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 [유철의 유럽방랑기] -3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 

슬로베니아 남서쪽 끝자락 크로아티아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작디 작은 마을, 피란Piran. 수도 루블라냐에서 5시간, 국토 대부분이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진 슬로베니아에서 버스 외에는 변변한 교통수단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특히 피란은 바다를 앞에 두고 산으로 둘러 쌓인 지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차를 탄다 하더라도 근처 도시인 코페르Koper에서 버스나 택시로 갈아타야 한다.
벅차 오르듯 넓디 넓고, 새파란 바다가 보고싶어 떠나온 여행이었다. 그래서 내가 택한 길은 베니스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피란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피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탈리아 두이노, 미라마레, 슬로베니아의 코페르, 이졸라의 아름다운 경관은 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를 그저 지나쳐 갈 수 밖에 없는 그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그저 다음에, 그리고 언젠가 다시 오리라 나를 위로해 본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해안도로를 빠져나와 피란으로 들어가는 길, 산비탈을 굽이굽이 넘어 내려오자 눈 앞에 펼쳐지는 경관은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배의 선수처럼 뾰족하게 톡 튀어 나와 있는 마을, 피란. 그리고 이를 둘러싼 새파란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진다. 유난히 맑은 하늘,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수평선의 경계는 모호하다. 이는 마치 아드리아 해가 하늘로 쏟구쳐 나를 삼킬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저 감탄사만 나올 뿐이었다.
옆 좌석에 앉은 노부부는 그런 나를 보며 웃는다. 그러나 그들도 나와 다를바 없다. 들썩이는 할아버지의 궁둥이나, 목을 내뺀 할머니의 모습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살짝 몸을 비틀어 드리자, 할아버지는 들썩이는 엉덩이를 들어 상체를 쑤욱 내밀며 오래되어 보이는 자동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찰칵, 지잉…’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중간쯤 어딘가의 카메라가 정겹다. 그러나 장담 컨데 그 사진엔 내가 나올 수밖에 없었을 뿐더러 반사광에 바깥 풍경은 그저 하얗게 나올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럼에도 내게 ‘엄지 척!’ 하며 웃으신다.
어린 시절, 아직 남은 필름이 들어있는 사진기를 집에서 몰래 들고나가 이것 저것 찍었던 기억이 난다. 난 그저 그 안에 있는 사진을 빨리 현상하고 싶었고, 이를 위해선 24방, 36방을 빨리 채워버려야만 했다. 지금같이 원하는 것을 골라서 현상하거나 혹은 컴퓨터에 저장해 놓고 생각날 때 클릭해서 보는 그런 시절과 다르다. 무엇이 찍혔을지, 혹은 어떤 필름이 들어 있는지 하는 기대가 있었고, 그 필름이 현상되어서 나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설렘이 있었다. 그런 노부부의 카메라를 보니 문뜩 그때 그 시절의 그리움이 싹튼다.

버스에서 내리자, 눈 앞에 펼쳐진 아드리아 해와 오늘따라 유난히 파란 하늘에 그 수평선 마저 모호한 그 곳에 내가 마치 던져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방파제 끝에 서로 마주한 초록과 빨강색 등대들은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랜즈’에서 고현정과 조인성이 이 방파제에 기대어 저 두 등대를 배경삼아 둘이 와인을 마시던 장면이 문뜩 떠오른다. 그러니 여기에 로멘틱함도 더해진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커플이 그 자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런 데서 셀카를 찍는 건 촌스러운거야!’ 셀카를 찍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가볍게’ 그곳을 지나친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호수 같이 잔잔하고 깨질듯 맑은 아드리아 해를 곁에 두고 그리고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걷는다. 그러자 눈 앞엔 타르티니 광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곳 한 가운데에는 피란이 자랑하는 이탈리아 바이올린 비루투오소이자, 작곡가인 쥬세페 타르티니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한 그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 사실 둘러보면 이 곳 마을은 타르티니 일색이다. 광장 입구에는 타르티니 호텔이 있으며, 동상 맞은 편 건물에는 타르티니의 생가라고 크게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다. 그의 동상 뒷 편 언덕 중턱의 성 프란시스 성당에도 마찬가지다. 성당에는 찬송가가 아니라 타르티니가 작곡한 소나타가 하루 종일 흘러 나온다. 지금 내가 서 있는 타르티니 광장도 마찬가지다. 타르티니 광장 한 가운데서 어린 꼬마의 바이올린 연주가 한창이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어 두고선 타르티니의 명곡, ‘악마의 트릴’을 연주한다.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동전을 하나 둘씩 던져주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도도한 표정으로 입술을 살짝 깨문 채 고개를 휘저으며 연주에 집중하는 꼬마 모습이 당돌해 보인다.

 

 

사실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타르티니의 친구였던 프랑스 천문학자 요셉 랑드의 일기에는 그 이야기가 적혀있다.
음악에 심취한 타르티니는 좋은 악상을 떠올리기 위해 매일 밤을 전전긍긍하며 보냈다고 한다. 아마도 성직자가 되길 바랬던 부모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선택한 그리고 다시 그 사랑하는 여인을 버리고 음악을 선택한 그에게 남은 건 음악, 바이올린 그것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타르티니는 꿈을 꾼다. 그리고 거기에서 악마와 마주하게 된다. 어둠 가득한 곳에서 나타난 붉은 모습의 악마는 타르티니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살고 싶다면 당장 네 영혼을 내놓아라. 네가 영혼을 내놓는다면,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한 제안을 마르티니가 받은 것이었다. 악마의 제안에 타르티니는 자신의 바이올린을 악마에게 건내며 망설임 없이 답한다.

“이 바이올린으로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가장 황홀한 연주를 내게 들려 주시오.“

그러자 악마는 그와의 약속에 따라 타르티니를 위해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한다. 악마가 들려준 트릴은 타르티니가 지금까지 평생에 들어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한 아름다운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꿈 속에서 들은 악마의 연주를 오선지에 옮겼는데, 그것이 ‘악마의 트릴’이라고 한다.

타르티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작곡한 악마의 트릴, 만약 악마가 타르티니에게 한 제안을 누군가에게 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답할까? 당장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신앙상의 문제를 들먹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평화? 남북통일? 그 순간 이렇게 거창한 것을 말하는 이도 많지 않을 터, 그럼 박근혜의 종신형? 영생이나 막대한 금은보화? 그것도 아니면 세월호에서 숨진 이들의 생환?…

문뜩 동네에서 만난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떠오른다. 아직 볕이 귀했던 영국의 겨울 어느 날, 오랜만에 허락된 햇볕을 만끽 하고픈 마음에 잽싸게 밖을 나섰다. 지금 해가 떠도 5분 뒤 비가 올 수 있는 것이 영국 겨울 날씨다. 시내를 거니는데 어디선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 온다. 오랜만에 허락된 햇볕과 함께 들려오는 바이올린의 선율은 내 감수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바이올린 소리에 이끌려 간 곳은 광장 한 귀퉁이. 그곳에는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백발의 아시아계 노인이 있었다.
낡디 낡은 테일드 코트에 잘 다려진 흰색와이셔츠, 검정색 등산복 바지에 반짝반짝 광나는 구두를 신은 백발 노인. 군데 군데 하얗게 빛 바랜 바이올린은 그 기능이나 할까 싶지만, 그 노인의 활 놀림에 응답하며 아직 수명을 다하지 않았노라 외친다. 인상을 쓰다가 살짝 미소 짓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짓는 애잔한 그의 표정은 그 울림에 깊이를 더 하는 듯 하다.
초라하지만 나름 갖춘 그의 복장과 그의 바이올린 연주실력에 길을 걷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연주를 마친 그는 관객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파란 하늘을 향해 키스를 던진다. 그리고 관객에게 말한다.

“이번 곡은 제 아내를 위한 곡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들려줄 수가 없어요. 얼마 전 그녀는 세상을 떠났거든요. 그녀를 대신해 여러분들께서 감상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의 말에 관객들은 박수를 보낸다. 노부부는 다시금 손을 꼬옥 부여잡았고, 맞은편 어린 아이는 그녀의 부모를 꼬옥 끼어 안는다. 아직 찬 공기에 나는 손을 모아 입김을 불고는 두 손을 비벼본다.
호흡을 가다듬은 노인은 다시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한다. 그의 활이 바이올린의 현과 마찰하며 이전과는 또 다른 깊은 울림을 만들어 낸다. 그건 건반악기가 주는 그런 직관적인 감동과는 다르다. 여러 개의 모노코드를 박자에 따라 혹은 화음 만들어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감동과는 다른 감동, 찰현악기가 내는 소리는 이보다 훨씬 감성적이다. 그 소리는 심장을 요동치게 한다. 눈물이 흐르는 소리라고나 할까? 그의 연주에 나도 모르게 그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마도 악마가 저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나타나 타르티니에게 한 제안을 한다면, 분명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내에게 나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게 해다오’ 하고 말했을 것이 분명하다. 먼저 떠난 아내에게 바치는 그의 연주는 무척이나 애절했고,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꼬마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뒤로 하고 광장을 떠나려고 하는데, 좀 전에 버스에서 마주한 노부부가 서로 번갈아 가며 광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필름 돌아가는 손맛이 그리웠던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제가 두 분을 찍어드릴까요? 두 분 같이 서 보셔요!”

할아버지가 내게 카메라를 건내려 하자,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잡아 끈다.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내게 카메라를 건내려 하자, 그녀는 마지 못해 그의 옷자락을 놓는다. 아마도 낯선 동양청년에게 ‘귀중품’을 맡긴다는 것이 불안했나 보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메고 있던 가방을 잠시 바닥에 눕히고 그 위에 내 핸드폰을 놓았다. 그러자 비로소 되찾은 그녀의 미소.

“할머니! 할아버지랑 더 가까이 붙으셔요. 좀 더! 굿!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저매니~”

‘찰칵, 지잉..’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말하는 독일인 노부부, 할머니는 언제나 마지막 여행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날씨가 좋아지는 시기인 봄, 그리고 절정인 여름마다 여행을 다닌다고 내게 말한다. 할아버지는 이에 덧붙이며 말한다.

“그래서 나는 늘 다음 여행을 미리 예약해. 낸 돈이 아까워서라도 죽을 순 없지. 이번 여름에는 두브로브니크!”
그러자, 할머니는 웃으시며 말한다.
“그래요. 두브로브니크, 갑시다. 그러려면 당신도 계속 운동해야 해요.”

할아버지는 손을 번쩍들며 여전히 자신이 건강하다고 표현한다. 아마도 이 노부부에게는 다음 여행, 그리고 그 다음 여행, 또 그 다음 여행이 악마와의 거래 대상이 될지 모르겠다.

그럼 나는? 나는 악마에게 무엇을 요구할까? 지금 내가 내 영혼과 맞바꿀 정도로 갈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처지를 생각해 보면 아마도 박사학위 정도라 답하지 않을까? 박사논문 서론에 내 연구의 의의랍시고 쓴 거창한 포부는 말하기도 부끄럽다. 하지만 이것이 죽은 아내를 위한 바이올린 연주나, 늙은 노부부의 다음 여행과 같이 그 다지 로맨틱하지도, 그렇다고 작지만 영혼과 맞바꿀 정도로 절실하거나 절박한 것 같지도 않다. 어찌 보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은 그저 시작했기에 하고 있는 것이고, 이를 마무리 짓기 위해 필요한 것들일 뿐 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내가 갈구하는 그것이 가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로부터 그냥 주어진 것이라면 영원히 가치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마와 거래에서 이를 요구한다면 그건 하찮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노부부와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의 바람이 가치 있는 건 그들 인생의 전부를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 했는가? 내가 이 과정에 충실해야 할 이유는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글 :  이유철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uchul83)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 1

 

박영미

 

1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루쉰의 「고향」중에서)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함께 분노를 외치고 희망을 노래했다. 그들의 분노와 희망은 길을 만들었다. 그 길은 현재로부터 미래를 여는 것이었으며 또한 과거로부터 현재로 이어진 것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광장의 촛불 속에서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진 길을 기억했고, 현재에서 미래로 열릴 길을 만들었다. 우리에게 광장은 그렇게 ‘길’이 되었다.

 

(국민일보)

 

2

광화문 광장에는 두 개의 동상이 일렬로 서 있다. 하나는 이순신, 다른 하나는 세종대왕. 나는 촛불 광장의 한 가운데 우뚝 서 있었던 이순신 동상을 보면 오늘의 박근혜와 어제의 박정희가 오버랩 된다. 광장의 동상이 오늘의 박근혜가 곧 어제의 박정희임을 보여주는 상징물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후 집권한 박정희는 1968년 광화문 앞 세종로에 6미터가 넘는 이순신 동상을 세운다. 정권의 정당성을 설득해야 하는 박정희에게는 뛰어난 무장이자 임진왜란의 영웅인 이순신의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해 12월에는 <국민교육헌장>이 반포된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되살려 안으로는 자주 독립에 힘쓰고, 밖으로는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로 시작되는 <국민교육헌장>은 1994년에 폐지될 때까지 누구나 반드시 읽고 외어야 하는 주문(?)이었다. 박정희는 이 주문을 공포하고 관련 교육을 강화했다. 이는 국가가 국민의 정신을 개조하고 통제한다는 국가주의적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순신 동상의 건립과 <국민교육헌장>의 공포는 이미 계획된 ‘10월 유신’을 위한 포석이었다. 박정희는 1969년 3선 개헌과 1972년 10월 헌법효력의 일부 정지, 국회해산, 정당활동 금지를 내용을 한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후 직선제가 아닌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장기집권의 토대를 마련한다. 바로 이 시기 <국민교육헌장>의 초안을 기초하고, 대통령 특별보좌관을 5년간 수행하면서 10월 유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박정희의 국가주의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한 사람이 박종홍(1903~1976)이었다.

 

박종홍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활동했던 서양철학 1세대로, 서양철학 1세대 중에서 드물게 전통철학의 현대적 계승이 필요함을 인식했으며, 서양철학과 전통철학이 결합된 ‘우리철학’을 모색한 철학자였다. 또한 경성제대부터 서울대학교까지 철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한국 강단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박종홍이 학문 생애 전체를 통해 노력한 ‘우리철학’의 모색은 의도의 선의여부와 상관없이 결국 국가권력과 결탁되며 일그러졌다.

 

그가 주장한 ‘부정성-주체의 자각-창조’의 논리는 전통철학과 결합하여 ‘천명-주체의 자각-참여’로 해석되었고, 다시 <국민교육현장>에서 ‘역사적 사명-민족적 자각-민족중흥’으로 구체화되었다. 더 나아가 천명과 역사적 사명은 ‘국가’로, 주체와 민족적 자각은 ‘국민정신’으로, 참여와 민족중흥은 ‘근대화’로 바꿔도 무방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부정성’은 역사적 사명이 된 절대적인 국가에게 자리를 내어주었고, ‘주체의 자각’은 교육과 지도로 내면화된 국민의 정신으로 전락하였으며, ‘창조’는 개발 반공 민주 애국 애족을 내용으로 하는 편협한 근대화로 축소되었다.(『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 300쪽)

 

지난 4년간 박근혜 정권이 보여줬던 국가의 모습은 이렇게 박정희가 꿈꾸고 계획했던 국가의 다름 아니었다. 따라서 박근혜의 탄핵과 구속을 ‘박정희 시대의 종언’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그들 부녀의 불온한 꿈을 저지했다는 의미에서는 타당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사후 30년이 지나 다시 박근혜가 선택(?)되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박정희 시대의 종언’은 성급한 희망일 수 있다. 박정희 시대는 한 개인의 권력욕과 이를 도운 철학이 우리의 정신을 지배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박정희 시대의 종언’은 절대 국가가 아닌 민주적 가치와 절차를 갖춘 국가, 복종하는 국민이 아닌 언제나 깨어있는 시민, 국가의 강요된 목표가 아닌 개인들의 바람과 꿈을 사회의 목표로 만들기 위한 쉼 없는 노력으로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한다.

 

 

3

우리는 과거로부터 미래로 열려진 길 위에서 시선을 미래보다는 과거에 두고자 한다. 우리철학, 한국근현대철학은 역사의 길을 뚜벅뚜벅 걸으면서 때로는 열려 있지 않은 길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때로는 잘못된 방향으로 길을 바꾸기도 했다. 이렇게 역사 속에서 분투했던 우리철학은 오랫동안 잊혀 있었고 이제는 이에 대한 정리와 성찰이 필요하다. 그 노력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잘못에 대한 냉철한 비판이 없다면 철학에서의 ‘종언’은 요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첫 걸음은 한국근현대철학을 소개한 책 『처음 읽는 한국현대철학』(동녘, 2015)의 출간이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여기서부터 역사이다
역사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미래의 험악으로부터
내가 가는 현재 전체와
그 뒤의 미지까지
그 뒤의 어둠까지이다
어둠이란
빛의 결핍일 뿐
여기서부터 희망이다….
(고은의 「길」 중에서)

 

기고자: 박영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한양대) 

중국 청대 대진의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7세기이후 동아시아 철학의 변화와 교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는 한국현대철학과 중국현대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 다음에는 “박은식”(이지)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10

최종덕(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이번에는 절판된 책 한 권을 소개 합니다)

자평(자기 책 서평) : 최종덕 지음,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휴머니스트, 2003

 

이번 서평은 오래 된 저의 책을 소개합니다. 제 책을 소개하는 것이 정말 겸연쩍습니다.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 라는 제목의 책인데, 15년 전에 잠깐 세상에 나왔다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사라진 책입니다. 이미 절판된 책이라서 과감히 자뻑 수준의 자평을 올려 봅니다. 책의 마지막 10장 부분을 수정하여 옮긴 것입니다. 장 제목은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입니다. 과학과 철학, 동양학과 서양학, 고전과 현대를 방황하던 저의 젊은 시절을 회고한 글이기도 합니다. 헤아려주세요

 

1. 그때 저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글을 썼는데,

“요즘 나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지나가는 소나 말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분하고, 친구와 처자식, 그리고 임금에 대한 사랑을 따로 구분하는 분별적인 사랑인가 아니면 무차별의 사랑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이 과거 유가와 묵가 사이의 이론적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민족주의의 문제에서부터 작은 학문연구자집단 안의 갈등들과 학연과 지연의 질곡들, 그리고 서양과 동양의 갈등이 곧 전통과 근대의 갈등으로 정착되는 우리의 왜곡된 현실의 문제로 비화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이 무엇인지 뾰족이 짚어낼 능력이 없지만, 우선 동양철학도 이제는 동양의 협궤를 과감히 벗어나서 삶과 역사를 호흡하는 통합과학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2. 연속성을 찾아서

 어릴 적에 멋모르고 천주교 성당을 나가게 되었다. 사춘기의 고민을 풀 수 있는 빛을 교회로부터 받게 되었다. 선과 악의 경직된 기준을 심사하는 일보다 사랑과 용서를 교회로부터 배우게 된 것은 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서 하나의 문제에 부딪혔다. 기독교의 구원이었다. 기독교 구원의 기준은 아주 분명했다. 복잡한 교리 밑바닥에서 공통된 구원의 기준을 찾을 수 있었다. 즉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바울 이후 ‘양심’이라는 보조준거가 나왔지만, 그래도 구원의 기준은 깨질 수 없는 성곽이었다. 여기서 또 다른 고민 하나가 생겼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조 할머니들과 지금도 문명과 단절된 아마존 정글 속의 원주민들이 구원을 받기란 애당초 그른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기준의 무차별 적용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더 생각해보니 그 구원은 2000년 전의 구체적인 존재자로서 예수의 존재에 대한 믿음보다는 신이 이룬 최초의 창조에 대한 믿음의 성격이 더 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신은 예수를 믿느냐?”라는 물음보다는 “당신은 최초를 인정하느냐?”라는 물음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보았다.

 

최초에 대한 의구심은 조금이라도 철학적 반성을 하고 싶어하는 젊은이의 특권이다. 나의 존재를 묻다보면 어느새 최초의 할머니가 누구인지를 묻게 되듯이 시간적 최초성은 아주 큰 고민거리 중의 하나이다. 나 역시 이런 고민에 빠진 적이 있으며, 이제 대학선생이 되어 철학 강의 시간에 이 문제에 대한 답 같지 않은 적당한 답을 떠들고 있지만 사실은 아직도 골치 아픈 문제로 남아있다. 그 뒤에 와서야 최초는 최후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각을 내가 하도록 해 준 두 분의 선생님이 계셨다. 한 분은 인도철학을 전공하시는 교수님이고, 다른 한 분은 전직 천주교 수사이셨던 할아버지이다. 교수님에게서는 시간적 최초만 따지지 말고 공간적 최초와 함께 보아야 하며, 인식의 최초가 존재의 최초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그리고 전직 수사님에게서 [대학]과 [중용]을 배우면서 최초는 최후의 끝과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처음 학문으로 접했던 고전물리학과 분석철학은 나에게 이 세계를 모두 산수算數와 조립의 대상으로 되어있는 것으로 보게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유럽철학을 접하면서 내가 공부한 산수와 조립방식은 존재에 접근하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양자역학 공부는 존재와 인식이 서로 얽매어진 실재 세계의 가능성들을 나의 가슴 안에 담아 주었다. 이 때부터 나의 철학적 화두는 연속성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의 철학 공부의 대상은 인간이 만나는 자연의 모습이었다. 자연의 근원은 연속성이라는 특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공부한 생물학적 자연과 초미시의 물리적 자연의 모습은 적어도 연속성 자체였다. 지나치게 전문적인 자연과학적 대상이 아니라도 일상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모든 자연의 운동과 현상이 바로 연속성임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연속성의 모습을 인간의 한계인 인식의 차원에서 밝힐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서양의 전통적인 의미에서 학문은 사이언스이어야 한다. 사이언스 연구 대상의 기본적인 필요조건은 비연속적이거나, 혹은 대상이 비록 연속적이더라도 그 연속성이 비연속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비연속적이 아니면 결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고민은 이미 칸트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칸트는 그 이전 시대의 형이상학자나 자연철학자와 달리 연속성의 세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연속성의 세계를 인간의 언어적 담론으로 다루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인간 오성의 성곽 안으로 비연속성의 세계만 편입시키고 연속성의 세계는 제외하였다. 이러한 구분이 서구 근대철학의 중요한 지위를 얻으면서, 서구에서 비약적인 학문발전이 있게 되었다. 칸트의 이러한 구분은 먼저 인식의 오차를 현저히 줄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따라서 과학과 형이상학의 혼란을 없앨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상의 과학과 마음의 형이상학 양자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즘 매스컴에서 ‘디지털 혁명’이라는 말을 자주 접하게 된다. 디지털과 대비되는 아날로그는 비연속성과 연속성의 대비와 유사하다. 흐르는 강물을 떠서 정확한 양을 누구에게 전달하고 싶을 때, 우리는 잔을 이용하여 한잔, 두 잔 또는 세 잔을 떠서 전달한다. 강물이 잔물로 바뀌면서 아날로그의 디지털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정확한 정보 전달은 반드시 계량 가능한 단위화가 이루어져야 가능해진다. 단위화 되지 않은 아날로그 정보 전달은 오차와 노이즈를 일으키면서 인식의 혼란을 가져온다. 반면에 디지털의 정보 전달은 한 개, 두 개, 세 개처럼 대상을 단위화 하고 나누어 셀 수 있어서 그 전달 효과가 매우 크다. 우선 단위와 단위 사이에 있는 어떤 존재의 양상은 이쪽 혹은 저쪽의 한 단위에 편입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놓칠 수 있는 정보를 모두 담아낼 수 있다. 그리고 정보 단위의 구분이 확실해지므로 노이즈 발생율을 현격하게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디지털 전환은 자연의 연속적인 아날로그 상태의 많은 것을 디지털 단위로 이전하고 변환하거나 혹은 왜곡시켜야만 가능하다. 이러한 디지털 혁명은 “무엇인가 있으며,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있고, 인식하는 것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서구의 전통적인 인식의 난제를 자연과학적으로 완성시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나의 연속성의 화두란 이제 디지털에서 다시 아날로그로 바꾸어 자연의 원래 모습으로 이전되고 변환되거나 혹은 왜곡되지 않은 원래의 모습을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노이즈가 가득 찬 아날로그라면 굳이 다시 아날로그의 패러다임으로 바꿀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국 나의 철학적 화두란 노이즈가 없는(상대적으로 적은) 아날로그 정보 전달의 가능성을 찾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자연과학의 성과로 이어지게 하고, 인문학의 주요 담론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3. 동양의 지리부도 

그래서 그 방법을 찾아보고 있다. 우선 생물학적인 운동과 현상이 전통 물리학적인 인과율의 범주와 차이나는 것을 조망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이 서로 만나야만 해결되는 천체물리학과 미시물리학의 대상계를 관찰해야 한다고 본다. 아울러 고대 자연철학의 진화론적 사유와 19세기 진화론의 발전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또한 인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티의 흐름과 역사주의 철학의 조류를 살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정지성의 철학이 아니고 시간이 유입되어 역사화된 철학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양의 자연에 대한 이해를 수용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모든 관심의 테두리를 나는 자연철학이라고 부르며 사용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동양학에 대한 나의 관심은 존재의 연속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우선 나는 동양철학에서 인식과 존재의 차이를 두지 않고 있다. 엄격히 말해서 인식의 유형은 존재의 양상에서 진화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 존재의 양상을 지배하는 존재의 원초성은 모든 존재에 동등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시간초월의 존재라는 말 대신에 역사적 존재 혹은 진화존재라는 신조어를 사용하고 싶다. 동양적 의미의 존재는 서양적 의미의 실체론적 존재와 달리 시간을 머금은 역사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양의 역사 존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하나는 역사 존재 자체의 자화상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수양론이다. 물론 두 가지 방식도 자연주의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서로 연결되어 있다. 누구나 사용하는 일상언어 가운데 한번 핀 꽃은 지고, 달도 차면 기우는 것을 인간 행태의 도리에 비유하여 말할 때 그 논거는 전적으로 자연주의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주의는 자연의 운동과 인간의 운동의 동형성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동양학의 중요한 방법론이 된다. 결국 동양의 자연주의는 역사 존재와, 그것을 인식하는 태도, 그리고 그에 따른 인간 행태의 방식이 서로 연속적임을 말하고자 하는 데 그 뜻이 있다.

 

대학원 시절 주렴계나 장횡거를 배우면서 대단한 우주 해석이 그들의 주제 안에 들어있다고 생각하였다. 장횡거에게서 개별자의 뜻을 파악하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려운 것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개별자의 정체성을 따지는 일에 익숙한 라이프니츠의 시각으로 볼 때 장횡거는 하나의 정서적 반란이 아닐 수 없었다. 역사적 순서를 무시하고 그 뒤에 장자를 만나고 보니 참으로 주렴계 이상의 대우주가 그려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서적 반란은 주자학을 풍월하면서 다시 차분해져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대부분의 도학 풍의 논의가 광대하게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우주의 책을 쓰고 있어서 무척 난해하지만, 반면에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어서 엄청난 매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냉철한 학문의 칼을 들이대면서 조금씩 정리하여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벌써 학문과 수양의 이중적 갈등이 드러난 셈이다. 이러한 생각의 변화는 실상 동양철학을 수양의 관점에서 보느냐, 아니면 학문의 관점에서 보느냐 하는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고민을 풀어줄 만한 해답은 이미 제시되어 있었다. 동양철학의 학문은 수양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서양과학에 익숙해 있던 당시의 나로서는 절실하게 다가오지를 않았다. 수양을 빙자하여 학문의 엄밀성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동양학의 문외한이자 초보자의 의심어린 어설픈 생각 때문이었다. 이는 공손룡을 만나는 과정에서 더욱 강하게 나왔다. 오래 전 논리철학에 심취해 있던 중에 동양에서 서양의 논리와 비슷한 장르를 찾다가 문자적 차원의 유사성에 끌려 명가名家를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명가를 비판한 장자처럼 혜시 역시 논리학이 아니라 광대한 삶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러한 곡절을 겪으면서 유가나 도가, 또는 불가의 이야기 안에는 연속성의 주제가 분명하게 들어있음을 알게 된 것은 지금까지 큰 수확이었다고 생각한다. “循環無端 故所在爲始也”라는 말은 대학원 시절에 공부의 주제를 잡게 해준 중요한 내용의 하나이다. 과연 최초를 인정해야 만 존재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자문을 하면서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당시에 나는 최초와 최후를 상정한 서양과학의 선형적 사유에 대한 적절한 대안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자백가의 역사적 상황의식은 분명한 것 같다. 일종의 사회 구원을 찾는 길이라고 본다. 당시는 정치적 분쟁이 끊이지를 않았고 사회적 불안감이 팽배했던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그들은 사회안정을 위한 개혁의 기치를 높이 세운 것 같았다. 서민이 학문에 접근할 수 없었던 사회적 상황에서 물론 그러한 노력은 관리 주도로 이루어 진 것 같았다. 그리고 관리의 개념은 현직뿐만이 아니라 많은 경우 민가에 흩어져 있는 무명의 학자인 잠재적 관리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서민의 생활태도뿐만이 아니라 임금의 도리와 임금과 서민간의 관계까지 다루면서, 삶에 녹아드는 실질적인 지표를 의도했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의 지표는 추상적이거나 종교적인 교리가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사회적 관심을 표명하고 있었다. 아마도 고대 유럽사회라면 다른 상황을 낳았을 것으로 본다. 유럽이라면 이러한 혼란상황에 직면해서 나올 수 있는 담론은 아마도 종교적 교리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중국인은 철저하게 구체적인 사람의 덕목을 제시하는 사회화 형성에 관심을 기울인 것 같았으며, 내세를 따지는 종교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공자에 보면 의義와 이利의 구분을 상반시켜 군자와 소인의 차이를 말했다. 그러나 유가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조차도 이를 구하듯 실용적 적극성을 발현해야 한다고 보는 듯하였다. 물론 도가는 그것조차도 부정하였다.

 

이렇게 제자백가 시대의 관심에 대하여 아마도 어떤 이는 사회 구원에 앞서 개인 해방에 관심을 두는 반면에, 어떤 이는 사회구성체 조직을 위한 개인의 역할에 관심을 두어 판단하기도 한다. 어쨌든 도가든지 유가든지 그것이 사회철학의 범주에서 볼 수 있다는 이야기에 큰 호감을 가졌다. 이러한 호감은 조선시대 정도전의 삼봉집을 읽으면서 확신으로 바뀌게 되었다. 정도전은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새로운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창출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런 필요성에 의해 불교는 단지 과거의 것으로 치부되어 척단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에 새로운 유교가 신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을 것이라는 해석학적 상상을 하였다.

 

이제 이쯤에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일이 생겼다. 동양철학이 개인의 수양론인가, 아니면 우주론적 본체론인가, 아니면 사회․정치철학으로 볼 것인가라는 논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서양철학의 입장에서 접근하는 방식이라는 점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역시 수신제가를 한 뒤에 치국평천하를 할 수 있다는 권력 유지의 차원에서 보는 수직적 해석이 아니라, 수신제가를 하면서 동시에 치국평천하도 할 수 있다는 수평적 입장을 취한다면 위의 논의 구조가 그렇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미아리 고개나 계룡산 계곡에 있는 많은 점집에서 ‘동양철학관’이라는 간판을 걸고 주역을 내세우며 장사를 하는 예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주역은 인간의 대소사를 점치는 책이 아니라 원래 하늘의 운행 이치를 설명한 책이다. 그런데 동양철학의 기저에는 하늘의 운행방식과 인간의 운행방식이 동형적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으니, 하늘의 운행방식을 그린 주역을 가지고 그 운행방식을 따르는 인간의 대소사를 점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점치는 집에서의 주역의 구실을 너그러이 봐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중국인이 본 하늘은 어떤 하늘인가를 알아야 한다. 서양의 하늘은 땅을 낳고 법칙을 생산한 인간이 다가갈 수 없는 머나먼 곳이다. 이에 비하면 동양의 하늘은 땅으로부터 귀납된 하늘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동양의 하늘은 땅의 모든 기억을 보존하고 있다. 서양의 하늘은 2500년 전부터 인위성이 가미되어 인간을 지배하는 하늘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에 동양의 하늘은 저절로 우러나오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의 하늘이다. 맹자가 말했듯이 모든 사람이 요순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이미 하늘이 내 몸 안에 들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의미를 통해서 맹자 이후 이천년이나 지났는데도 맹자와 불교가 새롭게 만날 수 있었던 양명학의 역사적 배경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쨌든 하늘이 내 몸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올 수 있는 이유는 하늘이 땅의 숨겨진 유전자를 갖고서 진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은 일방적인 지배 관계가 아니라 장자가 말한 ‘물극필반(物極必反)’하여 어느 것이 하늘이고 어느 것이 땅인지를 모르게, 그리고 먹고 마시고 부부의 잠자리를 하면서 어느덧 하늘이 땅 속에 들어있음을 깨닫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중용의 지적처럼 그러하다.

 

오래 전 돌아가신 동양철학계의 큰 스승, 배종호 선생님이 미국 여행을 다녀오신 이후였다. 그 때 나는 대학원생이었는데, 배종호 선생님께 이상한 질문을 드린 적이 있었다. 우리의 풍수지리 해석이 그랜드케년 지역에도 들어맞는지를 여쭈었다. 선생님은 전혀 맞지 않는다고 하셨다. 역시 지리적인 풍토의 차이가 고유의 사상을 유발시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하늘이 땅의 생산자가 아니라, 오히려 땅이 하늘의 생산자라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서양철학이나 서양종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동양철학에 대한 지나친 해석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공부를 더 해야 하겠다는 마음이 들뿐이다.

 

4. 서양이 이름붙인 동양

이후 나는 독일에 유학 가서 동양철학을 잊고 지냈다. 동양철학에 관한 책을 읽기보다는 힘든 유학생활을 달래기 위하여 틈틈이 붓글씨를 쓰곤 하였다. 재활 포장용 종이에 ‘인(仁)’자를 수백 번이나 썼을 것이다. 그리고 반야심경을 뜻도 잘 모르면서 부지런히 암송하였다. 이때 나는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동양철학이 갖는 의미와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돌아와 보니 우리의 현실은 동양철학이 제시하는 수양론과 엄청난 괴리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니 원래 알고 있었지만 새삼 느낀 것이라고 해야 옳다. 제일 먼저는 동양인 우리가 서양보다 더 서양적이라고 느꼈고, 역설적이지만 많은 동양적이라고 하는 것들의 표제어는 서양에 의해 이름 붙여진 것이 많다고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동양학에 대한 열기가 크게 일어났지만 그 열기의 실상은 비동양적인 것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우선 첫째 식민지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과거의 왜곡된 동양학 연구태도라고 본다. 둘째 서구문화가 여과 없이 직수입되면서 생긴 학문의 시녀현상을 든다. 셋째 서구문화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발 내는 국수주의로 인하여 고전문헌에만 매달려 훈고학만 하면서 발전적 비교해석과 전통의 창조를 두려워하는 잘못된 관행을 든다. 넷째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실천의 문제를 등한시하면서 중립성과 객관성이라는 허울아래서 잘못된 선비의식을 정당화시키는 편의주의적 상아탑의 가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둘째 문제와 연관을 갖는 것으로서 동양과 서양을 이분법적으로 대비시켜 이를 무턱대고 이성과 반이성으로 대치시켰던 과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런 이분법적 태도가 횡행하고 있는 듯하다.

 

한때 외국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외국의 연구 자세와 우리를 비교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는데, 이를 너그러이 용서해준다면 한마디 더 하고 싶은 것이 있다. 최소한 논문을 쓰려면 남이 해놓은 소주제 전개와 주장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남이 해놓은 연구결과를 관심 있게 살펴야 할 것이다. 혹은 기존의 연구결과에 일목연한 데이터베이스가 마련되어 있다면 더욱 좋다고 생각한다.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는 최근의 학계풍토로 보아서 세밀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서양의 동양학자가 쓴 글들이 우리 자신이 쓴 글보다 동양을 더 쉽게 이해하도록 해주는 안내구실을 더 잘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 마음 구석 한편에는 아직도 ‘서양 사람이 하면 얼마나 할까’라는 조소 어린 생각을 해보지만 실제로 서양의 동양학자가 쓴 책을 접하다 보면, 그 마음이 얼마나 풍선이었나를 깨닫게 된다. 나 같이 비전문가나 일반인 혹은 동양학 입문자에게 과연 한국의 기존 동양학 연구자는 과연 무엇을 해주었는지를 반성해야 한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서양의 동양학자의 강점이 있는 듯하다. 나무를 보는 대신에 멀리서 숲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절대로 서구의 동양학 연구자를 얕보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오래 전에 동양철학 관련 국제학술대회가 있었다. 독일에서 초청된 독일 한국학자가 발표를 하는데 내가 독일어를 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 연구발표의 논평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훌륭한 한국어 구사를 했기 때문에 나의 필요성은 별로 없게 되었다. 어쨌든 그의 남명 관련 연구논문은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하나 중요하게 느낀 것이 있었다. 그의 남명 관련 논문의 주제는 한국의 학자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분야였다. 그리고 논문의 전개 방법론이 매우 창의적이었음을 느꼈다.

 

5. 동서고금의 시선 – 역사를 호흡하는 공부

요즘(15년 전) 나는 나름대로 심각한 문제에 봉착되어 있다. 학문적 문제가 아니라 학문 외적 문제이기 때문에 더 심각할 수 있다. 앞서 말한 것 중에서 다섯 번째 문제와 연관되기도 하다. 문제의 핵심은 서양철학 그것도 과학철학하는 사람이 왜 갑자기 한의학이나 동양철학을 건드리고 있냐는 비난 어린 질문들이다. 한문이나 제대로 하느냐하는 보이지 않는 비난일 것이다. 약간은 곤혹스러웠다. 실제로 나는 한문을 읽는 수준이 미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동양철학 한다고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단지 나의 주 전공은 자연철학이고 자연철학의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동양의 자연문제를 건드릴 뿐이었다. 어쨌든 그러한 비난은 동양과 서양을 획일적으로 갈라놓는 이분법적 사고라고 본다.

 

나는 동양과 서양이 반드시 만나야만 우리가 안고 있는 역사적 문제들을 조금씩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동서양의 종합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먼저 반드시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정립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차이의 부각에만 그치면 국수주의 혹은 민족주의 아류에 머물고 만다. 차이의 정립은 종합을 위한 과정적 단계일 뿐이다. 과정을 거처 우리는 방법론과 문제의식까지를 공유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서양의 자연철학과 동양의 자연철학을 종합하는 듯이 보이는 작업은 거창한 학제간 연구이기보다는 한 논문의 작은 구성요소로서 인정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기 위하여 동양학을 공부하려는 후배들은 서양철학의 역사적 흐름들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서양철학을 공부하려는 후배들도 동양철학을 다른 전공으로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현상학 수업을 수강한 후에 하버마스 수업을 수강하는 그런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본다. 1998년쯤인가 동서양 철학하는 소장학자들이 모여서 더불어 공부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방이지(方以智)의 『물리소지』(物理小識)를 이현구, 김교빈, 박석준 선생님 등과 같이 읽은 적이 있었다. 동식물의 생태학적 자연학을 담아 낸 책인데, 동양철학의 시선을 넓게 해준 정말 고마운 독서모임이었다. 동양에도 서양이, 서양에도 동양이 내재해 있었음을 깨닫게 해준 좋은 기회였다.

 

요즘(15년 전부터 지금까지) 나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지나가는 소나 말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구분하고, 친구와 처자식, 그리고 임금에 대한 사랑을 따로 구분하는 분별적인 사랑인가 아니면 무차별의 사랑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이 과거 유가와 묵가 사이의 이론적 갈등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민족주의의 문제에서부터 작은 학문연구자집단 안의 갈등들과 학연과 지연의 질곡들, 그리고 서양과 동양의 갈등이 곧 전통과 근대의 갈등으로 정착되는 우리의 왜곡된 현실의 문제로 비화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길이 무엇인지 뽀족히 짚어낼 능력이 없지만, 우선 동양철학도 이제는 동양의 이름을 과감히 벗어나서 대화의 글쓰기에 나서야 한다. 나아가 서양철학자들도 동양학에 대하여 철학적 성찰과 과학적 방법론이 결핍되어 있다는 비판도 중요하지만, 이제 우위비교가 아닌 동양의 철학적 소재나 방법론에 도전해야 한다. 이런 문제는 공부하는 사람, 그 개인에게만 부과될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관심과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열린 대화가 필요하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문제풀이를 찾기보다는 학자군의 만남, 학문간의 협동이 절실하다. 그래서 동서양의 경계,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 전통과 근대의 경계에 묶이지 않으며, 삶과 역사를 호흡하는 그런 공부의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2003년 나온 책 『인문학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에서)

섦 – 꽃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1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꽃이 아니라서 꽃이라 부를 수 있고

 

알 수 없는 향기라서 머무를 수 있고

 

그 안의 기억이라서 푸르게 자랄 수 있고

 

물음의 저편에 별 하나의 꿈이 있어서

 

아름다울 수 있다.

 

2017. 5. 15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안내] 5월 철학자의 서재 live -시몬느 베이유의 ‘중력과 은총’

5월 철학자의 서재 live 안내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선생님들께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 1부입니다. 5월 철학자의 서재 live를 공지합니다.

5월 철학자의 서재 live 가 5월 26일(금) 오후 6시 30분에 열립니다.

 

이번 5월 철학자의 서재 live에는 시몬느 베이유의 “중력과 은총”이 찾아옵니다.

진행은 김은주 선생님이 맡아 진행해 주기로 하셨습니다.

주제는 “시몬느 베이유: 중력과 은총 – 고의적 어리석음으로 사유와 삶의 일치를 원하다”입니다.

사유와 삶의 일치는 그 누구보다도 사유를 업으로 삼은 지식인의 희망사항일 것입니다.

이것이 고의적 어리석음을 통해  가능하다니, 매우 흥미로운 주제라고 할 것입니다.

국내 학계에선 아직 낯설다 할 수 있는 시몬느 베이유라는 철학자에 대해 조금이나마

접근해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할 듯 합니다.

 

회원 여러분의 많은 참여 기대합니다.

 

– 5월 철학자의 서재 live

 

일시 : 2017년 5월 26일(금). 오후 6시 30분

장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주제:  “시몬느 베이유: 중력과 은총 – 고의적 어리석음으로 사유와 삶의 일치를 원하다”

담당: 김은주 선생님(동덕 여대)

 

——————-이하 인터넷 서점 알라딘 책 소개.————————————–

 

특정 종교인으로서 신앙심을 고백한 글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근본적 삶의 조건에 대한 탐구와 그 극복을 위한 철학적 사유의 기록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중력이라는 필연성의 영향 아래 놓였으며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 여기서 은총이란 지성과 신앙이
더 이상 분리되지 않게 해 주는 초자연의 빛이다.

지은이 시몬 베유는 저명한 철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이며 신비주의자이다. 고등학생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교사였지만
정의로운 평화를 위하여 전쟁터에서 총을 들었고, 노동자의 삶을 관념적이고 피상적으로 논하기를 거부하여 공장노동자와 농장노동자가 되어 생활하였다.

 

 

아드리안 해의 작은 베네치아 [유철의 유럽방랑기] -2

아드리안 해의 작은 베네치아

 

피란은 ‘아드리아 해의 작은 베네치아’라고 불린다. 중세시대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강한 영향을 받은 피란은 슬로베니아어 외에 이탈리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지만, 실제로 베네치아풍의 건물들이 빽빽히 들어차 있다. 게다가 피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성 조지 교회 옆 종탑은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의 종탑을 본 따 만든 것이라고 하니 그 별칭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피란에서 내 눈을 사로 잡은 건물도 그런 베네치아풍의 건물이었다. 마르티니 광장에 위치한 붉은빛 외관의 베네치안 하우스가 그렇다. 타르티니 광장에 위치한 이 3층짜리 베네치안 하우스의 아기자기하고 화려한 건물장식들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 특히, 일반적으로 정면에만 테라스가 있는 주변 건물들과는 달리 이 건물의 테라스는 달리 정면에서 왼쪽면까지 이어져 있어 독특하기도 하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독특한 외관을 지닌 이 건물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피란이 베네치아 공국에 지배 받던 시절, 한 베네치아 상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 상인은 나이 어린 피란 여인에게 반하고 말았는데, 그는 그 여인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피란에 들를 때마다 그 여인에게 선물을 한 가득을 전해주었다고 한다. 남성들의 과시욕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그런 둘을 보며 피란 사람들은 무척이나 수근거렸다고 한다. 나이 많은 식민지배국의 남성이 피식민국의 어린 여성을 쫓아 다녔으니, 게다가 그녀의 선물을 매번 한가득 가져다 주니 이 좁은 동네에서 이만한 가십거리가 어디 있겠는가? 분명 여인을 두고 매국노라 하는 이들부터 어린 여자가 돈만 밝힌다고 비난하는 이들, 곧 그 상인이 여자를 버릴 것이라며 떠드는 이들, 반대로 그런 여자를 쫓아다니는 남자에게는 파렴치한이라 하는 이들도 있었을 터. 둘을 바라보는 피란 주민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배신감은 무척이나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변 시선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는 그녀에게 집 한 채를 지어 선물한다. 그리고 창문과 창문 사이 사자상을 설치, 그 아래 휘장에 라틴어로 이렇게 새긴다.

‘Lass a Pur Dir’

영어로는 ‘Let them talk’, 한국말로 해석하자면, ‘지꺼리게 놔둬’, ‘말하게 둬’ 혹은 ‘신경쓰지 말라’는 의미다. 그건 자신들을 두고 수근거리는 이들에게 하는 말이면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성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자신이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받는 여인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둘이 서로 사랑한다고 주변의 불편한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그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시대에도 비난의 대상은 여성에게만 향했을 것, 게다가 상인은 무역을 위해 주기적으로 떠나야 하니, 그녀 곁에 항상 있을 수 없을테고 말이다. 결국 마을 사람들의 수근거림은 오롯이 그녀 혼자 감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하는 말,

‘내사랑, 신경쓰지마오’

그리고 그녀와 자신은 비난하는 이들에게 하는 말,

‘떠들 테면 떠드시오! 하지만 사랑하는 내 여자를 괴롭히지 마시오! 우리의 사랑을 방해하지는 말란 말이오!!’

각자의 사랑이 왜곡되는 상황, 그리고 이를 홀로 감당해야 했던 그녀, 그런 그녀에게 그 상인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없을 때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집을 지어주는 것 밖에 없었지 않을까? 그런 그의 마음은 주변 건물보다 유난히 많은 창문, 큰 창문들, 그리고 두 면으로 이어진 큰 테라스, 굳이 밖을 나오지 않더라도 집에서 바다와 주변이 훤히 내다 보이는 건물 위치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이 로맨틱한 건물이 유명해진 이유는 사실 이런 사랑 이야기 때문은 아니다. 사람들이 이 건물에 방문하는 이유는 건물 1층에 위치한 세계 유수의 레스토랑에서 앞다투어 공수해 간다는 피란의 소금 가게, 피란스케 솔리네Piranske Soline가 있기 때문이다.
금처럼 귀하다는 피란의 소금, 그건 피란주민들에게 축복이자 저주였다. 소금은 피란에게 풍요로운 삶을 약속했으나, 이 때문에 주변국들로 부터의 침략과 핍박에 시달리게 하기도 했다. 소금을 차지하기 위한 제국들의 침략 역사는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 비잔티움 제국, 신성로마제국,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 함부르크 제국에 이르기까지 한다. 피란을 감싸고 있는 모르곤 언덕의 몇 미터 남짓 밖에 남지 않은 성벽이 그 역사를 대변한다.

모르곤 언덕을 오른다. 이스트라 반도의 마을들이 그러하듯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사이 미로처럼 뻗어 있는 골목들. 건물과 건물 사이가 얼마나 가까운지 내가 양손을 뻗으면 마주한 건물벽이 닿는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골목은 정겹다. 집 창문에 고개를 내밀어 앞집과 대화하는 할머니, 그 앞집과 연결된 줄에 빨래를 널고 있는 아주머니들, 사람 사는 냄새 풀풀 나는 골목이다.
그 사람냄새 나는 좁은 길을 굽이굽이 오르며, 사람 사는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모르곤 언덕 위에 있다. 언덕 아래 펼쳐지는 피란. 내 시선과 수평선이 일직선이 되는 순간, 나는 마치 선수처럼 뾰족한 피란 반도라는 커다란 배 위에서 아드리아 해를 항해하는 듯 하다. 성 조지 성당 앞의 한 연주가의 아코디언 소리는 배의 항해를 알리는 기적 소리 같다. 연신 사진을 찍어보지만 내 눈 만한 게 어디 있겠는가. 사진 찍길 포기하고는 잊지 않기 위해 눈을 깜뻑이며 풍경을 머리 속에 담아 보려 애쓴다.

“사진 찍어드릴까요? 거기 한 번 서 봐요.”

한 동양인이 내게 말을 건다. 굴러가는 R발음이 이건 여지 없이 북미권 발음이다. 새까맣게 탄 얼굴, 허름한 옷차림에 목에 건 손바닥 만한 초록색 손가방, 하지만 언뜻 봐도 비싸 보이는 썬글라스가 인상적이다. 나는 얼떨결에 핸드폰을 건냈다. 셀카든 아님 찍히는 것이든 그리 능숙한 내가 아니다. 어색하게 팔을 허리춤에 올렸다가, 내렸다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기를 반복한다. 그러자 R발음 굴러가던 그녀가 익숙한 언어로 내게 묻는다.

“한국사람이죠? 맞아, 한국사람이야. 반가워요, 저는 카탈리나라고 해요.”

한국말을 하는 그녀는 캘리포니아에서 온 한국계 미국 이민자였다. 그녀는 지난 1년째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작년에 오랜만에 자신의 한국 고향을 방문했지만, 너무나도 변해 버린 모습에 실망을 하고 제 2의 고향을 찾아 떠나 여행 중이라고 한다.

“시골에서 소 젖 짜고, 피사리 하고, 새참 먹고 했던 그런 곳에 논밭은 어디로 갔는지 아파트가 들어차고, 카페들이 생기고 하는 것을 보니 갑자기 낯설더라구요. 그건 제 고향이 아니었어요. 실망한 마음을 안고 바로 그 길로 한국을 떠났어요. 다른 곳에서 그 고향 냄새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말이에요.”

지금은 자신의 새로운 고향을 찾았다고 한다. 우연히 여행중 만난 친구를 따라 찾아 가게 된 우크라이나의 리비우Liviv가 그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주변을 여행하고 있다는 그녀. 낯선 곳에서 고향같은 익숙함이라니, 그건 어떤 느낌일까? 게다가 정든 고향을 상상하며 방문한 그 고향이 내 고향 같지 않다는 느낌.. 사실 나는 감이 잘 오지 않는다.
부모님도 서울에서 자라셨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모두 서울에 계셨기 때문에 명절이든 뭐든 서울 밖을 나선적이 별로 없다. 내가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서울, 내가 자란 그 동네 아파트는 여전히 거기 있고, 그 앞에 있던 버거킹과 맥도날드도 그 위치에 있다. 변한 것이라고는 맥도날드 뒤편에 스타벅스가 생겼다는 것 정도? 서울은 변해 봤자 서울이다. 그 자리 그 건물에 간판들만 바뀌는 그런 곳.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사실,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 먹은 건 트럼프가 미국 대선에서 당선될 것 같아서 였어요. 트럼프가 대통령인 그 나라에서 살 용기가 더 이상 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이제는 그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미국땅을 밟지 않을 거에요. 요새 영국은 어때요?”

나의 30대를 보내고 있는 영국도 마찬가지다. 유럽의 반이민 분위기를 대표하는 영국, 브렉시트 가결 이후에는 그러한 인종차별적 반이민 목소리가 더욱 거세지고 있다. 브렉시트 가결 전후로 해서 인종차별적 범죄가 5배나 늘었다고 하니, 실제 체감하는 건 그 이상이다.
나도 종종 인종차별을 겪는다. 인종차별을 당할 때의 그 모욕감은 사실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으로서의 자괴감을 들게 만든다. 처음 이를 경험 했을 때는 집에 돌아와 하루 종일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제는 둔해 졌는지, 아니면 서구사회에서 ‘자발’적 ‘쭈구리’로 살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수 많은 간접적 차별은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치기 일쑤고, 인지한다 하더라도 ‘잘’ 참는다. 그래도 모욕적인 처사에는 가능한 한 영국 ‘젠틀맨 엔드 레이디스’에게 배운 ‘인다이렉트’한 표현과 함께 온갖 수사를 동원하여 ‘폴라이트’하게 그들의 자존심을 긁는다.

“매우 유감이군요. 당신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알아야 할 것 같아요. 당신들이 늘 말하듯 자랑스러운 영국인처럼 행동해야 하지 않겠어요? Be British!”

그러나 매번 이렇게 대응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한번은 이런 경험이 있었다. 어두운 밤 길을 걷고 있는데, 트럭에 탄 영국인이 나를 불렀다. 그리곤 무슨 이야기를 하는데 잘 들리지 않아, 다시 정중히 다시 한 번 말해달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이, 아시아인들은 아기를 어떻게 갖아? 너희들 성기가 고만한데 어떻게 그게 가능하기나 해? 하하하하”

모욕감에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이 떨렸지만 아무 말도 못했다. 차에 탄 그들을 쫓아가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내가 아는 누군가처럼 가운데 손가락을 쳐들며 ‘X먹어라!’하고 외칠 용기도 없었다. 그건 회피이기도 하다. 그럴 때면 나는 내 안의 쭈구리를 확인한다.
그렇기에 카탈리나의 용기가 부럽다. 비록 그것이 회피일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생활터전에서 벗어나 그곳에 있음을 거부함으로써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녀와 나는 우연히 또 다시 유럽에서 마주치면 그 때는 소주 한 잔 할 것을 약속하며 헤어졌다. 물론 그녀는 내게 자신의 제 2의 고향 리비우에 방문하라며 친히 주소를 이메일 주소와 함께 내게 건내 주었다. 내 언젠가는 가리라 다짐해 본다.

쪽지와 함께 모르곤 언덕을 내려 오는 길, 어린 학생들이 무리를 지어 지나간다. 유난히 발걸음이 가벼운 것을 보아하니 분명 하교길이다. 금발의 여학생들이 내 옆을 빠르게 지나치며 들릴 듯 말듯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칭크스Chinks~”

내 옆을 지나치자 마자 깔깔대며 웃는다. 그냥 넘어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용기내어 보기로 한다. 그냥 지나치면 그들이 평생 자신들의 행동이 무엇이 잘 못된 것인지 모를 것만 같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용기 내어 그녀들을 불러 세웠다.

“헤이, 레이디스, 너희들 그럼 못 써! 그건 누군가를 상처 줄 수 있는 표현이야. 앞으로는 그런 표현 쓰면 안돼. 절대로!”

검지 손가락을 상하좌우로 흔들며 아이들에게 말한다. 나의 정색이 당혹스러울 법도 한데, 잠시 나를 힐끔힐끔 쳐다볼 뿐,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깔깔대며 나를 앞서 간다. 그녀들이 사는 온 천지가 백인이니, 나같은 노랭이를 보면 신기하기도, 놀리고 싶기도 하겠다. 나도 그들을 양놈이라, 그리고 코쟁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단지 훗날 그녀들이 시골 골목길에서 만난 그 검은 머리 노랭이 청년의 설교를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민박집 관리인인 마르코가 추천해준 펍, Café Neptun으로 향한다. 기분 전환엔 맥주가 최고다. 아직 비수기인 탓에 가게마다 손님들은 거의 없지만 가게들마다 때마침 열린 슬로베니아의 국가대표 축구경기를 시청하고 있는게 보인다. 사람들은 TV를 바라보며, 소리지르기 바쁘다. 어디나 축구열기는 똑 같다. 바텐더로 보이는 여인이 내게 묻는다.

“뭐 마시겠어요?”
“로컬 맥주 하나 주세요.”
“그럼 이게 최고에요!”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며 잔과 함께 내게 건낸다. 그 병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Out of China’
내가 맥주를 한참 쳐다보고 있자, 슬로베니아가 지고 있는 상황을 보며 계속 성질만 내던 옆 자리 아저씨가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는다. 나는 애써 웃으며 바텐더에게 말한다.

“음.. 이 맥주 정말 맛있네요. IPA죠? 근데, 미안하지만 저는 중국인이 아녜요.”
내 얘기를 들은 바텐더 큰 소리로 웃는다.
“하하하하 오해하지 말아요. 이 맥주는 이 근처 지역 맥주인데, 그 지역 이름이 아이도브슈치나Ajdovščina에요. 발음이 비슷하지 않아요? 슬로베니아 사람들은 말장난을 무척 좋아해요. 하하하 정말 오해 말아요!”

그들에게 한국과 중국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내게 그들이 모두 양놈이고, 코쟁이들이 듯 말이다. 그래 나는 지금 한국 밖에 있다. 무척이나 낯선 곳. 나와 생김새도 문화도 사고도 다른 이들과 내가 자란 곳에서 비행기로 11시간 거리에 있다. 낯익은 거라곤 하나도 없다. 모든 게 낯설다.

나의 고향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도 없고, 논도 없고, 동네 바둑이도 없는 시멘트와 철근으로 쌓아 올린 서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아파트 촌. 내가 즐겨 찾던 비디오 대여점도 학교 과제물을 팔던 문방구도, 동네 슈퍼마켓도 사라져 버린 그곳. 이제는 낯익은 간판들마저 사라지고 낯선 외래어 간판들로 대체된 그곳. 공터들은 사라지고, 커다란 백화점과 주상복합 건물들로 가득 차 버린 그곳. 그런데 왜일까? 종종 겪는 차별은 더욱 그곳을 그립게 한다. 내게 이곳과 다를 바 없이 낯선 곳이 되어 버렸으며, 학연, 지연, 혈연 등으로 또다른 배제가 존재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립다.
그건 장소가 그리운 것이 아니고, 그곳에 살았던 그 시절이 그리운 건 아닐까? 비록 풍경이 변해도 낯선이들로 가득하다 하더라도 낯익은 사람이 낯설게 변했다 하더라도 혹은 그 시절 그 기억이 왜곡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곳에서 살았던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절 그 기억은 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낯선 땅, 이역만리에서 잠시나마 터전을 잡아 살기로 했으나, 여기에는 나의 이야기가 없다. 아니, 쓸 생각을 안했다는 것이 맞다. 그저 이곳에 온 목적이 우선되었지 결코 내 이야기를 쓰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곳에 있는 이들의 삶에 맞추어 그들과 이질적이지 않게 살았기에 그 동안의 이야기는 ‘그들 이야기 속 나’가 더 맞는 것 같다. 그렇다면 카탈리나가 그러했듯이 고향은 이질적인 곳이라 할지라도 의외의 곳에도 있을 수 있다. 이제야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한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의 마음으로 버텼던 지난 날이 헛되다. 이제 나도 이곳 낯선 땅에서 내 이야기를 써봐야겠다. 그들 속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 속 그들을 써 내려가 봐야겠다. 그렇다면 그들의 차별은 내 이야기가 되고, 그렇기에 그 차별에 더 용기 있게 저항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리라 다짐해 본다.

사진/글 :  이유철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uchul83)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섦 – 노래 위에 상인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0

노래 위에 상인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퍼석퍼석 모래 위로 나는 새는 바람이었다.

그래도 삶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구름 위에 핀 꽃을 노래하는 슬픔의 변명이 놀라워

그들은 꽃을 멀리하였다.

기억에 없는 기억을 떠올리며

악기를 연주하고 붉은 입술로 노래를 하고

익지 않은 푸른 사과는 아쉬워 바람에 춤을 춘다.

 

아직 낯선 사과에 겨울바람이 차곡차곡 쌓인다.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로 가는 것일까?

삶은 너무 낯설고 익지 않아 항상 거칠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은 황무지에

노랗게 피어나는 나비의 향기가 그립고

아직 익지 않은 밤, 푸르게 익어가는

한 여름 밤의 녹색 바람이 그립다.

부슬부슬 알 수 없는 비를 그리며

갓 구은 듯 한 초승달 한 마리가 반짝반짝

창밖으로 떨어지는 밤을 그리워한다.

그는 수많은 밤을 모아 곧 시장을 열 것이다.

그 추억의 밤을 누군가는 곧 사서 모을 것이다.

 

2017.4.26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딱 경험한 만큼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직 덜 익고 푸릇한 사과처럼 모든 것이 그 크기만큼 낯설고 그 크기만큼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알지 못하기도 합니다. 푸른 사과가 낯설지 않고 익숙해지는 것은 수많은 밤을 그 안에 담기 때문입니다.

 

익지 않은 열매는 많은 밤을 담을 것입니다. 푸르른 여름밤 풀냄새가 하늘에 가득하고 달빛에 반짝이는 빵 냄새가 나는 초승달과 수많은 별들과 뜨겁고 시원한 여름밤과 꽃이 피는 봄밤도 같이 담고 낙엽이 비처럼 쏟아지는 낯익은 가을밤도, 모든 것을 세상에 내던져 준 하얀 겨울밤을 차곡차곡 쌓은 사과의 낯설었던 밤은 누군가에게 달콤한 꿈이 됩니다. 상인은 수많은 밤을 팝니다. 작은 샘에 동그랗게 뜬 달을 떠서 누군가의 마음에 담는 것처럼 수많은 추억이 담긴 작은 우주를 경험하게 해주는 그 밤들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삶들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보다 넓은 세계를 경험하고 보다 멀리 바라보는 삶을 때로는 갈망하며 삶은 항상 그리운 날이기도 합니다. 늘 꽉 찬 듯 부족한 것이 그리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