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시대와철학의 old&goodys

이성이 짓밟은 그들의 외침, “침묵을 지킬 순 없었니?”[철학자의 서재]

?프랑수아 플라스의 <마지막 거인>

 

송종서(한반도 동북아 연구소 선임연구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2004년 8월 말에 어떤 ‘거인’이 내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그때 나는 중국 양쯔강(揚子江)의 중류 지방의 어느 도시에서 몇 년째 졸업 논문을 준비하다가 그곳의 여름을 견디다 못해 잠시 고국으로 피서를 와 있었다. 어스름이 내리는 늦여름 저녁 무렵 서울에서 거인과 마주앉았을 때 그는 땅거미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두 거인

“내가 좋아하는 책이야. 너와 느낌을 나누고 싶다. 그림책이라 금세 읽지만, 조금씩 천천히 읽어도 좋아.”

 

▲(프랑수아 플라스 지음, 윤정임 옮김, 디자인하우스 펴냄). ⓒ디자인하우스

거인과 마주 앉았던 장소나 둘이 나눈 이야기는 이제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그가 건넨 책의 표지를 보면서 느낀 이상야릇한 기분은 아직도 뚜렷하다. <마지막 거인>(프랑수아 플라스 지음, 윤정임 옮김, 디자인하우스 펴냄)? 묘하다. 거인이 거인에 관한 책을 주다니. 실상 그의 겉모습은 ‘거인’과 별로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도 키도 크지 않고 몸집도 왜소한 편이다.

그러나 체구가 작고 먹는 양이 적은 것을 제외하면 그는 확실히 모든 면에서 거대한 느낌을 준다. 때문에 나는 그를 무의식적으로 거인이라 여겼고, 이 느낌은 나만의 감상은 아닐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가질 것이다. 사람들 누구나 이런 거인을 마음속에 갖고 있다. ‘거인’이라 부르든 ‘영웅’이라 부르든 자신이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사람을 간직하고 산다. 그날 <마지막 거인>이라는 책을 선물해준 사람이 내게 바로 그런 거인이다. 내 거인이다.

‘마지막 거인’이라는 비장한 제목이 지금도 현실의 내 거인과 기묘하게 겹쳐진다. 그날 자신이 건넨 동화책을 애지중지 바라보던 저녁 어스름 속의 거인은 슬프고 가라앉은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그는 푸르스름한 황토색 표지 속에서 널따란 등을 드러내고 저 멀리 구름인지 아득한 산악인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거인 안탈라의 뒷모습과 겹쳐졌다. 이제 다시 보면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거의 없는 안탈라의 등허리와 팔다리와 뺨은 온통 어지럽고 복잡한 무늬와 그림들로 가득하다. 이 마지막 거인의 문신이 내 거인 속으로 옮겨 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피부는 대기의 미세한 변화에도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살랑거리는 미풍에도 몸을 떨었고, 금갈색 태양 빛에도 이글거렸으며, 호수의 표면처럼 일렁이다가, 폭풍 속 대양처럼 장엄하고 어두운 색조를 띠기도 했습니다.” (46쪽)

거인은 지평선만큼이나 평온한 목소리로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낯선 사물을 마음속에 들이는 데 민첩하지 못한데다, 자꾸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어서 얼떨떨한 기분이었고 거인의 이야기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 거인과 책 속 거인의 유사한 느낌에 자꾸 사로잡혀서일까. 흙의 빛깔을 닮은 그 거뭇하고 거칠한 음성과 동화책 표지를 물들인 황토 빛깔이 한눈에 겹쳐지면서 주변 공기가 뭉쳐진 느낌이랄까, 시간의 흐름이 멈추는 느낌이었다.

거인들이 사는 나라

처음 선물로 받은 날 밤에 멋진 그림들에 빠져 연신 책장을 넘겨보기는 했지만 머릿속을 가득 메운 학술 자료들과 논문 걱정으로 이야기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 크리스마스가 돼서야 이 동화책을 보았다. 예상과는 다르게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저자가 12~13세 어린이를 생각하고 지은 동화책이라고 하지만 어른들이 읽어야 할 동화라고 느꼈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화자(話者) 아치볼드 레오폴드 루트모어가 되었다. 나는 탐험가이자 지리학자로서 1849년 9월 29일 아침에 동인도 회사의 낡은 무역선을 타고 영국을 떠나 흑해의 원천에 있는 ‘거인족의 나라’를 찾아 갔다. 나를 거인족의 나라로 이끈 것은 이전에 부둣가에서 우연히 손에 넣은 거인족의 어금니였다. 정확히 말하면 어금니 뿌리 안쪽에 새겨진 미세한 지도였다. 거인족의 나라를 찾아가는 동안 나는 천신만고를 겪었다. 수많은 희생과 죽을 고비를 넘고 겨우 도착한 그 골짜기는 거인들의 묘지였다.

나의 탐험은 순전히 학문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학자로서 이제껏 누구도 얻지 못한 최고의 성취감과 빛나는 명예를 얻고 싶었다.

계곡의 지형도를 제작하는 데만 꼬박 한 달이 걸렸습니다. 일일이 세어 본 해골의 수는 백 십여 개였지만, 땅 속에 더 많이 묻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몇 두개골에는 기이한 돌덩이가 모자처럼 얹혀 있어 제례 의식의 대상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전부 다 삼사천 년 전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 종족이 전멸하게 된 이유만이 여전히 풀어야 할 신비로 남아 있었지요.” (36쪽)

거인족의 나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들의 온몸에 그려진 그림, 바로 문신이었다. 거인족의 몸에는 혀와 이까지 포함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구불구불한 선, 소용돌이 선, 뒤얽힌 선, 나선, 그리고 극도로 복잡한 점선들로 이루어진 정신없이 혼란한 금박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환상적인 미로에서 식별되는 이미지들이 있었다. 나무, 식물, 동물, 꽃, 강, 바다의 모습이 그것이다. 거인 아홉 명의 몸 전체에 그려진 그림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일까?

문명과 그 적들

나는 가장 키가 큰 안탈라의 등에 그려진 아홉 명의 거인들 틈바구니에서 열 번째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실크 해트”를 쓰고 있는 자신이었다. 내 실크 해트는 19세기 서유럽 남자의 상징이다. 우리는 세계 곳곳을 탐험하며 ‘최초의’ 학문적 성과를 적잖이 이룩했다. 그 성과들은 유럽인의 눈으로 본 미지의 세계를 그려내고 쓴 것이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 모든 대륙을 우리는 ‘탐험’을 한다는 구실로 거침없이 넘어 들어갔다. 우리에게 대항하는 원주민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면 살육의 대상일 뿐이다. 하마터면 나도 “사람 머리를 절단 내는 기이한 습성을 가진” 와족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을 뻔했다.

우리는 세계 대륙의 원주민들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에 그들을 죽여야 했다. 원주민에 대한 대량 학살은 그렇게 벌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땅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지구상 모든 대륙의 80퍼센트가 유럽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신(神)의 은총을 받지 못한 그들의 ‘쓸모없는 땅’에 복음을 전파했고, 신에게 제사 의식(cult)을 거행했으며, 그곳을 쓸모 있는 땅으로 경작(cultivate)했다. 이것을 ‘문화(culture)’라고 부르거나 ‘문명(civilization)’이라고 한다. 이런 선진적인 유럽인이었기에 내 모습은 항상 ‘실크 해트’로 상징된다.

그러나 내가 만난 거인족은 유럽인들과 완전히 딴판이었다. 우선, 그들은 미지의 땅을 탐험할 때 내가 가장 중시하는 그림을 그릴 줄 몰랐다. 그러므로 거인들의 온몸에 그려진 그림은 그야말로 신비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과 처음 만난 때를 회상해 보면, 나는 거인들의 계곡에 도착하자마자 탈진한 나머지 정신을 잃었다. 그 짧은 순간 내가 환영처럼 본 것은 나를 향하여 기울어지던 거대한 돌기둥의 그림자였고, 환청처럼 들은 것은 그 돌기둥의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미로운 노래였다. 거인들은 이방인인 나를 정성껏 돌봐 주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정신을 되찾았을 때는 그 모든 악몽이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꿈으로 변해” 있었고, 더할 나위 없이 쾌적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내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들은 나를 어린아이처럼 돌봐 주었다. 또 내게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을 알려주고 그들의 음식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리는 사람과 그려지는 사람

“거인들은 식물, 흙, 바위를 아주 가끔 먹었습니다. 난 그네들이 운모판 가루를 뿌린 편암으로 맛있는 파이를 만들거나 장밋빛 석회 조각을 앞에 놓고 군침을 흘리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 준비 과정을 비밀에 붙여 가며 자기들이 특별히 만들어 낸 국을 맛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큰 강의 진흙처럼 혀에 엊혀 화산의 용암처럼 불타오르다가 숲의 부식토 같은 뒷맛을 남겼습니다.” (48쪽)

거인들의 몸에 그려진 나무, 꽃, 짐승, 강, 바다의 무늬와 형상은 그들이 한밤중에 하늘을 향해 부르던 노래에 대지가 화답해 그려 준 “악보“였다. 노래가 우주를 향한 기도였다면 문신은 우주 자연의 응답이었다. 나와 유럽의 탐험가들이 미지의 땅을 정복하면서 그림 그리고 문명을 새기는 존재라면, 거인족은 대자연의 신비를 노래하며 그림 ‘그려지는’ 존재다.

“(…) 밤새도록 별들을 차례대로 불러대는 그들의 목소리는 서로 뒤섞이고는 했습니다. 그것은 유려하면서도 복잡하고 반복적인 멜로디와 가냘픈 변주, 순수한 떨림, 맑고 투명한 비약으로 장식된 낮고 심오한 음조로 짜여 있었지요. 무심한 사람의 귀에나 단조롭게 들릴 그 천상의 음악은 한없이 섬세한 울림으로 내 영혼오성의 한계 너머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우연히 나는 오래 전부터 별들의 움직임과 하늘을 세심하게 관찰해 오던 터였지요. 그래서 일종의 이중어 사전을 기획하고는 각각의 별자리에 상응하는 음악의 소절을 붙여 주었습니다.” (42쪽)

나, 루트모어 아치볼드 레오폴드는 이 거인들의 문신을 “진정한 노래”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이는 결코 깊은 깨달음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는 말에 불과한 덕담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거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내가 자랑스러웠고, 이제 남은 일은 그들을 알아가고 이해하는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일은 학문적인 작업이었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학술은 내가 헌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는 내 숭고한 학문이 저 고귀하고 아름다운 거인족을 파멸시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인족의 파멸은 내가 “신들의 축복을 받은” 덕분으로 거인의 골짜기를 발견한 뒤 “학문의 숭고한 임무”를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잊어서는 안 될 생생한 인상을 생동감 넘치는 그림으로 그려” 낸 데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거인의 눈물

“밤새도록 별들을 차례대로 불러대는” 거인족의 노래와 더불어 지낸 지 열 달이 지나면서 나는 런던의 밤하늘이 그리워졌다. 비록 거인족의 삶은 굳건하고 완벽해 보였지만 내가 그곳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의 감미로운 노래와 몇 날이고 계속되는 힘겨루기 퍼레이드에 그만 진력이 났다. “거인 친구“들은 이런 내 심정의 변화를 금세 알아차렸다. 그리고 마침 그들도 사랑을 나누고 깊고 오랜 잠을 자야만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고향으로 무사히 귀환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은 제각기 작은 호박 조각을 나에게 선물했고 거기에 소중한 마법의 힘을 실어 주는 듯했습니다. 난 점토 찰흙으로 만든 조그만 조각품을 끈에 매달아 일일이 걸어 주었습니다. 거인 친구들이 그토록 자주 웃으며 바라보았던, 우스꽝스런 실크 해트를 쓴 사람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었지요. 안탈라와 제울은 갈 수 있는 한 멀리까지 저를 데려다 주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난 눈물에 젖은 거인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습니다.” (54쪽)

내가 이 책의 화자가 되어서 진술하는 마지막 말은 여기까지다. 그 후 벌어지는 이야기는 암시했듯이 비극적인 결말이다. 그것은 화자에게 너무도 익숙한 거인 안탈라의 목소리를 통해 울려나온다.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 그것이다.

만약 저자가, 거인족의 나라를 떠나 고향인 런던으로 돌아가는 화자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끝냈다면 이 책이 1990년대 프랑스의 각종 어린이 도서 부문, 문인 협회, 도서관 협회, 나아가 독일, 미국의 여러 문예 잡지와 비평가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힘은 지금까지 서구인들이 저질러 온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학문과 이성이 기실 어떻게 세계를 마름질했는가를 성찰하고 비판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런 성찰은, 이 책의 화자가 그랬듯이 왜 언제나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생긴 뒤에야 나오는 걸까?

죄 없는 인류를 수없이 살해하고 식민지를 건설했던 제국주의자들이 모두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뒤늦은 후회나 반성도 무의미한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의미 있는 작용을 일으키려면 지식인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지금도 과거 제국주의자들의 만행과 유사한 강대국의 폭력은 계속 벌어지고 있지만 그들은 ‘세계화’니 ‘자유 무역’이니 하며 형태를 바꾸어 교묘한 방식으로 약자의 권리를 침해한다. 학문에 종사하고 지식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갈수록 커지는 이유다. 폭력의 형태와 얼개는 점점 더 세련되고 복잡해진다. 나의 거인이 내게 이 책을 선물한 이유를 요즘에야 조금 알 것 같다.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 다시 쓴다]-①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다시 쓴다]-①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천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도 있어

 
이제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어 왔던 ‘운동’의 문제라는 ‘벼랑 끝에서 허공으로 한 번 내딛기’의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다룰 길을 찾아왔지만 여전히 저는 사막 한가운데서 제자리를 맴도는 여행자의 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먼저 제 변화된 환경에 대해서 몇 말씀 여쭈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그 동안 몸담아 왔던 지방 대학을 떠나 한 해 말미로 이 땅에서는 가장 머리 좋은 학생들이 모여 있다는 중앙 도시의 국립 대학 대학원 철학과 석박사과정 학생들에게 ‘존재론’을 강의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제 계획은 거창했습니다. 이 기회에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존재론 전통의 맥을 짚어 가면서 ‘존재’와 ‘운동’의 문제를 중심에서부터 파고들자는 욕심을 부렸으니까요. 이 무리한 욕심이 저를 파멸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저는 제가 빠져들 수밖에 없는 ‘운동’의 깊은 늪에 뛰어드는 시기는 되도록이면 뒤로 미루자고 마음먹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은 그 동안 제가 조금씩 쌓아올렸던 존재론의 비축 양식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으로 버텼습니다. 잘 하면 이미 쌓아 놓은 양식으로 한 학기를 더 버틸 수도 있겠다는 약삭빠른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지만 저는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어차피 이번 한 학기가 제가 대학에 머무는 마지막 날들이었습니다. 다음 해부터는 시골에 들어가 농사를 지을 작정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이 좋은 기회를 적당히 뭉개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동안 망설이고 망설이면서 뜸만 들이고 있던 솥뚜껑을 열어 보자고 다짐했습니다. 더 이상 ‘모순’을 회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제 모순 속에 빠져들어 모순을 극복할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저는 원탁 강의실에 둘러앉아 저를 지켜보고 있는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에 두 점이 있다고 칩시다. 점〔point〕은 물론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하나로 있는 것이 그렇듯이 크기가 없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모든 끝(한계, peras)이 그렇듯이 크기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두 점은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각에 들어오지 않는 이 두 점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고 칩시다. 당구공 두 개가 서로 맞닿아 있는 당구대를 연상해도 됩니다. 이 때 서로 맞닿아 있는 이 두 점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제 물음이 무슨 뜻을 지녔는지 모르는 눈치가 역력했습니다. 저는 달리 물어야 하겠다고 느꼈습니다.

“두 개의 점이 나란히 맞닿아 있을 때 이 두 점 사이에 크기(또는 길이)로 드러나는 공간이 생긴다고 보아야 하겠습니까?”
제 질문에 어떤 학생이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선생님, 점은 본디 크기가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크기가 없는 두 점이 나란히 놓여 있다고 해서 그 사이에서 크기가 생긴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크기가 없는 두 점이 맞닿아 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지요? 만일에 두 개의 점이 맞닿아 있는데 그 사이에 크기가 없다면, 다시 말해서 두 점이 서로 따로따로 차지하는 자리가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 두 점은 한 자리에 있다는 말이 되고, 두 점이 한 자리에 있다는 말은 두 점이 겹쳐서 하나가 된다, 곧 합동(合同)이 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끝, 곧 한계〔peras〕가 하나인 것만이 크기를 갖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두 개의 점이 있다는 말은 끝이 두 개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지요? 끝이 둘인 것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르지요?”

“선〔line〕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옛 피타고라스학파의 전통에 따르면 끝이 두 개인 것은 선분이라고 정의됩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선〔line〕에서 두 끝 사이에는 끝이 없는 것〔apeiron〕이 들어 있지요?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점이 두 개 있고, 그 두 개의 점이 관계를 맺으면 그 두 점 사이에는 끝이 아닌 것, 곧 끝이 없는 그 무엇, 다시 말해 크기가 생겨나고, 길이로 나타나는 끝이 아닌 그 무엇과 두 개의 끝을 서로 연관시켜 우리는 그것을 선분으로 정의한다고 말입니다.”

“글쎄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싸하기는 한데, 그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데요. 어떻게 크기가 없는 점 두 개가 맞닿는다고 해서 그 사이에서 크기가 생겨난다, 공간적인 거리가 생겨난다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이 바로 둘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특성이자 하나와 다른 점이지요. 모든 하나는 어떤 하나이든 크기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간의 규정을 벗어납니다.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형상〔idea〕의 세계에는 모든 형상이 하나하나 다 고립되어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에 공간이 없습니다. 플라톤의 형상들은 하나, 둘…… 하고 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찌어찌해서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와 관계를 맺어 둘을 이루면, 다시 말해 둘이 나타나면 이 둘 사이에는 이 하나도 아니고 저 하나도 아닌 것이 나타나는데, 점의 형상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듯이 두 개의 하나가 저마다 크기가 없는 것, 끝, 한계이므로 이 하나도 저 하나도 아닌 것은 크기가 없는 것이 아닌 것, 끝이 아닌 것,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둘이 없으면 크기도 없고 공간도 없습니다. 둘은 이 하나와 저 하나의 만남의 다른 이름이고, ‘실체’의 이름이 아니라 관계의 이름입니다. 여럿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둘(여럿의 최소 단위)은 있는 것이 아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있는 것은 하나이지 둘은 아니니까요.”

“아니, 선생님!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분명히 ‘이 하나, 저 하나’‘점 두 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또 ‘여러 하나’라든지 ‘모든 하나’라는 말씀도 하셨고요. 그런데 금방 말을 바꾸어 하나, 둘, 셋……으로 셀 수 있는 하나가 두 개가 모여서 둘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둘이나 여럿이 ‘만남의 이름’이고 ‘관계의 이름’이라니, 그런 엉터리없는 논리의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인정하지요. 저는 지금 분명히 모순되게 여겨지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제가 하는 말은 모두 사유의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추론을 반영하는데, 알다시피 추론에는 공간, 다시 말해서 이 하나도 아니고 저 하나도 아닌 것,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끼어들어, 하나가 아닌 것을 하나로 보이게도 하고, 관계를 실체로 여기도록 만들기도 하니까요. 미리 앞당겨서 성급히 이야기하자면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도 없고, 추론을 이끌어 낼 수도 없는데, 없는 것을 생각하고 없는 것을 바탕으로 추론이 전개된다는 한계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이 이렇게 왔다갔다한다고 보면 되겠지요. 아무튼 이제까지 내가 한 말 가운데서 이 말만 귀담아들어 두면 됩니다. ‘공간은 두 하나의 만남에서 생겨나는데, 하나는 하나이지 둘이 될 수 없으므로, 두 하나라는 말은 관계 맺음의 다른 이름이다.’”

학생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았지만 저는 짐짓 모르는 척했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씨름해야 할 문제는 공간의 생성 배경이 아니라 ‘운동’의 생성 배경이라고 보았고, 어차피 ‘운동’과 ‘공간’은 한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이므로 ‘운동’의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공간 탄생의 내력도 저절로 드러나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 점이 만날 때 드러나는 또 하나의 이상한 사건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줄 필요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자, 다시 두 점이 맞닿아 있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봅시다. 크기가 없는 점이 맞닿아 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기 힘들다면 당구공 두 개가 맞닿아 있는 모습을 머리에 떠올려도 좋겠지요. 당구공 두 개는 한 점에서 맞닿아 있겠지요? 우리는 이 점을 ‘접점’이라고 부릅니다. 이 접점은 당구공 두 개 가운데 어느 것에 속하겠습니까?”
 

윤구병, <철학을 다시 쓴다>, 보리출판사, 2013.


 
제가 이렇게 묻자 한 학생이 무뚝뚝하게 대답했습니다.

“그 접점이 어느 당구공 하나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힘들겠는데요.”

“그러면 그 접점은 당구공 두 개에 모두 속한다, 그러니까 당구공 두 개가 접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나요?”

“그렇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다면 ‘어느 한 점을 공유하고 있는 두 개의 당구공은 붙어 있다.(이어져 있다.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둘이 아니다.’라는 반론이 나온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글쎄요. 참 대답하기 곤란한데요. 그러니까 그 접점은 어느 순간에는 이 공에, 또 다음 순간에는 저 공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이 공, 저 공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두 공이 맞닿아 있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두 개의 공이 맞닿아 있을 때 이 ‘두 개의 공은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요?”

“소박하게 표현하면 붙었다 떨어졌다 한다고 할 수도 있고…… 다시 말해서 접점이 끊임없이 운동한다고 할 수도 있고…….”

“더 엄밀하게 정의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나요?”

“입체인 구(球)를 단순화해서 두 개의 원(圓)이 맞닿아 있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기로 합시다. 이 때 두 개의 원은 한 점에서 만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접점이라는 말이 생겨났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위에서 우리는 ‘점은 끝(한계, peras)이 하나인 어떤 것을 말한다, 그리고 끝에는 크기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하나는 어떤 하나이든 크기가 없고 따라서 운동하지 않는다(정지해 있다)’는 말도 했지요?”

“예, 파르메니데스가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 두 원 가운데 어느 하나를 다른 원 위로 굴려서 처음에 두 원이 맞닿아 있던 점까지 한 바퀴 돌린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때 한 원의 모든 끝은 다른 원의 모든 끝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맞닿는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잘 생각하고 대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유의 실험에서 우리는 아주 기묘한 결과를 얻게 되니까요.”

“무엇이 기묘하지요?”

“먼저 원 둘레의 모든 점은 한정된 것〔peperasmenon〕이므로 이 한정된 것의 집합도 역시 한정된 어떤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원주율을 측정하려는 현대 수학은 아직까지도 한정된 측정치를 내놓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반복되는 수의 계열조차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주율에는 한정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되풀이되지 않는 수의 계열이 무한히 연속된다는 것은 원을 이루는 곡선 안에 무한〔apeiron〕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요. 우리의 추론과 실제 측정치 사이의 이런 불일치가 기묘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거 참! 그건 그렇다 치고 다음으로 기묘한 결과는 어떤 것을 가리키지요?”

“점은 끝이고 크기가 없는 것이라는 정의가 맞다면, 크기가 없는 점을 무한히 더해 보아야 크기가 있는 어떤 것이 나올 수 없는데, 알다시피 선분〔line〕의 한 끝을 한 자리에 고정시켜 놓고, 다른 끝을 고정된 한 끝과 같은 거리로 움직여서 드러나는 자취를 그린 원은 크기를 갖게 되거든요. 크기는 없지만 서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점을 가지고 실험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크기가 없는 것에서 크기가 나온다는 것이 기묘하지 않습니까?”

“이거야 뭐. 야바위 노름 같은 느낌이 드는데, 선생님 말씀을 드러내 놓고 야바위 노름으로 몰아붙이기도 그렇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당장 뭐라고 하기 힘든데요.”

“그러면 다시 한 번 접점의 성격을 살펴봅시다. 접점은 서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점이지요?”

“그렇습니다. 아 참! 그렇고 보니 끝이 두 개 있으면 그 사이에 끝이 없는 것, 크기로 드러나는 것이 끼어들어 선분〔line〕으로 규정된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하셨지요?”

“기억을 해냈군요.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접점의 성격 가운데는 더 까다로운 무엇인가가 숨어 있습니다.”

“그게 뭐지요?”

“앞에서도 잠깐 비쳤지만 그걸 이른바 둘이 가지는 모순, 둘에서 생기는 원시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선 모순의 측면을 적극적인 것으로 원시 우연의 측면을 소극적인 것으로 나누어 놓고 생각해 봅시다. 먼저 두 점이 만나면 그 사이에서는 원초적인 공간 규정인 크기도 생겨나지만, 원초적인 시간 규정인 운동도 생겨난다고 귀띔했던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접점에서 만나는 두 점은 이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는 조금 앞서 했습니다. 그런데 만남, 관계의 성격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만 있다면 만남도, 관계도 없지요. 만남은 늘 둘 이상의 무엇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있는 것은 하나로 있고, 바로 하나라는 특성 때문에 사유의 공간에서도 벗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있는 것 바로 그것을 사유로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없는 것 바로 그것도 사유의 대상이 아님은 거듭해서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다, 없다고 하는 것, 있는 것, 없는 것이라고 일컫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로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닌 그 무엇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④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4강, 5강?

 

박영균(건국대 HK교수)?

 


1. 자본주의의 성장과 노동가치론

 

1-1. 자본주의의 성장: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13세기 인클로저운동 시작, 15세기 말―16세기에 절정, 14세기 후반-15세기 중반 르네상스운동, 15-16세기 종교개혁운동): 17세기 “자신의 노동을 섞고 무언가 그 자신의 것을 보태면, 그럼으로써 그것은 그의 소유가 된다.” “인간의 삶에 유용한 토지 생산물 중에서 10분의 9가 노동의 결과라고 말해도 그것은 대단히 낮추어 잡은 계산일 것”(로크), ‘노동은 부의 아버지이고 토지는 부의 어머니’(1667년, 윌리엄페티→상품 교환의 공통 척도로서 노동량이라는 개념의 제시(애덤 스미스, 리카르도)

1-2. 정치경제학에서의 노동가치론: 정치경제학에서 노동 가치는 ‘노동이 유용한 어떤 것을 생산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노동의 양적인 규정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즉, 어떤 상품의 가치 크기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노동 가치의 개념을 정치경제학적 의미에서 사용한 사람은 마르크스에 따르면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페티이다. 그는 로크와 마찬가지로 ‘부의 어머니는 자연이고 부의 아버지는 노동’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마르크스는 이것을 ‘사용가치’라는 개념으로 정의하고 ‘가치’와 구별하지만 이 당시에는 이런 명확한 개념 구분이 없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가진 쌀 한 가마와 B라는 사람이 가진 은 한 냥을 교환한다고 하자. 여기서 쌀과 은은 전혀 ‘쓰임’이 다른, 즉 질이 다른 물품이다. 그런데 어떻게 둘을 교환할 수 있는가? 어떤 공통점도 가지고 있지 않은 두 물품이 교환된다. 그렇다고 해도 그 둘을 교환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매개하는 공통적인 어떤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바로 여기에서 가치의 다른 한 측면이 드러난다. 정치경제학적 의미에서 ‘가치’는 이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서로 다른 물건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어떤 공통의 척도 또는 매개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페티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페티가 처음이 아니다. 그보다도 약 2천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졌다. 그는 《정치학》에서 “교환을 위해서 생산되어지는 모든 상품 속에는 공통적인 어떤 것이 들어 있고 그 공통적인 것 때문에 상품간의 비교가 가능하다” 그리스는 기본적으로 노예제 생산양식을 가진 사회였다. 그러나 그리스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하여 해상무역을 전개하였으며 상업이 발전하였다. 탈레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상인출신이 많다. 그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을 전개하면서 상품교환을 했으며 여기서 개별자들의 평등에 대한 관념과 민주정에 대한 관념이 싹 튼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리스에는 소수이지만 근대적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있었다. 상품교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은 이렇게 발전한 상업의 영향으로 제기되었던 것 같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공통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았고,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는 데에는 약 2천 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품 생산이 일반화되고 이런 상품 생산의 발전과 더불어 상품 교환의 수수께끼를 해명하려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노동가치론을 가장 분명하게 밝힌 선구자는 1738년에 나온 소책자 《화폐 일반의 이자에 관한 몇 가지 성찰@Some Thoughts on the Interest of Money in General@》을 쓴 익명의 저자였다. 그 익명의 저자는 “모든 상품이 상호 교환될 때 여러 상품의 ‘가치’는 그것들을 생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반적으로 투하되는 ‘노동량’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여러 가지 상품들이 매매되거나 교환될 때, 그 상품이 지닌 가치 또는 가격은 ‘노동량’과 교환의 공통적인 ‘척도(화폐)’의 많고 적음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페티는 ‘노동 시간’의 많고 적음으로 규정한 것이다. 여기서 이윤의 원천은 노동이 될 수밖에 없으며 특정한 상품이 가진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투여되는 시간일 수밖에 없다.

최초로 토지나 금과 같은 자연 상태 그대로가 아니라, 거기에 투하된 노동력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노동가치론을 정식화한 사람은 애덤 스미스였다. 그는 제조업에 투자된 노동은 무익하며 비생산적이라는 중농주의자들의 주장뿐만 아니라, 금을 통해서 부의 축적을 정당화하고자 했던 중금주의적 환상에 대항하여 노동이 이윤과 축적의 원천이며 경제적 진보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리카도는 ‘지배노동가치설’을 비판하고 ‘투하노동가치설’을 주장했다.

1-3. 사회정치적 근대혁명(소유권과 근대민주주의): 캘빈의 구원예정설과 루터의 직업소명설(베버, 프로테스탄트윤리)→ “시민사회의 주요한 목적”은 “재산의 보존”(로크)


2. 자본주의생산양식과 근대적 패러다임: 노동가치론과 생산패러다임

2-1. 자본주의 생산양식: M-C(LP+MP)-M′
: 상품화(이중의 해방)-자연과 노동의 상품화
: 자본의 외부-노동력의 재생산과 자연의 수탈 메카니즘 → 자본주의적 지배메커니즘 확립

→ ① 자연의 수탈 메커니즘으로서 과학기술의 발전(생산력-MP, LP), ② 생산-소비 메커니즘의 확립(소비욕망의 창출), ③ 총자본의 대변자로서 국가의 조직화(교육, 의료, 주거 등)

2-2. 자본주의의 내부와 노동력 상품: 자본주의생산양식은 생산을 자본과 임노동이라는 두 관계로 추상화한, 생산의 특정한 사회적 양식이다. 이 생산양식의 핵심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과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임노동이라는 두 존재의 상호관계이다. 여기서 ‘자본’은 단순히 축적된 화폐가 아니라 기계처럼 ‘생산수단’을 사는 데 소비된 화폐이며 ‘임노동’을 자신의 파트너로 고용하고 있는 ‘화폐’이다. 따라서 맑스는 자본주의 내부의 지양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근본적 ‘균열’과 ‘공백’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노동력의 상품화와 필요/잉여노동으로 구성되어 있는 자본주의생산과정 내부의 모순이다. 자본주의생산양식의 존재론적 특성은 그것이 ‘상품’의 세계라는 점에 있다. ‘노동력’이라는 상품, 즉 “그 사용가치 자체가 가치의 원천으로 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진 한 상품”(Marx, 1989: 211-212)의 출현은 이 상품의 세계를 보편적인 존재양식으로 만들었다.

2-3. 자본주의 내부와 생산적 노동: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의 생산적 노동은 자본에게 생산적인 노동이다. 맑스는 아담 스미스의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을 다루면서 “이런 규정들은 노동의 소재적 특징에서, 즉 그 노동의 생산물의 본성에서도, 구체적 노동으로서의 노동에 고유한 일정한 속성들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노동이 실현되는 일정한 사회 형태, 여러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가져온 것”(Marx, 1965: 127)이라고 말하면서 “여기서 그것은 언제나 화폐 소유자인 자본가의 입장에 의해 이해되며 노동자의 입장에서 이해되지 않는다.”(Marx, 1965: 128)고 논평한 바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노동을 상품화하는 방식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이라는 대립적 체계를 통해서이다.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생산적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며 이런 사용가치를 가지는 노동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이다. 그런데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노동을 투여할 수 있는 대상과 노동수단으로부터 그 자신을 분리시켜야 한다. 그것은 경제학적으로 자연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관점에서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관점으로, 인간은 자연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존재라는 상징체계의 전환 뿐만 아니라 자연에 속박되어 있는 인신을 인격적으로 독립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간을 주체로 전화시켜 상품 계열화하는 근대자본주의생산양식의 작동방식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의 분리 및 지상의 주인으로 인간을 주체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2-4. 자본주의적 가치계열화와 자본의 외부: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자연/인간의 분리와 ‘생산/비생산적 계열화’의 작동은 자본주의생산양식의 내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부로 계열화된 자연/인간의 분리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노동에 대한 착취의 가치계열화라는 점에서 근대자본주의는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이라는 분리에 근거하여 이성애적 가부장제를 정당화하고 ‘성-사랑’이라는 환상체계를 만들어 ‘근대적 가족제도’를 생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생식’이라는 생산의 패러다임과 ‘인구학’이라는 국민경제학적 통제의 문제로 바꾸어 놓는다. 자본주의생산양식은 노동력의 가치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동을 재생산하거나 ‘생식’을 통해 후속 인구를 재생산하는 문제를 ‘가족’이라는 사적 공간으로 이전시키고 그것을 ‘비생산적 노동’으로 만들어 그에 대한 가치 지불의 책임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근대적 삶의 방식인 ‘공적/사적 영역’, ‘소비와 생산의 영역’의 이원화는 바로 이런 ‘생산/비생산’의 이원화에 상응한다.

– 자연과 인간의 분리: 자본주의생산양식이 이전의 생산양식과 다른 첫 번째 특징은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고 자연의 힘으로부터 인간의 인공적인 힘을 분리함으로써 그 스스로 인간적인 세계, 인공적인 세계, 기술적인 세계를 만드는 데 있다. 애초 인간은 자연에 일부였으며 그 세계에 의존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생산양식은 그런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존을 끊어냄으로써 그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인공적으로 구축한다. 그것은 자연-인간이라는 관계를 자연/기계(기술)-인간이라는 관계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직접적인 세계로서의 기계”(Ihde, 1979: 63)를 생산한다. 여기서 기술은 인공적 시스템, 기계적 시스템, 기술적 시스템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자동기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맑스는 기계와 도구를 구분하고 “완전히 발전한 기계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세 부분, 즉 동력기, 전동장치, 끝으로 도구 또는 작업기”(Marx, 1989: 477)로 이루어진, 여러 도구들을 통합하는 “자동장치”(Marx, 1989: 487)라고 말한다. 이것은 “생산수단인 기계를 기계로서 생산”함으로써 “자신에게 적합한 기술적 토대를 창조”하며 “자기 자신의 두 발로 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계에 의한 기계의 생산에 가장 필수적인 생산조건은 어떠한 출력도 낼 수 있으며 또 그와 동시에 인간이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원동기”(Marx, 1989: 491)를 필수적으로 동반한다. 따라서 문제는 에너지원이다.

자연의 생명 에너지와 생태적 순환은 에너지를 소비할 때 발생하는 엔트로피를 그 스스로 ‘자정-정화’하면서 ‘생태적 균형’을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생산력의 발전은 이런 자연의 ‘자정능력’과 ‘생태적 균형’을 파괴한다. 자연의 생태적 순환은 에너지의 균형과 생성소멸이라는 생명의 흐름에 의해 규정되며 자연적 물질들은 생명적 에너지들의 분배와 흐름에 의해 이루어진다. 반면 과학-기술은 ‘효율성’과 ‘인간중심’이라는 가치체계 하에서 작동하며 자연적 시간과 공간을 파괴하는 기계적 시공간, 또는 탈물질화된 시공간을 창출하며 자연에 없는 신물질들을 생산한다. 따라서 이 두 개의 메커니즘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충돌은 자본주의생산양식이라는 체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도시들의 성장과 파괴가 그 도시들을 발전시킨 에너지시스템의 성장과 파괴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자본주의생산양식이 인간과 자연을 ‘인간의 주체화-향락적 소비욕망’, 그리고 ‘생산/비생산의 가치계열’로 자연을 계열화함으로써 그전에 존재했던 그 어떤 생산양식보다도 더 총체적이고 전면적으로 지구의 에너지순환시스템과 생태계적 자정 및 균형능력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현대자본주의는 BT산업과 같이 그전에는 상품의 대상이 아니었던 ‘생명체’들을 자본축적의 대상으로 전화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환경오염과 위기’를 ‘물의 사유화’ 및 각종 환경친화적 상품들로 바꿈으로써 ‘그린의 상품화’라는 새로운 가치축적의 대상으로 전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환경위기는 근본적이고 총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성/생식의 자본주의적 포획: 근대자본주의에서 여성의 성은 비록 그것이 가부장제적 남성의 환타지와 결합된 ‘성의 상품화’와 함께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혈연의 재생산’이라는 성의 자연성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성적 욕망에 대한 긍정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성-사랑’은 근본적으로 자연적 성을 초과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족에 대한 대가 없는 지불이라는 ‘사랑의 공동체’라는 환상체계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의 노동의 상품화가 함축하는 인간과 자연의 분리, 그리고 인간의 인격적 독립성이라는 환상과 함께 진행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종족 번식으로서의 ‘성=생식’이라는 자연성을 넘어서며 신에 의해 억압되어 왔던 인간의 욕망과 감정, 성적 욕망을 포함하는 인간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인문주의적 운동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렇게 초과하는 ‘성-사랑’은 자본주의생산양식 내부로 온전하게 포섭될 수 없다. 왜냐 하면 노동력이 노동과의 분리를 통해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상품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처럼 성-사랑도 자본주의생산양식의 가치 메커니즘 안으로 포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의 과학기술이 테크노피아적 미래라는 환상에 기초하여 대중을 포획해 왔듯이 근대가족제도도 이성애적 성인 남성노동자들과의 공모를 통해서 가부장제의 자본주의적 재편이 이루어진다. 이성애적 성인 남성노동자는 자본주의생산양식의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이라는 가치의 틀을 수용함으로써 가족제도 내에서의 권력을 획득한다. 따라서 이 구조 하에서 자본과 임노동은 상호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수탈하는 전체메커니즘을 이끌어가는 파트너일 뿐이다. 여기서 자본/임노동의 상호 투쟁적 메커니즘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이성애적 권력이라는 또 다른 권력메커니즘에 의해 보완되며 전치된 환상체계를 만든다.

남성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그 책임에 대한 대가로 ‘가부장제적 권력’을 보존한다. 그는 힘들지만 그의 권력이 그의 책임에 대가로 주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임노동자로서 노동자가 가부장제와의 공모를 통해서 자본주의생산양식 내부로 포획되면 될수록, 그리하여 임노동만을 생산적인 것으로 보는 자본주의의 생산적 노동 개념을 고수하면 할수록 그의 얄팍한 지배 욕망 때문에 그의 노동력 가치는 더욱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임노동자로서 남성노동자들, 자본에 포획된 노동운동의 딜레마가 있다. 즉, 이성애적 가부장제는 단순한 성모순의 문제가 아니라 역으로 자본주의생산양식 내부로의 노동을 포획하면서 발생하는 노동/노동력의 간극을 감추는 기제가 되며 노동자의 노동력 가치를 하락시킴으로써 임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는 기제로 전화된다는 것이다.

임노동자는 그의 노동력을 팔아서 ‘사랑’이라는 의무와 책무 속에서 가족 전체를 재생산하고자 하지만 자본주의생산양식은 그의 ‘성-사랑’에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다. 자본의 본성은 ‘가치증식’에 있기 때문에 오직 노동력의 가치(임금)를 노동자의 육체적 최소치-생존적 필요(need)로 줄이려고 한다. 반면 노동자들은 ‘사랑’이라는 환상 속에서 항상 그 반대편, 즉 전체 가족의 생계에 대한 책임과 그들의 삶에 대한 향유라는 욕망을 향해 움직인다. 따라서 그의 노동력 가치 하락은 가족 전체의 생명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재화의 부족, 생존의 위기로 비화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자본은 자본을 목적으로 하는 임노동자가 아닌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임노동자와 대면”(Lebowitz, 1999: 109)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이 근본적으로 향하는 방향은 ‘생산적 노동’이라는 자본의 가치양식으로부터의 이탈, 즉 ‘생식’ 밖의 ‘성-사랑’이다.


3. 생산의 사회화와 근대정치의 불가능성

 

3-1. 총체적 빈곤화와 노동가치론적 세계의 와해: 오늘날 현대자본주의는 두 개의 세계로 점점 더 분열되어 가고 있다. 한편에는 극단적인 충동과 향유, 풍요의 세계가 존재한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한 이후 부자는 백만장자가 아니라 억만장자이며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0.5%가 1년 동안 쓴 돈은 6천 500억 달러로 이탈리아 전체 가구의 지출 규모에 맞먹는다(Frank, 2008: 175).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극단적인 결핍과 빈곤의 세계가 존재한다. 오늘날 세계는 전 세계 인구의 두 배인 120억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구의 절반은 하루 2달러 이하로 살고 있으며 그 중 12억 인구는 하루 1달러 이하로 살고 있다. 따라서 ‘풍요 속의 결핍’은 자본주의가 세상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생존권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경제적으로 빈곤한 계층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오늘날의 빈곤은 단순히 경제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빈곤은 문화적이고 환경적인 빈곤을 포함한 총체적인 빈곤이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 자원 및 부에 대한 분배의 문제이거나 자본/임노동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자연/인간, 성-사랑/생식이라는 자본주의 내/외부의 변증법이 중첩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환경-생태계의 파괴는 이중도시(duel city)와 같은 공간의 분절 속에서 ‘그린의 상품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제1세계와 부자들이 사는 공간에서 쾌적한 환경은 그 자체로 상품이다. 제1세계의 환경유해산업은 제3세계로 이전될 뿐만 아니라 ‘타워팰리스’나 ‘청담동’과 같은 그들만의 공간이 구획된다.

반면 제3세계의 특정 지역은 환경유해산업폐기물의 ‘쓰레기처리장’이 되며 생명공학은 이 이원화 속에서 GMO와 LMO를 생산하며 제3세계와 빈자들의 생존을 상품화하고 그들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이런 빈곤화는 여성문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근 여성노동의 상품화는 제3세계와 빈자들의 총체적인 빈곤화를 가족에 떠넘기면서 경제력의 격차를 여성의 노동이나 성애 등을 상품화하고 있다. 제3세계 여성은 제1세계 중산층 자녀에게 돌봄노동을 하면서 정작 자신의 자녀들은 할머니에게 맡겨놓는다. 따라서 여성의 돌봄노동은 제1세계의 여성을 자본주의적 생산 메커니즘으로 포획하면서 빈부격차에 따른 제3세계 여성의 노동을 착취한다.

따라서 빈곤화는 ‘경제’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환경적 빈곤)과 자신의 몸과 상징 등 문화적 자산의 결핍(문화적 빈곤)이라는 차원에서 삼중적으로 중첩(경제-환경-문화적 빈곤)되면서 진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적인 수탈 메커니즘을 강화하면서 그것을 자본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존의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가치증식’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산에 투자된 자본이 그 속에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것이 자본의 ‘가치증식메커니즘’으로 통합되고 있다는 것은 현대자본주의가 ‘노동/임노동’의 가치계열화를 ‘생산’ 영역에서 ‘소비’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수탈메커니즘을 만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오늘날 생산적/비생산적이라는 ‘노동패러다임’을 부정하고 그것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자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그들의 소유권과 지배-통제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점점 확대되는 자기모순을 국가의 법-제도적 강제장치를 이용한 ‘경제외적 강제’로 대체하고 있다. 하비는 ‘노동의 재생산을 통한 축적’과 구분하여 ‘수탈에 의한 축적’을 구분하고 있다. 전자는 맑스의 자본주의생산양식의 특징으로 규정한 ‘경제적 강제’인 반면 후자는 ‘경제외적 강제’이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점점 더 자본주의생산양식 내부의 착취메커니즘인 ‘경제적 강제’가 아니라 ‘경제외적 강제’를 필요로 하는가? 그것은 바로 오늘날의 자본주의생산양식이 더 이상 임노동만으로 자신의 이윤증식메커니즘을 가동시키지 않으며 자연/인간, 가부장제적 약탈메커니즘을 내부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자본주의는 EC혁명, BT혁명 등을 통해서 기존에는 가치증식 메커니즘으로 포획하지 않았던 영역들, 예를 들어 자연적 생명체들이나 정보-정서노동 등을 자신의 축적 메커니즘으로 급속히 빨아들이고 있다. LMO, RMO뿐만 아니라 전자네트워크를 통해서 구축된 삶 자체가 가치축적의 대상이다. 여기서 자본주의 축적 메커니즘으로 포획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협력, 사회적 협력 네트워크 그 자체이다. 따라서 오늘날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노동이 수행하는 ‘가치 생산’의 역할은 더욱더 떨어지고 있으며 직접적인 생산적 노동은 점점 배제되고 있다. 노동의 배제, 그것은 맑스가 이미 예견했던 바이기도 하다. “직접적인 형태의 노동이 부의 위대한 원천이기를 중지하자마자 노동시간이 부의 척도이고 따라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의 [척도]이기를 중지해야 한다. 대중의 잉여 노동이 일반적 부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기를 중지했듯이, 소수의 비노동도 인간 두뇌의 일반적 힘들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기를 중지했다.”(Marx, 2000b: 381)

3-2. 소결: 어디에서 출발할 것인가?

① 노동운동의 체제내화와 생산패러다임 벗어나기: 맑스 사후, 『자본』의 논리-역사적 추론은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부르주아 또는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체의 개입은 자본의 운동양식에 대한 일정한 수정을 가져왔으며 1950년대 자본주의의 황금기와 더불어 서구의 노동자계급은 정치-당, 경제-노조의 양날개론에 근거한 지배체제 내부의 동맹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역사에서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맑스가 말하는 ‘계급해방의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지탱하는 핵심계급이 되었다. 그들은 정치적 측면에서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회민주주의로 흡수되었으며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위해서 자본가계급과의 ‘사회적 타협’을 만들어왔다. 따라서 노/자의 적대적 분열, 노/자의 화해불가능한 적대성에 기초한 자본주의 내부 또는 중심에서 그 밖으로의 도약이라는 ‘혁명의 정치학’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 그렇다면 더 이상 자본주의체제 내부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변혁을 모색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애초 맑스주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화해는 불가능한, 적대적인 모순이라는 전제 하에서 출발했다. 노동자계급은 자본의 극복 없이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그러나 1950년대 서구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을 극복하기보다는 자본가와의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서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는 길을 선택했다. 전국적으로 조직된 노동조합과 정치적으로 성장한 노동자당은 오히려 그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고 그들의 상대적 지위를 확고히 하는데 몰두하였다. 여기서 배제된 것은 자본/임노동의 생산체제 내부로 들어가지 못한 자들, 주변부에 밀려난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변혁의 주체가 자본주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 또는 그 내부로 완전히 포획될 수 없는 지점, 주변, 경계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토니오 네그리 ?한겨례

② 사회경제적 구성의 변화: 노동의 신화 대 노동의 종말→산업사회 대 탈산업사회(엘빈 토플러, 다니엘 벨), 물질노동 대 비물질노동(네그리), 착취 대 약탈(하비)→근대적 패러다임/탈근대적 패러다임

: “20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에 산업노동은 자신의 헤게모니를 상실했으며, 그 대신 비물질적 노동 즉 지식, 정보, 소통, 관계 또는 정동적 반응 등과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들을 창출하는 노동이 출현했다.” (≪다중≫, p. 145.)→“우리의 주장은 비물질노동이 질적인 면에서 헤게모니적이 되었고, … 오늘날 노동과 사회는 정보화될 수밖에 없으며, 지적으로 되고, 소통적으로 되며, 정동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다중≫, p. 146.)

⇒ 사적 소유의 불가능성→개인주의-자유주의적인 근대 부르주아사회의 한계, 부르주아 정치의 불가능성

cf. “삶정치적 생산이 한편으로는 (시간의 고정된 단위로 양화될 수 없기 때문에) 측정 불가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 결코 삶 전체를 포획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이 그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가치를 언제나 초과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과 가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맑스의 견해를 수정해야 된다.”(≪다중≫, p. 187) → “사실은 우리가 소통과 사회적 네트워크들, 상호작용적 서비스들, 그리고 공통 언어들로 구성된 생산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 상품을 사용하고 상품의 점유에서 유래하는 모든 부를 처분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로 이해되는 사적 소유 개념 자체는 이 새로운 상황에서 점점 더 무의미해진다. 이러한 틀에서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상품들은 더욱 적어진다. 즉 공동체가 바로 생산하는 것이며, 생산하는 동안 바로 그 공동체는 재생산되고 재규정된다. 그러므로 고전적이고 근대적인 사적 소유개념의 근거는 탈근대적 생산양식 속에서 어느 정도 해체된다.”(≪제국≫, p. 395-96.)→“공통된 것의 강탈”: “오늘날 비물질적 생산의 패러다임에서 가치이론은 측정된 시간의 양이라는 관점에서는 이해될 수 없으며, 그래서 착취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가치의 생산을 공통된 것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또한 착취를 공통된 것의 강탈로 간주하려고 해야 한다. 달리 말해 공통된 것이 잉여가치의 장소가 된 것이다. … 예를 들어 정동적 노동에서 뽑아내는 이윤에 대해 생각해보라. 언어, 아이디어, 지식을 생산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공통적으로 생산된 것이 사적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민공동체에서 생산된 전통적인 지식이 혹은 과학공동체에서 협동적으로 생산된 지식이 사유재산이 된 경우가 그러하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통적인 특징이 사라져가는 상황에서도 자본이 여전히 통제력을 행사하여 부를 뽑아내는 모호한 논리를 화폐가 그리고 경제의 금융화가 요약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금융자본의 이윤들은 공통된 것의 강탈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일 것이다.”(≪다중≫, p. 191.)

3-3.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향유의 삶: 현재 진행되는 자본-기술-권력의 일체성이 지닌 양가성(ambivalence)을 볼 필요가 있다. STR은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킨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이 아닌 다른 사회화의 길이다.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노동시간의 단축 없이 극복될 수 없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 욕구에 대당적이다. 맑스는 기계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이 사회의 필요노동시간을 최소한으로 단축시킴으로써 개인의 발전을 위한 예술적이고 과학적인 교양의 조건을 형성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본에 의해 전유될 때, 과잉인구와 과잉생산으로 전화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전자의 길과 후자의 길은 전혀 상이한 가치와 결과를 함축하는 두 가지의 길이며 선택지이다.(두 가지 길)

맑스는 “오감의 형성은 지금까지의 세계사 전체의 노동”(Marx, 1991: 162)이며 “산업의 역사와 산업의 이미 생성된 대상적 현존재는 인간 본질적 힘들의 펼쳐진 책이며 감각적으로 눈앞에 있는 인간 심리학”(Marx, 1991: 163)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이런 “모든 육체적 및 정신적 감각들 대신에 이러한 모든 감각들의 완전한 소외, 즉 가짐이라는 감각”(Marx, 1991: 160)으로 환원한다. 맑스의 국민경제학 비판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

“국민경제학, 이 부의 과학은 … 동시에 단념, 내핍, 절약의 과학이다. … 자기 체념, 생활의 체념, 모든 인간적 욕구의 체념이 국민경제학이 주로 가르치는 명제”(Marx, 1991: 173)이다. 따라서 그는 “풍부한 인간과 인간적 욕구”로 “국민경제학적인 부와 빈곤을 대체”하고자 했다. 그것은 “다른 인간들의 감각들과 정신”이 나 자신의 전유”가 되는, “인간적인 생활의 자기화 방식”으로서 대안적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Marx, 1991: 159). 생산력의 발전은 자연이라는 제약이 제공하는 “곤궁성과 대립성의 형태를 벗어나”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물질적 토대로, “사회적 결합 및 사회적 교류뿐만 아니라 과학과 자연의 모든 힘”들을 발전시킴으로써 “향유 수단의 발전” 및 “자유시간의 증대”시키는 사회적 생산력을 만들어놓는다(Marx, 2000b: 381). 따라서 맑스는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생산적 노동’의 가치를 고수하거나 노동가치론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다.

현재의 총체적인 위기는 생산의 사회화에 있다. STR은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키며 생산의 사회화한다. 그러나 자본은 생산의 사회화를 사적으로 전유하기 때문에 생산이 사회화될수록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며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을 자본의 증식 욕구로 바꾸고자 한다. 따라서 정보화-자동화는 인간 노동의 배제와 노동력 상품의 가치 저하를 생산한다. 반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다른 사회적 기반을 창출한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이 아닌 다른 사회화의 길이다.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노동시간의 단축 없이 극복될 수 없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 욕구에 대당적이다. 따라서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문화사회로의 길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창출한다. 따라서 두 개의 길에서 전선을 나누는 선은 생산의 사회화에 있다.

삶의 자유를 위하여[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혼자 하는 사랑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행복한 것일까 아니면 괴로운 것일까. 사랑의 시작은 달콤하고 절대로 이별이 없을 거라는 믿음으로 시작된다. 서로 마주 보기만 해도 행복한 시기에는 만남은 필연적으로 이별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설령 생각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사랑에 이별 따위는 절대 끼어 들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온다. 이별의 상황에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음을 안다 하더라도 강제적이며 급작스러운 이별은 마음 깊은 곳에 그 마음보다 더 크고 깊은 상처를 남긴다. 할머니에게는 마쓰시타와의 이별을 준비할 시간도 없었고 현실로 받아들일 심리적 여유도 없었다.

할머니에게 마쓰시타는 어쩌면 괴로움 속의 행복이 아니었을까 싶다. 할머니가 처음 읊은 시 속에서 첫사랑은 풀벌레의 울음소리처럼 애달픈 기억이었다. 깊은 밤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도 할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슬픔을 나타낼 수 없었고, 그 어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고통이었다.
 

사진 출처: http://blog.daum.net/nogada4723/

 

소리쳐 통곡할 때
초승달도 울고 있네.

이 밤도 뒹구르며
몸부림칠 때
눈물이 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네. -시 <여름밤>의 부분-

 
할머니의 사랑은 그랬다. 60여년의 긴 시간 동안 오직 혼자 알고 혼자 아파하고 혼자 그리워해야 하는 사랑이었다. 다시는 재회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간도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밤이 되면 우는 풀벌레만 함께 할 수 있었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그립다 말하지 못하고 홀로 잠 못 이루며 고통스러워야 했다.

그 고통의 시간은 또 다른 죄의식의 시간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을 할머니의 곁을 지켜준 할아버지에 대해 할머니는 “나한테 참 잘했어. 내가 아무리 성질부리고 고집을 피워도 그리 화를 안 내대.”라는 말로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참 똑똑했다. 시대만 잘 만났으모 한 자리 했을 끼다. 뭘 해도 뭘 맡아도 똑 부러졌거든.”하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 한 가정을 이루고 부부의 연을 맺어 의지하며 긴 세월을 살아온 정이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정이 따뜻하고 깊어도 사랑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랑과 정을 검은 돌과 흰 돌처럼 확연하게 구분하여 정의내릴 수 없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 사랑이나 그리움 같은 표현을 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

 

마쓰시타에 대한 할머니의 감정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의 가면을 쓴 집착이었을까? 18살 어린 나이에 만나 19살이 되어서야 마음의 문을 열고 20살에 헤어진 사람을 81세가 될 때까지 변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게 가능한 것일까? 사랑은 변하는 게 아니라고, 단지 그 사랑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거라고, 그래서 할머니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었다면 무엇에 대한 집착이었을까? 할머니는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집착하며 고통으로 살아왔던 것일까? 무엇이 할머니의 마음을 60여 년 전의 시간 속으로 자꾸 끌고 간 것이었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사라졌다.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창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 할머니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할머니가 서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앉아 있었다. 어쩌다 치마 밑으로 발이 나오면 애써 치마를 끌어당겨 발을 감추곤 했다. 진물이 묻어 있는 할머니의 발을 볼 때에도, 전동 휠체어를 타다 넘어져 크게 다쳤을 때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할머니가 자유의지로 서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80평생을 살아오면서 할머니가 자신의 삶과 자신의 몸을 자기의지대로 할 수 있었던 게 언제였을까? 마쓰시타와의 사랑이 종말을 고한 그 시점까지였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나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할머니가 집착하는 것은 잃어버린 사랑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이 아닐까?

 

너무도 사랑하여
양손을 꼭 잡고
철로길을 걸으며 뛰며
동심에 싸여
아무것도 두렵고
무서운 걸 모르더라.
-시 <사랑>의 부분-
 
서로가 웃으며 변치 말자고
손을 굳게 잡고 다짐하며
맹세도 하였더라.
이것이 영원한 우리의
사랑의 속삭임이었더라.
-시<첫사랑 이야기 1> 부분-
 

애당초 나와 마쓰시타는
맺어질 사랑이 아니었구나.
국경이 다르고 나라가 다르니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보내주리라, 가거라
속절없는 사랑, 미련 없이 보내주마
-시<첫사랑 이야기 2>부분-
 
넘어지며 엎어지며 미끄러질 때마다
사랑하는 그대의 두 팔로
안아 일으켜 줄 때마다
눈 속에서도 그 따뜻한 사랑이
우리의 정으로 더 깊이 들더라.
-시<눈 내리는 날> 부분-

 

마쓰시타에 대한 기억은 사랑에 대한 영원한 약속에서 체념으로, 그리고 따뜻했던 정으로 이어진다. 사랑에 대한 약속도 이별도 할머니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다. 비록 ‘국경이 다르고 나라가 달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이별도 할머니의 의지였다. “보내주리라, 가거라/ 속절없는 사랑, 미련 없이 보내주마”하며 체념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제 따뜻한 기억으로 돌아와 있다.
 

내게도 행운이 있었던가
김철수라는 청년을 알아서
60년 동거생활하며 그 안에서
예쁜 딸을 선물로 하나 받았더라.
-시<내 인생길> 부분-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행운”으로 표현하며, 딸은 선물로 여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21살 때 만난 청년 김철수로 호칭한다. 여기에서 나는 다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와 함께 한 60년 세월을 ‘결혼생활’이라는 말 대신 ‘동거생활’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언어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따지는 것이 때로는 무의미하기도 하지만, 불쑥 나오는 언어를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본다면 결혼이 아닌 동거는 할머니가 생각하는 자신의 결혼관에 대한 표현일 수도 있다.

마쓰시타와 함께 한 시간들과 이별이 자기의지에 의한 것이었다면, 할아버지와의 결혼은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일본에서 온 용한 의사를 만나기 위해 떠돌이 약장수를 따라 간 결과 이루어진 반강제적인 결혼이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이루어진 결혼을 인정할 수 없었노라고 이미 수차례 되뇌었다.

살면서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여길 정도로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비록 자신의 손으로 키우지 못하고 입양시켜 보냈지만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선물이라고 여길 정도로 귀한 인연이었지만, 그 결혼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것이었다. 마쓰시타와 헤어진 이후의 60년은 온전히 할머니의 삶이 아니었던 것이다. 살아도 살았노라고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삶이었다.
 
 

선택의 자유

 
사랑이니 이별이니 하는 것들은 이제 더 이상 할머니의 삶을 흔들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눈 내리는 날의 따뜻한 정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60여 년을 찾아 헤맨 것은 삶이라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였다. 한센병이 찾아오면서 할머니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살다보면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방종으로 낭비하면서도 그것을 자유라고 여기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는 자유의지로 할머니를 찾아왔고, 할머니도 자유의지로 나를 맞이해 주었지만, 두 자유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나는 내 연구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할머니를 만났고, 할머니는 삶으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해 나를 만난 것이다.

나는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각만으로 얼마나 많은 올가미를 만들고 덫을 만들어 스스로를 구속했는지, 그리고는 살기가 힘들다고 푸념했는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는 생각의 자유마저도 없었다.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선택할 수도 없었고, 희망을 가질 수도 없었다. 애써 일구어 놓은 삶의 터전도 외압에 의해 뺏기고 낯선 곳으로 강제 이주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60년 동안 자신의 자유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사랑과 슬픔을 시로 읊었다. 비록 자유롭게 선택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드러내고자 선택한 것이 나와의 만남이었다. 선택의 자유, 온전한 자유가 항상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선택에 의해 내일 불행한 일을 당할 수도 있고, 애써 일구어 왔던 꿈이 사라질 수도 있다. 다만, 선택의 자유에 의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사실만큼 가슴 벅찬 일이 있을까.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풀어놓음으로써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자유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할머니는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온전한 자유를 가지기 위해서는 할머니가 열어야 할 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5월 월례발표회가 열립니다[ⓔ시대와철학알림]

안녕하세요, 학술1부에서 5월 월례발표회를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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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월례발표회는 유현상 선생님의 박사학위논문 발표입니다.

발표 주제는 찰스 테일러의 ‘자기 결정의 자유’입니다.

지난 달 월례발표회는 주제의 신선함(?)과 서유석 선생님의 논평에 힘입어 많은 회원들께서 참여하셨습니다.

이번 발표 역시 4월 월례발표회와 같은 많은 참여와 열띤 토론을 기대하겠습니다.

발표 논문은 파일로 첨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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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찰스 테일러의 ‘자기 결정의 자유’>

발표 : 유현상(숭실대)

논평 : 김상현(성균관대)

일시 : 5월 24일 금요일 오후 6시 30분 한철연 제1세미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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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의 ‘자기 결정의 자유(self-determining freedom)’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테일러의 ‘자기 결정의 자유’의 적극적 자유로서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것이 소유권 보호 중심의 ‘소극적 자유’와 달리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자유에 닿아 있다. 테일러의 ‘자기 결정의 자유’는 그가 생각하는 도덕적 이상인 진정성의 기초 위에 성립하는 것이며, 그의 정치 철학적 입장인 ‘인정의 정치’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실천과 행위의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잉의 시대-적절함의 가치를 조롱하다[시대와 철학]

과잉의 시대-적절함의 가치를 조롱하다[시대와 철학]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불편한 진실-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은 과잉

 

고래도 춤추게 하는 칭찬이라도 지나치면 칭찬을 듣는 사람에게 불편함을 안겨 준다. 나에 대한 과도한 칭찬은 늘 몸 둘 바를 모르게 하고 칭찬하는 이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실상 어느 정도의 칭찬이 적절한지는 늘 칭찬의 대상자 자신이 정확하게 알고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과잉이 야기하는 문제는 비단 칭찬에 관한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기야 ‘과잉’이라고 하는 표현 자체가 어떤 문제를 일으킬 법한 자태를 취하고 있지 않은가?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가난’ 이외의 과잉을 경험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수많은 과잉의 숲에서 숨 쉬고 있다. 문제는 과잉의 상태가 긍정의 요소마저 부정적 상황으로 치닫게 만든다는 점이다. 친절 역시 마찬가지이다.
 
최근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프렌차이즈 식당에서는 주문을 받을 때 종업원들이 거의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는 듯이 자세를 낮추어 주문 받는 것을 볼 수 있다. 비록 경제적 비용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제공받는 위치에 있다고는 하지만 친절의 과잉으로 느껴져 유쾌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이 겪는 불편함은 서비스 혹은 친절의 과잉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발생하는 문제 중 아주 사소한 점에 불과하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당사자들도 자발적이기보다는 고용주의 요구에 따른 것이기에 편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친절이든 칭찬이든 적절함을 잃어버릴 때 그것은 즐거운 감정의 형성에 기여하기보다는 찜찜한 뒷맛을 남기기 마련이다. 최근에 벌어진 대한항공 승무원 폭행 사건이나 전화 상담 업무에 종사하는 직원들이 당하는 부당한 대우는 친절 과잉 사회의 폭력적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과잉의 ‘감정노동’에 도사린 이중의 착취

 
최근 각종 언론에서 우리나라의 생산성 향상율 저하가 경제 성장을 더디게 한다는 보도를 내놓고 있다. 특히 서비스 산업의 생산성이 선진국들에 비해 크게 뒤진다는 보도는 서비스 산업 종사자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는 빌미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게 한다. 이러한 분석들은 1차적으로는 기업의 생산성 강화 노력을 촉구하는 근거로 작용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 강화로 이어질 개연성도 결코 낮지 않다. 특히나 서비스 산업의 최일선에 종사하는 감정노동자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분석이다.
 

그림출처: http://hook.hani.co.kr/archives/33293


 
감정노동의 문제를 대하는 언론의 보도 태도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열악한 근무 조건에 시달리는 감정 노동자들의 근무 실태를 다루는 기사들 대부분이 이른바 몰상식한 고객들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기업 임원에 의한 대한항공 여승무원 폭행사건에 대한 보도에서도 몰상식한 가해자의 행위와 대한항공의 대응 등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서비스의 과잉의 근본적인 책임은 자본에 있다.
 
소비자들이 감정노동자들을 향한 과도한 친절 요구에도 분명 문제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과잉의 서비스에 익숙해진 결과이지 소비자가 먼저 요구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른바 서비스 경쟁이라고 하는 경영방침이 종업원들에게 지나친 감정노동을 강요하고 소비자들의 태도는 그러한 대우에 익숙해진 결과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소비자가 먼저 밥 먹으러 가서 무릎 꿇고 주문 받는 서비스를 기대했을 리 없고, 허리 깊숙이 숙이는 절을 요구하는 고객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과잉의 서비스는 고용주들이 친절을 명백히 함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우리가 이만큼이나 극진하게 서비스를 제공했으니 소비자는 그에 상응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점을 못박아두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동일한 제품이 백화점에서 훨씬 비싸게 판매되는 여러 이유 중에 하나도 극진한 친절 비용까지 포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상 그러한 서비스의 제공자는 기업이 아니라 일선의 감정노동자이다. 그러므로 감정노동의 착취는 자본이 노동자들의 감정을 이용해 이윤을 극대화하면 감정노동이 생산한 가치의 일부를 가져가는 것으로 자본의 전형적 노동 착취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또한 소비자들로부터는 선택의 여지없이 불필요한 비용까지 지불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소비자에 대한 착취 구조마저 도사리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마치 과대 포장으로 제품 가격을 부풀려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과 다름없다.
 
 

여러 겹의 질곡

 

현재 우리나라에서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여성이다. 그리고 감정노동으로 분류되는 직종들은 몇몇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전문성을 요구하지도 않고 진입 장벽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역으로 말하면 노동 강도가 세고, 저임금일 가능성이 높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신분의 불안전성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필연적으로 여러 겹의 질곡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한다.
 
우선 감정노동자의 상당수가 여성이라는 점은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구조가 산업의 영역에서 강고하게 전이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여성의 노동을 부수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산업화 시대에 수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저임금의 노동집약적 산업에 종사했던 상황이 서비스업으로 전환되었을 뿐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감정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겪게 되는 또 다른 질곡은 고용주와 소비자 어떤 쪽으로부터도 인격적인 대우를 받을 장치를 보장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감정노동자들에게 고용주의 권력과 소비자의 권리는 이중의 족쇄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감정노동 자체가 이미 상품화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제공하는 감정노동자의 인격적 지위는 원천적으로 상실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감정노동자들은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의 소외에 더해 고객으로부터의 직접적인 소외까지 경험하게 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염려되는 점은 감정노동이 근본적으로 노동자 자신이 스스로에게서 겪는 자기 소외를 경험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자신의 본래 감정과 정서를 어느 정도는 감추어야 한다는 점은 불가피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가장된 감정을 가지고 대응해야 한다는 사실은 스스로에게 견딜 수 없는 질곡이며, 지속적으로 자존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게 만든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스트레스 이상의 부담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과잉의 억압은 일상을 왜곡한다

 

과도한 친절에의 요구는 일상의 다른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표적인 사례가 존칭 사용의 왜곡이다. 고객에 대한 지나친 존칭 사용의 관례가 이제는 상품에 대한 존칭으로 굳어지고 있다. 티셔츠 한 장을 구매하려는 순간에 우리는 매장 직원으로부터 “그 제품은 세일중이세요.”라는 말을 듣게 된다. 상품에 존칭을 붙이면 우리는 그 상품을 떠받들어 사야 한다는 말인가? 누군가가 일부러 그러한 어법을 사용하라고 가르친 적은 없을 텐데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이는 마치 군대에서 말을 할 때 ‘다’, ‘나’, ‘까’로 문장을 맺으라고 하는 어법을 요구한 결과 “다음 주에는 제가 휴가를 가지 말입니다.”와 같은 어색한 표현이 굳어지고 있는 현상과 같다. 존칭 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까 하는 부담이 모든 말에 존칭을 붙이는 식으로 왜곡되는 것이다.
 
산업 구조에서의 비중이 제조업에서 서비스 산업으로 급속하게 확대되는 추세에서 감정노동자들에 대한 법적, 제도적인 보호책 마련은 서비스 산업 생산성 향상보다 시급한 문제이다. 감정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은 단지 감정의 착취만이 아니라 미래마저 착취당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노동에 대한 사회적 존중은 그들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격적 존중의 태도를 훈련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산업 사회에서처럼 노동자들이 그러했듯 감정노동자들이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투쟁에 나서기 전에 국가와 사회가 먼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사가 아니라 중국사가 한의 역사:김택민이 쓴『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보고 듣고 생각하기]

한국사가 아니라 중국사가 한의 역사

-김택민이 쓴 『3000년 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신서원, 2006-

글:? 나태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여유 있으면 8천만 겨레 모두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

중국사를 관통하는 고난에 비하면, 우리 역사 관통하는 고난은 소꿉장난 수준이다. 일제강점기 일본학자가 우리 고난 침소봉대했고 이병도 따르는 역사학자들이 계속 식민사관 대물림한다. 이병도는 을사5적 이완용 양아들이다.

한국이 951번 이 땅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면, 중국 땅에서는 약 3만 번 전쟁이 일어났고, 일본에서는 약 2만 번 전쟁이 일어났다.

중국역사
맨 앞 1천년, 난세 870년 치세 130년
가운데 8백년, 난세 670년 치세 130년
마지막 1천년, 난세 700년 치세 300년(12쪽)

1979년에 박정희가 지 부하한테 총알 맞아 죽었다. 그 때 나는 중3 학생이었다. 1980년에 나는 고 1 학생이었다. 40대 중후반 윤리선생님이 침을 튀기면서 우리는 못난 민족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 『시련과 극복』이라는 책이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책 앞 부분에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한테 9백 몇 십번을 침략 받았다는 내용이 나왔다. 그 내용을 설명하시면서 윤리 선생님이 “우리 민족은 병신이야”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뭐라 설명할 수 없었지만 좀 거시기 했다. 좀 억울했다.

중학교 때 국사 책 앞 부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고구려가 위장 관구검한테 공격 받아 왕이 어디로 도망갔다. 라는 내용이 말이다. 책을 쓴 학자들이 식민사관에 세뇌되어 그리 썼을 것이다. 중국학자들이 쓴 책을 보면 자기들이 진 전쟁에 대해 역사책 앞에서 다루지 않는다. 수나라, 당나라가 고구려한테 대패한 이야기 잘 다루지 않는다. 간혹 다루더라도 아주 쪼금 다룬다.
 

김택민,『3000년 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신서원, 2006. 사진출처: www.everedu.com/


 
1981년에 서울역 대일학원에 다녔다. 성문기본영어 들었다. 강사는 일본에서 살다가 오신 분이다. 그 분이 그러시더라. 우리 민족은 단일민족 아닙니다. 원나라한테 침략 받을 때 우리 조상 여자들이 겁탈 당했습니다. 여러분 핏속에 몽골 피 있습니다. 우리나라 기와집 처마는 새 날개 모양입니다. 우리나라가 너무도 많이 다른 나라한테 침략을 받아서 새처럼 자유를 추구하는 마음이 생겨서 건물 처마가 새 날개 모양입니다.

그 분이 또 헛소리 하셨다. 우리가 세계에 내세울 유물이 석굴암이 아닙니다. 비원에 있는 아무개라는 목조건물입니다. 같이 일한 역사 강사가 그러더라. 우리 전통가옥 처마는 아래에서 볼 때 가장 웅장하게 보이도록 각도를 잡았다고 말이다.

우리나라 국사책에
일제 강점기 항목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나라 세계사 책에는

오호 16국 강점기,
요 강점기,
금 강점기,
원 강점기,
청 강점기

라는 항목이 나오지 않는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영어판을 1985년에 대학 도서관에서 본 적이 있다. 일본 항목을 봤더니 1대 왕부터 몇 대왕까지 줄줄이 사탕처럼 나온다. 상식 있는 일본학자들이 몇 대까지는 뻥이라고 인정하는 내용이 버젓이 사실인 양 나왔다. 대한민국 항목을 봤더니 단군 왕검 이야기 나오고 갑자기 서기 삼국시대 이야기 나온다. 단군 왕검 이야기는 신화로 나온다. 서양인들이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면 일본이 한국보다 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로 볼 것이다. 열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 항목은 이 나라 영문과 교수들이 영역했더구만. 당연히 원래 글은 식민사관에 쪄든 이병도 제자들이 썼겠지. 이병도가 나라 팔아먹은 이완용 양아들이라는 것을 최근에 알았다.

1985년에 대학생 사촌집에 갔다. 사촌한테 내가 물었다. 일제 시대와 해방초기에는 우리나라 마라톤 선수가 세계 맨 앞 이었는데 지금은 왜 성적이 나쁠까? 사촌이 그러더라. “조선 놈은 3일에 한 번씩 맞아야 정신 차려.” 식민사학자가 우리한테 심어놓은 말을 이 나라 최고 지성인이라는 대학생 입에서 나왔다. 깝깝했다.

이래서 나는 한국고대사에 관심이 많다. “조선 놈은 3일에 한 번씩 맞아야 정신 차려.” 이 말이 이 땅에서 없어지는 그 날까지 나는 한국고대사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3000년 중국역사의 어두운 그림자』로 책 제목 바뀜)이 책이 많이 팔려야 화이사관 식민사관 문제 풀 수 있다.

구보씨, 잠에서 깨어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잠에서 깨어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교수)

 

?

나름 긴 잠이었다. 구보씨는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크게 하품을 하는 구보씨의 쩍 벌어진 입에도 비춰든다. 아직 졸음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듯 눈을 연신 비벼대는 구보씨, 그 부스스한 모습이 꼭 겨울잠이라도 자고 일어난 짐승 같다.

?

잠이란 참 좋은 거야, 하고 구보씨는 생각한다. 잠은 일종의 축복이지, 잠이 아니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거듭 새로워질 수 있겠어. 구보씨는 마사지하듯 양손으로 얼굴을 부비다가 다시 눈을 끔벅거려 본다. 세상이 맑고 투명하다. 언제 이렇게 환해졌을까. 저 멀리 신록의 산등성이가 뿜어내는 청량함이 피부와 와 닿는 듯하다.

?

대체 얼마나 잤지? 영 분명치가 않다. 거푸 퍼마신 술 탓일까. 한 동안 멍한 기분으로 끼적끼적 살아서일까. 그러나 어떻든 세월은 흐른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니 뭐니 하더니 계절은 이미 봄을 훌쩍 타넘고 있지 않은가. 한참을 자고 깨니, 어두운 긴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은 기분이다. 겨울잠을 자고 난 곰처럼, 구보씨는 뻐근한 팔다리와 몸뚱이를 이리저리 흔들고 비틀어본다.

?

잠은 우리를 순수하게 만든다. 꼬인 몸과 마음의 타래들을 풀어 원상태에 가깝게 돌려놓는다. 서로 얽혀 랙이 걸릴 지경인 프로그램들을 리세팅해주는 격이라고나 할까. 일반적으로 잠은 휴식이고 복구며, 재정비고 새로운 준비다. 활동의 감소와 위축처럼 보이는 잠의 비활성 상태는 깨어 있는 분주함 못지않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한다. 아이들은 잠 잘 때 크고, 미인은 잠잘 때 예뻐진다지 않는가.

?

그러나 겨울잠은 좀 다르다. 거기엔 일종의 마비가 수반되는 까닭이다. 하기야 모든 잠이 얼마간 그렇긴 하다. 보통 우리는 꿈을 꾸는 수면 상태(REM 수면)에서 근육의 긴장을 놓아버린다. 하지만 겨울잠의 경우는 긴장 이완이 그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흔들어도 쉽게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활동이 정지되고 체온도 떨어진다. 동물들은 겨울잠을 자면서 꿈을 꿀까? 아마 아닐 것이다. 냉동 인간이 꿈을 꿀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가시에 찔려 잠든 숲속의 공주가 그 잠든 백 년 동안 꿈을 꾸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

하지만 ‘팻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까뜨린느 브레야 감독의 영화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는 가시에 찔린 공주가 잠든 사이에 나이도 먹고 꿈도 꾼다. 브레야는 잠이 마비 상태라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브레야의 공주는 그 꿈 속에서 평생의 연인을 만나고, 그 기억을 지닌 채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온다. 이 여성에게는 마비와 멈춤의 시간은 없다. 잠자기 전과 잠이 깬 후, 꿈꾸기 전과 꿈꾸고 난 후는 다르다. 그녀는 순진한 채로 머물러 있지 않다. 그래서 그녀는 깨어나 당당히 행동하고 남자 친구에게 당당히 이렇게 말한다. “난 혼자서 네 세계 속으로 들어갔던 거야.”

?

브레야는 긴 잠의 설정이 함축하는 정지와 수동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나 보다. 어쩌면 거기서 남성 지배의 사회가 설정한 순결과 정조의 이미지를 보았는지도 모른다. 일찍이 이링 페쳐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잠이 순결을 강요하는 상징이라고 해석하지 않았는가. 모름지기 젊은 계집은 정숙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잠은 그 기다림의 강제된 형태다. 그것은 물레 막대기의 뾰족함을 경계하지 못한 데 대한 벌이다. 방종의 유혹이 널린 현실을 함부로 돌아다닌 죄는 마비의 잠으로 가려지고 치장되어야 한다. 백 년 동안의 잠은 순결을 회복하고 보증하는 장치다.

?

이런 종류의 잠은 현실에 대한 외면이고 도피이면서 또한 현실의 강압에 대한 순응이기도 하다. 자고 있는 동안에도 세상은 굴러간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에서는 궁전의 요리사가 요리하던 생선까지도 마법에 의해 잠에 빠지지만, 이렇게 잠든 환경은 잠자는 공주의 부속물일 뿐 시간 속 세상이 아니다.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린 채 긴 잠에 빠진 공주는 과연 평화로울까? 그것은 마비의 평화로움, 마비의 순결함일 뿐이다. 더구나 그것은 과연 그녀를 위한 것일까?

?

오스트레일리아의 여성 감독 줄리아 리의 영화 ‘슬리핑 뷰티’는 이런 질문에 노골적으로 답한다. 돈이 아쉬운 미모의 대학생 루시는 마비되듯 잠든 채로 발가벗겨져 하얀 침대에 누워 있고 돈과 지위로는 아쉬울 것이 없는 노인네들이 차례로 그녀를 탐한다. 그러나 ‘삽입’은 금지다. 순결함이야말로 이들이 바라는 것이므로. 루시는 자신의 자궁을 결코 성소(聖所)라고 여기지 않지만, 그들은 그것을 원한다. 수동적이고 하얀 몸뚱이의 순수를. 약을 먹고 잠들었다 깬 루시는 자신이 잠자고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모른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계속 순수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더욱 더 더럽혀진 것일까?

?

이런 경우에 잠은 그 약점을 훤히 드러낸다. 이 잠에서 나는 세상과 교호적이지 않은 관계를 맺는다. 나는 세상을 무시하고 세상은 나를 유린한다. 나는 그 유린을 묵과하고 망각함으로써 세상에 아부한다. 때로 우리의 잠은 이렇게 비루하다. 거기에 비하면 동물의 겨울잠은 얼마나 안온한 축복인가. 매서운 겨울 날씨는 동굴에 웅크려 잠자는 짐승의 몸뚱이를 유린하지 못한다.

?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

“뭐가 말이야? 겨울잠 자던 곰? 아니면 나?”

?

“아니, 루시 말이야. 영화 ‘슬리핑 뷰티’의 루시라는 여자…”

?

Y다. 그녀도 일어났다. 그녀는 부스스하지 않고 얌체 같이 예쁘다. 언제나처럼.

?

“글쎄, 너라면 어떻게 하겠니? 막상 돈을 몇 번 손에 쥐고 나자 잠잘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궁금한 거야. 그래서 침대에 눕기 전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지.”

?

“그럼 결국 알게 됐겠네?”

?

“근데 그렇게 영화가 진행되면 시시하지 않겠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고서는 마비된 순수를 파는 일을 그만둔다? 아니면 분노에 차서 복수를 한다? 이거 다 너무 통속적이잖아.”

?

“왜, 그 더럽고 못된 노인네들을 혼내 주는 게 괜찮을 것 같은데. 폭로해서 몰락시킨다든지 아니면 짤 라버린다든지 해서 말이야. 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걸 생각만 해도 오싹해. 검사들 접대 사건만 해도 그렇잖아, 그 개새끼들… 그래도 정신 못 차리고 윤창중이 같은 기가 막힌 일도 생기고…”

??

“허, Y야, 잘 자고 나서 왜 그래? 아무튼 이 영화에선 그런 식으로 처리하진 않아. 줄리아 리라는 감독이 시나리오도 썼는데, 그 여잔 루시를 유린하는 현실 자체의 공허함이나 균열을 드러내려 하지. 싸움으로 몰고 간다면 그 노인네들, 그러니까 지배 계층의 패배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환상적 만족에 그치지 않겠어? 아니면 그저 그런 고발 영화가 되고 말거나…”

?

“줄리아 리? 그 사람 한국계야?”

?

“아니, Leigh라고 쓰는데, 호주 여자야. 소설도 쓰는 작가고. 그런데 이 영화 원작은 가와바타 야스나리 소설이지.”

?

“가와바타?

?

“가와바타? [설국]의 그 가와바타 말이야?”

?

“맞아. 그 사람 소설에 [잠자는 미녀]라고 있거든. 1960년에 발표한 거니까 줄리아 리의 영화보다 50년 전이지. 거기서도 잠재워 놓은 젊은 처자를 탐하는 노인이 나와. 영화의 기본 얼개는 이 소설에서 따왔다고 봐야지. 하지만 세부 내용이나 분위기는 꽤 달라. 무엇보다 가와바타의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에구찌(江口)라는 노인네거든. 이 노인네가 수면제를 먹여 잠재운 여자랑 동침할 수 있게 해주는 유곽을 찾아가서 겪는 이야기를 그린 거야. 여러 번에 걸쳐 이 여자 저 여자랑 같이 자면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거지.”

?

“그게 무슨 이 생각 저 생각이야, 이런 지랄 저런 지랄이지. 드런 놈들, 구역질 나.”

?

“하하… 왜 나한테 그래? 가와바타 소설이 남성 중심적인 건 분명하지만, 그래도 나름의 섬세함이 있잖아… 아무튼 그래서 영화에선 여자를 주인공으로 놓는 거 아닐까. 루시라는 여자가 겪는 이야기가 중심이 되거든. 하긴 영화에서도 에구찌 비슷한 노인네가 나오긴 해. 공허해하고 우울해하며 삶에 그다지 애착을 갖지 못하는 노인네… 이 노인네는 결국 잠든 루시 옆에서 약을 먹고 죽지. 가와바타 소설에서는 옆에서 자던 여자가 죽거든. 나는 이게 현실의 공허와 균열을 나타내려는 장치라고 봐. 루시를 유린하는 현실은 실상 노쇠한 무의미의 현실, ‘뼈가 부러진’ 현실이야. 그 현실은 이제 절망하여 스스로 무너지지. 그렇지만 루시처럼 마비 상태로 잠들어 있으면 깨어나서는 소스라치며 놀라 소리 지르게 돼. 이건 잠의 부정적 이미지야. 망각과 아부의 잠, 그건 결국 죽음과 동침하는 잠이고 죽음과도 같은 잠이지. 루시의 카메라에 찍힌 잠의 모습처럼. 그게 싫으면 깨어 있어야 하는 거야. 불면(不眠)의 주의력으로 눈을 똑바로 뜨고 말이지.”

?

“너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아까는 잠이 축복이라고 하지 않았어? 횡설수설하는 것을 보니 아직 잠이 덜 깬 거 아냐?”

?

“내 참, Y야, 그러니까 잠에는 두 종류가 있다는 거야. 꿈꾸는 잠과 마비의 잠. 회복과 갱신을 위해서는 잠을 자되 넋을 놓고 있지는 말아야 하는 거라구. 꿈도 없는 깊은 잠은 꿈꾸는 잠과 결합되어 있을 때만, 또 야경(夜警)의 매서운 눈초리와 결합되어 있을 때만 의미가 있는 거야. 그래서 우리는 겨울잠을 잘 수 없는 거지. 우리네 삶에는 겨울을 피해갈 수 있는 안온한 동굴이란 없으니까…”

?

“하지만 구보야, 내가 볼 때 나쁜 잠과 좋은 잠을 가르는 특징은 딴 데 있어. 그렇게 잠꼬대처럼 복잡하지 않고 아주 단순한 거라구.”

?

“뭔데?”

?

“코 골지 않는 거. 구보야, 내가 왜 이런 말 하는지 알지?”

?

글로벌 스타 싸이? ‘세계정신’은 이들이 최초![청춘의 고전 시즌3] -②

헤겔과 베토벤

 

강사 : 이관형(서울과학기술대학교 외래교수)
정리 : 박태근(알라딘 인문 MD)???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프레시안>, 출판사 알렙이 기획한 ‘교양 대한민국, 청춘의 고전’ 시즌 3 두 번째 강좌.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외래교수 이관형이 강연자로 나서 근대 철학과 근대 음악의 거장으로 꼽히는 헤겔과 베토벤을 겹쳐보며 철학과 예술을 통한 인간 정신의 자유가 어떻게 가능한지 살펴본다.

이날 강연은 바이올리니스트 최윤정, 피아니스트 최규진이 함께 연주한 베토벤의 <로망스>로 시작했는데, 정작 강연 안에는 음악이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만 없을 뿐 인간 정신의 자유가 만들어내는 화음은 어느 음악 못지않게 매혹적이었다. 헤겔이 전하는 묵직한 철학의 사유, 베토벤이 전하는 감각적인 음악의 사유에 들어가 보자. <편집자>

 

ⓒ알렙(조영남)

공교롭게도 베토벤과 헤겔은 1770년 같은 해에 태어났습니다. 서로 알고는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헤겔이 베토벤에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살아서 로시니, 죽어서 베토벤’이란 말이 있는데 로시니는 생전에 각광을 받았고, 베토벤은 그렇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빈 고전파를 띄우기 위해 베토벤 영웅 만들기를 시도한 게 아니냐는 평가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도 베토벤 그리고 ‘짜자자잔’ 하는 <운명>은 다들 알고 있잖습니까. 오늘 강의에서는 베토벤과 헤겔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당대의 지적 배경과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세계의 세계화’는 근대의 산물이다

한동안 ‘글로벌’이 유행했지요. 그런데 요즘 글로벌이라고 하면 글로벌 금융 위기밖에는 없습니다. 글로벌, 그러니까 세계화라는 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과거를 돌아보면 교류가 있었다고 해도 ‘세계가 하나다’라는 인식은 없었을 겁니다. 근대화가 되면서 그런 의식이 생겨난 거지요. 근대의 핵심은 상공업에 있는데, 농업에 기초한 이전 시대에서 벗어나 획기적인 삶의 변화가 생긴 겁니다. 산업혁명을 통해서 농업 사회에서 상공업 사회로 바뀐 거지요. 이 과정은 혹독했습니다. 산업혁명 초기에 어린이와 여성의 노동 참여가 그랬지요. 물론 이를 통해 여성이 참정권을 얻기도 했지만요. 세계화와 관련해, 당시를 지배한 제국주의를 생각할 수 있을 텐데요. 서양이 동양에 올 때 배에 태우는 세 부류가 있습니다. 선교사, 상인, 군인이지요. 이게 바로 근대의 표상인데요. 기독교와 자본주의와 폭력입니다. 무력과 상품과 종교를 매개로 유럽이 전 세계를 유린한 겁니다. 지금도 유럽의 평화 뒤에는 아프리카의 고통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우리는 여전히 그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걸로 보입니다. 우리도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죠. 그 증거가 바로 이 자리입니다. 우리가 지금의 생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면 베토벤이나 음악 이야기를 할 수 없었겠지요.

제가 왜 근대화, 세계화 이야기를 먼저 꺼냈느냐 하면, 바로 ‘세계정신’이란 표현을 헤겔과 베토벤에게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각각 철학과 음악에 세계정신을 담아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근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중세에는 신이 주인이고 주어입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서면 인간이 주인이 됩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는 거지요. ‘신은 죽었다’는 표현도 근대에 들어서야 등장한 겁니다. 그런데 이때 신만 죽은 게 아닙니다. 자연도 죽습니다. 이성을 지니지 못한 존재는 곧 죽은 겁니다. 그래서 자연이 죽은 거지요. 이제 인간의 이성만 남았는데, 이런 생각을 시작한 데카르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동물은 사유하지 않고, 정신적 세계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동물은 기계와 똑같은 순수 메커니즘일 뿐이다. 누군가 동물을 때리면 그 동물은 곧 울부짖는다. 이것은 누군가가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기만 하면 즉시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춘수의 시에도 이런 말이 나오지요.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데카르트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표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제국주의를 통해 이런 근대정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는데, 이 영향으로 사람들이 마주한 새로운 삶의 양식이 바로 근대입니다. 과거 로마나 몽골이 큰 영토를 장악했다고 해도, 사람들의 삶의 양식을 바꿔놓지는 못했기 때문에 세계화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근대에 이르러서야 ‘세계적’이라는 말이 가능한 거지요. 근대에 들어서면 그 사람이 유럽에 살든지 동아시아에 살든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잖아요. 물론 문화적 차이야 있겠지만요.

 

‘세계정신’ 탄생의 역설

 

그럼 베토벤과 헤겔이 활동한 독일의 근대화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괴테는 독일문학을 세계문학으로, 헤겔은 독일철학을 세계

▲ 베토벤. ⓒko.wikipedia.org

철학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베토벤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표현인데요. 베토벤도 독일음악을 세계음악으로 만든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왜 이들에게 ‘세계적’이란 표현을 쓰느냐 하면, 이들이 근대정신의 총아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근대화와 세계화의 연관성에 대해 말씀드린 걸 떠올려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당시 독일은 유럽에서 후진국에 속했습니다. 독일이라는 하나의 국가도 형성하지 못한 상태였지요. 이런 후진국에서 각 분야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거장이 동시에 출현한 건 역사의 아이러니 아닐까요. 영국은 명예혁명과 산업혁명을 주도한 나라고, 프랑스는 풍요로운 농업 자원에 시민혁명이 더해져서 현실에서의 자유국가를 실현하는 상황이었는데, 독일은 시민이란 계급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혁명을 주도할 세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몽’에 집중한 거지요. 시민을 키워내야 했으니까요. 물론 당시 유럽 전역이 계몽주의의 열풍이었지만, 독일은 혁명의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에 여기에 더 집중을 한 겁니다. 이런 분위기에 현실에서의 자유국가 형성에서도 어려움을 겪으니 ‘사유의 자유’에 더욱 힘을 쏟은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터졌을 때, 유럽의 지식인들이 열광을 했지요. 자유, 평등, 사랑의 정신에 입각한 정치 제도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혁명의 성공 이후 공포정치가 나타났지요. 로베스피에르 같은 사람이 꿈꾼 건 절대적 자유와 평등인데 ‘절대적’이라는 게 현실에서 가능할 리가 없잖습니까. 여기에서 이탈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이기 시작하는데, 결국 그 자신도 교수대에서 목숨을 잃게 된 거지요. 이런 상황을 보고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절대 자유는 현실에 없는 게 아닐까?’ 이런 의문을 품으면서 사상에서의 자유를 꿈꾸게 된 겁니다.

당시 나폴레옹이 자기네 나라를 쳐들어올 때 지식인 사회는 이를 크게 반겼는데, 프랑스 혁명을 자기 나라에 전파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헤겔이 <정신현상학>을 쓰다가 나폴레옹 군대가 들어온다는 소리를 듣고서는 “저기를 보라, 말을 탄 세계정신이 지나간다.”고 말하기까지 했겠습니까. 베토벤은 어떻습니까. ‘보나파르트’라는 곡을 만들어 헌정하려고도 했지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어떻게 됐습니까. ‘보나파르트’라는 곡이 <영웅>으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혁명이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거지요. 이런 답답함이 사유와 내면에 집중하게 된 결과를 낳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독일에서 비슷한 시기에 대문호, 대철학자, 대음악가가 나온 거지요.

 

헤겔의 자유; 예술, 철학, 종교

 

이제 헤겔과 베토벤이 자유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헤겔은 독일에서 분열을 봤습니다. 분열된 국가 그리고 분열의 소산인

▲ 헤겔. ⓒgreenbee.co.kr

근대, 두 가지 분열을 동시에 본 겁니다. 근대는 세분화되어 각각 독자적 발전을 추구하거든요. 정치권력 분권, 경제적 분업, 분과 학문이 그 모습이지요. 한편 근대는 통합이기도 합니다. 시장 원리로의 통합 말입니다. 그러니까 돈 없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 된 거지요. 돈은 많아졌는데 돈에 대한 면역 체계는 떨어졌다고 하겠습니다. 이렇듯 근대는 분열과 통합이 동시에 일어나는 과정인데, 헤겔은 여기에서 분열을 본 겁니다. 무슨 분열을 봤느냐. 바로 주관과 객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과 정신, 이론과 실천, 진리와 도덕, 자유와 필연의 분열과 대립입니다.

근대 이전까지는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삶이었지요. 그런데 근대 문명의 발달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소원하게, 서로 소외시키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자연은 인간 앞에 놓인 대상이 된 겁니다. 이런 주인과 대상 간의 분열을 철학에서는 주관과 객관의 분열이라고 합니다. 자연과 정신이 나뉘는 거지요. 이때부터 인간의 사유는 무한을 지향하기 시작합니다. 자연을 한계로 보고 그걸 넘어서려 하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자연과 정신의 조화는 없습니다. 근대 자체가 이 조화를 깨뜨리고 나온 거니까요. 자연과 조화롭게 산다는 건 동물적 삶이겠지요. 그런데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겁니다. 문명화의 길에 들어선 거지요.

저는 근대 이후 둘의 화합은 불가능하다고 보는데, 인류가 파멸로 간다는 세간의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릅니다. 헤겔이 말한 분열이 바로 이겁니다. 그는 여기에서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말하는데, 예술, 종교, 철학(학문)이 인간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본 겁니다. 자연 세계는 법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돌이나 인간이나 중력의 법칙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건 매한가지잖아요. 이에 비해 인간의 사유는 법칙에 구속받지 않고 여러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의 가능성은 결국 정신에 있는 것인데, 그 구체적인 내용이 뭐냐. 헤겔이 볼 때는 그게 바로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겁니다. 절대정신이 실현되는 영역이 이 셋이라는 거지요.

오늘은 예술에 대해 얘기해볼 텐데요. 헤겔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하찮게 봤습니다. 특이하죠? 우리 상식에는 자연이 예술보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칸트도 우리처럼 생각했거든요. 예술은 자연의 모방일 뿐이라고요. 그런데 헤겔은 알프스를 보고도 ‘무한하게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형식의 나열’이라는 재미없는 말만 했거든요. (웃음) 자연이 아름답다는 건 기껏해야 ‘조화롭다’ 정도라는 겁니다. 헤겔은 인간의 정신을 훨씬 높이 평가했습니다. 흙에서 나온 인간이 흙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데서 의미를 찾은 거지요. 이걸 가능하게 해준 게 바로 정신이니까요. 그래서 헤겔이야말로 진정한 근대주의자라고 불리는 겁니다.

헤겔은 예술이 가장 발전한 시대를 고대 그리스 시대로 꼽습니다. 헤겔은 예술이 상징적 예술 형식, 고전적 예술 형식, 낭만적 예술 형식으로 발전해왔다고 보는데, 상징적 예술 형식의 단계에서는 인간의 의식 수준이 자연의 풍요로움을 따라가지 못한 상황이라고 보고, 고전적 예술 형식의 단계에서는 인간과 자연이 가장 잘 조화를 이루던 때라고 보는데, 이걸 잘 드러낸 게 그리스 건축이라는 겁니다. 마지막 낭만적 예술 형식에 이르면 무한한 인간 정신이 유한한 자연을 압도하기 때문에 예술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발견될 수 없는 거지요. 예술을 통해서는 정신의 자유가 드러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와 철학을 이보다 높은 단계로 보고, 철학을 통해서만 인간 정신의 자유가 드러날 수 있다고 한 겁니다. 이제 그림이 그려지시죠?

정리하면 헤겔이 보기에는 철학을 통해 세계에 대한 개념적 파악을 하는 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자유인 겁니다. 그런데 제가 해보니까 전혀 자유롭지 않더라고요. 매일 책만 읽는다고 아내에게 구박을 받습니다. (웃음) 개념적 파악과 현실적 상황의 괴리 때문이겠지요. (웃음) 어쨌든 헤겔은 이렇게 봤다는 거죠. 제가 농담처럼 말씀드렸지만, 어떤 면에서는 헤겔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어요. 철학 공부를 하다 깨닫는 희열이 있거든요. 그런데 정말 예술, 종교, 철학 빼고 자유로울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저도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헤겔이 유효한 까닭이기도 하겠지요.

베토벤의 음악; 정신적인 생명을 감각적인 생명으로

이제 베토벤을 살펴볼까요. 그런데 헤겔은 베토벤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안 합니다. 모차르트나 로시니에 대해서는 극찬을 하면서도 베토벤에 대해서는 말을 안 했거든요. 헤겔 전집에 베토벤이라는 이름이 아예 나오질 않습니다. 왜일까요. 이번에는 베토벤이 말하는 자유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베토벤은 형편이 좋지 못했고, 그래서 음악을 하는 과정을 보면 생계를 위한 모습도 종종 보입니다. 그 삶을 살펴보면 베토벤이 공부를 깊이 있게 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로맹 롤랑의 <괴테와 베토벤>(웅진닷컴, 2000)을 보면, 베토벤이 “음악은 정신적인 생명을 감각적인 생명으로 옮겨주는 행위”라고 했다는 부분이 나옵니다. 헤겔과 똑같은 말인데요. 예술이라는 건 인간 안의 정신을 감각화시키는 거라는 말인데, 헤겔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야 이렇게 생각하지만 보통은 이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술이라는 건 아름답게 꾸민다거나 인간의 정서에 도움을 준다거나, 이렇게 생각을 하겠지요.

어쨌든 헤겔과 베토벤이 이 부분에서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헤겔도 예술이 자유의 영역인 이유는 인간 정신을 감각적인 형태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라고 말했거든요. 달을 가리키는데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을 보냐는 이야기가 있지요. 헤겔의 예술관은 손가락을 보는 겁니다. 예술 작품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예술 작품 속에 진리가 들어있고, 예술 작품은 진리가 감각화되어서 나타났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헤겔처럼 진리를 찾기 위해 음악을 듣는다면 너무 피곤하겠지요. (웃음) 예술 작품이 주는 미라는 건 진리가 던지는 미가 투사되어 나타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얼마나 진리를 잘 드러내느냐에 따라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이 가려지는 겁니다. 헤겔 미학은 그의 철학과 함께 헤겔 사후 현대 사상에서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예술이라는 게 정신을 감각화시킨 것인지, 예술이라는 게 과연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인지. 이 부분에서 헤겔과 베토벤의 생각이 겹치는 겁니다. 헤겔과 베토벤은 다른 영역에서 활동했지만, 각자의 영역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세계와 정신의 진리를 철학과 음악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다는 거지요. 헤겔이 베토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둘 사이에는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베토벤의 음악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지요. 오카다 아케오의 <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서양 음악사>(삼양미디어, 2009)에 나온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았는데요.

“고전주의 이전의 음악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18세기 중엽 시민계급의 성장과 계몽주의의 전개와 함께 고전주의가 출현하였으며 이로부터 근대 시민을 위한 음악이 시작된다. 그렇지만 음악적으로 귀족 세계와 연을 끊게 되는 것은 고전주의(빈 고전주의)의 3대 거장 중에서도 베토벤에 이르러서다.”

▲(오카다 아케오 지음, 이진주 옮김, 삼양미디어 펴냄). ⓒ삼양미디어

그러니까 베토벤 역시 귀족의 후원으로 연명을 했지만 귀족 세계를 드러내는 음악의 형식을 처음으로 거부했다는 겁니다.

“교향곡을 예로 들면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경우 제3악장은 반드시 미뉴에트를 쓴다. 그리고 미뉴에트의 중간에는 민중적인 성격트리오가 들어간다. 귀족의 만찬에 농민들도 초대하여 양자가 어우러짐을 상징하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이런 화해는 귀족의 덕과 포용력에 의한, 즉 귀족의 우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화해, 위장된 화해에 불과하다. 베토벤은 여기에 교향곡 제1번 제3악장에서 보듯 제목은 미뉴에트이지만 실제로는 스케르초를 집어넣는다. 미뉴에트에서와 같은 화해는 더 이상 없다.”

그래서 베토벤에 이르러서야 정말 시민을 위한 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보통 빈 고전주의를 시민 음악의 시작으로 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귀족 세력과의 결별은 베토벤에 와서야 가능했다는 거지요. 또한 마지막 악장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대개 4악장은 해피엔딩으로 끝나거든요. 그런데 베토벤의 6번 전원 교향곡을 보면 마지막 악장에서도 계속해서 상승합니다. 타협을 하지 않는 거지요. 베토벤 9번 합창 교향곡도 특이한데, 이 합창에는 천 명, 만 명이 참여할 수 있거든요. 모차르트의 음악에는 이런 참여가 불가능합니다. 귀족적이고 선이 가늘기 때문이지요. 이런 면에서 베토벤에 이르러서야 근대 시민의 음악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베토벤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이처럼 베토벤과 헤겔은 사유와 정신의 자유를 보여주는데, 제 생각에는 인류사가 지속하는 한 두 사람은 거의 불멸의 존재로 남을 거라고 봅니다. 두 사람이 다룬 주관과 객관, 정신과 자연의 분열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고, 둘 사이에서 나름의 자유를 보여준 두 사람의 철학과 음악의 수준을 우리는 여전히 뛰어넘지 못한 걸로 보이거든요. 현대 철학에서는 여전히 헤겔 죽이기가 과제인데, 이는 그만큼 헤겔이 쉽게 죽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니까요.

전통적으로 진선미란 세 가지 정신적 가치가 있는데, 진리를 모르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고, 선이 없으면 나쁜 놈 소리를 듣기 쉽습니다. 그리고 미의식이 결여되면 센스가 없다는 평가를 받지요. 사실 선이 없는 게 제일 안 좋은 거죠. 물론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진리를 모르는 것도 치명적이겠지만요. 그나마 제일 문제가 덜 되는 게 미적 감각입니다. 그런데 사회가 바뀌면서 경제적인 소외나 복지뿐 아니라 문화적 소외, 문화적 복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미의식에서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나뉘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친구들은 미의식이 결여된 걸 창피한 일로 여깁니다. 어쩌면 오늘 헤겔과 베토벤을 불러내 인간의 자유를 철학과 예술에서 찾아본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근대에 대한 평가는 각자 다를 수 있겠지만, 근대에 드러난 이 ‘세계정신’은 여전히 눈여겨봐야 할 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