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3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없는 것과 관련해서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기 있는 이 교탁이 보이지요??이 교탁은 크기가 있습니다.?그런데 크기가 있는 것은 모두 쪼개질 수 있다고 했지요??이제부터 우리 머릿속에 있는 칼날로 이 교탁을 한번 쪼개 봅시다.?쪼개고 또 쪼개고……?한없이 쪼개지지요??이제 잠깐만 칼날을 멈추세요.?그리고 생각해 봅시다.?왜 이렇게 크기를 가진 것은 한없이 쪼개질 수 있지요??왜 우리는 크기가 있는 것은 무한히 쪼갤 수 있다고 생각할까요??쪼개고 또 쪼개도,?크기가 있는 한,?우리의 의식 속에 있는 칼날이 무디어지지 않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우리가 쪼개는 작업은 물리학으로 말하면 작용입니다.?이렇게 무한히 계속되는 작용에 아무런 반작용도 하지 않고 작용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이 신기한 것은 무엇일까요??순수하게 수동성만 지니고 있는 이 신기한 것,?크기를 가진 것 속에 숨어 있는 이것,?바로 이것이 없는 것입니다.?없는 것만이 아무 저항도 하지 않습니다.?있는 것은 쪼개지지 않습니다.(있는 것에 작용을 하면,?작용도 있는 것이므로 있는 것과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좀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저는 없는 것을 순수하고 절대적인 수용 가능성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이쯤 해 두고 이제 쪼갤 때 생기는 다른 현상을 살펴보기로 할까요?크기를 가진 것은 아무리 쪼개고 또 쪼개도 크기가 아예 없어져 버리지는 않습니다.?그러면 아무리 작용을 해도 끝끝내 그 작용에 맞서서 저됨(자체성)을 잃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있는 것만이 저됨을 잃지 않습니다.?있는 것이 저됨을 잃고 바뀌면 없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그러나 있는 것은 없는 것이 될 수 없고,?없는 것도 있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다시 말해서 끝끝내 저됨을 잃지 않고 지키는 것은 크기 속에 있는 있음의 측면입니다.?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그것은 크기를 가진 것은 모두 그 안에 순수 수동성과 자기 동일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곧 크기 속에는 있음과 없음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우리는 이제까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배웠습니다. ‘여기에 분필이 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여기에 분필이 없다.’고 말하면 저는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크기 안에 있음과 없음이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보는 이 교탁에 모순이 있다는 말이고,?이 말을 넓히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모순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이 세상에 있는 모순을 반영해서 있는 것도 파악하고 없는 것도 파악하여?‘있다’, ‘없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저는 없는 것을 받아들여?‘없는 것이 있다.’는 말을 거짓에 이르는 함정이 아니라 세상살이와 주고받는 이야기와 그 말들을 뒷받침하는 우리 생각에 꼭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저는 칠판에 다음과 같은 두 개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윤구병 그림 1-4

 

윤구병 그림 1-5

그리고 학생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여기에서 고백할 말이 있습니다.?그것은 이 그림은 제가 생각해 내서 그린 것이 아니고 제 스승인 박홍규 선생님이 그려 주신 것을 본딴 것이라는 사실입니다.?물론 그분은 있는 것,없는 것이라는 말 대신에 존재와 무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앞의 그림?4를 보십시오.?보다시피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함께 있습니다.?이 세상에 처음으로 모순이 선을 보인 것입니다.?여럿〔多〕의 최소 단위인 둘〔2〕은 이렇게 모순과 함께 태어납니다.?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있는 금〔line〕에 주의를 기울여 주십시오.?앞에서 했던 질문과 꼭 같은 질문을 하겠습니다.?이 금은 있는 것에 속하는 것입니까??없는 것에 속하는 것입니까?”

“있는 것이요.”

어떤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그럴까요??그렇다면 금도 있는 것이므로 이 그림의 왼쪽 칸에 있는 있는 것에 달라붙어서 있는 것과 하나가 되어 버려 금 구실을 못 하게 되고,?그에 따라 없는 것은 없어져 버리게 되겠네요.”

“그럼,?없는 것에 속하겠네요.”

다른 학생이 잽싸게 대답했습니다.

“그럴까요??그렇다면 금도 없는 것이므로 오른쪽 칸에 있는 없는 것과 구별이 안 되어 금 구실을 못 하게 되겠네요.?그리고 그 결과 없는 것만 남게 되어 있는 것은 없어져 버리게 되겠는데요.”

그러면서 저는 칠판에 금을 잔뜩 그어서 한 번은 없는 것을 뭉개 버리고 또 한 번은 있는 것을 뭉개 버렸습니다.

윤구병 그림 1-6

“이렇게 되면 곤란하지요??그러니까 달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갈라 주는 금은 동시에 있는 것과도 떨어져 있어야 하고 없는 것과도 떨어져 있어야 하므로 있는 것도 아니고,?없는 것도 아닌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그리스 철학에서 아페이론(apeiron)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아페이론은?‘규정할 수 없는 것〔indefinite〕’이고?‘한계가 없는 것〔infinite〕’입니다.?피타고라스가 그처럼이나 중요하게 여겼던 페라스(peras), ‘한계’, ‘끝’의 반대말이 바로 이것입니다.?여기에서 잠깐 옆길로 들어서서 페라스,?곧 한계이자 끝이라는 말이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 살펴봅시다.?아다시피 피타고라스는 페라스가 하나뿐인 것을 점〔point〕으로 규정했습니다.?두 개인 것을 선으로 보고,?세 개인 것을 면〔plane〕,?곧 삼각형으로 보고,?네 개인 것을 입체로 보았습니다.?그러니까 이렇게 됩니다.

●─점?●●─선?●●─면?●●─입체(세 개의 점 위에 점을 하나 올려놓은 것).?피타고라스가?1, 2, 3, 4라는 숫자를 그처럼이나 애지중지하고?1+2+3+4에서 나온?10이라는 숫자를 신성하게 여긴 것은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 세상 모든 것은 점이나 선이나 면이나 입체로 되어 있어 이 네 개의 숫자 속에 우주의 구성 원리가 담겨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사실 이 끝이라는 낱말(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그것의 끝을 보기 때문입니다.?이를테면 여기 있는 이 교탁을 여러분은 눈으로 보고 있는데,?여러분의 망막에 나타나는 것은 이 교탁의 끝,?다시 말해서 이 교탁이 끝나는 표면입니다.?겉모습이지요.?우리는 투시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교탁의 속을 꿰뚫어 볼 수 없습니다.?우리는 늘 어떤 것이 그것이 아닌 것과 만나는 한계를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압니다.?다른 예를 하나 더 들지요.?여기 칠판이 있는데,?여러분이 이 칠판에 아주 가까이 서서 이 칠판 안쪽에 있는 어느 지점만을 볼 때는 그것이 칠판인지 아닌지 잘 모릅니다.?멀찌감치 떨어져서 이 칠판의 테두리까지 보아야만 비로소 이것이 칠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끝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기를 하나만 더 들겠습니다.?기타를 가지고 있는 학생 없습니까??좋습니다.?여기에 기타 줄이 하나 있습니다.?이 줄은?50센티미터쯤 되어 보이는데 이 줄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무한한 끝이 숨어 있습니다.?기타를 잘 치는 사람은 이 숨어 있는 끝〔peras〕?가운데 자기가 바라는 끝을 아주 잘 찾아냅니다.?손가락으로 줄을 길게 또는 짧게 짚고 튀길 때마다 서로 다른 소리가 들리는데 그 까닭은 이 기타 줄에 숨어 있는 끝이 저마다 다른 소리의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우리는?‘끝이 없는 것〔apeiron〕’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집니다.?무엇인 것도 아니고 무엇이 아닌 것도 아닌 것,?더 정확하게 말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없는 것도 아닌 것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것을 규정할 수 없는 것,?끝도 갓도 없는 것,?한없는 것이라고 부릅니다.”

윤구병 그림 1-5

“자,?이제 그림?5를 다시 한 번 봅시다.?이것을 당구공이라고 합시다.?있는 것은 하얀 공을 가리키고 없는 것은 빨간 공이라고 칩시다.?보다시피 이 당구공 둘은 서로 맞닿아 있습니다.?둘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붙어 있으면 하나가 되어서 뗄 수가 없지요.?그렇다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닙니다.?떨어져 있으면 이 두 당구공은 서로 독립되어 있어서 관계를 맺지 못합니다.다시 말해서 모순을 일으키지 않습니다.?문제는 이 두 개의 공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서로 맞닿아 있다.’는 말을 수학에서는 탄젠트(tangent),?곧 접선(接線)이라는 낱말을 써서 나타냅니다.?이 탄젠트라는 말은 라틴어 탄게레(tangere)에서 유래한 말인데?‘닿는다’, ‘만진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영어의 콘택트(contact)도 어원이 같습니다.?함께〔con〕+닿아 있는 것〔tactus〕이 콘택트이지요.?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로는 영어에 컨틴젠시(contingency)라는 낱말이 있습니다.?프랑스어로는 콩텡장스(contingence)이지요.?그런데 이 낱말의 뜻을 살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연’, ‘우연성’, ‘우발성’이 이 낱말의 뜻입니다.그러면 맞닿아 있다는 말이 어떻게 해서 우연을 가리키는 말로 탈바꿈했을까요??우리는 존재론의 영역에서 맨 처음 나타나는 두 괴물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며 이 둘이 몸을 맞대서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이 두 괴물이 서로 몸을 맞대야 할 아무런 필연적인 까닭이 없습니다.우리는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다시 말해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는 것을 보통 사라진다,?파괴된다고 말하고,?거꾸로 없는 것이 새로 생겨나는 것,?다시 말해서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는 것을 생겨난다,?창조된다고 말하는데,?엄밀하게 말하자면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어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거나,?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되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정확하기로 소문이 난 물리학자들도 아예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 있는 것이 생겨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나타난다면 이미 있는 것,?아원자나,?원자나 분자의 수가 늘어나거나 줄어들거나 자리를 바꾸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만일에 정말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되거나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뀐다면,?이런 사태는 우리가 머리로 이치를 따질 수 없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우연입니다.?기독교의?‘하나님’이 무(無)로부터〔ex nihilo〕?이 세상을 창조한 것〔creatio〕이 우연이듯이.?하나님이 무에서 다른 세상을 창조해 내지 않고 왜 우리가 살고 있는 이런 세상을 만들어 냈는지 그야말로?‘하나님’만이 아는 일,?다시 말해서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맞닿아 있는 당구공 두 개를 다시 살펴봅시다.있는 것이라는 흰 당구공과 없는 것이라는 빨간 당구공이 맞닿아 있는 점을 우리는 접점이라고 부릅니다.?접촉하고 있는 점〔point〕이라는 뜻이지요.?이 접점은 있는 것에 속하지도 않고 없는 것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에서?‘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라는 말은 앞에서 했습니다.실제로 당구장에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당구공이 붙었다 떨어졌다 해서 그 사이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실금 같은 공간이 있어 보이기도 하고 없어 보이기도 해서 종잡을 수 없는 것처럼 이?‘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규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앞으로는 무규정적인 것이라고 부르겠습니다.)은 어떤 때는 있는 것과 붙어 있어서 있다고 할 수 있는 것〔可能的 存在〕이 되는가 하면,?또 어떤 때는 없는 것과 붙어 있어서 없다고 할 수 있는 것〔可能的 無〕이 되기도 합니다.?다시 말해서 무규정적인 것〔apeiron〕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고,?그런 점에서 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이제 그림을 다시 하나 그려 보겠습니다.”

윤구병 그림 1-7

① ㄱ에서 점점 있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는?ㄱ′,?ㄱ′′,?ㄱ′′′ ……

② ㄱ에서 점점 없는 것에 가까워지고 있는?-ㄱ′, -ㄱ′′, -ㄱ′′′ ……

저는 칠판에 위와 같은 그림을 그렸습니다.(이 그림과 비슷한 것을 우리에게 그려 보여 주신 분도 박홍규 선생님이었습니다.)

“자,?보십시오.?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두 괴물이 서로 나란히 몸을 맞대자마자(관계를 맺자마자)?곧 두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세 번째 괴물(무규정적인 것)이 나타나고 이 세 번째 괴물이 나타나자마자,?첫 번째 괴물과 세 번째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또 하나의 괴물(있는 것과 최초의 무규정적인 것 사이에 들어 이 둘을 구별해 주는?‘있는 것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무규정적인 것’ : apeiron?ㄱ′)이 나타났습니다.?그리고 동시에 두 번째 괴물과 세 번째 괴물 사이를 갈라놓는 또 하나의 괴물(없는 것과 최초의 무규정적인 것 사이에 들어 이 둘을 구별해 주는?‘없는 것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무규정적인 것’ : apeiron -ㄱ′?)이 나타났습니다.?그리고 같은 방식으로 한없이 많은 괴물들(ㄱ′,?ㄱ′′,?ㄱ′′′ ……-ㄱ′, -ㄱ′′, -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들어섰는데 이것들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곧 무규정적인 것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저마다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보기를 들어 설명하지요.?이?50센티미터 남짓한 기타 줄 안에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이 숨어 있어서 이 줄의 어느 지점을 짚고 줄을 튀기느냐에 따라 저마다 다른 소리가 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기타 줄에 숨어 있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은 아직은 울려 퍼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무규정적인 소리들입니다.?다른 보기를 들어 설명해도 마찬가지입니다.?한 무더기의 진흙 속에는 그것을 빚어서 찻잔을 만들 수도 있고,?벽돌을 만들 수도 있고,?화분에 담아 꽃을 키울 수도 있다는 점에서 무한히 많은 것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이야기가 나온 김에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빌려서 이 문제를 조금 더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닭대가리[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

닭대가리[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세월호 사고가 터지면서 우리 사회의 안전관리, 재난관리 시스템이 도마 위에 오른다. 사실 2시간 가까이 두 눈 멀뚱이 뜨고서 수 백 명이 탄 배가 침몰하는 광경을 구경만하는 나라에서 재난시스템을 말한다는 게 우스을 지경이다. 허둥지둥 대처 시스템의 맨 위에 있는 청와대는 한 술 더 떠 재난 안전청을 만들겠다고 하고, 언론들은 안전관리 매뉴얼 타령만 하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다보면, 나는 이들이 정말 닭대가리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과연 이들이 이 사회의 최고 엘리트층이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인가 싶을 정도이다. 만약 그렇다면 국민들만 불쌍할 뿐이다. 지금 그런 관리청이 없어서 대처를 못하고, 매뉴얼이 없어서 허둥지둥거리는가? 수 십 년 동안 민방위 훈련을 하고 있지만 유사시 그것이 얼마나 형식적이었는가를 뼈저리게 알지도 모른다. 안전 관리나 생명 보호는 단순히 기술이나 기구의 문제가 아닌 생명을 중시하는 문화와 철학의 문제이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식민지도 경험하고 전쟁도 경험하고 보릿고개도 경험하면서 경제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에게 아마도 안전과 생명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자살율과 재해사고율, 교통 사망율이 OECD 1위이고, 출산율은 세계 최저이다. 우리 스스로 위험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고 느끼다보니 더 이상 내 새끼들을 이런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하고 싶지 않는다는 징표이다. 이런 문화와 사회 시스템이 바뀌리라고는 누구도 기대하지 않을지 모른다. 재난 사고가 생길 때마다 온갖 호들갑을 떨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그냥 망각해버린다. 일종의 푸닥거리를 하는 느낌이다. 정부는 온갖 재난 대책으로 도배하고, 언론은 진실 여부와 상관없다는 식으로 속보 경쟁만 하고, 국민은 분향소를 찾아 눈물 흘리는 것으로 면죄의식을 한다. 일종의 거대한 현대판 제의와도 같다. 이 제의는 무엇보다 사회적 망각을 감싸줌으로써 시간이 흐르면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한다. 우리 모두가 이 푸닥거리의 공범이 아닌지 모를 일이고, 그래서 우리들 모두가 닭대가리인지도 모를 일이다.

 

오래 전에 [소방관이 된 철학교수](F. 맥클러스키, 이 종철 역, 북섬, 2007)라는 책을 번역한 책이 있다. 이 책은 철학교수가 지역 소방관 활동을 자원봉사하면서 겪은 생생한 체험을 철학자의 눈으로 성찰한 책이다. 긴급 재난 활동가로 유명한 한비야가 추천한 탓에 한 때는 베스트셀러의 목록에도 오르고, 전국 소방관들의 필독서라는 우스갯소리도 들었다. 이 책의 말미에 썼던 역자 후기 일부의 문제 상황은 지금 읽어봐도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모름지기 소방관들은 그 파괴의 현장에서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인내와 헌신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누구도 접근하기 꺼리는 곳으로 뛰어들어 파괴의 불로부터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영웅들이다. 미국에서는 청소년이 바라는 직업의 1순위에 올라 와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소방관의 이미지가 그와 같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드물다. 가끔씩 티비 화면을 통해 큰 불을 끄다 순직한 소방관들 이야기를 보다 보면 그것은 기껏해야 고되고 위험해서 젊은이들이 지원하려 하지 않는 3D 업종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화재나 재난은 일순간에 한 가정이나 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어 버릴 수 있는 위험한 사건이고, 날마다 화재 현장에 뛰어 들어 목숨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소방관들의 활동이 없다면 우리의 재산과 안전을 누가 보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매일 같이 일어나는 화재 현장에서 생사를 가늠하는 전투를 벌이면서 인명 구조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드물게 전쟁 상황에 비교해 볼 수 있는데, 문제는 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영웅적 전투가 이 사회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고 있음에도 그들에 대한 사회적 인지도가 낮다는 점이다. 왜 그런 걸까?

 

그 이유 중의 상당 부분은 소방 활동을 표피적으로만 보도하는 대중 매체에 기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의 저변에서 묵묵히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배려가 낮은 우리 사회의 전반적 경향에 기인한다. 또한 소방 현장에서 남다른 경험을 겪는 이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일반인들이 공감하는 형식으로 전달하는 작품이 드물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이런 가운데에 형제 소방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다룬 외화 [백드래프트]나 사이코 방화범과 소방관의 심리전을 다룬 방화 [리베라메]같은 영화는 일반인들이 소방관들의 위험하고 영웅적인 행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드문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대학의 철학교수가 10여년을 묵묵히 자원 소방관으로 활동하면서 느낀 체험을 기록한 이 글은 그 자체만으로 감동의 여지가 있을뿐더러 소방관들과 그들의 고난의 현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많다.”

 

지금 와서 하나 더 덧붙이자면 비용이고 경제논리이다. 우리 사회는 이런 사고와 재난관리에 들어가는 비용을 불필요한 우연적 비용 정도로 생각하고, 관련 인력도 사정이 어려울 경우 정리 대상 일순위이다. 신자유주의에 세뇌된 정부는 기업의 이익을 보호한다고 안전관리에 관련된 규제부터 풀어버린다. 기업은 수익 극대화를 위해 노후 선박을 들여와 증개축을 한 것도 모자라 과적을 정상으로 만들어버린다. 먹이 사슬로 얽힌 관리 감독청은 감독의 책임을 로비 비용이나 접대로 눈감아 버린다. 이들에게 국민과 승객의 안전을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정도이다. 그동안 사고가 안 난 것이 우연인지 모르겠다. 세월호의 경우, 지난 한 해 안전과 관리된 선원 교육비용은 54만원인데 반해 접대비용은 6천만원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6,800톤급 선박의 항해 책임자가 1년 계약직이고 선원들의 절반 이상이 고용 1년이 안 된 계약직이라고 한다. 선내 서비스를 담당하는 대부분의 승무원들도 계약직이다. 승무원들의 연봉도 타 선사의 2/3 정도뿐이 안 된다고 한다. 이렇게 비용을 절감해서 거둔 수익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유병언 일가가 십 몇 년 사이에 청해진과 그 계열사로부터 무려 천억을 거두어갔다고 한다. 결국 걸레 짜듯이 쥐어 짜가지고 소수의 고액 연봉자들의 배를 채워 주는 셈이다. 이런 구조와 시스템에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아울러 다수가 이런 불안한 삶을 이어가는 상황에서 소수의 탐욕자들의 삶과 지위가 과연 안전할 수 있는가? 과연 이것이 세월호만의 문제이고, 우리 사회의 다른 부분은 이로부터 자유로운가? 이번 사고를 처리하는 과정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는 것은 산 자들의 몫이리라.

 

Memento mori. 베를린에서 바쳐진 애도의 물결. [베를린에서 온 편지]-2

Memento mori. 베를린에서 바쳐진 애도의 물결. [베를린에서 온 편지]-2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활짝 핀 나무조차 사람들이 그 만개 밑에 가려진 공포의 그늘을 인지하지 않는 순간 거짓말을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순진무구한 표현도 아름답지 못한 존재자를 치욕스럽게 하는 구실이 된다. 아름다움이나 위로란 더 이상 없으며, 있다면 그것은 오직 다음의 시선, 즉 공포를 직시하고 감내하며 ‘부정성’에 대한 단호한 의식 속에서도 더 나은 상태에 대한 가능성은 놓치지 않으려는 시선이다.”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5월 3일. 화창한 날씨였다. 전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베를린 최대 관광지인 브란덴부르크문(Brandenburger Tor)에서 따스한 햇살을 쐬며 맥주에 쿠리부어스트(베를린의 명물 간식)을 즐기던,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하고 행복한 토요일 오후였다. 이곳 한복판에 느닷없이 검은 상복을 입은 한국인 약 2백여 명이 나타났다. 슬픔을 머금은 표정을 하고, 다시는 이 푸르른 하늘을 두 눈으로 볼 수 없을 가여운 영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리고 수백 명의 생명, 그것도 대다수가 고등학생들인 이들이 차디찬 바닷물 속에서 숨을 거두도록 방치한 이 무능하고 부패한 사회에 침묵으로 항거하기 위해.

이날 거행된 베를린 시민분향소에 참여한 참석자들의 표정은 침통했다. 이 맑은 날씨를 원망이라도 하듯.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2백여 명의 조문객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어린 생명의 죽음에 부채감을 느끼는 어른들은 이제 자신들의 삶마저 원망스러워할 지경이다. 누가 이런 끔찍한 비극을 초래했는가? 부패한 정부, 조작과 기만이 일상이 된 사회는 인명구조에 무능하다. 지독히도 슬프고 비극적인 결론이다. 참석자들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선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최소화하고, 희생된 이들의 영혼에 깊은 위로를 전달하고자 했다.

SAM_0366사전행사로 기획된 단체 묵념, 바이올린 협주와 성악 공연, 독어로 번역된 유가족 어머니의 편지 낭독을 마친 뒤, 2백여 명의 조문객들이 각자 마련해온 흰 꽃을 헌화하면서 분향예절을 거행했다. 모두의 가슴엔 노란 리본이 달려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독일인들을 비롯한 외국인들 상당수도 함께 헌화를 하고 망자의 영혼을 위로했다. 이들 역시 언론을 통해 한국 정부의 무능함이 수백 명의 희생자를 낳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한국의 현실에 대해 언론이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 나라는 어찌 보면 한국이 유일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공영방송과 대형일간지들이 정부의 공식발표만을 옮겨적는 동안,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주요 일간지들은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한국정부의 무능함에 대해 신랄하게 꾸짖고 있었다. 비록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이 다를지언정, 우리를 지켜보던 수많은 외국인들의 연대의 정서는 우리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에서 온 루크라는 젊은이가 전통 파이프연주를 통해 “Amazing grace”를 연주했을 때, 우리는 국경을 초월해 이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희생자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헌화를 하고 분향을 한 뒤, 망자에 대한 예의로 절을 하고 나서 한참을 몸을 일으키지 못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고개를 바닥으로 숙이고 절을 하던 사람들은 어째서 몸을 일으킬 힘을 잃어버린 것인가. 어째서 우리는 어린 생명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에 통탄할 만큼 비참함을 느껴야 하는가.

침몰하는 배는 벤야민이 말한 바 있는 “변증법적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즉 그것은 단지 하나의 우발적인 사건으로서 우리에게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처한 절망과 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와 분노가 “집단 무의식”의 형태로 투영된 하나의 이미지였다. 사건 초기, 180도 뒤집혀 파란 선수만을 수위에 남겨놓은 채 침몰해버린 배의 이미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이 땅 속으로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은 현기증을 일으켰다. 그것은 세월호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침몰해간다는 위기의식이었다. 조타수를 쥔 사람들은 승객들에게 “제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한 뒤 그들 자신이 가장 먼저 구조되었다. 선장에게 버림받은 채 차디찬 바다 속에 가라앉아 희생되어야 했던 생명들은, 마치 경제위기 시 사측의 이윤을 보장하기 위해 가장 먼저 잘려나가야 하는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에 대한 알레고리였다. 버림받은 어린 생명들이 희생되어야 했듯이, 이 사회는 언제나 강자의 생명을 보장해주기 위해 약자가 희생되어야 하는 구조와 논리를 지니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일체의 희망도 없는 지금의 ‘버림받은 세대’는, 죽어야 했던 어린 생명들과 자신들을 일체화했다. 그들은 슬퍼했고, 절망했으며, 이 절망이 분노로 바뀌는 순간에, 그들은 ‘침묵행진’이라는 방식으로 이 모든 것을 낳은 한국 사회에 항거했다. 아무런 말 없이, 그러나 깊은 울림을 안고.

?정부에 항의하는, 안산 단원고 학부모들인 유가족들을 보수층이 증오하는 것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사회 질서를 그 자체로 절대적인 것으로 떠받드는 자신들의 논리상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식을 잃고 절규하며 “내 아이를 살려내라”고 외치는 부모들이 “종북”이라며, 그들에게 “시체장사”라는 표현을 붙인다. 그들이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 한국의 사회 시스템에 자신들의 불만을 제기하는 모든 세력은 ‘종북’이다. 심지어 그것이 살 수 있었던 생명이 이 정권의 무능함으로 인해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왔을 때, 차디찬 주검을 마지막으로 안아본 뒤 장례를 치러야 하는 부모들이라 할지라도. 한국 보수세력과 현정권은 인간의 존엄을 짓밟아버렸다.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자들의 처절한 외침마저 그들에겐 “종북”의 논리가 된다. 그런데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가만히 있으라”는 메세지에 더 이상 순응하지 않는, 그들의 말대로 가만히 있으면 우리 모두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친, 각성한 새로운 세대의 “버림받은” 청년들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침묵행진을 벌이려던 청년들과 시민들을 경찰병력을 동원해 감금해버렸다. 마치 “청와대로 가자”고 외치던 실종자 가족들을 경찰력으로 저지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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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칼 슈미트적 의미에서의, 주권자에 의해 선포된 예외상태가 아니라 아감벤적인, “벌거벗은 생명(호모사케르)”에 의해 개시된 예외상태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지금일 것이다. 죽어간 생명의 넋은 지금, 연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누가, 이 억울한 죽음에 항거할 것인가? 바다 속에 수장된 ‘벌거벗은 생명’을 위해 눈물짓는 자들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문받는 자가 비명지를 권리를 갖듯이, 영원한 고통은 표현될 권리를 갖는다.”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고통의 표현욕구가 실천적 충동을 낳고, 이는 총체적 지배 하에서도 윤리와 정치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이 아도르노 철학의 한 축이다. 고통(Leiden)은 실천적 열정(Leidenschaft)의 근거가 된다. 세월호 이후 윤리와 정치, 즉 ‘실천’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우리의 미메시스적 충동이 분노의 파토스로 이어질 때일 것이다. 이 분노의 파토스(부정성)를 변화의 긍정적 힘으로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정치’의 과제다.

 

침몰한 세월호와 마찬가지로 한국사회가 침몰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조타수를 잡은 세력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겨도 좋은 것인가? 우리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지시한 뒤에, 그들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먼저 배를 빠져나갈 사람들에게 우리의 생명을 맡겨도 좋은 것인가? 푸른 하늘과 만개한 푸르른 나뭇잎의 싱그러움마저도 삶의 약동이 아니라 집단적인 죽음에 대한 죄의식으로서 우리를 짓누르는 이 순간에, 베를린의 야속한 푸른 하늘은 우리에게 준엄하게 묻고 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무덤이 우리에게 말하듯, “죽은 자는 우리를 깨우친다.” 이 벌거벗은 생명이 불러일으킨 “예외상태” 속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 주권권력의 공백상태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 것인가??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2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2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자,?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들었어요.?그러나 지금 우리가 따져 보려는 건 어느 낱말의 울타리 속에 더 많은 것들이 들어가느냐가 아니고 낱말이 지닌 틀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이니까,?잠깐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금만 더 제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제가 알고 싶었던 건?‘있는 것’이라는 낱말이 그 안에 담길 수 있는,?더 그릇이 큰 낱말이 따로 있느냐는 것입니다.?그러니까?‘사람’보다는?‘동물’이 더 그릇이 큰 낱말이고, ‘생물’보다는?‘있는 것’이 더 그릇이 크지요??그럼?‘있는 것’?다음에?‘있는 것’까지 담을 수 있는 더 그릇이 큰 낱말이 있나요,?없나요?”

“글쎄요??없는 것 같은데요.”

학생들의 시큰둥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러면,?이제 이 그릇이 가장 큰 괴물 단지〔논리학에서는 이것보다 더 울타리가 넓은 낱말이 없다고 해서 잔뜩 어려운 말로?‘존재라는 개념은 최고의 유개념(類槪念)이다.’라고 게거품을 무는데,?그런 말은 잊어버리고〕?‘있는 것’이라는 낱말에만 주의를 기울여 봅시다.?그리고 여러분 말대로?‘있는 것’이라는 이 괴물이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라고 칩시다.?그런데 여럿의 가장 작은 수(이것을 여럿[多]의 최소 단위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는 몇이지요??그렇습니다.?둘이지요??하나,?둘의 둘.?그러면 이제?‘있는 것’이 두 마리라고 치고 그놈들을 나란히 놓아 보기로 할까요?”

그림1

그림1

“앞에 있는?‘있는 것(ㄱ)’과 뒤에 있는?‘있는 것(ㄴ)’이 서로 다른 것이 되려면 떨어져 있어야 하겠지요??만일에 이 두 놈이 한데 붙어 있으면 우리는 두 마리라고 할 수가 없잖아요??그런데 이 두 마리가 떨어져 있으려면 둘을 떼어 놓는 무엇인가가 사이에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여러분과 저 사이에 공간이 있듯이 말입니다.”

학생들은 제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럼,?앞에?‘있는 것(ㄱ)’과 뒤에?‘있는 것(ㄴ)’을 갈라놓는 이 금은?‘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학생들은 갑자기 어리둥절해진 것 같았습니다.

“‘있는 것’이요.”

한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있는 것’이라고요??그럼?‘있는 것(ㄱ)’, ‘있는 것(금)’, ‘있는 것(ㄴ)’?죄다‘있는 것’이네요.?구별이 안 되네요.?따라서?‘있는 것’?두 마리를 갈라 놓는 금도?‘있는 것’이라는 괴물이라면 이 괴물을 구태여 셋이라고 할 필요가 없지 않겠어요??죄다?‘있는 것’이니?‘있는 것’은 하나이지요.”

야바위 노름에서 잠시 딴전을 피우다가 헛짚었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학생이 얼른 대답했습니다.

“그럼, ‘없는 것’이요.”

“그럴까요??그런데?‘없는 것’이 뭐지요??그거 그냥 없는 것 아니에요? ‘없는 것’이니까 없지요??그럼?‘있는 것’?둘을 갈라 놓을 수 있다는 금은?‘없는 것’이네요.?그러니까 금은 없네요.?따라서?‘있는 것’이라는 괴물은 여전히 하나로 있네요.”

학생들은 야바위 노름에서 호주머니를 죄다 털려서 빈털터리가 된 풋내기 도박꾼처럼 씩씩댔습니다.

“이건 제가 꾸며 낸 야바위 노름이 아니고,?서양 고대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라는 사람의 생각입니다.?그 사람은 이 세상에는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는데 있는 것은 이렇게 모두 달라붙어서 하나로 있다고 주장했어요.?그런데 이상한 것은 우리 나라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예요.?특별히 철학을 공부하지 않은 두메 산골 할머니에게 물어 봐도?‘그래,?이 할멈은 학교 문턱도 밟아 보지 못해서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제 잉,?그래도?‘있는 것이 없네.’?이 말이?‘하나도 없네.’라는 말이라는 것까지 모르까 잉.?그것이 뭣이 그렇고롬 어렵다고 그래들 해쌓는지 모르겠어 잉.’?하고 대답할 것입니다.?그러니까,?있는 것이 없어지면 조금씩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도 남김없이 깡그리 없어진다는 건데,?그것은 있는 것이 하나로 뭉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조금씩 떼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뒤이어 저는 파르메니데스라는 괴짜가?‘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다.’는 말까지 했다는 것도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선생님,?서양 철학의 특징 하나는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지고 까닭을 밝히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그런데 파르메니데스인지 허여무레데스인지 하는 자가 그렇게 주장한 까닭이 뭡니까?”

한 학생이 당돌하게 묻더군요.?그래서 믿거나 말거나라는 생각으로 이렇게 대답했지요.

“우리는 흔히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고 믿고 있잖아요??그런데 파르메니데스인지 누르무레데스인지 하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과거란 뭐냐??그것은 이미 없는 것이다.?또 미래란 뭐냐?그것은 아직 없는 것이다.?이미 없거나 아직 없거나,?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따라서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다.?그러니 시간이라는 게 있을 게 뭐냐?있는 것은 현재뿐이다.’?어때요??그럴 듯하지 않나요??그럴 듯하지 않다고요?”

그러니 별수 있나요??저는 자기 선생의 이 이상한(?)?이론을 뒷받침하려고 갖은 애를 다 썼던 파르메니데스의 제자 제논(Zenon)까지 들먹여야 했습니다.

“파르메니데스가 시간이 없다고 하자 사람들은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그게 말이나 되느냐고 들고 일어섰어요.?그러자 제논이 나섰지요.?제논이 그 사람들에게 한 이야기는 대강 이런 것이었어요. ‘당신들 말대로 시간이 있다고 치자.?그러면 시간의 최소 단위가 있을 것 아니냐??그 최소 단위를 시간의 원자로 치고 그것을 순간이나 찰나라고 부르기로 하자.?그런데 그것이 시간의 가장 작은 구성단위이니까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것이어야 하겠지.?그리고 시간은 그 구성단위들이 보태져서 생겨난 것이겠지.?그럼 내가 여기에 그림을 하나 그려 보마.

그림2

그림2

이 그림에서 한 칸 한 칸은 시간의 최소 단위인 찰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치자.?그림의?ㄱ은 정거장을 나타낸다.?그리고?ㄴ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나타낸다.?이 기차는 한 찰나에 정거장 한 칸을 지나간다.?ㄷ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나타낸다.?이 기차도 마찬가지로 한 찰나에 정거장 한 칸을 지나간다.?ㄴ과?ㄷ의 한 칸 한 칸도 마찬가지로 한 찰나를 나타낸다.?두 찰나가 지나면 이 두 기차는 동시에 정거장에 들어와서 그림?3과 같이 바뀐다.

윤구병 그림 1-3

정거장?ㄱ을 중심으로 보면?ㄴ과?ㄷ은 두 찰나에 모두 정거장에 들어왔다.그러나?ㄴ과?ㄷ을 비교해 보자.?그러면?ㄴ과?ㄷ은 두 찰나에 네 칸을 서로 지나 왔다는 것을 볼 수 있다.?우리는 앞에서 시간의 최소 단위는 찰나이고,기차는 한 찰나에 한 칸밖에 갈 수가 없다고 했다.?그런데 이게 웬일인가?두 찰나가 네 찰나로 둔갑한 것이 아닌가??다시 말하면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다고 믿었던 시간의 최소 단위가 둘로 쪼개진 것이다.?따라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시간의 최소 단위가 있다는 말은 헛소리고,?시간의 최소 단위가 없으므로 그 최소 단위들이 모여서 이루는 시간도 없다는 게 맞는 이야기다.?그렇지 않은가?’?제논은 공간이 없다는 것도 비슷한 방법으로 증명하려고 들었어요.?파르메니데스는 그저?‘공간이 있다면 여기,?저기라는 말을 쓸 수 있어야 하는데 잘 아다시피 여기는 저기에 없는 것이고 저기는 여기에 없는 것이다.?그런데 없는 것은 없으므로 저기 없는 것인 여기도 없고,?여기 없는 것인 저기도 없다.’는 식으로 말했는데,?제논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공간은 일정한 크기를 가진 것이 놓인 자리이거나 일정한 크기를 지닌 빈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그런데 크기를 가진 것은 쪼개질 수 있다.?우리가 크기를 가진 것이 있다고 말하려면 크기를 이루는 최소 단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여기에 일정한 크기를 가진 줄〔line〕이 하나 있다고 치자.?그리고 우리가 머릿속에 칼을 가지고 있어서 그 줄을 쪼개고 또 쪼갠다고 치자.?크기를 가진 것은 아다시피 무한히 쪼개질 수 있으니까 우리는 이 줄을 무한히 쪼개 갔다고 보고,?그 결과로 크기의 가장 작은 알맹이를 얻었다고 하자.?그런데 그 크기의 가장 작은 구성 단위는 크기가 없거나 크기를 가진 것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만일에 그 가장 작은 구성 단위가 크기를 가지지 않은 것이라면 크기가 없는 것을 무한히 더해 봤자 거기서 크기가 있는 것이 나오지 않는다.?마치 수학에서?0을 아무리 보태 보았자?0밖에 안 되는 것처럼.?반대로 만일에 그 가장 작은 단위가 크기를 가지고 있고 모두 꼭 같은 크기를 지니고 있다면 크기를 가진 것을 무한히 더하면 처음에 가정했던 일정한 크기를 지닌 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긴 줄이 나오게 된다.?이 두 가지 모순되는 결과가 나오는데 어떻게 크기의 가장 작은 단위가 있다고 할 수 있겠으며,?크기의 최소 단위를 찾을 수 없는데 어떻게 크기로 이루어진 공간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이렇게 해서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은 시간과 공간마저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지요.”

그러고 나서 저는 마치 제가 파르메니데스라도 되는 것처럼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여러분은 없는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나요?”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느냐고요??왜 못 해요??황금산,?우주마왕,?춘향이와 이 도령,?이렇게 우리는 현실에 없는 것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잖아요?”

“그것은 없는 것에 들어가지 않아요.?상상 속에 있든지,?소설 속에 있든지 그것도 있는 것은 있는 것이에요.?아예 없는 것,?흔히 허무라고 하잖아요?그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겁니다.”

“글쎄요.?그건 생각할 수 없는데요.”

한 학생이 마지못해 뾰로통하게 대답하더군요.

“그러면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말할 수도 없지요??그렇지요?”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예.”

학생들이 불만스럽다는 듯 대답했습니다.

“정말 우리는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나요?”

저는 다시 다짐을 했습니다.

“예에―.”

모두 고삐에 묶인 소처럼 대답을 길게 뺐습니다.?자,?이렇게 해서 우리는‘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시간도 공간도 없는 것이다.’라는 파르메니데스의 덫에 치이고 말았습니다.?마침 서양 중세 철학사 시간이었기 때문에,?그리고 저는 그리스 철학이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중세 철학자(신학자라고 해도 무리는 없겠지요.)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꺼낸 참이기에 내친김에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파르메니데스인지 까마무레데스인지 하는 괴짜와 그 사람 제자인 제논인지 남의 논인지 하는 자의 세 치 혀끝에 녹아나 시간도 공간도 없는 곳,?모두가 달라붙어서 하나가 되어 버린 있는 것만 있는 세계까지 와 버리고 말았습니다.?이 하나뿐인 있는 것,?시간도 공간도 없으므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영원한 세계에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유일신?‘하나님’입니다.?시간이 없으므로?‘하나님’은 영원하고,?공간이 없으므로?‘하나님’은 여기나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루 있는 것,?곧 편재하는 것입니다.따라서 중세 신학자들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신은 히브리의?‘하느님’이 아니라 그리스의?‘하나님’인 파르메니데스의 있는 것,?곧 하나입니다.”

제 말이 얼마나 맞아떨어질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그러나 저를 가르치신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은 플라톤의 정신적인 부모이고,?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정신적인 자식인데,?중세 철학자들,그 가운데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기둥으로 삼아 자기들의 신학을 세웠다고 하니,전혀 터무니없는 생각은 아닐 듯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발붙이고 사는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시간도 공간도 없고,?따라서 이것,?저것도 없고,?과거도 미래도 없다면,?이 세상도 말짱 헛것이겠네요.”

제 이야기를 듣던 학생 하나가 한숨을 포옥 내쉬면서 이렇게 뇌까렸습니다.

“물론이지요.?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것을 현상 세계라고 하는데,?시간과 공간에 얽매여 있는 이 세상은 말짱 덧없는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되게 허무하네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렇지요.?중세 기독교 신학에 젖어든 많은 기독교도들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을?‘헛되고 또 헛되도다.’?하고 중얼거리는 것도 파르메니데스의 탓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어요.?그러나 여러분,?그렇다고 해서 파르메니데스나 제논을 허무주의자나 허무 사상을 퍼뜨리고 다닌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돼요.?여담이지만 제논에 대해서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제논이 살던 엘레아에 네아르코스라는 독재자가 있었는데,제논은 네아르코스의 독재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지하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그런데 어쩌다 들통이 나서 제논은 동료들과 같이 붙들리게 되었다는 겁니다.?그런데 네아르코스의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다른 동료들이 전부 자백을 했는데도 제논은 끝까지 동료들을 팔지 않고 버텼대요.?그리고 제논을 죽이기 전에 네아르코스가 직접 고문을 하면서 이제 그만 털어놓으라고 하자 네아르코스에게?‘아직도 나는 내 혀의 주인이다.’라고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는 자기 이빨로 제 혀를 끊어서 네아르코스의 얼굴에 내뱉었다고 합니다.”

한참 지껄였다고 생각했는데,?이제 보니?‘있는 것이 없다.’는 말에서만 곁가지를 친 셈이군요.?그러면 다음으로?‘없는 것이 있다.’는 말로 넘어가기로 하지요.?이 말은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우리를 거짓의 세계로 이끌어 가는 함정입니다.?그리고 어느 면에서는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사실이기도 합니다.?구태여 파르메니데스를 들먹이지 않더라도,?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이 참말이고,?없는 것을 있다고 하거나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던가요??그러나 따지고 보면 이제까지 우리는?‘없는 것은 없다.’라고 하면서,?따라서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말할 수도 없다고 하면서 줄곧 없는 것이라는 말과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지 않았습니까??그러고 보니,?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니라,?없는 것을 빼면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없는 것을 생각하고 말할 수 없다는 없다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되었을까요??이 세상 어딘가에 없는 것이 있는 것이나 아닐까요??왜냐하면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을 되비추고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없는 것을 생각하고 없다는 말을 할 수 있다면 이 세상 어딘가에 없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따라서?‘없는 것이 있다.’는 말을 단순한 거짓말로 돌려 버릴 수 없습니다.

 

안토니오 네그리 외 <탈정치의 정치학>[철학자의 서재]

안토니오 네그리 외 <탈정치의 정치학>[철학자의 서재]

김범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2008년 촛불의 진짜 ‘배후’!

 

자율의 이중성

 

5공화국 시절 중고등학생들에게 ‘자율’이라는 말은 환영과 동시에 엄청난 부담감을 안겨주었다. 전두환 정권의 포퓰리즘은 프로스포츠, 국풍사업뿐 아니라 학생들의 두발 자율화, 교복 자율화를 들고 나왔다. 그 당시 학생들은 그 자율화를 반겼다. 교복은 학생들을 억압해왔던 ‘상징’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 ‘상징’이 무너지는 것은 학생의 인권 신장이라는 막연한 즐거움을 안겨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자율화는 학교의 권위, 교사의 권위 앞에서 다른 방식으로 코드화되어 학생들을 억압했다. 아무리 두발 자율화라고 하지만 머리 긴 것은 용납이 안 된다. 그리고 여지없이 ‘바리깡’을 들고 교실을 감시하는 교사. 결국 자율은 또 다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의식을 주입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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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3일 시청앞 광장 촛불 집회ⓒWikipedia

이런 자율의 이중성은 학생들의 두발이나 교복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자율주의’라는 말은 아마도 2008년 촛불집회 때문에 널리 보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해 5월, 6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였다. 그리고 그 현상은 아직도 우리 사회 변혁을 진단하는 변곡점으로 파악된다. 촛불문화제의 모습은 여느 시위 문화와도 달랐다. 행사를 주도하는 단체도 없고, 모인 주체도 특정한 하나의 집단으로 말할 수도 없는 형태였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줌마, 넥타이를 매고 나온 회사원, 교복 차림으로 나온 고등학생들, 심지어 질서와 안전 지킴이를 자처하고 군복을 입고 나온 예비군까지. 그들은 다양한 정보를 공유했고, 수준 높은 지식으로 소통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다중지성’ 혹은 ‘집단지성’이라 칭했다. 그리고 그 집단지성은 즐겁게 놀면서 싸우고, 자율적으로 움직였다.

제발 해산하자는 말을 듣지 않은 채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과 횡단보도 놀이를 하며 거리를 활보했던 사람들. 이러한 자율은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분화되었다. 쌍용자동차, 기륭전자의 싸움에 화답했고, 밀양 송전탑과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저지 등에도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새로운 매체인 팟캐스트를 통해서 소수자들의 목소리, 사회 정의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름도 없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특이한 개체들로 모여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집단의 자율은 제도적 폭력 앞에 다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는 공권력이라는 구실로 물리적인 폭력이 행사되었다면, 지금은 재편된 제도를 이용한 경제적인, 혹은 정신적인 폭력이 자율을 억압하고 있다.

 

다중지성과 자율의 이론적 모델?

 

탈정치의정치학

▲ <탈정치의 정치학 : 비판과 전복을 넘어 주체성의 구성으로>(안토니오 네그리 외 지음, 워너 본펠드 엮음, 김의연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여기서 자율주의는 안토니오 네그리가 행했던 ‘아우토노미아(autonom?a)’를 번역한 말이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1968년 이후 70년대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 운동 과정에서 등장하는 일련의 운동, 특히 네그리가 이론적 중심이 된 모델이 바로 아우토노미아(자율)다.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도 촛불집회 때문에 아우토노미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이 내용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이미 90년대부터였다. 주로 조정환, 윤수종 등이 적극적으로 번역하고 소개했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안토니오 네그리 등이 쓰고 김의연이 번역한 <탈정치의 정치학>(갈무리 펴냄)인데, 그 내용은 아우토노미아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론가들의 논쟁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여러 이론적 상황들을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 명의 저자가 쓴 책이라면 일정한 흐름이 있는데, 불행하게도 이 책에서는 그런 흐름을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의 매력에 빠지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책에 접근하기 위한 기본적인 문제 상황과 이론적 배경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990년대 이른바 ‘한국의 좌파’는 공황상태에 빠져야 했다.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이 몰락하고, 독립 국가들이 탄생하는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폐해를 말하기 위해 그 반대편에 있었던 집단이 필요했으니 그 집단이 사라진 것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절대적 승리라는 주장에 넋을 놓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분명 자본주의는 구조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자본주의도 완전체가 아니라 투석 치료를 받아야하는 신부전증 환자일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르크스를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의 스펙트럼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명하게 되고, 국내 소개하게 되었다.

 

먼저 마르크스의 <자본> 분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류가 있었다. 그래서 알튀세르를 비롯한 프랑스 사회철학자들의 이론이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아예 마르크스주의와 결별을 선언한 그룹도 탄생하게 된다.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계열이 그것이었다. 물론 이런 부류 외에 전통적으로 존재해왔던 스탈린주의를 배격한 마르크스-레닌주의나 레닌조차 배제한 마르크스주의 등의 관점들이 존재한다. 이런 스펙트럼에서 자율주의는 어느 편에 속해 있을까?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

 

이 책을 엮은 본펠드는 자율주의를 ‘이단적 마르크스주의’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 의미는 ‘정통’에 대한 지위를 거부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여러 명이고, 그래서 이 저자들 모두가 이런 입장이라고 단언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스스로 이단적 마르크스주의라는 멍에를 쓴 이 모든 글에서 공통적인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위기를 인정하지만, 포스트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이론을 ‘마르크스를 통해서’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재확인시켜주는 부분이 이 책의 3장 ‘맑시언의 범주들, 자본의 위기, 그리고 오늘날의 사회적 주체성 구성’이다. 이런 공통적인 흐름은 이 ‘이단’이 단순히 마르크스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마르크스를 넘어서 마르크스로 향한다는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여전히 자본 안에서, 그리고 자본에 대항하면서 자본을 넘어서는 노동의 역량을 긍정한다. 그리고 이것이 마르크스의 중심적 개념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율주의의 이론적 배경을 좀 더 알아두어야 한다. 이 책의 매력에 빠지기 힘든 것은 바로 배경 지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다. 먼저 노동의 역량에 대한 부분을 보충 설명해 보자.??

 

Baruch Spinoza(1632~1677)ⓒWikipedia

Baruch Spinoza(1632~1677)ⓒWikipedia

스피노자 철학에서 핵심 개념 중 하나로 ‘코나투스(conatus)’가 있다. 이 말은 ‘생을 지속시키려는 힘’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철학사에서 오랫동안 이단으로 취급받던 인물이다. 그런데 프랑스를 중심으로 스피노자를 재해석하기 시작한다. 그중 스피노자의 ‘역량(potentia)’이나 ‘정동(affect)’ 따위의 개념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중요 개념이 된다. 네그리를 비롯한 자율주의 사상가들도 이런 해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물론 네그리가 프랑스 사상가는 아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정치적 박해 때문에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여기서 가타리, 알튀세르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특히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을 특정한 개체에 한정시키지 않고 집단에 활용했다. 그래서 집단적 코나투스에 해당하는 ‘다중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는 명목상의 권력을 비판하고, 모든 권위에 대한 부정과 저항의 의미를 담을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자본의 권력과 부도덕한 권력에 대항하여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주체성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이 집단의 힘은 강할 수는 있지만, 결코 사회 변혁이라는 구도로 배치된다는 보장은 없다. 여기에는 반드시 독특한 주체 개념이 상정되어야 한다.

 

네그리는 <전복의 정치학>(최창석·김낙근 옮김, 인간사랑 펴냄)에서 주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적이면서도 프롤레타리아적이고 다양하면서도 평등에 대한 집단적 요구를 하며 정치적 타협을 하면서도 생존과 투쟁을 위한 윤리적 결단을 추구하는 주체.”

 

비록 포스트모던한 사상가들이라고 하는 인물들 중 일부는 주체에 대해서 개체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있거나 주체 중심의 사고를 거부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변화의 중심을 이끌어갈 수 있는 주체는 필요하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이성주의의 그림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개념이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제국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고유한 역량을 탈정치의 윤리적 성격으로 정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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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주체들은 노동의 조건 자체가 변화되는 상황과 함께 연구된다. 자율주의에서는 이러한 변화와 연관해 ‘비물질적 노동’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말은 스피노자의 정동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도 ‘감정 노동’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업을 비롯해서 정신적 에너지를 소비하는 노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과거에 이런 노동은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지 않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에서는 새로운 생산 패러다임을 갖게 만들었으며, 이런 패러다임은 생산의 탈중심화, 탈장소화를 가능케 했다.

 

이런 노동의 양식은 자본의 운동 방식을 재탐색하게 한다. 이 책에서는 1장 ‘태초에 절규가 있었다’와 8장 ‘자본이 운동한다’에서 자본 권력이 아니라 불복종적인 노동의 역량을 다루고 있다. 또한 7장 ‘발전과 재생산’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소통과 접속의 확장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서 자율 공간의 창출에 공헌하는 주체성에 대한 논의를 분석한다.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탈정치의 정치

 

일상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탈정치인 것으로 각인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중립적인 태도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율주의에서의 탈정치란 이렇게 정치에 무관심한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인간을 규정하는 말 중에서 ‘사회적 동물’이라는 정의가 있다. 원래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말을 번역한 것인데,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고 비판받고 있다. 적절한 번역 용어는 ‘정치적 동물’이다. 이 말은 인간이 고대 도시 국가인 폴리스에 거주하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혹은 경제적인 것)을 엄밀하게 구별하게 된다. 공적인 것이란 폴리스 전체와 관련된 일이고, 사적인 것이란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적인 것으로 한정된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즉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이 서로 구별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는 경제 체제인데 어떻게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제외하고 공적인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자율주의에서 탈정치는 엄밀하게 보자면 공통적인 것의 복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공통적인 것에는 사적 소유 관계와 신자유주의적 전략들에 대립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자본은 자신의 소유 관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국가라는 허울을 쓰고 있고, 이 국가들은 다시 자본의 논리에 맞춰 제국주의적 성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먹고사는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의 모든 성원들에게 공통적인 것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탈정치는 역설적으로 매우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이런 고민을 10장 ‘정치적 공간의 위기’와 13장 ‘공적 공간의 재전유’ 등에서 만날 수 있다.

 

자율주의의 문제의식과 추이를 조금만 이해한다면, 이 책엔 우리 현실과 비교해서 사색의 깊이를 더할 내용이 많다. 자율에는 반드시 통제가 뒤따라왔다. 그런 의미에서 자율이 통제 사회 안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발전하기 위해서, 집단들의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는 가치의 전유가 필요할 것이다. 이런 고민을 통해서 현재 우리 사회에 놓여 있는 통제 사회의 징후를 차단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고민을 깊게 만들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은 자율주의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하지 않다. 이 책을 재미있게?읽기 위해서는 조정환이 쓴 <아우또노미아>(갈무리 펴냄)나 윤수종의 <안토니오 네그리>(살림 펴냄)와 같은 책을 미리 읽어보길 권한다.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2

<나르시시스적 공상으로부터 깨어나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④-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잘못에 대해서는 집착하지 말고 반성하자

 

?‘틀리지 말아야 한다’는 전제를 잘 검토해보면 그것 자체가 교만임을 알 수 있다. 자기 자신이 틀리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틀렸다는 것 자체에 대해 그리도 분노하게 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의 잘못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 잘못을 계속해서 반복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잘못을 수용하려다보면 그 잘못을 끊어내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이와 같이 잘못을 했을 때 피해야 하는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가 있다. 하나는 그 잘못으로 인해 너무 화가 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너무 느슨하게 ‘그럴 수도 있지 뭐’로 용인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화를 내면 다시 그런 일을 하지 않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기는 하지만 너무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다른 사람의 실수에도 상당히 경직된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렇다고 너무 느슨하게 어떤 실수에도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해.’ 하면서 용인해버리면 반성이 안 되어 다시 동일한 잘못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양 극단의 태도 사이에서 적정한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화내지 않으면서 잘못의 내용만을 깊이 의식해야 한다. 잘못을 했을 때 그것이 잘못임을 깊이 의식하고 다시 이 잘못을 하지 않으려면 어떠한 점을 조심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생각한 후 다시 하지 않도록 조심하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이 좋다. 자책이나 후회를 하지 말고 반성을 하자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어떤 문제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문제와 어떻게 적절하게 관계설정을 할 것인가이다. 문제없는 사람은 없으니 나는 나의 문제와 함께 잘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려 들지 않게 되고 대신에 완전하거나 자족감을 주는 이미지에 자신을 투사하려고 애쓴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게 되기 때문이다.

완전하거나 자족감을 주는 이미지에 자신을 투사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완전하거나 자족감을 주는 이미지를 자신의 마음 안에 심어놓고는 자신이 그 이미지에 부합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자꾸만 확인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잘났다’는 전제에 매여 자신의 열등한 부분을 보지 않기 위해 타인의 열등한 부분을 찾아내고 타인을 아래로 쳐다보는 태도를 취하며 안심하려 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슬픈 시도이다. 누구와 비교해보아도 다른 사람에게는 나보다 잘난 부분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약점은 언제나 발견되게 마련이라 이는 영원히 성공할 수 없는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는 스스로를 소외시킨다. 이는 결국 자신의 진짜의 모습을 볼 용기가 없어서 자꾸만 허상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스스로에게 자신이 있으면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게 된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을 받아들이고 있으면 자신이 잘났음을 확인해야만 안심하는 심리구조를 가지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나르시시르적 공상에 매인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마음 깊은 곳에서 스스로를 열등하게 느끼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 자신의 진실에 접근할 자신이 없는 사람이 나르시시스적 공상에 지나치게 빠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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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ho and Narcissus-John William Waterhouse

John William Waterhouseⓒko.wikipedia.org

자신의 단점을 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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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단점을 무시하지 않는다.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함께 볼 용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단점을 볼 용기가 없어서 스스로에게 나르시시스적 허상을 자꾸만 덧씌우려 하지 않는다.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수용해 장점은 유지하고 단점은 극복하려 노력하지만 그러한 단점을 가진 자기를 혐오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의 단점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단점을 보지 않으려 너무나 무의식적으로 노력하게 되고 자기가 원하는 자기상을 유지하기 위해 정신적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게 된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자신의 단점을 볼 용기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의 단점과 화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사람들은 싫어한다. 오히려 자신의 단점과 잘 화해하는 사람을 멋있다고 느낀다. 누군가가 단점을 가지고 놀림거리로 삼아도 “그래! 나 그런 단점 있어! 그게 뭐 어때서? 단점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의 당당한 태도를 취하면 그 사람을 멋있게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쪽에서는 별 말 없이 던진 말인데도 그 말에 열등감을 느끼고 피해의식을 가진 반응을 보이게 되면 그런 사람을 대하는 것이 불편해지고 힘들어진다. 자신의 단점을 당당하게 수용하는 사람은 멋있게 느끼게 되지만 자신의 단점에 주눅들어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 사람이 오히려 더 우스워보이게 된다.

인간이란 존재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점을 줄이고 장점을 확대해나가는 것뿐이다. 그런데 나르시시트들의 경우는 그럴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된 자기를 만나지 못하고 거짓된 자기상에 매달린다. 그래서 타인이 자신의 문제를 지적하면 받아들이지 못하고 건강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하고 힘들어하게 된다.

열등감에 시달린다는 것은 내가 우월해야 하는데 우월하지 못해서 화가 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람이 잘 하는 부분과 내가 잘 하는 부분은 달라. 그 사람이 잘 하지만 내가 못하는 부분도 있고 그 사람이 못하지만 내가 잘 하는 부분도 있는 거야. 내가 잘 하는 부분이 없다면 지금부터 발전시키면 돼! 걱정한다고 해서 내가 발전하는 것은 아니니까 걱정하는 데에 시간을 쓸 필요는 없어. 모든 것을 잘 할 수는 없는 거야. 완벽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의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만약에 자신이 나르시시스적 공상에 시달리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이 문장들을 핸드폰에 저장해놓고 하루 한 번씩(혹은 자신감이 떨어질 때마다) 거울을 보며 자기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현대는 우리에게 나르시시스적 공상을 가질 것을 권유한다. 소중한 나를 위해 물건을 소비하라고 속삭인다. 성공이 전부라고 부추긴다. 그러나 성공은 소수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하지 못한 실패자로 낙인 찍혀 살아간다. 무한경쟁의 사회에 살아가면서 우리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만큼의 사회적 인정을 받기는 어렵다. 그래서 원하는 만큼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하는 우리는 사회적 인정을 받는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그 나르시시스적 공상을 충족시키기도 한다.

사생팬이니 이모팬이니 하는 것은 모두 그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현실의 자기는 너무나 초라하지만 내 대신 내가 받고 싶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아주는 그 사람이 있어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행복은 오래가기 힘들다. 그 스타와의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대리만족이기 때문에 그러한 행동이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누구나 어느 측면에서는 못났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잘난 면을 잘 발전시켰을 뿐이다. 그 사람에게 못난 면이 전혀 없다는 착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나에게도 못난 면이 있을 수 있고 타인에게도 못난 면이 있을 수 있다. 존경하고 싶은 사람의 결여에 너무 마음 다칠 필요도 없고 나 자신의 못난 면에 너무 절망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다 어느 만큼은 못났고 어느 만큼은 잘난 것일 뿐이니까 말이다.

다른 사람을 열등하다고 평가해야만 나 자신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인과 나의 각각의 유일무이한 존재 가치를 인정해주면 남과 나를 동시에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남과 나는 다르기 때문에 타인의 독특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나의 독특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의 독특성과 타인의 독특성을 그 자체로 존중해주면서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이들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래서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그러면 옆 사람들이 나의 미소를 되받아 주어 행복해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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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 3기를 모집합니다. [ⓔ시대와철학 알림]

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3기를 모집합니다.?[ⓔ시대와철학 알림]

 

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3

 

?정치철학과 예술철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는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는 진보적 철학자들이 자유롭게 공존하는 모임입니다.?철학을 기반으로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위한 철학 세미나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개설 강좌

 

독일어 원전 강독 연습

강사😕서유석?(호원대 교수)

강독 교재: Max Stirner,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유일자와 그의 소유)

기간: 5월?16일?~ 8월?22일?(12)?매주 금요일 저녁?7– 10?

*?독어 철학텍스트 강독(독일어 초보자도 환영,?문법 강의 함께 진행)

*?대학원생 이상 수강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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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한문 강독 연습

강사😕구태환?(상지대 강사)

강독 교재😕맹자집주(孟子集註)

기간: 5월?22일?~ 8월?21일?(12)?매주 목요일 저녁?7– 10?

*?한문 텍스트 강독(초보자?위주로 진행)

*?학부?3~4학년 및 대학원생 수강 가능

 

분과연합 세미나(공통강좌)??정치철학과 예술철학

기간:??5월?17~8월?2일 매주 토요일?2~5

대상:?학부?3~4학년 및 대학원생 수강 가능

 

1.?정치철학

?맑스 분과

강사:?김종곤?(건국대?연구교수,?맑스분과 회원)

5월?17():?맑스의?<자본론>?상품장 읽기

5월?24():?알튀세르의??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읽기

 

?여성과 철학 분과

강사😕이현재(서울시립대?HK?교수,?여성과 철학분과 회원)

5월?31():?버틀러와 젠더의 해체적 재구성(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6월?7일?():?깁슨그래함과 여성주의 정치경제학(깁슨그래함, <그따위 자본주의>)

 

?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강사😕서영화(서울대,?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회원),

? ? ?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변증법과 해체론 분과 회원)

6월?21():?지젝의?투쟁,?역사성,?의지그리고 무위자연Gelassenheit의 사중주

(Less Than Nothing?4부?13)

6월?28():?지젝의?스피노자,?칸트,?헤겔 그리고?바디우!”

(http://www.lacan.com/zizphilosophy1.htm)

 

2.?예술철학

?헤겔 분과

강사😕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헤겔분과 회원)

이관형(경기개발연구원,?헤겔분과 회원)

7월?5() 😕헤겔미학 강의(1)

7월?19():?헤겔미학 강의(2)

 

?라캉 분과

강사😕이병창(동아대 명예교수,?라캉분과 회원)

7월?26():?라캉의 정신분석학(1)

8월?2일?():?라캉의 정신분석학(2)

 

* 6??14, 7월 둘째 주는 한철연 봄 학술대회와 전체 모꼬지 행사 관계로 휴강

대 상😕대학원 재학생 및 수료생,?학부?3~4학년,?한철연 신진회원

(철학을 토대로 연구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

*?독일어 강독의 경우,?철학과 대학원생

*?강좌 수료 이후에는 일정 절차를 통해 정회원으로 가입하여 각 분과에서 활동 할 수 있음.

*?분과연합세미나의 경우,?전 강좌에 참여해야 함.(부분 수강 불가)

수업 방식😕세미나(필요한 경우 강의 방식 병행)

신청 방식😕메일?(pipjc11@naver.com)로 자기소개서를 보내주세요.

(자기소개서 다운로드😕한철연 홈페이지(hanphil.or.kr)?→?공지사항)

수 강 료?😕없음?(과목당 최대 수강 인원?10,?최소 수강인원?2, 2명 미만 시 폐강)

문 의: 02-332-4301, pipjc11@naver.com

기 간: 2014년?5월 중순-7월 말(8월 말)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3)[대안도덕교과서]-4

욕망과 감정, 그리고 마음의 절제(3)[대안도덕교과서]-4

 

 

최종덕(상지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7. 분노와 절제

 
욕망은 어떤 때는 충동적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습관적으로 나타납니다. 이런 욕망의 특성을 충동적 욕망 혹은 중독성 욕망이라고 표현합니다. 절제란 그런 욕망의 마음을 행동으로 쉽게 옮기지 못하도록 하는 행동의 습관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절제의 뜻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음식을 너무 좋아해서, 먹기를 자제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친구는 대화할 때 욕설이 습관처럼 배어서 욕이 아니면 대화를 못할 지경에 사람도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려는 욕심은 나의 배가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욕을 하는 습관은 나의 혀가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포르노 동영상을 보려는 욕구은 나의 눈이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더 진한 화장을 하려는 욕구는 나의 얼굴이 아니라 나의 마음인 것입니다. 나의 배, 나의 혀, 나의 눈, 나의 얼굴이 요구하는 욕구는 채워질 수 있지만, 나의 마음은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우리는 절제라고 합니다. 절제된 마음에서 비로소 행동 습관이 멈춰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의 무절제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자기감정을 다스리는 절제력이 부족하다고 많이 느낍니다. 느끼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특히 분노에 대한 절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분노는 일종의 심리적 고통으로서 몸의 고통이 있으면 이를 진통제 등으로 치료해야 하듯이 심리적 고통인 분노도 치료의 대상입니다. 분노를 치료하는 방법은 분노를 일으킨 원인을 제거하는 방법이 있지만 현대사회에서 그 원인을 피해가기는 실제로 쉽지 않습니다. 일상적으로 술먹고 들어와 가족들을 못살게 하는 아버지에 대한 분노, 한 번 실수한 것 때문에 일 년 내내 나를 무시하는 담임선생님에 대한 분노, 집에 가는 밤길에 내 돈을 뺐어간 깡패들에게 대한 분노, 나를 왕따시키는 학우들에 대한 분노 등등, 이 모든 분노의 원인들을 헤아릴 수도 없고 적절히 대처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분노를 일으키는 나 자신만 손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를 절제하는 나 자신의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침에 학교를 가다가 지나가는 나와 모르는 자전거에 우연히 부딪쳤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지각하고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화를 풀어야 할까요? 이처럼 의도가 없는 행동에 의해 피해를 보고 짜증내고 화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결국 내 마음만 상처받고 풀리지 않은 채 나의 화만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결국 누가 손해일까요? 어느 누구도 나의 화, 나의 짜증냄을 풀어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조차도 겉으로만 위안이 될 뿐 나의 화낸 나의 짜증냄을 풀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절제의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내 마음속에 일어난 분노를 무작정 참는 것만이 문제해결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분노를 적절하고 합리적으로 표출하는 감정조절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노를 일시에 폭발시킬 경우 본인과 주변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가져다주기 때문에 분노의 적절한 표출은 매우 중요한 삶의 지혜입니다. 어떤 때는 화가 나서 혼자서 교실 뒤에 걸린 거울을 부수기도 합니다. 유리에 다쳐서 피가 나는 그런 몸서리쳐지는 뻔한 결과가 예상되지만, 그런 예후를 고려하지 않고 분노를 표출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청소년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방법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무차별한 폭력을 가하기도 하는데, 이런 끔찍한 소식을 우리는 가끔 뉴스에서 접하기도 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이런 마음의 고통으로서 분노를 내 안에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절히 화를 풀고 짜증을 내지 않는 마음의 윤리학이 필요한 것입니다.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는 것은 고통의 감정에 해당합니다. 분노의 마음은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고통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분노는 사회적 약자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 대하여 자식, 선생님에 대하여 학생, 기업주에 대하여 고용인, 독재자에 대하여 국민들, 이 모두 사회적 약자입니다. 권력에 대하여 느끼는 분노를 풀 행동의 탈출구가 약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분노가 증폭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노를 적절한 곳 적절한 때에 풀지 못하면 엉뚱한 곳에서 터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터트린 분노의 책임은 그 공동체 즉 가족이나 학교 아니면 지역공동체나 국가가 대신 지지 않으며 고스란히 개인에게 되돌아옵니다. 청소년도 사회적 약자입니다. 부모에 대하여 약자이며 학교 선생님에 대하여 사회적 약자입니다. 사회적 약자로서 생긴 분노는 그 공동체에서 책임을 공유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모든 책임은 바로 청소년인 나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이러한 뼈아픈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기 성장의 과정입니다. 결국 분노를 제어하는 방법을 청소년기에 터득해야 합니다. 불행히도 청소년은 그런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단지 ‘분노를 터뜨리는 것은 나쁜 것이니 스스로 잘 통제해야 한다’는 명령적 윤리만 있었고, 왜 내가 분노를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찾기 어렵습니다.

나의 분노는 곧 내 마음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절제가 안 되면 방탕이 됩니다. 물질적 방탕이 방탕의 전부가 아닙니다. 정신적 방탕은 우리 청소년에게 다가온 가장 큰 고통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정신적 방탕, 심리적 무절제를 스스로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하여 부모님이나 선생님 혹은 인생의 선배가 형식적으로 답변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자신의 무절제함을 절제심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묘수는 없습니다. 단지 꾸준한 일상생활의 연습을 통해 행동습관을 바꾸는 데 있을 뿐입니다. 그 연습의 하나로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데 한 순간씩 늦추는 방법이 있습니다.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표출을 하되 표출방법을 가장 효율적으로 그리고 적절하게 또한 제삼자가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마음의 절제로 찾아가는 뾰족한 정답은 없지만, 자신의 무절제함을 관찰하고 반성하는 일상적인 연습만이 가장 가까운 정답인 것입니다.
 
 

8. 욕망과 주체적 윤리학

 
청소년 시기는 자기존재감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저항적 감정을 쉽게 폭발하기도 하고 혹은 나쁜 감정에 휘말리어 평생 눌려서 살 수도 있습니다. 한편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나의 동기를 세워서 끝내는 무엇이든지 이뤄낼 수 있는 잠재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청소년의 징표입니다.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생물학적 보편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안에 욕망의 감정을 직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결단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과정에서 나의 행복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기 위하여 나의 감정을 피해가서는 안 됩니다. 행복에 이르기 위하여 감정들 특히 욕망의 감정을 피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욕망의 감정을 무조건 잘 통제해야 한다는 말과 다릅니다.

이제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의 문제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욕망은 나쁜 것이니만큼 그런 욕망을 싹둑 잘라버려야 한다는 강요된 윤리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게임은 나쁜 것이고 영어공부는 좋은 것이니, 나쁜 일을 하지 말고 좋은 일만 하라는 식의 획일적인 윤리학은 찐정한 윤리적 실천과 동떨어져 있습니다. 윤리학은 욕망의 감정을 무조건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소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욕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 때문에 갈등이 생기기도 합니다. 욕망은 감정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옮기고 싶어 합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싶고 그리고 밥을 먹으려는 준비행동을 준비합니다. 추우면 옷을 입고 따듯한 방에 들어가고 싶으며 또한 그런 행동을 옮기려 합니다. 이런 행동이 지나쳐서 남의 밥을 훔치고 남의 집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윤리적으로 부당한 행동일 것입니다. 그러나 욕망은 나의 행동을 증진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욕망은 세상을 다른 색깔로 칠하는 예술과 과학을 탄생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정리하여 말해봅시다. 욕망이 감정으로 나타나며 이를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 어떤 적절한 조절이 필요합니다. 감정의 조절입니다. 그런 감정의 조절을 규범화한 것이 바로 기존의 윤리학입니다. 감정의 조절은 개인의 책무이기도 하지만 법이나 문화 같은 사회적 관습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화가 났다고 칩시다. 나의 화를 조절하기 위하여 나의 개인적인 마음의 수양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수양말고도 화를 나게 만든 이 사회의 관습이 과연 옳은 것인지도 관찰해야 합니다. 물론 사회적 윤리가 필요한 만큼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마음의 윤리도 필요합니다. 이런 마음의 윤리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데서 시작합니다. 침팬지는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고 당황해 합니다. 15개월 이전의 아이들은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보고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울에 비춰진 나의 모습을 보고 빗질도 여드름도 짜며 옷매무새를 잡아봅니다. 거울을 통해 머리모양만 비춰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비춰보는 것, 그것이 바로 반성인 것입니다. 선생님으로부터 명령받아 억지로 쓰는 반성문의 그런 반성이라는 말을 이제부터 싹 잊도록 합시다. 그런 반성이 아니라 내 마음을 되돌아보는 반성입니다. 어려운 말로는 성찰이라고도 하는데, 자기 성찰이라는 거창한 표현보다는 그저 반성이라는 소박한 말이 더 좋습니다. 반성을 억지로 할 필요 없습니다. 단지 일기를 쓰거나 블로그에 나를 표현하는 글을 올리거나 깊이 숨을 들이 쉬면서 잠시라도 어제 일을 회상하는 등등, 이런 차분한 시간을 갖는 일이 곧 반성의 시간입니다. 그런 반성으로부터 이미 마음의 윤리학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반성을 할 수 있을는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에게는 마음의 윤리적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윤리학, 좀 더 쉽게 말해서 감정조절의 윤리학이 가능한 것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침팬지가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감정조절이란 뜻은 욕망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의 문제입니다. 욕망을 무조건 나쁜 것이라고 단순히 말할 수 없습니다. 욕망은 오히려 나의 삶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마음의 힘입니다. 기존의 금지의 윤리학에서는 욕망은 무조건 나쁜 것이어서, 욕망은 제거되어야 할 나쁜 감정이었습니다. “이거 해라, 저거는 하면 안 된다”라는 식의 금지의 윤리학에서 욕망의 창조성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앞서도 여러 번 말했듯이 청소년의 가장 큰 장점은 미래를 나름대로 설계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비록 그 미래는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이지만 바로 그런 불확실성 때문에 나는 나의 미래를 창조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욕망을 무조건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나의 욕망을 나의 친구삼아 배려하고 귀기울이며 공감하며 협조하면서 공존하는 연습이 소중합니다. 그런 일상생활 속의 연습이 바로 청소년 윤리학의 기초이며 이를 앞에서 자유의 윤리학이라고 불렀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욕망의 제어를 자율적으로 즉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나의 감정을 연습하는 일이 바로 청소년 윤리학의 조건입니다. 타인의 규제가 작용되는 금지의 윤리학과 달리 자유의 윤리학은 나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윤리적 자율성을 제시합니다. 그런 자율성은 법적이거나 통제적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감정 조절을 학습하는 마음의 원리들입니다. 자율성의 조건은 행동에 대한 결과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먼저 자기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행동습관을 형성한다는 점입니다. 그러한 행동습관이 구체적인 마음의 준칙으로 자리잡기 위하여 앞서 말한 긍지의 마음, 겸양의 마음, 정의로운 마음, 관심을 두는 마음, 분노를 조절하는 마음을 키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갖추게 된다면 우리에게 ‘금지의 윤리학’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며 ‘주체의 윤리학’ 그리고 ‘자유의 윤리학’이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욕망의 유혹이라는 큰 장벽이 있지만, ‘자유와 주체의 윤리학’을 가능하게 하는 도덕감정은 이미 여러분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스스로 끄집어내면 되는 것입니다.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2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2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이 글은 4월 22일?7시에 열린?<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두번째 강연 원고입니다.

 

참혹한 마음에 바치는 서(序)

오호라!?지금 이 순간에도 불행에 빠진 동료시민들이 울부짖고 있습니다.지극히 황당한 인재로 인해 사랑하는 아이와 가족을 잃었기 때문입니다.?삼가 애도를 표합니다.?이 강연을 마음 상처 입은 모든 사람들에게 받칩니다.

이 참사와 연관된 사람들 중에서 칭찬과 명예를 듣는 분들이 있습니다.?반면에 비난과 불명예로 시달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20대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승객들을 끝까지 구하고 자신을 희생한 여승무원이나 여선생님의 용기와 희생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반면에 칠순을 바라보는 연륜에도 승객과 배를 버리고 도망간 된 선장과 희생자 명단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고위 공직자,?피해자인 어린 학생의 마음에 상처를 주더라도 조난 구조에 방해가 되더라도 취재경쟁에 열을 올리는 기자가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관련자들의 용기와 비겁,?칭찬과 비난,?명예와 불명예,?한마디로 미덕과 악덕이 화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다시 말해서 사람됨,?성품이 문제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이런 논란은 개인의 물질적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우리의 전통에 유교가 있다면 서양의 전통에 덕 윤리가 있습니다.?이러한 덕 윤리를 대표하는 고전이 아리스토텔레스의?<니코마코스 윤리학>입니다.?이 책은 기독교 이전에 서양 시민의 윤리관을 대표하고 있습니다.?그 요지는 신이 없어도 엄격한 도덕법칙이나 이기심에 호소하지 않고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지성(정신)과 좋은 습관을 바탕으로 윤리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강연에서 추천하고 싶은 책은 우선 고전 그리스어를 우리말로 훌륭하게 번역한?<니코마코스 윤리학>(이창우·김재홍·강상진 옮김,?이제이북스, 2006)입니다.?그 시대적 배경과 철학적 분위기를 알고 싶다면?<지중해 철학 기행>(클라우스 헬트,?이강서 옮김,?효형출판, 2007)을 추천합니다.

김성우 사진2

 

어떻게 살 것인가(소크라테스)

서양 고대의 그리스 문화에서 윤리학의 중심 주제는 행동이 아니라 사람됨이며 더 나아가 삶 자체입니다.?다시 말하면 칸트처럼 도덕률에 합치하는 올바른 행동이나 벤덤처럼 쾌락의 양을 늘리는 행동이 아니라?‘좋은 삶’이 주제입니다.?인간이 산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아버지가 마케도니아 궁전의 시의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의학과 생물학에 밝았습니다.?동식물에 정통했던 그는 동물적인 생명(zoe)과 인간다운 삶(bios)을 구분했습니다.?그에 따르면?“산다는 것은 심지어 식물에게까지 공통되는 것으로 보이지만,?우리는?(인간에게만)?고유한 것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그러므로 영양을 섭취하고 성장하는 삶은 갈라내야 할 것이다.?다음으로는 감각을 동반하는 삶이 뒤따를 것이지만 이것 또한 분명 말과 소,?모든 동물들에 공통되는 삶이다.”?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성(logos)을 가진 것의 실천적 삶”입니다.

이러한 인간다운 삶과 관련해서 클라우스 헬트는 <지중해 철학 기행>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이 비오스,?즉 삶의 영위는 일정한 습관에 토대를 둔다.?이 습관은 우리에게 본성으로 부여된 것일 수도 있지만 획득될 수도 있다.?특정한 습관을 갖는 것이 과연 좋으냐를 두고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댈 수 있다.?이처럼 대화를 나누고 근거를 대는 능력을 그리스어로?‘로고스’라고 한다.?인간은 로고스를 지닌 동물,?로고스를 지닌 생명체이다.?이것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고전적인 인간의 정의로서, 2000년이 넘도록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다.”

좋은 삶은 좋은 것에 겨냥합니다.?그런데 가장 좋은 것(최고선)을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eudaimonia)이라고 부릅니다.?이와는 반대의 의견도 있습니다.?칸트의 도덕철학을 현대 민주적 절차주의로 발전시킨 존 롤스는 그의 유명한 저서인 <정의론>에서 행복보다는 정의가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진리가 사상 체계의 제일 덕목인 것처럼 정의는 사회 제도의 제일 덕목이다.?이론이 아무리 정교하고 간명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기각되거나 교정되어야 하듯이,?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효율적이고 질서정연한 것일지라도 그것이 정의롭지 못하면 개혁되거나 폐지되어야 한다.?각 사람은 사회 전체의 행복이라도 능가할 수 없는,?정의에 기초를 둔 침해불가능성을 갖는다.”

통상적으로 행복은 개인적이라면 정의는 사회적인 것입니다.?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개인주의적 행복을 이야기한 것에 그치고 만 것입니까??아닙니다.?그의 윤리학은 정치학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그가 말하는 행복은 폴리스(그리스 도시국가)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의 행복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으뜸가는 학문,?가장 총 기획적인 학문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그런데 정치학이 바로 그러한 학문인 것 같다.?왜냐하면 폴리스 안에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만 하는지,?또 각각의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학문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를 정치학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또 정치학은 나머지 실천적인 학문들을 이용하면서,?더 나아가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 무엇을 삼가야만 하는지를 입법하기에 그것의 목적은 다른 학문들의 목적을 포함할 것이며,?따라서 정치학은 목적은?‘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왜냐하면 설령 그 좋음이 한 개인과 한 폴리스에 대해서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폴리스의 좋음이 취하고 보존하는 데 있어서 거 크고 더 완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그 좋음을 취하고 보존하는 일이 단 한 사람의 개인에게 있어서도 만족스러운 일이라면,?한 종족과 폴리스에 있어서는 더 고귀하고 한층 더 신적인 일이니까.?따라서 우리의 탐구는 일종의 정치학적인 것으로서 이런 것들 추구하는 것이다.”

이 길게 인용된 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자신의 탐구를 윤리학(?thik?)이라고 부릅니다.?에티케는 성품과 습관을 의미하는 에토스(ethos)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즉,?좋은 성품의 사람이 되려면 좋은 행동을 하도록 습관이 길러져야 한다는 뜻이지요.?그렇지만 그의 윤리학은 개인의 행복에 그치지 않습니다.?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산다는 것은 혼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국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그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미덕(탁월함, aret?)을 향한 올바른 지도를 받으려면 올바른 법률에 의해 길러지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성인이 된 후에도 계속에서 올바른 일을 하고 좋은 습관을 들어야 하기에 법률이 필요합니다.?이렇게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삶을 사는 데는 국가에 의한 강제적인 법률이 있어야 합니다.?그에 따르면?“다중은 말에 따르기보다 강제에 따르고,?고귀한 것에 설복되기보다 벌에 설복되기 때문이다.”?폴리스의 입법자들은 시민들의 교육과 종사할 일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각자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공동의 보살핌이 폴리스가 제정한 법률을 통해 이루어집니다.?이를 고려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의 목적을?‘인간적인 좋음’(agathon)이라고 한 이유가 명백해집니다.?그래서 그에게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politikon)?동물입니다.?이런 까닭에 그에게 좋은 삶은 국가 안에서의 시민적인 삶이지 국가에서 벗어난 개인의 삶이 아닙니다.?따라서 그가 말하는 좋은 사람은 시민의 의무를 다하는 덕을 갖춘 사람이지 자신만의 안녕과 평온을 추구하는 무책임한 개인이 아닙니다.?이런 점에서 현대 철학자 중에서 개인주의적인 자유주의 윤리학과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공동체주의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공동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는?<덕의 상실>의 저자인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와?<다문화주의>를 주창한 찰스 테일러,?그리고?<정의란 무엇인가>로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해진 마이클 샌델이 있습니다.마이클 샌델이 왜 시민의 미덕을 강조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승객을 버리고 도망간 선장과 무책임한 고위공무원들은 시민의 미덕,?특히 사회적 리더로서의 의무를 저버렸기에 그토록 지탄과 원망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정치적인 것을 가르친다고 선전하는 소피스트들은,실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정치적 행위를 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학은 수사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이와는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학은 목적은 지식(앎)이 아니라 행위입니다.?마찬가지로 윤리적인 덕도 지식이 아니라 활동(ergon)입니다.?이는 자신의 스승인 플라톤 선생님과 스승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플라톤의 대화편인?<프로라고라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덕은 앎(인식)이라고 규정했습니다.?다시 말해서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는 자가 가장 좋은 사람인 것입니다.?그러한 최선자가 통치자가 되어야 합니다.?그런 리더를 플라톤은 철인왕이라고 불렀습니다.?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인간적인 좋음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그 좋음이라는 것도 완전한 삶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이런 그에게 아는 것보다 좋은 행동을 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그래서 그는 지식 중심의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그에게?“친구와 진리 둘 다 소중하지만,?진리를 더 존중하는 것이 경건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좋은 사람이 되고 행복한 사람이 되는 데는 지식보다는 좋은 습관이 요구됩니다. “한 마리의 제비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며 하루가 봄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까.?그렇듯 하루나 짧은 시간이 지극히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드는 것도 아니다.”?덕은 행위의 축적에 의해 즉 습관에 의해 획득됩니다. “정의로운 일들을 행함으로써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 되며,?절제 있는 일들을 행함으로써 절제 있는 사람이 되고,?용감한 일들을 행함으로써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만약 폴리스에서 입법자들이 시민들에게 좋은 습관을 들이게 하면 좋은 시민들이 육성될 것입니다.?이러한 폴리스는 좋은 정치체제를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 행복한 사람은 잘 행위하는 사람이고 잘 사는 사람이다.?행복은 덕에 따른 영혼의 활동입니다.?따라서 행복은 단순히 외적인 운명이나 우연에 의해 주어지지 않습니다.?이러한 요소들은 인간적 삶에 추가적으로 필요할 뿐이고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누구나 배움과 노력을 통해 인간적인 덕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우연이나 운명에 의해 주어지는 것과 달리 이러한 행복은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일 수 있습니다.?소나 말 등 동물을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 당연합니다.?이런 점에서 아직 어린이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아직 그 나이에는 덕에 따른 행동을?‘완전하게’(성숙하게)?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그렇다고 좋은 습관을 쌓지 못한다면 나이가 반드시 성숙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더 처참하게 물욕만 남은 비겁한 늙은이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혹시 운이 좋지 않더라도 활동이 결정적이라면?“지극히 복된 사람들 중에서 누구도 비참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그는 결코 가증스러운 일이나 비열한 행위들을 하지 않을 테니까.또 우리는 진정으로 좋고 분별 있는 사람은 모둔 운들을 품위 있게 견뎌 낼 것이라고,?현존하는 것으로부터 언제나 가장 훌륭한 것들 행위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행복과 관련해서 세 가지 종류의 삶을 제시합니다.?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정치적인 성취를 이루는 삶,?지성적인 관조를 하는 삶이 그것입니다.?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삶은 짐승의 삶을 선택하는 것이며 완전히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입니다.?정치적인 명예나 덕을 추구하는 삶도 역시 불완전할 뿐입니다.?명예는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 의존할 뿐이며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큰 불행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본질적으로 정치권력과 이성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이 외에도 그는 부를 추구하는 삶을 언급하다가 이를 재빨리 취소합니다.?그가 보기에 부를 추구하는 삶은 일종의 강제된 삶일 뿐이며,?부란 다른 것을 위해 수단일 뿐이니 진정으로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관조적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인 이유는?“무엇보다도 지성이?‘인간’인 한에서,?인간에게 있어서도 지성을 따르는 삶이 가장 좋고 가장 즐거운 것이다.?그러므로 이 삶이 가장 행복한 삶이기기도 하”기 때문입니다.?지혜에 대한 사랑,?즉 철학(philosophia)하는 삶이 그런 삶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그의 덕 윤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그의 시민에는 노예와 여자가 제외됩니다.?당연히 그리스어를 하지 못하는 야만인도 제외됩니다.?그의 시민이란 좋은 집안에 태어나,?잘 양육을 받고,?행운이 뒷받침되는 남성 어른에 해당되는 것입니다.?이런 이유로 오늘날 공동체주의자들은 전통적 공동체주의에서 수직성과 배타성을 제거한 새로운 공동체 창출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논현정보도서관 다음 강의는?5월?20일 배우고 익힘에서 기쁨을 찾다?-?인생을 말하는?『논어』?:?구태환(상지대 강사)입니다. ?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1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1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른바 서양에서?‘존재론(存在論?: ontology)’이라고 부르는 철학의 한 분야에 대한 것입니다.?이 분야는 전통적으로 존재와 무를 다루는 분야로 알려져 있습니다.?존재(存在)와 무(無)라니!?여기에서 잠깐 제가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한 이야기를 끼워 넣겠습니다.

“여러분,?장 폴 사르트르라는 프랑스 철학자를 잘 아시지요?”

“예,?그분 소설가이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그런데 그분이 비교적 초기에 썼던 유명한 철학책이 있습니다.?그 책 이름을 아는 분 계십니까?”

“예.”

“뭐지요?”

“《존재와 무》?아닙니까?”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존재와 무라??대단히 어렵고 심오한 말인 것 같은데,?여러분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이런 말 자주 씁니까?”

“가끔 씁니다.”

“그럼,?여러분들 가운데서 지난 한 주일 동안 날마다 한 차례 이상 존재나 무라는 낱말을 입 밖에 내본 사람이 있으면,?한번 손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난 한 주일 동안 이 낱말들을 한 번도 써 본 기억이 없는 학생이 있으면 손을 들어 보십시오.”

강의실에 앉아 있던 학생들 거의 모두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습니다!?이것은 바로 제 강의를 듣는 철학과 학생들과 저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제 강의실에서나 있었던 특수한 경우일까요??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그러면 사르트르가 붙인 원래 제목을 써 보겠습니다.?《Letre et le Neant》입니다.?이 프랑스 말을 토박이 우리말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L’etre et le neant =?있음과 없음(또는 임과 아님)입니다.?다시 물어 보겠습니다.?여러분 가운데 있다,?없다,?이다,?아니다라는 말을 빼고 단 일 분간이라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자신이 있는 분은 한번 손을 들어 보십시오.”

제?‘존재론’?강의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저는 칠판에 문장 하나를 썼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쓴 글은 우리가 보통 하는 말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이 말을 참과 거짓이 구별되는 문장,?곧 논리학에서 말하는 명제(命題?: proposition.?참 끔찍한 말이기는 합니다만 논리학 책을 보면 이런 낱말이 나옵니다.)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은 개가 아니다.”

학생들이 외쳤습니다.?저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 적었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다. (일상 언어)?→?사람은 개가 아니다. (참말,?논리적 명제)

“그런데 왜 우리는?‘사람은 개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그것을 참말이라고 하지요?”

제가 물었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게 생겼잖아요.”

“개는 네 발로 걷고 사람은 두 발로 걷잖아요.”

“개는 냄새를 잘 맡는데 사람은 그렇지 못하잖아요.”

“…….”

강의실이 온통 시끌벅적해졌습니다.

“잠깐,?사람과 개가 서로 다르니까 사람은 개가 아니라는 말은 아까 나왔던 말이고,?이제 한 단계 더 높여서 이른바?‘존재론’답게 말해 봅시다.?다시 말해서?‘있다’, ‘없다’는 말을 써서 사람이 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 보자는 거지요.”

여기까지 이르면 학생들은 거의 잠잠해지기 마련입니다.?저는 칠판에 이렇게 썼습니다.

일상 언어의 차원?:?사람은 개와 다르다.

논리 언어의 차원?:?사람은 개가 아니다.

존재 언어의 차원?:?사람에게 있는?(어떤)?것이 개에게는 없고,?사람에게 없는?(어떤)?것이 개에게는 있다.

“여기에서 보다시피?‘같다’, ‘다르다’는 말은?‘이다’, ‘아니다’는 말로 바꿀 수 있고,?또 이 말은?‘있다’, ‘없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다시 말하자면,?우리 둘레에 있는 서로 다른 온갖 것들을 가르는 기준이 있음과 없음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저는 네 개의 문장을 칠판에 써 내려갔습니다.

1.?있는 것이 있다.

2.?있는 것이 없다.

3.?없는 것이 있다.

4.?없는 것이 없다.

“자,?이 네 개의 글 가운데 어느 것이 참말이고 어느 것이 거짓말입니까?”

학생들은 문장 네 개를 꼼꼼히 뜯어보고 있더니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구별하기 힘든데요.”

“왜,?왜 그렇지요?”

“글쎄요.?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문장은?‘ㄱ은?ㄴ이다.’나?‘ㄱ은?ㄷ이 아니다.’라는 틀을 가지고 있잖아요.?그러니까?‘사람은 동물이다.’나?‘사람은 개가 아니다.’와 같이?‘이다’, ‘아니다’로 앞에 있는 말과 뒤에 있는 말이 이어져 있어야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있는데,?이 문장들은 그냥 있다,?없다로 끝나잖아요.?그래서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쏭달쏭한데요.”

“맞습니다. ‘저기 사람이 있다.’나?‘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같은 말은 그 말만 보아서는 그것이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따라서 이런 말은 일반적으로 논리적인 명제라고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모른다는 말이 참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칠판에 적혀 있는 이 네 마디 말들은 모두 뜻이 있는 말인가요??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이 말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나요?”

“예,?알아들을 수 있겠는데요.”

“그럼 지금부터 우리 그 뜻을 한번 캐 보기로 하지요.”

학생들과 제가 머리를 짜내서 캐낸 뜻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있는 것이 있다.?→?달리 이 말을 바꿀 필요가 없다.?이를테면 우리는?‘있는 것은 있고,?없는 것은 없는 거야.’라고 할 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

2.?있는 것이 없다.?→?하나도 없다. (눈여겨볼 낱말?: ‘하나’)

3.?없는 것이 있다.?→?빠진 것이 있다. (눈여겨볼 낱말?: ‘빠진 것’)

4.?없는 것이 없다.?→?다 있다. (눈여겨볼 낱말?: ‘다’)

자,?여기서부터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첫 번째 말이야 그냥 넘어갈 수 있다 치더라도 두 번째부터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 어떻게 해서?‘하나도 없다.’는 뜻을 지니게 될까??배운 도둑질이라고 저는 서양 고대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생각을 빌려 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하나일까요,?여럿일까요?”

제가 이렇게 물었더니,?학생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습니다.?틀림없이?‘저 선생 어떻게 된 거 아냐?’?하고 머릿속으로 내 머리를 향해 손가락을 서너 바퀴쯤 돌렸음직한 표정들이었습니다.

“에이,?선생님도!?있는 것은 당연히 여러 개지요.?저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여기 책상도 있고,?가방도 있잖아요.”

“잠깐,?잠깐만요.?제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제가 조금 설명을 하고 나서 다시 묻지요.?저기 있는 예쁜 여학생,?학생은 여자가 분명하지요?”

와그르르 웃음소리.

“요즈음에는 겉모습만 보아서는 도무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때가 많아서 한 말이니 노엽게 듣지 말아요.?그럼 제가 칠판에 몇 개의 낱말을 적어 볼 테니까 이 낱말들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아맞혀 보세요.”

여자―사람―동물―생물―있는 것

학생들은 이 낱말들을 연결시켜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사람이다. (여자 수보다 사람 수가 더 많다.)

사람은 동물이다. (사람 수보다 동물 수가 더 많다.)

동물은 생물이다. (동물 수보다 생물 수가 더 많다.)

생물은 있는 것이다. (생물 수보다 있는 것 수가 더 많다(?))

“어때요,?한 방 먹으셨지요??있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잖아요.?있는 것이 하나뿐이라니 말이나 돼요?”

아이고 골치야.?그야말로 제가 여우처럼 제 꾀에 넘어가고 만 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