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스와 코스모스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조광제의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 (생각정원, 2012) 

 

철학, 80개의 기초개념들

1. 철학 개념들의 탄생

오늘 첫 강의에는 고대 철학에서부터 지금까지 힘을 발휘하는 중요 개념들을 살피고자 한다.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이 있다. 개체 발생은 수정란에서 완전한 태아가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그리고 계통 발생은 원시 생물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의 진화 과정을 말한다.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고대철학의 개념들로부터 오늘날 철학의 개념들로 발전해 온 것은 계통 발생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낮은 수준에서 익힌 개념들로부터 높은 수준에서 익히게 되는 개념으로 발달은 개체 발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능하면 고대철학에서부터 오늘날 철학에 이르기까지의 순서에 따라 앞으로 80개의 철학의 기초 개념들을 살피고자 하는데, 오늘이 그 첫 시간이다. 오늘 강의의 큰 제목은 ‘철학 개념들의 탄생’이다.

 

 

1.1. 카오스

다들 알다시피, 카오스(chaos)는 코스모스(cosmos)와 대립된다. 그런데 카오스는 코스모스에 비해 신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카오스’는 헤시오도스(Hesiodos, 기원전 8-7세기 활동)의 <신통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카오스는 모든 신들이 태어나는 모태이다. 땅과 하늘, 어둠과 밝음, 낮과 밤 등 올림포스 이전의 시원적인 신들이 카오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카오스가 철학적으로 전이된 것은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기원전 610-546)의 ‘무한자’(apeiron <아페이론>)라 할 수 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이 무한자에서 모든 것들이 생겨난 것으로 본다. ‘apeiron’은 ‘peras’ 즉 한계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한계는 어떤 형태를 만들어내는 근본 요인이다. 카오스를 흔히 ‘혼돈’이라고 하지만, 그 특성은 바로 무정형(無定型, formlessness)이다. 형태가 없다는 것은 아직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한다.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다는 것은 인식할 거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형상’(形相, eidos, form)에 대한 설명을 통해 더욱 세밀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카오스가 혼돈된 것이기 때문에 무정형한 것이 아니라, 무정형하기 때문에 혼돈된 것이다.

무정형하다는 것은 그 속에 도대체 통일성을 갖춘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통일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주변의 다른 것들과 구분되면서 그 나름으로 하나의 단위를 이룬다는 것이다. 카오스에서 통일성을 갖춘 것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카오스에서 의미와 가치 그리고 그에 따른 목적 등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의미와 가치 그리고 목적은 인간을 비롯한 상상 가능한 모든 인격적인 존재(예컨대, 신들이나 천사 및 악마 등)의 삶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인들이다.

따라서 카오스는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의 상상에서 빚어지는 모든 인격적인 존재들을 넘어선 ‘그 너머의 존재’를 가리킨다. 인간의 인식과 판단을 전혀 허용치 않는 가장 최초의 근원적인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바탕에 근본적인 것으로 깔려 있는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그래서 카오스는 존재론에서 가장 심층의 깊이를 지닌 심연으로서 작동한다. 인간을 넘어서 있으면서 동시에 인간을 비롯해 모든 존재들을 안팎으로 관통하고 있는 근본적인 존재가 바로 카오스이다.

카오스를 생각한다는 것은 존재론의 출발이다. 하지만 카오스를 생각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생각을 넘어선 곳에서 존재론이 출발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은 자신을 형성한 근원적인 바탕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충동을 지니고 있다. 그 충동은 바로 존재론적인 근본 충동이다.

현대에 와서 이 충동은 사회역사적인 코드 체계를 완전히 벗어나 발가벗은 사물 자체 혹은 실재 자체의 영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카오스는 플라톤의 게네시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의 순수 질료,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물 자체,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의 순수 지속, 사르트르의 순수 즉자,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살, 레비나스(Immanuel Levinas, 1906〜1995)의 일리야,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실재,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의 기관들 없는 몸 등의 개념으로 이어지면서 그 원형의 역할을 한다. 그런 만큼 카오스는 존재론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근본 개념이자, 우리 인간의 근원적인 충동을 부채질하는 근본 개념이라 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예술에서의 예를 들자면, 1940년대 2차 세계 대전 중에 생겨난 ‘앵포르멜’ 유파를 들 수 있다. ‘앵포르멜’은 ‘inforemel’이라는 프랑스 말을 우리말로 음역한 것이다. 형태 혹은 형식이 없는 예술 양식을 일컫는다. 1950년대 말에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크게 융성한 것이 앵포르멜 회화 양식인데, 이는 대체로 물감 자체의 원형적인 질감 자체에 의존해서 우발성에 의존해서 그려내는 그림이다. 회화에서 앵포르멜은 도대체 그 어떤 질서잡힌 의미나 가치를 찾을 수 없는 한계 상황에서 느끼는 막연함을 그 자체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 바탕은 카오스가 아닐 수 없다. 카오스를 향한 존재론적인 욕망이 예술적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앵포르멜 미술 양식인 것이다.

 

 

1.2. 코스모스

 우주 발생론에 의하면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생겨난다. 하지만 카오스가 따로 있고 코스모스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변한 것이다. 카오스가 코스모스로 변한다는 것은 무정형의 상태에서 정형의 상태로 된다는 것이다. 정형의 상태가 된다는 것은 카오스 전체가 그 자체로 단 하나의 정형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무정형의 카오스가 형태를 갖춘 온갖 것들로 된다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코스모스는 일정한 형태를 갖춘 온갖 것들의 전체를 일컫는다 할 수 있다.

일정한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일정한 본성(nature)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돌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돌의 본성을, 식물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식물의 본성을, 동물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동물의 본성을, 인간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본성이라고 번역되는 ‘nature’는 자연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이 ‘nature’는 라틴어 ‘natura’(나투라)에서 온 것이고, 라틴어 ‘natura’는 그리스어 ‘physis’(퓌시스)를 번역한 것이다. 퓌시스는 본래 뭔가를 성장시키는 힘을 말한다. 카오스가 코스모스가 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카오스가 퓌시스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것이 ‘nature’ 즉 본성을 갖추었다는 것은 다른 것이 되지 않고 바로 자기 자신을 유지하고 생장시킬 수 있는 힘을 갖추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카오스가 코스모스가 되면서, 그 속에서 일정한 형태와 본성을 갖춘 각각의 것들이 생겨났다는 것은 그 각각의 것들이 스스로를 유지하고 생장시킬 수 있는 것들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각각의 것들이 각기 나름의 퓌시스를 발휘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항상 다른 것들과의 작용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을 가까이 하고, 자신을 유지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을 멀리 함으로써 각기 자신을 유지하고 생장시키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화와 상극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거대한 조화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상극마저도 크게 보면 조화의 한 방식인 것이다. 그래서 코스모스를 일체의 것들의 조화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코스모스는 각각의 것들이 어떻게든 조화롭게 다 같이 유지되고 생장할 수 있는 관계들의 총체라 할 수 있다. 거기에는 일정하게 질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카오스의 무정형은 달리 말하면 무질서이다. 코스모스에서의 정형의 조화는 달리 말하면 질서이다. 코스모스 속에서 각기 나름의 본성을 지니고서 존재하는 일체의 것들이 조화를 이룬다고 했다. 그 모든 본성들 간의 질서 잡힌 관계가 바로 질서의 총체인 코스모스인 것이다. 그래서 코스모스는 한편으로 본성들 간의 질서 잡힌 체계라 할 수 있고, 그래서 코스모스는 자연(본성, nature)라고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코스모스를 이루는 존재의 바탕(原質, arche)은 카오스이다. 꼭 그러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카오스는 코스모스의 원질의 내용이고, 코스모스는 카오스를 색다르게 구성하는 형식이다. 말하자면, 카오스와 코스모스는 다른 것이면서 같은 것이다. 원질의 내용으로 보면 같은 것이고, 그 형식에 있어서만 다른 것이다. 카오스는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고, 코스모스는 형식을 제대로 갖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의 이행이다. 그것은 도대체 코스모스를 이루는 질서, 즉 형태 혹은 본성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플라톤은 형태 혹은 본성이 카오스의 외부로부터 왔다고 말한다. 플라톤이 말한 형상들 즉 이데아들이 바로 카오스의 외부로부터 카오스에 주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카오스 자체에서 발휘되었다고 하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런 입장을 취한 인물이 바로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다. 그는 그래서 ‘카오스모스’(chaosmos)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카오스모스’는 들뢰즈가 우주론에 있어서 어떻게 반플라톤주의를 정립하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되는 과정이 카오스 외부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카오스 자체의 힘에서 이루어진 것이라 여기면서 그 중간 과정을 일컬어 카오스모스라고 하기 때문이다.

모든 통치자들은 사회적인 코스모스를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 통치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사회적인 카오스이다. 카오스는 도대체 어떻게 접근해서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강력한 사회적 코스모스를 지향하게 되면 자칫 파시즘적인 사태가 벌어진다. 개개 사회 구성원들의 자유란 통치자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카오스이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사회적 카오스가 바로 혁명이다. 그러고 보면, 자유와 혁명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아 불행한 것은 혁명 이후 혁명의 주동자들이 오히려 강력한 코스모스를 지향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요구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다. 일반 대중들이 혁명에 의한 독재가 아니라, 혁명에 의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적절한 카오스적인 측면을 허용하는 사회적인 코스모스야말로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의 형태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섦 – 시비시비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4

시비시비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그리 나쁠 것도,

그리 좋을 것도 없다.

있는 그대로 여기에 있다.

같은 해가 뜨고

같은 날이 오고

같은 생각이 와도

같지 않은 해이고

같지 않은 날이고

같지 않은 생각이 있다.

12월의 가득했던 날을 지나

1월의 새로운 날이 왔다.

반짝반짝 이 해를 닦아 보자

 2017-1-31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매일의 해는 똑같이 떠오르지만 누군가에게는 천국 같은 삶이,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은 삶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모든 것에 대해 나쁠 것, 좋을 것이라고 구분하는 선택의 삶은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지옥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경계선을 뛰어넘는 생각은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고

무한한 자유의 영역으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한정된 공간에 머무르는 몸과 무한정한 정신의 생각은 조화를 이루고

시비의 구분과 구별하지 않는 자유를 허락하는 작은 영역의 삶은

매일의 같은 해도 매일 다르게 볼 수 있는 해를 만들 것입니다.

2017년 매일의 해를 반짝반짝 닦아 빛나는 해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 곁에서 빛나는 별 3화 [정순야의 청춘웹툰]

(e)시대와 철학의 웹툰 시리즈 제 3화. 정순야의 [청춘웹툰]  ‘우리 곁에서 빛나는 별’ ~ 우리 시대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작가의 아름다운 그림선과 시선이 전 정말 좋네요. 앞으로 독자님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참고로 본 웹툰의 저작권은 전적으로 작가 본인에게 있으니, 함부로 허락없이 무단 전재하시면 안됩니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 구속영장 기각에 대한 유감과 분노 [시대와 철학]

이정호(방송대 문화교양학과) 

 

누군 3만원의 떡을 감사표시로 줘도 범법이고

누군 400억의 돈을 갖다 바쳐도 범법이라 단정할 수 없다니

형식논리적 법적용의 배후에 여전히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네요.

 

역사와 현실, 시대정신을 망각한 지식 모리배들에게

논리는 그저 탐욕의 노예일 뿐입니다.

역사는 그들의 부역을 심판할 것입니다.

 

2500년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플라톤의 <국가> 338c)라고 외친

소피스트 트라쉬마코스의 망령에 맞서

약자들이 싸워온 정의의 역사에

왜 피가 배어있는지 새삼 뒤돌아 보게 되는 오늘입니다.

 

정의의 씨앗

열매를 맺지 않아도 이어지는 그  알 수 없는 신비!

아마도 불멸의 투쟁과 연대 그리고 희망 때문일 것입니다.

끝내 우리는 정의의 열매를 만끽하게 될 것입니다.

끝내 우리는 이길 것입니다.

 

spes immortalis

-희망은 불멸이다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책 [신년회 후일담 2]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책

오늘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신년회다. 오후 3시에 시작해서 영화감상, 시평 토론회, 정기총회, 저녁식사와 여흥을 마치고, 현재 일부 회원들이 남아서 자유발언 중이다.

지금은 정년을 곧 맞이하는 이화여대 이규성교수가 발언하고 있다.

이규성왈

“나는 이제 책 안 본다. 이제 문자로 이루어진 책을 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광화문에 가면 큰 책이 있다. 이 책에 담긴 뜻을 이해하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이 큰 책 앞에서 지금까지의 철학은 모두 무효가 되었다. 지금 나는 이 큰 책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린 이제 큰 책을 보기로 했다!

(전호근 회원의 페북에서 재게재)

철학은 개폼이다 [신년회 후일담 1]

철학은 개폼이다.

역시 올해 정년을 맞이하는 방송대 이정호 교수의 한철연 신년회 발언이다.

“철학은 왜 하냐? 철학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이다. 세상에서 생존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철학하는 자들이 제도권으로 들어가면 공부하지 않는다. 퇴직하면 책을 읽지 않는다. 인생은 그걸로 끝이다.

반면 제도권 밖에서 연구하는 이들은 정년이 없다. 한 사람의 실존적인 자부심은 타인의 시선에 좌우되지 않는다.
자부심은 자신이(自) 짊어지는(負) 것이다. 이것이 기초다. 이것이 무너지면 모든 게 끝이다.
남들은 개폼 잡는다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철학은 바로 개폼이다. 내 시선을 기준으로 처절한 자기응시에 직면하는 것 그것이 철학이고 공부다.”

우린 이제 처절하게 고민하고,처절하게 성실하고, 처절하게 반성하기로 했다!

(전호근 회원 페북에서 재게재)

(e)시대와 철학 홈화면 추가 및 댓글 사이트 접속 안내

스마트폰 사용에 익숙하신 분들이야 다들 아시겠지만, 그래도 도움이 되실까해서 안내 올립니다. 

회원님들과 독자님들께서는 아래 그림의 안내에 따라 스마트폰에 홈화면을 추가하셔서 자주 방문해 주시고, Disqus 댓글 사이트에도 로그인하셔서 서로 댓글로 소통할 수 있는 좋은 공간 만들어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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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대한 성찰, 사회적 유대, 다시 민주주의 [시대와 철학]

2017년 정유년 새해를 맞이하여 각오를 다짐하는 한철연의 신년회. 이를 기념하기 위해 두 편의 시평을 연달아 게재합니다.  이 두 편의 글은  모두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학술지 [시대와 철학] 27권 4호에도 동시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회원분들께서는 신년회에 참석하시기 전 미리 한번 읽어오시면, 함께 토론하며 한철연의 앞길을 의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시대에 대한 성찰, 사회적 유대, 다시 민주주의

 

박종성(호원대학교)

 

“세상에서 행세하는 것 중에 황금처럼 고약한 것도 없다.
폭리로 돈을 벌게 해 주고 국가를 뒤집어 폐허로 만들며
사람들을 파산하게 하며;
나쁜 물로 교화시켜 도덕을 등지게 만들고
올바른 사람을 유혹하여 죄의 수렁에 빠지게 하며…….
죽을 운명의  그 육체에게 사악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주며
저주받을 일을 하도록 만든다.” (소포클레스, 『안티고네』)

 

시대에 대한 성찰: “이게 국가냐”

“정말 이건 사람 사는 나라가 아니지 않냐”, 집회 나온 할머니의 말이다. “순실”의 시대에 우리는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었다. 이러려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왔는지 “자괴감”도 들었다. 그러나 민중은 자괴와 상실만을 하지는 않았다. 상실의 시대에 민중들은 다시 촛불의 희망을 들었다. 7차 집회까지 연인원 700만을 넘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서울, 부산, 거제, 광주 등 전국 곳곳에서, 런던, 파리, 베를린 등 세계 주요 도시에서도, 어린이, 대학생, 노인들에 이르는 민중의 모습은 우리의 시대에 대한 촛불의 거대한 시대의 성찰이자 주권자의 실천이었다. 촛불 혁명이었다. “오늘 이곳으로부터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나니, 우리는 바로 그 탄생의 현장에 서 있다.” 괴테가 1792년 프랑스 혁명군이 오스트리아·프로이센 군대를 무찌르고 승리를 거둔 발미 전투를 회상하며 한 말이다. 우리는 촛불 혁명으로 새로운 시대를 시작하였고, 그 탄생의 현장에 시민들, 학생들, 노동자들이 있었다. 광장의 정치, 그 목소리는 다양했고, 정치의 참여는 자발적이고 평화로우며 축제 분위기였다. 가정주부는 답답하여, 학생들은 정유라 부정입학에 대한 분노로, 어린아이의 손을 잡은 부모는 부끄럽지 않은 부모가 되기 위하여, 노동자도 그렇게 광장으로 나왔다.
촛불 혁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는 이화여대 학생들은 정의롭지 못한 입학에 분노하였고 정의를 원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 정의(justice)는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평등의 원리, 각자는 각자의 공헌에 따라 분배받는 것인 분배적 원리이다. 정의롭지 못한 것, 공헌에 따라 분배받지 못한 정유라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렇듯 시민들, 학생들은 자신의 시대에 대해 성찰하고 비판하였다. 광장의 정치는 새로운 민주주의의 탄생이며, 유신 잔당들의 해체와 종식을 알리는 새로운 역사이어야 한다. 그런데 87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광장정치가 그야말로 텅 빈 기표로 남지 않기 위한 과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새로운 역사의 탄생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는 공적인(publica) 것(res)의 파괴이다. 공적인 것의 파괴와 사적인 것이 지배하는 국가, 바로 그런 지금의 국가(republic)에 대한 성찰이 촛불 혁명을 만든 것이다. 촛불 혁명은 탄생하였다. 그 성장의 과정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성찰이 없는 삶은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그에게 철학은 논박(elenchos)을 통해 궁극적으로 상대방을 당혹스러운 상태(aporia)에 처하게 하여 무지를 자각하는 과정을 말한다. 현실에서 시민은 논박보다는 촛불을 들어 통치자의 무지 자각을 일깨우려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박근혜는 당혹스러워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가 죽을 운명의 인간이 죽음을 대비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느냐는 근원적인 물음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과거의 유신 망령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폭정, 불의, 강도 짓을 일삼던 자들의 영혼, 즉 오늘날 망령, 독재의 유령은 이들의 영혼이 정화되지 못한 삶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로 인하여 망령은 현실에서 배회한다. 하지만 시민들은 정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 그것을 성찰하고 행동으로 선택하였다. 민중들은 정의롭지 못한 국가, 사회에 대해 다시 물음을 던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현재 박근혜와 그 부역자들에게, 곧 부, 명성, 명예의 획득에만 혈안이 된 이들에게 부끄럽지 않냐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 수백만의 민중들은 묻고 있다. 세월호 참사, 사드 배치, 국정원 선거 개입, 교육부 국정 교과서, 한일군사협정, 부정 입학, 국정 농단, 성과연봉제 등등 국정 전반에 대해 “이게 국가냐”고 말이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총체적” 질문이었다. 민중들은 충분히 철학적이었다.
둘째, 탐욕과 시기는 나라가 망하는 두 요소라고  플라톤은 말했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은 화폐였다. 요약하자면 이번 사태의 핵심은 사적인 인간의 화폐에 대한 탐욕이었고 이것을 정치권력이 두둔하고 은폐하였다는 것이다. 공적인 혈세는 사적인 인간의 부의 증대로 둔갑하였다. 맑스가 말하는 “치부욕”에, 곧 사적인 인간의 치부욕에 우리들의 혈세가 쓰인 것, 민중들은 이것에 대해 분노하였고 자신의 현실적 삶의 성찰을 통해 거대한 촛불 혁명을 만들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은 국민을 믿지 않고 재물의 신인 플루토스(Plutus)를 믿는다. 맑스는 재물의 신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을  사회의 “경제적 · 도덕적 질서의 파괴자”라고 비난했었다. 그렇다, 국정을 농단한 결과는 도덕적 질서뿐만 아니라 경제적 질서까지도 파괴하였다. 헌법 119조 2항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 경제 및 안정과 적절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며, 시장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고,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 이 조항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국가의 역할을 다시금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부의 불평등이 가속화되는 시대에 경제민주화를 위해 절실히 요구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민주주의를 더욱 절실히 요구하는 것이다. 고삐 풀린 자본을 위한 국가는 변혁되어야 할 대상이다.
플루토스를 추구하는 근대사회는 “자신의 고유한 생활원리를 눈부시게 비춰주는 화신(Inkarnation)을 자신의 황금 성배(Goldgral)로서 환영한다.”고 맑스는 말한 바 있다. 맑스는 『자본』에서 화폐형태는 일반적인 등가형태가 사회적 관습에 의해 특정한 상품의 특수한 현물형태(Naturalform)로 전환되어 상품소유자들의 공동의 행위 때문에 특정한 상품의 배타적 기능이 되고, 일반적 등가물로 간주한다. 화폐는 “추상적 부의 물적 현존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일은 “자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의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난다.”는 점이다. 오물을 흘리면 태어난 자본주의에서 민중들은 천박한 자본주의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민중이 권력을 갖는 그런 나라를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요구는 촛불 혁명이라는 광장의 정치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강화로 인하여 죽어간 구의역의 한 젊은이를 추모하는 발길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추모에서도 알 수 있다. 민중들은 자본이 생명의 가치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사회에 대해 성찰한다.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이들이 만들에 낸 국정농단 사태, 그곳에는 자신을 성찰하는 수백만의 민중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 민중은 철학적이었다.

사회적 유대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의 목적성을 “함께 존재함의 행복”이라고 하였다. 곧 한 정치 공동체를 위해 행복을 창출하거나 보존하는 행위를 하려는 경향을 정의로 보고 있다. 맑스의 진지한 고민은 “사회 구성원 누구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풍요로움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신자유주의는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다. 함께 존재함의 행복은 신자유주의와 상반된다. 신자유주의는 소득 불평등의 확대와 ‘고용 없는 성장’으로 귀결된다. ‘일자리를 줄이는 경기회복’(Jobloss Recovery)이라는 사이렌의 소리는 새로운 불안한 계급들을 유혹하여 그 존재를 난파시키고 불안정한 삶으로 그들을 구속하며, 끝끝내 삶 자체를 침몰시켜버린다. 경제적 불안은 부의 불평등을 가속하고 그러한 불평등은 불안한 자들의 불안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불만으로, 자신의 좌절을 경제적 약자에 대한 적대로 드러낸다. 이렇게 되면 사회적 유대는 깨져 버린다. 이 시대의 철학은 사회적 유대를 파괴하는 것에 저항할 것을 요구한다. 이번 촛불혁명은 바로 사회적 유대의 강화를 보여준다.
플라톤이 말하는 “고상한 거짓말”을 대한민국에서도 확인하였다. 세월호 참사를 다루는 국가의 태도에 민중들은 분노하였다. 청와대의 국정 운영의 방식에서 세월호 참사를 여객선 사고로 규정했다. “창조경제”, “국민행복 시대”라는 고상한 거짓말, 먼저 이 고상한 거짓말이 정치에서 의미하는 것은 이성 자체가 도시를 결속시킬 만큼 강력한 힘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는 끊임없는 고상한 거짓말을 한다. 그뿐만 아니라 타자에 대한 공감력을 약화하면서 보수단체를 이용하여 참사의 본질을 은폐하거나 희석하려고 하였다. 문제는 그러한 사유 틀이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과 반사회성이다. 쇼펜하우어는 일찍이 자신의 안락인 이기주의, 타자의 고통인 악의를 버리고 타인의 안일을 원하는 동정(Mitleid)을 주장하였다. 동정은 타자의 고통을 함께 느끼며 그에 참여하는 것이다. 루소 또한 동정(pity)을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는 것으로 보았다. 사회적 유대는 비단 이성만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죽음에 대한 여러 추모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동정의 사회적 유대이다.
민주주의를 선점한 자본으로부터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어 내기 위한 것, 사적인 것이 공적인 것을 파괴하고 집어삼킨 국가의 모습에서 새로운 민주적 국가를 만들어 내기 위하여 우리는 증오해야 한다. 우리는 흔히 부정적 계열에 속하는 정념인 증오를 사회적 유대를 해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사랑과 증오라는 정념들의 양가성을 인정한다. 공동선에 대한 사랑, 하지만 공동선을 피하려는 악에 대한 증오가 그것이다. 정의에 대한 사랑과 불의에 대한 증오이다. 촛불 혁명은 바로 공동선을 피하려는 악에 대한 증오로서의 사회적 유대이다.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증오할 것인가? 그 정념의 역량을 분출하고 시민의 권력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남겨진 과제일 것이다.

언제나 민주 vs. 반민주

결국 민주주의의 다시금 회복시켜 자본에 종속된 권력을 민중에게로 재전유하는 것이다. 아테네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병사로서 참여하여 정치에 참여하는 과정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민주주의이다. 이후 민주주의는 “좋은 외투, 좋은 모자를 쓰고 온 가족이 번듯한 집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할 권리”로서 나타난 “보통 선거권”의 확대에서 드러나듯이 자원의 배분과 관련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그렇다, 주권(sovereign)은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는(superus) 최고의 권력(power)이다. 그러나 현실 민주주의에서 주권의 원리와 대표자는 일치하지 않는다. 결국, 주권의 원리와 대표자는 불일치, 그 틈을 메웠던 것이 촛불혁명이다. 그런데 대의민주주의에서 이 틈은 여전히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그 메워진 틈을 더 좁히는 일이다. 결국, 대표성을 강화하는 것, 이것을 모색하여 더욱 더 민주주의의 본래성을 강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 이유는 결국 민중의 삶은 자원배분의 문제, 곧 민주주의의 역사라는 사실과 직접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 갈등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마치 갈등을 없애는 것이 민주주의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갈등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분노가 투표를 통해 정부를 정당하게 해임하는 것이다. 결국, 갈등은 민주주의에 핵심 동력이다. 문제는 그러한 갈등을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인정하지 않고 탄압하는 반면에, 민주주의 질서에서는 갈등을 드러내고 공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촛불은 갈등의 사회화 과정에서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쟁점은 언제나 민주 vs. 반민주이다. 이는 마치 호남 vs. 비호남과 같은 지역적 문제로 정치적 쟁점을 대체하거나 조직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민주화 과정이다. 민주주의를 강화하고자 하는 이들은 대의민주주의가 가지고 있는 결함인 대표성과 주권 원리의 불일치, 그 틈을 더욱더 메워 주체화하는 일이 과제로 남는다. 왜냐하면 더욱 더 자본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국가는 국민을 대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상위 1%의 부가 하위 99%의 부를 넘어서는 시대에 계급 간의 불평등은 정치에 있어서 너무나도 강력한 정치적 갈등이므로 더욱더 지역을 넘어선 철저한 계급투표를 진행해 나가야 할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는 삶의 문제이다. 주권의 대표성을 강화하여 자원의 재분배에 참여하는 것, 그리하여 그야말로 민중(demos)의 권력(kratia)을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다. 촛불로 “죽 쒀서 개주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민주주의를 살려내는 길 위에 있으며, 그 길은 멀고도 험할 것이다. 데리다가 말하듯, 민주주의를 탈(재)전유(exappropriation)해야 한다. 민주주의를 재전유하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고유성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과거가 될 민주주의라는 미래를 위하여, 자본이 선점한 민주주의를 재전유하기 위하여 민중들은 민주주의라는 현재를 잡은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비전유(expropriation)할 때의 지배성의 위험을 너무나 쓰라리게 경험하였다. 플라톤의 말은 현재 우리의 모습이었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현재를 잡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