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시대와철학의 old&goodys

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 4기에 초대합니다.

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 4기

?– 인간을 이해하는 세 가지 시선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진보적 철학자들이 자유롭게 공존하는 모임입니다.철학을 기반으로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위한 철학 세미나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개설 강좌 안내

* 한철연 교육부 세미나- 인간을 이해하는 세 가지 시선

 

기간: 5월9일~7월25일 매주 토요일3시~6시
대상: 철학과 학부 3~4학년 및 대학원생, 한철연 신진회원
(철학을 토대로 연구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

 

 

1. 류짜이푸, <인간농장>을 통해 본 인간의 맨얼굴

강사: 송종서(경희대 외래교수)

기간: 5월9일~5월 30일(4주)
교재: 류짜이푸, <인간농장>, 글항아리, 2014.

 

2. 헤겔의 역사철학과 현대
강사: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헤겔분과 회원)
기간:? 6월 6일~6월 27일(4주)
교재:? 헤겔, <역사철학강의>, 동서문화사, 2008.

 

?3. 라캉, 욕망의 변증법
교재: 브루스 핑크, <라캉과 정신의학>, 민음사, 2002.
강사:김우철(호원대 외래교수)
?기간: 7월 4일~7월 25일(4주)

 

*? 강좌 수료 이후에는 일정 절차를 통해 정회원으로 가입하여 각 분과에서 활동 할 수 있음.
*? 교육부 세미나의 경우, 전 강좌에 참여해야 함.(부분 수강 불가)
?수업 방식: 강독 및 세미나(필요한 경우 강의 방식 병행)?
?신청 방식: ?메일(pipjc11@naver.com)로 5월 7일까지 자기개서를 보내주세요.
?(자기소개서 다운로드:한철연 홈페이지(hanphil.or.kr)→공지사항)
?수 강 료:? 없음(과목당 최대 수강 인원10명, 최소 수강인원 2명, 2명 미만 시 폐강)
?문 의:? 02-332-4301, pipjc11@naver.com
?기 간: ?2015년5월 9일~7월 25일 매주 토요일 오후3시-오후6시
?장 소: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태복빌딩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미나실

인간의 삶과 종교(1)[대안도덕교과서]-13

인간의 삶과 종교(1)[대안도덕교과서]-13

 

 

진보성(방송대)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세계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1. 삶과 죽음, ‘나’와 ‘신’

 

우리가 살아가면서 가장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자연의 변화 현상이 있습니다. 무수히 많은 예를 들어볼 수 있겠지만 단적인 예로 낮과 밤의 변화를 들 수 있을 겁니다. 하루의 구성은 크게 보면 낮과 밤의 시간으로 나누어져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낮과 밤의 구분을 정확히 나눌 수 있는 잣대가 있을까요? 물론 기준을 정할 수는 있겠지만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계절에 따라서도 차이가 납니다. 낮과 밤의 나뉨에 엄밀한 기준을 설정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대략 오후 2시를 ‘낮’이라고 할 때 1시간 후인 오후 3시는 오후 2시와 같은 낮이지만 오후 2시에 비하면 조금 더 ‘밤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낮’입니다. 또 밤 12시는 명백하게 ‘밤’이지만 새벽을 지나 아침을 맞으면 낮을 밝힐 태양이 떠오릅니다. 이것도 ‘낮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밤’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포함하고 있는 자연의 섭리와 운행을 통해 세상에 태어나면서 삶을 맞이하지만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동시에 죽음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죽음을 향해 한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삶’과 ‘죽음’이란 서로 분리되어 나누어져 분절된 것이 아니라 서로 나뉠 수 없는 하나의 커다란 구성입니다.

하지만 각각의 인간은 서로 분리된 채 개인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의 인간 개체는 다른 인간 개체와는 다른 자기만의 독특한 개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개체들이 모이면 인간 군집이 되고 더 나아가 하나의 사회를 구성합니다. 한편, 이 사회를 구성하는 개체들이 가지는 각각의 개인성은 현대 사회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는 인간 고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자기만의 개성이기도 하구요. 이런 것을 통틀어 우리는 개체성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이 독립된 개체성에 의존해 삶과 죽음을 판단합니다. 인류, 또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식물의 태어남과 사라짐을 자연적인 우주의 운행이라고 했을 때 이 커다란 구성의 관점을 떠나서 삶과 죽음이라는 것을 ‘나’라는 외로운 한 인간이 맞닥뜨린 해결할 수 없는 숙명적인 문제로 받아들입니다. 독립된 ‘나’가 고립된 ‘나’로 변모하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이 ‘나’만의 문제가 되면 그 문제에는 ‘나’의 감정이 개입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삶’이라는 단어를 듣는 다면 어떤 감정이 느껴지나요? 환희, 생동감, 기쁨, 밝음 따위의 감정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슬픔, 우울, 불안, 어두움과 같은 감정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 삶과 죽음에 대한 감정적 대립은 ‘존재(being)’로써의 ‘삶’과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Non-being)’로써 ‘죽음’에 대한 각각의 이미지를 만들어냅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감정의 대입양상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추상적 이미지 보다 삶에 대한 추상적 이미지가 인간에게 더 긍정적으로 다가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에 대해 무한한 추구와 동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은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삶이 언젠가 끝난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인지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현실에서 목도하는 죽음이라는 것을 곧 인간의 한계로 받아들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이 세계는 유한한 세계라고 규정하게 됩니다. 유한한 인간은 곧 죽음을 앞둔 인간입니다. 언젠가는 소멸해버리는 나약함에 서있는 인간이기에 불안합니다. 이 유한한 세계를 뛰어넘기 위해 인간은 신(神;God)을 만들었습니다. 이 신 존재의 중요성 때문에 중세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에 몰두하기도 했지요. 신은 인간이 유한한 세계를 벗어나 현실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우주의 주재자(主宰者)입니다. 신의 세계는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는 무한한 세계이며 또한 끊임없이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세계입니다. 보통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의 ‘천국’이 여기에 해당하는 세계입니다.
 
 

2. 종교와 선·악의 개념

 
신의 필요성에 의해 만들어진 종교에는 천국과 지옥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물론 이 두 세계를 설정한 기원은 주로 서양의 유일신론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신론과 다르게 하나의 신만이 존재한다는 신념은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유래합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에서 보는 신과 인간의 차이가 그렇습니다. 신은 무한하며 완전하고 성스럽고 초자연적인 존재이지만 이에 반대되는 인간은 유한하고 불완전하며 속된 존재로써 일상의 자연적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이 구도에서 신의 영역은 선에 포함되고 인간의 영역은 악에 포함됩니다. 이렇게 종교에서 선과 악을 양분하여 구분하는 것을 선악 이원론이라고 합니다.

물론 다신론의 이란종교에서도 선한 신과 악한 신을 나누어 선과 악을 철저히 구분합니다. 반대로 인도종교에서는 선한 신과 악한 신의 구분이 없는 선악 일원론이 발견되기도 하지요. 또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은 선과 악을 모두 가진 모호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엄밀히 볼 때 선악을 둘로 나누어보는 관점과 하나로 보는 관점은 서양과 동양에 모두 나타나고 있었고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차적으로 그 정도의 차이에 기인하여 선악 이원론을 서양종교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규정하는 것이고, 전 세계적으로 파급된 서양기독교의 영향력에 의해 이분법적 선악 이원론의 전통이 서양종교에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서양종교가 강한 이분법적 전통을 가진다고 전제했을 때 선과 악을 둘로 나누는 특징을 동양, 좀 더 정확히 말해 동아시아 전통에서 발견하기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종교 교단의 종지(宗旨)에 입각해 보았을 때 도교의 ‘도(道)’·불교의 ‘불성(佛性)’등 동아시아의 종교형태에서 말하는 만물의 운행 원리는 이미 모든 사물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을 주재하는 절대적인 유일신을 상정하기는 힘들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절대자적 유일신이 있지 않다고 해서 선악 이원론을 동아시아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악한 현 세상을 물리치고 새로운 선한 세상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대승불교의 미륵사상이나 선천이 가고 후천의 세계가 도래한다는 민중적 혁명사상은 선과 악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종말론적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선과 악을 나누는 이분법적 기준이 서양에서 유래했다고 하여 서양만 선·악을 논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선과 악에 대한 설정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동아시아는 정교일치(政敎一致)체제 안에서 강력한 신념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유교가 종교적 역할을 일부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유교에 ‘극기복례(克己復禮)’라는 말이 있습니다.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말로써 자기의 ‘사욕(私慾)’을 이겨 보편타당한 ‘예(禮)’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일면 건전하기 그지없는 말이기도 합니다만 여기서 극복해야 할 대상 ‘자기(己)’는 곧 인간의 사사로운 욕망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극기’라는 개념은 사적 이기심과 사사로운 욕망의 발단이 되는 현실의 인간을 부정적인 대상으로 볼 수밖에 없는 한계를 만들어냅니다. 이 때 ‘극기’하여 일반 인간 대상을 넘어 이상적 경지로 옮겨가는 자는 선한 행위를 하는 자가 됩니다.

이상적 경지를 설정한 것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Platon, BC427~BC347)이 현실이 모방하고 있는 이상적인 세계 이데아(Idea)를 설정한 것과 비교적 유사한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공자(孔子, BC551~BC479)는 하늘과 같은 이상의 경지에 있는 추상적 선함을 말하기도 했지만 한편, 그것을 땅으로 끌어내려 현실에서 선한 행위를 구현하는 자를 ‘어진 사람[仁者]’이라고 했습니다. 어진 사람만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알아 볼 줄 압니다. 이 때 말하는 ‘나쁨[惡]’이란 어진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어질지 않은 사람에 대한 미움입니다. 선함을 추구하는 어진 사람이 나쁜 행실을 보이는 악한 사람을 좋은 사람이 되도록 교화하려는 미움인 것이지요.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보면 동아시아 전통에서도 선과 악에 대한 개념규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유교의 예를 들어 보았을 때 동아시아의 선악관은 서양의 이분법적 절대 신의 존재에서 파생된 종교의 선악관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종교적인 개념에 좋음과 나쁨이라는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서양 중심의 종교개념 전파로 동서양의 전통적 차이가 현저하게 사라진 현대 종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이상적 세계의 주재자인 신의 영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선이 되고 그 반대는 악이 됩니다. 악의 발원지가 되는 현실 세계에서 악이라 규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것은 우리 삶에서 고통을 수반하는 외부의 영향이 있는지 없는지의 차이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고통의 시작이며 삶을 고통으로 보기도 합니다. 끊임없는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는 회귀적인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은 힌두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체적으로 과거부터 인간을 위협하던 자연재해, 질병, 전쟁과 같이 고통스러운 일들은 유한하고 한계적인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고 이것은 곧 현실 자체를 부정하게 만드는 요소들이었습니다.

이 고통의 현실을 만드는 것에 탐욕스러운 권력자들의 전횡도 한 몫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과 민중들이 비참한 현실에서 죽지 못해 살아갔던 것이었죠. 종교는 선과 악을 구분하고 동시에 현실에서 선을 행하는 대리자들을 만들어 냅니다. 지금도 있는 가톨릭의 교황, 왕권신수설로 만들어진 국왕, 중국의 천자(天子)라는 명칭들은 신 또는 주재적(主宰的) 자연의 섭리를 대신한다고 자부하던 자들이 이름입니다. 이 이름들은 무겁습니다. 무거운 이름은 권위를 가진 이름입니다. 무거운 권위는 가벼움을 상쇄하고 짓눌러 버립니다. 과거의 종교는 신의 이름으로 생동하는 인간의 상상력과 자유를 억압했지요. 중세의 가톨릭이 신의 이름으로 과학과 예술을 장악한 것이 그렇습니다. 1632년 ‘하늘의 원리가 지상에도 있다’고 발언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를 재판정에 세운 것도 종교였고, 예술은 종교와 권력 있는 절대자를 향한 찬미의 예술이 되었습니다.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


 
그 이전 1600년에는 로마 교황청 광장에서 조르다노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라는 르네상스시기 자연철학자가 자연의 무한성을 얘기한 이유로 화형 당한 비극적인 일도 있었습니다. 무한 존재인 신의 섭리가 모든 자연물에 그 자체로 생성되어 있다는 주장은 무한세계 절대자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사안이었던 겁니다. 이미 인간과 신을 나눈 종교는 선과 악을 나누고 현실의 사회정치에서 계급을 통해 인간 스스로를 분류했습니다. 그리고 분류된 인간들을 선별해 선과 악의 가치를 평가하고 소수의 힘 있는 자와 다수의 약자들을 나누어 그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경계를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그래서 신의 이름으로 선한 위치를 선점한 힘 있는 권력자들은 다수의 약자를 악의 영역에 두고 이들을 지배합니다.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2

고통과 절망에 대하여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삶의 고통과 좌절은 늘 우리의 욕구 안에 숨을 쉰다.

고통으로 좌절할 때 희망이라는 행복을 보고

행복할 때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와 좌절을 본다.

한 가지의 고통과 한 가지의 행복은

같은 나무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열쇠이다.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고통1

[신간] 한중일의 유교문화담론

김예호 신간

 

출판사 서평

동아시아 사회 전통문화의 중심축인 유교가 한중일 삼국에서 어떻게 형성 발전되어 왔고, 어떤 특징이 있으며, 유교와 유교문화를 둘러싼 담론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이러한 논의들이 현 시점에 어떤 의미를 시사하는지 전반적으로 개괄한 책

 

▣ 책의 출간 의의

이 책의 기획 의도는 한중일의 유교담론과 유교문화의 정체성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데 있다. 글의 내용은 한중일 3국의 근대전환기 즉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무력으로 충돌한 시기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 근대 전환기 이후 한중일 삼국에서 발생한 유교와 유교문화 담론을 개괄하고 있다.

이 책은 한중일 3국의 전통사회 유교문화에 대한 특징을 서술한 후, 근대 이후 각 국가의 사회·정치·경제의 흐름과 이에 대응하는 유교문화담론의 특징을 고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의 구성도 주요 유교 지식인들의 주장이나 각 시기에 유행한 유교담론의 요지를 소개해 빠른 시간 안에 근대 이래의 한중일 유교담론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두었고, 글의 성격은 중국과 일본보다 한국 분야의 유교문화담론에 더욱 엄격한 평가기준을 적용했다.

한중일 각 나라의 문화담론의 중심에는 언제나 유교가 위치한다. 이는 최근까지 중국적인 것과 중국 정체성, 일본적인 것과 일본 정체성, 한국적인 것과 한국 정체성 등 지속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들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또한 각 나라의 사회정치적 상황 등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담론을 통해서도 유교가 아직도 동아시아 사회에서 중요한 논거가 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의 유교도 미래 사회의 가치에 부응할 수 있게 역할과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한국의 유교가 아시아의 도덕적, 문화적 가치를 선도하는 역할을 자임할 수 있을 정도로 환골탈태할 필요가 있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 한중일 삼국의 유교문화 들여다 보기

 

ㆍ 중국 더 나아가 중국 공산당에게 오늘의 ‘유교’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중국 사상계나 문화계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중국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중국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인데, 덩샤오핑 체제의 중국 공산당이 들어선 이후에 이 문제에 부쩍 더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국학 논의의 중심에 있는 전통 유교문화는 중국 문화 부흥론자들은 물론이고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도 현재 뿌리칠 수 없는 매력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현재 중국 공산당의 주요 관심사는, ‘아시아적 가치’가 아닌 ‘중국적 가치’, ‘유교 민주주의’를 포함한 ‘민주주의’보다는 여전히 경제성장으로 인한 사회적 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통합방안에 있다. 이는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 이후 중국 공산당이 한편으로 개혁개방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학’이란 이름 하에 유교연구를 지원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유교는 한편으로 대외적으로 화교의 자본력을 유인하기 위한 훌륭한 문화 수단이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성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모순을 중화주의의 민족의식 코드로 희석시키는 수단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 향후 중국인의 문화적 자존심은 중국의 경제성장에 편승해 중국을 대표하고 부흥시킬 수 있는 문화적 코드로서 유교부흥을 내세울 가능성은 농후하다.

 

ㆍ 일본 고유의 정체성의 중심축으로 작용하는 ‘화혼’의식과 유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일본의 ‘화혼’의식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치로 근대 전환기 이후로도 일본이 자신만의 고유한 사회문화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중심축으로 작용한다. 즉, 일본의 ‘화혼’의식은, 막부시대에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수입한 원시유교와 성리학을 일본화해 정착시키는 과정, 근대 전환기에 들어서는 탈아입구의 기치 아래 서양철학을 수용하는 과정, 메이지유신 중반 이후로는 화혼(和魂)이 양재(洋才)를 주도하는 과정, 현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식 자본주의를 견지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일본 사회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작용한다. 특히 현대 일본 사회에 이르러서는 자국의 침체된 경제위기 상황 하에서 전후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을 향수하는 극우세력의 등장과 이를 방조하는 상부의 정책 과정을 통해서도 이러한 화혼의식은 확인할 수 있다.

일본 문화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유교를 포함한 타자를 부정하면서도 부정하는 대상을 통섭하는 가운데 그것에 대항하는 이론체계를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즉, 일본은 유학을 수용한 이후 한국과는 달리 중국 고전의 교설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유교에서 벗어나 일본만의 유교를 만들고 또 새로운 학문을 창출해냈다.

이와 같이 일본식 사회문화는 전통문화와 새롭게 유입되는 문화가 긍정과 부정의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중첩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되며, 이러한 중첩 과정의 중심에는 의식적 내지 무의식적으로 항상 ‘화혼(和魂)’의 가치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일본 사회를 평가하는 내부의 자체적인 기준으로 작용한다.

 

ㆍ 한국의 ‘공동체 의식’에 대한 애착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한국 사회는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유교의 본고장인 중국보다도 더 모범적인 유교사회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유교문화는 ‘도덕과 정치의 결합’, ‘가족주의적 서열의 강조’ 등의 중국 유교문화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수용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중국 유교문화와는 달리 더욱 철저하게 성리학에 대한 교조적 입장을 견지하며 수양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중국 유교문화와는 차별성을 지닌다. 이 점에서 조선은 ‘개량된 중국형’의 유교사회 내지 동북아시아 국가 중 가장 모범적인 유교사회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경험하는 동안 황도유학의 본격적인 공세를 받는다. 즉, 일본의 지배 기간 동안 천황 내지 국가 공동체를 강조한 일본식 유교문화의 강력한 영향을 받음으로써 한국의 전통 유교문화는 고유한 자기수양의 형이상학적 색채가 완전히 탈색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위한 유교문화 정략과 메이지유신을 모방한 박정희 정권의 충효 일본(一本)의 일본식 유교문화의 선전 작업을 통해 해방 후 한국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학문적으로는 최근까지 ‘공동체’ 의식의 강화라는 미명하에 ‘대동(大同)’ 이상의 실현이 한국 유교문화의 중요한 본질이라고 논의하는 자리를 어렵지 않게 접한다. 일본 유학에 경도된 한국 유교문화의 공동체 의식에 대한 애착은 IMF 이후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자존적 문제나 자아실현의 문제보다는 한동안 한국 사회에 유행한 공동체라는 집단 곧 국가의 전체적인 부(富)만을 중시한 유교자본주의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된다.

 

 

[서평]통일인문학, 인문학으로 분단의 장벽을 넘다

[서평]통일인문학, 인문학으로 분단의 장벽을 넘다

 

 

최종덕(상지대, 철학)

 

지나온 70년 동안 통일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회자되어 왔지만 일관된 통일정책을 얻어낸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통일을 경제적 이해관계로만 간주했었거나 정치권력의 유지수단으로 보았거나 혹은 미국, 러시아(혹은 구소련), 중국과 일본 사이의 역학관계의 도구적 담론에 그쳐왔기 때문이다. 통일 논의는 이제 좀 더 근원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결과로서의 통일 혹은 반도의 단순한 지형적 통일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통일 혹은 사람의 통일이 우선이라는 인문학적 주장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런 이야기를 담아낸 한 권의 책이 새로 출판되었다. 그것은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에서 낸 <통일인문학, 인문학으로 분단의 장벽을 넘다>(알렙, 2015년 2월)라는 책이다.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씀   알렙, 2015.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씀
<통일인문학, 인문학으로 분단의 장벽을 넘다> 알렙, 2015.

 

이 책은 통일을 위하여 정치권력구조보다 인간다움을 찾는 사람의 통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 책은 이러한 인문학적 시도를 <통일인문학>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통일인문학을 ‘소통’과 ‘치유’ 그리고 ‘통합’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압축하고 있다. 서평자는 이 책에서 말하는 ‘소통-치유-통합’의 통일인문학을 아래처럼 정리해 보았다.

첫째, 통일인문학은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한 근원적 성찰에 기반을 둔 통일 패러다임이다.
둘째, 통일인문학은 남북한 주민 모두 더 나은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확장하는 데 있다.
셋째, 통일인문학은 자유, 평등, 인권, 민주, 생태와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넷째, 통일인문학은 분단구조의 문제를 극복하여 남북사회를 조화롭게 변하게 하려는 과정이다.
결국, 통일인문학은 이질적 남북 사이에 소통을 통하여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민족공동체의 통합을 지향한다.

통일을 위하여 우리는 정치권력의 무모함을 낳을 수 있는 국가중심주의에 빠지지 않고, 배타적 소집단주의의 횡포를 낳을 수 있는 민족중심주의에도 빠지지 않는 이념의 중용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념의 중용이 권력관계의 질곡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국내외 정책보다 오히려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성의 통일기준을 살려야 한다는 이 책의 입장은 매우 중요한 통일 시선이다. 그래서 강만길의 분단시대론이나 백낙청의 분단체제론, 송두율의 통일철학에서부터 경제우선론이나 탈분단주의와 평화우선론의 통일정책, 나아가 시민참여가 무슨 의미를 갖는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책, 33-61)

통일은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서평자에게 매우 중요하게 읽혀졌다. 분단극복은 세계사적 과제이며, 마음의 장벽을 무너트려야 가능하다는 이 책의 논거들은 우리가 되새겨야 할 내용들이다. ‘종북’과 같은 무시무시한 말들이 횡행하는 이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심각한 마음의 질병을 앓고 있다. 이런 마음의 병을 고쳐야만 긍극적인 통일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서평자는 독일 통일과 구소련 해체가 이뤄졌던 1990년 전후 독일에서 오래 살았기에, 화려한 정책보다 상처받은 주민들 사이의 마음을 치유하고 타자와 공존하는 길이 더 중요하고, 더 경제적이며, 더 실질적이고 더 역사적임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통일에 대한 새로운 조망을 나에게 던져주었다.

소통과 치유는 결국 내 안의 타자와 진심어린 대화를 얼마나 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그래서 이 책은 이질성과 동일성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소상히 해주고 있다. 통일정책을 하는 정치권력자들이 ‘이질성-동일성’ 논의에 관심도 두지 않을 터이지만, 타자를 끝까지 배척하는 습성을 버림으로써 통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를 우리 안에 가둬놓고 있는 폭력성과 권력의식, 증오와 분노의 병증을 치유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한다. 통합을 위해 소통은 필수적이다. 남을 배척하고 증오하고, 나를 내세우고 나만을 인정해달라고만 떼를 쓴다면 소통은 불가능할 것이 너무 뻔할 뿐더러, 통합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소통-치유-통합의 통일인문학 중에서도 치유의 힘을 가장 중시하고 있다.

분단을 고착화하는 내부의 마음에 해당하는 분단 아비투스에서 벗어나는 일이 가장 급선무라고 말한다. 그래야만 우리 안에 숨겨진 분단 트라우마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책, 79) 내 안의 타자와 공존하는 길은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여는 데서 시작한다고 했다.(책, 125) 나는 어떻게 해야 마음의 문을 열어서 통일에 다가갈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길을 이 책에서 찾아보았다. 속 시원한 한 마디의 정답은 없었다. 그런 정답을 찾으려는 내 심보가 바로 우리 내부에서 소통을 가로막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해 준 것이 바로 이 책의 진정한 의미였다. 통일은 결과가 아니며 한 방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다 아는 일이지만 독도 문제가 해결 안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 내부에 친일의 권력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친일의 집단은 그동안 소리를 숨죽여 오다가 최근 들어 노골적으로 그들의 세력을 과시하고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이런 사연은 통일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즉 누구나 통일 원하는 듯해도 통일이 안 되는 진짜 이유는 아마 우리 내부에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내부를 비판하고 반성하여 통일운동을 실천하는 성찰적 인문학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필요성을 이 책 <통일인문학>이 대신 말해주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어보도록 추천한다. 특히 통일 관련한 정책권과 정치권 사람들이 쌓여있는 하나의 보고서 파일을 훑어보는 태도가 아니라 조용한 시간 내어 차분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면 신나는 미래의 한반도를 구상할 수 있을 것으로 서평자는 확신한다.

0과 1 [철학을다시 쓴다]-30-3

0과 1?[철학을다시 쓴다]-30-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0과 1>에 덧붙임

0과 1의 논의에서 빠뜨려서는 안 되는데, 빠뜨린 사람이 있어요. Spinoza와 형이상학의 측면에서 본 Marx의 이론입니다. 저, 학사학위 논문을 스피노자의 Ethica, 석사학위 논문을 Epicuros 이론을 주제로 삼아 썼어요. Ethica는 다시 정독하고 싶고, 막스의 자본론은 나름으로 제법 꼼꼼히 정독했는데, 막스가 고대원자론자, 특히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유물론을 완성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막스 이론에 끼친 스피노자의 이론은 제가 알기론 우리 나라에서 크게 주목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서양 철학계의 동향은 잘 모르겠어요.

막스의 ‘물질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에 대한 언급은,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원자론자들의 세계 인식에 닿아 있지만, 제가 보기에 길잡이 구실은 스피노자가 하지 않았나 싶어요. 스피노자가 말한 ‘natura naturans’와 ‘natura naturata’ 기억하시죠? 제 기억에 ‘能産的 自然’, ‘所産的 自然’으로 번역된 것 같은데, 아마 일본 사람들 번역이 아닐까 싶어요. ‘Philosophia’를 ‘철학’으로 옮겨 놓은 것도 그 사람들이지요.

이 말, natura naturans를 ‘자연스럽게 하는 자연’으로, natura naturata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자연’으로 옮겨도 될 것 같아요. 이때 ‘자연스럽게 하는 것’(naturans)은 힘이에요. 이 힘은 동시에 ‘생성’하는 힘이기도 하고 ‘소멸’하는 힘이기도 하지요.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의 새끼줄을 꼬는 힘을 가리킨다고 봐요. 이 운동의 저 밑바닥, ‘없는 것이 없을 것’과 하나가 되는, ‘없음’에 닿는 그 ‘한계점’(tangent)에서 이 운동의 저 꼭지점 ‘있는 것이 있을 것’과 둘이 아닌 ‘있음’에 닿는 그 ‘한계점’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성과 소멸을 관장하는 2중의 힘이 작용하는데, 이 ‘확산’하고, ‘응축’하는 두 힘이 ‘평형’을 이루는 ‘마디’에서 우리의 감각과 의식에 주어지는 것이 바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자연’이 아닌가 해요. 이 ‘마디’는 저마다 ‘페라스’를 나타내지요. 겉으로, 밖으로 드러나는 ‘페라스’이기도 하고, ‘기억’(m′emoir)으로 드러났다 ‘망각’(oblibium-이 철자 맞나요?)으로 사라지는 한계점에서 형성되는 ‘페라스’이기도 해요. 크게 보면 모두 힘으로 ‘있는 것’ 1과, 힘으로 ‘없는 것’ 0의 접합점(tangent)에서 나타나는 ‘동요하는 평형’(equilbrium)이라고 볼 수 있어요.

당구를 쳐 본 사람은 두 당구공이 한 점에서 맞닿아 있을 때, ‘떡’이다, 아니 ‘스위치’다 하고 서로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을 거예요. ‘페라스’로 얼핏 드러나는 이 ‘점’은 ‘페라스’가 아니에요. 이 ‘점’은 빨간 공에도 안 속하고 하얀 공에도 안 속해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무엇이에요. 이것을 우리는 ‘아페이론’이라고 해요. 아무것도 아니면서 이것과도 잇닿아 있고, 저것과도 잇닿아 있는, 그러면서 여기에 붙는가 하면 저기에도 붙는, ‘시간’의식과 ‘공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원초적인 힘, 생성과 소멸의 측면에서 보면 naturans인데, 드러난 현상으로 보면 naturata인 것, 1에서 0에 이르는, 또는 0에서 1에 이르는 각각의 무한한 단계와 과정에서 꼬이고 마디를 이루는 ‘평형’을 드러내는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의 새끼꼬기, 여기에서 1을 원동자로 보느냐, 0을 원동자로 보느냐에 따라 ‘형이상학’과 ‘세계관’이 달라지는데, 제가 섣불리 입을 놀리자면 ‘기독교’는 1에 붙고, 불교는 0에 붙어요. 그렇게 보여요.

막스는 베르그송이나 마찬가지로 2원론자예요.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보다 앞서요. ‘의식’과 ‘물질’ 다 인정해요. 다만 ‘물질’의 힘을 더 크게 보아요. 막스를 ‘유물론자’로 보는데, 크게 보면, ‘물질의 규정성이 의식의 규정성에 앞선다’는 뜻에서 그렇게 비치는 거예요. 밑에서 올라오는 힘을 더 크게 보았는데, 그 힘의 근원이 1에 있다기보다 0에 있다는 것, 아주 비속하게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없는 놈’의 숨은 힘이, ‘있는 놈’의 드러난 힘보다 더 쎄다는 것을, ‘없는 것’이 ‘있는 것’을 이긴다는 것을, 인간적인 ‘결핍’과 ‘과잉’, ‘있을 것’(아직 ‘없는 것’), ‘없을 것’(군더더기로 ‘있는 것’)의 관계에서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세상 만들자.’ 그게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상의 ‘평형’이라고 외치는 것뿐이에요. 이 지향점은 ‘오래된 미래’를 꿈꾸었던 노자의 ‘과민소국’, 아주 조그마한 마을 공동체예요. 그 세상 오면 ‘먹물’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져요. ㅎㅎ

 

*다시 0과 1에 덧붙임

‘있음’은 ‘있는 것’과 ‘있을 것’이 ‘하나’, 1이 되는 지점에 ‘한계’(peras)로, 허공 속에 매달려 있다는 이야기했나요? 이렇게 뭉뚱그려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있는 것’과 ‘있을 것’이 ‘하나’가 되는 지점은 무얼 가리킬까요? 여기에서는 ‘있는 것’, ‘하나’, 1이 앞섭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했던 ‘스스로는 안 움직이면서 움직이게 하는 것’, ‘정지’이면서 ‘운동’의 원인이 되는 것, ‘순수형상’, ‘일자’(―者), 신, ‘하나님’이 앞서지요. 그러나 거기에 달라붙어 있는 ‘있을 것’은 ‘없는 것’입니다. 있어야 마땅하지만 아직은 없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요청이고, 당위이고, 미래입니다. 그런데 사유의 한계이자, 우주의 한계인 이 ‘있음’ 밖에 또 하나의 한계가 있습니다. ‘있음’이 허공에 감싸여 있다면, 또 하나의 ‘페라스’인 ‘없음’은 ‘있는 것’에 감싸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없음’은 ‘없는 것’과 ‘없을 것’이, 빠지고 또 빠져서 더 이상 ‘빠진 것’이 없는 텅 빈 그 무엇, 0집합, 무한한 것, ‘무규정적인 것’, ‘아페이론’의 극한에 자리 잡고 있다고 했습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Timaeus) 편에서 이 ‘없음’이라는 한계를 우주의 중심에 놓습니다. ‘있음’이, 1이 확장의 한계선이라면, 모든 ‘생성’이 그 한계선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울타리라면, ‘없음’은, 0은 ‘소멸’이 그 한 점에서 멈추는 응축의 한계점입니다.

‘있음’이 ‘파이’(π)라면 ‘무산소수’의 바깥 테두리라면, ‘없음’은 보이지 않는 점입니다. (‘소수’(prime number)는 1과 0 사이에, 무한히 흩어져 있습니다. 이 ‘소수’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소수’가 어느 날 슈퍼컴퓨터의 연산 작업으로 발견될지 모른다는 수학자들의 꿈은 수의 영역을 0과 1이 거꾸로 뒤집힌 10진법을 자연의 질서로 받아들인 야바위 놀음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피타고라스가 모든 ‘형상’(idea)을 수로 환원시킬 때, 그리스 수학에는 0이 도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0을 3으로 나눈다는 터무니없는 셈법은 자리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없음’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없는 것’과 ‘없을 것’이 한점으로 수렴되는 극한입니다. 이 극한과 맞닿아 있는, 어떤 것도 두 번 되풀이되지 않고, 어떤 순간도 두 번 지속되지 않는 이 한계점 바로 위에서 ‘여럿’은 숨은 채로 드러납니다. ‘있음’에서는 ‘있을 것’(없는 것)이, ‘결핍’이, ‘빠진 것’이 드러날 듯 숨어 있는 것과 달리, 이 지점에서는 ‘없을 것’(있는 것)이, ‘군더더기’들이, ‘과잉’이 ‘생성’의 이름으로 ‘평형’을 깨면서 이루는, ‘에셔’(Mauris Cornelis Escher)가 ‘올라가면서 동시에 내려가고, 내려가는 길이 올라가는 길’을 그린 그림에서,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이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모순의 통일’을 드러내는 그림에서 보여 주는 ‘혼돈’(chaos)이 싹틉니다.

‘드러날 듯이 숨어 있는 모순’과 ‘숨은 채로 드러나는 모순’이 ‘있는 것’을 ‘없음’의 극한까지 끌어내리는 ‘하강운동’을 일으키고, ‘없는 것’을 ‘있음’의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상승운동’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무한히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뒤틀리는 매듭, 마디마다 무한히 겹쳐 쌓이는 ‘흔들리는 평형’(equilbrium)의 연속 계단을, 크고 작은, 많고 적은 단계를 우리의 감각과 사고에 드러냅니다. 이 ‘매디’는 ‘마야의 베일’에 싸인 채로 우리에게 ‘현상’으로, ‘사유’의 파편으로 드러나지요. 감각에 직접 주어지기도 하고, 의식에 직접 주어지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마야의 베일’은 때로는 ‘흉내’로, 때로는 ‘환상’으로, 때로는 ‘견해’로, ‘판단’으로, ‘말’로, ‘거짓’으로, ‘속임수’로, ‘믿음’으로 드러나면서 숨고, 숨으면서 드러납니다.

어쩌면 철학은 사람이라는 별난 생성과 소멸의 모순된 응결체가 생명의 탈을 쓰고 벌이는 가장 그럴싸한 거짓과 속임수의 말놀음일지도 모르고, 그 안에서 종교라는 아편을 키우고 있는 ‘믿음을 통한 세상 편가르기’의 빌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 이 자리에서 내가 여러분의 뒤통수를 목침으로 내려치고 있다면, 이에 대한 여러분의 직각적인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여러분이 미처 통증을 느끼기도 전에 까무라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와야겠지요.

‘아파, 이 씨팔놈아! 너 죽고 싶어?’

 

 

 

“이 노래만 들으모 지금도 눈물이 난다” [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8

“이 노래만 들으모 지금도 눈물이 난다”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아아들 아버지는 애락원에서 만났다. 애락원은 개신교다. 개신교 플래처 목사가 세웠는데, 대구나병원이라고 한다. 애락원 거기는 병원이었다. 아매 지금 동산병원과 연결되어 있을 거다. 그때는 나환자들만 보는 병원이라 다른 환자들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 격리시키는 거제. 산위에 고아원이 있었다. 후문으로 가면 기념관이 있었제. 전에 보니까 애락원 나무들은 별로 안 변한 것 같더라. 그 집들이 지금도 있을까 모르겄네.

그때 애락원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병 표가 안 나서 시장꾼으로 밖으로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니까 밖에 나가서 필요한 물건도 사 오고, 간혹 환자들에게 오는 돈이 있으모 가서 찾아오고 하는 일을 했다. 병표 나는 사람이 밖에 가서 일을 볼 수 없고, 환자는 함부로 밖에 못 나가지만, 그 사람은 겉으로 보모 워낙 멀쩡해 보이니까 일이 있으모 수시로 다녔지.

애락원에는 평옥과 구이층집으로 불리는 건물이 있었다. 평옥은 단층집인데 여자 환자들이 지낸다. 구이층집은 오래된 2층집이라서 그리 불렀는데 남자들이 살았다. 사는 곳은 달라도 애락원 마당은 같이 쓰니까 마주치고 했지. 그 사람은 발이 좀 시원찮았다. 나는 사람들이 오물짜 같다고 했다. 지금 이쁘기는 뭐가 이쁘노? 니도 거짓말 참 잘한다. 그 때도 이쁜 기 아이라 얼굴이 하얗고 작다고 그리 부르더라.

성심원 들어가는, 눈쌓인 다리 사진 촬영 엄삼영 수사

성심원 들어가는, 눈쌓인 다리
사진 촬영 엄삼용 수사

그 남자 누나가 자꾸 나를 불러내는 기라. 그래 밖으로 나가모 그 남자가 기다리고 있고 그러대. 응, 뭐 연애라면 연애지. 좋았지. 시간이 지나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다 알고. 그 사람은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나한테 꼭 뭔가 사오고는 했다. 둘이서 철문을 타고 살짝 넘어가서 영화관도 가고, 손도 잡고 그랬다. 대구 극장에서 영화 봤다. 내가 원에 허락받고 외박 나가는 날에는 역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병표가 없으께, 그리고 원에는 이런 저런 일들이 많으니까 내가 외박 나가는 날에는 지도 뭔 핑계를 만들어서 나오는 거지. 오빠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나오면 서문시장가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거기 가서 만났다. 내가 오빠 집에 가는 날이모 그 사람은 서문시장가에서 항상 기다리고 있었거든. 어떤 때는 둘이서 시장에서 저녁 먹고 대구극장 가서 영화보고 했지.

그렇게 지내는데, 애락원에 김진옥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함흥 사람인데 우찌우찌해서 애락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 친구가 그러는 기라. “흥남으로 가라. 니 정도면 흥남 가서 살모 아무도 나환자로 안 본다. 니는 손만 표가 좀 나니까 그리로 가모 아무도 모른다.” 그러는 기라. 그 위쪽에는 손에 화상 입은 아아들이 많아서 나도 화상입어서 그리 된 줄 알거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리 가기로 했다. 그 사람은 한 달 먼저 함흥으로 가서 기다리고, 나는 원에서 수속 밟아서 엄마하고 오빠하고 기차타고 한 달 후에 갔다. 나 시집 보낸다고 우리 엄마랑 오빠가 이것저것 좀 장만해서 같이 간 거라. 그 사람은 나 기다리면서 한 달 내내 하루도 안 빠지고 흥남 역에 나와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더라. 내가 언제 올지 정확하게 모르니까 그리 한 거지. 매일 나와서 기차가 올 때마다 뛰어와서 찾다가 없으면 다음 기차가 올 때까지 노래를 부르며 왔다 갔다 하면서 기다렸다 카더라.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타관땅 밟아서 보니…” 아이고, 이 노래만 들으모 지금도 눈물이 난다. 허허허, 내가 안 올까봐 불안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더라. 혹시 가요무대에 이 노래가 나오모 그리 좋다. 옛 추억이 생각나고, 그때가 꼭 지금처럼 생생하고 그렇다. 애락원에 15살에 들어가서 23살에 나왔다. 24살에 결혼했다.

우리 오빠가 그 사람을 흥남지서에 취직 시켜줘서 먹고 사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게 웃지방은 너무 추운 기라. 방과 부엌에 벽이 없다. 아이고, 참, 그 말을 그리 못 알아 듣노. 너무 추우니까 솥이 방안에 있는 기라. 그러니까 아궁이 불 넣는 데는 부엌에 있고 솥은 방안에 있는 거지. 불 때서 방을 뜨겁게 하는 거로는 난방이 제대로 다 안 되는 기라. 부엌에서 불을 때면 자연히 난로가 되고, 방은 뜨거워도 밖이 워낙 추우니까 방안이 썰렁해. 그래서 방안에 솥이 있는 거지. 방안에 솥이 있으니까 추워서 솥을 안고 자다가 어린 아아들이 손을 데이기도 하고, 어린 아이가 뽈뽈 기어 다니다가 솥에 손을 데이기도 하는 거지. 밖에서 방으로 들어올라 하면 부엌으로 들어와서 방으로 온다. 부엌이 참 깨끗타.

그래 보니까 거기에는 나처럼 손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많아. 나는 심한 것도 아이라. 시장에라도 가면 사람들이? “아이고, 새댁이 욕 봤겄네.” 하고, 또 “어쩌다 이랬을고, 쯧쯧쯧”하지 내가 이 병에 걸렸다고는 생각을 안 하더라. 그러니 마음 편하게 살았다. 좋았지. 좋은 사람하고 사니까…… 그 사람도 겉으로 표가 안 나니까 아무도 우리를 그리 안 봤거든. 그러니 밖에도 맘대로 다니고, 그랬다.

해방이 되고 고향도 가고 싶제. 오늘 내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남으로 갈라모 빨리 가라하는 거라. 삼팔 선이 그어져서 시간이 지나면 못 간다고 하대.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서둘러 갈라고 보니까 이미 사람은 삼팔 선을 못 넘는 거라. 할 수 없이 남편 먼저 가고, 속초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때 딸이 3살이고 아들은 뱃속에 있었다. 아니다. 남편만 먼저 갈라고 간 게 아이라.

사람이 삼팔 선을 못 넘으니까 배를 타고 가는데, 사람은 배에 탈 수가 없고, 짐만 실어 가는 거지. 응, 화물선 쯤 되는 갑다. 사람들이 그 짐 보따리 안에 숨어서 가는 거지. 근데 나는 그때 임신 7~8개월 때라 배도 부르지만 3 살배기 딸을 짐 속에 숨길 수가 없지. 얼라가 울기라도 하고 보채기라도 하면 숨어 있는 사람 다 들켜서 바다 귀신이 될 판이니 나하고 딸은 어찌하든지 육로로 해서 남쪽으로 내려와야 하는 기라.

함흥에서 일부러 옷을 남루하게 해서 떨어진 광목치마를 입고 보따리를 이고 딸 손잡고 연천까지 왔다. 연천에서 밥을 사 묵으러 들어가서 이남 가는 길을 물었다. 그러니까 주인이 이남 갈려면 논둑을 타고 가야 한다고 길을 요리조리 가서 어찌 어찌 가라고 가르쳐 주더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기 가다보모 꼭 지나야 하는 다리가 나오는데, 그 다리 밑에는 소련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데, 들키모 그 자리에서 바로 총알 맞는다고 조심하라고 일러 주는 기라.

하이고 참, 밥을 시켜 묵고 해는 지고 ‘어찌할꼬’ 하고 앉아 있는데 웬 여자들이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여남은 살 먹은 머스마를 데리고 들어오는 거라. 주인이 저 사람들이 이남으로 장사를 다니는 사람들이니까 따라 가면 될 거라고 일러 주더라. 그래 그 사람들에게 나도 이남 가야한다고 데려가 달라고 했지. 어린 머스마가 딸려 있어서 말을 했지, 어른들만 있었으면 말 못했다.

알고 보니까 그 사람들은 이남에 없거나 귀한 것들을 떼서 이고지고 이남으로 가서 팔고, 거기서는 또 이북에 귀한 거를 사 와서 파는 보따리 장사들인 기라. 그 사람들이 데리고 있던 머스마는 저거 아아가 아니고, 그 사람들도 부탁 받고 머스마를 이남으로 데려다 주는 기라. 같이 가기로 하고 잠이 살짝 들었는데, 그 사람들이 깨워 보니 캄캄한 밤중이라. 해뜨기 전에 임진강에 가서 배를 타야 된다고 하더라.

너무나 작은, 그러나 너무나 소중한 할머니의 서재 사진촬영 김성리

너무나 작은, 그러나 너무나 소중한 할머니의 서재
사진촬영 김성리

새벽 두 시에 자는 애 깨워서 밥 먹고 장사꾼들을 따라 나섰다. 캄캄한 밤에 어데가 어딘지도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은 여러 번 다녀 놓으니까 잘 가대. 나는 배는 부르고 보따리는 이고 딸애 손을 잡고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길을 죽을 동 살 동 따라 갔다. 그 사람들을 놓치모 오도 가도 못 하는 기라. “새댁이 걸음이 와 그리 느리네”하면서 어서 가자고 재촉은 해도 나를 두고 가지는 않더라. 근데 그 머스마 덕분에 내가 따라 붙었지. 여남은 살 먹은 아아가 얼마나 잘 걸을 수 있겄노. 허허허 그 머스마 덕을 좀 봤다.

밤새 걷고 또 걸었다. 참 산길이 끝이 없더만. 저 멀리서 해가 떠오르려고 하니까 뿌옇게 주변이 보이는데, 옆에 보따리 장사가 한탄을 하는 거라. 알고 보이 밤새 동네 뒷산만 뱅뱅 돌았던 거라. 출발했던 그게 와 있는 기라. 하하하, 참 지금은 웃음이 나온다. 그때는 앞이 캄캄했지. 임진강으로 가서 배를 타야 하는데, 그 배를 못타면 이남으로 못 가는 거야. 육로로 걸어서는 소련군 총알에 죽을 판이고.

“아이고, 큰일 났네. 어서 갑시다. 어서” 아주머이들이 난리가 났지. 참말로 죽을 힘을 다 해서 산길을 걸었다. 밤중에 산으로 산으로 얼마나 걸었을꼬. 인자 해가 떠올라서 사방이 훤하지. 말하자면 배를 몰래 타고 임진강을 건너 이남으로 가는 거지. 그 사공은 우리를 태워주고 다시 이북으로 와야 하는데, 우리가 늦으면 그 사공이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 기라. 배 삯은 벌써 줘놨지. 그러니 전부 애가 타는 거라.

죽어라고 따라갔다. 하이고, 말 못한다. 고무신을 신고 있었는데 발은 부르트고 퉁퉁 붓고, 그래도 그 발로 죽어라고 따라 붙었다. 딸아를 업었다. 보따리를 이고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어데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 보따리 장사꾼들을 안 놓치려고 허겁지겁 따라 붙었다. 배는 부르지 아아는 업었지 보따리는 이고, 참말로 그 머스마가 은인이라. 갸는 지금 어데서 우찌 살고 있을꼬.

저 멀리 임진강이 보이고, 사공이 우리를 알아보고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대. 허겁지겁 배에 올라탔는데, 사방이 너무 훤해서 간이 쪼그라들데. “하이고, 인자 오면 어짜요. 갈까말까 했소. 왜 이리 늦었소?”하면서 사공이 한탄을 하더라. 사공도 사방이 그리 훤한데, 지도 들키모 총살이니 암만 돈이 좋아도 목숨보다 귀한가. 그때는 아무도 못 넘어가. 육지는 군데군데 소련군이 지키고 섰제, 바다는 화물선만 다닐 수 있었어. 참 살벌한 시대였다.

배를 타고 건너 편 임진강에 도착하니까 이남에서 보고 있던 순경들이 고생했다, 어서 오시오 하면서 환영을 하더라고. 참말로 이남에 왔다 싶대. 인자 거기서 화폐교환을 해 주더라. 북쪽 돈하고 남쪽 돈하고 다르니까 교환을 해야지. 북쪽으로 가는 사람하고 남쪽으로 온 사람들하고 서로 갖고 있던 돈을 다 바꿨다. 그리고는 동두천으로 갔다. 거기 수용소가 있는데, 예방주사도 맞고 어디로 갈 건지 물어도 보고 하더라.

동두천으로 가는 길은 꼭 가리마 같은 길을 걸어서 갔다. 비가 왔다. 고무신 안에 물이 차서 걸을 때마다 철컥철컥 하고, 이미 퉁퉁 부어 있는 발은 인자 고무신 안에서 불어터져서 피고름이 신 안에 흥건했다. 애기 업은 두데기(포대기)까지 물이 줄줄 흐르고, 힘든 거는 말로 다 못한다. 그래도 가야지. 동두천 수용소에서 전국으로 흩어지는 기라. 나는 일단은 대구로 가기로 했다. 친정에 가서 순천으로 갈라고 했지.

기차역에는 사람들이 억수로 많아. 기차는 자주 없고 사람은 많으니까 빨리 표부터 끊어 놔야지. 그래서 딸아를 보고 “엄마 올 때까지 꼼짝하지 말고 여게 있어라. 이 보따리 꼭 잡고 있어라.” 하고 나는 표를 끊으러 갔다. 남대문으로 가야 부산 가는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가지. 겨우 표를 끊어 갖고 오니까 보따리가 없는 기라. 보따리 어데 갔냐 하고 물어도 딸아는 말이 없고, 옆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할매가 와서 보따리 달라고 하니까 그만 주더란다. 그래서 저거 할매인 줄 알았다 안 카나. 그 보따리 안에 옷하고 돈이랑 다 들어있었는데……

 

 

제8장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자본론강독]-17

제8장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자본론강독]-17

정리 : 신준하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구체적 내용과 목적과 기술적 성격여하를 막론하고 노동대상에 일정한 양의 노동을 지출함으로써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첨가한다. 다른 한편 소비된 생산수단의 가치는 보존되어 생산물 가치의 구성부분으로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노동자가 동일한 시간에 이중으로 노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새로운 가치를 첨가하는 바로 그 행위에 의해 종전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이다. (노동의 이중성으로 인해) 노동의 단순한 양적 첨가에 의해 새로운 가치가 첨가되며, 첨가되는 노동의 질에 의해 생산수단의 원래의 가치가 생산물에 보존된다.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서 그 사용가치의 본래의 형태를 상실하고 생산물에서 새로운 사용가치의 형태를 취한다. 예를 들어 원료와 보조 재료는 사용가치로서 노동과정에 들어갈 당시의 독자적 모습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생산물의 속성으로 나타난다. 도구, 기계, 공장건물, 용기 등은 죽은 뒤에도 모습을 가지지만, 생명이 다하면, 사용가치는 완전히 소비되고, 따라서 교환가치는 완전히 생산물로 이전된다. 그러나 생산수단은 노동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사용가치의 소멸로 말미암아 잃는 것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물에 넘겨주는 것은 아니다.

생산적 노동이 생산수단을 새로운 생산물의 형성요소로 전환시킴으로써 생산수단의 가치는 일종의 윤회를 겪는다. 그러나 이는 현실적 노동의 배후에서 일어난다. 노동자는 원래의 가치를 보존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노동을 첨가할 수 없으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없다. 따라서 가치를 첨가하면서 가치를 보존한다는 것은 활동 중의 노동력[살아있는 노동]의 자연적 속성이다. 이 자연적 속성은 노동자에게는 아무런 비용도 들지 않으나 자본가에게는 현존하는 자본가치의 보존이라는 큰 이익을 가져다준다.

생산수단에서 실제로 소모되는 것은 그 사용가치이고 이 사용가치의 소비에 의해 노동은 생산물을 형성하는 것이다. 사실상 생산수단의 가치는 소비되지 않는다. 생산수단의 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에 재현되기는 하나, 엄밀히 말해 재생산되는 것은 아니다. 생산되는 것은 [원래의 교환가치가 그 속에 재현되는] 새로운 사용가치이다.

노동과정의 주체적 요소[즉, 스스로 활동하는 노동력]의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노동이 특수한 목적을 위해 행해짐으로써 생산수단의 가치를 생산물로 이전해 보존하는 동안, 노동의 각 순간마다 추가적 가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

노동자가 6시간 노동에 3원의 가치를 첨가했을 때 이 3원이라는 가치는 생산수단의 가치로부터 이전된 부분을 넘는 초과분이다. 생산과정에 발생한 유일한 본원적 가치이며, 생산과정 자체에 의해 생산된 유일한 부분이다. 이 지출된 화폐 3원에 관해서 보면, 2원이라는 새로운 가치는 재생산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재생산된 것이고, 생산수단의 가치처럼 이전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동과정은 노동력 가치의 단순한 등가물이 재생산되어 노동대상에 첨가되는 점을 넘어 계속된다. 노동력 가치의 등가물을 재생산하는 데는 6시간만으로 충분하지만 노동과정은 예컨대, 12시간 계속된다. 따라서 노동력의 활동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재생산 할 뿐 아니라 일정한 초과가치를 생산한다. 이 잉여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와 그 생산물의 형성에 소비된 요소들[즉,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 사이의 차이이다.

생산물의 총가치 중 이 생산물을 형성하는 요소들의 가치총액을 넘는 초과분은, 증식된 자본 중 최초에 투하된 자본 가치를 넘는 초과분이다. 생산수단과 노동력은, 최초의 자본가치가 [자기의 화폐형태를 벗어버리고 노동과정의 요소들로 전환할 때] 취하는 상이한 존재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 중 생산수단[즉, 원료, 보조재료, 노동수단]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생산과정에서 그 가치량이 변동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자본의 불변부분 또는 간단하게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자본 중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생산과정에서 그 가치가 변동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등가물을 재생산하고 또 그 이상의 초과분, 즉 잉여가치를 생산하는데, 이 잉여가치는 역시 변동하며 상황에 따라 크게도 작게도 될 수 있다. 이것을 자본의 가변부분 또는 간단하게 가변자본(variable capital)이라고 부를 것이다. 노동과정의 입장에서는 객체적 및 주체적 요소[즉, 생산수단과 노동력]으로 구별되는 바로 그 자본요소들이 가치증식과정의 입장에서는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구별된다.

불변자본의 규정은 그 구성부분의 가치변동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가치변동이 더 많은 가치를 증식하거나 더 많은 가치를 이전할 수는 없다.

또한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양적 관계 [다시 말해, 총자본이 불변적 구성부분과 가변적 구성부분으로 나누어지는 비율]을 변경시킬 수는 있지만,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사이의 본질상의 차이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0과 1 [철학을다시 쓴다]-30-2

0과 1?[철학을다시 쓴다]-30-2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제부터 제 이야기할게요.

1을 우리의 의식 안에서 형상화할 수 있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입시다. ‘있는 것’, ‘하나로 있는 것’(기독교에서는 ‘有-神’이라고 부르죠.)을 1로 표기합시다.

0도 우리 생각 속에 들어오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입시다. ‘없는 것’이라고 합시다. 그리고 ‘없는 것’도 있다고 칩시다.

‘있는 것’ 하나, ‘없는 것’ 하나(없는 것을 하나로 놓는 건 무리가 있지만 어쨌던 극한치에서 볼 때는 하나로 볼 수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1+0=2가 돼요. 이때 ‘+’(더하기, 보태기)는 1과 0을 맺어 주는 구실을 하지요.

그런데 +는 실체가 없어요. 기능이에요. 운동이지요. 맺어 주는 그 무엇이지요. 제3의 것이에요. 1과 0을 떼어놓으면서 이어주는 것. 그러면서 1도 0도 아닌 것, 이게 바로 ‘아페이론’ 이지요. ‘아페이론’의 성격 아주 복잡해요. 복합적이에요. 이게 바로 ‘운동’의 근거인데, 따지고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란 말이에요.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사이에 들어 이 우주를 움직이고, 생성과 소멸의 근거가 돼요.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결국 없는 것은 그 자체의 규정상 없는 것이니까 아무런 힘도 없다. 있는 것만이 두 순간 이상 지속되어 공간 표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두 번 이상 반복되어 공간화될 수 있는 것 아니냐. 있는 것만이 공간을 차지할 수 있고, 운동할 수 있다. 공간과 시간의 근거는 있는 것에 있다. 여기까지가 상식의 영역이에요. 누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형이상학은 바로 그래서 욕을 바가지로 먹지만 몰상식에서 출발해요. 눈 믿지 마라, 귀도, 코도, 입도, 혓바닥도, 니 살갗을 자극하는 그 어떤 감각도 믿지 마라, 이거 헤라클레이토스가 한 말이에요. 데모크리토스도 같은 말을 해요. 기독교에서도, 불교에서도, 이슬람교에서도 같은 말을 해요. 덧붙이는 말만 달라요. ‘믿어라’, ‘끝까지 왜냐고 물어라.’

철학은, 그 가운데서도 형이상학은 ‘아이티올로기’(aitiology), ‘원인학’이라고 부르잖아요. ‘끝까지 왜냐고 따지고 물어라’고 하잖아요. 죽을 때까지? 그건 모르겠어요. 그런 삶 행복할 것 같지 않아.

또 곁길로 들어서는데, 다시 ‘제3자’의 문제로, ‘아페이론’으로 돌아갑시다.

1+(+)+0=3

우리는 1과 0, ‘있는 것’과 ‘없는 것’에서 2를 끌어냈어요. ‘여럿’의 최소단위가 끌려나온 거예요.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다르다, 따라서 갈라놓아야 한다. 무언가 사이에 들어 이것들이 이어지지 않게 끊어놓아야 한다. 그러려면 그놈은 한편으로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어서 둘을 갈라놓고 또 한편으로는 이 둘이 관계를 맺을 수 있게 ‘있는 것’에도 끼어들고, ‘없는 것’에도 끼어드는 뚜쟁이 구실을 맡아야 한다. 이 역할을 ‘아페이론’에게 요구할 수밖에 없어요.

새끼를 꼬는 것, 초끈을 만드는 것, 시간과 공간을 가르고 운동과 정지를 주관하는 것, 다 이 3에게, 아페이론에게 떠넘겨요. 그런데 도무지 그 구실을 맡을 필연성이 아페이론에게는 없어요.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관계 맺을 필연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상승운동’만 있다면, ‘하나님’이 ‘무’에서 이 세상을 창조한 것으로만 본다면, 문제가 간단하죠.

빠방,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이고, ‘부동의 원동자’이고, 기독교의 ‘하나님’. ‘유일신’이죠.(이런 측면에서 베르그송은 대안이 아니에요. 2원자론자이거든요. 하나밖에 없는 세상 인정 않거든요.)

어떻게 해서든 ‘없는 것’도 힘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아페이론의 힘이 ‘있는 것’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없는 것’에서도 나온다고 가정해야 해요. ‘생성’의 힘 못지않게 ‘소멸’의 힘도 받아들여야 해요.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오겠죠? ‘도대체 당신이 이야기하는 ‘없는 것’의 정체가 뭐야?’

묻고 캐고 할 것 없어요. 있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없는 것’이 ‘있다’는 거예요.

없는 것이 없다고요? 그러면 다 있게 돼요. 다라는 말은 ‘여럿’ ‘모두’라는 말이에요.

여럿 모두에는 ‘없는 것’도 들어가요. (유식하게 말하면 0집합도 집합이라는 말이에요. 칸토르가 이야기하는 ‘무한집합’도 ‘집합’이에요.)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분석은 ‘있을 것’과 ‘없을 것’이라는, 그 안에 ‘운동’, ‘미래’, ‘당위’까지 들어가 있는 모순되는 개념의 분석만 빼고, 제가 얼마쯤은 제 미완의 반쪽 이론 <있음과 없음>에 지겹도록 해 놓았어요.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세요.

‘없는 것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이에요. 빈 것, 빠진 것, 이게 ‘이것’과 ‘저것’을 갈라놓아요. ‘이제’와 ‘저제’를 나누어요. ‘여기’와 ‘저기’를 다른 곳으로 바꾸어요. 여기 있는 것이 저기에 없다, 이제 있는 것이 저제 없었다. 이것과 저것이 다른 것은 이것에 빠진 것이 저것에 있고, 저것에 빠진 것이 이것에 있다……. 이렇게 돼요. 빠진 것이 하나도 없으면 모두 같은 것이 되고, 같은 것은 하나가 돼요. 수학에서 말하는 ‘합동’이죠. ‘하나’밖에 안 남아요.

‘있는 것’으로 ‘하나’가 되든 ‘없는 것’으로 ‘하나’가 되든, 하나가 되는데, 이걸 헤겔은 ‘순수 유’(reine Sein), ‘순수 무’(reine Nichts)로 보아 ‘개념의 운동’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똥친 막대기’로 그게 그거다 하고 개무시해 버리죠. 입도 뻥긋할 수 없는 거 뭐에다 쓰느냐는 거죠.

‘아페이론’은 ‘없는 것이 있다’는 전제가 없으면 있을 필요가 없어요. 존재가치가 없어요. ‘없는 것이 얼마나 있느냐’? ‘빠진 것이 얼마나 되느냐’? 여기에서 양적인 규정이 나와요. 수치화될 수 있어요. 헤겔은 빠진 것의 양이 질을 규정한다고 봐요. 이른바 ‘양질전화의 법칙’이죠. 현대 물리학자들도 다 그렇게 봐요. 그래야 잴 수 있고, 수치화할 수 있고, 증명이 가능하니까요.

‘왜 없지’? ‘왜 빠졌지’? ‘뭐가 빠졌지’? 가끔 묻죠. 정지가 빠졌어? 운동이 빠졌어? 이런 질문 안 해요. 그냥 정지하지 않았어?? 그럼 운동하고 있구먼, 운동하고 있지 않아? 그럼 제자리에 머물러 있구먼, 이렇게 여겨요. 그게 ‘관성의 법칙’으로 둔갑해요.

자, 이제 1과 0의 극한치인 ‘정지’, ‘한계’(peras)의 최고 영역을 다시 살펴보기로 하지요. ‘있음’은? ‘있는 것’과 ‘있을 것’이 하나로 뭉친 지점입니다. ‘있을 것’이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이 바로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운동이 사라집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없음’은 ‘없는 것’과 ‘없을 것’이 하나인 지점이지요. 역시 여기서도 운동이 사라집니다. 양쪽 모두에서 크기도 사라집니다. 따라서 시간도 공간도 여기서는 자리 잡을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의식과 현상계에서 겪는 온갖 변화와, 상승운동(없음→있음)과 하강운동(있음→없음)의 ‘평형’(equilibrium)상태에서 나타나는 공간지각은 모두 있음과 없음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인간세상을 우리는 ‘이상향’이라고 부릅니다. ‘유토피아’지요. 어디에도 없으니까 outopia입니다.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이 ‘평형’상태에서는 현상계는 모두 사라집니다. 생명계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들숨과 날숨으로 이루어진 ‘목숨’도 없고, 몸을 이루는 모든 것 움직일 길이 없습니다. 의식도 마비됩니다.

이 ‘평형’이라는 말 ‘이퀼리브리움’(equilibrium)이라는 말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상승운동’만 있는 곳에서도 ‘하강운동’만 있는 곳에서도 ‘평형’이라는 말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평형’이 없으면 공간지각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아주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먼저 ‘빠진 것’(privatio)부터 살펴봅시다. ‘군더더기’는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빠진 것’은 ‘없는 것이 있다’는 말로도 드러낼 수 있고, ‘있을 것이 없다’는 말로도 드러날 수 있습니다. ‘아페이론’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있을 것’은 현상적으로 보면 ‘없는 것’입니다. 아직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단순히 ‘없는 것’은 운동이 배제된 개념이지만 ‘있을 것’으로 ‘없는 것’은 운동을 전제합니다. 있음으로 가는 ‘상향운동’이 이 말 밑에 깔려 있습니다. ‘있을 것’을 ‘있는 것’으로 현실화시키는 힘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부동의 원동자’인 ‘순수형상’ Eidos, 1者, 神에게서 나옵니다. ‘무로부터 창조하는’ creatio ex nihilo가 작동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 ‘nihil’이 아예 없는 것이냐, 순수질료로서 있는 것이냐 입니다. 순수질료로서 어떤 형상도 지니지 않은 것, 그러나 ‘없음’ 그 자체는 아니고 chaos 형태로 있는 것, 두 순간 지속되지 않고, 두 번 반복되지 않는 어떤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2원론을 밑에 깔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논의를 더 진행하기 전에 ‘군더더기’로 ‘있는 것’을 잠깐 살피지요.

이 ‘군더더기’는 ‘없을 것이 있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없을 것’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더더기’이기 때문에 없애야 하는 것, 없는 것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없는 것이 없다’→‘다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신의 창조물이다 라는 관점에 서면 ‘군더더기’, ‘없을 것’은 없습니다. 그 나름으로 평형상태를 이룹니다. 여기에서 하나라도 빼면, 없애면, 곧 ‘빠진 것’(privatio)이 생기고, 이것은 ‘결핍’으로 나타납니다. 운동과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하강운동’을 뜻합니다. 현상유지가 필요하다는 것은 신의 의지가 됩니다. 어떤 것도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바꾸는 것은 결핍을, ‘빠지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강운동’의 관점에 서면, 빠질 것이 있어야 합니다. ‘빠질 것’, ‘없을 것’은 ‘군더더기’로, 삶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과잉’으로 드러납니다. ‘없을 것’을 없애는 힘,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바꾸는 힘, ‘형상’(eidos)을 ‘질료’(hyle)로 변화시키는 운동은 신인 ‘하나’, 1者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저 밑바닥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예 없는 것’, ‘없음’ 그 자체에는 그 힘도 없습니다. ‘없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른바 ‘무’의 ‘존재성’(유식한 말이어서 철학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야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겠지요?^^)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0은 그냥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없는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게 힘으로 나타납니다. 변화와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또 하나의 근본원인, ‘하강운동’을 이끄는 중력 구실을 합니다.

그러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그 안에 모순을 안고 있기 때문에, ‘페라스’에 익숙해 있는 우리 사고는 이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그렇지만 운동의 원인이 ‘모순’에 있다는 말은 낯설지 않을 겁니다. ‘있는 것이 없다’는 말과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우리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있는 것이 없다’→‘하나도 없다’, (이 말이 神을 부정하는 말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없는 것이 있다’→‘빠진 것이 있다’(이 말은 얼핏 들으면 단순한 privatio를 뜻하지만, ‘군더더기’가 없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아페이론’은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을 엮어서 하나의 가닥으로 꼬는 ‘2중나사’입니다. ‘초끈’으로 보아도 좋고, ‘새끼줄’로 보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꼬인 자리마다 순간적인 때로는 ‘지속’되고, ‘반복’되는 ‘평형’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지속’ 속에서 시간성이 드러나고, ‘반복’ 속에서 공간성이 확보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3자인, 1과 0사이에 있는 아페이론의 성격입니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은 각 단계에서 무수히 드러나는 이 꼬임을 반영합니다. 이 꼬인 자리, 꼬임의 순간에 ‘비약’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삶’으로의 비약, 생성의 비약일 수도 있고 ‘죽음’으로의 비약, 소멸의 비약일 수도 있습니다. ‘e′lan d′amour’는 동시에 그 안에 ‘e′lan de mort’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평형’으로, ‘페라스’로, 겉, 끝, 갓으로 드러나는(모두 같은 어원을 가진 말입니다.), 현상계, 생명계와 물질계의 다양한 모습 뒤에는 그렇게 드러나게 하는 힘이 작용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페이론’이라고 부릅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무’로, ‘공’으로 보기도 합니다. ‘아페이론’이 일시적으로 ‘평형’상태를 이룰 때,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이 형평을 이룰 때, 우리의 의식과 감각에 ‘페라스’의 형태로 현상계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어디서 ‘평형’을 이루는지, 또 이룰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느닷없는 순간, 느닷없는 곳에서 그 ‘평형’은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Lucretius가 말하는 ‘원자의 경사운동’이고, 쟈끄모노가 이야기한 ‘우연’이고, 우리가 가슴 내밀고 뽐내는 ‘자유의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마나한 소리로 여러분들 귀한 시간 빼앗고, 귀 어지럽혀 미안합니다. 이따가 술이나 풉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