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3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 이제 다시 제가 앞서 그렸던 그림으로 돌아갑시다. 이야기가 너무 곁가지를 많이 쳐서 그 그림이 어떤 것이었는지 잊어버렸다고요? 그렇다면 다시 그리지요. 힘든 일은 아니니까요.

 

윤구병29-2

 

제 고조부모인 파르메니데스 옹과 제논 마님에 따르면 이 그림에서 ①만 있고 ②부터 ⑥까지는 없습니다. 할아버지 플라톤 옹에 따르면 ①과 ②의 속살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저 세상〔이데아(idea)의 세계와 직관의 세계〕에 있고 ②의 겉껍데기와 ⑤까지만 현상계에 있습니다. 제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는 ①은 없다고 본 듯합니다. 제 아버지가 신으로 모셨던 분은 ①이 아니라 ②라고 저는 믿는데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제 아버지는 신을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신은 ‘생각의 생각〔noesis noeseos〕’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좀 묘하지요? 제 생각으로는 생각〔noesis〕은 움직임입니다. 생각이 멈추면 그걸 어떻게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생각이 다른 쪽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생각은 멈추게 되고, 그건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제 아버지가 하나이신 ‘하나님(신)’을 생각과 같은 것이라고 여긴 것은 잘못이라고 봅니다. 생각이 하나를 찾는 것은 생각이 하나에서 나왔기 때문이고, 또 생각과 하나는 마침내 하나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생각 속에는 생각함과 생각됨이 더불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은 하나이자 여럿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고조할아버지 파르메니데스 옹으로부터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내려온 존재론의 전통을 저 나름으로 졸가리를 찾으면 아마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이신 있는 것이 생각을 낳고, 생각이 삶을 낳고, 삶이 자연을 낳고, 자연이 질료를 낳았습니다. 파르메니데스 옹 말씀 그대로 하나이신 있는 것은 가득 차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하나에서 나왔고, 그 때문에 늘 하나를 지향하지만, 생각 속에는 빠진 것이 있습니다. 제 아버지가 신을 ‘생각의 생각’이라고 규정하셨을 때 앞생각〔noesis〕과 뒷생각〔noeseos〕은 같은 것이겠습니까, 다른 것이겠습니까? 저더러 말하라 하면 저는 다른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러면 앞생각과 뒷생각 사이에는 틈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대체 이 틈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입니까? 틈은 빈 데를 뜻합니다. 무엇인가 빠져 있을 때 빈틈이 생깁니다. 틈이 있으면 하나로 있던 것이 둘로 갈라집니다. 하나를 둘로 가르는 이 틈은 무엇 때문에 생겨날까요? 무엇이 빠져서 둘 사이가 갈라질까요? 빠진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아무튼 ‘빠진 것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아요? 그런데 누구한테 들었더니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은 ‘없는 것이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라고 하데요.(누구한테 듣기는 누구한테 들어? 윤모가 《있음과 없음》이라는 글에서 자기네 조상들이 쓰던 말이 그렇다고 했지!) 자, 앞생각과 뒷생각이 갈라지자 어느 틈에 없는 것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없는 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는 있는 것이 모습을 감추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가 빠지는 자리이지요. 생각이 하나로부터 갈라서는 자리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하나를 찾지 못하면 생각은 길을 잃지요. 감각을 징검다리로 삼는 보통 사람의 생각에서부터 고도로 추상화한 사유에 이르기까지, 언어학자가 찾는 음소〔phoneme〕나 형태소〔morpheme〕에서 생물학자가 찾는 생명의 단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각이 하나를 찾기에 그처럼이나 애를 쓰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를 찾지 못하면 생각은 생각이기를 그치지요. 하나를 잃은 생각은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지니까요. 무엇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의 상태를 가리켜 우리는 의식 불명이라 이르지 않던가요? 하나를 찾아 빠진 것을 메워야 생각이 제 구실을 합니다. 제가 생각을 ‘하나이자 여럿인 것’이라고 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이자 여럿인 생각은 있는 것에서 흘러나오지만 있는 것 바로 그것은 아닙니다. 생각에는 빠진 것, 다시 말해서 없는 것이 섞여 있다는 말이지요. ‘없는 것이 없게’ 만들려는 플라톤 할아버지의 노력이 있는 것들의 모두인 여러 하나들의 세계, 곧 이데아의 세계를 만들어 냈지만, 이데아 세계의 여러 하나들이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오직 하나, 곧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깨끗한 생각도, 이것과 저것을 먼저 놓고 그것을 같거나 다른 것으로 파악하는 추론의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생각은 하나를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과 저것이 함께 있는 세상, 곧 둘이 있는 곳에는 공간이 있게 마련이고, 공간이 있는 곳에는, 비록 그 공간이 순수한 사유 공간이라 할지라도 하나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나는 직관의 대상이지 추론하는 사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제 할아버지 플라톤 옹이 이데아의 세계는 직관의 대상이라고 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지요. 그러니까 생각에는 직관도 있고 추론도 있습니다. 직관은 하나를 지향하는 생각이고 추론은 여럿과 관계를 맺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 밖에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말인데, 하나는 곧 있는 것이니 있는 것과 다른 어떤 것이란 없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 저는 없는 것을 그렇게나 꺼리고 두려워했던 우리 고조할아버지 파르메니데스 옹으로부터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 옹에까지 이어져 내려온 이른바 ‘그리스 사유의 전통’을 깨지 않으면 존재론의 일관된 체계를 세우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있는 것과 생각은 하나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고 우기는 고조할아버지의 고집을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야 물론 우리의 생각은 늘 하나를 지향하지요. 일관된 생각이란 하나를 지향하는 생각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생각이 둘로 흩어지면 종잡을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생각은 움직이는 것이지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있는 것과 하나가 되려고 해도 하나 쪽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지요. 당신은 아예 없는 것, 다시 말해 허무를 생각할 수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으면 아예 없는 것은 말 그대로 없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없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규정할 수 없는 것〔apeiron〕’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순수 질료’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 그 반문에 대해서 대답하지요. 그렇습니다. 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그 순수 질료니, 무규정적인 것이니 하는 것의 뿌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철학은 뿌리를 찾는 학문이고, 까닭을 캐는 학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을 지닌 철학이 제대로 서려면 존재론의 바탕이 단단히 다져져야 합니다. 우리가 나날의 삶에서, 또 그 삶을 반영하는 감각이나 사유 속에서 없는 것을 몰아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없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삶과 생각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추운데 난로에 온기가 없습니다. 있는 것 하나밖에 없으면 생각도 없습니다. 구체적인 생활에서나 감각에서나 생각에서나 어디에서나 드러나는 이 없음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비어 있음이라고요? 결핍이라고요? 이미 있었던 것의 사라짐이라고요? 늘 있는 것과 연관되어 나타나는 것이지 홀로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고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천하장사라 해도 이 세상에는 감각의 세계와 사유의 세계로부터 이 없음을 몰아 낼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얼버무리지 말고 솔직히 인정합시다.

‘태초에 있는 것 밖에 없는 것도 있었다.’ ‘없는 것은 하나인 있는 것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나의 힘이 넘쳐흘러 없는 것을 밀어 내고 둘레에 생각의 고리를 만들었는데 이 생각의 고리는 하나와 맞닿아 있어서 늘 하나를 지향한다. 이 하나이자 여럿인 생각의 고리에서 최초로 운동 가능성이 나타났다.’ ‘생각의 고리 둘레를 생명의 고리가 둘러쌌는데 생명의 세계에서 처음으로 둘이 뚜렷이 갈라졌다. 하나의 힘이 지배하는 우주 생명은 생각의 고리에 닿아 있어 하나로 남았으나, 밖에 있는 자연의 고리에 잇대어 있는 생명은 없는 것이 사이에 들어 여럿으로 나누어졌다.’ ‘생명의 고리 바깥에 자연의 고리가 둘렸는데, 이 고리에서 하나인 있는 것과 하나가 아닌 없는 것이 팽팽하게 힘으로 맞섰다. 여기에서 비로소 동물과 식물과 땅같이 감각으로 지각되는 크기를 가진 몸뚱이를 지닌 것들이 나타났다. 이 자연도 생명의 고리에 가까운 ‘만드는 자연’과 밖에 있는 질료의 고리에 가까운 ‘만들어진 자연’으로 갈라졌다. 하나인 있는 것의 힘이 미치는 테두리는 여기까지다.’ ‘자연의 고리 밖에는 있는 것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질료의 영역이 있는데 이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없는 것이 없으면 낱낱으로 구별되는 여러 하나도 생겨나지 못한다. 고유 명사로 부르는 낱낱의 저마다 다른 것은 이 없는 것의 힘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있는 것뿐만 아니라 없는 것까지도 받아들이자고 한 생각의 큰 테두리는 이런 것입니다.”

제가 이렇듯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간단히 줄이고 플로티노스의 이론을 저 나름으로 해석하여 장황하게 늘어놓는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모자 속에 감추어 놓고 끝까지 보여 주려 들지 않았던 것의 실체가 플로티노스의 이론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당사자들은 인정하려 들지 않을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 플로티노스는 서양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위대한 신학자와 철학자들에게 숨은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플로티노스의 제자인 포르피리오스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도 토마스 아퀴나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스피노자도 헤겔도 베르그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이 부정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감추려고 애썼던 없는 것이 플로티노스에 의해서 있는 것으로 드러났으니, 이제부터 그 동안 우리가 뒤로 미루어 놓았던 과제, 곧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모순율을 뒷받침하는 가장 기본 되는 판단 형식이 될 수 있는지 따져 봅시다. 보통 모순율을 대표하는 문장은 ‘ㄱ은 ㄱ 아닌 것이 아니다(A is not non-A).’로 표현됩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이 ㄱ이라면 있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닌 것이라는 점에서 ㄱ 아닌 것이고, 따라서 ‘없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ㄱ은 ㄱ 아닌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 형식에 일치합니다. 모순율을 뒷받침하는 존재론 차원의 문장으로 왜 ‘있는 것이(은) 없는 것이 아니다.’를 들지 않고 하필이면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 아니다.’를 들었느냐고 묻는 분에게는 있는 것은 하나이고, 하나로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지 않으므로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추론의 공간 속에 자리잡을 수도 없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겠습니다. 다시 모순율로 되돌아가서, 만일에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판단 형식이 어떤 경우에도 참임이 증명될 수 있다면 모순율은 자명한 논리학의 공리로서 자리를 굳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위야 어떻든 없는 것은 분명히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이고, 이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없는 것이라는 말로(글자로) 지금 우리 눈앞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없는 것이라는 말을 버젓이 들으면서(글자를 눈앞에 보고 있으면서) 그것을 있지 않다고 우길 수 있겠습니까? 어떤 판단 형식이 공리 행세를 하려면 그 판단 형식에 실오라기만 한 의심의 여지도 없어야 합니다.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은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나란히 놓고 판단할 때 한층 더 강화됩니다. 만일에 이 두 문장을 놓고 볼 때 그 가운데 어느 하나는 분명히 참인데 다른 하나는 거짓임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면 사태는 더 심각해집니다. 모순율이 깨지면서 동시에 배중률도 공리의 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 사태는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학이 설 자리를 잃는 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학이 무너지면 파르메니데스가 주춧돌을 놓고 플라톤이 그 위에 기둥을 세운 그리스 존재론의 전통이 한꺼번에 와르르 주저앉을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아빠가 아빠다워야만 자식이 자식다운 법(2)[대안도덕교과서]-10

아빠가 아빠다워야만 자식이 자식다운 법(2)[대안도덕교과서]-10

 

 

오상현(숭실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평생 공부만 하라고?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논어』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열심히 배우고 시도 때도 없이 익히면 즐거운가요? 만약 공부 자체가 너무너무 즐겁다면, 그래서 초중고 12년을 한 20년쯤으로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가까운 병원에 가서 상담받기를 권합니다. 솔직히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는 게 재미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 사상에서는 혼자 있을 때에도 삼가는 마음으로 자기를 위한 공부에 매진하라고 합니다. 참 답답할 노릇입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이 말은 천하를 평화롭게 하기 전에 반드시 나라를 다스려야 하고,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 반드시 가정을 다스려야 하며, 가정을 다스리기 전에 스스로 엄격한 수양을 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천하를 다스리는 일도 결국은 자기 수양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말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볼게요. 대통령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가정합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제는 누구나 그 잘못을 탓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의미에 비추어 해석한다면, 국가적 문제, 즉 대통령의 잘못을 탓하려고 한다면 그 전에 자신의 가정을 잘 다스려야만 하고, 그 전에 자기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이 없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시무시하죠. 공자의 제자 중에 증삼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얼음판 위를 걷듯이 전전긍긍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야 비로소 (엄격한 자기 수양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구나!” 유가의 자기수양의 엄격성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유가의 자기 공부는 이렇게 무겁고 어려기만 한 일이었을까요?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얘들아, 집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서는 누구에게나 공손해야 한다. 삼가는 마음으로 뱉은 말은 꼭 지키고, 편 가르지 말고 사랑하여라. 또한 어진 사람과 가까지 지내도록 하여라. 이렇게 행하고도 혹여 남는 힘이 있다면, 비로소 그때 공부하여라.” 『논어』 「학이」

공자가 남긴 공부에 관한 말 중에서 위의 대목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문에서는 공부를 학문(學文)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 그럼 우리는 언제 학문을 해야 할까요? 공자는 말했습니다. ‘힘이 남을 때’라고. 우리가 흔히 쓰는 여력(餘力)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했습니다. ‘여력’이란 ‘남은 힘’을 의미합니다. ‘여력이 없다’는 말은 ‘남은 힘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공자가 ‘남은 힘’으로 공부를 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공자가 생각한 공부는 책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에서는 부모님과 마주하고 밖에서는 친구나 어른들, 혹은 선생님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늘 누군가와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의 의미처럼 혼자 살 수만은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지요. 공자가 볼 때, 공부는 바로 그렇게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쉽게 말해 도덕 시험 점수 100점 맞는 사람과 훌륭한 인격을 바탕으로 사회에서 묵묵히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단순한 문제의 해답 속에 공자의 생각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이제 눈치를 채셨나요? 유가에서 말하는 공부라는 것은 사실 책을 읽고 암기하고 문제 푸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영어 단어를 많이 외고 수학 공식을 많이 아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 아닙니다. 공자는 말합니다. 착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적극적인 실천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요. 혹시 그렇게 하고도 남는 힘이 있다면 그때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린 것이니까요. ‘지행합일(知行合一)’, 즉 ‘아는 것과 행동은 일치해야 한다’는 진리가 동서양 모든 철학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를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공부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공부 왜 하세요?” 새 학기 강의가 시작되면 첫 시간에 제가 꼭 학생들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대체로 ‘수업을 듣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럼 저는 또 묻습니다. “수업을 왜 잘 들으려고 하나요?” 그러면 대체로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라고 답하더군요. 그러면 저는 또 묻습니다. “학점은 왜 잘 받아야 하죠?” 자 이제 눈치를 채셨나요? 제가 왜 이렇게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졌을까요?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하다보면 결국 왜 사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삶의 물음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변이 한결같이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점입니다. 좋은 성적을 받아야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월급이 많아지고, 월급이 많아야 결혼도 하고 집도 장만하고 그럴 수 있다는 거죠. 그래야만 비로소 ‘행복’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행복’이라는 근원적 목표로 거슬러가는 길은 각자 조금씩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것은 반드시 궁극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위한 행동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행복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부모님의 행복을 위한 것? 혹은 선생님을 위한 것? 아닙니다. 모두 틀렸습니다. 결국 그 행복을 누리는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공자는 그래서 나를 위해서 공부하라고 말했습니다.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공부한다는 자들은 자신을 위해서 했다. (하지만) 요즘 공부한다는 자들은 남에게 보이려고만 하는구나.” 『논어』 「헌문」

월드 스타가 된 싸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전세계를 열광시킨 가수 싸이는 남들 다 하는 대학 입학 준비, 취업을 위한 스팩 쌓기 등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매일 음악만을 생각했습니다. 그저 음악에만 충(忠)했습니다. 그러니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무명일 때에도 좌절하지 않고 음악을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공자의 말을 빌리면 싸이는 전적으로 자기를 위해 공부한 셈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진짜 자기를 위해서, 그래서 진짜 자기가 하고 싶어서 공부하고 있나요? 혹시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기대 때문에 억지로 하지는 않나요?

대학생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라는 것이 더 안타깝습니다. 초중고 학창시절 내내 대학만 가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정작 대학에 입학해도 남들 다 하는 토익 준비나 학점에 목을 매기 일쑤입니다. 정작 자기가 선택한 학과가 적성에 맞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는 학생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땀에 절어 있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땀냄새를 없애는 방법으로 향수를 택했다고 합시다. 몇 시간은 버틸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 그 고약한 땀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또 다시 향수를 뿌리는 게 합리적일까요? 아니면 깨끗하게 샤워를 하는 것이 나을까요? 문제의 해결책은 근원적인 원인을 제가하는 데에 있지 드러나 증상만을 다른 것으로 뒤엎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정리할게요. 공부는 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 100점 맞는 놈이 더 나쁜 짓을 많이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좋은 머리로 나쁜 짓을 더 많이, 완벽하게 해낼지 모르지요. 공부 잘 한다고 꼭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적은 좀 떨어져도 정말 인간적인 녀석들이 성공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사회라는 틀 속에서 누군가와 마주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짜 공부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엄마나 아빠가 바라는 꿈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보다 자기가 정말 좋아서 공부하는 사람이 결과적으로 더 성공에 가깝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사 지내는 형식에 정답이 있다고?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면 평소에 떨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온갖 음식을 정성껏 장만하고 조상님들께 차례를 올립니다. 또 종교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1년에 몇 번씩은 조상님들을 위해 제사를 지냅니다. 그렇게 되면 차례상 혹은 제사상을 두고 간혹 어른들끼리 의견 충돌이 일어나곤 합니다. 이를테면 생선과 고기 위치, 혹은 흰 과일과 붉은 과일 등의 음식 위치를 바꿔야 한다는 상차림에 대한 논란에서부터, 술을 올리고 밥을 올려야 한다든가 밥그릇 뚜껑을 언제 닫아야 하느냐는 제사순서에 대한 논란까지 종류도 다양합니다. 게다가 시간(봄인지 가을인지)과 공간(전라도인지 경상도인지)에 따라 제사음식 자체도 다르고 순서도 모두 제각각입니다. 헌데 재미있는 것은 다들 제사지내는 법이 따로 있다고들 합니다. 이렇게 죄다 다른데도 정답이 있다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릴 때 저희 집은 일 년에 대여섯 번 정도의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에만 올리는 음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서 젯상에는 올리지만 평소에는 거의 먹지 않는 음식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혹시 경상북도 안동지역의 ‘헛제삿밥’을 아시냐요? 제사에 쓰이는 나물들을 간장에 비비고, 고등어나 고래고기 같은 제사 음식을 곁들여 먹는 것으로 이제는 안동지역의 대표 음식이 되었습니다. 이 음식은 본래 제사를 지낸 뒤에 만들어 먹던 음식인데 그 맛이 좋아서 제사랑 상관없이 먹게 된 음식입니다.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이처럼 제사를 지내면 남은 음식들이 늘 문젯거리가 됩니다. 평소에 잘 먹지 않던 음식들을 젯상에 올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어린 마음에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중에 내가 제사를 지내게 되면 돌아가신 분이 생전에 좋아하시던 음식을 올리겠다고요. 할아버지는 사이다를 엄청 좋아하셨습니다. 특히 별이 일곱 개가 있는 회사의 사이다만 드셨습니다. 할머니는 간장 게장을 좋아하셨는데 나중에는 이가 없으셔서 아예 잘게 부셔놓은 게에 양념을 버무려 게장을 담그시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한 제상에 사이다나 간장게장을 올리면 나쁜 행동이고 예의에도 어긋날까요?

원래 상상력은 끝도 없기 때문에 먼 훗날도 생각해봤습니다. 내 후손들이 나를 위해 제사를 지낸다면 어떤 음식이 좋을까 하고요. ‘오징어젓갈, 미역줄기볶음, 쇠고기무국, 홍어삼합’ 정도면 참 좋겠습니다. 제사가 끝나자마자 제사에 모인 사람들이 둘러앉아 바로바로 먹어치울 수도 있으니까 음식 남을 걱정도 없지요. 여러분들은 훗날의 자신의 제사상에 어떤 음식이 올라오길 바라나요? 돼지갈비나 초밥, 까르보나라 스파게티가 떠오르진 않나요? 우리의 이런 즐거운 상상에 대해 공자는 뭐라고 답할까요?

임방이라는 제자가 예의의 근본에 대하여 여쭈었다.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한 질문이구나. 예의라는 것은 사치스러운 것보다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낫고, (또한) 장례를 치를 때에는 (절차를 잘 알아서) 쉽게 (잘) 치르는 것보다 차라리 (진정으로) 슬퍼해야 한다. 『논어』 「팔일」

실제로 동양철학의 역사 속에서 유가는 너무 형식에 얽매인 집단이고 장례식이나 제사를 지낼 때에 너무 사치스럽게 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논어 안에 등장하는 공자의 말을 들으면 과한 비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적어도 공자 자신은 겉으로 보여지는 형식적인 측면에 힘을 쏟기 보다는 내면의 진실성에 더 귀를 기울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해봅시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이 그와 같을 것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게 ‘차 조심해라’, ‘밥 굶지 말고 다녀라’라고 잔소리하던 그런 엄마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셨다니. 말로 하기 어려운 슬픔에 잠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례식을 어떻게 치르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만약 개신교를 종교로 가진 이모와 불교를 종교로 가진 삼촌이 서로 자기의 종교식으로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다툰다면 저는 아마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유족들이 장례법을 가지고 다투는 일은 자주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고인께서 생전에 믿던 종교의 예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장례는 세상을 떠나신 분을 위한 마지막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제가 온전히 그분을 위해 슬퍼하고, 또한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러 와주신 분들에게 그분을 대신에 인사를 드리는 것이겠지요.

‘홍동백서(紅東白西)’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이 말을 ‘제사상을 차릴 때, 신위를 기준으로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쉽게 말해 사과처럼 붉은 과일은 동쪽에, 배처럼 흰 과일은 서쪽에 놓으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홍동백서’가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라고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서울을 떠나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이 바다에 침몰한 일이 있었습니다. 세월호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을 온통 슬픔에 빠지게 했던 안타깝고 절망적인 사건이고 두 번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특히 이 배에는 수학여행을 위해 승선했던 10대의 학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건 이후 처음 맞이하는 추석명절, 유가족들은 희생된 아이들을 위한 정성스런 차례상을 준비했습니다. 피자와 치킨, 콜라와 과자로 차려진 차례상이지만 그 누구도 불경스럽고 예의에 어긋났다고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누구보다 그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부모들은 희생된 아이들이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음식을 제사상에 올려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들의 진솔한 태도에 감히 누가 제사상의 예의범절을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정리하겠습니다. 제사는 유가에서 행했던 중요한 의식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그 행위보다 중요한 것이 진솔한 마음가짐입니다. 앞서 세상을 떠난 그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번지르르한 상차림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그러니 장례나 제사에 관한 절차로 싸우는 것도 모두 부질없는 일입니다. 도리어 자신들의 수준 낮음을 부끄럽게 드러내는 다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부모님이 아직 곁에 계실 때에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미리 말해두는 것입니다. 불행은 불현듯 다가오고 후회는 끝없는 고통으로 남게 됩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게 나쁘다고?

 

유가의 고지식한 선비를 떠올려 봅시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시대, 가난한 농촌마을에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한 채가 있습니다. 쌀독은 비어있는데다 곧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한 가정의 가장이 그 주인공입니다.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은 일상적인 배고픔에 시달리고 아내는 삯바느질을 하고 있습니다. 알바를 하는 셈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이 집의 가장이란 양반은 집 안에 들어앉아 글을 읽고 있습니다. 벌써 10년 째,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다못한 아내가 선비에게 한마디를 던집니다. 애들 굶어죽는 꼴 보기 전에 나가서 돈을 좀 벌어오라고요. 기다렸다는 듯 선비가 소리칩니다. 어디 양반 체면에 장사꾼들처럼 이익에 눈이 멀어 돈을 벌어서야 쓰겠느냐고요.

공자가 만약 이 광경을 지쳐본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자기 자식들 굶기면서까지 책을 읽는 것도 모자라 물질적 이익 자체를 거부하는 이 선비를 보고 말입니다. 공자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하고 귀한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지만 옳지 못한 방법을 통해서 얻어서는 안 된다. 가난하고 천한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면 안 된다. 『논어』 「리인」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거친 밥을 먹고 물만 마시며 팔베개를 하고 누워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에 있단다.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고 귀한 자리에 오른다면 내겐 뜬 구름과 같을 것이니라.” 『논어』 「옹야」

가만히 보니 공자는 이익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이익 앞에 마주했을 때에 그것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방법으로 얻은 것인지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받게 되는 정당한 급여는 옳은 것이지만 주식투자나 부동산 투기로 얻은 부귀는 옳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주식투자가 뭐가 문제냐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주식 역시 누군가 돈을 잃어줘야 내가 수익을 올릴 수 있으니까요. ‘제로섬 게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 사회의 이익 전체는 일정하기 때문에 한쪽이 득을 보면 반드시 다른 한쪽이 손해를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적어고 공자가 생각한 부귀는 다른 사람의 손해를 통해 얻어지는 이익과는 거리가 있었을 뿐이지 부귀함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닌 셈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 공자는 정치가 무엇이냐는 제자의 질문에 먼저 굶는 백성들이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국방력에 힘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라는 공자의 입장을 보면, 그가 물질적인 측면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나아가 공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성장과 분배의 분제, 즉 경제성장을 우선으로 놓을 것인지 아니면 분배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우선하는 지에 대해 꽤 의미 있는 말도 했습니다.

나는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라면, 적다고 걱정하지 않고 골고루 분배되는지를 걱정하며,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은지를 걱정한다.’고 들었다. 골고루 분배되면 가난함이 없고, 서로 어우러지면 적음이 없고, 편안하게 하면 편중됨이 없어진단다. 『논어』 「계씨」

부유함과 가난함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인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세계 최고의 부자인 만수르의 입장에서는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일 뿐입니다. 반대로 세 끼 따뜻한 밥을 먹는 것에 별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몸에 장애가 있어 생활이 매우 불편하거나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운 가정의 사람과 비교해 행복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절대적인 부자와 절대적인 가난뱅이가 없다면 결국 부유함과 가난함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라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앞서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가 힘써야 할 부분이 바로 ‘분배’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누구는 일한 만큼 대가를 가져가지 못하는데 누구는 노력에 비해 어마어마한 대가를 가져가는 사회라면, 아무리 그 사회가 성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억울한 사람들이 나오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억울함을 없애야 하는 자가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성장보다는 분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공자를 공산주의자라고 욕할 수는 없는 부분이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물론 공자는 물질적 이익 자체로부터 태연해지기를 바랐는지 모르겠습니다. 부귀를 쫓는다고 누구나 부귀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공자는 그것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처해진 상황에 만족하고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행복의 의미를 찾으라고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안회는 참으로 훌륭하구나. 다른 사람들은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가난한 마을에 사는 것을 (창피하다고)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가난 속에서도 얻어지는 작은) 즐거움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으니 참으로 훌륭하구나” 『논어』 「옹야」

정리하겠습니다. 공자도 사람인지라 부유하고 귀함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익을 얻기 위해 누군가 반드시 손해를 봐야만 한다면 옳지 않다고 여긴 것뿐입니다. 그러니 식구들 굶겨가며 자기 공부만 하고 있는 선비를 공자는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하는 만큼의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이익 앞에 올바름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세상은 살짝만 비겁하면 손쉽게 더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습니다. 어디서든 새치기 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바로 그것이겠지요. 그래서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임무가 중요합니다. 누구나 열심히 일한 만큼 그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나아가 누구나 자기 능력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공자가 생각한 국가의 임무가 아닐까요?

 

이것 하나만 기억하고 살자.

 

어떤 철학자의 삶의 방식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공자처럼 똑같은 질문에도 묻는 사람이 처한 상황을 고려해서 각기 다른 답변을 내놓던 인물에 대해서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철학자의 좌우명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도 이런 의문을 지녔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공자의 좌우명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궁금했던 것이지요. 바로 그 제자가 자공입니다. 어느 날 자공은 공자에게 돌직구 질문을 날립니다.

자공이 여쭈었습니다. “한 마디의 말 중에 평생토록 실천하면서 간직해야 하는 것이 있을까요?”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아마도) 서(恕)라라는 것일 게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않는 것이다.” 『논어』 「위령공」

우리가 흔히 공자의 철학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仁)이 아니라 서(恕)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인(仁)은 논어에 100번도 넘게 나오지만 서(恕)는 단 2번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비추어 봐도 좀 이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이야말로 공자가 후세에 전하려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恕)는 ‘같다’는 의미의 여(如)자와 ‘마음’을 뜻하는 심(心)으로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앞서 역지사지의 마음, 즉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늘 이 마음, 즉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마음’만 간직하고 살아도 다투고 싸울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딱 이 하나의 마음입니다.

지금까지 억울한 공자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우리가 흔히 유가에 대해 지니고 있었던 오해들이 상당부분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恕)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그동안 한국사회의 문제점이 유가적 전통에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공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이 모든 문제가 결국은 공자 때문이라는 식의 유치한 결론은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쟤는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지 말고 저 아이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 애는 왜 저렇게 게임만 하고 공부는 뒷전인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지 말고 실제로 아이디를 만들어 그 게임을 함께 해보면 어떨까요? 왜 우리 엄마는 저렇게 잔소리만 하는 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기 전에 엄마의 입장에서 내세울 것이 결국 자식인 ‘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세상의 수많은 갈등은 대부분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동네 할아버지가 지적한 것처럼 아는 것보다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면, 우리 이제 행동할 때입니다.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진은영의 『문학의 아토포스』[ⓔ시대와철학 알림]

진은영의 『문학의 아토포스』 –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안녕하세요, 학술 1부입니다. 11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를 아래와 같이 공지합니다. 이번에는 진은영 선생님이 직접 본인의 신간인『문학의 아토포스』를 가지고 독서 토론을 진행해 주실 계획입니다. 그리고 최종덕 선생님께서 흔쾌히 지정 토론을 맡아 주셨습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10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발표자: 진은영(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
지정 토론자: 최종덕(상지대 교수)
철학자의서재: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일? 시: 2014년 11월 28일(금) 오후 7시 30분 ~ 9시 30분
장 소: 태복빌딩 302호 한철연 강의실

이 책에 대해 참고할 만한 서평입니다.
1)‘문학의 아토포스’낸 진은영 시인 “고통의 목소리를 보여주는 ‘문학의 정치’ 필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8112056385&code=960100

2)‘시와 정치의 관계 천착한 진은영 논문집’
www.hani.co.kr/arti/culture/book/650563.html>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50563.html

▷ 11월 이후 일정
12월 한철연 정기 학술대회 관계로 월례발표회는 다음 달로 순연

● 이후에 다루었으면 하는 책이나 주제가 있으시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yhseo2001@hanmail.net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2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2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제부터 용렬한 후손의 조상 망신시키기가 어물전 망신을 꼴뚜기가 시키는 꼴보다 더 심하더라는 욕을 먹을 셈치고 어디 한번 제가 비몽사몽 중에 본 있음의 살붙이와 없음의 살붙이들을 그림으로 그려 볼까요?

 

윤구병 그림18

 

이 그림을 보면 가운데 있는 점①을 중심으로 네 개의 동심원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맨 바깥에 있는 동심원 밖에는 텅 빈 바탕⑥이 있습니다. 자, 이제 번호 ①에서 ⑥까지 저마다 무엇을 가리키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①­하나(있음, 있는 것, hen)

②­생각(정신, nus)

③­생명(영혼, psyche)

④­자연(생성, physis)

⑤­질료(없는 것=비존재, hyle)

⑥­아예 없음(허무, ouk)

이 그림을 눈여겨보신 분은 아마 조금 의아할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묻겠지요.

“너 플라톤 손자 맞냐?” “예. 맞아요.” “신플라톤학파에 속한단 말이지?” “글쎄요. 다들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까 제가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말해도 무리는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 네가 그려 놓은 그림 그게 뭐냐?” “왜요? 뭐 잘못된 게 있나요?” “어허, 그 그림 네 할아버지가 그린 우주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 아니냐?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 플라톤 옹이 〈티마이오스〉에서 설명하신 우주를 그림으로 그리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게야.”

 

윤구병 그림19

 

“자, 봐라. 네 할아버지는 우주 밖에 있는 것만 두고 ‘있는 것과 같은 것〔tauton〕’으로 우주의 바깥 테두리를 둘러 이 우주를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을 너도 인정하겠지? 그러니까 ‘있는 것과 다른 것〔heteron〕’은 그것이 정신〔nus〕이 되었건, 생명〔psyche〕이 되었건, 물질〔soma〕이 되었건, 물질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hypodoke〕이 되었건, 시쳇말로 운동이 되었건, 공간이 되었건, 하나도 빠짐없이 이 우주 안으로 밀어넣지 않았더냐? 같은 것의 고리가 우주를 감싸서 이 우주가 영원불변한 하나의 닫힌 우주로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우주가 하나인 있는 것과 맞닿아서 그 영향을 받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네 할아버지의 우주를 함께 꼼꼼히 들여다보자꾸나. 네 할아버지의 생각에 따르면 이 우주는 전체로 보아 빈틈없이 질서 지워진 완벽한 겉모습을 지니고 있어. 그러나 같은 것〔tauton〕으로 도배된 우주 표면 안쪽은 다른 것〔heteron〕으로 도배되어 있는데, 다른 것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있는 것과 다른 것, 하나와 다른 것, 형상〔idea〕과 다른 것이 아니겠느냐? 있는 것과 다른 것은 무엇이겠느냐? 언뜻 상식으로 생각하면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네 할아버지는 네 고조할아버지를 닮아서 아예 없는 것〔虛無〕은 생각할 수도 없고, 말로 드러낼 수도 없는 것이라고 여겨 아예 없다고 여겼어. 그 점에서는 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나 네 할아버지나 모두 그리스 정신의 소유자라고 볼 수 있겠지.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오랜 그리스 정신의 전통이 네 할아버지 플라톤 옹의 머릿속에도 꽉 박혀 있었던 거야. 없는 것을 있다고 인정하면 합리적 사고의 바탕이 아예 무너져 버린다고 여긴 거지. 그래서 네 할아버지가 고심 끝에 이끌어 낸 결론은 ‘있는 것과 다른 것은 없는 것이 아니요, 있는 것과도 다르고, 없는 것과도 다른 어떤 것, 다시 말해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어서,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방황하고 있는 것〔planomene aitia〕이다.’였지. 자, 그렇다면 이렇게 규정할 수 있겠구나. ‘있는 것과 다른 것〔heteron〕’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apeiron〕’이라고 말이야. 그렇다면 다음으로 하나와 다른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여럿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여럿이란 무엇이냐? 여럿의 최소 단위는 둘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둘이 나타나면 그 둘이 따로 있을 자리가 필요하게 되어 당장에 공간이 나타나고, 그 둘이 따로 떨어져서 관계를 맺지 않으면 둘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둘은 서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둘이 관계를 맺자마자 둘 사이에 서로 저됨〔identity〕이 사라지는 변화가 일어나 운동이 시작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하나와 다른 것〔heteron〕’은 여럿이요, 공간 규정이요, 시간 규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런데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다른 것〔heteron〕의 성격 하나는 ‘있는 것과 다른 것’으로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apeiron〕’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렇게 따지면 둘은 다시 말해 ‘있는 것이 아닌 것임과 동시에 없는 것이 아닌 것’이겠구나. 적어도 네 할아버지의 논리에 따르면 그런 것이겠지? 마지막으로 형상〔idea〕과 다른 것은 무엇이겠느냐? 하나하나의 형상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서 저마다 하나로 있는 것이고, 그런 뜻에서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고, 관계를 맺지 않으므로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정지의 반대는 무엇이지? 운동이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운동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전에 어떤 운동이 있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겠구나. 크게 보아 운동 가운데는 질서 있는 운동도 있고 무질서한 운동도 있지? 무엇을 질서 지워서 형성하는 운동도 있고, 질서를 흩뜨려서 허물어뜨리는 운동도 있지 않느냐? 네 할아버지가 〈티마이오스〉에서 말한 일정한 수치와 척도에 따라서 우주를 만들어 낸 데미우르고스(Demiourgos)의 운동은 바로 질서 있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데미우르고스의 운동이 우주 안에 반영되면 정신〔nous〕의 운동이 되고, 생명〔psyche〕의 운동이 되겠구나. 너도 네 할아버지 플라톤 옹이 〈티마이오스〉(Timaios)에서 한 말을 기억하고 있겠지? 데미우르고스가 한편으로는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제해서 생성〔gignomenon〕을 버물려 우주의 몸〔soma〕을 만들고, 그 몸 속에 생명〔psyche〕을 집어넣고, 그 다음에 정신〔nus〕을 집어넣어 이 우주를 살아 있는 것, 이성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말이야.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이 우주 속에 있는 생명과 정신 작용의 근원은 데미우르고스가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질서를 지향하는 운동이 있고, 그 근원이 어디라는 사실은 밝혀졌다고 치고, 거꾸로 무질서를 지향하는 운동은 어디에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하겠느냐? 우주 밖에는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이나 다른 것은 없다고 네 할아버지가 우기고 있으니까,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우주 밖에 있는 것은 형상과 데미우르고스뿐이겠구나. 그러면 무질서한 운동의 원인은 우주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 원인이 무엇이겠느냐? 형상과도 다르고, 데미우르고스의 운동과도 다른 것은 우주 안에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한데, 있는 것과 다른 것, 하나가 아닌 것, 형상과 다른 것, 질서 있는 운동의 원인과 다른 것, 그래서 질서에 따르도록 타이르면 그 타이름을 따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엇나가기도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그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 여럿인 것, 움직이는 것, 움직이되 내버려 두면 번번이 무질서와 혼돈 쪽으로 몸을 맡기려고 하는 것, 네 할아버지가 흔적〔ikne〕이라고도 부르고, 방황하는 원인〔planomene aitia〕이라고도 부르고, 생성〔gignomenon〕이라고도 부른 바로 그것이 아니더냐? 이야기가 너무 장황하게 늘어져서 곁길로 새어 나간 느낌이 없지 않다마는, 네 할아버지가 그려 놓았을 것으로 보이는 우주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자꾸나. 너도 이 그림이 네 할아버지 머릿속에 들어 있는 우주의 모습이라는 걸 인정하느냐?” “그림이 삭막하기는 하지만 얼추 비슷하네요.” “삭막하기는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우주의 모습도 오십 보 백 보야. 어디 네 우주와 네 할아버지의 우주 그림을 나란히 그려 놓고 견주어 보랴?

 

윤구병 그림20

 

보다시피 네 우주의 모습과 플라톤 옹이 생각한 우주의 모습은 정반대가 아니냐? 먼저 플라톤은 우주의 밖에 있는 것(①)을 두고, 있는 것의 세계와 맞닿아 있는 같은 것의 고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의 중심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두었는데, 너는 거꾸로 우주의 중심에 하나(있는 것)를 두고 우주의 맨 바깥쪽에 없는 것을 두고 있지?” “네, 그렇습니다.” “다음으로 너는 마치 해에서 햇살이 흘러나와 사방으로 흩어질 적에 빛의 중심인 해에 가까이 있을수록 빛다발이 더 많이 뭉쳐 있고, 해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빛다발이 성글어지면서 햇살이 힘을 잃는 것처럼 하나에 가장 가까운 누스(nous)에서 프시케(psyche)를 거쳐 힐레(hyle)에 이르는 동안 있는 것이 조금씩 잇달아 빠져나가 마침내 있는 것이 없는 완전한 결핍 단계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우주의 중심에 있는 하나(있는 것)에서 멀어질수록 없는 것이 지배하는 어둠의 영역으로 확산하는 우주를 그리고 있는데, 플라톤은 반대로 중심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소마(soma)가 감싸 안고, 소마를 프시케(psyche)가 또 감싸 안아 흩어지지 못하게 하고, 개별화하는 경향을 지닌 프쉬케를 그보다 더 강한 끈을 지닌 누스(nous)가 감싸서 우주가 전체로서 질서 있는 하나의 틀을 유지하도록 하고, 마지막으로는 맨 바깥에 있는 있는 것과 같은 것인 같음(또는 같은 것=tauton)의 끈이 우주를 칭칭 동여서 하나로 수렴하는 우주를 그리고 있지 않느냐?”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로 뭉치는 네 할아버지의 우주와 여럿으로 흩어지는 너의 우주는 전혀 거꾸로가 아니냐?” “바로 보셨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무엇인가 빠져 있는 것, 비어 있는 것은 빠진 무엇이 채워지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이 아쉬움이 그리움을 낳고, 이 그리움이 절실하면 할수록 빠져 있는 그 무엇, 다시 말해서 하나를 찾으려는 열망이 그만큼 강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 할아버지의 우주는 이미 하나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충만한 우주에는 크게 보아 빠진 것,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이 우주 밖에는 텅 빈 것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할아버지의 우주에서 완전한 결핍과 비슷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주의 중심에 점의 형태로나 있겠지요. 그리고 할아버지의 우주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우리가 사는 지구일 터이므로 현상만 살피면 이 지구에는 온갖 혼란이 일상화되어 있고 우리의 의식도 그 영향을 받아 혼란 투성이가 됩니다. 그러나 이 우주 내부의 모순은 비록 근본적으로는 해결될 길이 없다 할지라도 사람의 경우에는 영혼의 정화를 통해서 ‘하나와 같은 것〔tauton〕’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므로 사람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보시다시피 제가 그리는 우주는 허무에 둘러싸여서 어찌 보면 훨씬 더 상황이 비극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우주에는 ‘아예 없는 것(허무)’을 빼면 아무리 희미하게나마 하나인 있는 것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닿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어둠을 헤치고 이 빛살을 따라가면 우주의 모든 것이 다 하나와 하나가 되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떻든 네 우주 모형에 따르면 여러 우주, 무한한 우주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네 할아버지의 우주 모형에 따르면 하나의 우주밖에 있을 수 없거든.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찌하여 너를 신플라톤주의자라고 부르고, 심지어는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라는 딱지까지 붙이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구나.” “그거야 제 잘못이 아니지요. 제가 그리는 우주가 플라톤 할아버지의 우주와는 달리 닫힌 우주가 아니고 열린 우주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우주를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고조할아버지인 파르메니데스 옹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 옹에 이르기까지 이루어 놓으신 형이상학의 유산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힘을 입었습니다. 특히 할아버지 플라톤 옹의 영향은 더없이 컸지요. 저는 파르메니데스 옹이 하나로 있는 것만 인정한 결과로 후손들을 어떤 궁지에 빠뜨렸는지 잘 알고 있었고, 이 궁지에서 벗어나려고 할아버지 플라톤 옹이 여러 하나인 형상의 세계를 가정한 결과로 어떤 문제는 해결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골치 아픈 문제를 새로 불러일으켰다는 것도 분명히 이해했습니다. 또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 옹이 형상의 세계를 거부하고 형상의 세계와 경험 세계라는 두 세계 사이에 있는 틈을 메워 보려고 애를 썼지만 어느 점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눈치챘지요. 따라서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은 이 모든 작업의 성과를 한데 모아서 모순 없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비록 제 조상들의 뜻에 어긋나는 쪽으로 드러났더라도 너그러이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책읽기-『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

 

 

찬초?(다중지성정원회원)

 

프랑스 생명 철학의 거대한 흐름에 대한 보고

“깡길렘(캉길렘)인지, 킹크랩인지.” – 얼마 전 우연히 듣게 된 농담의 한 토막이다. ‘깡길렘’이라는 이름이 너무 낯설었던 나머지, 영미철학을 공부한 어느 노학자가 깡길렘 연구자의 발표에 이어 이런 우스갯소리를 던졌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화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에게 조르주 깡길렘(George Canguilhem)이나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과 같은 학자들이 속해 있는, 생성의 관점으로 생명을 사유하려는 프랑스 생명철학의 계보가 상당히 낯설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생명철학을 꾸준히 연구하고 있는 학자이자,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창조적 진화』의 역자로 알려져 있는 황수영의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갈무리, 2014)는 깡길렘과 시몽동을 비롯한 낯선 이름의 학자들을 베르그손과 함께 제시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베르그손 연구서들 사이에서 매우 독특한 지점을 확보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는 ‘깡길렘, 시몽동, 들뢰즈와의 대화’이다. 즉, 프랑스에서 거의 처음으로 생명 철학의 체계적인 정립을 시도한 베르그손을 중심으로, 생명 철학과 생성 철학이라는 두 가지의 키워드를 놓고 각자 독창적인 관점에서 다양한 논의를 전개한 깡길렘, 시몽동, 들뢰즈 철학의 구도를 그려보려는 낯선 기획이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베르그손의 텍스트는 『창조적 진화』이다. 베르그손은 애초에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과학의 소관인 것으로만 간주되어 온 진화론을 형이상학의 문제로 재구성한다. 당시에 제기되고 있던 여러 진화 이론들을 숙고한 결과물인 『창조적 진화』를 기초로 하였을 때 주목하게 되는 베르그손의 주요 개념은 ‘생명의 약동(?lan vital)’이다. 이 개념은 당대의 기계론적 과학이 신봉하던 인과 법칙에 따라 계산과 추측이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던 생명의 역사라는 흐름 속에서 우발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베르그손 철학의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그의 입장을 고생물학이나 다윈주의 이론가들의 견해와 비교한다. 이때 저자가 취하는 자세는 어느 일방에 치우친 것이 아니며, 과학과 철학 사이에서 생성되는 의미 있는 교차점들을 조명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의철학(醫哲學)의 문제를 고민하며 생기론적 철학을 전개한 조르주 깡길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유기체나 인간에게서 발생하는 정상성과 병리의 문제이다. 베르그손이 생명계를 시간적 운동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깡길렘은 개체들의 구체적 생명활동에 관심을 갖는다. 특히 흥미로운 개념은 바로 깡길렘의 ‘건강’ 개념이다. ‘건강’을 “일시적으로 정상이라고 정의되는 규범을 넘어설 가능성이며, 일상적 규범의 위반을 견디고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규범을 설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밝힌 깡길렘의 생명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문제에 대하여 무수한 반응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건강을 남용할 가능성도 건강의 일부를 이룬다.”라는 그의 말은 생명 현상의 우발성이나 과잉 현상으로부터 규범을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역동적 세계관을 구상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보통 ‘건강’을 일정한 상태로 ‘유지해야만 하는 것’, 비정상적인 것들로부터 지켜내야 할 것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깡길렘의 견해에 비추어보면, 건강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특이성과 전복가능성이 새롭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프랑스 생명철학의 계보에서 생명이라는 개념은 질병이나 노화, 죽음과 연관되어 온 통속적인 주제나 보건 산업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인식을 통해 재발견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된다.

한편, 자연과학 분야에서의 연구를 시작으로 후에 과학철학과 형이상학의 문제에 관심을 쏟은 과학철학자인 질베르 시몽동은 ‘생성의 철학’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베르그손과의 연관성을 드러낸다. 시몽동에게서 중요한 개념은 ‘개체화’이다. 베르그손에게 진화가 생명의 수다한 잠재적 경향들이 종과 개체로 분화되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면, 시몽동에게서 전개체적 과정은 긴장된 힘들이 공존하는 상태이며, 개체화과정은 하나의 싹을 중심으로 동일한 요소들을 응집시키는 ‘분극작용’이다. 이러한 베르그손과 시몽동의 구상에 의지해 들뢰즈는 차이의 철학을 기획하게 된다. 그는 베르그손에게서 잠재태의 현실화라는 장치를 참조하고 지속(dur?e)의 개념을 자기 자신과 달라지면서 반복하는 동적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들뢰즈는 자신의 생성 철학의 핵심 모형을 베르그손에게서 구하면서도, 발생이 동시에 개체화의 장이라는 특정한 환경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시몽동의 개체화이론을 조회하고 있다. 이로써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에서는 생명의 무궁무진한 폭발과 개체화라는 안정화과정이 서로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직접 과학 지식을 분석하고 참고하면서 자신들의 개념을 정립해 온 베르그손, 깡길렘, 시몽동의 선행작업을 마침내 들뢰즈가 철학사적인 관점에서 종합하고 이로부터 다시금 독창적인 개념을 발명해내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게 된다. 자기 자신과 달라지는 운동으로서 베르그손의 지속 개념을 받아들인 들뢰즈가 차이를 자기 철학의 핵심 개념으로 삼았을 때, 서양철학의 주류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플라톤주의가 전복되고, 차이, 이미지, 우발성, 일회성과 같은, 여태 철학의 뒷자리로 밀려나 있었던 개념들이 전면적으로 대두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황수영의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는 베르그손의 철학과 그것이 프랑스 철학계에 미친 영향에 대한 상세한 보고이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우리에게 다분히 낯선 철학의 경향들을 소개하고 있는 어떤 잠재성의 표현이자, 베르그손을 중심으로 생성철학의 계보를 엮은 분극작용, 즉 응집을 통한 개체화의 한 양태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 책이 생성의 철학에 대한 개인적 연구의 집대성인 동시에, 베르그손에서 깡길렘, 시몽동, 그리고 들뢰즈로 자리를 옮겨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유의 발생과 생성의 흐름 자체를 보여준다는 사실은 활달한 독서의 재미뿐만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강물이 흘러가는 가운데, 읽는 사람 스스로 그 광경을 목도하며 홀로 정지해 있는 듯한 숭고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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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공산주의의 현실성』

『공산주의의 현실성』

 

김상범 (포항공대 대학생)

 

오늘날 ‘공산주의’와 ‘현실성’이라는 단어처럼 붙여쓰기에 어색한 단어들이 있을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라는 유령’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에는 공산주의가 ‘현실적 위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공산주의라는 유령’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데리다의 말대로 ‘유령’은 단순한 ‘순수 정신’이 아니라 육체성이나 현실적인 위력을 어느 정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유령은 현실성과 절연된 채 ‘순수 이념’이 되어버린 듯하다. 특히 바디우는 공산주의가 플라톤적인 의미에서의 ‘이념’, ‘이데아’일 뿐만 아니라 칸트적 의미에서의 ‘규제적 이념’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 공산주의는 살과 살이 부딪히는 시공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초역사적인 보편성을 획득했지만, ‘현실’ 속에서는 완전히 무력한 것처럼 보인다.

<브루노 보스틸스>

브루노 보스틸스는 바디우 등이 내세우는 공산주의에 대한 ‘잠재성의 존재론’을 넘어서 ‘현실성의 존재론’을 구축하기 위해 이 책을 쓰기로 기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이 ‘공산주의의 현실성’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조화된, 그리고 전투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그대로 복귀하는 것도 아니고, ‘사유는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유치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다.(보스틸스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현실성은 reality가 아니라 actuality이다.)

보스틸스가 기존의 ‘정치적 존재론’을 검토할 때, 사실상 레닌주의적 정치철학, 혹은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의 정치학에 대한 반박으로서의 비전투적이고 탈주체적인 존재론을 제시하고 있는 에스뽀지토와 모레이라스의 사유를 먼저 검토하는 것은 이러한 복귀가 낳을 치명적인 결과를 피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에스뽀지토는 ‘비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을 제시하는데, 이러한 ‘비정치적인 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의 초월적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 정치 전체의 배후에 깔린 전제들 자체를 근본적[급진적]으로 만듦으로써, 즉 이 전제들을 내부로부터 동시에 치명적으로 붕괴시키는 일의 초과 성취를 통해서”(『공산주의의 현실성』, 163쪽)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비정치적인 것’은 정치가 펼쳐진 영역을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며, 이러한 공간을 제공한다는 것은 전투적이고 주체중심적인 맹목적 실천으로부터 거리를 취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모레이라스는 ‘하부정치’라는 개념을 통해서 주체주의의 “돌림병”을 치유하고자 한다. 하부정치라는 것은 적/아군의 구분을 넘어서, 유위적이고 주체적이며 주권적인 결단을 넘어서 존재하는 ‘비주체의’, ‘수동적인’, ‘무위적인’ 것으로서 정치적인 것 혹은 정치적 주체의 ‘구성적 외부’라고 볼 수 있다. 모레이라스는 이 ‘하부정치’ 개념을 통해 “자기정체성에 내재하는 배제된 타자의 위상학”(『공산주의의 현실성』, 176쪽)에 도달하게 된다.

보스틸스는 이러한 에스뽀지토와 모레이라스의 이론을 통해 주체중심적이고 전투적인, 그래서 위험성을 간직한 순수한 해방의 존재론을 극복할 가능성을 발견하지만 동시에 이들의 이론이 “통상적인 정치 전부를 능가하는 도덕적인 탁월함의 증거로서 비정치적인 것의 비효율성에 의지하는 아름다운 영혼이 취하게 되는 태도”(『공산주의의 현실성』, 195쪽)를 보여준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통렬한 비판과 함께 보스틸스는 랑시에르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랑시에르는 잘 알려진 대로 감각적인 것을 분할하는 질서이자 셈의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논리로서 ‘치안’과 이러한 ‘치안’에 대항하여 “셈의 논리”로부터 벗어난, 평등을 주장하는 ‘정치’를 구분하는데, 보스틸스는 이러한 “감각적인 것을 [명령적] 질서대로 분할 및 구획하는 것으로서 치안과 몫이 없는 부분집단을 기입하는 것으로서 정치 사이의 대립은, 사변적 좌익주의의 특성이라 할 법한 모순의 ‘순수화’에 위험할 정도로 가까운 것”(『공산주의의 현실성』, 229쪽)이라고 비판한다. 뿐만 아니라 치안과 정치가 이와 같은 것이라면, 정치는 단지 ‘간헐적으로’ 또는 ‘희귀성을 가지고’ 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보스틸스는 지적한다.

또한 보스틸스는 랑시에르의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것으로서의 공산주의, 즉 비시대적인 것이자 비장소적인 것으로서의 공산주의가 공산주의의 ‘비현실성’을 옹호하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비현실성에 대한 이런 옹호는, 비 현실성 자체의 지반이 우리 자신의 현실성과 해방적 관련을 맺는 때는 언제이며 어디에서 관련을 맺게 되는가를 결정해야만 하는, 그 다음 수준으로 문제를 넘기게 되는 것은 아닌가?”(『공산주의의 현실성』, 250쪽)

그래서 보스틸스는 이렇게 랑시에르의 한계를 지적하며, ‘실행’에 대한 사유를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지젝에 대한 검토로 넘어가게 된다. 지젝은 『믿음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라캉과 헤겔을 참조하면서 그의 ‘진정한 실행’ 개념을 “신경증에서의 [증상으로 구현되는] 행동화, 정신병에서의 [발작적인] 실행으로서의 이행, 그리고 순수하게 형식적인 자기주장에서의 상징적 실행”(『공산주의의 현실성』, 272쪽)과 구분짓는데, 이러한 실행은 “행위자가 속한 상황의 그야말로 상징적인 좌표를 재구축하는”(『공산주의의 현실성』, 272쪽) 행위로 정의된다.

그러나 이후의 저작에서 지젝은 바틀비를 옹호하며 ‘가짜 실행’을 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해석이나 사유에 머물지 않도록 명령하고 맹목적인 실천을 명령하는, 도서관에서 나와서 거리로 나갈 것을 명령하는 협박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지젝은 ‘멈춰라, 그리고 사유하라’고 말한다.

심지어 지젝은 진정한 ‘실행’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기도 한다.

“오늘날 진정한 정치적 실행일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지배적인 운동을 중단시키는 일이다.”(『공산주의의 현실성』, 321쪽)

이것은 보스틸스의 입맛에는 맞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것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사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일순간에 정지시킬 수도 없고, 이러한 초월적/신적 폭력에 의한 자본주의의 정지가 바람직한 정치적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들뢰즈와 가타리, 네그리와 하트가 말한대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뚫고 지나가야 하며, 자본주의 안에서 공산주의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심지어 가속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자본주의를 가속화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바깥에 서 있을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현실적인 사유’가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현실성’을 파악하고 현실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보스틸스의 생각과는 반대로 ‘잠재성’의 사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현실성’만 부여잡고 있는다고 해서 ‘현실적인 사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잠재성을 알아야 현실의 경향성을 파악할 수 있고, 또 존재론적으로도 현실의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잠재적인 것이 요청되는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를 하이데거-아감벤적 의미에서의 ‘순수 잠재성’으로 정의하거나, 바디우적/고진적 의미에서 ‘순수 이념/규제적 이념’으로 정의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들뢰즈적 의미에서 언제나 현실화될 수 있는 잠재성, 현실화될 수 있는 ‘이념’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회에 언제나 내재하는 비시대적인/비장소적인 것으로서의 공산주의, 그러나 동시에 언제나 어디에서나 현실화될 수 있는 공산주의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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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 증식과정(2)[자본론강독]-16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 증식과정(2)[자본론강독]-16

정리 : 김선이

 

제2절 가치 증식과정

 

●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한 측면으로서 가치증식과정

자본가에 의해 취득된 생산물은 사용가치이다. 상품생산에서는 사용가치는 ‘그 자체로서 사랑받는’ 물건은 아니다. 상품생산에서 사용가치가 생산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교환가치의 물질적 밑바탕, 그것의 담지자이기 때문이며 또 담지자인 한에서다.

자본가의 목적은 ①자본가는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용가치, 즉 판매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물품인 상품을 생산하려고 한다. ②자본가는 생산에 사용한 상품들의 가치총액[즉, 그가 상품시장에서 자기의 귀중한 화폐를 투하해 획득한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총액]보다 그 가치가 더 큰 상품을 생산하려고 한다. 그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려고 할 뿐 아니라 상품을 생산하려고 하며 사용가치뿐 아니라 가치를 그리고 가치뿐 아니라 잉여가치를 생산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상품생산이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노동과정]은 분명히 생산과정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상품 그 자체가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의 생산과정도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이어야 한다.(P.246~247)

● 생산과정을 가치형성 과정으로 고찰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의 사용가치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의 양에 의해, 즉 그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이것은 노동과정의 결과로 자본가가 손에 넣은 생산물에도 해당된다. (P.247)

면사의 생산에는 우선 원료가 필요하다. 면화의 가격에는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이 이미 사회적 평균노동으로 표현되어 있다. 면사의 예를 보아 면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면화를 원료로 하는] 면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일부이고 따라서 그것은 면사에 포함된다.

요컨대 12원이라는 가격으로 표현되는 면화와 방추라는 생산수단의 가치는 면사의 가치, 즉 생산물의 가치의 구성부분으로 된다. 그러나 두 가지 조건만은 충적되어야 한다. ①면화도 방추도 사용가치의 생산에 실제로 이바지해야만 한다. 가치의 담지자는 사용가치를 가져야만 한다. ②지출된 노동시간은 주어진 사회적 생산조건 하에서 필요한 노동시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P.247~249)

자본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상품의 독특한 사용가치였다. 이것이야말로 자본가가 노동력으로부터 기대하는 독특한 봉사며 그는 노동자와의 거래에서 상품교환의영원한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 사실상 노동력의 판매자는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실현하면서 그 사용가치를 양도한다. 그는 사용가치를 내어주지 않고서는 교환가치를 받을 수 없다. (P.256~257)

자본가는 화폐를 상품들로 전환시킴으로써 그리고 죽은 물체에 살아있는 노동력을 결합시킴으로써 가치를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가치창조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을 비교해 보면 가치증식과정은 일정한 점 이상으로 연장된 가치창조과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판명된다. 만약 그 과정이 자본에 의해 지불된 노동력의 가치가 새로운 등가물에 의해 보상되는 점까지 밖에 계속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가치창조과정에 불과할 것이고 만약 그 과정이 이 점을 넘어 계속된다면 가치증식과정으로 될 것이다.

가치형성과정을 노동과정과 비교해 보면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유용노동에 의해 성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치형성과정에서는 이 동일한 노동과정이 오직 양적 측면에서 고찰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의 작업시간, 즉 노동력이 유용하게 지출되는 계속시간 뿐이다. 여기에서는 노동과정에 들어가는 상품들은 더 이상 물적 요소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아직 대상화된 노동의 일정량으로 간주될 뿐이다.

사용가치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시간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인 한에서만 계산에 들어간다. ①노동력은 반드시 정상적인 조건 하에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② 자본가는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형법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낭비는 대상화된 노동의 쓸모없는 지출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것은 생산물에 들어가지 않으며 생산물의 가치에도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상품의 분석을 통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 사이의 차이를 발견했는데 이제 이 차이가 생산과정의 두 측면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다.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상품의 생산과정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며 상품생산의 자본주의적 형태다.

자본가가 취득하는 노동이 사회적 평균수준의 단순한 노동인가 아니면 더 복잡한 노동인가는 가치증식과정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 평균노동보다 고도의 복잡한 노동은 노동력의 지출이다. 이러한 노동력은 가치가 더 크기 때문에 고급 노동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동일한 시간 안에 상대적으로 더 큰 가치로 대상화된다.

어떤 가치형성과정에서도 고급 노동이 항상 사회적 평균노동으로 환원되는 것, 예컨대 하루의 고급 노동이 X일의 사회적 평균노동으로 환원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가가 고용하는 노동자는 단순한 사회적 평균노동을 수행한다는 가정에 의해 불필요한 조작을 생략하고 분석을 단순화 시키는 것이다.(P.259~263)
 

출처:www.theguardian.com

출처:www.theguardian.com

 
● 생산수단의 가치가 생산물로 이정되기 위한 필요조건
생산수단의 가치는 새로운 제품으로 이전되어 새로운 제품의 가치의 구성부분이 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이 사용가치의 생산에 실제로 쓰여 거기에 역할하지 않으면 안 되고, 사회적, 평균적 생산조건 하에서 필요한 노동량만큼이 옮겨가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 방적공이 가치를 덧붙이는 노동은 추상적 인간노동이다.
방적노동자가 면사에 가치를 덧붙여주는 노동은 추상적 인간노동이다. 방적노동자가 노동과정에서 면사를 만드는 노동은 구체적 노동이다. 그러나 방적노동자가 면사에 새로운 가치를 덧붙이는 노동은 방추의 가치를 만드는 노동이나 면화의 가치를 만드는 노동과 전적으로 같은 질의 노동, 즉 추상적 인간노동이다.

● 노동력은 자기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낳는다.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력의 가치와 같은 양의 가치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넘어서 더 많은 노동시간을 하는 데에서 생겨난다. 노동력의 가치와 그 노동력이 만들어내는 가치는 크기가 다른 것이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그것을 사용 사용가치로서 소비하면, 즉 노동을 하면 자기 자신의 가치보다도 큰 가치를 낳는 특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노동력이라는 상품 특유의 사용가치인 것이다.

● 자본가와 노동자 간에는 등가물의 교환이 이루어진다.
노동력의 판매자(노동자)는 다른 여느 상품의 판매자와 마찬가지로 대가를 받고서 사용가치를 사는 사람에게 넘겨준다. 그는 사용가치를 내놓지 않고서는 대가를 받아 쥘 수가 없다.

● 자본의 일반적 정식의 모순은 해결되어 있다.
상품의 생산과정은 한편으로는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과정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가치형성과정이다. 즉, 상품의 생산과정은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이다. 가치증식과정이란 어떤 한 점을 넘어서서 연장된 가치형성과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노동과정에서 노동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적 유용노동으로서 작용하므로 직물노동이라든가, 기계제작노동이라든가 하는 것과 같은 노동의 질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가치형성과정과 가치증식과정에서는 노동은 기계나 원료에 포함된 대상화된 과거의 노동이건 노동자들의 살아있는 노동이건 간에 추상적 인간노동으로서의 의이만을 갖기 때문에 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며 다만 양만이 문제가 된다.

● 노동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만큼만 계산에 들어간다.
사용가치의 생산에 소비된 노동시간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만큼만 계산에 넣어진다. ①노동자는 표준적인 여러 조건 아래서 일해야 한다. ② 노동력 그 자체도 표준적 성격의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노동력은 그것이 사용되는 부문에서 지배적으로 되어 있는 평균적인 숙련과 기능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되며 또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노동 강도를 가지고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③노동과정에서 원료와 노동수단이 낭비 되어서는 안 된다. 낭비된 원료와 노동수단의 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의 구성부분이 되지 못한다.

상품을 분석함에 있어 사용가치를 만드는 만큼의 노동자와 가치를 만드는 만큼의 노동 사이의 구별이 상품생산 과정의 두 측면, 즉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두 측면으로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 복잡노동의 경우도 사정은 동일하다.
노동력의 가치가 크면 그 노동력은 복잡한 고도의 노동을 하고 단위시간 안에 보다 큰 가치로 대상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복잡노동을 하는 보석세공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와 동일한 양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노동부분과 그가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노동부분은 질적으로 다른 노동이 아니다. 잉여가치는 역시 같은 노동과정의 시간적 연장에서만 생기는 것이다.

●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한 요인으로서의 노동과정의 특수성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한 요인으로서의 노동과정은 노동과정 일반의 성질 이외에 다음과 같은 특수성이 있다.①그것은 자본가가 소유하는 생산수단과 자본가가 사서 그 사용권을 벌써 자기 것으로 한 노동력 사이에 일어나는 한 과정이며 그 생산물은 자본가의 것이다. ②그 결과 자본가는 자기의 소유물인 생산수단과 노동의 사용에 관하여 엄격히 통제하고 감독한다.

아빠가 아빠다워야만 자식이 자식다운 법(1)[대안도덕교과서]-9

아빠가 아빠다워야만 자식이 자식다운 법(1)[대안도덕교과서]-9

 

 

오상현(숭실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공자님도 그냥 동네 할아버지일 뿐이다.

 

공자님도 그냥 동네 할아버지일 뿐이다.
무조건 어른 말씀이 옳다고?
평생 공부만 하라고?
제사 지내는 형식에 정답이 있다고?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게 나쁘다고?
이것 하나만 기억하고 살자.

공자님도 그냥 동네 할아버지일 뿐이다.

흔히들 세계 4대 성인으로 공자와 소크라테스, 그리고 예수와 마호메트를 꼽습니다. 이때 ‘성인’이란 평가는 모순투성이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인류의 역사 속에 큰 발자취를 남기신 분들에게 붙여진 일종의 별칭입니다. 그래서 어쩐지 같은 인간이지만 감히 흉내내기 어려운, 우리와는 결이 다른 분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얼마 전에 덕망도 있고 나이도 지긋하신 지도교수님의 특강을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율곡 이이를 기리는 학술단체가 마련한 강의였는데 저는 이 강의를 듣고 작지만 중요하고 흥미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율곡 이이나 퇴계 이황같은 분들을 성인이나 현자로 부르지 말자. 그냥 형이나 아저씨라고 부르자.” 강의 초반 힘주어 말씀하신 이 대목에서 실은 무척 놀랐습니다. ‘한평생 유가를 비롯한 동아시아 철학을 공부해오신 분께서 어떻게 저런 불경스러운 말씀을 하실까?’ 하고 말입니다. 게다가 그 자리는 청중의 대부분이 그 지역의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내 그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자신의 비관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엄청난 노력을 통해 성공을 이룬 사람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무엇인가 그들에겐 특별한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나요? 결국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이니까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도무지 따라잡기 어렵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나요? 그 강의의 핵심은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든 요인이 바로 우리가 그들에게 ‘성인’이나 ‘현자’와 같은 수식어를 붙이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실제 과학의 역사 속에서 2000년 전의 인류가 유전학적으로 혹은 지능이나 능력으로도 지금의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성인’이 살던 시절의 사람들과 별다른 능력의 차이가 없다는 것이지요.

공자와 그의 제자들 사이에 오고간 이야기들로 꾸며진 『논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읽다보면 공자는 우리가 우러르는 ‘성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좀 있습니다. 화도 내고 농담도 했습니다. 심지어 삐지기도 했으며 어떤 제자의 경우에는 뒷조사까지 했습니다. 자리를 떠난 제자의 흉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가르침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가 성인의 지위에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살았고 삶을 통해 배운 깨달음을 담담하게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도 여러분에게 제안을 하나 하렵니다. 공자를 그냥 동네 할아버지라고 부릅시다. 그도 결국 사람이었으니까요.
 

출처: womany.net

출처: womany.net


 
생애 처음으로 대한민국 땅을 밟은 외국인 여행객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숙소에 도착한 그는 짐을 풀자마자 근처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물론 처음 만나는 한국음식에 대한 소감을 담아낼 스마트폰도 챙겼습니다. 식사를 마친 그가 처음 맛을 본 한국음식에 대한 느낌을 SNS를 통해 친구들에게 소개를 한다고 상상해볼까요? 자, 만약 그가 김치찌개나 순두부를 먹었다면 아마도 “한국 음식은 매운 국물이 기본이야.”라고 올렸을 것입니다. 파전이나 빈대떡을 먹었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한국 음식은 기름지고 소박한 맛”이라고 했겠지요. 불고기를 먹었다면 이랬겠죠. “한국 음식은 단맛과 짠맛의 환상적인 조화”라고요.

우리가 흔히 쓰는 유가(儒家)라는 말에도 이런 함정이 있습니다. 공자 시대의 유가와 『삼국지』의 무대가 되는 위진시대의 유가와 ‘주희’라는 걸출한 인물에 의해 정리된 송나라 시대의 유가와 조선시대 양반들의 유가는 모두 ‘유가’라는 이름으로 묶이고 있지만 실제로는 서로 많이 다릅니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아주 나쁜 책입니다. 2500년이라는 시간 동안 뒤틀리고 변모되는 유가의 궤적에서 나쁜 점만 모아서 열거하고 이게 죄다 공자 탓이라고 하는 것이니까요. “몹시 억울하시겠다.” 동양철학을 공부하면서 아마도 공자가 이 시대에 다시 나타난다면 이런 생각을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억울함. 한 번 느끼게 되면 무지 분하고 답답해서 잠도 오지 않게 만드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온전히 동생이나 형이 저지른 잘못인데 내가 혼날 때, 짝이 말을 걸었는데 떠들었다고 혼날 때, 왼쪽 콧구멍을 후볐는데 오른쪽 콧구멍에서 코피가 터질 때. 뭐 그럴 때 있잖아요. 공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게 이 글의 목표입니다. 어깨가 무거워지네요. 오른쪽 콧구멍에서 코피가 터질 것만 같습니다.

 

무조건 어른 말씀이 옳다고?

 

유가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바로 ‘윗사람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바로 ‘충(忠)’이나 ‘효(孝)’와 같은 덕목입니다. 자식은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고, 학생은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무조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말입니다. 심지어 처음 만나는 사람일지라도 나보다 어른이면 무조건 먼저 인사를 하라고요. 또한 백성들은 임금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요. 오늘날로 말하면 국민들은 무조건 대통령의 명령을 따르라고요. 하지만 공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계강자가 공자 할아버지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만약에 나쁜 놈을 죽이고 착한 놈에게 잘해주면 어떨까요?” 할아버지가 답하시길, “선생님께서는 정치를 하시면서 왜 살인의 방법을 쓰려고 하십니까? 선생님께서 착하게 사신다면 백성들도 (자동으로) 착해집니다. 윗사람의 도덕은 바람이고 아랫사람의 도덕은 풀입니다. 풀 위로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그 바람결에 따라 눕게 됩니다.” 『논어』 「안연」

계강자는 공자가 살았던 당시 사회에 꽤 영향력이 있었던 권력층이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가를 물었던 대목입니다. 공자가 비유로 들었던 풀과 바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윗사람이 바람이고 아랫사람은 풀이라는 것이지요. 풀이 바람결에 따라 이리 누웠다가 저리 누웠다가 합니다. 윗사람이 올바르게 행동하면 아랫사람도 올바르게 행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말도 있잖아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 생각해보세요. 윗물이 더러운데 자꾸만 아랫물에게 깨끗해지라고 한다면 어처구니가 없겠지요. 이런 더러운 윗물에게 굳이 높은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사하러 갈 필요가 있을까요? 공자는 다른 곳에서 이런 말도 했습니다.

제나라 경공이 공자 할아버지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할아버지가 답하시길,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만 합니다.” 『논어』 「안연」

공자가 경공에게 말한 정치의 핵심은 임금이건 신하건 모두가 자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을 어려운 말로 바꾸면 ‘정명(正名)’이라고 합니다. 올바르다는 의미의 ‘정(正)’과 이름이나 지위를 의미하는 ‘명(名)’이 만나서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쉽게 말해서 각자가 그 지위(名)에 어울리도록 행동하는 것이 정치라는 말입니다. 임금은 임금답게 행동하고 신하는 신하답게 행동하며, 부모는 부모답게 행동하고 자식은 자식답게 행동하는 것이 바로 정명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공자는 왜 ‘임금’과 ‘아버지’를 앞에 두고 ‘신하’와 ‘자식’을 뒤에 두었을까요?

앞서 ‘윗사람’과 ‘아랫사람’을 ‘바람’과 ‘풀’에 비유했습니다. 임금과 아버지가 윗사람이니까 그들은 바람입니다. 신하와 자식은 ‘아랫사람’입니다. 그래서 풀입니다. 풀은 바람이 어떻게 부느냐에 따라 이리저리 흩날린다고 했습니다. 결국 윗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랫사람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 대목을 다시 해석하겠습니다. “임금이 임금다워야만 신하가 신하다울 수 있고, 아버지가 아버지다워야만 자식이 자식다울 수 있다”라고요. 단지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만의 문제만은 아닐 것입니다. 선배와 후배, 선생님과 학생, 형(언니)과 동생간의 문제도 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대통령이 장관의 잘못을 탓하는 장면을 떠올려봅시다. 공자의 생각에는 대통령이 대통령의 역할에 충실했다면 장관도 자기의 역할에 충실하여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입장이지요. 따져보면 문제를 일으킨 장관을 임명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대통령입니다. 자기가 임명한 사람의 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그런 사람인지 몰랐던 자신을 먼저 탓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너는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 그 모양이냐?”고 윽박지르는 부모가 있다고 해봅시다. 생물학적으로 그 자식이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은 바로 부모입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더러 누굴 닮아서 그러냐는 질문이라니, 유치하기 짝이 없습니다. 부모님들은 모릅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라고 종용하면서 급할 때는 무단횡단 정도는 괜찮다고 하는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얼마나 모순덩어리인지를.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어떤 교육학자가 그런 말을 했답니다. “내가 몸으로 너무 크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내 제자들은 내가 입으로 말하는 것을 듣지 못한다.” 입으로는 착하고 성실하게 살라고 가르치면서 수업 준비도 성의가 없고 시간만 때우려는 선생님이라면 정말 ‘노답’입니다. 답이 없다는 것이지요.

공자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증삼아!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은 하나로 꿰어 있단다.” (제자인) 증삼이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공자 할아버지가 (밖으로) 나가시자 다른 제자들이 (증삼에게) 캐물었다. “도대체 무슨 뜻이야?” 증삼이 답하길, “우리 선생님께서 삶을 살아가시는 방식은 오직 충서(忠恕)일 뿐입니다.” 『논어』 「리인」

‘충(忠)’과 ‘서(恕)’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유가에 대한 첫 번째 오해를 풀어줄 실마리가 여기에 있으니까요. 우리가 보통 충(忠)을 ‘충성’으로, 서(恕)를 ‘용서’라고 외우고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의미가 좀 다릅니다. 우선 두 글자 모두 마음을 의미하는 심(心)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두 마음가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지요.

충(忠)은 마음(心)과 가운데(中)가 만난 글자이기에 ‘마음 한가운데’를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 사랑에 빠졌다고 해봅시다. 온종일 다른 일을 하는데도 자꾸만 그 사람이 떠오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그 사람이, 버스를 타고 갈 때도 그 사람이 떠오릅니다. 내 마음 속 한가운데에 그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충(忠)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오직 그 일에 대한 생각이 내 마음 속을 가득 채웠을 때에 우리는 ‘충(忠)’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았는데 마음속에서는 아이유의 노래가 떠나지 않는다면 공부에 충(忠)하지 못하고 아이유에게 충(忠)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학자는 충(忠)을 ‘진정성’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렇다면 서(恕)는 어떨까요?

‘서(恕)’는 마음(心)과 같음(如)이 만난 글자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사람과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 ‘서(恕)’입니다. 흔히 용서라고 풀이하는 것은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사자성어를 떠올렸다면 당신은 완전 똑똑할뿐더러 지금 제 이야기에 충(忠)하고 있음을 의미하겠지요. 서(恕)에 대한 이야기는 마지막에 다시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공자는 왜 충서(忠)을 삶을 살아가는 방법으로 생각한 것일까요? 충(忠)은 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공부를 할 때, 여행을 갈 때, 심지어 똥을 쌀 때에도 나는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내 마음 한 가운데에 ‘공부’만을, 혹은 ‘여행’만을, 혹은 ‘똥’만을 떠올렸는지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성’이고 ‘성실함’이 곧 ‘충(忠)’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충(忠)을 충성으로 이해해야 할 때는 언제일까요? 그것은 바로 윗사람이 내게 하는 행동이나 말이 올바르고 적절하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윗사람이 아무렇게나 말하고 행동한다면 나도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바른 마음과 행동으로 어른의 역할을 잘 하시는 분께는 온 마음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혹시 주위의 철없는 어른들이 자기가 어른이니까 말 좀 들으라고 꾸중을 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글을 보여주세요.

동네 할아버지의 말씀을 정리해볼까요? 어른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따르라고 공자는 말하지 않습니다. 어른이 어른다운 말과 행동으로 나를 대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따를 수 있는 법입니다. 충(忠)도 역시 무조건 윗사람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을 가득 채운 진정성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가에 대한 첫 번째 오해가 풀렸다면 좋겠습니다.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1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1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저는 존재론의 차원에서 동일률을 뒷받침하는 기본 문장이 ‘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가 아니고 ‘없는 것이 없는 것이다.’라고 논증했지만, 이런 결론은 저를 조금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모든 학문적 인식은 있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에서 출발합니다.

학문 가운데 가장 엄밀한 학문이라는 수학을 예로 들어 봅시다. 수학에서 1이라는 숫자는 절대입니다. 우리는 1과 0, 이 둘만 가지고도 수학에서 연산을 할 수 있지만 1이 빠지면 수학 체계는 무너지고 맙니다. 어찌 수학뿐이겠습니까? 물리학도 마찬가지고 화학도, 생물학도, 그 밖의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리학은 가장 작은 하나로 여겨지는 미립자에서 가장 큰 하나로 여겨지는 물리적 우주까지를 대상으로 삼습니다. 화학은 가장 작은 하나로 여겨지는 원소에서 가장 큰 하나로 여겨지는 유기 화합물을 대상으로 삼고, 생물학은 가장 작은 하나로 여겨지는 단세포 생물 또는 단위세포에서 가장 큰 하나로 여겨지는 생명계 전체를 대상으로 삼고, 문학은 가장 작은 하나로 여겨지는 개별 작품에서 가장 큰 하나로 여겨지는 문학의 일반 이론까지 대상으로 삼고…… 이런 식이지요.

그런데 저마다 다른 이런 하나들의 존재론적 특성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늘 문제입니다. 자, 살펴봅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감각을 기준으로 삼을 때 ‘고유 명사의 세계’입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하나와 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세계에는 하나가 없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하나를 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수학에서 1을 기본 수로 정할 수 있는 것은 모든 1이 같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하나〔1〕도 서로 같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하나〔1〕를 기준으로 수학의 체계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감각과 연관된 세계에는 엄밀한 뜻에서 서로 같은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어느 하나도 기본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있는 것은 하나로 있고, 하나로 있는 것은 크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크기를 가진 것은 아무리 크기가 작더라도 늘 둘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어떤 것이 둘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겉으로는 하나로 보이지만 실상은 여럿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뜻하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하는 세계는 모두가 크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질세계에서 어떤 물질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치고 크기 없는 물질은 없습니다. 그러니 물질세계에 어떻게 하나가 있다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현상계에서는 공간의 기본 단위도, 시간의 기본 단위도 찾을 수 없다는 제논의 말은 백 번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상 세계에서 하나를 찾으려는 모든 노력은 헛수고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 가운데 가장 작은 하나를 찾으려는 물리학자의 노력, 화학 원소 가운데 가장 작은 하나를 찾으려는 화학자의 노력, 생명을 지닌 것 가운데 가장 작은 하나를 찾으려는 생물학자의 노력, 그 밖에 감각과 연관된 모든 학문 분야에서 가장 작은 단위를 찾으려는 모든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가장 크기가 작은 물질을 ‘티끌〔微塵〕’로 보았던 듯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 가운데 ‘티끌 하나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一微塵中含十方〕.’는 구절이 있습니다. 손톱만 한 크기의 운모에 책 몇백만 권 분량의 정보가 들어가는 기억 소자〔memory chip〕가 곧 상품으로 나올 것이라 하니, 그런 뜻으로 이 말씀을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 구절 속에 더 깊은 뜻이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안팎으로 무한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이 어느 하나도 홀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모든 방면으로 이어져 끝없이 소용돌이치며 출렁거리고 있는 모습이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제 마음의 눈앞에 홀연히 떠오르던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 안에 하나로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인데, 그러면 있는 것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로 있는 있는 것과 연관해서는 어디나 언제라는 말을 쓸 수 없습니다.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하나인 ‘있는 것’과 아예 없는 ‘없는 것’은 현상 세계에 없고, 따라서 현상 세계의 일부인 우리의 머릿속에도 없습니다. 제가 앞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린 그림에서 두 끝으로 나타나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어디까지나 설명을 쉽게 하려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고, 사실 이 양 극단, 모든 운동이 거기에 맞닿으면 그치게 되는 운동의 한계이자 모든 크기가 거기에 들어서면 없어지는 공간의 한계이기도 한 이 절대 지점에 연관해서 우리는 있다, 없다는 말도 쓸 수 없습니다. ‘입만 벙긋해도 틀린다〔開口則錯〕.’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하나인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것은 크기를 가진 여럿과 운동의 두 끝을 이루면서 시간과 공간의 규정을 받는 현상 세계를 초월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들과 연관해서 비유를 써서 하나〔一者〕, 또는 하나님〔有一神〕이라든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을 움직이는 것〔kinoun akineton〕이라든가, 큰 끝〔太極〕이라든가, 검고 또 검은 것〔玄之又玄〕이라든가, 검은 어둠〔黑暗〕이라든가, 끝도 없음〔無極〕이라든가 하는 여러 가지 말로 나타내려고 애쓰지만 그 둘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 의식 속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흔히 있는 것이라고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말하는 현상 세계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들이 어떤 자격을 가지고 있기에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스스럼없이 말할까요?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이라고요? 우리 귀에 들리기 때문이라고요? 우리가 만지고, 냄새 맡고, 혀로 맛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요?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모든 것, 시간의 규정을 받아 끊임없이 바뀌고, 공간의 규정을 받아 여럿으로, 이런저런 크기를 지닌 것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은 그 안에 있음과 없음의 두 상반된 측면을 함께 지닌 것이라고 앞에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상 세계는 한편으로 보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보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서 종잡을 수 없는 모순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현상 세계의 이런 특성은 우리의 감각 대상과 감각 기관 모두를 믿을 수 없는 증인으로 만듭니다. 고유 명사의 세계에서 도대체 우리가 무슨 법칙을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감각에 주어진 것을 기초 자료로 삼을 수밖에 없는 모든 일반화는 추상의 모든 단계에서 우리의 의식을 모순에 빠뜨립니다. 우리가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 세계만을 두고 말한다면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의 잣대’라고 한 프로타고라스의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각 기관 가운데 가장 발달했다는 시각을 기준으로 삼는다 치더라도 가까이 볼 때 다르고, 멀리 볼 때 다르고, 여기서 볼 때 다르고, 저기서 볼 때 다르고, 아침에 볼 때 다르고, 저녁에 볼 때 다르고, 어제 볼 때 다르고, 오늘 볼 때 다른데, 같은 것을 보더라도 어쩔 수 없이 나와는 다른 자리에서 볼 수밖에 없는 남들이 보는 것이 내가 보는 것과 다른 것은 너무나 뻔하지 않습니까? 누구의 눈을 더 믿음직하다고 하고, 누구의 눈을 덜 미덥다고 하겠습니까?

이렇게 모두가 저마다 다른 눈금이 새겨진 잣대를 가지고 무엇이 얼마나 큰지 잰다면, 그래서 저마다 다른 치수를 댄다면, 누구의 말이 옳고 누구의 말이 그른지, 누가 참말을 하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옳고 모두가 그르고, 모든 말이 참말이자 동시에 거짓말이 될 테니, 이런 세상에서는 저절로 말길이 끊길 것입니다. 의식이 모순에 빠지면 하는 말마다 횡설수설일 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날마다 하는 말 가운데 횡설수설 아닌 것이 몇 마디나 되겠습니까? 제가 여기서 이렇게 하는 말도 거의가 횡설수설이라고 보면 됩니다. 침묵이 금이라는 말이 달리 나왔겠습니까?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현상 세계에서 같은 것을 찾아 다른 것과 나눌 수 있는 길이 없겠느냐, 만일에 같은 것이 없다면 먼저 닮은 것, 비슷한 것부터 찾아볼 수 없겠느냐를 놓고 고민하던 플라톤이 결국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형상〔idea〕의 세계에서 현상 세계에 있는 모든 하나의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앞에서 저는 ‘ㄱ은 ㄴ과 다르다.’라는 일상 언어에는 ‘ㄱ에 있는 (어떤) 것이 ㄴ에는 없고, ㄱ에 없는 (어떤) 것이 ㄴ에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ㄱ에 없는 것이 ㄴ에 있는 것이고, ㄱ에 있는 것이 ㄴ에 없는 것이지요. 만일에 ‘ㄱ에 있는 것이 ㄴ에도 다 있고, ㄱ에 없는 것이 ㄴ에도 다 없다.’면 ㄱ과 ㄴ은 같은 것이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 수학에서 이야기하는 합동(合同)의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의 근거는 있는 것입니다. 같은 것의 근거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여럿의 근거는 없는 것이고 다른 것의 근거도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상계에 있는,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는 모든 것이 저마다 다 다른 고유 명사의 세계를 이루는 것은 그것들의 기본 특성이 모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에서는 참된 인식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파악하는 없는 것은 모순된 것이고, 모순된 것은 여럿과 크기와 바뀜이 있는 현상 세계의 반영물로서 우리의 의식을 모순에 빠뜨립니다.

“자,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한 하나로 있는 것은 우리의 사고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헤겔이 《논리학》에서 이야기한 그대로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상 세계에 있는 이것저것, 우리가 오관으로 파악하는 삼라만상을 미망의 세계로, 백일몽으로 돌려 버리지 않으려면, 이것들을 있는 것과 닮은 것, 있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규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보다시피 현상 세계에서는 하나를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는 여럿의 세계에서 독립해 있는 것, 어떤 다른 것과도 관계를 맺지 않는 것, 아예 없는 것으로 둘러싸인 것, 유식하게 말하자면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허무에 둘러싸여 절대 고립의 상태에 멈추어 있는 것인데, 현상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이어져 있고, 관계 맺음 속에서 저됨을 지니지 못하고 끊임없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기하학 도형인 삼각형을 보기로 들자면, 유클리드 평면 공간이라는 추상 공간에서 정의〔definition〕로 잡아 낸 삼각형은 ‘세 직선이 서로 만나서 이룬 안각의 합이 180도인 평면 도형’이다. 이 정의된 삼각형은 어떤 특정한 크기도 각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정의된 이 삼각형은 하나라는 점에서 삼각형 바로 그것과 맞닿아 있는데 하나로서 크기가 없는 삼각형 바로 그것은 크기가 없고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간과 공간의 규정을 받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있는 것 바로 그것과 같은 것, 있는 것 바로 그것에 맞닿아 있는 것이 된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로 있는 삼각형이나 원을 찾아 낼 수 있다면, 이것을 실마리로 삼아 현상 세계에 있는 이것저것 모두에 저마다 하나를 찾아 줄 수 있고, 이렇게 해서 삼각형 하나, 소나무 하나, 사람 하나, 좋은 것 하나들이 형상의 세계에 자리잡으면 이 하나를 바탕으로 현상 세계에서도 삼각형 하나, 소나무 하나와 같거나 비슷한 것, 좋은 것 하나와 닮거나 같은 것 따위를 찾아 낼 수 있다. 그러니까 저마다 고유 명사로 우리의 감각 대상이 되는 시간과 공간 속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 삼각형, 저 삼각형, 이 소나무, 저 소나무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형상의 세계에 하나로 있는 삼각형 바로 그것, 소나무 바로 그것과 같거나 닮았다는 뜻에서 삼각형, 소나무라는 일반 명사로 추상될 수 있고 이렇게 해서 최초의 하나가 나타나면 이 삼각형, 저 삼각형, 이 소나무, 저 소나무는 특정한 크기와 자리와 변화된 모습에 아랑곳없이 감각적인 특질을 벗어나 하나씩 헤아릴 수 있는 것, 곧 여럿 속의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 세계를 구제하려는 플라톤의 전략을 저 나름으로 엉성하게나마 재구성해 본 것입니다.

현상 세계를 구제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략은 스승인 플라톤의 전략과 조금 달랐지요.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하나로 있는 ‘있는 것’ 바로 그것이나 아예 없는 것이 현상 세계에 없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해서, 하나로 있으면서 바뀌지 않는 신(神)적인 것을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을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놓고, 아예 없는 것과 맞닿아 있어서 무엇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을 순수한 질료라고 부르자. 이 둘을 빼면 나머지는 모두 현상 세계의 식구들이다. 현상 세계의 식구들은 모두 있는 것과 없는 것, 하나와 여럿, 형상과 질료, 현실태와 가능태의 복합체다. 여기에서 있는 것, 하나, 형상, 현실태는 같은 울타리에서 사는 같은 식구고, 없는 것, 여럿, 질료, 가능태는 다른 울타리에서 사는 다른 식구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울타리에 사는 식구들이 저마다 짝을 지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한 몸, 하나와 여럿이 한 몸, 형상과 질료가 한 몸, 현실태와 가능태가 한 몸 되어 사는데 이 여러 한 몸들은 겉으로 보기에만 다르지, 본질에서는 같다. 다시 말해서 다른 여러 한 몸들은 ‘있는 것과 없는 것 한 몸’의 여러 현상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현상 세계에 몸담고 있는 온갖 것들은 있는 것이자 없는 것이요, 하나이자 여럿이요, 형상이자 질료요, 현실태이자 가능태인 것이다.

이 현상 세계를 보는 관점은 둘이다. 없는 것, 여럿, 질료, 가능태 쪽으로 시선을 집중하면 감각과 연관된 고유 명사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 하나, 형상, 현실태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이성과 연관된 일반 명사의 세계가 열린다. 이 일반 명사 세계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은 우리가 신(神)이라 불러 마땅한 있는 것 바로 그것의 다른 이름인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게 하는 것, 현상 세계를 벗어나 있으면서 현상 세계를 움직여 자기에게 향하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고유 명사의 세계에서 방황하지 말고, 일반 명사의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 현상 세계의 하나는 현상 세계에 있는 것이 보장하고, 현상 세계에 있는 것은 가장 큰 하나이면서 크기가 없는 현상 세계 밖의 하나이신 있는 것, 곧 신이 보장한다.”

말이 나온 김에 신플라톤주의자로 알려진 플로티노스의 현상 세계 구제 방법론을 한번 들어 보는 것도 해롭지 않은 일인 듯합니다.

“사람들은 우리 집 족보를 들출 때 플라톤이라는 할아버지만 자꾸 들먹이는데, 그건 우리 가문의 내력을 잘 모르는 탓입니다. 저희 고조부 파르메니데스 옹은 금실 좋은 고조모 제논이라는 분과 함께 아테네로 이민 온 이탈리아 마피아 출신입니다. 이분들이 소크라테스라는 박수 무당 증조부를 낳고, 소크라테스 옹이 저희 할아버지 플라톤을 낳으셨는데, 저희 할아버지의 꿈은 마피아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분의 꿈이 워낙 커서 우주 안에는 그 왕국을 세울 땅이 없었어요. 이분이 저희 부친 아리스토텔레스를 낳고, 아리스토텔레스 슬하에서 제가 태어났습니다.

저는 고조부 파르메니데스 옹으로부터 하나님〔一者〕이 있다는 것을 배웠고, 박수무당인 소크라테스 옹으로부터 이 거룩한 존재를 찾아가는 길을 배웠고, 할아버지인 플라톤 옹으로부터 이 하나님이 좋은 분이자 빈틈이 하나도 없는 꽉 찬 분으로서 이 세상 울타리 밖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 옹으로부터는 이분이 이 세상 울타리 밖에 계시지만 이 세상이 좋은 세상이 되도록 끊임없이 이 세상을 위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한 일은 이 여러 말씀들을 하나로 엮어서 하나님의 세계와 우리 현상 세계를 묶는 노끈을 만드는 작업이었다고 할까요. 파르메니데스 옹과 제논 마님께서는 늘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면서 없는 것을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셨는데, 자라면서 보니까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더라고요.

저는 세상에는 거짓말도 있고 속임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곰곰이 따져 보았지요.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아예 없다면 거짓말도 없을 것 아니냐, 없는 것이 있으니까,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 생겨난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까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을 생판 거짓말이라고 보기는 힘들지 않겠느냐, 없는 것이 있다는 거짓말보다 더 큰 거짓말은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일 텐데, 이 세상에는 없는 것도 있고, 있는 것도 없는 일이 비일비재하더라, 그렇다면 고조부모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했지요. 그 뒤로 증조부님과 조부님의 언행을 기록한 책들을 읽어 보니, 딱히 없는 것이 있다고 드러내 놓고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같은 것, 다른 것, 닮은 것, 안 닮은 것, 인 것, 아닌 것, 하는 것, 되는 것, 형상, 생성…… 뭐 이런 말이 자꾸 나와요. 가득 찬 것, 빠진 것 같은 말도 나오고요.

저는 파르메니데스 옹이, 있는 것은 하나이고, 빠진 데 없이 가득 차서 둥근 모습을 하고 있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이해할 수 있더라고요. 그런데 빠진 것〔steresis〕이라는 말이 무슨 뜻을 지닌 말인지는 도통 모르겠더라고요. 나중에 사람들이 일상용어에서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을 ‘없는 것이 있다.’는 말로 바꾸어 쓰는 버릇이 있다는 걸 상기해 내고, 아하, 그렇구나, 없는 것이 있구나, 그건 빠진 것이로구나, 가득 찬 물통에서 물을 조금씩 빼내면 물은 그만큼 빠져 나가서 물통은 조금씩 비게 되는구나 하는 데 생각이 미쳤지요. 그 뒤로 저는 있는 것만이 아니라 없는 것도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과학자가 없는 과학 윤리(2)[대안도덕교과서]-8

과학자가 없는 과학 윤리(2)[대안도덕교과서]-8

 

 

강경표(중앙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진짜 문제는 국가과학과 자본주의다!

 

만약 당신이 원자 폭탄을 만들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전시 상황에서 국가가 당신의 지식과 기술을 전쟁을 위해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면, 당신은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과학 윤리의 전형으로 대변되는 원자 폭탄 이야기는 사실 과학자 개인의 도덕 문제라기보다는 과학을 이용하는 국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도덕 교과서는 이러한 문제를 간과한 채 마치 과학자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원자폭탄이 만들어진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원자 폭탄을 개발하기로 결정한 데에는 과학자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었다. 몇몇 과학자들이 원자 폭탄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은 핵무기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물리학자들 중에는 아무런 죄책감 없이 핵무기 개발에 참여하고 즐겁게 임무를 수행한 학자가 있는가 하면, 초기부터 핵무기 개발이 인류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며 반대했던 학자들도 있었다. 심지어 별 생각 없이 참여하였다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된 이후의 결과를 보고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한 사람들도 있었다.

출처: www.dailymail.co.uk

출처: www.dailymail.co.uk

아인슈타인은 이론은 제공했지만 제작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동료 과학자들의 권유에 밀려 원자 폭탄 개발을 촉구하는 편지에 서명하였지만, 나중에는 후회하였다. 그 후로 아인슈타인은 죽기 바로 직전까지 적극적으로 평화활동을 펼쳤다.

(중학교 도덕2, 중앙교육진흥연구소 278쪽)

 

원자 폭탄 개발은 고도의 과학적 지식과 기술이 요구되는 과학입니다. 단순하게 과학자 몇명이 이론을 알고 있다고 해도 막대한 지원이 없이는 실행될 수 없는 과학입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당시 돈으로 20억 달러가 넘는 비용과 13만의 인력이 동원된 미국 정부가 주도한 과학 프로젝트입니다. 원자 폭탄 개발을 주도했던 오펜하이머(1904-1967) 박사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폭탄을 투여한 후 과학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고 이후 미국의 수소 폭탄 개발을 반대했습니다. 그러자 미국에너지국(AEC)위원장이었던 루이스 스트로슨은 오펜하이머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축출했으며, 미국은 제일 먼저 수소 폭탄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 국가가 주도하는 거대과학 프로젝트에서 과학자 개개인은 고용된 노동자에 불과합니다. 물론 과학의 내용이 전문적이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다고도 할 수 있지만, 원자 폭탄 개발과 같은 문제는 단순한 과학 윤리가 아닌 국가가 결정하는 정책 방향과 더욱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덕 교과서에는 이와 비슷한 또 다른 문제가 나옵니다. 이는 사실 시장자본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야기지만 도덕 교과서는 이를 과학자가 윤리적이지 못해서 발생한 사실로 그리고 있습니다.

 

아름 : 과학 기술은 어렵고 복잡해. 그냥 전문가들을 믿고 따르면 될 거야.

바름 : 그래도 될까? 과학자들의 말만 믿다 보면 큰일이 생길 수도 있어. ‘탈리도마이드 사건’이라고 못 들어보았어?

아름 : 그게 뭐야?

바름 : ‘탈리도마이드’는 임산부 입덧 방지용 약이야. 그런데 이 약의 안정성을 엉터리로 실험하고는 부작용이 없는 기적의 약으로 판매했어. 결국 그 약을 먹은 전 세계의 1만여 명의 임산부가 기형아를 출산하였어.

아름 : 정말 전문가의 말이라고 모두 믿고 맹신하면 안 되겠네.

(중학교 도덕2, 천재교육 317쪽)

 

탈리도마이드와 같은 약은 라세미 화합물입니다. 라세미화합물은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분자 화합물과는 구성이 다릅니다. 쉽게 얘기해서 라세미 화합물은 오른손과 왼손처럼 그 모양은 같으나 반대 방향을 하고 있는 거울 대칭의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방향의 화합물 중 한쪽은 약성을 갖고 다른 한쪽은 독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탈리도마이드입니다. 이 약은 1953년에 독일의 제약회사 그루넨탈에서 개발되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새로운 약을 개발하는 데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됩니다. 라세미 화합물은 분리를 통해 약성이 있는 부분만을 분리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분리 방법은 큰 비용이 듭니다. 사실 탈리도마이드 문제는 과학자가 위험 물질을 만들어 내거나, 위험을 속인 것이 아니라 라세미 화합물을 분리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과 관련한 문제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거대 자본이 없이 신약을 개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거기에 더해 자본가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입덧은 임신한 여성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증상이지 각한 질병이 아닙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습니다. 단순하게 증상을 완화시키는 약에 자본을 투입해서 정제를 한다는 것은 비용만 상승시키는 짓으로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자본의 투입은 누가 결정하는 것일까요? 과학자일까요? 그 회사의 최고 경영자일까요? 그러나 우리의 도덕 교과서에는 마치 탈리도마이드 문제가 과학자가 비윤리적이라서 발생한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탈리도마이드가 2006년 미국에서 악성암치료제로 허가를 받았고 암치료제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최근에는 이탈라아 알렉산드로 벤튜라 교수에 의하면 소아크론병에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번 판단해 볼까요? 탈리도마이드를 계속 사용해야 할까요? 아니면 폐기해야할까요? 희귀병치료제인 탈리도마이드의 가격은 얼마로 하는 것이 좋을까요? 바로 이것이 과학 윤리 뒤에 숨겨진 자본의 문제인 것입니다.

과학과 민주주의

 

도덕 교과서에는 “과학 기술의 목적은 자연 현상을 탐구하고 활용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는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행복하게 하는데 있다”(중학교 도덕2, 중앙교육진흥연구소 280쪽)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과학 기술의 중요성은 민주주의와 더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과학적 사실을 바로 아는 것이 도덕적?정치적 판단을 옳게 내리는 중요한 척도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자유롭게 정보와 자료를 사용하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과학은 우리가 사용하는 정보와 자료를 정확하고 엄밀하게 제공하는 학문입니다. 민주사회의 시민은 이러한 정보와 자료를 비교 분석하고, 대안을 찾을 수 있으며, 최선의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도덕 교과서에서 과학은 여전히 경제 개발과 풍요로운 삶을 제공하는 도구일 뿐이고 정치적?도덕적 주장을 하는 미사여구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생명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유전자 조작이나 배아 복제 등의 문제는 도덕적 사고가 필요한 부분으로 기술하고 있으면서도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과 2차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들을 간과하거나 과학이 주는 혜택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물체의 유용한 특성을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생명공학 기술은 해충에 강한 옥수수나 당도가 높은 토마토를 만들어 내고, 품질이 좋은 가축을 대량으로 생산하며, 의약품을 만드는데 이용되고 있다……10억분의 1미터 크기의 입자를 다루는 나노 기술 등 다양한 현대 과학 기술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 있다.(중학교 도덕2, 천재교육 304쪽)

 

유전자 변형 생물(GMO)에서 유전자 재작성 생물(GRO)까지 인간이 조작할 수 있는 생명공학 기술은 비단 우리에게 혜택만 있을까요? 그렇다면 사람들은 유전자 변형 식품을 왜 두려워할까요? 품질 좋은 가축을 생산한다는 목적 하에 행해지는 공장식 축산의 문제나 마블링이 많은 소고기를 생산하기 위해 억지로 사료를 먹이는 행위도 우리에게 혜택이 될까요? 미세먼지를 걱정하는 현대 사회에서 나노 기술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나노 공해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사실 도덕 교과서에서 이야기하는 과학 기술의 혜택은 경제적 측면에서의 기술일 뿐 과학이 전달해야 하는 사실 정보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과학 기술이 제공하는 정보를 피상적으로 혜택으로 묘사할 때 과학 정보는 왜곡이 일어나기 쉽고, 이 때문에 과학 전문가가 도덕 교과서를 만들 때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과학 정보의 왜곡은 국가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결정해야 하는 문제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경인운하와 4대강 사업처럼 생태계에 영향을 주는 사업에서 과학이 제공하는 정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결정에 의해 과학 정보는 무시되거나 왜곡되기 일쑤입니다. 천안함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중한 청년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은 철저하게 검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의혹이 남는 이유는 과학 정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민주주의를 고양시키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아주 단순한 예로 인터넷과 스마트 폰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도구들은 우리가 정보를 주고받는데 큰 역할을 수행하고 올바른 여론을 형성하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또한 과학 정보가 산출되기까지의 과정에 관심을 갖는다면 과학 정보가 얼마나 엄밀하고 공개적인 과정을 통해 생산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황우석의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이 거짓 정보는 결국 탄로나는 것이 현대 과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현대 과학 기술은 더 이상 전통 윤리의 통제를 일방적으로 받아야 하는 문화의 산물로 치부할 수는 없습니다. 과학적 사실과 성과물이 우리의 판단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해야 하며, 도덕?윤리적 판단도 과학적으로 생각해 봐야할 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과학을 도덕과 윤리에 활용할 수 있을까요? 이제 그 대답을 살펴볼 때입니다.

 

새로운 시민&과학 윤리를 향하여

우리는 과학이 매우 어렵고 복잡한 학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천재들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나 현대 과학은 어려운 수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며, 우리나라에서는 영어로 과학논문을 써야만 인정을 받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은 사실 우리와 그렇게 먼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온도계는 열역학 법칙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의 온돌 문화는 베르누이(1700-1782)가 누군지도 모르는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생각하고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현대 과학 기술을 표현하는 방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과학 전문가가 아닌 우리가 일상생활에서의 과학과 도덕을 생각할 때 중요한 점도 바로 이런 사례들입니다. 다시 말해 도덕과 마찬가지로 과학도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 교과서는 과학을 서양 근대 사회에서 갑자기 생겨난 문화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과학기술을 도덕이 통제해아만 하는 그 무엇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대 과학 기술의 위험성을 발생시키는 진짜 문제는 도외시하고 과학 윤리를 과학자 개개인이 지켜야 하는 문제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원래 도덕과 윤리 교과서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제시된 도덕을 맹목적으로 지키는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율성을 갖고 비판적?합리적 사고를 통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건전한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과학 윤리를 이야기할 때도 시민과 과학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학을 도덕적으로 바라볼 때의 기준은 그 과학이 시민을 위해 올바르게 복무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과학 기술도 시민에게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거나 특권화 된다면 우리는 그 과학을 반드시 경계해야만 합니다. 또한 과학을 규제하려는 도덕과 윤리가 담고 있는 내용이 현대 과학 기술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거나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할 때에는 현대 과학이 제공하는 사실과 정보를 바탕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 교과서가 과학 윤리라는 이름으로 담아야 할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도덕 교과서의 현실은 이와는 매우 다릅니다. 과학자가 지켜야할 윤리를 이야기하면서도 단 한 명의 과학자도 도덕 교과서를 만드는 데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윤리전문가들이 과학자들이 지켜야 할 윤리를 만들어준 것입니다. 내가 지켜야 할 도덕과 윤리가 내 의견과 상관없이 만들어지면 그 규칙을 따르고 싶을까요? 도덕을 연구하고 전문가가 되면, 현대의 복잡한 과학 기술과 관련한 문제도 정말 정확하게 분석하고 진단할 수 있을까요? 이 정도 이유라면 우리의 도덕 교과서에서 과학 윤리를 다시 써야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가까운 미래에 새로운 과학윤리가 담긴 교과서가 나오기를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