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왓슨, 무신론자의 시대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1

 

최종덕의 종횡무진 책읽기 : 서평연재 -1

 

피터 왓슨, 무신론자의 시대, 책과함께 2016년 5월 출간 (Peter Watson, The Age of Nothing, 2014) 

 

무신론자의 시대 : 이 책 피터 왓슨의 <무신론자의 시대>는 원래 영국판 책 제목을 <무의 시대>로 달고 나왔었다. 그러나 미국판에서 <무신론자의 시대>로 제호를 바꾸었다. 이 책의 제목으로 이 책을 무신론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단정지면 안 된다. 무신론도 의미가 있겠지만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내재된 종교심이라는 것이 있음을 은근히 보여주려는 책이다. 하버머스와 네이글로 시작하여 니체와 산타야나마르크스와 하이데거 그리고 융과 빅터프랑클에 이르기까지 현대 20세기 철학자들을 통하여 종교와 무신론이 서로 모순관계가 아니라 공존관계임을 보이려고 한 것이 저자 왓슨이 이 책을 쓴 목적이다.

예이츠가 본 니체 : 니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는 무신론의 성경이지만, 그런 책도 당시 니체의 책의출판을 맡은 인쇄소에서 니체 책보다는 찬송가집 50만권을 인쇄하는 일정 때문에 니체 책 출간이 한참 뒤로 밀려났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상징적으로 종교와 반종교이 당시 분위기를 표현한 것이다. 니체의 초인을 저자 왓슨은 존재론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방향적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니체의 초인을 설명하기 위하여 니체를 직접 건드리지 않고 예이츠William Buttler Yeats가 본 니체로 대신했다.(1902) 예이츠는 니체를 “가혹한 니체”와 “온화한 니체”로 구분했다고 한다. 가혹한 니체란 “물기없는 눈으로 바라본 세계”와 “무시무시한 인간의 내적 본성”을 강조한 니체이다. 반면 니체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예이츠는 강조하고 이 책의 저자 왓슨은 더 강조한다. 그런 다른 모습의 니체를 예이츠는 “온화한 니체”라고 했다. 온화한 니체가 바라본 세상은 다음과 같다. 전체적 세계는 혼돈스럽고 모순에 가득차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익한 세계라고 한다. 적대자들 사이의 짧은 용서가 존재한다고 한다. 끊임없는 새로운 선택의 자유는 그것 자체로 ‘기꺼이 맞이하는 기쁨’이다. 삶이 비극임을 인정하지만 그짧은 순간순간에도 신성한 무엇인가가 담겨져 있음을 생각한다. 예이츠는 그런 상태를 황홀한 긍정이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에이츠를 읽지 않아서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하겠지만 이 책의 저자가 에이츠의 니체 해석을 지나치게 황홀경의 존재론으로 만든 것 같다. 그 이유로서 예이츠는 나이가 들어 신비과학occult science과 민족주의로 빠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산타야나의 탈속세 : 또 한 명의 미국 현대철학자 산타야나가 있다. 산타야나의 반초월주의 철학은 이미 당시의 실증주의와 과학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산타야나의 논거는 매우 정교했다. 그에게 초자연성은 없으며 따라서 영혼도 없다. 그는 철학적 자유주의자로서 절대적이고 완전한 실재의 관념을 싫어했다. 그는 관념론의 철학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 철학은 하나의 견해일 뿐이라는 것이다. 관념론도 지나치면 신비주의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산타야나는 신비주의를 철학적 논의 자체의 붕괴로 간주했다. 그러나 저자 왓슨은 교묘하게도 산타야나에서 신성성을 골라내었다. 산타야나가 삶의 가치를 속세가 아닌 것(unworldiness)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명제를 골라낸 것이다. 즉 탈속의 범주에서 아름다움이 있고 그 안에서 정신성이 내재된다는 산타야나의 명제를 왓슨은 부각시켰다. 그러나 내가 산타야나를 아는 범위에서 왓슨의 강조점은 초점을 약간 벗어났다. 그가 말하는 정신성이란 미학적 정신성에 국한한다. 학문적 혹은 합리적 정신성은 여전히 세속적 합리성에서 찾아진다.

아방게르 : 1차 세계 대전 직전 프랑스의문화적 풍토를 말한다. 이에는 프랑스혁명의 저항정신이 포함된다. 나는 이 책에 나온 그 저항정신의 질문들을 아래처럼 요약했다. 1)성숙한 어른이 아이보다 과연 우월한가? 2)유머와 아이러니(풍자)의 차이가 있을까? 3)꿈의 의미는 무엇인가 4) 모호하지만 상징적인 그리고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다중성이 무엇인가? 왓슨은 다중성과 아이의 개념을 이성으로 접근하지 못하는 어떤 미지의 영역으로 유도하려는 글쓰기 전술을 보이지 않게 노출시켰다.

 

마르크스의 혁명 : 저자의 마르크스 해석을 더 보자. 경제학자며 철학자로서 마르크스의 저서 <자본>은 아래의 주장을 담았다고 말한다. 1)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부가 많아질수록 더 가난해진다. 2)더 높은 임금을 받게 되어도 더 가난해진다. 즉 인간 존재로서 더 궁핍한 소외로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3) 결국 소외는 노동에서 생겨난다. 왓슨은 소외의 기원을 다음처럼 설명한다. 1)노동의 댓가는 노동자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고 오히려 노동자를 지배한다. 2)생산행위자체가 노동자의 존재론적 본성을 빼앗는다.(소외시킨다) 3)시장이 형성되면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소외시킨다. 4)결국 노동은 노동자를 노동자가 속한 문화에서 소외시킨다. 나아가 저자 왓슨은 마르크스가 본 사회를 기술하고 있다. 첫째 어느 시대에서나 지배계급의 사상이 지배적인 사상으로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물리적 힘을 지배하는 계급이사회를 지배하는 지식권력의 주류가 된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둘째 인간은 오로지 혁명행위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정화하고 순화된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책 10장) 왓슨이 왜 마르크스를 설명했는지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마르크스에 대한 전형적인 비판 중의 하나가 마르크스의 혁명조차도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적 구원에 해당할 뿐이라는 것인데, 왓슨도 마르크스를 이런 식으로 보고 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 : 다 알다시피 우리 인간은 세계 속에 던져진 존재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표제어이다. 즉 우리는 우리의 세계와 존재를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세계에 잘 맞추어 잘 사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세계가 우리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에 맞춰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고유한 본성이나 본질은 무의미하며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본래적 삶이란 허구이며 세계 앞에서 우리는 유한한 작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한 유한성을 깨닫고 세계 속에 던져진 우리가 세계의 다원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 선택하는 것이기 보다 선택될 수밖에 없는 일을 결단이라고 말하며, 우리는 결단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현재적 인정은 “여기서 그리고 지금”이라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결국 우리는 세계를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잘 맞추는 길을 찾아야 한다. 하이데거는 이런 길을 ‘염려’Sorge라고 표현했다. 세계를 염려하는 울의 하이데거의 태도는 세계를 관조해야 한다는 초연함으로 우리를 끌고 가려한다. 세계라는 말 대신에 사회라는 말을 대입하면 우리는 세상에 대해 탈정치화 되어야 한다는 견해로 귀착된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초연함의 종교성과 만나게 된다는 것이 저자 왓슨의 해석이다. 왓슨의 이런 해석은 아주 명쾌하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1927)에서 존재는 두 가지 양상으로 드러난다고 했다. 하나는 변화를 인정하는 미래지향의 존재(Sein-Zu)이며, 다른 하나는 죽음으로 가는 존재(Sein-Zum-Tode)이다. 여기서 저자 왓슨은 하이데거의 존재를 현실적 존재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어딘지는 모르지만 어디로 가야하는 ‘향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저자 왓슨은 추상세계를 거부한 하이데거에서도 종교적 향함의 태도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다른 말이지만 왓슨은 하이데거의 인간적 태도에 대하여는 아주 부정적이다. 하이데거의 문체가 조악하여 읽기 어려운 것은 둘째치더라도 하이데거가 나치에 부역한 사실과 나중에 후설과 아렌트에 대해 비열한 처신을 한 사실을 저자 왓슨은 잘 꼬집어 내었다.

 

, 원형에 숨겨진 종교 감정 : 집단의식 형태의 무의식에는 인간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내재된 패턴이 있으며, 그런 패턴을 융은 ‘원형’이라고 했다. 원형을 이해하는 몇몇 개념을 나열한다. 인간에 씌여져 착각과 허상을 일으키는 페르소나가 있다. 남성성은 남성의 것, 여성성은 여성의 것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남성성과 여성성은 혼재되어 있다고 한다. 남성에게도 여성성이 있으며 여성에게도 남성성이 있다는 것이 융의 중요한 인간이해방식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 안에 가능한 여성성을 아니마라고 하며 여성 안에 가능한 남성성을 아니무스라고 한다. 요즘 통속심리학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외향성과 내향성이 구분도 융이 설정해 놓은 것이다. 그림자 개념은 인간의 이면을 관찰하는 중요한 통로이다. 여기서 왓슨은 융의 자아 개념을 강조한다. 융이 말하는 자아 개념 자체가 바로 신을 믿으려는 존재라고 왓슨은 해석한다. 융은 종교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 종교 자체를 부정하지만 사람의 종교 감정을 이해하는 일이 신경심리학적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왓슨이 보기에 융이 말하는 종교 감정을 거부할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라고 강조하는 듯한데, 저자 왓슨도 이 부분에서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애매한 태도로 기술하였다.

 

듀이, 종교와 종교적 : 실증주의자로서 듀이는 실증 범주를 벗어난 초자연적인 것을 부정한다. 당연한 일이다. 초자연주의를 인식의 방해물로 규정하는 것이 듀이의 기본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이 책의 저자 왓슨은 듀이의 종교이해를 새롭게 관찰한다. 듀이는 초자연적 계시종교를 거부한 것이지 사람 마음 속에 있는 종교적 성향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듀이가 보기에 종교는 하늘의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문제를 풀어야한 한다고 한다. 종교는 사람들 사이의 공통된 문제에 직접 닿아 있어야 한다. 또한 그런 일이 가능하다. 사람 마음속에 더 잘 살기 위해 경험에 내재한 힘과 가치를 보여주는 시적인 상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적인 상징의 힘이 바로 종교라고 왓슨은 말한다. 결국 왓슨이 보기에 실증주이자 듀이조차도 종교를 버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빅터 프랑클의 높이심리학 : 빅터 플랑클의 강제수용소 일기는 우리 내면의 반성과 성찰을 가져다 준 생명의 고전이다. 독일 점령 아래 3년간 감금된 경험을 전쟁이 끝나자마자 고향인 빈으로 돌아와 9일 만에 집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프랑클은 고통의 참상에서 인간의 원형을 보았다. 고통 안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와 고귀함을 발견하였다. 그가 말하는 자유란 삶의 의미이며, 그 의미란 자기 개인에서 벗어나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이며, 그 통로에서 자신의 존재를 재발견할 수 있었다. 자기존재의 발견이 곧 자기실현이다. 자기실현은 자기 초월이다 자기 초월의 심리학을 높이심리학이라고 표현한다. 융의 깊이심리학에 대비하여 표현한 말이라고 한다. 그 ‘높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영성을 찾아가는 내면의 에너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다시 말해서 빅터프랑클의 심리학은 단순한 행동주의나 유물론적 심리학이 아니라 영성의 심리학임을 저자 왓슨은 간접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초월성에 대한 내재적 충동 : 하바마스는 종교의 기원을 결여된 것에 대한 의식이라고 말했다.(Habamas 2008,”Ein Bewusstsein von dem, was fehlt”) 언어분석철학으로 시작한 현대 영미철학자 네이글은 스스로 무신론자이지만 초월적인 것에 대한 충동성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말했다. 네이글에게서 생명은 이중적이다. 생명은 물질적 현상이면서도 목적론적 실체라는 것이다. 왓슨은 네이글의 이러한 이중적 태도를 매우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왓슨은 네이글의 이중성을 지나치게 호의적으로 혹은 편향적으로 해석했다. 분석철학자 네이글이 젊었을 때는 전형적인 유물론자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변했듯이 네이글도 나이들어서 신비주의자로 된 전형적인 사례이다.

네이글은 무신론을 유지하지만 세계 안의 목적을 인정한다. 네이글은 그런 종교적 성향의 목적론을 ‘자연목적론’이라고 했다. 저자 왓슨은 네이글을 통해서 종교와 무신론의 구분에서 벗어나 공존가능의 논리를 세우려 했다. 그의 태도는 무신론과 종교의 공존보다는 애매한 상태의 병립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는 노년에 들어서 진화론을 부정하면서도도 기독교 창조론의 새로운 버전인 <지적설계론>과도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네이글의 <마음과 우주>(Mind and Cosmos, 2012)라는 책이 지적설계론을 지지하는 디스커버리 연구소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서평자가 보기에 노년의 네이글은 무신론의 주장을 포기한 것이다. 어쨌든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엇에 대한 공포와 동경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은 진화론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아니면 인류학적으로도 사실인 듯하다.

 

논리와 시 : 저자 왓슨은 시의 성찰적 기능을 크게 강조한다. 시는 일종의 세속적 계시에 해당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윤리학자 리처드로티는 유명하다. 그는 불행히도 노년에 췌장암에 결렸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전공분야에서 약간 벗어난 논문 “실용주의와 낭만주의”를 썼다. 그 글에서 로티는 셀리의 시를 언급하며 <시의 옹호>Defence of Poetry를 다루었다. 로티가 한 말이다. “종교도 아니고 철학도 아닌 시이다.” 그는 말년에 들어서 논리에서 시로 전환했다. 왜 나이가 들면 논리를 싫어할까? 이 책은 그런 전환을 찬사했지만 최소한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피터 왓슨, 무신론자의 시대, 책과함께 2016년 5월 출간 : 원제 Peter Watson, The Age of Nothing, 2014

피터 왓슨, 무신론자의 시대, 책과함께 2016년 5월 출간 : 원제 Peter Watson, The Age of Nothing, 2014

민주주의적 주체는 어디로? [평이의 궁시렁]

온 나라가 최순실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인물로 들썩이고 있다. 최순실이 연극 대본처럼 써준 연설문을 열심히 따라 낭독하던 우리의 최고 권력자 박근혜 대통령도 단순한 지지율 추락이 아니라 탄핵과 하야를 외치는 민중들의 성난 분노에 직면해 있다.

대통령을 한때는 그리도 열심히 보필하던 새누리당과 조중동 언론마저 이제는 그녀(?)에게 등을 돌린 듯 싶다. 아마 삼성을 중심으로 한 경제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단순한 레임덕 상황이 아니라 어쩌면 지금의 상황은 새로운 권력의 쟁취를 두고 이합집산하며 새판짜기에 골몰하는 모양새다.

지금은 아마  ‘공위시대interregnum'(주1)가 다가오고 있는 시기일 것이다.  그람시가 지적한 대로 “위기란 바로 낡은 것은 죽어 가는데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바로 이러한 공위시대에는 매우 다양한 병적인 징후들이 출현한다.”(주2)  그렇기에 이런 시대의 방향성은 함부로 예견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지점은 기존의 체제를 어떻게든 유지하려는 세력과 새로운 체제를 원하는 세력 간의 투쟁이 , 다시 말해 계급투쟁이 전면화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패닉상태이고 앞으로 우리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지 매우 불안하다고들 말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때 대통령을 그리도 열심히 원하고 보필했던 사람들과 언론들, 심지어 새로운 정권 창출에 몰두해 온 야당을 중심으로 이런 불안의 심리가 전시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대체 뭐가 불안한 것일까? 그 불안에 대한 심리는 어쩌면 계급투쟁이 진행되고 사회가 혼란 속에 들어갈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예견에 대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급투쟁의 두 전선 사이에는 명백한 간극이 존재한다. 체제가 뒤흔들려 기존의 안정성이 사라질까봐 두려워하는 진영이 있다면, 이와달리 이 공위시대가 새로운 체제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기존 체제의 새판짜기로 전락할까봐 걱정하는 진영이 있을 것이다.

알랭 바디우가 말한, 민주주의적인 주체의 시대!

우리는 이제 대통령에 대해서도 진정 평등하게 욕을하고 우리의 원하는 목소리를 그 어디에서든 내뱉게된 상황을 목도한다. ‘누구나 말할 수 있다’는 그 언어적 소통 가능성이, 그럼에도 어떻게 그 힘을 발휘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 분노의 목소리들은 기존 체체가 내뱉는 스펙타클적인 언어적 소통을 통해 오히려 기존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새판짜기 전략에 포획될지도 모른다. 또 반대로 그 분노의 목소리들이 동일한 스펙타클적인 언어적 소통을 통해 오히려 기존체제를 부수고 새로운 체제를 탄생시키는 길을 열어놓을지도 모른다.

과연 지금 2016년 10월의, 우리 민주주의적 주체들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까?

나는 불안하다. 또 다시 기존체제 권력의 새판짜기 전략으로 이 공위시대가 마무리될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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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공위시대란 보통 국가나 조직 등에서 신임 지도자가 취임하기 전, 최고 지도자가 부재하는 기간을 뜻한다. 물론 역사상 신성 로마 황제의 추대가 제대로 행해지지 않았던 1254(또는 1256년)~1273년까지의 기간을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 Interregnum)라고 규정하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냥 일반적으로 과거 국왕의 부재하던 기간이나 급격한 정치적 변혁 시기에 최고 지도자나 최고 권력이 비어있는 기간을 의미한다.

주2) In Quaderni del carcere; here quoted after Antonio Gramsci, Selections from the Prison Notebooks, ed. and trans. Quintin Hoare and Geoffrey Nowell-Smith (Lawrence and Wishart, 1971), p. 276. : 지그문트 바우만,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동녘, 2012. 254쪽 재인용.

[웹진 및 투고 안내] 한철연 회원님들과 독자님들께

안녕하세요.. (e)시대와 철학의 편집주간입니다.

그동안 웹진을 새로 리뉴얼하면서 나름 하루 평균 방문자 600여명, 한달 평균 조회수 2만여건 등, 아직은 그저 구멍가게 수준이지만 그래도 여러 필자분들과 편집위원님들 덕분에 우리 웹진이 꾸준히 나아지고 있습니다.

특히 블로그진 코너에 후원금도 내주시고 글도 써주시는 훌륭한 필진 덕분에 점점 더 반응이 좋아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20대 30대 젊은 후학들과의 소통을 위해 외부필진의 글도 받으면서 외연이 더 넓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아직 우리 한철연 회원님들의 소중한 원고를 기획하고 발굴해 내지 못하고 있고, 웹진에서의 회원들 간의 소통도 좀 저조하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웹진을 꾸려가는 일꾼들의 부족입니다.ㅠㅠ

그럼에도 희망을 갖고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보겠습니다. 회원님들과 독자분들의 관심과 독려, 때로는 호된 비판도 부탁드립니다.

직접 연락드리며 원고를 청탁하는 노력을 좀 더 기울여야겠지만.. 그럼에도 자발적으로 참여해 주실 분들을 위해 원고 투고에 대해서도 안내드립니다.


1. 블로그진 코너 : 한철연 회원님들 중에서 자발적으로 월 1만원의 후원금을 납부하시면서, 직접 웹진에 글을 써서 업로드 해주시는 코너입니다. 필자분들이 원하시는 코너를 개설하셔서 이후에 책으로 출판하시거나 다른 곳에 재게재 하셔도 좋습니다. 아울러 저작권과 원고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관심있는 회원님들은 언제든 아래 이메일 주소로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 [피켓2030]이라는 코너는 특별히 20대, 30대 젊은이들이 우리 시대에 꼭 외치고 싶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코너입니다. 회원님들뿐 아니라 독자분들, 주변의 지인분들 그 어느 분이든 원고를 투고하실 수 있습니다. 나머지 코너와 마찬가지로 약소하지만 3만원의 원고료를 지급합니다. 대략 A4 2장 이내의 분량으로 역시 아래 이메일 주소로 원고를 보내주시면 검토 후 바로 게재됩니다. 많은 관심과 지원 부탁드립니다.

 

3. 이하 종료기사를 제외한 나머지 코너는 계속해서 원고를 받고 있습니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주시는 [톡,톡,씨네톡], [시대와 철학], [침몰하는 대학] 등 흥미로운 코너가 많으니 살펴보시고 언제든 역시 아래 이메일 주소로 원고를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고 투고 이메일 주소 : esicheol@daum.net

아래로 연락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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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개 [내게는 이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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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래전 어딘가에 써놓았다가 처박아 둔 것이다. 세월의 변화를 감안하여 조금 손보았다. 재활용은 좋은 것이다.

 

하루 24시간 동안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말을 입에 올리고 있을까?

말 많은 인간을 내지 않는 집안의 자손인 나는 일상생활에서 되도록이면 입을 많이 놀리지 않고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다. -그런데…공교롭게도 나는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전공했다-

 

그러다보니 나를 처음 만난 사람들은 대화에서 무척 고전한다. 최소한의 대답만 하는 나를 아주 거만하거나 버릇없는 인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건 터무니없는 오해인데, 왜냐하면 그럴때의 나는 다만 낯을 심하게 가리는 중이거나, 상대방과의 화제를 찾기 위해 머릿 속에서 이런저런 대화의 상황을 백여수 정도 까지 진행시키는 중이거나, 아주 가끔 정말 상대방을 상종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새는 세번째의 경우가 증가세다.-

그래서 친구가 점점 적어진다.

있어도 멀어지는 중이다.

그 결과 말 수는 더 적어지고, 운동부족이 된 내 혀는 점점 뚱뚱해지고 있다.

한번은 내가 하루동안 무슨 말을 했는가 적어본 적도 있었는데,  그게 고작 “밥 줘”, “얼마여요?”, “응”, “아니”, “끊어” 뿐이었다.

 

혹자는 가족과 대화는 안 하는가고 짐짓 의아하게 생각할 테지만, 나에게는 가족이 없다.

가 아니고, 내가 밤 늦게 집에 가면 나의 모친께서는 붓글씨 쓰기에 여념이 없으신고로 나는 할 수 없이 가만히 모친의 곁에 앉아 불을 끄고 떡을 썰 운명밖에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떡을 잘 못 썰면 다시 도서관으로 쫓겨가야 한다. 참고로 난 한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오늘은 <타임>지에 ‘영향력있는 100인’으로 선정된 황우석 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앵무개를 만들어 달라고 얘기해봤다.

나의 불행한 사정을 조용히 오랫동안 귀 기울여 주시던 황교수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전 황수관입니다.”

 

앵무개란 앵무새와 개의 교접종으로 나의 심각한 ‘대화결핍에 의한 공황 장애 및 과대망상을 동반한 조울증후군’을 치료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만들기 어려운 유전자 변형 생물이다.

처음에 나는 나의 심각한 ‘대화결핍에 의한 공황 장애 및 과대망상을 동반한 조울증후군’을 치료하는 데에는 애완동물이 제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되도록이면 말하는 동물이라면 더 좋을 것이다. 현재 애완도 가능하며 말까지 할 수 있는 생물이라면 대표적으로 앵무새가 존재하는데, 불행하게도 나는 새라는 새는 모두 무서워하는 ‘조류 공포증’을 지니고 있으므로 앵무새는 결코 훌륭한 대안이 될 수 없다.

더군다나 앵무새는 무척 크며 발톱도 무지막지하게 굵고 부리는 거대하며 덩치도 꽤 나간다. 섣불리 앵무새를 키웠다가는, 분명 어느 천둥번개 치는 밤 앵무새는 커다란 발톱과 무지막지하게 날카로운 부리로 허술한 새장을 찢어발기고는, 더할 나위없이 연약한 모습으로 잠든 나를 습격하고 말테고, 다음날 난 하의가 벗겨진  변사체로 발견될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왜 하의가 벗겨져 있는지는 끝내 미스터리로 남겨지기를 바랄 뿐이다-

 

뿐만 아니라 앵무새를 키우기 위해서는 키다리 존 실버나 플린트 선장 혹은 갈고리 후크 같은 이들의 직군에 있거나, 그것에 걸맞는 몸집과 정신세계를 지녀야 하는데, 보시다시피 나는 그런 직업 세계인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영위하는 것에 무척 만족하는데다가,  뱃멀미에도 약하고, 카리브해는 커녕 캐리비안 베이에 가 본적도 없으니-생각해 보니 한 번 가봤는데,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과의 추억이 생각나서 가보지 않은 곳으로 선포한다- 앵무새를 애완하기 위한 조건은 아무래도 만족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남은 대안은 유전자 변형을 거친 동물의 개발인데, 앵무새와 개를 조합한 앵무개는 분명 말도 할 줄 알테고 재롱까지 솔찮이 부릴 테니 나의 긴 이름의 증후군을 치유하기에는 무척이나 적합한 대안이라 하겠다.

 

더군다나 앵무개만 데리고 다니면 나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될 것이며, 영화와 CF와 앨범 판매와 게임으로 온갖 돈을 움켜쥐게 될 것이고, 앵무개가 수명을 다한다고 해도 미리 들어놓은 보험은 죽음에 의한 손해를 해소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희한한 동물에 의한 성공은 미국의 콜로라도주에 실재했던 머리 없는 닭 마이크에서 이미 증명되었으니 앵무개의 개발은 분명 대박이다. 그러니 난 생계를 위해 공부를 안 해도 된다.

 

하지만…

앵무개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바티칸의 아르헨티나인 교황을 제거해야 하고,

황수관 박사의 방해를 따돌리고 황우석교수에게 소대신 개와 앵무새를 연구하도록 설득해야 하며, 그렇잖아도 희귀한 앵무새를 잡으러 돌아다녀야 한다. 물론 앵무새 보호 단체와의 전쟁은 필수다.

 

특히 마지막 조건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도네시아와 뉴기니아 등지의 지방 군벌들과 친분을 쌓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마약사업에도 관여해야 하고, 그러다보면 홍콩과 상해의 삼합회와 충돌을 일으킬 것이며, 중국에서의 조직간의 충돌은 어느덧 나비 날개에 실려 미국 해안가에서 허리케인을 일으킬 것이고, 미국 전역은 재해로 인해 온갖 난동과 범죄에 휩싸일 것이고, 이를 본 미대통령은 ‘기왕지사 또 전쟁하자’며 ‘불량국가들’과의 전쟁을 선포할 것이다.

 

이런 고난을 뚫고 사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설적인 킬러 카를로스와 검은 9월단과 붉은 여단과 알카에다와 블랙팬더단과 벵갈의 호랑이단, BF단, 스펙터, 닥터이블, 아수라백작, 파란해골 13호, 친구, 양은이파 등등의 비동맹세력과 광범위하고도 집중적인 연대가 필요할 텐데…

 

문제는 이 많은 사업을 하려면 수 많은 사람들과 오만가지 언어로 수 많은 논의를 거쳐야 하므로-또 한번 강조하지만 나는 말 없는 의사소통행위이론가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채식주의자 조스가 있다-, 나의 일명 ‘대화결핍에 의한 공황 장애 및 과대망상을 동반한 조울증후군’은 앵무개를 만들기도 전에 자연 치유될 것이며,

 

일단 치료가 된 마당이니 이제는 앵무개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위의 무지막지한 집단들에게 알리면, 나는 세상에 태어난 것을 오백만번쯤 후회하게 되는 신세가 될 것이고, 흥분한 황수우석 교수팀은 앵무개를 만들다가 우연히 발견한 좀비 바이러스를 퍼뜨려 워킹데드의 세상으로 만들 것이고, 기타등등 기타등등…

쳇, 앵무개 하나 만들기 되게 힘들군.

 

 

 

낚시[퍼농유]

우쑵니다.

서양의 많은 현자들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도 그러했고 아테네의 등에를 자처하며 사람들을 일깨우고자 했던 소크라테스가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공자는 처형당하기는커녕 천수를 누렸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을 엘렝코스(elenchos)로 규정했더군요. 논박술입니다. 나중에 플라톤이 변증술이라고 불렀던 원조라고 할 수 있죠. 루이-앙드레 도리옹(Louis-Andr Dorion)이라는 사람이 쓴 소크라테스>라는 책에 따르면 엘렝코스는 질문하고 대답하는 대화를 통해 논증을 전개하는 과정입니다. 답변자가 어떤 주제에 관해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음을 질문자가 드러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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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옹은 독특한 설명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엘렝코스의 논리적 요소에만 관심을 가졌지 정작 그 목적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합니다. 엘렝코스의 논리적 방법은 도덕적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엘렝코스의 목적은 상대의 논제를 논파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화자를 더 훌륭하게 만드는 데에 있습니다. 상대의 영혼을 정화시키려는 것이죠. 영혼의 정화는 행복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논리가 아니죠.
소크라테스는 상대가 참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거짓으로 드러날 때 그 영혼이 겪게 될 충격과 수치심을 강조합니다. 수치심을 느꼈다는 것은 철학을 시작할 수 있는 징후이기 때문입니다.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허위의식이 깨졌음을 의미하므로 이제 함께 철학적 탐구에 들어설 조건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논박을 당할 때 느끼는 수치심을 소크라테스는 ‘유익한 수치심’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엘렝코스는 일종의 교육적 장치로서 도덕 교육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논리적 논박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치심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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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이 엘렝코스가 주술(呪術)로 비유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엘렝코스는 합리적인 논변의 양식인데 어째서 마법의 주문인 주술에 비유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효과적인 측면에서 그렇다고 합니다. 대화자들을 마비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죠. 홀리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소크라테스에게 논박당한 이들 가운데 그의 이런 좋은 뜻을 이해하고 고마워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저는 ‘유익한 수치심’을 다른 측면에서 보고 싶더군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하는 논리적 궁지는 ‘유익한 수치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개쪽’입니다. 쪽팔림입니다. 현자라고 알려진 사람들은 더욱더 그렇겠죠.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 말입니다.
물론 유익한 수치심에 의한 도덕적 자각을 이룬 사람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실제로 논박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고마움을 표하기는커녕 소크라테스에게 적의를 드러냈다고 합니다. 도리옹의 말이죠. 특히 소크라테스를 모방했던 젊은이들에게 논박당한 사람들은 오히려 소크라테스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법정에 고발당한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무력하게 논박당하면서 모순덩어리인 자신이 발가벗겨지듯이 드러나는 순간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낀 이들이 소크라테스에게 분노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요.
소크라테스가 의도했듯이 수치심을 통해 영혼의 정화가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분노와 복수심을 불러일으킨다면 논박술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당하는 마지막 법정에서 죽어 지옥에 가서라도 엘렝코스를 멈추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좋은 의도가 현실에서는 최악의 결과를 산출하는 이 모순을 어찌 설명할까요.
공자는 어떠했을까요. 공자도 많은 제후들과 군주들에게 도덕적 깨달음을 위한 유세를 하러 다닌 사람이 아니던가요. 유세가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트이듯이 공자도 유세가였습니다. 유세가였던 공자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장자 「어부(漁父)」 편에 나온 평가는 그렇게 긍정적이지 못합니다.
「어부」에서 공자가 제자들과 산책할 때 어부를 만납니다. 근데 왜 공자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필 어부를 만났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부는 강가에서 물고기를 낚지만 지식인과 신하들은 현실 정치에서 군주의 마음을 낚습니다. 사실 어부는 군주의 마음을 낚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유세가이죠. 어부는 낚시의 최고 고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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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대(明代) 화가 오위(吳偉)의 독조한강설

아무튼 어부는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제자 자공은 충신(忠信)과 인의(仁義)를 실행하고 예악(禮樂)을 닦고 인륜(人倫)을 정하며 위로는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교화하여 천하를 이롭게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대한 어부의 질문이 독특합니다. 공자가 땅을 가진 군주냐 아니면 왕을 보좌하는 신하인가를 묻습니다. 물론 그 어느 것도 아니죠. 공자는 신하도 아니고 군주도 아니었습니다. 지위가 없는 사람이 지위에 걸맞지 않는 참견을 하는 사람입니다.
어부의 충고가 재미있습니다. 공자는 인한 사람이긴 하지만 화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어부는 충고합니다. 좋은 뜻을 가진 사람이지만 결과적으로 재앙을 면치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공자가 이를 듣고 쫓아가 가르침을 청합니다. 어부는 사람들이 흔히 범하게 되는 8가지의 잘못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어부가 말하는 잘못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상대의 속셈을 고려하면서 말하는 ‘아첨’,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않고 말하는 ‘아부’, 다른 사람의 단점만 말하기를 좋아하는 ‘험담’, 친구사이를 배제하고 친한 사람을 갈라놓는 ‘이간질’, 교활한 속셈과 거짓으로 칭찬하면서 이를 통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망치는 ‘사악함’, 선악을 가리지 않고 양측 모두 좋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자신의 이득을 취하는 ‘음험함’ 등 입니다. 공통적으로 모두 말하는 방식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권력자에게 간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당시 말이란 정치적 맥락을 가집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가 공자에 해당합니다.

자신의 일도 아닌데 간여하려는 것을 ‘참견’이라고 하고,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구태여 말하려는 것을 ‘잘난 체’라고 한다.(非其事而事之, 謂之摠, 莫之顧而進之, 謂之佞.)

이 말은 공자가 군주냐 신하냐라고 물었던 어부의 질문과 관련된 대답입니다. 공자에게 군주도 신하도 아니면서 직분에 어긋난 일로 잘난 체하며 참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말재주를 부리고 다니면 화를 당한다는 것이죠. 주목해야할 점은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개입하는 방식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합니다.
어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정치에 개입을 했는데 왜 사람들은 나에게 원한을 가지느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때 어부가 말하는 것이 자신의 그림자가 두렵고 발자국이 싫어서 그것으로부터 떨어지려고 달아난 사람에 대한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자신의 그림자와 발자국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쉬지 않고 달리다가 죽었다는 이야깁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재미난 상징적 이야기이지만 전 처음에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빛이 있다면 그림자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등불을 가지고 타인의 허물을 지적한다는 것은 타인의 그림자를 만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등불의 빛을 가지고 타인을 평가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기게 마련이고 땅을 밟으면 발자국의 흔적이 남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진리의 빛을 독단적으로 비추면 그림자가 생기고 무분별하게 개입하게 되면 상대에게 원한의 흔적이 남습니다. 예기(禮記) 「곡례(曲禮)」 하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하된 자의 예는 군주의 추악함을 드러내면서 간언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 번 간하였는데도 듣지 않는다면 직위를 버리고 떠난다.(爲人臣之禮, 不顯諫, 三諫而不聽, 則逃之.)

여기서 ‘추악함을 드러내면서 간언하지 않는다.’라고 번역한 말의 원문은 ‘불현간’(不顯諫)입니다. 군주의 과실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간언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당나라 때의 유학자인 공영달(孔潁達)은 ‘군주의 추악함을 분명하게 말하여 군주의 아름다움을 빼앗지 않는다.’고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잘났건 못났건 군주는 군주로서의 지위에 맞게 대우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군주라는 명예를 흠집 내고 역린을 건드려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면서 간언하지 말고 예의를 갖추면서 옳고 그름을 설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조건 군주의 비위를 맞추며 아부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해해서는 안 되겠죠. 설득과 아부는 다릅니다.
때문에 상대의 심리적 상태가 어떠한지 현실적 조건이 어떠한지에 대한 정보를 알지 못하고서 먼저 모든 것을 솔직하게 날 것으로 드러내면서 자신의 옳음을 말하는 것은 정직의 미덕이 아니라 일을 망칠 수도 있는 조급함의 악덕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지나친 확신이 있을 때 앞도 뒤도 좌우도 돌아보지 않고서 직설적으로 내뱉게 되는 것이 인간의 심리 아닐까요. 그러나 자신이 옳다는 확신을 가지고 상대의 부정을 공격한다면 상대는 자신의 부정을 인정하기보다는 저항하고 회피하기 쉽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부정한 사람으로 규정하려 하는 상대를 죽이려 하겠죠. 자신이 부정하다는 증거가 되니까요. 증거를 없애고서 피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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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유세란 그 당시에 어려웠던 일었습니다. 말이란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의사소통의 문제죠. 의사소통이란 하버마스처럼 이상적인 상태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성적인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이상적인 대화가 의사소통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의사소통을 해야 합니다. 이성적인 인간들과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이상적인 현실을 말합니다. 인간은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복잡한 것이 인간입니다.
논어를 읽다보면 공자의 이런 모습이 엿보입니다. 유비(孺悲)라는 사람이 공자를 만나려고 했습니다. 유비라는 사람을 공자는 매우 싫어했던 듯합니다. 공자는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죠. 그 명을 전달하는 사람이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공자는 거문고를 꺼내 노래해서 유비가 일부러 듣게 했다고 합니다.
왜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고 일부러 노래를 듣게 했을까요. 만나고 싶지 않다는 공자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유비는 만나고 싶지 않은 혐오스런 인간일 수 있습니다. 이성적인 대화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만나서 난 너가 싫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권력자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비에게 직접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을 전달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병을 핑계로 만날 수 없다고 해 놓고 얼핏 보면 야비하게 거문고를 꺼내 노래함으로써 나는 아파서 너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는 암시를 주려고 했을까요.
정말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예의의 격식을 차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의를 차린답시고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도가 전달되지 않는다면 유비에게 어떤 깨우침을 주지 못하고 공자에게도 감정적인 앙금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서 만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전달해야 하는 모순적인 의사소통 방식이 더욱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상대는 상처를 받지 않으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좀 극적이죠.
물론 논어에서는 유비가 그것을 깨달았는지 어떤지 혹은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모순적인 의사소통 방식은 우리들의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이런 극적인 장면은 연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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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참 묘한 인간의 심리입니다.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감추어진 영역에서 통찰해내는 진실을 읽어냄으로써 오히려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됩니다. 이것은 상대의 조건을 이용하고 상대를 모르게 한다는 모순적인 의사소통 방식입니다. 폭력적이고 권력적인 방식이 아니라 다소 시적인 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진리를 직접적으로 깨닫게 하려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공자는 진리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계기를 줄려는 시적이면서도 모순적인 방식을 택했습니다.
뭐랄까요. 인간은 좀 모순적이고 복잡합니다. 진리도 말할 만한 사람에게 말해야지 통하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원한을 받을 수 있죠. 사람에게 자신의 의도를 통하게 하는 방식은 직설적인 방식 말고도 우회적인 방식이 다양합니다. 이 우회적인 방식이 단지 비겁하다고 폄하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춥습니다. 이제 가을입니다. 우쑤, 저는 가을이 왠지 기다려지는군요. 단지 쏘주 한잔 때문만은 아니지만 쏘주가 그리운 계절입니다.

[한철연] 10월 철학자의 서재 live 안내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선생님들과 독자님들께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1부입니다.

10월 월례 발표회를 공지합니다. 10월은 철학자의 서재 live로 진행합니다.

진행은 버틀러의 저서 『혐오 발언』을 가지고 유민석 선생님이 하십니다.

“혐오와 혐오 발언”은 일베, 메갈리안 등의 활동이 촉발시키고 쟁점화되며 최근 한국에서 중요한 화두가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주제인만큼 회원 선생님들과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 일시 : 10월 21일(금), 오후 6시

* 장소 : 한국철학사상 연구회

* 주제 : 버틀러의 『혐오 발언』 – “혐오 발언에 대한 대항은 가능한가”

* 진행 : 유민석 선생님(서울시립대)

 


<아래는 유민석 선생님이 보내주신 철학자의 서재 live 내용 개요입니다>

법학자들과 운동가들은 혐오 발언이 말하는 것 뿐 그것이 행하는 것에 근거하여 혐오 발언에 대한 금지를 종종 추구해왔다 (랭턴, 1993).
그들에 따르면 혐오 발언은 일종의 언어적인 따귀로, 표현의 자유의 보호를 받는 ‘그냥 말’이 아니며(매키넌),
수신자의 복부를 강타하고 종속적인 지위로 못박아 두거나(마츠다),
열등한 자로 서열을 매기고, 그들을 향한 차별을 정당화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발언 불가능하도록 침묵시킨다(랭턴).

그러나 말은 의도된 대로 항상 행위하지 못한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주디스 버틀러는 잠재적으로 고통을 주는 말을 심문하고 수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말에 대한 금지가 아니라 말에 대한 반복에 위치시키면서 (1997)
“아무도 상처를 반복하지 않고서는 상처를 극복할 수 없다”(p.102)고 주장했다. (Eichhorn 2001)

『격분하기 쉬운 말Excitable speech』에서 버틀러는 포르노와 인종차별적 혐오 발언은 어떤 형태의 법적 제재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몇몇 페미니스트들과 반인종주의 이론가들을 비판한다.
버틀러가 인용하는 이론가들―레이 랭턴, 캐서린 매키넌, 그리고 마리 J. 마츠다―는 모두 발화의 규제에 대한 “평등equality” 논증의 어떤 형태를 제공한다.
즉 만일 말이 억압된 집단 구성원을 종속시키고, 주변화하거나 피해를 준다면, 말은 규제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J. L. 오스틴의 언어 행위 이론을 사용하면서 그리고 말의 열린 본성을 강조하면서, 버틀러는 이러한 논증들을 거부한다.
궁극적으로 버틀러는 그 같은 규제는 그렇지 않았다면 혐오 발언을 “재의미화resignigying”하고 “재상연restaging”함을 통해
이러한 말에 대한 도전을 불러일으켰을 자들을 침묵시키도록 작동할 수 있기 때문에 혐오 발언에 대한 어떤 규제를 실행하는데 반대할 것을 조언한다. (Schwartzman 2002)

혐오 발언이란 무엇이며, 혐오 발화자는 누구일까?
혐오 발언에 대한 대항은 가능한가?
버틀러는 어째서 혐오 발언에 대한 발화수반행위론에 반대하며, 혐오 발언에 대한 국가 규제나 처벌을 반대하는가?
주디스 버틀러가 『혐오 발언 Excitable Speech』에서 개진한 발화효과행위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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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철학사상연구회 오시는 길 : 2호선 합정역 2번출구, 도보10여분, 태복빌딩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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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죽음 [퍼농유]

우쑵니다.

정치는 쑈라고 하지만 정치는 쇼이어야만 한다는 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쇼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지겨움을 넘어 역겨울 지경입니다. 애덜의 쇼에는 그래도 천진난만함이라도 있지 이건 뭐 비열함만이 가득합니다. 어찌 헤쳐나가야할지 신의 가호가 아니라 신뢰의 연대와 냉정한 지혜가 있기를 ……. 물리적으로 너무 바쁜 10월입니다. 간단한 글하나 올립니다. 꾸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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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어릴 적 고생을 몰랐다. 아버지 덕택이다. 아버지는 2016년 2월 15일 응급실에서 돌아가셨다. 한밤중에 응급실에서 깨어났을 때 아버지의 “뭣 하러 왔어”라는 무심한 한마디에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했지만 아버지의 눈빛을 제대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왜 그랬을까에 대한 답변은 알고 있는 듯 모르는 척하는 듯 말할 수 없지만 다시 새벽 병원 응급실에서 아버지는 이미 의식을 잃고 계셨다. 아버지는 이 자식의 작별 인사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너무 성급하게 떠나셨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던 그런 때가 있었다. 그때 우연치 않게 손에 들었던 책이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난 추상적인 죽음을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구체적인 사람들의 죽음, 죽은 사람들,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알고 싶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엘리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시대에 죽어가는 사람들 곁에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각별하다고 할 당혹감은 죽음과 죽어가는 사람이 사회생활로부터 최대한 배제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다른 이들로부터 철저히 격리한다는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사람들은 마땅히 할 말을 알지 못한다.”
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었을까. 아니 난 죽어가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말았어야 했다. 살아 있는 아버지께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했으며 살아 있는 아버지께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말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었다.
엘리아스는 죽음의 병상에서 무덤으로 너무도 완벽하게 처리되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독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죽어가는 사람들은 병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 그 어딘가에는 이 사회가 철저히 배제해버린 살아있으면서도 죽은 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은 은폐되고 삶은 전시되고 있다. 죽어가는 자들은 음침한 뒷골목으로 내몰리고 산 자들은 양양한 대로를 뻔뻔하게 거닐고 있다. 하여 자신은 이 양양한 대로를 뻔뻔하게 걸을 생각만을 하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어서 주무세요, 아침에 다시 올께요”라고, 나는 어쩌면 우리는 그런 무심한 말을 죽은 듯 살아있는 사람에게 해서는 안 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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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가는 배 [평이의 궁시렁]

떠나가는 배

정태춘

저기 떠나가는 배 거친 바다 외로이
겨울비에 젖은 돛에 가득 찬바람을 안고서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훗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가는배야 가는배야 그 곳이 어드메뇨
강남길로 해남길로 바람에 돛을 맡겨
물결너머로 어둠속으로 저기 멀리 떠나가는 배

너를 두고 간다는 아픈 다짐도 없이
남기고 가져 갈 것 없는 저 무욕의 땅을 찾아
가는 배야 가는 배야 언제 우리 다시 만날까
꾸밈없이 꾸밈없이 홀로 떠나 가는 배
바람소리 파도 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 올 뿐
바람소리 파도 소리 어둠에 젖어서 밀려 올 뿐

 


이렇게라도 무언가를 전하려는데.. 그 무서운 저작권이 어찌되는지 몰라 주저하는 저도 참 허접하네요.. 유투브 영상을 이리 공유하는 게 저작권에 문제가 된다면.. 언제든 내려야겠지요? 하지만 정태춘씨는 뭐라 하시지 않을 듯ㅠㅠ

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0

빈집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비우고 비운 곳에 있고
있지 않은 곳에 비어 있다.
있는 것은 비어 있고
채워진 것은 비어 있다.
비어 있는 곳에 채운다.
채울 수 있어 비울 수 있다.
비울 수 있어 채울 수 있다.

비우고 비운 그 곳에 그것이 있고
있지 않은 그 곳에 그것은 비어 있다.
있는 곳에 그것은 비어 있다.
채워진 곳에 그것은 비어 있다.
비어 있는 곳에 그것은 채운다.
채울 수 있어 비울 수 있다.
채울 수 있어 비운다.

2016-9-30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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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노트

살아가면서 나의 공간, 나의 정신에 많은 것을 채우고 살아갑니다.
비우는 것보다 채우는 것이 보다 더 익숙해지는 삶인 것 같습니다.
여백으로 채워진다는 것은 비어있지만 비어있음 그 자체가 채워져 있는 것,
그것은 삶의 여유가 되고 편안해지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은 많지만 그리 필요하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몸과 마음에 무언가를 채우면 많은 것에 얽매이게 되고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육체적 풍요로 이어지진 않는 것 같습니다.
비어있는 허무함을 때로는 견디기 어려워하고 허무 자체를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여기며 살아가기도 하고 비어있기보다 채워지기를 바라고 채우기를 갈망하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비어 있음, 때로는 허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은
삶의 여유와 풍요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단상들 2016.9.22

 

단상들

1. 70년대에 리영희가 있었다면 오늘날은 손석희가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손석희가 4차례 해고와 5차례 옥살이를 했던 리영희의 아우라를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오늘날 그의 앵커브리핑은 그 시절 리영희의 언론사 기고문을 접했을 젊은이들이 느꼈을 어떤 것을 우리 시대에 주는 게 아닌가 싶다. 그의 나즈막한 목소리는 단호한 고발과 함께, 우리 시대의 좌절한 청년들에게 보내는 위로의 메세지를 담고 있다.

2. 최경환이 외압을 해서 채용시킨 인물은 서류점수가 2299등이었는데, 최종 36등으로 채용되었다고 한다. 내게 이 외압 사실보다 더 놀라운 건, 36명을 뽑는 자리에 도대체 몇 명이 지원했길래 ‘2299등’이라는 수치가 가능한가 하는 것이었다. 한 명의 정규직 직원이 되기 위해 도대체 몇 명, 아니 몇천 명을 앞질러야 하는 것일까. 임원도 아니고 ‘노동자’가 되는 것조차 수천 명을 누르고 4차례 심사를 통과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냥 해.” 최경환이 했다는 말이다. 어쩌면 ‘노동자’의 삶을 알지 못하는 그에게는 고작 중소기업진흥청 말단 직원이라는 대단하지도 않은 자리에 지인을 꽂아넣는 것이 별 일이 아니라고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그들이 보기엔 ‘머슴’일 뿐인 그 자리에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몰렸다. 오늘날 그 수천 명의 흙수저들은 누가 대변할 수 있을까.

3. 제주도에서 일부 중국인들이 벌인 폭력, 살인사건에 대한 기사에 달린 베스트댓글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강정 해군기지를 반대한 제주도인들, 너희는 당해도 싸다. 너희는 할 말이 없다. 이 무논리의 극치이자 동시에 몹시 잔인한 논리에 대한 나의 분노를 가라앉히고, 이 논리가 왜 틀렸는지를 지적하는 댓글을 입력했다. 얼마 후 다시 들어가보니 나더러 ‘전교조냐? 뷰웅신’이라고 욕을 한 댓글이 다시 베스트에 올라 있었다. 웃음만 나왔다.

아마도 제주도인들이 당해도 싸다고 말한 사람도, 나에게 조롱섞인 욕설을 단 사람도, 최경환이 낙방시킨 수천 명의 지원자들과 같은 운명을 공유할 수많은 흙수저들. 그들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좌절된 욕구를 (아마도 일베같은 곳에서 배웠을) 공격적 발언을 통해 해소하며 사회가 그들에게 강요하는 무기력감과 분노, 좌절을 그나마 삭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댓글을 단 사람에게 분노할 힘마저 없었다. 이런 생각만 맴돌았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구나. 이게 우리의 현 주소구나. 우리는 여기서 출발해야 하는구나. 우리 시대의 또다른 자화상이다.

4. 최순실 게이트. 현 정권을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정권을 공격할 호재가 생겨서 내심 기쁠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그렇지 않다. 가히 건국 이래 최대 친인척 스캔들이라 할 수 있는, 그리고 호사가들이 한 두마디 술자리 안주거리로 떠들어댈, 2대에 걸친 희대의 4각관계(최태원, 정윤회, 최순실, 박근혜)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품고 야권이 이 일로 정쟁을 벌이는 사이, 세월호 특별법 연장도, 각종 민생법안들도 이 정쟁에 밀려 통과가 늦춰질 게 분명하다. 소위 ‘현실정치’의 논리, ‘우선순위’의 논리다. 틀린 말은 물론 아니다.

비판할 게 너무나 많아서(정말로 그렇다), 부패가 너무나 많아서(정말이지 너무나 많다) 그 많은 사안들을 가지고 정쟁을 하느라 아무런 구체적 ‘정책’도 통과시키지 못하는 무능한 국회. 언제까지 이 광경을 봐야할까. 언제쯤 한국 국회가 ‘친인척 비리 폭로’를 넘어서 ‘정치’를 논할 날이 올까.

정치의 부재다. 그리고 고통받는 자들은 ‘정치’라는 수단을 통해 자신의 처우가 개선되고 사회가 보다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못하는 사이 자신들의 생존방법을 익혀나간다. 타인에게 공격적 충동을 투사하기. 학번, 출신학교, (특목고뿐 아니라 이제는 심지어 영어유치원 출신인지까지), 거주지역 등의 미시적인 부분까지 위와 아래를 철저하게 따져서 권위 앞에 굴종하고 약한 자를 짓밟기. 고통당한 자들을 조롱하기. 그것이 세월호 유가족이든, 관광객에게 폭력을 당한 제주도민이든.

우리의 이 시대정신에 ‘역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정치를 ‘재건’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정치철학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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