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성의 쇼펜하우어 연구와 혁명적 급진성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서평
1)
이규성 선생(이후 선생으로 약칭)의 저서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쇼펜하우의의 세계관과 아시아의 철학’(이하 ‘의지의 세계’로 축약)은 2016년 9월 발간되었다.
선생은 그동안 서양철학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기는 했으나 주로 아시아 철학을 연구했다. 선생은 말년에 서구철학이 중국과 한국에 어떤 파장을 미쳤는지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데 이 책에서 선생은 비록 서양철학의 전통에서는 비주류에 속하기는 하지만, 분명 서양철학의 전통에 선 쇼펜하우어를 다루었으니,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의 책은 너무 방대하고 심지어 서문 자체가 상당한 부피이다. 그 때문인지, 책의 맨 앞에 ‘요약’이라는 제목으로 간단한 글이 첨부되어 있다. 필자는 선생의 책을 다 읽고 난 후에야 비로소 이 요약문을 발견했는데, 책의 내용이 정말 잘 요약되어 있었다. 필자는 이 요약문을 보면서 선생이 왜 쇼펜하우어를 다루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선생은 ‘19세기 유럽과 아시아의 폭력적 만남’으로부터 많은 문제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여기서 유럽 정신의 폭력성에 대한 선생의 비판적 의식을 엿볼 수 있는데, 선생이 아시아 철학을 연구한 것은 유럽 정신의 폭력성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은 이미 선생의 여러 저서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선생은 이번에는 유럽 철학 내부에서 직접 그와 같은 유럽 정신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을 찾아내려고 시도하면서, 쇼펜하우어의 세계관을 연구하기로 선택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비주류이며, “아시아 철학을 인류의 운명을 창조적으로 해결하는 지혜로 간주한” 서양철학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선생은 유럽 철학을 자체 내에서 해체하는 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개인적인 이유도 있는 것 같다. 선생은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대학 시절부터 쇼펜하우어에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다. 선생은 서문 끝에서 대학 시절의 어떤 친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당시에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던 친구의 운명을 보면서 쇼펜하우어 철학을 연구해야 하겠다는 부채의식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그런 부채의식 말고도 다른 이유가 개입했을 것으로 보인다.
2) 혁명적 급진성
필자의 경험으로는 선생은 세상으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취하면서 살아왔다. 물론 비참한 인간 희극에 대해 분노하고 비판하는 의식은 생생했으나, 선생은 현실적인 투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자제한 것으로 안다.
‘의지의 세계’가 작성되던 시기는 박근혜 정권이 전횡하던 시기였는데, 선생은 더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반박근혜 투쟁을 위해 직접 거리에 나오기도 했으니 그만큼 실천적 투쟁의 절실함을 몸으로 느낀 것으로 생각한다. 이 시기 선생은 지식인으로 빨치산이 되어 사망한 박치우의 삶에 대해 필자에게 자주 말하곤 했는데 그런 말을 통해 자신의 내심을 간접적으로 토로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개인적인 판단이기는 하지만, 선생이 실천적 투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 일반적으로는 가장 정관적이고 심지어 도피주의라고 비난을 받는 쇼펜하우어를 연구했다는 것은 역설적이 아닐까 생각한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왜 하필이면 이 시기 선생이 쇼펜하우어를 연구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주로 그 고민의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필자는 ‘요약’ 속에서 다음과 같은 선생의 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가 새로이 정립하려는 철학에 대한 전망이다.
“이러한 방향(쇼펜하우어의 철학 방향)에서 전망되는 세계관은 안으로는 무한의 윤리를 본체로 하고 밖으로는 폐쇄적 질서를 개방적 질서로 변형하는 활동성을 갖는다. 이 활동성은 구체적 개인들의 기본적 역량들을 함양하고, 평등한 유대를 확장하는 개방적 노력을 동반한다.”
이런 구절이 지시하는 대상은 쇼펜하우어 철학 자신은 아니다. 하지만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이미 자신이 기대하는 그런 철학이 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구절은 선생이 쇼펜하우어의 철학 속에서 가장 급진적인 혁명성(또는 그 가능성)을 보면서 오히려 “창조적 활동성”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 급진적 혁명성을 선생은 두 가지로 요약한다. 그것은 곧 ‘무한의 윤리’이며 ‘개방적 질서’이다. 여기서 ‘무한의 윤리’란 나중에 선생이 쇼펜하우어의 윤리의 근본이라고 본 두 가지 즉 자발성으로서 자유와 타자(자연과 타인)와의 연대 또는 소통의 세계이다. 선생은 이런 무한의 윤리는 사회적으로는 개방의 질서(평등한 유대의 세계)를 통해 확립될 것이라 본다.
바로 이런 무한의 윤리, 개방의 질서가 쇼펜하우어의 지향점이기에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철학 속에서 급진적 혁명성을 발견한다. 더 나아가서 선생은 이런 무한의 윤리로부터 세계를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단호한 실천적 투쟁이 나오는 것으로 본다.
“이것이 생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긴 의지 부정의 길이다. 이것은 죽음의 길이 아니며, 무를 체화한 삶에서 우주와의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무대립의 자유의 길이다. 무는 허무를 의욕하는 궁극 목적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생성계의 존재로 나갈 수 있는 하나의 단계로 해석할 수 있다.”
선생의 생각에 따르자면 사람들이 이런 무한의 윤리에 도달하지 못하였기에 즉 ‘생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지’ 못해 세계를 근본적으로 전환할 혁명의 꿈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심지어 쇼펜하우어 자신조차도 자신의 철학에 내재하는 혁명적 급진성을 자각하지 못한 채, 의지 부정과 세계 도피의 한 측면에만 몰입한 것이 아닌가 하면서 비판한다. 선생은 쇼펜하우의 철학에서 보이는 이런 혁명적 급진성은 오히려 쇼펜하우어가 숭상한 아시아의 철학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아시아 철학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내재하는 그 가능성을 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생이 자신의 책의 제목을 쇼펜하우어의 책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왜곡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한다. 쇼펜하우어의 책의 제목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이다. 반면 선생의 책의 제목은 ‘의지와 소통으로서의 세계’이니, 그만큼 소통 즉 우주적 연대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3)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혁명적 급진성을 찾기 위해 선생은 방대한 연구를 전개한다. 선생의 연구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자주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비교된다. 선생은 심지어 비트겐슈타인이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선생은 두 철학자가 지닌 공통성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으로 정리하고 있다.
➀ 서양 형이상학의 해체
➁ 세계를 구성하는 언어에 대한 비판
➂ 삶의 의미에 대한 문제 제기
사실 이러한 세 가지 측면은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의 순서와 일치한다. 이 책에서 쇼펜하우어는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선험적 관념론의 세계(즉 표상의 세계)를 확립하고 그것을 넘어서서 물 자체의 세계로 이행한다. 이 물 자체의 세계를 그는 의지의 세계로 규정한다.
선생은 비트겐슈타인과 쇼펜하우어가 지닌 철학적 구도에 따라서 자신의 책을 서술해 나가는데, 1장 서문에 이어서 2장과 3장에서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 비판이 논의된다면, 4장과 5장은 쇼펜하우어가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현상계)을 확립하고 여기서 현상계를 넘어서 물 자체 즉 예지계로 이행하기 위한 단서가 제시된다. 이 단서는 세계의 무한성을 보여주는 형이상학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의 한계 내에서 제시된 것에 불과하다.
6장에 이르러 쇼펜하우어의 예지계가 본격적으로 논의된다. 이 예지계는 내감을 통해 확인한 대로 의지의 세계로 규정되지만, 그 자체가 물 자체의 세계는 아니다. 선생은 이 장에서 의지의 세계를 넘어 물 자체의 세계로 육박해 들어가는 쇼펜하우어의 관점을 영원이라는 개념을 통해 제시한다.
2장에서 6장까지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대한 논의에 해당하며 그 이후 7-9장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미치는 영향과 그 한계에 대한 비판,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에 대한 모색에 바쳐져 있다.
이 가운데 필자의 관심은 주로 6장으로 향한다. 왜냐하면, 이 6장에서 쇼펜하우어는 예지계로서 의지의 세계를 논의하는데, 이런 논의에서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혁명적 급진성을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4)
쇼펜하우어의 철학의 출발점은 칸트 철학, 그것도 ‘순수이성 비판’의 현상론이다. 칸트는 시간, 공간, 인과론이라는 의식의 형식을 통해 직관적으로 주어지는 경험을 구성하면서 현상 세계가 구성된다고 한다. 칸트는 이런 의식의 형식을 물 자체 적용하게 된다면 즉 이런 의식 형식이 주관의 형식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면 형이상학에 빠진다고 비판하였다.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이런 선험적 관념론 즉 현상론을 받아들이면서 그 역시 기존의 형이상학은 이런 의식의 형식을 마치 실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비판한다. 칸트의 형이상학 비판은 쇼펜하우어가 서양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도구가 되었다.
쇼펜하우어가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칸트의 현상론에 그냥 머물렀다면, 쇼펜하우어는 버클리나 흄의 아류로 전락했을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현상계에 머무르지 않고 이 세계 배후에 있는 물 자체 세계 곧 예지계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예지계를 찾아가는 쇼펜하우어의 길은 선생의 서술에 따르면 세 가지가 있다. 그 중 첫 번째 길은 기존의 형이상학과 같은 길을 가는 것이다. 기존의 형이상학은 개별 사실을 근거로 하여 가설 추리적인(이성적인) 방법을 통해 실재의 세계를 찾아간다. 그러나 이 길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변증론에서 제시했던 것처럼 이율 배반에 빠지게 된다.
칸트는 이런 딜레마 때문에 물 자체의 세계에 이성적 방법을 적용하는 것을 거부하였지만, 쇼펜하우어는 다르게 해석한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제시한 네 가지 이율 배반 가운데 정립은 오류 추리에 해당하지만, 반정립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런 반정립은 곧 실재 세계가 무한하며 무규정적이라는 것, 즉 ‘무’라고 상정하는 형이상학이다. 이런 반정립은 비록 방법론적으로는 형이상학적 길과 동일하므로 기존 형이상학과 마찬가지 오류 추리이고 진정한 세계의 실재 자체, 물 자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반정립은 예지의 세계가 현상계로부터 무에 의해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 즉 ‘그게 아니라’는 사실만은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신의 속성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를 지닌다.
쇼펜하우어는 당시 뉴턴에 의해 완성된 고전 역학의 세계를 넘어서서 진화론과 생리학 등 새로운 과학의 발전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과학의 발전은 정립의 길이 아니라 칸트가 반정립이라고 했던 길이 실재의 세계를 더 가깝게 암시한다고 믿었다.
5)
그러나 이런 가설 추리적 방법은 현상계를 넘어서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실재의 세계 자체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예지계로 들어가는 근본적인 방법은 곧 내감에 의해 접근하는 방법이라 한다. 쇼펜하우어는 이 길을 ‘성곽을 내부로부터 허무는 비밀의 통로’라고 말한다. 좀 길지만,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인용해 보자.
“객관적 인식의 길을 통해서는 즉 표상으로부터 출발하는 길에서는 우리는 결코 표상 즉 현상계를 빠져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물들의 밖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우리는 한갓 인식하는 주관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인식하는 존재에 속하기에 스스로가 물 자체라는 것이다. 또한 그래서 우리가 밖으로부터는 침투하여 도달할 수 없는 사물 자체의 고유한 내적 본질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 안으로부터 열려 있다는 것이다. 경험적 실재에 직면해서는 우리는 마치 성곽을 포위하여 밖으로부터 공격하는 병사와 같다. 그들은 성곽을 뚫고 들어가는 길을 발견하기 위해 끝없이 그리고 헛되이 노력한다.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다른 방식으로 입성하는 것에 있다. 그것은 전혀 성곽을 밖으로부터 공격하지 않고서 내부 배반을 통한 비밀스러운 접선에 의해 단번에 우리를 요새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비밀 지하 터널이다. 바로 이와 같이 물 자체는 자기 자신이 자신을 의식한다는 바로 이 사실을 통해 온전히 직접적으로 의식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표상 배후에 의지가 있다. 이것은 내적 자기의식, 내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단적인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데카르트가 ‘필자는 생각하므로 존재한다’고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성을 지닌 것이다. 이 사실은 반박할 수 없는 명증성을 지닌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명증적인 사실 즉 나의 본질에서 세계의 본질로 유추해 나간다. 내가 이처럼 의지라고 한다면 내 앞에 있는 현상 세계의 모든 것도 마찬가지로 의지가 아닌가? 쇼펜하우어는 나의 의지로부터 의지로 이루어진 세계로 도약한다. 쇼펜하우어는 더 나가서 나의 의지와 세계의 의지는 서로 다른 의지가 아니라고 한다. 나의 의지와 세계의 의지는 본래 하나의 의지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개체적 의지를 넘어선 일반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의 세계적 의지가 나의 의지로 그리고 사물의 의지로 자기를 발현했을 뿐이다. 인간의 의지와 사물의 의지에 차이가 있다면, 인간의 의지는 내감의 자기의식을 통해 자각되지만, 사물의 의지는 자각이 없다. 쇼펜하우어는 사물은 마치 인간이 자기를 자각해 주기를 기다리는 듯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의지는 어떤 속성을 지닌 것일까? 쇼펜하우어의 주장을 계속 따라가 보자. 내가 나의 내적 자기의식을 통해 확인한 것에 따르면 나의 의지는 맹목적이다. 그것은 나 자신을 파괴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는 세계적 의지도 마찬가지다. 세계적 의지 역시 맹목적이다.
이런 맹목적 의지로부터 개체적 의지가 출현하지만, 개별적 의지와 세계적 의지 사이의 관계는 결코 인과적 관계가 아니다. 인과성은 동일한 것이 원인과 결과에서 반복하는데, 맹목적 의지가 개별자를 실현하는 방식은 그와는 다른 것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 맹목적 의지는 개별자를 발현한다.
이런 발현의 관계는 본질과 현상의 관계와 같이 이데아가 유출되는 것이 될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현상계로부터 본질을 추론해 들어가는 길이 생기게 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런 발현의 관계에서 맹목적 의지는 우연한(자발적) 방식으로 개별자를 발현한다고 본다. 이런 개별자와 의지 사이의 관계는 무라는 심연에 의해 단절되어 있으며 의지의 발현은 맹목적이라는 특징을 지니게 된다.
쇼펜하우어가 발견한 맹목적인 일반 의지 개념은 서양 현대 철학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의지는 이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의지’로, 프로이트에 의해 ‘죽음의 충동’으로 수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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