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없는(?) 행길이의 이야기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① [내게는 이름이 없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글: 행길이

 

편견과 오해

 

시아파와 수니파가 구분되지 않고 이황과 이이가 헛갈리듯이,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은 늘 퀴레네 학파의 쾌락주의로 오인된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돼지들의 학교’를 만들어 경건한 삶을 조롱하고, 쾌락의 교리를 유포해 인간을 타락시킨다는 루머에 시달리곤 했다. 그의 쾌락주의를 말할라치면, 어떤 사람들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도덕적 결계’를 치는가 하면, 다른 이들은 금새 얼굴이 불그레지면서 ‘철학적 야설’을 기대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지만 -벌써부터 재미적어지는데- 에피쿠로스는 야하지 않다. 그는 난봉꾼의 성자라기보다는 정결한 수도자에 가깝다. 물론 그가 인생의 목표를 쾌락에 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쾌락이란 말초적인 게 아니라 기품있는 안락이다. 그는 말초적 쾌락의 어둠에 탐닉하기보다는 빛나는 정신의 안락 속에서 생을 완상하는 것을 권고하였다. 그런 까닭에 루크레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는 인간의 실존을 수많은 [고통의] 폭풍과 암흑에서 끌어내어, 이루 말할 수 없는 평온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빛의 세계 속에 정착시켰다.”

 

 

고통과 가난

 

에피쿠로스의 삶은 고통으로 가득했다. 그는 일생 동안 극심한 위장 장애를 앓았으며(하루에 음식을 두 번씩 토하곤 하였다), 오랫동안 방광염에 시달리다가 결국 심한 결석 질환으로 인해 절명했다. 너무나 병약한 나머지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지내야만 한 적도 많았다. 육체적 고통에서 자유로운 적이 거의 없었던 그였기에 쾌락에 대한 의지는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통에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의 시간 속에서 발견하는 기쁨을 단서로 진정한 쾌락을 추구하였다. 세속의 관점에서 보자면 질병과 가난의 고통을 면치 못하다가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삶에서 행복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죽음에 직면하는 인간의 심정이란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삶과 작별’해야 하는 진한 아픔으로 어지럽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사멸의 순간에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고 행복의 기쁨을 발견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이 내 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 나의 마지막 날이라네. 방광염과 위장병의 고통은 여느 때와 같이 격심하기 이를 데 없지만, 자네와 나누었던 대화의 순간을 떠올리면 어느새 내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는 게 아닌가(이도메네우스에게 보낸 편지).”

 

그를 괴롭히던 신체적 고통은 치료가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피할래야 회피할 수도 없고, 수단을 통해 제거할 수도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격심한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그것에 집착하여 마음이 흔들리도록 놔두지 않고 그것이 지나가도록 의연히 기다린다면, 어느덧 다른 육체적 쾌감에 의해 그 고통에서 놓여나게 된다. 에피쿠로스가 병마의 고통에 시달릴 때 불현 듯 경험하는 싱그러운 바람과 향긋한 공기, 그리고 갈증과 허기를 채워주는 한모금의 물과 한조각의 빵은 그 어떤 약과 성찬이 주는 쾌감보다도 컸을 것이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고통에서 해방되는 데에는 그러한 소박한 쾌감으로도 충분했다. 그래서 그는 신체의 단순한 필요, 기초적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얻게 되는 쾌감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 누구나 한번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우리가 겪는 고통이 그 정도의 것이라면,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견뎌낼 역량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고통의 순간에만 집착하지 말고 다가올 쾌락을 기다리는 의연함과 용기일 것이다.

 

“고통은 육체에 지속적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가장 심한 고통은 아주 잠시 머물며, 쾌락을 능가하는 육체적 고통도 여러 날 지속되지 않는다.”

 

고통이 잠시 잦아들 때 우리는 얼마간의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순간은 고통에 의해 어지럽혀졌던 우리의 몸과 마음을 평온하게 해준다. 에피쿠로스는 고통을 경유하면서 맛보게 된 이 쾌락의 순간을 고요히 되새겨본다.

 

“성숙한 사유는 내게 주어진 육체의 한계와 궁극적 목적을 곰곰이 생각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완전한 즐거움의 삶이 무엇인지 알게 해준다.”

 

고통에 대해 사유한 그는 고통을 단지 고통스럽다 여기지 않고 오히려 쾌락의 전조로 전환시킨다.

 

“우리는 많은 고통들이 쾌락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랫동안 고통을 참으면 더 큰 쾌락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인내의 미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이 말은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식의 무조건적 인내를 강조하는 교리로만 해석되어서는 곤란하다. 그가 강조한 것은 고통의 순간을 쾌락을 맞이하는 과정으로 전환시키는 능동적 사유태도이다. 쾌락은 고통이 있을 때 더욱 크게 느껴진다. 엄청난 목마름과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을 때 먹게 되는 한 모금의 물과 한 조각의 떡은 진수성찬을 능가하는 쾌감을 선사한다. 기아와 갈증의 고통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소찬의 지극한 쾌락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고통은 쾌락을 가능케 해주는 조건이다. 그러므로 고통이란 고통스럽지만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능동적 전환을 통해 우리는 회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쾌락을 발견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가난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논리를 전개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는 가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난은 큰 부이다. 반면 무제한적인 부는 큰 가난이다.”

 

가난이 커다란 재산으로 여겨질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소소한 기쁨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허안화 감독은 『황금시대』에서 국공내전기 요절한 중국의 작가 샤오홍과 그의 연인 샤오쥔이 살아가던 하얼빈 시절을 묘사하였다. 이들은 한겨울에 난방도 되지 않는 셋집에서 이불도 없이 밤을 지새우고, 빵 한 덩이로 끼니를 때우는 곤궁한 삶을 살아갔다. 그런 그들에게 얼마간의 저녁 외식을 할 수 있는 돈이 생겼다. 장터 허름한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참으로 풍요로워 보였다. 가난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 가난을 단순히 고통으로만 여기고 살아갔다면 소액의 돈이 선사한 커다란 부는 결코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재신이 너무나 많게 되면 일상의 소소한 물질적 행운에서 지극한 쾌락을 얻기란 쉽지가 않다. 오히려 재부를 지키는 데에 전전긍긍하고 손해에 동요하는 일이 많다. 결과적으로 가난한 자가 부자보다 부에서 오는 쾌락을 느낄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에피쿠로스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남긴다.

 

“가장 큰 부를 소유함에 의해서도, 사람들에게 명예와 존경을 받음에서도, 그리고 한없는 욕망으로부터 생기는 다른 어떤 것들에 의해서도, 마음의 동요가 끝나지 않으며 진정한 기쁨이 생기지도 않는다.”


 

인류 최후의 존재들과 나누는 ‘테스형’의 삶 이야기 ② [내게는 이름이 없다]

인류 최후의 존재들과 나누는 ‘테스형’의 삶 이야기 ②

 

글: 행길이

 

“내가 언제 악법도 법이라고 했냥?!”

 

덩치가 친구들을 모아놓고 시시덕거리며 놀고 있었어요. 얼마 전부터 사이가 틀어진 똘똘이가 그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가만보니 똘똘이는 고급 브랜드 점퍼를 입고 있군요. 덩치는 똘똘이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야, 똘똘이 너 오랜만이다. 새 옷 샀니? 우린 친한 친구니까 그 옷 좀 같이 나눠 입자. 친구끼리는 모든지 함께 나눠 쓰기로 정했거든.” 똘똘이는 억울했어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건 내꺼라구.” 그러자 덩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흥, 아까도 말했다시피 친구끼리는 무엇이든 나눠 쓴다는 규칙을 만들었어. 그렇지 얘들아?” 주변의 덩치패들은 킥킥대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는게 어딨어. 그건 부당한 규칙이라구!” 어처구니가 없어진 똘똘이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호오, 부당한 규치~익? 역시 똘똘이는 똑똑해서 어려운 말도 잘 쓰네. 그럼 네가 잘 아는 소크라테스 할아버지가 한 말을 일러주지. ‘악법도 법이다.’ 나쁜 규칙도 지켜야 한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그 옷 내놔.”

‘아니, 힘만 센 덩치가 어느새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잘 알게 되었지?’ 당황한 똘똘이는 새 옷을 빼앗기고 말았답니다. 힘 없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똘똘이는 생각했어요. ‘정말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는 이상한 말을 했을까? 그렇다면 소크라테스는 부당한 일을 그대로 두고 본 위선자가 되는 건데?’ 똘똘이는 혼란스러워졌습니다.

 

1. “널 고발한다. 소크라테스.”

 

아테네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행위를 점점 거북하게 여기기 시작했어요. 소크라테스는 고대 민주주의가 자주 빠지게 되는 잘못을 지적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당시 아테네인들은 집단적으로 결정한 사항은 의심하지 말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부당하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태도는 대중의 독재에 아부하는 것일 뿐 진정한 정치는 아니라고 비판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다수의 의견에 반대하는 반민주주의자로 보인 것이죠.

더구나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의 문답법(dialektike)을 흉내내면서 어른들을 골려먹고 기성 사회에 도전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소크라테스를 따르던 이들은 당시 아테네에서 촉망받았던 젊은이들이었어요. 이들 중 한 명이었던 알키비아데스(Alkibiades)는 적국으로 도망가 아테네를 위기에 빠뜨리는 매국 행위를 하다가 이국에서 암살당했습니다. 아테네인들에게 이것은 충격이었죠. 그들에게 똑같은 일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어요. 아테네 사람들이 보기에 이들을 가만 놔두다가는 사회가 혼란해질 것 같아 보였어요. 그래서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고발했습니다. 아테네인들에게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고유한 정치 전통에 대한 믿음을 흔들고 젊은이들의 머리 속에 불순한 생각을 집어넣은 원흉으로 보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테네의 적이라기보다는 진실한 친구이고자 했어요. 소크라테스는 재판정에 나가 자신을 변론했습니다. 당시에는 아테네 시민이라면 누구나 검사나 변호사가 되어 어떤 사람을 고발하거나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판결은 아테네 시민들의 투표로 내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2. “날 사형시키려거든 맘대로 하세요.”

 

그에게 재판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시민들이 진실(진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제 정신을 차리는 것이 더 중요했죠.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재판을 변론장이 아닌 철학적 토론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시민들은 당황스러웠어요. 소크라테스가 이상한 방식으로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배심원의 정서에 호소하면서 무죄 판결을 청하는 수사술(rhetorike)을 펼치지 않았어요. 오히려 소크라테스는 재판에 임하는 시민들의 영혼에 켜켜이 쌓인 잘못된 상식을 지적하면서 그들을 깨우치려는 변증술을 펼쳐나갔습니다. 이것은 시민들의 비위를 상하게 만들었어요. 당시는 배심원의 판결이 곧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민을 교육하려는 소크라테스의 이런 행동은 시민들에게 법 위에 군림하려는 오만함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시민들의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었습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여러분은 제가 성가신 질문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그만두면 풀어주겠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제안을 거부합니다. 저는 늘 해오던 대로 말하고 돌아다닐 겁니다. ‘그대들은 재물을 얻기 위해 의논하는 데에는 힘쓰지만 지혜와 영혼이 훌륭해지는 것에 대해서는 노력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줄 아시오.’라고요. 만일 당신들이 훌륭함을 지니고 있지 못하면서도 그걸 갖고 있는 양 거들먹거리면 저는 당신들에게 끝까지 질문하고 캐묻고 심문할 것입니다. 저는 재물보다는 자기의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설득하고 돌아다닐 것입니다. 이는 제가 여러분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봉사입니다. 아테네인 여러분! 저를 무죄 방면하든 유죄 선고를 내리든 맘대로 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저의 행동은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몇 번이고 죽는다 해도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시민들이 법의 이름으로 내리는 판결을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것이 정의보다는 재물을 탐하는 정신에 기초하여 내려진 나쁜 판결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이 다수의 힘을 근거로 하여 힘 없는 자를 압박하는 폭력에 다름 아닌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악법도 법인 이상 두말없이 따라야 한다고 말했겠습니까?

 

3. “잘 들으세요, 나는 정의로운 법질서를 존중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정의롭지 않은 법의 판결은 존중할 마음이 없다고 말한 덕분에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소크라테스보고 몰래 탈옥하라고 권합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를 거부합니다. 나라에서 내려진 판결이 잘못됐다는 이유로 그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행적은 겉으로 보기에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입장을 내보인 것으로 볼 여지를 줍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는 없어요.

우리는 억울한 판결을 받았다고 생각되면 세 번까지 재판을 받을 수 있어요. 세 번째 재판에서도 진다면 그 판결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세 번에 걸친 재판에서도 부당한 판결은 나올 수 있어요. 과거 우리나라에도 그런 일이 많이 벌어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탈옥을 하지 않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악한 판결이 정당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결코 악한 판결을 정의롭다고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들이 존중한 것은 바로 오늘 내려진 악한 판결이 아닙니다. 재판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는 민주적 법제도와 그것을 가능하게 한 사회 질서를 존중하고 신뢰하고 있을 뿐이었어요.

소크라테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가 순순히 독배를 마신 까닭은 판결의 정당성을 수긍해서가 아니어요. 그가 살아왔고 살고 있었던, 그에게 수많은 권리와 자유를 제공해 주었던 아테네의 정의로운 법질서와 법의 정신을 존중해서였어요. 어렵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의 본래 정신에 대해서 한 번 알아봐야 해요.

 

4. 야수는 죽어야 한다.

 

서양에서 법이라는 것은 서로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표시해 주는 울타리에서 기원하고 있어요. 이것은 힘 센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것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법은 힘의 독점을 막기 위해 마련된 거랍니다. 여기서 법의 정당성이 확보돼요.

넓디 넓은 목초지의 울타리는 혼자서 세우기 힘들죠? 그래서 모두가 힘을 합쳐 울타리를 세웁니다. 법도 마찬가지여요. 공동체 모두의 힘을 합쳐서 법질서를 엮어나가요. 누구든 다른 사람을 함부로 지배해서도 안 되고 해를 끼쳐서도 안 돼요. 법질서는 이런 정의로운 마음을 담아 한땀 한땀 엮은 거랍니다.

그런데 가끔 자기 힘만 믿고 법의 울타리를 넘어서 자기 욕심만 챙기는 이들이 있어요. 이런 이들은 울타리를 넘어서 양을 물어가는 늑대와 같은 취급을 받아요. 그들은 사회의 혼란을 가져오는 야수와 같기에 처벌을 받습니다. 공동체의 약속인 법질서 자체를 무시하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한다는 것은 모두의 적이 될 각오를 하는 것과 같답니다. 그래서 공동체에서 영원히 추방하거나 심하면 죽여 버리기도 해요.

 

5. “다시 한 번 말합니다. 나는 정의로운 법의 정신을 준수할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양치기 개들 중 몇 마리가 양고기 맛을 알게 돼서 남의 양을 잡아먹고 시치미 뚝 뗄 때는 어떻게 하죠? 동료였던 많은 이들이 야수가 되어 이웃 사람의 양을 탐할 때는 어쩌죠? 당시 아테네 사람들도 법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위협하거나 다른 나라를 멸망시키는 야수 같은 짓을 종종 벌였답니다. 이것은 법질서 자체가 악해서 벌어진 문제가 아니어요. 법질서를 악용하는 이들의 부도덕함이 문제죠.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인들이 잠시 현혹된 부도덕한 정신을 고발하고 싶었을 뿐이었어요.

소크라테스에게 아테네의 법질서는 애초부터 악하지 않아요. 그는 아테네인들의 법질서가 정의를 지향하고 있다고 믿었어요. 그는 아테네인들이 자기에게 부당한 판결을 내렸다고 해서 아테네의 법 원칙이 악하다고 주장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아테네인들이 정의로운 법 원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당한 판결이 나왔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는 아테네의 법을 준수합니다. 그것이 악한 법이라도 법이기에 따른 게 아니었어요. 아테네의 정의로운 법 원칙과 법 정신을 존경하고 그것의 회복을 신뢰했기 때문에 독배를 마신 거여요. 법 원칙이 나쁜 게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이해 못한 사람들이 잘못을 범했을 뿐이라는 거죠. 그는 뼈 속까지 아테네의 정치 및 법질서를 신뢰한 사람이었어요.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87년

 

6. 잘 가요, 소크라테스

 

사형 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작별을 고합니다.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어요.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갈테죠. 하지만 우리들 중 어느 쪽이 더 좋은 곳으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답니다. 신을 제외하곤 말이죠.”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으로서는 너무도 담담한 말입니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지도, 아테네인들의 무지를 깨닫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에게 실망하지도 타인을 원망하지도 않았죠. 소크라테스는 어느 누구보다도 지혜로웠지만 자기의 지혜를 내심 자랑스러워하며 과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재판에서의 패배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어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고귀하고도 용감한 모습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멋진 사람이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밝혀주는 사람이 되길 바래요. 안녕 여러분, 안녕 소크라테스.


1편 가기

인류 최후의 존재들과 나누는 ‘테스형’의 삶 이야기 ① [내게는 이름이 없다]

인류 최후의 존재들과 나누는 ‘테스형’의 삶 이야기 ①

 

글: 행길이

 

아, ‘테스형!’

 

‘네 주제를 알아!!’

 

똘똘이에게는 요즘 한창 연예인이 될 꿈에 부푼 덩치라는 친한 친구가 있습니다. 어느 날 덩치는 똘똘이 앞에서 그동안 열심히 익힌 솜씨를 보여준 후 이렇게 말합니다. “어때? 이만하면 이번에 열리는 TV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적어도 톱 텐에는 들 수 있겠지?” 내심 덩치의 솜씨에 감탄하던 똘똘이는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배알이 뒤틀려서 이렇게 비아냥댑니다. “흥, 소크라테스가 한 명언도 몰라? 네 자신을 알아야지. 주제 파악이나 좀 하라구. 무식한 딴따라같으니라구.” 심술궂은 이 말에 화가 난 덩치는 주먹을 날렸어요. 똘똘이는 ‘객관적’ 사실을 알려준 호의를 주먹질로 보답한 덩치가 원망스러워요. 순간 똘똘이는 무지한 아테네 시민들에게 느꼈던 소크라테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어요. “역시 진리를 외치는 자는 고독한 거야.” 이렇게 되뇌이며 똘똘이는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친구의 무지함을 깨우쳐주려 했다가 우정을 해친 똘똘이는 과연 지혜로운 걸까요? 그는 과연 무지에서 벗어난 이일까요? 아무래도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참뜻은 똘똘이가 생각하는 의미가 아닌 것 같군요.

 

1. ‘너 자신을 알라’=무지(無知)의 자각(自覺)

 

옛날 아주 먼 옛날,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천 4백 여 년 전, 지중해 유역의 머나먼 나라 그리스의 아테네라는 도시에 소크라테스(Sokrates)라는 현자가 살았습니다. 여러분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아주 못생겼으며 구질구질한 옷차림으로 매일같이 시장 바닥을 돌아다니면서 곤란한 질문으로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는 식의 이야기말입니다. 바가지를 긁던 그의 아내 크산팁페(Xanthippe)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죠. 하지만 우리에게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이 말은 흔히 “함부로 까불지 말고 네 주제 파악이나 해라”라거나 “나쁜 규칙이라도 그것이 규칙인 이상 잔말 말고 지켜야 해”라는 식으로 해석되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소크라테스가 이런 심술궂은 말을 했다는 게 믿어지나요? 정말 그는 이 두 ‘명언’을 남긴 사람일까요? 이런 질문을 한다면 어른들은 아마 “무슨 소리야!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구. 난 그걸 교과서에서 배웠는 걸!!”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틀렸답니다. 두 말 모두 소크라테스가 한 게 아니어요. 소크라테스가 남에게 면박이나 주고 부당한 규범을 강요하는 영감탱이였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존경과 사랑을 받지는 못했을테니까요.

원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만들어 낸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당시 그리스 사람들이 늘 되뇌이고 있었던 상식적인 격언이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사용하는 사람들이나 그것이 활용되는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달라집니다. 델포이(Delphoi) 신전의 무녀들은 신전 입구에 이 말을 걸어놓고 신탁을 요청하는 이들의 금언으로 삼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당시 사람들과 다르게 해석하면서 자기 삶의 경구로 삼습니다. 그는 신전의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를 ‘자기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고 있어라’는 의미로 풀이했죠. 이것을 어려운 말로 ‘무지(無知)의 자각(自覺)’이라고 한답니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지혜로운 자라고 칭송을 받던 사람들의 대부분은 실제로는 무지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의 가르침을 경건하게 따르는 삶을 살고자 했던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자각’하라는 신의 뜻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델포이 신전의 가르침대로 살라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남달랐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미움을 사게 한 원인이었죠.

‘소크라테스’ 출처: 위키피디아

 

2. 델포이 신탁

 

아마도 조각가였을 거라고 짐작되는 소크라테스는 당시에 특출한 지혜를 가진 이로도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 카이레폰(Chairephon)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찾아가 소크라테스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신탁을 이랬습니다.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 친구로부터 신탁의 내용을 전달받은 소크라테스는 기뻐하기는커녕 혼란에 빠졌어요.

 

“내가 지혜롭지 않다는 것은 나 자신이 잘 아는데, 신은 나를 가장 지혜로운 자로 지목하다니…. 이건 대체 무슨 뜻일까? 하지만 신이 거짓말을 한다거나 틀린 말을 할 리는 없을 테고… .”

 

자기는 무지하다고 믿고 있었지만 소크라테스는 일단 신의 말대로 살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신앙심 깊은 소크라테스는 신이 자신을 지혜로운 자로 보고 있는 이상 이 말을 거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신의 뜻대로 살면서도 자신의 의혹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을 찾아가자. 그래서 그들이 정말 지혜로운지 시험해보자.”

 

그는 우선 가장 지혜롭다는 정치인을 찾아가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인 중 누구도 지혜로운 답변을 내놓지는 못했어요. 이어서 그는 라케스(Laches)와 니키아스(Nikias)와 같은 이름난 장군들을 찾아다니면서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지 알면 가르쳐 달라며 여러 가지를 끈덕지게 묻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소크라테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있는 사람이 아님이 판명되었어요. 이어서 그는 작가들에게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당시 작가들은 가장 훌륭한 통찰력을 지닌 이들로 여겨졌어요. 하지만 이들도 자기가 쓴 작품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자기 작품을 지혜를 가지고 짓는 게 아니라 타고난 끼나 우연히 얻게 되는 영감에 의해서 지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속 시원한 답을 내놓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탁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어요. 그가 생각하기에 자기는 영명한 지혜는 갖고 있지는 않지만 최소한 지혜롭다고 거드름 피우는 사람들이 모르는 한 가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이라는 겸손한 지혜를 다른 사람들도 갖도록 권하면서 돌아다녔어요. 사람들이 그의 깨달음을 쉽게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를 이용했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신전의 경구를 ‘무지의 자각’이라는 철학적 성찰로 해석한 거죠. “우리들은 스스로 지혜롭고, 탁월하며, 용기있는 이들이라고 자부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요. 그런 우리의 모습을 깨닫고 진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함께 진지하게 노력합시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깨달음이었어요.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자각을 통해 스스로를 되돌아볼 기회를 제공하고, 더 건강한 아테네 사회를 위해 사람들이 노력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거예요.

 

3. 전쟁과 내전

 

소크라테스가 이런 충고를 하고자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아테네는 이웃 나라 스파르타와 전쟁 중이었어요. 한 때 대제국 페르시아의 침략을 함께 물리친 두 동맹국은 강력한 적을 물리치자 서로 세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27년 간 계속된 펠로폰네소스전쟁이 바로 그것이었어요. 이 전쟁에서 아테네는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약소국을 침공하는 등 부당한 짓을 여러 차례 저질렀습니다. 그 와중에 국론은 분열되고 민심은 사나워지기 시작했어요. 내란도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고향을 떠나야 했답니다. 사람들은 이제 정의보다는 이기심과 욕망을 채우는 데에 급급해졌어요. 아테네인들이 자랑했던 빛나는 자유의 영혼은 점점 부패하고 추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테네인들의 정신이 부패하여 사회가 무너져 가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답니다. 아테네를 사랑한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신전의 경구를 빌어 영혼의 빛을 잃고 헤매고 있는 아테네인들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기를 바랐던 겁니다.

 

4. “힘 센 놈이 정의로운 거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아테네 사람들은 자유로운 삶을 위한 연합이라는 정의로운 정신을 점점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점차 오직 힘만이 정의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죠. 힘 있는 자가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곧 정의로운 행위라는 것입니다. 정의로운 법과 제도라는 것도 결국에는 권력(힘)을 가진 이가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 휘두르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거죠.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Thrasymachos)와의 논쟁에서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조목조목 지적합니다. 정의의 의미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거듭할수록 자기의 무지가 드러난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트리다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립니다. 분명히 현실에서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이 들어맞는 것 같은데, 소크라테스와 함께 논리적으로 따지고 보니 그것은 틀린 게 분명해보였던 까닭입니다.

아마도 소크라테스와 정의에 대해서 대화하는 아테네 사람이었다면 트라시마코스가 아닌 누구라도 화를 내며 돌아섰을 것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자국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져 이웃나라를 부당하게 멸망시키는 일을 저질러 놓고도 그것이 정의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른말을 하는 소크라테스가 얄미워보였겠죠.

 

5. “나는 굼뜬 말을 깨우는 등에라네”

 

소크라테스의 대화 여행이 거듭될수록 사람들은 점점 소크라테스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지혜롭고 덕망있는 자로 한껏 뽐내던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질문 공세를 받고 순간 전기에 감전된 듯이 멍해져 버렸답니다. 그리곤 어느새 무지한 자로 전락하게 된 자기를 발견하게 되죠. 이렇게 질문을 통해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여 진지한 탐구의 자세를 갖게 하는 대화의 방법을 문답법(dialektik)이라고 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에 걸려든 이들은 황급히 말꼬리를 잡아 소크라테스를 논박해 보려 했지만 그때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공격을 미끄러운 뱀장어 마냥 요리조리 피해가곤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는 밉살스런 전기뱀장어같이 보였어요. 소크라테스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가 점점 깊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을 조롱하고 그들의 믿음을 비웃기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이 아니었어요. 신탁의 말을 확인해보려는 마음도 있었지만 우선은 집단적 이기주의에 눈이 멀어가고 있는 아테네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죠.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인 특유의 위대한 정신을 잊고 점점 자신의 적이었던 페르시아의 추악함을 닮아가는 아테네인들이 걱정스러웠어요. 그에게 아테네는 ‘혈통은 좋지만 이제는 욕심 때문에 살만 뒤룩뒤룩 쪄서 잠만 자려고 하는 말’ 같아 보였어요. 소크라테스는 이 뚱뚱이 말을 깨워 다시 뛰게 하기 위해 따끔한 자극을 선사하는 등에가 되기로 했답니다.

 

6.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의미

 

여러분도 이제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의 의미를 잘 알게 되었을 테죠?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말은 소크라테스가 지어낸 게 아닙니다. 다만 그는 자기의 깨달음을 사람들에게 좀 더 친근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리스(헬라스)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델포이 신전의 경구를 활용했을 뿐이었어요.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사람들이 무지를 스스로 깨달아 다시금 영혼의 눈을 떠서 훌륭한 사회를 만들어 나가도록 유도하고 싶었어요. ‘우리 앞에 있는 문제의 해답은 나도 잘 모르고 당신도 잘 모릅니다. 우리 아는 척은 이제 그만둡시다. 겸손한 마음으로 이 문제의 해답을 함께 고민해보는 친구가 되자구요.’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하고 싶은 말이었어요. 그러니 이제는 친구를 비아냥대거나 비웃는 마음에서 이 말을 사용해서는 안 되겠죠?

 

②편에서 계속…

 


2편 가기

이케아, 인문학 연구자 그리고 인천공항 [내게는 이름이 없다]

이케아, 인문학 연구자 그리고 인천공항

 

아내가 이케아에서 6단 철제 서랍을 주문했다. 이케아가 약속한 3만 8천원의 가성비를 즐기려면 3시간 이상 손수 조립하는 수고를 바쳐야 한다. 처음에 아내는 나보고 조립을 해달라고 했다. 이럴 때 취할 수 있는 전략은 얼빠진 바보 행세를 하는 것이다. 순식간에 바보를 앞에 둔 아내는 혼자 조립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현실 인식 능력이 탁월하다.

서랍장이 완성되자 아내는 탄성을 지르며 스스로 대견해 했다. 기쁨에 들 떠 있는 아내를 뒤로 하고 나는 무심코 서랍을 열다가 대참사를 저지르고 말았다. 견고하게 서 있던 서랍장이 산산이 무너진 것(실제로는 부품 몇 개가 떨어져 나갔을 뿐)이다. 아내는 서랍장이 민감한 아이라면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함을 누누이 강조했다. 예전에 볼보는 차 예닐곱대를 쌓아놓는 광고로 견고함을 강조했는데, 이 스웨덴 출신 서랍장은 어찌된 일인지 ‘아기 돼지 삼형제’의 첫째 돼지 집처럼 연약하기 짝이 없었다.

 

 

바우만은 우리 시대가 단단한 모든 것을 연약한 액체로 전화시켜버리는 ‘액체근대’에 진입했다고 말했다. 우리 집 6단 서랍장은 액체근대의 산물임을 유감없이 입증했다. 내가 서 있는 자리도 액체임은 물론이다. 이른바 ‘전임’이 되어 사뭇 의기양양해진 요즘이지만, 실상을 따지고 보면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줄 것을 애원하는 ‘전임’ 아닌 ‘전임’이다. 10년 안에 정년 자리를 꿰차지 못하면 나가야 하고, 정년이 되려면 다시 시험 절차를 거쳐 ‘신입’이 되어야 하는 자리다. 학교에서는 이것을 ‘비정년 트랙 교육중점전임교원’이라고 한다.

 

<1984>의 신어(newspeak)같은 이 용어의 의미는 대략 이러하다. 2년 동안 의료보험과 사학연금(국민연금같은 것) 그리고 매달 월급을 받을 수 있다. 고용보험과 산재보험은 해당되지 않으므로 실업수당과 산업재해 수당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승진과 그에 따른 임금 상승에 대한 규정은 ‘정년 트랙 전임’과별도다. 하지만 근무 내용은 동일하다. 주당 12시간 강의, 매년 1~2편의 논문 실적, 교내 행정 업무를 위한 보직 봉사 등은 정년과 비정년의 구분이 없다. 전임이지만 교수회의에 참여하여 학교 행정에 대해 논할 수 없고 교수협의회의 구성원이 될 수도 없다. 연구년이 보장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무기계약이 아니므로 고용 내용상으로는 전임으로 분류할 수 없는데 서류상으로는 전임의 명칭을 쓰고 있다. 아마도 전임 비율을 높이라는 교육부 행정 지침을 준수하고자 이런 꼼수를 쓰는 듯 하다.

 

비정년전임이 되면 다음달 수입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서 좋지만, 언제나 이곳저곳의 평가에 노출된다는 점에서 여간 고역이 아니다. 무슨 일을 하든 2년 뒤 계약 연장을 염두에 둬야 하므로 학교에서 요구하는 일을 거절하기는 웬만한 담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이를테면 교수와 학생이 동아리를 지어서 정기적으로 만나 무슨 활동을 같이하고 무언가를 지도하게 하는 사업이랄지, 교수학습커뮤니티 참가, 연탄 나르기 봉사, 교재 집필, 고등학생 대상 특별 강연 준비, 교양 도서 소개 집필, 거의 매주 열리는 회의 참여, 회식 등등 연구와 강의 이외의 잡다한 업무가 한아름이다. 이런 업무는 대부분 에이스나 코어 사업(나는 일 년이 넘도록 이 사업이 뭐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수행을 위해 나랏돈을 지원받으면서 하는 건데, 비정년 전임 같은 파리 목숨은 사업에 참여하면 받게 되어 있는 소액의 수당마저도 받지 못하고 무급 봉사를 감내하는 신세에 몰리기도 한다.

 

이렇게 일주일을 정신없이 보내면 어느새 학기말이 되어 강의평가서가 날아온다. 떨리는 마음으로 평가서를 열어보면 인문교양 강의자들은 영락없이 평균 이하의 평가를 받게 되어 있다. 온통 실용주의와 효율성에 사로잡힌 대학 사회에서 고색창연한 인문교양을 강의하고도 평점 90 이상의 강의 평가를 바란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내가 속해 있는 조직의 교수들은 강의 평가 평점 90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강의 이외의 시간을 학생 면담으로 보내고 학생들의 온갖 개인적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노력하고 항상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고 용을 쓴다. 고객 만족 점수에 목숨 거는 서비스직 사원의 비애는 강단에서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비정년전임의 사정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란다. 마가렛 대처 체제가 지구를 휩쓸게 된 이후, 정년 교수직은 드물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미국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수많은 후보가 정년 자리 하나를 두고 150~200명의 후보가 경쟁한다. 철학이나 인문학 분야에서는 정년 자리 하나를 위해 300~400명이 경쟁한다. 한국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 참혹한 경쟁률을 뚫고 정년이든 비정년이든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일차적으로 임용은 대학 입학 성적에서 결정된다. 입학 당시 대학의 순위가 1차적 요인이다. 두 번째 요인은 역시 유학, 그 중에서도 미국 유학 출신자인가 여부다. 미국을 중심으로한 영어권 유학 출신자들은 SCI급 논문 실적을 쌓는 데에도 유리하지만 영어 강의 능력면에서도 이득을 본다. 이런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은 핸디캡을 메꾸기 위해 국내 등재지 논문 실적에 열을 올릴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한 해에 서너 편씩 논문을 남발해 500%, 1000%의 실적을 올리지만 큰 효과를 보기는 어렵다. 개인적 노력이외에 힘을 쓸 사람들을 널리 알거나 지원한 대학에 대한 폭 넓은 정보 취합 능력과 임기응변력 등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한 마디로 운수소관이다. 그렇게 얻은 자리도 대략 열에 일고 여덟은 일 이년 뒤의 미래를 전망하기 어려운, 이케아 서랍장만큼이나 부실한 자리다.

 

그런데 이 부실한 자리도 얻지 못한 채 근근히 연명하고 뛰어난 연구자들이 한 둘이 아니다. 인문학 연구자의 대부분은 이런 알량한 교수 자리도 얻지 못하는 유랑지식인 신세로 생을 마친다. 인문학 연구자들은 10여년의 대학원 수련 기간을 거쳐 학위를 받는다. 졸업 후 운이 좋으면 시간당 5~6만원정도의 강의 자리를 얻을 수 있다. 시간 당으로 받는 액수로는 고액이지만 강의 시수가 일주일에 고작 5~10시간 이하여서 정상적 생활을 유지할 수준은 되지 않는다. 월 200만원 이하의 수입을 올리면 ‘재벌’에 속한다. 이마저도 방학에는 기대할 수 없다. 한국의 시간강사들은 방학 중에 이렇다할 수입이 없으므로 1년 52주의 시간 중 30주만 연명 가능한 상태이다. 나머지 기간은 동면에 들 수밖에 없는 기이한 삶을 살게 된다. 이런 생활도 1년만 가능하다. 대부분의 강사 계약은 최장 1년이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난방비를 이기지 못하고 겨울 방학 중에 태국 등지를 떠도는 이들도 있다. 해외여행을 자주 하고 싶다면 인문학 연구자의 길을 걷는 것도 한 방법이다.

 

처음 인문학 연구자의 길을 걷고자 했을 때는 1998년 구제금융기였다. 그때 나의 스승께서는 추어탕을 사주시면서 반가움 반 안쓰러움 반의 복잡한 표정을 지으셨다. 20년 후 이 표정을 후배에게 물려 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정치권에서 적폐청산의 목소리가 높다. 2017년을 전후하면서 끈질기게 광화문 앞을 점거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 덕에 그것을 바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1998년의 적폐를 깔고 앉은 채 돌아가고 있다. 기술관료들이 지배하는, 자유 없는 신자유주의사회에서는 적폐청산의 구호로는 어림없다. 액체근대적 비정함을 우리에게 선사한 당사자들이 바로 적폐청산을 외치는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대통령이 인천공항에 가서 정규직 전환 문제에 대해 한 마디했다. 비정규직자들의 무기계약직화를 둘러싼 노동자 간 갈등을 두고 노조가 지혜롭게 문제를 풀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공적 사안은 모든지 민영화해 버리는 것을 시대의 규범으로 만드는데 일조한 정치 세력의 수장답다.

글 : 행길이

 

(발췌번역)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6 [내게는 이름이 없다]

5. 칼리가리(Caligari)

<칼리가리박사의 밀실 Das Cabinet des Dr. Caligari>을 지은 두 작가 중 한 명인 체코인 한스 야노비츠(Hans Janowitz)는 프라하-현실이 꿈과 뒤섞이고 꿈이 공포의 영상으로 변해버리는 바로 그 도시에서 자랐다. 1913년 10월의 어느 오후 이 젊은 시인은 자기를 매혹시킬만한 훌륭한 미모와 예절을 갖춘 소녀를 찾아다니며 함부르크의 어느 축제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축제마당의 텐트가 레퍼반 거리를 뒤덮고 있었다. 그 곳은 선원들에게 세계 최고의 쾌락을 선사하는 장소 중 하나로 이름난 곳이었다. 레더러(Lederer)의 거대한 비스마르크 동상이 홀스텐발 거리 근처에서 항구에 들어선 배들의 보초를 서고 있었다. 예의 그 소녀를 찾아다니는 와중에, 야노비츠는 희미한 웃음소리를 따라 홀스텐발 거리에 인접한 어두컴컴한 공원으로 들어갔다. 젊은 남자를 유혹하는 데에는 확실한 효과를 내던 이 웃음소리는 관목숲 어느 즈음에서 사라져버렸다. 이 젊은이가 자리를 뜨자, 조금 있다가 덤불 어딘가에 그때까지 숨어있던 또 다른 그림자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예의 그 웃음소리와 함께 자리를 옮겼다. 스쳐가는 이 기이한 그림자를 야노비츠는 언뜻 보았다. 그는 보통의 부르주아처럼 보였다. 어둠이 그를 다시 삼켜버렸고, 더 이상은 보기 힘들었다. 다음날 지역 신문의 커다란 머리기사에 다음과 같이 났다. “호스텐발가의 무시무시한 성범죄! 소녀 게르트루드… 살해당해.” 게르트루드라는 소녀는 축제마당의 그녀였을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느낌에 사로잡힌 야노비츠는 이 희생자의 장례식에 참석해야 한다고 느꼈다. 추도식에서 그는 갑자기 그때까지 체포되지 않은 그 살인자를 보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의심하고 있던 사내 역시 그를 알아본 듯했다. 그 사내는 덤불 속의 그림자, 바로 그 부르주아였다.

<칼리가리>의 공동 저자 칼 마이어(Carl Mayer)는 오스트리아의 지방 도시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과학적’ 도박꾼이 되고자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부유한 사업가가 되었을 것이다. 한창 때의 그는 틀림없는 ‘시스템’으로 무장한 채 자기 재산을 팔아치우고서는 몬테카를로로 떠났다. 몇 달 후 그는 파산한 채로 그라츠에 다시 나타났다. 이 편집광적인 아버지는 열여섯 살의 칼과 세 살 아래 동생 앞에 파산의 스트레스를 부여안고 나타났다가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소년에 불과했던 칼 마이어는 세 아이들을 책임져야 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기압계를 팔고 합창단에서 노래도 부르다가 야외극장의 단역 연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점점 무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떠돌이 생활 동안 그가 찾아다니지 않은 무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온갖 경험으로 가득했던 이 시기는 훗날 영화 시인으로서의 그의 경력에서 큰 쓸모를 발휘하였다. 1차 대전이 시작되자, 청소년이었던 그는 뮌헨의 한 카페에서 힌덴부르크의 얼굴을 담은 엽서를 그리면서 생활을 꾸려갔다. 야노비츠의 기록에 따르면, 전쟁 이후 그는 자기의 정신 상태를 반복적으로 검사받아야만 했다고 한다. 마이어는 자기를 담당하던 군대 내 고위 정신과 의사에 대해 격심한 분노를 품고 있었던 듯하다.

전쟁이 끝났다. 갑작스러운 전쟁 발발로 인해 보병 연대의 장교로 근무하고 있던 야노비츠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당국에 대한 증오로 인해 투철한 평화주의자로 돌아왔다. 그는 절대적 권위는 그 자체만으로 나쁘다고 느꼈다. 베를린에 정착한 그는 칼 마이어를 만났고, 이제까지 글이라고는 한 줄이라도 써 본 적 없는 이 별난 젊은이가 자기와 혁명적 기질과 관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챘다. 이런 기질과 관점을 영화에 표현하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베게너의 영화에 심취했던 야노비츠는 이 새로운 매체가 강력한 시적 계시를 빌려줄 수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청년의 의지로 이 두 친구들은 마이어가 정신과 의사와 벌인 정신적 투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야노비츠가 홀스텐발가를 어슬렁거리며 경험한 모험에 대해 끝없이 토론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이야기들은 서로의 기억과 이미지를 북돋워주거나 보완해주었다. 이 짝궁은 이런 토론을 하다가 휘황찬란하고 떠들썩한 칸트 거리의 축제 마당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을 느껴 밤거리를 거닐곤 했다. 그곳은 번쩍이는 정글이었고 천국이라기보다는 지옥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두려움을 결핍에 대한 공포로 바꿔버렸던 사람들에게는 천국이었다. 어느 날 저녁, 마이어는 야노비츠를 자기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던 소극에 끌고 갔다. ‘인간인가 기계인가’라는 제목의 소극은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기적같은 용력을 얻은 사내를 출연시켰다. 그는 마치 최면이 걸려있는 듯이 행동하였다. 가장 이상한 일은 그가 불길한 예감에 빠지도록 관객의 넋을 빼앗는 말을 해가며 묘기를 부린다는 사실이었다.

무릇 창조적인 일들은 모든 요소들을 전체적인 하나로 통합하는데 필요한 단 하나의 경험이 덧붙이는 순간에 이르게 만든다. 그러한 경험을 제공했던 것은 이 장사의 신비로운 풍모였다. 이 쇼를 본 날 밤에 두 친구는 <칼리가리>의 원안을 처음으로 마음속에 그려보게 되었다. 그들은 이후 6주 동안 시나리오를 썼다. 야노비츠는 각자 맡을 부분을 나누면서 자신은 “씨앗을 뿌린 아버지로, 마이어는 그것을 품어 키워낸 어머니”로 칭하였다. 막판에 작은 문제 하나가 발생하였다. 이 작가들은 마이어가 전쟁 동안 만났던 일생일대의 적수를 원형으로 삼아 만든 주인공의 이름을 무엇으로 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스탕달의 알려지지 않은 편지』라는 희귀 도서가 해결책을 제공하였다. 야노비츠가 이 책을 훑어보는 동안 그는 스탕달이 전쟁터에서 복귀하자마자 밀라노의 라스칼라 극장에서 칼리가리라는 이름의 장교를 만났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 이름을 보자 두 작가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그들의 이야기는 네덜란드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부 독일의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도시의 이름은 의미심장하게도 홀스텐발이다. 어느 날 회전목마와 소극으로 이루어진 박람회가 이 마을로 찾아든다. 그 중에는 이 소극을 공연하는 안경 쓴 괴이한 남자 칼리가리박사와 그것을 광고하는 세자르가 있다. 칼리가리는 공연 허가를 위해 시청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박사는 거만한 관리에게 험한 대접을 받는다. 다음날 아침 이 관리는 자기 방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그렇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박람회의 즐거움을 즐기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의사의 딸 제인과 사랑에 빠진 두 대학생 프란시스와 알란은 수많은 구경꾼들을 따라 칼리가리 박사의 천막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똑바로 세워진 관에서 걸어나오는 세자르를 구경한다. 칼리가리는 오싹해하는 관객들에게 이 몽유병자가 앞일에 대한 물음에 답할 것이라고 말한다. 흥분한 상태에서 알란은 자기가 얼마나 오래 살 것 같은지 묻는다. 세자르는 입을 연다. 그는 무시무시한 최면력을 내뿜는 주인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답한다. “새벽까지.” 새벽녘에 프란시스는 자기 친구가 예의 관리와 똑같은 방법으로 칼에 찔려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칼리가리를 의심하던 이 대학생은 그의 수사를 도와주십사고 제인의 아버지를 설득한다. 수색영장을 지닌 두 사람은 칼리가리의 마차에 강제로 밀고 들어가 최면술을 그만두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들은 한 여인을 살해하여 체포된 범죄자에 대한 조사에 참석해 달라는 요구로 경찰서에 소환된다. 그는 연쇄 살인마의 혐의에 대해 미친 듯이 부인하는 중이다.

프란시스는 계속해서 칼리가리를 염탐하고, 해가 저물자 창문을 통해 마차 안을 몰래 들여다본다. 그러나 세자르가 관 속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있다고 그가 잘못 생각하는 동안, 세자르는 제인의 침실에 침입하여 잠든 그녀를 칼로 찌르려다가 가만히 그녀를 보고서는 단검을 내던진다. 비명을 질러대는 제인을 팔에 안고 그는 지붕을 넘어 길거리로 도주한다. 그녀의 아버지의 추격을 받은 그가 제인을 땅에 떨어뜨리자, 그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온다. 반면에 이 고독한 납치범은 기진맥진해있다. 프란시스는 자기가 본 것과 전혀 다른 사실을 주장하는 제인으로 인해 수수께끼를 풀고자 칼리가리를 두 번째로 찾아간다. 그와 동행한 두 경찰관이 관과 같이 생긴 상자를 압수하자 프란시스는 거기서 예의 몽유병자와 똑같이 생긴 인형을 끄집어낸다. 경찰이 방심한 틈을 타서 칼리가리는 도망치는 데에 그럭저럭 성공한다. 그는 정신병원으로 안전하게 피신하였다. 그를 뒤쫓던 프란시스는 도망자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며 병원장을 부르다가 겁에 질려 소스라치게 놀란다. 병원장이 칼리가리였던 것이다.

다음날 밤 병원장이 잠든 사이에 프란시스는 이 사건에 새로 입문한 병원의 세 직원들과 함께 병원장의 사무실을 수색하다가 정신질환을 다루는 이 시설의 과오를 완벽하게 입증하는 물증을 발견한다. 그들은 책 더미 속에서 칼리가리라는 이름의 흥행사에 관한 오래된 책을 발견한다. 그는 18세기 이탈리아 북부를 돌아다니며 최면에 걸린 세자르로 하여금 온갖 사람들을 살해하였다. 세자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는 밀랍 인형으로 그를 대신함으로써 경찰을 속였다. 가장 중요한 증거물은 원장의 의료 기록이다. 이 기록물들은 원장이 칼리가리의 최면 능력을 실증하는 데에 강박적으로 집착하였음을 입증하였다. 그는 몽유병자가 병원에 맡겨졌을 때 칼리가리가 했던 가공할 게임을 재연하고자하는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칼리가리의 정체성을 제 것으로 삼았다. 원장이 범죄를 인정하도록 만들기 위해, 프란시스는 원장의 도구였던 몽유병자의 시체를 원장에게 들이댄다. 세자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 괴물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수행원들은 그런 그에게 능숙하게 구속복을 입힌다.

https://www.youtube.com/watch?v=zrsDCP22lQE

(발췌번역)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5 [내게는 이름이 없다]

심리적 불안의 조짐을 보여주는 여명기 작품들 중 네 번째 영화는 위의 세 판타지에 대한 사실주의적 대항물인 <타자 Der Andere>이다. 이 영화는 파울 린다우(Paul Lindau)의 동명의 희곡을 원작으로 삼아 1913년에 개봉된 작품이다. 린다우의 희곡은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상황을 부르주아의 고루한 분위기 속으로 들여와 극화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지킬박사가 베를린의 계몽된 변호사 할러박사로 바뀌는데, 그는 하우스 파티에서 분열된 인격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에 대해 냉소한다. 그는 그 같은 일은 자기에게 일어날 수 없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할러는 과로로 인해 말에서 떨어지게 되고 그 결과 [무의식 속의] ‘타자’가 등장해 [의식적 자아가] 강제적 잠의 희생물이 되는 일이 점점 늘어난다. 불한당인 이 다른 자아는 강도가 되어 자기 집에 침입한다. 경찰의 개입으로 이 두 자아는 체포된다. 경찰이 조사하는 동안 그는 잠이 들고 할러가 깨어난다. 할러는 자기가 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자기가 강도의 짝패임을 깨닫게 되자 그는 쓰러진다.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할러는 건강을 회복해 결혼한다. 심리적 교란에 영향 받지 않는 시민의 전형인 것이다.

할러의 모험담은 누구라도 볼드윈과 같은 정신분열의 먹이로 전락할 수 있으며, 그 결과 호문쿨루스처럼 추방자가 될 수 있다고 암시해준다. 이제 할러는 독일 중간 계급으로 뚜렷하게 규정되었다. 이들 모두를 중간 계급을 대표하는 인물이라 여기는 것은 더더욱 정당하게 보인다. 위의 여타 영화들의 판타지적 등장인물과 그 사이의 정신적 근친성이 그 이유다. <타자>는 이러한 근친성을 정교하게 다듬는 대신에 그것을 잠깐 다루고 넘어간다. 할러의 [정신적] 분열은 치유가능한 질병인 듯 다루어지고, 비극적 엔딩과 동떨어져서, 그는 정상적 삶의 고요한 안식처로 복귀한다. 이러한 차이는 틀림없이 관점의 변화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위의 판타지 영화들은 분열의 태도에 집단적 불안에 관한 징후를 자연스럽게 반영하고 있지만, <타자>는 중간 계급의 진부한 낙관주의를 가지고 분열의 태도에 접근한다. 이러한 낙관주의가 이끌고 있는 까닭에, 이 이야기는 현존하는 불안을 축소한다. 그 결과 불안은 안정은 영원할 것이라는 확신을 무효화시킬 수 없는 일시적인 사건으로 상징화된다.

Ⅱ: 전후의 시기(1918-1924)

자유의 충격

1918년 11월의 사건을 혁명이라고 일컫는 것은 [혁명이라는] 이 말을 남용하는 것이리라. 그 당시 독일에 혁명이란 없었다. 실제 발생했던 일은 지휘 체계의 와해였다. 그것은 무력한 군사 정세와 전쟁에 신물이 나던 사람들로 인해 기세를 얻었던 수병들의 반란이 초래한 일이었다. 정권을 획득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혁명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애초부터 그들은 독일 공화국을 건립할 생각조차 없었다. 공화국 선포는 즉흥적인 것이었다. 레닌이 희망하던 것을 꿈꾸던 이들 지도자들은 대지주들, 기업가들, 장군들, 법률가들을 제거하는 일에 무능하다는 점을 입증하였다. 그들은 인민의 군대를 창설하는 대신 민주적인 의용군의 편성에 의존함으로써 스파르타쿠스단을 궤멸시켰다. 1919년 1월 15일, 의용군 간부들이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칼 립크네히트(Karl Libknecht)를 살해하였다. 이후 악명 높은 페메 살인자들(Feme-murders)의 범죄가 잇따랐지만 이런 일을 저질렀던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 새 공화국이 출범한 첫 주 이후 구지배 계급들은 기세를 회복하기 시작하였다. 몇몇 사회 개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유산된 혁명을 동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적 격동의 급속한 발달은 옛 위계질서에 속한 가치와 전통의 붕괴를 감당해내는 독일이 재앙에 휩싸여있음을 폭로하였다. 일시적으로 독일 정신은 세습적 관습을 극복하여 그것을 완전히 재구성할 수 있는 좀처럼 없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독일 정신은 선택의 자유를 향유하였으며, 그것을 내적 태도로 재편성하고자 하는 수많은 교설들이 가득한 분위기가 되었다.

공적 삶의 영역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배고픔, 무질서, 실업 그리고 인플레이션의 첫 징조에 시달리고 있었다. 길거리 싸움이 매일같이 벌어졌다. 혁명적 해결은 이제 멀리 있어 보이는 동시에 목전에 있는 듯 했다. 분노에 사무친 계급투쟁은 공포와 희망으로 이글거렸다.

https://www.youtube.com/watch?v=eJ919AY6FHI

(발췌번역)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4 [내게는 이름이 없다]

베게너는 그의 두 번째 영화 <골렘 Der Golem>(그의 첫 번째 영화와 마찬가지로 1차 대전 후 리메이크됨)을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 헬릭 가렌(Henrik Galeen)과 함께 시나리오, 감독, 배우로 활약하며 만들어냈다. 1915년 초에 처음 개봉되었던 이 영화는 환상적 테마를 원료로 하여 영화적 효과를 뽑아내고자 했던 베게너의 순수한 정열을 새롭게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되었다. 이 영화는 프라하의 유대인 랍비 뢰브(Loew)가 골렘이라는 진흙상의 가슴에 마법의 인장을 집어넣어 살아 움직이게 한 중세의 사건을 과거의 전설로 삼고 있던 현대가 배경이다. 영화에서 옛 유대교 회당의 우물을 파던 노동자들은 골렘 상을 발굴하고서는 그것을 골동품상에게 넘긴다. 그러다가 이 골동품상은 우연히 몇몇 유대 신비주의적 문헌에서 랍비 뢰브의 마법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고서는 이 방법을 따라하여 마침내 [죽어있던 진흙상에서 살아 움직이는 골렘으로 만들어내는] 기적적인 변신을 이루어낸다. 이제 이야기는 현대적 심리학으로 바뀐다. 골렘이 골동품상의 하인으로 일하는 동안 두 번째 변신이 발생한다. 어리석은 로봇이었던 그가 주인의 딸과 사랑에 빠지면서 자기만의 영혼을 지닌 인간으로 변화한 것이다. 겁을 집어먹은 소녀는 이 섬뜩한 구혼자로부터 놓여나가고자 하고 그로 인해 골렘은 끔찍한 고립감을 알게 된다. 그는 격분한다. 이 분노한 괴물은 소녀를 맹목적으로 갈구하면서 자기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파괴한다. 결국 그는 높은 탑에서 떨어짐으로써 산산이 부서진 진흙상이 되어 죽어버린다.

<골렘 Der Golem>의 모티프들은 <호문쿨루스 Homunculus(1916)>에서 다시 나타난다. 6부로 이루어져 있는 이 스릴러는 1차 대전 동안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주인공은 덴마크의 인기 배우 올라프 푄스(Olaf Fønss)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의 낭만적인 옷차림새는 우아한 베를린 패션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골렘>과] 이 시리즈는 프랑켄슈타인에 관한 작품들의 선구자였지만, 베게너의 은막의 전설 <골렘>과는 전혀 상이한 원천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두 영화 사이의 유사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골렘과 마찬가지로 호문쿨루스도 인간이 만들어낸 존재다. 유명한 과학 교수 한센과 조수 로딘이 증류기에서 만들어낸 그는 번득이는 지성과 불굴의 의지를 지닌 남성으로 자란다. 그러나 그는 곧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골렘과 같은 짓을 저지른다. 호문쿨루스는 골렘이 느낀 것과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는 버림받았다고 느끼고서는 치명적인 고독감을 없애줄 사랑을 갈망한다. 그는 자기의 비밀을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만한 곳을 강렬히 욕망하면서 만리타국을 떠돈다. 그러나 진실은 누설되고 만다. 그가 자기 마음을 억누를 때마다 사람들은 공포에 휩싸여 뒷걸음질 치며 말한다. “호문쿨루스다. 영혼 없는 인간, 악마의 종, 괴물!” 그들이 호문쿨루스의 개를 죽이는 일이 벌어지자, 그의 유일한 친구였던 로딘조차도 호문쿨루스를 사람들의 오해와 증오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히틀러를 미리 암시하고 있다. 혐오에 사로잡힌 호문쿨루스는 대국의 독재자가 되어 자기가 겪은 고통에 대한 전대미문의 복수를 감행하기 시작한다. 호문쿨루스는 노동자로 위장해 폭동을 조장함으로써 독재자인 자신에게 대중을 무자비하게 진압할 기회를 제공한다. 마침내 그는 세계 대전을 촉발시킨다. 이 가공할 존재의 삶은 벼락과 같이 갑작스럽게 끝난다.

호문쿨루스와 골렘의 비정상적 성격은 비정상적 태생의 결과물인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비정상적 태생이라는 전제는 사실 외견상 설명 불가능해 보이는 사실, 즉 이들이 주변 사람들과 상이한 존재이며, 그들 자신도 이점을 감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합리화하려는 시적 공상의 속임수(poetic subterfuge)일 뿐이다. 도대체 어떤 점이 그들을 그토록 유별난 존재로 만들었을까? 골렘이 모호하게 알고 있었던 그 이유를 호문쿨루스는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나는 인생에서 마땅히 선사받아야할 최고의 것을 받지 못하는 사기를 당했다!” 그는 자기가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못한다는, 그리고 이런 결핍은 그에게 강한 열등감만을 선사할 뿐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호문쿨루스가 상영되던 무렵에 독일 철학자 막스 쉘러(Max Scheller)는 독일이 전 세계에서 자아냈던 증오의 원인에 대해 공개 강연을 하였다. 독일인들은 호문쿨루스와 닮았다. 그들은 중간 계급의 자신감에 해로운 것으로 입증된 [독일] 역사의 전개로 인해 열등감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와 달리, 독일인들은 혁명에 실패했으며 그 결과 진정한 민주 사회를 확립하는 데에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의미심장하게도 독일 문학은 발자크(Balzac)나 디킨스(Dickens)의 방식을 따라 유기적으로 연결된 사회적 전체가 관통하고 있는 작품을 단 하나도 제공해내지 못하고 있다. 독일에는 그 어떤 사회적 전체도 존재하지 않았다. 중간 계급은 투쟁을 두려워하는 정치적 미성숙 상태에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가 처한 불안정한 사회적 조건이 위험해질까봐 두려워했다. 이런 퇴행적 행태는 심리적 침체를 자극하였다. 열등함과 고립감이라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감정을 키워나가고 있는 그들의 습성은 미래의 꿈에 파묻히고자 하는 유치한 성향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이 두 영화적 등장인물들은 좌절감에 대해 유사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호문쿨루스의 경우 그를 행동하도록 자극하는 충동들은 매우 분명하다. 그는 사도마조키스트적인 성향을 파괴에 대한 불타는 욕망과 결합한다. 이 성향은 겸허한 순종과 복수심 가득한 폭력 사이에서 동요하는 가운데 드러나고 있다. 호문쿨루스에 대한 로딘의 과도한 우정은 동성애의 조짐을 더함으로써 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근대 정신분석학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러한 도착을 호문쿨루스가 특정하게 겪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수단으로 해석하는 가운데 정당화된다. 이 두 영화는 이런 배출구들을 곱씹어 봄으로써 독일인들이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강한 성향을 폭로하고 있다.

광포해진 골렘과 호문쿨루스는 정상성에서 멀어지다가 결국 죽게 된다. 비록 호문쿨루스는 응보 혹은 정의로운 행동에 의해서 죽게 되지만, 그의 죽음은 엄밀히 말하자면 초자연적이다. 인간과는 확실히 다른 그의 죽음은, <프라하의 대학생>이 그랬듯이, 사회적 교류라는 급선무에 구애받지 않는 그를 찬양하고자 하는 독일 중간 계급의 욕망을 입증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선택한 고립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볼드윈의 자살이 그러듯이, 두 괴물의 죽음은 음울한 조짐을 무심코 드러낸다.


<Der Golem>(1920 film by Paul Wegener)

 

참고 : 프라하의 대학생(1913) 

(발췌번역)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3

2. 조짐

여명기의 구닥다리 영화들 중에서 네 작품은 특별한 주목을 받을 만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들은 전후의 중요한 영화적 주제들을 앞질러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 중 세 편은 가공의 피조물들로 가득한 환상 세계를 비춰주었다. 이 세계는 당시의 진보적인 독일 영화 이론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당대의 많은 작가들은 영화인들이 현존하는 대상을 만들기보다는 순전한 상상의 산물을 만들어냄으로써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특수한 잠재력을 입증해줄 것이라고 격려하였다. 헤르만 해프커-전쟁이 평화라는 해악으로부터 구원될 것이라고 찬양하던 바로 그 사람-는 영화 시인들에게 실재하는 것과 비실재적인 것을 섞어보라고 조언 하였다. 전쟁광들은 환상 동화를 좋아했다. 이는 진정 독일적인 현상이었다. 부르주아 탐미주의자였다가 나중에 마르크스 사상가로 변모한 게오르크 루카치(Georg Lukacs)도 마찬가지로 1913년에 쓴 글에서 영화란 환상 동화 및 몽상과 같은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당시 루카치의 교설을 실천에 옮긴 최초의 인물은 파울 베게너(Paul Wegener)였다. 그는 동아시아인의 얼굴을 지닌 라인하르트 극단의 배우로서 어떤 기이한 환상이 그를 사로잡곤 한다고 말하던 이였다. 그는 이러한 환상들을 은막에 재현하려는 욕망을 품고 있었는데 마침 그것을 진정한 혁신을 이루었던 영화 속에서 실현시켰다. 이런 환상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법칙이 아닌 다른 세계의 법칙의 지배를 받는 영역으로 쓸어담겨졌다. 이 환상들은 오직 영화만이 현실화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사건들을 제공하였다. 베게너는 <달나라 여행 A Trip to the Moon>과 <사탄의 즐거운 장난 The Merry Frolics of Satan> 등의 영화를 만든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éliès)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던 것과 같은 동일한 영화적 열정에 의해 고무되었다. 이 정감 넘치는 프랑스 예술가가 발랄한 마술로 아이같은 영혼을 지닌 모든 이들을 매혹시킨 반면에, 이 독일 배우는 인간 본성의 악마적 힘을 소환하는 사악한 마법사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베게너는 일찍이 1913년 <프라하의 대학생 Der Student von Prag>으로 영화를 시작하였다. 이 영화는 오래된 전설을 활용하여 만든 개척적 작품이다. 베게너와 협력하여 대본을 쓴 한스 하인츠 에베르스(Hans Heinz Ewers)는 진정한 영화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좋은 영화적 소재가 되는 엄청난 흥분과 성욕을 잘 드러낼 줄 알았다. 이런 상상력-그는 1933년 호르스트 베셀(Horst Wessel)에 관한 관제 영화 대본을 쓴 사람으로서 나치의 타고난 협력자였다. 그런 면에서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종류의 상상력은 그를 실제 사건과 감각적으로 지각 가능한 경험으로 가득한 [현실] 영역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겠다-을 지녔음에도 사악한 작가가 될 수 있었을 만큼 그는 운이 좋았다.

호프만(E. T. A. Hoffmann)의 작품, 파우스트의 전설 그리고 포우(E. A. Poe)의 단편 「윌리엄 윌슨 William Wilson」에서 빌려온 요소를 가지고 에베르스는 우리에게 가난한 학생 볼드윈을 선사하였다. 그는 수상한 마법사 스카피넬리와 계약을 한 인물이다. 사탄의 화신인 이 마법사는 볼드윈에게 유익해 보이는 환상과 무궁무진한 부를 주기로 약속한다. 볼드윈이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기에게 준다면 말이다. 이 영화에는 마법사가 면경에 비친 상을 불러내어 그림자를 독립적 인격으로 만들어내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영화적 발상이었다. 계약 조항에 따르면 볼드윈은 아름다운 여자 백작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어 있다. 그 결과 그녀는 볼드윈을 공식적 구혼자로 바꾼다. 결투는 불가피했다. 여자 백작의 아버지가 이전 구혼자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요구하자, 뛰어난 펜싱선수로 이름나있던 이 학생은 그가 목숨을 부지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스카피넬리의 교묘한 술책으로 인해 제 시간에 결투 장소에 가지 못하던 볼드윈이 서둘러 약속 장소로 나간 사이에, 그의 그림자 인격이 볼드윈은 대신하여 불쌍한 구혼자를 죽여 버린다. 볼드윈은 신망을 잃게 된다. 그는 자기의 무고함을 여자 백작에게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명예 회복의 모든 시도는 그의 쌍둥이 덕분에 무정하게도 좌절된다. 확실히 이 쌍둥이는 볼드윈의 몸에 살던 두 영혼 중 하나가 투사된 것이다. 악마적 유혹에 무릎 꿇도록 만든 그의 욕심 많은 자아는 진짜 자아 행세를 하면서 볼드윈이 저버린 또 다른 자아를 파멸시키는 일에 착수한다. 절박해진 이 학생은 결국 다락방에서 그를 총으로 쏘아버린다. 망령을 향해 쏜 총알은 오히려 그를 죽인다. 이윽고 스카피넬리가 방에 들어오고 그는 계약서를 찢어버린다. 종잇조각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볼드윈의 시체가 그 위를 덮는다.

<프라하의 대학생>의 영화적 참신성은 당대인들의 마음을 휘저어놓은 듯하다. 어느 비평가는 이 영화를 리베라(Ribera)의 그림에 비견하면서 칭찬했지만 1926년 즈음에 리바이벌된 작품에 대한 평론가들의 반응은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들은 이 리바이벌 작품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고지식하고 심지어 우스꽝스럽다”고 하였다.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는 이 영화는 무언가를 결여하고 있다. 아쉽게도 요지는 의심할 여지없이 부적절한 줄거리 때문이라기보다는 조야한 카메라 워크 때문이라는 데에 있다. 비록 영미권의 팬들은 독일만이 지닌 토착적 원천으로 인해 매혹당한 듯이 보여 독일인의 이목을 끌긴 했지만 말이다.

<프라하의 대학생>은 독일 영화의 강박적 테마, 즉 자아의 토대에 대한 깊숙하고도 두려움 가득한 관심을 은막에 옮긴 것이었다. 베게너의 영화는 볼드윈이 분리된 자기의 거울상과 대면하게 함으로써 특수한 유형의 분열된 인격을 상징화하였다. 공황상태에 빠진 볼드윈은 자기의 이중성을 알아채지 못한 채, 그가 적의 손아귀에 잡혀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의 적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이것은 일군의 의미들로 둘러싸인 오래된 모티프이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중세적 카스트 제도로 운영되고 있는 독일에 대해 중간 계급이 실제에서 경험하고 있는 바를 몽환적 분위기로 개작한 결과물이 아니었을까? 제국 체제에 대한 부르주아들의 반발은 커져갔다. 이것은 절대주의에 준하는 프러시아 체제, 군부의 전횡 그리고 황제의 얼빠진 행태에 대한 일반의 분개와 뒤섞여 노동자들에 대한 부르주아들의 적대감을 간혹 약화시켰다. “두개의 독일”이라는 표현 문구는 지배층과 중간 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 특히 후자가 몹시 분노하는 차이를 드러내는 데에 맞춤하다. 이러한 이중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이하게도] 제국 정부는 자유주의자들조차 수용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경제적 정치적 원칙을 옹호하였다. 양심적으로 볼 때 부르주아들은 그들이 반대하는 지배계급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을 시인해야만 했다. 그들은 두 개의 독일을 전형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공포담인 <프라하의 대학생>을 개인 심리학적 케이스로 다룬다는 결정 또한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에서 보이는] 모든 외적 행위는 볼드윈의 영혼 속에서 발생한 사건을 반영하는 거울일 뿐이다. 볼드윈은 그가 속한 세계의 일부가 아니다. 따라서 이 작품을 사회적 현실의 요구가 고려되어서는 안 되는 환상 영역 속에 자리하는 것으로 보는 것 이상으로 그를 가장 잘 묘사하는 방법이란 없다. 바로 이 점이 전후 독일 영화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주제들을 편애한 경향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을 제공해준다. 볼드윈의 내적 삶에 속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난해한 의미는 모든 독일 중간계급의 애매한 사회적 상태에 대해 그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 딜레마에 관련된 것으로서 그들의 심대한 혐오감을 반영한다. 그들은 관념 혹은 심리적 경험을 경제‧사회적 원인에서 찾아내는 사회주의자들의 방식을 기피하였다. 그들의 태도는 자율적 개인이라는 이상주의적 개념을 토대로 하면서 실제적 이해관계와 완벽하게 조화되고 있었다. 사회주의자들의 유물론적 사유를 용인하는 것은 이러한 이해관계를 잠식하는 것이므로, 그들은 개인의 자율성을 과장함으로써 사회주의적 해석을 본능적으로 회피하였다. 이런 태도는 그들로 하여금 외적 표리부동을 내적 이중성으로 여기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특권 상실을 수반하는 그러한 심리적 복잡성을 선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혼의 심연으로 물러나는 것이 자신들을 사회 현실의 파국적 타개라는 비극에서 과연 구원해줄 것인가라고 의심하는 듯 보였다. 볼드윈의 자살은 결국 독일 중간계급의 불길한 예감을 반영하고 있다.

(발췌번역)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2 [내게는 이름이 없다]

영화가 반영하는 것은 뚜렷한 신조라기보다는 심리학적 성향들이다. 이러한 성향들은 의식의 아래 영역에서 확장된 집단의 심층적 심태를 이룬다. 물론 대중잡지, 방송, 베스트셀러, 광고, 유행어 그리고 사람들의 문화적 삶이 쌓이면서 생긴 여러 산물들 역시 널리 퍼져서 우세를 점한 태도와 내적 경향성들에 관한 가치 있는 정보를 낳는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는 포괄성에 있어서 이러한 원천들을 능가한다.

다양한 카메라 움직임, 편집 그리고 수많은 특수 장치 덕분에 영화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의 모든 모습을 세밀히 볼 수 있게, 따라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은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잊을 수 없는 강의에서 ‘공간의 역동화’라고 규정했던 것을 만들어냈다. “영화관에서 …관객은 고정된 의자에 앉아있다. 그렇지만 물리적으로 …미학적으로, 그는 항상적 움직임 속에 있다. 관객의 눈이 끊임없이 거리와 방향을 바꾸는 카메라 렌즈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객이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그에게 제시되는 공간은 관객 자신만큼이나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된다. 딱딱하게 굳은 육체가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공간 그 자체도 움직이고, 변화하고, 회전하고, 겹쳐지고 재결정화된다(recrystalizing).”

이런 식으로 공간을 점령하면서, 픽션 영화와 사실 영화와 같은 것들은 영화가 거울처럼 반영한 세계의 수많은 구성요소들, 어마어마한 볼거리, 인간과 무생물에 대한 무심한 배열 그리고 야단스럽지 않은 현상의 끝없는 연쇄 등을 포착한다. 사실 영화는 야단스럽지 않고 평범해서 간과되는 것들에 특히 관심을 모으도록 함으로써 그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다른 모든 영화적 장치가 밟아 온 과정과 마찬가지로, 클로즈업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여 영화의 역사 내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영화감독을 할 때는 완벽한 디테일을 위해, 심지어는 얼굴 표정이 어떻게 변해야만 하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때로는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밤낮으로 일하려고 했습니다.” 영화는 날 때부터 세세한 것들을 찾아내는 본래적 임무를 완수해야만 하는 듯하다. 삶의 내면은 다양한 요소들 속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다양한 요소들의 집적 속에서, 특히 영화대본의 본질적 부분을 이루는 거의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표면적 자료들 속에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영화는 눈에 보이는 세계-그것이 실제 현실이든 상상의 세계든-를 기록함으로써 은폐된 정신적 과정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호레이스 M. 칼렌(Horace M. Kallen)은 무성영화 시기를 연구하면서 클로즈업이 지닌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는 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손가락을 우발적으로 움직이는 등의 경미한 액션, 손을 꼭 쥐거나 편다거나, 손수건을 떨어뜨리고, 겉보기에는 무관한 사물을 가지고 연기하고, 무언가에 걸려 비틀대고, 넘어지고, 뭔가를 얻으려고 하거나 찾지 못하는 등과 같은 것들은 인간관계의 보이지 않던 동학을 보여주는 가시적 상형문자들이 되었다….” 영화를 이루고 있는 “가시적 상형문자들”은 이야기의 증언을 적절히 보완해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특히 포괄적이다. “인간관계의 보이지 않던 동학”은 이야기뿐만 아니라 가시적인 것들 에도 스며들었다. 그러자 그것은 영화가 등장한 이 나라의 내적 삶(inner life)을 보여주는 특성이 되었다.

대중의 욕망을 반영하는 이런 영화들이 특히 엄청난 흥행 성공을 이루어낸다는 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히트작이라는 것은 수많은 요구들 중 하나에만 영합하는 것이거나 심지어는 특정한 하나의 요구조차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바바라 더밍(Barbara Deming)은 미 의회 도서관의 영화를 선별해내는 방법에 관한 글에서 이 점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영화가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영화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하더라도, 그런 일은 아마도 일등부터 순위를 매겨 모으는 일에 불과하다는 점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이런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서로 동일한 꿈을 계속해서 모으는 일이나 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 인기있는 개별 영화들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수많은 싸구려이자 인기가 덜한 영화들에서나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이와 다른 꿈들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대중성의 문제에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통계적으로 측정 가능한 영화의 대중성이라기보다는 영화가 지닌 회화적이고도 서사적인 모티프에 있어서의 대중성이다. 이러한 모티프들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은 내적 충동을 외적으로 투사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모티프들은 대중적인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모두에서 그리고 초대작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B급 영화에서도 발생할 경우 확실히 징후적 중요성을 담지하게 된다. 이점에서 독일 영화의 역사는 모든 수준에서 모티프들이 도처에 배어든 역사이다.

어떤 국가의 특수한 심태에 대해 이야기 한다고 해서 고정된 민족성이라는 개념을 암시한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다. 여기서는 한 국가의 특정 국면에 만연한 집단적 성향 혹은 경향들에만 관심을 둔다. 1차 대전 직후 독일을 휩쓴 공포와 희망은 무엇인가? 이런 종류의 물음은 그것의 범위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합당하다. 말하자면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그 시절 영화에 대한 적절한 분석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이른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파악된다고 하는 어떤 민족성을 건립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이 책은 다만 특정 시기에 나타난 사람들의 심리학적 유형에 집중할 뿐이다. 세상에는 위대한 민족들이 이룩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역사를 골고루 다룬 연구가 적지 않다. 나는 익히 잘 알려진 유형의 연구에 심리학적 역사에 대한 탐구를 덧붙이고자 할 뿐이다.

어떤 영화의 모티프들은 오직 특정 국가의 일부 사람들에만 연관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경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공동의 전통과 상이한 주민 계층 사이에서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연관관계는 집단적 삶의 심층에서 통일적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작용한다. 이런 것들은 의문시 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영화의 모티브들 또한 그러했다. 나치 독일 이전에 중간 계급의 기호는 모든 계층에 퍼져나갔다. 중간 계급의 기호는 좌파의 정치적 포부와 경쟁하였으며, 상류층의 정신적 공허를 메워주기도 하였다. 여기서 중간 계급의 심태에 확고히 뿌리내렸던 독일 영화의 전국적 호소력에 대한 이유가 해명된다. 1930년에서 1933년까지 배우 한스 알베르스(Hans Albers)는 부르주아의 몽상을 노골적으로 충족시키는 전형적 영화의 영웅 역할을 하였다. 그의 행적은 노동자 관객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고, <제복을 입은 소녀 Mädchen in Uniform>에서는 귀족 가문의 딸들이 숭배하고 있는 그의 사진을 목격하게 된다.

과학에서는 보통 일련의 동기 유발에 있어서 민족적 특성들이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물, 즉 자연 환경, 역사적 경험, 경제 및 사회적 조건의 결과물이라고 보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인류에 속하기 때문에 비슷한 외적 요소들은 유사한 심리학적 반응들을 유발한다고 여길 수 있다. 1924년에서 1929년 사이의 독일 전체에 퍼져있었던 정신적 무기력은 독일만의 특수한 현상은 아니었다. 유사한 상황이 영향을 미쳐 [독일과] 비슷한 집단적 무기력이 다른 나라들에서도 발생했다는 점만 봐도 이 사실은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사람들의 심적 태도가 외적 요인들에 의해 좌우된다고 해서 심적 태도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게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결과는 어느 때든 자발적 원인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심리학적 경향성들이 파생적인 특성을 지녔다하더라도, 그것들은 곧잘 독립적 활기를 띤다. 심리학적 경향성들은 항상 변화하는 상황들의 변화에 맞춰 자동적으로 변하는 대신에 역사적 진화의 본질적 원천이 된다. 민족의 역사 과정에서 모든 민족은 여러 변형을 거치면서 [민족성이라는] 그들만의 주된 원인을 존속시켜 특유의 성향들을 발전시켰다. 그러한 성향들은 현행하는 외적 요인들에 기초하여 단순히 추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외적 요인들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결정하는 문제에 이바지 한다. 우리 모두는 인류에 속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간혹 상이한 방식으로 그러하다. 이러한 집단적 성향들은 극단적 정치 변화의 경우에 추진력을 얻는다. 정치 체계의 소멸은 심리학적 체제의 해체를 낳았다. 나아가 전통적인 내적 태도들이 혼란에 빠지는 일이 잇따르고 유포되면 이러한 태도들은 도전받거나 오히려 힘을 더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심리학적 요인을 무시한다. 그들이 무시했던 이 요인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기간인-1차 대전에서 히틀러의 궁극적 승리에 이르는 독일 역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던 것에 현저한 빈틈이 있음을 명백히 보여줬다. 그렇지만 사건, 사회‧문화적 환경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범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조사되긴 했다. 독일에서 발생한 1918년 11월 ‘혁명’이 독일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능한 사회민주당은 혁명 세력들의 중추를 파괴하는 데에만 전능했다는 사실을 입증했을 뿐, 군대, 관료, 대지주, 자본가 계급을 청산하는 데에는 무력했다. 이들 전통적 권력자들은 1919년 이후 허울뿐인 신세가 되어버린 바이마르 공화국을 계속 실제적으로 통치하였다. 또한 이 신생 공화국이 패전의 정치적 귀결에 의해, 그리고 인플레이션을 거리낌 없이 유지시켜서 구중간층을 피폐하게 만들어버렸던 유력 독일 기업가와 금융자본가들의 술책으로 인해 궁지에 몰려있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결국 도즈안(The Dawes Plan)의 시행 5년 후-거대 사업자에게 이 시기는 외채 덕에 큰 이익을 본 축복의 시기였겠지만- 사람들은 세계 경제 위기가 안정의 신기루를 끝장내고, 중간 계급에게 남겨졌던 배경과 민주주의를 박살냈으며, 대량 실업으로 인해 절망감을 일반화시키는 식의 결말을 맺게 되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제도’의 몰락 속에 내재해 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제도’는 나치 정신을 번성하게 만든 진정한 구조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요소들은 히틀러주의의 엄청난 충격과 반대 진영의 고질적 타성을 해명하는 데에는 불충분하다. 의미심장하게도, 수많은 주의 깊은 독일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히틀러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 히틀러가 집권한 후에도 그들은 새 체제를 일시적으로 발생한 희한한 사건 정도로 치부하였다. 이런 식의 견해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최소한 당시 독일의 상황에 무언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정상적 시야에서는 유추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소수의 분석만이 사회민주주의자들 특유의 유약함과 공산주의자들의 부적절한 행실 그리고 독일 대중의 기이한 반응 이면에 존재하는 심리학적 메커니즘에 대해 넌지시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프란츠 노이만(Franz Neumann)은 공산주의자들의 실패에 대한 해명을 부분적으로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독일 노동자들 사이에 작용하고 있었던 심리학적 요소들과 사회학적 동향들을 정확히 평가하는 일에 무능…”했다. 그러면서 그는 [바이마르시기] 국민의회의 제한적 정치권력 상황을 폭로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민주적 가치 체계가 사회 속에 확고히 뿌리박고 있었더라면 민주주의는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이것을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 독일 노동자들의 심리학적 경향들은 그들의 정치적 신조를 무력화시켰으며,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의 궤멸을 촉발했다는 것이다.

광범위한 중간 계급층의 태도 역시 압도적인 충동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 것 같았다. 1930년에 출판된 연구서에서 나는 대부분의 독일 사무직들에게 ‘화이트 컬러’의 허세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독일 사무직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는 실제로는 노동자 계층의 그것에 가깝거나 심지어는 그보다도 못한 지경이었다. 이들 하부 중간 계급 사람들은 부르주아적 보장책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네의 궁상스런 처지와 조응하는 모든 교설과 이념을 경멸하면서 실제 현실에 있어서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정신적으로 의지가지없는 상태(mental forlornness)에 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심리학적 완고함에서 더 나아간 일종의 고립 상태를 고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쁘띠 부르주아 특유의 행동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소매상인들, 장사꾼들 그리고 장인들은 울분에 사무친 나머지 상황에 순응함으로써 움츠러들기만 하고 있었다. 사무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민주주의를 편들면서 자기네의 실제적 이익을 실현시키는 대신에 나치의 약속에 귀 기울이는 편을 선호하였다. 나치에 대한 그들의 굴종은 사실과의 어떤 대면을 근거로 하기 보다는 감정적 고착을 바탕으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경제적 변동, 긴급한 사회 상황 그리고 정치적 모략이라는 명시적 역사 이면에는 독일 국민의 내적 성향에 함축된 비밀스런 역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독일 영화라는 매개물을 통해 이러한 성향을 폭로하는 작업은 히틀러의 부상과 지배권 장악을 이해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Papas Kino 1) 복숭아 누이 [내게는 이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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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의 추태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덕분에 온 나라가 여성 비하네 아니네로 시끌시끌하다. 한 외신은 그녀 때문에 모든 한국 여성들이 ‘여혐당할 지도 모르겠다’는 염려를 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방송엔 연일 그녀의 추함을 헐뜯는 데 여념이 없다. 늘 여인의 아름다움을 탄복해 왔던 나로서는 요즘처럼 괴로운 시절이 없다. 여인 성토장이 된 방송을 피해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그 여인과 비슷한 연배의 여성을 발견하고는 분주하던 리모콘을 놓을 수 있었다.

그녀는 <심플 라이프>라는 영화에 나오는 늙은 식모였다. 원제가 <桃姐>, 즉 복숭아 누이인 이 영화는 육십을 훌쩍 넘어서까지 결혼도 못하고 한 집에서 식모살이를 한 여인의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다. 연출을 맡은 허안화감독은 비판적 역사 의식으로 유맹(流氓)의 땅 홍콩을 통찰력있게 그려내는 이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녀의 전작들과 달리 매우 사적인 일상을 다룬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녀의 어떤 영화보다도 묵직하다.

더구나 <심플 라이프>는 아름답다. 최근에 본 가장 아름다운 영화는 허우샤오시엔의 <자객 섭은낭>이었는데, 이 영화는 <섭은낭>과는 다른 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대에서 오는 아름다움이었다.

병들고 오갈 데 없는 늙은 식모 아타오와 부유한 영화 제작자 로저 사이의 유대는 자칫하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적 일상을 분식하는 같잖은 미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유대는 계급과 나이, 성별의 차이와 긴장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간직하면서 화해에 이르는 사건을 창출한다.

둘은 결코 동등해질 수 없는 이들임을 잘 알고 있다. 아타오는 오갈데 없는 병든 독거노인에 불과하고, 로저는 중국과 홍콩을 오가며 영화를 만드는 유명 제작자다. 둘 사이에 놓은 장벽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은 필요 이상의 호의를 베풀거나 과도한 신세를 지지않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그들 사이를 소원하게 하지는 못한다. 이들은 모두 유맹의 땅 홍콩에서 부유하는 ‘발 없는 새’들이기 때문이다. 홍콩인들은 오래 전 환란을 피해 남하하여  마천루의 숲을 이룬 이들과 그 후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언제나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었고, 늘 이쪽과 저쪽 사이를 오가야만 하는  ‘무간지옥’에 빠져있었다. 본토 반환 이후에는 ‘발 없는 새’의 신세를 면하나 했지만, 그들은 곧 본토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나고 말았다. 아타오와 로저 사이에서 맺어진 유대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고통의 공유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다.

아타오는 일본인의 손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홍콩에 남하하였다가 부유한 로저 집에 ‘양녀’ 겸 식모로 들어온 유맹이다. 로저는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이주해 버린 덕에 가족과 떨어져 비좁고 고적한 홍콩의 집에 살고 있다. 반환 이후 화려했던 홍콩의 영화 산업이 뿌리채 뽑히자 로저는 보따리를 짊어지고 중국과 홍콩을 오가며 본토의 자본을 얕은 꾀로 우려내 <삼국지>나 재탕하는 떠돌이 영화 제작자가 되었다. 둘 모두 결혼과 정착은 생각하지 않거나 엄두도 못 내는 이들이다.

놀이터에서 그들은 결혼도 못한 서로를 놀리며 그들의 영락을 웃음으로 넘어선다. 그곳에서 둘은 단단히 묶인다. 나는 인간적 유대의 아름다움을 경배하는이 놀이터에서 떠나지못하고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시경>에는 이런 시가 있다. 桃之夭夭, 灼灼其華. 之子于歸, 宜其室家. 뜻을 새기면 이렇다고 한다. ‘무성히 자란 복사나무, 활짝 꽃이 피었네. 이 아가씨 시집가면, 시댁에 잘 하리라.’

우리 식으로 하자면 ‘봉순이 누나’ 정도가 되는 春桃라는 이름을 지닌 우리의 복숭아 누이는 안타깝게도 <시경>에서 읊은 복사꽃 처자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복사꽃 못지 않다. 바다 건너  ‘무궁화 언니’도 시집을 가지 못하였다. 대신 그녀는 청기와를 얹은 으리으리한 집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아름답지 못한 인연으로 수많은 사람을 수치스럽게 하였다. 나 역시 부끄러움 탓에 며칠 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의 아름다움은, 그리고 인간적 유대의 아름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복숭아 누이가 보여준 유대의 끈이 이를 잘 보여준다.

추함의 악덕은 아름다움의 미덕으로 씻을 수 있다. 아무쪼록 이 땅에 복숭아 누이가 누린 유대의 아름다움이 펼쳐지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