말 총학 후보가 나오지 않으면서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를 4월까지 유지하던 상황이었다. 3.4%라는 높은 등록금 인상률을 잠정 고지한 상황에서 총학의 부재는 등록금 투쟁의 주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학내 현실에서 일반학우들이 모여 등록금문제 해결을 위한 조직의 필요성을 논의했고 그렇게 한신대 안에서는 등투위가 출범하게 되었다. 이후 총학이 선출되었지만 이들은 등록금 투쟁에 집중하지 않았고, 모든 투쟁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해 학내 투쟁에서 등투위의 역할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등투위는 투쟁의 시작과 함께 가장 먼저 “등록금문제 해결을 위한 교양대회”를 개최했다. 등록금 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학생들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현실은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교양대회에 참석한 이들은 인문대, 사회과학대의 특정 몇 개 학과 학생들뿐이었다. 그리고 이어 진행된 집회나 선전전에도 그 학생들만 참여했다. 결국 등록금 투쟁이 몇 개 학과에게만 전가된 분위기였고, 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등투위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몇 개 학과씩 연합해 선전전과 집회를 로테이션으로 진행하고, 이 과정을 “전체학생총회”로 연결시키는 전략을 수립하여 진행하였다. 각 학과 학생회들은 책임감 있게 등록금 투쟁에 결합했고 이러한 노력들은 4월 14일 제 1차 전체학생총회 성사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전체학생총회에서 한신대 학생들은 등록금 투쟁을 결의했고, 기획처장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확인된 학교의 무책임함에 대해 분노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분노지점이 있었는데, 총학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였다. 총학은 회의 내내 학생들의 요구에 반하는 진행을 했고, 등록금문제에 대한 학생들의 분노에 찬 발언들을 ‘시간이 없다.’ 등의 이유로 제지하려했다. 그리고 정상적인 의결을 통해 확정된 본관 진입을 거부하는 등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투위와 개별 과 학생회의 의지로 본관에 진입하였고, 학생들의 의지를 학교당국에 다시 한 번 확인시킬 수 있었다.
전체학생총회 이후 등투위는 기존의 선전전 집회 방식과는 다르게 등록금심의위원회에 적극 참여함과 동시에 선전물 제작 및 부착, 외부 단체 연대 조직 등에 집중했다. 이유는 중간고사 기간과 특별활동주간(수업 외 활동 주간) 등 2주간 등록금투쟁 활동을 현실적으로 펼칠 수 없는 기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 2주간 동안 학내 등록금투쟁 분위기는 점점 사라져갔다. 학생들은 이미 등록금을 모두 납부한 상태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등록금 투쟁의 전망을 비관적으로 바라본 것이다. 등투위에는 이 상황을 타개할 카드가 필요했다. 단식, 본관점거 등의 방안들이 나왔지만, 모든 방안들이 학생들과 함께하는 투쟁을 만들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할 경우에는 투쟁 자체가 고립될 위험이 있었다. 그런 고민 속에서 등장한 전략이 “동맹휴업”이었다. 동맹휴업의 경우 학생 대중들이 함께 참여 할 수 있는 투쟁이고, 동맹휴업을 만들어가는 투표 등 과정에서 학생들의 등록금에 대한 의사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동맹휴업을 등록금 투쟁 전략으로 제시했지만 추진 과정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총학생회운영위원회에 최초 제안했지만 ‘전체투표가 성사되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반대표가 더 많이 나오면 학생들이 패배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운 총학의 반대로 시일이 촉박함에도 불구하고 결정은 전체학생대표자회의로 미루어 졌다. 이 회의에서 다행히 동맹휴업을 지지하는 학생대표자들의 노력으로 동맹휴업을 위한 전체투표는 압도적인 표 차이로 가결되었다. 가결된 이후 등투위는 강의실을 돌며 동맹휴업 총투표 지지를 호소했고, 캠퍼스에 동맹휴업과 총투표에 대한 선전물을 내걸었다. 이 시기 서울대, 이화여대 등의 지지와 외부 진보사회단체들의 지지가 큰 보탬이 되었다.
이러한 노력과 연대들은 학우들의 높은 투표율로 나타났다. 축제기간과 겹쳐 성사가 불투명했고, 적극적인 투표 독려를 하지 못한 점이 있었지만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투표에 참여한 것이었다. 사흘간 전체학생 5303명 중 54.7%인 2903명이 투표에 참여하며 총학 투표보다 높은 투표율을 보여주었고, 이 중 82.9%가 찬성하며 등록금문제 해결을 위한 동맹휴업은 전국 최초로 가결되었다. 이 과정에서도 총학의 문제점은 나타났는데, 동맹휴업에 관한 선전물은 단 하나도 부착하지 않은 점과 5303명 전체학우들의 전체투표 투표용지를 3000장 밖에 뽑지 않는 등의 안일한 대처가 그것이었다. 이러한 총학생회의 불성실함과 책임회피는 이후 등투위와의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힘들게 진행된 6월 6일 동맹휴업 당일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등록금문제 해결을 위해 수업을 거부하고 학내 광장으로 모이기로 했지만 많은 학생들이 수업에 들어갔고, 또 많은 학생들은 아예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것이다.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모인 것은 300명 정도의 학생들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이 300명가량 되는 학생들이 몇 시간 동안 기다렸고, 수업을 끝내고 나온 학생들과 결합하면서 제 2차 전체학생총회가 성사되었다는 것이다. 전체학생총회에서 학생들은 등록금 인하 투쟁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하지만 총회 막바지에 실천투쟁을 논의함에 있어 총학생회가 의도적으로 등투위의 전략을 방해하면서 이날 동맹휴업은 등투위와 총학의 감정싸움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현재 한신대 학교당국은 등록금 3.4% 인상에서 1.9% 인상으로 확정했다. 인상분에서 1.5% 내려간 수치이다. 만족스럽지 않지만 이것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투쟁한 학생들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다. 등투위와 총학의 갈등 등 과정상의 문제가 있었지만, 학생대표 기구인 총학이 부재함에도 일반학우들이 투쟁을 이끌었다는 점에서 한신대의 투쟁은 높이 평가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학교가 3.4% 인상분에서 1.5% 깎은 부분은 학생들의 장학기금과 교직원 임금이었다. 학생들의 재단전입금과 적립금 문제 해결로 등록금 인하를 이루고자 했던 요구를 무시한 것이다. 우리는 몇 만원 돌려받는 것을 원해 구걸했던 것이 아니다. 불합리한 것들을 바로잡으려고 투쟁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신대학교의 등록금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