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④-국가폭력의 완성 ?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

국가폭력의 완성 ?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

 

이원혁(한철연 회원)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에 대해 연일 계속되는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나 촛불집회에도 불구하고 전·현직 정보당국의 책임자들과 또 그 연계가 의심되는 전·현직 대통령들은 그 어떤 책임 있는 행동이나 발언 없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오히려 여당은 대선불복이니 국론분열이니 하면서 적반하장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뻔뻔함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들을 지지하는 소위 콘크리트지지층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있는 국가권력의 강고함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국가라는 이름과 힘에 의해서라면 그 어떠한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으며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이 그들의 행동과 언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이것이 이번 사건이 유신시대를 연상시킨다고 말하는 이유기도 하다. 국가에 의해 진행되는 강압과 음모에 대해 그것을 행한 이들이 도덕적, 양심적 가책을 받지 않고 카메라와 국민 앞에서 저토록 당당한 것은 국가권력은 그래도 되고 그럴 힘이 있으며 그 힘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 덕분에 가능하다. 이는 과거 권위주의시대의 권력층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민주주의 정치와 가장 동떨어진 의식이다.

근대 사회계약론의 환상과는 달리 국가는 사람들의 합의로 구성,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신의 거대한 폭력성에 의해 국민을 구성하고 포섭하여 국가의 체계를 유지시켜온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지난 세월 지난한 민주주의 투쟁은 이러한 국가 폭력을 견제해 왔으며 이를 통해 사회 공동체의 붕괴를 막아왔다. 근대 이후의 국가는 사회와 국민에 대한 수많은 폭력과 강제를 진행해왔지만 민주주의 본질에 대해서는 감히 범하지 못했다. 설령 범하는 국가권력이 있었더라도 패망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 국가권력이었다는 점은 역사가 명백히 보여줘 왔다. 즉 국가권력과 그것에 심취한 권력자는 전제적 권력을 완성하기 위해 국민을 넘어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까지 진행하지만 그것의 말로는 손에 잡히는 역사책 한권만 펼쳐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 여당과 청와대는 부정선거 발언이나 대선불복은 금도를 넘은 것이라 말하지만 정작 금도를 넘은 것은 정보기관을 통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근간인 보통선거의 근간을 흔든 권력이다. 이번 사건은 여당의 표현대로 금도를 넘은 사건이며 사회적 금기의 파기는 묻혀 질래야 묻혀질 수 없는 것이다. 무능한 야당의 무능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파장이 날이 갈수록 더욱 커져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또 책임 당사자의 뻔뻔함이 이대로 계속간다면 뿌리가 흔들리던 민주주의는 오히려 들풀처럼 일어나 뻔뻔하게 흔들던 손을 날카롭게 베어버릴 것이다.

 

양심, 본래적 자기로 회귀하는 실존적 결의[Q 선생의 閑談]

서영화의 하이데거론

 

이규성(웹진편집위원장, 이대교수)

 

최근(2013년 2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와 무의 관계에 대한 연구](서영화)가 나왔다. 이 논문은 학위논문의 성격이 요구하는 대로 국내외의 주요한 1, 2차 자료를 넓게 활용하여 연구자의 논제를 일관되게 다루고 있으며, 자신의 차후의 연구 과제를 언급하고 있다. 학위 논문의 성격상 자신의 과감한 비판적 논의를 전개하지 않는 것 또한 후일의 기회를 갖고자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평자(評者)가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이데거의 주제이자 서영화의 주제인 존재와 무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저자가 잠시 미루고 있는 하이데거에 대한 비판적 해명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1945년 해방 이전부터 특히 박종홍, 고형곤, 신남철, 박치우, 조가경과 같은 초창기 철학 연구자들의 논의의 범위 안에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박종홍은 존재의 문제를 역사철학적으로 발전시킨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운(歷運) 개념을 ‘우리의 철학’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천명(天命) 개념과 연관하여 재해석하고자 했다. 박종홍은 존재의 극치에서 만나는 무(無)를 이학의 무극(無極) 개념 그리고 불가와 도가의 공(空)과 무(無)의 개념과 연관하여 해석하고자 했다. 이 맥락에서 박종홍은 ‘무의 형이상학’을 20세기 주요 철학적 과제로 간주하고, <무>를 통과해서 존재의 역운에 동참하고자 했다. 한편 박종홍은 전통적 선비의 현실참여 방식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요구를 물질적이고 문화적인 빈곤을 극복하는 강력한 국가의 형성을 위한 실천적 개입으로 보았기 때문에 야스퍼스의 존재(포괄자) 개념을 포함하여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말하는 인간론을 무기력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신남철, 박치우는 현실 문제를 둘러싼 정치사상적 주제를 주요 과제로 설정했기 때문에 하이데거를 매력 있고 심오한 철학으로 보면서도 본격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여력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도 존재론이 갖고 있는 초탈적인 비역사적 성격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고형곤은 구체적인 사회적 연관들을 제거하고 존재론을 선불교의 마음의 현전(現前, 현전은 마음이 지금 이 자리에서 앞에 드러난다는 선종의 용어)과 연관하여 현상학적 해명을 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서양의 현상학적 운동이 과학기술적 객관성이 지배하는 시대를 극복하고자하는 활력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해, 긴장을 상실한 도인의 수양론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이나 동아시아의 선종을 고립된 실체로 다루는 정태적 태도에 빠져 있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그 후 하이데거 연구자들 가운데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이는 고통스러운 생명 현실의 존재[有]와 이에 대한 부정인 무(無)의 엄중한 차이를 관찰하라는 붓다의 단호한 태도([아함경],[가전연경])를 무색하게 하고, 고난과 참회가 갖는 수양론적 의의를 무시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서영화의 [하이데거론]은 하이데거에 입문하거나 평가해보려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논제들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평자는 대학시절 실존주의라는 이름 아래 알려진 하이데거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었으나, 대체 존재론적 차이가 무엇이며, 전기와 후기의 차이는 무엇이고, 해석학적 해명이란 무엇인지가 애매모호한 채로 군사독재 시절을 보냈다. 그 후 나이가 먹어가면서 동서양의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인간의 이상적 모습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모습은 궁극적으로는 자유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궁극적 관심을 동양철학, 가톨릭 신비주의나 카발라철학, 셀링을 비롯한 사변철학적 작품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도교의 연금술적 자기변형의 기술, 심지어 도교와 불교에 바탕한 안토냉 아르또(Antonin Artaud)의 연극론에서 말하는 ‘기관 없는 신체’도 새로이 변형된 신체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우주와의 일치에서 오는 자유 즉 신체 내 각 기관들의 속박에서 벗어난 연금술적 해방이다. 말(로고스)로 다하는 그리스적 전통의 예술이 아닌 동양의 연극이 보여주듯 행위의 상징을 통한 새로운 인간성의 형성이 예술의 과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하이데거의 철학도 비록 그가 가치론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비본래적 단계에 처해 있는 전락한 삶의 양식으로부터 본래적 실존을 통과하여 생성의 유희로서의 존재를 향유하는 삶 즉 자유를 지향하는 가치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서 혹은 신들이 있었던 태고적에 나타났다가 상실된 과거의 사상이면서도 결단을 통해 접근해야하는 미래적 가치이다. 이 점에서 결단의 순간은 신약성서의 구도처럼 결정적 시간(chronos)이며, 이 시간을 통해 선구적 삶을 살게 된다. 자유와 시간, 존재와 시간의 문제는 분리될 수 없다. 존재와의 합치를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하려는 문맥에서 하이데거는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 즉 존재 그 자체를 상실해 간 과정으로서의 서양 철학사를 비판하게 되었다. 존재자의 근거인 존재를 마치 존재자의 원인인 것처럼 보는 전통 형이상학, 특히 유대 기독교 전통과도 연관된 제일 원인으로서의 신의 위상을 갖고 있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는 철학, 심지어 유물론적 아르케(원인)를 근원으로 제시하는 자연철학도 어느 특정한 존재자를 존재로 오해하는 존재 망각의 사유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하이데거가 저녁의 나라(Abendsland) 서양의 자연과학을 전통 형이상학의 완성으로 보고, 존재자를 물리적 객관으로 환원하여 객관성을 존재로 생각하는 습관을 비판적으로 본 것은 흥미로운 과학론으로 보인다. 형이상학의 완성태인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는 철학의 종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서영화가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를 중심으로 하이데거의 전 후기를 일관되게 바라보는 시야를 갖고자 하고, 헤겔, 니체, 들뢰즈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생성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 것은 하이데거의 중심 논제에 육박해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생성을 생과 죽음이 일어나는 과정으로 보아 생만을 강조하고 죽음이 없는 생명성에 집착하는 니체나 들뢰즈를 극복하려는 관점에서 하이데거의 무(無)에 접근하려는 태도는 인상적이다. 평자의 관점에서는 하이데거 철학의 이러한 측면은 영국 학자 매기(Bryan Magee)의 언급처럼 쇼펜하우어의 관점과 공통된 것이다(The Philosophy of Schopenhauer, 1983). 개별적 존재자의 죽음을 수용하고, 전체로서의 존재자의 무에 대한 긍정을 통해 존재와 무의 통일성을 사유한다는 사상은 존재와 무의 합일을 추구하는 동양적 사고나 서양 신비주의 전통에 접근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영화에 의하면 이러한 통일에서 존재와 존재자가 원인과 결과라는 신학적 혹은 과학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존재자에게 줌(Didonai, Lassen) 혹은 허여(Zugeben)의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평자가 보기에는 하이데거의 견해가 고대 그리스적 연원을 갖는다하더라도 그래서 신학적 구도를 떠나있다 하더라도, 그가 결정적 결단의 시간을 중시한 것과 함께 줌이라는 말 자체는 쉽게 또 다시 신학적 은총의 관계와 연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운은 인간 현존재의 능력의 범위를 무한히 넘어서기에 인간은 단지 동경과 기다림의 상태에 있게 되는 기독교 종말론적 구원사의 성격을 갖게 된다. 이와 연관하여 데리다의 연구(Jacqes Derrida, [정신에 대하여], 박찬국 옮김, 동문선, 2005)가 보여주듯 서양 역사를 구원사적 관점에서 해석한 헤겔처럼 하이데거도 기독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정신’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주저에서 사용함으로써 사고의 불일치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점에 대해 서영화는 여러 군데에서 암시적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해와 해석에 치중한 저자는 그것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있다.

또한 저자는 존재론적 (차이) 문제가 전 후기를 관통하는 하이데거의 관심임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세계와 인간이 맺는 관계의 현실적 국면을 해명하려는 데에 관심을 보이는 전기와 본격적으로 존재론적 문제에 개입하는 후기의 차이를 ‘명백하게’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세계를 해명하는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의 발전사적 차이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존재와 연관하여 세계의 문제를 둘러싼 여러 전문 연구가들의 입장을 소개하고 그들에 대한 간략한 비판을 통해 (전기의 인간관이 근대적 주체성이 아닌 현존재의 유한한 실존의 무력성과 절박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슐츠와 헤르만의 입장을 지지하면서)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려는 저자의 자기의식적 태도는 연구자의 기본을 준수한 것으로 보인다.

평자가 서영화의 논문을 읽는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관심을 일으킨 것은 저자가 제시하는 하이데거의 ‘양심(Gewissen)’ 개념이었다. ‘죽음 앞에서의 불안을 견디고’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스스로를 단독화하는’ 의지이다. 이러한 의지는 존재에 귀의하는 진정한 삶의 양식으로 살기로 결의하는 키에르케고르적인 독자적 의지일 것이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견해가 ‘유아론적 세계’(한나 아렌트)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양심 개념이 시회적 소통성을 무시한 원자적 개인은 아니라고 한다. 양심은 세인(Das Man)의 관심(도구적 삶)을 초월하여 본래적 자기로 회귀하는 실존적 결의를 가진, 그래서 현존재 자신을 목적으로 결단하는 자기성이다. 진정한 가능성을 향한 자기가 양심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견해를 서영화는 변호하고 있다. 평자 역시 하이데거의 이 견해는 현대인이 상실한 최대의 가치라고 본다. 진정한 본래적 소통적 사회성은 고독한 자기 관심에의 열정을 통해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초인들은 언제나 텅 빈 광야로부터 왔다.

그러나 저자도 주석에서 소개하듯이 한나 아렌트의 비판 즉 하이데거가 유아론적 관점에 빠짐으로써 동료와의 분리를 추구한 결과 전체주의적 국가 사회주의 정치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판단된다. 이 문맥에서 평자는 양심의 정의를 칸트나 하이데거와는 달리 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위해 평자는 하이데거와 인도의 우파니샤드(Upanishad) 철학을 비교하여 인도인의 관점을 취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하이데거는 데리다도 비판하듯 동물을 세계 개시성이 없는 본능적 충동에 의거해서 사는, 그래서 인간과는 단적으로 구분된다는 ‘인간 중심주의적’ 착상을 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동물학을 싫어하는 기독교적 습성을 가지고 당시의 동물학적 정보를 이용하여 나방과 같은 곤충들이 충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과학적 사실로 언급한다. 그러나 현대 동물학은 동물의 인지 구조에 대한 풍부한 전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동물도 환경 세계를 갖는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우주 중심주의적 사고를 중시하는 하이데거가 그러한 편견을 고집하고, 나아가 동물과의 연속적 유대성을 무시한 양심 개념을 자명한 전제처럼 주장하는 것은 놀라운 역설이다. 그리고 존재 중심의 역사철학은 절대정신처럼 역사에 대한 숨 막히는 지배력을 갖고 세계를 누르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에 비해 우파니샤드 철학은 광물, 식물, 동물, 인간, 천상의 존재들은 전체로서의 우주와 하나임을 자각한 초인적 존재가 자신의 우주를 단계적으로 상실하여 가장 작은 세계를 갖게 된 존재가 광물과 같은 존재라는 관념을 전제하고 있다. 동물은 인간 보다는 협소한 세계를 갖지만 세계를 인간과 공유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같을 뿐만 아니라 우주를 최대한 광대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초인의 관점을 근본적이고 무의식적인 희망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자유를 원한다. 이러한 관념은 태고적 영웅시대의 잔혹한 투쟁사를 겪고 만유의 우주적 유대를 최상의 진리로 깨닫게 된 전사 계급의 자각의 결과였다. 불교의 만유 불성론은 여기에 기원한다.

쇼펜하우어는 이에 의거하여 ‘양심 불안(Gewissensangst)’([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V 1 ,65장, 1818)을 다른 생명체를 식용으로 삼는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게 된 죄의식에 연원하는 것으로 본다. 이 죄의식이 우주와의 분리를 불안의 근거로 보는 철학을 창조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우주적 불안의 극복은 우주와의 합치에서 오는 ‘평정(Gelassenheit, 방하放下)’에서 이루어진다. 우주적 연대성의 상실에 인간의 근본 불안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불안을 감지하고 다시 우주적 유대를 회복하려는 의지가 양심이 아닐까. 그리고 이 양심을 사회 정치적 평등의 이념으로 전개는 것이 동서양의 신비가들의 희망이었다는 사실은 수많은 그들의 언행에 관한 서적들이 증언하고 있다. 프란시스코 수도회 소속인 둔스 스코투스도 성인 프란시스코의 정신에 따라 고독과 우주적 유대를 결합하는 자각을 사랑으로 보았다. 하이데거의 절박하고 강렬한 본래적 실존은 바로 이와 같은 평등의 유대와 결합했을 때 정치적 잔혹성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달달볶는 개신교적 내면성이 갖는 불건강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평자는 동양의 지혜를 정치사상적 문맥에서 발전시키려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하이데거 철학의 절박한 성실성을 매력 있는 것으로 수용하면서도 그가 갖고 있는 어두운 측면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영화의 [하이데거론]을 유심히 읽었으며, 평자의 생각을 정돈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논문의 후반에서 무의 문제와도 연관된 생성의 문제를 후속 연구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이 문제는 인류의 오랜 숙제로서 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윤리적 의미도 갖고 있다. 오늘 날 군산 복합체의 기술과학 권력과 정치가들과 결탁한 화폐 권력은 생사의 의미를 움켜쥐고 있으며, 자신을 호위하는 많은 과학적 철학과 언어규칙 철학을 생산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생사의 의미를 추구하고 양심에 의거하는 생성의 철학은 이러한 권력의 철학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동시에, 귀부인이 넘보는 돌쇠의 유혹에도 눈길 하나 주지 않듯 고고한 자태를 유지할 것이다.

 

2013, 8, 23.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③-장물 취득 정권의 탄생

장물 취득 정권의 탄생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대다수의 국민들은 국정원이 어떤 기관인지는 알아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 분명히 알고 있는 점은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그들은 막강한 권한을 국민도 모르게 행사해 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국회조차도 그 예산 집행 내역을 알 수가 없는 집단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사용한 권력은 한국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일에도 동원되었다는 점도 일부 밝혀진 바 있다.

이번 대선 정국에서 드러난 국정원 댓글 사건은 그들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집단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댓글 작업에 동원된 것으로 알려진 직원은 종북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고까지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들의 말대로 북을 이롭게 하는 것이 종북이라면 그들은 가장 위험한 종북 세력임에 틀림없다. 남북 대치 국면에서 북을 가장 이롭게 하는 것은 남한 사회의 국론 분열과 민주주의의 퇴행일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선과정에서 이루어진 국정원의 행위는 그 어떤 공작 정치보다도 유치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막대한 세금을 들여 무엇을 하나 했더니 초등학생들도 할 수 있는 댓글 작업이었다. 마치 값비싼 다이아 반지 사주었더니 집안 유리나 자르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아울러 박근혜 정부 역시 이번 국정원 댓글 사건의 피해자임도 드러났다. 왜냐하면 박근혜 정부가 처음부터 정통성을 잃은 실패한 정권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출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형법상 장물 취득죄는 미필적 인식의 성립만으로도 적용가능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불거진 이 문제에 대해 적어도 미필적 인식의 차원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는 국정원이 훔친 민심이라고 하는 장물을 취득한 정권이다.

박근혜 정부와 여당이 이번 문제에 대해 미봉적으로 대할수록 국민들은 그들의 인지 가능성에 대한 더욱 가능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가장 상식적인 국민들의 판단은 구린 구석이 없으면 도대체 무엇을 숨기려고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분명하다. 박근혜 정부는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덮으려 하지 말고 진상을 명백히 밝히고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국정원과 같은 권력 기관이 더이상 민심을 우롱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반역적 행동을 하지 않도록 철저한 개혁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정보기관의 특수성이라는 수사를 동원해서 그들의 범죄가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실패한 정권 혹은 성공한 정권은 정권초기에 나올 말이 아니라 정권을 내려놓은 이후에 나와야 할 평가인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② – 이 땅의 민주주의를 말아먹은 자 누구냐

이 땅의 민주주의를 말아먹은 자 누구냐

강지은(한철연 회원, 웹진편집주간)

드디어 1954명의 언론, 출판계 인사들이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한국언론은 죽었다”고 비웃는 해외 언론들의 비난을 이제 면할 수 있을까. 아직 멀었다. 권력과 유착한 메이저 언론들은 ‘국정원 대선 개입’에 분노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철저하게 왜곡, 유린하고 있다. 이들이 권력에서 독립해 국민을 위한 목소리를 내리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난 이명박 정권부터 작금의 박근혜 정부까지 이어지는 권언유착은 흡사 5공화국을 떠올리게 할 만큼 친정권적이다.

국정원의 대선개입은 누가 뭐라해도 권력에 의한 부정선거임을 피할 길이 없다. 부정선거로 권력을 쟁취한 자들이 앞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못할 짓이 무엇이겠는가. 권력과 유착한 국가정보기관의 선거개입이 명확한 이 마당에 대한민국의 국민은 어떠한 미래도 꿈꿀 수 없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죽은 꽃에서 어떤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선배 열사들이 핏자죽이 아직도 선명하건만 이 시대의 민주주의는 죽은 꽃이 되어버렸다.

국정원의 선거개입만 문제가 아니다. 권력기관의 부패가 드러난 이 시점에 대선개표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시행되었어야 할 수개표가 진행되지 못했다.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확인되어야 할 투표용지가 오류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기계에 맡겨졌다. 민심은 천심이다. 천심을 기계에 맡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지금이라도 언론과 야당은 국정원대선 개입문제 뿐만 아니라 수개표까지 관철시켜야 한다.

언론을 타지 못하면 없는 일이 될 만큼 강력한 것이 언론이다. 언론은 오감을 곧추세워 헌정질서를 교란시킨 범죄자를 발본색원해야 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역사에 늦은 시기란 없다. 언론은 권력의 하수 노릇을 집어치우고 국민과 민주주의 수호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 것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① – 은밀하게 위대하게

은밀하게 위대하게

 

한길석(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교육부장)

 

민주주의가 위협받고 있다는 장탄식이 연일 계속되고 있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의 헌신’을 아끼지 않는 어느 국가 기관 종사자들의 전사적 열망 때문이란다. 하지만 난 그들의 순정을 믿는다. 그들이나 나나 ‘자유와 진리’를 위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에서, 그들은 내곡동 어느 골짝에서.

1960년대 이래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던 이 은밀하던 기관은 구제금융기의 경제적 위기를 맞아 ‘정보는 국력’이라는 대단히 경제적인 모습을 잠시 보였다가 어느새 ‘진리와 자유를 향해 무명’으로 ‘헌신’할 줄 아는 위대한 변신을 하게 된다. 경제적 가치로만 폭주하고 있는 이 한심한 세상에서 참으로 고고하게도 ‘진리와 자유를 향한 무명의 헌신’을 외치다니…역시 그대들은 ‘은밀하게 위대하게’ 사는구나.

‘자유와 진리’에 대한 이들의 이름 없는 헌신은 작년 이후 줄곧 너무도 교묘하게 수행되고 있다. 그들이 행한 ‘NLL 공작’과 ‘사이버 여론 조작‘이라는 것은 사실 민주주의의 살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찬란한 부활을 위한 ‘고육지계’다. 이건 ‘자유와 진리를 향해’ 헌신해 온 동업자만 알 수 있는 직감인데, 내가 보기에 그들은 민주화 이후 민주화의 의미를 마구 ‘민주화’시켜 결국 ‘홍어 삼합’과 함께 좆으로 가공한 ‘우중’의 가공할 행태에 격분한 나머지 민주주의의 진리와 자유를 위해 악명을 뒤집어쓴 헌신의 가시밭길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죽어가는 민주주의의 회생을 위한답시고 이름과 명예를 걸고 싸우고 있는 데 반해 우리의 전사들은 민주주의의 진정한 부활을 위해 이름 따위는 제쳐두고 달려든다. 상대가 안 되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들의 이름 없는 헌신은 민주주의의 번영을 위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진리를 들이대면서 반민주주의의 doxa를 물리치는 것도 방법이지만, doxa의 거짓됨을 분명히 드러내게 함으로써 진리에 기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1997년에 세운 ‘북풍공작’이 그 좋은 예다. 이 황당한 계획에 꼬여들게 만든 그들의 교묘함이란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그러니까 우리의 전사들을 욕하는 건 이제 그만 두기 바란다. 오늘은 저들의 품 안에 안겨 그들 입 안의 혀 노릇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내일 이들의 무명의 헌신은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의지와 행동을 더욱 단련하는 데에 좋은 망치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대들이여 민주주의를 위한 반민주주의 행보에 더욱 표독스럽게 매진하기를. 그대들이 더러워질수록 민주주의는 더욱 아름답게 빛날테니…. 건투를 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성명서-죽어가는 민주주의를 되살려야 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성명서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되살려야 한다

국정원의 선거개입 논란과 함께 국정원과 새누리당의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로 나라가 시끄럽다. 나아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조·중·동 신문은 대화록의 전체적인 맥락을 무시하고 왜곡보도를 일삼고 있다. 공개된 회의록만 보아도 이들 언론의 보도는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텍스트만 읽고 콘텍스트는 읽지 못하는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NLL포기 발언’이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을 무마하려는 정치적 의도 속에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이 ‘국정원의 자발적 댓글 공작정치’ 이상의 것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정상회의록을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혹의 핵심에는 김무성 의원이 있다. 지난 6월 25일 언론보도에 따르면,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 총괄본부장이었던김무성 의원은 “지난 대선 때 이미 내가 그 대화록을 다 입수해서 다 읽어봤다”라고 발언하였다. 국가 기밀인 정상회의록이 특정 정당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사실로 확정된다면 박근혜 정부는 물론이고 국가의 위상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국가 정보기관이 특정 정치 세력에게 국가기밀을 넘겨 선거에 개입하였기 때문이고 국가의 공공성 그 자체, 중립성의 근간을 뿌리째 뒤흔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정원 수장은 “국정원의 명예와 직원의 사기 진작을 위해 공개했다”고 말하는가 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이 땅의 국가가 ‘공적인 것’(res publica)으로서의 국가(Republic)인지 반문하게 만든다.

우리는 다시 묻는다.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묻는다. 그리고 이번 사태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일찍이 스피노자는 민주주의를 다중의 표현으로, 자유로운 인간들의 정치적 행위로, 모두에 의한 모두의 통치로 이해하였다. 즉 민주주의는 절대적 힘의 표현이며, 따라서 구성적 행위이다.

이렇게 볼 때, 이번 국정원 선거개입은 자율적인 주체들의 정치적 행위라는 민주주의의 구성행위 그 자체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는 민주주의와의 이별을 의미한다. 이번 사태는 민주주의를 구성할 수 있는 대중의 권능(potestas)을 무력화하고 민주주의를 실제적으로 생산하는 힘(potentia) 또한 상실하게 만든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정조사 계획서는 조사범위를 “전 국정원장의 불법 지시 의혹 및 국가정보원 여직원 등의 댓글 관련 등 선거 개입 의혹 일체”로 한정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이번 사건이 단순한 ‘국정원 댓글 사건’이 아니며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라는 점을 지적한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자율적 존재의 힘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대중의 힘을 드러내는 것 그 자체를 부정당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 사태는 절대적 민주주의를 향한 집단의 힘과 실제적인 민주주의의 구성을 통해서만 풀어낼 수 있다. 민중의 힘의 표현과 그 힘을 통한 실제적인 민주주의의 구성이 민주주의의 참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실제적인 민주주의를 구성하고자 하는 힘을 더욱 증가시킬수록 우리 모두는 더 많은 권리를 갖는다. 우리의 권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힘을 표현할 때 생긴다.

따라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이번 사태에 대해 침묵할 수 없었다. 진정한 민중의 권력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은 정치를 민중의 사회적 힘에 종속시키는 과정이다. 민주주의는 수많은 선열들의 피와 땀을 먹고 자랐다. 인간 존재는 고갈되지 않는 자유를 향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한 여정 역시 멈출 수 없다. 이 땅에서 철학은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주체가 바로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이 삭제될 수 없는 시간성 속에 있음을 자각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는 힘을 조직하는 한편, 통치 권력의 부정성과 언론의 위선을 폭로하면서 관료적인 경직성과 이데올로기적 감옥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 어떤 권력도 억견과 위선으로 생성의 정치체제인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꺾을 수 없다.

2013년 7월 16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응답하라! 학생들의 시국선언에 침묵하는 언론과 어른들이여![시대와 철학]

응답하라! 학생들의 시국선언에 침묵하는 언론과 어른들이여![시대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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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대학의 어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지난 6월 18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국정원선거개입 관련 시국선언을 위한 온라인 서명운동을 시작, 의견을 수렴해 다음 달 중 시국선언을 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19일 ‘국가정보원의 선거개입과 경찰 축소수사에 대한 총학생회의 입장’을 발표했다. 이어 20일에는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시국선언 추진을 공식 발표했다. 비운동권 성향의 서울대 총학생회의 이러한 행보는 곧 다른 비운동권 총학을 포함한 대학들의 동참 선언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종교계도 서서히 이에 동참하고 있다.

이번 시국선언 추진 운동은 SNS를 통해 확산된 것과 비운동권 총학, 총학이 아닌 ‘보통 학생’들의 적극적 참여가 특징적이다. 총학이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시국선언에 불참하겠다고 밝힌 성신여대는 SNS를 통해 하루 만에 자신을 ‘보통 학생’이라 밝힌 119명이 모여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119명의 학생들은 정치적 중립의 기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총학생회장의 직함으로 대통령 직속 기구에 소속된 것’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 하면서 ‘사회문제에 학생 자격으로 목소리를 내는 시국선언’을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주저하는 총학의 언행은 모순입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현 대통령의 모교인 서강대에서는 정치외교학과 학생 4명이 ‘양심선언’을 발표했다. 이렇게 대학가에서 운동권, 비운동권의 범주를 깨고 자발적 정치참여가 시작되는 것은 무척 고무적인 현상이다. 대학 내의 운동이 전멸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교수나 재야인사, 종교계에서 시국선언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먼저 시작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반면에 교수 등의 대학가의 ‘어른’들은 그 어떤 뚜렷한 제스처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이다. 이러한 침묵은 촛불로까지 번지고 있는 대학가의 시국선언과 지지호소의 열기를 식히고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시국선언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당해야만했던 그 교수들,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또 다른 선언을 준비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때 당했던 상처를 아직도 수습 중인가? 그도 아니면 시국에 대한 온도차가 있는 것일까,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는 냉소주의에 빠져있는 것일까? 교수들도 개인적으로는 활발하게 의견개진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떤 집단적 입장 발표도 없는 작금의 상황에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20대는 88만원 세대, 혹은 삼포세대라고 일컬어진다. 기업은 그들에게 취업하고 싶으면 자신의 절박함을 증명하라고 요구한다. 그 절박함이란 것은 수시로 학점으로, 토익 점수로, 해외연수경험으로, 자기소개서로 바뀌건만 취업문은 절대 넓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정부는 복지 혜택을 받으려면 자신의 빈궁함을, 경제적 비참함을 만인에게 공개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어른들은 그런 그들이 정치에 등 돌리도록 종용한다. 그런 세상에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그리고 그 노력에 지지를 호소하는 대학생들에게 지금 그 스승들, 멘토들은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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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장(왼쪽부터 네번째)과 학생들이 20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앞에서 국정원의 선거개입을 규탄하고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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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인 언론의 권력앓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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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쪽 날개로만 힘겹게 날아오르려 하는 대학생들을 언론은 노골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학생들의 시국선언을 파급력 없는 단순한 ‘선언’으로 끌어내리려는 언론은 침묵하는 방법으로 정치권력을 돕는다. MBC와 YTN의 메인 뉴스에는 시국선언에 대해 아직까지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또한 포털 사이트 ‘네이트(NATE)’에서는 21일에 ‘시국선언’ 단어를 검색하면 사이트가 먹통이 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에 논란이 커지자 네이트는 단순한 기술상의 오류라고 해명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시국선언’을 검색하면 검색어가 ‘시국의 선언’으로 자동으로 바뀌어 검색되는 기현상이 있었다. 또한 포털 사이트 ‘네이버’ 또한 21일에 ‘다음’과 달리 실시간 검색순위에 ‘시국선언’에 관련된 검색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현상이 시국선언을 검색하지 못하게 하려는, 이슈파이팅을 저지하려는 의도인지, 그저 단순 오류인지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네이트와 네이버의 검색어 조작논란은 이러한 정치적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매번 있었고, 그때마다 전문가들의 조작에 대한 근거제시와 함께 네티즌의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이보다 더 적극적인 언론들은 정치세력들과 함께 돌팔매질에 돌입했다. 조중동은 아직 판결이 나지 않은, 수사과정에 있는 사건에 대해 ‘시국’ 운운하는 것은 과잉행동이라는 자신들의 주장과 함께 따라서 ‘시국’에 대한 논쟁이, 선언에 찬성하지 않는 학생들의 반발이 학내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그리고 특히나 학생들의 선언이 무게가 없다거나, 그저 또래의 유행 같은 집단행동이라는 등의 ‘권위 있는 교수’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 파급력을 깎아내리고, 갈등요소로 부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또한 진부하지만 언제나 효과를 보장하는 ‘물타기 수법’도 등장하고 있다.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이에 대한 수사 축소 및 은폐라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한 사건을 앞에 두고도, NLL 대화록을 공개하겠다는 유치하고 진부한 협박이 통하리라 생각하는 정부와 국정원, 집권여당의 수준이 개탄스럽다. 하지만 그보다 더 쓰라린 점은 이러한 방법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점이다. 꾸준히 진행되어온 권력의 언론 잠식은 박근혜 지지율 70%라는 경이로운 효과를 드러냈다. 인사 참사와 외교에 대한 무능력이 여실히 드러났음에도 말이다. 그러니 권력이 학생들의 선언문따위야 묵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끝없이 ‘권력앓이’하고 있는 언론이 든든히 버티고 서서 적절한 어휘와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국정원의 선거개입 정황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그 사안 자체가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중대하고 위급한 문제임에도 언론은 애써 이것을 ‘민감한 정치적 문제’로, 따라서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논조로 문제를 축소시키려 한다. 2008년의 촛불집회는 국민의 주권과 건강권이라는 이슈를 중심으로 공감대 형성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언론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뛰었다. 그래서 올바른 정보를 제공하고, 여론 형성과 의제 설정을 위해 제 4의 권력으로서 살아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언론은 이명박 정부의 방통위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해고·해직의 칼날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괴사(壞死)가 진행되고 있다. 그렇게 제 기능을 잃어버린 언론은 정권의 나팔수로 활동하던 지난 세월을 그대로 반복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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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금 촛불은 번져나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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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지역 대학생들은 21일부터 광화문에서 ‘국정원 선거개입에 대한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촛불집회에 돌입했다. 주말인 23일에는 시민들이 합세하여 500여 명이 광화문에 모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날, 경찰은 최루액을 분사하였고,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고교생의 얼굴에 최루액을 분사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이후 첫 촛불집회에서 경찰은 집회의 양상을 고려하지 않고, 진압수위를 높이는 충성심을 보인 것이다.

‘민감한 정치적 문제’라는 용어로 국민을 주춤하게 만들고, ‘종북좌파’라는 틀거리로 학생들을 옭아매면서, 국정원의 NLL 대화록 공개라는 눈가리개를 통해 박근혜 정부는 촛불을 꺼버리고 싶어 한다. 이명박의 정치적 유전자를 물려받은 박근혜 정부는 촛불을 두려워하는 것 또한 닮아있다. 하지만 2008년에 비해 보다 더 정부에게 유리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거기에 더해 미온적인 태도의 교수들과 어른들, 일베로 대표되는 젊은 ‘넷(net) 극우파’들의 극성스런 방해로 이번 학생들의 촛불은 채 자신을 다 태우지도 못하고 사그라져갈지도 모른다. 다시금 촛불이 번져갈 수 있을까? 그것은 ‘정상적인 나라’,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싶다는 학생들의 절실한 바람과 정당한 요구에 적극적으로 답하고, 자발적으로 응하는 태도에 달려있을 것이다.

 

과잉의 시대-적절함의 가치를 조롱하다[시대와 철학]

과잉의 시대-적절함의 가치를 조롱하다[시대와 철학]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불편한 진실-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과잉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이라도 지나치면 칭찬을 듣는 사람에게 불편함을 안겨 준다. 나에 대한 과도한 칭찬은 늘 몸 둘 바를 모르게 하고 칭찬하는 이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실상 어느 정도의 칭찬이 적절한지는 늘 칭찬의 대상자 자신이 정확하게 알고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과잉이 야기하는 문제는 비단 칭찬에 관한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기야 ‘과잉’이라고 하는 표현 자체가 어떤 문제를 일으킬 법한 자태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가난’ 이외의 과잉을 경험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수많은 과잉의 숲에서 숨 쉬고 있다. 문제는 과잉의 상태가 긍정의 요소마저 부정적 상황으로 치닫게 만든다는 점이다. 친절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근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프렌차이즈 식당에서는 주문을 받을 때 종업원들이 거의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는 듯이 자세를 낮추어 주문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비록 경제적 비용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제공받는 위치에 있다고는 하지만 친절의 과잉으로 느껴져 유쾌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이 겪는 불편함은 서비스 혹은 친절의 과잉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문제 중 아주 사소한 점에 불과하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당사자들도 자발적이기보다는 고용주의 요구에 따른 것이기에 편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친절이든 칭찬이든 적절함을 잃어버릴 때 그것은 즐거운 감정의 형성에 기여하기보다는 찜찜한 뒷맛을 남기기 마련이다. 최근에 벌어진 대한항공 승무원 폭행 사건이나 전화 상담 업무에 종사하는 직원들이 당하는 부당한 대우는 친절 과잉 사회의 폭력적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과잉의 ‘감정노동’에 도사린 이중의 착취

 
최근 각종 언론에서 우리나라의 생산성 향상율 저하가 경제 성장을 더디게 한다는 보도를 내놓고 있다. 특히 서비스 산업의 생산성이 선진국들에 비해 크게 뒤진다는 보도는 서비스 산업 종사자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는 빌미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게 한다. 이러한 분석들은 1차적으로는 기업의 생산성 강화 노력을 촉구하는 근거로 작용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 강화로 이어질 개연성도 결코 낮지 않다. 특히나 서비스 산업의 최일선에 종사하는 감정노동자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분석이다.
 

그림출처: http://hook.hani.co.kr/archives/33293


 
감정노동의 문제를 대하는 언론의 보도 태도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열악한 근무 조건에 시달리는 감정 노동자들의 근무 실태를 다루는 기사들 대부분이 이른바 몰상식한 고객들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기업 임원에 의한 대한항공 여승무원 폭행사건에 대한 보도에서도 몰상식한 가해자의 행위와 대한항공의 대응 등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서비스의 과잉의 근본적인 책임은 자본에 있다.
 
소비자들이 감정노동자들을 향한 과도한 친절 요구에도 분명 문제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과잉의 서비스에 익숙해진 결과이지 소비자가 먼저 요구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른바 서비스 경쟁이라고 하는 경영방침이 종업원들에게 지나친 감정노동을 강요하고 소비자들의 태도는 그러한 대우에 익숙해진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소비자가 먼저 밥 먹으러 가서 무릎 꿇고 주문 받는 서비스를 기대했을 리 없고, 허리 깊숙이 숙이는 절을 요구하는 고객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잉의 서비스는 고용주들이 친절을 명백히 함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우리가 이만큼이나 극진하게 서비스를 제공했으니 소비자는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점을 못박아두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동일한 제품이 백화점에서 훨씬 비싸게 판매되는 여러 이유 중에 하나도 극진한 친절 비용까지 포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상 그러한 서비스의 제공자는 기업이 아니라 일선의 감정노동자이다. 그러므로 감정노동의 착취는 자본이 노동자들의 감정을 이용해 이윤을 극대화하면 감정노동이 생산한 가치의 일부를 가져가는 것으로 자본의 전형적 노동 착취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또한 소비자들로부터는 선택의 여지없이 불필요한 비용까지 지불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소비자에 대한 착취 구조마저 도사리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마치 과대 포장으로 제품 가격을 부풀려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과 다름없다.
 
 

여러 겹의 질곡

 

현재 우리나라에서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여성이다. 그리고 감정노동으로 분류되는 직종들은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전문성을 요구하지도 않고 진입 장벽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역으로 말하면 노동 강도가 세고, 저임금일 가능성이 높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신분의 불안전성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필연적으로 여러 겹의 질곡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한다.
 
우선 감정노동자의 상당수가 여성이라는 점은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가 산업의 영역에서 강고하게 전이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여성의 노동을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산업화 시대에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저임금의 노동집약적 산업에 종사했던 상황이 서비스업으로 전환되었을 뿐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겪게 되는 또 다른 질곡은 고용주와 소비자 어떤 쪽으로부터도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장치를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감정노동자들에게 고용주의 권력과 소비자의 권리는 이중의 족쇄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감정노동 자체가 이미 상품화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제공하는 감정노동자의 인격적 지위는 원천적으로 상실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정노동자들은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의 소외에 더해 고객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소외까지 경험하게 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염려되는 점은 감정노동이 근본적으로 노동자 자신이 스스로에게서 겪는 자기 소외를 경험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자신의 본래 감정과 정서를 어느 정도는 감추어야 한다는 점은 불가피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가장된 감정을 가지고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은 스스로에게 견딜 수 없는 질곡이며, 지속적으로 자존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만든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스트레스 이상의 부담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과잉의 억압은 일상을 왜곡한다

 

과도한 친절에의 요구는 일상의 다른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표적인 사례가 존칭 사용의 왜곡이다. 고객에 대한 지나친 존칭 사용의 관례가 이제는 상품에 대한 존칭으로 굳어지고 있다. 티셔츠 한 장을 구매하려는 순간에 우리는 매장 직원으로부터 “그 제품은 세일중이세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상품에 존칭을 붙이면 우리는 그 상품을 떠받들어 사야 한다는 말인가? 누군가가 일부러 그러한 어법을 사용하라고 가르친 적은 없을 텐데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이는 마치 군대에서 말을 할 때 ‘다’, ‘나’, ‘까’로 문장을 맺으라고 하는 어법을 요구한 결과 “다음 주에는 제가 휴가를 가지 말입니다.”와 같은 어색한 표현이 굳어지고 있는 현상과 같다. 존칭 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부담이 모든 말에 존칭을 붙이는 식으로 왜곡되는 것이다.
 
산업 구조에서의 비중이 제조업에서 서비스 산업으로 급속하게 확대되는 추세에서 감정노동자들에 대한 법적, 제도적인 보호책 마련은 서비스 산업 생산성 향상보다 시급한 문제이다. 감정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은 단지 감정의 착취만이 아니라 미래마저 착취당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노동에 대한 사회적 존중은 그들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격적 존중의 태도를 훈련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산업 사회에서처럼 노동자들이 그러했듯 감정노동자들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투쟁에 나서기 전에 국가와 사회가 먼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말이 힘을 잃은 시대의 한반도[시대와 철학]

말이 힘을 잃은 시대의 한반도[시대와 철학]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1. 아무도 믿지 않는 말잔치의 풍경

 

작년의 대선 결과가 충격으로 다가온 사람들, 그 이후에도 일련의 정치적 ‘꼬락서니’들을 넋 놓고 보아야만 하는 우울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봄’ 기운은 참으로 간절했었다. 그런데 연일 계속되던 북한의 ‘악다구니’와 그것을 교묘히 활용하는 남한의 위정자들은 이 ‘꽃샘추위’가 더 지속되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2013년 봄 연일 계속된 한반도 긴장 국면이 그 정점을 찍고 서서히 ‘대화 재개와 신뢰 구축’이라는 예정된 각본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북한 내부의 불안 요인을 잠재우는 거짓말과 남한 내부의 불안 요인을 증폭시키는 거짓말이 서로 교차하며 이익을 얻는 집단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거짓말 잔치의 풍경이 지금 한반도를 뒤덮고 있다.

‘파국’으로 치달을리가 없다고 모두 암묵적으로 전제했던 이 위험한 ‘쇼’의 각본은 사실 상호의 이익이 어느 수준을 넘어섰을 때 ‘불장난을 멈춘다’는 연출자들의 보이지 않는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제 이 정도 수위에서 북한, 남한, 미국, 중국 모두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북한의 김정은 체제는 내부세력을 단속하고 강성 군부를 통해 독재 리더쉽을 과시했으며, ‘핵 보유’와 도발의지를 통해 궁극적으로 원하는 점진적 개방과 투자를 위한 협상력을 강화했다. 남한의 박근혜 정부는 이 ‘북풍’을 통해 ‘낯 뜨거운’ 직무수행 능력을 덮어버리고, 뒤숭숭한 민심을 불안감과 외부 관심으로 얼기설기 솎아 내고 안보상황을 유리하게 환기했다. 물론 개성공단의 위기가 남북한 경제에 실제적으로 미치는 파급효과가 미미하다는 것은 양자가 서로 큰 부담 없이 다음 절차를 위해 이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전술적인 조건이었다. 한편 이 기간 동안 미국의 공고한 군산복합체 지배계층은 최신 무기를 전시하고 판매할 수 있는 ‘모터쇼’를 성황리에 열었으며, 북한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고 방어하는 향후 ‘칭얼대는 아이 달래고 혼내기 액션’을 보다 자유롭게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북한이 쏟아내는 공격적이고 극단적인 언사들은 실상 그들의 공포심과 두려움을 은폐하고 있으며, 그 ‘위험한 악동 코스프레’는 고립을 극복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계산된 행동의 일부일 뿐이다. 물리적 전쟁으로 결코 승리할 수도 없고, 전면전으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북한의 군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당랑거철(螳螂拒轍)의 호기롭고도 가련한 무기-핵무기를 빌미로 한 심리전쟁, 말의 전쟁-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 당국의 언사가 호전적이면 호전적일수록 그 말의 진정성은 떨어지고 현실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진다.

그런데 무슨 사고만 터지면 ‘북한의 소행이다’라고 몰아가는 남한 정부와, 중국조차 믿을 수 없는 무기력한 힘의 대결에서 거짓말을 남발해서라도 작은 통제력을 갖추고자 하는 북한 당국의 몸짓은 어쩐지 서로 닮은 데가 있다. 이러한 북한 지배층의 위악(僞惡)의 포즈는 남한 지배 권력의 위선(僞善)적 포즈와 쌍을 이루어 전후 한반도의 인민들을 통치하는 가장 중요한 기만 술수였다.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한반도의 이 기묘한 호혜적인 관계는 2013년, ‘3대 세습권력’과 ‘독재자의 딸’이라는 최악의 조합이 갖고 있는 상호 필요성으로 인해 이 땅에서 다시 재현될 조짐을 보인다.

사실 남과 북의 권력자들이 모두 원하는 것은 아무도 믿지 않는 말을 하고 아무도 신뢰할 수 없는 이미지를 연출하면서도, 인민들로 하여금 마치 그 말과 이미지가 사실이고 진실이라고 스스로 믿고 싶게 만드는 ‘연극적인 상황’이 아닌가. ‘거짓에 의해 지속되는 공동체’가 남과 북에서 모두 필수불가결한 것이 되도록 한반도의 현대사는 모질게 흘러왔다. ‘능수능란한 사기꾼은 속고자 하는 사람들을 항상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의 조언이 오용되면 위험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기표가 함의하는 바를 모르고 ‘속은’ 사람이 아니라, 그것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스스로 ‘속고 싶어서’ 그녀를 선택한 사람들이 많다면 향후 제도권 정치를 통한 삶의 개선은 더욱 요원해질 것이다. ‘show’를 쑈인줄 알면서 그것을 적절한 수위에서 소비해주는 것과, 쇼가 아닌 삶과 역사의 문제를 쇼처럼 관람하고 방관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미 숱하게 속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속아 넘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의식은 끝내 자기 자신의 양심까지도 속이려 들것이다. 말 같지 않은 말도 반복적으로 들으면 고유한 세뇌 효과를 얻기 마련이고,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기 때문이다. 탈출구 없는 불안한 민중들이 상징조작과 선동의 효과를 통해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출 때의 참혹한 광경을 우리는 이미 20세기 전반의 파시즘에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2. 불신시대의 언어와 무기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이익’이라는 말은 오늘날 정치와 경제 두 영역의 교차지점을 꿰뚫는 핵심적인 테제이다. 또한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라는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지도자 마르코스의 메시지는 이제 전혀 다른 맥락에서 지금-여기 상황에 적용된다. 진실을 거의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전체주의 체제 독재자의 말은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이데올로기를 실현한다. 늘 속셈을 숨기면서도 국가와 민족, 국민과 국익을 주워섬겨야 하는 선출된 권력자의 말은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라는 이데올로기를 구축한다. 자신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말을 확신에 찬 어조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서 내뱉는 것은 이제 국회의원에게도 필수적인 자질이 되었다. 필자는 “음란물의 유통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 중에 “누드사진”을 검색했다고 뒤늦게 수습하는 새누리당의 어느 중진 의원을 보면서 시궁창 똥물을 뒤집어 쓴 ‘공공언어의 무덤’을 목도했다. 공적 권력에 의해 공표된 말이 가장 의심스러운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대의민주제 정치가의 기본적인 레토릭마저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남한의 위정자들을 보면, 혹시 그들이 쏟아내는 말은 스스로의 권위를 자해하는 무기이거나 스스로의 수준을 까발리는 풍자의 말이 아닐까 싶다. 우리의 새 대통령이 정성들여 쓴 수첩에서 비밀스럽게 나온 비리 인사(人事)들이 만들어내는 저 지리멸렬한 가관을 보라. ‘4대 중증질환 진료비 100% 보장’이라는 대선 공약(公約)을 첫 번째 보건복지부 장관인 그녀의 최측근이 “그것은 선거 캠페인용 문구”였다고 말하는 ‘셀프 공약(空約) 인증’을 보라. 실상 재벌과 부자들만을 위한 나라를 만들 작정이면서도 선거에서는 ‘국민행복 시대’를 열겠다고 거짓말할 수밖에 없고, 서민들과 노인들에게 어떤 식이든 복지 떡고물을 나눠주는 액션을 취해야 하지만 결코 재벌과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걷을 수 없는 자승자박(自繩自縛) 딜레마에 빠진, 구중궁궐 홀로 고고하고 불쌍한 ‘근혜 언니’를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 이 청와대 발(發) 불신지옥-퇴행의 정치를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허허.

▲ 3월 21일 박근혜 대통령이?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 ⓒ청와대

이처럼 ‘거짓말’이 일상이고 진정성이 예외가 된 정치권력의 언어가 탐욕만이 승리를 보장하는 신자유주의 경쟁사회의 언어와 쌍둥이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 된다. 그래서 어느 누구의 말도 곧이곧대로 듣기 힘든 이 사회를 풍자하며, 언어의 새로운 의미를 공유하는 우스개 소리도 당연히 출현했다. 개그콘서트의 ‘현대레알사전’에서는 어휘의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이해되는 현실의 진짜(real)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다. 그 코너에서는 “직장인들에게 회식이란?” “‘사장님, 회식비로 차라리 월급이나 올려주세요’하고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 또 다른 뜻으로는 사장님이 카드만 주고 가셨으면 하는 것”이라고 폭로하며 시청자의 호응을 이끌어낸다.

한편 최근에 필자가 인터넷에서 재미있게 본 어느 댓글에서는 현실을 이렇게 조롱한다. “자유주의란? 돈에 구속당하는 것. 신자유주의란? 돈에 더 구속당하는 것.” 물론 원장님의 지침에 따라 편향된 정치적 댓글을 다는 것이 주된 업무인 국정원 일부 직원들에게는 언어의 의미와 변용 따위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에는 말이 가진 해방의 힘은 제거되고 구속력만이 작용할 뿐이다.

이제는 ‘텅 빈 개념’이 된 민주주의, 주권이라는 말이 그 사회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로 인식되는 사회에서는 불신 관계가 더욱 강화한다. 특권층과 기업을 위한 조치가 국민들을 위한 조치로 둔갑하는 사회에서 ‘점령당한 방송사’의 뉴스를 볼 때는 일단 의심부터 하는 것이 상식이 되었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고, 국가의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글자 그대로 신봉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성경 말씀을 글자 그대로 믿는 신앙인과 대화할 때만큼이나 답답해졌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현대의 고사성어를 잊을만하면 상기시키는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판결을 보며, 인민들은 공권력이 집행하는 정의(正義)와 국가가 보장하는 생존에 대해 기대감을 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이렇게 당당히 외치는 사람들이 대다수다. “나는 오직 돈만 믿는다.”

더 많이 누리고 가진 자의 말일수록 믿을 수 없는 시대, 서로의 말이 말 같지 않아 말이 무기력한 사회, 음모론과 증권가 찌라시가 존중받는 시대, 곧 말뿐인 시대. 그래서 믿을 거라곤 내 재산밖에 없는 피곤한 사회, 돈이 있어도 고민, 없어도 고민이지만 어쨌든 돈이 무기인 사회, 곧 너도나도 ‘힐링’을 요구할 수밖에 없어서 잠이라도 푹 자고 싶은 프로포폴 권하는 사회. 불신-불안-공포가 대중의 가장 강력한 정서이자 가장 강력한 지배수단이 된 시대. 이것이 작금에 들어 더욱 퇴행할대로 퇴행한 저잣거리 정서이자 대중이 가진 시대정신의 실체라고 한다면 너무 비관적인 인식일까.

 

3. 불감증: 소통이 어려운 사회의 질병

 

“제 머리가 심장을 갉아먹는데 이제 더 이상 못 버티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죄송해요.” 이런 말을 남기고 자살한,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전교 1등’이라고 언론에 보도된 학생의 유서를 보았다. 이 유서에는 공표된 말과 실제 현실의 괴리가 심한 우리 사회의 가장 처절한 단면이 예리하게 드러나 있었다. 열심히 공부하면 보장된다는 행복한 미래에 관해 말씀하시는 선생님과 부모님의 말만을 믿고 그대로 따르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 현재를 만드는가. 그 권위 있는 말이 사실과 진실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갈 때, 말은 거품이고 성적만이 실체인 학교에서 조숙한 그 아이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타인과의 정서적 교류나 연대가 몰가치하며 불필요한 것으로만 폄하될 때 우리 내면은 얼마나 쪼그라드는가.

서로 다른 저마다의 생각은 효율과 성장발전에 방해가 된다고 강요했던 ‘박통시대’의 시즌2가 그의 딸에 의해 도래했다. 전인교육, 감성교육 이런 말은 이제 중등교육 현장에서 구호로 외쳐지기도 민망해졌다. 공교육에서 외면한 역사교육, 시민교육으로 대학생들의 역사적?정치적 감수성도 메마를 대로 메말라 있다. 필자는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했지만 이제는 하나의 세력을 이루어 가고 있는 젊은 파시스트들이 이런 현상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부터 서열화와 폭력이 상식이 되면 민주(民主)와 다양성은 낯설고 불편하고 거추장스러워진다. 우리의 아이들이 지금 그렇게 훈육되고 있는데 학교폭력이 어찌 학교와 부모의 문제일 수 있겠는가. 이 사회에서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가 이미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자신은 감당하기 싫은 고통과 폭력을 서로가 서로에게 강요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 아이들이 만들어갈 한반도의 미래는 지금보다 더 안전한 시대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장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시대가 될 수도 있다. 작년 대선 이후 가속화된 ‘늙은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젊은이, 젊은이를 믿지 못하는 늙은이’의 사회가 도착할 터널의 끝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말에 담긴 파시즘적 상황보다 더 끔찍하다. 남한 내부의 사정이 이러할진대 어떻게 남과 북이 서로 대화하고 교류할 수 있는 각 영역의 광장들이 쉽게 열릴 수 있을까. 평화를 위한 ‘신뢰 프로세스’라는 것도 서로의 이익이 확대될 수 있는 조건의 확장이 아니라, 먼저 서로의 말을 믿을 수 있는 조건의 확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거짓’이 일상이고 ‘진실’이 예외적인 상황이 되면 말 자체는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우울증이 고립감을 키우는 개인적 정서의 문제라면, 불감증-타인의 고통에 반응하고 공공의 문제를 공적으로 인식하고 대처할 수 있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 자체를 상실하게 만드는-은 사회적 정서의 문제이다. 말의 힘이 무너진 시대에는 어차피 합리적인 대화와 소통이 불가능하기에 시민의 정치력이 쇠퇴하고 공공의 문제에 대한 불감증이 커지고 현실도피적 경향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말이 힘을 가지는 관계, 즉 서로의 말을 믿을 수 있는 관계가 확산된다면 사람들의 약속과 상호연대는 보다 강력해진다. 그런 상황에서 인민들은 비로소 자율성과 감수성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사회의 한 조건은 공적으로 뱉은 말이 자발적인 권위를 갖출 수 있는 관계가 아닐까. 서로의 말을 경청할 수 있기 위해서는 말을 뱉은 자들이 자신의 말에 대해 마땅히 책임을 져야한다. 말이 가진 가치와 의미를 행동으로 실현하고 그 관계의 망들이 서로 엮여져 그것이 가장 강력한 권력이 되는 정치, 아니 그런 말과 말의 선순환 관계가 일상이 되는 사회. 그것이 현재 우리가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거짓말’이 아닐까.

불안과 증오의 시대, 그리고 파시즘의 발아[시대와 철학]

불안과 증오의 시대, 그리고 파시즘의 발아[시대와 철학]

이원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운지, 앙망, 전땅크…

 

요즘 인터넷 상에서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말들이다. 이는 극우적 인터넷커뮤니티인 ‘일간 베스트(이하 일베)’를 중심이 펴져나가는 인터넷 비속어들이다. 일베는 특정인에 대한 악플과 극우적 콘텐츠 생산으로 최근 여러 언론에서도 조명을 받고 있는 화제의 커뮤니티다. 운지는 고 노무현대통령을 죽음을 모TV광고에 빗대 조롱하는 것이며, 앙망은 고 김대중 전대통령이 사형선고 이후 전두환 전대통령에게 보낸 탄원서에 나오는 단어로 이를 고 김대중 전대통령을 비하는 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또 전땅크는 전두환 전대통령을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로 격상시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용어는 50~60대의 보수층이 아닌 10~20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인터넷을 넘어 일상적인 비속어로 자리하고 있다. 최근 이러한 커뮤니티의 규모가 커지면서 단지 정치적 입장이 다른 정치인을 비아냥거리는 것을 넘어 독재찬양, 민주주의에 대한 경멸, 항일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에 대한 비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여성, 외국인, 노동에 대한 혐오와 극단적 지역감정을 내보이며 파시즘적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 이들은 단순한 악플러들로 여겨지고 개별적 인성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악플의 수준을 넘어 이들이 뉴라이트나 조갑제 등 극우적 인사들의 인식과 결합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내용들을 생산하는 사이트가 청소년들 사이에서 유머를 빙자하여 인기를 끌면서 상당한 규모로 성장함에 따라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일베저장소 사이트 캡처(http://www.ilbe.com/)

 

10~20대의 보수화는 IMF이후 꾸준히 제기되어 온 이슈였지만 최근 나타나는 이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90년대의 젊은 층의 보수화는 개별적 생존의 문제에서 비롯되어 개인적이고 파편적인 양상을 뛰었다면, 2010년대의 보수화는 집단적 불안감 속에서 그것이 뭉쳐지고 파괴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들은 민주적 의사과정이나 저항을 경멸하고 강렬한 리더십을 원하는 측면에서 파시즘의 초기 모습과 상당히 닮아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 한국사회와 자본주의가 던져주는 무한경쟁과 낙오에 대한 두려움이 타인에 대한 적대감과 이를 제압할 강력한 권위에 대한 추앙으로 보인다. 이는 근대사회계약론이 자연상태나 전쟁상태에 대한 불안감을 기초로 출발한다는 점에서 근대사회계약론의 모습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자연상태와 주권에 대한 해석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자연상태가 전쟁상태를 유발할 수 있고 이를 방지하기위해 초월적 권력을 만들어야한다는 점은 홉스, 로크, 루소 등 근대사회계약론자들의 공통된 주장이다. 사회계약론의 요지는 개인은 계약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제한하고 초월적 권위에 스스로 귀속된다는 것이다. 근대사회계약론에서 주목해야하는 점은 과연 실제 계약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개별의 보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개인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초월적 권위에 의지하려한다는 점이다. 대개 개인은 자신의 보존이 유지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으로서 사회적 계약 속으로 들어가고 또 주권은 자신의 외부에 대한 처벌을 명확히 함으로써 개인을 포섭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계약은 개인적 욕구와 그 자발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과 주권 사이에는 항상 긴장관계가 형성된다. 그러나 사회계약으로 인한 초월적 권위에 대한 인정이 개인이 주권에 포섭된 형식이 아니라 자발적 형태를 띠게 될 때 이는 파시즘으로 흘러갈 수 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는 둘 간의 긴장관계는 종속으로 변한다.

 

출처: 블로그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lo9956&logNo=10153502640&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주권은 자연상태에 대한 공포를 매개로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는데 기존 한국사회에서 대표적인 자연상태는 북한과 관련된 전쟁, 적화통일과 같은 것이었고 이는 국가적 차원에서 확대 생산되어 왔다. 이러한 자연상태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국민으로 하여금 추상적 공포를 제시해왔다. 그 반면에 21세기 한국사회가 개인에 던지는 자연상태의 공포는 개인의 보존을 직접 위협하는 미시적 공포다. 개인적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스펙을 요구하는 사회, 9%를 넘어서는 청년실업, 그나마 있는 직장들은 비정규직인 상황과 사회에서의 대화단절은 젊고 어린 학생들을 극단으로 몰아간다. 추상적 공포는 젊은이로 하여금 그 실체에 대한 질문을 던질 여유를 주지만 개인의 실존과 관련된 공포는 이러한 상상력을 제한시킨다. 기존 한국에서 던져졌던 전쟁에 대한 공포는 이미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기성층에게 더 큰 공포로 다가오지만 경제적, 사회적 인정과 관련된 공포는 젊은 층에게 훨씬 더 큰 위협을 안겨준다. 이러한 공포가 건강한 비판과 저항으로 나타나 경우도 많고 이를 20~30대의 대략적 정치적 성향이나 인터넷의 대부분 여론에서 확인 할 수 있으나 그 반대급수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좌절 속에서 파국과 폭력적 권위를 기대하는 젊은 여론이 인터넷을 통해 성장하고 있다.

‘일베’에서는 민주화와 산업화가 일반적 용어와 다르게 사용된다. 민주화는 패배, 반대, 무엇에 당함 등의 의미를 지니고 산업화는 승리를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용어는 인터넷공간을 넘어서 현실 속에서 청소년들에게 민주화는 비속어 사용되고 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혼나는 것을 ‘민주화 당했다’고 표현한다. 민주화가 이렇게 경멸당하면서 반대급부로 ‘전땅크’는 추앙받는다. 이러한 ‘일베’의 회원은 100만여 명에 이르고 동시접속자는 2만여 명에 다 달한다. 이들은 강한 소속감을 가지고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다. 사회적 커뮤니티에 쉽게 안착하지 못한 이들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신 응어리를 비뚤어진 형태로 드러내고 공유하는 것이다. ‘일베’의 언어의 특징은 반말과 욕설이다. ‘일베’에서는 경어를 사용하면 욕설이 빗발친다. 그런데 이는 권위주의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사회적 대화가 단절된 이들의 일종의 방언이다. ‘말할 수 없는 사회’에 그들은 가장 공격적인 대화방식을 선택하고 그것을 자신들끼리 공인한다. 그리고 그 커뮤니티를 통해 인정욕을 충족한다. 이들은 단순한 악플러들처럼 익명성 속으로 숨지 않고 정치적 조직화까지 꽤하고 있다. 파시즘은 이성적 영역이나 기존 기득층을 기반으로 하기보다 감성과 무산층을 기반으로 한다. 뉴라이트보다 일베가 더욱 우려스러운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다.

지난 대선의 결과를 단순한 세대대결로만 해석할 경우 젊은 세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적, 집단적 불안감이 표출할 수 있는 폭력성에 대해 둔감해 질 수 있다. 다시 말해 희망이 사라져가는 사회에서 젊은 세대는 저항을 선택할 수 있지만 역으로 파시즘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한다. 20대의 투표는 30~40대의 투표와 다르다. 그들에게는 이데올로기적 저항의식도, 사회정의에 대한 부채의식도 3040세대에 비하면 훨씬 흐리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실존적 입장에서 표현할 뿐이다. 따라서 지금 한국의 정치상황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박근혜정부의 독선이나 유신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이러한 자발적 파시즘이 인터넷이라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매체를 매개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연예인에 대한 악플이나 음란성 등의 이유로 일베를 청소년 유해매체로 지정해야한다는 의견이 많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일 뿐이다. 공유될 수 없는 분노와 불안은 일그러지기 쉽다. 이러한 감성을 위로받는 형태와 장소가 인터넷의 극우적 커뮤니티라는 것은 그들에게 일상 속에서 휴식과 위로가 될 공간이 제공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분노와 불안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오프라인에 만들어져야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젊은 파시스트들의 등장이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