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미학 산책 3-고대예술과 근대예술 논쟁[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미학산책 3-고대예술과 근대예술 논쟁

 

1)

헤겔의 미학은 빙켈만 이래로 내려오는 고전주의 미학과 낭만주의 미학의 대결을 마무리하는 결정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의 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겔 이전에 이루어진 격렬한 논쟁의 전말을 살펴보아야 한다.

논쟁의 출발점에 빙켈만이 있었다. 그는 1755년 로마에서 고대예술작품을 직접 관찰하면서 연구한 끝에 1764년 <고대 예술의 역사>라는 저서를 완성했다. 여기서 그는 고대예술의 근본특징을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함’을 갖는다고 평가했다. 

빙켈만 이후 서구에서는 고대의 아름다움을 되살리려는 (신)고전주의가 출현했다. 고전주의의 중심에 괴테가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고전주의를 옹호하는 예술사가, 미학자가 모여들었다. 대표적으로 쉴러, 히르트, 마이어 등이다.

고대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면서도 근대 예술의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등장하면서, 논쟁이 벌어졌다. 중세 낭만주의 예술의 전통을 잇는 근대예술이 고대 예술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고대의 예술을 부활하려 했던 르네상스 예술을 제쳐 놓는다면, 14세기 고딕 예술이나 낭만주의 문학, 17세기 바로크 예술은 고대의 미학적 기준으로 보면 예술로 인정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여기서 근대 예술작품의 미학적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등장하면서, 논쟁이 벌어졌다.

이런 논쟁에서 고대예술에 관한 한 빙켈만의 규정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논쟁의 초점은 고대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근대에 있었다.

 

2)

이런 논쟁에서 효시가 된 것이 바로 쉴러다. 쉴러는 괴테와 함께 발간하던 잡지 호렌에 1795년 11월에서 1796년 사이 세 논문[1]을 연재한다. 그는 여기서 고대 문학과 근대 문학을 구별하면서 전자를 소박 문학이라 규정하고 후자를 감상(또는 성찰) 문학이라 규정했다. 그에 따르면 소박문학이란 현실적 대상 속에 이미 아름다움이 내재하고 있어서 단순한 경험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 반면 근대에 이르러 문명의 진보에 따라 현실은 분열에 처했으며, 아름다움은 사라졌다. 이런 아름다움을 이상의 세계 속에 창조하려는 시도가 성찰 문학을 낳는다.

쉴러의 주장에서 고대 문학이나 근대 문학의 목표는 같다. 그것은 자유롭고 조화로운 질서이다. 이 속에서 감성과 이성, 우연과 필연이 통일되어 있다. 다만 이런 질서에 다가가는 방식만 다를 뿐이다. 고대 문학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서술할 뿐이며 근대 문학은 이미 사라진 것을 환상 속에서 만들어내려 한다.

쉴러에 따르면 사라진 아름다움을 다시 찾으려는 시도는 루소 등에서 보듯이 문명을 버리고 원초적인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택할 수 없다. 감상 문학은 문명의 진보를 인정한 위에서 사라진 아름다움을 다시 창조해야 한다. 감상 문학의 시도는 여러 가지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그는 특히 세 가지를 거론한다.

첫 번째가 곧 풍자적인 문학이다. 풍자 문학은 현실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풍자 문학은 단순한 부정에 머무른다는 한계가 있다. 두 번째가 곧 비가적[elegiac]인 문학이다. 비가적 문학은 상실한 아름다움을 한탄하지만 그것을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 속으로 밀어 넣는 한계를 지닌다. 세 번째가 목가적인 문학인데 이는 이상의 세계가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근대 성찰 문학이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가 여기서 출현한다.

그러나 쉴러의 이런 시도는 고대 문학의 아름다움으로 근대 문학을 재단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런 기준으로 재단되지 않는 다양한 근대 문학을 설명할 가능성을 결여한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고대 미학의 품 안에 머무르는 쉴러에 반발하면서 근대 문학의 미학적 기준을 고대 미학의 기준으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시도를 전개했다.

 

3)

슐레겔은 고대 문학과 비교되는 근대 문학을 정립하기 위해, <그리스 문학 연구>[2]라는 책을 서술했다. 슐레겔이 이 책 초판을 작성할 당시 쉴러의 논문 <소박 문학과 성찰 문학>이라는 논문을 읽지 못했다. 그는 발간하기 전 쉴러의 논문을 읽고 책의 서문에서 쉴러의 논문을 평가한다. 그는 그 속에서 자신의 생각과 유사한 부분을 발견하면서도 쉴러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부각하였다.

슐레겔의 사유는 순환론적인 관점을 취한다. 그에게서 역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교차되어 있어서, 고대의 끝에 근대가 시작하며, 근대의 끝에 다시 고대의 출발점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인식론적으로는 서로 대립하는 감성과 이성은 서로 교차한다. 감성은 이성을 향하고 이성은 다시 감성을 향해 간다. 미학적으로도 고대 문학과 근대 문학, 발견(모방)의 본능과 구성의 충동이 대립하면서 서로를 향해 나간다.

고대 문학은 무질서하고 자연의 맹목적인 운명에서부터 출발한다. 여기서 현실 속에서 조화의 질서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시도되었다. 이를 통해 아름다운 그리스 고전예술작품이 출현했다. 그 정점에 있는 아테네 비극이 있다.

이 과정은 자연 스스로의 자발적인 운동을 통해 전개되므로 슐레겔은 이를 자연문학이라 한다. 그리스 문학은 비극을 넘어서 나갔으며 그 결과 고전시대 말기 즉 헬레니즘 시대에는 개인적 행복을 추구하는 문학 즉 희극이 출현했다.

슐레겔에 따르면 근대 문학은 인위적인 문학이다. 이 문학은 세계를 구성하려는 충동에서 나온다. 근대의 구성적 충동은 처음 감각적 만족을 추구하는 흥미로운 문학으로 출현했다. 흥미로운 문학은 고대 문학의 말기에 등장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문학과 외형적으로는 유사하지만 미학적으로는 새로운 전환이 일어났다. 흥미를 추구하는 문학은 중세 말기 셰익스피어의 특징성(성격)의 문학에서 정점에 이른다.

구성의 충동은 흥미로운 것을 넘어 나간다. 구성 충동은 사회적인 자유가 현실적으로 실현되는 이상을 향해 나가며, 이를 통해 괴테의 작품에서 보는 것과 같은 객관적(도덕적) 미학이 성립한다.

슐레겔 자신은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객관적 미학은 다시 해체되면서 그 끝에 맹목적 운명을 인정하는 문학으로 발전할 것이다. 이는 다시 고대 문학의 출발점이 된다.

슐레겔은 고대 문학과 근대 문학을 대립하면서도 교차 시킴으로써 고전주의 미학의 탁월성을 인정하면서도 근대 낭만주의 문학의 가능성을 살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고대 문학의 도달점에 개인의 자유를 설정하면서, 고대 문학을 근대적 관점에서 파악한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고대적 개인은 어디까지나 민족적 실체를 대변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4)

쉴러가 근대 문학작품을 고대 미학의 기준으로 파악한다면, 슐레겔은 근대 미학을 가지고 고대 문학작품을 해석한다. 이런 착잡한 논쟁 가운데 괴테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한편으로 쉴러와 교제하면서, 고전주의를 옹호하였지만 다른 한편 마이어와 교제하면서 역사적 관점을 미학의 영역에 끌어들인다.

헤겔 <미학강의> 서문에서 헤겔은 예술사가인 마이어[Johann Heinrich Meyer]를 거론하는 가운데, 히르트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듯이 히르트를 소개한 후, 마이어의 주장을 본격적으로 소개한다. 히르트[Aloy Hirt][3]는 헤겔이 존경을 바치는 베를린 대학 동료 교수이다.

헤겔에 따르면 히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예술작품에서] 표현양식 상의 모든 특수자는 내용의 특정한 묘사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극시에서] 본격적 내용으로서 특정한 행위와 직접적으로 관계 맺지 않는 것은 배제되어야 한다.”

헤겔은 이렇게 히르트를 소개한 다음, 다시 마이어[4]의 주장을 소개한다. 헤겔은 괴테가 마이어와 같은 주장을 한다고 하면서 그 주장의 핵심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예술작품의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직접 현시된 것에서 출발하며 그런 다음 비로소 그 의미나 내용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전자의 외면성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가치를 가지지 못하며, 오히려 우리는 외적 현상에 영혼을 부여하는 하나의 내면성, 하나의 의미를 여전히 그 배후에 상정한다.”

여기서 마이어의 주장은 헤겔에 의해서 예술은 상징의 예에서나 우화의 예에서 보듯이 예술작품은 현상으로서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으로 파악된다.

 

5)

히르트의 특징성을 지닌다는 주장과 마이어의 의미성을 지닌다는 주장은 헤겔에 따르면 서로 다르지 않은 주장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사실 상당히 다르게 보인다.

원래 히르트의 주장은 원래 미의 범위를 이상적인 것에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제시된 것이다. 이상화에 철저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이고 우연적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 이런 주장은 빙켈만 이래로 고대 예술의 가장 기본적 원칙으로서, 빙켈만이 히르트에게 준 영향을 보여준다.

그런데 특징적이란 곧 ‘가장 적합한 것’으로 해석되면서, 이 주장은 ‘의미한다’는 주장으로 전환된다. 왜냐하면 어떤 것에 적합한 것은 자기를 넘어서 다른 것을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예술작품은 매우 포괄적이 된다. 즉 예술작품은 그리스 예술처럼 이상화된 것 즉 아름다운 것만 것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추한 것도 포함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추한 것 역시 하나의 의미를 가장 적합하게 지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그 밖에도 희화적 요소는 나아가 왜곡된 것으로서 추한 것의 특징으로서 나타난다. 추한 것은 나름대로는 내용에 비교적 밀접하게 관계하므로 특징성의 원리에서 추한 것과 추한 것의 표현도 역시 근본 규정으로서 수용된다고 이야기될 수 있다.”

특징적인 것이 이처럼 하나의 기호로서 파악된다면, 여기서 고전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펼쳐진다. 이제 각 시대에 고유한 특징적인 것이 출현할 수 있으며, 그리스 시대 아름다운 것이 특징적인 것이었듯이 근대에 이르게 되면 추한 것이 특징적인 것으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이어는 히르트의 고전주의를 이어받으면서도 미학의 역사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마이어는 이런 역사적 관점에서 그의 선구자인 빙켈만이 그리스 예술작품을 시대적으로 잘못 분류했던 점을 지적한다. 그는 빙켈만 전집을 발간하는데, 주석을 통해 빙켈만의 오류를 수정한다.[5] 헤겔의 미학은 한마디로 말해 역사적 미학이니, 헤겔 미학의 출발점은 마이어의 미학적 사유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1] 그 제목은 다음과 같다. <소박한 것에 관하여>(1795. 11), <감상 시인에 관하여>(1795. 12), <소박 및 감상 시인에 관한 논문의 결론>(1796)

[2] 슐레겔은 이 책을 1795년 작성했으나 출판은 1797년 이루어졌다. 이 책은 본래 계획된 것의 서론에 해당하며, 그 본론은 작성되지 못했다. 1822년 슐레겔은 자신의 전집을 발간하려는 가운데 위의 책을 수정하여 재판으로 발간하였다. 재판은 표현의 변경과 부연 설명에 주력했다.

[3] 히르트는 원래 수도원 교육을 받았고 비엔나 대학에서 고전을 연구하다, 1782년 로마로 갔다. 거기서 그는 빙켈만의 저서를 읽은 후 고전 예술로 방향을 돌려 고전 예술을 연구했다. 그는 1796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침략 이후 로마를 떠나 베를린으로 가서 프리드리히 2세의 예술 고문이 되었다. 그는 1809년 고대의 원리에 따른 건축술이라는 저설르 발표하여, 신고전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는 1810년 베를린대학 창립에 관여했으며 그 후 베를린 대학 예술사 및 고고학 교수로 있으면서 또 건축 아카데미를 창립했으며, 이를 통해 쉰켈 등과 같은 신고전주의 건축가를 길러냈다. 헤겔은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하고도 진정한 예술감정가 중 하나이다”라고 평가한다.

[4] 마이어 취리히에서 예술가 도제수업을 받던 중, 화가였던 퓌슬리로부터 빙켈만의 저서를 소개받는다. 그는 미술사를 연구하기 위해 1784년 로마로 가며, 1786년 괴테가 로마에 도착하자 만나서 평생에 걸친 친구가 된다. 1791년 괴테의 초청으로 바이마르로 가서, 장식 연구가로서 활동한다. 그는 1798년 괴테와 더불어 잡지 <프로필레엔[prophylaen: 열주]>을 발간하면서, <조형 예술의 대상에 관해서>라는 글을 발표한다. 그는 여기서 예술사적인 관점 즉 예술작품이 만들어지던 당대의 취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816년 새로운 잡지 <예술과 고대>라는 잡지에 그는 18세기 예술의 역사를 서술했다. 그는 1809-1811년 사이 바이마르 궁정에서 했던 강의를 토대로 1824년 <예술사> 1,2권을 발표했으며 그의 사후 1836년 3권이 발간되었다.

[5] 헤겔은 그리스 조각 작품을 논하면서 라오쿤을 설명한다. 라오쿤은 빙켈만이 그리스 예술의 전성기에 속하는 전형으로 파악했던 작품인데, 헤겔은 이는 명백히 후대 매너리즘 시대에 등장한 작품이라 본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정교하고 우아하기 때문이다. (이창환 역, 미학강의 2권, 470쪽) 반면 헤겔은 그리스 조각의 전형은 빙켈만의 표현대로 고요함과 단순함을 지닌 것으로 본다. 헤겔의 이런 평가는 분명 마이어의 주장으로부터 배운 것으로 보인다.   

헤겔 미학 산책2-예술의 과거성 테제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 산책2-예술의 과거성 테제

 

1)

헤겔 미학과 관련해 가장 뜨거운 논제는 예술의 과거성 테제일 것이다. 헤겔은 미학강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 예술의 아름다운 시절과 중세 후기의 황금시대는 사라졌다[sind voruber].” (미학강의1, 30쪽)[1]

“최상의 규정이라는 면에서의 예술은 우리에게 과거의 것[Vergangenes]으로 존재하며 또 그렇게 남아 있다. 이로써 예술은 우리에 대해 진정한 진리와 생명성도 역시 상실했으며[verloren], 예전의 필연성을 현실 속에서 주장하여 한층 높은 지위를 점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표상 속으로 그 자리를 옮겼다.”(미학강의1, 30쪽)

 

이런 구절에서 헤겔은 ‘사라졌다’ ‘과거의 것’ ‘상실했다’는 표현을 반복함으로써 소위 예술의 과거성[vergangen] 테제가 출현하게 되었다. 예술의 과거성 테제는 고전주의 시대인 그리스 예술작품에서 미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고전주의의 미적 작품은 예를 들어 그리스 조각 작품에서 보듯이 예술의 내용인 이념을 이상화 된 감각적 현존을 통해 표현한다. 이렇게 이상화 하는 가운데 고전적인 아름다움 즉 조화와 비례가 갖추어진다. 이 조화나 비례는 아름다움의 정점이었다.

그 이후 등장한 낭만주의 예술작품은 예술의 퇴락이다. 낭만주의 예술작품 가운데 인정할 만한 게 있다면 고전주의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자면 르네상스 시절의 종교화나 괴테의 고전주의적 작품이 그렇다. 그 외에는 뭐 볼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성 테제는 예술의 시대는 그리스 고전주의 이후 지나갔다고 주장한다. 

 

2)

이 과거성 테제는 헤겔 미학 강의 텍스트 자체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했다.[2] 이 논쟁에서 핵심은 위에서 언급한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다. 과거성 테제를 찬성하는 사람은 곧 헤겔이 그리스 예술을 이상화하는 고전주의자라고 보고 위의 말을 과거성 테제로 해석한다.[3]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헤겔의 위의 말은 헤겔 미학을 편집한 편집자 호토의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과거성 테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힘들다. 굳이 낭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중세 이후 등장한 낭만주의 예술의 탁월함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헤겔 역시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나 네델란트 풍속화를 칭찬하는 데 결코 인색하지 않으며, 더구나 회화나 음악, 시문학은 낭만주의적 예술 장르라고까지 주장한다. 중세 이후 낭만주의 예술을 부정한다면, 지금 남아있는 대부분의 고전과 핵심적 예술 장르를 버려야 할 지경이다.

 

3)

호토가 헤겔을 왜곡했는지는 제쳐두고 위에서 언급된 ‘지나갔다’는 헤겔의 발언조차도 엄밀하게 살펴보면, 과거성 테제로 해석하기 어렵지 않을까? 위의 구절에서 ‘최상의 규정이라는 의미에서의 예술’이 사라졌다고 할 때, ‘최상의 규정’이라는 말의 의미가 문제가 된다. ‘최상의 규정으로서 예술’은 고전주의 미학자들이 믿듯이 그리스 예술이 인류의 최고 예술이라는 의미로 본다면 과거성 테제가 출현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말은 절대정신을 대변하던 예술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헤겔은 그리스 시대는 예술이 종교나 철학을 제치고 절대정신을 대변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판단의 구체적 근거로 그리스 신화조차도 호머의 서사시를 통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과거성 테제는 예술이 절대정신을 대변하던 그리스 시대가 지나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이후 그리스 시대보다 더 탁월한 예술이 나오기도 했지만 절대정신을 대변하는 자격에서 예술은 이제 철학에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스 시대, 예술이 절대정신을 대변하는 이유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헤겔은 이 시대 예술의 내용이 되는 신은 곧 민족신이라고 규정한다. 민족신은 그 이전 자연신의 단계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아직 각 민족에게 고유한 개별적 신이다. 개별적이라는 것은 곧 감각적인 것과 같은 말이니 헤겔은 그리스 신이 개별 신이기에 외적인 감각적 현상으로 출현할 수 있다고 본다.

신 자신이 민족신으로서 감각적으로 현상하므로 감각성에 머무르는 예술이 이 시대에 종교를 제치고 지배적인 절대정신이 된다. 하지만 이런 민족신을 이해하는 데 사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철학이 아니라 예술이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한다는 주장이다. 비유하자면 산수 정도는 초등학생이 가장 잘한다는 뜻이다.

 

4)

그런데 문제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낭만주의 시대에도 예술이 여전히 ‘진리와 생명성’을 주장하려면 이 시대 예술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이 문제가 헤겔의 미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보면 이 시대 예술은 근본적인 난관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헤겔의 역사관에서 중세 이후 근대까지 이어지는 주관성의 시대이다. 이 시대 예술이 곧 낭만주의 예술인데 낭만주의 예술의 내용이 되는 것은 유일하며 보편적인 기독교 신이다. 그 신은 감각적 현실을 초월하는 신이다. 이 신은 우상숭배금지의 원칙에서 보듯 자신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을 거부하는 신이다.

초월적 유일 보편 신을 어떻게 감각적 예술을 통해 표현할 수 있을까? 헤겔이 낭만주의 예술의 특징을 특징성에 두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특징성란 곧 셰익스피어의 희극의 주인공이 지닌 것과 같은 권력욕(맥베스) 질투(오델로) 등 주관적 성격을 말하는데, 이런 특징성 자체가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 특징성이 예술의 원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 추가 예술의 원리가 된다는 주장으로 나가기도 하지만 추가 예술의 한 요소는 몰라도 기본 원리로 인정되기는 어렵다.[4]

설혹 괴테나 실러의 고전주의적인 작품에서 보듯이 그리스적 예술작품의 흉내를 내더라도, 우선 우수꽝스럽다. 미켈란제로가 예수의 모습을 그리스 영웅 헤라클레스의 모습으로 표현했을 때 생각해 보라. 그리고 낭만주의적 인물이 기독교적 신을 표현하는 한에서는 여전히 우상숭배 금지의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니, 아마도 후일 성상 파괴 운동에서 보듯이 교도의 도끼 아래 파괴되고 말지 않을까?

그렇다고 예술이 감각을 떠나 개념을 사용하거나 불립문자와 같은 방식으로 수수께끼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지 않을까?

 

5)

헤겔은 낭만주의가 표현하는 신이 초월적 신일뿐만 아니라 인격신이라는 데서 모든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인격신이라는 말은 곧 신이 우리 눈앞에 자신을 직접 계시한다는 말인데, 계시된 신의 존재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신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무상의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사람들은 그가 곧 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의 탄생과 죽음은 신의 인격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여기서 감각적 예술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즉 낭만주의 시대 예술은 신의 인격성과 마찬가지로 감각적 현상이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헤겔은 이를 곧 가상이라 규정한다.[5] 낭만주의 예술의 근본적 원리는 바로 감각적 가상이다.

헤겔은 예술은 이념의 가상이라고 규정하는데, 이 가상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낭만주의 예술에 와서이다. 이집트 예술은 신을 수수께끼와 같은 상징으로 표현한다. 그리스 신은 이상화 된 현상으로 출현한다. 낭만주의 시대 신은 자기 부정이라는 가상을 통해 출현한다. 예술의 개념 즉 이념의 가상이라는 개념은 상징과 현상을 거쳐 가상에 이르러 자기를 실현한다. 그러니 헤겔에서 예술은 고전주의가 아니라 낭만주의에서 완성된다고 하겠다.

 

5)

예술이 낭만주의에 와서 완성되었다고 하더라도, 예술이 낭만주의 시대 절대정신에 대한 유일한 표현이거나 최고의 표현은 아니다.

인격신은 가상을 통해 표현되더라도, 감각적으로 표현되는 한 한계를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예수의 탄생과 죽음은 사실 신이 현현하는 모습인데, 인간의 눈에 그저 자연적인 탄생과 죽음으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면서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경우이다. 헤겔이 예술이 ‘진리와 생명성을 상실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감각성이 지닌 이런 한계를 뜻한다. 

그러므로 낭만주의 시대에 헤겔은 인격 신을 표현하는 절대정신의 대변자로서 자격을 철학에 넘겨준다. 철학은 추상적 사유가 아니라 자기반성적인 사변적인 개념을 통해 인격 신을 표현할 수 있다. 이제 심지어 예술은 진리를 알고 있는 철학의 반성 대상이 되어 그 자리를 앞에서 인용 귀절에서 말했듯이 ‘표상 속으로 옮기니’ 여기서 ‘예술에 대한 학문’으로서 미학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이 죽은 왕의 후궁처럼 구중 궁궐에 숨어 지내야 한다 말은 아닐 것이다. 우선 철학이 인격신을 사변적으로 표현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사변적 개념에 기초한 철학은 헤겔 철학에 와서야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 추상적 사유에 기초한 철학 즉 근대철학보다는 차라리 예술이 낫다. 왜냐하면 예술은 비록 한계는 가지지만 가상을 통해 인격신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변철학이 등장하여 인격신을 표현하더라도, 이런 사변철학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들다. 헤겔이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말했듯이 사변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중들에게 사변철학보다는 예술이 훨씬 쉽게 인격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낭만주의 시대 끝에 이르러 사변철학이 등장하고 마침내 인격신의 비밀이 대중적으로 폭로된다면 예술은 어떻게 되는가? 헤겔은 낭만주의 예술형식의 발전 끝에 예술 자체의 종언을 제시한다. 이것은 흔히 과거성 테제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다른 논제이니 추후 살펴보기로 하자.


[1] 헤겔, 미학 강의 1, 이창환 역, 세창, 2020

[2] 헤겔은 1818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미학을 처음 강의한 이후, 베를린 대학에서 1821 겨울, 1823년 1826년 1828년 겨울 네 번에 걸쳐 강의했으나 자신의 강의를 출판하지 못하였다.

1831년 헤겔 사후, 헤겔 강의록 출판의 흐름 속에서 헤겔의 미학강의도 출판되었다. 미학강의는호토[H. G. Hotho]가 처음으로 1835년 편집하여 불멸자의 친우판 전집으로 발간했고 1842년 개정했다. 호토는 헤겔 자신의 베를린 시대 23년 강의 수고와 자신의 필기록을 대조하여 편집했다.

20세기 초 헤겔 부흥운동 중 1911년 이후 라슨 판 전집이 발간되는 가운데 라슨이 1931년 미학강의를 재편집하였다. 라슨은 1826년 강의의 필기록을 참조로 하여 호토의 판을 살펴본 결과, 호토가 생략하거나 표현을 왜곡한 부분이 다수 발견되어 재편집하였으나, 서문과 1부의 발간에 그쳤다.

그 이후 이어지는 헤겔 전집에서는 즉 70년대 수어캄프 판이나 펠릭스 마이너판까지 모두 호토판에 기초하였다. 1971년 부브너[R. Bubner]는 호토판을 불신하면서 라슨이 편집한 것을 재편집하여 미학강의를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안네마리 게트만 지페르트는 호토 판을 불신하면 강의 필기록에 기초하기를 주장했다. 니콜라스 헤빙[Nicholas Hebing]이 편집하여 2015년 발간된 헤겔 서고 판(펠릭스 마이너 출판사)은 제목조차 미학 강의가 아니라 예술철학 강의[Vorlesungen ueber die philosphie der Kunst]로 바꾸었고, 호토의 편집을 불신하고 강의 필기에 기초하여 편집조차 21년(미학), 23년(예술철학), 26년(예술철학). 28년(미학) 강의록이라는 방식으로 전개했다. 

현재 한국에서 번역된 두행숙 번역판(나남, 1996)이나 이창환 번역판(세창, 2022)은 모두 1970년 발간된 수어캄프 판 미학강의를 번역한 것이다. 헤겔의 강의 필기록은 개별적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서정혁은 미학강의-베를린 1820/21(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한동원은 헤겔 예술철학(미술문화, 2008), 권정임은 헤겔 예술철학 1826년 강의(세창, 2023)을 출판했다.

[3] 이 논쟁에서 최근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을 들라면 G. S 안네마리를 들 수 있겠다. 그의 주장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호토판 미학강의는 헤겔을 왜곡했다. ②여기서는 헤겔을 고전주의자로 간주하면서, 고전주의 예술작품에서 미의 이상은 완성되었다고 본다. ③중세 이후 고전적 이상의 잔재가 남아 있으니 르네상스 종교화와 고전 음악 정도이다. ④중세 이후 등장한 낭만주의 예술작품은 특징적인 것에 몰두하는데 이는 미적 이상으로부터의 후퇴이다.

안네마리는 호토판 헤겔미학을 혹독하게 평가하면서, 헤겔의 미학강의에 관해서는 학생들이 남긴 필기록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1826년 강의 필기록에 주목하는데, 이에 따르면 헤겔의 미학적 관점은 앞에서 제시된 것과 전혀 다르다.

①고전주의 시대 예술이 표현하려는 절대정신은 민족신이었으나, 낭만주의 시대 절대정신은 기독교적 신 즉 내재하는 신이다. ②헤겔 미학에서 상징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는 이념이 현존하는 방식의 차이를 주장한다. 각각에 고유한 미적 이상이 존재한다. ③고전주의는 미적 이념이 아름답게 현존하는 방식을 말한다. 낭만주의에서 미적 이념은 이념과 감각적 현존이 불합치하는 추의 방식으로 출현한다. ④구체적으로는 예를 들어 쉴러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데, 주인공은 윤리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좌절되면서 범죄자로 전락한다.

[4] 그러나 헤겔에서 낭만주의 예술 형식을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호토의 헤겔 미학강의가 왜곡되었다고 비판하는 안네마리조차도 이 점에서 분명하지는 않다. 그는 고전주의가 아름다운 감각적 현존을 제시했다면 낭만주의 예술형식은 추의 형식을 제시했다고 말한다.

무엇이 예술에서 추일까? 안네마리는 미가 이념과 감각적 형식의 조화, 합치라고 한다면, 추는 이념과 감각적 형식 사이의 부조화라고 한다. 하지만 이념이 어떤 형식이라도 갖는다면, 미와 추를 논할 수 있겠지만, 기독교 신은 이념은 아예 감각적 형상화가 거부되니, 무엇이 미이고 추인지를 알 수 없다. 

중세 고딕 신상을 보면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은 왜곡되고 과장되어 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절 신의 모습은 그리스 조각상처럼 이상화되어 있다. 전자가 낭만주의 예술이라면 후자는 낭만주의 예술이 아니란 말인가?

[5] 가상[Schein]이나 현상[Erschein]이나 똑 같이 빛난다[scheinen]는 말에서 나온다. 하지만 현상은 직접적인 것에 머무르며, 가상은 자기부정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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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미학 산책 1-미에 관한 철학이 가능한 것일까?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미학 산책 1-미에 관한 철학이 가능한 것일까?

 

1)

헤겔은 미학강의 서문에서 들어가자 마자, 미학이라는 학1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지금 대학에 미학과가 있으니 굳이 그 가능성을 문제 삼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매우 흥미로운 문제가 아닐까 한다.

예를 들어 미와 유사한 멋이나 맛의 학문이 가능할까? 물론 맛의 기술과 멋의 디자인이 전공[discipline]으로서 가르쳐지고 있으니, 학문이 아니라 할 수는 없지만, 헤겔에게 물어보았다면 아마 맛과 멋의 학문은 없다고 했을 것이다. 왜 헤겔은 멋이나 맛에는 학문이 성립하지 않지만 미에는 학문이 성립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일까?

 

2)

헤겔은 미학이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두 가지를 거론한다. 우선 예술은 생존이 걸린 문제가 아니라 맛과 멋처럼 일종의 잉여라는 주장이다. 예술은 진지함이 결여된 유희, 오락에 가까우니, 이를 위해 학문적 연구의 노고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우선 예술이 쓴 약에 감초를 넣듯이 예술이 감성과 경향성을 통해 이성과 의무의 부담을 덜어주니 그런 봉사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대표적으로 쉴러 같은 철학자는 예술은 진리를 감성적인 것을 통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주장했다. 헤겔은 그런 주장이 못마땅하다. 헤겔이 보기에 이는 이성과 의무가 지닌 순수성을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헤겔은 예술이 유희나 오락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예술의 신성함을 옹호한다. 즉 종교나 철학과 마찬가지로 절대정신에 속하는 등근원적인 것이라 한다. 예술은 절대정신의 감각적 현존으로서 절대정신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만 종교와 철학과 차이를 가질 뿐이다.

절대정신의 표현 방식에서 시대에 따라 예술, 종교, 철학 가운데 어느 하나가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그리스 시대 절대정신은 주로 예술을 통해 표현되었으니, 그리스 신화는 헤시오도스와 호머의 예술작품을 통해 창조됐으며 철학은 아직 예술의 생동성과 풍요로움을 따라갈 수 없었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게 되면 예술은 기꺼이 장식이 되고, 오락과 유희가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헤겔은 예술에 너무 과도한 가치를 부여했을지 모르겠다. 반면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예술이 그 자체로 사회의 혁명이며 인류의 구원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술을 신성시했다. 반 고흐의 예에서 보듯이 그들은 예술을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내던지기도 했으니 헤겔의 주장에 눈물지을지 모르겠다.

헤겔은 왜 예술에 절대정신이라는 엄청난 의미를 부여했을까? 절대정신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 점은 문제로만 제기하고, 미학이 불가능하다는 두 번째 주장을 살펴보자.

 

4)

두 번째 주장은 미학이 필요하더라도 다루어지는 대상의 성격상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미적 작품은 공통적으로 감각적 질료적 성격을 가진다는 데서 나온다.

예술작품에는 이런 성격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건축이나 조각 회화 음악은 물질적 수단을 이용하니 말할 것도 없다. 비물질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문학도 추상적인 것을 지칭하는 개념적 언어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지칭하는 감각적 언어가 사용된다.

예술작품의 질료가 되는 감각적 자연은 개별적이며 우연적으로 움직이다. 더구나 예술 작품은 자연적 산물에 머무르지 않고 자유롭게 산출되는 판타지로 가득 차 있다. 판타지는 자의적이니, 어떤 법칙적 규제도 이성적 목적에서도 벗어난다. 이런 예술작품에서 학문의 기초가 되는 규칙적인 것이나 합목적적인 것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연목구어(緣木求魚)가 아닐까? 그러니 예술작품은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서 자격 자체를 갖지 못하지 않을까?

사실 예술에 관한 많은 담론은 그저 주변적인 사실에 대한 소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언제 누가 어떤 동기로 이 작품을 만들었고, 누구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고, 뒤에 어떤 영향을 남겼다고 얼마에 팔린다는 둥, 자질구레한 사실을 많이 알수록 훌륭한 비평가로 행세하는 것이 현실이다. 거기에 약간의 주관적 감상이 덧붙여지는데, 좋았다는 감탄을 얼마나 다양하게 표현하는가가 훌륭한 비평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헤겔은 예술작품이 감각적 질료를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미학의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예술 작품의 감각적 질료는 예술의 내용인 절대정신을 표현하는 형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경험적 실재인 자연산물과 같이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우연과 혼돈의 지배 아래 있겠다. 하지만 예술작품은 자기 스스로를 통해서 자기를 부정하면서 절대정신을 표현하는 가상2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물론 예술작품의 가상성은 하나의 암시에 지나지 않으며 표면적으로 작품의 감각적 질료적 성격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예술작품은 항상 수수께끼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그럼에도 예술작품은 어떤 경우라도 이런 암시가 감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가상이다.

역설적이지만 헤겔은 예술작품의 가상성 때문에 미학의 가능성이 펼쳐진다고 본다. 예술작품의 자기 부정성을 통해 진리인 절대정신이 드러나니, 이를 통해 예술작품은 우연성을 벗어나 필연성으로, 경험적 실재를 넘어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예술작품이 단순한 감각적 자연이나 판타지가 아니라 자기 부정적인 가상이므로 오히려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5)

이런 점에서 헤겔은 예술작품을 역사와 비교한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 속에는 역사의 의미 즉 시대정신이 드러나 있다. 마찬가지로 감각적 예술작품에는 작품의 의미 즉 절대정신이 드러난다.

동시에 헤겔은 두 가지를 엄밀하게 구별한다. 역사의 경우 예를 들어 나폴레옹에게서 보듯이 구체적 사건을 일으키는 행위자는 자기 행위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행위 했을 뿐이다. 그 행위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역사적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예술작품에서 작가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자각적으로 노력한다. 그는 자기 작품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의 의미를 새겨놓는다. 그 때문에 작품은 가상성을 띠게 되는데, 관객이나 독자는 작품의 감각적인 측면을 따라가더라도 그 작품 속에 놓여 있는 작가의 암시에 따라서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작가가 작품 속에 어떻게 그런 암시를 새겨놓는가 하는 방식이 곧 장차 미학이 다루어야 할 대상이다. 이런 방식이 곧 예술작품의 역사적 형식과 장르의 개념을 이룬다. 헤겔의 미학 강의는 곧 이런 역사적 형식과 장르의 개념을 전개하는 데 있다.

 

6)

절대정신과 가상성이라는 두 개념은 헤겔 미학의 핵심 개념인데, 미학의 가능성을 설명하다 어느덧, 헤겔 미학의 기본 개념을 언급하게 되었다. 그 의미는 앞으로 상세하게 다루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오늘날 미학의 불가능성이라는 테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간략하게 언급하기로 하자.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은 미학의 불가능성이라는 문제를 헤겔 당시보다 더 심각하게 제시한다. 헤겔 당시에는 진리나 가치의 인식 자체가 부정된 적은 없다. 하지만 오늘날 후기구조주의의 등장 이후 진리나 가치의 인식 자체가 회의되고 있다. 미의 영역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진리나 가치가 사라졌으며, 예술은 기꺼이 오락이 되고 여흥이 되었다. 예술은 삶의 풍요한 잉여가 되기를 지향한다. 예술은 상품화되었다. 이런 사태 앞에서 미의 가치를 논하고 미와 진리의 관계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불필요해진 것이 아닐까?

1980년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 전성기를 누린 포스트모더니즘은 오늘날 후퇴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자체가 위기에 부딪히면서 다시 진리와 가치에 대한 열망이 되살아나고 예술을 신성시했던 모더니즘이 부활한다. 이런 흐름에서 본다면 헤겔의 미학을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대안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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