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힘을 잃은 시대의 한반도[시대와 철학]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1. 아무도 믿지 않는 말잔치의 풍경
작년의 대선 결과가 충격으로 다가온 사람들, 그 이후에도 일련의 정치적 ‘꼬락서니’들을 넋 놓고 보아야만 하는 우울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봄’ 기운은 참으로 간절했었다. 그런데 연일 계속되던 북한의 ‘악다구니’와 그것을 교묘히 활용하는 남한의 위정자들은 이 ‘꽃샘추위’가 더 지속되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2013년 봄 연일 계속된 한반도 긴장 국면이 그 정점을 찍고 서서히 ‘대화 재개와 신뢰 구축’이라는 예정된 각본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북한 내부의 불안 요인을 잠재우는 거짓말과 남한 내부의 불안 요인을 증폭시키는 거짓말이 서로 교차하며 이익을 얻는 집단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거짓말 잔치의 풍경이 지금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파국’으로 치달을리가 없다고 모두 암묵적으로 전제했던 이 위험한 ‘쇼’의 각본은 사실 상호의 이익이 어느 수준을 넘어섰을 때 ‘불장난을 멈춘다’는 연출자들의 보이지 않는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제 이 정도 수위에서 북한, 남한, 미국, 중국 모두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북한의 김정은 체제는 내부세력을 단속하고 강성 군부를 통해 독재 리더쉽을 과시했으며, ‘핵 보유’와 도발의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원하는 점진적 개방과 투자를 위한 협상력을 강화했다. 남한의 박근혜 정부는 이 ‘북풍’을 통해 ‘낯 뜨거운’ 직무수행 능력을 덮어버리고, 뒤숭숭한 민심을 불안감과 외부 관심으로 얼기설기 솎아 내고 안보상황을 유리하게 환기했다. 물론 개성공단의 위기가 남북한 경제에 실제적으로 미치는 파급효과가 미미하다는 것은 양자가 서로 큰 부담 없이 다음 절차를 위해 이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전술적인 조건이었다. 한편 이 기간 동안 미국의 공고한 군산복합체 지배계층은 최신 무기를 전시하고 판매할 수 있는 ‘모터쇼’를 성황리에 열었으며, 북한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고 방어하는 향후 ‘칭얼대는 아이 달래고 혼내기 액션’을 보다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북한이 쏟아내는 공격적이고 극단적인 언사들은 실상 그들의 공포심과 두려움을 은폐하고 있으며, 그 ‘위험한 악동 코스프레’는 고립을 극복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계산된 행동의 일부일 뿐이다. 물리적 전쟁으로 결코 승리할 수도 없고, 전면전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북한의 군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당랑거철(螳螂拒轍)의 호기롭고도 가련한 무기-핵무기를 빌미로 한 심리전쟁, 말의 전쟁-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 당국의 언사가 호전적이면 호전적일수록 그 말의 진정성은 떨어지고 현실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진다.
그런데 무슨 사고만 터지면 ‘북한의 소행이다’라고 몰아가는 남한 정부와, 중국조차 믿을 수 없는 무기력한 힘의 대결에서 거짓말을 남발해서라도 작은 통제력을 갖추고자 하는 북한 당국의 몸짓은 어쩐지 서로 닮은 데가 있다. 이러한 북한 지배층의 위악(僞惡)의 포즈는 남한 지배 권력의 위선(僞善)적 포즈와 쌍을 이루어 전후 한반도의 인민들을 통치하는 가장 중요한 기만 술수였다.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한반도의 이 기묘한 호혜적인 관계는 2013년, ‘3대 세습권력’과 ‘독재자의 딸’이라는 최악의 조합이 갖고 있는 상호 필요성으로 인해 이 땅에서 다시 재현될 조짐을 보인다.
사실 남과 북의 권력자들이 모두 원하는 것은 아무도 믿지 않는 말을 하고 아무도 신뢰할 수 없는 이미지를 연출하면서도, 인민들로 하여금 마치 그 말과 이미지가 사실이고 진실이라고 스스로 믿고 싶게 만드는 ‘연극적인 상황’이 아닌가. ‘거짓에 의해 지속되는 공동체’가 남과 북에서 모두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도록 한반도의 현대사는 모질게 흘러왔다. ‘능수능란한 사기꾼은 속고자 하는 사람들을 항상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의 조언이 오용되면 위험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기표가 함의하는 바를 모르고 ‘속은’ 사람이 아니라,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스스로 ‘속고 싶어서’ 그녀를 선택한 사람들이 많다면 향후 제도권 정치를 통한 삶의 개선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show’를 쑈인줄 알면서 그것을 적절한 수위에서 소비해주는 것과, 쇼가 아닌 삶과 역사의 문제를 쇼처럼 관람하고 방관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미 숱하게 속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속아 넘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의식은 끝내 자기 자신의 양심까지도 속이려 들것이다. 말 같지 않은 말도 반복적으로 들으면 고유한 세뇌 효과를 얻기 마련이고,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기 때문이다. 탈출구 없는 불안한 민중들이 상징조작과 선동의 효과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출 때의 참혹한 광경을 우리는 이미 20세기 전반의 파시즘에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2. 불신시대의 언어와 무기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이익’이라는 말은 오늘날 정치와 경제 두 영역의 교차지점을 꿰뚫는 핵심적인 테제이다. 또한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라는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지도자 마르코스의 메시지는 이제 전혀 다른 맥락에서 지금-여기 상황에 적용된다. 진실을 거의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전체주의 체제 독재자의 말은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이데올로기를 실현한다. 늘 속셈을 숨기면서도 국가와 민족, 국민과 국익을 주워섬겨야 하는 선출된 권력자의 말은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라는 이데올로기를 구축한다. 자신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말을 확신에 찬 어조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서 내뱉는 것은 이제 국회의원에게도 필수적인 자질이 되었다. 필자는 “음란물의 유통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 중에 “누드사진”을 검색했다고 뒤늦게 수습하는 새누리당의 어느 중진 의원을 보면서 시궁창 똥물을 뒤집어 쓴 ‘공공언어의 무덤’을 목도했다. 공적 권력에 의해 공표된 말이 가장 의심스러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대의민주제 정치가의 기본적인 레토릭마저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남한의 위정자들을 보면, 혹시 그들이 쏟아내는 말은 스스로의 권위를 자해하는 무기이거나 스스로의 수준을 까발리는 풍자의 말이 아닐까 싶다. 우리의 새 대통령이 정성들여 쓴 수첩에서 비밀스럽게 나온 비리 인사(人事)들이 만들어내는 저 지리멸렬한 가관을 보라. ‘4대 중증질환 진료비 100% 보장’이라는 대선 공약(公約)을 첫 번째 보건복지부 장관인 그녀의 최측근이 “그것은 선거 캠페인용 문구”였다고 말하는 ‘셀프 공약(空約) 인증’을 보라. 실상 재벌과 부자들만을 위한 나라를 만들 작정이면서도 선거에서는 ‘국민행복 시대’를 열겠다고 거짓말할 수밖에 없고, 서민들과 노인들에게 어떤 식이든 복지 떡고물을 나눠주는 액션을 취해야 하지만 결코 재벌과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걷을 수 없는 자승자박(自繩自縛) 딜레마에 빠진, 구중궁궐 홀로 고고하고 불쌍한 ‘근혜 언니’를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 이 청와대 발(發) 불신지옥-퇴행의 정치를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허허.
▲ 3월 21일 박근혜 대통령이?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청와대
이처럼 ‘거짓말’이 일상이고 진정성이 예외가 된 정치권력의 언어가 탐욕만이 승리를 보장하는 신자유주의 경쟁사회의 언어와 쌍둥이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된다. 그래서 어느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듣기 힘든 이 사회를 풍자하며, 언어의 새로운 의미를 공유하는 우스개 소리도 당연히 출현했다. 개그콘서트의 ‘현대레알사전’에서는 어휘의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이해되는 현실의 진짜(real)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다. 그 코너에서는 “직장인들에게 회식이란?” “‘사장님, 회식비로 차라리 월급이나 올려주세요’하고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 또 다른 뜻으로는 사장님이 카드만 주고 가셨으면 하는 것”이라고 폭로하며 시청자의 호응을 이끌어낸다.
한편 최근에 필자가 인터넷에서 재미있게 본 어느 댓글에서는 현실을 이렇게 조롱한다. “자유주의란? 돈에 구속당하는 것. 신자유주의란? 돈에 더 구속당하는 것.” 물론 원장님의 지침에 따라 편향된 정치적 댓글을 다는 것이 주된 업무인 국정원 일부 직원들에게는 언어의 의미와 변용 따위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에는 말이 가진 해방의 힘은 제거되고 구속력만이 작용할 뿐이다.
이제는 ‘텅 빈 개념’이 된 민주주의, 주권이라는 말이 그 사회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로 인식되는 사회에서는 불신 관계가 더욱 강화한다. 특권층과 기업을 위한 조치가 국민들을 위한 조치로 둔갑하는 사회에서 ‘점령당한 방송사’의 뉴스를 볼 때는 일단 의심부터 하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고, 국가의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신봉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성경 말씀을 글자 그대로 믿는 신앙인과 대화할 때만큼이나 답답해졌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현대의 고사성어를 잊을만하면 상기시키는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판결을 보며, 인민들은 공권력이 집행하는 정의(正義)와 국가가 보장하는 생존에 대해 기대감을 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이렇게 당당히 외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나는 오직 돈만 믿는다.”
더 많이 누리고 가진 자의 말일수록 믿을 수 없는 시대, 서로의 말이 말 같지 않아 말이 무기력한 사회, 음모론과 증권가 찌라시가 존중받는 시대, 곧 말뿐인 시대. 그래서 믿을 거라곤 내 재산밖에 없는 피곤한 사회, 돈이 있어도 고민, 없어도 고민이지만 어쨌든 돈이 무기인 사회, 곧 너도나도 ‘힐링’을 요구할 수밖에 없어서 잠이라도 푹 자고 싶은 프로포폴 권하는 사회. 불신-불안-공포가 대중의 가장 강력한 정서이자 가장 강력한 지배수단이 된 시대. 이것이 작금에 들어 더욱 퇴행할대로 퇴행한 저잣거리 정서이자 대중이 가진 시대정신의 실체라고 한다면 너무 비관적인 인식일까.
3. 불감증: 소통이 어려운 사회의 질병
“제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이제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죄송해요.” 이런 말을 남기고 자살한,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전교 1등’이라고 언론에 보도된 학생의 유서를 보았다. 이 유서에는 공표된 말과 실제 현실의 괴리가 심한 우리 사회의 가장 처절한 단면이 예리하게 드러나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면 보장된다는 행복한 미래에 관해 말씀하시는 선생님과 부모님의 말만을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현재를 만드는가. 그 권위 있는 말이 사실과 진실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갈 때, 말은 거품이고 성적만이 실체인 학교에서 조숙한 그 아이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타인과의 정서적 교류나 연대가 몰가치하며 불필요한 것으로만 폄하될 때 우리 내면은 얼마나 쪼그라드는가.
서로 다른 저마다의 생각은 효율과 성장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강요했던 ‘박통시대’의 시즌2가 그의 딸에 의해 도래했다. 전인교육, 감성교육 이런 말은 이제 중등교육 현장에서 구호로 외쳐지기도 민망해졌다. 공교육에서 외면한 역사교육, 시민교육으로 대학생들의 역사적?정치적 감수성도 메마를 대로 메말라 있다. 필자는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이제는 하나의 세력을 이루어 가고 있는 젊은 파시스트들이 이런 현상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부터 서열화와 폭력이 상식이 되면 민주(民主)와 다양성은 낯설고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워진다. 우리의 아이들이 지금 그렇게 훈육되고 있는데 학교폭력이 어찌 학교와 부모의 문제일 수 있겠는가. 이 사회에서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가 이미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자신은 감당하기 싫은 고통과 폭력을 서로가 서로에게 강요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 아이들이 만들어갈 한반도의 미래는 지금보다 더 안전한 시대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시대가 될 수도 있다. 작년 대선 이후 가속화된 ‘늙은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젊은이, 젊은이를 믿지 못하는 늙은이’의 사회가 도착할 터널의 끝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에 담긴 파시즘적 상황보다 더 끔찍하다. 남한 내부의 사정이 이러할진대 어떻게 남과 북이 서로 대화하고 교류할 수 있는 각 영역의 광장들이 쉽게 열릴 수 있을까. 평화를 위한 ‘신뢰 프로세스’라는 것도 서로의 이익이 확대될 수 있는 조건의 확장이 아니라, 먼저 서로의 말을 믿을 수 있는 조건의 확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거짓’이 일상이고 ‘진실’이 예외적인 상황이 되면 말 자체는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우울증이 고립감을 키우는 개인적 정서의 문제라면, 불감증-타인의 고통에 반응하고 공공의 문제를 공적으로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 자체를 상실하게 만드는-은 사회적 정서의 문제이다. 말의 힘이 무너진 시대에는 어차피 합리적인 대화와 소통이 불가능하기에 시민의 정치력이 쇠퇴하고 공공의 문제에 대한 불감증이 커지고 현실도피적 경향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말이 힘을 가지는 관계, 즉 서로의 말을 믿을 수 있는 관계가 확산된다면 사람들의 약속과 상호연대는 보다 강력해진다. 그런 상황에서 인민들은 비로소 자율성과 감수성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사회의 한 조건은 공적으로 뱉은 말이 자발적인 권위를 갖출 수 있는 관계가 아닐까. 서로의 말을 경청할 수 있기 위해서는 말을 뱉은 자들이 자신의 말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져야한다. 말이 가진 가치와 의미를 행동으로 실현하고 그 관계의 망들이 서로 엮여져 그것이 가장 강력한 권력이 되는 정치, 아니 그런 말과 말의 선순환 관계가 일상이 되는 사회. 그것이 현재 우리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거짓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