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시대와철학의 old&goodys

한글날을 생각하며[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한글날을 생각하며[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파이드로스』라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보면 소크라테스가 문자와 말의 관계에 관한 신화를 소개하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타무스 왕이 다스리는 테베에 토트라는 신이 찾아온다. 토트 신은 왕에게 통치에 필요한 여러가지 기술을 소개한다. 이 신은 서양에서 주사위 놀이를 처음 발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농사를 짓는 기술과 천문 지리에 관한 기술, 그리고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말한다. 왕은 이 모든 기술이 대단히 실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기쁘게 받아들인다. 다음으로 토트 신이 백성들에게 문자를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왕이여, 이런 배움은 이집트 사람들을 더욱 지혜롭게 하고 기억력을 높여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억과 지혜의 묘약(phamakon)으로 발명된 것이니까요.” 그런데 유독 문자와 관련해서는 왕이 거부를 한다.

 

왕이 거부하는 첫 번째 이유가 흥미롭다. 첫째, 문자가 진리(truth)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짝퉁(the semblance of truth)만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자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흥미로운 진단이다. 진리는 화석화된 문자가 아니라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의 의식(영혼)에 각인되는 것이다. 사실 현장의 생생한 소리는 영혼에 직접적으로 현전한다. 우리는 스승의 이런 목소리를 통해 진리를 깨우치고 또 이 진리를 똑 같은 형태로 전승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자로 표현되는 순간 이런 생생한 현전이 사라진다. 문자는 다만 그것을 저장할 뿐이고, 우리는 그 저장되고 기록된 문자를 통해 화석화된 진리의 흔적(semblance, 짝퉁)만을 상기할 뿐이다. 문자는 영혼의 기억(memory) 능력을 퇴화시키고, 다만 떠올리는 능력(상기: reminiscence)만 남긴다. 모든 종교에서 스승(구루)의 역할은 이런 생생한 진리를 우리의 영혼에 각인시키는 데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그 스승은 대부분 남성과 아버지로 나타난다. 그런데 문자는 독학을 가능하게 하므로 스승이 필요 없고, 스승의 권위도 잊게 한다. 권위가 사라지면 결국 왕의 통치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몇 가지 이유를 들어 타무스 왕은 토트 신이 문자를 가르쳐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한 것이다.

 

문자가 진리의 생생한 현전을 단순한 모방(시뮬라크르)으로 변질시킴으로써 서양의 로고스의 형이상학을 지탱해왔다는 데리다의 분석은 일면 타당하다. 목소리(음성)는 이 현전의 형이상학을 통해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권위와 통치의 권위를 정당화한 것이다. 테베의 왕은 문자가 도입되면 이런 아버지와 스승, 그리고 왕의 권위가 무너질 것을 우려해서 문자를 전해주겠다는 토트 신의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런 역할을 목소리만 담당했겠는가? 문자 역시 그것을 아는 식자識者와 무식자 無識者를 차별하고, 식자의 강력하고 유효한 통치수단으로 활용되어 오지 않았던가? 전통적인 유교 경서에 기반한 조선의 과거시험은 통치를 담당하는 관료들을 등용하는 관문의 역할을 했다. 때문에 한문을 모르고 경서를 읽지 못한 일반 대중은 반상의 차별 이상으로 통치계급에 접근할 수 있는 지식이 없다. 조선에서 한자라는 문자는 봉건적인 조선의 위계질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해주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15세기 중반 조선의 위대한 왕 세종은 문자를 거부하는 테베의 왕과 다르게 오히려 적극적으로 문자를 발명해서 어리석은 백성의 삶을 개선하려 한 것이 아닌가?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끼리 서로 맞지 아니 할세. 이런 이유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쉽게 펴지 못할 놈이 많으니라. 내 이를 위하여 어여삐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쉬이 익혀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훈민정음 서문)

 

읽어 볼수록 명문이다. 중국과 조선이 언어 체계가 다른데 중국의 한자로 모든 생각을 표현하고, 모든 문서를 한문으로 작성하는 상황에서는 조선이 아무리 자주 독립을 외친다 해도 중화적 세계관을 벗어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문에 접근하기 어려운 일반 대중의 뜻이 정치에 반영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한문은 중화적 세계관에 갇힌 조선의 봉건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외부적으로는 중화적 세계관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겠다는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봉건적 위계질서 안에 민주주의의 정신적 토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글 창제의 소식을 듣고 최만리를 위시한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이 극렬 반대했다는 것은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 자신들이 누려왔던 보호와 기득권이 무너질 수 있었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이후 성경을 위시한 서적이 대량 보급되고 이것이 루터의 종교 개혁의 기반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의 세종은 단순히 인쇄의 기술이 아닌 문자를 발명해서 보급하려 했던 것이니 그 얼마나 혁명적인가? 한글이 1446년에 반포되었고 유럽의 종교개혁이 1517년 시작이 되었으니 적어도 70년 이상을 앞서 있다.

 

전문 언어학자에 따르면,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프랑스어를 위시한 서구의 모든 언어는 인도 유럽피언 언어가 문화와 지역에 따라 특성화되고 개선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언어를 일정한 원리와 계획에 따라 독자적으로 발명한다는 것은 유럽의 전통이나 그 밖의 세계 어떤 전통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선의 세종은 분명한 언어 창제의 원리에 따라 한글을 만든 것이다. 자음은 발성기관의 기능과 작동을 본 딴 음운학적 원리를 따르고, 모음은 동양사상의 오랜 전통인 천지인天地人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모든 글자는 모음과 자음이 독립적인 아닌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한글이라는 글자는 음과 양의 대대관계, 우주 자연의 정신 및 철학과 몸과 기계의 기능 및 작동이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한다. 이 한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니까 한글의 표현가능성과 확장 가능성은 대단히 우수한 것이다. 게다가 음양의 원리와 같은 모음과 자음의 결합은 현대 컴퓨터 언어의 기초를 이루는 이치 논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기계어로 확장될 가능성도 무한하다. 오늘 날 인터넷에 기반 한 디지털 혁명에 언어학적으로 가장 활용성이 큰 언어가 한글인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글이 이런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표음문자로서의 한계도 적지 않다. 다시 말해 고도의 사색을 축약하고 추상하는 면에서는 표음문자가 그 역할을 다 할 수 없다. 반면 추상기능은 표의문자로서의 한문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장점이다.

 

이 점에서 나는 좀 더 솔직해지고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많은 한글학자들이 한글 한자 병행론을 비판하면서 한글 전용론을 외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언어와 문자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고 문화가 바뀌면서,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고 의미도 바뀔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는 조선시대의 한자나 그 한자로 만들어진 한문과는 큰 관계가 없다. 한중일이 똑같이 한자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발음은 전혀 다르고 의미 차이도 큰 경우가 있다. 한자는 중국에서 탄생했을지라도 오늘날 그것은 동아시아의 정신문화의 근간일 뿐이다. 그런 한자를 받아들여 오래 사용하면서 이미 각 나라 별로 토착화되고 변용된 것이다. 마치 유럽의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등 모든 유럽 언어가 인구어 전통의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각 나라 별로 발전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라틴어는 유럽 언어의 근간이자 정신적 뿌리 역할을 하면서 각 나라의 언어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들이 교육과정에 라틴어를 도입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한자도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70%가 한자로 만들어진 개념어이다. 그런데 그것을 표음문자인 한글로 표기가 된다고 해서 모두 음성언어로 바꾼다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더러 무식의 표현이다. 간단히 말해 한글학자 최현배 식으로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한글로 바꾸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우리 사고의 영역을 절대적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이미 한자는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 속에서 타자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 언어 체계 속으로 동화된 우리 언어나 다름없다 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마치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프랑스어와 같은 각 언어가 라틴어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그들 나라의 모국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와 같다. 이런 의미의 한자는 과거의 서책에서 발견되는 한문과도 별 상관없다. 때문에 일상적으로 표현되는 한자를 알 수 있는 교육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겠다.

 

둘째, 동양철학이나 불교 관련 논문들 그리고 책들을 보다 보면 수백, 수천 년 전의 한문 투가 전혀 번역이 되지 않은 상태로 쓰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심지어 페이스 북에도 불교 경전이 한문 투를 거의 바꾸지 않은 상태로 올라오는 경우가 있다. 만약 그것이 문헌학의 대상이라면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의미 있는 종교적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그렇게 했다고 하면 그것은 대단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어떤 이는 그것이 그 사상이나 종교의 핵심을 표현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불교의 사상도 인도에서 유래한 것이고, 그것이 중국의 한자와 사상을 통해 번역된 것이다. 수 백, 수 천 년 전의 한문 투는 그 당시 중국 사람들, 혹은 한자 문화권 하에서 자기 언어가 없던 우리 조상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어쩔 수 없는 방식일 뿐이다. 문헌학적 연구나 사상사적 연구가 아니라면 빼어난 우리 한글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그 오래된 유물을 반복할 이유는 전혀 없다.

 

세상이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지고 사용하는 언어도 바뀌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과거의 그런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과거에 예속된 것이고 지적으로 태만한 것이다. 이때의 번역은 단순히 한글 전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한글과 한자로 이루어진 국어에 의한 번역이고 가독성에 기초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고전이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다. 불교든 동양사상이든, 아니면 서양사상이든 우리가 이런 언어를 가지고 표현할 때 그 모든 것들은 더 이상 타자의 사상이 아니라 우리 사상 속에서 재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데카르트가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철학책을 쓰고, 괴테가 독일어로 소설을 쓰면서 비로소 프랑스 철학과 독일 문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과 같지 않을까?.

 

셋째, 오늘 날 한글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보다 다른 데 있을지 모른다. 지난 수 십 년간 이룩한 경제 성장과 세계화, 인터넷의 등장은 영어의 위력을 말할 수 없이 키워 놓았다. 여기에는 자연발생적인 측면도 있지만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영어 교육의 열풍도 크다. 한국처럼 영어가 돈을 벌고 출세를 하는 데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사회에서는 영어의 비중은 말 할 수 없이 크다. 때문에 이런 영어의 영향력이 불가피한 측면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좀 더 큰 문제는 인위적인 영어의 열풍과 교육이 새로운 정신적 사대주의를 조성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창의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대학 강의조차 영어강의를 획일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국문학이나 한문학도 영어로 강의를 하고 유럽에서 유럽 학문을 공부하고 돌아온 선생한테도 영어강의를 요구한다. 대학평가 점수와 연관되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것은 학문의 내용과 질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처사다. 영어로 언어를 획일화하는 것은 언어 생태계를 파괴하고 학문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해칠 수 있을 뿐더러, 모국어로 연구하고 사유할 수 있는 것을 막음으로써 학문의 창의적이고 장기적인 발전도 막는 것이다. 영어 강의자를 우대하고 국내 대학 출신이 자연스럽게 배제됨으로써, 학문의 사대적 종속을 심화시키고 새로운 언어 계급주의를 야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학문의 자생적 발전이 절대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모두 국내파 지방대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획일적 언어 정책이 얼마나 대학의 창의적 교육을 망치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글날은 결코 일회적인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잘못된 한글화 정책으로 모국어의 풍부한 자원을 스스로 황폐화시켜서도 안 된다. 학자들은 끊임없이 이 모국어를 통해 훌륭한 정신적 창작물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서양철학이 수입된 지 120년이 넘어가도 아직 이렇다 할 우리 철학의 자랑거리가 되는 저작이 없는 실정이다. 모국어로 쓰인 훌륭한 창작물은 그것이 비록 서양 사상이나 과거의 중국철학, 불교철학을 기술한 것이라 해도 우리의 철학이다. 이 점은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국어의 정신을 살려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간판 몇 개 바꾸고, 낱말 몇 개 한글로 표현해서 쓰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우리는 언제가야 진정 이 모국어로 사유하고, 이 모국어로 쓰인 문헌들을 중심으로 참조하고, 이 모국어로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그리하여 이 모국어로 빼어난 정신적 창작물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6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6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 여러분, 이제 그림 하나를 더 보고 넘어가기로 할까요?” 이렇게 말하면서 저는 그림을 하나 그렸습니다.

그림8

“보다시피 이것이 가장 단순한 모습으로 드러난 플라톤의 우주입니다. 이 우주 밖에는 무엇이 있느냐고요? 그것은 이데아(idea)라는 두드러기들이 잔뜩 나 있는 있는 것, 곧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에서 보듯이 같은 것(같음)의 고리는 있는 것에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이 있는 것(있음)은 파르메니데스의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달라붙어〔syneches〕 하나〔monoeides〕로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하나임으로 말미암아 영원불변하며,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저됨(자체성, 自體性)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하나의 바로 이런 특성으로 말미암아 하나, 곧 있는 것에 맞닿아 있는 것도 하나와 같은 것, 하나로 있는 것에 동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의 우주는 하나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우주, 그 안에서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의 파괴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저임(자기 동일성, 自己同一性)을 잃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덧붙여서 설명한다면, 플라톤의 우주 맨 바깥을 두르고 있는 같은 것(같음)의 고리는 있는 것과 같은 것이고, 바로 이 때문에 플라톤의 우주는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일 수밖에 없으며, 생성도 소멸도 되지 않고 정지해 있는 것입니다. 이 우주 안의 모든 변화와 차별상, 곧 운동과 여럿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까지 포함해서 다른 것〔heteron〕에서 나옵니다. 플라톤의 우주 안쪽을 여러 겹으로 감싸는 이 다른 것(다름)의 고리는 있는 것과 다른 것, 하나와 다른 것, 따라서 없는 것이요, 여럿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지요? 다른 것이 있는 것과 다른 것이어서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하나와 다른 것이어서 여럿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런 설명에는 논리의 비약이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없는 것과 여럿이 같은 것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우리 잠깐 생각을 다시 가다듬어 봅시다. 저는 앞에서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빌려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고 했고, 왜 그런지 증명까지 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있는 것만 있고, 그것이 하나이며 없는 것은 없다면, 파르메니데스 주장대로 시간도 공간도 없고, 그에 따라 우주도 삼라만상도, 생성과 소멸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감각과 이성으로 파악하는 모든 것들은 죄다 마야의 휘장 너머에 펼쳐진 환상의 세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론은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정상적인 모든 사람의 상식에 벗어납니다. 상식에 벗어나지 않는 주장을 하려면 하나뿐만 아니라 여럿이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인 있는 것뿐만 아니라 없는 것도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없는 것이 있다니? 그런 엉터리없는 말이 어디 있어? 없는 것은 그 말 그대로 없는 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라는 말을 파르메니데스가 쓴 뜻 그대로 쓰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이라는 말을 아예 없는 것, 없음 바로 그것이라는 뜻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 우리가 흔히 쓰는 뜻으로 이 말을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앞에서 우리는 여럿의 가장 작은 수, 곧 여럿의 최소 단위는 둘인데, 있는 것은 하나이므로 여럿이 있다고 하려면, 없는 것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럿을 살리기 위해서 없는 것을 있음과 같은 자리에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없는 것이 있는 것과 몸을 맞대고 나란히 서 있다는 것이 우연이고 모순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여럿을 요청하는 순간 우연과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없는 것이 있는 것과 나란히 서자마자 파르메니데스의 없음 바로 그것은 없어지고, 어려운 말로 ‘존재화(存在化)한 무(無)’ 다시 말해서 없다는 규정 아닌 규정을 받아들인 어떤 것, 곧 빠진 것이 없는 것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납니다. 이렇게 해서 여럿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는 구제되고 플라톤의 우주에서 다른 것은 있는 것과는 다른 것, 없는 것, 그러나 없음 바로 그것은 아닌 것으로 재해석되어 있는 것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 관계는 우발적인 것, 우연이고 모순입니다. 그리고 이 우연과 모순은 우리의 의식 속에 최초의 우연, 원초적 모순으로 드러나고, 이 때문에 운동과 변화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왜냐하면 운동은 모순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운동의 문제는 여기에서 함께 다루기는 벅차니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합시다.”

저는 여기에서 여럿의 문제를 조금 더 자세히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모든 것의 최소 단위〔unit〕인 하나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설명은 못 했지만 이 하나, 곧 있는 것을 찾아내야만 어떤 것을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는 말도 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가 없으면, 다시 말해서 있는 것이 없으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나 빠진 것에 대해서는 아무 이름도 붙일 수 없고 따라서 무엇이라고 부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예 없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으니 제쳐놓고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제 말투에 익숙한 어떤 학생이 이렇게 묻더군요. “선생님, 오늘 수업에는 이고운 양이 빠졌는데요. 이렇게 우리는 빠진 것에도 이고운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습니까?” “뭐? 이고운 양이 빠졌어? 입덧이 심한가?” “에이, 선생님도. 처녀가 입덧은 무슨 입덧이에요. 괜히 딴전 피우시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사실 제가 하는 이야기에는 어려운 낱말이 하나도 없어서 말이야 쉽지만 이 쉬운 말들의 실꾸리를 따라가다 보면 곧잘 미로에서 헤매기 일쑤여서 가끔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 긴장을 풀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꽁무니를 뺄 수는 없는 노릇! “어쩌다 이고운 양이 여기에 없어서 졸지에 빠진 것이 되어 버렸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고운 양이 처음부터 빠진 것, 처음부터 없는 것은 아니었지요? 그리고 지금도 여기에서는 빠졌지만 다른 자리를 채우고 있을 것입니다. 대답이 되었나요?” 잠시 동안 긴장이 풀린 사이에 저는 여럿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없으면 여럿이 있다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럿이라는 말로 저마다 다른 하나하나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 강의실에 여러 학생들이 있지요? 그런데 하나하나 저마다 다르지요? 이를테면 변강세 군과 이옥녀 양은 각각 한 사람이면서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변강세 군과 이옥녀 양이 다르다는 걸 어떻게 해서 안다고 했지요?” 이 시간이 존재론 시간이라는 것을 잘 기억하고 있는 한 학생이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건 첫 시간에 가르쳐 주셨듯이, 변강세 군에게 있는 어떤 것이 이옥녀 양에게는 없고, 변강세 군에게 없는 어떤 것이 이옥녀 양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폭소가 터져 강의실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이름이 비슷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판소리 가루지기타령에 나오는 변강쇠와 옹녀를 연상하고, 뛰어난 정력을 지닌 이 두 남녀를 머리에 떠올리다 보니 생각이 엉뚱한 데로 비약한 모양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그 학생의 대답이 옳았기 때문에 저는, “맞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하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다시 책상을 두들기면서 배를 잡고 웃어 대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학생들의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리고 나서 설명을 계속했습니다.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까닭은 아까 저 학생이 말했듯이 이것에 있는 (어떤) 것이 저것에는 없고, 이것에 없는 (어떤) 것이 저것에는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럿의 테두리 안에 있는 하나하나의 것은 저마다 있는 것(있음)과 없는 것(없음)의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것에 있는 것이 다른 것에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만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사람, 개, 소, 말, …… 빨강, 파랑, 노랑, …… 동그라미, 세모, 네모 …… 이렇게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이루는 삼라만상의 하나하나는 있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모두 하나에 참여할 수 있고, 바로 이 때문에 어떤 것으로 규정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다른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림 8을 다시 한 번 살펴볼까요? 이 그림을 보면 다시 확인할 수 있듯이 같은 것〔tauton〕의 고리는 있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보면 없는 것과 같은 것도 있을 수 있고, 있는 것과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지만 플라톤이 같은 것의 고리로 하여금 우주의 맨 바깥을 감싸고 있도록 한 것으로 보아 같은 것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다른 것(다름 바로 그것)’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해석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저도 잘 모르니 여기서 덮어두고 다른 것이 지니고 있는 이중의 성질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지요. 다른 것은 이 두 마디로 요약해 말할 수 있습니다.

1. 다른 것은 있는 것과 다르다는 점에서 있는 것이 아니다.

2. 다른 것은 없는 것과 다르다는 점에서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뭉뚱그려 말하자면 다른 것〔heteron〕은 동시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들어서 이 둘을 맺어 주면서 동시에 떼어 놓는 무규정적인 것 바로 그것입니다.”

 

 

극단의 시대 [베를린에서 온 편지 8]

극단의 시대 [베를린에서 온 편지 8]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960년대 서구의 청년들은 체 게바라에 열광했다.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뒤 권력을 거부하고 다시 볼리비아의 정글로 돌아가 싸우다 전사한 게릴라의 영웅. 1968년의 학생운동 분출 이후 급진화된 일부 청년들은 70년대에 도시게릴라 운동을 벌인다. 독일과 일본 적군파, 이탈리아 붉은여단은 테러라는 수단에 의존해 세계를 변혁하려 했다. 그들의 방법은 틀렸지만, 적어도 그들의 이상은 원대했다. 평등한 세계.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슈피겔지 기자 출신으로 알렉산더 바더와 함께 적군파를 이끈 울리케 마인호프는 독일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잇는 좌파진영의 성녀와 같은 존경을 받는다.

오늘날 서구사회로 진출한 무슬림들의 자녀들은 높은 차별의 벽과 깊은 절망 앞에서 지하드 전사를 꿈꾼다. 턱수염을 기른 살라피스트와 근본주의 종교지도자들이 거리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슬람 국가건설의 당위, 그리고 지하드 성전의 참전을 호소하면 차별 속에 절망하던 무슬림 청년들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트위터, 유튜브 등에는 검은 두건을 걸치고 바주카포를 쏘는 지하드 전사의 영상이 뮤직비디오처럼 화려하게 편집되어 돌아다닌다. 영상 매체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더욱 큰 자극을 받는다. 그들은 터키 국경을 넘어 이라크와 시리아의 교전 지역에 진입해 지하드 전사가 된다. 지금 중동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슬람국가(IS) 전사들 중 상당수는 유럽, 미국, 호주 등에서 온, 아랍어를 하지 못하는 서구출신 이민자들의 자녀다. 그래서 영국의 잘나가는 힙합DJ가 어느날 유튜브 동영상에 출연해 미국인 기자의 목을 베는, 영화에서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 현실이 되고 있다.

60년대에 청년들이 붉은 별이 그려진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담배를 문 에르네스토 게바라에게 열광했다면 21세기에 유럽 한복판에 사는 무슬림 청년들은 검은 두건을 두르고 검은 깃발을 펄럭이며 코란과 기관총을 양손에 든 지하드 전사에 열광한다. 70년대에 체 게바라의 후예들에게 적어도 평등한 세계에 대한 이상이 존재했다면, 오늘날 무슬림 청년들은 수니파 이슬람 신정국가를 만들어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광신적 근본주의를 꿈꾸고 있다. 시아파 무슬림, 소수파 기독교도, 쿠르드족 등에 대한 인종청소와 모든 종류의 광적 폭력은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객관적 인정을 결여한 주관적 확신이 그 자체로 초월적, 절대적 정당성을 얻었다고 자처하는 순간, 그것은 종교적 광신주의가 된다. 이념이 아니라 종교적 광신을 위한 살상이 청년들을 마법처럼 휘감는다. 세계가 얼마나 퇴보했는가를 이처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

지난 9월, 독일정부는 독일 내 IS의 불법화를 선언했다. 내무부장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이제 거리집회에서 IS의 상징이나 깃발을 드는 것, 신문 등에 IS 지지광고를 내는 것, 거리 연설 모두 범죄로 형사처벌될 거라고 강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효력이 없어 보인다. IS가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 대규모 거주지역인 코바니를 맹공격하며 쿠르드족에 대한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가운데, 독일 전역에서는 10월 7일, 쿠르드족 이민자들이 거리시위를 통해 IS의 학살을 규탄했다. 그런데 함부르크에서는 IS의 지지자들이 쿠르드족 시위대를 습격해 양쪽 진영 사이에 칼과 쇠파이프가 동원된 격렬한 거리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불법화라는 방식으로는 IS 지지자들이 생겨나고 공공연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 한계가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유럽의 이슬람권 이민자 청년들이 종교적 근본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누적되어 온 차별과 박탈, 배제의 원한감정(Ressentiment)이 그들로 하여금 반사회적 폭력으로 나아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속국가의 법보다 신의 법(물론 정작 코란은 폭력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여러 종교학자들이 말하고 있지만)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에게 ‘불법’이라는 표식이 얼마만큼 효력이 있겠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독일 정부에게 다음과 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테러단체 IS를 불법화한 독일정부는 그렇다면 노골적인 인종주의 네오나치 정당 NPD(독일국민당)를 그동안 어째서 불법화하지 않았는가. 동독 지역의 반실업 상태 독일 청년들이 극우 이데올로기에 감염돼 이주자들을 공격하고 NPD와 같은 극우정당들(최근에는 NPD보다는 온건하지만, 마찬가지로 외국인 혐오와 유럽연합 탈퇴 등 독일민족주의에 기댄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구동독 지역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에 투표하는 것을 왜 방치해왔는가? 무슬림 청년들이 차별의 벽에 막혀 극단적인 대안을 찾고 있는 현상에는 이주민 정책을 실패로 이끈,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독일 청년들 사이에 인종주의가 뿌리내리는 것을 방조한 정부 자신의 책임은 없는가?

극단적인 불평등과 갇혀 있는 현실, 불투명한 미래에 좌절한 유럽의 청년들은 극우 인종주의에, 이주민들의 자녀들은 종교적 광신주의에 물들고 있다. 옆 나라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정당(프랑스 국민전선(FN)과 영국의 영국독립당(UKIP))이 1위를 차지했다. 한 편에서는 극우 인종주의적 선동에 현혹되어 외국인들에 대한 증오범죄를 저지르는 빈민층 독일 청년들이, 다른 한 편에선 이슬람 신정국가 수립을 위해 지하드 성전에 동참하려는 무슬림 청년들이 거리에서 유혈낭자한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이제 이러한 폭력은 쿠르드족과 IS 지지세력의 충돌에서 보듯, 같은 무슬림 청년들 사이의 대립으로도 번지고 있다. 극단의 시대다. 극단적인 불평등은 극단적인 분열과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여러 극우 청년 단체들이 이제 온라인을 벗어나 조직력과 자신감을 과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들이 들린다. 우경화와 약자에 대한 조롱, 국가에 대한 신화 속에 뭉친 이들의 활동은 IMF 이후 미래가 막혀버린 절망적인 세대의 극단적인 탈출구인 셈이다. 그들 역시 결국 이 극단의 시대가 만들어낸 피조물인 것이다. 극단의 시대, 이 극단의 쳇바퀴를 과연 멈출 수 있을까?

 

 

내가 나비 꿈을 꾸는가? 나비가 내 꿈을 꾸는가?[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2

내가 나비 꿈을 꾸는가? 나비가 내 꿈을 꾸는가?

 

나태영(한철연 회원)

 

18대 대선 기간 동안 국정원과 국방부 사이버사령부가 부정 댓글을 무수히 많이 달았다. 이 사건이 수류탄 터진 경우라면 18대 대선 선거 개표조작은 핵폭탄 터진 경우이다. 하지만 선서 개표 조작은 여론화 되지도 못한다. 소수 촛불 시민들만이 여론화 시키려고 애를 쓰고 있다.

2012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대한민국 전체 투표권자들 이 연극배우가 되었다. 왜 그런가? 2012년 12월 18일 대통령 선거 하루 전 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컴퓨터에 박 근혜가 51.6프로 득표한다는 내용이 저장되었다. 저들이 박 정희가 저지른 5.16 쿠데타 연상하도록 51.6프로로 득표 조작을 했다. 저들은 이 땅 유권자를 조롱했다.

투표함 열기 전에 개표 방송 했다.무수히 많은 보기들이 있다. 그 중에 하나의 보기만 들겠다.

보기

강원도 춘천시 제 1 투표구 투표수: 2,924매강원도 춘천시 선관위 투표지 분류를 끝낸 시각: 2014년 12월 19일 저녁 9시 24분강원도 춘천시 선관위원장 공표 시각: 2014년 12월 19일 저녁 7시 40분투표함 열기 1 시간 32분 전에 개표 방송 했다.

신 상철은 말한다.

“선거 개표조작 당사자가 박 근혜에게 내가 당신이 대통령 당선되게 해 주겠소 말한 다음에 대통령 당선 시켜주면 박 근혜가 그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당신이 51.6프로로 대통령 당선되게 해 주겠소 말한 뒤에 그런 결과를 내면 박 근혜는 그 말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명박과 박 근혜와 전 중앙선거관리 위원장 김 능환은 국기문란죄로 처벌 받아야 한다.

그래도 이 땅 언론인, 진보정당 사람들, 지식기술자들은 침묵한다. 박 창신 신부가 이 내용을 담은 책 『제18대 대통령 부정선거백서』를 가슴 아래에 들고 시국 선언했어도 이 땅 언론인, 진보정당 사람들, 지식기술자들은 침묵한다.

이들은 칼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한테 회초리 맞아야 한다.

선거 개표조작을 막지 않으면 새누리당 인간들은 지들이 선거에서 불리할 때마다. 2012년 12월 대통령 선거 전 날처럼 계속 선거 개표조작 할 것이다.

18대 대선 선거 개표 조작을 문제 제기한 한 영수(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노조 위원장)와 김필원은 감옥에 갇혀 있다.감옥에 갇힐 사람들은 두 사람이 아니라이 명박, 박 근혜, 김 능환 세 인간이다.

장자가 기가 막혀!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5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5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여기에서 이야기가 더 얽히기 전에 저는 파르메니데스가 한 유명한 말로 되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없는 것은 아예 없으므로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따라서 말도 할 수 없다.’는 말 말입니다. 파르메니데스는 분명히 ‘없는 것은 없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말의 뜻이 ‘빠진 것이 있다.’임을 확인했습니다. 일이 이쯤 되면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틀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쓰는 말이 틀렸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파르메니데스가 쓴 ‘없는 것’이라는 말과 우리가 쓰는 ‘없는 것’이라는 말이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이 세 경우 가운데 어느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따지는 데는 앞에서 우리가 한 말도 염두에 두어야 하겠지요. 없는 것이나 없다는 말이 없으면 우리는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거나 이것은 저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쓸 수 없고, 따라서 이것과 저것을 갈라 보는 분석뿐만 아니라, 거기에 바탕을 두고 있는 사고와 그 사고의 표현인 언어생활조차 불가능해진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르메니데스가 없는 것은 없다고 했을 때 쓴 ‘없는 것’이라는 말은 말하자면 ‘허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없음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없음 바로 그것을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없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없음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빠진 것을 가리킵니다. 그림 7을 다시 보아 주십시오. 여기에 최초의 무규정적인 것 ㄱ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한없이 많은 무규정적인 것들이 줄을 서 있지 않습니까? 당분간 있음 바로 그것인 맨 왼쪽의 있는 것과 없음 바로 그것인 맨 오른쪽의 없는 것을 보지 말고 그 사이에 있는 것들에만 주의를 기울이기로 합시다. 그리고 ㄱ의 왼쪽으로 줄지어 있는 것들을 있음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 있는 것들이라고 하고 ㄱ의 오른쪽으로 줄지어 있는 것들을 없음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 없는 것으로 봅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있는 것 쪽으로 향하는 무규정적인 것들의 움직임이 충만(있는 것은 하나로 있고 없는 것이 그 안에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가득 찬 것이기 때문에)을 지향하고 있고, 없는 것 쪽으로 향하는 무규정적인 것들의 움직임이 결핍(아예 하나도 있는 것이 없고 비어 있는 허무로 향하기 때문에)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 안에 들어 있는 더 깊은 뜻은 나중에 파헤쳐 보기로 하고 우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예 없는 없음 바로 그것이 아니라 무규정적인 것 ㄱ에서 없는 것에 이르는 사이에 들어 있는 무한히 많은 저마다 다른 정도의 빠짐을 지닌 빠진 것들이라고 합시다. 왜 이런 제안을 하느냐 하면 철학의 역사에서 ‘없는 것’을 ‘없음 바로 그것’으로 놓고 벌여 왔던 많은 논쟁이 소모적일 뿐 아무런 생산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여기에서 성급하게 한 마디 끼워 넣자면, 없음 바로 그것이나 있음 바로 그것은 학문의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논쟁거리가 못 됩니다. 학문의 대상은 있는 것과 맞닿아 있어서 있는 것과 같은 것에서 없는 것과 맞닿아 있어서 없는 것과 같은 것 사이의 무한히 많은 무규정적인 것들입니다. 말하자면 학문은 규정하는 것[definition : 이것을 정의(定義)라고 합니다. 끝, 한계(peras)를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뜻이지요.]인데,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나 이성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 이미 다 규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따로 머리를 싸매고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과 저것은 어떻게 다르냐? 따위의 질문을 할 필요도 없고, 따라서 학문의 탐구는 부질없는 노릇이 되고 맙니다.”

여기까지 말하다 보니, 이야기가 너무 거창해져서 잘못하면 학생들이 허공에 한눈을 팔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그 기타 줄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로 이어져서 50센티미터의 길이를 가지고 있는 강철선 말입니다. 저는 그 기타 줄을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차례로 짚어 튀겨 가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 기타 줄에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이 숨어 있습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소리들은 규정되지 않았고, 따라서 겉으로 보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기타 줄 안에 소리가 아예 하나도 없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기타 줄을 차례로 짚어서 튀기면 숨어 있던 소리가 밖으로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없던 소리가 생겨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없던 소리가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줄을 짚어서 튀겼기 때문이 아니냐고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줄을 짚어서 튀긴다는 행위는 무엇을 뜻할까요?”

“그만큼 줄을 끊어 냈다는 것 아닙니까? 잘라 버렸다는 뜻은 아니고요.”

한 학생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저는 얼른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렇죠! 이어진 줄을 어느 부분에서 잘라 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어진 것을 잘라 내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이어진 것, 연속된 것은 한계가 없다는 점에서 무규정적인 것 아니에요? 그것을 끊어 냈으니 그만큼 한정시켰다는 뜻이겠지요.”

다른 학생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학생이 몹시 귀여운 나머지 입이라도 맞추어 주고 싶었습니다. 예쁜 여학생이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지요.

“한정시켰다? 좋은 말입니다. 그 결과 무엇이 드러났지요?”

제가 물었습니다.

“이제까지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소리요.”

어느 학생이 곧 대답했지만 그 대답은 제가 바란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기타 줄이라는 것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이어져 있는 모든 것, 다시 말해서 길이까지 포함해서 크기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머리에 떠올려 보세요. 그것들을 끊어 내면 무엇이 나타나지요?”

그제야 학생들은 내가 듣기를 바라는 대답이 무엇인지를 알아챈 듯했습니다.

“아아, 알았습니다. 새로운 끝, 한계, 페라스(peras)요. 맞지요?”

“그렇습니다. 기타 줄을 끊어 내는 순간 이어져 있던 것이 끊어져 숨어 있던 끝이, 한계가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일정한 진폭과 진동수와 음색을 지닌 소리와 함께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것의 끝이, 한계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알면 소리가 되었든 모습이 되었든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문제를 조금 더 단순화시켜서 일차원의 세계에 있는 줄〔line〕을 머릿속에 그려 봅시다. 이 줄을 끊어 내면 거기에서 새로운 끝이 나타나는데, 일차원의 줄이므로 이렇게 해서 얻어 낸 끝〔peras〕은 하나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양쪽에 하나씩 새로운 끝이 생겨났다고 해야 하겠지요. 여기에서 중요한 낱말은 하나라는 낱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있는 것이 왜 하나로 있는지 증명해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하나의 끝이 나타나자마자 이것은 규정된 것(끝, 한계가 보인 것)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 된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자 학생들은,

“어려운데요.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요.”

하고 요구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학생들의 감각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앞에 있는 교탁을 번쩍 들었다가 제자리에 놓으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방금 들어 보인 이 교탁은 한 개지요?”

학생들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너무나 뻔한 질문을 너무나 진지하게 하는 제 모습이 그렇게 우스웠나 봅니다.

“당연히 하나지요.”

학생들이 대답했습니다.

“정말 하나인 것이 그렇게 당연한가요? 왜 그렇게 당연하지요?”

제가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감각적으로 너무나 분명한 사실에 대해서 되물으니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아까 들어 보였던 것처럼 이 교탁은 삼차원 공간에서 다른 어떤 것과도 이어져 있지 않지요? 이 교탁이 놓여 있는 교실 바닥과도 떨어져 있고, 이 교탁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와도 떨어져 있지요? 다시 말해서 이 교탁은 이 교탁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과 끊어져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앞 뒤, 아래 위에서 이 교탁의 끝을, 한계를 눈으로 볼 수 있지요? 이렇게 삼차원에서 다른 어떤 것과도 끊어져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교탁을 하나의 교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탁은 하나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이것은 교탁이다.’ ‘저것은 책이다.’ ‘그것은 연필이다.’와 같이 어떤 것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것의 끝을 보고, 그 끝에서 다른 모든 것과 떨어져 있어서 하나로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하나하나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으면 여럿이라는 말은 쓸 수 없습니다. 하나가 없으면 여럿도 없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초의 하나는 있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을 하나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는 단위입니다. 단위(單位)라는 한자말은 영어로는 유니트(unit)인데, 이 유니트라는 말은 라틴어의 ‘우누스(unus)’, 곧 하나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물질의 단위, 생명의 단위, 공간의 단위, 시간의 단위, 운동의 단위, 입자의 단위…… 이렇게 모든 것의 최소 단위를 찾아 헤매는 것은 모든 복합체들이 이 단위, 곧 하나로 되어 있어서, 하나만 찾으면 그 하나로부터 전체를 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곁다리 이야기는 애초에 플라톤이 데미우르고스를 시켜서 만든, 우주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늘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플라톤의 우주로 돌아가기로 하지요. 제가 학생들에게 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앞에서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가 ‘되는 것’[gignomenon, genesis : 이 말을 흔히 생성(生成)이라고 번역하는데, 독일 말로는 베르덴(werden), 영어로는 비커밍(becoming)으로 흔히 번역하는 것으로 보아 되는 것 또는 됨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을 이리저리 버무려 ‘같은 것[tauton〕’과 ‘다른 것[heteron〕’의 띠를 만들고 같은 것의 띠는 밖에 두르고 다른 것의 띠는 같은 것의 띠와 엇갈리게 해서 안쪽으로 둘러 이 우주를 질서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같은 것과 다른 것이라는 말에 걸려 곁길로 새고 말았는데요,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하기로 하지요. 플라톤의 우주론에 관해서는 저보다 훨씬 더 지적인 능력이 뛰어난 많은 학자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영국의 콘포드나 테일러, 또 프랑스의 브리송 같은 사람이 미주알고주알 자세히 해설해 놓은 터라, 제가 거기에 대해서 중언부언한다면, 그것은 마치 잘 그려 놓은 뱀의 몸뚱이에다가 다리를 그려 넣겠다고 부산을 떠는 꼴이 되기 십상일 겁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은 플라톤의 우주론이 지닌 존재론적인 의미(이렇게 쓰다 보니 정말 뭐 같아 보이는데, 겁먹지 않아도 됩니다.)에 연관된 토막 이야기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려 둡니다.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가 같은 것(또는 같음)의 띠로 둘러싼 이 우주의 밖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따라서 운동(또는 변화)도 여럿〔多〕도 없는 초월적인 이데아(idea)의 세계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이 괴물은 천의 얼굴을 지닌 데다가 종잡을 수 없는 구석이 하도 많아서 플라톤 자신도 제대로 그 모습을 그려 내지 못하고, 이 괴물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오십 보 백 보인지라, 이제까지 이 괴물을 둘러싸고 수십 권(어쩌면 수백 권이 될지도 모릅니다.)의 책, 수천 편의 논문이 나왔지만 아직까지 이 괴물의 정체를 제대로 알았다거나 이 괴물을 사로잡았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떠도는 풍문에 따르면 이 이데아라는 괴물들의 왕은 ‘좋음’의 이데아라는데, 그 밑에 무수한 괴물들이 이 왕을 떠받들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놈들은 ‘사람’, ‘개’, ‘소’, ‘말’, ‘지렁이’, ‘바퀴벌레’, ‘쇠똥구리’…… 같이 천하기 짝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고, 또 어떤 놈들은 ‘아름다움’, ‘참됨’, ‘용기’, ‘중용’, ‘거룩함’…… 따위의 제법 그럴싸한 이름을 지니고 있고, 또 다른 놈들은 ‘큼’, ‘작음’, ‘많음’, ‘적음’, ‘삼각형’, ‘동그라미’…… 같은 시답잖은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데, 그 수가 이 우주의 삼라만상에 붙인 이름보다 더 많아서 이 괴물들을 제대로 먹여 살리자면 ‘좋음’이라는 이데아계의 임금이 아무리 마음씨가 곱다 한들 어디쯤까지 좋은 임금님으로 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와글거리는 이데아라는 괴물들을 하나하나 붙들고 씨름하려 드는 건 마치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콩더미에서 콩알을 하나하나 골라 내 도끼로 뽀개는 짓과 진배없는지라 그런 일은 다른 할 일이 없는 한가한 분들께 맡겨 두기로 하고, 얼렁뚱땅 ‘이데아라는 놈들은 있는 것(또는 있음)이라는 하나의 괴물 몸에 생긴 두드러기들이다.’ 이렇게 말하고 넘어가기로 합시다. 아무튼 데미우르고스가 이 우주를 만들 때 이 괴물들을 보고, 그놈들을 본떠서 만들었다는데, 이 엉터리없는 이야기 속에 담긴 숨은 뜻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 제 관심을 끄는 문제라는 것만 알고 넘어갑시다.”

세상에! 철학 선생이라는 자가, 그것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면서 그것으로 밥을 벌어먹는 서양 고대 철학 선생이라는 자가 이렇게 제 쪽박 깨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으니, 앞으로 하는 이야기가 씨알이 안 먹히면 그야말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어 마땅한 노릇이겠지요.

 

 

 

과학자가 없는 과학 윤리(1)[대안도덕교과서]-7

과학자가 없는 과학 윤리(1)[대안도덕교과서]-7

 

 

강경표(중앙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도덕 교과서에는 ‘문화와 도덕’이라는 영역이 있습니다. ‘문화와 도덕’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로부터 시작해서 ‘예술이 주는 도덕적 감수성’의 문제를 지나, 갑자기 ‘과학과 도덕’이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챕터로 마무리됩니다. 과학도 하나의 문화 현상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분류도 타당하겠지만 다소 생뚱맞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시 교과서를 만드신 선생님들이 하지 못한 다른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부터 우리는 도덕교과서 속에 숨겨진 과학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도덕, 과학에 활을 겨누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인가를 묻는다면, 과학 자체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E=mc²이라는 수식은 그 안에 아무런 도덕적 가치를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수식을 이용해 질량을 에너지로 바꾼다고 할 때, 그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사용하는 과학자의 행위는 가치중립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과학자가 살고 있는 시대, 문화, 역사, 환경, 정치, 신념에 따라 과학자의 행위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과학과 도덕’에서는 사실 과학자가 지켜야 하는 도덕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학자가 되고 싶은 학생들에게 과학자가 지녀야 할 도덕적 태도를 이야기해 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과학자는 우리 사회를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만들어 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나 만화 속에 등장하는 악당 과학자들은 항상 지구를 파괴하거나 세계를 정복하는 꿈을 갖고 있으면서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들어 냅니다. 자신이 가진 과학의 힘을 과시하지만 도덕 능력은 빵점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영화 속에나 존재하는 이야기이고 현실의 과학계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여줍니다. 사실 과학계의 상황을 고려할 때 과학자 개인의 윤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의 과학관, 자본과 과학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과학과 도덕’은 이런 문제를 외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도덕 교과서의 출발이 국가가 원하는 인간상을 그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과 도덕을 이야기하면서도 과학을 반영하지 못하고, 엉뚱한 결론에 빠질 수 있는 생각들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도덕 교과서에는 과학 이야기가 등장하는데도, 왜 교과서를 만들 때 과학자 또는 과학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한명도 참여하지 않았을까요? 과연 도덕은 모든 학문을 능가하는 것일까요? 정말 과학자가 도덕을 배우지 않는다면 모두 악당이 될까요? 예술은 도덕적 감수성을 키우지만 과학은 도덕에 따라 움직여야만 하는 학문일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질문들 속에는 우리의 도덕 교과서가 두려워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도덕 교과서는 새로운 힘을 가질 수 있는 존재들을 두려워합니다.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의 말처럼 ‘아는 것은 힘’이고 이때 ‘아는 것’이란 과학 지식을 의미합니다. 과학은 물질을 다루는 새로운 지식을 찾아내고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무모하기도 하고,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하기도 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기에 생길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예전에는 인터넷이 없었습니다. 사이버 공간도 없었지요. 그러나 현재 우리는 이 사이버 공간에서 다양한 활동을 합니다. 또 하나의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사이버 공간도 사회적 성격을 지니기에 많은 도덕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발생하는 도덕적인 문제는 우리가 기존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해법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이버 윤리’라는 새로운 영역이 탄생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도덕 교과서에는 과학자들의 행동을 전통적인 도덕 안에서 규제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과학자들의 양심만 올바르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과연 과학자 개인을 겨냥한 도덕의 활만으로 과학을 통제할 수 있을까요? 또한 과학자가 지켜야할 규칙이 과학자의 참여가 없이 만들어진다면 그 규칙을 지켜야만 하는 사람들은 불만이 생기지 않을까요? 이제 이런 문제들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신과학운동’이 과학 윤리인가?

 

우리의 전통 문화 속에서 과학적 사실을 밝혀내고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과학자에게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과학적 사실을 전통적 사고에 기초해서 찾아내고 조화를 얘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한때 전통적인 사유와 과학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신과학운동이 현대 사회와 과학 문명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런 생각들을 바탕으로 종교와 과학의 융합, 생태?환경운동이 촉발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의 도덕교과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캐프라는 물리학을 동양사상과 비교하는 강연과 논문을 많이 발표하였는데, 그가 저술한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과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이라는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유럽과 미국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새로운 과학 운동, 녹색 운동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해 줌.(중학교 도덕1, 미래엔 278쪽)

아직까지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캐프라로 대표되는 신과학운동을 과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과학운동은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신비주의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 교과서에는 신과학운동이 과학의 도덕적 대안 모델인 것처럼 제시되어 있습니다. 캐프라가 뛰어난 과학자는 분명하다고 해도 그 한 사람의 견해가 과학의 도덕적 대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신과학운동에 대해 다른 교과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과학운동은 현대 과학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관을 찾는 과학 사상운동이다. 신과학 운동자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핵전쟁으로 인한 공포, 자연환경의 오염 등을 비판하면서 우리 삶의 터전이 황폐해진 원인과 책임이 과학 기술에 있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과학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거나 과학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신과학 운동은 동양사상이나 새로운 철학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하였다. 과학은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인간의 의식을 떠나서는 과학의 객관성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신과학운동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을 엄격히 분리시키는데 반대하고, 모든 사물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한다.(중학교 도덕2, 중앙교육진흥연구소 288쪽)

전통적 사유 속에서 도덕적 진리를 찾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과학을 동양철학적 사유 위에서 이해한다는 것이 매력적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장에서 과학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들에게는 크게 설득력이 없습니다. 실제적인 과학 윤리는 과학 탐구 행위에 부합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하는데 과학자들이 참여하지 않고서는 실제적인 과학 탐구 행위가 무엇인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과학의 뿌리는 서양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양의 전통과 과학의 조화가 마치 과학 윤리인양 이야기 하는 것은 현실 과학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은 아닐까요?

인간의 의식을 떠나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실을 밝혀낸 것도 과학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느끼지만 이는 지구의 자전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지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주와 자연에 대한 다양한 현상들은 과학에 의해 밝혀졌고, 과학은 그러한 사례들의 연관성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근거를 동양철학적 사유에서 찾지 않아도 그 근거를 충분하게 제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도덕?윤리 선생님들은 (자연적) 사실로부터 당위를 도출하는 행위를 자연주의의 오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진화론이라는 과학이 발전하던 시대에 진화론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조지 무어(1873-1958)라는 사람이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로부터 당위를 도출하는 것에 반대하는 논리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철학적 당위 위에 놓인 과학은 좋은 과학이고 과학적 사실로부터 철학적 당위를 도출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문제일까요?

신과학운동은 철학적 당위와 과학적 사실을 결합한 형태의 학문입니다. 그러나 다수의 과학자들은 신과학운동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는 도덕 또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하나의 가설일 뿐입니다. 과학에서 가설은 실험을 통해 검증되어야만 합니다. 단순하게 전통이라는 이유로 도덕을 따르는 것은 과학적인 태도도 아닙니다. 이것은 과학자가 지켜야할 도덕을 만드는데 과학자가 참여해야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실제 과학자들의 생각이 반영되지 못한 우리의 도덕 교과서는 신과학운동을 마치 과학이 걸어가야 하는 모범적인 모습인양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2)에서 계속…

제 7장 노동과정과 가치 증식과정[자본론강독]-15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 증식과정

정리 : 김선이

 
□ 본문 발제(p.235263)
? 제1절 노동과정[또는 사용가치의 생산](p.235~246)
[자본가는 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 구매한다] 노동력의 구매자는 노동력의 판매자에게 일을 시킴으로써 노동력을 소비한다. 노동력의 판매자는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노동력이 된다.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을 상품에 대상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의 노동을 사용가치에 대상화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만들게 하는 것은 어떤 특수한 사용가치(어떤 일정한 물품)이다. 사용가치의 생산이 자본가를 위해 자본가의 감독 하에 수행된다고 해서 그 생산의 일반적 성질이 달라는 것이 아니므로 노동과정은 어떤 특정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고찰되어야 한다.

● 노동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의 소재를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기 신체를 운동시킴으로써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며 동시에 자신의 자연을 변화시킨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p.235)

노동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의 노동이다.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는 것으로 노동자자는 자신의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자신의 의지를 이것에 복종시키는데 이 의지는 노동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 더욱이 노동의 내용과 그 수행방식이 노동자의 흥미를 끌지 않으면 않을수록 노동자가 노동을 자기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힘의 자유로운 발휘로서 즐기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더 치밀한 주의가 요구된다. 노동과정의 단순한 요소들은 ①인간의 합목적적 활동(노동 그 자체), ②노동 대상, ③노동수단이 된다.(p.236~237)

⇒ 노동은 인간의 노동력이 발현된 것, 즉 노동력의 작동인데 ①노동에 앞서 이미 인간의 두뇌 속에 실재하고 있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의식적인 합목적적인 활동이다. 이 점에 있어서 인간의 노동은 거미나 벌이 그 집을 만들 때의 무의식적 본능적 활동과는 다르다. ②노동은 자연의 형태를 바꾸어 인간의 욕망을 보다 더 잘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활동으로 그것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활동이 아니다. ③인간은 노동에 의해 외부의 자연에 작용하여 자연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욕망을 한층 더 잘 충족시킬 수 있는 형태로 바꾸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육체를 변화시키고 자신의 여러 능력을 발전시킨다. 두뇌를 발전시키고 언어를 만들어 내고 지식을 발전시켜서 유인원을 인간으로 진화시키는 것도 다름 아닌 노동이었다. ④노동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자연적 필요사이며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다. 노동을 그만둘 때 사회는 멸망한다.

● 노동 대상
토지는 인간노동의 일반적 대상으로 인간의 수고 존재한다. 노동에 의해 자연환경과의 직접적 연결로부터 분리된데 불과한 물건들도 모두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노동대상이다. 물고기, 원목, 광석 등이 그러한 것 들이다. 이와 반대로 노동대상 그 자체가 이미 과거의 노동이 스며든 것이라면 그것은 원료라고 부르는데 광석이 그것이며 원료는 모두 노동대상이 된다. 그러나 모든 노동대상이 원료인 것은 아니고 노동대상이 원료로 되는 것은 이미 노동에 의해 어떤 변화를 받은 경우뿐이다.⇒ 원료는 모두 노동대상이지만 노동대상이 모두 원료인 것은 아니다. 노동에 의해서 이미 그 형태가 바뀌어 진 것만이 원료이다.(p.237)

● 노동 수단
노동수단이란 노동자가 자기와 노동대상 사이에 끼워 넣어 이 대상에 대한 자기 활동의 전도체로서 이용하는 물건[여러 가지 물건들의 복합체]이다. 노동자는 여러 물질들의 기계적, 물리적, 화학적 성질들을 이용해 그 물질들을[자기 힘의 도구로서 자기의 목적에 따라] 다른 물질들에 작용하게 한다. 노동자가 직접 손에 넣는 것은 노동수단이다. (p.237)

토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노동수단이기는 하나 그것이 농업에서 노동수단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노동수단과 비교적 고도로 발달한 노동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노동과정이 조금이라도 발전하게 되면 특별히 가공된 노동수단을 필요로 한다. 노동수단의 사용과 제조는 인간 특유의 노동과정을 특징짓는다.(p.238)

? 노동수단표

광의의 노동수단 협의의 노동수단(생산 용기) 생산의 골격, 근육 계통(기계, 도구)
생산의 맥관 계통(관, 통, 바구니, 항아리)
기타, 목축용 토지, 비료제조에 있어서의 가축 등
노동과정에 필요한 일반적인 물적 조건 생산의 장소로서의 토지, 생산용 건물, 도로, 운하, 항만, 창고 등

? 광의의 노동수단
광의의 노동수단 중에는 협의의 노동수단 이외에 노동과정이 진행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물적 조건이 포함된다. 이리하여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노동이 노동수단을 사용, 노동대상에 작용하여 당초에 의도했던 대로의 변화를 노동대상 위에 일으킨다. 노동과정이 낳은 생산물은 인간의 욕망을 더 잘 충족시킬 수 있도록 형태가 바뀌어 진 자연물이다.

? 협의의 노동수단
협의의 노동수단(생산용구)은 노동자가 자신과 노동대상 사이에 개재시키는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그들의 활동의 전도체로서 그를 위해 역할 하는 하나의 물건 또는 여러 물건의 복합체이다. 인간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하나의 물건을 다른 물건에 작용시키기 위해 물건의 물리적, 물리적?화학적 제 속성을 이용한다. 노동자가 직접 작용하는 것은 노동대상이 아니라 노동수단이다. 협의의 노동수단을 생산용구라 부르고 토지도 하나의 생산용구로 불렀다.

? 생산용구는 경제발전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협의의 노동수단의 발전수준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의 정도를 측정하는 척도이며 인간이 달성한 경제발전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멸망한 경제적 사회구성체를 탐구하는 데 노동수단의 유물이 중요하다. 경제적 시대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이 생산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어떠한 노동수단으로 생산 되는가이다. 노동수단은 인간의 노동력 발달의 척도일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지표이기도 하다. 노동수단은 인간의 노동력 발달의 척도일 뿐 아니라[사람들이 그 속에서 노동하는] 사회적 관계의 지표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동수단 중 역학적인 종류의 노동수단은[그 전체를 생산의 골격, 근육계통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컨대 관, 통, 바구니, 항아리 등과 같이] 노동대상의 용기로 쓰일 뿐이고 생산의 혈관계통 이라 부를 수 있는 노동수단에 비해 하나의 사회적 생산시대를 훨씬 더 결정적으로 특징짓는다. 화학공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p.238~239)

? 생산수단, 생산적 노동
노동과정의 수행에 필요한 모든 객체적 조건들은 더 넓은 의미의 노동수단에 포함될 수 있다.그것들은 직접적으로는 노동과정에 들어가지 않으나 그것들 없이는 노동과정이 전혀 행해지지 못하거나 불완전하게만 행해진다. 이러한 종류의 보편적인 노동수단은 역시 토지 그 자체이다.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활동이 노동수단을 통해 노동대상에 변화를 일으킨다. 노동과정은 생산물 속에서는 사라진다. 그 생산물은 하나의 사용가치이며 자연의 소재가 형태변화에 의해 인간의 욕망에 적합하게 된 것이다. 노동은 그 대상과 결되어 노동은 대상화되었고 대상은 변형되었다. 이 과정 전체를 그 결과인 생산물의 입장에서 고찰한다면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은 생산수단으로 나타나며 노동 그 자체는 생산적 노동으로 나타난다.(P.239~240)

어떤 사용가치가 생산물의 형태로 노동과정으로부터 나올 때 그 이전 노동의 생산물인 다른 사용가치는 생산수단으로 노동과정에 들어간다. 동일한 사용가치가 어떤 노동과정의 생산물이면서 동시에 다른 노동과정의 생산수단으로도 된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노동과정의 결과일 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조건이기도 하다.(P.240)

물건들은 각각 여러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용도가 각양각색일 수 있기 때문에 동일한 생산물이 아주 판이한 여러 가지 노동과정의 원료로 쓰일 수 있다. 동일한 생산물이 동일한 노동과정에서 노동수단으로도 원료로도 쓰일 수 있다. 소비를 위해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어떤 생산물이 새로운 다른 생산물의 원료로 되는 일도 있다. 또는 노동이 우리에게 생산물을 주는 경우도 있다.(P.241)

요컨대 어떤 사용가치가 원료, 노동수단, 또는 생산물로 되는가는 전적으로 그 사용가치가 노동과정에서 행하는 특정한 기능[그것이 노동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존하는데 이 위
생산물은 생산수단으로서 새로운 노동과정에 들어가면 생산물이라는 성격을 상실하며 다만 살아있는 노동의 대상적 요소로 기능한다. (P.241~243)

우리의 장래의 자본가로 돌아가 보자. 우리의 자본가는 그가 구매한 상품인 노동력의 소비에 착수한다. 다시 말해, 그는 노동력의 담지자인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을 통해 생산수단을 소비하게 한다.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노동자가 노동과정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서 수행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는 물론 변하지 않는다.

노동과정은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소비과정으로서는 두 가지의 독특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①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소유하는 자본가의 감독 하에서 노동한다. ②생산물은 자본가의 소유물이지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의 소유물은 아니다. 상품의 사용은 상품의 구매자에게 속한다. 그리고 노동력의소유자, 즉 노동자는 노동을 함으로써 실제로는 자기가 판매한 사용가치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노동과정은 자기가 구매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소비에 지나지 않지만 그는 노동력에 생산수단을 첨가함으로써만 노동력을 소비할 수 있다. 노동과정은 자본가가 구매한 물건과 물건 사이, 즉 그에게 속하는 물건과 물건 사이의 한 과정이다.
(P.244~246)

발터 벤야민과 함께 티어가르텐을 산책하다 [베를린에서 온 편지 7]

발터 벤야민과 함께 티어가르텐을 산책하다 [베를린에서 온 편지 7]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내가 사는 곳은 베를린 모아빗(Moabit)이다.?종교박해를 받던 위그노 교도들이 이주해 와서 성경에 등장하는?‘모압’이라는 지명을 따다가 이름 붙인 것이 그 이름의 기원이라고 알려져 있다.?전통적으로 모아빗 바로 위에 있는 베딩(Wedding)과 함께 베를린 노동계급의 거주지였고?20세기 초에는 이 지역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성장,?히틀러 치하에서도 반나치 운동이 왕성하게 펼쳐진 곳이다.?지금은 슈프레강 인근의 부유한 주택에 사는 독일인 중산층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에서 온 가난한 이주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며,?특히 베딩,?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에 이어 터키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라 거리에 나가보면 여기가 독일인지 아니면 터키나 중동의 어느 도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

모아빗 인근에는 커다란 도심 속의 숲 티어가르텐(Tiergarten)이 위치해 있다.?티어가르텐은 과거 프로이센 왕의 사냥터였다가 이후에 공원으로 지정되어 시민들에게 개방된 곳이며,?대규모의 도심 속 숲이다.?날씨가 좋은 날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갈 때는 모아빗에서 출발해 전승기념탑을 지나 티어가르텐을 가로질러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한 뒤 운터덴린덴(Unter den Linden)?거리를 따라 달린다.?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쬘 때에도 티어가르텐의 숲 속으로 들어가면 나무들 사이로 부는 시원한 바람에 더위를 잊게 된다.?도심 한 복판에 삭막한 고층건물이 아니라 커다란 숲과 공원이 위치해 있다는 것은 베를린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축복일 것이다.?이 때문에 티어가르텐은 오늘날 사람들이 베를린을?‘생태도시’로 규정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베를린의 상징물이기도 하다.?빽빽이 들어선 빌딩숲이 아니라 말 그대로 수풀로 우거진 자연공원 속에서 길을 잃을 수 있는 경험은 베를린이 아닌 다른 대도시에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바로 이 때문에 발터 벤야민 역시 그가 베를린을 회상할 때 가장 먼저 이곳 티어가르텐을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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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은 벤야민

“어떤 도시에서 길을 잘 모른다는 것은 별일이 아니다.?그러나 그 곳에서 마치 숲 속에서 길을 잃듯이 헤매는 것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벤야민의『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등장하는 첫 문장이다.?티어가르텐에서는 길을 잃기 쉽다.?넓은 숲속에 나있는 복잡한 산책로들이 미로처럼 얽혀있기 때문이다.?이곳에서 길을 잃는 것은 그러나 나쁜 경험으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여기서 길을 잃은 산책자는 시간에 쫓기거나 뚜렷한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다급함 없이 꿈을 꾸듯 부유하며 자신의 사색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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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어린시절도 그러했다.?벤틀러 다리(Bendlerbr?cke)에서 시작되는 벤야민의 티어가르텐에 대한 회상은 티어가르텐의 미로처럼 복잡한 산책로들 위에서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 이어진다.?이 다리는 어린 나이에 죽은 그의 동급생 루이제 폰 란다우가 살던 뤼초우 물가와 교차하여 란트베어운하(Landwehrkanal,?조금 뒤에 보겠지만 로자 룩셈부르크가 죽은 곳이기도 하다)를 가로지르는 곳이다.?벤틀러 다리를 지나 조금 더 걸으면 티어가르텐의 남쪽 입구가 나온다.?아마 어린 벤야민은 이곳을 거쳐 자신의 목적지로 향했던 것 같다.

 “벤틀러 다리의 완만한 아치형 곡선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언덕의 측면이었다.”

“벤틀러 다리의 완만한 아치형 곡선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언덕의 측면이었다.”

그의 발걸음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은 티어가르텐 안에 위치한 루이제섬(Luiseninsel)이다.?이곳에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와 그의 부인이자 독일인들에게 지금까지도 널리 사랑받는 인물인 루이제 왕비의 동상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서 있다.?벤야민은 이곳을 아주 좋아했고 특히 동상을 받쳐주는 아래 기둥 부분의 조각장식들을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다.?특히 루이제 왕비의 동상 아래 부분에는 남녀간의 격정적인 사랑을 표현해놓은 장식이 있는데,?벤야민이 그의 글에서 바로 이곳에서 그가?‘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일 것이다.?특히 벤야민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루이제 왕비로부터 자신의 동급생이었던 루이제 폰 란다우의 사연을 연상시킨다.?이 둘은 모두 루이제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이로부터 벤야민은 아름다움에는 언제나 차가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그것을 손에 넣으려 제 아무리 시도한다 한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는 비극적인 진실을 깨닫는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

 

전승기념탑

영화?<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인간들의 삶을 엿보고 그들의 생각을 엿듣는 천사 다미엘(브루노 간츠)은 티어가르텐의 정중앙에 위치한 전승기념탑의 여신상 어깨에 올라 앉아 인간 세계를 내려다본다.?사랑의 기쁨,?헤어짐의 고통,?삶의 무게,?시간의 무상함 등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과 그들의 일상적 삶에 무한한 호기심과 동경을 갖고 지내던 다미엘은 써커스단에서 곡예를 하는 어느 여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뒤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천사가 인간이 되려면 자살을 해야 하는데,?이 때 그가 선택한 장소 역시 전승기념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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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기념탑은 프로이센이 프랑스와의 보불전쟁에서 승리,?나폴레옹?3세의 항복을 받아낸 스당전투를 기념하기 위해?1873년 설립되었다.?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이듬해 독일 전체를 통합하고 스스로 황제국으로의 승격을 선포한다.?따라서 전승기념탑은 뿔뿔이 흩어져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근대화를 이룩하지 못한 채 낙후되어 있었던 독일이 프랑스를 제압하고 통일을 이룩한 뒤 유럽최강국으로 변모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물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전 세계인들이 알고 있듯이,?독일의 역사는 이후 평탄하지 못했다.?가빠른 군국주의화 물결 속에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모두 패한 뒤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단되었고 수도 베를린 역시 두 개로 쪼개져야 했다.?그 이후 냉전기간동안 전승기념탑은 독일의 비극적인 현대사,?그리고 동서로 분단된 채 장벽으로 가로막힌 베를린의 현주소를 상징하는 기념물이 되었다.?독일의 승리와 번영의 상징에서 전쟁과 분단의 아픔의 상징으로.?전승기념탑은 독일 현대사의 주요 장면들과 늘 함께 해왔다.?이 점에서 탑의 꼭대기에서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승리의 여신상은 인간들의 삶의 기쁨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천사 다니엘을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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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역사의 진보는 동시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파국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이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적 성찰이다.?마찬가지로 그는 스당전투의 승리와 전승기념탑 건립이 보여주는 독일의 성공과 번영,?그리고 그 정점에 서 있는 나치의 세계대전 수행의 와중에 세계사의 죽음을 보았다.?『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프랑스인들이 패배한 이후 세계서는 영광스러운 무덤 속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으며 이 전승기념탑은 그 무덤 위에 세워진 돌로 된 묘비였다.”

아름다움은 차가운 그림자를 안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루이제 왕비의 동상으로부터 얻은 벤야민의 깨달음은 역사의 흐름에도 적용된다.?군국주의 독일과 나치즘의 승리와 번영은 이미 그 자체로 세계 역사에 짙게 드리운 총체적 파국과 일치한다.?역사의 진보는 그것이 그 정점에 서 있을 때 동시에 참담한 파국의 역사로 나타난다.?승리를 기념하는 탑이 세월이 흘러 전쟁의 비극과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기념물이 되었듯이,?역사는 희극과 비극이 무한히 교차하는 가운데 운명처럼 그 힘을 드러낸다.?벤야민 역시 그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도주하던 중 스페인 국경도시인 포르부에서 자살을 택함으로써 그 스스로 이?“세계사의 죽음”의 희생자가 되지 않았던가?

 

란트베어카날

베를린의 란트베어운하는 많은 것들을 가로지른다.?벤야민은?『베를린 연대기』에서 란트베어운하를 빈민구역과 부유층 거주지를 가르는 경계로 소개한다. “프롤레타리아 주거 지역과의 차단벽 역할을 하는 란트베어 운하의 느릿느릿 흐르는 물”은 계급 분단을 나타내는 지표다.?운하의 남쪽에는 동물원 역과 쿠담 거리가 있고,?고가 명품 의류를 판매하는 상점들이 즐비한 이곳은 베를린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손꼽힌다.?반면 운하와 티어가르텐 북쪽에 위치한 모아빗과 베딩은 노동계급의 집단 거주지였다.?그곳에는 벤야민이 크리스마스 장터를 구경하러 집밖으로 나왔을 때 화려한 트리장식과 달콤한 먹거리들 사이로 자신의 존재를 불쑥 내밀어 그를 당혹케 만든?“가난한 자들”,?그리고 벤야민의 꿈 속에 나타나 그를 괴롭히는“꼽추 난쟁이”들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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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벤야민은 이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알지 못했다.크리스마스가 되면 그는 부모와 함께 화려한 가판대에서 물건들을 구경하지만,?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은 스스로 만든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부유한 집안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장터를 구경나오면 그들에게 구걸을 해야 했다.란트베어 운하가 빈민층 거주지와 부유층 거주지를 구획했듯이,?크리스마스 역시 아이들을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눈다. “크리스마스는 부르주아 집안의 아이들 앞에 다가오면서 그들의 눈앞에서 단번에 도시를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눈다.”

란트베어운하는 슬픔을 간직한 곳이다.?이곳은 그가?『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소개한,?귀족 가문의 동급생 루이제 폰 란다우가 살았고 그녀의 시신이 안치된 곳이기도 하다.?그런데 이곳과 연관된 또 하나의 죽음이 있다.?벤야민이 언급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죽음이다. 1919년?1월?15일 독일 혁명의 와중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반혁명 의용대의 손에 살해당한 뒤 그 시신이 이곳에 버려졌다.?며칠 뒤 그의 시신이 떠오른 곳에는 수십년이 지난 뒤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는 기념물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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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는 란트베어운하가 가르는 가난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의 삶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다가 죽었고,?의용군 병사의 개머리판에 의해 두개골이 부서진 그의 시체는 다시금 란트베어운하에 던져졌다.?벤야민의 꿈에서?“꼽추 난쟁이”의 형태를 하고 나타나 그를 괴롭히는 알 수 없는 형체는,?란트베어 운하가 가르는 계급의 분단에 의해,?전승기념탑이 상징하는 독일의 군국주의화와 되풀이되는 전쟁에 의해 희생되어야 했던,?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의 알레고리인지도 모른다.

티어가르텐에서 길을 잃는 것은 좋은 경험이다.?아드리아네의 실에 의지해 미로를 따라 걷고 또 걷다보면,?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순간들은 결국 지나간 순간들이 우리 앞에 되살아나 오늘날의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벤야민의 무의식 속에서 그를 한없이 괴롭히던 꼽추 난쟁이는 결국 그에게 다가와 속삭인다.

“사랑하는 아이야,?아,?부탁이다,

꼽추 난쟁이를 위해서도 기도해주렴.”

우리는 지금,?누구를 위하여 기도를 해야 할까.

 

정치적 판단과 법적 판단[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정치적 판단과 법적 판단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지난 주말 두 가지 판단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민주당 비대위 대표 박영선이 2011년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 2012년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으로 활동하며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던 이상돈 교수를 비대위 위원장으로 내정했다는 정치적 판단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국정원 선거 개입 관련 재판에서 전 국정원장 원세훈에 내려진 법원의 판단입니다. 둘 다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는 예민한 문제인데, 저는 판단이라는 의미에서 한 번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따르면 판단은 보편과 특수를 결합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이미 존재하는 보편을 특수에 적용하는 규정적 판단과 특수로부터 보편을 찾는 반성적 판단이 있습니다. 전자는 도덕적이고 법적인 판단에서 많이 볼 수 있고, 후자는 미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에서 많이 내려집니다.

 

먼저 특수에서 보편을 찾는 정치적 판단을 보지요. 세월호 정국에서 비대위 대표를 맡은 박영선의 행로를 보면 괴이할 정도입니다. 새누리와의 협상안이 당내에서 두 번이나 부결이 되고, 유족들의 반발도 크게 샀지요. 협상 내용을 떠나서 협상의 기본적인 원칙과 방식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협상에 들어가려면 관련 당사자의 합의를 거친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상대측과 협상하고 와서 당내에서 그리고 유족들의 동의를 구하는 형태인거지요. 본말이 전도된 셈이지요. 비상 상황이라 전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부결되었으면 다시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런 실수를 두 번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 괴이쩍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두 번 실수는 분명히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새민련에서 그냥 넘어간 것도 문제이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새민련 내부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이상돈 교수를 영입하려 했다가 당내의 큰 반발을 사고 있습니다. 아하, 이 대목에 와서 나는 박 대표가 정말 정치적 판단력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포스트 모던적으로 생각을 해서 여야와 진보/보수의 경계를 넘나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상돈 교수는 직전 대통령 선거까지 적장의 책사 노릇을 했던 자가 아닙니까? 그가 아무리 새누리를 비판하고 있고, 합리적 사고와 중도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적장의 책사를 자당의 비대위 위원장으로 앉히려는 생각을 했을까요?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 그렇게 했을까요? 나는 이것이 정치의 기본도 모르고, 정치적 판단이 전혀 안 돼 있는 데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현 상황이 아무런 질적 차이가 없이 무수한 잡다들의 혼재로 비춰진 것이지요. 다 그놈이 그 놈이고, 대신 좀 더 낫거나 좀 더 나쁜 정도의 차이로만 파악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 상황의 보편적이고 객관적 의미나 원리가 파악이 안 되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한다는 것이지요.

 

칼 슈미트 이야기처럼 정치란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야 전선이 어디에 있고, 전략을 어떻게 세우며 전방과 후방에 인력을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할 수가 있지요. 이건 강경파니 온건파니 하는 문제와는 상관도 없습니다. 그동안 새민련이 세월호 정국에서 허둥지둥 거리면서 새누리에 면박당하고 유족들 꽁무니를 따라 다닌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니까 어떻게 행동할 지 판단이 서지 않은 거지요. 한 마디로 정치적 판단력의 부재 혹은 무능, 정치에 대한 무감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셈입니다. 이럴 때는 다른 수 없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장수를 갈아치우는 수밖에요.

 

사진-ttp://www.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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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단은 앞서의 경우처럼 특수한 상황으로부터 그 객관적 의미를 찾아가는 반성적 판단이 있는 반면, 어떤 원칙이나 규칙을 가지고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는 규정적 판단도 있습니다. 국정원장이 지난 선거 정국에서 선거법을 위반했는지를 판단할 때, 국정원법을 위반해서 정치에 개입한 것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했지만 선거에 개입한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한 겁니다. 게다가 정상 참작으로 집행유예를 선고했으니까 사실상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명백히 국정원장이 직원들을 동원해서 11만 건이나 되는 댓글 공작을 한 정황이 드러났음에도 선거법 위반이 아니고 구속도 되지 않았으니 국민의 법 감정이나 여론이 용납하기 힘든 것이겠지요.

 

법적 판단은 사건과 관련된 여러 증거들을 판단해서 해당 법 조항을 적용하는 것이지요. 이 때 이런 판단은 특수한 상황이나 증거에 어떤 조항이나 원칙이 적용되는 가가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상당한 증거 능력과 관련된 공방이 필요하죠. 본 사건의 경우에도 댓글 공작이 2012년 1월 전이고, 야당 후보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 특정 후보의 탈락을 겨냥한 것이 아니고, 이런 댓글 행위가 일상적인 정치 행위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행위인지 등등을 따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증거가 확정이 됐을 때 검찰의 기소내용과 여기에 적용할 법조항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것이죠. 때문에 법원의 이런 판단은 상당히 정교하고 기술적인 법적 판단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법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듯 이 판단은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커피를 뽑는 식으로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사건의 의미와 정치적 성격, 그 파장 등을 바라보는 재판부의 입장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 재벌들이 탈세나 기타 등등으로 법원의 판결을 받을 때 이른바 국민 경제에 미친 공로나 영향 등을 판결 주문에 넣고 정상참작 운운하면서 집행유예로 빼 넣는 경우들이 다반사였습니다. 하자만 이것은 법치와 평등의 원칙에 어긋나는 재판부의 월권이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국민경제는 그들이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에도 판사의 재량권과 해석권이란 차원에서 주관적이고 자의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법원이 재벌에 대해서 이런 봐주기식 판단을 상당히 제한하는 것은 법치와 사법부의 독립이란 측면에서 고무적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재판부가 법조항이란 보편과 사건이라는 특수를 결합해서 판단할 때 자의성이 개입할 여지, 쉽게 말하면 정치적 판단의 여지가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판결문이 문제가 됩니다.

 

이번 판결에서는 국정원의 정치적 개입은 인정했으면서도 집행유예로 빼준 것도 문제가 될 겁니다.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할 국가 기관, 특히 정보기관이 조직적으로 정치에 개입한 것을 인정하고서도 유야무야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판단이지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반 상식적인 정치적 판단을 재판부가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선거에 개입했는가의 여부를 판단할 때 적용한 법조항이 문제입니다. 법원은 선거법 제85조(선거운동금지)와 제86조(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금지)의 차이를 부각시키면서 기소된 제85조 위반이 아니라고 합니다. ‘선거 또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와 ‘선거운동’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공직선거법의 입법취지 및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지요.

 

제86조는 검찰의 공소장에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법원이 판단할 이유가 없어서 별론으로 처리를 했습니다. 선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선거운동 한다는 것보다 외연이 넓고 포괄적이죠. 죄형법정주의 운운하는 것은 그만큼 법을 엄격하고 좁게 적용하겠다는 제스처지요. 여기서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을 연상케 합니다. 이미 국정원의 정치 및 선거 개입 여부에 대해 강력 수사하겠다고 했던 검찰 총장을 사생활 문제로 밀어냈고, 수사팀도 완전히 물갈이를 해놓았습니다. 이런 사전 정지 작업을 통해 건드리면 다친다는 무언의 경고를 한 셈이지요. 이제부터 검찰은 자기검열을 하게 된 것이고, 쉽게 말하면 알아서 기는 개가 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지요. 제86조는 이미 민주당에서 고발장을 제출할 때 적용한 법규인데 검찰이 그걸 몰라서 뺐을까요? 당연히 바보가 아닌 바에야 국민은 검찰과 법원, 그리고 그 윗선의 거래에 대해 상상력을 발동할 수밖에 없지요.

 

세 번째로, 선거운동금지에 관한 85조 적용문제를 보지요. 법원은 국정원의 조직적인 댓글 공작을 정치활동으로 인정했으면서도 집행유예로 무력화했고,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는 판단을 공소장에 없다는 것으로 빼버렸습니다. 이렇게 외연을 좁혀 놓고 나서 마지막으로 국정원의 조직적 댓글이 선거운동도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죄형법정주의 운운하면서 이렇게 좁고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느라 재판부도 고심 많이 했을 겁니다. 한 마디로 재판부는 축소전략을 쓴 것이고 이것이 일관성이 있다고 한다면 뭐라고 하겠나요? 법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하는 것은 법원의 덕목이니까요?

 

그런데 담당 판사는 2013년 야당 시의원의 리트윗 단 한건에 대해 벌금 500만 원이라는 의원직 상실 형을 선고했고, 야당 후보자 배우자가 월간지에 보도된 내용을 인용해 상대 후보자의 부정축재 의혹을 제기하는 이메일 1건을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 쪽에서는 법을 한 없이 축소해서 적용하고, 다른 쪽에서는 한 없이 확장해서 적용한 셈이죠. 이러니 일반 국민의 법 감정은 법원의 판결을 고무줄 판결이라고 생각하고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로 생각하는 거지요. 법관의 자의성과 주관성, 게다가 정치적 판단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판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겠죠. 당장 현직 동료 판사가 이 판결문을 가지고 지록위마(指鹿爲馬)라고 비난하고 나선 겁니다. 동료의 판결문을 비판한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고 용기 있는 행동일 것입니다.

 

중요한 대통령 선거 정국을 앞두고 정치에 개입은 했지만, 선거 운동은 아니라는 판단은 개도 웃을 일이지요. 손바닥으로 해를 가린다고 해서 가려질 수 있을까요? 법관들이 이렇게 뻘짓을 하니까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법원 판결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판결을 가지고 어떤 이들은 법관들이 형식논리도 모른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입니다. 검은 것을 검다 하고, 흰 것을 희다고 하지 못하는 거짓의 문제이지요.

 

나는 모든 법관들이 이렇게 정치성을 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물전의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소수의 출세지상주의 판사들이 사법부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지요. 당장 이 판결문에 대해 의롭게 문제제기를 하는 판사도 있고, 또 이재현 CJ 회장에 대해 과거의 재벌 봐주기 식과 다르게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는 재판부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번의 원세훈 판결과 2013년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국정원 수사 은폐 사건 판결 같은 것은 법원이 스스로 알아서 기는 개가 되는 치욕적인 판결이고, 사법적 정의를 크게 후퇴시키는 판결이라 생각합니다.

 

검찰이야 행정부 소속이고, 최고 권력자의 입김이 검찰총장을 통해 압박으로 가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삼권이 분리된 법치국가에서 법원이 독립적으로 판단을 하지 못하고 권력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국민으로서 대단히 불행하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법치는 헌법이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법을 운용하고 적용하고 또 판단하는 법관들이 법의 정신을 지키려고 노력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무소불위의 권력과 금력이 지금 정치를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국민을 소외시키고 있을 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사법부가 아닐까요? 이 점에서 본다면 법률적 판단은 단순히 보편을 특수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규정적 판단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특수가 지니고 있는 보편성을 알아가는 반성적 판단도 개입하고 이를 통해 법의 정신과 법치주의가 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