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비극의 바다에서 퍼올린 농담과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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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쑵니다.

덥습니다. 더위만큼이나 저의 삶도 무덥습니다. 슬럼프입니다. 누구나 겪는 것이겠지만 나이들어서 겪는 슬럼프를 제대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싸놓은 똥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사치처럼 느껴지는 요즘입니다만 많이 부끄럽습니다. 하여 죄송스런 마음을 전하는 표시로 예전에 썼던 글 하나를 올립니다. 어서 슬럼프를 헤쳐나와 부끄러운 사치의 글쓰기를 감행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꾸뻑.

 

화장실이야말로 가장 이데올로기적인 문제를 감추고 있는 인간의 건축물이다. 지젝은 여러 곳에서 이점을 지적하고 있다. 프랑스 변기는 용변을 보자마자 스위치 누를 필요도 없이 신속하게 구멍으로 빠져나간다. 혁명적이다. 독일은 물도 없는 변기에 변이 빠져나가지 않고 그대로 있다. 냄새가 지독하다. 성찰과 반성을 하게 만든다. 관념적이다. 미국에선 변기 물 위에 둥둥 떠 있다. 스위치를 눌러야 내려간다. 실용주의적이다.

Slavoj Žižek

그러나 지젝의 생각과는 달리 더 근본적으로 화장실이야말로 가장 형이상학적 문제가 감추어진 건축물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유명한 밀란 쿤데라는 참으로 독특한 질문을 던진다. 신도 똥을 쌀까? 똥과 신은 양립할 수 없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다. 인간은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었고 따라서 신도 창자를 지녔거나, 아니면 신은 창자를 지니지 않았고 인간도 신을 닮지 않았거나. 똥은 가장 심각한 신학적 문제이다. 골칫거리다.

그래서 밀란 쿤데라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왜 화장실에서 문을 꼭 잠그는가? 이 질문은 물론 서양 사람들을 향한 질문이었다. 밀란 쿤데라는 이것을 서양의 낭만주의와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나는 이 질문의 답을 중국을 여행하면서 깨달았다.

중국의 화장실에 가 본 일이 있는가? 중국 화장실에는 문을 잠글 일이 없다. 잠글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이 없다. 아니, 문이 필요 없다. 그들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을 잠그는 것이 이상한 것이다. 왜 그럴까? 다시 왜 인간은 화장실에서 문을 잠그는가를 물을 필요가 있다. 벌거벗은 몸이 창피해서? 성기가 노출되어서?

아니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기가 노출되는 것이 창피한 것이라면 목욕탕 가는 것조차 거부해야 한다. 그러니, 성기가 노출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똥 누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다. 그것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이 창피할 뿐 아니라 두렵기까지 한 것이다. 중국 문화는 똥 누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는 문화다.

현대의 수세식 화장실은 자신이 똥을 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 채, 모든 것을 깨끗하게 처리하고 가뿐하게 나와서 사람들에게 똥을 싸고 나왔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을 수 있는 건축학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현대의 수세식 화장실은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되어 인간이 똥을 누지 않는다고 착각할 수 있도록 만든, 신학적 명제를 실현한 건축물이다. 똥을 누지 않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이 서양의 낭만주의 시대의 핵심이다. 중국의 화장실은 다르다.

화장실

똥을 누지 않는다고 착각하는 인간이란 똥을 눌 수밖에 없는 현실을 외면하려는 인간에 대한 은유일 뿐이다. 똥을 누지 않는 신적인 환상에 갇혀 자신이 똥을 누고 있다는 인간적 현실 자체를 회피한다. 결국 그것은 자신의 환상에 갇힌 채 결벽증을 가진 미성숙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고? 이 말처럼 잘못 전파된 말은 없다. 실은 무서워하면서 더럽다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일 뿐이다. 인생에 똥은 지천으로 깔려 있다. 똥은 피할 수 없다. 똥은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여 관리되어야 하는 것이다.

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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