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원래 그런거야” [내가 읽는 『자본론』]
“인간이 원래 그런거야”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얼마 전 아주 어린 시절에 함께 어울려 다니던 동네 형을 만났다. 마지막 만남이 수년 전이었기에 서로 너무나도 반가웠다. 근황을 묻고 예상치 못했던 서로의 변화에 새삼스레 놀라기도 했다. 함께했던 시절은 이미 아득한 옛날이고, 우리 모두 달라져 있었다. 그러던 중 그 형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꺼냈다. 본인의 역경을 한참 설명하더니 “내가 살아보니 인간이란 게 다 그렇더라… 사람이 원래 그런 거야..”라며, 흔한 꼰대식 조언을 무심하게 던졌다. 그 순간 문득 든 엉뚱한(?) 생각,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라고?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신의 삶을 모두 바쳐 탐구해도 규명해내지 못했던 (인간에의) 정의를 저렇게 쉽게 해도 되는 건가?” 그래도 꼴에 철학을 전공한다고, 내 머릿속엔 나름의 철학적 의문이 샘솟은 것이다. 스스로도 우스웠는지 순간 헛웃음이 터졌다. 왜 웃느냐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짓는 형의 얼굴 너머로 더욱 커다래진 의문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어떤 존재인 것일까? 도대체 무엇으로 정의할 수 있을까?”
생각지 못한 계기로 시작된 철학적 의문은 이후 수일간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름의 답을 찾고자 여러 철학책을 뒤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던 명쾌한 대답은 찾기 어려웠다. 서양철학은 대부분 ‘신’에 대한 담론을 중심으로 인간을 수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었으며, 동양철학은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기보다는 인간이 ‘어떻게’ 행위를 해야 하는지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자유의지’에 관한 철학적 사조나 ‘실존주의 철학’ 등에서 인간 본성에 관한 나름의 설명을 듣는가 싶기도 했지만, 이 역시도 내 궁금증을 명쾌히 해소해주지는 못했다.
이들은 모종의 인간적 특성에 집중하는 문학적 사조의 느낌이 강했으며, ‘실존성’이나 ‘자유의지’ 같은 인간의 추상적 특성을 무조건적으로 전제한 논의였기 때문이다. 또 그렇기에 구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명료한 존재론적 해석 방식을 제시하는 이론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근래 『자본』1에 관해 꾸준히 탐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테두리 밖에서 답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결국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마르크스의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에 관한 자료들을 뒤적였다. 『경제학 철학 수고』의 내용적 얼개까지 확인하자, 비로소 머릿속에 분별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인간뿐만 아니라 어떤 존재의 본질을 특정 짓는 것은 철학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사고방식인 것이 맞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내 궁금증 역시 절대적/고정적 실체를 요구하는 본질주의적 발상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유에 있어서는 매우 신중해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사유는 이러한 조심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고정적 실체를 제시하기보다는 인간의 본질적 특질을 토대로 인간 본성의 방향성만을 시사하고 있었다. ‘유(類)적 존재’ 그리고 ‘노동’이라는 두 키워드는 기존 철학 사조들의 인간관과 마르크스주의적 인간관이 질적으로 상이함을 암시했다. 마르크스 철학은 이러한 개념들로 인간의 존재론적 함의를 분명히 한 후 휴머니즘적 차원에서 인간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더불어 인간을 수동적 존재나 조건적/의존적 존재로 해명하지도 않았다. 넓게 보았을 때, 마르크스의 인간관은 본인이 근 몇 년간 꾸준히 탐닉해온 『자본』의 사상적 밑바탕을 형성하고 있기도 했으며, 마르크스주의 전반의 배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렇다면 ‘유(類)적 존재’란 대체 무엇인가? ‘노동’은 인간의 본성과 어떠한 관련성을 지니는 것인가?
반가운 만남 속 우연한 계기로 머릿속에 스며든 의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문득 찾아온 인간 존재에 관한 철학적 의문은, 본인을 휘감아 흔들었다. 나는 본질주의적 사고의 오류를 경계해가며 해답에 관한 힌트를 찾아 나갔다. 기존의 관심을 계기로 다시 들여다본 마르크스주의적 사유와 그 속에 묘사되어있는 인간의 모습은 내 의문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경제학, 사회학, 또는 혁명적 정치학으로만 서술되는 마르크스주의의 기저에 있던 인간 마르크스의 휴머니즘 철학은 그 어떤 이론보다도 설득력 있는 체계적 논의를 통해 인간 존재를 해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유(類)적 존재(Gattungswesen)’라는 개념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설명을 담은 비교적 직접적인 개념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한자 ‘類’는 ‘무리 지음’이라는 의미로 새길 수 있어서 그 숨은 의미를 어렴풋이 암시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무신론적 유물론자이자 헤겔 좌파였던 독일의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영향으로 그가 먼저 사용했던 ‘유(類)적 존재’ 개념을 도입했다. ‘유(類)적 존재’라는 철학적 개념은 마르크스 철학이 기존의 절대주의적 관념론의 인간관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앞서 언급했듯, 인간 존재의 실체적 본질을 고정적인 것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기존의 철학들을 비판하는 개념인 셈이다.
마르크스는 기존의 철학에서 인간을 ‘종(種)’으로 설명하는 경향성을 비판한다. 다윈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기존의 학문적 조류는, 인간의 종(種)적 본질을 찾아 모든 개별 인간에게 하향식으로 이를 적용하고자 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관념론적 고전 철학의 흐름이 그릇된 인간관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인간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앙상블:ensemble2)’로서 존재함을 주장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는 개개인의 인간이 그들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적 맥락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고정불변한 형태의 어떤 종(種)적 본질만으로 형성되는 수동적 존재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예컨대, 내가 어릴 적 동네 형을 오랜만에 만나 별다른 종(種)적 목적성 없이도 마주 앉아 웃고 떠들 수 있던 것은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사회적 맥락 위의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적 사유에 따르면 인간은 동물적, 생물학적 속성에 종속되지 않으며, 능동적, 의식적 존재인 셈인데, 이는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도 증명된다. 우리 주위의 개인적 인간들이 동물적, 종(種)적 본성으로만 이뤄져 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담당 교수님, 우리 엄마, 내가 아끼는 친구들을 비롯해 내 주위의 모든 이들은 종(種)적 본질보다는 사회적 관계와 맥락의 총체로서 오늘 이 순간에도 내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논의를 출발시킨 동네 형과 나 역시도 서로에게 사회적 맥락을 제공하며 서로의 존재를 채워주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유(類)적 존재’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능동성과 사회성을 실천적 관점에서 설명했다. 인간은 종(種)적 본성에만 지배받는 동물들과는 달리, 유(類)적 성격과 종(種)적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의식적 사회 활동과 능동적 행위를 실천해낼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방향성이 나에게는 일종의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신 존재나 도덕 등 조건적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고도 인간의 참된 가치와 의미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명하는 마르크스의 인간관이 굉장히 설득력 있게 들렸으며, 매력적인 이론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한편, 포이어바흐에 의해 유(類)적 존재의 개념을 이어받은 마르크스는, 오히려 포이어바흐를 비판하기도 했다. 포이어바흐가 설명하는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고정적인 대상으로서 묘사될 뿐, 실천적 주체로서 설명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마르크스의 비판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마르크스가 인간의 실천성과 능동성에 특히 더욱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마르크스는 인간의 보편적인 종(種)적 특성을 고정적/실체적인 무언가로 상정하지 않고, 유(類)적 성격이라는 특질로써 해명하고 있다. 인간의 유(類)적 성격은 인간이 동물과 달리 능동적으로 행위하고 계획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다른 한편에서 그는, 인간의 본질이 불변하는 실체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인간 종(種)의 유(類)적 성격에 의거한 사회적 맥락의 총합으로 구성됨을 시사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인간의 본성적인 사회성과 능동성을 설명할 수 있게 하는 배경이 된다.
이처럼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마르크스주의적 사상 전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시에, 많은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유(類)적 존재 개념 속 의미의 맥락이 모호하기 때문에 후대에 숱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를테면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을 고정적 실체로 설명하는 것을 비판했지만 일각에서는 마르크스가 인간에게 유(類)적 성격을 부여한 것 자체가 인간의 고정적/실체적인 종(種)적 본질을 규정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할 수도 있었다. 더불어, 구조주의적 시각에서는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달리 해석하기도 했으며, 훗날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 사이에서도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어찌 되었든 본인은 ‘유(類)적 존재’의 개념이 마르크스주의적 사유의 전반에서 매우 핵심적 역할을 도맡고 있음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유(類)적 존재의 개념은 마르크스 자본주의 비판의 단초로서 그의 사유 배후에 숨어있었다. 그리고 이 유(類)적 존재의 개념과 마르크스적 정치경제학 비판의 연결고리는 다름 아닌 ‘노동’이었다. ‘노동’은 마르크스 인간관의 이해를 돕는 두 번째 키워드이자, 마르크스-경제학의 핵심인 정치경제학 비판서 『자본』 속 궁극적 문제의식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다. 우선 마르크스는 유(類)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그 의미를) 확장하여 설명했다. 인간의 본성적 행위로서 ‘노동’을 제시하며, 자신의 사유 방식을 보다 구체화한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처음 접하는 입장이라면 의문이 들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버텨내는 노동 행위가 어떻게 인간의 본질적 특성으로서의 행위가 된다는 것인지 의아할 테다. 앞서 마르크스는 직접적인 신체의 욕구와 본능적 생산 활동에 지배받는 동물과 인간, 또는 동물적 존재와 인간을 명백히 구분했다. 인간은 동물처럼 단순하게 살아가지 않는다. 자기 삶에서 자연 전체의 다양한 사물과 관계한다는 면에서 ‘보편성’을 지닌다. 한 인간의 삶과 행위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동물적 행위와는 다르다. 그래서 인간은 오히려 자유롭다. 또 인간의 의식과 의지의 형성에 관계한다. 이때 인간이 행하는 의식적/의지적 노동의 행위는 오로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유(類)적’ 성격의 행위일 테다. 즉,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자연의 만물에 ‘창조적 노동’을 행함으로써 ‘유(類)적’ 본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본 것이다. 더불어, 인간은 자연적 존재인 동시에 (그들 자신이 일부를 이루는) 자연을 확장하여 창조하거나 구체화하는 창의적 존재로 설명된다. 인간은 창조적 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대상화시키며 또 이 같은 대상화가 이루어진 세계에서 스스로를 실현하며 자신의 모습을 직관한다. 마르크스는 사회 속에서 의식적이고 창의적이며, 자유로운 노동 활동을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적 특질이라 보았다.
따라서 노동 행위는 단순히 생계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라, 본디 인간의 ‘유(類)적’ 성격을 실현해내고 확인하는 즐겁고 자발적인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론 마르크스주의적 ‘노동’의 개념을 처음 접하고서 그의 사상 자체가 굉장한 휴머니즘적 경향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노동’과는 거리가 있는 마르크스의 ‘노동’론은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의식이 어떤 지점을 가리키고 있는지 암시한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행해지는 인간 특질로서의 ‘노동’에 대한 억압과 착취 및 강압은 ‘노동 소외’3로 이어진다. 여기서 ‘소외’란 어떤 대상이나 개념이 본질로부터 멀어짐을 의미하는데, 마르크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인간의 본성적 특질로서의 ‘노동’이 점점 그 본질에서 멀어졌음을 제시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노동 행위’는 창조적으로 인간의 유(類)적 본성 혹은 의식적 자아를 실현해나가는 과정으로 보기 어렵다. 그저 밥 빌어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행하는 수동적, 강압적, 비자발적 과정이 오늘날의 ‘노동’이다. 아끼던 형님을 몇 년 만에야 다시 볼 수 있었던 것도, 강압적 노동의 사회적 압박이 (예를 들면 취업 혹은 취업을 위한 대입 등) 나와 그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취직 문제로 수년간 고통 받았다던 형님의 씁쓸한 회상처럼, 우리는 생계를 위한 노동에의 압박에 시달리며, 사회의 부속품으로 전락했고, 이제 어디에서도 ‘인간 노동’의 본질적 가치를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현대의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우리가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서술을 마주하며 느낀 의문스러움은 ‘인간 노동’이 소외되어왔음에 기인했다는 사실을 명확히 포착할 수 있겠다.
본래의 논의와는 약간 거리가 있는 내용이지만 조금 더 덧붙여보겠다. 앞선 논의에서 좀 더 나아가, 마르크스는 자신의 경제학적 논의 역시도 인간의 ‘노동’을 중심으로 전개해왔다. 인간의 본성이자 유(類)적 특질을 드러내는 ‘노동’은 경제적인 측면에선 ‘가치’를 창출해내게 되는데, 자본주의적 생산 구조는 이 ‘가치’(인간 노동)를 착취함으로써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본』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경제학적 논의에서, 줄곧 ‘인간 노동’의 개념을 등장시킨다.
애초에 경제적 가치의 근원이 ‘인간 노동 일반’에 있음을 전제하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기존의 경제학적 상식이나 효용가치설의 기본적 구조와는 완전히 상이한 파격적 학설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적 구조에서 ‘인간 노동’이 어떻게 기능하고 어떤 방식으로 가치의 착취에 놓이게 되는지를 구체화하고자 했다. 상품으로서 거래되는 ‘인간 노동’에 대한 그들의 분석은,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인간 본성으로서의 ‘노동’을 어떻게 망가뜨리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이기도 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근본적으로 ‘노동’을 중심에 두고 ‘노동가치설’을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인간애(愛)와 휴머니즘적 양상을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사실 유(類)적 존재의 개념이나 인간 본질에 관한 논의는 마르크스&엥겔스 철학의 초기 저작에서 주로 등장했으며, (위와 같은 경제학적 논의가 주를 이루게 되는) 후기로 갈수록 이는 사라지게 된다. 짙은 휴머니즘적 경향을 보였던 초기 마르크스의 철학은 후기로 발전해가며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적 유물론이나 추상적인 헤겔식 독일관념론에서 벗어나 보다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이론으로의 변모를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인간 본성에 관한 앞선 논의의 견해들을 포기하거나 변경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본인은, 그들이 (후기에도) 여전히 ‘유(類)적’ 존재로서 노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인류의 본성적 경향성으로 판단했다고 생각한다. 이는 후기 마르크스주의의 시발점 격이었던 『독일 이데올로기』4의 면면에서 때때로 드러난다고 한다. 헤겔의 역사철학5의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는 전, 후기 저서를 막론하여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고정적 실체가 아닌 역사적, 사회적 맥락과 활동성 및 실천으로 설명하고자 했다. 그 밑바탕에서 ‘유(類)적’ 존재의 개념과 ‘인간 노동’에의 논의가 핵심적 토대를 이뤄왔음은 물론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은 마르크스에 의해 다시금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를 수 있겠다. 앞서 언급했듯, 포이어바흐는 인간을 존재론적 측면에서만 유(類)적 대상으로 파악했을 뿐, 실천적 행동의 맥락에서 인간을 유(類)적 (감성적) 활동의 주체로 파악하지 못했다. 마르크스는 이 지점을 비판하며 인간의 ‘유(類)적’ 혹은 ‘감성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강조한 것이다. 더욱이 포이어바흐는 ‘유(類)적’ 존재 개념을 다수의 개별자를 단순히 결합시키는 내적인 보편성/통일성으로 파악했다. 즉 사회적 총체로서 인간의 본성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사회적 맥락 속 계급 관계 등을 파악하지 못한 셈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가 관념론의 흔적을 완전하게 벗어버리지 못한 채, 인간의 본성을 실체적, 대상적인 것으로 묘사했던 점을 비판하고자 했던 것 같다. 또한, 그는 포이어바흐가 실천적 활동으로서의 ‘노동’의 의미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인간의 ‘유(類)적’ 본성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였음을 비판하며, 사회 속의 인간적 계급 구조 형성의 필연성 등을 강조하고자 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마르크스가 생각한 ‘인간’의 본질이란 ‘유(類)적’ 성격과 ‘노동’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절대로 고정된 실체로서 형이상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를 토대로 형성되는 인간의 ‘유(類)적’ 성격과 실천적 형태의 동적 인간 행위인 ‘노동’은 마르크스가 생각한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 종류의 것인지를 명료화한다. 능동성과 창조성을 중요한 본래적 특질로 지닌 인간은, 사회성을 토대로 그 본성을 형성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인간관에 흡족함을 느낀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는 절대자나 관념적 가치(이를테면 ‘자유의지’, ‘실존성’)에 의존한 형이상학적 인간관과는 결이 다른 이론적 견해를 보였으며,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희망적인 인간적 관점에서 자신만의 인간관을 정립했기에 그렇다.
또한, 나는 그가 인간의 사회적 특성에 대해서도 탁월한 분석을 내놓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하여 이미 우리는 너무나 좋은 실례를 알고 있다. 서두에 이야기했듯, 매우 반가운 만남이었음에도 동네 형님과 나는 무척 많이 달라져 있었고, 이는 우리가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회적 맥락 위에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본질이 실체로서 고정되어있었다면, 형과 나는 예전처럼 본성적으로 통해야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인간의 본질이 사회적 관계와 맥락에 따라 구성됨을 설명했고 나는 내 생활세계에서 사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인간의 본질로서 어떠한 실체도 고정화하지 않았던 마르크스는, 인간의 능동성과 사회성을 강조한 휴머니스트였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인간이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존재지만, 동시에 그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역동적(능동적) 주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갈망하던 종류의 인간관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사유 속에 있었던 것 같다. 사견이지만, 인간의 본질은 아마 그러한 종류의 것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사람을 여기까지 이끌 수 있음에 글을 쓰는 와중에도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었던 인간에 대한 질문과 철학적 탐색은 오늘날에도 어리고 미숙한 예비 철학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인간 존재 자체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서 다양한 철학적 서적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나의 철학적 사유의 깊이가 확장될 수 있었음은 물론이요, 근래에 공부 중인 『자본』의 저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어떠한 생각(인간관)을 바탕으로 이 책을 집필했는지 가늠할 기회를 얻어 개인적으로 무척이나 기뻤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유는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 여기, 내게도 상당히 설득력 있고 흥미로운 인간관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수많은 철학자들과 마르크스&엥겔스, 그리고 필자 본인이 인간 본성에 대해 추측하는 바가 정확한 사실인지, 어느 것이 맞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계속해서 성찰하며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굉장한 의미가 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알며,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외부의 객체적 존재들을 명확히 인식하겠는가.
비록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이 의문만 연속되었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너무나도 흥미롭고 가치 있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논의를 이쯤에서 줄여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내 주위 나와 관계하는 많은 사람들 역시 나처럼 각자 스스로의 견해를 갖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한 번쯤은 우리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자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인간은 원래 그런 것일까?”
마르크스&엥겔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고전서↩
여기서 ‘앙상블:ensemble’은 불어인데, 독일인 마르크스가 흔한 독어 표현 대신 불어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은 매우 인상적이다. 아마 마르크스가 ‘하나’로서의 합일과 전체성을 추구하는 독일(독어)의 신비주의적 흐름의 뉘앙스에서 벗어나, 전체 속에 다양성과 개체성이 조화를 이룸을 표현하고자 했기에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 소외’ 혹은 ‘인간 소외’ 현상의 양태를 네 가지로 구분한다. 1.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 2. 생산과정으로부터의 소외 / 3. 동료 인간으로부터의 소외 / 4. 유(類)적 인간 본성으로부터의 소외. 즉 자본주의 사회는 인간 노동이 지니는 본래의 의미를 훼손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노동하는 인간은 생산물의 지배권, 노동 과정의 통제권, 동료 인간과의 본성적 화합의 가능성을 빼앗기고 나아가 유(類)적 인간의 본성 자체도 소외당하고 있는 셈이다.↩
『독일 이데올로기』를 기점으로 초기 마르크스주의와 후기 마르크스주의를 구분한다고 한다.↩
헤겔 철학은 기존의 사유 방식과는 달리 절대자 혹은 신을 역사 속에서 발전, 변화하는 주체적 존재로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