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없는(?) 행길이의 이야기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 [1] [내게는 이름이 없다]

하버마스, 세상은 더 나아져야 한다(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한길석(한철연 회원)

 

[소개글]

하버마스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복잡하기 그지 없는 그의 사상이 무엇을 의도했고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되도록 간명하게 알고 싶어 한다. 여러 개론서들은 독자들의 이런 욕구를 충족하고자 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되지는 못했다. 2024년 출판된 이 인터뷰집은 하버마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독자들의 이러한 불만족을 해소해 준다. 오랫동안 하버마스를 연구했으며, 그의 학문적 전기를 깊이있게 서술했던 질문자들의 역량 덕분이기도 하다.

이 인터뷰는 하버마스의 어릴적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그의 학문적 여정을 차근차근 다루고 있다. 인터뷰를 따라가다보면 하버마스와 스승 세대, 동료들 그리고 제자 세대에게서 받은 여러 영향들이 정치적 현실을 배경으로 어떻게 작용하였는지 이해하게 된다. 독자들은 이런 영향들이 하버마스의 사유에 있어서 어떤 동기를 부여했으며, 발전 방향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그리고 하버마스가 이런 영향을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하면서 수용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 인터뷰는 학문적 생애를 단순히 회고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2019년 두 권으로 출판된 대작 『또 다른 철학사』를 통해 구현된 ‘탈형이상학적 사유의 계보학’이 어떤 과정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었으며 관철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독자는 하버마스 취하고 있는 탈형이상학적 사유가 무엇이고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그의 철학이 현실 사회의 모순과 비판적으로 대결하면서 형성된 지적 정치 투쟁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종종 내비치는 소소한 개인사와 사적 인연들에 관련된 에피소드는 딱딱하고 진지하기만 한 이 이론가가 살아있는 인간의 몸을 지닌 존재라는 점을 느끼게 하면서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번역은 AI의 도움을 받아 수정했다. 저본은 Habermas, Jürgen. 2024. Es musste etwas besser werden … : Gespräche mit Stefan Müller-Doohm und Roman Yos. Stefan Müller-Doohm, Roman Yos, Frankfurt am Main: Suhrkamp.


[1]

 

1. 학문적 생애의 시작 – ① –

 

□ 하버마스 선생님, 예전에 “살면서 자기의 근본적인 의도를 쏟아부을 수 있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의 ‘근본 의도’는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이론 발전과 직업 경로에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쳤습니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949년 괴팅겐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 1949년 제 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을 역사적으로 급격한 어떤 단절을 경험한 세대로 회고해 볼 수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할 무렵, 우리는 4년 동안 나치 지배가 남긴 심연을 시간을 갖고 되새기며, 그 시절 우리가 살아갔던 ‘정상적’ 일상의 이면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었는지를 성찰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윗세대보다 우리에게 더 쉬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젊었기 때문에, 우리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상적 일상 속에 숨어 있던 심연의 깊이를 민감하게 너끈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저지른 짓이나 방조(放棄)한 일에 대해 책임져야만 할 기억이 없었기에, 그런 통찰을 중지하게 할 만한 ‘죄책감’에 얽매이지 않았습니다. 헬무트 콜이 말했던 ‘늦게 태어난 것의 은혜’라는 표현은 이 점을 정확히 짚었습니다. 우리보다 조금이라도 나이 많은 이들은 우리 세대와 전혀 다른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이 점에서 저는,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역사학자 논쟁(Historikerstreit)에 참여한 이들의 세대차를 늘 매우 의미 있게 보아왔습니다. 그처럼 완전히 의문시되지 않을 수 없는 민족적 환경 한가운데서, 우리 젊은 세대는 방향 감각과 계몽에 대한 갈망, 진실을 알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는 데 심리적인 장애물이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 세대의 비판적 성향을 지닌 이들이 주변의 ‘굳어 버린 사고 방식’과 결별하게 된 것은 일종의 직관적 통찰 덕분이었습니다. 즉, 나치는 ‘본질적으로 건전한 문화’ 안에 침투한 이질적인 물질 같은 존재가 아니었고, 한낱 지나간 ‘악몽’ 같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 민족 문화의 가장 어두운 유산을 자신들의 자양분으로 삼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문화 유산은 심지어 토마스 만 같은 국민적 대문호조차도 제1차 세계대전 초기에 ‘1789년의 정신[프랑스 혁명 정신]’에 맞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직 그런 배경만이 나치가 공습 대피소 안까지도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그 ‘감염력’을 설명해줍니다.

통화 개혁 전까지 이어진 전후 초 잡지와 문학 속에는, ‘문명 파괴’라는 이름조차 미처 붙이지 못했지만 그런 단절에 대해 스스로 책임 있게 성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철학 공부는 저에게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다가왔습니다.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한 가정 환경, 그리고 학비를 기꺼이 대려 했던 아버지도 한 몫 했습니다. 그러나 전공 선택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철학을 공부하기로 했을 당시 저는 특정한 직업—그리고 특히 교수라는 직업은 전혀—염두에 두지 않았고, 단지 관심을 충족시키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1949년에는 한 세대의 약 5%만이 대학에 진학했지만 오늘날에는 50%에 달하죠.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자유가 보장된 시기였습니다. 단순히 한 전공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 학부라는 틀 안에서 자신이 더 깊이 알고자 하는 주제나 대상들을 중심으로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거의 스스로 구성한 셈인 공부 과정을 통해, 중간 시험 같은 것을 본 적도 없이, 박사 시험에 필요한 두 개의 부전공을 나중에 선택하곤 했습니다. 저는 이미 대학 입학 시험(Abitur)을 통과하기 전부터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했습니다.

 

□ 그 결심에 이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당시 선생님의 삶의 상황, 특히 철학에 이르게 된 과정에 대해 들려주실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경험이 있었을까요? 청소년기에는 의사가 되고 싶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 어릴적 의사가 되고 싶다고 희망해서 해부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열두 살 무렵 ‘융폴크(Jungvolk)’에서 ‘펠트셰어(Feldscher, 야전 의무병)’로 옮겨서 훈련받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아마도 사춘기 시절 입천장 갈림병(구개열) 문제와 관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어느 순간 그 문제를 뚜렷이 인식하게 되었고, 그것이 저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제 친구 유프 되어(Jupp Dörr)와 함께 학교 운동장에서 불쾌한 경험을 몇 번 당한 것을 제외하면 순진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도록 꽤 잘 보호받으면서 지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의학에 대한 관심은 생물 수업의 영향을 받아 점차 이론적인 방향으로 옮겨갔습니다. 제 흥미를 자극했던 생물 선생님은 사실 전쟁 이후에 나폴라(Napola, 나치 엘리트 학교)에서 우리 학교로 부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나치였던 셈이죠. 그러나 매우 해박했고, ‘인종생물학’의 함의를 이미 넘어선 학문 자세를 견지하면서 우리를 유전학과 다윈의 진화론에 입문하게 했습니다.

그 이후 제 관심은 생물학을 넘어서 인간학적 질문들로 확장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통화 개혁 이후 어느 날 저는 우연히 슐츠-헨케(Schultz-Hencke)의 책을 손에 넣었는데, 이는 나치 체제에 순응한 정신분석학 교재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김나지움(고등학교) 마지막 2년 동안에는 심리학 잡지 《Psyche》를 정기 구독할 수 있게 되었죠. 이처럼 넓은 의미의 ‘인간에 대한 관심’이 결국 제가 고교 졸업 시험을 보기 전 몇 해 동안 칸트와 헤르더의 역사철학을 읽으면서 철학적 관심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사르트르의 실존철학—아이러니하게도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우(Otto Friedrich Bollnow)라는 구 나치 인사의 책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은 특히 그의 희곡을 통해 우리 세대 전체를 사로잡았습니다. 또한 굼머스바흐(Gummersbach)역 근처에 있던 공산당 서점에서 접한 마르크스주의 문헌들 그리고 그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로서 제 아버지 세대가 선호했던 발터 오이켄(Walter Eucken)과 빌헬름 뢰프케(Wilhelm Röpke)의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도 저의 지적 환경을 함께 구성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저는 개인적인 ‘에세이’(Aufsätze) 속에서 풀어냈습니다. 그 에세이를 가지고 저는 학교에서 몇 안 되는 비(非)나치 교사 중 한 명이자 제가 깊이 존경하던 라틴어 교사 클링홀츠(Klingholz) 선생님을 꽤 괴롭혔습니다. 그는 매우 인상적인 인물이었고, 저는 그에게 그런 글을 자주 들이밀었기 때문에 꽤 성가신 존재였을 겁니다. 또한 저의 외삼촌 페터 빈겐더(Peter Wingender)는 철학을 가르치는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칸트의 『프로레고메나(Prolegomena)』와 같은 ‘진지한’ 책을 추천해주며 제게 자극을 줬던 수많 내용들이 단순한 ‘흥미’ 수준에서 끝나지 않도록 방향을 잡아주었습니다. 이처럼 지적으로 무수한 세계가 한꺼번에 몰려드는 환경에 살다 보면, 철학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은 따로 의식적으로 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특별한 ‘근본 의도’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물론 철학 같은 학문을 전공하며 살아가겠다는 선택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경제적 불안감’은 오랫동안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나중에, 뜻밖에도 제가 교수가 될 수 있었을 때조차도, 저는 제 능력이나 성과 나아가 제 직업에 대해 별로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직업—대학교수이자 학자—를 어느 정도 잘 해내고 있다는 감각이 비로소 생기기 시작한 건, 1980~90년대 프랑크푸르트에서의 마지막 재직 시절부터였습니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생님이 전공을 선택하게 된 어떤 ‘내면적’ 동기가 없었던 건 아닐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가치 지향을 정리하고자 하는 욕구 같은 건 없었나요?

 

■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건 오히려 철학에 대한 플라톤적인 자기 이해에 가깝습니다. 저는 그런 관점을 한 번도 공유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이 늘 ‘진짜 철학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곤 했습니다. 흔히 말하는 그런 철학자들 말이죠. 즉 자기 삶을 깊이 성찰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거기서 심오하고 형이상학적으로 타당한 통찰을 추구하는 그런 철학자들 말입니다. 오히려 저는 마르크스주의와 프래그머티즘에서 [철학적 탐구에 대한] 제 동기들을 더 많이 발견했습니다. 세상을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노력, 아니 최소한 늘 되풀이 될 위험이 있는 퇴행을 막으려는 노력이야말로 결코 하찮게 볼 수 없는 동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라는 호칭에 꽤 만족하고 있습니다.

 

□ ‘철학자’라는 호칭만 붙이면 선생님께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는 표현이었던 건가요?

 

■ 그건 오랫동안 말 그대로 느낌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아보면, 동료들 가운데 제가 거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 되어버린 지금 가끔 그 점을 곱씹어보게 됩니다. 확실히 위대한 형이상학자 중 한 사람인 토마스 아퀴나스를 아무 거리낌 없이-하지만 아무 맥락 없이 그런 건 아니죠- 직접적으로 계승한 사람 중 로베르트 슈페만(Robert Spaemann)만한 인물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고전 텍스트에 대해 깊이 있는 정독을 통해 놀라운 통찰을 끌어내는 능력을 지닌 인물로, 그 점에서 저는 종종 레오 슈트라우스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제 가까운 철학 동료들 역시 각자 고유의 이론적 구상 속에 겉보기엔 냉철해 보이면서도 ‘위대한 철학’ 전통에 다소간 뿌리박고 있는 동기들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허락하신다면 몇 가지 대략적인 도식으로 설명드리죠. 예컨대 칼-오토 아펠(Karl-Otto Apel)의 경우, 도덕의 최종적 정당화(die Letztbegründung der Moral)를 향한 그의 열정만 보아도, 그는 ‘탈형이상학적 사고’를 너무 멀리 밀어붙여선 안 된다고 확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그건 우리 사이의 핵심적인 의견 차이기도 했습니다. 디터 헨리히(Dieter Henrich)의 경우, 형이상학적 근본 동기는 명백합니다. 즉, 성찰로 진입하기 이전에 이미 자기와 낯익은 것(Mit-sich-Vertraut-Sein)과 같은 게 있다는 직관을 확신하는 입장을 지니고 있는데, 이런 직관 같은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의식으로 하여금 [모든 존재자들의 바탕이 되는 형이상학적 근거와 같은] ‘포괄적 전체(Allumfassenden)’를 이해하게 하는 문턱이 된다는 것이죠. 미하엘 토이니센(Michael Theunissen)은 평생 동안 종교적 동기들과 씨름해 왔습니다. 초기에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았고, 이후에는 상호주관성과 청년 헤겔적 관점에서 해석한 헤겔 독해를 거쳐 말년에는 후기 하이데거로의 회귀를 시도했죠. 저는 그 시도가 그리 생산적이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가장 명석하고 냉철한 철학자였던 에른스트 투겐트하트(Ernst Tugendhat)조차도 자신의 언어철학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번역한 작업으로 이해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윤리학 사상에서 형이상학적 지향성은 그의 후기 작업인 신비주의로의 전환에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는 자기중심적 주체의 고집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압도적인 우주에 대한 관조에 몰입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방식이 아니고는 칸트의 보편주의적 정의 개념과 이성적 자유 개념을 구제할 수 없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죠. 저에게는 그런 종류의 ‘심층적인’ 동기들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붙잡고 있는 문제는 왜 인간 사회는 그토록 쉽게 파괴되고 반복적으로 붕괴되어왔는가 그리고 그런 취약한 사회적 공존을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철학적 탐구의 동기가 될 수 있느냐고요? 저에게 인간의 자연 의존성[죽음의 숙명과 같은 것을 탐구하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경향]은 철학적 탐구의 동기가 되지 않습니다. 저의 철학적 탐구는 다만 인류가 언어를 통한 사회화라는 완전히 새로운 진화적 도약을 이뤄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춰 [인간 사회 외부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바탕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삶에 중심을 두고 사유됩니다. 제 철학의 ‘궁극적’ 동기를 굳이 꼽자면, 그것은 아마도 ‘언어의 해방적 힘(die befreiende Kraft des Wortes)’일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개별화된 사회화가 오직 상호 평등한 인정 관계 속에서 이뤄질 때에만 온전히 펼쳐질 수 있습니다. 가까이함과 멀리함, 예와 아니오, 해방과 퇴행, 찬성과 반대(Zustimmung und Widerspruch), 자립과 의존(Selbstsein und Abhängigkeit), 이 모든 것은 개인들이 사회화 과정을 통해 자아가 되어가는 과정을 치러낸 의사소통적 경험들입니다. 그런 개인들은 서로 상반된 극들 사이에서 균형을 이룰 때만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것은 [인간 사회 외적 토대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어느 정도 통합된 사회적 조건 속에서만 가능하죠. 저는 이런 직관을 가지고 철학과 사회 이론을 전개해 왔습니다. 저의 이론은 역사적으로 볼 때, 칸트, 피히테, 쉘링, 헤겔 이후 [세속주의적] 철학자들과 연결되어있습니다. 이들은 종교적 직관을 세속적 사유로 완전히 이행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의 철학은 그리스적 동기보다는 성서적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그 말씀도 이미 어떤 근본적인 직관에 따른 것처럼 들리는 데요.

 

■ [관념적이기보다는] 좀 더 사실적인 측면에서 얘기해 봅시다. [앞에서 저는 인간의 사회적 삶의 성공 여부가 취약하다고 했어요. 이와같은] 성공적이거나 실패하지 않은 형태의 사회적 통합(soziale Integration)에 대한 직관은 저를 의사소통 행위 이론으로 이끌었고, 이 점은 제가 언어학적 전회에 주목했음을 말해줍니다. 처음 시작할 땐 명확하지는 않았죠. 하지만 훔볼트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발전해 온 사고, 즉 인간의 존재 방식으로서의 ‘호모 사피엔스’의 생활 형식을 언어적으로 구성한다는 사고만이 언어학적 전회로서의 패러다임 전환의 의미를 부여합니다. 반면에 카르납, 콰인, 데이비드슨 같은 주요 분석철학자들에게 언어학적 전회는 단지 방법론적인 의미에 불과했습니다. 덧붙여 이[렇게 언어학적으로 전회한] 패러다임은 조지 허버트 미드와 윌리엄 제임스 같은 프래그머티스트들이 제기한 개별화와 사회화의 동시 기원성과 상호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통과할 때에만, 제1인칭, 제2인칭, 제3인칭 간 관계의 역동적인 긴장 구조에 내재한 변증법적 요소를 획득합니다. ‘나-너(Ich-Du) 관계’는 ‘우리(Wir) 관계’의 틀 안에서 형성되며, 이 ‘우리’는 [어떤 의견 등에 대해] ‘예’와 ‘아니오’라고 말하는 행위 주체들이 자신들이 공유하는 언어라는 공동 배경과 그로 인해 열리는 근거들의 공간을 인식하면서, 세계의 어떤 대상에 대해 객관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에 대해 합의를 이루려는 관계입니다. 저는 이 관계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즉 헤겔의 변증법처럼 행위 주체들 상호 간의 대립과 투쟁 관계에서 발생하는 위기적인 분위기의 변증법과는 다른 의미에서의—‘변증법적’ 관계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성장해 가는 이들은 자신들이 ‘나(Ich)’로서 경험하고 자의식을 형성하는 정도가, 자신들이 각각 ‘너(Du)’로 인식하는 제2인칭의 시선을 받아들이고, 그 시선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는 법을 배우는 정도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매개되는 것은 자의식만이 아닙니다. 의사소통 행위와 담론을 통한 이해는 타당성 주장에 대한 상호 비판을 목표로 하며, 그 점에서 문자 그대로 변증법적[변증술적] 과정입니다. 동시에 이 과정은 의사소통 행위를 하는 주체들로 하여금 ‘예’ 또는 ‘아니오’의 입장을 취하도록 강제하며, 이 입장에 대해 그들은 개인적으로 책임을 집니다. 그리고 인생에서 중요한 상황들에서는 이 책임감이 단지 개인의 자립성과 대체 불가능성에 대한 의식만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고유의 독특한 특성 또한 형성합니다.

 

□ 선생님의 생애로 돌아가 보죠. 이를테면 당신의 ‘첫 번째’ 대학 이야기말입니다. 왜 괴팅겐 대학이었나요?

 

■ 대학 입학 시험을 마친 후 어디서 공부할지는 자연스럽게 결정됐습니다. 그 당시에는 마르틴 하이데거와 니콜라이 하르트만이 ‘누구나 꼭 가서 배워야 할’ 두 명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프랑크푸르트에 대학이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어요. 프라이부르크 대학은 전쟁 때문에 ‘중단된’ 학년이 있었고 전후에 여전히 의무적으로 시행되던 정리 작업들(시설 재건 등) 때문에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거기서 공부하려면 몇 달, 어쩌면 한 학기를 더 보내야 했기 때문이죠. 반면 괴팅겐 대학에서는 하르트만과 ‘입학 면담’만 하면 됐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별 관심 없어 보이던 그에게 저는 릴케의 작품을 읽은 경험만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제 첫 학기는 마침 제1차 독일 연방의회 선거운동 기간과 겹쳤습니다. 우리는 나치 시대에 성장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마지막 몇 해 동안에서야 어느 정도 각성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주로 도덕적인 반응에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정치적으로도 깨어나게 되었죠. 그래서 괴팅겐에서 열리는 선거 유세 행사들을 거의 빠짐없이 찾아갔지요. 그때 저는 민주주의를 대부분 책을 통해서만 배워 온 젊은이로서 아주 극단적인 실망을 경험했습니다. 현실 민주주의와 했던 첫 대면은 충격이었죠. 그 충격은 1944년 7월 20일 베를린에서 반(反)히틀러 음모자들을 체포했던 오토 에른스트 레머(Otto Ernst Remer)가 극우 독일제국당 대표로 등장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저를 진정으로 충격에 빠뜨린 것은 BHE(동유럽 국가들에서 거주하다가 추방된 독일인 연합 Bund der Heimatvertriebenen und Entrechteten), 독일당 그리고 기독교민주당의 선동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레머 못지않게 극우적인 태도를 보였거든요. 그때 제가 알게 된 오버렌더, 제보움, 메르카츠(Oberländer, Seebohm, Merkatz) 같은 인물들은 거만하고, 모욕적이고, 점령국들에 맞서 들끓는 말투의 뻔뻔한 태도로 연설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아데나워 초대 내각에 전원 포함되었던 겁니다! 그들의 무책임한 언설에서는 나치 시대와의 단절이라는 필수적인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지금도 그 장면이 기억납니다. 어떤 행사에서 독일 국가의 첫 소절이 연주되자 저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그 순간 청중들의 야유와 환호가 동시에 터져 나왔습니다. 그 국가가 12년 동안 나치의 당가였던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Horst-Wessel-Lied)’와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떠올렸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원래는 별 문제가 없는 국가였지만, 그런 식으로 악용되었기 때문에 저는 지금도 독일 국가에 대해 일종의 저항감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94년 연방총회에서 요하네스 라우가 로만 헤어초크와 경쟁해 낙선했을 때, 저는 그 자리에 있던 페터 글로츠에게 ‘독일 국가가 연주되기 전에 미리 알려달라’고 부탁해서 그 시점에 맞춰 회의장을 떠났습니다. 이처럼 제 첫 학기의 경험을 되돌아보면, 그 시절 우리 세대가 ‘정치적으로 자명한 것들(die politischen Selbstverständlichkeiten 정치적으로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원칙이나 가치들)’을 얼마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철학적 깨달음에 대한 지적 욕구는 그런 자명성에 깊이 젖어 있었지요. 세상은 더 나아져야만 하고,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 전후 시절 당시 철학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계셨나요? 디터 헨리히가 ‘1945년 이후 세대 철학자들만의 고유한 세대적 특징이 있으며, 그것이 특히 현재에 대한 특정한 시각으로 표현되었다’고 한 말에 동의하십니까?

 

■ 전후 세대 철학자들에 관해 헨리히가 말한 ‘특유한 세대적 특징’이라는 감성을 제가 공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런 식의 세대 구분으로 철학자들을 다른 학문 동료들과 명확히 나누는 것은 쉽지 않다고 봅니다. 저와 제 아내는 같은 또래 사회학자들 그리고 역사학자들과 우정을 맺으며 매우 비슷한 사고 방식을 경험했습니다. 인문학부 내 모든 학문 분야에 존재하던 더 깨어 있고 더 뚜렷한 개성을 가진 정신들 속에서 어떤 공통된 세대적 특성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들의 전통이 부패한 뒤 모든 것이 오염되었다는 혐의를 얻었고, 모든 것이 회의와 불신, 비판의 여과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우리는 철학 교수로서 나중에 플라톤 전통의 엄숙한 제스처에 맞서서, 우리의 직업적 역할에 대해 냉철하고 소박한 이해, 특히 우리의 주장과 이론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뿌리내리도록 하였습니다. 하이데거가 여전히 찬양하던 진리에 대한 특권적 접근권을 주장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짓에 불과했습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분석철학의 방법과 정신을 습득하려 노력했습니다. 독일에서 한때 경멸받던 프래그머티즘조차도 금방 성공 가도를 달렸습니다. 이러한 서구에 대한 무조건적 개방은 독일 철학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저희 세대는, 자랑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 문을 열어젖혔습니다.

각기 다른 이유로 저는 전쟁을 겪은 칼-오토 아펠, 에른스트 투겐트하트, 디터 헨리히, 미하엘 토이니센과 가장 가까웠습니다. 앞에서 말한 동기들 때문에, 우리는 모두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 각자 철학 프로젝트를 발전시켰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다소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서로를 지켜본 것 같습니다. 브루멘베르크(Blumenberg)는 독불장군이었고, 야콥 타우베스(Jacob Taubes)는 1960년대 초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뮌스터 대학 동료들, 특히 슈패만(Spaemann), 륍베(Lübbe), 마르쿠바트(Marquard)를 포함한 뮌스터(Münster)의 동료 철학자들은, 제가 보기엔 리터 학파(Ritter-Schule) 소속이라는 관점에서 받아들여졌을 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는 파울 로렌젠(Paul Lorenzen)의 ‘에를랑겐 학파’와 특히 ‘콘스탄츠 학파’인 프리드리히 캄바르텔(Friedrich Kambartel), 위르겐 미텔슈트라스(Jürgen Mittelstraß), 나중에는 페터 야니히(Peter Janich)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 세대 철학자에는 알브레히트 벨머(Albrecht Wellmer)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철학을 공부할 때 수학을 전공했던 그가 제 첫 제자였는데, 우리는 곧 매우 우정 어린 관계를 맺었고, 다른 경우들처럼 가족 간 교류로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알브레히트는 뉴스쿨(New School)에서 수년 간 가르치면서 미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벨머는 뉴 스쿨에서 비판이론 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학생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이 과정에서 토마스 매카시와 그의 제자들도 함께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전통은 오늘날 독일보다 미국에서 더 생생합니다. 1970년대 초부터 미국에서 딕 번스타인(Dick Bernstein 리처드 번스타인), 딕 로티(Dick Rorty 리처드 로티), 특히 긴밀한 연구 협력 관계를 맺은 톰 매카시와의 우정이 수많은 다른 인맥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

나라의 이유: 레종 데타(Raison d’État) ① [내게는 이름이 없다]

나라의 이유레종 데타(Raison d’État)

 

행길이(한철연 회원)

 

1

이따금 나라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본다올바른 나라란 무엇이고정의로운 나라란 어때야 하는지가 궁금했다이에 대해선 여전히 궁금하지만조금 더 알고 싶은 건 나라의 이유다나라가 좀 더 좋아졌으면 하는 마음에서 올바른 나라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해 묻게 되었지만계속 묻다 보니 굳이 나라가 있어야 할까?’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기 때문이다찾아보니 나라 없이도 잘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의외로 많았다믿었던 나라에 발등 찍히는 일이 많은 요즘나라 없는 이들이 부러워 보이기도 한다그렇긴 해도 나라가 없어 설움받았던 우리와 세계 곳곳을 떠도는 난민들의 고초를 떠올리면 나라가 없어서는 안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존재 이유를 묻고자 하는 마음은 여전하다근본적 물음은 새로운 길로 이끌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대답의 행로가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도 없고간혹 그 대답이 우리를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할 수도 있을 테지만…….

여기에 끄적이게 될 글들은 나라의 이유를 탐문하는 과정의 기록들이다일단 나라가 생긴 이유를 통해 나라가 있어야 할 이유나 없어도 될 이유를 짐작해 보고자 한다. ‘올바른 국가란 무엇인가라든가 국가의 목적은 무엇인가’ 등과 같은 거창한 물음에 대한 답은 우선 미뤄두기로 한다그런 얘기라면 이미 빛나는 지혜를 지닌 수많은 사람들이너무도 일찌감치참으로 훌륭하게 풀어 놓았다여기서는 그저 내가 이곳 저곳에서 보고 들었던 나라에 대한 이야기들을 헐렁하게 늘어놓고자 한다누구에게는 전인미답의 이야기들일 수 있지만누군가에게는 뒤늦은 담론일 수도 있다후자라면 비판적 가르침을 부탁드린다.

여기 써 내려 간 모든 이야기는 작은 조각들로 구성되어 있다각 파편들의 이야기는 독립되어 있는 동시에 서로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때로는 사료나 민족지적 자료에서 뽑아낸 이야기를 쓰기도 하겠지만경우에 따라서는 추정과 상상을 길잡이로 삼아 자료의 공백을 채워보기도 할 것이다근거 없는 허무맹랑한 얘기가 될 공산이 크다따라서 앞으로의 이야기는 눈동자가 발가락에 붙고머리와 꼬리가 구분되지 않으며상상이 근거를 압도하는 터무니 없고도 어처구니 없는 형세로 전개될 수도 있다.

감히 이 글을 읽는 독자의 태도에 대해 첨언한다면눈썹의 힘은 풀고비스듬히 누운 채곁눈질로 읽는 것이다읽다가 지겨우면 저만치 치워뒀다가 다시 읽어도 무방하며재미 없으면 슬쩍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도 좋다뒤에서부터 읽어도 되고 중간부터 읽어도 상관 없다어차피 모든 이야기는 나라가 있게 된 이유와 없어도 될 이유에 관해서이거나지금은 없으나 어쩌면 있었을지도 몰랐던 나라에 관한 이야기들로 대략 흘러들어갈 것이다흘려 듣다가 문득 비판적 눈길을 던져준다면 더욱 감사하겠다나라 없던 시절족장의 말을 공공연히 흘려들으며 그들의 위세를 견제했던 부족민들처럼(이 얘기가 궁금하면 계속 읽어 주세요ㅎㅎ).

마지막까지 읽어도 나라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이렇다 할 답은 아마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오히려 나라에 관해 늘어 논 여러 가지 이유들로 머리만 복잡해 질지도 모르겠다나라에 살 이유나라에 안 살 이유나라가 생긴 이유나라가 없어진 이유나라가 있어야 할 이유나라를 없애야 할 이유나라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이유나라 안에서 나라 없는 듯이 살아도 될 이유…….

어떤 두려움 – 프랑크푸르트학파 100주년에 – [내게는 이름이 없다]

어떤 두려움 – 프랑크푸르트학파 100주년에 –

 

행길이(한철연 회원)

 

‘어떤 두려움’

 

올해는 프랑크푸르트학파 100주년이다. 비판이론 1세대의 아도르노, 2세대의 하버마스, 3세대의 호네트 등 뛰어난 학자들을 배출하면서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이 학파의 전통은 계승보다는 비판이다. 그 이름에 걸맞게 선배의 이론을 수용하기보다는 비판적으로 극복하면서 이론적 폭과 깊이를 더하고 있다. 선배와 후배, 스승과 제자 간에 대립과 단절의 계기를 지닌 채 비판적으로 연합하는 것이 이 학파의 정체성이자 전통인 것이다. 하버마스의 입장이 아도르노와 다르듯이 호네트도 하버마스와 같지 않다.

철학자마다 입장이 다른 까닭은 그가 걸어온 삶의 궤적과 그가 처한 역사적 조건이 상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선배 세대들이 망명 유대 지식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고난은 하버마스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전체주의 시기 하버마스는 철없는 소년이었고, 게르만 민족의 범죄적 역사를 의식할 수 있을 만큼의 나이도 되지 못했다. 그는 의사를 꿈꾸던 착실한 소년에 불과했다.

소년기의 무구함을 벗어나게 된 계기는 뉘른베르크 재판이었다. 소년은 자기가 속한 민족공동체가 인류 최악의 범죄 집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하였다. 하버마스는 의사의 길을 접고 철학의 길로 들어섰다. 신체의 병을 치유하는 것보다 정신의 질병을 다스리는 것이 더 중대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을까? 대학에 입학한 하버마스는 선배 아펠의 도움으로 비판적 문제의식을 넓혔고, 졸업 무렵에는 비판적 저널리스트의 길을 가고자 했다. 하이데거 철학의 근저에 흐르고 있던 전체주의적 정신에 대한 비판적 논평을 게재하여 호응을 얻던 차였다.

하지만 하버마스의 학문적 재능을 알아본 아도르노가 조교직을 제안하면서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로 이끌자 그는 비판적 저널리스트의 꿈을 접고 학문의 길로 들어선다. 이후 하버마스는 독일 국민들을 권위주의적 전체주의 체제의 하수인으로 만든 모든 정신적인 것들을 일소하고 민주주의 정신을 구제하는 철학적 투쟁에 평생 헌신한다.

전후 서독 사회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과거의 야만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는 전체주의 체제의 지적 선봉대들과 그 후예들이 반공주의적 자유주의를 구실로 권위주의적 정신을 퍼뜨리고자 하는 데에 큰 두려움을 느꼈다고 한다. 1980년대 초 서독 지식 사회가 과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세우며 전체주의의 부활을 시도하자, 하버마스는 ‘역사가 논쟁’에 뛰어들어 이들의 반민주주의적 의도를 낱낱이 폭로하는 비판 활동에 힘썼다. 독일 시민들은 하버마스의 비판을 수용함으로써 과거의 망령에게 혼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민주화 이후 3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독일의 행운을 기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현 정부는 ‘민주주의를 제거한 자유’를 정치적 이상으로 삼고 있으며, 적잖은 사람들이 거기에 호응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에 대항하는 비판적 담론이 활기차게 제기되지도 못하는 데다가 시민들 사이에 확산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건 한숨과 조롱 그리고 역정뿐이다. 과거의 망령들이 하나둘 무덤에서 나와 활개를 치고, 권위주의 체제가 부활에 성공하는 것 같아 참으로 두렵다. 과한 두려움일까?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⑤ [내게는 이름이 없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행길이(한철연 회원)

 

우정, 최고의 기쁨

 

“전 생애에 걸친 축복을 만들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들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을 갖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혹은 공적 삶을 살지 말 것을 충고하였다. 폴리스적 삶의 양식이 무너진 시대에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쾌락보다는 고통을 가중시킨다. 정치 영역은 이미 권력을 독점한 군주의 손아귀에 장악되었다. 군주는 권력을 분점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군주의 지배권을 분할받으려는 시도로 인지되어 파멸의 고통을 면치 못할 수도 있게 된다. 권력을 추구하면서도 군주권을 침해하지 않으려는 줄타기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에피쿠로스는 공적 행위인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쾌락의 지속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 되니 적이 생기지 않도록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아갈 것을 권고하였다.

그렇지만 에피쿠로스가 사회생활 자체를 금한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 활동 이외의 사회생활을 통해 얻는 우정은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다. 우정이 주는 쾌감은 사회생활을 통해 얻는 즐거움 가운데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다. 키케로에 따르면, 에피쿠로스는 ‘우정이란 쾌락과 떼어놓을 수 없고, 우정이 없이는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고 두려움 없이 살지도 못하며 심지어 유쾌하게 살 수도 없기에 우정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자기 철학의 기본 입장에서 벗어나는 말을 할 정도로-“모든 우정은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 우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에피쿠로스에게 우정은 인생에 있어서 즐거움의 커다란 원천이었다. 에피쿠로스와 제자들은 그가 근근이 마련한 작은 안뜰에 모여 우정을 나누었다. 그의 정원에서는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사회에서는 감히 볼 수 없었던 풍경이 그의 정원에서는 자연스럽게 벌어지기도 했다. 즉 고대 그리스의 고급 창녀들인 헤타이라들이 드나들며 남성 구성원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담론을 나누었던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여성은 더 이상 남성의 노예로 취급되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그의 적대자들은 에피쿠로스를 창녀와 수작이나 부리는 자로 비방하곤 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노예와 어린이들(학단 구성원들의 자녀들)도 친구로 대우하면서 상냥한 편지를 남기기도 하였다.

“대지 전체가 고통 속에서 산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가장 많은 선물을 선사받았다.” 그것이 바로 우정이다. 모름지기 인간은 누구나 고통의 삶을 경험하다가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우정은 홀로 맞는 죽음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원천이다. 죽음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고적함의 고통은 누구에게든 보편적이다. 홀로 죽음의 고통이 보편적이라는 각성은 모든 인간을 외로운 존재로 남겨두지 않고 친구로 삼게 하는 동기가 된다.

자유시민들의 우정 어린 공동체라 할 수 있는 폴리스가 소멸한 이후에 우정의 기쁨을 전파할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의 안뜰은 폴리스의 몰락으로 인해 고립되어 버린 인간들에게 새로운 우정의 공동체를 사적으로 선사하였다. 흔히 우리는 친구들이 반드시 우리를 실제로 도와주기 때문에 우정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정이 지속되는 이유는 실제의 도움보다는 “친구들이 우리를 도와주리라는 믿음”에 있다. 이 믿음이 깨지면 세상은 분열과 고립의 고통으로 넘쳐난다.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며 늘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여 불안 속에 살게 된다. 하지만 우정의 삶은 이러한 고립의 환난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 폴리스의 연대적 삶이 소멸된 불안한 상황에서 안전과 평화를 제공해줄 수 있었던 공간은 에피쿠로스가 제안한 우정의 정원이었다. 비록 이 공간은 사적 관계를 기초로 하여 형성된 것이기는 했지만 이를 통해 사람들은 각자도생의 비정함이 초래하는 삶의 고통에 꺾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정원 속에 모인 이들은 우정의 기쁨을 아래와 같이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정이 춤추면서 세상의 주위를 돈다. 그리고 소리친다. 모두 일어나라! 그리고 노래하자!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우리 시대와 에피쿠로스

 

러셀에 의하면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모험 가득한 행복을 좀처럼 얻을 수 없는 세계에나 어울릴 법한 병약자의 철학이었다. 소화불량에 걸리고 싶지 않으면 적게 먹어라. 다음 날 아침이 걱정된다면 과음하지 말라, 정치와 사랑과 격렬한 열정을 동반하는 모든 활동을 삼가라.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운명의 인질이 되지 말라.” 고통에 침잠하지 말고 그 속에 잠재된 쾌락을 능동적으로 관조하는 법을 배우라. “육체의 고통은 분명히 커다란 악이지만, 격심한 고통이라는 것은 짧은 법이고, 길고 긴 고통이라는 것은 정신훈련을 하거나 고통 속에서도 행복한 일들에 대해 생각하는 습관을 들임으로써 참아낼 수 있다.”

어찌보면 소심하기 그지없는 철학이다. 그런 까닭에 얄팍한 위로와 단발적 힐링에 열광하는 부박한 시대에 에피쿠로스는 자칫 힐링의 멘토로 부각될 수 있다. 더구나 시민적 연대의 전통과 사회적 보호의 수단이 점차 훼손되고 있는 와중에 현대인의 고통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에피쿠로스가 살던 시대도 극심한 고통으로 마음을 종잡을 수 없는 고난의 시대였다. 지금과 유사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의 미망은 올바른 해답이 될 수는 없었다. 사회적 고통을 해결해줄 구조적 대응은 요원한 형국이다. ‘위로의 구루’가 재림하여 힐링의 향유를 피워대면 사람들은 언제든 ‘좋아요’를 누르며 힐링을 소비할 태세다. 하지만 에피쿠로스가 제안하는 위로의 즐거움은 ‘좋아요’와 같은 손쉬운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처방은 정신의 자기성숙을 통한 고통의 극복이다. 정신훈련을 통해 굳건한 정신을 가진 주체를 만들어낼 때 비로소 고통도 극복되는 것이다.

우리의 시대에도 같은 방법이 적용될 수 있을까? 시대적 조건이 유사하다는 점에서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과거에 수행했던 역할은 오늘날에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이 얼핏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성향은 다르다. 더구나 사람들은 욕망의 무제한적 표출을 동력으로 작동하는 체제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렸다. 욕망의 무분별한 추구로부터 초연해지는 평정한 영혼의 상태(ataraxia)를 권고하는 에피쿠로스가 과연 현대인의 삶을 인도하여 즐거움의 항구에 안착하게 만들 수 있을까? 아무래도 모를 일이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④ [내게는 이름이 없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④

 

글: 행길이(한철연 회원)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

 

김훈의 『강산무진』에는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무기력함이 끔찍할 정도로 냉정하게 조탁되어있다. 죽음의 두려움이 주는 고통은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인 경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죽음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기쁜 인생을 살기 위해 태어났다. 그런데 인간은 두려움 때문에 기쁜 인생을 향유하지 못한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은 자기 삶의 최종적 파멸로서의 죽음이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란 살아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작용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은 감각에 의존하는데, 죽으면 이러한 감각을 잃게 된다.” 즉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기쁘게 되지도 않고,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게 된다. 우리가 죽게 되면 죽음으로 인해 느껴지는 고통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죽음에 대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고통이란 죽음을 경험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음에 대한 고통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닥쳤을 때라도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기에 죽음이 두려운지 조차도 느낄 수 없다. 그러니 죽음이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한순간도 죽음을 경험할 수 없으니 죽음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와 동요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유령과 같은 허상을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의 공포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다.

 

신에 대한 두려움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

 

죽음 다음가는 공포는 신에 대한 공포다. 모두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불행해진 이유가 신이 불경한 자기 행동에 분노하여 징벌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제사장들에게 재물을 제공하면서 신의 전조를 읽어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엄청난 비합리성이 판을 치는 불의한 사회가 되어버린다. 종교적 권고는 심지어 자기 자식을 신에게 공양하는 범죄를 신성한 의례로 여기게 하는 미혹을 유포시키기도 했다. 루크레티우스의 말처럼 “종교로 인해 우리가 이르게 되는 악의 심연(Tantum religio potuit suadere malorum)”은 인간의 삶을 고통에 휩싸이게 만든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신이 인간의 행위에 분노하거나 기뻐하는 등의 감정을 함부로 남발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신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신은 불멸의 축복을 받은 존재다. 따라서 그의 불멸성과 축복에 어울리지 않는 속성들, 즉 걱정, 근심, 분노 등을 신에게 갖다 붙이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신은 인간과 같이 근심하거나 걱정에 휩싸이고 분노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자기에게 악한 자들은 신의 징벌을 통해 불행해지고, 자기에게 선한 자들은 신의 축복에 의해 행복해진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고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려는 인간이나 하는 것이지 지성적 존재인 신이 취하는 것일 수 없다. 따라서 신은 우리 인간이 무슨 짓을 하든지 아무런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며, 아무런 징벌도 상도 내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즐거움의 항구

 

나이를 먹을수록 활력과 정열은 예전 같지 않다. 의욕은 있으되 청년의 정력적 활동을 따라가기란 역부족이다. 주변에서는 활력을 갖고 젊게 살기 위한 노력을 주문하면서 젊은이들 못지않게 열심히 활동하는 노년들을 보여준다. 이른바 청년 시절의 삶을 노년에서도 반복하기를 권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청년 같이 사는 삶이 과연 행복한 노년의 삶이랄 수 있을까?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젊은 사람을 행복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노인을 행복하다고 해야 한다. 젊은이는 혈기왕성해서 운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하지만 노인은 항구에 정박하듯 제 나이에 닻을 내린다. 하여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경험을 즐거운 일이라 감사히 여기며 [그 경험을] 안전한 곳에 가져다 둔다.”

 

에피쿠로스가 보기에 청년보다는 노인이 더 행복할 수 있다. 청년은 언제나 자기 운수의 행로가 좋은 결과를 가져올만한 방향으로 가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행복을 판별한다. 하지만 노인은 좀처럼 운수의 향방에 따라 자기 인생의 복됨을 결정하지 않는다. 노인은 항구에 굳건히 정박한 배처럼 운수가 어떤 변덕을 부리든 상관하지 않고 굳건히 자신의 경험을 관조하면서 그 속에서 얻은 기쁨을 발견하는 즐거움에 행복감을 느낀다. 비록 새벽잠이 없어서 매번 외로운 아침을 맞이하지만 그로 인해 하루가 시작되는 신비로움을 고요히 응시할 수 있고, 두뇌 활동이 예전 같지 않아 빠른 독서는 하지 못해도 느릿한 독서는 구절마다 배인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만든다. 젊은 시절 성급하게 놓쳐버린 경험의 다양성은 노년이 주는 완상의 기회 덕분에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좋은 일들을 잊고서 그는 오늘 이미 노인이 되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과거의 즐거움을 기억하는 사람은 젊음을 유지할 수 있지만 새로운 쾌락만 추구하려는 사람은 금세 늙는다는 말이다. 에피쿠로스에게 쾌락이란 대체로 완상과 관조의 경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을 청춘의 즐거움 속에서 살게끔 만든다. 고통의 제거란 생의 경험 속에 내재된 기쁨의 요소를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관조를 통해 자신이 겪은 경험 속에 내재한 좋은 일들을 간수하지 못하고 망각하게 되면 그는 고통의 심연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청년이어도 노년의 고통을 겪는다. 반면에 경험 속에 내재한 좋을 일을 고통의 순간 속에서도 관조할 줄 알면 노인이어도 청년을 살게 된다.

에피쿠로스에게 나이가 듦에도 젊게 사는 인생이란 청년의 삶을 모방하며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노인답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첫 걸음은 나이를 먹으면서 변화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경험을 완상하며 즐거움의 계기를 발견하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 나갈 때 젊은이의 그것과는 다른 삶의 활기를 얻게 될 것이다. 항구에 닻을 놓고 생의 즐거움을 완상하는 것. 이것이 청춘을 사는 노년의 방법이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③ [내게는 이름이 없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③

 

글: 행길이(한철연 회원)

 

고통의 제거

 

“우리는 본성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필연적인 육체적 육망들은 충족시키는 반면, 해로운 욕망들은 완강히 거부할 때 우리는 본성에 맞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삶이다. 이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태어나자마자 쾌락을 얻으면 만족하고 고통을 혐오한다. 이는 이성과는 무관하게 본성에 이끌려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는 쾌락주의의 공통적 전제에서 도출되는 입장이다. 고대의 쾌락주의에는 에피쿠로스 학파말고도 아리스티포스의 퀴레네 학파도 있었다. 퀴레네 학파가 육체적 쾌락의 무한한 증진을 추구한 것과 달리 에피쿠로스 학파는 육체적 쾌락 뿐만 아니라 정신적 쾌락도 추구하였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고통이 결핍에서 온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쾌락은 고통의 제거에서 비롯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고통스러운 것들의 제거가 쾌락 크기의 한계이다.” 즉 고통을 제거한 이후에는 더 큰 쾌락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육체적 쾌락을 무한히 증가시키기를 원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한다. 에피쿠로스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흔히 우리는 육체적 쾌락이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육체는 무한히 지속되지 않는다. 육체가 유한한데 쾌락이 무한할 리는 없다.”

허기라는 고통이 소박한 식사를 통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음식에 대한 욕망을 줄기차게 추구한다. 형태를 달리한 즐거움이 증가된 쾌락의 경험을 제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새로운 형태의 ‘쾌락’을 추구하다보면 새로운 고통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기의 맛’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쾌락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경우 우리는 성인병이라는 고통을 겪게 된다. 쾌감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무분별하게 추구하게 되면 “쾌락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쾌락보다는 고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위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위가 무한한 용량을 가진다’라는 잘못된 의견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라는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을 잘 새겨야 하겠다.

 

소박한 쾌락주의

 

허기와 갈증과 추위와 더위에 시달릴 때 그것의 욕구를 채워주면서 더 이상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춥지도, 덥지도 않게 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만족스러운 쾌감을 느끼게 된다. 고통이 사라짐으로써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의 제거 그것이 곧 쾌락이다. 시시해보이지만 부정하기는 힘든 소박한 사실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얻은 새로운 형태의 쾌락이 우리를 만족시킨다 해도, 그것을 위해 감수한 노력과 애타는 시간 등을 감안해 우리가 얻은 즐거움의 양을 계산해 본다면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사 그것이 나의 노력과 힘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스러운 노동의 성과를 착취해 얻은 기쁨이라 해도, 그가 품고 있는 불만은 공동체적 삶의 즐거움을 반감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에피쿠로스적 관점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의 양이란 우리가 사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을 얻는 것에 국한된다. 진정으로 배고플 때 먹고, 정말로 목마를 때 마셔야만 한다. 그럴 경우에만 진정 쾌감을 얻을 수 있다. 자연적 필요가 아니라 인위적 충동에 의해 쾌락을 추구할 때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고통의 대가도 치러야 한다.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계속 술을 마시고 흥청거리는 일도 아니고,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도 아니며, 물고기를 마음껏 먹거나 풍성한 식탁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선택과 기피의 이유를 스스로 발견하고 잘못된 생각을 몰아내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따져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가장 큰 선은 사려 깊게 판단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육체의 자연적 욕구를 충족시킨 이후에는 더 나은 생계를 위해 필요한 수단을 확보하느라 노력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삶은 인위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삶이다. 그것은 삶의 균형을 상실한 사람들이나 할 만한 어리석은 짓이다. 에피쿠로스의 제자 메트로도로스가 말했듯이 “어떤 사람들은 일생 동안 생계 수단을 모은다.” 되도록 많은 재산을 모음으로써 우리가 배고픔, 목마름, 추위 등의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갖고 있다 해도 우리가 육체를 지닌 인간인 이상 우리는 갈증, 허기, 추위 등의 고통에서 영구히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 죽음의 약을 마신 육체적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존재적 지위를 깨닫지 못하기에 우리는 더 많은 재산을 원한다. 하지만 일단 우리에게 신과 같은 풍요가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의 욕구는 자연적 필요를 채우는 데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자연적 필요를 채우는 데에는 그리 많은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단지 소박한 몇몇의 것들만 있으면 된다. 이러한 사실을 강렬히 깨달은 사람이라면 욕망의 어리석은 타력에 제 몸과 정신을 맡기지 않고 자기 절제의 의식을 가지면서 살아갈 수 있다.

 

“사치스럽지 않고 단순한 음식에 길들여지는 것은 우리에게 완전한 건강을 주며, 우리가 생활하면서 꼭 필요한 것들에 주저하지 않게 해준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사치스러운 것들과 마주쳤을 때 우리를 강하게 만들며, 우리가 행운(tyche)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만들어준다.”

 

자연적 필요를 충족시켰을 때 얻는 쾌락에 만족하는 삶이 익숙해지면 사치스러운 것을 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마음의 동요가 없다면 그러한 행운을 과감히 무시하더라도 번민의 고통을 겪지 않는다. 오히려 홀가분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이러한 기쁨과 쾌락은 오직 인위적 욕구의 절제를 알고, 의연함으로 스스로를 제어하는 이만이 얻게 되는 보상이다.

고전문헌학자 앙드레 보나르는 한 고인의 말을 인용하며 에피쿠로스의 삶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밥 한 술 뜨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등짝을 눕히고 자는 것, 이것이 바로 에피쿠로스다. 그는 새벽이 되면 벌써 비단 친구들뿐만 아니라 제우스 신하고도 토론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것이 적잖은 사람들이 방탕의 화신이자 난봉꾼으로 몰아세운 이의 진면목이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② [내게는 이름이 없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글: 행길이(한철연 회원)

 

고대의 양극화

 

에피쿠로스가 쾌락주의자가 된 까닭은 그의 시대와 삶이 고통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307년~261년까지 아테네는 46년 간 전쟁과 폭동으로 점철되었다. 아테네는 알렉산더 왕의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하였다. 이후 폴리스 체제에서 유지되었던 민주적 연대의 정신은 점차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칼과 강간의 시대였으며, 살육과 방화, 살해와 약탈이 일상화되던 폭력의 시대였다.

아테네의 위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점령이었다. 그리스 세계에 존재하던 폴리스적 삶의 문화를 붕괴시킨 마케도니아는 노예제 폐지 금지 정책을 관철시켰다. 이는 그리스 민족이 처한 재앙적 위기를 타개할 마지막 탈출구마저 봉쇄해버린 조치였다. 알렉산더의 원정에서의 승리는 노예를 대량으로 공급해주었다. 기득권층은 늘어난 노예를 가지고 거대농장을 운영했으며 경쟁력을 잃은 소규모 토지 소유자들은 몰락을 거듭했다. 전쟁은 중산층의 삶을 무너뜨렸고 양극화는 극심해졌다. 수많은 노예를 거느린 이들의 거대한 생산력에 경쟁할 수 있는 중산 시민이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유시민이 중산층에서 날품팔이 노동을 하는 계층으로 전락하는 경우는 늘어나기만 했다. 이들의 삶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무료 노동을 하는 노예가 흔한데 굳이 노임을 지급하면서 자유시민에게 노동을 시킬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고 아무 일도 얻지 못한 채 떠도는 빈민이 늘어나기만 했다. 한때 폴리스는 빈곤한 자유시민들의 생계를 위해 식량과 임금을 보전해주었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은 곧 고갈되었다. 아테네는 인구 압박을 해결하기 위해 늘어나는 빈민들을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는 기민정책을 취하기도 했다. 이민을 강요받은 이들 중 일부는 할 수 없이 무장 조직을 만들어 노략질을 일삼는 해적이 되기도 했다.

폴리스의 붕괴와 함께 그들의 인생을 지탱해주던 모든 가치와 삶의 문화들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전쟁과 폭력, 기아와 기근을 막아주던 폴리스라는 보호처가 사라지자 사람들은 공적 시민으로서의 연대적 삶을 지속할 수 없었다. 이제는 각자가 알아서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고 안정적 삶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공적 시민으로서의 연대 의식은 사적 개인의 각자도생 의식으로 대체되었다.

 

양극화 시대의 미몽

 

폴리스 체제의 멸망과 경제 위기로 인해 발생한 모든 불행 앞에 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불확실한 것으로 여겨졌다. 모든 것은 인간의 판단과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을 넘어선 우연의 손에 좌우되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신에 대한 맹목적 숭배와 두려움이 기승을 부렸으며, 우연의 여신인 튀케(tyche)를 숭앙하는 풍조가 일반화되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대체로 자연과 사회를 움직이는 법칙을 인간의 이성을 통해 이해하고자 했는데, 이제 인간들은 그러한 태도를 버리고 세계와 인간의 삶을 신적 힘과 우연에 기대 해명하고자 했다. 삶의 안전판이 결여되자 불안의 고통에 휩싸인 사람들은 종교적 미망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되었고 어리석음은 세상을 뒤덮게 된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고통의 시대를 건너기 위한 처방으로 사회 개혁 보다는 개인적 구원을 제시했다. 이것은 그의 시대에 대한 냉정한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미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너무도 참혹한 처지에 있어 사회적 진보나 정의의 회복이라는 구조적 접근으로는 좀처럼 만족되기 어려운 급박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 사회적 개혁과 정의를 외쳐도 힘써 호응해줄 여유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없었고, 제도적 투쟁을 전개하게끔 자극하는 공동체적 가치도 소멸한 지 오래였다. 사회적 변동의 압력에 직면한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어 나 아닌 타인의 삶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고, 공동체적 삶의 연관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인식할 수도 없는 상태에 빠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저 저마다의 극심한 고통과 비참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너 죽고 나 살자’의 사회에서 꿈꿀 수 있는 해방이란 고통을 멀리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① [내게는 이름이 없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글: 행길이

 

편견과 오해

 

시아파와 수니파가 구분되지 않고 이황과 이이가 헛갈리듯이,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늘 퀴레네 학파의 쾌락주의로 오인된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돼지들의 학교’를 만들어 경건한 삶을 조롱하고, 쾌락의 교리를 유포해 인간을 타락시킨다는 루머에 시달리곤 했다. 그의 쾌락주의를 말할라치면, 어떤 사람들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도덕적 결계’를 치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금새 얼굴이 불그레지면서 ‘철학적 야설’을 기대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지만 -벌써부터 재미적어지는데- 에피쿠로스는 야하지 않다. 그는 난봉꾼의 성자라기보다는 정결한 수도자에 가깝다. 물론 그가 인생의 목표를 쾌락에 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쾌락이란 말초적인 게 아니라 기품있는 안락이다. 그는 말초적 쾌락의 어둠에 탐닉하기보다는 빛나는 정신의 안락 속에서 생을 완상하는 것을 권고하였다. 그런 까닭에 루크레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인간의 실존을 수많은 [고통의] 폭풍과 암흑에서 끌어내어, 이루 말할 수 없는 평온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빛의 세계 속에 정착시켰다.”

 

 

고통과 가난

 

에피쿠로스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했다. 그는 일생 동안 극심한 위장 장애를 앓았으며(하루에 음식을 두 번씩 토하곤 하였다), 오랫동안 방광염에 시달리다가 결국 심한 결석 질환으로 인해 절명했다. 너무나 병약한 나머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지내야만 한 적도 많았다. 육체적 고통에서 자유로운 적이 거의 없었던 그였기에 쾌락에 대한 의지는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통에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의 시간 속에서 발견하는 기쁨을 단서로 진정한 쾌락을 추구하였다. 세속의 관점에서 보자면 질병과 가난의 고통을 면치 못하다가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삶에서 행복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죽음에 직면하는 인간의 심정이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삶과 작별’해야 하는 진한 아픔으로 어지럽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사멸의 순간에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고 행복의 기쁨을 발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이 내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 나의 마지막 날이라네. 방광염과 위장병의 고통은 여느 때와 같이 격심하기 이를 데 없지만, 자네와 나누었던 대화의 순간을 떠올리면 어느새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는 게 아닌가(이도메네우스에게 보낸 편지).”

 

그를 괴롭히던 신체적 고통은 치료가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피할래야 회피할 수도 없고, 수단을 통해 제거할 수도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격심한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그것에 집착하여 마음이 흔들리도록 놔두지 않고 그것이 지나가도록 의연히 기다린다면, 어느덧 다른 육체적 쾌감에 의해 그 고통에서 놓여나게 된다. 에피쿠로스가 병마의 고통에 시달릴 때 불현 듯 경험하는 싱그러운 바람과 향긋한 공기, 그리고 갈증과 허기를 채워주는 한모금의 물과 한조각의 빵은 그 어떤 약과 성찬이 주는 쾌감보다도 컸을 것이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데에는 그러한 소박한 쾌감으로도 충분했다. 그래서 그는 신체의 단순한 필요, 기초적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얻게 되는 쾌감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누구나 한번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이 그 정도의 것이라면,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견뎌낼 역량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고통의 순간에만 집착하지 말고 다가올 쾌락을 기다리는 의연함과 용기일 것이다.

 

“고통은 육체에 지속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가장 심한 고통은 아주 잠시 머물며, 쾌락을 능가하는 육체적 고통도 여러 날 지속되지 않는다.”

 

고통이 잠시 잦아들 때 우리는 얼마간의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순간은 고통에 의해 어지럽혀졌던 우리의 몸과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을 경유하면서 맛보게 된 이 쾌락의 순간을 고요히 되새겨본다.

 

“성숙한 사유는 내게 주어진 육체의 한계와 궁극적 목적을 곰곰이 생각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완전한 즐거움의 삶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고통에 대해 사유한 그는 고통을 단지 고통스럽다 여기지 않고 오히려 쾌락의 전조로 전환시킨다.

 

“우리는 많은 고통들이 쾌락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고통을 참으면 더 큰 쾌락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인내의 미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이 말은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식의 무조건적 인내를 강조하는 교리로만 해석되어서는 곤란하다. 그가 강조한 것은 고통의 순간을 쾌락을 맞이하는 과정으로 전환시키는 능동적 사유태도이다. 쾌락은 고통이 있을 때 더욱 크게 느껴진다. 엄청난 목마름과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을 때 먹게 되는 한 모금의 물과 한 조각의 떡은 진수성찬을 능가하는 쾌감을 선사한다. 기아와 갈증의 고통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소찬의 지극한 쾌락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고통은 쾌락을 가능케 해주는 조건이다. 그러므로 고통이란 고통스럽지만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능동적 전환을 통해 우리는 회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쾌락을 발견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가난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논리를 전개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가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난은 큰 부이다. 반면 무제한적인 부는 큰 가난이다.”

 

가난이 커다란 재산으로 여겨질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소소한 기쁨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허안화 감독은 『황금시대』에서 국공내전기 요절한 중국의 작가 샤오홍과 그의 연인 샤오쥔이 살아가던 하얼빈 시절을 묘사하였다. 이들은 한겨울에 난방도 되지 않는 셋집에서 이불도 없이 밤을 지새우고, 빵 한 덩이로 끼니를 때우는 곤궁한 삶을 살아갔다. 그런 그들에게 얼마간의 저녁 외식을 할 수 있는 돈이 생겼다. 장터 허름한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참으로 풍요로워 보였다. 가난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 가난을 단순히 고통으로만 여기고 살아갔다면 소액의 돈이 선사한 커다란 부는 결코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재신이 너무나 많게 되면 일상의 소소한 물질적 행운에서 지극한 쾌락을 얻기란 쉽지가 않다. 오히려 재부를 지키는 데에 전전긍긍하고 손해에 동요하는 일이 많다. 결과적으로 가난한 자가 부자보다 부에서 오는 쾌락을 느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에피쿠로스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남긴다.

 

“가장 큰 부를 소유함에 의해서도, 사람들에게 명예와 존경을 받음에서도, 그리고 한없는 욕망으로부터 생기는 다른 어떤 것들에 의해서도, 마음의 동요가 끝나지 않으며 진정한 기쁨이 생기지도 않는다.”


2편에서 계속… 아래 ⇓

인류 최후의 존재들과 나누는 ‘테스형’의 삶 이야기 ② [내게는 이름이 없다]

인류 최후의 존재들과 나누는 ‘테스형’의 삶 이야기 ②

 

글: 행길이

 

“내가 언제 악법도 법이라고 했냥?!”

 

덩치가 친구들을 모아놓고 시시덕거리며 놀고 있었어요. 얼마 전부터 사이가 틀어진 똘똘이가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가만보니 똘똘이는 고급 브랜드 점퍼를 입고 있군요. 덩치는 똘똘이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야, 똘똘이 너 오랜만이다. 새 옷 샀니? 우린 친한 친구니까 그 옷 좀 같이 나눠 입자. 친구끼리는 모든지 함께 나눠 쓰기로 정했거든.” 똘똘이는 억울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건 내꺼라구.” 그러자 덩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흥, 아까도 말했다시피 친구끼리는 무엇이든 나눠 쓴다는 규칙을 만들었어. 그렇지 얘들아?” 주변의 덩치패들은 킥킥대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는게 어딨어. 그건 부당한 규칙이라구!” 어처구니가 없어진 똘똘이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호오, 부당한 규치~익? 역시 똘똘이는 똑똑해서 어려운 말도 잘 쓰네. 그럼 네가 잘 아는 소크라테스 할아버지가 한 말을 일러주지. ‘악법도 법이다.’ 나쁜 규칙도 지켜야 한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그 옷 내놔.”

‘아니, 힘만 센 덩치가 어느새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지?’ 당황한 똘똘이는 새 옷을 빼앗기고 말았답니다. 힘 없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똘똘이는 생각했어요. ‘정말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이상한 말을 했을까?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부당한 일을 그대로 두고 본 위선자가 되는 건데?’ 똘똘이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1. “널 고발한다. 소크라테스.”

 

아테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행위를 점점 거북하게 여기기 시작했어요. 소크라테스는 고대 민주주의가 자주 빠지게 되는 잘못을 지적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당시 아테네인들은 집단적으로 결정한 사항은 의심하지 말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부당하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태도는 대중의 독재에 아부하는 것일 뿐 진정한 정치는 아니라고 비판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는 반민주주의자로 보인 것이죠.

더구나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의 문답법(dialektike)을 흉내내면서 어른들을 골려먹고 기성 사회에 도전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소크라테스를 따르던 이들은 당시 아테네에서 촉망받았던 젊은이들이었어요. 이들 중 한 명이었던 알키비아데스(Alkibiades)는 적국으로 도망가 아테네를 위기에 빠뜨리는 매국 행위를 하다가 이국에서 암살당했습니다. 아테네인들에게 이것은 충격이었죠. 그들에게 똑같은 일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어요. 아테네 사람들이 보기에 이들을 가만 놔두다가는 사회가 혼란해질 것 같아 보였어요. 그래서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고발했습니다. 아테네인들에게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고유한 정치 전통에 대한 믿음을 흔들고 젊은이들의 머리 속에 불순한 생각을 집어넣은 원흉으로 보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테네의 적이라기보다는 진실한 친구이고자 했어요. 소크라테스는 재판정에 나가 자신을 변론했습니다. 당시에는 아테네 시민이라면 누구나 검사나 변호사가 되어 어떤 사람을 고발하거나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판결은 아테네 시민들의 투표로 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2. “날 사형시키려거든 맘대로 하세요.”

 

그에게 재판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시민들이 진실(진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제 정신을 차리는 것이 더 중요했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재판을 변론장이 아닌 철학적 토론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시민들은 당황스러웠어요. 소크라테스가 이상한 방식으로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배심원의 정서에 호소하면서 무죄 판결을 청하는 수사술(rhetorike)을 펼치지 않았어요.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재판에 임하는 시민들의 영혼에 켜켜이 쌓인 잘못된 상식을 지적하면서 그들을 깨우치려는 변증술을 펼쳐나갔습니다. 이것은 시민들의 비위를 상하게 만들었어요. 당시는 배심원의 판결이 곧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민을 교육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이런 행동은 시민들에게 법 위에 군림하려는 오만함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시민들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었습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여러분은 제가 성가신 질문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그만두면 풀어주겠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제안을 거부합니다. 저는 늘 해오던 대로 말하고 돌아다닐 겁니다. ‘그대들은 재물을 얻기 위해 의논하는 데에는 힘쓰지만 지혜와 영혼이 훌륭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노력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줄 아시오.’라고요. 만일 당신들이 훌륭함을 지니고 있지 못하면서도 그걸 갖고 있는 양 거들먹거리면 저는 당신들에게 끝까지 질문하고 캐묻고 심문할 것입니다. 저는 재물보다는 자기의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설득하고 돌아다닐 것입니다. 이는 제가 여러분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입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저를 무죄 방면하든 유죄 선고를 내리든 맘대로 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저의 행동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몇 번이고 죽는다 해도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시민들이 법의 이름으로 내리는 판결을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것이 정의보다는 재물을 탐하는 정신에 기초하여 내려진 나쁜 판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다수의 힘을 근거로 하여 힘 없는 자를 압박하는 폭력에 다름 아닌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악법도 법인 이상 두말없이 따라야 한다고 말했겠습니까?

 

3. “잘 들으세요, 나는 정의로운 법질서를 존중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롭지 않은 법의 판결은 존중할 마음이 없다고 말한 덕분에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소크라테스보고 몰래 탈옥하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를 거부합니다. 나라에서 내려진 판결이 잘못됐다는 이유로 그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행적은 겉으로 보기에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입장을 내보인 것으로 볼 여지를 줍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는 없어요.

우리는 억울한 판결을 받았다고 생각되면 세 번까지 재판을 받을 수 있어요. 세 번째 재판에서도 진다면 그 판결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세 번에 걸친 재판에서도 부당한 판결은 나올 수 있어요. 과거 우리나라에도 그런 일이 많이 벌어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탈옥을 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악한 판결이 정당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결코 악한 판결을 정의롭다고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존중한 것은 바로 오늘 내려진 악한 판결이 아닙니다. 재판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는 민주적 법제도와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회 질서를 존중하고 신뢰하고 있을 뿐이었어요.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가 순순히 독배를 마신 까닭은 판결의 정당성을 수긍해서가 아니어요. 그가 살아왔고 살고 있었던, 그에게 수많은 권리와 자유를 제공해 주었던 아테네의 정의로운 법질서와 법의 정신을 존중해서였어요. 어렵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의 본래 정신에 대해서 한 번 알아봐야 해요.

 

4. 야수는 죽어야 한다.

 

서양에서 법이라는 것은 서로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표시해 주는 울타리에서 기원하고 있어요. 이것은 힘 센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것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법은 힘의 독점을 막기 위해 마련된 거랍니다. 여기서 법의 정당성이 확보돼요.

넓디 넓은 목초지의 울타리는 혼자서 세우기 힘들죠? 그래서 모두가 힘을 합쳐 울타리를 세웁니다. 법도 마찬가지여요. 공동체 모두의 힘을 합쳐서 법질서를 엮어나가요. 누구든 다른 사람을 함부로 지배해서도 안 되고 해를 끼쳐서도 안 돼요. 법질서는 이런 정의로운 마음을 담아 한땀 한땀 엮은 거랍니다.

그런데 가끔 자기 힘만 믿고 법의 울타리를 넘어서 자기 욕심만 챙기는 이들이 있어요. 이런 이들은 울타리를 넘어서 양을 물어가는 늑대와 같은 취급을 받아요. 그들은 사회의 혼란을 가져오는 야수와 같기에 처벌을 받습니다. 공동체의 약속인 법질서 자체를 무시하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한다는 것은 모두의 적이 될 각오를 하는 것과 같답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영원히 추방하거나 심하면 죽여 버리기도 해요.

 

5.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나는 정의로운 법의 정신을 준수할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양치기 개들 중 몇 마리가 양고기 맛을 알게 돼서 남의 양을 잡아먹고 시치미 뚝 뗄 때는 어떻게 하죠? 동료였던 많은 이들이 야수가 되어 이웃 사람의 양을 탐할 때는 어쩌죠? 당시 아테네 사람들도 법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위협하거나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는 야수 같은 짓을 종종 벌였답니다. 이것은 법질서 자체가 악해서 벌어진 문제가 아니어요. 법질서를 악용하는 이들의 부도덕함이 문제죠.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인들이 잠시 현혹된 부도덕한 정신을 고발하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소크라테스에게 아테네의 법질서는 애초부터 악하지 않아요. 그는 아테네인들의 법질서가 정의를 지향하고 있다고 믿었어요. 그는 아테네인들이 자기에게 부당한 판결을 내렸다고 해서 아테네의 법 원칙이 악하다고 주장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테네인들이 정의로운 법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당한 판결이 나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아테네의 법을 준수합니다. 그것이 악한 법이라도 법이기에 따른 게 아니었어요. 아테네의 정의로운 법 원칙과 법 정신을 존경하고 그것의 회복을 신뢰했기 때문에 독배를 마신 거여요. 법 원칙이 나쁜 게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이해 못한 사람들이 잘못을 범했을 뿐이라는 거죠. 그는 뼈 속까지 아테네의 정치 및 법질서를 신뢰한 사람이었어요.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87년

 

6. 잘 가요, 소크라테스

 

사형 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작별을 고합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어요.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갈테죠. 하지만 우리들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곳으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신을 제외하곤 말이죠.”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으로서는 너무도 담담한 말입니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지도, 아테네인들의 무지를 깨닫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에게 실망하지도 타인을 원망하지도 않았죠. 소크라테스는 어느 누구보다도 지혜로웠지만 자기의 지혜를 내심 자랑스러워하며 과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재판에서의 패배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고귀하고도 용감한 모습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멋진 사람이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밝혀주는 사람이 되길 바래요. 안녕 여러분, 안녕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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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후의 존재들과 나누는 ‘테스형’의 삶 이야기 ① [내게는 이름이 없다]

인류 최후의 존재들과 나누는 ‘테스형’의 삶 이야기 ①

 

글: 행길이

 

아, ‘테스형!’

 

‘네 주제를 알아!!’

 

똘똘이에게는 요즘 한창 연예인이 될 꿈에 부푼 덩치라는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어느 날 덩치는 똘똘이 앞에서 그동안 열심히 익힌 솜씨를 보여준 후 이렇게 말합니다. “어때? 이만하면 이번에 열리는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적어도 톱 텐에는 들 수 있겠지?” 내심 덩치의 솜씨에 감탄하던 똘똘이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배알이 뒤틀려서 이렇게 비아냥댑니다. “흥, 소크라테스가 한 명언도 몰라? 네 자신을 알아야지. 주제 파악이나 좀 하라구. 무식한 딴따라같으니라구.” 심술궂은 이 말에 화가 난 덩치는 주먹을 날렸어요. 똘똘이는 ‘객관적’ 사실을 알려준 호의를 주먹질로 보답한 덩치가 원망스러워요. 순간 똘똘이는 무지한 아테네 시민들에게 느꼈던 소크라테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역시 진리를 외치는 자는 고독한 거야.” 이렇게 되뇌이며 똘똘이는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친구의 무지함을 깨우쳐주려 했다가 우정을 해친 똘똘이는 과연 지혜로운 걸까요? 그는 과연 무지에서 벗어난 이일까요? 아무래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참뜻은 똘똘이가 생각하는 의미가 아닌 것 같군요.

 

1. ‘너 자신을 알라’=무지(無知)의 자각(自覺)

 

옛날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천 4백 여 년 전, 지중해 유역의 머나먼 나라 그리스의 아테네라는 도시에 소크라테스(Sokrates)라는 현자가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주 못생겼으며 구질구질한 옷차림으로 매일같이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면서 곤란한 질문으로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말입니다. 바가지를 긁던 그의 아내 크산팁페(Xanthippe)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죠. 하지만 우리에게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이 말은 흔히 “함부로 까불지 말고 네 주제 파악이나 해라”라거나 “나쁜 규칙이라도 그것이 규칙인 이상 잔말 말고 지켜야 해”라는 식으로 해석되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소크라테스가 이런 심술궂은 말을 했다는 게 믿어지나요? 정말 그는 이 두 ‘명언’을 남긴 사람일까요?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른들은 아마 “무슨 소리야!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구. 난 그걸 교과서에서 배웠는 걸!!”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틀렸답니다. 두 말 모두 소크라테스가 한 게 아니어요. 소크라테스가 남에게 면박이나 주고 부당한 규범을 강요하는 영감탱이였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존경과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테니까요.

원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늘 되뇌이고 있었던 상식적인 격언이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사용하는 사람들이나 그것이 활용되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집니다. 델포이(Delphoi) 신전의 무녀들은 신전 입구에 이 말을 걸어놓고 신탁을 요청하는 이들의 금언으로 삼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당시 사람들과 다르게 해석하면서 자기 삶의 경구로 삼습니다. 그는 신전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를 ‘자기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고 있어라’는 의미로 풀이했죠. 이것을 어려운 말로 ‘무지(無知)의 자각(自覺)’이라고 한답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지혜로운 자라고 칭송을 받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실제로는 무지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의 가르침을 경건하게 따르는 삶을 살고자 했던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자각’하라는 신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델포이 신전의 가르침대로 살라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남달랐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한 원인이었죠.

‘소크라테스’ 출처: 위키피디아

 

2. 델포이 신탁

 

아마도 조각가였을 거라고 짐작되는 소크라테스는 당시에 특출한 지혜를 가진 이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 카이레폰(Chairephon)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찾아가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신탁을 이랬습니다.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 친구로부터 신탁의 내용을 전달받은 소크라테스는 기뻐하기는커녕 혼란에 빠졌어요.

 

“내가 지혜롭지 않다는 것은 나 자신이 잘 아는데, 신은 나를 가장 지혜로운 자로 지목하다니…. 이건 대체 무슨 뜻일까? 하지만 신이 거짓말을 한다거나 틀린 말을 할 리는 없을 테고… .”

 

자기는 무지하다고 믿고 있었지만 소크라테스는 일단 신의 말대로 살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신앙심 깊은 소크라테스는 신이 자신을 지혜로운 자로 보고 있는 이상 이 말을 거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신의 뜻대로 살면서도 자신의 의혹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을 찾아가자. 그래서 그들이 정말 지혜로운지 시험해보자.”

 

그는 우선 가장 지혜롭다는 정치인을 찾아가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인 중 누구도 지혜로운 답변을 내놓지는 못했어요. 이어서 그는 라케스(Laches)와 니키아스(Nikias)와 같은 이름난 장군들을 찾아다니면서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지 알면 가르쳐 달라며 여러 가지를 끈덕지게 묻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소크라테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있는 사람이 아님이 판명되었어요. 이어서 그는 작가들에게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당시 작가들은 가장 훌륭한 통찰력을 지닌 이들로 여겨졌어요. 하지만 이들도 자기가 쓴 작품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자기 작품을 지혜를 가지고 짓는 게 아니라 타고난 끼나 우연히 얻게 되는 영감에 의해서 지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속 시원한 답을 내놓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탁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가 생각하기에 자기는 영명한 지혜는 갖고 있지는 않지만 최소한 지혜롭다고 거드름 피우는 사람들이 모르는 한 가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이라는 겸손한 지혜를 다른 사람들도 갖도록 권하면서 돌아다녔어요. 사람들이 그의 깨달음을 쉽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를 이용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신전의 경구를 ‘무지의 자각’이라는 철학적 성찰로 해석한 거죠. “우리들은 스스로 지혜롭고, 탁월하며, 용기있는 이들이라고 자부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그런 우리의 모습을 깨닫고 진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함께 진지하게 노력합시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깨달음이었어요.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을 통해 스스로를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하고, 더 건강한 아테네 사회를 위해 사람들이 노력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3. 전쟁과 내전

 

소크라테스가 이런 충고를 하고자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이웃 나라 스파르타와 전쟁 중이었어요. 한 때 대제국 페르시아의 침략을 함께 물리친 두 동맹국은 강력한 적을 물리치자 서로 세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27년 간 계속된 펠로폰네소스전쟁이 바로 그것이었어요. 이 전쟁에서 아테네는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약소국을 침공하는 등 부당한 짓을 여러 차례 저질렀습니다. 그 와중에 국론은 분열되고 민심은 사나워지기 시작했어요. 내란도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고향을 떠나야 했답니다. 사람들은 이제 정의보다는 이기심과 욕망을 채우는 데에 급급해졌어요. 아테네인들이 자랑했던 빛나는 자유의 영혼은 점점 부패하고 추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테네인들의 정신이 부패하여 사회가 무너져 가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답니다. 아테네를 사랑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신전의 경구를 빌어 영혼의 빛을 잃고 헤매고 있는 아테네인들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기를 바랐던 겁니다.

 

4. “힘 센 놈이 정의로운 거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아테네 사람들은 자유로운 삶을 위한 연합이라는 정의로운 정신을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점차 오직 힘만이 정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힘 있는 자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곧 정의로운 행위라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법과 제도라는 것도 결국에는 권력(힘)을 가진 이가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휘두르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거죠.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Thrasymachos)와의 논쟁에서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조목조목 지적합니다. 정의의 의미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거듭할수록 자기의 무지가 드러난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트리다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립니다. 분명히 현실에서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이 들어맞는 것 같은데, 소크라테스와 함께 논리적으로 따지고 보니 그것은 틀린 게 분명해보였던 까닭입니다.

아마도 소크라테스와 정의에 대해서 대화하는 아테네 사람이었다면 트라시마코스가 아닌 누구라도 화를 내며 돌아섰을 것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자국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져 이웃나라를 부당하게 멸망시키는 일을 저질러 놓고도 그것이 정의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른말을 하는 소크라테스가 얄미워보였겠죠.

 

5. “나는 굼뜬 말을 깨우는 등에라네”

 

소크라테스의 대화 여행이 거듭될수록 사람들은 점점 소크라테스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지혜롭고 덕망있는 자로 한껏 뽐내던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질문 공세를 받고 순간 전기에 감전된 듯이 멍해져 버렸답니다. 그리곤 어느새 무지한 자로 전락하게 된 자기를 발견하게 되죠. 이렇게 질문을 통해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여 진지한 탐구의 자세를 갖게 하는 대화의 방법을 문답법(dialektik)이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 걸려든 이들은 황급히 말꼬리를 잡아 소크라테스를 논박해 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공격을 미끄러운 뱀장어 마냥 요리조리 피해가곤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밉살스런 전기뱀장어같이 보였어요. 소크라테스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가 점점 깊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믿음을 비웃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니었어요. 신탁의 말을 확인해보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우선은 집단적 이기주의에 눈이 멀어가고 있는 아테네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죠.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인 특유의 위대한 정신을 잊고 점점 자신의 적이었던 페르시아의 추악함을 닮아가는 아테네인들이 걱정스러웠어요. 그에게 아테네는 ‘혈통은 좋지만 이제는 욕심 때문에 살만 뒤룩뒤룩 쪄서 잠만 자려고 하는 말’ 같아 보였어요. 소크라테스는 이 뚱뚱이 말을 깨워 다시 뛰게 하기 위해 따끔한 자극을 선사하는 등에가 되기로 했답니다.

 

6.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의미

 

여러분도 이제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게 되었을 테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지어낸 게 아닙니다. 다만 그는 자기의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리스(헬라스)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델포이 신전의 경구를 활용했을 뿐이었어요.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사람들이 무지를 스스로 깨달아 다시금 영혼의 눈을 떠서 훌륭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도록 유도하고 싶었어요. ‘우리 앞에 있는 문제의 해답은 나도 잘 모르고 당신도 잘 모릅니다. 우리 아는 척은 이제 그만둡시다. 겸손한 마음으로 이 문제의 해답을 함께 고민해보는 친구가 되자구요.’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그러니 이제는 친구를 비아냥대거나 비웃는 마음에서 이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되겠죠?

 

②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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