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문화와 B급 철학 [피켓2030]

아래 글은 우리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최근 출판한 [B급 철학](알렙, 2016)을 읽고 대학교 2학년 학생이 보내온 서평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고, 다른 측면에서 이 책에 관한 서평을 쓰고 싶으신 분들도 언제든 대환영이니 원고를 보내주시면 검토해서 게재하고 약소하지만 소정의 원고료도 드립니다.


권유리(건국대 건축학과 2학년)

2014년 1000만 관객을 이끌어낸 <겨울왕국>. 이 애니메이션에 어른과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열광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겨울왕국의 주인공 ‘엘사’와 엘사의 테마곡 ‘Let it go’는 이미 아이들에게 영웅과 다름없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아이들의 이런 공감을 이끌어 냈는가? 이처럼 질문을 갖는 것이 바로 대중문화를 제대로 마주하게 되는 첫걸음이다. 밤늦게까지 학원을 다니는 학생들, 집안일과 회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들에게 주인공 ‘엘사’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부르는 ‘Let it go!’는 그들의 억압된 일상으로부터의 해방을 대신해준다. 많은 사람들은 ‘엘사’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엘사’라는 캐릭터는 [피로 사회](한병철 저)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안 되는 ‘규칙사회’에서 모든 것이 가능한 ‘성과사회’로 전환된 사회에서 느끼는 현대인들의 단절감, 우울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공감하며 때론 멀리 떨어진 입장에 서서 캐릭터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자신도 모르게 제시한다.

정해져 있는 결말과 흔한 스토리, 한회만 봐도 앞뒤 내용까지 이해할 수 있는 드라마 <상속자들>을 보자. 안방에 앉아 동생과 보고 있자면 현실과 동떨어진 드라마 속 상황에도 분개하며 “재는 왜 저래?”, “친아빠 맞아?” 라는 말을 주고받는 것은 흔한 모습이다. 이런 단순한 질문 속에서 우리는 공자의 ‘효 사상’과 연결고리를, 또 ‘부의 추구’에 대한 연결고리를 스스로 찾아 낼 수 있을까? 진지하게 스스로에게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대중매체를 접할 때 주체가 아닌 하나의 소비자가 될 뿐이다.

일본 만화 <진격의 거인>은 기괴한 스토리와 암울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수많은 독자들을 가지고 있다. 인간을 잡아먹는 거인과 이를 막기 위해 거대한 장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 정말 생존을 위해 살고 있는 만화 속 캐릭터들에게 정의와 선(善) 같은 인간의 기본적 권리는 무시될 수밖에 없다. 언제라도 잡아먹힐 수 있다는 공포에 떠는 인간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방법은 소수들에 의한 철저한 지배이다. 비현실적이고 잔인한 설정에도 많은 사람들이 전율을 느끼며 계속해서 이 애니메이션을 찾는 이유는 일본과 한국인 속에 잠재되어있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전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 단 한가지의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마치 황제군의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진격의 거인>은 사람들 속에 잠재되어있는 피해의식을 자극한다.

지금과는 다르게 오랜 시간동안 문화는 대부분이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 즉 부르주아 계층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현재는 기술, 미디어, 언론, 오락, 드라마, 영화 등의 발달로 문화는 훨씬 더 널리 보급되었고 일부 소수의 사람들을 위한 산유물이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아직도 클래식과 오페라, 전통음악은 고급문화로, 소위 말하는 대중문화는 깊이가 덜한 문화로 무의식중 인식된다. 친구와 함께 카페에서 칸트의 [순수 이성비판]과 쇼펜하우어, 헤겔을 찾는다면 지적인 대화이고, 어제 저녁에 보았던 드라마를가지고 이야기한다면 수준 낮은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문화에 A급과 B급으로 나눌만한 척도가 있는 것일까?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문화는 다름의 차이일 뿐 더 우월하고, 더 낮은 문화는 없다. 오히려 대중문화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시뮬라시옹’의 프레임으로 우리를 이끌어 다양한 공감과 동질감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만화와 게임, 영화, 애니메이션 같은 대중문화를 문화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수고가 따른다. 바로 ‘자기화’의 과정이다. 대중문화는 좁게는 자신을 넓게는 대중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 이 거울을 바로 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왜?”라는 질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중문화는 필자의 말처럼 햄버거 포장껍데기처럼 단순 소비될 수밖에 없다.

8997779680_1

자세한 책 안내는 위 그림 클릭!

시위, 짧은 수기 [피켓2030]

정승우 작가


종로3가역에서 내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나는 동대문운동장에서 5시반쯤 5호선으로 갈아탔다.
5호선은 시위에 참여하려는 사람으로 가득 찼다. 가족 단위도 많았다. 젊은 부부와 그들의 손을 잡고 있는 아이의 모습들이 여럿 보였다. 종로 3가역에 가까워질 쯤, 광화문역은 많은 인파로 복잡하니 종로3가역에서 미리 하차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곧, 종로3가역에 도착하여 문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내렸다. 많은 사람들 때문에 종로3가역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질서가 필요했다. 사람들은 암묵적 줄을 지어 차례차례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내 바로 앞에는 한 젊은 가족이 있었다. 여자는 아들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고, 남자는 큰 배낭용 가방에서 생수를 꺼내고 있었다. 역 밖으로 나왔을 때도, 그들은 내 앞에서 계속 걸어갔다. 남자의 걸음은 꽤나 빨랐고, 그의 아내와 아들은 뒤쳐졌다. 그러면 여자는 자신의 남편에게 같이 가자고 소리를 쳤고, 남자는 그제야 걸음을 늦췄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남자는 또 다시 홀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앞만 보고 계속 걸었다.

광화문 사거리로 가는 대로에 나왔을 때, 이는 꽤나 진풍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넓은 공간을 사람이 걸어가는 것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차들이 다니는 도로를 걷는다는 건 꽤나 짜릿했는데, 불현 듯 예전에 했던 생각이 났다. 대학 입학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매일 집 근처 공원에 산책을 갔었다. 공원으로 들어가는 도로는 2차선이었고, 나는 겁도 없이 중앙선 위를 걸었다. 물론, 다니는 차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행동이었다. 나는 그 2차선 위를 걷는 동안, 왜 차들한테 이 넓은 공간을 빼앗겨야 하는 건가 불만을 가지며, 언젠간 차가 하나도 없는 아주 넓은 도로 위를 걷고 싶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나는 넓은 도로를 걸었다.
차도를 걷는다는 건 생각해보면 일종의 싸움이다. 차도라는 말은 그 자체로 사회를 드러낸다. 규칙과 질서와 복종. 차도라는 것은 차들만이 다닐 수 있는 도로이고 그 위를 사람이 다녀서는 안 된다. 물론, 아무 이유 없이 그것을 막는 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편의와 안전을 위한 규칙이다. 어쨌든, 사회에서 만들어진 규칙과 질서는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 우리는 혼이 난다. 다시 말해, 벌이 뒤따른다. 규칙과 벌이 합쳐지며 복종이 있게 되고, 재미있게도 그 뒤에 탈주에 대한 갈망이 들어선다. 그 탈주는 마땅한 탈주일 수도 있고, 탈주 그 자체를 위한 탈주일 수도 있다. 그 어떤 것이든, 탈주는 짜릿하다. 고등학교 시절 수능을 준비하며 수많은 문제지를 풀었다. 어느 날은 그 문제지들을 앞에 두고 있는 내 모습이 문득 슬펐다. 나는 검정색 볼펜을 가지고 펼쳐져 있는 문제지의 한 쪽 페이지를 마구 그어댔다. 그 페이지는 마구잡이로 그어진 선들 때문에 알아볼 수가 없게 됐다. 그리고 나는 강렬한 쾌감을 느꼈다. 나는 탈주를 했던 것이다.
그 만큼의 기분은 느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위로 가는 그 차도 위의 나의 걸음은 은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들이 그 길 위를 걷고 있었고, 수많은 이들이 탈주하고 있었다. 그렇게 모여진 탈주는 이제 더 이상 탈주가 아니다. 그것은 다시 하나의 새로운 길이 됐다.

20161126_180331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대개 삼삼오오였다. 큰 깃발을 들고 무리를 지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소란스러움을 만들어냈고, 활기들이 컴컴한 도로 위에 가득했다. 혼자인 몇몇도 있었다. 그들은 조용했다.
사진을 찍는 모습들이 많이 보였다. 한 손에는 촛불을 들고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자신의 모습을 찍었다. 아주 웅장한 파티가 있고, 그 파티는 초대 받은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사람들은 그 파티에 초대 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초대권은 귀족들에게만 보내지고, 평민들은 그런 귀족들을 부러워한다. 아주 큰 파티가 있다. 그곳은 입장권을 필요로 하지 않고 모두에게 열려 있다. 하지만, 그 파티는 인간만이 참여할 수 있다. 그 파티에 참여한 이들은 스스로의 인간성에 자부심이 있다. 그리고 때론 그 자부심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법이다. 이 파티에는 초대권이나 입장권 같은 것이 없으니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찰칵. 사람들은 그 모습을 서로 칭찬해준다. 그 옆을 조용히 지나가는 뫼르소.
4.19혁명, 5.18민주화 운동, 6월 항쟁 등. 역사가 된 이 날들은 교과서에 남았다. 그리고 나는 3인칭의 시점으로 그것을 들여다본다. 피가 그려져 있고, 정의가 적혀 있다. 그 위에 내려앉은 숭고함을 본다. 그리고 역사로 불릴지 모르는 한 시위. 나는 그 시위의 현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종로3가역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날은 져있었다. 컴컴했고 그래서 촛불들은 더 빛나보였다. 많은 사람들의 손에 촛불이 들려있었다. 정의의 여신의 손에는 저울이 들려있고, 저항하는 이들의 손에는 촛불이 들려있다. 옳고 그름의 측량을 위해 저울이 필요하듯, 저항을 위해 촛불이 필요하다. 나는 지하철을 타기 전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광화문에 갈 때 촛불을 사서 가야하느냐고 물어봤다. 친구는 광화문에 가면 다 있다고만 말을 하고 끊었다. 촛불을 사가야 하는 거 아닌가했던 내 생각을 무색케 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팔고 있었다. 문득, 성경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그들을 쫓아선 안 된다. 사람들은 촛불을 필요로 하고, 때문에 촛불을 파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배고픈 누군가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 먹을 것을 팔아야 한다. 그 날 광화문 광장은 시위를 하는 곳이었다. 시위를 하는 데에는 필요로 하는 것이 많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그것들을 팔아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촛불을 팔고, 사람들은 촛불을 산다. 그 촛불이 사람의 손에 들리면 어느 순간 그것은 저항이 된다. 그렇다고 장사꾼들이 저항을 판 것은 아니다. 촛불이 한 사람에게 들리는 순간 바로 저항이 되는 것은 또 아니다. 저항이 되려면 어떤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아무튼, 장사꾼들은 촛불을 팔기 위해 그곳에 온다. 그리고 그곳은 예수의 말대로 한편의 강도의 굴혈이 된다. 강도의 굴혈이 단 한 명의 장사꾼의 등장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리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즉, 광경이 되어야 한다. 장사의 광경이 만들어질 때, 그 순간 강도의 굴혈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광경의 힘은 대단한 것인데, 촛불을 저항으로 만드는 것도 사실 이 광경이다.

20161126_183129


광화문 사거리에 도착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거리 가운데에 무대가 설치돼 있고, 그곳을 기점으로 사람들이 거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나는 틈을 비집고, 앉은 사람들의 무리로 들어갔다. 뒤에서는 서있는 사람들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니, 앉아 있는 사람들이 바로 눈앞에서 보였다. 광화문 사거리를 사람들이 가득 메우고 앉아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광경이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이 하나의 광경을 만든 것이다. 한 명 한 명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촛불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빛이 있었다. 한 곳에 모여진 수많은 빛은 하나의 빛으로만 보였다. 그리고 그 때, 저항이 드러났다.
광경이 된다는 것은 아주 신비로운 것이다. 부분들이 사라지고 전체만이 남는다. 마치 나무들이 모여 숲이 되듯이. 숲은 나무로 이루어져있지만, 숲이 보이면 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한 명 한 명이 모이고 한 개 한 개의 촛불들이 모여 그 광경을 만들었지만, 광경이 되는 순간 그 한 명과 그 한 개의 촛불은 사라진다. 언제, 무엇이 작은 것들을 하나로 묶어 광경으로 만드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광경에 대한 인식은 존재하고 인식된 광경은 독특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광경은 물리적 거대함과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 단 한 명에 의해 광경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대우주만큼이나 소우주도 존재한다. 다만, 한 명에 의해 광경이 만들어지는 것은 꽤나 힘들다. 그것은 낯설음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무수히 많은 ‘한 명’들을 만나고 그들을 ‘인간’이라는 하나의 시각으로만 바라본다. 그 시각의 변화가 그 한 명을 광경으로 인식하게 하거나 혹은 그 시각의 변화 자체가 광경이다. 나는 이 조그마한 광경을 찬양한다. 그것은 일상 그리고 매일의 변화이다. 큰 광경은 사람들이 그 광경이 벌어지는 장소를 벗어나버리는 순간 잊히기 십상이다. 아무튼 광경은 대단하고, 그 날의 광화문 사거리는 대단한 광경이었다.


나는 틈을 비집고 들어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거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니 보이는 것은 다시 나무였다. 삼삼오오 모인 나무다. 삼삼오오라는 것은 굉장히 애매하다. 이것은 통합도 아니고 개인도 아니다. 개인은 차라리 어딘가로 새로이 들어가기 쉽지만, 일부의 무리가 어딘가로 새로이 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다. 나는 이 집회가 통합이라기보다는 응집으로 보였다. 파편화들의 응집이다. 기 드보르는 스펙타클이 파편화된 개인을 그대로 뭉쳐버린다고 하지만, 스펙타클에 의한 것뿐만 아니라 집합이라는 것 자체가 본래적으로 통합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 아닐까? 본래, 마구잡이의 모습으로 뭉쳐지는 것이 아닌가? 하나로 보였던 그 빛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서 보니 삼삼오오의 빛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다른 삼삼오오의 빛이 있고, 서로서로는 너무나 남이다.

6시가 조금 지나고 광화문 사거리 가운데에 설치된 무대 위에서 누군가 사회를 봤고,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자유발언들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했다. 집회의 뚜렷한 목적이 있으니 그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나는 금방 따분해졌고, 들고 온 파이 한 조각을 입에 물었다.
조금 있으니 다시 사회자가 올라와 여러 설명을 했고 모금 활동이 벌어졌다. 앉은 무리들 사이사이로 모금함을 들고 여러 사람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지폐를 내밀었다. 내 옆에는 한 아주머니가 계셨는데, 그 아주머니도 팔을 뻗어 그 사람들에게 돈을 건네려고 했다. 그런데 아주머니의 손모양이 이상했다. 가만 보니 그 손은 돈을 가리고 있었다. 천 원짜리 한 장이었다. 나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아주머니는 아마 부끄러웠던 것 같다. 쓰레기를 주우시는 분도 사람들 틈 사이로 지나다니셨다. 큰 쓰레기봉투를 들고 사람들 사이사이를 걸어 다니며 사람들이 건네는 쓰레기를 그 안에다 담았다. 사람들은 그 분이 걸어 다닐 길을 알아서 만들어주었다. 이렇게 모두가 선량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는, 그 분이 지나가시다 실수로 잡고 있던 쓰레기봉투를 놓쳐 쓰레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아주 솔선수범하며 그 쓰레기들을 주어 다시 그 봉투에다 담았다. 나는 박수를 쳤다.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었다. 많은 농담들이 오갔고, 자유발언은 계속해서 진행됐다. 그곳에 피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대체 여기에 교과서에서 본 숭고함이 어디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피커에서는 자유발언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내 주위에는 단지 삼삼오오의 사람들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삶을 아름답게 봐야할 필요가 없듯이 정의 또한 숭고하게 바라볼 필요가 없는 것 같다. 교과서도 거짓말을 하기 마련이다. 나는 더 가운데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숭고함이 여기에 쭉 있었네.’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길가로 자리를 옮겼다. 사람들을 비집고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건물이 하나 보였다. 광화문 사거리에 붙어있는 그 건물은 우습게도 면세점이었다. 아니, 평소라면 우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만큼은 그 건물이 너무 우스웠다. 아니, 사람들이 우스운 건가? 집회가 우스운 건가? 사회가 우스운 건가? 소란스러운 그 광화문 사거리의 우리들과 그 옆에 우뚝 솟은 면세점이라니. 나는 그 건물이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놓아두며 여기 있는 우리도 어느 정도는 뻔뻔하다. 자유발언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면세점을 얘기하지는 않았다.
내 바로 앞에는 우연히도, 지하철역을 나올 때 내 앞에 있었던 바로 그 가족이 있었다. 아니, 남편은 없고 여자와 아이 그 둘이 있었다. 그는 어디로 간 것인가. 아마 정의를 외치기 위해 사거리 중심으로 뛰어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여자와 아이는 그를 놓쳤으리라. 나는 갑자기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탈주를 위해 온 그 곳을, 나는 다시 탈주하고 싶었다. 삼삼오오와 면세점 그리고 덩그러니 놓인 여자와 아이, 이 잡다(雜多)에 의해 나는 탈주하고 싶었다. 나는 뫼르소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찾을 수 없다. 뫼르소는 찾아내고, 기댈 인물이 아니다. 그는 오로지 내가 되어야 할 인물이다.

시간은 대략 8시정도였고, 사람들은 여전히 광화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반대로 걸었다. 우리는 더 나아질 것이다. 여러 번의 집회와 그 집회에 참여한 이들 그리고 그들을 지지해주는 참여하지 못했던 이들, 이 모든 것들이 변화가 이미 일어났음을 보였다.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서 나는 나의 집회를 열고 싶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나는 혹시 나의 집회에 참여할 동료들을 찾을 수 없을까 생각을 해보지만, 이것은 소설이 아니고 수기이기 때문에, 나는 어느 누구도 찾을 수 없었다.

20161119_204307

(발췌번역)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2 [내게는 이름이 없다]

영화가 반영하는 것은 뚜렷한 신조라기보다는 심리학적 성향들이다. 이러한 성향들은 의식의 아래 영역에서 확장된 집단의 심층적 심태를 이룬다. 물론 대중잡지, 방송, 베스트셀러, 광고, 유행어 그리고 사람들의 문화적 삶이 쌓이면서 생긴 여러 산물들 역시 널리 퍼져서 우세를 점한 태도와 내적 경향성들에 관한 가치 있는 정보를 낳는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는 포괄성에 있어서 이러한 원천들을 능가한다.

다양한 카메라 움직임, 편집 그리고 수많은 특수 장치 덕분에 영화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의 모든 모습을 세밀히 볼 수 있게, 따라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끔 만들었다. 이러한 노력은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잊을 수 없는 강의에서 ‘공간의 역동화’라고 규정했던 것을 만들어냈다. “영화관에서 …관객은 고정된 의자에 앉아있다. 그렇지만 물리적으로 …미학적으로, 그는 항상적 움직임 속에 있다. 관객의 눈이 끊임없이 거리와 방향을 바꾸는 카메라 렌즈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객이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그에게 제시되는 공간은 관객 자신만큼이나 움직일 수 있는 것이 된다. 딱딱하게 굳은 육체가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공간 그 자체도 움직이고, 변화하고, 회전하고, 겹쳐지고 재결정화된다(recrystalizing).”

이런 식으로 공간을 점령하면서, 픽션 영화와 사실 영화와 같은 것들은 영화가 거울처럼 반영한 세계의 수많은 구성요소들, 어마어마한 볼거리, 인간과 무생물에 대한 무심한 배열 그리고 야단스럽지 않은 현상의 끝없는 연쇄 등을 포착한다. 사실 영화는 야단스럽지 않고 평범해서 간과되는 것들에 특히 관심을 모으도록 함으로써 그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다른 모든 영화적 장치가 밟아 온 과정과 마찬가지로, 클로즈업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여 영화의 역사 내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영화감독을 할 때는 완벽한 디테일을 위해, 심지어는 얼굴 표정이 어떻게 변해야만 하는지를 묘사하기 위해, 때로는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서 밤낮으로 일하려고 했습니다.” 영화는 날 때부터 세세한 것들을 찾아내는 본래적 임무를 완수해야만 하는 듯하다. 삶의 내면은 다양한 요소들 속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삶의 다양한 요소들의 집적 속에서, 특히 영화대본의 본질적 부분을 이루는 거의 감지되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표면적 자료들 속에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 따라서 영화는 눈에 보이는 세계-그것이 실제 현실이든 상상의 세계든-를 기록함으로써 은폐된 정신적 과정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호레이스 M. 칼렌(Horace M. Kallen)은 무성영화 시기를 연구하면서 클로즈업이 지닌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는 기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손가락을 우발적으로 움직이는 등의 경미한 액션, 손을 꼭 쥐거나 편다거나, 손수건을 떨어뜨리고, 겉보기에는 무관한 사물을 가지고 연기하고, 무언가에 걸려 비틀대고, 넘어지고, 뭔가를 얻으려고 하거나 찾지 못하는 등과 같은 것들은 인간관계의 보이지 않던 동학을 보여주는 가시적 상형문자들이 되었다….” 영화를 이루고 있는 “가시적 상형문자들”은 이야기의 증언을 적절히 보완해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특히 포괄적이다. “인간관계의 보이지 않던 동학”은 이야기뿐만 아니라 가시적인 것들 에도 스며들었다. 그러자 그것은 영화가 등장한 이 나라의 내적 삶(inner life)을 보여주는 특성이 되었다.

대중의 욕망을 반영하는 이런 영화들이 특히 엄청난 흥행 성공을 이루어낸다는 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히트작이라는 것은 수많은 요구들 중 하나에만 영합하는 것이거나 심지어는 특정한 하나의 요구조차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바바라 더밍(Barbara Deming)은 미 의회 도서관의 영화를 선별해내는 방법에 관한 글에서 이 점을 면밀히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영화가 가장 대중적으로 인기있는 영화인지를 알아낼 수 있다하더라도, 그런 일은 아마도 일등부터 순위를 매겨 모으는 일에 불과하다는 점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이런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서로 동일한 꿈을 계속해서 모으는 일이나 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가장 인기있는 개별 영화들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수많은 싸구려이자 인기가 덜한 영화들에서나 계속적으로 나타나는 이와 다른 꿈들은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대중성의 문제에서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사항은 통계적으로 측정 가능한 영화의 대중성이라기보다는 영화가 지닌 회화적이고도 서사적인 모티프에 있어서의 대중성이다. 이러한 모티프들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은 내적 충동을 외적으로 투사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모티프들은 대중적인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모두에서 그리고 초대작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B급 영화에서도 발생할 경우 확실히 징후적 중요성을 담지하게 된다. 이점에서 독일 영화의 역사는 모든 수준에서 모티프들이 도처에 배어든 역사이다.

어떤 국가의 특수한 심태에 대해 이야기 한다고 해서 고정된 민족성이라는 개념을 암시한다고 말할 수는 결코 없다. 여기서는 한 국가의 특정 국면에 만연한 집단적 성향 혹은 경향들에만 관심을 둔다. 1차 대전 직후 독일을 휩쓴 공포와 희망은 무엇인가? 이런 종류의 물음은 그것의 범위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합당하다. 말하자면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그 시절 영화에 대한 적절한 분석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이른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파악된다고 하는 어떤 민족성을 건립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이 책은 다만 특정 시기에 나타난 사람들의 심리학적 유형에 집중할 뿐이다. 세상에는 위대한 민족들이 이룩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역사를 골고루 다룬 연구가 적지 않다. 나는 익히 잘 알려진 유형의 연구에 심리학적 역사에 대한 탐구를 덧붙이고자 할 뿐이다.

어떤 영화의 모티프들은 오직 특정 국가의 일부 사람들에만 연관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경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입견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공동의 전통과 상이한 주민 계층 사이에서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연관관계는 집단적 삶의 심층에서 통일적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작용한다. 이런 것들은 의문시 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영화의 모티브들 또한 그러했다. 나치 독일 이전에 중간 계급의 기호는 모든 계층에 퍼져나갔다. 중간 계급의 기호는 좌파의 정치적 포부와 경쟁하였으며, 상류층의 정신적 공허를 메워주기도 하였다. 여기서 중간 계급의 심태에 확고히 뿌리내렸던 독일 영화의 전국적 호소력에 대한 이유가 해명된다. 1930년에서 1933년까지 배우 한스 알베르스(Hans Albers)는 부르주아의 몽상을 노골적으로 충족시키는 전형적 영화의 영웅 역할을 하였다. 그의 행적은 노동자 관객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고, <제복을 입은 소녀 Mädchen in Uniform>에서는 귀족 가문의 딸들이 숭배하고 있는 그의 사진을 목격하게 된다.

과학에서는 보통 일련의 동기 유발에 있어서 민족적 특성들이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물, 즉 자연 환경, 역사적 경험, 경제 및 사회적 조건의 결과물이라고 보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인류에 속하기 때문에 비슷한 외적 요소들은 유사한 심리학적 반응들을 유발한다고 여길 수 있다. 1924년에서 1929년 사이의 독일 전체에 퍼져있었던 정신적 무기력은 독일만의 특수한 현상은 아니었다. 유사한 상황이 영향을 미쳐 [독일과] 비슷한 집단적 무기력이 다른 나라들에서도 발생했다는 점만 봐도 이 사실은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사람들의 심적 태도가 외적 요인들에 의해 좌우된다고 해서 심적 태도들을 무시해도 된다는 게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결과는 어느 때든 자발적 원인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심리학적 경향성들이 파생적인 특성을 지녔다하더라도, 그것들은 곧잘 독립적 활기를 띤다. 심리학적 경향성들은 항상 변화하는 상황들의 변화에 맞춰 자동적으로 변하는 대신에 역사적 진화의 본질적 원천이 된다. 민족의 역사 과정에서 모든 민족은 여러 변형을 거치면서 [민족성이라는] 그들만의 주된 원인을 존속시켜 특유의 성향들을 발전시켰다. 그러한 성향들은 현행하는 외적 요인들에 기초하여 단순히 추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외적 요인들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결정하는 문제에 이바지 한다. 우리 모두는 인류에 속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간혹 상이한 방식으로 그러하다. 이러한 집단적 성향들은 극단적 정치 변화의 경우에 추진력을 얻는다. 정치 체계의 소멸은 심리학적 체제의 해체를 낳았다. 나아가 전통적인 내적 태도들이 혼란에 빠지는 일이 잇따르고 유포되면 이러한 태도들은 도전받거나 오히려 힘을 더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심리학적 요인을 무시한다. 그들이 무시했던 이 요인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기간인-1차 대전에서 히틀러의 궁극적 승리에 이르는 독일 역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던 것에 현저한 빈틈이 있음을 명백히 보여줬다. 그렇지만 사건, 사회‧문화적 환경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범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조사되긴 했다. 독일에서 발생한 1918년 11월 ‘혁명’이 독일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전능한 사회민주당은 혁명 세력들의 중추를 파괴하는 데에만 전능했다는 사실을 입증했을 뿐, 군대, 관료, 대지주, 자본가 계급을 청산하는 데에는 무력했다. 이들 전통적 권력자들은 1919년 이후 허울뿐인 신세가 되어버린 바이마르 공화국을 계속 실제적으로 통치하였다. 또한 이 신생 공화국이 패전의 정치적 귀결에 의해, 그리고 인플레이션을 거리낌 없이 유지시켜서 구중간층을 피폐하게 만들어버렸던 유력 독일 기업가와 금융자본가들의 술책으로 인해 궁지에 몰려있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다. 결국 도즈안(The Dawes Plan)의 시행 5년 후-거대 사업자에게 이 시기는 외채 덕에 큰 이익을 본 축복의 시기였겠지만- 사람들은 세계 경제 위기가 안정의 신기루를 끝장내고, 중간 계급에게 남겨졌던 배경과 민주주의를 박살냈으며, 대량 실업으로 인해 절망감을 일반화시키는 식의 결말을 맺게 되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제도’의 몰락 속에 내재해 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제도’는 나치 정신을 번성하게 만든 진정한 구조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요소들은 히틀러주의의 엄청난 충격과 반대 진영의 고질적 타성을 해명하는 데에는 불충분하다. 의미심장하게도, 수많은 주의 깊은 독일인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히틀러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 히틀러가 집권한 후에도 그들은 새 체제를 일시적으로 발생한 희한한 사건 정도로 치부하였다. 이런 식의 견해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최소한 당시 독일의 상황에 무언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정상적 시야에서는 유추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소수의 분석만이 사회민주주의자들 특유의 유약함과 공산주의자들의 부적절한 행실 그리고 독일 대중의 기이한 반응 이면에 존재하는 심리학적 메커니즘에 대해 넌지시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프란츠 노이만(Franz Neumann)은 공산주의자들의 실패에 대한 해명을 부분적으로 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에 따르면 “공산주의자들은 독일 노동자들 사이에 작용하고 있었던 심리학적 요소들과 사회학적 동향들을 정확히 평가하는 일에 무능…”했다. 그러면서 그는 [바이마르시기] 국민의회의 제한적 정치권력 상황을 폭로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민주적 가치 체계가 사회 속에 확고히 뿌리박고 있었더라면 민주주의는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이것을 더 자세히 설명하였다. 독일 노동자들의 심리학적 경향들은 그들의 정치적 신조를 무력화시켰으며, 결과적으로 그것은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의 궤멸을 촉발했다는 것이다.

광범위한 중간 계급층의 태도 역시 압도적인 충동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 것 같았다. 1930년에 출판된 연구서에서 나는 대부분의 독일 사무직들에게 ‘화이트 컬러’의 허세가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독일 사무직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는 실제로는 노동자 계층의 그것에 가깝거나 심지어는 그보다도 못한 지경이었다. 이들 하부 중간 계급 사람들은 부르주아적 보장책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네의 궁상스런 처지와 조응하는 모든 교설과 이념을 경멸하면서 실제 현실에 있어서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결과는 정신적으로 의지가지없는 상태(mental forlornness)에 처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심리학적 완고함에서 더 나아간 일종의 고립 상태를 고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쁘띠 부르주아 특유의 행동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소매상인들, 장사꾼들 그리고 장인들은 울분에 사무친 나머지 상황에 순응함으로써 움츠러들기만 하고 있었다. 사무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민주주의를 편들면서 자기네의 실제적 이익을 실현시키는 대신에 나치의 약속에 귀 기울이는 편을 선호하였다. 나치에 대한 그들의 굴종은 사실과의 어떤 대면을 근거로 하기 보다는 감정적 고착을 바탕으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경제적 변동, 긴급한 사회 상황 그리고 정치적 모략이라는 명시적 역사 이면에는 독일 국민의 내적 성향에 함축된 비밀스런 역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독일 영화라는 매개물을 통해 이러한 성향을 폭로하는 작업은 히틀러의 부상과 지배권 장악을 이해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22

헬조선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낡고 늙고 바래 익숙해진 공기는
새롭고 신선하게 덧칠을 하고 있다.
낡고 빛바랜 지붕 위에 줄지어 서있는 공기는
시간의 바퀴를 굴려 빛을 내고 있다.
긴 시간이지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의 때 묻은 먼지를 털고 싶어한다.
가면을 쓴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고
날 것 그대로의 초라한 얼굴을 드러내기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날 것 그대로의 얼굴도, 가면을 쓴 얼굴도
지옥같은 시간의 바퀴에 묻은 먼지가 쌓이면 언젠가는 멈춘다.

2016-11-30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ec%9d%b4%ec%8b%9c%eb%8c%80%ec%99%80%ec%b2%a0%ed%95%992016-11-30-%ed%97%ac%ec%a1%b0%ec%84%a0-copy

 


작업노트 

요즘같은 세상에 대한민국 국민이 바라보는 한 사람에 대한 공기는
참으로 혼란스럽고 무겁습니다. 1%, 5%의 소수가 독점하는 세상의 형태는
대다수의 삶을 고통스럽고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욕망하는 모든 것은 채워지는 충족 조건이 되지 못하지만
필요에 의한 필요를 채워가는 독점적 삶은 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삶에 정해진 시간은 뜻대로 흘러가지 못하고
소수의 지배적인 이념대로 흘러가고 소수가 만들어 놓은 형태로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가며 수동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의식이 없는 내가 나를 지키지 못하는 현실에서 다수의 삶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망이 없는 절망의 늪에 빠집니다. 가시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삶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조건들이 무너지면
더더욱 삶은 절망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현 사회에서 대한민국은
소수가 다수의 국민의 권리를 포기하고 살아가게 만들어 헬조선을 만들고 있습니다.
헬조선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상황은 공정하고 공평하지 못하고 차이를 만들고
차이에 의한 차별을 만들고 모든 삶 안에 차별적 사고, 차별적 인식, 불평등을 만들어
불만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존중받고 모두가 배려하는 평화의 세상을 향해,
모두가 좋은 가치를 향해 나아간다면 분명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의 한 사람이 국민의 대다수를 기만하는 때 묻은 바퀴를 이제 그만 멈추길 바랍니다.

 

 

무당, 마약, 성형, 섹스? 당신들의 관심이 불편한 이유 [나인당케의 단상들]

요즘 난리라지요. 청와대가 사들인 의약품들 중에 비아그라가 들어있다는 소식에 수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보였습니다. 주사제를 대리처방 받았다고 하는데 대통령이 성형중독에 걸렸다거나 마약중독에 걸렸다는 의심이 퍼지고 있습니다. 언론도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래퍼 산이’니 ‘DJ DOC’니 하는 잘 나가는 가수들도 이렇게 박근혜를 낯선 남자와 키스를 한 ‘더러운 혀’로 국민 앞에 변명하는 음란한 여자, 성형중독에 걸려 ‘하도 찔러대서 얼굴이 빵빵’해진 ‘미스 박’으로 묘사합니다. 대중들은 이런 직설적 어법에 시원해하고요.

20161114_%ec%b9%b4%eb%93%9c%eb%89%b4%ec%8a%a4100%eb%a7%8c-%ec%b4%9b%eb%b6%88-%ec%86%8d-%ec%97%ac%ec%84%b1%ed%98%90%ec%98%a4_9

소위 ‘진보’언론들도 이러한 관심을 부추기며 취재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프로포폴 의혹을 줄기차게 제기하는 이상호 기자와 파파이스의 김어준씨뿐 아니라 급기야 어제는 주진우 기자가 박근혜의 ‘섹스 테이프’가 공개될 거라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보도가 권력자의 스캔들을 보도함으로써 진실을 알리는 정의로운 행위라고 생각들 하시겠지요. 하지만 저는 불편합니다.

 

주진우 기자님, 저는 박근혜가 섹스비디오를 찍었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상호 기자님, 김어준씨, 저는 박근혜 최순실 최순득이 어느 병원에서 어떤 주사를 맞고 다녔는지도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관심있는 건 부패한 ‘시스템’입니다.

 

무당, 마약, 성형, 섹스. 당신들이 어린 시절 보았던 선데이 서울에나 실릴 법한 3류 이야기들을 거대권력자들이 실제로 하고 다녔으니 흥미를 자극하지요. 그리고 당신들은 대중의 그런 호기심을 부채질하고요. 그러는 사이 뭐가 잊혀지고 있는지 아십니까?

 

이 권력형 비리의 최대 수혜자가 한국 재벌들이라는 것. 그들이 수백억을 최순실에게 바치면서 지키려고 했던 것은 그들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이 체제라는 것. 따라서 우리가 더욱 집중해야할 것은 국가-재벌 유착의 고리와 체제 전반의 부패라는 것입니다.

 

박근혜를 ‘성형중독 걸린 김치녀’이자 ‘비아그라 사고 섹스비디오 찍는 음란녀’로 몰아가는 당신들의 보도 프레임은 이제 신물이 납니다. 이 혐오 프레임 보도를 멈춰요. 부패한 시스템에 대한 고발 없는 ‘정치포르노’형 취재를 멈추란 말입니다.

 

더 중요한 물음이 있지 않나요? 롯데와 삼성을 비롯해 부패한 재벌총수들은 아직 구속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권력을 누리고 있으며, 박근혜가 퇴진 또는 탄핵된 이후에도 권력을 유지할 것입니다. 조선일보 같은 주류보수세력 역시 아직도 전혀 헤게모니를 상실하지 않고 정국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박근혜의 섹스 테이프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이, 이런 사실들은 잊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TV조선, 채널A 같은 보수종편은 언제나 김정은의 추악한 사생활을 보도하거나, 세월호 사건 이후 유대균이 ‘뼈 없는 치킨’을 시켰다거나 하는 등의 가쉽거리들을 보도해 대중의 관심을 불러모읍니다. 그리고는 정작 본질적 물음에 대한 보도는 회피하지요. 이번엔 진보 언론들도 같은 길을 가기로 한 겁니까?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부패한 ‘한국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성형녀 섹스중독녀 마약녀’로 프레임 잡은 박근혜와 최씨자매의 사생활에 대한 관음증적 시선 말고요. 그게 제가 원하는 ‘진보 언론’의 보도입니다.

(Papas Kino 1) 복숭아 누이 [내게는 이름이 없다]

%ec%8b%ac%ed%94%8c-%eb%9d%bc%ec%9d%b4%ed%94%84

한 여인의 추태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덕분에 온 나라가 여성 비하네 아니네로 시끌시끌하다. 한 외신은 그녀 때문에 모든 한국 여성들이 ‘여혐당할 지도 모르겠다’는 염려를 하고 있다. 그 때문인지 방송엔 연일 그녀의 추함을 헐뜯는 데 여념이 없다. 늘 여인의 아름다움을 탄복해 왔던 나로서는 요즘처럼 괴로운 시절이 없다. 여인 성토장이 된 방송을 피해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그 여인과 비슷한 연배의 여성을 발견하고는 분주하던 리모콘을 놓을 수 있었다.

그녀는 <심플 라이프>라는 영화에 나오는 늙은 식모였다. 원제가 <桃姐>, 즉 복숭아 누이인 이 영화는 육십을 훌쩍 넘어서까지 결혼도 못하고 한 집에서 식모살이를 한 여인의 삶과 죽음을 다루고 있다. 연출을 맡은 허안화감독은 비판적 역사 의식으로 유맹(流氓)의 땅 홍콩을 통찰력있게 그려내는 이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녀의 전작들과 달리 매우 사적인 일상을 다룬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녀의 어떤 영화보다도 묵직하다.

더구나 <심플 라이프>는 아름답다. 최근에 본 가장 아름다운 영화는 허우샤오시엔의 <자객 섭은낭>이었는데, 이 영화는 <섭은낭>과는 다른 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유대에서 오는 아름다움이었다.

병들고 오갈 데 없는 늙은 식모 아타오와 부유한 영화 제작자 로저 사이의 유대는 자칫하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비인간적 일상을 분식하는 같잖은 미담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유대는 계급과 나이, 성별의 차이와 긴장을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간직하면서 화해에 이르는 사건을 창출한다.

둘은 결코 동등해질 수 없는 이들임을 잘 알고 있다. 아타오는 오갈데 없는 병든 독거노인에 불과하고, 로저는 중국과 홍콩을 오가며 영화를 만드는 유명 제작자다. 둘 사이에 놓은 장벽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를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은 필요 이상의 호의를 베풀거나 과도한 신세를 지지않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것이 그들 사이를 소원하게 하지는 못한다. 이들은 모두 유맹의 땅 홍콩에서 부유하는 ‘발 없는 새’들이기 때문이다. 홍콩인들은 오래 전 환란을 피해 남하하여  마천루의 숲을 이룬 이들과 그 후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언제나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었고, 늘 이쪽과 저쪽 사이를 오가야만 하는  ‘무간지옥’에 빠져있었다. 본토 반환 이후에는 ‘발 없는 새’의 신세를 면하나 했지만, 그들은 곧 본토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에 의해 주변부로 밀려나고 말았다. 아타오와 로저 사이에서 맺어진 유대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고통의 공유에 기초한다고 할 수 있다.

아타오는 일본인의 손에 남편을 잃은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홍콩에 남하하였다가 부유한 로저 집에 ‘양녀’ 겸 식모로 들어온 유맹이다. 로저는 가족 모두가 미국으로 이주해 버린 덕에 가족과 떨어져 비좁고 고적한 홍콩의 집에 살고 있다. 반환 이후 화려했던 홍콩의 영화 산업이 뿌리채 뽑히자 로저는 보따리를 짊어지고 중국과 홍콩을 오가며 본토의 자본을 얕은 꾀로 우려내 <삼국지>나 재탕하는 떠돌이 영화 제작자가 되었다. 둘 모두 결혼과 정착은 생각하지 않거나 엄두도 못 내는 이들이다.

놀이터에서 그들은 결혼도 못한 서로를 놀리며 그들의 영락을 웃음으로 넘어선다. 그곳에서 둘은 단단히 묶인다. 나는 인간적 유대의 아름다움을 경배하는이 놀이터에서 떠나지못하고 오랫동안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시경>에는 이런 시가 있다. 桃之夭夭, 灼灼其華. 之子于歸, 宜其室家. 뜻을 새기면 이렇다고 한다. ‘무성히 자란 복사나무, 활짝 꽃이 피었네. 이 아가씨 시집가면, 시댁에 잘 하리라.’

우리 식으로 하자면 ‘봉순이 누나’ 정도가 되는 春桃라는 이름을 지닌 우리의 복숭아 누이는 안타깝게도 <시경>에서 읊은 복사꽃 처자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움은 복사꽃 못지 않다. 바다 건너  ‘무궁화 언니’도 시집을 가지 못하였다. 대신 그녀는 청기와를 얹은 으리으리한 집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아름답지 못한 인연으로 수많은 사람을 수치스럽게 하였다. 나 역시 부끄러움 탓에 며칠 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의 아름다움은, 그리고 인간적 유대의 아름다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복숭아 누이가 보여준 유대의 끈이 이를 잘 보여준다.

추함의 악덕은 아름다움의 미덕으로 씻을 수 있다. 아무쪼록 이 땅에 복숭아 누이가 누린 유대의 아름다움이 펼쳐지길 빈다.

 

(발췌 번역)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1 [내게는 이름이 없다]

c155x225

이 연재글은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의 고전적 저작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 독일영화의 심리학적 역사(1947)>를 발췌 번역한 것이다. 크라카우어는 청소년기 아도르노에게 칸트를 가르쳐 주고, 벤야민에게 많은 사상적 영향을 준 비판이론 계열의 유대계 문예 비평가다. 건축을 전공하긴 했지만 당시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의 독일에 대한 통찰력 있는 문화 비평을 한 저널리스트로 유명하였다. <대중의 장식>, <사무원> 등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그는 그곳에서 두 권의 대표적 영화 저작을 발표하는데 <칼라가리…>와 <영화이론>이 그것이다. 이 중 <칼리가리…>는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 대한 역사적 비평서이자 당대 독일인들의 심태(mentality)를 사회구조적 시각에서 해명한 역작이다. 비판이론적 문화산업론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는 데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서툰 원고를 쪼개어 올려 본다.

서문

이 책은 독일 영화 그 자체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히틀러 이전의 독일에 대한 지식을 특정한 방식으로 증대시키는 것을 겨냥하고 있다.

1918년에서 1933년에 이르기까지 독일에서 우세했던 심리학적 경향성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은 당시 독일영화에 대한 분석을 통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논점이다. 이 경향성은 이 시기에 발생한 사건의 추이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히틀러 이후의 시대에서도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다루는 영화가 미국이나 그 이외의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대중의 행태에 관한 연구를 확장하는 작업에 유익한 매체로 활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나는 이런 종류의 연구가 다른 의사소통 매체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문화적 목적을 효과적으로 완수하게 만들 영화를 기안하는 일에 이바지할 것이라고 믿는다.

1946년 5월 뉴욕시에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도입

1920년 이후 독일 영화는 연합국이 [독일에] 설정한 금수 조치를 무력하게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독일 영화는 뉴욕, 런던, 파리의 관객들을 매혹시키면서도 혼란스럽게 만드는 그 어떤 예술적 성취로 각인되었다. 1차 대전 후 뒤이은 모든 영화들의 원형이 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은 열광적인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한 평론가는 “영화 매체를 가지고 창조적 정신을 표현한 최초의 의미 있는 시도”라고 평했지만, 다른 평론가는 “이 영화는 더러운 음식의 악취를 풍긴다. 입 안에 재를 물고 있는 듯한 뒷맛을 남긴다”라고 말했다. 1차 대전 이후의 영화들은 독일의 정신을 수수께끼 같은 것 이상의 그 무엇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섬뜩하고 사악하며 병적인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당시 독일 영화들을 묘사하는 데에 가장 자주 사용된 형용사들이었다.

독일 영화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연출 방식과 주제를 바꿨다. 그렇지만 이 모든 변화 속에서도 독일 영화는 특유의 충격적 시작이라고 할 만한 어떤 특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장기 불황이 시작되었다고 간주되던 1924년 이후에도 그러했다. 미국과 유럽 관객들 사이에서는 이런 특성을 지닌 독일 영화를 평가하는 데에 있어서 이견의 여지없이 완전한 만장일치를 이루었다. 그들은 <칼리가리> 이후 독일 영화감독들이 선도했던 시각 영역에 대한 재능에 대해 깊이 탄복하였다. 즉 장엄한 무대장치에 대한 감각을 기탄없이 표현하고, 적절한 조명을 통해 연기의 기교를 발전시키는 독일 감독들을 존경해마지 않은 것이다. 전문가들도 독일 영화들에서 두드러지는 특성, 즉 독일인들이 최초로 완벽하게 구사한 카메라의 움직임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게다가 조명, 무대장치 그리고 배우의 완벽한 융합만큼이나 뛰어났던 내러티브의 통일성을 고려하면서 찍은 독일 영화의 조직적 역량을 알아채지 못한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다. 이상과 같은 독특한 가치 덕분에, <마지막 웃음(1924)>과 <버라이어티(1925)>에서 카메라 장치와 스튜디오가 총체적으로 진화한 이후 독일 영화는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할리우드에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독일의 카메라 워크(이 용어의 가장 완전한 의미에서의)이다.” 할리우드는 [독일 영화에] 특히 탄복하면서 가능한 한 모든 독일 영화감독, 배우 그리고 기술자들을 고용하였다. 프랑스 역시 라인강 건너편의 영화 양식이 수용할 만한 것임을 입증해주었다. 그리고 고전 러시아 영화들은 독일 조명과학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감탄과 모방은 내부까지 파고드는 깊이 있는 이해(intrinsic understanding)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 독일 영화에 관한 많은 글들은 기이한 특질에 대한 연이은 분석에 머무르고 있었다. 설사 이를 넘어서는 이해가 이루어졌다 해도 그것은 독일 영화의 실존과 연관되고 있는 불안의 문제를 풀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미학적인 이러한 문헌은 영화를 마치 자율적 구조를 지닌 것이라고 간주하면서 영화에 대한 분석을 수행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왜 독일에서 카메라가 최초로 완벽한 움직임을 성취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물음은 아예 제기되지도 않았다. 독일 영화가 이룩한 진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논의하지 않았다. 영국의 영화 잡지 『클로즈 업 Close up』의 저자들과 협력하고 있었던 폴 로타(Paul Rotha)는 일찍부터 독일 영화의 예술적 장점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연대기적 틀 속에만 제한되어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차 대전이 끝난 후부터 미국 유성 영화가 등장하는 시기까지의 독일 영화를 살펴본다면, 대략 세 개의 모듬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연극조의 사극 영화고, 두 번째는 스튜디오 예술 영화의 중흥기이며, 세 번째로는 미국적 ‘영화 감각(picture-sense)’에 동조하기 위해 독일 영화가 침체되어버리는 시기다.” 로타는 독일 영화들이 왜 이상의 세 모듬으로 묶여야 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고 있지 않다. 이와 같은 외적 해석은 규범이 되어 버렸다. 이런 식의 여러 해석은 위험한 오해를 낳았다. 1924년에 발생한 독일 영화의 쇠퇴로 인해 독일의 중요한 영화인들이 미국으로 떠났고, 이는 독일 영화 산업에 대한 미국의 간섭을 낳았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 시기 독일 영화에 대해 “미국화”되거나 “국제화”된 형태로 생산되고 있다는 식의 평가를 내놓았다. 이른바 “미국화된” 영화가 사실은 이 시기 독일의 삶을 제대로 표현해줬다는 점이 앞으로 서술될 것이다. 나아가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영화에서 나타나는 테크닉, 내용, 진화는 그 나라의 심리학적 유형과 연관될 경우에만 충실히 이해될 수 있다는 점이 앞으로 선보이게 될 것이다.

한 나라의 영화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에서 여타 예술 매체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 나라의 심태(mentality)를 반영한다.

첫째, 영화는 개인의 산물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 영화감독 푸도프킨(Pudovkin)은 영화 제작을 산업적 생산 방식과 동일시함으로써 그것의 집단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기술 관리자는 십장과 인부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만일 모든 협력이 기술 관리자의 기능을 기계적으로 이행하는 것에만 국한된다면 그들의 집단적 노력은 결코 좋은 결과물을 낳을 수 없게 될 것이다. 팀워크는 모든 일을, 심지어 가장 하찮은 일이라도, 살아있는 노동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으로 만들며, 분화된 노동 작업을 조직적으로 연결하여 전체적 작업을 이루도록 만든다.” 저명한 독일 감독들은 이러한 견해를 공유하면서 그에 따라 행위 하였다. 나는 프랑스 주앵빌 스튜디오에서 G. W. 팝스트(G. W. Pabst)가 연출하는 촬영 현장을 본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그가 무대 장치와 조명의 배분에 관해 제안된 기술자들의 의견을 기꺼이 따르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팝스트는 이것을 영화 제작에 있어서 귀중한 기여로 생각한다고 내게 말하였다. 영화를 제작하는 팀들은 모두 상이한 관심사와 경향성을 융합시키기 때문에, 이 분야에서 팀워크는 영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요소들을 제 마음대로 쥐고 흔드는 태도를 배제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성향을 위해 개인의 특질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영화는 익명의 다중에게 말을 걸면서 그들의 마음에 호소한다. 따라서 대중영화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대중 영화의 모티프는 대중의 현재적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흔히 할리우드는 대중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영화를 그냥저냥 판매하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할리우드 영화는 대개 청중이 지닌 수동성과 압도적인 홍보의 위력을 통해 그들을 우롱하고 잘못된 곳으로 이끈다. 그러나 할리우드 대중 엔터테인먼트가 지닌 왜곡의 영향력은 과대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날조자들은 질료가 지닌 내재적 성질에 의존하고 있다. 심지어 순수한 선전물로서 제작되었던 나치의 어용 전쟁영화조차도 결코 조작할 수 없었던 어떤 민족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치] 영화들에게 유효한 진리는 경쟁사회의 영화들에도 유효하게 적용된다. 할리우드는 청중이 지닌 자발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일반의 불만은 줄어드는 매표 수입에서 뚜렷이 드러나며, 수익에 극도로 관심을 두는 영화 산업은 가능한 한 [청중의] 변덕에 적응하지 않을 수 없다. 확실히 할리우드는 관객들이 무언가를 원하게 만들고 그들에게 그것을 준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자면 청중의 욕망이 할리우드 영화의 본성이다.

삶을 고뇌하는 라이더를 위한 철학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코너를 새로 시작하려 합니다.  먼저 흔쾌히 출판책의 원고 사용을 허락해 주신 저자 조광제 선생님과 ‘생각정원’ 출판사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앞으로 조광제 선생님의 원고를 바탕으로 한철연 회원 필자분들과 함께 공동 프로젝트 형태로 코너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한 개념어에 대한 원본을 바탕으로 여러 회원분들의 추가글 또는 논쟁, 토론을 함께 담아내는 나름 리좀 같은 개념어 코너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해 봅니다.


우선 아래는 [철학라이더를 위한 개념어 사전](생각정원, 2012)의 서문에 해당하는 조광제 선생님의 글입니다.

8996792926_1

 

프롤로그 : 삶을 고뇌하는 라이더를 위한 철학 안내서 

단 한 번 주어진 나의 인생을 제대로 살려고 하다 보면 작은 일에서부터 큰일에 이르기까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른바 육하원칙이라고 해서 ‘누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라는 의문사들을 앞세운 질문 형식들이 정착된 것은 이러한 궁금증이 삶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근본적인가를 말해 준다.
이 글을 쓰는 동안, 북한의 수령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했다. 특히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누가 그러한 평가를 하는 것일까? 그러한 평가에서 핵심은 무엇일까? 언제부터 그런 평가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까? 어디에서부터 그러한 평가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까? 어떻게 해서 그러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을까? 왜 그러한 평가를 하게 되었을까? 특히 한반도 분단 상태를 견디고 있는 당사자인 우리 남한 주민들로서는 향후 이 사건으로 인해 생겨날 일들에 대해 첨예한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 사건이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에 미칠, 군사 ‧ 외교 ‧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전반의 변화에 대해 과연 우리가 주도적인 방향타 역할을 할 수 있는가이다.
만약 이러한 문제를 철학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사건은 하나의 현상이다. 그런데 과연 ‘현상’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지 않고서는 이 사건이 하나의 현상이라는 말을 제대로 피력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사건’이라는 말조차 엄격하게 파고들면 무엇인지를 알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이 사건의 향방에 대해 한반도 주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주체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주체적’ 혹은 ‘주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이에 관해 정확하고 면밀한 논의를 할 수 있을까? 주체와 대립되는 ‘객체’ 혹은 ‘대상’이 무엇인가도 알아야 할 것 같다. 그와 더불어 ‘능동성’과 ‘수동성’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것이다.
북한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인데도, 이 사건이 미치는 국제적인 파장이 결코 만만치 않다고 할 때, 하나의 사건이 여러 사건들을 폭넓게 야기하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그렇게 해서 생겨난 국제적인 파장은 다시 한반도를 향해 영향을 미친다. 사건을 둘러싸고서 확산과 수렴이 순환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의 사건이 여러 사건들을 폭넓게 야기하면서 동시에 다시 되돌아와 사건의 진원지에 영향을 미치는 사태에 대해, 그 구조와 성격을 알지 못하고서 이 사건으로 인해 벌어지는 국제적인 정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구조’는 무엇이며, ‘성격’은 무엇이란 말인가? 또한 ‘수렴’은 무엇이며, ‘확산’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의 사건이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일어났던 관련 사건들과 또 앞으로 일어날 관련 사건들에 의거해서 의미를 갖는다. 이때 ‘……에 의거해서’라는 말은 ‘……을 지평으로 해서’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즉 “하나의 사건은 여러 다른 관련 사건들을 지평으로 해서 의미를 갖는다.”라는 바꿀 수 있다. 이때 ‘지평’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서 이런 말을 피력하거나 이해할 수는 없다. ‘지평’(예컨대 한반도에서 동북아, 동북아에서 세계 전체)은 항상 그 속에서 문제가 되면서 의미를 갖는 ‘주제화된 대상’(예컨대 김정일의 사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주제화됨’이라는 것은 무엇이며, ‘대상이 됨’은 무엇인가, 그리고 ‘주제화된 대상과 지평 간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을 모르고서는 이러한 말을 제대로 피력하거나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설사 피력하고 이해한다 할지라도 피상적일 수밖에 없고, 다들 피상적인 설명과 이해를 통해 제대로 소통을 이루었다고 착각을 할 수밖에 없다.
하나의 설명과 이해가 혼돈된 상태에서 제대로 질서를 갖춘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관련되는 기초 개념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흔히 혼돈은 ‘카오스’이고, 질서를 갖춘 것은 ‘코스모스’라고 한다. 과연 ‘카오스’는 무엇이며, ‘코스모스’는 무엇인가? 이를 근본에서부터 파악하는 것은 철학의 몫이다. 그뿐만 아니라, 흔히들 말을 하고 그 말을 이해하고 또 그렇게 이해된 말을 바탕으로 자기 나름의 말을 한다고 할 때, 그 말이 제대로 기능하고 정확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그 말을 할 때 그 말을 하고 이해하는 당사자들이 거기에서 활용되는 기초 개념들에 대해 가능한 한 정확하게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른 소통이 이루어지고, 올바른 소통을 통해서 바람직한 효과를 낳을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철학은 ‘설명’이 무엇인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바람직함’이 무엇인지, ‘효과’가 무엇인지, 또 ‘행동’이 무엇인지 등을 근본에서부터 알고자 한다. 심지어 ‘앎’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
하나의 대대적인 사건이 일어나면, 그 사건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하게 된다. 비단 대대적인 특별한 사건에 대해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소한 사건도 제대로 깊이 있게 알고 보면 대단히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잘 안다. 굳이 나비 효과와 같은 사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사소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대대적인 큰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은 어쩌면 역사의 기본적인 법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생은 사건의 연속이다. 인생은 결코 나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다. 나의 삶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어져 있으면서 계속 새롭게 다변화해 나가는 사회역사적인 전체의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영위된다. 나와 나 아닌 것들 간의 부단한 상호작용이 곧 삶의 역정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 즉 ‘자아’는 무엇이며, 나 아닌 것 즉 ‘타자’ 무엇이며, ‘자아와 타자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어쩌면 인생을 논할 때 가장 근본적인 기초 개념들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나이고자 하는 것을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확대시킬 수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늘 자기이고자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이고자 할 때, 항상 자기가 아닌 것들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자기임을 전문적으로 ‘자성’(自性)이라고 하고, 자기가 아닌 것들을 ‘타자’(他者)라 하고, 타자들과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대타적’(對他的)이라 하고, 그러한 대타적인 관계를 통해 자기에게 형성된 것을 ‘대타성’(對他性)이라고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다는 것은 결국 자성과 대타성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듯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기초적으로 작동하는 주요 개념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런데 그 개념들 역시 존재하는 것이기에 그 나름의 존재, 즉 그 나름의 자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나름의 자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개념들과의 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다. 즉 대타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의 개념이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의 개념을 이해할 때, 다른 개념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여러 다른 개념들로써 하나의 개념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개념은 완전하게 설명될 수도 없고 이해될 수도 없다. 설명되어야 할 개념(피설명항)을 설명해 주는 개념들(설명항) 역시 다시 설명되어야 할 개념(피설명항)들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대략 설명했지만,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알면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모든 사태들이 의미를 갖는 것은 인간들을 통해서이고, 특히 그 인간들의 말을 통해서다.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바탕에 깔지 않고서는 그러한 말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가능한 한 정확하고 깊이 있게 그리고 폭넓게 이해하고 있으면 인류가 형성 ‧ 축적해 온 온갖 예술 문화적인 보고(寶庫)들을 나의 삶의 자양분으로 삼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된다. 여러 장르의 문헌들에서 예사로 쓰이는 것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이 아닌가. 그 문헌들의 맥락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여 우리의 삶을 더욱 살지게 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보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은 인간 사유의 기초적인 뼈대를 형성하고 있기에, 어떤 사유를 하건 더욱 논리적이면서도 근본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 말하자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익힌다는 것은 모든 사유를 위한 기초적이면서 근본적인 두뇌 체조라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을 익혀 나의 개인적인 삶을 풍부하고 깊이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공동체의 삶을, 나아가 전 인류적인 공동체의 삶을 풍부하고 깊이 있게 하는 데 기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공동체의 삶이 없이는 나의 삶이 없고, 나의 삶이 없이는 공동체의 삶이 없다고 하는 근본적인 사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도 바로 이 철학적인 기초 개념들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소략한 이 책은 저자가 일해 온 <철학아카데미>의 2011년 봄 학기에 진행한 강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책의 문장들 중 실제 강의 상황을 느끼게 하는 대목들이 나오더라도 괘념치 마시길 바란다. 당시 강의에 참여한 많은 수강생들에게 특별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이를 알고서 책으로 출판하고자 제안을 하고, 또 솔선수범해서 애써 멋진 책을 만들어 준 출판사 <생각정원>의 대표 박재호 선생께 마찬가지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11년 12월 21일, 녹번동에서
저자 조광제

[안내]한철연 2016년 가을 제51회 정기학술대회(12월3일,토)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6년 가을 제51회 정기학술대회

주제: 21세기 유교의 향방―탈경계시대, 유교 부흥과 전유
일시: 2016년 12월 3일 (토) 오후 12:30 ∼ 6:00
장소: 경희대학교(서울) 본관 2층 대회의실
 

  안녕하세요? 한철연 학술2부입니다.
  이제 가을의 막바지에서 어느 때 보다 황량하게 느껴지는 겨울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철연 가을 정기학술대회(심포지엄)가 열립니다. 이번에는 ‘21세기 유교의 향방─탈경계시대, 유교 부흥과 전유’라는 주제로 동양철학 연구자들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장을 만들었습니다.

  20세기 전반기, 전통사회의 토대였던 유교는 몰락의 길을 걷는가 싶었으나, 20세기 후반 유교는 동아시아에서 열띤 열기 속에서 부활하였습니다. 하지만 유교가 현대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의미 있는 토론보다 ‘동아시아의 특수한 근대화’를 설명하는 논리, 또는 정당화의 논의에 머물렀습니다.

  90년대 아시아적 가치 논쟁을 필두로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나, 국제적인 호소력을 갖기에는 미진합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유교’는 새로운 화두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중국과 한국 모두에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는 과거 80년대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열에 관한 객관적 조망과 현대신유가에 대한 비판적 토론을 한 바 있습니다. 그러한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이제 다시 소리 없이 확산되어가는 탈경계시대 ‘유교’의 다양한 흐름과 방향을 점검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부디 많은 회원들께서 참석하시어 우리의 학술 얘기와 지금의 현실 얘기를 같이 논할 수 있는 치열한 토론 자리를 만들어주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학술2부 드림

 

학술대회 일정

일 시 발 표 및 내 용 비 고
제 1부

12:30~

14:30

12:50~

13:00

개회사

축사

회장

이사장

13:00~

13:30

1부 다시 유교의 시대가 도래하는가?

발표주제 1

21세기 중국, 제국인가 민주인가-소프트 파워와 모더니티의 문제

발표자: 조경란(연세대학교)

논평자: 이지(이화여자대학교)

1부 사회자 :

이병태(경희대학교)

13:30~

14:00

발표주제 2

 21세기 유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경계를 넘을 수 있는가?      – 어울림의 공동체 사회 건설의 논리를 중심으로

발표자: 이철승(조선대학교)

논평자: 김원열(한국철학사상연구회)

14:00~

14:30

발표주제 3

  유교와 현자 지배 체제 – 현대 중국의 정치 체제

발표자: 손영식(울산대학교)

논평자: 김동민(한밭대학교)

  14:30~

14:40

쉬는 시간  
제 2 부

14:40~

16:50

14:40~

15:10

2부 탈경계시대의 유교, 회고와 전망

발표주제 4

  유학과 서양철학의 만남은 어떻게 이뤄졌나?

발표자: 박영미(한양대학교)

논평자: 김재현(경남대학교)

2부 사회자 :

박민철(건국대학교)

15:10~

15:40

발표주제 5

  탈경계시대, 여성주의 유교는 가능한가?

발표자: 김세서리아(이화여자대학교)

논평자: 한영희(전북대학교)

15:40~

15:50

쉬는 시간
15:50~

16:20

발표주제 6

  유학과 서학: 유학의 변용과 확장

발표자: 김선희(이화여자대학교)

논평자: 김갑수(호원대학교)

16:20~

16:50

발표주제 7

 안회의 눈물 – 도통(道統)은 정말 계승되었는가?

발표자: 김시천(숭실대학교)

논평자: 심의용(숭실대학교)

16:50~

17:00

쉬는 시간  
종합

토론

17:00~

18:00

전체 집담회 및 종합 토론 종합토론 사회자:

김교빈(호서대학교)

종합토론 이후에는 약 30분 가량 총회가 있을 예정입니다.

 

오시는길

noname01

오시는 길 위치와 교통편 자세한 안내(홈페이지 접속)

http://www.khu.ac.kr/university/campus/seoulcam_location.do

주차료 : 학회, 행사 참석자 1,500원/4시간

대통령의 초월적 자기기만 – 진화생물학과 신경심리학적 배후 [자연과 문화 사이에서] -4

최종덕(상지대, 과학철학)의 종횡무진 책읽기 : 서평연재 -4

 

오늘의 책

트리버스,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살림 2013

Robert Trivers, <The Folly of Fools: The Logic of Deceit and Self-Deception in Human Life>, Basic Books, 2011

noname01

1. 위계적 권위의식과 자기기만

사람들은 당장에 처한 위기상황을 모면하기 위하여 거짓말로 속임수를 쓰곤 한다. 그리고 자신의 속임수가 남에게 탄로나거나 남이 알아채지 못하게 속임수의 수준을 더욱 더 강화한다. 속임수 강화의 마지막 단계는 자기 자신이 먼저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 즉 남을 기만하고 그런 기만이 들통 나지 않고 성공시키기 위하여 자기기만에 자신도 모르게 빠지게 된다. 기만과 자기기만은 한 개인의 생존과 관련하여 생물학적으로 진화된 것이라는 명제가 바로 이 책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살림 2013; The Folly of Fools, The Logic of Deceit and Self-Deception in Human Life, 2011)의 저자 트리버스Robert Trivers가 이루어낸 사회심리학적 성과이다. 트리버스는 기만행위를 진화생물학과 신경생리학의 시선으로 조명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

기만행위의 생물학적 진실을 많이 알면 알수록 기만행위로부터 유래된 인류학적 불행들, 즉 전쟁, 테러, 종교 갈등, 인종차별, 독재권력 등의 사회현실을 방지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이 책은 전해주고 있다. 한 개인의 기만행위는 개인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속한 집단의 신뢰도를 추락시킨다는 데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인류사에서 볼 때 인간사회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충돌이 생길 경우, 개인의 자기기만 행위는 집단을 넘어서 집단 간 전쟁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전쟁까지 가지 않더라도 사회집단 내 불평등 구조는 바로 권력자 혹은 권력집단의 기만과 자기기만 행위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권력의 횡포, 일방적 위계구조의 부작용이 심각한 한국사회에서 이 책을 읽는 일은 더욱 의미있다.

이 책은 생물학자이면서 인류학, 심리학, 역사,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다층적이고 포괄적인 학문성과를 보여준 트리버스의 최근 작품이다. 이 책의 한국어 번역제목은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이다. 이 책에서 저자 트리버스는 속임수와 자기기만이 진화적으로 오래된 인간의 행동양식임을 강조한다. 자기기만의 행동양식들이 누적되거나 집단화 되고 혹은 관습적으로 허용될 때 역사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야기된다. 사회적으로는 전쟁과 같은 역사적 파국이 일어나며 개인적으로는 이혼이나 가정파괴로 이어지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임수와 자기기만은 신체적으로 면역력의 약화를 초래하여 결국 건강까지도 훼손한다고 트리버스는 말한다.

이 책에서 자기기만의 흥미로운 사례로 항공기 사고들을 소개하고 있다. 1994년, 모스크바 발 서울 행 에어로플롯 593편에 탑승자 전원이 사망한 추락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사고 비행기의 조종사는 아들과 딸을 조정실에 동승시켰다. 조종사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욕심이 있었다. 그런 욕심은 자기기만적인 인정요구에 해당한다. 조종사는 그의 아들에게 조정칸을 맡기고 아버지의 멋있는 행동을 따라하도록 했고 11살 아들의 실수로 결국 비행기가 추락되었다. 탑승자 75명 전원이 사망한 이런 극도의 불행한 사고는 개인의 사소한 자기기만에서 비롯했다.

이 책은 한국의 대한항공의 경우까지 기술하고 있다. 1988-1998년 사이 대한항공의 사고로 인한 사망율은 미국의 일반 항공사 대비 17배였다. 한때 델타항공사와 에어프랑스 항공사는 대한항공과의 협력관계를 중단하기도 했었다. 미군은 대한항공기의 이용을 금지하는 내부명령을 잠시 내린 적도 있었다. 캐나다에서는 대한항공의 비행기가 캐나다 영토 내 착륙권을 금지하는 것을 고려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모두 대한항공의 불안전성 때문이었다. 트리버스는 대한항공 조종사들의 자기기만 요소를 기술했다. 첫째 한국의 고질적인 위계질서는 자기기만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한다. “기내 조종실에는 정/부 두 명의 조종사가 있지만 그들 간의 지배 관계가 확고해서 사실상 한 명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303쪽) 둘째 권위의식 때문에 비행 환경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예측하지 못한 오류 발생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한항공에 내재된 이러한 자기기만 요소는 결국 큰 사고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사고내용은 다음과 같다.(주1) 기장과 부기장만 있는 폐쇄된 여객기 조정실에서 기장의 자기기만은 자칫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사례를 저자가 대한항공사에서 찾은 것은 정말 씁쓸한 일이다. 1997년 대한항공 비행기가 괌에서 추락하여 무려 228명이 사망한 대참사를 말하고 있다. 당시 기장이 조정키를 맡았었다. 심한 안개로 인해 활주로 1차 착륙시도에 실패한 후 다시 선회하는 중 코앞에 닥친 산등성이에 충돌될 위험을 부기장은 인지하였다. 부기장이 이 위험상황을 기장에게 보고하고 즉시 선회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기장과 부기장 사이에 고착된 위계질서와 권력구조 때문에 기장은 부기장의 말을 무시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이 사고의 원인은 기장에게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괌 공항 항공시스템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문제는 기장의 자기기만적 권력의식 때문에 조종사가 돌발상황에 대처하는 데 매우 취약했다는 데 있다. 조종실과 같은 폐쇄공간에서 자기 과신과 위계적 권위의식은 부조종사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기기만 행태가 더 쉽게 드러난다는 것이 트리버스의 설명이다.

일반적으로 권력구조가 강한 집단일수록 그 집단 안에서는 불의의 사고 및 갈등사태의 발생율을 높인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한국사회의 위계적 권력구조의 문제는 우리 사회를 파국으로 만들 수 있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바로 그러한 상황은 트리버스가 말하는 자기기만으로부터 초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치권력구조에서부터 가부장적인 가족구조에까지 그런 자기기만은 터지기 일보 직전의 위험수위에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설명이 더욱 흥미롭다.

주1) 한국어 번역서에는 대한항공 사고내용에 대한 부분이 모두 빠져있다. 출판사가 의도적으로 뺐는지 아니면 번역자의 실수인지 잘 모르지만, 사고내용마저 침몰시킨 세월호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 때문에 한국어 번역서에는 없지만 영어 원본에 있는 사고경위를 여기서 기술한다.

15073427_1029656710489776_931503996222317669_n

2. 한국 대통령에서 드러난 자기기만의 양상

우리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아부, 거짓말, 약자 학대, 가족갈등, 부정부패, 남녀불평등, 조폭사회, 양극화 현상, 경쟁심리조작, 공격성향의 팽배, 종교의 물신화, 이주노동자 학대, 심각한 노조탄압, 마구잡이식 토건개발, 외모지상주의, 사학비리의 천국, 핵발전소 이권 야합, 정치적 매카시즘 등의 개인적 혹은 사회적 갈등구조는 자기기만 행동의 사회적 결과로부터 야기된 것임을 이 책을 통해 이해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이 책에서 지적한 자기기만의 양태가 한국의 대통령의 모습과 똑 닮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더해 보자. 남을 속이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이 든다. 트리버스는 기만의 비용을 세 가지로 본다. 첫째 인지부하가 크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거짓말할 때 머뭇거리거나 떠듬거린다. 그리고 초조해지는데, 이를 숨기거나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치미를 떼거나 남 탓을 더 한다. 혹은 남을 부정한다. 자기기만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대신에 남의 의견을 거부하고 부정하며 오히려 남의 의견에 대하여 강하고 과잉된 반응을 한다.(33쪽) 박근혜는 최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통령에 대한 외부의 비판 일체를 부정하면서 그런 행위에 대하여 <일벌백계>한다는 봉건적 왕권의식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박근혜의 일벌백계론은 하나를 본보기로 처벌하여 대중들 모두에게 경각심을 고조한다는 것인데 이런 강한 표현법은 자신의 의도를 숨기려는 과잉반작용의 한 사례이다. 트리버스는 박근혜식의 반응양태를 “과잉통제”라고 한다. 자신의 기만이 들킬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과잉반응을 유도하며 과잉반응을 숨기기 위하여 과잉통제로 자신의 감정을 포장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park_guen_hye2009

물론 대통령의 과잉통제는 쉽게 노출되지 않을 정도로 매우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의 기만이 자기기만으로 발달되었기 때문이다. 자기기만은 기만의 성공도를 높이기 위해 발달된 양상이다. 자기기만으로 나타난 “기만에 능한 사람은 감정억압 기제도 같이 발달한다.”(35쪽) 기만행위자는 자기 자신의 행위를 믿는 정도가 자기기만자보다 떨어진다. 즉 자기기만의 발달단계에서 기만자는 지나친 자신감(과신)을 표출한다.(38쪽) 과신이 있어야만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게 하고 속임수를 계속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신과 과잉반응은 누가 뭐라고 말해도 관계없이 자신의 행위를 지속시키는 기만적 장치라고 트리버스는 잘 말해주고 있다.

자기기만에는 다음과 같은 9가지 양태가 있다고 저자 트리버스는 말한다.(42-53쪽)
1. 자기기만은 자기 부풀리기를 동반한다.
2. 자기기만은 남을 폄하하고 자화자찬하려는 숨겨진 의도를 갖는다.
3. 나와 너, 내집단과 타집단을 분리하여 상대를 배제한다(배제의 원리)
4. 자기기만의 권력은 편향되고 부패해진다.
5. 자기기만은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다가 결국 도덕적 위선으로 빠진다.
6. 같은 정도의 위험이라 할지라도 불확실한 위험보다는 확실한 위험을 더 편하게 생각한다.
7. 상대방을 통제할 수 있고 통제를 보다 더 잘 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통제착각)
8. 자기기만은 자기만의 이야기를 꾸미면서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9. 자기 자신의 권력에 종속된 집단의 자기기만을 유도한다.

이번 박근혜 게이트의 배우 중의 한 사람인 고영태는 스스로 말하기를 “유명한 대기업 간부들조차 자기에게 굽실거린다“고 말할 정도다. 부도덕한 기만행위자의 개인적 위안감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반영한 사례이다. 기만에서 자기기만으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기만행위의 신경생리학적 가소성plasticity이 작용한다. 쉽게 말해서 거짓말도 자주 하고 오래 하면 는다는 뜻이다. 저자는 기만의 가소성을 신경생리학으로 설명한다. 두뇌 피질 중에서 백질(white matter) 부위가 있는데, 이 부분은 신경세포체가 아니라 신경세포의 가지인 수상돌기(dendrite)와 그 부위에 양분을 공급하는 신경아교세포 부분이다. 이 부분은 사용하면 사용하면 할수록 더 증가되고 사용을 멈추면 축소되는 성질이 있다. 즉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학습하거나 연습하면 할수록 그 행동연관성 신경세포가 증가한다. 마찬가지로 거짓말을 하면 할수록 는다. 거짓말을 할 때 활성화되는 부위의 백질이 증가한다는 경험보고를 저자는 강조한다.(105쪽) 박근혜 자신은 스스로 기만행위를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깊은 자기기만에 빠질 경우 본인 스스로 기만이라고 판단하지 않거나 기만이라고 판단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기기만이 오래 갈 경우 해리disassociation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광신도적 종교 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해리현상에 빠져 있다. 그 스스로 하는 행위의 기만성을 스스로 알아채지 못한다. 이런 증상은 자기기만의 전형적인 현상이다. 자기기만을 더 깊이 천착시키기도 하는데 이는 관련자들의 아부와 아첨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 더 깊이 천착된 자기기만은 자기 자신을 재구성하고 재구성된 자기를 기억이라는 장치로 합리화시킨다. 쉽게 말해서 기억이 조작된다는 뜻이다.(232쪽) 자기의 재구성이란 개인의 서사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서사를 창출한다는 것은 가공의 자기를 만들어서 자기 스스로 자기를 해리disassociation시키는 것이다.

해리상태에 이른 자기기만된 자기는 어리숙하게 굴기도하면서 주변 상황파악을 못하는 척하면서 뻔뻔한 행동을 하는 데 능해진다. 또한 자기가 속한 집단의 분위기(혹은 사회적 이념)를 조작하는 합리화를 한다. 나아가 자신의 기만을 남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먼저 상대를 강하게 공격한다. 저자 트리버스는 이런 증상을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이라고 말했다.(117쪽) 또한 자기기만의 병증은 광신도들이 가지는 극도로 편향된 주술적 성향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자기기만의 주술적 성향이란 자기 개인의 내부적 심리상태를 우주적 통일성으로 대체하는 가상세계에 빠지는 경향을 의미한다. 트리버스는 이를 “우주적 의식의 특권화”라고 표현했다.(461쪽) 우주적 의식으로 가장한 한국 대통령의 초월적 자기기만의 심리상태의 특징은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몰이성적 행위를 정당화하며 ‘우리는 옳다“라는 주술적 자기기만의 형태와 유사하다. 이런 자기기만의 양상은 모종의 갈등이 생겼을 때 혹은 자신의 기만행위가 탐지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조직적으로 남 탓을 하고 분리주의를 유도하며 결국 자화자찬과 상대비난에 ’빠진다‘.(463쪽)(주2) 

트리버스가 말하는 우주적 의식의 특권화에는 “거짓역사 서사”가 있다.(10장) 거짓역사 서사란 집단수준에서 집단적인 거짓말을 공유하고 집단거짓말에 스스로 참여하여 거짓서사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거짓말을 하고 스스로 기꺼이 속는다. 이를 통해 집단의 동일성을 확인한다. 구성원이 어릴 때부터 집단교육을 받으면서 집단의 거짓교육에 순응하게 된다. 자기가 자기 자신의 과거에 대하여 하는 거짓말도 포함한다. 집단 내 극단적 이기주의도 서로 합리화한다. 집단 내 상대의 비리를 묵인하거나 격려하여 자신의 비리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온다.

주2) 여기서 서평자는 ’빠진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일반적으로 이는 능동성 행위가 아니라 수동적 행위일 경우에 사용된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기만 행위는 능동성 행위이다. 그래서 기만행위에 대하여분명한 법적 책임이 지워진다. 그 근거로서 자기기만의 경우에도 자기기만 행위자의 전두대상피질(ACC Anterior Cingulated Cortex)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권위기반 자기기만이나 주술적 자기기만 행위 역시 의도적 기만과 같은 능동적 행위이다. 

3. 편향과 인지부조화

이 책은 자기기만의 사회-진화심리학적 배경을 다루고 있다. 자기기만은 진화적 형질의 결과이다. 기만의 성공여부는 자신의 기만이 들통 나지 않도록 즉 남이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것에 달렸다. 인간에게서 이러한 기만형질은 인간의 언어 능력보다 더 오래된 진화적 형질이라고 저자 트리버스는 쓰고 있다.

인간 본성 가운데 기만을 알아채는 능력이 따라서 진화되었다고 트리버스 교수는 말한다. 다시 말해서 기만하는 자와 기만당하는 자 사이의 공진화적 투쟁이다. 이런 점에서 지능과 기만은 상관성이 높다고 한다. 사람들이 남들로부터 기만을 당했을 때 더 이상 기만을 당하지 않으려는 경고의식을 배우게 된다. 이는 일종의 지능상승의 효과이다. 성공적인 사냥을 위해서 혹은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탄생한 위장술은 자기 혹은 집단 생존과 번영을 위한 사회적 전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기만을 당하는 경우 분노를 표현하고 이는 기만을 진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기만 방지 사회의 규범을 만들게 된다. 이는 사회적 윤리 형성과 깊이 연관된다고 한다.

자기기만은 신경생리학적 신체기관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무의식적 자기 인정은 자기기만으로 유도되는 경우가 많다. 자기자립심, 자존감은 자기인정 감정에서 시작하며 이는 자기기만에서 극대화를 이룰 수 있다. 드러낸 자기존중과 숨겨진 자기존중 사이의 상관성을 말하고 있다. 이 점에서 트리버스만의 독특한 시니컬한 필체를 엿볼 수 있다. 인간의 어두운 면을 솔직하게 보여준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사실의 측면에서 아직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자기합리화를 하는 경우는 매우 일상적인 삶의 모습들이다. 자기합리화는 자기기만의 전단계이다. 이런 점에서 자기기만은 마음의 면역계라고 말한다. 자기기만은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를 스스로 창조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한쪽 뇌반구를 자신의 또 다른 뇌반구로부터 숨길 수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오는 것, 그것이 바로 기만행위이라는 것이다.

가족 간 그리고 남녀 간에서 일어나는 자기기만의 현상은 관심이 더 가는 주제였다. 가족 내 자기기만은 분열된 자아를 초래한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갈등에서 부모는 자기기만의 증상을 보인다. 어른은 자신이 어른이라는 권력을 이용하여 아이에게 일방적 권리를 주장한다. 부모라는 지위를 더욱 강화하여 양육에 필요하지 않은 지나친 권력의 요소를 가미하여 아이를 통제하고자 한다. 이런 권위와 권력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행사하는 기만의 일종이다. 이는 부부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남편은 남편이라는 주어진 권력구조에 스스로 빠지고 만다. 이로부터 부부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한다. 남녀관계를 다루는 측면은 더 흥미롭다. 남자와 여자는 공진화하는 서로 다른 두 생명종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다. 상호 자기기만의 정도가 심하여 마치 다른 생명종과 같다는 트리버스만의 메타포이다. 월경주기에 대한 기만, 성적 관심을 우회하는 방식, 동성애와 동성애를 회피하려는 남성의 억제력, 결혼에 대한 의미, 환상과 그에 대한 배신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기존 임상심리학에서 많이 연구되어 온 편향확증의 문제들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고 있다. 편향된 정보해석, 편향된 기억, 편향된 판단, 편향된 추측 등의 편향확증의 문제를 자기기만의 상태와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억제와 투사, 즉 부정하려는 억제의 심리상태와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는 투사의 심리상태는 기존의 것을 보전하거나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기인하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회피하려는 의도와 연관한다고 말한다. 이로부터 인지부조화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제 현실을 왜곡하여 자신의 생각으로 현실을 포장하는 일이다. 그리고 포장된 현실을 실제 현실로 굳게 믿어버린다. 트리버스는 이런 구조를 진정으로 이해할 때 개인적 인지부조화의 부작용들을 방지할 수 있다고 한다. 개인의 인지부조화로부터 야기되는 사회적 갈등들을 타개할 수 있는 대안도 마련될 수 있다고 한다. 일상생활에서 자기기만 현상들이 도처에 깔려있다. 주식시장에서의 성공환상, 국회의원 후보들의 한결같은 승리 도취감, 자신의 일을 멋있게 포장하는 우월감 혹은 허풍의 행위 등등 수없이 많다.

4. 트리버스가 본 정치적 자기기만의 사례

미국인으로서 트리버스는 미국의 잘못된 역사의 이야기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으로 진보적 학자도 아니면서 미국의 편향적 정치외교 풍토를 비판적으로 서술한다. 소규모 전쟁들과 지역 대리전쟁들을 통한 통제의 역할이 무엇인지, 왜 미국 역사교과서는 중립성이 취약한지, 나아가 이스라엘 국가의 창설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각 나라마다 지난 역사에서 발생한 대학살의 과거를 왜 부정하는 지 말하고 있다. 나아가 나치 등에서 발생한 인종청소의 대학살의 역사, 기독교의 시오니즘과 아랍의 자기기만 형태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이러한 오도된 역사는 왜 발생하는지 트리버스는 자신의 자기기만 이론으로부터 끌어내온다.

자기기만은 민족 간 전쟁 유발의 요소라고 본다. 이는 침팬지의 기습공격의 연원과 맥을 같이 한다고 말한다. 불행의 역사를 만들게 된 인간의 전쟁은 결국 자기기만으로부터 온다는 점이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전쟁도 여기에 속할 수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 가자 지구에서의 학살사태도 여기에 속할 수 있다고 본다. 트리버스가 한 말은 아니지만 서평자의 입장에서 현재 시리아 내전은 현 정권 집단의 자기기만 행위의 절정을 보여주는 사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태들은 지구 곳곳에서 그리고 우리 역사 한가운데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도 이와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고 한다. 어떤 경우 종교는 자기기만의 처방전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우리는 종교에서 자기정당화로 인해 큰 전쟁으로 치닫는 경우들을 보아왔다. 이는 자기기만의 집단적 귀결이다.

현대사회는 곳곳에서 정의를 외치고 있지만, 정의는 권력자의 자기기만의 도구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원시사회 이상으로 자기기만의 부작용이 크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학문적 진실은 이러한 기만적 정의를 폭로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이 트리버스의 생각이다. 생물학에서, 경제학에서, 심리학이나 문화인류학에서 그리고 철학과 역사학에서 그러한 기만의 정체를 대중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자기기만에 스스로 빠지지 않고 또한 타인의 기만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고민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한다. 속임수를 통해 남을 꺾고 이기려는 타인 기만과 타인 기만의 성공도를 더 높이는 자기기만이 팽배해지면 그 사회 전체의 존속이 위태로워진다고 저자는 경고한다. 이는 과잉자만심과 연관한다. 예를 들어 과잉자만심의 사례로서 국수주의 애국심은 역사를 지우려는 집단심리의 폭탄과도 같다고 트리버스는 말한다. 이런 집단성 편향은 결국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 길로부터 멀어진다. 자기기만의 허울을 벗는 것이야말로 인간도덕의 지향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스스로 자기기만의 굴레를 벗기가 쉽지 않다. 기만행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기만을 느끼지 못하거나 반성 자체가 없는 사람들의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 역시 습관화된 자기기만의 결과이다. 트리버스는 자기기만에 맞서야 할 것을 말한다. 그것만이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개인의 정신적 공항, 충동성, 환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 집단의 전쟁, 외교 분쟁의 실마리도 여기서 찾아야 한다. 자기의 정신적 편향성을 교정하는 노력에서부터 시작한다. 트리버스의 표현대로 말해서 “끝나지 않는 광시곡”, 자기기만의 어리석음을 벗어나는 일이 평화로 이르는 길이다. 특히 한국에 사는 우리들은 그런 자기기만의 어리석음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우리는 평화를 찾기 위하여 기필코 대통령이 연주하는 광시곡의 무대를 하루빨리 철거해야 한다.

<저자 소개>
저자 로버트 트리버스는 러트거스Rutgers 대학교 인류학과 생물과학 교수이다. 트리버스 교수는 생물학에 기반한 대표적인 진화심리학자이다. 그는 갈등구조와 협동성, 권위와 자기기만 행동유형의 연구성과로 2007년도 생명과학 분야 크래이푸어드Crafoord Prize 상을 수상했다. 그는 자신의 자기기만 행동을 스스로 인정하는 등, 시니컬하면서도 사회적 협동성에 관심이 많은 독특한 스타일의 지식인이다. 정치적으로 인종불평등과 편향된 정치권력구조를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독설가로서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사회과학적 현실 이해방식은 항상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정당성있는 이론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는 70년대 이후 진화심리학의 과학적 초석을 마련한 최고의 생물학자로 인정받고 있다. 사회에 관심있는 진화생물학 연구자라면 누구나 읽고 가야할 최근작 <Natural Selection and Social Theory>(2002)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는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서 역사와 인간과 사회 그리고 생물학을 연결하는 다중적이고 통합적이며 초학제적 학문연구의 범례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