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과 보베라이트: 서울 시민인권헌장의 폐기를 지켜보며 [베를린에서 온 편지 9]

박원순과 보베라이트: 서울 시민인권헌장의 폐기를 지켜보며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성적 지향을 근거로 성적 소수자를 차별해선 안 된다는 내용이 담긴 서울 시민인권헌장이 폐기되는 과정은 많은 물음을 낳는다. 무엇보다도 이 문제는 그동안 시민운동가 출신으로 젊은 층의 진보적인 시민들에게 광범한 사랑을 받아온 박원순 시장이 보수적 종교인들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과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필자는 지난 8월 베를린을 방문한 박원순 시장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세월호 유가족에 호의적이지 않았던 <조선일보>가 마련한 독일-한국 교류 행사에 참석한 것이라 눈치가 꽤 보였을텐데도, 박원순 시장은 당시에 세월호 특별법을 위한 서명운동을 진행중이던 교민들을 방문해 악수를 나누며 격려를 해주었고, 이런 모습은 베를린 교민들에게 상당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베를린 세월호 특별법 서명운동을 격려하는 박원순 시장

베를린 세월호 특별법 서명운동을 격려하는 박원순 시장

 

시장으로서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

 

베를린을 방문한 박원순 시장은 베를린 시장인 클라우스 보베라이트를 만나 두 시의 우호관계 증진을 논의하며 “문화관광 분야 교류를 위한 업무협약(MOU)”를 체결했다. 이날 박원순 시장을 만나 함께 악수를 나누고 베를린과 서울의 공동의 미래에 대해 논의한 클라우스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은 2002년부터 올해까지 무려 13년째 베를린 시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오늘날 젊은 보헤미안 예술가들과 학생들에게 전 유럽에서 가장 사랑받는 문화도시 베를린을 만들어낸 주역이다. 또한 그는 동성애자이기도 하다. 이미 정식 시장이 되기 전에 이미 그는 커밍아웃을 통해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밝혔으며, 그가 했다고 알려지는 “나는 동성애자입니다. 그건 그런대로 괜찮아요 (Ich bin schwul ? und das ist auch gut so!)”라는 말은 그 이후 수 많은 사람들에게 젊고 개혁적이며, 소수자와 약자를 대변하는 베를린 시장으로서 그의 이미지를 어필해왔다.

 

사진 2) 박원순 서울시장과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 (사진제공: 서울시 홈페이지)

사진 2) 박원순 서울시장과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 (사진제공: 서울시 홈페이지)

 

무려 13년째 자기 자신을 동성애자로 밝힌 시장이 통치하는 도시에 사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시장으로서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고 말하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발언이 이해가 되질 않는다.

 

첫째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시장은 어째서 소수자의 인권을 대변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인지에 대해서다. 과거 시민운동가로 활동한 박원순 시장은 여러 차례 동성애자를 비롯한 소수자의 인권에 대해서 옹호한 바가 있다. 그런데 시장은 중립을 지켜야 하므로 갈등을 부추길 수 있는 인권헌장 제정에 대해서 찬성할 수 없다고 말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시장이라는 자리가 모든 시민의 자유로운 삶과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점을 감안해보면, 오히려 ‘시장이기 때문에’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물음은 다시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진다. 만약 언론에 알려진대로 박원순 시장이 “시장으로서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다”고 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말 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동성애는 지지 또는 반대와 무관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감정과 사랑에 관한 것으로,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와 맺는 관계의 형태 중 하나이며, 따라서 타인의 지지와 동의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군가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차별과 소외, 억압에 시달려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그 누구도 인종과 종교, 성적 지향에 따라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현대 사회의 원칙에 비추어볼 때 정당하지 못한 일인 것이다.

따라서 시장이라는 공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은 서울시 안에서 보편적인 가치인 인권이 지켜지고 있는지를 감시하고, 불평등과 차별을 해소해야 할 의무를 갖는다. 이를 소홀히 하는 것이야말로 태만이다.

 

억압의 상처?

 

베를린 놀렌도르프광장(Nollendorfplatz)은 동성애자들이 많이 거주하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이곳에 가면 나치의 지배 하에서 억압 속에 목숨을 잃어야 했던 동성애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있다.

 

사진 3) 놀렌도르프 광장의 희생된 동성애자들 추모비

사진 3) 놀렌도르프 광장의 희생된 동성애자들 추모비

 

나치가 집단적으로 학살한 것은 유태인들만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떠돌이생활을 하는 (흔히 집시라는 차별적 이름으로 알려진) 로마족, 그리고 동성애자들 역시 탄압을 받았고 수용소에서 죽어갔다. 게르만 민족의 우월함을 유지한다는 나치의 광신적 우생학의 관점에서는 동성애자 역시 게르만족의 자손 번식을 가로막는데다, 게르만족의 성적 미풍양속을 해치는 제거돼야 할 사회의 악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동성애자들을 향해 온갖 폭력적인 발언들을 쏟아부으며 그들에 대한 인권을 인정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보수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나치의 그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리고 나치의 기억 때문에 독일에서 소수자에 대해 노골적으로 차별을 선동하는 사람에게는 지금 한국에서 보수 차별주의자들이 소수자들에 대한 증오를 선동할 수 있는 표현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을까? 소수자 차별은 범죄다. 그리고 모든 시민의 인격적 평등을 주창하는 헌법의 가치가 존중받는 나라에서라면 당연히 범죄가 되어야 한다. 동성애라는 사랑의 형태가 아니라,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증오야 말로 사회적으로 추방해야 할 범죄인 것이다.

 

보론: 인간의 권리와 신의 권리?

 

보수 종교인들은 신이 동성애를 금지했으므로, 소수자의 인권 역시 존중받을 수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런데 ‘인간의 권리’는 ‘신의 권리’와 양립될 수 없는 것일까? 철학자 칸트는 양자가 양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나의 도덕법칙을 신의 계명으로 여기고 살아갈 때 나는 자유로워지며, 내가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유를 보장해주는 자연에 있어 인간인 나의 존재가 목적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목적의 관계는 다시 신의 존재를 전제해야 하므로, 결국 ‘나의 자유’와 도덕법칙은 ‘전능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유일한 길이다. 이것이 칸트가 인간의 자유와 이성, 도덕의 관점에서 신의 존재를 논하는 방식이다.

자유로운 인간은 신을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 신을 공포의 대상, 복종해야 할 존재로 여기는 것은 미신과 우상숭배의 흔적이다. 진정한 신학과 종교는 신을 나의 자유(그리고 자유로운 의지에서 나오는 도덕법칙)를 보장해주는 세계의 근원적 존재자로 표상하는 데에서 출발하지, 엎드려 절하며 두려워 몸서리치는 데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신이 동성애를 금지했을까. 물론 몇 구절들을 인용해 기독교는 동성애와 양립불가능하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성경을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다. 예컨대 성경에는 근친상간도 등장한다. 창세기를 보면 소돔에서 도망쳐나온 롯의 두 딸이 번갈아가면서 아버지를 잠들게 만든 후 겁탈하는 장면도 등장한다(창세기 19:30~38).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율법들 중 상당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전혀 적용될 수 없을 뿐더러, 기독교인들도 전혀 지키지 않고 있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예수가 등장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동성애자들은 사랑을 원한다. 그것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보수 기독교인들의 증오의 감정보다 훨씬 더 숭고한 감정이다. 인간의 권리는 신의 권리와 모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이 서로 증오하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인간에게는 다른 인간을 차별할 권리가 없다는 것. 그래서 인종, 종교,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만인이 동등한 법적 인격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것.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의 원칙이다. 지금은 마녀를 이단심문해서 불에 태워버리던 중세, 혹은 천주교도들이 조상에게 제사지내지 않는다고 참수해버리던 조선시대가 아니다. 만인의 인격이 동등하다는 것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현대 사회다.

동성애에 대한 증오를 선동하는 사람은 결국 현대의 성과를 되돌리고 사회를 전근대로 되돌리려는 시도를 하는 셈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지, 뒤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3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 이제 다시 제가 앞서 그렸던 그림으로 돌아갑시다. 이야기가 너무 곁가지를 많이 쳐서 그 그림이 어떤 것이었는지 잊어버렸다고요? 그렇다면 다시 그리지요. 힘든 일은 아니니까요.

 

윤구병29-2

 

제 고조부모인 파르메니데스 옹과 제논 마님에 따르면 이 그림에서 ①만 있고 ②부터 ⑥까지는 없습니다. 할아버지 플라톤 옹에 따르면 ①과 ②의 속살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저 세상〔이데아(idea)의 세계와 직관의 세계〕에 있고 ②의 겉껍데기와 ⑤까지만 현상계에 있습니다. 제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는 ①은 없다고 본 듯합니다. 제 아버지가 신으로 모셨던 분은 ①이 아니라 ②라고 저는 믿는데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제 아버지는 신을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신은 ‘생각의 생각〔noesis noeseos〕’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좀 묘하지요? 제 생각으로는 생각〔noesis〕은 움직임입니다. 생각이 멈추면 그걸 어떻게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생각이 다른 쪽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생각은 멈추게 되고, 그건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제 아버지가 하나이신 ‘하나님(신)’을 생각과 같은 것이라고 여긴 것은 잘못이라고 봅니다. 생각이 하나를 찾는 것은 생각이 하나에서 나왔기 때문이고, 또 생각과 하나는 마침내 하나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생각 속에는 생각함과 생각됨이 더불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은 하나이자 여럿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고조할아버지 파르메니데스 옹으로부터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내려온 존재론의 전통을 저 나름으로 졸가리를 찾으면 아마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이신 있는 것이 생각을 낳고, 생각이 삶을 낳고, 삶이 자연을 낳고, 자연이 질료를 낳았습니다. 파르메니데스 옹 말씀 그대로 하나이신 있는 것은 가득 차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하나에서 나왔고, 그 때문에 늘 하나를 지향하지만, 생각 속에는 빠진 것이 있습니다. 제 아버지가 신을 ‘생각의 생각’이라고 규정하셨을 때 앞생각〔noesis〕과 뒷생각〔noeseos〕은 같은 것이겠습니까, 다른 것이겠습니까? 저더러 말하라 하면 저는 다른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러면 앞생각과 뒷생각 사이에는 틈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대체 이 틈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입니까? 틈은 빈 데를 뜻합니다. 무엇인가 빠져 있을 때 빈틈이 생깁니다. 틈이 있으면 하나로 있던 것이 둘로 갈라집니다. 하나를 둘로 가르는 이 틈은 무엇 때문에 생겨날까요? 무엇이 빠져서 둘 사이가 갈라질까요? 빠진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아무튼 ‘빠진 것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아요? 그런데 누구한테 들었더니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은 ‘없는 것이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라고 하데요.(누구한테 듣기는 누구한테 들어? 윤모가 《있음과 없음》이라는 글에서 자기네 조상들이 쓰던 말이 그렇다고 했지!) 자, 앞생각과 뒷생각이 갈라지자 어느 틈에 없는 것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없는 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는 있는 것이 모습을 감추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가 빠지는 자리이지요. 생각이 하나로부터 갈라서는 자리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하나를 찾지 못하면 생각은 길을 잃지요. 감각을 징검다리로 삼는 보통 사람의 생각에서부터 고도로 추상화한 사유에 이르기까지, 언어학자가 찾는 음소〔phoneme〕나 형태소〔morpheme〕에서 생물학자가 찾는 생명의 단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각이 하나를 찾기에 그처럼이나 애를 쓰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를 찾지 못하면 생각은 생각이기를 그치지요. 하나를 잃은 생각은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지니까요. 무엇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의 상태를 가리켜 우리는 의식 불명이라 이르지 않던가요? 하나를 찾아 빠진 것을 메워야 생각이 제 구실을 합니다. 제가 생각을 ‘하나이자 여럿인 것’이라고 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이자 여럿인 생각은 있는 것에서 흘러나오지만 있는 것 바로 그것은 아닙니다. 생각에는 빠진 것, 다시 말해서 없는 것이 섞여 있다는 말이지요. ‘없는 것이 없게’ 만들려는 플라톤 할아버지의 노력이 있는 것들의 모두인 여러 하나들의 세계, 곧 이데아의 세계를 만들어 냈지만, 이데아 세계의 여러 하나들이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오직 하나, 곧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깨끗한 생각도, 이것과 저것을 먼저 놓고 그것을 같거나 다른 것으로 파악하는 추론의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생각은 하나를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과 저것이 함께 있는 세상, 곧 둘이 있는 곳에는 공간이 있게 마련이고, 공간이 있는 곳에는, 비록 그 공간이 순수한 사유 공간이라 할지라도 하나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나는 직관의 대상이지 추론하는 사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제 할아버지 플라톤 옹이 이데아의 세계는 직관의 대상이라고 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지요. 그러니까 생각에는 직관도 있고 추론도 있습니다. 직관은 하나를 지향하는 생각이고 추론은 여럿과 관계를 맺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 밖에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말인데, 하나는 곧 있는 것이니 있는 것과 다른 어떤 것이란 없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 저는 없는 것을 그렇게나 꺼리고 두려워했던 우리 고조할아버지 파르메니데스 옹으로부터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 옹에까지 이어져 내려온 이른바 ‘그리스 사유의 전통’을 깨지 않으면 존재론의 일관된 체계를 세우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있는 것과 생각은 하나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고 우기는 고조할아버지의 고집을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야 물론 우리의 생각은 늘 하나를 지향하지요. 일관된 생각이란 하나를 지향하는 생각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생각이 둘로 흩어지면 종잡을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생각은 움직이는 것이지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있는 것과 하나가 되려고 해도 하나 쪽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지요. 당신은 아예 없는 것, 다시 말해 허무를 생각할 수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으면 아예 없는 것은 말 그대로 없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없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규정할 수 없는 것〔apeiron〕’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순수 질료’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 그 반문에 대해서 대답하지요. 그렇습니다. 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그 순수 질료니, 무규정적인 것이니 하는 것의 뿌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철학은 뿌리를 찾는 학문이고, 까닭을 캐는 학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을 지닌 철학이 제대로 서려면 존재론의 바탕이 단단히 다져져야 합니다. 우리가 나날의 삶에서, 또 그 삶을 반영하는 감각이나 사유 속에서 없는 것을 몰아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없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삶과 생각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추운데 난로에 온기가 없습니다. 있는 것 하나밖에 없으면 생각도 없습니다. 구체적인 생활에서나 감각에서나 생각에서나 어디에서나 드러나는 이 없음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비어 있음이라고요? 결핍이라고요? 이미 있었던 것의 사라짐이라고요? 늘 있는 것과 연관되어 나타나는 것이지 홀로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고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천하장사라 해도 이 세상에는 감각의 세계와 사유의 세계로부터 이 없음을 몰아 낼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얼버무리지 말고 솔직히 인정합시다.

‘태초에 있는 것 밖에 없는 것도 있었다.’ ‘없는 것은 하나인 있는 것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나의 힘이 넘쳐흘러 없는 것을 밀어 내고 둘레에 생각의 고리를 만들었는데 이 생각의 고리는 하나와 맞닿아 있어서 늘 하나를 지향한다. 이 하나이자 여럿인 생각의 고리에서 최초로 운동 가능성이 나타났다.’ ‘생각의 고리 둘레를 생명의 고리가 둘러쌌는데 생명의 세계에서 처음으로 둘이 뚜렷이 갈라졌다. 하나의 힘이 지배하는 우주 생명은 생각의 고리에 닿아 있어 하나로 남았으나, 밖에 있는 자연의 고리에 잇대어 있는 생명은 없는 것이 사이에 들어 여럿으로 나누어졌다.’ ‘생명의 고리 바깥에 자연의 고리가 둘렸는데, 이 고리에서 하나인 있는 것과 하나가 아닌 없는 것이 팽팽하게 힘으로 맞섰다. 여기에서 비로소 동물과 식물과 땅같이 감각으로 지각되는 크기를 가진 몸뚱이를 지닌 것들이 나타났다. 이 자연도 생명의 고리에 가까운 ‘만드는 자연’과 밖에 있는 질료의 고리에 가까운 ‘만들어진 자연’으로 갈라졌다. 하나인 있는 것의 힘이 미치는 테두리는 여기까지다.’ ‘자연의 고리 밖에는 있는 것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질료의 영역이 있는데 이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없는 것이 없으면 낱낱으로 구별되는 여러 하나도 생겨나지 못한다. 고유 명사로 부르는 낱낱의 저마다 다른 것은 이 없는 것의 힘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있는 것뿐만 아니라 없는 것까지도 받아들이자고 한 생각의 큰 테두리는 이런 것입니다.”

제가 이렇듯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간단히 줄이고 플로티노스의 이론을 저 나름으로 해석하여 장황하게 늘어놓는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모자 속에 감추어 놓고 끝까지 보여 주려 들지 않았던 것의 실체가 플로티노스의 이론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당사자들은 인정하려 들지 않을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 플로티노스는 서양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위대한 신학자와 철학자들에게 숨은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플로티노스의 제자인 포르피리오스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도 토마스 아퀴나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스피노자도 헤겔도 베르그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이 부정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감추려고 애썼던 없는 것이 플로티노스에 의해서 있는 것으로 드러났으니, 이제부터 그 동안 우리가 뒤로 미루어 놓았던 과제, 곧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모순율을 뒷받침하는 가장 기본 되는 판단 형식이 될 수 있는지 따져 봅시다. 보통 모순율을 대표하는 문장은 ‘ㄱ은 ㄱ 아닌 것이 아니다(A is not non-A).’로 표현됩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이 ㄱ이라면 있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닌 것이라는 점에서 ㄱ 아닌 것이고, 따라서 ‘없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ㄱ은 ㄱ 아닌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 형식에 일치합니다. 모순율을 뒷받침하는 존재론 차원의 문장으로 왜 ‘있는 것이(은) 없는 것이 아니다.’를 들지 않고 하필이면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 아니다.’를 들었느냐고 묻는 분에게는 있는 것은 하나이고, 하나로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지 않으므로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추론의 공간 속에 자리잡을 수도 없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겠습니다. 다시 모순율로 되돌아가서, 만일에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판단 형식이 어떤 경우에도 참임이 증명될 수 있다면 모순율은 자명한 논리학의 공리로서 자리를 굳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위야 어떻든 없는 것은 분명히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이고, 이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없는 것이라는 말로(글자로) 지금 우리 눈앞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없는 것이라는 말을 버젓이 들으면서(글자를 눈앞에 보고 있으면서) 그것을 있지 않다고 우길 수 있겠습니까? 어떤 판단 형식이 공리 행세를 하려면 그 판단 형식에 실오라기만 한 의심의 여지도 없어야 합니다.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은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나란히 놓고 판단할 때 한층 더 강화됩니다. 만일에 이 두 문장을 놓고 볼 때 그 가운데 어느 하나는 분명히 참인데 다른 하나는 거짓임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면 사태는 더 심각해집니다. 모순율이 깨지면서 동시에 배중률도 공리의 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 사태는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학이 설 자리를 잃는 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학이 무너지면 파르메니데스가 주춧돌을 놓고 플라톤이 그 위에 기둥을 세운 그리스 존재론의 전통이 한꺼번에 와르르 주저앉을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아빠가 아빠다워야만 자식이 자식다운 법(2)[대안도덕교과서]-10

아빠가 아빠다워야만 자식이 자식다운 법(2)[대안도덕교과서]-10

 

 

오상현(숭실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평생 공부만 하라고?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논어』의 첫 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열심히 배우고 시도 때도 없이 익히면 즐거운가요? 만약 공부 자체가 너무너무 즐겁다면, 그래서 초중고 12년을 한 20년쯤으로 늘려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가까운 병원에 가서 상담받기를 권합니다. 솔직히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하는 게 재미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가 사상에서는 혼자 있을 때에도 삼가는 마음으로 자기를 위한 공부에 매진하라고 합니다. 참 답답할 노릇입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이 말은 천하를 평화롭게 하기 전에 반드시 나라를 다스려야 하고, 나라를 다스리기 전에 반드시 가정을 다스려야 하며, 가정을 다스리기 전에 스스로 엄격한 수양을 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천하를 다스리는 일도 결국은 자기 수양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말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볼게요. 대통령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가정합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제는 누구나 그 잘못을 탓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의미에 비추어 해석한다면, 국가적 문제, 즉 대통령의 잘못을 탓하려고 한다면 그 전에 자신의 가정을 잘 다스려야만 하고, 그 전에 자기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이 없어야만 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시무시하죠. 공자의 제자 중에 증삼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얼음판 위를 걷듯이 전전긍긍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야 비로소 (엄격한 자기 수양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구나!” 유가의 자기수양의 엄격성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유가의 자기 공부는 이렇게 무겁고 어려기만 한 일이었을까요?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얘들아, 집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서는 누구에게나 공손해야 한다. 삼가는 마음으로 뱉은 말은 꼭 지키고, 편 가르지 말고 사랑하여라. 또한 어진 사람과 가까지 지내도록 하여라. 이렇게 행하고도 혹여 남는 힘이 있다면, 비로소 그때 공부하여라.” 『논어』 「학이」

공자가 남긴 공부에 관한 말 중에서 위의 대목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문에서는 공부를 학문(學文)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 그럼 우리는 언제 학문을 해야 할까요? 공자는 말했습니다. ‘힘이 남을 때’라고. 우리가 흔히 쓰는 여력(餘力)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했습니다. ‘여력’이란 ‘남은 힘’을 의미합니다. ‘여력이 없다’는 말은 ‘남은 힘이 없다’는 말이니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공자가 ‘남은 힘’으로 공부를 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공자가 생각한 공부는 책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집에서는 부모님과 마주하고 밖에서는 친구나 어른들, 혹은 선생님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늘 누군가와 마주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의 의미처럼 혼자 살 수만은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지요. 공자가 볼 때, 공부는 바로 그렇게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행동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쉽게 말해 도덕 시험 점수 100점 맞는 사람과 훌륭한 인격을 바탕으로 사회에서 묵묵히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단순한 문제의 해답 속에 공자의 생각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이제 눈치를 채셨나요? 유가에서 말하는 공부라는 것은 사실 책을 읽고 암기하고 문제 푸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영어 단어를 많이 외고 수학 공식을 많이 아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 아닙니다. 공자는 말합니다. 착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적극적인 실천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요. 혹시 그렇게 하고도 남는 힘이 있다면 그때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공부의 궁극적인 목적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달린 것이니까요. ‘지행합일(知行合一)’, 즉 ‘아는 것과 행동은 일치해야 한다’는 진리가 동서양 모든 철학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를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공부에 대한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여러분 공부 왜 하세요?” 새 학기 강의가 시작되면 첫 시간에 제가 꼭 학생들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그러면 대체로 ‘수업을 듣기 위해서’라고 대답합니다. 그럼 저는 또 묻습니다. “수업을 왜 잘 들으려고 하나요?” 그러면 대체로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라고 답하더군요. 그러면 저는 또 묻습니다. “학점은 왜 잘 받아야 하죠?” 자 이제 눈치를 채셨나요? 제가 왜 이렇게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졌을까요?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하다보면 결국 왜 사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삶의 물음에 다다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변이 한결같이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점입니다. 좋은 성적을 받아야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야 월급이 많아지고, 월급이 많아야 결혼도 하고 집도 장만하고 그럴 수 있다는 거죠. 그래야만 비로소 ‘행복’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행복’이라는 근원적 목표로 거슬러가는 길은 각자 조금씩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그것은 반드시 궁극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위한 행동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행복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부모님의 행복을 위한 것? 혹은 선생님을 위한 것? 아닙니다. 모두 틀렸습니다. 결국 그 행복을 누리는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공자는 그래서 나를 위해서 공부하라고 말했습니다.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에 공부한다는 자들은 자신을 위해서 했다. (하지만) 요즘 공부한다는 자들은 남에게 보이려고만 하는구나.” 『논어』 「헌문」

월드 스타가 된 싸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전세계를 열광시킨 가수 싸이는 남들 다 하는 대학 입학 준비, 취업을 위한 스팩 쌓기 등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매일 음악만을 생각했습니다. 그저 음악에만 충(忠)했습니다. 그러니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무명일 때에도 좌절하지 않고 음악을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공자의 말을 빌리면 싸이는 전적으로 자기를 위해 공부한 셈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진짜 자기를 위해서, 그래서 진짜 자기가 하고 싶어서 공부하고 있나요? 혹시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기대 때문에 억지로 하지는 않나요?

대학생들도 대부분 마찬가지라는 것이 더 안타깝습니다. 초중고 학창시절 내내 대학만 가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다고 떠들어대지만 정작 대학에 입학해도 남들 다 하는 토익 준비나 학점에 목을 매기 일쑤입니다. 정작 자기가 선택한 학과가 적성에 맞지도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는 학생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땀에 절어 있는 한 아이가 있습니다. 땀냄새를 없애는 방법으로 향수를 택했다고 합시다. 몇 시간은 버틸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 그 고약한 땀냄새가 나기 시작합니다. 또 다시 향수를 뿌리는 게 합리적일까요? 아니면 깨끗하게 샤워를 하는 것이 나을까요? 문제의 해결책은 근원적인 원인을 제가하는 데에 있지 드러나 증상만을 다른 것으로 뒤엎는 데 있지 않습니다.

정리할게요. 공부는 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덕 100점 맞는 놈이 더 나쁜 짓을 많이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좋은 머리로 나쁜 짓을 더 많이, 완벽하게 해낼지 모르지요. 공부 잘 한다고 꼭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적은 좀 떨어져도 정말 인간적인 녀석들이 성공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반드시 사회라는 틀 속에서 누군가와 마주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짜 공부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엄마나 아빠가 바라는 꿈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보다 자기가 정말 좋아서 공부하는 사람이 결과적으로 더 성공에 가깝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사 지내는 형식에 정답이 있다고?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면 평소에 떨어져 지내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온갖 음식을 정성껏 장만하고 조상님들께 차례를 올립니다. 또 종교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1년에 몇 번씩은 조상님들을 위해 제사를 지냅니다. 그렇게 되면 차례상 혹은 제사상을 두고 간혹 어른들끼리 의견 충돌이 일어나곤 합니다. 이를테면 생선과 고기 위치, 혹은 흰 과일과 붉은 과일 등의 음식 위치를 바꿔야 한다는 상차림에 대한 논란에서부터, 술을 올리고 밥을 올려야 한다든가 밥그릇 뚜껑을 언제 닫아야 하느냐는 제사순서에 대한 논란까지 종류도 다양합니다. 게다가 시간(봄인지 가을인지)과 공간(전라도인지 경상도인지)에 따라 제사음식 자체도 다르고 순서도 모두 제각각입니다. 헌데 재미있는 것은 다들 제사지내는 법이 따로 있다고들 합니다. 이렇게 죄다 다른데도 정답이 있다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릴 때 저희 집은 일 년에 대여섯 번 정도의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사에만 올리는 음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서 젯상에는 올리지만 평소에는 거의 먹지 않는 음식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혹시 경상북도 안동지역의 ‘헛제삿밥’을 아시냐요? 제사에 쓰이는 나물들을 간장에 비비고, 고등어나 고래고기 같은 제사 음식을 곁들여 먹는 것으로 이제는 안동지역의 대표 음식이 되었습니다. 이 음식은 본래 제사를 지낸 뒤에 만들어 먹던 음식인데 그 맛이 좋아서 제사랑 상관없이 먹게 된 음식입니다.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이처럼 제사를 지내면 남은 음식들이 늘 문젯거리가 됩니다. 평소에 잘 먹지 않던 음식들을 젯상에 올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어린 마음에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나중에 내가 제사를 지내게 되면 돌아가신 분이 생전에 좋아하시던 음식을 올리겠다고요. 할아버지는 사이다를 엄청 좋아하셨습니다. 특히 별이 일곱 개가 있는 회사의 사이다만 드셨습니다. 할머니는 간장 게장을 좋아하셨는데 나중에는 이가 없으셔서 아예 잘게 부셔놓은 게에 양념을 버무려 게장을 담그시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한 제상에 사이다나 간장게장을 올리면 나쁜 행동이고 예의에도 어긋날까요?

원래 상상력은 끝도 없기 때문에 먼 훗날도 생각해봤습니다. 내 후손들이 나를 위해 제사를 지낸다면 어떤 음식이 좋을까 하고요. ‘오징어젓갈, 미역줄기볶음, 쇠고기무국, 홍어삼합’ 정도면 참 좋겠습니다. 제사가 끝나자마자 제사에 모인 사람들이 둘러앉아 바로바로 먹어치울 수도 있으니까 음식 남을 걱정도 없지요. 여러분들은 훗날의 자신의 제사상에 어떤 음식이 올라오길 바라나요? 돼지갈비나 초밥, 까르보나라 스파게티가 떠오르진 않나요? 우리의 이런 즐거운 상상에 대해 공자는 뭐라고 답할까요?

임방이라는 제자가 예의의 근본에 대하여 여쭈었다.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한 질문이구나. 예의라는 것은 사치스러운 것보다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낫고, (또한) 장례를 치를 때에는 (절차를 잘 알아서) 쉽게 (잘) 치르는 것보다 차라리 (진정으로) 슬퍼해야 한다. 『논어』 「팔일」

실제로 동양철학의 역사 속에서 유가는 너무 형식에 얽매인 집단이고 장례식이나 제사를 지낼 때에 너무 사치스럽게 한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논어 안에 등장하는 공자의 말을 들으면 과한 비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적어도 공자 자신은 겉으로 보여지는 형식적인 측면에 힘을 쏟기 보다는 내면의 진실성에 더 귀를 기울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엄마가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해봅시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이 그와 같을 것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게 ‘차 조심해라’, ‘밥 굶지 말고 다녀라’라고 잔소리하던 그런 엄마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셨다니. 말로 하기 어려운 슬픔에 잠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장례식을 어떻게 치르는 것이 뭐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만약 개신교를 종교로 가진 이모와 불교를 종교로 가진 삼촌이 서로 자기의 종교식으로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다툰다면 저는 아마 화를 참지 못하고 폭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유족들이 장례법을 가지고 다투는 일은 자주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고인께서 생전에 믿던 종교의 예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장례는 세상을 떠나신 분을 위한 마지막 예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제가 온전히 그분을 위해 슬퍼하고, 또한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러 와주신 분들에게 그분을 대신에 인사를 드리는 것이겠지요.

‘홍동백서(紅東白西)’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어사전에는 이 말을 ‘제사상을 차릴 때, 신위를 기준으로 붉은 과일은 동쪽에 흰 과일은 서쪽에 놓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쉽게 말해 사과처럼 붉은 과일은 동쪽에, 배처럼 흰 과일은 서쪽에 놓으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 ‘홍동백서’가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라고 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서울을 떠나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이 바다에 침몰한 일이 있었습니다. 세월호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을 온통 슬픔에 빠지게 했던 안타깝고 절망적인 사건이고 두 번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특히 이 배에는 수학여행을 위해 승선했던 10대의 학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건 이후 처음 맞이하는 추석명절, 유가족들은 희생된 아이들을 위한 정성스런 차례상을 준비했습니다. 피자와 치킨, 콜라와 과자로 차려진 차례상이지만 그 누구도 불경스럽고 예의에 어긋났다고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누구보다 그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부모들은 희생된 아이들이 생전에 가장 좋아하던 음식을 제사상에 올려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부모들의 진솔한 태도에 감히 누가 제사상의 예의범절을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정리하겠습니다. 제사는 유가에서 행했던 중요한 의식인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그 행위보다 중요한 것이 진솔한 마음가짐입니다. 앞서 세상을 떠난 그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번지르르한 상차림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그러니 장례나 제사에 관한 절차로 싸우는 것도 모두 부질없는 일입니다. 도리어 자신들의 수준 낮음을 부끄럽게 드러내는 다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부모님이 아직 곁에 계실 때에 사랑한다고 감사하다고 미리 말해두는 것입니다. 불행은 불현듯 다가오고 후회는 끝없는 고통으로 남게 됩니다.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게 나쁘다고?

 

유가의 고지식한 선비를 떠올려 봅시다. 때는 바야흐로 조선시대, 가난한 농촌마을에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 한 채가 있습니다. 쌀독은 비어있는데다 곧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한 가정의 가장이 그 주인공입니다. 다섯이나 되는 아이들은 일상적인 배고픔에 시달리고 아내는 삯바느질을 하고 있습니다. 알바를 하는 셈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이 집의 가장이란 양반은 집 안에 들어앉아 글을 읽고 있습니다. 벌써 10년 째,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다못한 아내가 선비에게 한마디를 던집니다. 애들 굶어죽는 꼴 보기 전에 나가서 돈을 좀 벌어오라고요. 기다렸다는 듯 선비가 소리칩니다. 어디 양반 체면에 장사꾼들처럼 이익에 눈이 멀어 돈을 벌어서야 쓰겠느냐고요.

공자가 만약 이 광경을 지쳐본다면 뭐라고 했을까요? 자기 자식들 굶기면서까지 책을 읽는 것도 모자라 물질적 이익 자체를 거부하는 이 선비를 보고 말입니다. 공자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부유하고 귀한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지만 옳지 못한 방법을 통해서 얻어서는 안 된다. 가난하고 천한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피하는 것이 아니라면 안 된다. 『논어』 「리인」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거친 밥을 먹고 물만 마시며 팔베개를 하고 누워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에 있단다.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고 귀한 자리에 오른다면 내겐 뜬 구름과 같을 것이니라.” 『논어』 「옹야」

가만히 보니 공자는 이익 자체를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우리가 어떤 이익 앞에 마주했을 때에 그것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방법으로 얻은 것인지 진지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받게 되는 정당한 급여는 옳은 것이지만 주식투자나 부동산 투기로 얻은 부귀는 옳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주식투자가 뭐가 문제냐고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주식 역시 누군가 돈을 잃어줘야 내가 수익을 올릴 수 있으니까요. ‘제로섬 게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 사회의 이익 전체는 일정하기 때문에 한쪽이 득을 보면 반드시 다른 한쪽이 손해를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적어고 공자가 생각한 부귀는 다른 사람의 손해를 통해 얻어지는 이익과는 거리가 있었을 뿐이지 부귀함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닌 셈입니다.

또 다른 곳에서 공자는 정치가 무엇이냐는 제자의 질문에 먼저 굶는 백성들이 없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국방력에 힘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백성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라는 공자의 입장을 보면, 그가 물질적인 측면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나아가 공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성장과 분배의 분제, 즉 경제성장을 우선으로 놓을 것인지 아니면 분배의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 우선하는 지에 대해 꽤 의미 있는 말도 했습니다.

나는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라면, 적다고 걱정하지 않고 골고루 분배되는지를 걱정하며, 가난함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지 않은지를 걱정한다.’고 들었다. 골고루 분배되면 가난함이 없고, 서로 어우러지면 적음이 없고, 편안하게 하면 편중됨이 없어진단다. 『논어』 「계씨」

부유함과 가난함은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인 삼성의 이건희 회장도 세계 최고의 부자인 만수르의 입장에서는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일 뿐입니다. 반대로 세 끼 따뜻한 밥을 먹는 것에 별 어려움이 없는 사람은, 몸에 장애가 있어 생활이 매우 불편하거나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운 가정의 사람과 비교해 행복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절대적인 부자와 절대적인 가난뱅이가 없다면 결국 부유함과 가난함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는 문제라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앞서 공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가 힘써야 할 부분이 바로 ‘분배’의 문제라고 했습니다. 바꿔 말하면 누구는 일한 만큼 대가를 가져가지 못하는데 누구는 노력에 비해 어마어마한 대가를 가져가는 사회라면, 아무리 그 사회가 성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억울한 사람들이 나오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억울함을 없애야 하는 자가 바로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성장보다는 분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 공자를 공산주의자라고 욕할 수는 없는 부분이 바로 이 점 때문입니다.

물론 공자는 물질적 이익 자체로부터 태연해지기를 바랐는지 모르겠습니다. 부귀를 쫓는다고 누구나 부귀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공자는 그것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처해진 상황에 만족하고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작은 행복의 의미를 찾으라고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안회는 참으로 훌륭하구나. 다른 사람들은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가난한 마을에 사는 것을 (창피하다고)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가난 속에서도 얻어지는 작은) 즐거움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으니 참으로 훌륭하구나” 『논어』 「옹야」

정리하겠습니다. 공자도 사람인지라 부유하고 귀함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익을 얻기 위해 누군가 반드시 손해를 봐야만 한다면 옳지 않다고 여긴 것뿐입니다. 그러니 식구들 굶겨가며 자기 공부만 하고 있는 선비를 공자는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하는 만큼의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물질적 이익 앞에 올바름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 세상은 살짝만 비겁하면 손쉽게 더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습니다. 어디서든 새치기 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바로 그것이겠지요. 그래서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사람의 임무가 중요합니다. 누구나 열심히 일한 만큼 그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 나아가 누구나 자기 능력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공자가 생각한 국가의 임무가 아닐까요?

 

이것 하나만 기억하고 살자.

 

어떤 철학자의 삶의 방식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특히 공자처럼 똑같은 질문에도 묻는 사람이 처한 상황을 고려해서 각기 다른 답변을 내놓던 인물에 대해서는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철학자의 좌우명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도 이런 의문을 지녔던 제자가 있었습니다. 공자의 좌우명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궁금했던 것이지요. 바로 그 제자가 자공입니다. 어느 날 자공은 공자에게 돌직구 질문을 날립니다.

자공이 여쭈었습니다. “한 마디의 말 중에 평생토록 실천하면서 간직해야 하는 것이 있을까요?” 공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아마도) 서(恕)라라는 것일 게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미루지 않는 것이다.” 『논어』 「위령공」

우리가 흔히 공자의 철학을 떠올렸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仁)이 아니라 서(恕)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인(仁)은 논어에 100번도 넘게 나오지만 서(恕)는 단 2번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만 비추어 봐도 좀 이상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말이야말로 공자가 후세에 전하려던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恕)는 ‘같다’는 의미의 여(如)자와 ‘마음’을 뜻하는 심(心)으로 이루어진 글자입니다. 앞서 역지사지의 마음, 즉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공자는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늘 이 마음, 즉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마음’만 간직하고 살아도 다투고 싸울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딱 이 하나의 마음입니다.

지금까지 억울한 공자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우리가 흔히 유가에 대해 지니고 있었던 오해들이 상당부분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恕)의 의미가 바로 그것이 아닐까요? 그동안 한국사회의 문제점이 유가적 전통에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공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이 모든 문제가 결국은 공자 때문이라는 식의 유치한 결론은 내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쟤는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지 말고 저 아이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우리 애는 왜 저렇게 게임만 하고 공부는 뒷전인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지 말고 실제로 아이디를 만들어 그 게임을 함께 해보면 어떨까요? 왜 우리 엄마는 저렇게 잔소리만 하는 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기 전에 엄마의 입장에서 내세울 것이 결국 자식인 ‘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세상의 수많은 갈등은 대부분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동네 할아버지가 지적한 것처럼 아는 것보다 실천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면, 우리 이제 행동할 때입니다.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진은영의 『문학의 아토포스』[ⓔ시대와철학 알림]

진은영의 『문학의 아토포스』 –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안녕하세요, 학술 1부입니다. 11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를 아래와 같이 공지합니다. 이번에는 진은영 선생님이 직접 본인의 신간인『문학의 아토포스』를 가지고 독서 토론을 진행해 주실 계획입니다. 그리고 최종덕 선생님께서 흔쾌히 지정 토론을 맡아 주셨습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10월 철학자의 서재 라이브
발표자: 진은영(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교수)
지정 토론자: 최종덕(상지대 교수)
철학자의서재: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일? 시: 2014년 11월 28일(금) 오후 7시 30분 ~ 9시 30분
장 소: 태복빌딩 302호 한철연 강의실

이 책에 대해 참고할 만한 서평입니다.
1)‘문학의 아토포스’낸 진은영 시인 “고통의 목소리를 보여주는 ‘문학의 정치’ 필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8112056385&code=960100

2)‘시와 정치의 관계 천착한 진은영 논문집’
www.hani.co.kr/arti/culture/book/650563.html>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50563.html

▷ 11월 이후 일정
12월 한철연 정기 학술대회 관계로 월례발표회는 다음 달로 순연

● 이후에 다루었으면 하는 책이나 주제가 있으시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yhseo2001@hanmail.net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2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2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제부터 용렬한 후손의 조상 망신시키기가 어물전 망신을 꼴뚜기가 시키는 꼴보다 더 심하더라는 욕을 먹을 셈치고 어디 한번 제가 비몽사몽 중에 본 있음의 살붙이와 없음의 살붙이들을 그림으로 그려 볼까요?

 

윤구병 그림18

 

이 그림을 보면 가운데 있는 점①을 중심으로 네 개의 동심원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맨 바깥에 있는 동심원 밖에는 텅 빈 바탕⑥이 있습니다. 자, 이제 번호 ①에서 ⑥까지 저마다 무엇을 가리키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①­하나(있음, 있는 것, hen)

②­생각(정신, nus)

③­생명(영혼, psyche)

④­자연(생성, physis)

⑤­질료(없는 것=비존재, hyle)

⑥­아예 없음(허무, ouk)

이 그림을 눈여겨보신 분은 아마 조금 의아할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묻겠지요.

“너 플라톤 손자 맞냐?” “예. 맞아요.” “신플라톤학파에 속한단 말이지?” “글쎄요. 다들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까 제가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말해도 무리는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 네가 그려 놓은 그림 그게 뭐냐?” “왜요? 뭐 잘못된 게 있나요?” “어허, 그 그림 네 할아버지가 그린 우주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 아니냐?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 플라톤 옹이 〈티마이오스〉에서 설명하신 우주를 그림으로 그리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게야.”

 

윤구병 그림19

 

“자, 봐라. 네 할아버지는 우주 밖에 있는 것만 두고 ‘있는 것과 같은 것〔tauton〕’으로 우주의 바깥 테두리를 둘러 이 우주를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을 너도 인정하겠지? 그러니까 ‘있는 것과 다른 것〔heteron〕’은 그것이 정신〔nus〕이 되었건, 생명〔psyche〕이 되었건, 물질〔soma〕이 되었건, 물질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hypodoke〕이 되었건, 시쳇말로 운동이 되었건, 공간이 되었건, 하나도 빠짐없이 이 우주 안으로 밀어넣지 않았더냐? 같은 것의 고리가 우주를 감싸서 이 우주가 영원불변한 하나의 닫힌 우주로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우주가 하나인 있는 것과 맞닿아서 그 영향을 받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네 할아버지의 우주를 함께 꼼꼼히 들여다보자꾸나. 네 할아버지의 생각에 따르면 이 우주는 전체로 보아 빈틈없이 질서 지워진 완벽한 겉모습을 지니고 있어. 그러나 같은 것〔tauton〕으로 도배된 우주 표면 안쪽은 다른 것〔heteron〕으로 도배되어 있는데, 다른 것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있는 것과 다른 것, 하나와 다른 것, 형상〔idea〕과 다른 것이 아니겠느냐? 있는 것과 다른 것은 무엇이겠느냐? 언뜻 상식으로 생각하면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네 할아버지는 네 고조할아버지를 닮아서 아예 없는 것〔虛無〕은 생각할 수도 없고, 말로 드러낼 수도 없는 것이라고 여겨 아예 없다고 여겼어. 그 점에서는 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나 네 할아버지나 모두 그리스 정신의 소유자라고 볼 수 있겠지.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오랜 그리스 정신의 전통이 네 할아버지 플라톤 옹의 머릿속에도 꽉 박혀 있었던 거야. 없는 것을 있다고 인정하면 합리적 사고의 바탕이 아예 무너져 버린다고 여긴 거지. 그래서 네 할아버지가 고심 끝에 이끌어 낸 결론은 ‘있는 것과 다른 것은 없는 것이 아니요, 있는 것과도 다르고, 없는 것과도 다른 어떤 것, 다시 말해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어서,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방황하고 있는 것〔planomene aitia〕이다.’였지. 자, 그렇다면 이렇게 규정할 수 있겠구나. ‘있는 것과 다른 것〔heteron〕’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apeiron〕’이라고 말이야. 그렇다면 다음으로 하나와 다른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여럿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여럿이란 무엇이냐? 여럿의 최소 단위는 둘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둘이 나타나면 그 둘이 따로 있을 자리가 필요하게 되어 당장에 공간이 나타나고, 그 둘이 따로 떨어져서 관계를 맺지 않으면 둘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둘은 서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둘이 관계를 맺자마자 둘 사이에 서로 저됨〔identity〕이 사라지는 변화가 일어나 운동이 시작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하나와 다른 것〔heteron〕’은 여럿이요, 공간 규정이요, 시간 규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런데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다른 것〔heteron〕의 성격 하나는 ‘있는 것과 다른 것’으로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apeiron〕’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렇게 따지면 둘은 다시 말해 ‘있는 것이 아닌 것임과 동시에 없는 것이 아닌 것’이겠구나. 적어도 네 할아버지의 논리에 따르면 그런 것이겠지? 마지막으로 형상〔idea〕과 다른 것은 무엇이겠느냐? 하나하나의 형상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서 저마다 하나로 있는 것이고, 그런 뜻에서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고, 관계를 맺지 않으므로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정지의 반대는 무엇이지? 운동이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운동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전에 어떤 운동이 있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겠구나. 크게 보아 운동 가운데는 질서 있는 운동도 있고 무질서한 운동도 있지? 무엇을 질서 지워서 형성하는 운동도 있고, 질서를 흩뜨려서 허물어뜨리는 운동도 있지 않느냐? 네 할아버지가 〈티마이오스〉에서 말한 일정한 수치와 척도에 따라서 우주를 만들어 낸 데미우르고스(Demiourgos)의 운동은 바로 질서 있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데미우르고스의 운동이 우주 안에 반영되면 정신〔nous〕의 운동이 되고, 생명〔psyche〕의 운동이 되겠구나. 너도 네 할아버지 플라톤 옹이 〈티마이오스〉(Timaios)에서 한 말을 기억하고 있겠지? 데미우르고스가 한편으로는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제해서 생성〔gignomenon〕을 버물려 우주의 몸〔soma〕을 만들고, 그 몸 속에 생명〔psyche〕을 집어넣고, 그 다음에 정신〔nus〕을 집어넣어 이 우주를 살아 있는 것, 이성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말이야.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이 우주 속에 있는 생명과 정신 작용의 근원은 데미우르고스가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질서를 지향하는 운동이 있고, 그 근원이 어디라는 사실은 밝혀졌다고 치고, 거꾸로 무질서를 지향하는 운동은 어디에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하겠느냐? 우주 밖에는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이나 다른 것은 없다고 네 할아버지가 우기고 있으니까,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우주 밖에 있는 것은 형상과 데미우르고스뿐이겠구나. 그러면 무질서한 운동의 원인은 우주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 원인이 무엇이겠느냐? 형상과도 다르고, 데미우르고스의 운동과도 다른 것은 우주 안에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한데, 있는 것과 다른 것, 하나가 아닌 것, 형상과 다른 것, 질서 있는 운동의 원인과 다른 것, 그래서 질서에 따르도록 타이르면 그 타이름을 따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엇나가기도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그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 여럿인 것, 움직이는 것, 움직이되 내버려 두면 번번이 무질서와 혼돈 쪽으로 몸을 맡기려고 하는 것, 네 할아버지가 흔적〔ikne〕이라고도 부르고, 방황하는 원인〔planomene aitia〕이라고도 부르고, 생성〔gignomenon〕이라고도 부른 바로 그것이 아니더냐? 이야기가 너무 장황하게 늘어져서 곁길로 새어 나간 느낌이 없지 않다마는, 네 할아버지가 그려 놓았을 것으로 보이는 우주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자꾸나. 너도 이 그림이 네 할아버지 머릿속에 들어 있는 우주의 모습이라는 걸 인정하느냐?” “그림이 삭막하기는 하지만 얼추 비슷하네요.” “삭막하기는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우주의 모습도 오십 보 백 보야. 어디 네 우주와 네 할아버지의 우주 그림을 나란히 그려 놓고 견주어 보랴?

 

윤구병 그림20

 

보다시피 네 우주의 모습과 플라톤 옹이 생각한 우주의 모습은 정반대가 아니냐? 먼저 플라톤은 우주의 밖에 있는 것(①)을 두고, 있는 것의 세계와 맞닿아 있는 같은 것의 고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의 중심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두었는데, 너는 거꾸로 우주의 중심에 하나(있는 것)를 두고 우주의 맨 바깥쪽에 없는 것을 두고 있지?” “네, 그렇습니다.” “다음으로 너는 마치 해에서 햇살이 흘러나와 사방으로 흩어질 적에 빛의 중심인 해에 가까이 있을수록 빛다발이 더 많이 뭉쳐 있고, 해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빛다발이 성글어지면서 햇살이 힘을 잃는 것처럼 하나에 가장 가까운 누스(nous)에서 프시케(psyche)를 거쳐 힐레(hyle)에 이르는 동안 있는 것이 조금씩 잇달아 빠져나가 마침내 있는 것이 없는 완전한 결핍 단계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우주의 중심에 있는 하나(있는 것)에서 멀어질수록 없는 것이 지배하는 어둠의 영역으로 확산하는 우주를 그리고 있는데, 플라톤은 반대로 중심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소마(soma)가 감싸 안고, 소마를 프시케(psyche)가 또 감싸 안아 흩어지지 못하게 하고, 개별화하는 경향을 지닌 프쉬케를 그보다 더 강한 끈을 지닌 누스(nous)가 감싸서 우주가 전체로서 질서 있는 하나의 틀을 유지하도록 하고, 마지막으로는 맨 바깥에 있는 있는 것과 같은 것인 같음(또는 같은 것=tauton)의 끈이 우주를 칭칭 동여서 하나로 수렴하는 우주를 그리고 있지 않느냐?”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로 뭉치는 네 할아버지의 우주와 여럿으로 흩어지는 너의 우주는 전혀 거꾸로가 아니냐?” “바로 보셨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무엇인가 빠져 있는 것, 비어 있는 것은 빠진 무엇이 채워지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이 아쉬움이 그리움을 낳고, 이 그리움이 절실하면 할수록 빠져 있는 그 무엇, 다시 말해서 하나를 찾으려는 열망이 그만큼 강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 할아버지의 우주는 이미 하나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충만한 우주에는 크게 보아 빠진 것,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이 우주 밖에는 텅 빈 것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할아버지의 우주에서 완전한 결핍과 비슷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주의 중심에 점의 형태로나 있겠지요. 그리고 할아버지의 우주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우리가 사는 지구일 터이므로 현상만 살피면 이 지구에는 온갖 혼란이 일상화되어 있고 우리의 의식도 그 영향을 받아 혼란 투성이가 됩니다. 그러나 이 우주 내부의 모순은 비록 근본적으로는 해결될 길이 없다 할지라도 사람의 경우에는 영혼의 정화를 통해서 ‘하나와 같은 것〔tauton〕’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므로 사람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보시다시피 제가 그리는 우주는 허무에 둘러싸여서 어찌 보면 훨씬 더 상황이 비극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우주에는 ‘아예 없는 것(허무)’을 빼면 아무리 희미하게나마 하나인 있는 것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닿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어둠을 헤치고 이 빛살을 따라가면 우주의 모든 것이 다 하나와 하나가 되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떻든 네 우주 모형에 따르면 여러 우주, 무한한 우주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네 할아버지의 우주 모형에 따르면 하나의 우주밖에 있을 수 없거든.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찌하여 너를 신플라톤주의자라고 부르고, 심지어는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라는 딱지까지 붙이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구나.” “그거야 제 잘못이 아니지요. 제가 그리는 우주가 플라톤 할아버지의 우주와는 달리 닫힌 우주가 아니고 열린 우주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우주를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고조할아버지인 파르메니데스 옹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 옹에 이르기까지 이루어 놓으신 형이상학의 유산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힘을 입었습니다. 특히 할아버지 플라톤 옹의 영향은 더없이 컸지요. 저는 파르메니데스 옹이 하나로 있는 것만 인정한 결과로 후손들을 어떤 궁지에 빠뜨렸는지 잘 알고 있었고, 이 궁지에서 벗어나려고 할아버지 플라톤 옹이 여러 하나인 형상의 세계를 가정한 결과로 어떤 문제는 해결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골치 아픈 문제를 새로 불러일으켰다는 것도 분명히 이해했습니다. 또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 옹이 형상의 세계를 거부하고 형상의 세계와 경험 세계라는 두 세계 사이에 있는 틈을 메워 보려고 애를 썼지만 어느 점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눈치챘지요. 따라서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은 이 모든 작업의 성과를 한데 모아서 모순 없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비록 제 조상들의 뜻에 어긋나는 쪽으로 드러났더라도 너그러이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12살짜리 아동 성 매수가 집행유예라니…[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12살짜리 아동 성 매수가 집행유예라니…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딸 같은 12세 여아와 성매매를 한 40대가 집행유예를 받았다고 한다. 판결문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뉴스에 나온 양형 이유에 따르면 이렇다. “아직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아동·청소년의 성을 매수해 죄질이 불량하지만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범행을 반성하는 점을 참작했다” 이런 내용을 보면서 도대체 이 나라의 사법부가 위치한 시간대가 어느 시대인지 의심스럽다.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조선의 19세기라 하더라도 미성년자의 성을 매수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나 법률적으로 도저히 용납이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법원은 어떻게 이런 판단을 내리게 되었는가? 일단 언론에 보도된 내용만 가지고 보자.

 

법원도 12세 여아의 성을 매수한 것이 불량한 죄질임을 인정하고 있다. 현행법 하에서 성 매수는 불법이다. 특히나 13세 이하의 미성년자를 상대로 하는 경우는 특례법에 의해 가중 처벌을 한다. 자유의사에 의해 합의를 했다 하더라도 미성년자의 경우는 독립적인 인격이 아니므로 인정이 안 된다. 일단 성 매수가 불법이고, 무엇보다 미성년자, 특히 12살짜리 아동이다. 언론에 나온 것만으로는 두 차례 성 매수를 했다고 한다. 언론에 나온 정도가 이러니 그 이상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라면 반복적이고 상습적일 수 있다. 상습범의 경우라면 더 엄중하게 처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법원은 집행유예로 판결했다. 그 이유가 재밌다.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범행을 반성하는 점을 참작했다.” 아, 대한민국의 법정에서는 초범이고 반성하면 다 풀려나는구나. 법원이 언제부터 이렇게 관대해졌는가?

 

40대가 어린 막내 딸 같은 12살짜리와 성매매를 했다는 것이 어디 간단한 문제인가? 합의를 가장하고, 돈으로 유혹을 했다 하더라도 아이가 성큼 따라나설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돈으로 유혹하는 이상으로 위계에 의한 강박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7조(13세 미만의 미성년자에 대한 강간, 강제추행)은 10년 이상 무기징역까지 처벌할 정도로 엄중하다. 그런데 12살짜리 아동의 성 매수를 한 자에 대해 법원은 ‘죄질이 불량하다’는 표현으로 간단하게 처리한다. 이런 표현 속에는 죄질이 얼마나 위중하고, 얼마나 반인륜적이고, 얼마나 폭력적인가 드러나 있지 않다. 그저 통상적으로 있을 수 있을 정도의 불량한 죄 정도로 무심하게 넘겨질 수 있다. 아무튼 죄질이 불량하다고 했으니까 그 죄에 대해 문책하고 처벌해야 하지 않는가? 이런 행위에 대해 법원은 어떻게 판단했는가?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범행을 반성하는 점을 참작했다.” 일단 범행을 반성하는 점부터 보자. 아무리 나쁜 범죄를 저지른 자들도 엄중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높으면 면죄를 위해 반성을 가장할 수 있다. 이런 반성은 사실 진실한 반성일 수 없다. 물론 그런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법원이 그런 반성문 정도로 면죄시켜 준다면 개나 소도 다 반성문 쓰고 나올 일이다. 법원의 판단이 그렇게 우연적이고 심정적인 판단에 매달린다면 법의 엄중함을 어디서 볼 수 있겠고, 그런 범죄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예방적 처벌의 효과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음으로 다른 이유가 된 동종 전과가 없다는 점을 보자. 전과가 없는 초범의 경우 정상을 참작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다. 죄질이 불량하고 위중하고 반인륜적이고, 앞으로 반복될 가능성이 높은 범죄에도 똑같이 초범이라 정상을 참작한다는 것은 법원이 별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판단했다는 것 외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다시 한 번 양형의 이유를 보자. “죄질이 불량하지만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범행을 반성하는 점을 참작했다.” 이런 표현은 대부분 copy and paste로 이루어지는 상투적 판단이다. 혹은 자판기에 넣고 커피 뽑는 것처럼 기계적이다. 이 판단에는 아동 성 매수가 얼마나 불량한 죄질인지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법원의 판단은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아동 성 매수가 갖는 반인륜성과 폭력성이 어떻고, 또 그 판단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파급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아무런 성찰이 없다.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행이나 성 매수 등과 관련해 죄를 엄중하게 묻는 것은 세계적으로 일반적 추세이다. 그만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등의 발달로 아동 성매매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추세를 저지하고 경고하기 위해서 더 엄중하게 처벌해야 하는데 대한민국의 법원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런 기계적 판단에는 그런 관심과 파급효과 등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려는 전문가의 계산된 냉정함이 엿보일 지경이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일반인의 호기심 이상으로 법원의 판단에 대해 알 수 없는 나로서는 다만 법적 판단이 상당 부분 우연적이고 자의적으로 내려지고 있다고 생각할 밖에 없다. 이런 우연과 자의의 틈바구니로 정치적 압력, 금전의 유혹, 전관예우 같은 비합리적 요소가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원의 판단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유전 무죄요, 무전 유죄” 혹은 “늘었다 줄었다 하는 고무줄 판결”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법의 판단이 그럴 수 없고, 결코 그래서도 안 된다. 엄중하고 공정해야 할 법원의 판단이 이렇게 자의적이고 우연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법적 정의가 훼손이 되고 법적 질서와 안정이 깨질 수가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떠안게 되지 않겠는가? 12살짜리 아동 성 매수 범을 집행유예로 쉽게 풀어 줄 정도로 법원은 성범죄에 대해 관대하단 말인가? 법원은 자신들이 내리는 판단의 의미와 효과에 대해 좀 더 신중하고 성찰적이어야 할 것이다.

 

책읽기-『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

 

 

찬초?(다중지성정원회원)

 

프랑스 생명 철학의 거대한 흐름에 대한 보고

“깡길렘(캉길렘)인지, 킹크랩인지.” – 얼마 전 우연히 듣게 된 농담의 한 토막이다. ‘깡길렘’이라는 이름이 너무 낯설었던 나머지, 영미철학을 공부한 어느 노학자가 깡길렘 연구자의 발표에 이어 이런 우스갯소리를 던졌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화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에게 조르주 깡길렘(George Canguilhem)이나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과 같은 학자들이 속해 있는, 생성의 관점으로 생명을 사유하려는 프랑스 생명철학의 계보가 상당히 낯설다는 사실이다.

프랑스 생명철학을 꾸준히 연구하고 있는 학자이자, 앙리 베르그손(Henri Bergson)의 주요 저작 중 하나인 『창조적 진화』의 역자로 알려져 있는 황수영의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갈무리, 2014)는 깡길렘과 시몽동을 비롯한 낯선 이름의 학자들을 베르그손과 함께 제시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베르그손 연구서들 사이에서 매우 독특한 지점을 확보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는 ‘깡길렘, 시몽동, 들뢰즈와의 대화’이다. 즉, 프랑스에서 거의 처음으로 생명 철학의 체계적인 정립을 시도한 베르그손을 중심으로, 생명 철학과 생성 철학이라는 두 가지의 키워드를 놓고 각자 독창적인 관점에서 다양한 논의를 전개한 깡길렘, 시몽동, 들뢰즈 철학의 구도를 그려보려는 낯선 기획이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베르그손의 텍스트는 『창조적 진화』이다. 베르그손은 애초에 실증주의적 입장에서 과학의 소관인 것으로만 간주되어 온 진화론을 형이상학의 문제로 재구성한다. 당시에 제기되고 있던 여러 진화 이론들을 숙고한 결과물인 『창조적 진화』를 기초로 하였을 때 주목하게 되는 베르그손의 주요 개념은 ‘생명의 약동(?lan vital)’이다. 이 개념은 당대의 기계론적 과학이 신봉하던 인과 법칙에 따라 계산과 추측이 가능한 것으로 여겨지던 생명의 역사라는 흐름 속에서 우발성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베르그손 철학의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그의 입장을 고생물학이나 다윈주의 이론가들의 견해와 비교한다. 이때 저자가 취하는 자세는 어느 일방에 치우친 것이 아니며, 과학과 철학 사이에서 생성되는 의미 있는 교차점들을 조명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의철학(醫哲學)의 문제를 고민하며 생기론적 철학을 전개한 조르주 깡길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유기체나 인간에게서 발생하는 정상성과 병리의 문제이다. 베르그손이 생명계를 시간적 운동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깡길렘은 개체들의 구체적 생명활동에 관심을 갖는다. 특히 흥미로운 개념은 바로 깡길렘의 ‘건강’ 개념이다. ‘건강’을 “일시적으로 정상이라고 정의되는 규범을 넘어설 가능성이며, 일상적 규범의 위반을 견디고 새로운 상황에서 새로운 규범을 설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밝힌 깡길렘의 생명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문제에 대하여 무수한 반응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건강을 남용할 가능성도 건강의 일부를 이룬다.”라는 그의 말은 생명 현상의 우발성이나 과잉 현상으로부터 규범을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역동적 세계관을 구상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보통 ‘건강’을 일정한 상태로 ‘유지해야만 하는 것’, 비정상적인 것들로부터 지켜내야 할 것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깡길렘의 견해에 비추어보면, 건강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특이성과 전복가능성이 새롭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렇게 프랑스 생명철학의 계보에서 생명이라는 개념은 질병이나 노화, 죽음과 연관되어 온 통속적인 주제나 보건 산업의 대상이 아니라 새로운 인식을 통해 재발견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된다.

한편, 자연과학 분야에서의 연구를 시작으로 후에 과학철학과 형이상학의 문제에 관심을 쏟은 과학철학자인 질베르 시몽동은 ‘생성의 철학’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베르그손과의 연관성을 드러낸다. 시몽동에게서 중요한 개념은 ‘개체화’이다. 베르그손에게 진화가 생명의 수다한 잠재적 경향들이 종과 개체로 분화되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면, 시몽동에게서 전개체적 과정은 긴장된 힘들이 공존하는 상태이며, 개체화과정은 하나의 싹을 중심으로 동일한 요소들을 응집시키는 ‘분극작용’이다. 이러한 베르그손과 시몽동의 구상에 의지해 들뢰즈는 차이의 철학을 기획하게 된다. 그는 베르그손에게서 잠재태의 현실화라는 장치를 참조하고 지속(dur?e)의 개념을 자기 자신과 달라지면서 반복하는 동적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들뢰즈는 자신의 생성 철학의 핵심 모형을 베르그손에게서 구하면서도, 발생이 동시에 개체화의 장이라는 특정한 환경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시몽동의 개체화이론을 조회하고 있다. 이로써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에서는 생명의 무궁무진한 폭발과 개체화라는 안정화과정이 서로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직접 과학 지식을 분석하고 참고하면서 자신들의 개념을 정립해 온 베르그손, 깡길렘, 시몽동의 선행작업을 마침내 들뢰즈가 철학사적인 관점에서 종합하고 이로부터 다시금 독창적인 개념을 발명해내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게 된다. 자기 자신과 달라지는 운동으로서 베르그손의 지속 개념을 받아들인 들뢰즈가 차이를 자기 철학의 핵심 개념으로 삼았을 때, 서양철학의 주류로서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플라톤주의가 전복되고, 차이, 이미지, 우발성, 일회성과 같은, 여태 철학의 뒷자리로 밀려나 있었던 개념들이 전면적으로 대두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황수영의 『베르그손, 생성으로 생명을 사유하기』는 베르그손의 철학과 그것이 프랑스 철학계에 미친 영향에 대한 상세한 보고이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우리에게 다분히 낯선 철학의 경향들을 소개하고 있는 어떤 잠재성의 표현이자, 베르그손을 중심으로 생성철학의 계보를 엮은 분극작용, 즉 응집을 통한 개체화의 한 양태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 책이 생성의 철학에 대한 개인적 연구의 집대성인 동시에, 베르그손에서 깡길렘, 시몽동, 그리고 들뢰즈로 자리를 옮겨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유의 발생과 생성의 흐름 자체를 보여준다는 사실은 활달한 독서의 재미뿐만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강물이 흘러가는 가운데, 읽는 사람 스스로 그 광경을 목도하며 홀로 정지해 있는 듯한 숭고를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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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꼬의 <성의 역사(Histoire de la sexualit?)>[철학자의 서재]

푸꼬의 <성의 역사(Histoire de la sexualit?)>[철학자의 서재]

 

류종렬(철학아카데미)

 

[철학자의서재]가 “이시대와 철학”에서 새롭게 연재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성의역사1성(sex)에 관한한 의학(생물학)적으로 지식이 지배하고 권력을 행사할 수도 있을지라도 성관심(sexualit?, 애정관심)은 지식과 권력에 연관 속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포함된 것보다 더 많을 것이다. 애정관심은 남녀만의 것도 아니고, 한 생명체와 다른 생명체(나나니 벌과 난초, 도착자들) 사람과 사물 사이에도 있다. 푸꼬의 철학적 여정을 보면 애정관심의 문제거리는 지식과 권력과는 다른 차원임을 알 수 있다. 왜 성관심은 지식과 권력이 아닐까하는 문제거리를 나는 막대자석에 비유한다. 근세철학이 맘과 몸, 영혼과 신체의 관계를 두 시계처럼 서로 다르지만 같이 갈 수 있는 것으로, 학문적 표현으로 평행론이라거나 번역가능성이거나 한쪽으로 환원가능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또는 그보다 더 높은 하나로 치환가능한 것쯤으로 여긴다. 좌석은 남극과 북극이 둘 다 같은 힘(역량)을 표현하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연관을 맺는다. 두 방식은 방향만이 반대일까? 간단히 막대자석을 반으로 잘라보라, 그러면 두 개의 성(sex)처럼 따로 남성과 여성처럼 남극과 북극이 따라 현존할까? 잘라진 반토막은 또 다시 두 개의 극을 갖는다. 하나의 관심을 잘라낸다고 다른 하나로서만 존속할 것이라고 사유될 수 없고, 상대적인 것은 거의 자동적으로 생성한다. 다른 표현으로 기의(한 극)가 활동하는 순간, 기표(다른 극)는 만들어진다, 즉 생성한다. 부정성을 거쳐서 지양이라기보다 부정성도 실재성이며 단지 배제된 관심으로 무시되었을 뿐이며, 이는 여성, 소수자, 이석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둘 사이에 평행도 번역도 환원도 아닌 방식으로 생성한다는 가정은 인간의 사유를 모독하는 것일까?

우리가 푸꼬에게 다시 물어볼 수 없지만, 그의 학문적 여정을 다시 보면 심각한 고민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들뢰즈을 빌지 않아도 가능하다. 그로서는 지식의 고고학을 탐구 해 나가면서 보니, 지식이 권력의 행사와 같은 보조를 맞추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보기에 푸꼬는 과거를 탐색하는 고문헌학자에서 새로운 지도를 그리는 지도제작자를 이행하였는데, 당시의 주변 학자들이 그에게서 ‘신의 죽음’보다 더한 ‘주체의 상실’을 보았다고 할 때, 푸꼬는 자신의 의도와 관계 없이, 왜 다른 사람들이 주체의 부재로 읽었을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권력의 행사에서 피권력자(배제자)는 주체가 아니게 되고, 지식이 개별자의 것이 아니면 인간조차도 배제자(소외자)가 된다. 은연중에 지식의 총체로서 상층이라는 기표를 인정하게 되면, 당연히 거기에 대응하는 기표로서 개인 또는 인민은 기표의 권능을 지닐 것이라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대응도 평행도 아니고, 그의 비판자들 말대로 개인은 피지배자로 놓이게 되어 아니러니에 빠진다.

푸꼬는 지식과 권력처럼 성관심에서도 같은 관계가 성립하는지에 대해 그의 3부작의 첫 작품 <성의 역사 1: 앎의 의지(La volont? de savoir, 1976)>에서 고민하면서 시작한다. 억압 기제로서 권력을 성관심에 관한한 그 작동(기술방식)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당연히 지배 기술(techn?)은 여기서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여긴 것에서 문제거리를 보았다. 그런데 성에 관해서만은 그 억압이 구체적으로 실행된 것은 과거 서양에서는 고백문화가 전부가 아닌가 한다. 성관심은, 성을 다루듯 기계적 장치로만으로도, 생물학적으로 둘 사이의 상대적 연관을 맺는 매체로서도, 그리고 정치적 쟁점으로서 규제와 규율의 강화에서도 인구조절의 정책에서도 설명될 수 없는 다른 것이 있다. 역사의 구체적 고문헌을 파고 들어가 보면 통제와 규율보다 더 많은 성관심을, 권력의 그물에 잡히지 않은 더 많은 애정관심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한다. 애정 관심은 자기의 목표 추구처럼 일정한 완성에 이르면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확장의 추구, 즉 회오리 같은 추구로서 자기완성의 길로 가는 과정이라는 소크라테스적 욕망과 더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푸꼬는 첫 권을 쓰고서(1976년) 그 자신이 6가지 주제를 다룰 것이라고 예고했다. 1. 앎의 의지 2. 살과 신체, 3. 어린이들의 십자군, 4. 여성, 어머니, 히스테리, 5. 도착자들, 6. 인구와 종족 이다. 이러한 방향은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고, 긴 시간(8년)을 고민하여 두 권(제2권과 제3권, 1984년 그가 죽기 직전에)을 내면서 스스로 방향을 수정할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지식의 진보라는 방향, 권력의 표출이라는 방향과 달리 셋째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즉 “자기와 관계가 어떤 형태와 양태들을 취하는 지”를 탐구하는 “주체”의 문제로 전환이다. 들뢰즈가 푸꼬를 존경하여 쓴 <푸꼬(1986)>의 제2부 ?위상학?에서 “다르게 사유하기”라는 용어를 부각시켰듯이, 푸꼬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대신에, 어떻게 그리고 어느 만큼까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할지를 알려고 하는 것”(제2권 번23쪽)에서 주체의 진솔한 위상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았다. 우리가 보기에는 애정관심에서는 ‘다르게 생각하는’ 번역가능하지 않는 상대를 만날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푸꼬는 이 상대를 제3권에서 ?자신과 타인?이라는 소제목에서 타인들의 범주들로 다룬다. 우리는 그의 저술의 순서에 따라서 타인과 관계 이전에 제2권에서 자기의 설정을 먼저 다룬 이유를 짐작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지식은 바깥의 대상이다. 인간이라는 상대도 바깥으로 두었을 때 지식을 통한 지식에 의한 지배는 가능하다. 우리는 이런 철학을 주지주의철학이라 부른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에 대한 지배 또는 배려에서도 대상으로 위상을 설정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다이몬,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에서 기억, 베르그송의 지속은 같은 고민이었을 것이다. 인격에 관한한 대상화(기표)이전에 자기 현존(인격성, 기의)이 먼저이고, 게다가 이 현존을 타자처럼 대상화로 다루기가 매우 곤란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은 묻기를 하다 보니 아이러니로, 다른 사람은 고민을 하다고 오류가 있더라고 믿자 하며 넘어가고, 또 한 사람은 운동하고 있는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기나긴)? 과정 전체를 “하나”로 위상을 정하자고 한다. 이 하나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으며, 하나가 자기 삶의 선택을 다른 하나(분신, 아바타, 기표)로 표출한다. 이런 생각은 주지주의에 대립되는 본성주의(le Naturalisme, 자연주의)라 하자. 푸꼬는 우선 그러한 방식을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볼 것이고, 자기 위상의 설정으로 주체화의 양식의 길 즉 자기완성의 길에 주목하였다. 그다음으로 다루어야 할 것으로 크리스트교 안에서 자기완성의 길일진 데 애석하게도 다음 차례로 남겨 놓고 죽었다.

자기완성을 애정관심에서 보면 네 가지 개념을 다룰 수 있다고 한다. “우선 아프로디지아, 쾌락의 개념. 그것을 통해 우리는 성적 행동에서 무엇이 ‘윤리적 실체’로 인식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다음으로 크레시스, ‘활용’의 개념. 이 개념을 통해 우리는 쾌락의 실천이 도덕적 가치를 부여 받기 위해 따라야 했던 복종의 유형을 파악할 수 있다. 엔크라테이아, ‘제어’의 개념. 이 개념은 스스로를 도덕적 주체로 세우기 위해 자기 자신에 대해 가져야만 하는 태도를 정의해준다. 마지막으로 소프로쉬네, ’절제’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성의역사2 수행 중에 있는 도덕적 주체를 특징짓는 것이다.”(2권 51쪽) 여기서 성관심의 쾌락, 극기, 절제에 관한한 조화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어서 고대 철학의 주제인 듯하지만, 제2권의 주제인 “쾌락의 활용”에는 다른 의미가 들어있다. “때에 맺게”(카이로이스) 이용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얼핏 때에 어긋나게 라는 니체의 ‘반시대’를 떠올일 수 있다. 반시대도 부정성이 아니라 실재성이므로,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은 48%의 부정성이, 51.6%만큼이나 시대의 적절함이며 때에 맞음이기도 하다. 여기서 언급은 카이로이스가 자기 배려에 중요한 계기이다.

그는 고문헌학자답게 성관심과 자기 배려를 다룰 세 가지 기술(techn? 조절 방식)을 다룬다. 스스로를 자신의 육체에 대한 적절한 결합과 배려의 기술로서 양생술, 자기 관리를 잘하는 것만큼이나 가축과 노예처럼 여성에 대해서도 통제와 지배의 기술로서 가정관리술, 대리자로서 자유로운 활동을 예비하는 소년을 스스로 지혜를 갖추어가는 기술과 훈련으로서 연애술, 세 부분을 학문적으로 다룬다. 이런 내용을 검토하고 나서, 주체의 진정한 활동은 사랑행위로부터 사랑의 본질로, 명예의 문제로부터 진리의 사랑으로 가듯이, 타인과 관계에서도 불균형으로부터 일치로 나간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자유인들이 중요시한 연애술 중에서 소년애도 덕목의 발현으로부터 지혜로 이행을 여러모로 검토한다. 그 성관심에는 즐거움을 활용하고 그것에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는 자기 극복의 노력이 필요하며 또한 그 훈련이 중요하다. 소년은 장차 자유시민이 되기 부족하여 종속되거나 넘쳐서 독재적이 되어서 안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언제나 절제(소프로쉬네) 또는 조화(아르모니아)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성관심의 문제가 플라톤의 소클라테스의 연애술(사랑의 욕망)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본질을 찾아가는 과정과 같은 것으로, 사랑의 권장은 문제에 답을 찾는 것이라기보다 문제거리의 꺼풀을 벗기는 과정이다. 욕망의 실현은 자기의 꺼풀을 벗는 것으로 자기에 대한 자기 스스로를 파악하는 것이다. 답을 모른다고 하면서도 끊임없이 찾아가는 소크라테스의 여정일이지 모른다.

“자기 속에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의 방식은,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에서처럼 지속하는 기억의 총체가 무매개적으로 실재함을 다루는 것도,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서처럼 꿈을 분석하여 무의식을 실재적 존재로 인정하는 것도 또 다른 한 방식일 것이다. 현상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긍정성으로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부정성의 실재성으로 전환. 푸꼬는 이 여정을 고대의 아르테미도로스의 <꿈 해몽>을 통해 방법을 들여다본다. 꿈은 질서를 주체에 맞는 상태로 표현하기보다, 어쩌면 떠돌이 거지(부족한 자)의 일시적 표현같이 우의적이고 신탁적인 경우가 더 많다 점이다. 푸꼬는 이 책을 빗대어, 꿈의 해석이 윤리적 형식을 갖추게하는 측면이 있다기보다, 고대 꿈의 해석을 통해 성관심을 인식하고 평가하는 방식을 본다. 그 속에는 애정 관심들이 지속성을 지니고 상관성을 정리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관심”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보기에, 어둠에 있는 아페이론이 자기 생성으로서 시뮬라크르로 등장하는 실재성이 “자기 관심”이 아닐까? 우리가 보기에 푸꼬에서 애정관심에 관한 자기 설정, 자기의 역할과 훈련, 그리고 자기극복 등을 제2권에 다루었던 것도, 자기에 대한 관심 즉 “자기 배려”(제3권의 제목이다)때문일 것이다.

푸꼬의 관점을 맘과 몸 연관에서 보면, 몸은 외적 표현(표시, 시뮬라크르)이라면, 맘은 내면의 본성(자연)으로서, 자연 속에서 자기 배려라는 ‘달리 사유’는 푸꼬를 깊이로(심층으로) 향하게 된다. 우리가 보기에, 그 내면의 본성이 물질적(유물론)이고 자연적(자연주의)이며, 이것의 외화된 표현(껍질)이 물체로서 형식(형상론)이며 표상적(주지주의)이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유물론과 형상론은 전도된 것으로 나타난다. 소위 말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관심은 ‘자기에 대한 관심’은 개인 하나에 대해 전념하는 것이 아니성의역사3라, 자기와 연관있는 모든 것에 대한 전념을 말하는 것으로, 사유(맘)와 실천(몸)은 분리되지 않은 밀접한 관계로서 다룬다. 이 주제들 잘 들여다보면, 사실은 소크라테스의 욕망의 탐구와 사회적 실천의 양면성(이원성이 아닌 이중성)을 함께 하는 바로 자기의 배려이다. 즉 소크라테스의 앎과 함(지행합일)을 구체적 실천의 지표로 삼은 것은 스토아학파일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오이케이오시스(O?k?iosis ο?κε?ωσι?, 헌신)는 살아있는 존재가 자기에 속하는 것. 즉 자기 존재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파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소개된 번역어는 헌신이지만, 푸꼬의 번역의 “자기 배려”가 더 적당할 것 같고 나아가 “자기 치유”도 같은 의미이다. 소크라테스가 당대에 지식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 배운 것도 자기의 배려이며, 그들을 찾아가서 논쟁 끝에 피상적 지식을 넘어서 지정한 지식(총체적 배려, 인민들 삶의 절제, 도시 전체의 정의 등)에 추구는 ‘자기 치유’의 방식이다. 성관심도 개별적으로 답을 얻듯이 쾌락을 얻는 것도 아니고, 타인과 논쟁에서 이기듯이 성적관계도 이기는 것도 아니고, 수사학이나 논변술로서 자기 자랑과 허풍이 아니라 자기 극복이자 지식 추구이듯이, 성관심도 얻거나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훈련으로 자신의 극복에 있으며, 도시와 개인의 조화로운 절제 이듯이 성관심은 상대의 자유와 완성하려는 인격의 배려에 있다. 이 점에서 푸꼬는 고대의 소년애에 대해 잘 다루고 있다. 여성과 노예는 가정관리의 대상이니 제외하고, 자유 시민으로 자라 도시를 담당할 소년에게는 자신처럼 소년(타인)을 배려하여, 그도 자기의 인격완성의 노력과 지혜를 소년(타인)에게 전하는 사랑과 배려가 필요하다. 즉 소년애의 사랑은 타인의 자유와 지혜 추구의 길이 된다. 푸꼬는 제3권을 쓰고 다음 4권에서 크리스트교 사랑을 쓴다고 했지만, 여기서 어느 정도 만족했으리라. 즉 주체의 탐구는 주체의 자기 배려, 자기 훈련과 자기 극복, 그리고 회오리처럼 점점 커져가는 방식으로 자기 탐구의 확장은 성관심의 문제거리들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지식과 지혜들의 추구욕망과도 같은 방식으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푸꼬는 “주체”를 다루면서, 은연중에, 진솔한 지식의 탐구로서 “철학”을 밝히게 되었다. 주체의 주체화 과정이 “철학”이며 욕망의 추구이며 애정관심을 포함한 진정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누구나를 배려하는 “자유”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푸꼬는 역사적 고문헌을 통해 새로운 지도그리기가 이쯤에서 자유를 향한 주체의 위상을 그려 놓지 않았을까?

띠리(Bruno Thiry)는 <성의 역사(Histoire de la sexualit?)>에서 “윤리적 요청에 따라서 그 자체로 ‘사유 속에서 자기의 훈련’을 만족 시키며, 한 사상가는 자기가 [현재] 있는 것과 다른 것이 되면서도 자기에 충실하게 남는다. [자아의 이중화 현상을 이어가는] 푸꼬는 이런 것을 그의 고유한 이름으로, 철학, 이라 부른다.”고 평했다. 나로서는, 맘과 몸의 이중화의 부조화를 끊임없이 조화롭게 만들기(생성)하는 노력과 훈련 그리고 배려가 삶이며, 그 표면의 시뮬라크르 등장이 ‘철학’이라 본다. 푸꼬는 말년에 인격의 이중화 작업을 깨닫고서 철학의 진정한 아이러니를, 소크라테스처럼, 맛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책읽기-『공산주의의 현실성』

『공산주의의 현실성』

 

김상범 (포항공대 대학생)

 

오늘날 ‘공산주의’와 ‘현실성’이라는 단어처럼 붙여쓰기에 어색한 단어들이 있을까?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공산주의라는 유령’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에는 공산주의가 ‘현실적 위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공산주의라는 유령’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다. 데리다의 말대로 ‘유령’은 단순한 ‘순수 정신’이 아니라 육체성이나 현실적인 위력을 어느 정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유령은 현실성과 절연된 채 ‘순수 이념’이 되어버린 듯하다. 특히 바디우는 공산주의가 플라톤적인 의미에서의 ‘이념’, ‘이데아’일 뿐만 아니라 칸트적 의미에서의 ‘규제적 이념’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 공산주의는 살과 살이 부딪히는 시공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초역사적인 보편성을 획득했지만, ‘현실’ 속에서는 완전히 무력한 것처럼 보인다.

<브루노 보스틸스>

브루노 보스틸스는 바디우 등이 내세우는 공산주의에 대한 ‘잠재성의 존재론’을 넘어서 ‘현실성의 존재론’을 구축하기 위해 이 책을 쓰기로 기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이 ‘공산주의의 현실성’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조화된, 그리고 전투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그대로 복귀하는 것도 아니고, ‘사유는 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유치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아니다.(보스틸스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현실성은 reality가 아니라 actuality이다.)

보스틸스가 기존의 ‘정치적 존재론’을 검토할 때, 사실상 레닌주의적 정치철학, 혹은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의 정치학에 대한 반박으로서의 비전투적이고 탈주체적인 존재론을 제시하고 있는 에스뽀지토와 모레이라스의 사유를 먼저 검토하는 것은 이러한 복귀가 낳을 치명적인 결과를 피하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에스뽀지토는 ‘비정치적인 것의 존재론’을 제시하는데, 이러한 ‘비정치적인 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것의 초월적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 정치 전체의 배후에 깔린 전제들 자체를 근본적[급진적]으로 만듦으로써, 즉 이 전제들을 내부로부터 동시에 치명적으로 붕괴시키는 일의 초과 성취를 통해서”(『공산주의의 현실성』, 163쪽)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비정치적인 것’은 정치가 펼쳐진 영역을 사유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며, 이러한 공간을 제공한다는 것은 전투적이고 주체중심적인 맹목적 실천으로부터 거리를 취하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모레이라스는 ‘하부정치’라는 개념을 통해서 주체주의의 “돌림병”을 치유하고자 한다. 하부정치라는 것은 적/아군의 구분을 넘어서, 유위적이고 주체적이며 주권적인 결단을 넘어서 존재하는 ‘비주체의’, ‘수동적인’, ‘무위적인’ 것으로서 정치적인 것 혹은 정치적 주체의 ‘구성적 외부’라고 볼 수 있다. 모레이라스는 이 ‘하부정치’ 개념을 통해 “자기정체성에 내재하는 배제된 타자의 위상학”(『공산주의의 현실성』, 176쪽)에 도달하게 된다.

보스틸스는 이러한 에스뽀지토와 모레이라스의 이론을 통해 주체중심적이고 전투적인, 그래서 위험성을 간직한 순수한 해방의 존재론을 극복할 가능성을 발견하지만 동시에 이들의 이론이 “통상적인 정치 전부를 능가하는 도덕적인 탁월함의 증거로서 비정치적인 것의 비효율성에 의지하는 아름다운 영혼이 취하게 되는 태도”(『공산주의의 현실성』, 195쪽)를 보여준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통렬한 비판과 함께 보스틸스는 랑시에르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랑시에르는 잘 알려진 대로 감각적인 것을 분할하는 질서이자 셈의 ‘정상적이고 자연적인’ 논리로서 ‘치안’과 이러한 ‘치안’에 대항하여 “셈의 논리”로부터 벗어난, 평등을 주장하는 ‘정치’를 구분하는데, 보스틸스는 이러한 “감각적인 것을 [명령적] 질서대로 분할 및 구획하는 것으로서 치안과 몫이 없는 부분집단을 기입하는 것으로서 정치 사이의 대립은, 사변적 좌익주의의 특성이라 할 법한 모순의 ‘순수화’에 위험할 정도로 가까운 것”(『공산주의의 현실성』, 229쪽)이라고 비판한다. 뿐만 아니라 치안과 정치가 이와 같은 것이라면, 정치는 단지 ‘간헐적으로’ 또는 ‘희귀성을 가지고’ 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보스틸스는 지적한다.

또한 보스틸스는 랑시에르의 때와 장소에 맞지 않는 것으로서의 공산주의, 즉 비시대적인 것이자 비장소적인 것으로서의 공산주의가 공산주의의 ‘비현실성’을 옹호하는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의 비현실성에 대한 이런 옹호는, 비 현실성 자체의 지반이 우리 자신의 현실성과 해방적 관련을 맺는 때는 언제이며 어디에서 관련을 맺게 되는가를 결정해야만 하는, 그 다음 수준으로 문제를 넘기게 되는 것은 아닌가?”(『공산주의의 현실성』, 250쪽)

그래서 보스틸스는 이렇게 랑시에르의 한계를 지적하며, ‘실행’에 대한 사유를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지젝에 대한 검토로 넘어가게 된다. 지젝은 『믿음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라캉과 헤겔을 참조하면서 그의 ‘진정한 실행’ 개념을 “신경증에서의 [증상으로 구현되는] 행동화, 정신병에서의 [발작적인] 실행으로서의 이행, 그리고 순수하게 형식적인 자기주장에서의 상징적 실행”(『공산주의의 현실성』, 272쪽)과 구분짓는데, 이러한 실행은 “행위자가 속한 상황의 그야말로 상징적인 좌표를 재구축하는”(『공산주의의 현실성』, 272쪽) 행위로 정의된다.

그러나 이후의 저작에서 지젝은 바틀비를 옹호하며 ‘가짜 실행’을 하지 않는 것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해석이나 사유에 머물지 않도록 명령하고 맹목적인 실천을 명령하는, 도서관에서 나와서 거리로 나갈 것을 명령하는 협박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다. 지젝은 ‘멈춰라, 그리고 사유하라’고 말한다.

심지어 지젝은 진정한 ‘실행’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기도 한다.

“오늘날 진정한 정치적 실행일 수 있는 것은 새로운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지배적인 운동을 중단시키는 일이다.”(『공산주의의 현실성』, 321쪽)

이것은 보스틸스의 입맛에는 맞는지 모르지만, 나는 이것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사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일순간에 정지시킬 수도 없고, 이러한 초월적/신적 폭력에 의한 자본주의의 정지가 바람직한 정치적 결과를 낳는 것도 아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들뢰즈와 가타리, 네그리와 하트가 말한대로 우리는 자본주의를 뚫고 지나가야 하며, 자본주의 안에서 공산주의를 만들어내어야 한다. (심지어 가속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자본주의를 가속화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바깥에 서 있을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현실적인 사유’가 아닌가?

그리고 이러한 ‘현실성’을 파악하고 현실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보스틸스의 생각과는 반대로 ‘잠재성’의 사유가 반드시 필요하다. ‘현실성’만 부여잡고 있는다고 해서 ‘현실적인 사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잠재성을 알아야 현실의 경향성을 파악할 수 있고, 또 존재론적으로도 현실의 진정한 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잠재적인 것이 요청되는 것이다.

또한 공산주의를 하이데거-아감벤적 의미에서의 ‘순수 잠재성’으로 정의하거나, 바디우적/고진적 의미에서 ‘순수 이념/규제적 이념’으로 정의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들뢰즈적 의미에서 언제나 현실화될 수 있는 잠재성, 현실화될 수 있는 ‘이념’으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 모든 사회에 언제나 내재하는 비시대적인/비장소적인 것으로서의 공산주의, 그러나 동시에 언제나 어디에서나 현실화될 수 있는 공산주의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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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 증식과정(2)[자본론강독]-16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 증식과정(2)[자본론강독]-16

정리 : 김선이

 

제2절 가치 증식과정

 

●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한 측면으로서 가치증식과정

자본가에 의해 취득된 생산물은 사용가치이다. 상품생산에서는 사용가치는 ‘그 자체로서 사랑받는’ 물건은 아니다. 상품생산에서 사용가치가 생산되는 것은 오직 그것이 교환가치의 물질적 밑바탕, 그것의 담지자이기 때문이며 또 담지자인 한에서다.

자본가의 목적은 ①자본가는 교환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용가치, 즉 판매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물품인 상품을 생산하려고 한다. ②자본가는 생산에 사용한 상품들의 가치총액[즉, 그가 상품시장에서 자기의 귀중한 화폐를 투하해 획득한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가치총액]보다 그 가치가 더 큰 상품을 생산하려고 한다. 그는 사용가치를 생산하려고 할 뿐 아니라 상품을 생산하려고 하며 사용가치뿐 아니라 가치를 그리고 가치뿐 아니라 잉여가치를 생산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상품생산이 문제가 되고 있으므로 [노동과정]은 분명히 생산과정의 한 측면에 불과하다. 상품 그 자체가 사용가치와 가치의 통일인 것과 마찬가지로 상품의 생산과정도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이어야 한다.(P.246~247)

● 생산과정을 가치형성 과정으로 고찰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의 사용가치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의 양에 의해, 즉 그 상품의 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이것은 노동과정의 결과로 자본가가 손에 넣은 생산물에도 해당된다. (P.247)

면사의 생산에는 우선 원료가 필요하다. 면화의 가격에는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이 이미 사회적 평균노동으로 표현되어 있다. 면사의 예를 보아 면화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은 [면화를 원료로 하는] 면사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일부이고 따라서 그것은 면사에 포함된다.

요컨대 12원이라는 가격으로 표현되는 면화와 방추라는 생산수단의 가치는 면사의 가치, 즉 생산물의 가치의 구성부분으로 된다. 그러나 두 가지 조건만은 충적되어야 한다. ①면화도 방추도 사용가치의 생산에 실제로 이바지해야만 한다. 가치의 담지자는 사용가치를 가져야만 한다. ②지출된 노동시간은 주어진 사회적 생산조건 하에서 필요한 노동시간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P.247~249)

자본가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상품의 독특한 사용가치였다. 이것이야말로 자본가가 노동력으로부터 기대하는 독특한 봉사며 그는 노동자와의 거래에서 상품교환의영원한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 사실상 노동력의 판매자는 노동력의 교환가치를 실현하면서 그 사용가치를 양도한다. 그는 사용가치를 내어주지 않고서는 교환가치를 받을 수 없다. (P.256~257)

자본가는 화폐를 상품들로 전환시킴으로써 그리고 죽은 물체에 살아있는 노동력을 결합시킴으로써 가치를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가치창조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을 비교해 보면 가치증식과정은 일정한 점 이상으로 연장된 가치창조과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판명된다. 만약 그 과정이 자본에 의해 지불된 노동력의 가치가 새로운 등가물에 의해 보상되는 점까지 밖에 계속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히 가치창조과정에 불과할 것이고 만약 그 과정이 이 점을 넘어 계속된다면 가치증식과정으로 될 것이다.

가치형성과정을 노동과정과 비교해 보면 노동과정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유용노동에 의해 성립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치형성과정에서는 이 동일한 노동과정이 오직 양적 측면에서 고찰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노동자의 작업시간, 즉 노동력이 유용하게 지출되는 계속시간 뿐이다. 여기에서는 노동과정에 들어가는 상품들은 더 이상 물적 요소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아직 대상화된 노동의 일정량으로 간주될 뿐이다.

사용가치의 생산에 지출된 노동시간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인 한에서만 계산에 들어간다. ①노동력은 반드시 정상적인 조건 하에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② 자본가는 자기 자신의 독자적인 형법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낭비는 대상화된 노동의 쓸모없는 지출을 의미하며 따라서 그것은 생산물에 들어가지 않으며 생산물의 가치에도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상품의 분석을 통해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과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 사이의 차이를 발견했는데 이제 이 차이가 생산과정의 두 측면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다.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상품의 생산과정이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통일이란 면에서 보면 생산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이며 상품생산의 자본주의적 형태다.

자본가가 취득하는 노동이 사회적 평균수준의 단순한 노동인가 아니면 더 복잡한 노동인가는 가치증식과정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 평균노동보다 고도의 복잡한 노동은 노동력의 지출이다. 이러한 노동력은 가치가 더 크기 때문에 고급 노동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동일한 시간 안에 상대적으로 더 큰 가치로 대상화된다.

어떤 가치형성과정에서도 고급 노동이 항상 사회적 평균노동으로 환원되는 것, 예컨대 하루의 고급 노동이 X일의 사회적 평균노동으로 환원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가가 고용하는 노동자는 단순한 사회적 평균노동을 수행한다는 가정에 의해 불필요한 조작을 생략하고 분석을 단순화 시키는 것이다.(P.259~263)
 

출처:www.theguardian.com

출처:www.theguardian.com

 
● 생산수단의 가치가 생산물로 이정되기 위한 필요조건
생산수단의 가치는 새로운 제품으로 이전되어 새로운 제품의 가치의 구성부분이 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이 사용가치의 생산에 실제로 쓰여 거기에 역할하지 않으면 안 되고, 사회적, 평균적 생산조건 하에서 필요한 노동량만큼이 옮겨가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 방적공이 가치를 덧붙이는 노동은 추상적 인간노동이다.
방적노동자가 면사에 가치를 덧붙여주는 노동은 추상적 인간노동이다. 방적노동자가 노동과정에서 면사를 만드는 노동은 구체적 노동이다. 그러나 방적노동자가 면사에 새로운 가치를 덧붙이는 노동은 방추의 가치를 만드는 노동이나 면화의 가치를 만드는 노동과 전적으로 같은 질의 노동, 즉 추상적 인간노동이다.

● 노동력은 자기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낳는다.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력의 가치와 같은 양의 가치를 생산하는데 필요한 노동시간을 넘어서 더 많은 노동시간을 하는 데에서 생겨난다. 노동력의 가치와 그 노동력이 만들어내는 가치는 크기가 다른 것이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은 그것을 사용 사용가치로서 소비하면, 즉 노동을 하면 자기 자신의 가치보다도 큰 가치를 낳는 특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노동력이라는 상품 특유의 사용가치인 것이다.

● 자본가와 노동자 간에는 등가물의 교환이 이루어진다.
노동력의 판매자(노동자)는 다른 여느 상품의 판매자와 마찬가지로 대가를 받고서 사용가치를 사는 사람에게 넘겨준다. 그는 사용가치를 내놓지 않고서는 대가를 받아 쥘 수가 없다.

● 자본의 일반적 정식의 모순은 해결되어 있다.
상품의 생산과정은 한편으로는 사용가치를 만드는 노동과정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가치형성과정이다. 즉, 상품의 생산과정은 노동과정과 가치형성과정의 통일이다. 가치증식과정이란 어떤 한 점을 넘어서서 연장된 가치형성과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노동과정에서 노동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구체적 유용노동으로서 작용하므로 직물노동이라든가, 기계제작노동이라든가 하는 것과 같은 노동의 질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가치형성과정과 가치증식과정에서는 노동은 기계나 원료에 포함된 대상화된 과거의 노동이건 노동자들의 살아있는 노동이건 간에 추상적 인간노동으로서의 의이만을 갖기 때문에 질적으로는 같은 것이며 다만 양만이 문제가 된다.

● 노동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만큼만 계산에 들어간다.
사용가치의 생산에 소비된 노동시간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만큼만 계산에 넣어진다. ①노동자는 표준적인 여러 조건 아래서 일해야 한다. ② 노동력 그 자체도 표준적 성격의 것이 아니면 안 된다. 노동력은 그것이 사용되는 부문에서 지배적으로 되어 있는 평균적인 숙련과 기능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되며 또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노동 강도를 가지고 노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③노동과정에서 원료와 노동수단이 낭비 되어서는 안 된다. 낭비된 원료와 노동수단의 가치는 생산물의 가치의 구성부분이 되지 못한다.

상품을 분석함에 있어 사용가치를 만드는 만큼의 노동자와 가치를 만드는 만큼의 노동 사이의 구별이 상품생산 과정의 두 측면, 즉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의 두 측면으로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 복잡노동의 경우도 사정은 동일하다.
노동력의 가치가 크면 그 노동력은 복잡한 고도의 노동을 하고 단위시간 안에 보다 큰 가치로 대상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복잡노동을 하는 보석세공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의 가치와 동일한 양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노동부분과 그가 잉여가치를 만들어내는 노동부분은 질적으로 다른 노동이 아니다. 잉여가치는 역시 같은 노동과정의 시간적 연장에서만 생기는 것이다.

●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한 요인으로서의 노동과정의 특수성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한 요인으로서의 노동과정은 노동과정 일반의 성질 이외에 다음과 같은 특수성이 있다.①그것은 자본가가 소유하는 생산수단과 자본가가 사서 그 사용권을 벌써 자기 것으로 한 노동력 사이에 일어나는 한 과정이며 그 생산물은 자본가의 것이다. ②그 결과 자본가는 자기의 소유물인 생산수단과 노동의 사용에 관하여 엄격히 통제하고 감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