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는 저자 마리횬이 선정한 시 두 편과, 함께 들으면 좋을 두 곡의 음악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특히 호주 한인방송에 출연했던 마리횬이 직접 낭송한 시를 들어보면 시의 의미와 울림이 더 크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복잡하고 치열한 삶 속에서 몸과 마음을 이완시키고, 잊고 있었던 것에 대해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앞으로 2주에 한 번 마리횬이 안내하는 시의 오솔길을 따라 사색하는 여유를 가져보시길 바랍니다.
6월도 다 지나가고 이제 본격적인 여름의 시작입니다. 갑작스런 무더위가 계속되는 동안 햇빛은 뜨겁고, 마스크는 마스크대로 한층 더 답답하게 후끈거리는 숨을 몰아쉬게 만들었었는데요, 드디어 며칠간 반가운 빗줄기가 쏟아졌습니다. 비가 막 내리기 시작하니까 갑자기 가을이라도 된 것처럼 한낮에도 살짝 서늘하기까지 하더라구요. ‘아 여름이 이대로만 시원하게 지나갔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오늘은 앞으로 우리가 자주 만나게 될 ‘비’를 이야기하는 시를 함께 읽어볼까 합니다. 여러분은 혹시 비 좋아하세요?
저는 비를 좋아해요. 빗소리를 좋아한다는 것이 더 알맞을 것 같네요. 특히 비가 내려서 도로가 비에 젖었을 때, 그 위로 자동차가 달리면서 내는 “촤악~” 소리가 참 좋습니다. 밤에 그 소리를 들으면 마치 파도 소리처럼 들리기도 하는 거 아세요? 눈을 감고 듣고 있으면 해변가에 나와있는 것 같고 괜시리 기분도 좋아진답니다!
왠지 모르게 비 오는 날에는 조금 차분해지기도 하고, 비 오는 날만의 분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시가 바로 그런 분위기와 어울리는 시가 아닐까 싶은데요, 유안진 시인의 <비 가는 소리>입니다. 비가 ‘내리는’ 소리가 아니라, 비가 ‘가는’ 소리라니 약간은 생소하죠.
‘비 가는 소리’라면 비가 점차 그치기 시작할 때의 빗소리를 말하는 것일 텐데요, 내리는 비가 그치는 것을 보면서 과연 시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이 시를 통해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낮에 비가 내렸다면 당연히 빗소리가 들릴 것이고, 창 밖 풍경으로 빗줄기가 보일 테니 비가 오는 줄 모를 리가 없을 겁니다. 비가 오는 줄 몰랐다가 나중에야 ‘아, 비가 왔었구나’하고 알게 되는 것은 ‘밤비’뿐이겠지요. 이 시는 비가 그치고 있는 어느 날 밤, 화자가 잠을 깨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잠든 사이에, 내가 모르는 사이에 이미 내렸고, 이제는 서서히 그치고 있는 밤비를 보면서 시인은 문득, 온 줄 모르고 있다가 어느 새 가버리는 어떤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가는소리들리니왔던게틀림없지
밤비뿐이랴
젊음도사랑도기회도
오는줄은몰랐다가갈때겨우알아차리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정신 없이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벌써 6월이 다 가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듯, 이미 지나가버린 뒤에야 늘 아쉬움으로 남는 것들이 있죠. 우리의 젊음이 그렇습니다. ‘내가 10년만, 아니 5년만 더 젊었다면’하는 생각, 다들 한 번씩은 해 보셨겠죠? 이제 막 젊음을 누리는 10대나 20대초까지만 해도 알지 못했던 시간의 빠름을 그 때가 지나간 후에 점점 나이가 들면서 비로소 느끼게 됩니다.
또 누군가가 떠난 이후, 그 존재의 무게와 깊이가 얼마나 컸었는지 뒤늦게야 와 닿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일 수도 있고, 가족, 친구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감정일 수도 있어요. ‘그 사람이 없는 내 마음이 이렇게 허전한 것을 보니 그가 내 곁에 가까이 머물렀었구나’, ‘그의 존재가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 게 틀림 없구나…’라고 누군가가 떠난 흔적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 사람의 소중함을 알게 될 때가 있죠. 역시 한창 어리기만 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감정들 일겁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회’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눈 앞에 왔을 때 두 손으로 꼭 잡았어야 했던 것인데, 당시에는 소중한 줄 모르다가 지나쳐 버린 후에야 ‘그 때 시도해 볼 걸’, ‘….걸, …걸..’하며 후회하죠. 왜 진작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서야 이렇게 깨닫게 되는지..
이처럼 밤비가 지나가버린 뒤에야 비가 왔었다는 것을 깨닫는 새벽녘의 선잠처럼, 뒤늦은 아쉬움으로 남는 순간들이 우리 삶의 곳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아쉬움과 애잔함을 잘 표현해주는 단어가 이 시에서의 ‘불협화의 음정’이라는 말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가 음악을 듣거나 노래를 부를 때 듣게 되는 ‘화음’이 있죠. 음정이 딱 맞아 떨어지는 화음(협화음)은 듣기에도 안정적이고, 아름답고 편안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서로 어긋나고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의 음정은 불안하고 약간의 긴장감을 주고, 한편으론 아련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시인은 불협화음이 자아내는 그러한 아련하고 슬픈 느낌을 ‘가고 있는’ 빗소리를 통해 느끼고 있는 것이죠.
어느새가는소리가더듣긴다
왔던것은가고야말지
시절도밤비도사람도…죄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 소리 보다, 왔다가 떠나가는 빗소리가 더 들린다면, 어쩌면 이제 조금 더 성숙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모든 것은 “왔다가 가고야” 마는 것인데, 그것을 전혀 모른 채 아쉬움 없이 떠나 보냈던 수많은 날들, 젊음, 사랑, 기회들을 이제는 돌이켜보게 되었다는 것이니까요.
분명 비 가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에 대한 감수성이며 성찰이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놓쳐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에만 너무 지나치게 붙들려 있어서도 안될 겁니다. 오히려 이 시의 화자처럼, “왔던 것은 가고야 말지”라고 그것을 담담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우리의 남은 인생에서 어김없이 또 다시 비가 내릴 테니까요.
황동규 시인은 “즐거운 편지”라는 시에서,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치겠지만, 눈이 그치면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질 것이고 그러다가 또 눈이 퍼부으리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지금 눈이 그치고 마치 내 사랑도 끝난 것처럼 보이겠지만, 세월 지나 다시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눈처럼, 내 사랑 역시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기다림의 자세를 말해주고 있는 거 아닐까요? 유안진 시인의 <비 가는 소리>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눈을 떠 보니 어느 새 비가 그치고 떠나가고 있나요? 그 ‘비 가는 소리’에 잠시 귀 기울이신 후에, 다시 훌훌 털고 다음 번에 내릴 비를 기다려 보면 어떨까요? 내일이 될 지, 다음 주가 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반드시 다시 비가 내릴 겁니다. 그 때는 ‘비 오는 소리’도 반갑게 들을 수 있게 말이죠.
오늘 이 시와 어울릴만한 노래로 한영애 씨의 <바람>을 골라 보았습니다. 내리는 줄 몰랐다가 그쳐버린 비처럼, 곁에 있는 줄 몰랐다가 떠난 뒤에야 알아차리는 것들이 많다고 이야기 했었는데요, 우리 주위의 바람, 구름, 비가 되어 그대의 곁에 머물겠다는 가사가 한영애씨의 목소리를 만나 한층 더 마음에 와 닿는 노래입니다. 이번 주에는 비 소식을 기다려보면 어떨까요. 저는 2주 후에 또 좋은 시를 가지고 찾아올게요.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최근에 부쩍 더워진 날씨 탓에 ‘이제 진짜 여름이구나’하고 느끼게 되는데요, 여름의 계절이 찾아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더위 말고 하나 더 있습니다. 요즘 부쩍 나무 그늘이 많아진 것을 혹시 보셨나요? 자주 산책하는 공원을 거닐 때 3-4월, 아니 5월까지만 해도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걸었던 것 같은데, 며칠 전에 가보니 그 사이에 나무가 무성해져서, 어느 새 산책로에 나무그늘이 만들어졌더라구요. 푸르러진 나무들이 서로 맞닿아서 만들어낸 시원한 그늘을 보면서, 새삼 ‘아 여름이구나’하고 느끼게 됩니다. 어쩜 나무들은 늘 그 자리에 서서 무수한 겨울과 여름을 보내며 소리도 없이 자신만의 시간을 살아내는지. 그 나무들을 보면서 떠오른 시가 있어서 오늘 가져왔습니다. 정병근 시인의 시 ‘나무의 경지’입니다.
나무의 경지
정병근
그래도 그냥 서 있는 것이 더 좋았다
누구에겐가 가서 상처를 만들기 싫었다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부딪히지 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생을 죽도록 살고 싶었다
자신만의 생각으로 하루의 처음과 끝을 빽빽이 채우는
나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다
그게 한계다 치명적인 콤플렉스다
콤플렉스를 가진 나무는 아름답다
까마득한 세월을,
길들여지지 않고 설득 당하지 않고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 있는 그 한 가지로
마침내 가지 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한 경지에 이르렀다
많은, 움직이는, 지친 생명들이
그의 그늘 아래로 들어왔다
정병근 시인의 시 “나무의 경지” 들어 봤습니다. ‘경지’라는 말은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는 단어인데요, 사실 ‘경지’에는 세 가지 뜻이 있어요. 똑같은 한자[境地]를 쓰면서도 뜻이 조금씩 다릅니다. 첫 번째로는 ‘일정한 경계 안의 땅’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어떤 ‘경계’가 있는 ‘땅’이라는 뜻으로 ‘경지’가 되는 거죠. 두 번째로는 ‘학문, 예술, 인품 따위에서 일정한 특성과 체계를 갖춘 독자적인 범주나 부분’ 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완전 다른 뜻인 것 같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첫 번째 뜻에서 의미가 이어져서 나오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특성과 체계가 있는 독자적인 경계(범주)라는 뜻이니까요.
그렇다면 세 번째 뜻은 뭘까요? 세 번째 뜻은 아마도 여러분이 이 단어를 듣고 가장 많이 생각하셨을 법한 뜻으로, ‘몸이나 마음, 기술 따위가 어떤 단계에 도달해 있는 상태’ 라는 뜻입니다.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라고 할 때의 그 ‘경지’죠.
그런데 정병근 시인의 <나무의 경지>가 흘러가는 흐름과 이 ‘경지’라는 말의 세 가지 뜻이 신기하게도 맞닿아 있습니다. 이 시의 제목과 방금 설명 드린 ‘경지’의 세 가지 뜻을 잘 기억해두시면서 시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그냥 서 있는 것이 더 좋았다
누구에겐가 가서 상처를 만들기 싫었다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부딪히지 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생을 죽도록 살고 싶었다
이 시가 이렇게 시작하죠. “그냥 서 있는 것이 더 좋았다.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부딪히지 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혼자’만의 생을 죽도록 살고 싶었다”라고요. 이 첫 부분이 “일정한 경계 안의 땅”이라는 ‘경지’의 첫 번째 뜻과 연결됩니다.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상처를 만들기 싫어서, 아무에게도 가지 않고 부딪히지 않고, 상관하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일정 경계 안의 땅’에만 머물고 있는 나무의 모습이죠.
두 번째 연에서 “자신만의 생각으로 하루의 처음과 끝을 빽빽이 채우는/나무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다./그게 한계다. 치명적인 콤플렉스다….”라고 이어지는데요, 그런데 그 콤플렉스가 그저 콤플렉스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어서 시인은 “콤플렉스를 가진 나무는 아름답다”라고 말합니다. 콤플렉스가 아름다움으로 변하는 순간이자, 독자적인 그만의 영역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경지’의 두 번째 뜻, “학문, 예술, 인품 따위에서 일정한 특성을 갖춘 독자적인 범주나 부분”과 이어지죠.
일정 경계 안에 스스로를 세워 놓고 있는 나무를 ‘한계’와 ‘콤플렉스’를 가진 존재로, ‘이기적인’ 존재로만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치명적인 아름다움이 되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범주를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그 나무가 또 다른 경지에 이르면서 시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까마득한 세월을
길들여지지 않고 설득 당하지 않고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 있는 그 한 가지로
마침내 가지 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한 경지에 이르렀다
일정 경계 안에 있었던 나무의 경지, 그리고 특정한 독자적인 범주를 만든 나무의 경지, 그리고 이제는 다가가지 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나무의 경지. 이렇게 세 가지의 나무의 경지를 읽어 낼 수가 있습니다. 이 시는 형식적으로도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요, 어쩌면 시인이 시의 제목을 ‘나무의 경지’라고 하면서 이 세 가지 뜻의 경지를 모두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크게 세 부분으로 된 시는 마지막에 두 줄로 이렇게 끝납니다.
많은, 움직이는, 지친 생명들이
그의 그늘 아래로 들어왔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혼자만의 삶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보면 지독하게 이기적인 삶을 산 것인데.. 그런데 그것이 또 다른 매력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아름다움이 된다니… 이 시가 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무는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서서 어디로도 가지 않고, 가령, 춥다고 따뜻한 곳으로 가거나 덥다고 시원한 곳으로 움직이지 않고, 늘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면서 서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가지 않고도 누군가를 오게 하는 한 경지’에 이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어요. 이 시의 표현처럼 어쩌면 “까마득한 세월”이 걸릴 수도 있겠죠. 잠시 마음먹기는 쉬워도, 사실 그 마음가짐을 계속 고집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가 나를 좀 알아봐주기를 바라는 기본적인 욕심, 인정받고자 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먼저 나를 PR해야지만 살아남을 것처럼 삽니다. 그렇지 않으면 잊힐 것 같고,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남에게 먼저 다가가고, 다른 누군가의 취향에 맞추려고 나 자신을 바꿀 때도 있지 않은가요? 여론이 기우는 쪽으로 내 생각을 바꿔버리기도 참 쉽죠. 대세에 따르는 게 정답인 양, 그러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다는 불안한 심리를 가지고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이 시를 통해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나무처럼 한 자리에 가만히 있다는 것이, 어쩌면 요즘 같은 시대에 뒤쳐지고 잊혀지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지만, 내 자리를 올바르게 지키고, 그 자리에서 내 생각(가치관)을 가지고 뿌리 내리고 이파리를 키워 놓는다면, 마침내 많은 지친 생명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이르는 것이 진짜 ‘경지’이겠죠. 여기 저기 쫓아다니면서 내 생각도 없이, 그저 유행만 좇다가 올라간 자리는 결코 ‘경지’가 아니라 일시적인 ‘거품’일겁니다. 쉬우면 너도나도 다 경지에 오르겠죠.
여러분 각자가 겪어내고 공부하고 있는 자신만의 분야가 있을 테고, 첫 번째와 두 번째 뜻으로의 ‘경지’가 각자 하나씩 있을 겁니다. 그 자리에서, “길들여지지 않고, 설득 당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면서” 자신만의 ‘경지’에 오르시길 바랍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곡으로, 클래식 연주곡을 가져왔습니다. 영화 OST인데요,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레프 톨스토이의 삶과 말년을 다룬 영화 <The Last Station(2009)>에 삽입된 같은 제목의 연주곡입니다. 톨스토이야 말로 자신만의 경지에 오른 작가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싶어요. 물론 그의 삶이 도덕적으로 비판 받는 부분들도 있지만, 귀족으로 태어났음에도 농민의 계몽과 교육을 주장했고, 농민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으며, 귀족들의 부의 축적을 비판하는 문학활동을 하는 등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몸소 실천하고자 노력한 사람입니다. 톨스토이 자체도 그리고 그의 작품들도 모두 이 시에서 말하는 경지에 이른 것들이 아닐까요? 어쩌면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지금도 다시 찾고 있고, 그것을 통해 많은 깨달음과 위로를 받는 거겠죠. 이 영화의 ost도 참 아름답습니다. 마치 시원한 나무 그늘아래 들어와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곡인데요, 이 음악을 들으면서 정병근 시인의 <나무의 경지>를 다시 읽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오늘도 시원한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시가 필요한 시간, 열다섯 번째 시간으로 여러분을 찾아뵙니다. 오늘은 “이것도 과연 시가 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할 법 한 주제를 골라보았는데요, 바로 ‘스포츠’입니다.
스포츠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이미지들이 떠오르시나요? 저는 스포츠뉴스 시작 할 때 나오는 “딴딴딴! 뚜구뚜구…”하는 로고송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나고, 또 땀 흘리는 축구선수들, 질주하는 마라토너들 등의 이미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스포츠가 우리 인생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을 때도 분명 있어요. 9회말 2아웃의 상황에서 역전하는 야구 경기나, 42.195km를 쉼 없이 달려야 하는 마라톤 경기를 보면 인생의 희로애락이 다 담긴 것이 바로 스포츠라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이 스포츠를 가지고도 시를 쓴다는 것은 왠지 전혀 다른 이야기인 것 같지 않나요? 고독하게 앉아서 사유하고 감상하는 ‘시’하고 스포츠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죠?
하지만 오늘 제가 준비한 시를 들어보시고 “와, 이런 것도 시가 될 수 있구나” 느낄 수 있길 바라봅니다. 오늘 들려드릴 시는 권순진 시인의 시 <낙법>입니다.
너무 기본적인 내용이라 굳이 사전을 찾지 않아도 낙법이 뭔지는 잘 아실 겁니다. 벌써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들이 있죠. 그런데 이 ‘낙법’도 시가 될 수 있을까? 권순진 시인의 시 ‘낙법’, 들어 보시죠.
낙법
권순진
유도에서 맨 먼저 익혀야 할게 넘어지는 기술이다
자빠지되 물론 상하지 말아야 한다
며칠 생각에 앞서 패배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훈련
거듭해서 내동댕이쳐지다 보면 바닥과의 화친이 이루어진다
몸의 접점이 많을수록 몸은 안전해지고
나아가 기분 더럽지 않고 안락하기까지 하다
탁탁 손바닥으로 큰소리 장단 맞춰 바닥에 드러눕는 것이
더러는 보는 이에게도 참 흐뭇하다
머리를 우선 낮추고 몸을 둥글게 말아 구르니
넘어진들 몸과 마음이 상할 리 없다
어깨에 얹힌 힘을, 발목에 달린 힘을, 모가지에 붙인 힘을
죄다 빼고 헐거워져서야 마음도 둥글어진다
그때서야 엉덩살은 왜 그리 두껍게 붙어있는지
넘어지고서도 다시 일어서야 할 생각은 왜 솟아나는지
누운 자세에서 깨달으며 무릎 세운다
권순진 시인의 시 <낙법> 들어 보았습니다. 나와 아무 상관이 없을 것만 같았던 낙법을 시로 만나니 마치 우리의 인생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낙법’에 대한 설명을 조금 더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나오는데요,
“메치기의 연습에 들어갈 때는 먼저 낙법연습부터 하는 것이 순서이다. 낙법을 충분히 익혀 두면, 메치기를 당하는 그 자체에 신경을 덜 쓰기 때문에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다. 따라서 낙법의 연습은 메치기 기술의 기본이 될 뿐만 아니라 자유자재의 몸놀림에 익숙해지므로 유도기술 훈련에 있어 가장 기초가 될 수 있다.”
다른 어떤 기술보다도 먼저 배워야 할 것이 ‘넘어지는’ ‘기술’이라니. 아이러니하게 들리죠? 그리고 “넘어지는 것을 충분히 익혀 두어야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간단합니다. 낙법으로 넘어지는 것을 충분히 익혀 두면, 메치기를 당하더라도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누울 수 있고, 그렇게 되면 메치기 당하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게 될 테니까, 결과적으로는 내 공격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그저 넘어지는 것에 다름없어 보였던 낙법이 유도에 있어서 가장 기초가 되고, 뿐만 아니라 모든 공격에 앞서 가장 중요한 ‘기술’이 되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 가장 짜릿한 부분은 시의 마지막 부분에 나와요.
머리를 우선 낮추고 몸을 둥글게 말아 구르니
넘어진들 몸과 마음이 상할 리 없다
어깨에 얹힌 힘을, 발목에 달린 힘을, 모가지에 붙인 힘을
죄다 빼고 헐거워져서야 마음도 둥글어진다
그때서야 엉덩살은 왜 그리 두껍게 붙어있는지
넘어지고서도 다시 일어서야 할 생각은 왜 솟아나는지
누운 자세에서 깨달으며 무릎 세운다
여러 사람들과 사건들을 겪으며 살아갈 때, 이 시의 표현처럼 때로는 머리를 낮추고, 몸을 둥글게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꼿꼿하게 굽히지 않고 곧게 고집하는 것이 때로는 내 자신에게 오히려 더 큰 상처가 될 때가 있죠. 머리를 낮추고 몸을 둥글게 말아야지만 넘어지더라도 몸이 상하지 않는 유도의 낙법기술처럼, 때로는 어깨에 얹힌 힘을, 발목에 달린 힘을, 목에 붙인 힘을 빼고 둥글어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안전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 시에서 그저 넘어지고 쓰러진 채로 끝이 아니라, 넘어지고서도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이 솟아나는 사람, 굳건하게 무릎을 세우는 한 사람의 모습을 봅니다. 비록 넘어졌더라도, 그렇게 넘어진 채로 계속 드러누워 버린다면 그 채로 끝이겠지만, 그게 아니라 넘어졌던 자세에서 다시금 굳게 무릎을 세운다면 이제는 다시 Get ready, 공격 시작인 것이죠. 넘어지는 것이 패배하는 것만 같고 힘없는 모습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이 내 쪽에서 가장 기초가 되고 기본이 되는 ‘공격의 기술’이라는 것. 이 ‘낙법’이라는 시를 통해 배워 봅니다.
오늘 시가 필요한 시간, 이 시와 함께 들을 노래로 영화 ost 를 가져 왔습니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과 남아공 럭비팀의 실화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인빅터스(Invictus)’의 ost 중 한 곡 ‘colorblind’입니다. “난 끝날 때까지 일어날 거야. 난 다시 하늘을 볼 거야. 난 쓰러져도 기도할거야. 난 바닥에 있지 않을 거야.” 라는 가사는 권순진 시인의 시와도 잘 어울리는 가사죠.
이 영화는 스포츠영화로 분류가 되는데요, 영화 장면 중에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27년간의 수감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자신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은 다름 아닌 한 편의 ‘시’였다는 것을 발견합니다(어떤 시인지 영화 속에서 찾아보세요!). 그 시는 럭비팀 주장을 비롯해 패배감에 젖어있던 많은 팀원들에게 용기를 주는 동기부여가 됩니다. 시와 스포츠가 만나는 순간이죠^^
어제 하루, 혹시 머리를 낮추고 몸에 힘을 푼 채로 그만 넘어져 버렸다면, 이제 여러분의 두툼한 엉덩살로 버티고 무릎을 세울 차례입니다. 넘어질 때 안전하게 넘어져야 다음 공격의 기회를 얻습니다. 인생의 낙법을 통해 Get Ready하시는 오늘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어버이날을 기념해서 글을 쓰고 싶었는데, 한 주 미루다 보니 조금 늦어버렸네요. 더 늦기 전에 소개해드릴 시가 있어 가져왔습니다. 고두현 시인의 <늦게 온 소포>입니다.
늦게 온 소포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이 풀다 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 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을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 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 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요즘 웬만한 물건들은 가까운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온라인 쇼핑몰도 구성이 잘 되어 있어, 전자기기, 식품 등 다양한 상품들을 주문당일이나 다음날 새벽에 샛별처럼 빠르게 로켓과도 같은 속도로 받을 수가 있죠. 얼마나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여기, 늦게 온 소포 하나가 있습니다. 남해에 사시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소포입니다. 행여 어디 부딪혀서 생채기라도 날까, 유자 아홉 개를 싸고 또 싸고 무명실로 겹겹이 감아 조심조심 포장해서 보낸 소포를 봅니다.
어머님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시 제목에서 분명 “늦게 온” 소포라고 시작했지만, 다름아닌 어머니가 보낸 것임을 아는 순간, 밤 늦게 받은 소포는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을 만큼 재빨리 날아 온 소포가 됩니다.
시의 화자는 겹겹으로 동여맨 매듭에서 어머니의 주름진 손마디를 읽어내고, 속에 것보다도 더 무겁게 포장된 마분지에서 겹겹이 쌓인 두터운 어머니의 마음을 보아냅니다. 포장된 종이를 한 장 한 장 벗겨낼 때마다 나의 낯선 서울 살이, 분주한 생활의 겉꺼풀도 하나씩 벗겨지는 것을 느끼죠. 그리고 마치 그런 자녀의 마음을 다 알고 있는 듯한 어머니의 쪽지가 눈앞에 툭 떨어집니다.
마치 실제 어머니의 쪽지를 마주하는 듯, 시의 원문에는 어머니의 말투로 된 시행이 고스란히 삽입되어 있습니다. 서툴고 맞춤법도 안 맞는 촌스러운 편지, 투박하게 싸맨 유자, 빠르고 편리한 흐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늦게 온 소포…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나에게 더 큰 위로를 주는 듯 합니다.
헤쳐 놓았던 몇 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어머니가 한지더미로 꽁꽁 싸서 보낸 것은 사실 유자가 아니라, 혹시 내 아들 딸이 바빠서 챙겨먹지 못할 까봐, 그저 몸에 좋은 거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어머니의 사랑이었겠죠. 유자를 포장했던 종이들을 버리려고 접었다가, 어머니 생각에 다시 펼쳤다가… 접었다 펼쳤다 하는 그 손길에서 어머니를 향한 말 못할 그리움이 묻어납니다. 그리고 새벽에 내려 녹고 있는 눈을 핑계 삼는 시인의 눈물도 엿볼 수 있습니다.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이 마지막 연에서 나타나는 눈물은 슬픔, 쓸쓸함, 외로움의 눈물이 아니라,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아 흘리는 눈물,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지 않을까요?
이 시를 읽으며 함께 생각난 시 가운데 이대흠 시인이 쓴 <어머니라는 말>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에서 시인은 “어머니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입이 울리고 코가 울린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가만히 살펴보면 ‘어머니’라는 단어에는 한국어의 비음에 해당하는 자음 ㅇ,ㅁ,ㄴ이 들어있습니다. 비음은 공기가 코로 나가서 코를 울려서 내는 소리를 뜻하는데, 이 세 가지 비음이 모두 사용되고 있는 단어가 바로 ‘어머니’인 것이죠. 어쩌면 그래서 “엄마”라고 입으로 부르기만 해도 우리의 콧등이 시큰거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원한 그리움이자 영원한 울림의 이름, ‘엄마’, ‘어머니’…
오늘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이설아의 <엄마로 산다는 것은>이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몇 년 전 “K-pop Star”라는 프로그램에서 자작곡으로 소개가 되었던 짧은 노래인데요, 가사가 참 가슴 먹먹해지는 노래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린 <늦게 온 소포>와도 잘 어울리고, 어버이날을 지내면서 많이 생각난 노래이기도 합니다. 5월이 지나가기 전에, 우리의 부모님께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꼭 전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2주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요즘 부쩍 거리의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붙잡고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꽃의 향기가 참 좋죠. 향수를 뿌려야만 향기를 가질 수 있는 인간과는 달리, 꽃은 스스로 향기를 내뿜는다는 게 새삼 놀랍습니다. 인간이 뿌린 향수는 아무리 짙은 향수라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 향이 사라지기 마련인데, 꽃은 피어 있는 동안 심지어는 말라서까지 그 향기를 간직하고 사니까, 지워지지 않는 향기를 가지고 있는 존재인 셈이죠.
우리 인간에게는 없는 향기. 이 향기가 꽃에게는 있는 이유가 뭘까? 오늘 소개해 드리는 시를 읽으며 한 번 생각 해 보시죠.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이해인
꽃들이 한데 어우러진
이 고운 자리에
꽃처럼 순하고 어여쁜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겸허한 눈길로 생각을 모으다가
사람을 만나면
환히 웃을 줄도 아는
슬기로운 꽃
꽃을 닮은 마음으로 오십시오
꽃 속에 감추어진 하늘과 태양과
비와 바람의 이야기
꿀벌과 나비와 꽃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
꽃이 좋아 밤낮으로
꽃을 만지는 이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들으며
기쁨을 나누는 우리의 시간도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 날수 있도록
기다림의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열매를 위한 아픔을 겪어
더욱 곱게 빛나는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이해인 시인은 시인이자 수녀님이시죠. 그래서인지 시인의 시를 읽을 때마다 깨끗하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시에서는 ‘꽃마음’이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요, 시인이 우리에게 가지길 원하는 이 ‘꽃마음’이 무엇일지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있어야 할 제자리에서
겸허한 눈길로 생각을 모으다가
사람을 만나면
환히 웃을 줄도 아는
슬기로운 꽃
꽃을 닮은 마음으로 오십시오
시인은 꽃에게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겸허한 태도를 엿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느 화려한 꽃이라도, 또 어느 담벼락의 볼품없는 꽃이라 하더라도 “내가 왜 여기 있어야 하느냐”고 불평하는 법이 없죠. 있어야 할 자리에서 겸손하게 자라나고, 그리고 때가 되면 활짝 피어 납니다.
꽃속에 감추어진 하늘과 태양과
비와 바람의 이야기
활짝 핀 꽃 속에는 하늘과 태양, 비와 바람의 이야기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꽃 한 송이가 피기 위해서는 뜨거운 태양빛도 받아야 하고, 거센 빗줄기도 속절없이 맞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더위와 추위, 외로움, 또 바람 불 때의 아픔.. 꽃이 피어 나려면 그 모든 것을 오롯이 견뎌내야만 하죠.
뿐만 아니라, 꽃을 피우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손길도 있습니다. 농장에서 혹은 가정에서 꽃을 기르고 키우며 정성을 다 했던 사람들의 어루만짐의 시간들도 한 송이의 꽃 속에 들어 있겠죠.
그 긴 시간들을 감내했기 때문에 지금의 꽃이 있는 것일 텐데, 활짝 핀 꽃송이만 봐서는 그런 모든 시간들을 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들의 이야기가 꽃 속에 감춰져 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결코 쉽게 피는 꽃은 없기 마련이고, 그렇기에 ‘기다림의 꽃마음’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기쁨을 나누는 우리의 시간도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 날수 있도록
기다림의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그런 기다림의 꽃마음을 우리에게도 가지고 살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쉬운 인생이란 없잖아요. 꽃이 그러했듯 우리도 향기로운 삶으로 피어나려면, 견뎌내야 할 것들을 견디고, 겪어야 할 연단을 겪으며, 피어날 시간을 기다릴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사실, 열매가 열리려면 먼저 꽃이 져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배운 잘 아는 상식이죠. 시인은 그 부분까지도 고찰해냅니다.
열매를 위한 아픔을 겪어
더욱 곱게 빛나는
꽃마음으로 오십시오
시인이 보아낸 또 하나의 꽃마음은 열매를 위해서 나를 희생할 줄 아는 마음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져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매년 곱게 빛나는 꽃의 마음, 주어진 삶의 순간에 최선을 다 하는 겸손과 만족의 꽃마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하겠죠.
이 시에서 말하는 꽃마음들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 마음을 가지고자 매 순간 노력한다면 그러한 삶이 정말 향기 나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는 이문세의 <꽃들이 피고 지는 게 우리의 모습이었어>라는 곡입니다. 마이너 코드와 메이저 코드가 번갈아 진행되는 것이, 마치 평탄치만은 않은 우리의 인생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그 위로 흐르는 아름다운 멜로디는, 마치 어려움 속에서도 피어나고야 마는 아름다운 꽃처럼, 굴곡진 우리의 인생 속에도 분명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봄날에 참 어울리는 곡입니다. 시와 노래와 함께 오늘도 향기로운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무언가를 빌다’라는 뜻의 한자어, 빌 기(祈)에 빌 도(禱)로 이루어진 말, ‘기도’입니다. 종교의 유무에 따라 어쩌면 자칫 거부감이 들 수도 있는 단어일 텐데요, 그런데 이문재 시인의 시 <오래된 기도>에서는 조금 다른 ‘기도’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하는 것들을 보면, “어떻게 저런 게 기도가 될 수 있지?” 라고 반문이 드는 것들이 있죠. “음식을 오래 씹는 게 기도하는 거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됩니다.
이 시에서 ‘기도’라고 말하고 있는 행동들을 가만히 살펴 보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다름아닌 ‘잠시 멈춤의 상태’, 곧 일상의 빠른 흐름에서 순간의 시간, 일부의 시간을 떼어내는 행위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노을이 지는 때라면 곧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찾아왔음을 의미합니다. 어제와 똑같은 하루로 오늘을 보내버리기 전에, 잠시 멈춰 노을을 한 번 바라본다면, 그 짧은 순간만큼은 잠시 하루를 돌아 볼 시간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음식을 오래 씹는 것 역시, 별 의미 없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한 번쯤 천천히 음식을 오래 씹는다면, 아무래도 그 순간만큼은 잠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조금이라도 갖게 되지 않을까요? 그런 어떤 ‘멈춤의 상태’, 마구 흘러가 버리는 시간에 잠시 ‘매듭’을 지어보는 것. 시인은 그러한 시간이나 순간들을 ‘기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또한 관심 없이 지나가버릴 수 있는 사소한 존재, 생명, 주변의 자연에 한 번 더 따뜻한 눈길을 주는 것 역시 ‘기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 버스에서 혹은 길에서, 아이들에게 눈 마주쳐 준 적 있으신가요? 피어있는 꽃을 잠시 바라보셨나요? 그럼 여러분도 기도를 하신 겁니다^^
이 시를 읽고 나면 기도라는 것이 과연 어떤 거창한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며,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오래 전부터 우리 주변에 숨쉬고 있었던 기도의 순간들. 그래서 시인은 이 기도를 ‘오래된 기도’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한 순간에도 이미 이 오래된 기도를 해오고 있었던 것 아닐까요?
한병철 교수의 <시간의 향기(문학과지성사, 2013)>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오는데요, “최고의 행복은 아름다운 것 곁에 사색에 잠겨 머무르는 데서 생겨난다. … 완전히 자기 안에 고요히 있는 사물을 바라보는 것. 진리에 대한 사색적 헌신. 이것이야 말로 인간을 신의 곁으로 데려간다.”
한병철 교수가 말하는 ‘사색적 헌신’은 이문재 시인의 시 속에 담긴 여러 모양의 ‘오래된 기도’와 결코 다르지 않을 겁니다. 아름다운 것 곁에 잠시 머무르는 것, 사색에 잠기는 것이 바로 우리가 누려야 할 최고의 행복이며, 우리들에게 필요한 오래된 기도인 것이죠.
어떻게 한 주가 흘렀는지 모르게 벌써 주말을 맞이하고, 어느새 4월이 시작되었고…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끼는 이유, 모든 것이 점점 가속도가 붙은 듯 흘러가버리는 이유. 한병철 교수의 표현을 빌면, 흘러가는 시간을 묶어주는 ‘사색적 헌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지금이 우리 삶에 기도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외출도 자제하게 되고, 어쩔 수 없는 멈춤의 시간이 계속되고 있죠. 한 편으로는 그 동안 우리가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것들, 곧 친구와 만나 나누는 소소한 일상의 대화나, 반가운 얼굴들과의 악수, 계절마다 걸었던 벚꽃길 등.. 아무렇지 않게 누렸던 일상들이 이제 와 보니 매우 소중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 멈춤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여전히 바쁜 하루, 분별없이 흘려 보내는 오늘을 살고 계신가요?
내일은요 잠시 가만히 눈을 감아 보시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보시고, 또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도 불러보고, 노을이 질 때 잠시 걸음을 멈춰 보고, 갓난아기와 눈도 맞춰보고, 차를 타지 않고 한 번 걸어도 보고, 고개를 들어 잠시 하늘을 바라 보는… ‘오래된 기도’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이문재 시인의 ‘오래된 기도’와 함께 들어볼 노래 소개해드릴게요.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 ost 중 <나의 피아노> 라는 곡, 이병우 기타리스트의 연주로 들으면서 잠시 머무르는 것, 사색적 헌신의 시간을 한 번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2주 후에 찾아오겠습니다.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코로나19로 여전히 많은 것들이 연기되고 멈춰 있지만, 가까이에 다가오는 봄기운마저 막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곳곳에 산수유의 노란 꽃망울이 올라왔고, 햇빛 비치는 곳에 서 있으면 따스함이 은은하게 느껴지는 ‘봄’이 성큼 눈앞에 와 있네요. 아직 바람은 조금 차갑긴 하지만 말입니다.
봄을 기대하면서, 오늘 함께 읽을 시는 김종해 시인의 <그대 앞에 봄이 있다>입니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
김종해
우리 살아가는 일속에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게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 쳐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 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인생을 이야기 하거나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을 비유적으로 이야기 할 때,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으로 비유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도 인생을 항해로 표현했죠. 문득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도 생각이 납니다. 또 어떤 중요한 결단을 내린 후에 “우리 이제 한 배를 탄 거야”라고 말하는 것도 들어본 적이 있으실 겁니다.
그런 비유가 이 시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인생은 항해다’라는 표현을 하진 않지만, “우리 살아가는 일속에/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어디 한두 번이랴”라고 하는 표현에서 그 비유가 드러나고 있죠.
우리가 살아가는 일속에는 기쁜 일도 많이 있지만,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일도 많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에게 오해를 받기도 하고, 내가 열심히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죠. 생각해보면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한 두 번이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럴 때, 그 파도에 흔들리면서 그 주체할 수 없는 기분에 나를 놓아버리지 말 것을 시인은 당부합니다. 오히려 그런 날은 ‘닻’을 내리라고 말하고 있죠.
우리 살아가는 일속에
파도 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 두어야 한다
닻을 내린다는 건 배를 움직이지 않게 하기 위함인데요, 성난 파도가 일고 바람이 마구 부는 상황에서 배를 그냥 놔둔 채로 계속 항해를 한다면, 아무리 큰 배라고 하더라도 여기저기로 휩쓸려 버릴 것이고, 원래 가려고 했던 방향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떠내려가게 될 겁니다.
그렇게 다 떠밀린 후에 그제서야 다시 원래 가려고 했던 방향을 찾으려면 여간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시인은, 내가 이리저리 흔들릴 것만 같은 그런 날에는 조용히 닻을 내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이 ‘닻’의 의미에 대해서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배를 고정시켜주는 닻을 살펴보면 무게는 상당하지만 크기가 꽤 작습니다. 배보다 큰 닻 본 적 있으세요? 평소에는 배에 싣고 다녀야 하니까 배의 몸체보다는 훨씬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훨씬 작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몇 십 배의 큰 배를 고정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닻이죠. ‘배’가 ‘나 자신’을 의미한다면, ‘닻’은 ‘작지만 나를 지탱해줄 힘이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배마다 닻이 하나씩 있듯이, 내가 흔들릴 때 나를 잡아줄 수 있는 이 ‘닻’과 같은 작지만 큰 무언가가 우리 모두에게 하나씩은 있다는 의미로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닻’과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은 뭐가 있을까요? (친구와의 전화 한 통, 부모님의 격려의 말 한마디,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 시 한 편, 맛있는 커피 한 잔 등 여러분 각자에게 무엇이 ‘닻’이 되는지 한 번 생각 해보세요)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뜻하지 않게 만나는 파도와 같은 일들, 바람과 같은 일들이 없을 수는 없겠죠. 그럴 때 그 파도와 바람에 흔들려 방향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닻을 내리시고 그 일들을 잠시 묻어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파도가 지나고 바람이 멎었을 때, 그때 다시 내 방향대로 나아가면 되는 거예요. 분노가 치미는 일이나, 짜증나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을 때, 괜히 애꿎은 다른 사람에게 그 화를 풀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요, 본의 아니게 괜한 사람에게 상처 주는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그 순간 잠시 한 숨 쉬어 가면서 내 마음 속에 닻을 내리는 겁니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그러면 나만 바보같이 참으라는 얘기냐!”라고 말이죠. 똑같이 짜증나는 상황에서 누군가는 나에게 상처를 줄 텐데, 나만 닻을 내리고 참으라는 거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요, 그럴 때 시인은 마지막 연으로 우리에게 이야기 합니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시인은 사랑하며 산다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상처받고 또 상처 줄 수 밖에 없는 삶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습니다.
겨울은 오게 되어있는데, 춥다고 아무리 불평해봤자 그만큼 시간이 빨리 흐르지도 않아요. 더 춥게 느껴질 뿐이죠.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도 ‘겨울’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을 텐데요, 시인은 우리의 삶에 있을 그 아픔과 상처의 시간들을 덤덤하게 위로하고 있습니다. 모두의 시간은 흐르게 되어 있는데, 그 시간 동안 나는 파도에 휩쓸려 더 긴 시간을 돌아 올 것인가, 닻을 내리고 내 방향을 지키며 그 시간을 버틸 것인가. 선택해야 하겠죠.
추운 겨울 다 지내고
꽃 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지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나요? 여러분 배의 닻을 내리고 그 시간들을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이 지나면 이제 곧 봄의 시간이 여러분 앞에 다가올 겁니다.
오늘 이 시와 함께 들려드릴 노래로, 홍이삭의 ‘봄아’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이 곡은 홍이삭이 제 24회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동상을 수상했던 곡인데요, 따뜻한 목소리와 가사가 봄기운을 느끼게 해 주는 곡입니다. <그대 앞에 봄이 있다>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과 잘 어울리는 것 같죠? 여러분, 조금만 더 힘 내시기 바랍니다! 꽃 필 차례가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그대 앞에 봄이 있습니다.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요즘 서로 거리를 두어야만 하고, 불필요한 외출도 삼가야만 하는 유례없는 시간을 살아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예민하고 불안하죠. 매일 TV와 신문을 뒤덮는 뉴스들에 촉각을 세우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강하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아무래도 ‘두려움’이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두려움에 정복당하지 않고 그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될 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눠보고 싶습니다. 바로 박노해 시인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라는 시입니다.
박노해 시인의 프로필을 찾아보시면 시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는데요, 박노해 시인은 군사정권 때에 반국가단체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1998년 김대중대통령의 특별사면을 통해서 석방된 시인입니다. 그 이후 시인은 시집 출간을 뒤로하고 약 12년 동안 아프리카, 중동 등 세계의 빈곤 지역과 분쟁 현장을 돌면서 사진과 시를 남기는 활동을 시작했고, 그 시들을 모아서 12년 만에 신작으로 출간한 시집이 바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라는 제목의 시집이었습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시는 동명의 시집에 실린 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입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
안데스 산맥의 만년설산 가장 높고 깊은 곳에 사는 께로족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희박한 공기는 열 걸음만 걸어도 숨이 차고 발길에 떨어지는 돌들이 아찔한 벼랑을 구르며 태초의 정적을 깨트리는 칠흑 같은 밤의 고원
어둠이 이토록 무겁고 두텁고 무서운 것이었던가 추위와 탈진으로 주저앉아 죽음의 공포가 엄습할 때
신기루인가 멀리 만년설 봉우리 사이로 희미한 불빛 하나
산 것이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을 것이다
세계 속에는 어둠이 이해할 수 없는 빛이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거대한 악이 이해할 수 없는 선이 야만이 이해할 수 없는 인간정신이 패배와 절망이 이해할 수 없는 희망이 깜박이고 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세계의 모든 어둠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 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네, 박노해 시인의 시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들어봤습니다. 메시지의 울림이 큰 시죠. 시인이 직접 경험했던 사건을 시로 표현한 것이어서 그런지, 한 장면 한 장면이 눈 앞에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뒤덮인 산속을 혼자 가고 있다고 한 번 상상해 볼까요? 앞도 잘 보이지 않아 두려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천천히 내딛는데, 저 멀리서 작은 불빛이 하나 나타난다면..! 얼마나 반갑고 기쁠까요?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던 찰나에 나타난 불빛은, 아무리 작고 희미하더라도 그 순간 그 어떤 빛보다도 더 강렬하고 강력한 생명의 빛으로 다가올 겁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어둡고 두려운 때가 분명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코로나19사태 뿐만 아니라, 그 동안 겪어왔던 어떤 인간관계의 문제, 학업의 문제, 취업, 경제상황, 가정문제 등 답답한 사건들 앞에서 ‘내 인생은 왜 이렇지?’ ‘난 어디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거지?’ 하고 고민하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누군가는 돈이 없어서, 누군가는 나이가 너무 많아서 또 누군가는 자신감이 부족해서 등등, 각자 자신의 능력의 한계점을 만나고, 그것 때문에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는 암흑과도 같은 상황을 만날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인은 당장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어둠, 나를 짓누르는 그 커다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내게 필요했던 것이 결코 거대한 어떤 것이 아니었음을, 그저 작은 불빛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음을 눈 앞에서 깨닫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 길을 잃은 우리를 부르는 께로족 청년의 호롱불 하나
이렇게 어둠이 크고 깊은 설산의 밤일지라도 빛은 저 작고 희미한 등불 하나로 충분했다
그런데 우연히 등불을 들고 그 길에 있었던 케로족 청년은 자신의 등불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큰 의미가 될 줄 알았을까요? 아마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청년의 불빛은 겨우 주변 1미터 반경 정도만 밝힐 법한 희미한 호롱불에 불과했죠. 호롱불을 가지고 숲의 어둠을 다 밝히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니, 어쩌면 케로족 청년도 덜덜 떨면서 그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청년이 그 등불을 갖고 그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에 절망에 빠져있던 한 사람을 지켜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계가 칠흑처럼 어둡고 길 잃은 희망들이 숨이 죽어가도 단지 언뜻 비추는 불빛 하나만 살아 있다면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을 것이다
제가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가 2017년이었는데요, 한국에서는 국정농단 사건과 대통령 탄핵이 벌어지고 있었고, 당시 저는 호주에서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호주와 비교되는 비효율적이고 공평하지 않은 우리나라의 사회 시스템을 보며 답답한 마음이 들던 차에, 국정농단 사건까지 터지면서.. ‘앞으로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까’ 실망하고 절망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이 시를 읽고 스스로 많은 힘을 얻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는 ‘결코 굴복시킬 수 없는 한 사람이 살아 있다면/저들은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패배한 것이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큰 메시지를 읽고 감동을 받았었죠.
여러분은 이 시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으셨나요?
저는 이번에 다시 한 번 이 시를 읽으면서, ‘나의 등불’을 가지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등불’이란 뭘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 볼 때, 나의 ‘지식’일 수도 있고, 내가 가진 ‘물적 재산’, 나의 ‘경험’, 혹은 나의 ‘능력’ 등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또 ‘내가 맡은 어떤 사명’이라고 생각해 볼 때, 각자가 맡은 직업이나 역할, 각자가 지켜야 할 규칙이 될 수도 있겠죠. 내 눈으로 볼 때는 그것이 보잘것없고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내 자리에 서 있을 때, 케로족 청년의 ‘희미한 빛’이 박노해 시인에게 ‘희망의 빛’이 되어 준 것처럼, 나의 작은 ‘등불’이 어둠 속에 두려워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생명의 빛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토록 강력하고 집요한 악의 정신이 지배해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희미한 등불로 서 있는 사람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무력할지라도 끝끝내 꺾여지지 않는 최후의 사람
최후의 한 사람은 최초의 한 사람이기에 희망은 단 한 사람이면 충분한 것이다
이 시의 표현처럼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에, 만약 여러분이 희미한 등불로라도 자기 영혼을 잃지 않고 서 있는다면, 끝내 꺾여지지 않을 한 사람으로 존재해 준다면, 바로 여러분이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다면, 우리의 희미한 등불은 어둠을 이길만한 넉넉한 빛이 될 겁니다. 그렇기에 시인은 말합니다.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그대가 아무리 작은 불빛이더라도.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그대, 희미한 불빛만 살아 있다면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나의 등불이 희미해 보이나요?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고,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자리에서 나만의 등불을 밝히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등불을 밝히십시오. 여러분의 불빛이 어둠에 갇혀있는 누군가에게는 희망이요 생명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이 시기에, 서로를 향한 격려와 사랑의 말을 건네는 것도 칠흑 같은 어둠에서의 밝은 불빛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는 만큼, 마음으로 서로에 대한 관심과 격려를 더 쏟아야 하지 않을까, 더욱 열심히 전화와 메시지로 서로의 안부를 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삶은 기적이고, 인간은 신비이고, 희망은 불멸이다! 이 시의 메시지 기억하시면서, 요즘처럼 응원이 필요하고 격려가 필요한 시기에 곁에 있는 누군가와 함께 이 시를 나눠보면 어떨까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 연주곡을 하나 가져왔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밴드의 음악입니다. 레비 파티(Levi Party)의 <아픔을 지날 때>라는 곡인데요, 반노네온 연주자인 고상지 씨가 함께 협연한 곡이기도 합니다. 박노해 시인이 ‘어둠을 지날 때’ 만났던 작은 빛처럼, 지금 혹여 아픔을 지나고 계신 분들, 어둠을 지나고 계신 분들 계시다면, 이 곡이 그 분들께 작은 빛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함께 듣고 싶습니다. 그럼, 저는 2주 후에 또 다른 시와 음악으로 찾아오겠습니다. 힘내시고, 건강 유의하세요!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안녕하세요, 시가 필요한 시간의 마리횬입니다. 2020년도 어느덧 1월이 지나고, 2월의 마지막 주를 맞게 되었습니다.이번에는 굉장히 오랜만에 여러분을 만나는 기분이 드네요.잘 지내셨어요?요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온 나라와 세계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하루하루 보내고 있는데요,이럴 때 일수록 몸과 마음 잘 챙기시고,모두 건강에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친구’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예전에는 ‘친구’하면 주로 학교 친구, 동네 친구, 동아리 친구를 떠올리기 쉬웠는데,요즘은 SNS를 많이 하다 보니얼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과도 친구처럼 소통하게 되는 경우도 많고,또 ‘원데이 클래스’ 같은 다양한 모임들이 주변에 많이 생기다 보니,그곳에서 알게 되는 다양한 사람들과도 친구가 되는 경우들을 적지 않게 봅니다.과거에 비해 ‘친구’라는 개념이나 경계가 확실히 넓어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나이의 개념도 과거보다는 덜 중요시되는 것 같고,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친구’가 될 수 있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오늘은 ‘친구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되는 시 한 편을 준비해 보았어요.
첫 번째로 여러분께 들려드릴 시는, 마종기 시인의 ‘우화의 강’이라는 제목의 시예요. ‘우화’라는 말은 “인격화한 동물 등을 주인공으로 하는 풍자와 교훈을 주기 위한 이야기”라는 뜻의 ‘우화(寓話, 이솝우화)’도 있지만, 짝 우(偶)에 말 화(話)로 이루어진,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 함’이라는 뜻의‘우화(偶話)’도 있더라구요. 마종기 시인의 시 제목은 이 두 번째 우화에서 왔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며 이야기하는 강’이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겠죠.
시인은 이 시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을 강과 강물에 비유하고 있는데요, 여러 번 읽을수록 정말 와 닿는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눈 앞에 넓은 강이 펼쳐져 있다고 생각하시면서 들어보시죠.
偶話(우화)의 江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이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네,마종기 시인의 <우화의 강>들어보았습니다.이 시를 들으면서 넓은 강을 한번 떠올려보자고 했는데요, 그 전에 먼저 작은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모래밭 어딘가를 상상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느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으로 물이 흐르기 시작할 때, 그 부분에 흙이 조금씩 파이면서 작은 물길이 터지게 됩니다.그리고 그 한 곳으로 물이 계속 흐르다 보면 점점 굵고 깊은 물길이 터지게 되죠.
이 시의 첫 시작이 그러한 비유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처음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평평했던 땅에 물길이 생기는 것’ 과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마음이 통하게 되는 것’을 함께 연결 지어 이야기하고 있어요.
이쪽과 저쪽 사이에 처음 물길이 생겼을 때, 그 사이로 자주 물을 보내야 그 자리가 조금씩 깊게 파이면서 물길이 유지될 수 있죠. 그렇지 않으면 얕기만 한 물길은 깊게 파이기 전에 금방 사라지고 말 겁니다.
물길이 오가야 그 물길이 점점 깊어질 수 있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도 서로 친해지려면 자주 만나고 이야기가 자주 오가야만 합니다.물론 처음에는 어색할거예요.아무리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와 처음 만나는 순간은 아무래도 조금 어색하기 마련이죠.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지금은 매우 친한 친구가 있는데,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서로 존댓말도 썼고, 겉으로 내색은 안 하더라도 ‘이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했던 상황도 있었죠. 내 개인적인 얘기를 어디까지 꺼내야 될지도 잘 모르고 말이죠.하지만 지금은 서로 말도 편하게 하고,척 하면 착 알아듣고 많은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어 있습니다. 고민거리도 서로 얘기하고 들어주는 좋은 친구가 되어 있죠.여러분도 아마 그런 친구 한 명씩은 있을 겁니다.
시인은 처음 물길이 생기고, 물이 자주 오가고 서로 섞여야 하는 수고를 거친 후에는 “넘치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는 강물”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데,사람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인 것이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서로 전혀 모르던 사람이 어느 순간에 만나서 서로 친해지기까지는 쉽다손 치더라도, 거기에서 더 나아가 서로의 내면적 고민까지 진솔하게 나눌 수 있는 정도의 사이까지 된다는 것은 진짜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진실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죠.
그래서 시인은 이야기 합니다.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 있겠는가.수려한 강물이 된다는 것이 어디 흔한 일이겠는가’하고 말이죠.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되었다는 것은,다시 말하면그만큼의 물길이 오간 세월과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고,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노력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여러분 곁에는 그러한 사람이 있나요?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긴 세월과 많은 노력을 통해 이제 큰 강이 되었다면,물을 계속 보내거나 굳이 수고스럽게 섞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 자체로 계속 큰 강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큰 강은 얕은 물길처럼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이 시를 거듭 읽을 수록,강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참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우리도 정말 친한 친구와는 오랜만에 만나더라도 마치 며칠 전에 보고 다시 만나는 것처럼 전혀 어색하지가 않잖아요?정말 친한 친구라면,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대화가 어색하지 않은 사이일 것이고,긴 말을 전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친구의 한숨 하나만으로도 마음의 무게를 알 수 있는 그런 사이일 겁니다.마종기 시인의 말의 표현을 빌면, 그러한 두 사람의 사이에는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들을 수 있는’ 강이 존재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한 편으로는,이 만남이 언제 어떤 모습으로 끝나게 될지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시인도 그 부분을 인정하고 있어요.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시인은그 시작과 끝은 모를지라도,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이미 시작된 인연과 만남이라면 그 만남이 맑고 투명하기를, 시원하고 곱게 이어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이 시를 읽으면서,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맑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가 힘들 때 곁에서 든든히 지켜봐 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고, 또 누군가가 나를 생각 할 때 마냥 답답한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만나고 싶고 가까이 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네요.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로,샘킴이 부른 <Your Song>이라는 곡 가져왔습니다. 이 곡은 샘킴과 K-Pop Star 방송동기이자 같은 회사 소속가수인 권진아 양을 위해 만든 곡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권진아 양이 매우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때, 샘킴이 직접 만든 곡이라고 하는데요, 가사가 참 위로가 되는 노래입니다. 여러분과도 나누고 싶습니다.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오늘 시가 필요한 시간은 ‘가족’을 주제로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여러분은 평소 가족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시나요?얼마 전에 설 연휴도 있어서,아마 오랜만에 친척들과 부모님들을 뵙고 온 분도 있을 것 같아요.저도 평소에는 학업에,직장에 바쁘기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가 별로 없지만,명절이나 연휴만큼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저는 2016년에 친척을 방문하러 호주에 갔다가, 약 2년간 호주 브리즈번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그곳에서 느낀 것 가운데 한 가지는, 호주 사람들은 참 가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거예요.
호주에서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퇴근시간 이후에 추가로 야근을 하면 추가수당을 받아요.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휴일이나 주말에 근무하면 기존에 받던 시급이나 주급의 몇 배를 추가로 받는 것이 법으로 제도화 되어 있습니다. 언뜻 생각해 볼 때, “기존 시급의 몇 배를 더 준다고 하면,서로 휴일에 근무하려고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 쉬울 텐데요,대부분의 호주 사람들은 돈을 좀 덜 벌더라도 그 일할 시간에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을 흔하게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어린 자녀를 둔 부모의 경우,아이들의 어린 시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너무도 당연하게 추가 근무 대신 집에서 아이들과 시간 보내는 것을 선택하더라구요.호주 사람들에게 차지하는 가족에 대한 부분이 정말 크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물론 나라마다 복지의 조건과 상황이 다르겠지만,호주 사람들의 그런 사고방식이 때론 부럽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부모님들도 사실은 결국 가족들을 위해서 야근도 하고, 가족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것일 텐데, 그 희생이 당연하게 느껴질 때도 있고,그 희생이 가족들에게 잘 전해지지 않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오늘은 특별히 자녀들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시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생각나는 시를 각각 한편씩 골라보았습니다.이 시들을 읽으면서,오랜만에 가족들을 좀 더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 보면 어떨까 싶어요.
첫 번째로 소개해드릴 시는 유안진 시인의 시 <배꼽에 손이 갈 때> 입니다.우리가 알다시피 배꼽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는 태아와 어머니의 자궁을 연결시켜주는 탯줄이 있던 흔적을 의미합니다.
그 탯줄을 통해서 태아가 어머니로부터 영양분을 받아서 자라나죠. ‘배꼽’은 아기가 태어나기 전까지 정말 중요한 역할을 했던 부분이지만, 우리가 태어난 이후로 자라나면서 또한 평소에 살면서는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신체부위이기도 합니다.
유안진 시인의 <배꼽에 손이 갈 때>는 과연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요?기왕이면 배꼽 위에 손을 얹으시고 이 시를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배꼽에 손이 갈 때
유안진
생각할 게 있으면
가슴에 손을 얹는 이
이마를 짚거나 뒷머리를 긁는 이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는 이
엉덩이를 꼬집는 이도 있지만
나는 배꼽에 손이 간다
낯선 이들하고도 아무리 가족호칭으로 불러도
한 가족이 될 수 없고
한 가족끼리도 타인처럼 사니까
진실은 천륜의 그루터기에서 나온다 싶어서
어머니와 이어졌던 흉터만 믿고 싶어서
출생시의 목청은 정직하니까
배꼽의 말은 손으로만 들리니까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두 손바닥에다 거듭 일러준다
내 손 아닌 어머니의 손이 된다
유안진 시인의 시 <배꼽에 손이 갈 때> 들어보았습니다.제목만 들어서는 무슨 시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지만,시를 읽고 나니 이 시가 어머니에 관한 시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죠.
시의 첫 부분에, 생각할 게 있으면 누군가는 가슴에 손을 얹기도 하고, 뒷머리를 긁는 사람도 있는데, 난 ‘배꼽에 손이 간다’라고 시작합니다.그렇다면 이 시의 화자는 뭔가 생각할게 있었다는 이야기겠죠.시의 화자가 생각하고 있는 게 뭘까요? 시를 끝까지 읽고 나면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어떤 상황에 처해있었던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낯선 이들과 가족 호칭으로 불러도 한 가족이 될 수 없다는 말, 한 가족끼리도 타인처럼 산다는 그 말을 한 번 생각해볼까요? 이 시의 화자는 어쩌면 지금 참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저도 외국에 나가서 가족들과 떨어져있었던 경험이 있다 보니까 공감이 되는 부분이었어요. 물론 외국에서도 좋은 분들을 만나서 외롭지 않게 가족같이 잘 지냈지만, 정말 결정적인 어느 순간에는 ‘진짜 가족’과는 다른 부분이 있을 수 밖에 없겠죠.
회사나 학교에서도 거의 친언니나 친동생과 같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터놓고 지내는 좋은 동료들이 분명히 있지만, 그렇더라도 실제 친언니와 친동생과 똑같을 수는 없을 겁니다.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진짜 가족보다는 그래도 뭔가 조심스럽고 약간의 거리는 있을 수 밖에 없어요.이 시의 화자도 가족들과 떨어져 있으면서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지금 한국의 20-30대 청년들의 모습이 많이 떠올랐습니다. 제 주변에도 취업 때문에 혹은 고시나 진로 때문에 부모님 집을 떠나 홀로 서울이나 지방에 나와있는 친구들이 많은데, 처음에는 독립했다는 설렘이 앞서지만 점점 혼자 지내는 게 쉽지 않고외로워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아마도현실의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지치기도 하고,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그들보다 성공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기도 하는 거겠죠.그런데 어디에도 그런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할 데가 없다면, 스스로를 더 외롭게 만들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이 많아지는 어느 날 밤, 가만히 배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데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 한 거죠. 이 시의 마지막 연에 나오는 말들,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라는 말은 아마도 어머니의 말투였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한 번쯤은 이런 기억이 다 있으실 겁니다. 어렸을 적에 배가 아프면 어머니가 “엄마 손은 약손!”하면서 배꼽 주변을 쓰다듬어 주고, 배를 만져주던 기억.한 번쯤은 있으실 텐데, 사실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손’ 자체는 아무 치료제도 아니고 그냥 ‘손’일 뿐이죠.하지만어머니가 “엄마 손은 약손!”이라고 말하니까, 신기하게 무슨 약을 먹은 것도 아닌데 아팠던 배가 싹 나았던 기억이 있습니다.어머니의 손에 무슨 힘이 있던 것일까요,아니면 어머니의 말에 어떤 힘이 있던 것일까요?
이만하면 배부르다
이만하면 따뜻하다
너무 생각 말거라
두 손바닥에다 거듭 일러준다
내 손 아닌 어머니의 손이 된다
이 시에서 화자는 어머니의 손과 말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있습니다. ‘그만하면 배부르단다’, ‘그만하면 따뜻하단다’라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괜찮다’라고, ‘너는 지금도 충분히 괜찮단다’라고 위로하고 치유하는 음성으로 다가옵니다.그리고 마지막 행에 와서, 배를 쓰다듬고 있는 손이 내 손이 아니라 어머니의 손이 된다는 이 표현에서, 시의 화자는 영원한 내 편인 어머니라는 존재를 통해 현재의 힘듦과 외로움을 견뎌낼 만한 위로를 얻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주변 누구의 말도 진심으로 들리지 않을 때, ‘어머니’라는 존재,나를 향한 그 어머니의 위로의 말이야말로 정말 진심 어린 격려와 충고가 되겠죠.
어머니의 말이 때로는 잔소리로 들릴 때도 있죠. 사실은 그 모든 말들이 다 나를 위한 말일 텐데,자녀들은 그걸 쉽게 놓칠 때가 있는 것 같아요.이 시를 통해 영원한 내 편인 어머니의 존재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 유안진 시인의 시 ‘배꼽에 손이 갈 때’와 함께 소개해드릴 곡은 양희은의 ‘엄마가 딸에게’라는 곡입니다. 예전에 TV방송에서 악동뮤지션과 양희은씨가 함께 부르면서 유명해졌던 곡인데요, 오늘은 그 곡의 원곡을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몰랐던 엄마의 속마음과 딸의 마음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곡입니다.함께 들어보시죠.
오늘 ‘가족’을 주제로 소개해 드릴 두 번째 시는 아버지가 생각나는 시를 골라보았습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버지에 대한 시는 유난히 슬픈 내용의 시가 많이 있더라구요.어머니에 관한 시도 물론 슬픈 시가 있었지만그래도 잔잔한 감동이 느껴지는 시들이 많았는데,아버지에 관한 시들은 유독 슬픈 내용들이어서 소개할지 말지 조금 망설여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중에 한 편을 여러분과 나누기 위해서 가져왔는데요,오늘 소개해드릴 시는 이상국 시인의 <혜화역 4번 출구>라는 제목의 시 입니다. 제목만 들어서는 ‘아버지’가 연상되지 않는 것 같죠. 저도 처음에 시를 읽을 때는 이 시가 아버지에 대한 시라고는 눈치를 채지 못했어요. 하지만 다 읽은 후에 뭔가 가슴 한 켠에 묵직한 감동이 있었던 시 입니다. 여러분께도 그 감동이 잘 전해졌으면 좋겠네요.그러면 이상국 시인의 시 <혜화역 4번 출구>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혜화역 4번 출구
이상국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 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 애는 나를 안아 준다 아빠 잘 가
네, 이상국 시인의 시 <혜화역 4번 출구> 들어보았습니다. 시의 한 줄 한 줄에서 아버지의 무뚝뚝함이랄까? 그 무뚝뚝함 속에 담긴 진심과 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런 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서 첫 번째로 읽었던 시가 자녀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다시 기억하는 시였다면, 이 이상국 시인의 시는 아버지 입장에서 자녀를 향하는 사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이 시 속의 아버지도 그렇고,우리 아버지들은 왜인지 모르지만 다 큰 자녀들에게는 사랑표현을 잘 못하는 것 같아요. 예전에 한 방송에서 개그맨 이경규씨와 당시 대학생이었던 이경규씨의 딸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는데, 아빠와 딸 모두 대화도 별로 없고 감정표현에 서로 서툰 서먹서먹했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그런데 그 방송에서 자료화면으로 두 부녀의 옛날 모습이 함께 나왔는데, 이경규씨가 3-4살 된 딸을 너무 잘 안아주고, 계속 딸아이와 이야기도 하고 너무 잘 놀아주고, 뽀뽀도 해주는 장면이 있었어요. 지금의 대면 대면한 부녀 사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친밀한 모습이었습니다.
모든 가정이 다 똑같다고는 볼 수 없겠지만,위 방송에서처럼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음에도 현재는 자녀와 부모님 사이가 다소 서먹한 가정이 적지 않은 것 같아요.생각해보면우리의 아버지들도 예전에는 우리들에게 감정표현을 잘 하셨을 텐데, 왜 지금은 그렇게 못하실까요?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도,어렸을 적에는 부모님께 애교도 부리고 모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다 했던 때가 있었을 텐데,언제부터 다소 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렸을까요?아마도 자녀들이 크면서 사춘기도 오고, 또 각자 자기만의 활동영역이 생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모님과 자녀 사이가 멀어졌던 게 아닐까 싶어요.
이 시에서도 그런 대목이 나오죠. 세 번째 연에서,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 하늘 아래서 불러준 노래를 기억이나 하겠는가’하는 대목에서, 여전히 변함없이 딸을 사랑하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해도 마음으로는 옛날처럼 딸아이와 함께하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이겠죠.
또한 서울에 눈이 온다고 보낸 딸의 메시지에 ‘그거 다 아빠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아라’라고 답장을 보낸다는 그 대목 역시도, 보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 돌려서 표현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죠.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이 시를 읽으면서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아버지의 마음 속의 진심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문득 저희 아버지가 생각이 났어요.저희 아버지도 전화하면 늘 하시는 얘기가 있어요. “뭐하고 있었어?”“밥은 먹었고?”“피곤하지 않아?”“너무 무리하지 말고, 밤에 너무 늦게 자지 말고” 등등, 안부를 묻는 이야기들이 오가고 나면 항상, “잠깐만 있어 봐,엄마 바꿔줄게” 하고 그것으로 아버지와는 통화가 끝납니다. 어머니하고는 기본 30분은 넘게 통화하는데, 아버지와는 늘 약 3분 정도 통화 했던 것 같아요.지금은 조금 더 길어지긴 했는데,그래도 여전히 “잠깐만 기다려봐,엄마 바꿔줄게”로 통화가 끝이 나죠.어렸을 때는, ‘하실 말씀도 없으신데 왜 전화 하시는 건가’ 싶기도 했었어요, 솔직히. 그런데 조금 크고 나니까 그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별 말씀도 안 하시고,통화하는 시간도 짧음에도 이렇게 전화를 하시는 것 역시 다 아버지의 사랑의 표현인 것이고,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딸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간접적인 표현이었던 것이죠.이제는 그걸 다 알고,제가 먼저 아버지께 전화 드리기도 하고,아빠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번에 이 글을 준비하면서 어느 인터넷 페이지에서 읽었던 에피소드가 생각이 났어요.여러분께도 소개해드릴게요.
한 교수가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질문1] 사랑하는 남녀가 있는데, 여자는 누가 봐도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다.그런데 그녀가 교통사고를 당해 얼굴에 심한 흉터가 생기고 말았다. 남자는 그녀를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그리고 학생들은 세 가지 답안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는데요,
A. 당연히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
B.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
C.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답을 골랐을까요?이 [질문1]에 대한 학생들의 답변은, A가 10%, B가 10%, 그리고 C가 80%였습니다. 압도적으로 C가 많았죠.
그리고 두 번째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질문2] 사랑하는 남녀가 있는데, 남자는 사업에 크게 성공한 백만장자였다.그런데 그의 회사가 파산해 남자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다. 여자는 그 남자를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A. 당연히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
B.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다.
C.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두 번째 질문에 대한 결과는, A가 30%, B가 30% 그리고 C가 40%였습니다. 아까 첫 번째 질문보다는 ‘예전처럼 사랑하겠다’는 비율이 좀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질 것’이라는 부정적인 대답과 ‘사랑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대답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죠.
이 두 가지 질문을 마친 교수가 말했습니다. “모두들 이 두 남녀를 ‘연인관계’라고 생각했나?” 학생들은 “그렇습니다.”,“사랑하는 남녀라고 해서 연인관계로만 생각했는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교수가 잠시 말을 멈추더니 학생들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만약 첫 번째 질문의 남녀가 ‘부녀관계’이고, 두 번째 질문의 남녀가 ‘모자관계’라면, 어떻게 대답하겠나?” 순간 교실 안이 조용해지고 학생들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잠시 후 교수는 앞선 두 질문을 다시 한 번 되물었고,그러자 이번에는 모든 학생들이 전원 ‘A:당연히 예전처럼 사랑할 것이다.’를 답변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이 에피소드는 우리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부모는 자식이 어떤 흉터를 갖게 되든 그 사랑을 포기할 수 없고, 자식이 어떤 실패를 겪더라도 내 자식이기 때문에 끝까지 사랑하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죠.
어느 인간관계가 이러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싶습니다. 단순히 사랑하는 남녀관계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고,쉽게 잴 수 없는 깊이와 넓이의 사랑이 부모님에게 넘치게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오늘 유난히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나는 날이네요. 오늘 ‘가족’을 주제로 함께 했는데요, 이상국 시인의 시 <혜화역 4번출구>와 함께 들려드릴 노래는 홍재목의 ‘당신이 그대가’입니다. 이 노래는 사실 남녀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노래인데요, 저는 이 노래를 들으면서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났어요. 시간이 점점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다 기억하지 못하고 잊어버리게 되는 추억들, 그 아쉬움과 그리움을 노래한 곡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늘 곁에 계실 것만 같지만,사실 인간의 삶과 시간,기억은 유한합니다.언젠가는 이별하게 될 테고,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받고 있는 이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이 되겠죠.이 노래 들으시면서 더 늦기 전에 우리 부모님과의 추억들을 되새겨보고, 다시 한 번 그 사랑에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모두 건강 조심하시구요,저는 2주 후에 다시 찾아올게요.
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