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1)[대안도덕교과서]-2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1)[대안도덕교과서]-2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1. 행복
“게임을 더 하고 싶은데 엄마가 못하게 해요. 그래서 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조금만 더하고 그만둔다고 엄마에게 말했지만, 실제로 인터넷 게임을 그만두고 싶지 않는 것이 저의 솔직한 욕심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게임을 그만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하거든요. 게임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은 생각대로 따로 놀고 몸은 여전히 게임을 하고 있단 말이죠.” 이렇게 사람들의 욕망은 욕망을 실현하려는 대로만 움직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욕망을 일으키는 마음과 욕망을 누그러지게 하려는 마음 사이에서 마음의 갈등이 일어나는데, 그런 갈등이 바로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감정입니다. 게임을 무작정 못하게 막으면 화가 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게임 아이템을 많이 잃어서 화가 나기도 합니다. 한편 댄스 동아리에서 춤을 추면서 희열을 느낄 때도 있으니, 항상 화만 나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또래들과 어울려 놀 때 마음이 편해지지만 집에 들어와 부모로부터 간섭과 핀잔을 받게 되면 마음이 불편해 집니다.
편안한 마음이 지속되면 행복해지지만, 불편한 마음이 지속되면 고통에 버금갑니다. 너무 당연한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고통보다 행복을 원합니다.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만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은 어른들도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행복이 무엇일까요? 더 쉽게 말해서 어떤 감정이 행복을 일으킬까요? 아니면 행복의 실체가 무엇인가요? 불행히도 이런 질문은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감정이 행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이든지 그 감정을 걸러내고 아우르고 다스려서 표현하는 방법 안에 행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행복의 실체를 직접 찾으려는 것도 처음부터 잘못된 시도인 것입니다. 동물원 침팬지에게 바나나를 주면 바나나 껍질을 잘 까서 먹습니다. 영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침팬지에게 양파를 던져주면 껍질을 가서 먹으려고 합니다. 껍질을 깠더니 그 속에 다시 껍질이 있어서 껍질을 또 벗깁니다. 그 안에 껍질을 계속 벗기면서 결국은 나무 것도 먹지를 못하게 됩니다. 침팬지의 영리함은 바나나에 통했지만 양파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미처 모른 것입니다. 행복도 양파와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양파의 행복을 모르고, 어떤 감정을 벗겨내어야만 그 안에 진짜 행복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오해를 하는 어른들이 많습니다. 행복이란 감정 저 깊이 숨겨진 부동의 실체가 아닙니다. 겉에 드러난 감정을 풀어가는 표현과 방법 그 자체가 바로 행복으로 가는 길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깨달음은 생각이 고정된 어른보다 약간의 착오는 있을지언정 생각이 유연한 청소년에서 더 많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인터넷 게임을 과감하게 멈추고 혼자 힘으로 몇 달 동안 방치되었던 내 책상을 정리한다고 칩시다. 책상 정리를 내 손으로 끝내고 나면 정말 자기 자신에 대해 대견한 생각이 듭니다. 뿌듯해지기도 합니다. 그런 감정이 바로 행복의 시작점입니다. 물론 그런 감정도 계속 이어가지 않으면 다시 게을러지거나 인터넷게임으로 또 빠질 수 있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해 보기로 하죠. 인터넷 게임에 빠지게 되더라도 잠시라도 행복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터넷 게임에서 이외의 상황에서 아이템을 획득했을 때, 작년 겨울에 입었다가 보관해 둔 내 잠바 안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지폐 다섯 장이 나왔을 때, 어제 밤 당일치기로 찍어서 공부한 문제들이 오늘 시험문제에 그대로 나왔을 때, 나는 매우 기쁨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행복이 아니라 일시적 즐거움입니다. 일시적으로 즐거운 감정을 행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감정을 갖게 되는 행동을 꾸준히 연습해야 합니다. 연습하지 않으면 아무리 대단한 성인군자라도 결국 게을러지고 순간 감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청소년이 어른들보다 자기 충동에 빠지게 될 우려가 더 크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언뜻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청소년은 가족, 교사, 또래 등에서부터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매체 등에 이르기까지 주변 환경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 현상은 성장과 발달의 자연스런 과정입니다. 그래서 자기충동이라기보다 자기를 변화시키는 힘이 더 크다고 해야 옳은 말입니다. 자기충동이 더 크다는 말을 달리 표현할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을 크게 성장시킬 가능성이 더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 청소년들의 장점은 행복으로 가는 행동을 연습할 시간이 어른들보다 훨씬 많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가능한지 더 말해 봅시다.
2. 책임과 자유
나의 감정과 욕망 그리고 행복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나의 욕망과 행복은 나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감정이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앞서도 말했지만 행복의 상태가 계속 죽 이어져서 욕망의 감정에 너무 흔들리지 않는 내가 바로 행복한 나입니다. 욕망의 감정을 무조건 극복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욕망의 감정은 평생 나와 함께 하며, 욕망의 감정에서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이기 위하여 본능을 넘어서는 윤리감정이 더없이 중요합니다. 윤리적 감정이 어디서 오고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를 따지는 이론들이 대학교 윤리학 교재의 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런 복잡한 이론들을 여기서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간단히 제목만이라도 아는 것은 중요할 것 같습니다. 우선 윤리란 ‘무엇 때문에 사는가’라는 목적을 수행하는 것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라는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철학자의 윤리학으로서 서구에서는 근대 나아가 현대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한편 윤리의 법칙이 형이상학적으로 존재하여, 우리는 그것을 쫒으면 윤리적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이론으로서 그 유명한 칸트의 윤리학입니다. 이런 이론들을 다 나열할 수 없습니다만 기존 윤리학의 공통점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를 다지는 일이었습니다. 책임을 묻기 위하여 나의 자유의지에 다라서 행동을 했는가를 먼저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갓난아기 내 동생이 밥그릇을 엎어도 혼나지 않는데, 나는 밥알을 조금 흘려도 아빠에게 혼줄이 나는 것입니다. 나는 갓난아기 내 동생보다 책임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나는 갓난아기 동생보다 자유의지를 담은 행동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윤리학은 책임과 자유의 문제에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갓난아기 내 동생은 나만큼 책임질 일이 없지만 한편 내 동생은 나보다 자유롭지도 못한 것입니다.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가 내가 아끼는 잠바를 물어뜯어서 나는 속상합니다. 나는 화난 김에 강아지 콧등을 한 대 쥐어박을 수는 있지만 손해배상하라고 강아지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대신 우리 집 강아지는 그만큼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 동물원에서 키우던 호랑이가 사육사를 물어서, 사육사가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호랑이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지에 대해 논쟁이 많았습니다. 냉정하게 분석하여 말한다면 호랑이는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살해했다면 당연히 책임을 물어서 법정에 세워야겠지만, 호랑이에게는 그런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거꾸로 말해서 호랑이는 자유가 없으며 사람에게는 자유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유를 원합니까 아니면 철망에 갇힌 노예나 동물원의 노리개가 되기를 원합니까? 이런 질문 자체가 우스울 정도입니다. 강아지도 목줄을 메어서 줄을 억지로 끌면 깨갱거리면서 싫어합니다. 그런 강아지 목줄을 풀어주면 좋아라하며 신나게 뛰어다닙니다. 하물며 사람은 더 큰 자유를 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사람다운 모습입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동시에 그만큼 책임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유와 책임의 얽힘이 바로 윤리학의 기본틀입니다. 윤리학의 고전들은 거의 이런 식으로 윤리이론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칸트라는 철학자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칸트의 윤리학을 잘 몰라도 괜찮습니다만, 바로 그 칸트가 자유와 책임을 연결시킨 대표적인 철학자입니다.
책임과 자유의 문제를 동기부여라는 관점에서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자유라는 개념은 참으로 복잡합니다. 우리는 자유의 개념을 형이상학적으로 복잡하지 않게 그냥 단순히 생각하면 됩니다. 나의 행동이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나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했다면 그것을 자유로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엄마의 잔소리나 무서운 선생님의 명령에 의해서 혹은 학교 선배의 강압에 의해서 내가 행동을 했다면, 그 행동은 자유로운 것도 아니고 즐겁지도 않고 별 효과도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일 때 그 나의 행동은 즐겁고 효과도 크다는 것쯤은 어린아이도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청소년이 그렇게 하도록 어른들이 놔두지 않는 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단순히 청소년 개인의 문제이기보다 한국 교육 전체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육의 문제를 개선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우리의 주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자신의 행동을 자유롭고 즐겁고 큰 효과가 나도록 하는 길을 찾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 안에서 행동의 동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원하는 행동을 남이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서 할 수 있어야만 바로 앞서 말한 나의 행복한 상태를 갖게 되며 비로소 행복해지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렇지만 자발적인 동기가 중요하다는 말쯤이야 누구나 다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말을 구태의연하게 다시 반복하는 것 같아 필자도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뒤집어서 말해 봅시다. “타인의 압박과 관습 그리고 명령 때문에 내키지 않는 일,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있다면 과감하게 그런 행동을 하지 말라”라고 말한다면 과연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나요? 물론 쉽지 않지만 그런 용기를 항상 연습하는 모습이 바로 청소년의 본능입니다.
3. 긍지와 인정욕구
용기의 감정은 청소년의 특징이며 장점입니다. 어른들은 직장, 동창, 혈연 등 사회적 관계들을 이미 많이 가지고 있어서 자신을 변화시킬 용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반면 청소년은 아직 사회적 연관관계를 적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래의 변화와 가능성에서 무한합니다. 친구들이나 대중매체의 아이돌 스타로부터 어떤 때는 문학소설이나 영화로부터 간혹 짜릿한 감성적 메시지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감성메시지는 나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는 중요한 동기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와 닿는 동기부여가 생기면 우리들은 어서 빨리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라는 말이 있듯이 행동은 신중함이 필요하고 신중하지 않으며 행동의 용기가 자칫 무모함으로 갈 수 있습니다. 자꾸 머뭇거리는 것도 문제지만 지나친 무모함도 문제가 생깁니다. 머뭇거리는 주저함과 일시적인 자극에 의해 무모한 행동을 하는 것 사이에서 우리는 갈등을 합니다. 실은 그런 갈등의 현실은 바로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우리는 갈등이 없는 그런 인간상이 아니라 갈등을 풀어가려는 마음의 과정에서 윤리적 인간을 형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판단을 위하여 중용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중용이라는 말을 자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중용이라는 뜻은 이것저것을 섞어 놓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용이란 일차적으로 내가 왜 이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런 과정을 반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 그런 나의 반성을 거쳐서 판단과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이 바로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마음이 커가는 징표입니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동기부여를 위하여 우리는 자신의 생각에 대한 믿음을 먼저 필요로 합니다. 자기가 갖는 생각을 자기가 믿지 못한다면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절대 옮길 수 없을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자부심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자기도취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자기도취보다는 자부심이 더 중요하고 의미있는 동기부여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자기도취는 자신이 남과의 관계망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모른 채 행동하는 양상입니다. 자기도취는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관계없이 제멋대로 하는 행동을 말합니다. 자기도취는 자신에 대한 믿음을 독선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믿음은 반성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런 자기도취에 빠진 생각에서 시작된 행동은 실효성도 없으며 남에게 피해를 줍니다. 결국 반성이 없는 믿음은 매우 위험스러운 생각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나의 믿음은 남의 믿음과 충돌되는지를 세심하게 둘러봐야 합니다. 반성된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한 생각이 자부심입니다. 자부심을 통해서 이룬 행동은 그만큼 실효성도 높고 남들과의 사회적 관계를 좋게 해줍니다. 그리고 자신의 만족도도 높아집니다. 결국 더 높고 뜻있는은 자부심을 더 쌓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행복으로 가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만족을 높이고 타인에게도 좋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자부심을 우리는 긍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긍지를 갖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일상의 연습은 자아를 형성하는 청소년기의 가장 중요한 과정입니다. 자부심이 지나치면 자기도취에 빠질 수 있듯이, 긍지가 너무 지나치게 넘치면 오만이 됩니다. 한편 자부심이 없으면 자기불신이 되듯이, 긍지가 부족하면 비굴함이 됩니다. 우리는 타인에게 비굴함을 느낄 때 정말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에게 비굴함을 갖게 되면 더 큰 고통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 대한 자랑스러움 즉 자부심을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느낄만한 것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서, 자신을 의심하는 청소년이 의외로 많습니다. 학교성적 등과 같이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획일적인 기준 때문에 생긴 사회적 문제들입니다. 기성세대 혹은 대중매체가 만들어 놓은 기준에 기죽을 이유가 없습니다. 나 자신을 정말 깊이 있게 되돌아본다면, 나는 내가 자랑스러움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학교성적은 떨어지지만 만화를 잘 그리는 자부심이 나만의 긍지입니다. 키는 작지만 나의 다부진 성격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도전정신을 남들보다 더 키울 수 있는 나만의 긍지도 있습니다. 소심한 성격 때문에 그룹에 잘 어울리지 못했지만 게임프로그램 제작에 일찍 발을 들여놓은 나만의 긍지도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는 일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자신을 믿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나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 점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를 믿음의 주체성이라고 합니다.
물론 긍지가 넘쳐서 오만해진다면 더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정말 나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면 나는 오만함도 비굴함도 갖지 않고 적절한 자부심인 긍지를 갖게 될 것입니다. 청소년은 그런 감정의 시소를 타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비굴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상황에서는 나도 모르게 오만한 행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나는 완전하지 않지만 그래도 긍지를 찾아가는 변화의 모습이 청소년의 자랑입니다. 비굴함과 오만함의 시소를 타면서 나는 긍지를 찾아가는 과정이 바로 청소년의 본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고나면서 긍지를 갖는 사람, 타고나면서 오만하거나 비굴한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긍지는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은 마음과 연관합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하기를 사람의 가장 중요한 본성은 바로 남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는 마음에 있다고 합니다. 이를 도덕철학에서는 인정요구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뻔히 속보이고 얄팍한 방식으로 자신을 잘 낫다고 표현합니다. 자신을 남에게 돋보이려고 하는 지나친 태도를 간혹 우리는 접합니다. 그런 지나친 태도를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멸시하거나 무시하려 합니다. 인정욕구가 지나치면 상대방의 인정요구를 침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인정요구는 오만하거나 비굴한 욕망의 한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인정욕구는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는다는 점입니다. 내가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으면 먼저 나 자신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을 쌓아가야 합니다. 어떤 경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자신에 대한 긍지가 없다는 뜻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나 스스로 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남들은 나를 결코 믿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내가 나를 믿지 않는데 그 어느 누가 나를 믿어줄 수 있겠습니까? 긍지와 용기, 믿음과 인정, 이 모두 통일된 인격체로 향한 도덕감정의 기초입니다.
4. 겸양
청소년은 수줍음이 많습니다. 수줍음이란 원래 미지의 세상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려는 행동양식에서 나왔습니다. 청소년의 수줍음은 어른으로 되는 아주 중요한 감정단계입니다. 부모 밑에서만 자라다가 사회로 나가면서 미지의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려는 정신적 면역제인 것입니다. 수줍음이란 일종의 사회화 과정입니다. 즉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감정의 단계이며,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대표적인 감정의 성장입니다. ‘만약 내가 이러 저러하게 행동을 할 경우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우려심이 지속되는 감정형태로 나타납니다. 거꾸로 말해서 수줍음은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되어가는 소중한 감정입니다. 수줍음은 잘못된 일에 대하여 수치심을 갖는 마음의 시작점입니다. 그래서 내가 수줍음을 탄다고 해서 나 자신을 나쁘게 학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수줍음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서 남에게 양보하며 남에게 베푸는 마음을 키우는 겸양의 시작입니다. 2,500년전 고대중국의 철학자 맹자의 사단설을 들어 보셨나요?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마음을 4 가지로 표현했습니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4 가지입니다. 측은지심이란 남의 불행을 보고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수오지심이란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사양지심이란 겸손하고 양보하는 마음입니다. 시비지심이란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줍음이란 결국 수오지심과 사양지심을 다 합친 마음의 씨앗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수줍어하는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세요.
수줍음을 전혀 타지 않는다는 말은 타인의 감정이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런 행동습관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파렴치하다고 부릅니다. 염치가 전혀 없다는 말이죠. 파렴치하거나 염치가 없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정말 힘들게 합니다. 물론 수줍음의 감정 상태가 너무 지나치면 아무 행동도 못 하는 모순이 생깁니다. 타인의 감정을 지나치게 고려하여 행동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부작용이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감정이 습관적으로 되면 나의 생각을 내 안에만 가두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나를 이 세상에 표현할 기회를 잃는다는 뜻이다. 그런 기회를 잃었기 때문에 자칫 나 자신을 스스로 자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학에서 벗어나 나의 수줍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생활습관을 들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떻게 하느냐고요? 앞서 말했듯이 자신을 믿고 자부심을 스스로 만들면 우리 모두 수줍음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을 자동적으로(선천적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수줍음과 파렴치의 양단에서 겸양의 미덕을 찾을 수 있는 주인은 오로지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아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의 장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