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있으니 이리 산다” [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9

“죄 있으니 이리 산다”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동두천역에서 옷과 돈이 든 보따리를 참 우습게 도둑맞고 나니 앞이 캄캄했다. 배는 부른데 얼라를 데리고 돈도 없이 어데를 어찌 가노. 그만 다리 힘이 탁 풀리고 아무 생각도 안 나더구먼. 그래도 대구까지는 가야한다 싶어서 딸아 손을 잡고 일어나서 국수집으로 갔다. 서울역 가는 표 끊고 남은 돈이 50전이더라. 딱 국수 한 그릇 값이라. 우짜겄노. 국수 한 그릇 사서 딸아 먹이고 남는 거는 내가 묵었지. 참 기도 안 차지만 그래도 가야한다 싶어 터벅터벅 걸어서 기차를 타러 갔다.

서울역에 도착은 했는데 대구까지 갈 일이 꿈만 같은 기라. 우리집은 대구 본전통에 있는데, 일단 대구까지 가야 집으로 걸어가든지 우짜든지 할 건데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으니 참 난감하지. 딸아 손을 잡고 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맥을 놓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자존심은 남아 있어서 구걸도 못 하겄고, 세상 물정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탓할 수도 없고…… 얼마나 살기가 험했으면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의 보따리를 뺏들어 갔을꼬 싶다가도 화도 나고 그렇더라.

그렇게 망연자실해서 서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아줌마, 어디 가요?”하고 묻는 거라. 대구 간다 하니까 그 아저씨가 “이 기차가 대구 가는 급행 열차요. 빨리 타야 갑니다.” 하길래 용기를 내서 “이북에서 넘어오다 돈을 몽땅 잃어버려 오도가도 못합니다.”하고 사정을 말했다. 그랬더니  두말 안 하고 대구 가는 급행표를 끊어주는 기라. 그러면서 “지금 저기 출발하려는 저 기차를 타야 합니다. 어서 가이소.”하고 등을 밀어서 급하게 탔다.

기차표를 끊자 개찰이고, 개찰하면 바로 타야했거든. 급하게 탄다고 이름도 못 물어보고 어디 사는지도 못 물어봐서 지금까지 그 은혜를 못 갚고 있다. 돈을 갚아야 하는데, 다급할 때 도움을 받고 은혜는커녕 돈도 못 갚았으니, 아무리 급해도 이름 성명은 물어봐야 하는데, 그리 못했다. 그게 지금도 한이 된다. 요새도 그 아저씨 생각을 한다. 누군지 몰라도 잘 되라고 기도한다.

할머니의 방에서 구술 채록하는 모습

할머니의 방에서 구술 채록하는 모습

참 옛말에, 숭년에 부모는 굶어죽어도 아는 배터져 죽는다는 말이 있더마 다 맞는 말이라. 그냥 나온 말이 아니더라고. 기차가 요새하고 달라서 서울에서 대구까지 가는 동안 장사도 지나가고 기차 타는 사람들도 먹을 걸 다 준비해서 탔거든. 근데 나는 돈이 없으니까 먹을 거라고는 하나도 준비 못했제. 참 눈치 없는 딸아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 먹는 것마다 먹고 싶다고 졸라제. 그것도 모자라서 장사가 지나가면 그것 볼 때마다 사 내라고 졸라네. 돈이라고는 한 푼도 없는데……

근데 사람들이 저거만 안 먹고 딸아한테 조금씩 나누어주는 거라. 수중에 돈 한 푼 없이도 얼라는 먹고 싶은 것 먹고, 배 안 곯고 그리 대구에 왔다. 그때는 모두가 배고프고 가진 게 별로 없던 때라도 옆에서 누가 굶으모 매정하게 못 본 척 안 하던 시대다. 지금하고 마이 다르제. 허긴 우리도 도와주는 사람들 없었으모 이리 살고 있기 힘들제.

동두천역에서 저녁에 출발해서 서울역에 도착하니까 밤이더라. 부랴부랴 기차타서 대구역에 내리니까 새벽이대.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어서 새벽 4시 해금 사이렌이 울려야 다닐 수 있었거든. 그래서 대구역에서 새벽 4시까지 기다렸다가 자는 딸아 깨워서 역 밖으로 나왔다. 내가 살던 그대로 있더라. 그때 내 나이가 28살이었는데, 15살에 떠나던 그대로더라.     딸아 손을 잡고 집으로 가니까 아버지가 점포(포목점) 문을 열고 장사 준비를 하고 계시대. 우리 오빠가 대구에서 포목점을 했는데, 아버지가 아침 일찍 문 열고 장사 준비도 하고 했거든. “아부지, 아부지”하고 부르니까 “내가 왜 니 아부지고? 썩 안 나가나?”하는 거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 내 꼴을 보니 참 가관이라. 옷은 남루하기 말할 수 없고, 몇날 며칠을 제대로 씻지 못했으니 거지가 따로 없어. 누가 나를 정상으로 보겄나.

연천에서 올 때, 사람들이 옷을 남루하게 입어야 한다고, 그래야 검문 걸리도 잘 피해갈 수 있다고 해서 남루하게 입고 다른 옷들은 전부 보따리 안에 넣어 놨다 아이가. 딸아도 마찬가지라. 임진강에서 동두천까지 140리 길을 걸었제. 그 후에도 몇날 며칠을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옷도 남루하고 더럽고 하니, 그냥 거지가 따로 없지. 세수를 제대로 했나, 머리를 제대로 빗기를 했나.

“아부지, ○○이요, ○○이” 그러니까 우리 아부지가 나를 보고 깜짝 놀라는 기라. “니가 어짠 일이고?” 하면서 점포 문을 열어 주시더라. 나중에 들어보니 금달이네이라는 미친 여자가 있었어. 원래는 안 그랬는데 언제부터인지 정신이 나가서 식전 댓바람부터 우리 집에 와서 아부지라고 부르니까, 그 날도 금달이네가 와서 그러는 줄 알고 썩 나가라 한 거라. 그 정도로 우리 몰골이 처참했던 거지. 업고 다니는 아 이름이 금달이라서 미친 어미는 금달이네라고 부르는 거지.

집에서 며칠 있다가 소록도로 가서 아들내미 낳고 그리 힘들게 살았다. 소록도에서 나왔지만, 집으로 갈 수는 없었제. 그러다가 딸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아들은 오빠 집에 맡기고 문전걸식 하다시피 살았다. 그래도 아들은 배 안 곯게 해주고 싶고, 또 공부시키려고 내 딴에는 죽을힘을 다 해서 살았지만, 아들은 아들대로 얼매나 애를 달구고 서럽고 외로웠겠나. 외삼촌 외숙모가 그리 따뜻하게 보살펴도 부모 대신이지 부모는 아니잖나.

아들도 어느 정도 성인이 되고 해서 경상북도 의성군 다인면 신라리에서 혼자 살았는데, 내 건강이 이러하니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일을 해야 먹고 사는데, 개간해서 농사를 지으면 그게 다 내 수입이 되는데,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어서 이북에서 혈혈단신으로 넘어온 영감을 만나서 같이 살았다. 서로가 참 잘했다. 평양에서 넘어왔는데, 여기는 아무도 없이 혼자였어.

부지런하게 열심히 해서 살았는데, 마을에서 이장 투표로 싸움이 났어. 그때 거기서 못 살고 둘이 같이 나와서 경주 희망촌으로 갔어. 5~6년 같이 살다가 1994년도에 먼저 갔다.  우리 아들에게도 참 친아들 이상으로 잘 했다. 대구 카톨릭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화장은 싫다 하더라. 우리 아들에게 말했다. “내가 없더라도 불쌍한 사람이니 관리비 주고 한번 씩 돌봐줘라.” 우리 아들이 그리 하마하고 약속했다.

혼자 살다가 칠곡의 피부과 병원인 엠마병원의 원장이 소개해줘서 1996년도에 여기 성심원으로 왔다. 편하고 따습게 살고 있다. 그래도 마음 한 편은 언제나 서럽고 외롭다. 빨리 죽는 게 소원이다. 너무 많이 살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아들이 벌써 68살이다. 전화는 자주 한다. 여기 자주 오지는 못하지. 손자들은 내 생존여부는 모른다. 며느리는 내가 대구에 살 때 침대에서 떨어져 입원했을 적에 한 번 왔다갔다. 옷도 어쩌다 한번 씩 보내주는데, 그만큼만 해도 된다.

요새는 눈이 잘 안 보여서 애가 탄다. 글자가 잘 안보이니까 책도 읽을 수 없고, 미사 때도 성가책이나 성경책을 아주 눈 가까이 갖다 대야 보인다. 참말로 애가 터져 죽겄다. 책읽는 그게 유일한 낙이었는데, 그마저도 안 된다. 아침에 일어나서 미사 갔다가 아침밥 먹고 물리치료 받으러 간다. 끝나면 연천에서 임진강으로 올 때 났던 발의 상처를 치료 받는다. 그때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상처가 안 낫고 애를 멕인다. 그러면 점심 시간이제. 점심 먹고 앉아서 놀다가 텔레비전 보다가 하루에 세 번 씩 안약 넣고 저녁 먹고 또 텔레비전 보고 잔다. 이게 내 하루다.

요새는 빨리 죽는 게 소원이다. 너무 오래 살고 있어. 잠 안 오면 누워서 생각한다. 내게 죄 있으니 이리 산다. 하느님께서 내 죄를 사해 주시기만을 바란다. 내가 죄 없으면 이런 병 안 걸렸지. 다 내 죄다. 그 죄를 하느님 아니면 누가 사해 주시겠나. 얼마 전에 시를 하나 읽었는데, 참 내 마음 같더라. 그래서 베껴 썼거든. 잘 안 보여서 빼뚤빼뚤 해도 아직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내 마음에 탁 와 닿는 것만 베껴서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니 이제 외운다.

 

다른 사람의 시를 옮겨 적어 놓은 글

다른 사람의 시를 옮겨 적어 놓은 글

 

외딴 곳 높은 산골짜기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해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

피고 싶어라

 

아이구, 쓴 사람 이름도 제목도 기억이 잘 안 나. 이 시를 쓴 사람도 마이 힘들었던 갑다. 나도 참말로 숨어 숨어 살고 싶다. 돈으로 따질 수도 없고, 매길 수도 없는 그런 꽃으로 살고 싶다. 값이 없는 그런 꽃이 되고 싶다. 어찌 이리도 내 마음 같을꼬.

 

 

 

“이 노래만 들으모 지금도 눈물이 난다” [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8

“이 노래만 들으모 지금도 눈물이 난다”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아아들 아버지는 애락원에서 만났다. 애락원은 개신교다. 개신교 플래처 목사가 세웠는데, 대구나병원이라고 한다. 애락원 거기는 병원이었다. 아매 지금 동산병원과 연결되어 있을 거다. 그때는 나환자들만 보는 병원이라 다른 환자들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 격리시키는 거제. 산위에 고아원이 있었다. 후문으로 가면 기념관이 있었제. 전에 보니까 애락원 나무들은 별로 안 변한 것 같더라. 그 집들이 지금도 있을까 모르겄네.

그때 애락원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병 표가 안 나서 시장꾼으로 밖으로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니까 밖에 나가서 필요한 물건도 사 오고, 간혹 환자들에게 오는 돈이 있으모 가서 찾아오고 하는 일을 했다. 병표 나는 사람이 밖에 가서 일을 볼 수 없고, 환자는 함부로 밖에 못 나가지만, 그 사람은 겉으로 보모 워낙 멀쩡해 보이니까 일이 있으모 수시로 다녔지.

애락원에는 평옥과 구이층집으로 불리는 건물이 있었다. 평옥은 단층집인데 여자 환자들이 지낸다. 구이층집은 오래된 2층집이라서 그리 불렀는데 남자들이 살았다. 사는 곳은 달라도 애락원 마당은 같이 쓰니까 마주치고 했지. 그 사람은 발이 좀 시원찮았다. 나는 사람들이 오물짜 같다고 했다. 지금 이쁘기는 뭐가 이쁘노? 니도 거짓말 참 잘한다. 그 때도 이쁜 기 아이라 얼굴이 하얗고 작다고 그리 부르더라.

성심원 들어가는, 눈쌓인 다리 사진 촬영 엄삼영 수사

성심원 들어가는, 눈쌓인 다리
사진 촬영 엄삼용 수사

그 남자 누나가 자꾸 나를 불러내는 기라. 그래 밖으로 나가모 그 남자가 기다리고 있고 그러대. 응, 뭐 연애라면 연애지. 좋았지. 시간이 지나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다 알고. 그 사람은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나한테 꼭 뭔가 사오고는 했다. 둘이서 철문을 타고 살짝 넘어가서 영화관도 가고, 손도 잡고 그랬다. 대구 극장에서 영화 봤다. 내가 원에 허락받고 외박 나가는 날에는 역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병표가 없으께, 그리고 원에는 이런 저런 일들이 많으니까 내가 외박 나가는 날에는 지도 뭔 핑계를 만들어서 나오는 거지. 오빠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나오면 서문시장가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거기 가서 만났다. 내가 오빠 집에 가는 날이모 그 사람은 서문시장가에서 항상 기다리고 있었거든. 어떤 때는 둘이서 시장에서 저녁 먹고 대구극장 가서 영화보고 했지.

그렇게 지내는데, 애락원에 김진옥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함흥 사람인데 우찌우찌해서 애락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 친구가 그러는 기라. “흥남으로 가라. 니 정도면 흥남 가서 살모 아무도 나환자로 안 본다. 니는 손만 표가 좀 나니까 그리로 가모 아무도 모른다.” 그러는 기라. 그 위쪽에는 손에 화상 입은 아아들이 많아서 나도 화상입어서 그리 된 줄 알거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리 가기로 했다. 그 사람은 한 달 먼저 함흥으로 가서 기다리고, 나는 원에서 수속 밟아서 엄마하고 오빠하고 기차타고 한 달 후에 갔다. 나 시집 보낸다고 우리 엄마랑 오빠가 이것저것 좀 장만해서 같이 간 거라. 그 사람은 나 기다리면서 한 달 내내 하루도 안 빠지고 흥남 역에 나와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더라. 내가 언제 올지 정확하게 모르니까 그리 한 거지. 매일 나와서 기차가 올 때마다 뛰어와서 찾다가 없으면 다음 기차가 올 때까지 노래를 부르며 왔다 갔다 하면서 기다렸다 카더라.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타관땅 밟아서 보니…” 아이고, 이 노래만 들으모 지금도 눈물이 난다. 허허허, 내가 안 올까봐 불안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더라. 혹시 가요무대에 이 노래가 나오모 그리 좋다. 옛 추억이 생각나고, 그때가 꼭 지금처럼 생생하고 그렇다. 애락원에 15살에 들어가서 23살에 나왔다. 24살에 결혼했다.

우리 오빠가 그 사람을 흥남지서에 취직 시켜줘서 먹고 사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게 웃지방은 너무 추운 기라. 방과 부엌에 벽이 없다. 아이고, 참, 그 말을 그리 못 알아 듣노. 너무 추우니까 솥이 방안에 있는 기라. 그러니까 아궁이 불 넣는 데는 부엌에 있고 솥은 방안에 있는 거지. 불 때서 방을 뜨겁게 하는 거로는 난방이 제대로 다 안 되는 기라. 부엌에서 불을 때면 자연히 난로가 되고, 방은 뜨거워도 밖이 워낙 추우니까 방안이 썰렁해. 그래서 방안에 솥이 있는 거지. 방안에 솥이 있으니까 추워서 솥을 안고 자다가 어린 아아들이 손을 데이기도 하고, 어린 아이가 뽈뽈 기어 다니다가 솥에 손을 데이기도 하는 거지. 밖에서 방으로 들어올라 하면 부엌으로 들어와서 방으로 온다. 부엌이 참 깨끗타.

그래 보니까 거기에는 나처럼 손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많아. 나는 심한 것도 아이라. 시장에라도 가면 사람들이? “아이고, 새댁이 욕 봤겄네.” 하고, 또 “어쩌다 이랬을고, 쯧쯧쯧”하지 내가 이 병에 걸렸다고는 생각을 안 하더라. 그러니 마음 편하게 살았다. 좋았지. 좋은 사람하고 사니까…… 그 사람도 겉으로 표가 안 나니까 아무도 우리를 그리 안 봤거든. 그러니 밖에도 맘대로 다니고, 그랬다.

해방이 되고 고향도 가고 싶제. 오늘 내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남으로 갈라모 빨리 가라하는 거라. 삼팔 선이 그어져서 시간이 지나면 못 간다고 하대.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서둘러 갈라고 보니까 이미 사람은 삼팔 선을 못 넘는 거라. 할 수 없이 남편 먼저 가고, 속초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때 딸이 3살이고 아들은 뱃속에 있었다. 아니다. 남편만 먼저 갈라고 간 게 아이라.

사람이 삼팔 선을 못 넘으니까 배를 타고 가는데, 사람은 배에 탈 수가 없고, 짐만 실어 가는 거지. 응, 화물선 쯤 되는 갑다. 사람들이 그 짐 보따리 안에 숨어서 가는 거지. 근데 나는 그때 임신 7~8개월 때라 배도 부르지만 3 살배기 딸을 짐 속에 숨길 수가 없지. 얼라가 울기라도 하고 보채기라도 하면 숨어 있는 사람 다 들켜서 바다 귀신이 될 판이니 나하고 딸은 어찌하든지 육로로 해서 남쪽으로 내려와야 하는 기라.

함흥에서 일부러 옷을 남루하게 해서 떨어진 광목치마를 입고 보따리를 이고 딸 손잡고 연천까지 왔다. 연천에서 밥을 사 묵으러 들어가서 이남 가는 길을 물었다. 그러니까 주인이 이남 갈려면 논둑을 타고 가야 한다고 길을 요리조리 가서 어찌 어찌 가라고 가르쳐 주더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기 가다보모 꼭 지나야 하는 다리가 나오는데, 그 다리 밑에는 소련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데, 들키모 그 자리에서 바로 총알 맞는다고 조심하라고 일러 주는 기라.

하이고 참, 밥을 시켜 묵고 해는 지고 ‘어찌할꼬’ 하고 앉아 있는데 웬 여자들이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여남은 살 먹은 머스마를 데리고 들어오는 거라. 주인이 저 사람들이 이남으로 장사를 다니는 사람들이니까 따라 가면 될 거라고 일러 주더라. 그래 그 사람들에게 나도 이남 가야한다고 데려가 달라고 했지. 어린 머스마가 딸려 있어서 말을 했지, 어른들만 있었으면 말 못했다.

알고 보니까 그 사람들은 이남에 없거나 귀한 것들을 떼서 이고지고 이남으로 가서 팔고, 거기서는 또 이북에 귀한 거를 사 와서 파는 보따리 장사들인 기라. 그 사람들이 데리고 있던 머스마는 저거 아아가 아니고, 그 사람들도 부탁 받고 머스마를 이남으로 데려다 주는 기라. 같이 가기로 하고 잠이 살짝 들었는데, 그 사람들이 깨워 보니 캄캄한 밤중이라. 해뜨기 전에 임진강에 가서 배를 타야 된다고 하더라.

너무나 작은, 그러나 너무나 소중한 할머니의 서재 사진촬영 김성리

너무나 작은, 그러나 너무나 소중한 할머니의 서재
사진촬영 김성리

새벽 두 시에 자는 애 깨워서 밥 먹고 장사꾼들을 따라 나섰다. 캄캄한 밤에 어데가 어딘지도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은 여러 번 다녀 놓으니까 잘 가대. 나는 배는 부르고 보따리는 이고 딸애 손을 잡고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길을 죽을 동 살 동 따라 갔다. 그 사람들을 놓치모 오도 가도 못 하는 기라. “새댁이 걸음이 와 그리 느리네”하면서 어서 가자고 재촉은 해도 나를 두고 가지는 않더라. 근데 그 머스마 덕분에 내가 따라 붙었지. 여남은 살 먹은 아아가 얼마나 잘 걸을 수 있겄노. 허허허 그 머스마 덕을 좀 봤다.

밤새 걷고 또 걸었다. 참 산길이 끝이 없더만. 저 멀리서 해가 떠오르려고 하니까 뿌옇게 주변이 보이는데, 옆에 보따리 장사가 한탄을 하는 거라. 알고 보이 밤새 동네 뒷산만 뱅뱅 돌았던 거라. 출발했던 그게 와 있는 기라. 하하하, 참 지금은 웃음이 나온다. 그때는 앞이 캄캄했지. 임진강으로 가서 배를 타야 하는데, 그 배를 못타면 이남으로 못 가는 거야. 육로로 걸어서는 소련군 총알에 죽을 판이고.

“아이고, 큰일 났네. 어서 갑시다. 어서” 아주머이들이 난리가 났지. 참말로 죽을 힘을 다 해서 산길을 걸었다. 밤중에 산으로 산으로 얼마나 걸었을꼬. 인자 해가 떠올라서 사방이 훤하지. 말하자면 배를 몰래 타고 임진강을 건너 이남으로 가는 거지. 그 사공은 우리를 태워주고 다시 이북으로 와야 하는데, 우리가 늦으면 그 사공이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 기라. 배 삯은 벌써 줘놨지. 그러니 전부 애가 타는 거라.

죽어라고 따라갔다. 하이고, 말 못한다. 고무신을 신고 있었는데 발은 부르트고 퉁퉁 붓고, 그래도 그 발로 죽어라고 따라 붙었다. 딸아를 업었다. 보따리를 이고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어데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 보따리 장사꾼들을 안 놓치려고 허겁지겁 따라 붙었다. 배는 부르지 아아는 업었지 보따리는 이고, 참말로 그 머스마가 은인이라. 갸는 지금 어데서 우찌 살고 있을꼬.

저 멀리 임진강이 보이고, 사공이 우리를 알아보고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대. 허겁지겁 배에 올라탔는데, 사방이 너무 훤해서 간이 쪼그라들데. “하이고, 인자 오면 어짜요. 갈까말까 했소. 왜 이리 늦었소?”하면서 사공이 한탄을 하더라. 사공도 사방이 그리 훤한데, 지도 들키모 총살이니 암만 돈이 좋아도 목숨보다 귀한가. 그때는 아무도 못 넘어가. 육지는 군데군데 소련군이 지키고 섰제, 바다는 화물선만 다닐 수 있었어. 참 살벌한 시대였다.

배를 타고 건너 편 임진강에 도착하니까 이남에서 보고 있던 순경들이 고생했다, 어서 오시오 하면서 환영을 하더라고. 참말로 이남에 왔다 싶대. 인자 거기서 화폐교환을 해 주더라. 북쪽 돈하고 남쪽 돈하고 다르니까 교환을 해야지. 북쪽으로 가는 사람하고 남쪽으로 온 사람들하고 서로 갖고 있던 돈을 다 바꿨다. 그리고는 동두천으로 갔다. 거기 수용소가 있는데, 예방주사도 맞고 어디로 갈 건지 물어도 보고 하더라.

동두천으로 가는 길은 꼭 가리마 같은 길을 걸어서 갔다. 비가 왔다. 고무신 안에 물이 차서 걸을 때마다 철컥철컥 하고, 이미 퉁퉁 부어 있는 발은 인자 고무신 안에서 불어터져서 피고름이 신 안에 흥건했다. 애기 업은 두데기(포대기)까지 물이 줄줄 흐르고, 힘든 거는 말로 다 못한다. 그래도 가야지. 동두천 수용소에서 전국으로 흩어지는 기라. 나는 일단은 대구로 가기로 했다. 친정에 가서 순천으로 갈라고 했지.

기차역에는 사람들이 억수로 많아. 기차는 자주 없고 사람은 많으니까 빨리 표부터 끊어 놔야지. 그래서 딸아를 보고 “엄마 올 때까지 꼼짝하지 말고 여게 있어라. 이 보따리 꼭 잡고 있어라.” 하고 나는 표를 끊으러 갔다. 남대문으로 가야 부산 가는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가지. 겨우 표를 끊어 갖고 오니까 보따리가 없는 기라. 보따리 어데 갔냐 하고 물어도 딸아는 말이 없고, 옆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할매가 와서 보따리 달라고 하니까 그만 주더란다. 그래서 저거 할매인 줄 알았다 안 카나. 그 보따리 안에 옷하고 돈이랑 다 들어있었는데……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에 항거한다.”[베를린에서 온 편지 11]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에 항거한다.”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나는 전에 쓴 글 <극단의 시대>(http://ephilosophy.kr/han/?p=46285)에서 유럽에 거주하는 무슬림 청년들의 극단주의화 경향과 유럽 내 반이슬람, 반외국인 정서가 양극을 이루어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고 진단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우려는 끔찍한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유럽 역사상 가장 끔찍한 언론에 대한 테러가 일어났다. 전 세계가 이 테러에 분노하고 있고, 희생된 사람들에게 추모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양심의 선언은 처벌의 대상, 폭력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는 표현의 자유의 원칙은 흔들림 없이 지켜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죽은 이들에게 추모의 뜻을 밝히고, 야만적인 폭력으로 본인들의 의사를 관철시키려고 하는 모든 형태의 종교 근본주의에 반대해야 한다. 이 큰 원칙에 우리 모두가 동의한다는 전제 하에, 나는 다만 몇 가지 세밀한 논점들에 대한 논평을 덧붙이고자 한다.

2012년 9월 독일에서 있었던 일이다.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주요 근거지를 가지고 있던 극우 민족주의 단체 프로 도이칠란트(Pro Deutschland)는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서 당시에 전 세계 무슬림과 아랍인들의 분노를 자극했던 모하메드 풍자 비디오를 상영하려고 시도했다. 당시 프로 도이칠란트와 대립하며 이미 거리 시위에서 폭력을 동원해 대항했던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살라피스트 단체들은 이 상영회를 격렬히 비판하며, 상영회가 강행되면 테러공격을 자행하겠다고 밝힌 상황이었다. 양측의 폭력충돌이 우려되고 테러위협이 제기되던 상황에서 메르켈 정부는 안전을 구실로 모하메드 풍자 비디오 상영회를 불허하여 상황을 종료시킨다. 그러자 중도좌파진영인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은 강력히 반발하며, 정부의 상영 불허조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라고 비판했다.

이 상황은 오늘날 표현의 자유가 직면한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과거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온갖 형태의 권력에 의한 억압에 저항하던 피억압자들과 진보적, 계몽주의적 지식인들, 그리고 권력자들을 조롱하고 성적 금기에 도전했던 예술가들과 문학가들의 구호였다. 이제 제1세계와 중심부 국가들에서 정치적, 성적, 종교적 표현의 자유가 상당부분 허용되는 상황에서 간혹 등장하는 표현의 자유 논쟁은 더 이상 피억압자, 소수자, 약자의 권리에 관한 것이 아니다. 거꾸로 이제 논란은 이 소수자와 약자들에 대한 혐오선동을 일삼는 배타적 민족주의자들과 극우세력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독일에서는 나치를 찬양하는 것이 불법이다. 그러나 일부 네오나치들은 여전히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앞세우며, 홀로코스트가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할 권리, 그리고 유태인과 외국인들을 비난할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라고 요구한다. 원칙적으로 모든 표현의 자유는 보장받아야 한다. 그러나 무슬림들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와 혐오를 드러내는 모하메드 풍자 비디오를 공공장소에서 상영하며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모독할 ‘표현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는가? (이를 한국의 경우에 대입해본다면, 일베와 같은 극우 인터넷 사이트 이용자들이 특정 지역인들과 여성, 장애인들 등을 모욕할 표현의 자유를 그대로 존중해주어야 하는가?) 질문을 이렇게 던진다면 대답하기는 쉽지 않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유럽에서 계몽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공통적으로 세속주의의 가치를 들고 구체제의 억압적 사회질서와 관습들을 옹호하던 종교권력에 대항해 싸웠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자코뱅과 공화주의자들은 부르봉 왕가와 귀족들뿐 아니라 특권을 누리던 성직자와 교회와도 싸워야 했다. 오늘날에도 유럽의 공화주의적, 사회주의적 좌파 진영은 동성결혼, 안락사, 낙태 등의 이슈로 언제나 보수적인 교회에 대립해 왔다.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교권주의에 대항하는 세속주의자들의 무기였다. 그렇게 해서 “계몽(세속주의적 비판정신과 표현의 자유)”이 “신화(비합리적이고 억압적인 교권주의적 종교권력)”에 대항하여 오늘날 자유롭고 개방적인 유럽을 만들어냈다고 많은 세속주의자들은 생각하고 있으며, 68혁명 이후 등장한 <샤를리 에브도> 같은 세속주의적 좌파 언론 역시, 신성시되는 모든 가치들을 가차없이 조롱하는 것이 1968년의 급진적 문화대혁명을 완수하는 길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놀라운 속도로 진행된 세계화 속에 이제 유럽은 자신들이 겪은 이 수백 년간의 문화적 충돌들, 그리고 그 타협물인 세속적인 관용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에 관한 경험을 갖추지 못한 수많은 제3세계 출신 이주민들과 공존해야 할 상황에 놓여 있다. 특히 프랑스는 인구의 10% 가까이가 무슬림인 것으로 추정되며, 독일의 경우도 터키인 이주자들이 이미 하나의 주요 사회세력으로 인정될 만큼 커다란 비중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 전부는 아니더라도, 상당수의 무슬림들에게 여전히 세속적인 표현의 자유, 그리고 모독의 권리, 불경하고 불온한 것에 대한 사회적 관용은 그들이 경험, 학습하지 못한 낯선 문명이다.

유럽에 몰려오는 아랍, 터키, 아프리카계 무슬림들은 대부분 유럽 문화 속에 동화되지 못하고, 그들 스스로의 공동체들을 형성하며 제1세계 내 타자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신앙은 그들의 공동체적 동질감을 높여주는 수단이었고, 백인 현지인들에게 시달리는 차별과 소외의 감정을 보상해주는, (맑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억압받는 피조물의 한숨”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믿는 신앙이 유럽 현지인들에 의해 조롱을 받는다고 생각해보자. 그들이 느낄 박탈감은 어떤 것이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표현의 자유는 더 이상 “신화”에 맞선 “계몽”으로 군림하기보다는, 낯선 “타자”의 등장 앞에서 깊은 자기성찰에 직면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종교권력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이라는 세속주의자들의 구호가 만약 타자, 그것도 소외받는 소수자들의 종교에 대한 조롱으로 귀결된다면, 그것은 유럽의 세속주의가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들(다양성, 개방성, 인권)에 스스로 반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현재 <샤를리 에브도>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외치는 구호 “나는 샤를리다(Je suis Charlie)”에 내가 동의하지 않는 이유다. 물론 나는 <샤를리 에브도>의 표현의 자유를 지지한다. 그리고 <샤를로 에브도>에 대한 야만적인 테러행위에 단 한 점이라도 정당화될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것이 그들의 만평에 내재된 타종교에 대한 적대감의 표출, 그리고 노골적으로 드러난 인종주의가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Je ne suis pas Charlie). 그러나 그들의 죽음에 항거한다.” 이것이 이번 상황에서 내가 취하고자 하는 입장이다. 물론 내가 샤를리가 아닌 이유는 극우파 국민전선(FN)의 창설자 장 마리 르펜이 말하듯이 이 잡지가 아나키스트-트로츠키스트 성향의 좌파여서가 아니라(르펜의 호들갑과 달리, <샤를리 에브도>는 90년대 이후 정치적으로는 온건해졌으며, 상업주의화되어 정치적 메시지 전달의 선명성보다는 상업적 스캔들을 더 즐긴다는 비판을 이전부터 받아왔다), 소수자들이 믿는 타종교에 대한 조롱이 톨레랑스에 대한 위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톨레랑스야말로 세속주의자들이 보수적인 교권주의자들에 맞서 싸우면서 쟁취하려 해왔던 것이 아니었는가?

현재 유럽 각국의 극우세력들은 앞을 다투어 이번 테러를 비난하면서 “이번 일은 예상된 귀결이고, 바로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내일 당장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라며 이슬람과 이주민들에 대한 인종주의적 적대감을 선동하고 있다. 독일에서 매주 월요일 드레스덴에서 벌어지는 페기다(PEGIDA, ‘서양의 이슬람화에 반대하는 애국적 유럽인’의 약자)의 반이슬람, 반외국인 시위대 규모는 3만에 육박하고 있으며 드레스덴을 넘어 전 독일로 확산되는 추세다. 마찬가지로 외국인들에게 적대적인 독일 국수주의 극우정당 AfD(독일을 위한 대안)의 지지율은 이미 테러사건 이전에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극우세력들의 인종주의적 증오선동과 일상에서 느끼는 억압과 차별이야말로 무슬림 청년들이 더욱 더 유럽의 세속주의적 문화가 아니라 이슬람 근본주의적인 주장들에 동조하게 되는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다. 프랑스에선 3천 명 이상이, 독일에서만 600명의 이주민 자녀들이 이슬람국가(IS)의 지하드에 동조하고자 시리아로 떠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유럽으로 돌아왔다. 독일에서 떠난 사람들 중 180명이 독일로 돌아온 것으로 추산된다. 돌아온 사람들이 어떤 종교적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 그들이 여전히 이슬람국가 측의 지령에 따르고 있는지 등은 미지수다. 독일인들은 겁에 질려 있으며, 이 기회를 틈타 극우세력이 지지를 끌어모으고 있다. 정부는 인터넷 감시를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끔찍한 악순환이다.

만약 유럽사회가 이슬람 인구를 자신들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공존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슬람 근본주의의 확장을 경계하고 테러에 단호하게 반대하면서, 동시에 수많은 무슬림들의 신앙이 왜 극단적인 성향으로 전도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2004년부터 학교에서 무슬림 여학생들의 히잡(머리에 두르는 수건) 착용이 금지되었다. 2011년부터는 길거리에서 부르카(온 몸을 가리는 두건)를 착용하고 얼굴을 가리는 행위가 금지되었다. 국가가 개인의 옷차림마저 규제하는 것은 극단적인 사생활 침해이자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다. 더군다나 이러한 규제는 신앙의 자유에 대한 침해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프랑스의 세속주의 세력, 즉 공화주의적, 사회주의적 좌파는 항상 이 문제에 침묵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세속주의 원칙에 따라 이 조치들에 찬성해왔다. 그러나 진정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람이라면 타종교가 신성시하는 선지자를 알몸으로 그리고 모독할 권리 그 이상으로, 소수자들이 자신의 믿음을 지킬 수 있는 권리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믿음에 대한 비판의 권리만큼이나 믿을 수 있는 권리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는 한 시사잡지의 만평을 보고 느낀 격분을 야만적인 학살이라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했던 사람들에게 분노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러한 행동을 사주한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들에게도 분노한다. 그러나 유럽 사회는 수많은 이슬람권 이주민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근본주의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모든 형태의 인종주의적 차별 선동을 중단해야 한다. 그것만이 이 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의 공존을 가능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지켜져야 한다. 그것이 사회의 다양성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표현의 자유는 다시금 혐오와 차별선동에 대해서는 그 스스로의 예외를 허용해야 한다. 이것만이 표현의 자유가 애초에 지키고자 했던 사회의 다양성과 관용적 질서를 가능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물론 이 예외는 결코 국가권력에 의한 강제에 의한 것이어서는 안 되며, 시민사회의 힘을 통해 설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민사회의 힘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시금 소수자와 차별받는 사람들에 대한 보편적 연대의식이다. 이 연대의식의 성장은 억압받는 타자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는 <샤를리 에브도>가 표현해온 이슬람과 무슬림에 대한 차별적이고 인종주의적 시선에 비추어볼 때 적합한 구호가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샤를리 에브도>의 희생자들을 슬픔과 분노 속에 추모하면서도, “나는 샤를리다”라는 구호에 만족할 수 없는 이유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이유로 이를 대신해 “나는 아흐메드다(Je suis Ahmed)”라는 구호를 외친다. 아흐메드는 사건 당시 숨진 아랍계 경찰관의 이름이다. 그 역시 선지자 모하메드와 무슬림을 조롱하는 <샤를리 에브도>의 논평에 수치심을 느꼈을 무슬림이었다. 그러나 그는 <샤를리 에브도>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 죽었고, 따라서의 그를 기리는 것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폭력적 침탈에 항의하면서, 소수자 무슬림의 권리 역시 방어하는 의미를 갖는다. 표현의 자유를 지키고 폭력에 항의하며, 동시에 타자화된 소수자들에 대한 연대의식을 표현하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매우 어려운 과제다.

 

 

오 탄넨바움! [베를린에서 온 편지 10]

오 탄넨바움!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2월 25일 새벽, 성탄절을 맞아 쓰는 편지.

독일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성탄절 노래는 독어로 탄넨바움이라고 불리는 전나무를 예찬한 곡 <오 탄넨바움(O Tannenbaum)>이다. 16세기부터 내려오던 전래동요로서, 1824년 라이프치히의 에른스트 안쉬츠(Ernst Ansch?tz)에 의해 크리스마스와 연관된 곡으로 가사가 수정되면서 대표적인 독일의 캐롤이 되었다. 전나무는 독일에서 흔하게 자라는 나무이면서 동시에 크리스마스 트리로 사용되는 나무이기 때문에 독일의 크리스마스와 겨울을 상징한다. 어느 곳에서 나무가 많은 독일에서는 한 겨울, 흰 눈에 뒤덮인 전나무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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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은 영국으로 옮겨가 아일랜드 출신의 혁명가 Jim Connell에 의해 가사가 붙여져 1889년 <적기가(The Red Flag)>라는 민중가요로 재탄생했는데, 이 곡은 영국 노동당을 비롯한 노동운동진영뿐 아니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응원팬들에 의해 널리 불리며 여전히 전승되고 있다. 이 곡이 과거 북한에서 번안되어 <적기가>라는 군가로 사용되었는데, 우리에겐 영화 <실미도>에서 북파 암살요원들이 결의에 찬 채 이 곡을 부르는 장면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이 영화는 당시 심기가 불편했던 몇몇 우익들로부터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국가보안법과 ‘종북’ 논란까지 불러일으킨 이 곡이 실은 독일에서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평온한 느낌의 성탄 캐롤이라는 점은 우리가 사는 “실재의 사막”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총 3절로 이뤄진 노래 <오 탄넨바움>의 가사는 지역별로, 시대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가장 고전적인 버젼은 다음과 같다. 독어로 먼저 쓰고 한글로 번역해보자.

1.

O Tannenbaum, o Tannenbaum,

wie treu sind deine Bl?tter!

Du gr?nst nicht nur zur Sommerszeit,

nein, auch im Winter, wenn es schneit.

O Tannenbaum, o Tannenbaum,

wie treu sind deine Bl?tter!

오 전나무야, 오 전나무야

너의 잎은 얼마나 충직한가!

너는 여름에만 초록빛인 것이 아니다.

아니다. 겨울에도, 눈이 올 때도 초록빛인 것이다.

오 전나무야, 오 전나무야

너희 잎은 얼마나 충직한가!

2.

O Tannenbaum, o Tannenbaum,

du kannst mir sehr gefallen.

Wie oft hat nicht zur Weihnachtszeit

ein Baum von dir mich hoch erfreut!

O Tannenbaum, o Tannenbaum,

du kannst mir sehr gefallen!

오 전나무야, 오 전나무야

너는 내 마음에 쏙 드는구나.

몇 번이고 성탄 기간에는

너라는 한 그루 나무가 이토록 나를 즐겁게 하는구나!

오 전나무야, 오 전나무야

너는 내 마음에 쏙 드는구나.

3.

O Tannenbaum, o Tannenbaum,

dein Kleid will mich was lehren:

Die Hoffnung und Best?ndigkeit

gibt Trost und Kraft zu jeder Zeit.

O Tannenbaum, o Tannenbaum,

dein Kleid will mich was lehren.

오 전나무야, 오 전나무야,

너의 옷은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준단다.

희망과 강인함은

매 시간 위안과 힘을 주는구나.

오 전나무야, 오 전나무야,

너의 옷은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준단다.

노래 가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전나무의 잎은 비단 여름에만 푸르게 만개하는 것이 아니다. 춥고 눈과 바람이 몰아치는 매서운 겨울에도 전나무의 잎은 초록빛과 그 풍성함을 유지하며 다가오는 따스한 봄을 기다린다. 그래서 전나무는 변하지 않고 늘 푸르른, 충직한, 믿음직스러운 나무이며, 또한 온갖 시련과 역경을 이겨내는 강인함을 지니고 있다. 이 때문에 전나무는 우리에게 깨달음을 준다. 전나무의 강인한 생명력처럼 우리도 이 힘겨운 시련을 버티고 이겨낼 때, 다시 도래할 따스한 봄날의 햇살을 마주할 수 있으리라는 진리가 바로 그것이다.

한 겨울의 살얼음처럼 차가운 추위 속에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칼처럼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은 살갗을 할퀴고 상처를 내며 지나간다. 한 겨울 한국은 민주주의의 죽음이라는 재앙을 선고받았다. 유권자에 의한 직접 투표로 5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한 당이,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고 정권과 권력자들에 의해 임명된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명령을 받았다. 북한과의 실질적 연관성이 증명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당의 강령이 북한의 주장과 유사하다는 것만으로 정당을 해산시킨 유례가 없는 판결이다. 선출된 국회의원들은 제명되었고, 일반 당원들에 대해서까지 공안수사의 보복이 몰아칠 예정이다.

이 판결이 매서울 칼바람인 이유는 해산판결을 받은 당의 구성원들뿐 아니라, 정권과 권력자들, 그리고 그들이 지배하는 거대한 사회적 억압체계에 대항하는 주장을 펴거나 행동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잠재적으로 ‘종북’이라는 낙인이 찍힐 위협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낙인찍기와 마녀사냥이 터져나올 것이다. 극단적인 불평등과 경제난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때마다 ‘종북’이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닐 것이다. 생존의 권리, 평등, 자주적 주권 등 실제로는 ‘부르주아적’ 근대 사회의 산물인 개념이 ‘종북’이라는 낙인과 함께 법의 외부로 추방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사회가 전근대화될 위기, 민주주의 이전의 단계로 퇴행할 위기에 처해 있다. 모든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주장들이 ‘자기검열’에 시달릴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면 ‘종북’으로 몰리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마법처럼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을 것이다.

10년 전, <오 탄넨바움>을 원곡으로 한 북한가요 <적기가>로 인해 영화 <실미도>가 국가보안법 논란에 휘말렸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와 같은 상황이 하나의 희극이며 구시대적 냉전적 사고의 유물이라고 웃어넘겼다. 그 때 사람들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한 우스꽝스러운 희극적 사건이 드러내는 비극성이 커지고 커져, 결국 한 사회 전체를 잠식하게 될 줄은.

 

실미도 항공사진

실미도 항공사진

 

거센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냉혹한 겨울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회적 시련이다. 이 현실의 역경 속에서, 다시 전나무가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을 새겨야 하는 것이 아닐까. 현실이 어렵다 하여 색을 변화시키지도 말 것이며, 고난과 역경이 닥치더라도 잎을 떨어뜨리지 말고 언제나 한결같이, 늘 그래왔던 것처럼 푸르름을 유지하라. 그러면 지금 너를 떨게 만드는 추위도, 너의 얼굴에 생채기를 내는 매서운 찬 바람도 그칠 것이다. 해가 나고, 따스한 봄이 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푸르름도 더욱 빛을 발하리라. 전나무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성탄의 밤에, 충직하고 또 강인한 전나무를 생각한다.

 

 

“소록도 김 가요” [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7

“소록도 김 가요”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요새 자꾸 눈이 침침하고 전에는 보이던 것도 이제는 안 보인다. 나는 책 읽는 게 참 좋은데, 전에 니가 갖다 줬던 책도 이제는 도통 읽을 수가 없네. 왜 이럴꼬? 기운도 없고 보이던 것도 안 보이고…… 나는 여러 사람 있는 데에 가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혼자 조용히 있는 게 좋다. 테레비도 연속극이나 쇼 같은 거는 재미가 없다. 뉴스나 스포츠가 좋다. 저 봐라. 씨름한다고 난리네. 씨름 저게 참 재미있는 기라. 옛날만큼 재미있지는 안 해도 재미가 안 있나.

저 사람들은 외국인인데 씨름을 참 잘한다. 감독이나 코치도 외국 사람이제? 하이고, 우짜겄노. 그만 번쩍 들리네. 저게 씨름의 재미라. 단번에 매다 꽂는 거, 저리 큰 사람을 번쩍 들어올리고, 힘이 장난 아니라. 스포츠를 보고 있으면 재미가 있다. 저 정도는 보인다. 그런데 얼굴이랑 표정 같은 거는 자세하게 안 보인다. 참으로 답답하다. 안약도 하루 네 번씩 꼭꼭 넣는데 나아지는 기 아이고 자꾸 나빠진다. 약으로 어찌할 수 없는 기 나이인기라.

작년(2013년) 11월까지는 안경 없이도 글이 잘 보였다. 큰 글씨 작은 글씨 할 것 없이 잘 봤는데 인자는 안경이고 뭐고 잘 안 보인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저기 창가에 햇빛이 들어오면 그 밑에서는 글자를 읽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안 된다. 참 답답하다. 안약도 넣고 병원에 가도 뾰족한 대답이 없네. 우찌해야 가는 눈을 잡아 볼꼬?

저게 봐라. 지금 끓나 안 끓나? 뜨겁다. 조심해서 봐라. 아직 시계는 눈 앞에 갖다 대면 아직 대충 보고 시간을 알 수 있다. 끓어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 안 끓는 게 아무래도 사단이 났는 갑다. 응, 맞다. 계란이다. 계란을 하루에 두세 개 먹으면 눈이 좋아진단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계란을 삶아 놓고 먹는데, 조금 낫는 것 같다. 블루베리도 먹으면 좋단다. 그래서 블루베리를 저리 사 놓고 먹고 있다.

책 읽는 할머니.

책 읽는 할머니.
<사진 – 김성리>

레지나 있제. 레지나 언니가 나이 들어 영 안 보였는데, 계란을 삶아서 먹고 눈이 좋아졌단다. 그래서 레지나가 와서 나보고 계란을 삶아서 먹어 보라고 하더라. 레지나도 안 보이지. 레지나는 너무 많이 안 좋아서 해봐도 소용이 없다고 하고, 나는 인자 눈이 안 보이기 시작하니까 한번 삶아 먹어보라고 해서 먹고 있다. 아이고, 그럼 그렇지. 그게(콘센트) 딱 안 끼어 줬고나. 바로 끼웠나? 안 보이니 병신이 따로 없다. 봐라. 금방 뜨거워지제? 인자 좀 있으면 끓는다.

시계 보고 있다가 끓고 나서 20분 지나면 끄고 식힌다. 저기 옆에 뜰채 안 있나. 내가 다 갖다 놓고 한다. 걱정하지 마라. 손 안 데이게 뜰채로 떠서 저 그릇에 담아가서 찬물로 식혀서 다 식으면 먹는다. 매일 삶는 게 힘들어서 왕창 삶아 놓고 하루 두세 개씩 먹는데, 진짜 좀 좋아졌다. 며칠 전까지는 저 테레비에 나오는 사람들 얼굴이 잘 안보였는데, 이제는 얼굴이 보인다. 블루베리도 저리 사다놓고 열심히 먹는다. 인제 큰 글자도 보이고. 눈이 빨리 좋아져서 책도 읽고 하면 좋겠다.

안약은 내가 혼자서도 잘 넣는다. 허허허 그럼 네가 넣어주라. 뭐한다고 자꾸 넣어준다고 하노. 한 방울씩만 넣어라. 두 가지를 넣어야 하니까 많이 떨어지면 밖으로 주르르 흐른다. 아이고, 옛날에는 참 잘 보이고, 잘 보일 때는 그게 좋은 건지도 몰랐다. 작년 11월까지는 안경 안 쓰고 책도 읽었다. 이리 빨리 나빠지는 게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요새 들어 안 아프던 데가 자꾸 아프네.

팔도 아프제, 눈도 침침하제, 입도 아프제, 장도 안 좋아 변은 자꾸 흐르고, 그래 그런가 머리도 아프고, 이제 어찌 될 긴지 모르겄다. 조끔만 앉아 있어도 궁둥이가 아프네. 이 동그랗게 구멍 있는 방석 이것도 레지나가 갖다 주더라. 방바닥에 그냥 앉아 있으니 어찌 아프고 불편하든지. 이걸 깔고 앉으니까 그래도 영 낫다. 궁둥이 살이 없어서 그런가. 암튼 너무 불편하고 하루하루 지내는 게 힘들다.

우리 오빠가 나 어릴 적에 나를 얼마나 좋아했다고. 나를 참 사랑했다. 그런데 그 오빠도 하나 있던 남동생도 다 갔다. 둘 다 암으로 죽었다. 우리 오빠는 51살에, 우리 남동생은 63살에 죽었다. 요새 변이 자꾸 흘러서 쬐끔 먹던 밥도 잘 안 먹는다. 국수 삶아서 먹는다. 국수를 삶아서 먹으면 좀 낫고. 왜 이리 됐을꼬. 실수할까 싶어서 나가는 것도 싫다. 참 깔끔했는데, 아무래도 갈 때가 다 돼 가는가. 나도 이제 가야지. 하기사 너무 많이 살았다. 그쟈. 이리 머리가 허옇게 될 때까지 뭐한다고 살고 있을꼬. 뭐 좋은 거 볼 거라고.

1948년도에 소록도로 갔는데, 그때의 소록도는 일종의 형무소라. 광주 형무소의 소록도 지소꼴로 보면 돼. 그 형무소에 있던 나환자들 중에서 좀 말썽을 일으키고 폭력을 쓰는 나환자만 따로 소록도에 보냈는데, 나중에는 아무 문제 안 일으키는 나환자들까지도 그냥 모두 소록도로 보냈어. 거기는 무서운 곳이라. 나는 거기서 4년 살았어. 1952년도에 나왔어. 그래도 기억은 생생해.

그때 소록도에는 감금실이 있었는데, 딱 가마니 한 장 크기라. 화장실은 뭐 그냥 구멍만 하나 파 놓은 거고, 창문이라고는 밥그릇 정도 크기로 있었어. 밥이라 해야 주먹밥 하나를 공기에 담아서 그 구멍으로 밀어 넣어 줬지. 말썽을 일으키거나 말 안 들으면 감금실에 보내는데, 살아나온 사람보다 죽어 나온 사람이 더 많았지.죽어도 곱게 땅에 못 묻히고, 일단 죽으면 모두 해부하고 화장해버렸어.

먹을 것도 귀했지. 나는 돈이 없어서 배급 주는 걸로 살았어. 옛날부터 있었던 사람들은 저축미가 있어서 배급 주는 게 시원찮아도 괜찮았어. 또 돈이 있으모 쌀을 얼마든지 살 수 있는데 나는 돈이 없어서 배급 주는 겉보리쌀을 도구통에 넣고 찧어서 껍질 벗겨 먹고, 어쩌다 알양미(안량미)가 나오면 그때 쌀밥을 쬐끔 먹을 수 있었어. 주로 강냉이 죽을 먹었어. 소록도는 바닷가라서 파래가 많거든. 파래 뜯어서 구호물자로 나오는 강냉이하고 섞어서 죽을 끓여 먹었다.

소록도에서는 한 방에 8명이 살았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8명이 사는데, 큰 가마솥에 밥을 같이 했어. 아이고, 나는 그런 거 처음 봤다. 각자 요만한 밥종지가 있어. 거기다가 쌀이나 보리를 담아 내 놓으면 그 밥그릇 채로 솥에 넣어 밥을 했거든. 내가 젊어서 주로 내가 밥을 했어. 담아 주는 밥그릇을 받아서 담겨 있는 곡식을 씻고는 다시 그 밥그릇에 부어서 각자 밥그릇을 솥에 넣었어.

그리고 나무를 때서 밥을 하면 희한하게 밥그릇 안에 밥이 되어 있어. 그 밥그릇을 각자 가져가서 먹었지. 내 옆에 붙어 있던 딸이 다른 사람 밥그릇을 보고 “어매, 우리도 저런 거 먹자”하고 많이 보챘어. 그 어린 게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면서 “파래죽 안 먹을래, 파래죽 안 먹을래”하던 소리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 때 그 기억들은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가슴이 아프다. 아프고말고.

아들은 소록도에서 낳았다. 소록도에서는 아이를 낳아도 키울 수가 없었다. 그라고 임신한 걸 들키면 바로 낙태시킨다. 10달 된 태아도 낙태시켜 화장터로 가져간다. 내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하루는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어데서 아 우는 소리가 들리더라. 두리번 거려보니까 어떤 사람이 대야를 안고 가는데 그 대야 안에서 아 우는 소리가 들리더라. 어데로 가는 가 했더니 옆에 사람이 말해주대. 신생아를 담아 화장터로 데려간다고. 그때 소록도는 신생리, 남생리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화장터는 구봉리에 있었다. 그때 아들이 태중에 있었는데, 내 심정이 어땠겠노.

거기서 나는 아들을 낳았다. 내가 소록도에 갈 때는 배가 그리 표가 안 났어. 딸 업고 보따리 들고 있으면 표가 안 났거든. 그래서 무사히 태중에 아들을 품고 들어갔다. 같이 있던 사람들이 그리 중한 환자들이 아니고 정도 있어서 안 일러바치고, 나도 배가 부르니 들킬까 싶어서 숨어서 지냈다. 그런데 아를 낳을 때쯤에 원장이 바뀌었어. 고 씨 성을 가졌는데 그리 무지막지하게 신생아를 죽이는 일을 못하게 했어. 그래서 아들을 무사히 낳았어. 옆에 있던 사람들이 “니는 참 복도 많다. 운도 좋제”하며 많이 부러워했다.

소록도에 갈 때 딸은 4살이었는데, 그리 오래 같이 있지는 못했다. 몰래 낳아도 곧 들키거나 일러바쳐서 신생아는 그리 버려지고 좀 자란 아이들은 보육시설로 강제로 뺏어 갔거든. 우리 딸도 그만 7살 때 보육원으로 갔다. 그래도 아들은 품에 안고 4살까지 키웠다. 딸을 보육원으로 뺏기다시피 보내고 지냈는데, 안 되겠더라. 아이들이 학교를 가야하는데 우짜꼬 싶은 기라. 그때 마침 우리 동생이 손을 써줬어.

딸 7살, 아들이 4살 때 소록도에서 나왔다. 그때가 1952년도였어. 하나 있던 남동생도 나병을 앓았어. 소록도 가기 전에 애락원으로 가려고 했는데, 애락원에 있던 동생이 어떻게 형제가 같이 있냐고 했어. 나는 같이 있는 사람들도 봤다고 했는데, 내 동생이 “누이가 오면 내가 나갈 거요.” 하니 우째, 내가 소록도로 갔지. 그런데 동생이 애락원에서 있어보니 형제끼리 더러 와 있으니 전출신고를 해줬어. 응, 밖에서 가족이 전출신고를 하면 나올 수 있었어. 애락원은 전에도 있었고 친정이 있는 대구여서 마음이 한결 편했지.

그런데 거기서 딸을 잃었다. 11살 때 뇌막염으로 갔다. 열이 나고 아픈 딸을 업고 애락원 밖에 있는 소아과로 다녔다. 지금은 뇌막염 그거 잘 낫는다는데. 그 병이 그리 머리가 아픈 가봐. 어린 게 “아이구 머리야 아이구 머리야”하고 머리를 잡고 뒹굴더라. 뭘 조금만 먹여도 몽땅 토하는 기라. 지 먹이던 밥그릇에 토물을 담는 그런 식이었어. 하, 휴우, 살아 있으모 지하고 둘이 앉아 옛말하고 살 건데……

딸 잃고 아들이 7살 때 애락원에서 나와서 의성 정착촌으로 갔어. 아들은 대구 외갓집에 맡기고. 애락원에서는 아무 것도 못하지. 아들을 초등학교라도 보내고 공부시키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뭐든지 해서 벌어야지. 그런데 애가 딸려 있으니 여기저기서 다 안 받아주는 거라. 그래서 아들은 대구 외갓집에 맡기고 나만 정착촌으로 갔다.

나는 혼자 정착촌에 있으면서 동냥을 다녔어. 뭔 돈을 보냈겄노? 동냥한 쌀을 보내주고, 학비는 좀 커서는 지가 벌었지. 우리 오빠가 데리고 있었어. 올케가 참 사람이 좋고 넉넉해서 구박 안 하고 중학교까지는 보내줬어. 남동생 올케도 있었는데, 오빠 올케가 우리 아들이 부모도 없이 그리 있으니 안쓰러워서 학교 갔다 오면 줄 거라고 먹을 걸 감추어 놓으면, 밑에 동생 올케는 와서 뒤져서 싹 가져간다고 그리 하더라.

이 철없는 아들이 지 외갓집에서 살면서, 시키지도 않는데 큰 소리로 “우리엄마 있는 데는요, 기계로 솥을 돌리요”하고 노래를 부르는 기라. 그러면 오빠나 올케는 기겁을 하고 입을 막았제. 애락원에서는 큰 솥에 쌀을 안쳐서 기계로 밥을 했거든. 게다가 아이가 똘똘하고 대답을 잘 하니까 옆에 어른들이 “네 성이 뭐꼬?”하고 물으면 “소록도 김가요”하는데, 참 기가 막히는 기라. 기가 막히제. 지금은 이리 웃어도 그때는 나환자 아들이라고 사람들이 알까봐서 간이 오그라들었다. 참 식겁할 일이제. 우리가 소록도에서 살다 온 걸 알면 안 되지. 사람들이 알면 쫓겨 날 건데.

그런 놈이 커서 대구 달성고등학교 나와서 서울대를 들어 가대. 고등학교 때에는 지가 과외해서 돈 벌었어. 부모라고 학비 대 주고 용돈 대 주고 그런 것 못했지. 저거 아버지에게도 가 봤다. 경북에 있었는데, 전부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사니 넉넉하지 않은 기라. 아이고, 나는 그 농사일을 도저히 못하겄더라. 그냥 보통 농사가 아이고 참 험하더구나. 그나마도 있기가 어려워서 그냥 아들 데리고 떠나왔어.

어미가 돼서 잘 입히고 잘 먹이지는 못해도 밥이라도 안 굶길라고 동냥을 다닌 거야. 동냥을 가면 술도 끼얹고 욕도 하고 그러지 뭐. 그래도 사회는 동냥이라도 할 수 있는데, 소록도나 애락원은 그런 걸 못하지. 한번은 개를 풀었는 기라. 그만 물렸는데, 욕은 하면서도 쌀을 대두 1말 주더라. 요게 이게 그 상처인데, 개에게 물린 것보다 쌀을 그리 얻으니까 좋아서 아픈 줄도 모르겄더라. 그리 커서 장가도 가고, 손자 하나는 서울법대 나오고 하나는 서강대 나왔다.

 

 

박원순과 보베라이트: 서울 시민인권헌장의 폐기를 지켜보며 [베를린에서 온 편지 9]

박원순과 보베라이트: 서울 시민인권헌장의 폐기를 지켜보며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성적 지향을 근거로 성적 소수자를 차별해선 안 된다는 내용이 담긴 서울 시민인권헌장이 폐기되는 과정은 많은 물음을 낳는다. 무엇보다도 이 문제는 그동안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젊은 층의 진보적인 시민들에게 광범한 사랑을 받아온 박원순 시장이 보수적 종교인들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필자는 지난 8월 베를린을 방문한 박원순 시장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세월호 유가족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조선일보>가 마련한 독일-한국 교류 행사에 참석한 것이라 눈치가 꽤 보였을텐데도, 박원순 시장은 당시에 세월호 특별법을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중이던 교민들을 방문해 악수를 나누며 격려를 해주었고, 이런 모습은 베를린 교민들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베를린 세월호 특별법 서명운동을 격려하는 박원순 시장

베를린 세월호 특별법 서명운동을 격려하는 박원순 시장

 

시장으로서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

 

베를린을 방문한 박원순 시장은 베를린 시장인 클라우스 보베라이트를 만나 두 시의 우호관계 증진을 논의하며 “문화관광 분야 교류를 위한 업무협약(MOU)”를 체결했다. 이날 박원순 시장을 만나 함께 악수를 나누고 베를린과 서울의 공동의 미래에 대해 논의한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은 2002년부터 올해까지 무려 13년째 베를린 시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오늘날 젊은 보헤미안 예술가들과 학생들에게 전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는 문화도시 베를린을 만들어낸 주역이다. 또한 그는 동성애자이기도 하다. 이미 정식 시장이 되기 전에 이미 그는 커밍아웃을 통해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밝혔으며, 그가 했다고 알려지는 “나는 동성애자입니다. 그건 그런대로 괜찮아요 (Ich bin schwul ? und das ist auch gut so!)”라는 말은 그 이후 수 많은 사람들에게 젊고 개혁적이며, 소수자와 약자를 대변하는 베를린 시장으로서 그의 이미지를 어필해왔다.

 

사진 2) 박원순 서울시장과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 (사진제공: 서울시 홈페이지)

사진 2) 박원순 서울시장과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 (사진제공: 서울시 홈페이지)

 

무려 13년째 자기 자신을 동성애자로 밝힌 시장이 통치하는 도시에 사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시장으로서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고 말하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발언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첫째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시장은 어째서 소수자의 인권을 대변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인지에 대해서다. 과거 시민운동가로 활동한 박원순 시장은 여러 차례 동성애자를 비롯한 소수자의 인권에 대해서 옹호한 바가 있다. 그런데 시장은 중립을 지켜야 하므로 갈등을 부추길 수 있는 인권헌장 제정에 대해서 찬성할 수 없다고 말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이라는 자리가 모든 시민의 자유로운 삶과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점을 감안해보면, 오히려 ‘시장이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물음은 다시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진다. 만약 언론에 알려진대로 박원순 시장이 “시장으로서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고 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말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동성애는 지지 또는 반대와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감정과 사랑에 관한 것으로,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맺는 관계의 형태 중 하나이며, 따라서 타인의 지지와 동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군가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차별과 소외, 억압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그 누구도 인종과 종교, 성적 지향에 따라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현대 사회의 원칙에 비추어볼 때 정당하지 못한 일인 것이다.

따라서 시장이라는 공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은 서울시 안에서 보편적인 가치인 인권이 지켜지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불평등과 차별을 해소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이를 소홀히 하는 것이야말로 태만이다.

 

억압의 상처?

 

베를린 놀렌도르프광장(Nollendorfplatz)은 동성애자들이 많이 거주하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이곳에 가면 나치의 지배 하에서 억압 속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 동성애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있다.

 

사진 3) 놀렌도르프 광장의 희생된 동성애자들 추모비

사진 3) 놀렌도르프 광장의 희생된 동성애자들 추모비

 

나치가 집단적으로 학살한 것은 유태인들만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떠돌이생활을 하는 (흔히 집시라는 차별적 이름으로 알려진) 로마족, 그리고 동성애자들 역시 탄압을 받았고 수용소에서 죽어갔다. 게르만 민족의 우월함을 유지한다는 나치의 광신적 우생학의 관점에서는 동성애자 역시 게르만족의 자손 번식을 가로막는데다, 게르만족의 성적 미풍양속을 해치는 제거돼야 할 사회의 악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동성애자들을 향해 온갖 폭력적인 발언들을 쏟아부으며 그들에 대한 인권을 인정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보수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나치의 그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리고 나치의 기억 때문에 독일에서 소수자에 대해 노골적으로 차별을 선동하는 사람에게는 지금 한국에서 보수 차별주의자들이 소수자들에 대한 증오를 선동할 수 있는 표현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을까? 소수자 차별은 범죄다. 그리고 모든 시민의 인격적 평등을 주창하는 헌법의 가치가 존중받는 나라에서라면 당연히 범죄가 되어야 한다. 동성애라는 사랑의 형태가 아니라,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증오야 말로 사회적으로 추방해야 할 범죄인 것이다.

 

보론: 인간의 권리와 신의 권리?

 

보수 종교인들은 신이 동성애를 금지했으므로, 소수자의 인권 역시 존중받을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런데 ‘인간의 권리’는 ‘신의 권리’와 양립될 수 없는 것일까? 철학자 칸트는 양자가 양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의 도덕법칙을 신의 계명으로 여기고 살아갈 때 나는 자유로워지며, 내가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유를 보장해주는 자연에 있어 인간인 나의 존재가 목적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목적의 관계는 다시 신의 존재를 전제해야 하므로, 결국 ‘나의 자유’와 도덕법칙은 ‘전능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유일한 길이다. 이것이 칸트가 인간의 자유와 이성, 도덕의 관점에서 신의 존재를 논하는 방식이다.

자유로운 인간은 신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신을 공포의 대상, 복종해야 할 존재로 여기는 것은 미신과 우상숭배의 흔적이다. 진정한 신학과 종교는 신을 나의 자유(그리고 자유로운 의지에서 나오는 도덕법칙)를 보장해주는 세계의 근원적 존재자로 표상하는 데에서 출발하지, 엎드려 절하며 두려워 몸서리치는 데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신이 동성애를 금지했을까. 물론 몇 구절들을 인용해 기독교는 동성애와 양립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성경을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다. 예컨대 성경에는 근친상간도 등장한다. 창세기를 보면 소돔에서 도망쳐나온 롯의 두 딸이 번갈아가면서 아버지를 잠들게 만든 후 겁탈하는 장면도 등장한다(창세기 19:30~38).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율법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전혀 적용될 수 없을 뿐더러, 기독교인들도 전혀 지키지 않고 있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등장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동성애자들은 사랑을 원한다. 그것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보수 기독교인들의 증오의 감정보다 훨씬 더 숭고한 감정이다. 인간의 권리는 신의 권리와 모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이 서로 증오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인간에게는 다른 인간을 차별할 권리가 없다는 것. 그래서 인종, 종교,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만인이 동등한 법적 인격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의 원칙이다. 지금은 마녀를 이단심문해서 불에 태워버리던 중세, 혹은 천주교도들이 조상에게 제사지내지 않는다고 참수해버리던 조선시대가 아니다. 만인의 인격이 동등하다는 것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현대 사회다.

동성애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는 사람은 결국 현대의 성과를 되돌리고 사회를 전근대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하는 셈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지, 뒤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극단의 시대 [베를린에서 온 편지 8]

극단의 시대 [베를린에서 온 편지 8]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960년대 서구의 청년들은 체 게바라에 열광했다.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뒤 권력을 거부하고 다시 볼리비아의 정글로 돌아가 싸우다 전사한 게릴라의 영웅. 1968년의 학생운동 분출 이후 급진화된 일부 청년들은 70년대에 도시게릴라 운동을 벌인다. 독일과 일본 적군파, 이탈리아 붉은여단은 테러라는 수단에 의존해 세계를 변혁하려 했다. 그들의 방법은 틀렸지만, 적어도 그들의 이상은 원대했다. 평등한 세계.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슈피겔지 기자 출신으로 알렉산더 바더와 함께 적군파를 이끈 울리케 마인호프는 독일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잇는 좌파진영의 성녀와 같은 존경을 받는다.

오늘날 서구사회로 진출한 무슬림들의 자녀들은 높은 차별의 벽과 깊은 절망 앞에서 지하드 전사를 꿈꾼다. 턱수염을 기른 살라피스트와 근본주의 종교지도자들이 거리집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슬람 국가건설의 당위, 그리고 지하드 성전의 참전을 호소하면 차별 속에 절망하던 무슬림 청년들의 심장이 뛰기 시작한다. 트위터, 유튜브 등에는 검은 두건을 걸치고 바주카포를 쏘는 지하드 전사의 영상이 뮤직비디오처럼 화려하게 편집되어 돌아다닌다. 영상 매체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더욱 큰 자극을 받는다. 그들은 터키 국경을 넘어 이라크와 시리아의 교전 지역에 진입해 지하드 전사가 된다. 지금 중동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슬람국가(IS) 전사들 중 상당수는 유럽, 미국, 호주 등에서 온, 아랍어를 하지 못하는 서구출신 이민자들의 자녀다. 그래서 영국의 잘나가는 힙합DJ가 어느날 유튜브 동영상에 출연해 미국인 기자의 목을 베는, 영화에서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 현실이 되고 있다.

60년대에 청년들이 붉은 별이 그려진 베레모를 쓰고 파이프담배를 문 에르네스토 게바라에게 열광했다면 21세기에 유럽 한복판에 사는 무슬림 청년들은 검은 두건을 두르고 검은 깃발을 펄럭이며 코란과 기관총을 양손에 든 지하드 전사에 열광한다. 70년대에 체 게바라의 후예들에게 적어도 평등한 세계에 대한 이상이 존재했다면, 오늘날 무슬림 청년들은 수니파 이슬람 신정국가를 만들어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광신적 근본주의를 꿈꾸고 있다. 시아파 무슬림, 소수파 기독교도, 쿠르드족 등에 대한 인종청소와 모든 종류의 광적 폭력은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헤겔이 말한 것처럼, 객관적 인정을 결여한 주관적 확신이 그 자체로 초월적, 절대적 정당성을 얻었다고 자처하는 순간, 그것은 종교적 광신주의가 된다. 이념이 아니라 종교적 광신을 위한 살상이 청년들을 마법처럼 휘감는다. 세계가 얼마나 퇴보했는가를 이처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

지난 9월, 독일정부는 독일 내 IS의 불법화를 선언했다. 내무부장관이 기자회견을 열고 이제 거리집회에서 IS의 상징이나 깃발을 드는 것, 신문 등에 IS 지지광고를 내는 것, 거리 연설 모두 범죄로 형사처벌될 거라고 강하게 경고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효력이 없어 보인다. IS가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 대규모 거주지역인 코바니를 맹공격하며 쿠르드족에 대한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있는 가운데, 독일 전역에서는 10월 7일, 쿠르드족 이민자들이 거리시위를 통해 IS의 학살을 규탄했다. 그런데 함부르크에서는 IS의 지지자들이 쿠르드족 시위대를 습격해 양쪽 진영 사이에 칼과 쇠파이프가 동원된 격렬한 거리전투가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불법화라는 방식으로는 IS 지지자들이 생겨나고 공공연한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저지하는 데 한계가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유럽의 이슬람권 이민자 청년들이 종교적 근본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누적되어 온 차별과 박탈, 배제의 원한감정(Ressentiment)이 그들로 하여금 반사회적 폭력으로 나아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속국가의 법보다 신의 법(물론 정작 코란은 폭력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여러 종교학자들이 말하고 있지만)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에게 ‘불법’이라는 표식이 얼마만큼 효력이 있겠는가?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독일 정부에게 다음과 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테러단체 IS를 불법화한 독일정부는 그렇다면 노골적인 인종주의 네오나치 정당 NPD(독일국민당)를 그동안 어째서 불법화하지 않았는가. 동독 지역의 반실업 상태 독일 청년들이 극우 이데올로기에 감염돼 이주자들을 공격하고 NPD와 같은 극우정당들(최근에는 NPD보다는 온건하지만, 마찬가지로 외국인 혐오와 유럽연합 탈퇴 등 독일민족주의에 기댄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구동독 지역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에 투표하는 것을 왜 방치해왔는가? 무슬림 청년들이 차별의 벽에 막혀 극단적인 대안을 찾고 있는 현상에는 이주민 정책을 실패로 이끈,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독일 청년들 사이에 인종주의가 뿌리내리는 것을 방조한 정부 자신의 책임은 없는가?

극단적인 불평등과 갇혀 있는 현실, 불투명한 미래에 좌절한 유럽의 청년들은 극우 인종주의에, 이주민들의 자녀들은 종교적 광신주의에 물들고 있다. 옆 나라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유럽의회 선거에서 극우정당(프랑스 국민전선(FN)과 영국의 영국독립당(UKIP))이 1위를 차지했다. 한 편에서는 극우 인종주의적 선동에 현혹되어 외국인들에 대한 증오범죄를 저지르는 빈민층 독일 청년들이, 다른 한 편에선 이슬람 신정국가 수립을 위해 지하드 성전에 동참하려는 무슬림 청년들이 거리에서 유혈낭자한 전투를 벌이기도 한다. 이제 이러한 폭력은 쿠르드족과 IS 지지세력의 충돌에서 보듯, 같은 무슬림 청년들 사이의 대립으로도 번지고 있다. 극단의 시대다. 극단적인 불평등은 극단적인 분열과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여러 극우 청년 단체들이 이제 온라인을 벗어나 조직력과 자신감을 과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는 소식들이 들린다. 우경화와 약자에 대한 조롱, 국가에 대한 신화 속에 뭉친 이들의 활동은 IMF 이후 미래가 막혀버린 절망적인 세대의 극단적인 탈출구인 셈이다. 그들 역시 결국 이 극단의 시대가 만들어낸 피조물인 것이다. 극단의 시대, 이 극단의 쳇바퀴를 과연 멈출 수 있을까?

 

 

베스비오스 화산의 문둥이들 [이재원의 노동이야기]-13

베스비오스 화산의 문둥이들

 

이 재 원(한철연 회원)

 

지하철을 타면 귀신같이들 알고 자리를 비켜준다.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꼭 필요한 때에만 불러 쓰고 버려도 되는 목수가 되었다. ‘너는 나이가 들어서, 어차피 장기간 일 할 처지가 못되는 목수이다’, 라는 뜻으로 땜빵 해달라는 말을 받아들인다. JJ가 기존 목수 세 명이 빠져나갔으니, 땜빵해 달라고 연락해 왔다. 나 외에 L씨가 땜빵하러 갔다.

P 하천 수중보, 도로 쪽 벽체 공사이다. 가을 바람은 좋고, 주변 경치도 좋다. 옹벽은 양 끝은 1미터, 중간 3미터, 길이 약 100미터이다. 그 중간에 하천을 가로지르는 보를 만들 것이다. 옹벽 높이 상부는 30센티미터, 하부는 헌치, 헌치 위로 40센티미터이다. 아래, 위 두께가 달라서 거푸집을 지탱해 줄 규격품 타이가 없다. 이런 경우 막 타이라고 해서, 거푸집 양 족을 관통시킨 기다란 쇠 볼트 양 족에 나비너트로 거푸집을 고정시켜 인장력을 유지하는 공법을 쓴다. 나를 부른 사람은 JJ였으나, “전주 이 씨 적손”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는 이와 손 맞춰 일했다. 바탕 콘크리트는 이미 완성되었다. 우선 바탕 콘크리트 위에 천변 쪽 직선 옹벽 폼을 짜 올렸다.

그 다음에는 땜빵 두 인간이 손 맞춰, 벽체에 가로, 세로 철봉 지주대를 세우는 작업을 했다. 우선은 가로 지주대를 반생이로 고정시킨다. 그 다음에는 세로 지주대를 막볼트 양 쪽에 세워 역시 반생이로 고정시킨 후, 막볼트를 조여주었다. 그 다음에는 보가 일직선이 되도록 ?’도리’를 잡아주었다. L은 벽체 위로 올라가서 추를 본다. 나는 터파기 한흙 위에 비스듬히 ‘도다이’, 지주터를 설치한 후, 지주터와 벽체에 철제 서포트를 걸치고, L의 신호에 따라 시우나 빠루를 이용해 수직이 되도록 서포트 밑면을 밀어준다.

 

1. 개발의 평가 기준, 그리고 악인들

한철연 논술학교 시절 예상에 없었던, 그리고 당시로서는 짭짤한 수입 덕분에 방학 때마다 이곳 P하천 상류, 물 맑고 산 좋은 곳에서 지냈다. 동네 청년과 어울려 물고기 잡고 버섯 따고 몸에 좋다는 약초 캐어 먹었다. 지금도 그를 따라다니며 배웠던 송이버섯 있는 곳, 싸리버섯 있는 곳, 더덕 있는 곳을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산불이 나서 소방용 헬기가 뿌린 소화제 때문에 그 산에서 나오는 것들을 먹을 수 없다. 물고기 잡는 것도 특이했다. 밤에 랜턴을 물에 비추면 물고기가 돌 틈에서 자고 있었다. 청년은 톱 끝으로 중택이를 가격했다. 중택이 넣고 끓인 라면은 진미였다.

처음 P보의 용도를 들었을 때에는 ‘보가 만들어지면 물놀이하기 좋겠다’라고만 생각했다. 얼마 전에 여행했던 연천강 보도 생각 났다. 사람들이 연천보 근처 물 맑은 곳에서 텐트 치고 야영도 하고 낚시질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수중보를 만드는지 궁금해졌다. 물은 흐르는 것 아닌가? 농업 용수를 쓰기 위해서 만드는 보라면 좋다. 시민들에게 맑은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한 것이라면 더욱 좋다. 그러나 4대강 사업에서 보듯, 입찰 업체들이 담합하도록, 오직 기업들의 이익만 챙겨 주고 녹조 라테를 만들었으되 아무 쓸모 없는 흉물을 만드는,? ‘삽질’을 위한 삽질이라면 공무원들은 “제발 놀아야 한다”.

개발의 논리가 ‘발전’이라는 수식어로만은 안 된다. 어떤 개발이든, ‘이 개발에 의해서 어떤 공익이 있는가’를 따져야 한다. 거대 토목 공사들, 이를테면 김제 만경제방, 인천 영종도 간척사업, 오이도 제방, 천수만 간척사업을 보자. 서해바다 곳곳을 틀어막은 제방들은 물고기들을 멸절시켰다. 이들 사업들이 공익이 있는가의 여부는 아예 따지지 않았다. 공익 보다는 거대 재벌들에게만 이득을 주었다. 원주민들은 생계 터를 잃어버렸으며, 국민들은 자원을 잃어버렸다.

P천의 보는 어떤 공익이 있는가? 이 곳 도시는 거대 담수호에서 수돗물을 끌어온다. 지금가지 농업용수는 해결되고 있었다. 보가 세워지면 보 아래 동네는 생활용수가 새 물로 희석되지 못하여 썩은 냄새를 풍길 것이다. P천은 거대 도시를 관통해 흐르기 때문이다.

공익과 관련해서 또다른 질문을 하게 된다. 지난 정권 시절 해외 투자 캐나다 유전은 1조원에 서사 900억에 되팔았단다. 기업은 이윤에 매진한다고 해서 어떤 일이든 이윤을 위한 행위는 묵과할 수 있는가? 누군가가 부정을 저지른 것이 확실한데, 이런 것들을 여론화 하지 않고 수사도 하지 않는 이 사회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더구나 해외 투자 43조원이란다(정관용의 박완용의원 인터뷰: “그리고 얼마 전에 한신대의 경제학과 고기영 교수가 자원외교 실적을 쭉 정리를 해 봤더니 총 43조 원이나 들였었는데 별 결실이 없다, 이런 분석을 했거든요”(노컷뉴스, CBS인용)>.

누군가가 빼돌린 것이 확실한 거래조차 언급하지 않는 이 책임을 최우선으로 져야할 사람들은 신문방송과 그 기자들이다. 이들이 정보에 가장 근접해 있으며, 말해야 하는 것이 그 임무임에도 보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가장? ‘악인’이다. 사실을 말해야 하는데 침묵한다면 그는 악인임에 틀림 없다. 또한, 4대강 사업을 적극 홍보한 학자연 하는 교수들이 악인이다(이들에 대해서는 ([한겨레 21], 제 949호 참조).

 

2. 발명

나비 몰트 조이기는 답답하다. 빨리 해야만 일 능률이 오르지만, 아무리 부지런하고 손재주 있는 사람도 한계가 있다. 일명 ‘타타기’라 불리는 기계도 있다. 그러나 이곳 현장에는 그 기계가 없었다. 자신을? ‘전주 이 씨 적손(嫡孫)’이라고 소개하는 이 씨가, “각목으로 돌리는 거 만들어올까?”, 한다. 나는 무심히, “그래. 만들어 와” 라고 대답했다. 아, 그가 만들어 온 이 연장이 쏙 맘에 들었다. 각목을 잘라 너트에 맞게 홈을 판, 간단한 이 연장은 요령 있게 사용하면 손보다 몇 배 빨랐다.

의식의 흐름은 발명의 기쁨과 함께 기억에 깊이 자리잡은 상처들를 발라내었다. 그것은 미장들이 쓰던 보온 몰탈과, 이를 특허 낸 그 제품과 연관된 기억, 그리고 부끄러움인지, 상처인지, 세태에 따라 막 산 것인지, 억압인지 알 수 없는 내 상처들과 연관되어 있다.

올 봄, 공중파 방송에서 아파트 부실공사 문제를 다루었다 특히 실내와 실외온도 차에 의해 시내 내벽에 물기가 생기는 결로 문제를 심각히 고발했다. 결로는 곰팡이를 증식하고, 원인 모를 호흡기 질환의 원인이 된다고 했다

신축 아파트 현장은 입주 예정 주민들이 의심하는 표적이 되었다. 동호회를 구성하고, 자기들이 입주할 아파트 내부 공사 현황을 사진 찍어 게시판에 올리면 서로 토론들이 벌어진다고 했다.

아파트 공사 담당자들은 현장에 들어오려는 주민들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들에게 공사 현장이 인터넷에 회자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주민 통제는 일당에 비해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 용역회사에서 뽑힌 나를 포함한 네 명을 기존 경비원들과 함께 현장 주 출입구에 배치했다. 나는 입주 예정인들의 질문에 잘 대답할 수 있었다. 방수 전문회사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공 방식으로는 결로를 피할 수 없다고는 아가리가 찢어져도 말 할 수 없었다.

콘크리트 외벽은 겨울 냉기를 전달할 수밖에 없다. 전에, 그러니까 지금 특허되어 상품화된 보온 몰탈이 나오기 전, 직접 집을 짓는 이들 중에 건축에 감각있는 이들은 몰탈 시멘트와 스티로폴을 부수어, 결로가 생길 수 있는 부분들을 세심하게 발라줌으로써 결로를 해결했다. 보온이 되면서, 냉기들은 차단되면서 습기가 생긴다 해도 다시 외벽이 건조해 지면 보온 방수층에 섞인 몰탈을 따라 다시 습기가 분출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미장들이 스티로폴을 부수어 몰탈과 섞어 바르는 것을 흉내내어 특허를 내었다. 특허품 공장을 세워,? ‘보온 몰탈’이라는 상품으로 대단한 매출을 올리고 있다.

현재 공사 방식은 스티로폴을 내벽에 붙여 단열효과를 노리지만, 세밀하게 작업을 하지 않는 이상 천정 외벽, 슬라브와 벽체 부분이 만나는 부분의 결로를 피할 수는 없다. 이 현장에서도 보온 몰탈을 쓰지만, 엉뚱하게도 화장실과 벽체에 스티로폴을 댈 수 없는 부분에만 발라서, 반듯하지 않은 벽체의 보양 효과를 위해서만 쓰고 있었다.

 

3. 상처들

아파트 준공이 가까워지면서 조경 팀이 활발히 작업을 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조경 작업을 눈여겨 보앗다. 어떻게 저토록 큰 나무들을 옮겨 심어서 살릴 수 있을까?

3년 여에 걸쳐서 고향집 앞 밭에 나무를 심었다. 나무를 키우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잘 크는 나무가 있고, 키우기 어려운 나무가 있었다. 특히 감나무를 수십 그루 살리지 못했다. 나무 심는 법을 묘목 상회에서 배워서 심었으나, 묘목이 잘못 되었는지, 아니면 심는 방법이 틀렸는지, 살리기 쉽지 않았다.

조경팀? ‘부반장’으로부터 이런 저런 조경 지식을 주워들었다. 식재에는 무엇보다도 나무가 물을 빨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식재와 전지, 두 가지가 중요하다. 전지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옮겨 심은 나무는 뿌리를 잘랐다. 따라서 뿌리가 빨아들여 공급해야 하는 나무 전체의 부피를 줄여주어야 한다. 가지의 전지 요령은 손바닥, 사람 손바닥 모양을생각하며 잘라 나간다. 큰 나무를 심는 경우 약 절반 정도를 잘라준다. 그 다음은 물이다. 적어도 두 차례 흠뻑 물을 줘야 한다.

전지하는 노인이 유난히 내 눈을 잡아 끌었다. 사다리를 이용해? ‘간신히’ 나무를 기어오르는가 싶다. 그러나 나무에 올라간 순간은 사람이 달라진다. 나무 하나를 모두 해결할 때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쉬는 것도 나무 위에서, 참도 나무 위에 걸터앉아 먹었다. 노인의 행동을설명하는 조경회사 현장 소장의 설명도 마음에 들었다. “나무와 대화하는거요, 저 노인은.” 이라고 말하고는, “나무와 대화해 보지 않았어요?”라고 나에게 반문했다.

나도 나무와 대화해 보았다. 아니, 나무를 숭배라고는 못해도, 두려움을 느끼기는 했다. P천 상류, 호두나무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산을 오르다 보면 거대한 참나무를 만나게 된다. 하늘 높이 드리운 나무의 어깨는 어느 산중턱의 산어깨와도 닮아있었다. 자연이 주는 숭고함이란 말로 표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비의 언어를 필요로 한다. 인간은 그저 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다.

조경팀 일이 바빠지자,? ‘부반장’은 나를 자기 팀에 불러주었다. 나는 즉각 주민통제 일을 그만두고 조경 팀에서 일했다. 그 현장 조경 일이 끝날 때까지 일을 ‘배웠다’.

조경 팀에 합류하기 전, 주민 통제 일이 쉬웠던 탓에 계속 일을 하러 나갔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문제였다. 메모를 시작했다. 일종의 치유책으로 노동의 세계에서 정신적으로 상처받은 일들부터 메모하기 시작해서, 소설 쓸 재료들까지 두 권에 기록했다.

사건 후 몇 개월이 지난 지금도? ‘지나치게 참혹해서’ 아직도 세월호 이야기는 못 하겠다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 사건 직전 까지는? ‘노동과 일상의 신비’ 라는 주제로 에세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장팀 천정 공사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임금이 작다거나 일이 힘든 것이 주는 상처들 이외에 또다른 상처들도 남는다. 못 볼 것을 보거나 못들을 이야기들도 듣는 상처들 말이다.

신참이 기존 팀원들에게 밥한 끼 사는 것은 여반사이다. 친목 속에 현장 부드러움이 생기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물산 풍부한 이곳 장날을 잡아서 내가 한 턱 냈다. 알을 품은 쭈꾸미, 뻘밭처럼 부드러운 꼬막, 식감 좋은 갑오징어를 사서 숙소에서 한 판 벌렸다. 일차가 있으면 이차가 있는 법이요, 불행이도 나에게는 유흥비가 있었다. 노래방에 갔다. 아가씨들이 왔다. 나는 맥주에 취했다. 주인에게, 가장 이쁜 아가씨를 맨 나중에 들여보내라고 했다. 우선 고참들이 손짓으로 아가씨들을 자기 옆에 앉혔으며, 가장 예쁜 아가씨가 내 옆에 앉았다.

화장실을 갔다가 일행의 방을 간신히 찾았다. 실내가 어두웠다. 더듬어 전등 스위치를 켰다. 그토록 허겁지겁, 사람들은 주둥이를 맞대거나 젖을 더듬거나 보듬어 안고 있었다. 그것은 세상에 절망이 온 듯한 몸짓들이었다.

“베스비오스 화산이 폭발했다. 용암이 흘러내리자 그곳 섬에 갖힌 뭉둥이들은 피할 곳을 찾아 바다로 뛰어들었다. 이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안 문둥이들은 다른 방법을 찾았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짝을 지어 그 짓을 하기 시작했다(윤흥길).”

웬일인지, 노동판의 사람들은 정상적인 가족이 없다. 오죽한 사람들이면 이토록 미친듯이 행동할까 만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고통만 생각한다. 오직 자기 자신의 고통만 고통으로 인식할 뿐인 사람들은 다른 모든 것은 중요치 않다. 인간은 마치 쾌락에 열중 하듯이 자기 고통에 열중한다. 인간을 극단적으로 개인화시키는 이 고통의 밤에는 죽음이 차라리 나을른지 모르는 절망 뿐이다.

 

4. 극단적 개인들과 분노 없는 관용

P천 보 이틀 일하고 28만 8천원을 받았다. 첫 날, 일이 끝나자, 오야지가 일당을 나누어주었다. 이것은 아주 묘한 현상인데, 당일 돈 주는 대신 용역비 10퍼센트를 일당에서 떼고 주었다. 막걸리 잔을 앞에 두었을 때 JJ가 말했다. 오야지가 말하더란다. “내일부터 사람 줄이자….” JK는, “안 된다. 인원 줄여 일하면, 남은 사람들이 고생하게 된다”고 말했단다.

기껏 2-3일이면 끝나는 공사이다. 오래 현장에 붙어있는 사람은 오야지와 친분이 있어 함께 다닐 것이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노동자는 일회용이다. 말 그대로 일용 노동자이다. 헛…

며칠 여행했다. 그 와중에 두 사람과 인터뷰를 했다. 담뱃불을 빌리며 넌지시 말했다. “이거 2천원 올라, 4천 7백원 하면 담배 피워야 되요, 끊어야 되요?” 대형 마트 지점장이라는 이는,“‘복지를 위해“ 세수가 필요하니 담배 피워야 한단다. 나는, ”이명박이가 숨켜논 것을 뺏어서 복지비 하는 게 났지 않나”고 물었다. 상대는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잘도 풀어주었다.

“사대강 사업을 지금 당장 평가할 수 없다. 몇 십 년 몇 백 년 후에 나타난다. 선거 공약의 이행 차원이었으므로 국민이 이 사업을 찬성한 것이다.”

공정무역 커피코너에 계신 분에게 앞 인터뷰 걸과에 대해 묻자,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원래 선거 공약은 운하건설이었다. 반대가 심하자 공약을 철회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 밀어붙인 것이 사대강 사업이다.

몇 십 년 몇 백년 기다릴 필요 없다. 선진국에서 한 경험을 우리 상황에 간접경험으로 선취할 수 있다. 민주주의란 공론의 장을 활성화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이 없이 밀어붙인 결과가 사대강 사업이다.”

침묵을 강요당하는 고통이 있다. 정치적 폭력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고통에서는 그것과 거리를 두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브레히트). 격정 없는 이는 그리스인의 운명의 신 ‘모이라’, 프로이드의 무격정, 또는 상류층의 이상으로서의 운명의 여신 ‘아낭케’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저항을 거부함으로서 살아남으려는 개인화된 이 고통의 밤에는 변혁은 없다. 그 반대의 편에는 양심, 행동하는 지성이 있다. 거리를 유지함으로서 살아남는 이들은 고통 가운데에서 쾌락을 보는 순교자들의 매저키즘과 같다. 그들이 침묵 속에서 우주를 보든 말든, 프랜시스코 교황의 말대로 “고통당하는 이들 앞에 정치적 중립은 없다”는 행동 원칙이 우선이다.

 

 

발터 벤야민과 함께 티어가르텐을 산책하다 [베를린에서 온 편지 7]

발터 벤야민과 함께 티어가르텐을 산책하다 [베를린에서 온 편지 7]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내가 사는 곳은 베를린 모아빗(Moabit)이다.?종교박해를 받던 위그노 교도들이 이주해 와서 성경에 등장하는?‘모압’이라는 지명을 따다가 이름 붙인 것이 그 이름의 기원이라고 알려져 있다.?전통적으로 모아빗 바로 위에 있는 베딩(Wedding)과 함께 베를린 노동계급의 거주지였고?20세기 초에는 이 지역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성장,?히틀러 치하에서도 반나치 운동이 왕성하게 펼쳐진 곳이다.?지금은 슈프레강 인근의 부유한 주택에 사는 독일인 중산층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에서 온 가난한 이주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며,?특히 베딩,?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에 이어 터키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라 거리에 나가보면 여기가 독일인지 아니면 터키나 중동의 어느 도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

모아빗 인근에는 커다란 도심 속의 숲 티어가르텐(Tiergarten)이 위치해 있다.?티어가르텐은 과거 프로이센 왕의 사냥터였다가 이후에 공원으로 지정되어 시민들에게 개방된 곳이며,?대규모의 도심 속 숲이다.?날씨가 좋은 날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갈 때는 모아빗에서 출발해 전승기념탑을 지나 티어가르텐을 가로질러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한 뒤 운터덴린덴(Unter den Linden)?거리를 따라 달린다.?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쬘 때에도 티어가르텐의 숲 속으로 들어가면 나무들 사이로 부는 시원한 바람에 더위를 잊게 된다.?도심 한 복판에 삭막한 고층건물이 아니라 커다란 숲과 공원이 위치해 있다는 것은 베를린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축복일 것이다.?이 때문에 티어가르텐은 오늘날 사람들이 베를린을?‘생태도시’로 규정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베를린의 상징물이기도 하다.?빽빽이 들어선 빌딩숲이 아니라 말 그대로 수풀로 우거진 자연공원 속에서 길을 잃을 수 있는 경험은 베를린이 아닌 다른 대도시에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바로 이 때문에 발터 벤야민 역시 그가 베를린을 회상할 때 가장 먼저 이곳 티어가르텐을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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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은 벤야민

“어떤 도시에서 길을 잘 모른다는 것은 별일이 아니다.?그러나 그 곳에서 마치 숲 속에서 길을 잃듯이 헤매는 것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벤야민의『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등장하는 첫 문장이다.?티어가르텐에서는 길을 잃기 쉽다.?넓은 숲속에 나있는 복잡한 산책로들이 미로처럼 얽혀있기 때문이다.?이곳에서 길을 잃는 것은 그러나 나쁜 경험으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여기서 길을 잃은 산책자는 시간에 쫓기거나 뚜렷한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다급함 없이 꿈을 꾸듯 부유하며 자신의 사색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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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어린시절도 그러했다.?벤틀러 다리(Bendlerbr?cke)에서 시작되는 벤야민의 티어가르텐에 대한 회상은 티어가르텐의 미로처럼 복잡한 산책로들 위에서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 이어진다.?이 다리는 어린 나이에 죽은 그의 동급생 루이제 폰 란다우가 살던 뤼초우 물가와 교차하여 란트베어운하(Landwehrkanal,?조금 뒤에 보겠지만 로자 룩셈부르크가 죽은 곳이기도 하다)를 가로지르는 곳이다.?벤틀러 다리를 지나 조금 더 걸으면 티어가르텐의 남쪽 입구가 나온다.?아마 어린 벤야민은 이곳을 거쳐 자신의 목적지로 향했던 것 같다.

 “벤틀러 다리의 완만한 아치형 곡선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언덕의 측면이었다.”

“벤틀러 다리의 완만한 아치형 곡선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언덕의 측면이었다.”

그의 발걸음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은 티어가르텐 안에 위치한 루이제섬(Luiseninsel)이다.?이곳에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와 그의 부인이자 독일인들에게 지금까지도 널리 사랑받는 인물인 루이제 왕비의 동상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서 있다.?벤야민은 이곳을 아주 좋아했고 특히 동상을 받쳐주는 아래 기둥 부분의 조각장식들을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다.?특히 루이제 왕비의 동상 아래 부분에는 남녀간의 격정적인 사랑을 표현해놓은 장식이 있는데,?벤야민이 그의 글에서 바로 이곳에서 그가?‘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일 것이다.?특히 벤야민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루이제 왕비로부터 자신의 동급생이었던 루이제 폰 란다우의 사연을 연상시킨다.?이 둘은 모두 루이제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이로부터 벤야민은 아름다움에는 언제나 차가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그것을 손에 넣으려 제 아무리 시도한다 한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는 비극적인 진실을 깨닫는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

 

전승기념탑

영화?<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인간들의 삶을 엿보고 그들의 생각을 엿듣는 천사 다미엘(브루노 간츠)은 티어가르텐의 정중앙에 위치한 전승기념탑의 여신상 어깨에 올라 앉아 인간 세계를 내려다본다.?사랑의 기쁨,?헤어짐의 고통,?삶의 무게,?시간의 무상함 등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과 그들의 일상적 삶에 무한한 호기심과 동경을 갖고 지내던 다미엘은 써커스단에서 곡예를 하는 어느 여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뒤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천사가 인간이 되려면 자살을 해야 하는데,?이 때 그가 선택한 장소 역시 전승기념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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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기념탑은 프로이센이 프랑스와의 보불전쟁에서 승리,?나폴레옹?3세의 항복을 받아낸 스당전투를 기념하기 위해?1873년 설립되었다.?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이듬해 독일 전체를 통합하고 스스로 황제국으로의 승격을 선포한다.?따라서 전승기념탑은 뿔뿔이 흩어져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근대화를 이룩하지 못한 채 낙후되어 있었던 독일이 프랑스를 제압하고 통일을 이룩한 뒤 유럽최강국으로 변모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물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전 세계인들이 알고 있듯이,?독일의 역사는 이후 평탄하지 못했다.?가빠른 군국주의화 물결 속에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모두 패한 뒤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단되었고 수도 베를린 역시 두 개로 쪼개져야 했다.?그 이후 냉전기간동안 전승기념탑은 독일의 비극적인 현대사,?그리고 동서로 분단된 채 장벽으로 가로막힌 베를린의 현주소를 상징하는 기념물이 되었다.?독일의 승리와 번영의 상징에서 전쟁과 분단의 아픔의 상징으로.?전승기념탑은 독일 현대사의 주요 장면들과 늘 함께 해왔다.?이 점에서 탑의 꼭대기에서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승리의 여신상은 인간들의 삶의 기쁨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천사 다니엘을 닮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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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역사의 진보는 동시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파국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이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적 성찰이다.?마찬가지로 그는 스당전투의 승리와 전승기념탑 건립이 보여주는 독일의 성공과 번영,?그리고 그 정점에 서 있는 나치의 세계대전 수행의 와중에 세계사의 죽음을 보았다.?『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프랑스인들이 패배한 이후 세계서는 영광스러운 무덤 속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으며 이 전승기념탑은 그 무덤 위에 세워진 돌로 된 묘비였다.”

아름다움은 차가운 그림자를 안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루이제 왕비의 동상으로부터 얻은 벤야민의 깨달음은 역사의 흐름에도 적용된다.?군국주의 독일과 나치즘의 승리와 번영은 이미 그 자체로 세계 역사에 짙게 드리운 총체적 파국과 일치한다.?역사의 진보는 그것이 그 정점에 서 있을 때 동시에 참담한 파국의 역사로 나타난다.?승리를 기념하는 탑이 세월이 흘러 전쟁의 비극과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기념물이 되었듯이,?역사는 희극과 비극이 무한히 교차하는 가운데 운명처럼 그 힘을 드러낸다.?벤야민 역시 그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도주하던 중 스페인 국경도시인 포르부에서 자살을 택함으로써 그 스스로 이?“세계사의 죽음”의 희생자가 되지 않았던가?

 

란트베어카날

베를린의 란트베어운하는 많은 것들을 가로지른다.?벤야민은?『베를린 연대기』에서 란트베어운하를 빈민구역과 부유층 거주지를 가르는 경계로 소개한다. “프롤레타리아 주거 지역과의 차단벽 역할을 하는 란트베어 운하의 느릿느릿 흐르는 물”은 계급 분단을 나타내는 지표다.?운하의 남쪽에는 동물원 역과 쿠담 거리가 있고,?고가 명품 의류를 판매하는 상점들이 즐비한 이곳은 베를린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손꼽힌다.?반면 운하와 티어가르텐 북쪽에 위치한 모아빗과 베딩은 노동계급의 집단 거주지였다.?그곳에는 벤야민이 크리스마스 장터를 구경하러 집밖으로 나왔을 때 화려한 트리장식과 달콤한 먹거리들 사이로 자신의 존재를 불쑥 내밀어 그를 당혹케 만든?“가난한 자들”,?그리고 벤야민의 꿈 속에 나타나 그를 괴롭히는“꼽추 난쟁이”들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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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벤야민은 이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알지 못했다.크리스마스가 되면 그는 부모와 함께 화려한 가판대에서 물건들을 구경하지만,?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은 스스로 만든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부유한 집안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장터를 구경나오면 그들에게 구걸을 해야 했다.란트베어 운하가 빈민층 거주지와 부유층 거주지를 구획했듯이,?크리스마스 역시 아이들을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눈다. “크리스마스는 부르주아 집안의 아이들 앞에 다가오면서 그들의 눈앞에서 단번에 도시를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눈다.”

란트베어운하는 슬픔을 간직한 곳이다.?이곳은 그가?『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소개한,?귀족 가문의 동급생 루이제 폰 란다우가 살았고 그녀의 시신이 안치된 곳이기도 하다.?그런데 이곳과 연관된 또 하나의 죽음이 있다.?벤야민이 언급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죽음이다. 1919년?1월?15일 독일 혁명의 와중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반혁명 의용대의 손에 살해당한 뒤 그 시신이 이곳에 버려졌다.?며칠 뒤 그의 시신이 떠오른 곳에는 수십년이 지난 뒤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는 기념물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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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는 란트베어운하가 가르는 가난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의 삶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다가 죽었고,?의용군 병사의 개머리판에 의해 두개골이 부서진 그의 시체는 다시금 란트베어운하에 던져졌다.?벤야민의 꿈에서?“꼽추 난쟁이”의 형태를 하고 나타나 그를 괴롭히는 알 수 없는 형체는,?란트베어 운하가 가르는 계급의 분단에 의해,?전승기념탑이 상징하는 독일의 군국주의화와 되풀이되는 전쟁에 의해 희생되어야 했던,?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의 알레고리인지도 모른다.

티어가르텐에서 길을 잃는 것은 좋은 경험이다.?아드리아네의 실에 의지해 미로를 따라 걷고 또 걷다보면,?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순간들은 결국 지나간 순간들이 우리 앞에 되살아나 오늘날의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벤야민의 무의식 속에서 그를 한없이 괴롭히던 꼽추 난쟁이는 결국 그에게 다가와 속삭인다.

“사랑하는 아이야,?아,?부탁이다,

꼽추 난쟁이를 위해서도 기도해주렴.”

우리는 지금,?누구를 위하여 기도를 해야 할까.

 

“너도 늙으면 할미꽃 된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6

“너도 늙으면 할미꽃 된다.”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5살에 어머니 손잡고 애락원 가던 날

외동딸 나를 “가스나”라고 부르던

어머니

가면서 돌아보고 또 돌아보던

내 어머니

 

할미꽃 꽃대 꺾어 머리에 꽂으면

“너도 늙으면 할미꽃 된다”

세상 보려고 나온 생명인데

그렇게 꺾어 되느냐 가르치시던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힘들게 가르친 딸 대신하여

졸업장 받아들고

소리 없이 우셨을

어머니

내 어머니

– 이○○, 2014년 2월 19일 구술 내용에서 발췌-

 

사진-김성리 성심원 요양사 정경

사진-김성리
성심원 요양사 정경

 

애락원에 갈 때 내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외동딸이라고 나를 귀하게 여겼던 어머니는 부를 때 이름 대신 꼭 “가스나야”하고 부르더라.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어머니가 우겨서 좀 늦게라도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밥장사를 했는데, 글자를 몰랐다. 그라께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그리 안 우겼겠나. 내가 열서넛 살 되었을 끼다. 그때부터 안 좋았다. 손가락이 자꾸 뻣뻣해지는 기라. 주물러도 그 때뿐이고 좀 지나면 다시 뻣뻣해졌지.

학교에서 무용을 하는 시간이 있는데, 손가락을 펼치기도 하고 여러 모양으로 구부리기도 했다. 왜 그리 손을 많이 쓰는지 무용 선생님이 원망스럽더라. 아이들은 무용시간이 좋아서 들떠 있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더라. 다른 데는 크게 표도 안 나고 그때는 발도 괜찮았는데, 뭔 조화인지 손가락부터 안 좋아지더구먼. 손가락이 뻣뻣하니까 손 모양을 따라 할 수가 없잖아. 혹시 내 손가락을 보고 친구나 선생님이 병 걸린 걸 알까봐 조마조마했다.

무용 수업이 있는 날은 아침부터 손을 궁둥이 밑에 넣어 깔고 앉아 있었다. 그러면 따뜻한 온기와 몸무게가 있어서 안으로 꼬부라져 오는 손가락이 잠시 펴진다 아이가. 겨우겨우 무용 시간이 끝나면 왜 그리 어린 마음에도 맘 한 구석이 허해지던지… 그리 애를 써도 손가락은 자꾸 굳어오고 안으로 오그라들더구나. 밥장사하던 우리 어머니는 아무리 바빠도 조그만 틈만 나면 내 손을 주물러 줬다.

친구들이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내 손을 흉내 내고 놀렸지만 나하고 잘 놀았는데 언젠가부터 드문드문해지더라. 나는 얼굴도 작고 피부도 하얗고 고와서 오물짜 같다고 했다. 그리 하모 뭐 하노. 나중에는 찾아오는 친구도 없고 놀 친구도 없는데. 놀 사람이 없고 동네 사람들 눈치가 보이니까 자꾸 산에 갔다. 산에는 나보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도 안 들리제. 그래서 산에 갔다.

우리 동네 뒷산에는 할미꽃이 참 많았다. 지천에 널린 게 할미꽃이었다. 초봄부터 여름이 다 갈 때까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할미꽃 뿌리는 기침에 참 좋은 약이 된다. 모양은 그래도 그 꽃은 여러 모로 잘 쓰면 좋은 기 많다. 혼자 산에서 놀다가 심심할 때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밑자루 있는 데가 불그스름하게 보인다. 고개 숙이고 외진 데에 피어 있는 할미꽃이 꼭 남의 신세 같지 않더라. 한참을 보다가 꽃대를 꺾어서 머리에 꽂고 산을 여기저기 그리 돌아다녔다.

사진-김성리 복지사 선생님의 허락하에 게재합니다.

사진-김성리
복지사 선생님의 허락하에 게재합니다.

할미꽃을 귀 옆에 꽂고 좋다고 집에 돌아오모 우리 어머니는 항시 같은 말을 하셨다. “너도 늙으면 할미꽃 된다.” 그러면 나는 픽 웃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세상 보려고 나온 생명인데 그리 꺾어 되느냐고 안쓰러워하던 어머니 마음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병든 어린 딸이 무심코 꺾은 그 생명이 그냥 예사로 보이지 않으셨던 게야. 그리 함부로 꺾다가 혹시라도 나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기모 어쩔까 걱정이 앞섰던 게야.

열다섯 살이 되니 그나마 학교에 가기도 힘들어졌어. 동네 사람들도 학교 선생님도 모두 나를 어디로 보내라고 어머니를 졸랐다. 우리 어머니는 우짜든지 나를 안 보내려고 용을 썼지만, 어쩔 수 없어서 애락원으로 가기로 했제. 우리 엄마가 해주는 국밥을 먹으러 오던 단골 중에 손상이라는 떠돌이 곡식 장수가 있었는데, 그 양반이 애락원을 말해줬어. 열서너 살에 말해줬는데 우리 어머니가 안 보낼라고 모르는 체 했거든.

더는 못 버티고 우리 어머니 손잡고 애락원으로 갔는데, 문 앞에서 헤어져야 하는 기라. 병자 아닌 사람은 안으로 못 들어가. 문을 가운데 놓고 엄마도 나도 손을 못 놓고 꼭 잡고 있었다. 보다 못한 직원이 나서서 강제로 꼭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놓고 나를 문 안으로 들이 밀었어. 나는 문 안에서 우리 어머니 보고 우리 어머니는 문 밖에서 나를 봤다. 담도 아이고 문을 가운데 놓고 들어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고 그리 그리 서로 바라만 봤다. 돌아가야지.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나는 애락원으로 들어가야 하제. 어머니는 가면서 돌아보고 몇 발자국 가다고 또 돌아보고 했다. 나는 그냥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5학년까지 다니다가 애락원으로 갔다. 글도 모르고 밥장사하는 어머니였지만, 하나뿐인 딸은 공부도 가르치고 예삐게 그리 키우고 싶어 하셨다. 세상 부모 다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 어머니 생각은 지금도 난다. 근데 왜 어린 시절에는 기억이 잘 났는데 중년 이후로는 이리 기억이 흐리지노? 그리 우겨서 힘들게 보냈던 학교를 나는 졸업식에 못 갔다. 우리 어머니가 나 대신 졸업장 받아왔지. 얼매나 울었을꼬. 나도 어미 되고 이리 늙어가니 새삼 어머니가 보고 싶다. 참 보고 싶다.

우리 어머니는 여걸이었다. 실수가 없었다. 손끝이 야무져서 바느질도 참 잘하고 음식도 맛깔스럽게 잘 했다. 그래서 동네 큰일이 있으모 뽑혀가서 음식을 만들고는 했다. 밥장사는 고령 장날만 장에 가서 했다. 집에서는 떠돌이 장사치들을 상대로 하숙을 했다. 장사치들이 장을 따라 다니기도 하고 물건을 지고 여기저기 다니거든. 그러다가 우리 동네 가까이 오모 꼭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는 기라. 그런 하숙이지. 애락원이 있다고 알려 준 손상도 그런 사람이었다. 손 씨인데 그때는 손상이라고 했다.

애락원에 들어갈 때 만원 줬다. 그때 그 돈은 엄청 큰 돈이었다. 굳이 돈을 안 줘도 되는데 우리 어머니는 나를 보내면서 그리 큰 돈을 줬다. 애락원은 병원 같은 데였다. 플래처 선교사가 의사이기도 했는데, 그 때는 건물이 2개 있었다. 나병원이라고 하더라. 우리 어머니는, 글도 모리던 우리 어머니가 시장에서 국밥 말아 팔고 장사치들 밥해 준 돈 만원을 내 치료해주라고, 잘 치료해서 꼭 낫게 해주라고 애락원에 냈다.

나는 ‘불효자는 웁니다’ 노래를 들으면 울고, 어머니 생각해서 울고 그냥 울고 매일 밤 한 번은 운다.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 보고 땅을 치고 통곡해요.다시 못 올 어머니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이리 부르고 어머니 생각하고, 휴우~~~ 말해도 소용없는 지난 일 생각하고…… 그래서 운다. 그리 힘들게 번 큰돈을 갖다 바쳐도 안 되는 게 이 병이더라.

오빠가 있었다. 오빠는 초등학교 나와서 대구에서 포목 장사를 했다. 동생은 일본에서 대학까지 나왔다. 우리 어머니하고 오빠가 열심히 일해서 내 병원비랑 동생 학비를 댔다. 내가 병에 걸려 학교를 못 다녀도 고등수학까지는 안다. 옆에서 보고 들으면서 혼자 공부했다. 나는 경북 고령이 고향이다. 주민등록증에는 1921년 1월 5일로 되어 있는데, 원래는 1919년 1월 5일(양력)이다. 홍진으로 예방접종을 했다는 말은 들었다. 그때는 어린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그래서 호적에 늦게 올린 건가 싶다.

어머니가 해 주던 음식 중에 가죽 자반이 있다. 가죽을 뜯어서 살짝 데쳐서 말리거든. 살짝 말려야 돼. 약간 꼽꼽하게 마르면 밀가루 풀을 이파리 사이사이에 넣어서 잎을 반듯하게 만들어. 그 위에 찹쌀풀을 먹이는데, 그 찹쌀풀은 찹쌀하고 고추하고 소금을 넣어서 빻아서 만들어. 찹쌀풀을 서너 번 덧발라 줘야해. 마지막 풀이 또 꼽꼽하게 되면 통깨를 뿌리고 말려서 단지에 차곡차곡 재여 놔.

좀 맵거든. 매우니까 병에 안 좋다고 우리 어머니가 못 먹게 해. 그런데 그게 참 맛있어. 어머니 몰래 하나씩 꺼내 먹으모, 아이고 참 맛있다. 매워서 헥헥 거리면서도 훔쳐 먹고는 했다. 그리 하는 것도 있고, 여린 가죽 이파리를 소금물에 절여 꼭 짜서 말린 후에 고추장 양념해도 맛있다. 그것 말고도 갈치가 참 맛있었다. 명태도 맛있고 함흥에 청어가 많이 났는데 그 청어도 맛이 있지. 아, 참 김밥도 맛있다.

2011년부터 이상하게 입안이 헐어서 안 나아. 요 안에, 입 안에 봐라. 헐어 있는 거 보이제? 아이고 많이 아프다. 김치를 참 좋아하는데 김치도 못 먹고 매운 것도 못 먹고 하니까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게 자꾸 생각이 나. 죽을 먹는데 김치도 없이 뭔 맛으로 묵노. 오늘은 김치를 물에 씻어서 먹었는데 그것도 김치라고 좀 낫더라. 전에 여기 성심원에 의사로 있던 이비인후과 선생이 요새도 한 번씩 오거든. 내처럼 이리 입안이 헐고 아픈 거 공부해서 꼭 낫게 해준다 했는데, 그 공부가 어려운가 아직 안 낫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