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부터 (e)시대와철학에 실렸던 글들 중에서 편집자가 다시 뽑아올린 글

타자의 얼굴과 환대의 윤리[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⑩

 

타자의 얼굴과 환대의 윤리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레비나스⑩

 

강사 :문성원(부산대 철학과 교수)
후기 :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지금, 철학의 이미지와 레비나스의 철학

 

“과학에 있어서의 철학은 섹스에 있어서의 포르노그래피와 같습니다. 더 싸고, 더 쉽고, 어떤 사람들은 더 좋아하기는 하죠.” 스티브 존스(제레미 스탱룸 편, 김미선 역, 『세계의 과학자 12인, 과학과 세상을 말하다』, 지호, 26~27쪽.)

“멀쩡한 사람도 누구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러나 이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대체로 정신병자밖에 없다. 누구나 이런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을 진심으로 중대하게 여기는 사람은 정신병자로, 그는 언제나 신념체계를 세우는 사람이다.” 대리언 리더(대리언 리더 저, 배성민 역, 『광기』, 까치, 97쪽.)

철학은 무엇일까? 과학에 있어서 철학은, 비유하자면 실제 섹스를 따라가지 못하는 포르노그래피와 같아서 비록 가짜이지만 그 힘든 과학적 발견에 앞서서 세계와 사회의 현상을 풀어주고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현대의 과학자들은 과학 이전에 철학이 과연 필요한지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철학자들이 평가절하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자기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고 완벽한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려는 자세가 정신병자와 같은 기준에 서 있다는 점이다. 현실과 부딪힌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철학을 도모하고 세계를 남김없이 설명하려는 철학자들의 일관성은 흡사 정신병자들이 가지는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철학은 이런 비판과 맞닿아 있다. 서양에서 근대까지 철학자들은 단순하고 일관적인 원리를 가지고 세계를 설명하려 하였다. 철학자들이 제시하던 세련된 근대적 세계관은 일방적이며 일관적으로 세계를 장악하려했던 시도들로 점철되었다. 서양인들이 이른바 제3세계를 식민지화하려했던 역사의 이면에는 서양인들의 전체성과 인간과 자연을 조작 가능한 것으로 봤던 이성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신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열 번째 시간에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의 철학을 통해 근대적 세계관과 그 이해의 연장선에서 발생하는 억압되는 타자, 그리고 타자를 장악하는 나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나와 타자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런 현상은 신자유주의의 심화와 함께 우리 사회에 일반화된 모습들이다. 얼마 전 『해체와 윤리 – 변화와 책임의 사회철학』(그린비, 2012.03)을 펴낸 부산대 철학과 문성원 교수는 이 책에서 추상적 원리만 남고 우리 삶의 구체적 현실은 논외가 되어버린 철학이 과연 정체된 현실과 퇴색된 가치를 뛰어넘어 우리 문화와 사회 전반에 변화를 제시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타진하면서 신자유주의 극복의 실마리를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번 레비나스 철학 강좌를 통해 레비나스의 ‘환대’라는 개념이 우리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면모를 명확히 하는 시간을 가졌다.

 

현상학적 전통과 레비나스의 ‘환대’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이 가지고 있는 전체성이라는 거대한 폭력적 성향과 인간의 이성이 인간과 자연의 모든 것을 관장하고 조작할 수 있다는 이성주의의 폐단을 지적한다. 이런 레비나스 시각의 배후에는 현상학적 전통이 자리 잡고 있다.

현상학이라는 철학 운동의 시발점에 서 있는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자연과학적 세계관의 무비판성을 문제시 하며 현상의 근원성과 본질을 탐구한 철학자이다. 특히 인간의 의식과 관련하여 무엇인가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지향적 의식의 구성 작용에 주목했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존재와 관련하여 존재자와 존재 차이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존재자에 매몰되어 있던 서양의 전통을 근원적으로 반성해보려는 시도를 한다. 문성원 교수에 의하면 레비나스에게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영향력이 가장 컸을 것이라고 한다.

레비나스 보다는 나이가 어리지만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레비나스는 후설과 하이데거를 비판하기도 하는데 데리다는 1964년 “폭력과 형이상학”(『글쓰기와 차이』)이라는 글을 통해 레비나스의 철학을 소개하면서 비판한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견지에서 역으로 레비나스의 후설, 하이데거 비판을 반(反)비판하는 작업이었다. 물론 데리다 역시 하이데거의 영향력이 굉장히 강했다.

잠시 데리다의 ‘해체주의(deconstruction)’를 살펴보면 하나의 문제점이 발견된다. 해체를 통해보면 어떤 철학도 내부 모순을 가지고 있어서 계속 분석하다보면 그 체계는 다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곧 어떤 하나의 개념체계를 가지고 세계를 일관되게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해체 뒤에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해체주의는 무엇을 얘기하려는 것인가? 이런 과제가 남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데리다는 ‘환대’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내세운다. ‘환대(hospitality)’, 즉 ‘기꺼이 받아들이다’


‘환대’라는 개념 뒤에는 근대적 이성주의, 이 세계를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근대적 사고방식에 대한 반성이 있다. 먼저 근대 계몽주의의 계보를 살펴보면 세상을 인간이 합리적으로,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는 노동 모델을 중심으로 근대를 이끌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문성원 교수는 농부 철학자로 유명한 변산공동체의 윤구병 선생이 주장하는 대로 인간의 역사에는 ‘기르는 문명’과 ‘만드는 문명’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기르는 문명’에서는 인간이 자연에 의존적이었고 자연은 숭상의 대상(신격화)이었다가, 인간이 머리가 깨고, 기술이 발전(산업혁명)하면서 인간이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의식이 지금까지 연장되고 있다. 이 근대에 들어서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시건방진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생각이 인간을 서로 싸우게 만들고 자연까지 망가뜨리는 주된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과 갈등을 내재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많은 철학자들이 사회주의 모델을 제시했는데 80년대 후반 소련을 위시로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그 기반이었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회의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이 시기 팽배해진 기존 철학의 불완전성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그 대안을 제시했던 철학자가 레비나스이다.

 

윤리를 제1철학으로,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라

 

레비나스는 철학에서 ‘제1의 과제’는 ‘존재’가 아니고 ‘윤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주장은 “죽이지 말라”이다. 1?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인간들은 죽음의 강을 건너왔다. 실제로 레비나스는 전쟁의 상흔을 가진 인물로써 리투아니아에서 유태인 부모 아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2차 세계대전 때 두 동생을 나치에 의해 잃은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우리(나)는 유한자이고 그러면서 스스로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여기지만 우리가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제한되어 있어서 우리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우리 바깥의 세계는 넓고 높고 심오하다. 그러기에 우리의 바깥을 마음대로 죽일 수 없다. ‘타자’는 바깥이고 우리 세계가 포섭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삶은 ‘타자’에 근거해 있는 것이지 ‘타자’가 우리 삶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어서 레비나스는 더 적극적으로 “타자가 우리에게 ‘호소(appeal)’한다면 여기에 ‘응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세계의 기준으로 보면 ‘타자’는 약하고 부족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우리(나)의 기준이다. 만약 ‘타자’가 약자의 얼굴로 호소해 온다면 우리는 거기에 응답해야할 ‘무한한 책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 때 주체는 지배하는 주체가 아니라 ‘응답하는 주체’이다. ‘호소’하는 자에게 ‘응답’하고 호소하는 자로서의 ‘타자’와 관계하는 주체이고 더 나아가 ‘타자’에 의해 형성된 주체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소리를 듣는다’고 할 때의 중립성을 내세우는 ‘존재’를 철학의 기본적 카테고리로 삼아서는 우리 삶을 제대로 읽어 나갈 수 없다. 자기중심적이고 계산적인 전체론적 사고방식은 서양의 근대적 발상에서 기원한 사회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입장에서 레비나스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방식과 통하는 면이 있다. 다른 점은 보다 적극적으로 ‘타자’의 우선성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동일자와 타자라는 개념

 

레비나스는 나와 타자를 ‘동일자(the same)’와 ‘타자(the other)’로 나누어 설명한다. ‘동일자’는 자기는 물론 자기 근처의 남들도 자기와 같아야 한다는 ‘동일성’을 지향한다. 이 ‘동일성’은 사실 여러 다채로운 군상들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에서 가장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기는 하다. 똑같은 것을 대한다는 것은 예전의 방식을 현재의 사고와 행위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규범까지 ‘동일화’ 시켜 그 안에서 살아간다. 자연과학적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간과 사회에 적용시킨다. 질서정연한 사회다. 세상의 법칙을 안다는 것은 세상을 구성하는 ‘동일성의 배열’을 잘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으로 대상을 분절시키고 배열해서 규정하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통하는가?

근대인들은 대체로 ‘동일성을 강요’하는 것 속에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속에서 그 규칙을 따르면 자유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틀에 맞지 않으면 제외시키고 소멸시킨다. 유럽이 문명과 비문명을 나누어 아프리카나 아시아를 대하던 식민지정책의 태도가 바로 동일자가 지향하는 동일화의 길이다. 서구의 근대적 사고에서 ‘인격적 개인’이라는 것은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서 ‘이성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는 개인이다. 이들이 합의를 도출하여 균형을 맞추면 서로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서양의 정치철학이다. 그러나 이 틀에 맞지 않는 존재는 다 내쳐진다. 이런 문제의 대상은 광기, 정신병자, 소수자 등이며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언급은 서구 문명에 대한 자기비판이었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을 찾다 보니 주요하게 부각되는 개념이 ‘타자’이다. ‘타자’는 ‘동일자’의 틀에 잘 안 들어오는,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대상이다. 이 ‘타자’는 서구의 근대적 입장에서 자유를 확보하는데 지장이 있는 타자로써 매우 불편한 존재이다. ‘타자’의 영역은 내가 지배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면 보인다. 그래서 ‘동일화’의 세계는 ‘유한의 세계’이다. 테두리를 벗어나면 ‘타자’의 영역이고 ‘무한으로서의 타자’의 세계이다. 무한은 끝이 없다. ‘타자’의 특성은 ‘무한’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의 특성

 

레비나스가 얘기하는 타자의 정의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 무한으로서의 타자 : 레비나스는 ‘타자’를 우리의 한계와 틀을 넘어서는 무한하고 ‘초월(transcendence)’적인 것이라고 했다. 레비나스는 처음에 이 ‘초월’이라는 말이 신을 떠올리게 하니까 ‘외월(外越, exscendence)’이라는 말로 바꿔 쓰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다시 ‘초월’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우리와 같은 선상에서 보면 안 되며 우리보다 높이 봐야한다고 했다.

? 비(非)지배(non-dominance) : 지배자는 동일적인 것이고 ‘타자’는 내가 잘 모르는 다른 면모, 새로운 것을 가지고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안정된 상황을 목적으로 하는 테두리 안으로 예상 못하게 다른 것이 넘어온다. 이 때 넘어오는 것을 레비나스에 의하면 막을 수 없다고 한다. 자본과 파워가 있어도 테두리는 언젠가는 무너진다. 유한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자’는 ‘호소’하고 ‘명령’한다고 한다. 이것은 결코 타자가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다. 타자의 호소와 명령은 안 들을 수는 있지만 도망갈 수 없는 것으로서 이것은 마치 ‘죽음에서 도망갈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타자’를 극복하려 하지만 ‘타자’는 이미 내 틀을 벗어나있기 때문에 실제로 ‘타자’를 극복하지 못한다. 문성원 교수는 마치 예수의 생애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어찌 보면 이런 이율배반적인 결합은 우리에게 이미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 종교라는 의미의 라틴어 ‘religio’(영어→‘religion’) : ‘religio’는 관계 맺는다는 뜻이다. 종교는 나와 같은 ‘동일자(the same)’끼리와의 관계가 아니고 ‘타자(the other)’와의 관계이다.

? 무차별하지 않음(non-in-difference) : ‘타자’는 나와 다르지만 무관심하게 방치하지 않고 무관심하지 않은 관계가 설정된다. 다르지만 관계 맺지 않을 수가 없다.

? 비대칭성 : ‘타자’와의 관계는 ‘상호성’을 넘어선다. 상호성은 장사와 무역에서 거래의 핵심이다. 근대 질서에서 상업성이라는 행위는 동등한 가치의 상품 교환을 기초로 한다. 상호성이 정치로 가면 너와 나는 ‘같은 권리소유자’라는 것을 기반으로 하여 서로를 합리적 거래를 통해 이해한다. ‘사회계약’이 그것이다. 사회계약은 상품거래자들의 상호적 거래를 정치질서로 정착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신 상태에서 인간은 같은 동일자들의 세계만 끌어안는다. 그리고 이 속에서 싸움(전쟁)과 경쟁은 끊이지 않게 된다. 정작 ‘give & take’라는 거래는 확실하지 않다. 이 속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비대칭성’은 더 확실해진다.

 

타자의 나타남과 타자의 얼굴

 

그렇다면 ‘타자’와 비대칭적이거나 무관심하지 않으면서 ‘타자’는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인간의 활동 영역에서 ‘본다는 행위(시각)’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에게는 일본을 거쳐서 중역된 말이기는 하지만, 철학의 ‘철(哲)’자가 의미하는 것처럼 밝게 해서 환하게 비추면 뭔가를 알게 된다. 그러면 훤히 보이는 대상을 ‘지배’하고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 근대 서구인들의 생각이었다. 전쟁에서 높은 고지를 ‘점령’하는 이유는 뭘까? 내 눈앞의 것을 모두 발밑에 두고 낱낱이 알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이다. 첨단을 자랑하는 미국의 고공정찰기나 인공위성은 근대의 판옵티콘이 현대화된 것으로 ‘모든 것을 보는 눈’으로써 미국 제국주의 최전선에서 근무하는 첨병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청각’을 강조한다. 기존에 강조하던 ‘시각’은 ‘지배’와 ‘점령’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었지만 타자와 같은 불확실한 것을 파악하는 데는 좌표를 직시하는 ‘시각’보다 ‘청각’이 더 필요할 수 있다. 공자나 석가, 예수의 ‘대기설법(對機說法)’이 바로 그렇다. 불확실한 청자의 다양함을 전제하는 방법이다. 세상이 무한하고 ‘타자’도 무한하니 이에 대응하고 책임지는 방식도 다양해 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청각’의 영역과 관계한다.

그리고 어떤 표현이 그 사람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그렇듯 ‘타자’는 말로 나타난다. 화가가 표현하는 방식은 그 화가의 표현 중 하나이지 그것이 화가 전부를 대변할 수는 없다. 무수히 다른 그림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 표현 하나하나에 그 화가의 정신이 들어가 있다. 그것을 ‘참가(attendance ≠ participation)’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레비나스는 ‘타자’가 우리에게 ‘얼굴’로 다가온다고 했다. 사진과 같은 어떤 형태의 시각적 현상이 아니라 ‘나타남’이다. 또한 얼굴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호소’하고 메시지를 주고 느낌을 전달한다. 레비나스는 ‘벌거벗은 얼굴’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얼굴을 통해 직접적으로 ‘타자’와 가리지 않고 만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현현(顯現, manifestation?epiphany)’이라할 수 있겠다. 낯선 자가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내개 다가와 호소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동일자와 타자, 그리고 향유

 

앞에서도 언급했던 ‘동일자’와 ‘타자’라는 개념어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동일자’는 ‘유한자’가 되고 ‘무한자’는 ‘타자’가 된다. 레비나스는 동일자는 항상 테두리 바깥의 타자를 향한 형이상학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때 형이상학적 욕망은 대문자 ‘D’를 써서 ‘Desire’로 표기한다. 욕구(need)로써의 ‘욕망(desire)’과 구별한다. 당장의 결핍을 전제하지 않고서 하는 욕망으로, 예를 들어 높고 멋진 산악의 풍경이나 경외감이 드는 광경을 목격할 때 드는 인간의 감정 상태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동일자의 속성인 유한은 무한에서 ‘분리(seperation)’된 것이다. 이 때 말하는 분리는 무한이 전체이고 부분이 유한자여서 전체에서 부분이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다. 문성원 교수는 “마치 불교의 설명처럼, 눈을 감거나 우리가 살다 죽으면 경험하는 그 세계가 사라지는 것과 같이, 내가 경험하는 세계, 전체화 할 수 있는 세계가 분리이다.”라고 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전체는 ‘유한자’에게서만 만들어지는 것으로 ‘동일자’들이 모든 것을 ‘동일화’ 시키는 것을 두고 전체화 했다고 이해하기 쉽지만 레비나스의 시각에서는 ‘동일자’의 성립 자체가 분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안과 밖을 구분했을 때 동일화된 테두리가 전체가 되어 동일화 되지 않은 밖을 분리시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역으로 무한이 전체이고 부분이 유한자라는 이해도 성립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전체라는 개념을 상정하는 유한이 있어서 무한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무한은 전체라는 개념이 있을 수도 없다. 굳이 말하자면 ‘무한’이 있음으로 해서 ‘유한’과 ‘무한’이 생겨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의 분리이다. 그것이 레비나스에게 있어 ‘안과 밖(interiority & exteriority)’의 성립이다. 안은 항상 밖을 전제하고 밖과 더불어서 성립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은 분리된 상태로 어떻게 살아나가는지에 대해 설명해 나간다. 그 첫 번째로 제시하는 개념이 ‘즐김(jouissance)’이다. 하이데거의 경우 ‘불안’ 또는 ‘죽음을 향한 존재’ 등의 얘기를 하는데 레비나스는 하이데거가 인간의 존재 의미를 한계 짓고 규정하려 한다고 하면서 대단히 부정적인 출발이라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불안에서 출발하지 않고 즐김에서 시작한다. 향유이다.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현실적 상황에 있건 간에 우리의 주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공기, 물, 기본적 먹거리 등)에 대한 ‘향유’로 귀결된다고 한다.

문제는 ‘자연적 향유’의 영역이 항상 ‘불안정성’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서 테두리 치고, 재화를 수집하고, 집이 생겨나고, 소유, 노동의 개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동일성을 확보한다. 그래서 내 ‘집’, 내 ‘영역’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문성원 교수는 이것을 레비나스 고유의 주장이라고만 볼 수 없다고 한다. 하이데거도 이런 얘기를 먼저 했었기 때문이다. 단, 레비나스는 ‘타자’와 관련짓기 위해 앞서의 언급을 재해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레비나스는 기존 서양철학의 제 문제를 재해석 하여 근사하게 풀어내고 있다.

 

응답과 환대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는 내 테두리 밖에 있는 존재이기에 ‘낯선 자’이지만 내 옆에 붙어 있고 항상 나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이웃’이다. 어찌 보면 같은 한 테두리 안에 있는 이웃들 중에도 나에게는 낯선 부분이 분명 있어서 사실 ‘이웃’과 ‘낯선 자’는 다르다고 볼 수도 없다.

문성원 교수는 레비나스가 항상 ‘호소에 대한 응답(response)’은 곧 ‘책임(responsibility)’과 관계 지었다고 한다. ‘나는 내가 무언가를 소유하고 나의 혹은 우리의 테두리가 있으니까’라고 생각하면 ‘타자’와의 관계는 끊기고 자신은 테두리 안에 매몰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것은 삶이 아니라 죽은 삶이다. 이에 유일한 소통은 ‘응답’하는 것이다. 내 집 밖의 타자를 내 집에 맞아들임, 이것이 ‘환대(hospitality)’이다. ‘환대’야 말로 우리 삶의 근본적인 자세라고 『전체성과 무한』에서 강조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의 약점은 언제나 내 집의 테두리라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나중에 이것을 잘 언급 하지 않는다. 이후 레비나스는 누군가 내 것을 따지기 이전에 ‘타자’는 이미 나한테 와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내 집이라는 생각과 내 테두리를 고수하려는 생각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비나스의 환대는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환대’와는 다른 점이 있다. 먼저 계몽주의자의 연결 선상에 있는 칸트는 환대를 ‘상호적 관계’에서 말한다. 칸트의 환대는 상호적인 관계이다. 남이 나의 집에 오면 ‘환대’하듯이 나도 남의 집에 가면 ‘환대’받을 권리가 있다는 ‘권리의 측면’에서 말한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자는 거다. 내 의지의 주장이 입법의 원리에 의해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것. 역지사지로 네가 환대 받고 싶으면 네가 먼저 환대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조건적 환대’이다. 가장 현실적이고 승률이 높은 태도이다. ‘give & take’ 전략이랄까.

그럼 ‘무조건적 환대’는? 레비나스는 칸트의 방법만 가지고는 삶에 비전이 없다고 생각했다. 레비나스는 ‘무조건적 환대’가 더 근본적이라고 한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문성원 교수는 물론 자연과학자들이나 진화론자 중에는 무조건적 환대도 ‘give & take’의 일부분이라 말한다고 하지만 레비나스는 현상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내 입장에서 내 삶의 유의미한 입장은 ‘무조건적인 환대’라고 보았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환대가 조건적인 환대와 결합해야 제대로 된 ‘환대’로서 작동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가 있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환대’해야 하는 근거 중 하나는 내가 태어나 이 세상의 테두리 안에서 내 집이 나를 받아주는 것처럼 안락함으로 받아주는 세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듯이 타인을 받아주어야 한다. 레비나스는 그것과 관련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여성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존재와 달리, 존재성을 넘어서

 

‘존재’에는 이해 ‘타산적(inter-esse)’인 속성이 있다. 우리가 ‘존재’에 집착하게 되면 내 것을 지키려하고, 규정하려하면 다툼과 전쟁을 피할 수 없다. 내가 내 집을 차지하면 내 집을 차지하지 못한 사람은 그 영역에서 밀려난다. 이것이 ‘존재’의 ‘점령’하며 ‘독점’하려는 속성이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독점’한 자리를 말하면서 “태양 아래 나의 자리(Pascal)”에 대해 묻는다. 이 자리는 다른 사람이 내가 거기에 있음으로 해서 밀려난 자리이다. 내가 정규직이 되면 다른 사람은 비정규직이 된다. 이것은 곧 “내가 존재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연결된다. 내가 내 자리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일종의 ‘찬탈’이라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영역을 차지하고 점령하고 밀어내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존재와 달리’ 살아야 한다. ‘존재성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와 달리’하는 방법은 자신이 차지하는 곳에 대해 버겁게 생각하고 타자에 대해 공경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문성원 교수는 이런 점에서 레비나스가 조금 극단적으로 나간 부분이 분명 있다고 한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책을 읽어 본 사람들은 레비나스의 주장을 거부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또한 실행하기도 어려운 것 아니냐고 한다. 방향은 있는데 따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레비나스가 말한 ‘존재와 달리 사는 지평’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레비나스 철학이 우리에게 남긴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쨌든 여기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함과 됨’, ‘있음과 없음’의 연관성[철학을다시 쓴다]-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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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오늘은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는데, 먼저 유클리드 기하학과, 리만(Riemann) 기하학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공간의 성격에 연관되는 것인데, 닫힌 공간이냐 열린 공간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열린 공간에 대해서 맨 처음 이야기한 사람은 원자론자들이었습니다. 로이키푸스에서부터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를 잇는 원자론자들이 열린 공간을 생각했고, 이 사람들은 이 우주는 공간과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는 그 안에 빈 틈, 공간이 하나도 있지 않으므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것 ‘아토마’(atoma)이다, (템네인(temnein)이라는 그리스어가 있는데, 그것은 가른다, 쪼갠다라는 말입니다.) 아토마의 ‘아’는 부정사로서 ‘아톰’(atom)은 쪼갤 수 없는 것,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있음’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또는 ‘있는 것’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있음’과 ‘있는 것’이 갈라지는 지점이 있는데, 그것이 지닌 성격을 원자론자들은 원자라고 불렀다.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것이다로 이해하면 됩니다.

파르메니데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요. ‘있는 것’ 또는 ‘있음’(einai)을 구(球)처럼 생겼고, 모든 것이 달라붙어서 하나로 되어 있고,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것을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하나’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하나’를 무한히 작은 것들로 쪼개서 무한한 공간 속에서 흩뿌려놓은 사람들이 원자론자들입니다. 그리고 원자론자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죠. 이 우주 속에서 원자의 수도 무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무한하고, 공간도 무한하다. 그런데 고대 원자론자들의 원자와 공간의 성격은 각각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함’과 ‘됨’이 어떻게 다르냐고 이야기 했을 때 한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죠. 함은 능동성이 강조되는 말이고, 됨은 수동성이 강조되는 말이다. 그렇습니다. ‘됨’은 수용성, 받아들임, 외부에서 어떤 작용이 있을 때, 거기에 대해서 반작용을 하지 않고 그 작용을 받아들이는 측면입니다. ‘함’은 작용을 하는 측면이죠. 여기에서 이런 문제를 먼저 짚고 넘어갑시다. 우리가 ‘대상’이라고 부를 때, 불란서말로 ‘오브제’(objet), 영어로 ‘오브젝트’(object), 독일로 ‘게겐슈탄트’(Gegenstand)라고 그러는데, ‘오브제’, ‘오브젝트’라는 말은 ‘오브’(ob) ‘이케레’(icere)라는 라틴어에서 나왔습니다. ‘가로막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게겐슈탄트’라는 독일말은 라틴어가 어원인 불어와 영어의 독일식 직역입니다. ‘맞서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맞서 있는 것은 어떤 작용에 대해서 반작용을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저 학생은 내 시선을 가로막아서 저하고 맞서 있고 버티고 서 있는, 내 시선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저는 이 학생 뒤에 있는 다른 학생을 보고 싶은데 말이죠. 이렇게 장애물이 되는 것, 제 시선에 대해서 반작용을 하는 것이죠.

“반작용의 능력을 무화시키는 방식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이 책상 표면만 보면 원목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진짜 원목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여러 방법이 있겠죠. 두들겨서 소리를 듣는 방법도 있고, 옆과 앞을 살펴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도 이것이 원목인지 아닌지 확인이 안 되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잘라 봐요.”

“네, 잘라 봐야죠. 그런데 자르려는데 이 책상이 반항을 한다, 그럼 어떻게 하죠?”

“자를 수 없죠.”

“자를 수가 없죠. 그렇죠? 색은 원목색인데 금강석이다, 그래서 이걸 자를 수가 없다, 그러면 이것이 나무인지 금강석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물질에는 저항하는 임계점이 있죠. 모든 물질들은 저항하는 임계점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계속해서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원자 이하인 아원자 수준으로 계속해서 쪼개서 소립자, 그것도 쪼개서 그 결을 보고 이것이 어떤 물질인지,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 어떤 운동을 하는지를 알아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쪼개면 당장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이 사물을 어떻게 인식을 합니까? 이 사물의 겉을 보고 우리가 인식을 합니다. 갓, 겉, 끝, 어원으로 보면 전부 같은 말입니다. 이 사물과 사물이 아닌 것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 사물을 우리가 이해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앞을 보고, 옆을 보고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되도록 많은 겉을, 표면적을 살핀다는 소리죠. 그런데도 잘 알 수가 없어, 가르고 쪼갠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안에 숨어 있는 새로운 겉을 들어낸다는 것이죠? 자꾸 쪼개서 표면적을 늘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삼차원 세계를 이차원으로 전부 환원할 수 있다면 모든 결들이 자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내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깊이 있는 사물을 깊이 없는 것으로, 삼차원 공간을 이차원 공간으로 환원시키게 되면, 이 모든 물리 현상을 이해할 수 있고, 물리현상이 이해된다면 화학, 생물학, 사회, 역사, 인간현상까지도 전부 단순한, 이런저런 것들의 복합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거기에서 출발을 합니다.

이 출발 지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리스철학에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엮어낸 우주론은 둘로 갈라집니다. 그 주인공 가운데 하나는 원자론자들, 또 하나는 플라톤입니다. 원자론자들이 열린 우주, 개방된 공간을 그렸다면, 플라톤은 닫힌 우주, 폐쇄된 공간을 그립니다. 이것이 현대물리학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바뀌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두 가지 ‘거대이론’(Grand Theory)입니다. 이 우주를 열렸다고 보느냐 닫혔다고 보느냐죠. 유클리드는 원자론자적인 전통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열린 공간, 등질적인 공간을 상정하고 기하학 이론을 전개합니다.

그렇지만 로바쳅스키(Lobachevskii)나 리만의 경우는 공간을 달리 봅니다. 휜 공간, 그것이 조금 성격이 다르지만 닫힌 공간으로 보느냐, 아니면 닫힌 것인지 열린 것인지 구별하기는 힘들어도 공간 자체가 휘어 있는 것으로 보이냐, 평행으로 보이느냐 하는 점에서 유클리드와 견해가 다릅니다. 그런데 대단히 이상하지 않습니까? 공간은 ‘없는 것’에서 나오는 건데, 이것이 휘어있다는 말이 무슨 말이죠? ‘없는 것’은 ‘휘어있다’? 공간은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어떤 것에도 저항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없는 것’뿐이지요? ‘있는 것’은 대상이 됩니다. 맞서고, 저항을 합니다. ‘없는 것’만이 어떤 작용에도 반작용하지 않고 순수 수동성을 띠게 됩니다. 공간이 원자한테 저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간의 특성이 ‘없는 것’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공간’은 ‘없는 것’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면 ‘있는 것’은 뭐냐? ‘원자’만 있다, 데모크리토스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로바쳅스키(Lobachevskii, 1792~1856) 초상화 , 레프 크류코프 작(1843)


 

‘있는 것’을 상정하고, ‘없는 것’을 상정하게 될 때, 거기서 운동이 나올 수 있는지 없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함’이 됐든 ‘됨’이 됐든 한쪽은 능동적인 운동의 양태이고, 한쪽은 수동적인 운동의 양태인데 ‘있는 것’과 ‘없는 것’ 안에 운동을 포함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 없는지를 한번 살펴봅시다.

*있음 (있는 것)
*없음 (없는 것)

운동은 변하죠. 바뀌는 것을 뜻하죠? 변하는데, 이 ‘바뀜’을 두 가지로 갈라볼 수 있겠죠, 한쪽은 없는 것에서 무언가 새로 생겨나서 있게 되는 것, 또 한쪽은 있는 것이 사라져서 없어지는 것, 보통 상식으로 이 두 가지 운동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운동이 ‘없음’에 맞닥뜨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하강운동을 ‘없음’ 아래로도 할 수 있을까요? 없죠. 말하자면 ‘없음’은 운동도 없는 정지지점을 나타내는 거죠. 거긴 운동이고 뭐고 다 없다, 우리가 ‘운동’과 ‘정지’로 어떤 변화를 규정하자면 없는 것에 이르러서 하강운동은 멈춘다, 상승운동은? 있는 것 이상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까? 없죠. 있는 것 이상으로 올라간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있는 것의 한계를 넘어서서 없는 것으로 돌아선다는 것이죠.

‘있음’과 ‘없음’, 또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운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두 한계지점입니다. 이 한계 안에서 운동이 이루어집니다. 지난번에 제가 당구공을 예로 들어 이야기했던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있음’이 여럿으로 있다면, 여럿의 최소 단위가 뭐라 그랬죠? 둘, 둘이 여럿의 최소 단위죠. 만일에 ‘있는 것’이 둘로 있다고 치자. 그럼 이것을 ‘있는 것 기역’(ㄱ), ‘있는 것 니은’(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에서 ‘있는 것 기역’(ㄱ)과 ‘있는 것 니은’(ㄴ)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둘을 나누는 경계선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런데 이 경계선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하고 물었을 때, ‘있는 것’이라 하면 ‘있는 것 기역’(ㄱ)과 ‘있는 것 니은’(ㄴ)은 달라붙는다, ‘없는 것’이라고 보면 ‘없는 것’은 그 자체 규정상 없으므로 ‘ㄱ’과 ‘ㄴ’은 하나로 달라붙을 수밖에 없죠. 그래서 ‘있는 것’은 ‘하나’라고 이야기했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있는 것이 없다’고 ‘있는 것’이 부정돼버리면, 부분 부분 부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도 없다’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랬죠. 통째로 부정이 돼서 ‘있는 것은 하나다.’, 그때 제가 여러분들한테 동의를 얻어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일동 웃음.)

‘있는 것’은 ‘하나’이기 때문에 다(多)와 운동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설명하려면 ‘있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있는 것’ 하나만 놓고 가버리면 ‘없는 것’이 다 사라져 버린다. ‘원자’와 ‘공간’으로 나누든 ‘질료’와 ‘형상’으로 놓든 어떤 방식으로든지 두 개를 놓고 나가야 하는데, 최초의 두 개는 뭐냐? ‘있음’과 ‘없음.’ 이게 최초의 두 개인데 있음과 없음이 서로 관계 맺을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 관계 맺을 필연적인 이유가 없기 때문에 있음과 없음이 접촉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다, 있음과 없음이 접촉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왜 이 우주에 원자가 있어야 하고, 거기에 대응해서 또 공간이 있어야 되는지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원자론이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는 기간 동안 왜 ‘있음’과 ‘없음’이, ‘원자’와 ‘공간’이 우주를 설명하는 기본 개념으로 설정되었느냐, 동시에 공존하게 되느냐 물었을 때 그 대답은 ‘우연’이다, ‘필연’이다, 어쩔 수 없다, 설명할 수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가 헛돌고 말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제1편, 제3장 화폐 또는 상품유통-[자본론강독]⑨

제1편, 제3장 화폐 또는 상품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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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참석 : 이재유, 김선이, 김성심, 신재길, 신준하, 옥철

정리 : 신재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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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의 논의에서 금은 화폐상품으로 간주한다.

금은 모든 상품에 대해 질적으로 동일하고 양적으로 비교 가능한 가치표현의 재료로 즉 가치의 일반적인 척도로 기능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단위 측정의 근거가 금이 화폐라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주지하고 있는 사실, 모든 상품에 내재한 공통적 속성 ?상품에 대상화된 인간노동-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금이라는 하나의 특수한 상품이 대표적인, 공통적인 가치척도인 화폐로 전환 될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가치척도로의 화폐를 가치척도의 필연적인 현상 형태로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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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http://www.silverdoctors.com

화폐가 가치척도로 기능함에 따라 늘어서 있던 상품의 행렬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금이라는 화폐와 상품의 비교만이 남는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는 단순한 또는 개별적인 상대적 가치형태의 모습을 띠고 전개되며, 상대적 가치표현은 화폐상품의 독특한 상대적 가치형태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그 가치형태의 모습은 ‘상품의 가격’이라는 형태로 사회에 출현한다. 다만, 화폐에는 가격을 매길 수 없다. 화폐가 다른 상품들을 상대로 통일적인 상대적 가치형태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등가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동어반복적 관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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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화폐와 가격의 문제에 대해 고려해 본다. 중요한 것은 상품의 가격 또는 화페 형태는 상품의 가치형태 일반과 마찬가지로 현실에 물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지점이다. 가치는 상품에 내재하며, 그것을 가치척도로 재고자 할 때 관념적인 금과의 상상된 관계에 의해 표현된다. 상품의 주인이 자신의 상품가치에 가격이라는 형태를 부여한다 할지라도, 아직 그의 상품이 금으로 전환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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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상품의 가치는 여러 크기의 상상적 금량이라는 동일한 명칭의 양으로 전환된다. 다만 상품의 가치를 배제한 채, 척도로의 가격이라는 사회적 형태만을 고려한다면 가격의 문제는 “화폐 재료”로부터 비롯한다. 즉, 특정상품의 가치는 동일한 양의 노동량을 포함하는 상상 속의 화폐상품의 양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논리적으로 유통되는 화폐상품의 재질이 복수일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상품만이 가치척도로의 지위를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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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의 가치척도가 가치척도의 기능과 모순된다는 것이다. 이제 금이 가치척도로의 견고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정된 금량을 가치들의 도량 단위로 삼을 필요가 있다. 나아가 도량 단위는 세부적으로 분할된 도량표준으로 발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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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지금까지 고찰한 화폐의 기능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노동의 사회적 화신으로 가치를 측정하는 가치척도로의 기능이며 또 하나는 고정된 무게라는 속성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금의 양을 측정하는 도량표준으로의 기능이다. 맑스가 보기에 화폐 형태를 고려할 때 우리는 이 두 기능을 분리해서 사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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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가 도량표준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도량을 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노동생산물로의 금 역시 잠재적으로 가변적인데 이는 금이 가치척도가 되는데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금의 가치가 변동하더라도(가치가 전환된 형태인) 여러 가치의 금량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상품가격이 오른다면, 그것은 나머지 요소들은 고정된 상태에서 상품가치가 올랐거나 화폐 가치가 떨어진 것이고 상품가격이 떨어진다면 그것은 상품가치가 내렸거나 화폐가치가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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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의 가치가 변해도 도량표준으로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문제는 없는 셈이다. 한 가지 고려할 것은 문화적, 관습적 요소들에 의해서 화폐의 명칭이 그 무게 명칭으로부터 분리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결국 도량표준의 화폐명칭은 실제 무게와 동일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이름을 획득하고 법률에 의해 규제된다. 이제 1쿼터의 밀은 1온수의 금과 가치가 같다“고 표현하지 않고 ”3파운드 17실링“의 가치가 있다고 표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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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3파운드 17실링”이란 것은 그러한 가격을 가진 상품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사물의 명칭은 사물의 성질과 관련성을 가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화폐의 명칭들에서 우리는 상품의 가치 관계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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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은 상품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의 화폐명칭이기는 하지만 그 외현된 이름으로부터 가치관계의 논의를 시작할 수는 없다. 나아가 화폐 형태와 상품 사이의 관계를 단순한 상대적 가치형태와 그것의 등가형태의 표현으로 간주하기도 어렵다. 즉, 가격이라는 형태는 상품의 가치와 더불어 수요/공급 등의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 변화되어 출현하기에 상품가치량의 지표로의 가격은 상품과 화폐 교환비율의 지표이나 그 역의 관계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노동생산성이 동일한 이상 사회적 노동시간이 동일하다면 그 상품의 가치량은 동일하게 상품에 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가격으로 사회적으로 외화된 형태로 출현할 때는 사회적 조건이 그 거울 관계를 왜곡시킨다. 결국, 가격과 가치량 사이의 양적 불일치의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가격 형태에 내재하는 것으로 이 질적 모순은 거의 언제나 존재한다. 가격형태만을 가지지 가치가 없는 것(양심, 명예), 상상적 가격형태(미개간지) 등은 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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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상품이 그 가치를 고려할 때, 현실의 물질적 형태에서 벗어나 상상의 금과 비교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때의 금은 관념적인, 상상적인 금이지만, 주인이 상품에 가격이라는 형태를 부여하길 원한다면, 상품이 등가물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상의 금은 실제의 금으로 대체되어 출현해야 한다. 사실상 관념적 가치 척도에는 hard cash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의 금이 현실의 금으로 전환되는 순간, 노동생산물이라는 가치 형태가 그것이 그대로 반영되기 보다 필연적으로 변형되어 ‘가격’이라는 모습을 가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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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②

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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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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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늘의 문예비평』 2012 여름 85호에 실었던 논문 「페미니즘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가능성 탐색」의 제목을 변경하고 문장을 약간 다듬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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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그래함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는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거래, 임금이 지불되는 노동, 잉여노동을 자본가가 취하는 자본주의적 기업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제한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우리의 일상에서 수행되는 경제활동 중 하나일 뿐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자본주의를 이렇게 제한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우리는 자본주의 외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순수 자본주의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상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대안적 시장이나 비시장적 거래가 존재하며, 대안적 지급이나 미지급으로 노동을 수행하는 경우도 많다. 대안적 기업이나 비자본주의적 기업 등과 같은 비자본주의적 기업들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자본주의적 경제형식 아래 두 칸에 나열된 다양하고 풍부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보라. 깁슨-그래함에 의하면 시장거래가 아닌 윤리적 공정 거래나 협동조합 방식의 교환, 개인적 선물이나 국가적 배분과 같은 비-시장적 유통은 비자본주의적 경제이다. 화폐교환이나 임노동과 관계없는 품앗이나 자원봉사 혹은 대안적 지불 형태도 자본주의 경제를 벗어난 경제적 활동이다. 그리고 사회적 기업이나 공동체 사업 그리고 자영업 역시 생산된 잉여가치의 분배에 있어서 자본주의와는 다른 원칙을 갖는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 기업이다. 이들은 자본주의적이라기보다 봉건적, 노예적, 독립적 혹은 공동체적 원리에 따라 작동하며 이 원리는 또한 성, 인종, 제도 여타의 규범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이지 않다고 해서 경제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경제형식들일 뿐이다,

깁슨-그래함의 모델에 따라 앞서 제시한 조씨와 같은 여성의 활동을 분석해 보면 그녀가 다층적인 차원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삶은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들로 점철되어 있다. 봉건적 가족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녀의 가사노동, 친인척 돌보기는 비지불 노동이지만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그녀는 봉건적 가족 관계 내에서만 경제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공동체적 관계 안에서 학교에 봉사활동을 하며, 아이 돌봐준 이웃의 아이들에게 과외지도를 한다. 이러한 봉사활동, 품앗이, 호혜적 노동은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이다. 그녀는 사적인 관계 내에서 순수 비자본주의적인 경제활동만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일주일에 네 번 정도 하는 프랑스어 과외지도는 화폐를 통해 매개되는 임금노동이라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노동이 순수 자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지하시장에서 노동하며 자영업자로서 자신의 잉여노동을 자신에게 배분한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에도 연루되어 있다.

이로써 분명해 지는 것은 조씨가 경제와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 활동은 한 가지 혹은 두 가지의 본질적 경제체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제형식들과 다층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녀는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에 참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풀어야할 문제는 그녀가 수행하는 경제적 활동이 어떻게 대안적 잠재성을 갖는가이다. 만약 우리가 기존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강력한 경제형식으로, 비자본주의를 나약한 경제형식으로 간주한다면, 조씨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은 언젠가 자본주의에 의해 침투되고 식민화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깁슨-그래함은 어떤 전략에 따라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긍정적 가능성을 주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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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제적 차이의 담론과 중층결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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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http://left21.com/article/12757

깁슨-그래함이 사용하는 전략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녀들은 비자본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마저도 복수화함으로써 본질로서의 자본주의가 가졌던 막강한 힘을 탈각시킨다. 이것이 바로 본질주의에서 경제적 차이로의 전회이다. 다른 한 편으로 그녀들은 이러한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바탕으로 중층결정론을 주장한다. 다양한 경제 형식들 중 어떤 하나가 본질로 설정될 수 없으므로 이제 경제는 다양한 형식들이 상호교차하는 가운데 중층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의 전략부터 살펴보자. 앞서 설명했듯이 깁슨-그래함은 기존의 이론과 달리 우리 사회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이것은 전체 경제형식의 50%이상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미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양식이라고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러나 깁슨-그래함은 이에서 머물지 않는다. 깁슨-그래함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재소환하는 것을 넘어서 자본주의마저도 복수화시킨다. 그녀들은 여성주의적 관점을 한 발 더 밀고나가 여성 정체성이 다양하다면 남성 정체성 역시 다양하게 이해될 때 대칭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이 있다면 자본주의적 경제 형식 역시 다양하다고 주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깁슨-그래함은 자본주의 역시 하나의 통일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논증한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형태학으로 파악될 수 있는 통일된 형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들에 따르면 실제로 우리가 전형적으로 자본주의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금융부문도 전적으로 자본주의적이지 않다. 가령 개인투자관리사와 같은 자영업자는 자신의 잉여노동을 스스로 전유한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인 특성과 절합되어 있고, 자유로운 사업대출 분야의 성장은 많은 비자본주의적 기업 특히 자영업 활동의 신장에 기여했다. 그녀들에 따르면 주어진 정의를 매끈하게 따르는 그런 순수한 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생각보다 적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말해왔던 것처럼 매끈하거나 통일적이지 않다.

이렇게 자본주의마저 복수화하는 전략은 깁슨-그래함의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급진화시킨다. 이제 그녀들의 정치 경제학 내에서 모든 요소들을 관통하거나 지배하는 통일된 단일자로서의 본질은 없다. 알튀세르의 말처럼 모든 사건은 그 순간에 존재하는 모든 조건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하나의 본질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깁슨-그래함의 두 번째 전략이다. 이 전략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본질로서의 위상을 잃게 됨에 따라 그 강력한 힘도 잃게 된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괴물이 아니라 여러 가지 경제형식 중 하나일 뿐이다. 이로써 경제 영역은 다양한 경제 형식들이 절합하고 혼종되는 장소가 되며, 여기서 다양한 차이들의 성격과 방향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중심은 없다. 새로운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강력하거나 통일적인 영웅 혹은 최후의 승리자가 아니다. 경제적 차이의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의 절합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해 온 하나의 경제형식일 뿐이다.

반대로 비자본주의는 더 이상 무력한 경제형식이 아니다. 깁슨-그래함에 따르면 비자본주의는 생각보다 우리의 일상에 널리 퍼져 있으며 고유의 힘을 통해 자본주의를 변형시키고 탈구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정복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무력한 혹은 낡은 경제가 아니다. 오히려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세계에서조차 자본주의적 경제형식 이상으로 존재해 왔으며, 유령처럼 늘 자본주의의 주변을 맴도는, 결코 제거되지 않는 힘들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기존의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에 대해 겁을 먹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늘 우리 곁에 있었던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고 그 힘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껏 말해왔던 방식의” 자본주의에 종말을 고하는 여성주의적 정치경제학의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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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대안적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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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그래함의 차이의 경제학 속에서 조씨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은 사소하지 않다. 그녀의 가부장적, 공동체적 경제활동은 자본주의적 경제에 의해 먹혀들어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 앞에 떨지 않아도 된다. 자본주의는 이제 괴물이 아니라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 절합되는 하나의 경제요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깁슨-그래함의 청사진은 객관주의자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히곤 하였다. 정치경제학이 대상으로 해야 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며, 강력한 자본주의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는 객관주의자들은 담론을 달리한다고 해서 객관적 세계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깁슨-그래함은 두 가지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한 편으로는 그녀들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사례들을 발굴하고자 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러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확장시키려는 실천을 통해 담론이 세계를 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가령 깁슨-그래함은 호주 탄광촌의 광부 부인들의 사례를 통해 여성들이 어떻게 가부장적 착취에 대응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항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사례에 따르면 탄광회사는 광부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는 조건으로 불규칙적인 교대근무의 조건을 제시했는데 광부의 부인들은 그러한 조건이 가내의 착취를 더욱 심화시킨다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가내의 생산적 노동자로서 광부의 부인들은 자신의 봉건적 착취에 대항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논리의 확대에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밖에도 깁슨-그래함은 잉여의 공동 분배를 지향하는 협동조합 활동이나 상호 호혜적 노동이 만들어 내는 공동체 경제의 형성에도 주목하면서 이러한 경제형식들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깁슨-그래함이 제시하는 사례들이 발견될 수 있는가? 오래 동안 우리는 사회의 전체 영역에 자본주의가 침투하고 있다는 각본에 매달려 왔다. 많은 비판이론들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여주는 데 열중해왔다. 그러나 비판이 강하게 고조될수록 자본주의는 괴물과도 같은 형상을 드러냈으며 그 괴물은 어떤 저항에 의해서도 극복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여성의 경제활동은 침범되고 강간될 수밖에 없는 나약한 것으로만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제 관점을 바꾸어 깁슨-그래함의 언어 속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을 다시 보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우리 역시 여성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이 가진 잠재력을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를 위해 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나섰던 사건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가족들의 밥상을 위해 신자유주의적 논리의 확산에 저항했다. 그들의 저항은 가족 내에서의 그녀의 생산적 경제활동에 기반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품앗이의 사례들도 주목할 만하다. 과천에서 만들어진 지역 공동체에서 수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품앗이 활동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녀들은 한 시간 단위로 자신의 노동을 책정하고 서로의 노동을 교환한다. 내 아이를 한 시간 맡기는 대신 머리 염색을 한 시간 해주거나 과외지도를 한 시간 해 주는 식이다. 여기서 노동의 가치는 자본주의적 시장의 가치체계에 따르지 않는다. 모든 노동은 공평하며 돈이 없어도 일상의 많은 생활이 가능하다.

이렇듯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채택하게 되면 여성의 경제활동은 나약하거나 사소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대안으로 나타난다. 앞서 제시했던 조씨의 경제활동은 봉건적 혹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무력한 부정적 활동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하는 공동체적 활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인가? 자본주의를 경제의 유일하고도 막강한 형식으로 보면서 여성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을 폄하할 것인가, 아니면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받아들이고 이와 함께 비자본주의적 경제의 실천을 의식적으로 감행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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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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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①

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13강-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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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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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늘의 문예비평』 2012 여름 85호에 실었던 논문 「페미니즘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가능성 탐색」의 제목을 변경하고 문장을 약간 다듬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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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제언어가 지워버린 여성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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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를 학교까지 차로 데려다 준다. 그녀는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외국유학을 갔었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양육의 문제로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귀국 후에는 전업주부로 가사와 양육을 도맡고 있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주일에 네 번 정도 학생들에게 프랑스어 과외지도를 하기도 한다. 그밖에도 아이의 학교에서 급식을 나누어주는 자원봉사도 한다. 남편은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지만 아직 형편이 어려운 시간강사이다. 일하러 갈 때면 그녀는 이웃에 아이를 맡긴다. 대신 이웃의 아이들에게 영어나 프랑스어를 가르쳐 준다. 부모/시부모가 아플 때 간병을 담당하는 것은 항상 그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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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조씨의 이야기는 결코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주의를 둘러보면 조씨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여성들은 흔하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들의 활동은 주류 경제학자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공식적인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GDP든 GNP든 어떤 경제적 용어도 조씨가 수행하는 종류의 노동을 생산 활동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통상 그녀가 수행하는 대부분의 활동은 화폐의 거래나 공식적 시장과는 상관이 없기에 노동이나 경제활동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적인 행위일 뿐이다. 화폐교환이 이루어지는 과외지도 역시 공식적 시장거래가 아니라는 점에서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씨가 수행하는 가사노동과 양육, 과외지도, 자원봉사, 품앗이, 간병은 생산 노동이라고, 경제활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아무런 사회적 의미도 갖지 못하는 사적인 활동일 뿐인가? 조씨의 노동을 경제와 관계없는 사적인 활동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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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사, 경제/비경제의 이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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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의 형성과 함께 굳어진 공/사 구분법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근대 자본주의의 성립과 더불어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 경제적 영역과 비경제적 영역이 더욱 분명하게 구분되었다고 주장해왔다. 이들에 따르면 봉건시대에 가정은 사회적 신분과 유산이 계승되는 장소라는 점에서 경제활동의 공간이었으며 여기서 공/사, 경제/비경제의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성립과 더불어 경제는 자본주의적 시장 중심의 임노동 영역으로, 가정은 시장중심의 경제관계 밖에 존재하는 친밀성, 인간관계, 사랑의 영역으로, 즉 사적인 영역으로 분리되었다. 이제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개인의 경제관계는 친밀관계로부터 분리된다. 경제적 활동은 오직 자본주의적 시장에서 노동을 사고파는 행위와만 연관되며, 가정은 경제활동이나 이해관계와는 동떨어진 숭고한 친밀성의 영역이 된다. 즉 가정에서의 활동은 노동이기보다 사랑의 표현이며, 가족, 이웃의 관계는 이해관계 중심의 경제적 관계이기보다는 규범적 태도가 중시되는 인간관계로 간주된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자본주의를 비판했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담론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가령 맑스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의 논의를 살펴보자. 한편으로 그들은 강력한 자본주의가 여성의 가내 노동 및 친밀관계를 자기존립의 기반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은 시장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가정 내에서의 여성의 활동은 강력한 자본주의의 논리에 종속된 것으로 혹은 자본주의를 유지시키는 지지물로 파악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다른 한 편으로 맑스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가정을 소비의 공간으로 분석함으로써 어떻게 가정이 자본주의에 의해 식민화되는지를 분석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맑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적 분석은 강력한 자본주의 경제가 어떻게 사적인 인간관계 나아가 사회적인 것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모든 비판의 근저에는 가정 내에서의 활동이 공식적인 경제활동과는 분리된 사적인 것이라는 전제가 여전히 깔려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담론에는 가정에서의 활동이 생산 활동이라기보다는 생산 활동을 보조하는 재생산 혹은 소비활동이며, 이 활동마저도 자본주의라는 강력한 경제 원리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포함한다.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은 결국 이러한 전제들로 인해 자본주의적 시장 밖에 존재하는 여성의 정체성을 독자적으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사적인 관계에서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들은 경제적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갖지 않는 수동적 대상이기에 그녀들의 정체성은 공식적 자본주의 시장에서 맺고 있는 남편의 계급과 관련하여 정의되곤 하였다.

만약 이분법을 전제로 하는 맑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논리를 조씨의 사례를 분석하는 데 적용해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선 조씨의 다양한 활동은 경제적 활동이라기보다는 친밀성의 표현이다. 그녀는 사랑의 이름으로, 친밀성의 이름으로, 아이를 위해, 남편을 위해, 부모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적인 관계에서의 이러한 희생의 결과는 결국 자본주의를 공고하게 하는 데 이바지 한다. 그녀의 애정 어린 봉사와 희생으로 남편의 노동력은 재생산되며, 아이는 미래의 노동력이 된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경제적 생산자가 아니다. 그녀가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직 노동력의 재생산자로서 혹은 소비자로서일 뿐이다. 그녀는 경제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에 대항할 어떠한 대안적 생산의 힘도 갖지 못한다. 그녀는 자본주의에 의해 이용되고 침탈되는 수동적 대상일 뿐이다.

결국 공/사, 경제/비경제의 이분법은 조씨와 같은 여성을 경제의 언어에서 지우거나 경제에 종속된 수동적 존재로 강등시킨다. 이분법을 고수한 채 여성을 사적인 영역으로, 비경제의 영역으로 감금하는 한, 여성이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활동은 비존재처럼 취급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친밀 관계 내에서의 여성 활동은 비경제적 활동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는가? 이분법 안에서 경제는 어떻게 정의되기에 조씨와 같은 여성의 활동을 노동으로, 경제활동으로 규정해 줄 수 없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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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본주의적 경제활동만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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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http://blog.daum.net/yyy8525/124

여기서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경제에 대한 관념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좌파에게든 우파에게든 경제체제란 곧 자본주의를 일컫는 말이었다. 깁슨-그래함(Gibson-Graham)이 분명하게 지적했듯 주류 경제학자들뿐 아니라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에게도 경제적 분석의 대상은 곧 자본주의였고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경제의 유일한 그리고 본질적인 형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러한 자본중심적 경제일원론으로 인해 여성의 일상적 활동은 경제 언어에서 지워져버린 것이다.

이러한 경제일원론의 문제점을 처음으로 간파했던 것은 바로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크리스틴 델피(Christine Delphy)였다. 델피는 논문 「주요한 적」(1980)에서 결혼 내에서 가사노동은 남편의 임금과 함께 가족 생존에 기여하는 중요한 요소인데도 불구하고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은 상품생산과 관계없다는 이유로 “비생산적”인 것으로 혹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고 진단한다.(Christine Delphy, “The Main Enemy”, in Feminist Issues, Summer 1980, p. 26.) 가사 노동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모두를 생산함에도 불구하고 가족 개개인의 고유한 필요를 만족시키는 개인적인 것으로만 여겨지기 때문에 그 노동에 대한 지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델피는 레오나드와 함께 저술한 1992년의 논문 「가족적 착취: 현대 서구 사회에서의 결혼에 대한 새로운 분석」에서 가내 생산을 하나의 독자적인 생산양식으로 이론화하고 이를 자본주의와 다른 경제 모델로 제시함으로써 경제 일원주의에 도전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즉 델피는 “이중 체제론(dual systems theory)”으로 알려진 입장을 개진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이외에도 가부장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내 생산 양식(domestic mode of production)”(Christine Delphy and D. Leonard, “Familiar Exploitation: a new analysis of marriage”, in Contemporary Western Societies, Cambridge: Polity Press, 1992를 참고하시오.)이 있음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델피의 모델에 따르면 가사노동은 단순히 자본주의적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부차적인 체제가 아니라 독자적 관계 즉 가부장적 관계에 따르는 “생산” 양식이다. 이제 사회는 자본주의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두 가지의 경제적인 것에 영향을 받는 전체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델피의 이중 체제론에 따라 앞서 제시한 조씨의 사례를 분석해 보자. 분명한 것은 조씨의 가정 내 노동을 순수 사적인 것 혹은 비경제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여기서 폐기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씨의 노동은 생산노동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시장에서의 거래를 전제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연히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또 하나의 생산 활동이다. 조씨가 가족을 위해서 수행하는 가사노동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며, 아이를 돌봐주는 대가로 이웃의 아이들에게 수행하는 영어, 프랑스어 과외지도는 교환가치를 생산한다. 따라서 그녀는 가내 생산자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의식하는 한 자신의 노동이 착취될 때 저항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제 그녀는 자신이 학업을 포기하고 나아가 자신의 잉여노동을 착취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가부장적 가내생산양식의 모순 때문인 것으로 파악하고 이 모순에 저항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 체제론”은 여전히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델피는 가부장적 생산관계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양자는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설명하지 못했다. 만약 델피가 자본주의를 여전히 강력한 경제형식으로 전제하고 있다면, 어떻게 가부장적 가내생산양식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자율적일 수 있는가? 어떻게 가내생산양식은 자본주의에 의한 식민화를 벗어날 수 있는가? 뿐만 아니라 델피는 경제 이원론의 언어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가령 당시 자본중심적 경제학에 정향된 경제 일원론자들은 여전히 가내 생산양식을 자본 연관적 이론형식을 통해 설명할 것을 그녀에게 요구했는데 그러한 요구 앞에서 델피는 어려움을 가졌다. 예를 들어 그녀는 가내 생산양식 역시 자본의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위기의 경향을 갖는 경제시스템으로 설명해야한다는 요구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즉 그녀는 자본주의와 다른 경제형식이 있다는 생각에는 도달하였지만 이 다른 형식을 표현할 수 있는 적극적인 언어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가들의 반론에 효과적으로 대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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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의 소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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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본주의적 경제형식과는 다른 경제형식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 형식들이 자본주의와는 다른 언어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경제형식들이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내재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일상에서의 여성의 활동을 생산적 경제활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야하며 여성의 경제활동이 가지고 있는 생산적, 대안적 힘의 가능성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가능성을 이론화할 것인가?

여기서 필자는 J. K. 깁슨-그래함(Gibson-Graham, 깁슨ㅡ그래함은 캐서린 깁슨(Katherin Gibson)과 줄리 그래함(Julie Graham)이 함께 만든 공동의 필명이다.)이 제안하는 새로운 페미니즘 정치경제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깁슨-그래함은 그 누구보다도 경제일원론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자본주의를 유일한 경제형식으로 전제하는 정치경제학 이론들이 가정경제와 같은 자본주의와 다른 경제형식들을 이론의 전면에서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남근중심적(phallocentric) 담론이 남근을 인간을 대표하는 유일한 기표로 간주하면서 남근과 다른 모든 것들을 타자로, 결핍으로 배제해왔듯이 말이다. 따라서 그녀들은 이제 타자로 배제되어왔던 여성의 관점에서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언어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녀들은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언어 속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을 이론화하고자 할 뿐 아니라 이러한 활동이 갖고 있는 긍정적 잠재력을 발굴하고자 한다.

깁슨-그래함의 이러한 작업은 델피의 이중 체제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한 편으로 그녀들은 델피가 가내 생산양식과 같은 자본주의와는 다른 경제형식에 주목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녀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델피가 또 다른 본질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델피의 모델에 따르면 개인의 정체성은 자본주의 혹은 가부장제라는 두 개의 체제로 환원되어 설명되기 때문이다. 가령 자본주의 밖에 존재하는 한 여성은 가내 생산양식이라는 또 하나의 본질에 따라 파악된다. 그러나 깁슨-그래함이 보기에 여성들은 가족 관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관계들에 연루되어 있다. 여성들은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적 관계 안에 있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깁슨-그래함은 여성을 가부장적 관계 안에서 하나의 통일된 정체성을 갖는 존재로 보는 델피의 방식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성주의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여성은 통일체로서의 “대문자 여성(Woman)”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깁슨-그래함이 “여성”을 어떻게 이해하고자 하는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깁슨-그래함에 따르면 여성의 타자성은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타자들이다. 즉 여성의 타자성은 항상 복수이다. 버틀러가 분명하게 주지시켰다시피, “여성”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수행성의 결과일 뿐이지 그 자체가 어떤 하나의 본질에 의해 정의될 수 있는 통일적 실체가 아니다. 이리가레가 여성을 “두 입술”로 비유했던 것도 여성이 단 하나의 매끈한 형태를 갖는 남근과는 다른, 그 자체의 내적 차이를 갖는 여성들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은 어떤 내용적 동일성을 갖는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타자들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은 단수로서의 여성을 넘어 다양한 타자들의 관점에서 기존의 이론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깁슨-그래함은 복수적 타자의 관점을 여성주의적 정치경제학의 핵심으로 삼고자 한다. 깁슨-그래함은 여성주의적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여성을 가내 생산 양식과 같은 어떤 하나의 타자성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 관련하여 다층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아래의 <표1>을 통해 그녀들이 제시하고 있는 다양한 경제형식들을 살펴보자(ibid. p. xiii. 이 표는 가로가 아니라, 세로줄 아래위로 읽는 것이다. 예컨대 비자본주의적 활동도 시장지향적일 수 있다.)

거래

노동

기업

시장

임금

자본주의

대안적 시장

공공재의 판매

윤리적 “공정무역” 시장

지역유통체계

대안 통화

지하시장

협동조합형 교환

물물교환

비공식시장

대안적 지급

자영업

협동조합

기식노동

호혜적 노동

현물지급

복지급여형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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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적 자본주의 기업

국영기업

녹색자본가

사회적 책임 기업

비영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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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장

가계 흐름

선물

토착적인 교환

국가 할당

국가 전유

이삭줍기

수렵, 어업, 채취

절도, 밀렵

미지급

가사노동

친인척 돌보기

마을 노동

자원활동

자기재충전형 노동

노예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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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본주의적

공동체적

독립적

봉건적

노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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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

애인을 사랑하는가? yes도 no도 아닌 진동 상태! [철학자의 서재]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철학자의 서재]

 

정성훈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세대론도 멘토링도 힐링도 아닌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한 이후 21세기의 청춘이 처한 처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중년층 학자들의 술자리에선 요즘의 20대가 자기들의 청춘 시절보다 힘들게 사는가 아닌가, 희망이 있는가 없는가 등등의 주제로 격론이 벌어지곤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힘든 처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이들이 멘토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런 술자리 논쟁에서 청춘의 편을 들어주는 편이고 철학이라는 힘든 길을 가려는 학생들에게 세태에 흔들리지 말라는 멘토링을 해주곤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게 떠오르는 두 가지 의문은 “내가 가르쳐온 20대를 과연 하나의 세대로 묶을 수 있는가?”와 “내가 저들의 처지와 다른 것은 무엇인가? 나의 조언은 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가?”였다.

오늘날의 청춘의 삶에 대해 관심이 많지만 나는 왠지 그 멘토라는 사람들이 쓴 책들을 읽어보기는 싫었다. 그들이 아무리 따뜻한 시선을 가졌고 그들이 아무리 진보적이라 하더라도 이른바 성공한 사람 혹은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성공과 성장을 강요받는 청춘에게 의도하지 않은 기죽이기 효과를 갖는 것 같았다.
 

▲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세대론이나 멘토들이 쓴 책들을 외면해오다가 뭔가 다른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 구입한 책이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이다. 일단 저자 엄기호가 요즘 청춘들을 기죽이는 전설의 시대인 80년대 학번이 아니라 ‘낀 세대’라 불리는 90년대 학번이라는 점, 게다가 의사도 변호사도 교수도 아닌 박사과정 수료의 시간강사라는 점에 끌렸다. 수업 보고서를 통해 이 책을 함께 쓴 덕성여대와 연세대 원주캠퍼스의 학생들이 이 선생에게 기죽거나 혹은 선생을 과도하게 존경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기대대로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부터 이 책이 세대론에 대한 책이 아니며, 20대에 관한(about) 책도, 20대에게(to) 쓰는 책도 아님을 밝힌다. 저자는 이 책이 “지난 2년간 대학에서 학생들이 어떤 언어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들과 함께 나누었던 지적 대화의 기록”이라고, 학생들은 선생과 ‘with’의 관계에 있는 “시대에 대한 앎의 지적 파트너”라고 말한다(20쪽).

그렇다면 이 책은 혹시 요새 유행하는 대화를 통한 힐링을 목표로 하는 서적은 아닐까? 하지만 학생들의 글과 선생의 분석 혹은 비평이 이어지는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이 선생과의 대화를 통해 학생들의 마음이 크게 치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잉여’라고 ‘한심하다’고 자조하는 그들의 태도는 별로 바뀌지 않는다. 선생도 이들에게 자기긍정을 요구하거나 잉여의 조건을 변혁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역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이 책을 함께 만든 지적 파트너들 사이의 거리, 불일치 등이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며, 그것은 학생들을 바라보는 선생의 시선을 역설에 이르게 한다. 선생은 중고등학교의 폭력과 억압을 부정적으로 보여준 후 “폭력적이지 않은 교육이 가능한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약력을 보면 그는 대안학교 선생도 했지만 “대안학교의 교육은 사랑이라는 주장에 학생들은 냉소하고 지겨워 한다”는 고백도 한다. 그리고 폭력적 교육과 비폭력적 교육의 구별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116~121쪽).

또한 그는 서사적 사랑을 가장 강렬한 성장의 드라마라고 찬양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사랑을 할 수 없는 조건에 처해 있는 청춘을 위해 “이 임시적인 사랑, 그것은 왜 또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되묻는다(163쪽). 몸을 최고의 아이템으로 여기고 다이어트에 몰두하는 세태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서술하는 동시에 성적 상품화에 대한 인권 관점에서의 비판에 대해 “그들의 귀에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지겹고 고리타분한, 후지고 하나 마나한 말씀이 된 것뿐”이라고 냉소하기도 한다(185쪽). 그래서 책 제목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저자의 답은 ‘아니오’로도 읽을 수 있고 ‘예’로도 읽을 수 있다.

역설적 상태란 이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하고 이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을 뜻하는 진동 상태이다. 사랑을 예로 들자면, 모든 파트너는 서로 사랑한다는 규정과 함께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동시에 내릴 수 있다. 연애 기간이라 불리는 시간 동안 한시도 의심의 여지없이 열정을 불태운 커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 기간 내내 서로를 연인이라 부르는 것은 탈역설화를 위한 노력, 즉 ‘사랑하지 않는다’ 혹은 ‘헤어지자’라는 말을 되도록 내뱉지 않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니클라스 루만에 따르면, 모든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엄청나게 높아진 시대인 ‘현대(modern)’에는 아무리 권위적인 규범이나 질서라 하더라도 결코 역설적 상태를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에서 놀라울 정도로 견고한 질서 – 화폐경제, 법의 지배, 대의제 민주주의, 일반 교육 등등 – 가 유지되어온 이유는 진리, 권력, 화폐, 법, 인권 등의 가치가 탈역설화 메커니즘을 잘 발달시켜왔고 그것이 학문, 정치, 경제, 법 등 각 고유 영역에 따라 잘 분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는 선생과 학생들의 글 속에서, 특히 각 장의 마지막에 선생이 던지는 의문을 읽으면서, 더 이상 탈역설화가 쉽지 않은 시대 상황을 읽어내었다. 민주주의의 정당성, 인권의 정당성, 가족의 소중함, 사랑의 숭고함 등이 전면적으로 부정되지는 않지만 의문에 처해지는 것, 돈과 사랑의 경계, 진리와 돈의 경계 등이 희미해져버리는 것 등이 이 책에서 읽어낼 수 있는 청춘의 변화이다. 아니 세대론을 넘어서서 본다면 우리 시대의 변화이다. 사실 중년층이 청춘에 대해 비난하는 내용의 상당수는 고스란히 더 이상 20대의 자신처럼 살고 있지 않는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들이다.

저자는 이런 변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지만 옛날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거나 이것이야말로 대안이라고 큰 소리로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변화를 어느 정도는 감수하는 태도 혹은 부분적으로 긍정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어쩌면 모호한 듯 보이는 이러한 태도가 우리 시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솔직한 태도일 것이다. 나 역시 내가 내뱉은 정치적 주장이나 도덕적 판단에 대해 수시로 이차 관찰을 하면서 역설적 상태 속에서 진동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현대성의 위기

 
현대 사회는 그 이전 시대의 사회들과 비교해 너무나 비개연적인 일들을 달성해내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서로 사랑하며 살겠다고 맹세하는 일, 전혀 다른 수준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격리되어 같은 종류의 학교에 다니면서 출신 성분을 알 수 없는 선생으로부터 함께 배우는 일, 출신 가문과 무관하게 학교를 통해 쌓은 경력에 기초해 조직에서 역할을 부여받는 일,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라도 진리의 영역이나 예술의 영역에서는 평범한 문외한으로 취급받는 일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 비판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인쇄 매체를 기반으로 달성된 것들이며, 그래서 쉽게 다시 역설에 처할 수 있다. 현대성은 그 현대성 자체를 가능하게 한 논리의 귀결로 위기에 이르게 된다.

사랑을 예로 이 위기를 짚어보자.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권기돈 외 옮김, 새물결 펴냄)을 읽어보면, 사랑의 코드화의 출발점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여성들에게 청혼을 거절할 수 있는 자유가 부여되었을 때이다. 즉 두 파트너 모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 이상 덕(virtue)이나 아름다움이 사랑을 보장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오직 사랑만이 사랑을 가능하게 하고 ‘사랑한다’가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부정의 가능성을 열어놓았을 때, 현대적 연애가 성립한다. 그리고 사랑은 성애와 결혼을 함축하되 그것들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또한 사랑은 돈, 권력, 진리 등과 무관해짐으로써 독자적인 영역으로 자리 잡는다, 이런 부정의 가능성들 덕분에 엄기호가 “가장 강렬한 성장의 드라마”라고 말하는 사랑의 서사가 가능해진다. 고백하고 거절당하고 다시 도전하고 맺어지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등등이 이어질 수 있으며, 이 서사에서 사랑 바깥의 요인들은 원인으로 간주되어선 안 된다.

이렇듯 부정의 가능성 위에 성립했던 사랑은 이제 사랑 그 자체를 부정하는 도전에 처하게 된다. 사랑 혹은 친밀성이 어차피 거래라는 분석, 그런 거래를 주선하는 정보업체의 등장, 서사적으로 사랑할 수 없기에(결혼에 이르기 어렵기에) 즉각적 성애를 추구하는 경향, 자기서사가 불가능한 인격들의 등장 등이 그러하다. 임시적인 사랑은 왜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엄기호의 질문도 그런 도전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런 도전에 대응하는 태도에는 정답이 있는가? 이런 도전을 순수한 사랑의 훼손이라고 도덕의 타락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고리타분한 자, 낭만적 사랑의 환상에 매달리는 자, 영원한 사랑이라는 사기극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자 등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반면에 이런 도전을 그대로 수용하는 자는 속물, 인격성의 포기 등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두 극단 사이에서 뭔가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도 할 수 있지만 그런 대안들 중 보편화 가능한 것은 별로 없다. 그래서 사랑이 거래라는 도전 앞에서, 임시적 사랑도 사랑이라는 도전 앞에서, 나는 ‘예’라고도 ‘아니오’라고도 답할 수 없는 역설에 처한다.
 

당신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이 책을 현대의 역설 혹은 현대성의 위기의 징후로 읽는다면, 이 책은 요즘의 20대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의 서사를 추억으로 간직한 40대도 지금 사랑의 역설로 괴로워하며 살 수 있으며 임시적 사랑으로 서사적 사랑의 관념에 도전하며 살 수도 있다. 또한 퇴직당한 후 알바를 하며 살아가는 노인들은 이 책에 나오는 대학생들처럼 자신들을 ‘잉여’라고 부를지 모른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면, 견고한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액체 현대”는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 한국적 맥락에서는 87년에 성립된 현대를 위협하고 있다. 아주 쉽게 ‘탈현대’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역설에 처한다. 인권, 민주주의, 사랑, 일반 교육 같은 것들을 나는 고루하게 고수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 그리고 요즘의 20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평하는 중년층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글쓰기와 차이[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데리다⑨

 

해체란 무엇인가 – 글쓰기와 차이[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2]-데리다⑨

강사 :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후기 :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한국사회에서 민주화 운동이 강렬하게 일어났던 1980년대는 맑스-엥겔스의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한 이론이 사회적 대안으로 자리 잡았었다. 그러다가 90년대 이후 공안정국이 약화되고 사회 전반에 민주화가 일정 정도 진척되면서부터 과연 유물론적인 입장이 우리사회의 대안으로 기능하기에 적합한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한국사회를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의 도입을 추구하는 시도가 있었다. 실제로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한 여러 대안이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포스트모더니즘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철학자가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이다.

데리다는 프랑스에서 살고 거기서 죽었지만 태어난 곳은 알제리이다. 이 평범하지 않은 경력은 그가 알제리 출신으로서 프랑스 문화와의 충돌과 차이에서 느끼는 이질감을 통해 자신을 주류 프랑스 사회에 대한 이방인이자 타자라고 여기는 근간이 되었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아홉 번째 시간에 만나 본 철학자 데리다의 이런 생각은 까뮈(Albert Camus, 1913~1960)의 소설 의 내용과 오버랩 된다. 이번 강의를 맡은 이정은 교수는 사람들이 보통 프랑스 사회를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회로 이해하지만 한편으로 인종문제와 같은 첨예한 사안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영향력의 범위 안에서 오히려 폐쇄적이 될 수도 있다고 하면서 데리다는 까뮈가 고발한 프랑스 사회의 모습을 통해 어떤 집단의 규정 밖에 존재하는 인간(이방인)의 실존적 고민이 남의 문제처럼 느껴지지 않고 자신에게 진지하게 다가왔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자크 데리다/ 출처: www.fjalareview.com

 

타자의 경계를 해체

 

데리다는 이방인, 즉 타자의 경계를 ‘해체’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 해체의 과정에서 타자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그렇지 않다고 하기에도 힘든 그런 지점이 있음을 설명해내고 싶어 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방인이나 타자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집단의 규정 안에 있는 인간으로서, 주체와 경계 밖의 타자로서 주체가 아닌 것의 구분은 굉장히 유동적이고 자의적이다. 양자를 구분하는 차이 역시 그렇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무엇을 가지고 규정하고 만들어지는가?

무언가를 둘로 나눌 때 작동하는 차이는 기존의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이 차이를 만드는 근저의 또 다른 ‘차이’가 있다. 데리다에 의하면 이 차이를 만드는데 작동하는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다. 그러나 차이를 만들어 내는 ‘차이’가 작동하는 것은 확실하다. 이방인과 비이방인이 나누어지는 것은 차이가 있기 때문이고 이것은 기준이 되는 차이에 의해 나누어진다.

데리다는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를 근본적으로 반성하면서, 차이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개념적으로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경계를 만드는 기존의 지점은 해체되고, 나누는 기준이 사라지니까 이 모두를 다시 새롭게 규정해야할 상황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데리다는 기존철학사 전체를 한마디로 설명해내려 한다.

 

탈근대로서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해체주의

 

데리다는 포스트모드니즘을 ‘탈근대’라는 개념으로 규정했고 ‘해체주의’라는 독자적인 용어를 써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데리다는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로서의 근원적인 어떤 것을 얘기하면서 자신의 이런 생각은 예전부터 계속 있어왔던 사유의 전통에서 발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철학사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그 선구적인 인물을 발견하여 지목한 것이 니체(Nietzsche, 1844~1900)와 하이데거(Heidegger, 1889~1976)이다. 그리고 이들을 분석하다보니 자기가 말하는 지점에 더 가까운 사람을 니체라고 봤다. 그런데 이정은 교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객관적 입장에서 니체를 본다면 오히려 후기구조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더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것을 해체하는데 그 특징이 있지만 이러한 발상을 가지고도 결과적으로 새로운 구조가 만들어짐을 인정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와 그것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존재한다. 데리다는 후자의 입장이다. 이정은 교수는 데리다가 탈근대라는 개념에 이어 다시 해체주의라는 용어를 만들고, “나의 발상은 니체에 연원한다”고 했지만 사실 니체를 잘 들여다보면 데리다가 거부했던, 구조를 깨고 또 깨 봐도 부수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있다는 점을 수용한 사실이 분명 있다고 한다. 푸코의 구조주의에 대한 입장(후기 구조주의)이 이와 같고 이런 발상을 전개시킨 사람들의 계보는 니체-푸코-들뢰즈로 연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리다가 니체를 자기사상의 선구자로 말하는 이유는 먼저 ‘실체’ 개념을 거부했다는 점에 있겠다. 그러나 ‘실체’ 개념에 대한 거부는 니체 이전의 경험론자들이나 고대의 회의론자들도 모두 언급한 얘기다. 데리다에게 있어 니체를 해체주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점은 ‘인과관계’를 거부했다는 점이다. 보통 ‘인과관계’는 어떤 학문의 지식체계나 개념체계이던지 간에 그 체계의 기본 틀로 전제된다.

 

인과관계를 거부

 
흄(David Hume, 1711~1776)과 같은 경험론자들에 의하면 개별적 현상과 내가 사고하는 인과개념은 서로 이질적이다. ‘물건 A’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소리현상 B’가 일어난다는 명제가 있다고 할 때, ‘A’와 ‘B’에 대해서는 인지했지만 다시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경험했는가? 라고 묻는다면 경험론자들은 그 둘 사이의 인과성 자체를 경험한 것은 아니라고 대답할 것이다. 서로 다른 현상들을 경험한 것뿐이다. 또 경험론자들은 모든 지식은 감각경험으로 환원되지 않으면 지식이라 할 수 없다고 한다. 흄은 인과관계는 필연성이 없지만 인간의 지성이 마치 필연성이 있는 것처럼 여겨서 지식을 만들어내고 학문이라는 체계를 만들어 냈다고 했다. 그리고 니체는 인과관계에는 필연성이 없으므로 반드시 거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정은 교수는 다음같이 설명한다. “예를 들어보자, 사람들이 돌멩이는 단단하다고 하지만 돌멩이의 단단함은 경험의 결과이다. 내가 돌멩이가 단단하다고 느낀 것과 자연물인 돌멩이의 단단함 사이에는 아무 인과관계가 없다. 돌멩이를 만졌을 때 스펀지와 같이 말랑말랑 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돌멩이에 대해 결과적으로 단단하다고 말한 것을 돌멩이에 적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 니체의 입장이다. 돌멩이는 단단하다고 본질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돌멩이가 스펀지와 같다고 규정 한다면 이경우도 스펀지와 같다고 느낀 나의 감각과 돌멩이 사이에 인과관계를 적용시켜야 하기 때문에 성립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설명해보면 어떤 존재에 대해 파악하고 개념규정을 한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형성’된 것으로서 여기에 인과관계가 성립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 결과적인 것은 본질이라고 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왔던 모든 학문, 지식체계나 경험적인 현상들도 실제 대상과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돌멩이가 단단하다는 것은 본질적 규정이 될 수 없다.

돌멩이는 상황에 따라 단단하게 또는 물렁하게도 느껴질 수 있다. 니체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세상에 있는 인간 외의 모든 존재들은 생물적인 감각에 있어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똑같은 돌멩이도 다른 존재들에게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규정된다. 니체가 말한 ‘다른 세계’라는 것은 똑같이 보편적으로 규정된 세계를 각각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체가 본 세계가 곧 자기의 세계 전부라는 것이다. 똑같은 세계를 경험한 것처럼 보이지만 똑같은 세계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본래의 모습이라는 것은 없고 오직 구성된 결과물만 있다. 인과관계는 없다. 그래서 인과관계로 만들어지는 개념도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그 개념으로 만들어지는 체계도 없다.

데리다는 본질적인 돌멩이의 단단함은 없는데, 돌멩이의 단단함이 없다는 그 ‘지점’만을 말하려 한다. 데리다는 니체가 본질적인 것을 깨는 그 지점을 보았고, 봤던 그것만 말하겠다는 입장이다. 데리다는 항상 인과관계를 가지고 이 세계를 구성하게 되면 구성되는 방식이나 지점마다 여러 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계가 생긴다고 말한다. 그리고 데리다는 니체가 구조주의적인 맥락이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 개념적인 이성의 체계를 깨고 나서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고민하다가 결국 웃음을 날려 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평한다.

 

로고스적 질서를 비판

 
‘로고스(logos)적 질서’를 가지고 있는 것들은 모두 ‘이원론적’인 특징으로 전개된다. 남자와 여자, 선과 악, 해와 달, 이성과 비이성, 정상과 비정상 등의 이항대립으로 나누고 이렇게 상호작용이 불가능한 경계를 설정한 후에 양자에 대해 좋고 나쁨의 가치를 평가하고 대입한다. 정리하면 근대를 비판한다는 것은 모든 로고스적 체계를 가지고 있는 질서에 대한 비판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유에 이분법적 가치평가를 개입시키는 이원론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 로고스적인 질서의 꽃은 철학이다. 데리다는 형이상학적인 모든 철학체계를 비판하고 이와 유사한 모든 학문체계, 개념체계를 비판하겠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고대로부터 이어진 로고스적 전통을 해체시키기 위해서는 현대의 인간과 근접해 있는 근대 철학의 자아 중심, 주체적 철학, 주관주의 요소와 특징을 해체시키는 것이 주요하다고 보았다. – 근대 철학의 정점(Hegel 철학)에서 변곡점이 생겼을 때 프랑스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구조를 통해 철학을 위시한 근대 전반을 비판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 데리다는 근대 전반을 비판하는데 이 비판은 이성비판, 종교비판(신비주의), 선악대립비판, 실체비판, 개념비판(은유) 등 대부분의 영역을 대상으로 한다.

보통 이성중심주의는 로고스 중심주의이고 로고스 중심주의는 ‘음성중심주의’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로고스는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나오는데 전통적인 생각 안에서 이성은 영혼의 작용이다. 그리고 영혼의 사유는 이성적 작용으로서 밖으로 표출되는데 이 때 표출되는 형태는 ‘음성’이다. 이 음성은 언어체계를 만들고 이것은 다시 문자로 표현된다. 기존의 철학체계에서는 모든 것이 영혼의 울림이 음성으로 드러나는 것에서 출발하여 음성중심주의적 체계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완결된다. 음성은 이른바 신의 계시를 상징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가 ‘신탁’을 받았다는 표현을 쓰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신적 질서를 뛰어넘지 못하는 전통적인 기존의 철학체계에서는 항상 이성 위에 음성이 있다.

이를 비판하기 위해 ‘문자중심주의’를 사용하는데, 데리다는 기존과 다르게 새로운 개념의 문자학 만들기를 선언한다. 이른바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y:신문자학)’이다. 데리다가 말하는 ‘그라마톨로지’는 새로운 대안의 지평을 드러내는 글쓰기로, ‘일반적 글쓰기’이다. 차이로 담기지 않는 차이로써 ‘차연’을 그려내는 과정이다. – 바로 차이를 만들어 내는 차이가 ‘차연’이다. – 이 차이는 개념적 질서나 로고스적 질서로 잡히지 않는 차이이며 기존의 개념규정으로도 잡히지 않는다. 개념으로 잡히지 않고 언어로 접근도 안 되지만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흔적’(또는 ‘자취’, ‘발자국’)이라고도 한다.

우리는 기존의 개념적 체계를 가지고 접근하기 때문에 그 차이를 잡을 수가 없다. 또 존재 자체를 언어로 설명하려고만 하면 그 경계밖에 있는 차이는 잡히지 않는다. 이런 것을 잡아내려면 새로운 글쓰기로 찾아내야 한다.
 

음성과 문자의 사이

 
데리다는 음성과 문자의 관계에 있어서 문자가 음성의 영향을 받아 음성을 표현해 내는 수단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음성을 일탈하는 부분도 있다고 한다. 기존의 로고스적인 전통에서는 문자가 음성에 일탈하는 부분이 있으면 그것을 제거하고 음성에 맞게 만들었지만 데리다가 보기에는 음성과 문자는 각각 따로 작동하는 체계이다.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지만 기존의 개념으로는 파악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데리다는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이면서도 보이지는 않지만 작동하는, 파악되지 않는 무언가 있다고 한 것이다.

우리가 예를 들어 이방인과 비이방인의 개념을 구별하듯이 하려면 둘을 나눌 수 있으면서 눈에 보이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 이 개념은 로고스적인 방법으로써 철학자들이 보여주는 장치이다. 그렇다면 데리다가 말한 잡히지 않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데리다의 용어 ‘차연’은 ‘diff?rance’라고 쓰고 프랑스어로 기존의 ‘차이’라는 말은 ‘diff?rence’라고 적는다. 이 두 단어의 발음은 [dife???ːs]로 서로 같다. 이정은 교수는 알파벳 ‘e’와 ‘a’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음성 발음은 같지만 눈으로 보면 이 둘은 분명 다른 단어이다. 데리다는 이 두 단어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하면서 동시에 음성중심의 문자 체계는 이 둘의 차이를 드러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음성중심주의의 개념체계 아래에서 ‘차이-diff?rence’는 있지만 ‘차연-diff?rance’은 없는 것이 되고 문제가 있어 사라져야 할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둘이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며 나중에는 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diff?rence’만 맞다 한다면 이 개념에 맞는 대상만 이성적 질서에 맞는 체계라고 이해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이해체계로 잡히지 않는 모든 것은 거짓이고 틀린 것이 된다. 또 더 나아가 틀렸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는지 조차도 생각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조차도 망각해버린 상태가 되고 만다.

이정은 교수는 차이에 대해 모순적 질서를 바탕으로 확인해 들어가 보면 이 둘 사이에 경계를 구획하는 ‘차이’가 있어야 하는데 이 차이조차도 음성중심적인 구조로 진행되다 보니까 그 질서를 벗어나는 것을 간과하게 되었고, 처음엔 알았지만 무시(은폐)하게 되고 더 나아가 시간이 지나면서 무시(은폐)했다는 것조차도 잊어버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존재자가 존재에 의해 드러나는 우리 세계의 구성 안에서 단순히 세계가 존재자에 의해서만 이루어졌다고 인식하다보니까 마침내 존재에 대한 망각 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가 망각된 것조차도 모르고 살 수밖에 없던 것이 우리의 모습이었다.

데리다는 음성과 시각 사이에서 작용하는 흔적을 보여줬다고 했다. 이 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것은 일반적으로 ‘신비’라고 인식된다.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비가 곧 성스러움이 되고 성스러움이 신비로운 감정에서 나오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종교가 그 신비주의를 강화하여 사용하는 것을 목도한다. 종교적인 입장을 강화하는 모습이다. 사실 데리다는 종교를 비판하려는 입장에서 이런 얘기들을 했는데 오히려 역으로 그들을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인간은 흔적, 또는 차이를 만들어내는 그 밑에 있는 그것을 신비로 알아차린다.

 

차연의 의미와 상징

 

차이를 만드는 근간이 되는 배후의 무엇이며 보이지는 않지만 작용하고 있는 이것을 ‘차연’이라고 한다. 들리지도 않고 시각적으로 파악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데리다는 음성과 문자를 통해 그 상황을 앞서와 같이 보여주고 있다.

‘차연’에 운동이 있는데 그것이 ‘자취’(‘흔적’ 혹은 일종의 ‘발자국’과 같은 이미지)를 만든다. 그러나 자취가 ‘차연’은 아니다. 이것을 종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아우라aura’라고 할 수 있겠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연’이 있고 그 차연이 만들어낸 차이를 토대로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동일성과 비동일성’, ‘동일성과 차이’ 이런 개념들에 차이들이 작동하고 있고 이 차이에 대해 그 배후에서 차연이 작동하고 있다. 보통의 우리들은 차이까지는 알 수 있지만 ‘차연’은 잡아내지 못한다. 그리고 마치 있지도 않은 것처럼 처리해 버린다. ‘차연’이라는 지점은 이성적이거나 감각적인 질서와 체계로 파악이 되지 않는 어떤 지점이다.

데리다는 기존에 만들어 놓은 체계가 앞서의 얘기들을 무시하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런 체계와 개념들의 분류는 정확한 나눔이 아니라 일시적인 경계일 뿐이라고 한다. 데리다가 이런 설명을 한 이유는 diff?rance ‘a’를 통해서 ‘trace’([t?as]프랑스어:발자국, 자취, 흔적) 와 같은 세계를 설명하려고 하는 의도였으며 이렇게 ‘차연의 유희’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예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말하려했기 때문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헤겔(Hegel, 1770~1831)도 그랬다.

이정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예를 든다. “헤겔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쇠로 만든 망치가 있다고 치자. 그리고 이 망치에 ‘물건A’라는 또 다른 이름을 부여하자. 이 ‘물건A’-망치는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객관적 질료인 쇠를 재료로 만든 물건이다. 단, 만약에 이 물건의 용도와 이름을 정확히 모른다면 우리는 일단 쇠붙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물건A’-망치는 개별적으로 경험 가능한 대상이다. 이것이 못을 박는 도구인 망치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 물건에 쇠붙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쇠붙이라는 이름은 여기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순전한 쇳덩어리 ‘물건B’에도 적용되는 보편적인 이름이 된다. 그랬을 때 내가 개별적으로 경험한 망치로서의 ‘물건A’와 순전한 쇳덩어리 ‘물건B’ 사이에는 쇠붙이라는 이름의 불일치가 일어나게 된다.(‘물건B’가 쇠붙이라는 개념에 더 가깝게 일치하는 이름이다)”

“그런데 인간은 감각적으로 경험한 어떤 것을 개념으로 규정하려는 버릇이 있다. 앞에서 예를 든 바에 따르면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것과 개념적인 것 사이에는 불일치가 일어난다. 그래서 인간은 불일치를 극복하고 양자를 연결하여 설명하기 위해 이 사이에 이런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중간개념으로써 쇠붙이 이미지를 부착시키는 기호를 붙여준다. 그리고 기호가 정착되면 이름을 붙인다. 이 때 중간의 매개 고리로서 기호가 만들어지는데 데리다는 그것을 알파벳 소문자 ‘a’라고 했다. 기호는 감성과도 연결되고 보편적 개념과도 연결된다. 그리고 둘 다도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기호가 보편적 개념으로 완전히 전화되는 순간이 오면 기호는 쓸모가 없어지게 된다. 이 쓸모없는 기호를 헤겔은 죽어있는 무덤 피라미드와 같다고 했고 알파벳 대문자 ‘A’라고 표현했다. ‘A’가 보편적으로 잡히지 않는 어떤 상징적인 장치라는 것이다.”

알고 보면 헤겔조차도 우리가 지금까지 말한, 보편개념으로 잡히지 않는 어떤 지점을 언급한 것이다. 로고스적 체계가 강한 헤겔은 ‘A’라고 표현했고 이런 사실을 토대로 데리다는 ‘a’라고 표현했다. 차연으로서 ‘a’가 음성중심적인 질서에서 사라지고 없어지며 은폐되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곧 ‘A’는 차연 ‘a’의 무덤이자 거대한 묘비이다. – ‘A’의 삼각 형태는 피라미드(무덤)의 형태와 닮았다. – 죽어있는 무덤이기에 누가 죽어있는지, 더 나아가 죽어있는지조차 모르는 그런 상황이 된다. 데리다는 헤겔이 이것을 ‘A’라는 기호로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데리다는 자신이 말하려는 이런 상황과 경제학의 차원이 비슷하다고 했다. 문자 ‘a’의 죽음이 경제학의 차원과 설명하는 것이 닮았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철학자들의 개념 중심적, 로고스 중심적, 의미 중심적 차원을 ‘제한 경제학’이라고 불렀다. 데리다는 전통 철학자들의 제한 경제학적인 구조를 비판하면서 데리다 자신의 대안으로써 철학을 경제학에 비견하면 실은 ‘일반 경제학’적인 질서와 같다고 한다. 특히 헤겔에게는 제한 경제학만 있기 때문에 일반 경제학으로 전환하여야만 이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여기에서 일반적 글쓰기가 등장한다. 이것이 새로운 문자학의 이름이다. 물론 데리다의 이런 설명은 무덤의 어원 ‘oik?sis’와 경제(economy)의 어원인 ‘oikos’가 서로 동족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에서 출발했다.

 

차연이라는 용어의 문제

 

차이라는 것은 로고스적인 질서 속에서 나온 용어이다. 그래서 차이를 만들어내는 차이라는 방식으로 ‘차연’을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더 세밀하게 보면 데리다는 자기가 말하는 ‘trace’를 설명하기 위해 ‘차연’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존재자 배후에 있는 존재의 모습인 ‘차연’을 사람들은 계속 놓치고 있다는 것.

그런데 데리다 자신도 기존의 철학적 질서에 속에 있는 인간이기에 ‘차연’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다보니 이것이 일정한 개념으로 고착됨을 느꼈다. 자신의 방식이 기존의 체계에서 설명하는 방식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차연’이라는 용어를 고정시키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데리다는 ‘차연’을 ‘유보’, ‘원문자’, ‘원흔적(공간화&시간유보)’, ‘공간화’, ‘대치’, ‘약’, ‘처녀막’, ‘변두리-흔적-움직임’ 등으로 대체한다.
– 예를 들어 ‘약’이라는 것의 의미는 이렇다. 우리가 약이라고 쓰는 것들 중에는 본래는 독약이라고 불리던 것들도 있고 독약이 아닌 순한 약성을 가진 것이 있을 수도 있다. 현대에도 보면 전문의약품의 경우 투약 대상이 아주 건강하거나 의약품의 효능에 맞는 증상이 아닐 때, 그 상황에서는 100% 약이라고 할 수 없다. 약이라는 용어의 의미 설정은 굉장히 주관적이고 자의적이다. 그래서 이런 용어가 사용되는 영역은 존재자의 질서이지 존재의 질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데리다는 용어를 이렇게 자주 바꾼다. –

 

철학은 상징과 은유에서 출발

 
기존의 로고스적인 질서를 통해 만든 개념들은 지극히 자의적이다. 소쉬르(Saussure, 1857~1913)는 언어를 문자로 만든 그 사이에 연결고리가 없어 문자는 지극히 자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언어를 만들기 위한 기표도 자의적이다. 이를 토대로 우리도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들이 자의적임을 주지할 수 있다.

이정은 교수는 “여자화장실 표시를 볼 때, 그 기표가 여자화장실을 상징함을 알지만 사실 둘 사이에 본질적인 관계는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과 영혼의 울림 작동도 그렇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표현하는 문자체계인 한글과 영어도 자의적이 된다. 음성과 문자 간에는 자의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자의적인 것을 규정해놓고 절대적이라고 인정하는 태도 자체가 존재의 본래 모습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근간이 되고, 이른바 우리가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성의 결과물인 언어, 개념, 철학 체계가 모두 자의적인 체계라는 것을 또한 알 수 있다”고 한다.

데리다에 의하면 철학은 자체가 은유이다. 은유에서 철학이 탄생했고 개념도 은유에서 탄생한다. 그리고 철학언어 모두가 수사이다. 다만, 감각적 모습을 가지고 비유적인 모습을 설명했는데 이후 감각적인 개념이 탈각되면서 기존의 것은 마치 비감각적인 개념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 착각조차도 지워졌다. 그래서 철학은 이성적?논리적 개념이라고 인식하지만 알고 보면 철학체계는 모두 은유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적인 아픔을 표현할 때 어떤 것에 비유한다. 마찬가지로 철학의 경우 이데아에 대한 설명도 비유에서 시작했다. ‘동굴의 비유’가 그렇지 않은가. 플라톤의 이데아는 무엇인가? 이정은 교수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플라톤의 이데아를 설명할 때 논리적인 설명으로 이해를 못하면 곧잘 태양에 비유해서 설명한다고 한다. “이 세상은 태양이 있어야 빛과 어둠을 구별한다. 모든 존재자의 구별 근거가 태양이고 모든 생명체의 에너지활동의 근원이 태양이다. 마찬가지로 선의 이데아는 태양과 같아서 모든 이데아의 근원이 된다.” 이렇게 설명하면 이해가 쉽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선의 이데아를 이해하게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을 잊는다. 잘 살펴보면 학생들은 개념적인 파악 이전에 비유를 통해 대상을 이해했다. 그런데 시험시간이 되면 감각적인 설명이 아닌 논리적인 설명으로 기억하고 답안지를 써내려간다. 그리고 감각적인 설명이 있었는지 조차 잊어버리고 철학은 이성적인 논리체계라고 기억한다.

 

로고스적 질서에 기생하기

 

옛날에 양피지에 쓴 글은 시간이 지나 오래되면 글이 흐릿해지면서 지워지게 된다. 그리고 후대 사람들은 그 위에 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전에 쓴 글의 흔적이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희미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다. 현대미술에서는 시약을 써서 이 사실을 밝혀낸다. 마찬가지로 감각적 체계로 글자 모양이 만들어진 이후에 개념적 체계로 이전의 글 위에 문자를 덧썼다면 개념적 체계 배후에 감각적 체계가 있고 다만 그 감각적 체계는 지워진 것처럼 흔적이 흐릿하게 남을 뿐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의 영역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 데리다는 철학자들이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말하는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간극이 보인다고 했다. 헤겔이 보편개념으로 잡히지 않는 어떤 지점의 상징인 기호 ‘A’를 얘기 했듯이 텍스트 사이에 들어가면 그 간극이 보인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형이상학적 체계 안으로 들어가 형이상학적 체계를 상징하는 거인 위에 ‘등 타기’ 하여 앉아서 얘기하거나 ‘기생’하여 철학하는 방법을 말한다. – 데리다는 자신을 기생충이라고 비유한다. – 대신 형이상학적 체계를 깨버리거나 죽여 버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기생충은 숙주가 죽으면 자신도 죽기 때문이다. 데리다에게 ‘차연’은 ‘기존 형이상학적 질서’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차연’을 얘기하면서 ‘차연’을 설명하는 방법으로 ‘차연’을 은폐한 로고스적 질서를 죽이지는 않는다. 또 ‘차연’은 ‘차연’만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다. 기존의 텍스트 속에 들어가 줄타기 하면서 얘기해야 한다. 데리다는 로고스 중심주의를 비판하지만 로고스적 질서 안에서 기생하는 기생충으로서 숙주인 로고스적 질서에 일치되지 않고(될 수도 없고) 다만 기생충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알리는 것이다.

데리다는 해체주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차연’이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이런 과정을 보여주는 상황이 ‘차연’의 상황이 된다. 만약 데리다의 철학을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 Ponty, 1908~1961)의 몸철학과 비교한다면, 몸철학에서는 주체와 객체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육체가 정신을 컨트롤하기도 하는데, 간혹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구분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기 애매한 것이 바로 몸이다. 데리다의 해체는 그 구분하기 힘든 상태를 맞닥뜨린 상황에서 몸을 통해 구분하는 절대적인 상태를 깨부수는 것이다. 이성적이거나 비이성적인 상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종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으로 작용한다. 쉽게 말하면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차원은 차이의 차원에 머물지만 데리다의 ‘차연’은 그것보다 하나 더 나아가는 개념이라고 설명 가능하다. 메를로-퐁티와 데리다는 서로 연결되는 부분이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데리다가 더 멀리까지 간다.

가을 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⑨

가을 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⑨

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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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하러 오가는 길

H인력으로 가는 새벽길은 이 도시의 번화가를 거쳐 간다. 우선 밤을 새워 일하는 커피 전문점 종업원들을 본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젊은이들이 모이는 나이트클럽이 있다. 토, 일요일은 새벽까지 클럽 앞에서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한 눈에 보아도 알 수 있는, 남녀들이 만들어내는 각양의 그림들을 목격한다. 큰 길을 건너면 뒷길 형을 한 번화가이다. 여기에서도 술 취한 젊은이들의 각양의 행태를 본다. 편의점 데크마다 남녀들이 엉켜 쓰러져 잠들어있다. 시청의 젊은 청소원의 작업과 폐지 줍는 정신지체 부부의 작업이 겹치기도 한다.

퇴근길에도 이들 부부를 만난다. 각양의 폐지더미와 함께 길목 한켠에 앉아, 스피커와 같은 고물들에서 쇠붙이와 나무를 분리하는 작업도 한다.

나는 이들의 작업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싶은 충동을 참는다. 차마 핸ㅡ폰을 들이댈 수 없다.

십 수 년 전, 광부를 그리는 떠돌이 화가, 나중에는 천주교 공소의 주임이 되어 그림을 그리던 화가의 말을 들은 적 있다.

“갱도를 올라온 광부들이 한숨을 푹 쉰다. 차마 그 앞에 카메라를 들이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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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데마찌-J의 절망

평택 항 현장은 며칠째 최소 인원만 일하러 간다. 어느덧 구조물 마무리 공사 시기라서 H인력 일감이 뚝 떨어졌다. 비도 자주 오가는 통에 더욱 일 할 날들이 드물어졌다. 반장들은 평소 일하던 이들 중 성실한 사람 몇 명만 데리고 갔다. 나는 나대로, J는 J대로 일을 한 참 안했다. 전화로 ‘오늘은 일 나가자’고 합의했으나, 우리는 오늘도 일거리를 찾지 못했다.

평택 항에 일 나가던 이들 중 간택되지 못한 윤씨, 정씨, J와 나는 둘러서서 잡담을 나누었다. 정씨와 J는 경마장에서 만나 밥도 먹고 마권을 사기도 했단다. 그 둘은 지금 수중에 한 푼도 없다. 기적 같은 이는 윤 씨이다. 그는 여름에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현장에서 보는 윤 씨는 시체와도 같았다. 햇빛에 그을은 얼굴은 핏기 하나 없고 눈은 초점 없는 생선의 그것 같았다. 금방 쓰러질 것 같이 보였다. 왜 그리 열심히 일하느냐고 묻자 “손자 키우려고”, 또는 “무조건 일 나오는 거야”라고 했다.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 관절은 어떠냐고 물으면, “아픈 데는 없어, 아직까지는”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체력을 타고 태어났다. 오래 된 3층짜리 작은 상가가 그의 소유이다-노동하여 건물주가 되다니, 대단하다.

뒤늦게 윤 씨만 팔려나가고, 나머지는 돌아가야 한다. J가 “소주 한 잔 사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한 참을 걸어 은행 근처 편의점 파라솔에 자리 잡았다. 나는 컵 라면을, J는 ‘휴식시간’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셨다. J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번에는 들어주기 곤란할 정도의 이야기를 했다.

?이재원

“형님이 양주 사주던 날까지 경마에서 꼴아 박은 돈 생각하면 참 후회막급이네. 방세라도 줄 걸…”

보름 전 일이다. 그는 모아둔 돈을 가지고 경마장에 갔다. 돈이 바닥났다. ‘성질났다’. 집에까지 걸어와서는 신용카드 빛을 내어 다시 경마장으로 갔다. 그리고는 다 쏟아 부었다. 그날 저녁, J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 술을 사주며 나는, “인간이 귀신을 어찌 이기겠나. 할 수 없지”라고 했다. 내가 귀신을 믿어서가 아니다. <정념>인 즉 ‘한 대상에 대한 정신활동의 집중화’, 고착화(Katexis)라는 것이 신적인 힘들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뜻이었다.

그토록 허망하게 돈을 낭비한 후에 일하기 싫은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경마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이다. 그의 비극적인 가정사가 있고, 학력과 관계없는 무학에 가까운 난독증도 있다. 즉, 그는 지식과 경제, 양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인 셈이다. 그에게 듣는 가장 행복한 날들은 할머니가 생선을 구워, 그것을 뜯어 그의 밥 수저 위에 올려주던 어린 시절이었다.

최소한의 윤리도 걷어치우고 도박을 조장하는 경제정책의 뒤켠에 사람들의 희망 없음이 있다. 정선 카지노 동네 호텔에 묵는 사람들은 한밤중에 천정에서 커다란 손이 나와 휘젓는 통에 기절초풍한다는 이야기부터 중고 좋은 차를 샀는데 사고 났다는 <카더라>까지, 도박의 결과 목숨까지 버리는 사람들에 대한 보도가 흔하지 않은가. 십 수 년 전 사설 경마장 설립에 50억 들어야 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는 도박 자체가 (범상하지 않은) 자본의 산물이라는 증거요, 또 몇 천 만원 배팅한다는 강남 애마부인 이야기들과는 다른, 사행성 폭력 자본에 절망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위협을 무릅쓰고 돈 안되는 투자를 하는 자본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J는 오늘 방세를 내야 한다. 그러나 돈이 없다. 그가 말했다.

“아무래도, 일해서 (품삯을 받으면) 찜질방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아. 지난번 방세 밀렸을 때 주인이 심하게 뭐라 하더라구.”

당연히 방 얻어 사는 것이 찜질방에 있는 것보다 좋다. 우선 마음대로 식사를 해 먹을 수 있다. 잠도 편히 잘 수 있다. 그는 겨울을 대비해 난방용 유류도 한 드럼 사 놓았다. 찜질방에 들어간다면 겨울나기를 준비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도 유류나 식량을 산다는 등의 계획을 세워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나는 간신히 한마디 했다.

“H인력에 나오는 그 잡부, 찜질방에서 90일 살았대. 내가 90일 동안 며칠 일했느냐 물었더니 15일 일을 했대. 찜질방에서 잠을 잘 못자기 때문에, 일하기 힘들어. 일하면 방세부터 줘. 일부분이라도…”

J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얼마나 더 고생을 해야 하나? 이렇게 살다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냥 살아야지 뭐, 혹시라도 반장이 된다면 형편이 나아지겠지. 반장이 되면 여자도 생기겠지, 생활이 안정될 테니까.”

K팀장은 자기 쓰고 저축하는 돈을 제외하고, 한 달에 5백 만원을 부인에게 준다. 하루도 일을 빠지지 않는, 18년간 군 생활을 한 김 노인은 한 달에 연금 3백만 원 받는다. 당연히 그는 개인주택을 지닌 부자이다.

J가 팀장이 될 수 있을른지는 의문스럽다. 술과 경마가 그를 방해하며, 난독증이 건축도면 읽는 것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일용 노동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계획을 세워 사는 일이 어렵다. 나 역시 어떤 사람의 삶을 서사화하려는 작업을 시작했으나, 들쑥날쑥한 경제 형편으로 작업을 완성하지 못한 채로 있다. 자료들 프린트 자체가 않좋기도 하지만, 독서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소주 한 병을 다 마신 J가 말했다.

“소주 한 병 더 사주고 형님은 가세요. 나는 더 앉아 있다가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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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따

평택 항 현장은 3층 사무동과 2층 지휘 동을 짓고 있다. 공사는 더디다. 날씨는 35도를 향한다. 망치질 몇 번 하면 숨이 헐떡거린다.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어느 순간 쓰러질지 모른다. 쓰러지면 심장이 멈추고 뇌사한다.

?이재원

천정을 슬래브로 가리지 않는 오픈구를 되나우시, 부적합 시공 고치는 작업했다. 유독 내가 이 일을 주도하는 L에게 간택되었다. 힘도 좋고 일도 잘 하는 L은 <그 사람이 현장 일 다 한다>는 칭찬을 듣는다. L이 BT 아시바 위에서, 나는 밑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올려주었다.

우선 기존 하리(보) 폼을 뜯어내어 아래로 내렸다. 그 다음 새롭게 치수를 맞추기 위해 작은 폼들을 올려 주면 L이 가와바리, 속고 위에 품을 붙였다. 그리고는 시다 오비끼(직사각형의 9센티미터 목재)를 하리통 위에 각목으로 임시로 이어붙인 다음, 시다 오비끼 아래에 삿보도를 세워 받쳤다. 다시 삿보도 위에 네다로 각재와 철봉을 깐 다음, 그 위에 합판을 깔아 슬래브 판을 완성하였다.

성격이 급한 것인지, 일을 빨리 하려는 욕심 때문인지, 내가 조금만 더디면 L은, “형님 이거이거…”라고 소리쳤다. 일반인들은 거리를 걷기에도 힘든 날씨이다. 한 숨 돌리면서 일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작업 중간에 땜빵작업을 한다. 하리통 빈 곳을 각재와 합판을 이용하여 이어 짜기 해야 한다. 나는 정신이 나가, 땜빵으로 짠 패널을 하리 통에 이어붙이며, 연결 불가능한 빈 곳에 헛못질까지 했다.

사람들은 모두 짜증스러워 했다. 인간이 천사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어떤 일이든 곤란하거나 잘 안 되는 일은 다른 사람의 핑계를 댄다. 재미있게 일해야만 일이 쉽고 능률이 오른다는 것을 알고 있으나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감정을 주체 못한다. 날씨 탓이 크다. 함께 일하면서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방에게 화를 낸다. 손 맞춰 일하는 이들의 감정 까지도 받아야주어야 하는 상황도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현장에서 따를 당했다.

IMF 당시 어느 은행 지점장이 강제 해직 당했다. 가족들이 그를 노숙자들 속에서 찾아냈다. 그는 집 주소는 물론 자기 이름도 잊고 있었다. 모든 것이 노동과 연관된 우리의 삶에서 직업인 즉 자기의 아이덴티티이다. 해직당한 이는 종교적 파문과 같은 정신상태가 되는 것이었고, 자기 자신인 즉 이름을 잊어야만 살 수 있었던 셈이다.

따돌림을 당한다는 것은 이와 비슷하다. 따 인 즉 노동세계에서 밀려날 위기를 겪는 순간이요, 당하는 이는 현장에 계속 일하러 나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따는 예전에는 어느 현장에나 있었던 일이다. 그래서 목수들은 외톨이로 현장에 나가지 않았다.

J와 손 맞춰 일 할 때는 별 일 없었다. 내가 부족한 부분을 J가 잽싸게 말로, 또는 행동으로 보완해 주었다. 그러나 J가 일 안하는 동안, 갈수록 나와 다른 목수들의 실력 차이가 났다. 목수 현장을 몇 십 년 떠났던 내가 평생 목수만 해 온 사람들과 문제해결 능력이 같다면 그들 목수들을 무시하는 것이리라.

돼지띠 노인은 내게, ‘이 씨는 반생이 틀게 하지 마’라고 말했다. 또, ‘이 씨는 도리반생이 못 박지 마’라고 하기도 했다. 또 다른 사람은 나와 함께 일하다가, ‘당신 목수 얼마나 했어? 모르는 게 너무 많아’ 라고 말하기도 했다. 매일 하는 일들을 하지 말라니, 이는 왕따인 셈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도리반생이 못 박는 것, 반생이 트는 것을 재산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재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나에게 이런 저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은 왕따 시키는 것이다. 정히 내가 작업하는 것이 불안하다면 정확히 알려주고 확인하면 될 일 아닌가?”라고 받아쳤다.

따를 시키는 사람, 갑은 따를 당하는 사람, 을에게 항상 은근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다. 갑질 함으로써 현장에서 자신은 스스로 안심하는 심리가 있다. 내가 당하기 이전의 따 대상은 외국인 K였다.

별 생각이 다 났다. 나는 왜 이토록 힘들게 노동하는가? 좋은 노동세상을 꿈꾸기 위해서인가? 다시 학자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그러나 내가 다시 몇 년간 책 읽을 형편이 되는가?

견뎌야 했다. 따를 무시하고 내 할 일을 묵묵히 했다. 내가 일 안 나올 수도 없었다. 공기는 한정되어 있으나 날이 너무 더워서 사람들이 일을 하러 오지 않았다. 현장은 항상 사람들이 부족했다.

?

4. 희망의 사제들

가을이 다가오자 현장에는 활기가 넘쳤다. 여름에 한 달 걸릴 일을 온도가 낮아지자 15일 정도면 해치웠다. 현장들마다 마무리 공사로 들어갔다. 덩달아,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일거리가 줄어들었다. 정씨나 J, 그리고 나 같이 자주 일나오지 않던 이들이 가장 어려운 시기이다.

?이재원

그 와중에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일 할 생각 않나고 술 마시게 되는 사회적 사건들이 터졌다.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증거들은 왕따를 당하거나 고독보다 더 절망스러웠다. 4대강 비리를 볼 때와는 또 다른 절망감이었다. 소련 KGB와 자신들의 업무를 비교하는 국정원 직원의 대답(뉴스타파)을 들으며, 민주주의는 불가능할 것 같은 절망을 느끼기도 하였다. KGB가 고르바쵸프 당시 국가안전위원회를 꾸려 사실상의 쿠테타를 일으켰듯이, 관료들이 안전이라는 신념을 조직의 이득인 즉 사적 욕망 충족 수단으로 이용한다면 내란 구성과 똑같이 위험하다. 안전을 개인 욕망으로 만드는 순간 제지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민족과 국가를 제1원리로 하는 파시즘의 안쪽에는 정치 경제 파시스트들의 자기보호 계기가 작동한다.

사람들에게 술도 사주고 통닭도 사주며 대화했다. 그러나 정치관련 대화는 안 하늬만도 못했다. 권력 언론들이 파쇼 자본주의를 고착화하기 위하여, ‘기차 바퀴는 박달나무로 만든다’고 떠들어 대면, 진상을 알아볼 생각도 안하거나 그저 맹목적으로 현 체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라 수용하고 재확대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희망>이 가장 위대한 것이라 했다. 간신히 해석하자면 ‘하느님의 나라는 정의로울 것이다’라는 희망만이 ‘하느님은 전능하다’라는 믿음보다 위대하다고 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나이가 젊다고 청년이 아니요 백발이라서 노인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만이 청년’이라고 했다.

경제도 민주화되는 세계에서만 사람들은 계획을 세워 삶을 살 정도가 될 것이다. 지금처럼 건설 방식이 도급과 하도급 형식이라면 업자들은 배부를 것이지만 일반 노동자의 풍요는 기대할 수 없다. 임금이 생존비에도 못 미친다는 증거가 배우자 없는 노동자들이다. 임금이 생존비 이상 올라간다면 노동자도 자식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경제정책과 임금 정책에서 노동자의 삶의 향상을 기대할 수 없다. <자본>에 따라서, 노동자의 노동력에 임금을 준다면, 실제 생산한 노동의 그 가치에 따라서 임금을 받을 수 있다면 틀림없이 노동자가 살 만 한 세상이 될 것이다. 이런 정책은 오직 <정의로운 자본주의>에서만 가능하다. 구성원의 진정한 행복을 기획하는 사회가 욕망에 기초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⑦ 쥐구멍에 강제로 볕들게 하기

쥐구멍에 강제로 볕들게 하기

 

김성우(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맑스의 저작 중에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은 대단히 희귀하지만 주옥같은 정치 분석에 해당한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60여 년간의 혼돈의 과정에서 겨우 획득한 의회공화정이 결국 4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독재체제로 붕괴되었다. 그것도 그토록 평범한 한 인물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양상을 분석하면서 맑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한다. “헤겔이 어딘가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세계사의 모든 거대한 사건과 인물은 말자하면 두 번 일어난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 즉,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인민혁명당 사건은 1974년 4월 군사독재에 맞서 대학생들이 궐기하자 당시 중앙정보부가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23명을 구속기소했으며 법원은 이 중 8명에게는 사형, 15명에게는 무기징역 및 징역 15년의 중형을 선고한 사건이다. 사형이 선고된 8명은 대법원 상고가 기각된 지 20여 시간 만에 형이 집행됐다. ……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자체 조사결과,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 당시 반국가 단체라고 발표된 인혁당은 서클 수준의 단체였으며 수사과정에서 각종 고문이 자행됐다는 점이 인정됐다. 그리고 2차 인혁당 사건의 중심이었던 ‘인혁당 재건위’는 실재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박문각) 결국 이 사건에 관해서 2007년 서울중앙지법의 재심 판결은 1975년의 판결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여러 번의 정권 교체를 이뤄낸 개명된 대한민국의 2013년 무더운 한여름에 인혁당 사건이라는 비극이, 맑스의 경구처럼 다시 희극으로 일어난다. 유신독재시대의 중앙정보부가 다시 국가정보원으로, 인혁당이 다시 이석기를 필두로 한 지하혁명조직(일명 RO)으로 바뀌어 등장한다. 이 사건이 희극적인 이유는 관련 당사자가 모두 현실을 거부한다는 데 있다. 극소수가 비현실적이고 시대착오적인 환상을 논의하는 장면이 있다. 그들 스스로도 이를 농담이라고 변명한다. “국가안보 수호”에 전념하는 한 국가기관의 원칙은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이다. 그래서 그 기관은 은밀하게 불법적인 정보조작으로 대선에 개입한다. 결국 그 국가기관은 자신의 불법 행위를 규탄하는 국민들의 잇따른 촛불 시위와 정치권에서의 조직개혁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수세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은 그 기관이 억압과 거짓을 향한 무명의 헌신에 전념한 까닭이다. 반전을 꿈꾸며 그 기관은 무명의 헌신이라는 원칙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번에는 유명(有名)의 헌신에 착수한다.

그 기관은 극소수의 비현실적인 환상이 내란음모죄에 해당한다며 수사를 선언한다. 그것도 공익을 빌미로 불법으로 녹취한 자료를 가지고서 말이다. 내란이란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키는 행위를 말하며 음모란 이를 위해 모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극소수의 비현실적인 환상의 담론이 이러한 폭동을 모의하는 구체적인 행동일 수 있을까? 혹시 이러한 비상식적인 관점은 “국가안보 수호”를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여 자신의 불법 행위를 망각하게 하고픈 그 국가기관의 오래된 망상은 아닐까? 이와 같이 이번 수사에 대해 국민적인 의혹이 가시지 않는 이유는 그 기관이 자신의 원칙인 무명의 헌신을 저버리고 국가의 정치판을 모조리 뒤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그 기관에 햇볕이 잘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국민에게는 커다란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이런 까닭에 국민은 역사적으로 반복된 이토록 웃기는 사건을 접하면서도 웃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함과 됨’의 차이[철학을다시 쓴다]-⑨

‘함과 됨’의 차이[철학을다시 쓴다]-⑨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함과 됨’: 운동의 난제
 

여러분들, 서양의 ‘히스토리’(history)라는 말의 어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물리학사, 철학사, 생물학사 같은 ‘역사’를 이야기하고, 서양에서는 그것을 ‘히스토리’라고 합니다. 이 말은 그리스어 ‘히스토르’(histor)라는 말에서 나온 건데 히스토르라는 말은 증인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실증적인 증언의 뒷받침이 없으면 신화나 상상, 환상이라고 하지 역사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역사는 실증과학이라고 하는 말, 이 말을 널리 퍼뜨린 사람이 누구입니까? 실증과학의 아버지는 누굽니까? 불란서 사람인 오귀스트 콩트(August Conte)입니다. 그 사람은 물리학, 화학뿐만이 아니라 사회학, 철학까지도 실증과학으로 만들려고 애썼던 사람입니다. 근대과학의 밑바닥에는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과학이 깔려 있습니다. 물리현상이나 생물현상이나 화학현상이나 인간현상이나 전부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 보고, 누구나 납득할 수 있도록 그 법칙을 설명하지 않으면 전부 헛소리로 치부하는 거지요.

“화학에서는 가장 큰 난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불.”

“그렇죠!”

불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리는 간단하게 급격한 산화현상이라고 배웠지만, 산화현상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은 지극히 후대의 일이고, 불이란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 화학에서 가장 큰 난제였습니다.

생물학에서 가장 큰 난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자연 발생설에 대한 논박이었습니다. 파스퇴르가 나타나서 비로소 아주 조그만 생명체도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에서만 생명체가 나온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 전에는 그냥 세균이라는 것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오귀스트 콩트(1798~1857) / 출처: blog.joins.com


 
물리학에서 가장 큰 난제이고 현재까지도 큰 난제인 것은 무엇입니까? 운동의 문제입니다. ‘한다’, ‘된다’, 이런 것이 전부 운동하고 연관된 문제입니다. 크게 봐서 운동에는 몇 가지 운동이 있습니까? 질적인 운동과 공간운동, 두 개로 크게 나눌 수 있죠? 질적인 변화와 공간에서 위치 변화, 물리학자들은 질적인 운동을 어떻게 봐요? 양적인 운동으로 환원하죠? 어찌 보면 물리학자들이 극단의 환원주의자들이라고 볼 수 있는데, 고대원자론자들이 그랬듯이 단순한 요소를 가지고 전체 우주 삼라만상을 모두 설명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그런데 질적인 운동을 양적인 운동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가? 이 운동 문제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지금 현대 물리학자들이 빠진 궁지가 있습니다.(홉킨스도 마찬가지고 아인슈타인도 마찬가지고, 저는 다 그 수렁에 빠져 있다고 봅니다.) 원자론자들은 개방된 우주를 상상했습니다. 원자들도 무한하고 우주 공간이 외연적으로도 무한하다고 해서 개방된 우주를 생각했는데 현대 물리학자들은 폐쇄된 우주를 그립니다. 아인슈타인의 통일장 이론이 일차적으로 밑바닥에 깔고 있는 것은 하나의 폐쇄된 우주입니다. 질서 있는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니까 폐쇄된 공간이 필요한 겁니다.

“열역학 제1의 법칙이 뭡니까?”

“에너지 보존의 법칙.”

“네, 에너지 보존의 법칙입니다. 이게 철학적으로는 어떤 뜻을 지니고 있습니까?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없는 것에서 무언가 새로 생겨나지도 않고, 있는 것이 없어지지도 않는다.’ 그거죠? 안 그렇습니까? 어떤 면에서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철학적인 문제를 물리학적인 동어반복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 다음 열역학 제2의 법칙은 뭡니까? 엔트로피가 증가한다는 건 무엇입니까? 무규정성이 늘어난다는 말이죠. 무질서해진다는 것은 무규정성이 늘어난다는 거고, 그리스 사람들 이야기를 따르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 늘어난다’, ‘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것이 늘어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 늘어난다’, 라는 거고, 그걸 물리학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말하면 어떤 말이 되겠습니까?”

“…….”

“이놈 저놈이 질적으로 구별 안 된다는 말입니다. 결국은 등질화된다는 말입니다. 고전물리학의 완성자로 알려진 뉴턴은 운동을 두 개로 나누는데 수평운동과 수직운동이 합쳐져서 무한히 튕겨나가지도 못하고, 무한히 오므라들지도 못하고, 우주에 떠 있는 것들을 둥글둥글 돌게 만든다, 이 두 개가 합쳐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서 우주선도 돌고, 지구도 돌고, 달도 돌고, 해도 돌고, 천체도 운행된다고 이야기하죠. 참 아름다운 이론입니다.”

그런데 중력 중의 중력은 뭐라 그러죠? ‘블랙홀.’ 지금 우주 산지사방에 블랙홀이 있는데, 그 블랙홀을 전부 끌어 모으는 최종 블랙홀이 나올 겁니다. 그게 중력중의 중력이거든요. 중력중의 중력에 중심이 있어서, 흩어지려는 모든 무게 있는 것들을, 성운이라든지 개별적인 별들을 끌어 모아서 통일장을 이룬다는 것이 아이슈타인의 생각이고, 거기에서부터 현대 물리학자들이 한 치도 벗어나려고 들지 않고,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론은 파괴 정도에 있어서 고대 원자론자인 데모크리토스 학파의 이론을 못 따라갑니다. ‘빅뱅’(Big Bang)이든지 ‘블랙홀’(Black Hole)이든 옛날부터 원자론자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것들을 이론적인 정교함, 섬세함을 더하고 수학을 덧붙여서 새로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실제로 알고 있는 정치경제학 이론이라든지 현대 자연과학 이론, 이 모든 이론들이 물리학 이론을 중심으로 마치 성단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이야기하면 중심은 ‘환원’입니다. 소립자로 환원시키든,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환원시키든, 이 모두가 환원론들입니다. 여기저기서 환원론이 지배질서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물을 던져서 그 그물에 걸리는 고기만 잡아야 하니까, 그것이 이론적으로 아름답고 깨끗하니까, 이론을 그렇게 만들어 내는데, 도시사람들은 서로 무엇이 닮아 간다 했죠? 생각이 닮아간다, 시골사람들은 손이 닮아 가는데, 도시사람들은 생각이 닮아 간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생각을 통일시키려고 듭니까? 왜 모두 이렇게 단순한 걸로 환원시키려고 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