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얼굴과 환대의 윤리[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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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얼굴과 환대의 윤리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레비나스⑩

 

강사 :문성원(부산대 철학과 교수)
후기 :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지금, 철학의 이미지와 레비나스의 철학

 

“과학에 있어서의 철학은 섹스에 있어서의 포르노그래피와 같습니다. 더 싸고, 더 쉽고, 어떤 사람들은 더 좋아하기는 하죠.” 스티브 존스(제레미 스탱룸 편, 김미선 역, 『세계의 과학자 12인, 과학과 세상을 말하다』, 지호, 26~27쪽.)

“멀쩡한 사람도 누구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러나 이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대체로 정신병자밖에 없다. 누구나 이런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을 진심으로 중대하게 여기는 사람은 정신병자로, 그는 언제나 신념체계를 세우는 사람이다.” 대리언 리더(대리언 리더 저, 배성민 역, 『광기』, 까치, 97쪽.)

철학은 무엇일까? 과학에 있어서 철학은, 비유하자면 실제 섹스를 따라가지 못하는 포르노그래피와 같아서 비록 가짜이지만 그 힘든 과학적 발견에 앞서서 세계와 사회의 현상을 풀어주고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현대의 과학자들은 과학 이전에 철학이 과연 필요한지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철학자들이 평가절하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자기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고 완벽한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려는 자세가 정신병자와 같은 기준에 서 있다는 점이다. 현실과 부딪힌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철학을 도모하고 세계를 남김없이 설명하려는 철학자들의 일관성은 흡사 정신병자들이 가지는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철학은 이런 비판과 맞닿아 있다. 서양에서 근대까지 철학자들은 단순하고 일관적인 원리를 가지고 세계를 설명하려 하였다. 철학자들이 제시하던 세련된 근대적 세계관은 일방적이며 일관적으로 세계를 장악하려했던 시도들로 점철되었다. 서양인들이 이른바 제3세계를 식민지화하려했던 역사의 이면에는 서양인들의 전체성과 인간과 자연을 조작 가능한 것으로 봤던 이성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신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열 번째 시간에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의 철학을 통해 근대적 세계관과 그 이해의 연장선에서 발생하는 억압되는 타자, 그리고 타자를 장악하는 나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나와 타자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런 현상은 신자유주의의 심화와 함께 우리 사회에 일반화된 모습들이다. 얼마 전 『해체와 윤리 – 변화와 책임의 사회철학』(그린비, 2012.03)을 펴낸 부산대 철학과 문성원 교수는 이 책에서 추상적 원리만 남고 우리 삶의 구체적 현실은 논외가 되어버린 철학이 과연 정체된 현실과 퇴색된 가치를 뛰어넘어 우리 문화와 사회 전반에 변화를 제시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타진하면서 신자유주의 극복의 실마리를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번 레비나스 철학 강좌를 통해 레비나스의 ‘환대’라는 개념이 우리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면모를 명확히 하는 시간을 가졌다.

 

현상학적 전통과 레비나스의 ‘환대’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이 가지고 있는 전체성이라는 거대한 폭력적 성향과 인간의 이성이 인간과 자연의 모든 것을 관장하고 조작할 수 있다는 이성주의의 폐단을 지적한다. 이런 레비나스 시각의 배후에는 현상학적 전통이 자리 잡고 있다.

현상학이라는 철학 운동의 시발점에 서 있는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자연과학적 세계관의 무비판성을 문제시 하며 현상의 근원성과 본질을 탐구한 철학자이다. 특히 인간의 의식과 관련하여 무엇인가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지향적 의식의 구성 작용에 주목했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존재와 관련하여 존재자와 존재 차이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존재자에 매몰되어 있던 서양의 전통을 근원적으로 반성해보려는 시도를 한다. 문성원 교수에 의하면 레비나스에게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영향력이 가장 컸을 것이라고 한다.

레비나스 보다는 나이가 어리지만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레비나스는 후설과 하이데거를 비판하기도 하는데 데리다는 1964년 “폭력과 형이상학”(『글쓰기와 차이』)이라는 글을 통해 레비나스의 철학을 소개하면서 비판한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견지에서 역으로 레비나스의 후설, 하이데거 비판을 반(反)비판하는 작업이었다. 물론 데리다 역시 하이데거의 영향력이 굉장히 강했다.

잠시 데리다의 ‘해체주의(deconstruction)’를 살펴보면 하나의 문제점이 발견된다. 해체를 통해보면 어떤 철학도 내부 모순을 가지고 있어서 계속 분석하다보면 그 체계는 다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곧 어떤 하나의 개념체계를 가지고 세계를 일관되게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해체 뒤에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해체주의는 무엇을 얘기하려는 것인가? 이런 과제가 남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데리다는 ‘환대’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내세운다. ‘환대(hospitality)’, 즉 ‘기꺼이 받아들이다’


‘환대’라는 개념 뒤에는 근대적 이성주의, 이 세계를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근대적 사고방식에 대한 반성이 있다. 먼저 근대 계몽주의의 계보를 살펴보면 세상을 인간이 합리적으로,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는 노동 모델을 중심으로 근대를 이끌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문성원 교수는 농부 철학자로 유명한 변산공동체의 윤구병 선생이 주장하는 대로 인간의 역사에는 ‘기르는 문명’과 ‘만드는 문명’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기르는 문명’에서는 인간이 자연에 의존적이었고 자연은 숭상의 대상(신격화)이었다가, 인간이 머리가 깨고, 기술이 발전(산업혁명)하면서 인간이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의식이 지금까지 연장되고 있다. 이 근대에 들어서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시건방진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생각이 인간을 서로 싸우게 만들고 자연까지 망가뜨리는 주된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과 갈등을 내재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많은 철학자들이 사회주의 모델을 제시했는데 80년대 후반 소련을 위시로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그 기반이었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회의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이 시기 팽배해진 기존 철학의 불완전성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그 대안을 제시했던 철학자가 레비나스이다.

 

윤리를 제1철학으로,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라

 

레비나스는 철학에서 ‘제1의 과제’는 ‘존재’가 아니고 ‘윤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주장은 “죽이지 말라”이다. 1?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인간들은 죽음의 강을 건너왔다. 실제로 레비나스는 전쟁의 상흔을 가진 인물로써 리투아니아에서 유태인 부모 아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2차 세계대전 때 두 동생을 나치에 의해 잃은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우리(나)는 유한자이고 그러면서 스스로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여기지만 우리가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제한되어 있어서 우리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우리 바깥의 세계는 넓고 높고 심오하다. 그러기에 우리의 바깥을 마음대로 죽일 수 없다. ‘타자’는 바깥이고 우리 세계가 포섭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삶은 ‘타자’에 근거해 있는 것이지 ‘타자’가 우리 삶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어서 레비나스는 더 적극적으로 “타자가 우리에게 ‘호소(appeal)’한다면 여기에 ‘응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세계의 기준으로 보면 ‘타자’는 약하고 부족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우리(나)의 기준이다. 만약 ‘타자’가 약자의 얼굴로 호소해 온다면 우리는 거기에 응답해야할 ‘무한한 책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 때 주체는 지배하는 주체가 아니라 ‘응답하는 주체’이다. ‘호소’하는 자에게 ‘응답’하고 호소하는 자로서의 ‘타자’와 관계하는 주체이고 더 나아가 ‘타자’에 의해 형성된 주체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소리를 듣는다’고 할 때의 중립성을 내세우는 ‘존재’를 철학의 기본적 카테고리로 삼아서는 우리 삶을 제대로 읽어 나갈 수 없다. 자기중심적이고 계산적인 전체론적 사고방식은 서양의 근대적 발상에서 기원한 사회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입장에서 레비나스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방식과 통하는 면이 있다. 다른 점은 보다 적극적으로 ‘타자’의 우선성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동일자와 타자라는 개념

 

레비나스는 나와 타자를 ‘동일자(the same)’와 ‘타자(the other)’로 나누어 설명한다. ‘동일자’는 자기는 물론 자기 근처의 남들도 자기와 같아야 한다는 ‘동일성’을 지향한다. 이 ‘동일성’은 사실 여러 다채로운 군상들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에서 가장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기는 하다. 똑같은 것을 대한다는 것은 예전의 방식을 현재의 사고와 행위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규범까지 ‘동일화’ 시켜 그 안에서 살아간다. 자연과학적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간과 사회에 적용시킨다. 질서정연한 사회다. 세상의 법칙을 안다는 것은 세상을 구성하는 ‘동일성의 배열’을 잘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으로 대상을 분절시키고 배열해서 규정하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통하는가?

근대인들은 대체로 ‘동일성을 강요’하는 것 속에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속에서 그 규칙을 따르면 자유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틀에 맞지 않으면 제외시키고 소멸시킨다. 유럽이 문명과 비문명을 나누어 아프리카나 아시아를 대하던 식민지정책의 태도가 바로 동일자가 지향하는 동일화의 길이다. 서구의 근대적 사고에서 ‘인격적 개인’이라는 것은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서 ‘이성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는 개인이다. 이들이 합의를 도출하여 균형을 맞추면 서로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서양의 정치철학이다. 그러나 이 틀에 맞지 않는 존재는 다 내쳐진다. 이런 문제의 대상은 광기, 정신병자, 소수자 등이며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언급은 서구 문명에 대한 자기비판이었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을 찾다 보니 주요하게 부각되는 개념이 ‘타자’이다. ‘타자’는 ‘동일자’의 틀에 잘 안 들어오는,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대상이다. 이 ‘타자’는 서구의 근대적 입장에서 자유를 확보하는데 지장이 있는 타자로써 매우 불편한 존재이다. ‘타자’의 영역은 내가 지배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면 보인다. 그래서 ‘동일화’의 세계는 ‘유한의 세계’이다. 테두리를 벗어나면 ‘타자’의 영역이고 ‘무한으로서의 타자’의 세계이다. 무한은 끝이 없다. ‘타자’의 특성은 ‘무한’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의 특성

 

레비나스가 얘기하는 타자의 정의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 무한으로서의 타자 : 레비나스는 ‘타자’를 우리의 한계와 틀을 넘어서는 무한하고 ‘초월(transcendence)’적인 것이라고 했다. 레비나스는 처음에 이 ‘초월’이라는 말이 신을 떠올리게 하니까 ‘외월(外越, exscendence)’이라는 말로 바꿔 쓰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다시 ‘초월’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우리와 같은 선상에서 보면 안 되며 우리보다 높이 봐야한다고 했다.

? 비(非)지배(non-dominance) : 지배자는 동일적인 것이고 ‘타자’는 내가 잘 모르는 다른 면모, 새로운 것을 가지고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안정된 상황을 목적으로 하는 테두리 안으로 예상 못하게 다른 것이 넘어온다. 이 때 넘어오는 것을 레비나스에 의하면 막을 수 없다고 한다. 자본과 파워가 있어도 테두리는 언젠가는 무너진다. 유한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자’는 ‘호소’하고 ‘명령’한다고 한다. 이것은 결코 타자가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다. 타자의 호소와 명령은 안 들을 수는 있지만 도망갈 수 없는 것으로서 이것은 마치 ‘죽음에서 도망갈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타자’를 극복하려 하지만 ‘타자’는 이미 내 틀을 벗어나있기 때문에 실제로 ‘타자’를 극복하지 못한다. 문성원 교수는 마치 예수의 생애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어찌 보면 이런 이율배반적인 결합은 우리에게 이미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 종교라는 의미의 라틴어 ‘religio’(영어→‘religion’) : ‘religio’는 관계 맺는다는 뜻이다. 종교는 나와 같은 ‘동일자(the same)’끼리와의 관계가 아니고 ‘타자(the other)’와의 관계이다.

? 무차별하지 않음(non-in-difference) : ‘타자’는 나와 다르지만 무관심하게 방치하지 않고 무관심하지 않은 관계가 설정된다. 다르지만 관계 맺지 않을 수가 없다.

? 비대칭성 : ‘타자’와의 관계는 ‘상호성’을 넘어선다. 상호성은 장사와 무역에서 거래의 핵심이다. 근대 질서에서 상업성이라는 행위는 동등한 가치의 상품 교환을 기초로 한다. 상호성이 정치로 가면 너와 나는 ‘같은 권리소유자’라는 것을 기반으로 하여 서로를 합리적 거래를 통해 이해한다. ‘사회계약’이 그것이다. 사회계약은 상품거래자들의 상호적 거래를 정치질서로 정착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신 상태에서 인간은 같은 동일자들의 세계만 끌어안는다. 그리고 이 속에서 싸움(전쟁)과 경쟁은 끊이지 않게 된다. 정작 ‘give & take’라는 거래는 확실하지 않다. 이 속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비대칭성’은 더 확실해진다.

 

타자의 나타남과 타자의 얼굴

 

그렇다면 ‘타자’와 비대칭적이거나 무관심하지 않으면서 ‘타자’는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인간의 활동 영역에서 ‘본다는 행위(시각)’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에게는 일본을 거쳐서 중역된 말이기는 하지만, 철학의 ‘철(哲)’자가 의미하는 것처럼 밝게 해서 환하게 비추면 뭔가를 알게 된다. 그러면 훤히 보이는 대상을 ‘지배’하고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 근대 서구인들의 생각이었다. 전쟁에서 높은 고지를 ‘점령’하는 이유는 뭘까? 내 눈앞의 것을 모두 발밑에 두고 낱낱이 알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이다. 첨단을 자랑하는 미국의 고공정찰기나 인공위성은 근대의 판옵티콘이 현대화된 것으로 ‘모든 것을 보는 눈’으로써 미국 제국주의 최전선에서 근무하는 첨병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청각’을 강조한다. 기존에 강조하던 ‘시각’은 ‘지배’와 ‘점령’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었지만 타자와 같은 불확실한 것을 파악하는 데는 좌표를 직시하는 ‘시각’보다 ‘청각’이 더 필요할 수 있다. 공자나 석가, 예수의 ‘대기설법(對機說法)’이 바로 그렇다. 불확실한 청자의 다양함을 전제하는 방법이다. 세상이 무한하고 ‘타자’도 무한하니 이에 대응하고 책임지는 방식도 다양해 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청각’의 영역과 관계한다.

그리고 어떤 표현이 그 사람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그렇듯 ‘타자’는 말로 나타난다. 화가가 표현하는 방식은 그 화가의 표현 중 하나이지 그것이 화가 전부를 대변할 수는 없다. 무수히 다른 그림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 표현 하나하나에 그 화가의 정신이 들어가 있다. 그것을 ‘참가(attendance ≠ participation)’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레비나스는 ‘타자’가 우리에게 ‘얼굴’로 다가온다고 했다. 사진과 같은 어떤 형태의 시각적 현상이 아니라 ‘나타남’이다. 또한 얼굴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호소’하고 메시지를 주고 느낌을 전달한다. 레비나스는 ‘벌거벗은 얼굴’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얼굴을 통해 직접적으로 ‘타자’와 가리지 않고 만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현현(顯現, manifestation?epiphany)’이라할 수 있겠다. 낯선 자가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내개 다가와 호소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동일자와 타자, 그리고 향유

 

앞에서도 언급했던 ‘동일자’와 ‘타자’라는 개념어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동일자’는 ‘유한자’가 되고 ‘무한자’는 ‘타자’가 된다. 레비나스는 동일자는 항상 테두리 바깥의 타자를 향한 형이상학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때 형이상학적 욕망은 대문자 ‘D’를 써서 ‘Desire’로 표기한다. 욕구(need)로써의 ‘욕망(desire)’과 구별한다. 당장의 결핍을 전제하지 않고서 하는 욕망으로, 예를 들어 높고 멋진 산악의 풍경이나 경외감이 드는 광경을 목격할 때 드는 인간의 감정 상태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동일자의 속성인 유한은 무한에서 ‘분리(seperation)’된 것이다. 이 때 말하는 분리는 무한이 전체이고 부분이 유한자여서 전체에서 부분이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다. 문성원 교수는 “마치 불교의 설명처럼, 눈을 감거나 우리가 살다 죽으면 경험하는 그 세계가 사라지는 것과 같이, 내가 경험하는 세계, 전체화 할 수 있는 세계가 분리이다.”라고 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전체는 ‘유한자’에게서만 만들어지는 것으로 ‘동일자’들이 모든 것을 ‘동일화’ 시키는 것을 두고 전체화 했다고 이해하기 쉽지만 레비나스의 시각에서는 ‘동일자’의 성립 자체가 분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안과 밖을 구분했을 때 동일화된 테두리가 전체가 되어 동일화 되지 않은 밖을 분리시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역으로 무한이 전체이고 부분이 유한자라는 이해도 성립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전체라는 개념을 상정하는 유한이 있어서 무한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무한은 전체라는 개념이 있을 수도 없다. 굳이 말하자면 ‘무한’이 있음으로 해서 ‘유한’과 ‘무한’이 생겨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의 분리이다. 그것이 레비나스에게 있어 ‘안과 밖(interiority & exteriority)’의 성립이다. 안은 항상 밖을 전제하고 밖과 더불어서 성립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은 분리된 상태로 어떻게 살아나가는지에 대해 설명해 나간다. 그 첫 번째로 제시하는 개념이 ‘즐김(jouissance)’이다. 하이데거의 경우 ‘불안’ 또는 ‘죽음을 향한 존재’ 등의 얘기를 하는데 레비나스는 하이데거가 인간의 존재 의미를 한계 짓고 규정하려 한다고 하면서 대단히 부정적인 출발이라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불안에서 출발하지 않고 즐김에서 시작한다. 향유이다.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현실적 상황에 있건 간에 우리의 주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공기, 물, 기본적 먹거리 등)에 대한 ‘향유’로 귀결된다고 한다.

문제는 ‘자연적 향유’의 영역이 항상 ‘불안정성’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서 테두리 치고, 재화를 수집하고, 집이 생겨나고, 소유, 노동의 개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동일성을 확보한다. 그래서 내 ‘집’, 내 ‘영역’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문성원 교수는 이것을 레비나스 고유의 주장이라고만 볼 수 없다고 한다. 하이데거도 이런 얘기를 먼저 했었기 때문이다. 단, 레비나스는 ‘타자’와 관련짓기 위해 앞서의 언급을 재해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레비나스는 기존 서양철학의 제 문제를 재해석 하여 근사하게 풀어내고 있다.

 

응답과 환대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는 내 테두리 밖에 있는 존재이기에 ‘낯선 자’이지만 내 옆에 붙어 있고 항상 나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이웃’이다. 어찌 보면 같은 한 테두리 안에 있는 이웃들 중에도 나에게는 낯선 부분이 분명 있어서 사실 ‘이웃’과 ‘낯선 자’는 다르다고 볼 수도 없다.

문성원 교수는 레비나스가 항상 ‘호소에 대한 응답(response)’은 곧 ‘책임(responsibility)’과 관계 지었다고 한다. ‘나는 내가 무언가를 소유하고 나의 혹은 우리의 테두리가 있으니까’라고 생각하면 ‘타자’와의 관계는 끊기고 자신은 테두리 안에 매몰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것은 삶이 아니라 죽은 삶이다. 이에 유일한 소통은 ‘응답’하는 것이다. 내 집 밖의 타자를 내 집에 맞아들임, 이것이 ‘환대(hospitality)’이다. ‘환대’야 말로 우리 삶의 근본적인 자세라고 『전체성과 무한』에서 강조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의 약점은 언제나 내 집의 테두리라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나중에 이것을 잘 언급 하지 않는다. 이후 레비나스는 누군가 내 것을 따지기 이전에 ‘타자’는 이미 나한테 와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내 집이라는 생각과 내 테두리를 고수하려는 생각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비나스의 환대는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환대’와는 다른 점이 있다. 먼저 계몽주의자의 연결 선상에 있는 칸트는 환대를 ‘상호적 관계’에서 말한다. 칸트의 환대는 상호적인 관계이다. 남이 나의 집에 오면 ‘환대’하듯이 나도 남의 집에 가면 ‘환대’받을 권리가 있다는 ‘권리의 측면’에서 말한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자는 거다. 내 의지의 주장이 입법의 원리에 의해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것. 역지사지로 네가 환대 받고 싶으면 네가 먼저 환대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조건적 환대’이다. 가장 현실적이고 승률이 높은 태도이다. ‘give & take’ 전략이랄까.

그럼 ‘무조건적 환대’는? 레비나스는 칸트의 방법만 가지고는 삶에 비전이 없다고 생각했다. 레비나스는 ‘무조건적 환대’가 더 근본적이라고 한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문성원 교수는 물론 자연과학자들이나 진화론자 중에는 무조건적 환대도 ‘give & take’의 일부분이라 말한다고 하지만 레비나스는 현상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내 입장에서 내 삶의 유의미한 입장은 ‘무조건적인 환대’라고 보았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환대가 조건적인 환대와 결합해야 제대로 된 ‘환대’로서 작동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가 있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환대’해야 하는 근거 중 하나는 내가 태어나 이 세상의 테두리 안에서 내 집이 나를 받아주는 것처럼 안락함으로 받아주는 세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듯이 타인을 받아주어야 한다. 레비나스는 그것과 관련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여성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존재와 달리, 존재성을 넘어서

 

‘존재’에는 이해 ‘타산적(inter-esse)’인 속성이 있다. 우리가 ‘존재’에 집착하게 되면 내 것을 지키려하고, 규정하려하면 다툼과 전쟁을 피할 수 없다. 내가 내 집을 차지하면 내 집을 차지하지 못한 사람은 그 영역에서 밀려난다. 이것이 ‘존재’의 ‘점령’하며 ‘독점’하려는 속성이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독점’한 자리를 말하면서 “태양 아래 나의 자리(Pascal)”에 대해 묻는다. 이 자리는 다른 사람이 내가 거기에 있음으로 해서 밀려난 자리이다. 내가 정규직이 되면 다른 사람은 비정규직이 된다. 이것은 곧 “내가 존재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연결된다. 내가 내 자리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일종의 ‘찬탈’이라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영역을 차지하고 점령하고 밀어내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존재와 달리’ 살아야 한다. ‘존재성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와 달리’하는 방법은 자신이 차지하는 곳에 대해 버겁게 생각하고 타자에 대해 공경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문성원 교수는 이런 점에서 레비나스가 조금 극단적으로 나간 부분이 분명 있다고 한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책을 읽어 본 사람들은 레비나스의 주장을 거부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또한 실행하기도 어려운 것 아니냐고 한다. 방향은 있는데 따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레비나스가 말한 ‘존재와 달리 사는 지평’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레비나스 철학이 우리에게 남긴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쨌든 여기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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