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퍼와 정신분석 11-원초적 장면[흐림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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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와 정신분석 11-원초적 장면

 

1)

앞에서도 말했듯이 호퍼는 1930년대 이르러 극심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그 시기가 결혼 전반기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특이하다 할 수 있는데, 여러 해석자는 그의 정신적 고통을 그 시대 상황과 관련한다. 그 시대는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일대 혼란에 빠진 세계경제공황의 시기였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시기, 호퍼의 정신적 고통은 그런 시대적 상황보다는 오히려 호퍼의 심적 욕망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이상하게도 1940년대로 들어가면서 호퍼의 정신적 고통은 치유되고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 시기 미국에서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으로 경제적 상황이 상당히 나아진 것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게도 볼 수 있지만, 호퍼의 예술적 소재가 사회적 상황과는 별 관련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게 해석하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호퍼의 정신적 고통과 마찬가지로 그의 치유와 회복 역시 그의 심적 욕망 구조에서 원인을 발견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이 시기 호퍼가 그린 그림들을 살펴보자. 가장 눈에 뜨이는 그림은 원초적 상황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대표적으로는 1939년 그려진 뉴욕 극장과 1942년 그려진 밤을 지새우는 사람[Nighthawks] 1943년 그려진 호텔 로비라는 그림이다.

 

필자가 이 세 가지 그림을 주목하는 것은 공통적으로 세 인물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두 인물은 남녀인데, 젊기도 하고 늙기도 하다. 그들은 서로 무심관심하게 보이지만 서로 가까이 있어 심지어 약간의 신체적 접촉조차 존재한다. 특징적인 것은 또 하나의 인물이다. 이 인물은 여성이기도 하며 남성이기도 한데, 그는 자기 속에 몰두하고 있어서 자기 앞에 보이는 두 사람에 대해 애써 무관심하게 보이지만, 어쩌면 마치 곁 눈짓으로 감시하는 듯하다.

 

2)

우선 1939년 그려진 뉴욕 극장이라는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왼편은 관객석이고, 화면의 절반이 함께 보인다. 관객석에서 나이든 남녀의 뒷 모습이 보인다. 남자는 머리가 희끗하며 여자는 모자와 외투를 보아서 젊은 여성은 아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열에 앉아 남처럼 보인다. 하지만 관객석에 다른 사람은 없으니 왠지 두 사람이 가까운, 심지어 부부인 것처럼 보인다.(호퍼가 그린 스케치에서는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으니 부부라 하기에 무리가 없다.) 두 사람은 서로 떨어진 채로 산과 하늘이 보이는 영화 화면에 몰두하고 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어두우며, 화면에서 나오는 빛이 명멸하고 있을 뿐이다. 왼쪽 화면의 지배적 색조는 녹색이다.

 

반면 오른쪽에는 금발의 젊은 여자가 있다. 아마도 객석 안내원으로 보인다. 입고 있는 푸른 제복이 이를 암시하다. 그녀는 턱을 팔에 괸 채로 무언가 골똘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벽에 기댄 그녀를 향해 머리 위에서 밝은 조명이 비치고 있다. 복도에서 금발의 여자 이상으로 시선을 끄는 것은 계단을 가리는 붉은 휘장이다. 

 

이 장면은 객석의 장면과 대조적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영화관에서 관객석과 안내원이 있는 복도는 같이 붙어 있는 장면은 시각적으로 왜곡되어 있어 두 장면이 서로 통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보면 자기 속에 침잠해 있는 안내원은 어쩌면 관객석의 나이든 두 남녀를 보고 있는 듯하다. 객석은 화면에서 나오는 빛이 명멸하고, 복도는 실내등으로 환하다. 후자가 현실과 의식 속의 장면이라면 전자는 기억 속의 무의식의 장면으로 보인다.  

 

이렇게 이 그림을 기억과 현실, 무의식과 의식을 함께 그려낸 장면이라 본다면, 이 그림이 의미하는 것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흔히 정신분석학에서 원초적 장면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원초적 장면은 아이가 목격한 또는 목격했다고 믿는 부모의 성관계 장면이다.

 

3)

이번에는 1942년 그려진 <밤을 지새우는 사람>이라는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은 호퍼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그림에서 길 모퉁이 주변의 어둠에 대조되어 더욱 환하게 빛나는 카페에 네 사람이 있다. 정면에 검은 양복의 입고 모자를 쓴 남자와 붉은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여인은 입은 옷 매무새로 보아 호퍼가 자주 그린 도시 오피스 사무원으로 보인다. 그들은 서로 나란히 앉아 있고 심지어 남자의 왼쪽 손과 여자의 오른쪽 팔꿈치가 서로 부딪힐 정도로 가깝지만 서로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다. 남자는 무슨 상념에 빠져 있고 여자는 무료한 여성이 자주 그렇듯이 자신의 손톱을 바라보고 있다.

 

흰 옷을 입고 수병 모자를 쓴 남자는 그들을 쳐다보는데, 무슨 말인가를 하는 듯하지만, 두 남녀는 그 말에 전혀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다. 반면 카페의 왼쪽에 그려진, 오피스 사무원의 복장인 검은 양복과 모자를 쓰고 있는 남자는 우리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어 우리로서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또는 생각하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그의 자세는 한편으로는 자기 앞의 두 남녀를 바라보는 듯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스스로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

 

 

주변의 어둠과 녹색의 색조 속에서 네 명의 인물은 모두 고립되어 있는 듯하지만 또한 조명 등의 빛을 받아 붉은 색으로 빛나는 카페의 탁자는 이들을 서로 연결해 주고 있는 듯하다.

 

네 명의 인물이 모두 비슷한 나이의 장년이어서 이 그림을 원초적 장면에 등장하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비추어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의 관계 자체는 서로 가깝지만 서로 떨어져 있는 두 남녀와 이를 흠모하듯 또는 질시하듯 훔쳐보는 사람이라는 관계의 성격은 원초적 장면과 동일하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 역시 원초적 장면의 변형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4)

원초적 장면에 대한 유사한 변형은 1943년 그려진 호텔 로비라는 그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그림에서는 두 남녀가 나이든 부부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그림에서 붉은 옷을 입은 여자는(위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여자는 붉은 옷을 입고 있다) 늙은 자신의 남편을 쳐다보고 있다. 반면 단정한 차림으로 코트를 손에 걸친 나이든 남자는 상의 주머니에 왼손을 넣은 채 무언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듯하다. 가방이 없는 것을 보아 그들은 이미 호텔에 투숙한 것 같다. 아마도 밖으로 나가기 위해 부른 택시를 기다리는 듯한 자세이다.

 

오른 편에는 금발의 젊은 여성이 다리를 꼬아 쇼파에 앉은 채 책을 읽고 있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햇빛이 비추어지고 있으며 햇빛은 펼쳐진 책 위에 하얗게 부서지고 있다. 반면 그녀의 얼굴은 그늘에 가려 우울해 보인다. 그녀는 책에 몰두해 있지만 뉴욕 극장의 안내원에 마찬가지로 자기 앞에 있는 노 부부에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이 일어나는 이유는 호퍼가 이 그림에서 두 장면을 몽타주 했기 때문이다. 그림의 왼 편과 오른 편은 시각적으로 상이하다. 왼 편의 경우의 시각은 정면에 가깝다면 오른 편 시각은 상당히 위쪽에 있다. 사실은 서로 부딪힐 일이 없는 두 장면이 몽타주 됨으로써 서로 부딪히게 되고 그 결과 마치 두 장면의 인물들이 서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그림 역시 앞의 두 그림과 마찬가지로 원초적 장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5)

프로이트에 따르면 원초적 장면은 아이에게 깊은 정신적 외상을 주는데, 프로이트는 이를 거세라고 했다. 이를 통해 아이는 남근기에서 성기기로 결정적으로 이행하게 된다. 라캉식으로 표현하자면 자신을 대타자의 욕망 대상이라고 보는 실재계로부터 벗어나 대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을 자신도 욕망하는 상징계로 들어가게 된다.  

 

호퍼의 경우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상상적 동일화를 거쳐 실재계로 발전했다. 그 밑바닥에는 실재 즉 어머니와의 단절을 두려워하는 거세 공포가 있었다. 이제 뒤늦게 이르러 마침내 호퍼에게서 거세 즉 단절이 일어나게 된다. 호퍼는 원초적 장면을 통해 마침내 자신의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호퍼는 이제 독립된 자아로서 이 험난한 세상에 던져져서 스스로의 힘으로 견뎌나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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