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회원들의 철학적 책읽기

태권V,2천년 역사의 한(漢)을 풀다[청춘의 서재]

『김태권의 한(漢)나라 이야기』(비아북)를 청년들에게 소개합니다.(편집자)/

?씬 레드라인? vs.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의 한 장면

1 vs. 100,000 즉 10만 대 1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숫자일까? 정확한 사실인지 아닌지 잘은 모르겠지만, 옛날 어느 선생님께 들었던 이야기다. 옛날 한국내전 즉 6.25 전쟁 때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 가운데 실제로 인명을 살상하거나 상해를 입힌 총탄의 숫자가 10만발 당 ‘하나’ 라고 한다. 처음엔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숫자였다. 아마 허공에 대고 기관총을 난사했을 때 지나가던 참새 한 마리가 적중하여 떨어질 확률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도대체 전쟁 중에 어떻게 사격을 하였기에 이런 숫자가 가능할까? 하지만 전쟁의 실상을 알고 난 지금 오히려 나는 이 숫자도 과장이 아닐까 싶다. 과연 누가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정확한 조준을 하고 사격을 할 수 있을까? 조금만 생각해도 뻔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인데, 왜 10만대 1이라는 숫자가 그렇게도 이해할 수 없는 비율의 숫자였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을 실감나게 보여준 영화가 있다. 바로 ?씬 레드라인?이란 영화다.

 

우리가 흔히 보는 ‘전쟁’이란, 빗발치는 포탄과 귓가를 스치듯이 지나가는 총탄에 굴하지 않고 용감하게 돌격하는 영웅들로 가득하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주인공들이 그렇다. 병사들은 먼지 속을 군화발로 누비며 용감하게 진격해 들어간다.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적진 속에 남겨진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해 병사들은 용감하게 돌진한다.

영화 [씬 레드라인](1999)의 한 장면

그런데 미국의 영화철학자라 불리는 테렌스 맬릭 감독의 ?씬 레드라인?의 병사들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일본군이 점령한 고지를 계속 탈환하라는 대령의 명령에 불복하는 대위, 게다가 지휘관의 돌격 명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사들은 엄폐물 뒤에 찰싹 누워서 고개조차 들지 않는다. 과연 어느 누가 감히 고개를 들고 죽음이 보이는 고지로 용감하게 진격해 나갈 수 있을까?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그렇게도 흔히 보았던 장면들이 실제로 얼마나 현실과 거리가 먼 것인가를 아는 것이 이렇게도 힘들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현실’이란 아직도 보여주어서는 안 되는 그 무엇이어서 그런 것일까? ‘현실’을 보기 위해 다시 영화를 보아야만 하는 우리들의 ‘감각’이란 것이 참으로 우습기만 하다. 그런데 이런 일은 전쟁 영화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공자님은 볼 일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나는 동양 고전, 그것도 2,000년이 넘는 아주 먼 옛날의 책을 읽으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읽는 책들은 대개가 다 고매하다. ?논어?도 그렇고, ?맹자?도 그렇고 하나같이 어쩌면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고상하게 행동하고 고상하게 말한다. 그래서 난 가끔 이런 상상을 하며 공자(孔子)나 맹자(孟子), 노자(老子)나 장자(莊子)를 속으로 조롱하곤 했다.

제후를 만나러 가서 연회 중에 화장실에 갔다가 휴지가 없어서 황당한 경우에 처한 공자, 기다랗게 늘어진 하이얀 수염이 국그릇에 빠져 꺼내어 말리느라 고생하는 노자. 이런 상상을 하다보면 결국 그들도 나와 같은 살과 뼈로 이루어진 사람이고, 우리가 늘 하는 고민을 똑같이 하며 살다간 사람이 아닐까 상상한다. 결혼한 후엔 소크라테스처럼 공자님도 부인에게 바가지 꽤나 긁히며 살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상상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이런 순진한 상상도 사실은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자 당시에는 우리가 흔히 먹는 품종을 개량한 쌀이 없었다. 게다가 당시의 ‘쌀’(米)이 오늘날의 기장에 속한다는 것을 알고나서는 ‘상상’을 위해서도 상당한 정도의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도대체 그네들은 뭘 입고, 뭘 먹고, 어떻게 살았을까?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님은 ‘볼 일’을 어떻게 해결하며 살았을까?

사실 알고 보면 우리가 고전이라 부르는 모든 것들이 다, 이런 자질구레한 것처럼 보이는 그네들의 현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공자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모른 채 ?논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까? 거꾸로 과거 선인(先人)들의 실제 삶의 모습을 이해할 때 ?논어?든, ?노자?든 더욱 살갑고 친근하게 이해되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날아라 태권 V?에서 ?한(漢)나라 이야기?까지

어릴 적부터 만화를 즐겨 읽어 온 내게 우스꽝스런 일이 있었다. 어느 때엔 오전에, 또 어느 때엔 저녁 무렵에, 또 어느 때엔 밤늦은 시각에, 그것도 어떤 때는 체육복 차림으로, 또 어떤 때는 양복 차림으로 만화방에 들어서는 내게 어느 날 만화방 주인 아주머니가 물었다. “도대체 뭐 하는 분이세요?” 순간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뭐 하는 사람 같아요? 저, 대학에서 강의합니다!”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비아북

고교 시절에는 만화방에서 생물선생님과 만난 적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 모른 척하며 페이지를 넘기는 일에 몰두했다. 이현세와 황미나는 가장 즐겨보던 만화가였다. 그렇게 만화는 살아가는 재미였고, 일상이었다. 만화를 좋아하게 된 건 어릴 적에 본 최초의 한국애니메이션 영화 ?날아라 태권 V?를 본 이후였다. 난 아직도 가끔씩 ?전자인간 337?의 삽입곡 “아람의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그러던 차에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만화를 다시 새롭게 보게 만들었다. ?조선왕조실록?은 단순한 만화가 아니라 우리의 삶의 과거를 새롭게 들여다보게 만드는 하나의 창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옛날 중국의 삶의 모습, 2천 년 전의 모습도 이렇게 눈으로 볼 수는 없을까? 대만 출신의 만화가 채지충의 만화는 왠지 억지로 꾸민 듯한 외모 때문에 상당한 이질감을 느꼈다. 비록 수준 있는 작품들이었지만 내게는 2% 부족한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김태권의 ?한(漢)나라 이야기?를 펴든 순간 그간의 기다림은 단순에 풀리고 말았다. 책을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 책을 읽는 내내 눈과 손과 입술이 함께 움직였다. 넘기는 페이지마다 어느 그림 하나, 어느 대사 하나도 놓칠 수 없는 흥분과 쾌감을 주었다. 처음엔 감탄으로 읽다가 나중엔 화가 나기까지 했다. 한 젊은 만화가의 손끝에서 ‘살아 움직이는 한(漢) 나라의 역사’가 되살아나는 것을 보며, 부러움과 질투가 났기 때문이다.

김태권, 2천 년 ‘한’(漢)의 역사를 풀다

?한나라 이야기?는 기원전 238년 진시황(秦始皇)이 스무 살이 되던 해로부터 시작한다. 고대 중국의 역사서 ?사기(史記)?와 ?한서(漢書)?는 물론 제자백가(諸子百家)와 현대 역사학의 성과까지 동원하면서 김태권은 ‘권력 앞에서 개인의 고독’이라는 주제를 추적해 간다. ?진시황과 이사?를 다룬 1권에서부터 ?항우와 유방?을 다룬 2권, 그리고 ?조조와 유비?(10권)까지 다룰 예정이라 한다.

그런데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의 매력은 이런 역사를 재미있는 만화로 소개한 데에 있지 않다. “독자 여러분은 한니발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만일 영화나 그림에서 튜더 시대의 판금 갑옷을 입은 한니발이 포병부대를 지휘한다면, 여러분은 짜증을 낼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 때의 복장을 한 항우나 유방을 보아도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전국시대 말의 유물을 토대로 복식을 고증하면, 그게 더 낯설어 보일 것이다.” 고 하며 그 낯설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태권은 진시황을 비롯하여 이사, 한비자, 항우, 유방 등등 출연하는 모든 인물들의 복식과 장식, 전쟁의 상황 묘사나 무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비아북

기 등 우리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을 한 나라 때의 화상석에서부터 후대의 자료까지 최대한 실증과 고증된 자료를 통해 현실감있게 보여준다. 단지 보여주는 것뿐만이 아니다. 각종 역사서와 역사 연구서를 통해 중요한 사건, 대화의 의미와 해석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이렇게 볼 때 ?한나라 이야기?는 재미로 보는 만화를 넘어서 새로운 ‘사기’, 새로운 ‘한서’, 더 나아가 새로운 ‘삼국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만화라는 장르는 이제 어린이들이나 보는 장남감이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같이 애니메이션 영화를 통해 새로운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예술인이 있는 것처럼, 김태권은 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고대의 역사, 살과 피로 이루어져 부대끼고 싸우며 우정을 나누던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도 건조한 문자로 이루어진 역사가 아니라, 살아 숨쉬듯이 꿈틀거리는 형상들을 통해서.

?제자백가?와 갖가지 중국 고전을 만화화한 채지충의 고전만화가 있듯이, 우리에게는 조선의 역사를 비주얼로 창조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제 일본인이면서 로마를 노래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있듯이, 한국인이지만 ?사기?, ?한서?, ?삼국지?의 세계를 새롭게 역사화하는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를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재미는 기본이다. 아마도 소장하여 물려줄 만한 책은 이런 것이 아닐까? 특히 학업에 지친 젊은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김시천(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