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3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없는 것과 관련해서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있는 이 교탁이 보이지요??이 교탁은 크기가 있습니다.?그런데 크기가 있는 것은 모두 쪼개질 수 있다고 했지요??이제부터 우리 머릿속에 있는 칼날로 이 교탁을 한번 쪼개 봅시다.?쪼개고 또 쪼개고……?한없이 쪼개지지요??이제 잠깐만 칼날을 멈추세요.?그리고 생각해 봅시다.?왜 이렇게 크기를 가진 것은 한없이 쪼개질 수 있지요??왜 우리는 크기가 있는 것은 무한히 쪼갤 수 있다고 생각할까요??쪼개고 또 쪼개도,?크기가 있는 한,?우리의 의식 속에 있는 칼날이 무디어지지 않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우리가 쪼개는 작업은 물리학으로 말하면 작용입니다.?이렇게 무한히 계속되는 작용에 아무런 반작용도 하지 않고 작용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이 신기한 것은 무엇일까요??순수하게 수동성만 지니고 있는 이 신기한 것,?크기를 가진 것 속에 숨어 있는 이것,?바로 이것이 없는 것입니다.?없는 것만이 아무 저항도 하지 않습니다.?있는 것은 쪼개지지 않습니다.(있는 것에 작용을 하면,?작용도 있는 것이므로 있는 것과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좀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저는 없는 것을 순수하고 절대적인 수용 가능성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이쯤 해 두고 이제 쪼갤 때 생기는 다른 현상을 살펴보기로 할까요?크기를 가진 것은 아무리 쪼개고 또 쪼개도 크기가 아예 없어져 버리지는 않습니다.?그러면 아무리 작용을 해도 끝끝내 그 작용에 맞서서 저됨(자체성)을 잃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있는 것만이 저됨을 잃지 않습니다.?있는 것이 저됨을 잃고 바뀌면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그러나 있는 것은 없는 것이 될 수 없고,?없는 것도 있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다시 말해서 끝끝내 저됨을 잃지 않고 지키는 것은 크기 속에 있는 있음의 측면입니다.?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그것은 크기를 가진 것은 모두 그 안에 순수 수동성과 자기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곧 크기 속에는 있음과 없음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우리는 이제까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여기에 분필이 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여기에 분필이 없다.’고 말하면 저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크기 안에 있음과 없음이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는 이 교탁에 모순이 있다는 말이고,?이 말을 넓히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모순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이 세상에 있는 모순을 반영해서 있는 것도 파악하고 없는 것도 파악하여?‘있다’, ‘없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없는 것을 받아들여?‘없는 것이 있다.’는 말을 거짓에 이르는 함정이 아니라 세상살이와 주고받는 이야기와 그 말들을 뒷받침하는 우리 생각에 꼭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저는 칠판에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여기에서 고백할 말이 있습니다.?그것은 이 그림은 제가 생각해 내서 그린 것이 아니고 제 스승인 박홍규 선생님이 그려 주신 것을 본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물론 그분은 있는 것,없는 것이라는 말 대신에 존재와 무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앞의 그림?4를 보십시오.?보다시피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함께 있습니다.?이 세상에 처음으로 모순이 선을 보인 것입니다.?여럿〔多〕의 최소 단위인 둘〔2〕은 이렇게 모순과 함께 태어납니다.?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있는 금〔line〕에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앞에서 했던 질문과 꼭 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이 금은 있는 것에 속하는 것입니까??없는 것에 속하는 것입니까?”
“있는 것이요.”
어떤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그럴까요??그렇다면 금도 있는 것이므로 이 그림의 왼쪽 칸에 있는 있는 것에 달라붙어서 있는 것과 하나가 되어 버려 금 구실을 못 하게 되고,?그에 따라 없는 것은 없어져 버리게 되겠네요.”
“그럼,?없는 것에 속하겠네요.”
다른 학생이 잽싸게 대답했습니다.
“그럴까요??그렇다면 금도 없는 것이므로 오른쪽 칸에 있는 없는 것과 구별이 안 되어 금 구실을 못 하게 되겠네요.?그리고 그 결과 없는 것만 남게 되어 있는 것은 없어져 버리게 되겠는데요.”
그러면서 저는 칠판에 금을 잔뜩 그어서 한 번은 없는 것을 뭉개 버리고 또 한 번은 있는 것을 뭉개 버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곤란하지요??그러니까 달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갈라 주는 금은 동시에 있는 것과도 떨어져 있어야 하고 없는 것과도 떨어져 있어야 하므로 있는 것도 아니고,?없는 것도 아닌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그리스 철학에서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아페이론은?‘규정할 수 없는 것〔indefinite〕’이고?‘한계가 없는 것〔infinite〕’입니다.?피타고라스가 그처럼이나 중요하게 여겼던 페라스(peras), ‘한계’, ‘끝’의 반대말이 바로 이것입니다.?여기에서 잠깐 옆길로 들어서서 페라스,?곧 한계이자 끝이라는 말이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봅시다.?아다시피 피타고라스는 페라스가 하나뿐인 것을 점〔point〕으로 규정했습니다.?두 개인 것을 선으로 보고,?세 개인 것을 면〔plane〕,?곧 삼각형으로 보고,?네 개인 것을 입체로 보았습니다.?그러니까 이렇게 됩니다.
●─점?●●─선?●●─면?●●─입체(세 개의 점 위에 점을 하나 올려놓은 것).?피타고라스가?1, 2, 3, 4라는 숫자를 그처럼이나 애지중지하고?1+2+3+4에서 나온?10이라는 숫자를 신성하게 여긴 것은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점이나 선이나 면이나 입체로 되어 있어 이 네 개의 숫자 속에 우주의 구성 원리가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사실 이 끝이라는 낱말(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그것의 끝을 보기 때문입니다.?이를테면 여기 있는 이 교탁을 여러분은 눈으로 보고 있는데,?여러분의 망막에 나타나는 것은 이 교탁의 끝,?다시 말해서 이 교탁이 끝나는 표면입니다.?겉모습이지요.?우리는 투시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교탁의 속을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우리는 늘 어떤 것이 그것이 아닌 것과 만나는 한계를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다른 예를 하나 더 들지요.?여기 칠판이 있는데,?여러분이 이 칠판에 아주 가까이 서서 이 칠판 안쪽에 있는 어느 지점만을 볼 때는 그것이 칠판인지 아닌지 잘 모릅니다.?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칠판의 테두리까지 보아야만 비로소 이것이 칠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끝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기를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기타를 가지고 있는 학생 없습니까??좋습니다.?여기에 기타 줄이 하나 있습니다.?이 줄은?5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데 이 줄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무한한 끝이 숨어 있습니다.?기타를 잘 치는 사람은 이 숨어 있는 끝〔peras〕?가운데 자기가 바라는 끝을 아주 잘 찾아냅니다.?손가락으로 줄을 길게 또는 짧게 짚고 튀길 때마다 서로 다른 소리가 들리는데 그 까닭은 이 기타 줄에 숨어 있는 끝이 저마다 다른 소리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우리는?‘끝이 없는 것〔apeiron〕’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집니다.?무엇인 것도 아니고 무엇이 아닌 것도 아닌 것,?더 정확하게 말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없는 것도 아닌 것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을 규정할 수 없는 것,?끝도 갓도 없는 것,?한없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자,?이제 그림?5를 다시 한 번 봅시다.?이것을 당구공이라고 합시다.?있는 것은 하얀 공을 가리키고 없는 것은 빨간 공이라고 칩시다.?보다시피 이 당구공 둘은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둘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붙어 있으면 하나가 되어서 뗄 수가 없지요.?그렇다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떨어져 있으면 이 두 당구공은 서로 독립되어 있어서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다시 말해서 모순을 일으키지 않습니다.?문제는 이 두 개의 공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서로 맞닿아 있다.’는 말을 수학에서는 탄젠트(tangent),?곧 접선(接線)이라는 낱말을 써서 나타냅니다.?이 탄젠트라는 말은 라틴어 탄게레(tangere)에서 유래한 말인데?‘닿는다’, ‘만진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영어의 콘택트(contact)도 어원이 같습니다.?함께〔con〕+닿아 있는 것〔tactus〕이 콘택트이지요.?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는 영어에 컨틴젠시(contingency)라는 낱말이 있습니다.?프랑스어로는 콩텡장스(contingence)이지요.?그런데 이 낱말의 뜻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연’, ‘우연성’, ‘우발성’이 이 낱말의 뜻입니다.그러면 맞닿아 있다는 말이 어떻게 해서 우연을 가리키는 말로 탈바꿈했을까요??우리는 존재론의 영역에서 맨 처음 나타나는 두 괴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며 이 둘이 몸을 맞대서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이 두 괴물이 서로 몸을 맞대야 할 아무런 필연적인 까닭이 없습니다.우리는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다시 말해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을 보통 사라진다,?파괴된다고 말하고,?거꾸로 없는 것이 새로 생겨나는 것,?다시 말해서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는 것을 생겨난다,?창조된다고 말하는데,?엄밀하게 말하자면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어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거나,?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정확하기로 소문이 난 물리학자들도 아예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 있는 것이 생겨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면 이미 있는 것,?아원자나,?원자나 분자의 수가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자리를 바꾸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만일에 정말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되거나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뀐다면,?이런 사태는 우리가 머리로 이치를 따질 수 없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우연입니다.?기독교의?‘하나님’이 무(無)로부터〔ex nihilo〕?이 세상을 창조한 것〔creatio〕이 우연이듯이.?하나님이 무에서 다른 세상을 창조해 내지 않고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세상을 만들어 냈는지 그야말로?‘하나님’만이 아는 일,?다시 말해서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맞닿아 있는 당구공 두 개를 다시 살펴봅시다.있는 것이라는 흰 당구공과 없는 것이라는 빨간 당구공이 맞닿아 있는 점을 우리는 접점이라고 부릅니다.?접촉하고 있는 점〔point〕이라는 뜻이지요.?이 접점은 있는 것에 속하지도 않고 없는 것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라는 말은 앞에서 했습니다.실제로 당구장에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당구공이 붙었다 떨어졌다 해서 그 사이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실금 같은 공간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없어 보이기도 해서 종잡을 수 없는 것처럼 이?‘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규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앞으로는 무규정적인 것이라고 부르겠습니다.)은 어떤 때는 있는 것과 붙어 있어서 있다고 할 수 있는 것〔可能的 存在〕이 되는가 하면,?또 어떤 때는 없는 것과 붙어 있어서 없다고 할 수 있는 것〔可能的 無〕이 되기도 합니다.?다시 말해서 무규정적인 것〔apeiron〕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고,?그런 점에서 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이제 그림을 다시 하나 그려 보겠습니다.”
① ㄱ에서 점점 있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는?ㄱ′,?ㄱ′′,?ㄱ′′′ ……
② ㄱ에서 점점 없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는?-ㄱ′, -ㄱ′′, -ㄱ′′′ ……
저는 칠판에 위와 같은 그림을 그렸습니다.(이 그림과 비슷한 것을 우리에게 그려 보여 주신 분도 박홍규 선생님이었습니다.)
“자,?보십시오.?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두 괴물이 서로 나란히 몸을 맞대자마자(관계를 맺자마자)?곧 두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세 번째 괴물(무규정적인 것)이 나타나고 이 세 번째 괴물이 나타나자마자,?첫 번째 괴물과 세 번째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또 하나의 괴물(있는 것과 최초의 무규정적인 것 사이에 들어 이 둘을 구별해 주는?‘있는 것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무규정적인 것’ : apeiron?ㄱ′)이 나타났습니다.?그리고 동시에 두 번째 괴물과 세 번째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또 하나의 괴물(없는 것과 최초의 무규정적인 것 사이에 들어 이 둘을 구별해 주는?‘없는 것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무규정적인 것’ : apeiron -ㄱ′?)이 나타났습니다.?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한없이 많은 괴물들(ㄱ′,?ㄱ′′,?ㄱ′′′ ……-ㄱ′, -ㄱ′′, -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들어섰는데 이것들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곧 무규정적인 것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저마다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보기를 들어 설명하지요.?이?50센티미터 남짓한 기타 줄 안에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이 숨어 있어서 이 줄의 어느 지점을 짚고 줄을 튀기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른 소리가 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기타 줄에 숨어 있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은 아직은 울려 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무규정적인 소리들입니다.?다른 보기를 들어 설명해도 마찬가지입니다.?한 무더기의 진흙 속에는 그것을 빚어서 찻잔을 만들 수도 있고,?벽돌을 만들 수도 있고,?화분에 담아 꽃을 키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무한히 많은 것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이야기가 나온 김에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빌려서 이 문제를 조금 더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