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계절의 끝에서 [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치유될 수 없는 과거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힘들고 아픈 상처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사람의 힘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할머니에게 아들과의 이별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상처가 되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처는 가슴 깊이 커다란 웅덩이를 파고 들어 앉았다.
속아서 결혼했다는 생각으로 남편에 대한 원망과 야속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6살이 많았던 남편은 어린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지만, 20살의 아내는 남편의 정성마저도 싫었다. “진짜 정 안 주어지더라. 내 때문에 저거 아버지도 참말로 죽고 싶다했다. 내내 울고, 달래도 울고, 아침 저녁으로 내내 울었다.” 먹지도 않고 제대로 지자도 않으면서 울기만 하는 아내를 달랠 방법이 없었다.
“내 간다 이러면, 보따리 싸가 간다, 그리 하면” “아이고 가보지 어디가 몇 발 못가가 붙잡히지. 이 안에 법이 없는 줄 아냐, 당신 마음대로 하냐, 가 봐라.”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가겠다는 아내의 말에 아랑 곳 없이 그 곁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남편이 하루 종일 옆을 지키면서 달래고 또 달래도 스스로에 대한 서러움과 속았다는 분노는 다스려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머물러야 할 곳은 울산 바닷가였다. 울산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그 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나갈 수 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바닷가 넓은 바위 위에 앉아서 매일 죽음을 생각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분노 속에서 할머니는 집단촌에서 주는 약을 거부했다. 약을 먹지 않는 상태에서 끼니마저 거르자 병의 속도는 빨라졌다.
“한 번은 저 바닷물에 빠져 죽을라 했다. 그것도 그만 들켜서 안 됐제. 근데 헤엄을 치몬 도망 갈 수 있겠는 기라. 그리 생각하니까 사람들이 쫓아 올낀데 가다 잡혀서 두들겨 맞으모 우야노, 몽디 갖꼬 두들겨 맞으면 우야노, 겁이 나 얼마나 벌벌 떨어댄 줄 아나.” 그래도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허허로운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그 당시 공부도 좀 했다 쿠고, 공부 많이 한 처자가 저기 있다 소문이 어디까지 나가지고, 영감한테까지 오게 된 기라. 영감도 공부는 좀 했더라꼬.” 남편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던 중 한센병에 걸린 것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이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고향에는 형과 누나가 있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일본에서 배운 학식으로 한센인 집단촌의 행정적인 일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할머니 기억 속의 젊은 남편은 미남이었다. “얼굴도 뽀얗고 모리고 보면 진짜 의사 같앴다. 인상도 참 괜찮았다. 마음도 좋았제. 얼매나 착한 사람이었다고.”
그러나 20살 할머니의 눈에 그런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죽는 게 낫다는 절망감뿐이었다. 그 절망감은 20살의 할머니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한번은 약 묵고 죽을라꼬 치료약을 한 서른 개 묵었다. 서른 개 먹으니 죽지는 안 하고 토하기만 토하고 얼굴이 새파래지고 굿이 났지. 그거 묵고 나니 잠이 안 오데. 밤낮으로 잠이 안 오데. 그래 가지고 어떤 사람은 죽게 놔두라 하고, 간 크게 어디 약을 그리 지 마음대로 먹노 하는 사람도 있고, 약병을 단디 안 놔놓고 뭐했노 하는 사람도 있고, 아이고 동네 굿이 안 났더나.”
새로운 탄생
몇 날 며칠을 밤낮없이 뜬 눈으로 보내고 난 후, 할머니는 운명에 순응했다. 삶은 팍팍했다. 일자리를 얻을 수가 없었으므로 동냥을 다녔다. 운이 좋으면 쌀도 얻고 이삼일 지낼 수 있는 반찬거리도 얻었지만, 쫓겨 다니기도 수 없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남편이 있었기에 그 어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리라 싶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해 뜨면 일어나고 어두워지면 잤다.
“이 사람이 현재 내캉 이렇게 사는 사람이라고 맘속으로 자꾸 다짐했제. 안 그래야 될 낀데 자꾸 지난 기 생각나는 기라.”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 되면 밥 먹고 양식이 떨어지면 동냥을 다녔다. 그러다 집단촌에 배급이 시작되었다. “땡보리가 나오더라고. 쌀은 없었어.” 그 중에서도 좋은 것은 위에서 가로채 갔다. 나머지 힘 없는 사람들은 맷돌로 갈아서 보리 수제비를 해먹었다. 거친 보리 수제비지만 동냥을 다니지 않아도 굶지 않는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그 동안 몇 번의 강제 이주가 있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와서 떠나라고 난리를 치면 입은 옷 그대로 보따리만 들고 떠나야 했다. 집단촌은 울산을 떠나 부산으로 옮겨졌다. 세월의 무심함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건지 아니면 사람이 변해서 세월이 무심해 보이는 건지 알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결혼하고 만 3년이 지나 24살 때 딸을 낳았다. 30살에 아이를 본 남편은 좋아서 어쩔 줄 몰랐지만, 할머니의 슬픔은 방긋거리는 딸을 볼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커져 갔다. 어디를 가든지 정부에서 나오는 배급품은 한센인들에게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좋은 것은 전부 힘 있는 관리나 하다못해 집단촌 이장까지 팔아서 이익을 챙겼기 때문이다. 생활은 항상 궁핍했지만, 딸은 젖을 먹여 키울 수 있었다.
할머니와 마주 앉은 방안은 서늘했다. 낡은 집의 창틈으로 찬 바람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이리 추워서, 겨울이 되니까 영감에 대한 시를 하나 지어 볼라꼬 아무리 생각해도 시가 생각이 안 나.” “추운데 왜 할아버지 생각이 나세요?” “내가 겨울에 영감을 만났거든. 참 마이 추웠다. 눈도 마이 오고……. 하아얗게 쌓여 있었다.”
할머니의 감기 기운은 낫는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미열도 더 이상 내리지 않고 할머니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몇 년 전부터 감기가 자꾸 걸리는 기라.” 할머니는 혀를 찼다. 깊은 산 속에서 서서히 시들어 가는 고목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갔다. 할머니에게서는 하나 둘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고목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텅 빈 삶
딸아이가 젖을 뗄 무렵, 삶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할머니는 다시 약을 먹었다. 이번에는 예전보다 더 많은 양의 약을 먹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딸의 울음인지 승팔이의 울음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이제 됐다. 이제는 됐다.’라는 안도의 물결만이 밀려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편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참말로 징하다. 어찌 그리 독하노. 니 같은 독종은 살다 살다 처음 본다.”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듯한 목소리에는 분노와 허무함이 묻어났다. 아내에 대한 서운함과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남편은 한 동안 말문을 닫았다.
“밥 먹자 하면 먹고, 일하러 가자 하면 가고, 이거 하자 하면 이거 하고, 저거 하자 하면 저거 하고, 별 그거 없고 그래 지내는 사람인데 내 영감은… 이거는 만나 놓으면 어렵거든. 법적으로 이래 이렇게 그거는 없고” 할머니는 띄엄띄엄 간격을 두며 먼저 가신 남편에 대한 미안함을 드러냈다.
남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텅 빈 듯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린 딸은 어떻게 하라고 그러셨어요?” 나의 바보 같은 질문에 할머니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다, 딸도 승팔이도, 영감도, 아무 죄 없는 기라. 죄는 나한테 있는 기라. 그러니 죽을 수밖에.”
사는 것이 죄를 짓는 일이고 죽는 것이 속죄하는 일이라면 삶과 죽음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왜 태어나야 하는 것일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동안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태어나서 병들어 사는 것이 죄라면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죄’라는 단어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삶이 저렇게 고독하고 고통스러운데, 그 삶이 죄가 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의 죄는 무엇일까. 할아버지와 딸에 대한 시를 짓고 싶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 편의 시가 떠 올랐다.
나무들이 요란히 흔들리는 가운데 겨운 햇빛은 떨어지며 너를 불러들인다. 얼은 들판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나에게로. 잘 왔다. 친구여, 내 알려줄 것이 있다. 저 캄캄해오는 들판을 바라보라. 들판을 바라보는 그대로 너를 나에게 오게 하는 법을 배웠느니라.
이제 무엇을 말하겠는가. 혹은 다시 보겠는가. 네 허전히 보낸 나날의 표정 있는 얼굴을. 네 그처럼 처음을 사랑했던 꿈들을.
보여라, 살고 싶은 얼굴을. 보아라, 어지러운 꿈의 마지막을. 내려서라, 들판으로, 저 바람 받는 지평으로.
황동규 < 이것은 괴로움인가 기쁨인가> 부분
할머니가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은 죽음이었다. 찬 바람 부는 언 들판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할 이에게 괴로움과 기쁨은 명확하게 구분되는 대상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 바라보는 삶은 어둠이 내려앉은 캄캄한 들판과 다를 바 없었을 게다. 그런 사람에게 ‘왜 죽음을 선택하는가’라는 질문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으리라.
계절의 끝에서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큰 기쁨으로 모두에게 외치는 한 생명의 탄생이 어떤 이에게는 살아보기 위해 애써 누르며 외면하고자 했던 상처를 수면 위로 들어 올리는 사건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기쁨이라고 해야 할까 고통이라고 해야 할까. 할머니에게 딸의 탄생은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었다.
남편은 “당신 속에 무엇이 들어 앉아 있는가? 내가 알면 안 되는 것인가?”라며 아내의 마음을 열고자 노력했다. “가까이 오면 저리 가라고, 오지 마라고 폴을 휘둘렀지.” 털어 놓을 수 없는 비밀은 아내의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고,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은 까맣게 타 들어갔다.
“영감은 나한테 온갖 이야기 다 했다. 지 연애 했던 이야기, 첫사랑 이야기, 어릴 때 이야기,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만약 말씀하셨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감은 참 좋은 사람이다. 예수를 믿고 나서는 더 좋아졌제. 무엇이든 나누었다.” 할머니는 나의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남편의 좋은 점을 열거했다.
좋은 사람이었으며, 5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했지만, 사랑은 싹 트지 않았다. 딸을 바라보면서 떠나보낸 아이를 생각하면 안 된다고 다짐했지만, 그것은 다짐일 뿐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그리움과 연민은 불쑥불쑥 튀어 나와 가슴을 텅 비워 놓았다. 그때마다 어미는 어린 딸의 얼굴을 외면하고, 아이는 본능적으로 어미에게 더 매달렸다.
‘이렇게 병들어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데, 아이가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잘 자라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할머니는 캄캄한 들판에 홀로 서서 칼바람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맞았다. 그래도 추운 줄 몰랐다. 할머니의 마음을 꽁꽁 얼게 만드는 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 온 이후 할머니의 삶은 언제나 죄책감이 함께 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죽음에 대한 유혹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된 것이다. “죽는 것도 내 기 아이라. 내 거는 아무 것도 없는 기라.” 내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면, 괴로움도 기쁨도 고통도 내 것이 아닐 것이다.
내 것이 없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것뿐이리라. 할머니의 가슴은 언제나 찬 바람이 불어도, 그 찬 바람은 더 이상 할머니의 삶을 흔들지 못했다. 할머니에게는 이제 지켜야 하는 딸이 있고, 할머니를 지켜주는 남편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은 아닐지라도 함께 갈 수 있다는 믿음이 할머니에게 싹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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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사진 : 상단 나무 / 하단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