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드리언 리치(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2.  <피, 빵, 시>, 에이드리언 리치(下)

“위치의 정치학을 향하여”

 

정유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미국 산타 크루즈(Santa Cruz) 길가에 그려져 있는 에이드리언 리치 초상화)

 

  • 니카라과 혁명과 흑인 페미니즘

1980년대 들어서면서 미국의 페미니즘은 다음과 같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 첫째, 무엇보다도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로널드 레이건의 집권 이후 1980년대 내내 언론·종교·대중문화·정치 등의 영역에서 페미니즘 운동에 반발하는 백래시(backlash)에 시달렸고 낙태를 둘러싼 이슈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이 가장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둘째, 냉전 체제 속에서 국제적인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미국 정부의 타국에 대한 내정 간섭은 국제적인 정세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해 미국 여성들과 남미 여성들의 국제적인 연대 또한 위태로워졌다. 특히 1979년 7월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Frente Sandinista de Liberacion Nacional)은 혁명을 통해 니카라과의 소모사(Somoza) 독재정권을 타도했지만, 니카라과의 좌경화를 우려하며 남미를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기를 원하였던 미국 정부는 니카라과 내 반혁명세력인 콘트라(Contra)를 지원하였으며 그 결과 1980년대 내내 니카라과는 내전에 시달려야 했다. 무엇보다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에서 니카라과 여성들은 무장봉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독재정권뿐만이 아니라 가부장제로부터 해방된 사회를 건설하는 기획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반혁명세력과 이를 지원하는 미국정부에 대항할 수 있는 페미니스트들 간의 국제적인 연대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였으나 80년대 페미니즘의 백래시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미국의 페미니즘은 니카라과 혁명이라는 이슈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했다.

셋째, 미국의 페미니즘은 내부적으로 여러 분파들로 나뉘었고, 무엇보다도 제2물결 여성운동에 참여하였던 흑인여성들이 흑인운동 내에서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도 흑인 여성들은 주변화되어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흑인여성들에게 젠더와 인종 문제는 중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에 단지 백인 중산층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흑인 여성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의 시간 속에서 1984년 에이드리언 리치의 「위치의 정치학을 향하여(Notes toward a Politics of Location)」가 발표되었다. 이 글에서 리치는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우리’가 누군지, 그리고 ‘우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여성들이 단일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질문함으로써 여성운동의 위기에 응답하고자 하였다.

(니카라과 혁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여성들)

 

  • 타자와 몸의 위치성

미국이 니카라과 내전에 깊이 개입되어 있는 상황에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단지 “여성으로서 나에게 국가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을 피력했다. 오히려 리치는 “여성으로서 나에게는 국가가 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미국의 국가주의에 동조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지도 위에 그려진 미국이라는 공간에서 태어나고 자라나며 그 속에서 정체성을 만들어 나간 자신에게도 미국이 관여하고 있는 니카라과 내전과 그 내전이 일으키는 비참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리치에게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것은 곧 타자에 대한 자신의 책임성을 인식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때의 위치는 단지 물리적인 위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치는 언제나 역사적으로 구성된 공간이었으며, 위치의 역사에는 타자들의 역사도 포함되어 있다.

여성으로서 나에게는 국가가 있다. 즉 여성으로서 나는 단지 정부를 비난하거나, 혹은 “여성인 나의 조국은 전 세계다”라고 3번 말한다고 해서 국가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민족적 충성심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리고 국민국가가 지금으로서는 오히려 다국적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얻는데 이용하는 구실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지도 위의 한 장소가 어떻게 또한 여성으로서, 유대인으로서, 레즈비언으로서, 페미니스트로서 내가 만들었고 또 만들려고 애쓰고 있는 역사의 한 장소인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는 흑인 미국 시민들의 글에서, 그들의 행동, 연설, 설교들에서 내가 그들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있는 한 위치의 지점인 나의 백인성이라는 의미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또한 오늘날의 쿠바 여성들이 쓴 시를 읽으면서부터 누가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나의 시각 및 생각의 방식을 형성했던 하나의 위치, 또한 내가 책임질 수 있는 하나의 위치로서 북아메리카인이라는 의미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나는 작고 가난한 나라이자 빈곤을 뿌리뽑기 위해 4년을 바친 사회인 니카라과를 여행하고 있었다. 니카라과와 온두라스의 경계선이 되는 언덕 아래에서 나는 등 뒤로 북아메리카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무게, 미국의 군사력, 미국의 엄청난 화폐 전횡, 미국의 매스미디어 등을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즉 내가 반체제 인사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권력의 부츠를 한껏 치켜올린 미국인의 한 성원으로서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으며, 우리가 남아메리카 전역에 드리운 차가운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지도 위에서 내 몸이 놓인 위치를 인식하는 것은 곧 몸 자체에 대한 질문, 즉 내 몸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내 몸은 어디에 있으며, 내 몸은 무엇으로 보이는가와 같은 질문을 요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는 순간 몸은 단일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으며 특이하고 다양한 것들의 집합체임을 발견할 수 있다. 몸에는 변형되고 변색되고 손상되고 손실된 부분, 그리고 쾌락을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존재한다. 또한 몸의 피부색, 임신의 흔적 여부, 중산층으로 치과의 진료를 받은 치아의 흔적들은 내 몸이 특정한 역사의 지형을 지나왔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지형은 단일하지 않다. 여성으로서뿐만 아니라 백인으로서, 유대인으로서, 레즈비언으로서 다양한 정체성들이 혼합되어 있는 흔적들이 몸에 새겨져 있다. 이처럼 몸을 통한 사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단지 성별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인종, 계급, 그리고 섹슈얼리티의 관계 안에서 복합적으로 구성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끔 한다.

위치의 정치. 나의 몸에서 시작한다 하더라도, 나는 처음부터 그 몸이 하나의 정체성 그 이상을 갖는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내가 산부인과 병원에서 세계로 옮겨질 때, 나는 여자로 간주되고 여자로 취급받지만, 또한 백인으로 간주되고 백인으로 취급받는다. 그 사람이 흑인이든 백인이든 모두가 나를 그렇게 취급한다. 한 명의 흑인 아이가 인종과 성별에 의해 위치지어지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것은 내가 인종과 성별에 의해 위치지어진다는 것이다. 비록 백인 정체성이 지닌 의미가 백인은 우주의 중심이라는 가정에 의해 신비화되었을지라도.

(여성운동에 참여하는 흑인여성들)

 

  • 정체성에 대한 인식에서 차이에 대한 인식으로

이 글에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더이상 여성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에 대한 믿음이 지속되기 어려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여성이라는 정체성과 여성들의 공통성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으며, 전세계의 모든 여성들의 고양된 의식과 함께 해방된 세상을 창조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시기에 에이드리언 리치는 더 이상 ‘우리’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오히려 미국의 페미니즘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우리’라고 말하는 경향은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자의 경험을 삭제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타자를 대신하여 말할 수 있다는 오만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자신의 몸에서, 지도 위의 위치에서,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서 많은 차이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여성운동을 지탱해온 ‘우리’, 그리고 단일한 정체성으로서의 ‘여성’은 더 이상 존재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오히려 타자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또 다른 기제임을 확인한다. 오히려 차이들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타자에 대한 인식 속에서 우리 또한 특정한 위치 속에서는 억압 기제의 일부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을 에이드리언 리치는 페미니즘 위기의 시기 속에서 새로이 발견한 페미니즘의 방향으로 이해했다. 이런 점에서 에드리언 리치의 「위치의 정치학을 향하여」는 제2물결 페미니즘 이후를 고민하는 페미니스트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주디스 버틀러, 찬드라 모한티, 로지 브라이도티 등 많은 현대의 페미니스트 사상 속에 에이드리언 리치의 언어와 고민들이 스며들게 되었다. 그녀에게 ‘우리’를 상실하는 것, 더이상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공통되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신념과 희망의 상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우리’의 상실을 “계속 나아가기 위한 투쟁으로서, 그리고 책임을 향한 투쟁”의 토대로 만들고자 하였다. 페미니즘이 단일한 ‘우리’의 정체성으로 확립될 수 없으며, 타자에 대한 책임을 수반해야 한다는 그녀의 생각은 페미니즘의 지평을 확장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그녀의 생각은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증명되고 있다.

 

  • 두 편에 걸친 에이드리언 리치의 글 어떠셨나요?
  • 다음으로는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가 연재됩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⑤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플라톤 대화편의 고전 그리스어 텍스트의 모태는 19세기 초 독일의 고전문헌학자 베커(I. Bekker)가 유럽의 유수 도서관들을 찾아가며 그곳에 산재해있었던 수많은 중세 양피지 사본들(vellum codex)을 비교 교열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여러 해에 걸쳐 펴낸 이른바 베커판 교정본(校訂本)(1816-1823)이다. 이 후 여러 종류의 추가적인 교정본들이 후속해서 나왔는데 그 가운데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 가장 표준적인 텍스트로 채택되고 있는 교정본이 1902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펴낸 <플라톤 전집>(Platonis Opera) 이른바 버넷(J. Burnet)판 교정본이다. 그런데 이 책이 출간된 지 101년 후인 지난 2003년에 그간의 연구 성과를 반영한 새로운 옥스퍼드대학 판 교정본(S. R. Slings 편찬)이 출간되었다. 이 새 교정본을 보면 <국가>의 고전 그리스어 텍스트 역시 여러 곳이 수정되어 있다. 그런데 수정한 내용들이 대부분 소소한 것들이라 내용상 크게 주목할 만한 부분은 많지 않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기초 원전 텍스트가 달라진 터라, 1997년 버넷판을 텍스트로 삼아 <국가> 우리말 원전 역본을 펴낸 박종현 선생도 이러한 수정 부분들을 꼼꼼하게 반영하여 2003년에 <국가> 개정증보판을 새로 펴냈다. <국가> 박종현 역본의 본문 내용 중 *표 표시를 한 부분들이 새로 수정된 부분인데, 책 말미를 보면 달라진 부분들에 대한 고전어 텍스트 상의 근거가 부록으로 함께 실려 있다.

* 폴레마르크스가 소크라테스 일행을 불러 세워 체류를 권하는 부분[327c]에도 그러한 수정 내용이 들어 있다. 1997년판 박종현 역본에는 “그렇다면 아직도 한 가지가 남아 있지 않겠소?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보내 주어야만 되게끔 설득할 수 있을 때의 경우가 말이오.”로 번역되어 있지만, 2005년 개정판 역본에는 “그러면 아직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보내 주어야만 되게끔 우리가 설득하게 될 경우가 남아 있지 않소?”로 바뀌어 있다. 이것은 버넷판 텍스트에서 두 단어로 분리되어 실려 있는 ἓν λείπεται(한 가지가 남아 있지 않겠소?)라는 구절이 새 텍스트에서는 ‘하나’의 뜻을 가진 ἓν을 후속 동사에 붙여 그냥 ελλείπεται(남아 있지 않겠소?) 한 단어로 수정된 데에 따른 것이다. 내용 상 ‘한 가지’라는 뜻이 없어진 것이다. 사실 고전학자들 사이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이 부분을 ἓν λείπεται로 볼 것이냐 ελλείπεται로 볼 것이냐 논쟁이 있었는데 결국 새 교정본에서는 ελλείπεται쪽을 택한 것이다. 이렇듯 고전학자들은 텍스트 상의 단어 하나하나를 따져가면서 과연 어떤 것이 플라톤 당대의 텍스트와 일치하는 것인지를 두고 지금도 씨름하고 있다. 그런데 이 수정 부분은 내용적으로도 왜 그런 수정이 이루어졌는지 눈여겨 볼만한 사안들이 포함되어 있다. 전후 내용을 보면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라테스 일행을 불러 세워 대짜고자 ‘우리가 몇 명인지 아시냐? 우리 보다 더 강하시면 청을 물리치고 시내로 가시고 아니면 이곳에 머물러 달라’는 식으로 요청하자 소크라테스는 설득이라는 방법이 있는데 왜 그리 무턱대고 강권하느냐고 반문한다. 이에 폴레마르코스는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설득이 통하겠느냐’는 식으로 다시 반문하고 글라우콘이 ‘결코 그럴 수는 없다’고 대답한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이 장면은 플라톤이 앞으로 전개될 트라쉬마코스와의 만남을 예고하는 일종의 복선으로 여겨지는 장면이다.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가로 막고 나선 다음, 소크라테스의 말은 아예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펴다가 소크라테스의 비판에 밀려 겉으로는 고분고분해지지만 속으로는 끝까지 설득되지 않은 채 자기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이 장면에서도 폴레마르코스는 마치 트라쉬마코스처럼 처음부터 막무가내 힘으로 길을 막고 서서 자기 요구를 내세우고 있고 소크라테스는 설득의 방법도 있다고 반문하지만 그는 아예 설득할 받아들일 생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고 대꾸한다. 이럴 경우 과연 소크라테스로서는 어떻게 대응해야할까? 설득이 받아들여질 수 없다면 그냥 강압에 밀려 폴레마르코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곳의 경우처럼 함께 구경을 하자는 수준의 강권이야 크게 문제 삼을 것은 없겠지만, 트라쉬마코스의 요구처럼 정의와 행복의 관계를 묻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서는 결코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결코 굴복을 거부하고 마땅히 그에 맞서 싸우는 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설득을 접고 제2권부터 그의 입장을 압도하고 남을 만한 대안적 주장을 제시한다. 트라쉬마코스는 자신의 주장이 완전히 논파되었음에도 속으로는 여전히 근본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를 통해 ‘아집이란 비록 논파는 될 지라도 결코 파괴되는 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 부류의 주장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이란, 합당하고 설득력 있는 근거를 내세워 사태를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주장을 받아들이게 하여, 그 주장의 정당성을 사회적 변화의 동력으로 관철시키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이 <국가> 제1권에서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제2권 이하에 대한 철학적·문학적 함의이다. 이렇게 보면 이곳에서도 폴레마르코스의 강권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소크라테스에게 설득 한 가지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 설득 한 가지만 남아 있다면 그게 실패할 경우 강제에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된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입장에도 맞지 않는다. 그리고 이 부분이 앞으로 전개될 상황을 예고하는 복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부분이라면 더더욱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해당 부분 텍스트의 수정이 이루어졌을지 모른다. 그렇게 보면 그것은 매우 의미 있는 합당한 수정이 아닐 수 없다.

* 그래서 아테이만토스는 폴레마르코스가 강권하는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느꼈는지 바로 대화에 끼어들어 다른 방식으로 소크라테스의 체류를 권한다. 아테이만토스의 말에 소크라테스가 새로운καινόν 것이라고 관심을 보이자 폴레마르코스도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그의 말을 거들고 글라우콘도 소크라테스에게 머물기를 권한다. 폴레마르코스도 최소한 소크라테스가 젊은 사람들과 대화 나누는 것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서둘러 돌아가려한 것으로 보아 시간은 저녁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의 제안대로 축제 현장이 아니라 그 전에 일단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폴레마르코스의 집으로 간다. 그곳에서 소크라테스는 폴레마르코스의 아버지 케팔로스와 만나 인사를 나눈다.

 

  1. 케팔로스와 대화(328b~331d)

 

2-1(328c-328e): 소크라테스 케팔로스를 만나 노년의 즐거움을 묻다.

 

[328c]

* 그런데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일행의 수를 내세워서까지 가는 길을 막아선 이유가 단지 마상 횃불경주와 철야제 구경을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아무래도 어색해 보인다. 사실 폴레마르코스의 제안에 따라 집으로 오게 되었지만 전후 상황을 보면 케팔로스가 아들 폴레마르코스를 시켜 구경 안내를 핑계로 소크라테스를 집으로 불러들인 것이라고 봐도 이상할 것이 없다. 케팔로스 이외에 여러 사람이 그곳에 함께 있는 것도 눈여겨 볼 일이다. 사실 당시 아테네의 유명 정치가나 부유층의 집은 소피스트들을 비롯해서 당대 많은 유력 인사들이 드나들거나 머무는 일종의 고급 사교 무대였다. 페리클레스의 집에 수많은 소피스트들이 아예 식객으로 늘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캐팔로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친구나 친척처럼 자주 찾아달라고 말하는 것도 다른 소피스트나 유력인사들이 그러하듯 소크라테스도 그러기를 바랐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케팔로스는 당대 아테네 여러 유력인사들은 자기 집에 자주 드나드는데 유독 소크라테스만은 그리하지 않아 서운함을 느꼈을 것이다.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를 기다렸다는 듯 반기면서 ‘실은 자주 찾아와야만 한다.’χρῆν μέντοι.(328c), ‘이제 더 자주 당신이 이리로 와야 한다.’νῦν δέ σε χρὴ πυκνότερον δεῦρο ἰέναι.(328d)는 말로 반복해서 강권하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모습도 그러한 서운함 때문일 것이다.

* ‘내가 오랜만에 그 분을 뵌 탓이기도 하지.’διὰ χρόνου γὰρ καὶ ἑωράκη αὐτόν. 케팔로스가 아주 늙어보였다는 앞의 말과 더불어 이 말은 소크라테스와 케팔로스가 서로 상당 기간 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사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소피스트들이나 유명 인사들처럼 케팔로스 같은 유력 인사들 집에 드나들기를 좋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케팔로스 역시 자기가 기력이 있으면 소크라테스를 찾아갔을 것이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지난날 그 긴 시간 동안 소크라테스를 제 발로 찾아간 적도 없어 보인다. 어쩌면 케팔로스는 거류외인으로 아테네로 건너와서 부를 쌓고 여유자적하고 품위 있는 삶을 보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소크라테스에게 과시하려고 폴레마르코스를 시켜 그를 불러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플라톤은 그러한 케팔로스의 모습을 통해 크게는 상업주의, 부와 가난의 문제를 포함해서 당대 신흥 기득권 부유층의 태도와 사고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이미 고인이 된 케팔로스를 시대착오를 무릅쓰고 하나의 대표적 인물로 대화편에 등장시켰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플라톤의 대화편의 주요 등장인물들 가운데 시인과 소피스트, 장군 등 수많은 사람들 이외에 거류외인이자 상공업에 종사하는 인물은 케팔로스가 유일하다.

* 이런 측면에서 보면 케팔로스의 등장은 <국가> 전체의 구상 하에서 주도면밀하게 도입부를 구성하고자 하는 플라톤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실제로 <국가> 제1권은 당대 신흥 부유층인 케팔로스의 등장과 그의 훈계조의 과시로부터 시작하여, 폴레마르코스의 입을 통해 아테네의 주류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시인들의 주장으로 이어진 후, 트라쉬마코스의 거친 입을 통해 또 다른 당대 신흥 지식인 세력으로 크게 부상한 소피스트의 도발적인 도전을 그려냄으로써 그 극치에 이른다. 이처럼 대화의 목적과 동기는 물론 등장인물의 특징과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플라톤의 아주 섬세하고도 주도면밀한 문학적 철학적 플롯은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이런 점에서도 <국가> 제1권은 <국가> 전체를 이해하기 위한 길잡이가 된다. 정의의 문제를 둘러싼 당대의 도전과 도발들을 어떻게 극복하고 대처해야할 것인지에 대한 원초적인 문제의식과 실마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후에도 계속 강조하게 될 것이다.

* ‘머리에 제관을 쓰신 채ἐστεφανωμένος…. 뜰에서 막 제물을 바쳤기 때문이네’τεθυκὼς γὰρ ἐτύγχανεν ἐν τῇ αὐλῇ. 여기서 제물을 바친 대상은 제우스임이 분명하다. 아테네인들은 집 뜰(ἑρκος)에 제단을 만들어 제우스를 가정을 지키는 신으로도 섬겼다. Ζεὺς ἑρκεῖος는 이 경우에 붙여진 제우스의 이름이다. 이처럼 집에서 제단을 꾸미고 제사를 드리는 모습은 아테네인들의 일상적 삶의 일부였고 그 대부분은 오늘날도 그러하듯이 개인과 가정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 전란의 혼란기에 일반 대중이라면 몰라도 아테네 사회 지도층인 케팔로스가 제사를 드리면서 공동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저 재산에 기대어 자신의 안녕과 사후 구원에 관심을 쏟는 모습에 비판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것은 나중에 호메로스 시가와 시인들에 매달려 있는 아테네인들의 종교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과도 연결된다.

 

[328δ]

* ‘적어도 내 경우에는 육신과 관련된 다른 즐거움이 시들어짐에 따라 그 만큼 대화에 대한 욕망과 즐거움이 증대된다는 사실을 잘 아셔야 한다.’ὡς εὖ ἴσθι ὅτι ἔμοιγε ὅσον αἱ ἄλλαι αἱ κατὰ τὸ σῶμα ἡδοναὶ ἀπομαραίνονται, τοσοῦτον αὔξονται αἱ περὶ τοὺς λόγους ἐπιθυμίαι τε καὶ ἡδοναί. 케팔로스의 이 말은 정신적 즐거움이 육체적 즐거움에 반비례할 뿐만 아니라 육체적 즐거움에 부차적인 것임을 은연 중 내포하고 있다.

* ‘잘 아셔야하오’εὖ ἴσθι, 젊은이들과 ‘어울리시오’σύνισθι, 자주 ‘찾아주시오’φοίτα 이곳 케팔로스의 말에는 명령형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고대 그리스어 긍정 명령형의 용례가 모두 강제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긴 하지만 케팔로스의 말에는 전체적으로 연장자임을 내세워 소크라테스를 내려다보며 훈계조로 강권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 여기서 ‘다른’ἄλλαι이라는 표현은 노인이 되어도 시들지 않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도 있음을 시사한다. 하긴 늙어서도 맛있는 것을 찾거나 다른 위안거리에 집착하는 일은 시들지 않는다. 그래도 이 표현은 그냥 이러 저러한 육체적 즐거움들을 나타내는 용도로 쓰였다고 보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만약 직접적인 ‘다른’의 의미로 썼다면 여기서 ‘시들어가는 즐거움’이란, 전후 문맥상 성적 쾌락일 것이다.

* 아테네에서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라기보다는 대체로 출산을 위한 방편으로 부모와 친척들의 중매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성적 쾌락을 위해 외도를 일삼거나 연애 대상으로 따로 정부를 두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데모스테네스는 귀족이라면 적어도 2-3명의 정부는 있어야한다고까지 말했다고 전해진다. 부부간에 성적인 교감과 정신적 유대의 일치와 상승을 꿈꾼다는 것은 거의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사회적 관습상 부부간의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쾌락의 공존은 구조적으로 이미 기대할 여지가 없다. 오뒷세우스와 페넬로페 부부간의 일편단심과 사랑은 말 그대로 신화적 로망에 불과하다. 요컨대 여성은 장차 가사와 출산, 육아를 위한 일종의 도구이자 재산 정도로 여겨졌던 것이다. 플라톤이 주장한 수호자들 간의 처자공유는 기본적으로 가족이기주의, 귀족 내 자기 혈족주의가 빚어내는 반공동체적 경향에 대한 거부감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출산을 주목적으로 한 당대의 기계적인 결혼관을 기저에 깔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플라톤이 능력에서 여성을 차별하지 않은 것은 당대의 의식 수준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가히 혁명적인 발상이었기는 하나 인격체로서 여성의 성적 자의식과 자기정체성에 관해서는 여전히 시대적 무지의 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328e]

* 소크라테스도 노인과 대화하는 걸 기뻐한다고 말한 후 케팔로스의 삶의 여정에 관해 물으면서 특히 ‘노년의 문턱에 들어선 것이 어려운 고비인지 의견을 구한다.

* 육신과 관련된 다른 즐거움이 시들어짐에 따라 그 만큼 대화에 대한 욕망과 즐거움이 증대된다는 케팔로스의 말에 소크라테스도 ‘실은 저로서도 많이 연로하신 분들과 대화하게 되는 걸 기뻐합니다.’χαίρω γε διαλεγόμενοςτοῖς σφόδρα πρεσβύταις.라고 호응한다. 앞에서 케팔로스가 ‘대화에 대한 욕망과 즐거움’이고 말했을 때 대화의 원어는 logos이고 케팔로스의 말을 받아 소크라테스가 말한 대화의 원어는 dialogos이다. 물론 dialogos에는 일반적인 대화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가 logos라고 표현한 것을 염두에 두고 아마 중의적으로 이 표현을 썼을 것이다. 케팔로스가 원하는 것은 담소이지만 소크라테스가 바라는 건 문답이다.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적 문답을 감당하기에는 이미 기나긴 인생경험을 통해 생각이 굳어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런 노인들의 생각은 경륜의 측면과 함께 아집의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다.

* ’들어서 알아야한다‘에 쓰인 πυνθάνομαι는 ‘듣거나 물어서 아는 것(to learn by hearsay or by inquiry)’을 의미한다. 케팔로스는 앞서 소크라테스에게 훈계조로 강권하다시피 말을 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에게 노년의 삶에 대해 배우되 단순히 수동적으로 듣기만 하는 방식이 아니라 묻고 따지는 방식도 병행해서 배우겠다는 의지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 ‘노년의 문턱’’ἐπὶ γήραος οὐδῷ이라는 말은 <일리아스> 22권 60, 24권 487에서 처음 나타나는 어귀로 부양자가 없이는 따로 살아가기 힘든 단계의 노년 시기를 나타내는 말이다. 인간은 출생의 문턱을 넘어 이생을 살다가 노년의 문턱을 넘어 다른 세계로 떠나는 여행자로 여겨진다. 케팔로스는 아테네 몇 안 되는 부유층으로 집도 여러 채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노년의 문턱을 넘어 장남인 케팔로스의 부양을 받으면 함께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어르신께서 어떻게 알려 주실 것인지’ἢ πῶς σὺ αὐτὸ ἐξαγγέλλεις. 여기서 쓰이고 있는 ἐξαγγέλλεις는 무대 뒤에서 연극의 진행 상황을 말로 알려주는 ‘전달자’를 뜻하는 연극용어 ἐξάγγελος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에게 인생이라는 연극 무대에서 노령의 의미를 알려주는 전달자 역할을 부탁하고 있다.

 

 

“근대 노동자와 21세기 노동자” – 노동과 노동자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⑤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2018. 8. 20.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

 

제5강. “근대 노동자와 21세기 노동자” – 노동과 노동자

 

강연 : 박종성(건국대 초빙교수)

후기 : 김상애(한철연 회원)

 

우리의 삶에 있어서 ‘노동’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끝없는 굴레일까요? 아니면 자기실현을 위한 주체적 행위일까요? 박종성 교수의 이번 강의를 들으며 역사적으로 노동과 노동자가 어떻게 정의되고, 가치 평가되어 왔는지 살펴보고, 특히 맑스(Karl Marx, 1818~1883)의 사상을 바탕으로 ‘노동자로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창세기에 노동은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로 얻게 된 징벌로 적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도 육체적 활동인 노동은 노예계급의 것이라며 저급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노동은 철학적 맥락에서 언제나 부정적인 의미만을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노동은 신의 명령으로서 그 의미가 변화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사유재산 개념의 등장으로, 모든 권리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 그 가치가 격상됩니다.

 

그 이후 등장한 칼 맑스는 ‘노동’과 ‘노동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상가인데요, 맑스는 노동을 인간의 실존조건으로 봅니다. 즉 노동은 인간의 존재에 있어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맑스는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이토록 중요한 노동과 이를 수행하는 노동자를 착취와 소외로 내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맑스에 따르면 노동활동은 노동자의 노동력, 노동대상, 노동수단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여기에서 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을 합쳐 ‘생산수단’이라고 부릅니다. 이를테면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물건은 노동대상이며, 그 물건을 만들기 위한 기계 등은 노동수단입니다. 이 생산수단과의 관계가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을 가릅니다. 말하자면, 생산수단을 가진 자가 자본가이고, 생산수단 없이 자신의 노동력만을 가진 자가 노동자입니다.

 

자본주의 체제를 이루는 기본 세포는 ‘상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노동력 역시 상품으로 봅니다. 맑스는 노동자가 노동력을 판매할 때 이중적 자유가 생긴다고 보았습니다. 한편으로 노동자에게는 자신이 가진 노동력을 팔 것인지를 결정할 자유가 있습니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노동자는 자유로운 것이지요.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노동자는 이 이유로 생존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노동자의 착취구조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자본의 가치증식입니다. 다시 말해 1만큼의 자본을 가지고 1보다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이를 가능케 하려면 제 값보다 더 적은 금액으로 노동력을 구매하면 됩니다. 더 낮은 임금을 지급하는 것이지요.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이 임금이 부당해도 자본가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원리와 노동자의 이중적 자유 때문에 노동자와 자본가는 형식적으로는 대등한 계약 관계라 볼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이기에, 필연적으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노동자가 스스로를 자본가의 적대자로 생각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게으름’을 나쁜 덕목으로 만들고, 스스로를 열심히 일하는 ‘근로자’로 생각하게끔 만들어 노동자 자신의 욕망을 왜곡하고 자본에 복무하도록 만듭니다.

 

물론 맑스는 혁명을 통해,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함으로써 계급을 없애자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관계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실에서 이와 같은 혁명이 단번에 이루어지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착취구조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우리는, 혁명의 낙관도 기대할 수 없는 우리는, 노동자로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오늘 강의를 맡은 박종성 교수는 이렇게 조언합니다.

“먹고는 살되, 내가 신나는[나에게 재미와 의미가 있는] 일을 하며 살자”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④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서론에 이어 본문 강해는 앞에서 밝힌 강해취지에 따라 텍스트를 처음부터 빠짐없이 천천히 읽어가며 주요 부분을 설명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정암학당 현장 강의에서는 텍스트의 일정 단락을 청중들과 함께 읽고 난 다음, 강사가 다시 읽어가며 설명을 하지만, 이곳 강의록에는 본문 내용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텍스트 해당 부분 독서를 병행하며 본 강해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1 ]

 

<세부 목차 >

 

  1. 도입부(327a-328b) :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열린 벤디스 축제 에 갔다가 폴레마르코스의 집에 초대를 받는다.

 

  1. 케팔로스와 대화 : 노년의 즐거움과 재산(328b~331d)

2-1(328b-328c) : 소크라테스, 케팔로스를 만나 노년의 즐거움을 묻는다.

2-2(329a~329d) : 케팔로스의 대답 – 노년의 즐거움은 노령이 아닌 생활방식에서 온다.

2-3(329e~330c) : 노령을 수월하게 견디게 해주는 것이 과연 생활 방식인가 재산인가?

2-4(330d~331d) : 노령의 즐거움과 재산의 관계를 논하다 정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다.

 

  1. 폴레마르코스의 정의(331d~336a)

3-1(331d-332b) : 폴레마르코스, 시모니데스를 인용하여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 정의이다’라고 말하다.

3-2(332b~334b) : 정의는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갚는 것’ 즉 ‘친구들과 적들에 대해 각각 이득을 주고 손해를 입히는 기술’인가?

3-3(334c~336a) : 기능과 훌륭함(덕) – 정의는 사람을 나쁘게 할 수 없다.

 

  1. 트라쉬마코스의 정의(336b~354c)

4-1(336b~338b) : 트라쉬마코스의 저돌적 등장과 소크라테스의 당부

4-2(338c~339a) : 트라쉬마코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고 주장하다.

4-3(339b~340b) ; 폴레마르코스와 클레이토폰이 잠깐 끼어든다.

4-4(340c~341a) : 트라쉬마코스, 통치자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다.

4-5(341a~342e) : 소크라테스, 기술 일반의 특성을 토대로 트라쉬마코스를 비판하다.

4-6(343a~344c) : 트라쉬마코스, 현실론으로 돌아와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다.

4-7(344d~345e) : 소크라테스의 절망과 분노

4-8(345e~346e) : 기술과 그 기술에 수반하는 보수획득술은 구분해야 한다.

4-9(347a~347e) : 통치자에게 보수는 강제나 벌이다.

4-10(348a~349a) : 소크라테스, 검토방식을 재정비. 정의와 부정의는 각각 덕과 악덕.

트라쉬마코스, 정의는 고상한 순진성, 부정의야말로 덕과 지혜.

4-11(349b~350c) : 소크라테스 능가개념을 토대로 정의가 덕과 지혜임을 밝히다.

4-12(350d~352c) : ‘부정의는 강하다’라는 주장에 대한 검토

4-13(352d~354a) :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잘 살고 행복한가?’에 대한 검토

4-14(354b-354c) : 마무리와 탄식

 

<본문 강해>

 

  1. 도입부(327a-328b) :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은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열린 벤디스 축제에 갔다가 폴레마르코스의 집에 초대를 받는다.

 

[327a]

* <국가>는 소크라테스가 어제 나눈 대화를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화는 그가 글라우콘과 함께 아테네 외항 페이라이에우스에서 처음 열리는 트라케인들이 주최하는 벤디스 축제에 갔다가 축원과 구경을 마친 후 돌아오는 모습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 ‘어저께 나는 글라우콘과 함께 페이라이에우스로 내려갔네.’κατέβην χθὲς εἰς Πειραιᾶ μετὰ Γλαύκωνος <국가>의 그리스어 텍스트는 ‘내려갔네.’κατέβην라는 동사로 시작한다. 이 첫말이 갖는 함축을 제7권 서두의 동굴의 비유에서 지혜로운 자가 다시 동굴로 내려가는 상황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학자도 있다. 당연히 동굴의 비유 부분에서도 그 동사가 나온다.(516e) 대화편의 구조를 크게 보면 소크라테스가 페이라이에우스로 내려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주장들을 논박하거나 깨닫게 하여 지혜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소크라테스는 ‘어제’χθὲς 거의 밤이 샐 정도로 오랫동안 토론을 했음이 분명함에도 그에 이어 오늘 누군가에게 그 긴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티마이오스>도 이처럼 ‘어제’ 대화에 이어 오늘도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티마이오스>에서 ‘어제’(17a)했다고 요약 인용되고 있는 이야기가 <국가> 4권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이를 근거로 <티마이오스>의 대화 설정 시기가 <국가>에서 이루어진 대화 다음날이고 그에 따라 <국가>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사람들이 <티마이오스>의 등장인물들 즉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 헤르모크라테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나타났다. 실제로 5세기 플라톤 주석가로 유명한 프로클로스는 이를 근거로 <국가>, <티마이오스>, <크리티아스>를 3부작으로 쓰여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티마이오스>에서 언급된 내용은 <국가> 전체 내용도 아니고 4권의 내용도 일부만을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티마이오스>에서 그 내용이 어제 이야기한 내용에서 빠진 것 없이 그대로라고 말하고 있는데 (19a~b). 이 또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미 <국가>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가 <티마이오스>에서 일부 요약에 불과한 내용을 가지고 그렇게 말했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내용이 플라톤의 핵심 정치사상임을 고려하면 그러한 중요한 내용을 그 날 하루만 표명했을 리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고려하면 두 대화편의 대화 설정시기가 연속적이라는 주장은 신빙성이 희박하다.

* 페이라이에우스Πειραιεύς는 아테네 도심으로부터 8㎞ 떨어진 아테네 외항이다. 페이라이에우스는 페리클레스의 제국화 정책 이후, 국제적인 교역이 급증하고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아테네와 외부지역을 연결하는 핵심 항구이었을 뿐만 아니라 에게 해를 오가는 배들의 기항지로서도 중심적인 기능을 했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면서 그리스의 패권을 둘러싸고 스파르타와의 전쟁 기운이 커지자 페리클레스는 기원전 457년 막강한 스파르타의 육군의 침공으로부터 아테네를 방어하고 아테네 도심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 도심 성곽과 페이라이에우스를 잇는 장성(μακρὰ τείχη)을 구축한다.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가 아티카를 침공하면 지역 농민들을 소개(疏開)시켜 장성으로 피신케 한 후 스파르타 군이 복귀하면 해군을 동원하여 스파르타 해안 마을을 공격하는 전략을 썼다. 그의 이러한 전략은 큰 효과를 거두었지만 앞서 살폈듯이 좁은 장성 내에 수많은 사람들이 집단 거주함에 따라 기원전 429년에는 참혹한 역병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 ‘그 여신께 축원도 드릴 겸’προσευξόμενός τε τῇ θεῷ이라는 말에서 표명되고 있는 여신신은 354a에서 지금 열리고 있는 축제가 벤디스 축제(Bendideia)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벤디스(Bendis) 여신임이 분명해 보인다. 벤디스 여신은 아테네의 아르테미스(Artemis) 여신에 해당하는 트라케 지방의 여신으로서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고대 그리스에는 각 나라마다 숭배하는 주신이 있었고 주신들 이외에도 또 각 도시와 지방, 마을 마다 자신들을 가장 잘 돌봐줄 것으로 여겨지는 각기 다른 여러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그에 따라 그리스 전역에는 국가가 관리하는 신전을 비롯해 지역별, 개인별로 공물을 바치고 안녕을 기원하는 크고 작은 수많은 신전들과 제단들이 산재해 있었고 정기적으로 제의와 축제가 열리곤 하였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종교 생활 즉 제우스를 비롯한 여러 신들에 대한 신앙은 오랜 동안 전통적인 규범이자 관습으로서 그들의 일상적 삶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 신들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호메로스 시가는 그리스인들에게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경전과 다름없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제의와 축제는 물론 공적 기부금까지 동원하여 수시로 펼쳐지는 시가를 주제로 한 합창극·연극 공연은 이러한 믿음을 공유하는 일종의 교양교육이자 세계관 내지 가치관 교육이기도 했다. 이런 측면에서 플라톤의 시가와 시인 비판은 단순한 예술 비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당대 세계관·가치관에 대한 비판적 성찰인 것이다. 수호자 교육에서 시가 교육이 생각 외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문제는 수호자 교육을 다룰 때 보다 자세히 살필 것이다.

* 소크라테스도 위와 같은 아테네의 종교적 전통과 관습에 따라 제의에 참석하여 신들에게 기원을 드리고προσεύχομαι 있다. 이곳에 나오는 ‘본바닥 사람들(ἐπιχώριοι)의 행렬’은 아마도 트라케 사람들의 벤디스 축제를 동반 축하하기 위해 본토 주민들이 펼친 아르테미스 여신 경배 행렬일 것이다. 이미 국제화된 아테네에서 본토 주민과 거류외인이 큰 거리감 없이 매우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 ‘트라케인들’οἱ Θρᾷκες 이들은 본토 주민들과는 구별되는 거류외인들((metoikoi 혹은 synoikoi)로서 대부분 아테네의 상업 장려 정책에 의해 페이라이에우스에 정착한 트라케 출신 즉 발칸반도 동북부에서 내려온 상인들 또는 라우레이온 은광 채굴을 위해 초청된 광산 기술자들일 것이다. 이들의 유입이 늘어남에 따라 아테네는 그들의 관습과 제례도 허락하였고 그런 배경에서 페이라이에우스에 트라케인들의 여신인 벤디스 신전도 세워졌고 축제도 개최되었을 것이다. 벤디스 축제 관련 비각문에 대한 연구 가운데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 결과에 따르면 벤디스 축제가 아티카에서 열린 시기는 기원전 429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만약 이 주장이 옳다면 앞서 살핀 대화편 상정 시기를 최대 429년까지 높여 잡을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Christopher Planeaux, ‘The Date of Bendis Entry into Attica’, The Classical Journal 96.2, December, 2000. pp165-195)

* 아테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주민들은 자유민(eleutheros)과 비자유민으로 구분된다. 자유민은 다시 시민(politēs, 참정권을 가진 완전 시민으로서 성인 남성들과 불완전 시민으로서 그들의 가족)과 비시민(거류외인+ 그의 가족, 시민과 비시민의 자식 등)으로 나누어진다. 이처럼 시민은 곧 자유민이지만 자유민이 곧 시민은 아니다. 그리고 비자유민에는 농노(농업노예)와 가사노예(가정교사, 보모 등)가 있었다. 이러한 계급분화는 그리스의 모든 국가가 정복국가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가 활동하던 기원전 425년 경 아테네의 인구는 시민은 29,000명 그들의 가족은 87,000명 거류외인은 7,000명 그들의 가족은 1,4000명, 농노와 노예는 81,000명, 총 218,000명 정도였다. 완전한 시민권은 곧 참정권(koinōnein archēs)을 의미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테네 민주정은 주민 14%에 해당하는 성인 남성 이른바 완전 시민들만의 민주정이었다.

* 아테네에 타 지역 그리스인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6세기 초 클레이스테네스가 자신의 정치적 배후세력으로서 민중의 수를 늘이려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아테네가 급성장하기 시작한 기원전 480년 이후로 알려져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테네에 거주하는 타 지역 그리스인 출신이 시민이 되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비교적 국제적인 도시였던 코린토스 정도를 제외하면 나라마다 외국인도 별로 없었고 스파르타는 아예 정책적으로 외국인을 추방 또는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만은 해를 거듭할수록 외국인의 수가 크게 늘어나자 이후부터 이른바 metoikos 즉 거류외인이라는 공식명칭이 붙여지면서 법적인 제한이 따르게 되었다. 어떤 이는 metoikos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사용 된 것은 427년 초연된 아이스퀼로스의 연극<페르시아인(Persai)>이었다고도 주장한다. (James Watson. “The Origin of Metic Status at Athens”. The Cambridge Classical Journal 56, 2010. p. 265) 이후 거류외인은 시민권은 취득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자유인으로서 영주권과 전문 직업을 가질 수 있었고 각종 종교행사와 제례에도 참가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참정권을 제외한 기타 공공사업에 권리와 부담을 함께 가졌으며 때로는 군역을 지기도 하였고 일부 부유층은 자비무장인(hopla parechomenoi)이 되어 전투에 나서기도 하였다. 다만 그들은 시민이 아니어서 법정에 설 때에는 한 시민을 보호자(prostates)로 내세워야 했다. 그리고 세금의 경우, 이들은 식솔의 수에 따라 소정의 인두세(metoikion)를 내야했다. 그러나 아테네의 상업 진흥정책에 따라 다른 세금에서는 면제되어(ateleia) 점차 이들의 지위는 향상되었다.(빅터 에렌버그 <국가> 63쪽 참고) 이후 이들의 상당수가 부를 축적하여 아테네 부유층으로 성장함에 따라 그들에게도 공공기부금 헌납(leitourgia: 비극·희극의 상연에 불가결한 합창대 운용비용, 함선의 장비 및 시설 등 공공사업비를 위한 기부제도)이 요구되었고 부정기적으로 과세된 특별재산세(eisphora)의 납부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 중 일부는 아테네의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4세기에 들어서 그들의 부를 이용하여 시민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 시민들 가운데 중추적인 계층은 조상 대대로 이어 받은 토지 소유자로서 2, 3명의 노예를 두고 농업 또는 목축업에 종사하는 중소 자영농들이었고 이에 따라 전통적으로 농업이야말로 자유인에 어울리는 직업으로 여겨졌으며 상공업은 시민이 아닌 자들에게 맡겨졌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이르러 상업이 발달하고 이오니아 등 외지에서 올리브 수요가 급증하자 토지는 식량생산 보다는 부가가치가 높은 수출용 올리브 재배지로 크게 바뀌어 무역업은 물론 그것을 담을 수 있는 도자기 산업도 크게 발달하였다. 이른바 기원전 5세기 아테네 경제는 식량생산과 물물교환 중심의 전통적인 경제 틀에서 벗어나 교환가치 중심의 화폐경제, 상업경제로 급속하게 재편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테네의 변화는 농업경제 중심의 전통적인 시민적 삶의 방식을 해체하는 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업주의적 재편은 특히 페리클레스 등장 이래 아테네가 제국화되면서 전통 그리스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그에 따른 혼란과 내분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이 되었다. 당대 주변 국가들 특히 아테네와 패권경쟁을 하던 스파르타인들에게는 농업을 통한 자급자족 이외의 상업주의적 부의 축적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 승리 이후 동맹국으로부터의 조공에 힘입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였지만 장기적인 경제입국을 위한 비축과 투자 개념은 희박했고 대부분의 경비가 파르테논 등 대규모 신전 건축을 포함하여 시민들의 정치 참여 및 배심원 수당으로 지출되었다. 예산개념도 따로 없었고 실제로 근대국가가 재정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몇몇 분야( 예컨대 공교육, 공공수송 등 사회간접자본)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군비를 비롯한 나라에 필요한 경비 또한 기본적으로 동맹국의 조공과 국가가 관리하는 신전의 공물 그리고 부유층의 공공기부제(leitourgia)에 크게 의지하였다. 그리고 나라가 시민에게 세금을 물리는 것은 최대한 자제되었으며 직접세는 필요할 경우 민회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이에 따라 비교적 상시적인 세입의 주요항목은 무역업의 증대로 생긴 관세 수입정도였다. 아테네는 최소한 재정운용에 한해서는 오늘날의 최소국가와 소비주의를 지향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페리클레스 사후 실권을 잡은 클레온 치하에서 더욱 강화되어 동맹국의 조공 요구도 크게 늘어났고 그에 따라 시민의 정치 수당도 인상되었다. 기원전 5세기 초이기는 하지만 데미스토클레스가 라우레이온 은광이 발견되자 그곳에서 생긴 막대한 부를 시민들에게 분배하지 않고 페르시아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삼단노선 건조에 투자한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다. 시민 모두가 국가 연금자이다시피한 이러한 포퓰리즘적 경향과 원시적인 재정정책, 행정의 비전문주의는 5세기 중반 아테네의 전성기 동안에는 민주정하 민중들의 정치참여를 유도하는 기폭제 역할도 하였지만, 시라쿠사 원정 실패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참담한 패배를 지나 4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각자도생을 위한 민중들의 이기심과 선동정치, 부자 갈취, 무고와 소송 등 사회적 병폐의 원인이 되면서 공동체의 분열과 몰락을 재촉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빅터 에렌버그 <국가>, 123-130쪽 참고) 이러한 점에서 <국가>가 이 혼란기를 배경으로 아테네의 상업주의를 대표하는 세력이자 오랜 전쟁기간 동안 무기 판매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케팔로스와의 대화로부터 시작하는 것도 주목할 만한 일이다. <국가>의 집필 또한 이후 아테네가 더욱 쇠락하여 거의 재기 난망의 상태로 접어들던 기원전 375년 전후에 이루어졌다.

 

[327b]

* 소크라테스는 시내로 서둘러 돌아오는 길에 폴레마르코스의 시동παῖς을 통해 기다려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여기서 시내τὸ ἄστυ는 폴리스 ‘아테네’의 중심을 이루는 아테네 성곽 내 도심 지역을 말한다.

* ‘시동이 내 뒤에 와서 옷을 붙잡고서’καί μου ὄπισθεν ὁ παῖς λαβόμενος τοῦ ἱματίου.

말을 걸기 전 옷을 붙잡는 장면은 <국가> 제5권 서두에서 폴레마르코스가 아데이만토스에게 귓속말을 건네는 장면에서도 나온다.(449b)

 

[327c]

* 폴레마르코스는 아테이만토스, 니케라토스 그 밖에 몇 명과 함께 소크라테스에게 다가와 시내로 가지 말고 그곳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한다. 니케라토스는 아테네의 장군이었던 니키아스의 아들(Νικήρατος ὁ Νικίου)이다. 니키아스(기원전 약 470-413)는 422년 클레온이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아테네의 지도자가 되어 스파르타와 일시 평화협정을 성사시켰으나 기원전 413년 시라쿠사 원정 중 포로로 잡혀 처형된다. 그의 아들 니케라토스는 함께 있는 폴레마르코스와 함께 404년 30인 과두정권에 의해 처형된다. 기원전 406년에는 페리클레스의 아들 페리클레스도 아르기누사이 해전에 장군으로 참전했다가 시신 수습 문제로 문책을 당해 다른 장군들과 함께 처형된다.

* 이 사람을 ‘이겨내시거나(더 힘이 세거나)’의 원어(κρείττους)는 나중에 트라쉬마코스가 ‘강자’를 표현할 때도 나오는 말이다. 이런 식의 힘에 의한 물리적 윽박지름은 이어서 언급되는 소크라테스의 설득(πείθειν)의 방법과 대비된다. 그리 심각한 대화 국면은 아니긴 하지만 폴레마르코스에게 설득의 방법은 아예 대안으로 고려되고 있지도 않다. 이런 식의 농담조 윽박지름은 <필레보스> 16a, <파이드로스> 236c에도 나온다.

*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실 수가 있을까요?’ἦ καὶ δύναισθ᾽ ἄν πεῖσαι μὴ ἀκούοντας;라는 폴레마르코스의 반문에 글라우콘이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οὐδαμῶς라고 답하는 부분은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직면하게 될 상황을 미리 알려주는 복선처럼 느껴진다. 잠시 후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를 만나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종국에 이르러 트라쉬마코스가 이미 처음부터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임을 깨닫는다. 글라우콘의 말대로 그런 사람을 설득하기란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 사람에 대한 바른 대응은 이제 설득이 아니라 그와 같은 주장을 완전하게 제압하고도 남을 정도의 대안적 주장을 제시하는 것이다.

* 아무려나 이러한 윽박지름식 강권은 소크라테스에게 익숙하지도 받아들여지기도 힘든 것이다. 그래서일까? 곁에 있던 아데이만토스는 이 상황의 어색함을 금세 알아차리고 다른 방식으로 소크라테스의 체류를 청한다.

 

[328α]

* 아테이만토스는 밤에 횃불 경기도 있고 철야제παννυχίς도 열리니 그것도 구경하고 젊은이들과 대화도 나눌 겸 재차 머물기를 청한다. 횃불 경주 λαμπὰς : λαμπὰς는 횃불 경기의 공식이름이기는 하지만 λαμπὰς는 뒤에 나오는 λαμπάδια와 마찬가지로 그냥 ‘횃불’을 뜻한다.

* 트라케 지방은 광산업이 크게 발달한 지역으로 광산노예들이 많았다.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 또한 트라케 광산에 묶여 지낸 광산 노예들의 삶에서 착상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 몸과 영혼의 이원론, 영혼불멸설 또한 고대 아티카에서는 그리 발달하지 않은 사고인데 광산 동굴노예의 참혹한 삶이 영혼만이라도 자유롭고 영원하길 바라는 소망과 욕구의 일환으로 생겨나 점차 아티카에도 전해진 것이라는 설도 있다. 트라케지방에서 디오뉘소스 신앙이 발달한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벤디스 축제에서 열린 횃불 경기도 그들이 광산 동굴에서 늘 함께 했던 횃불에서 유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광산에서 말을 타고 달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소크라테스는 마상 횃불 경기에 의아해하며 관심을 보인다.

* 이 후 전개된 대화의 분량으로 시간을 추정해보면 아마도 철야제 구경은 밤샘토론으로 대치되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에게는 말잔치(συμποσίον)가 축제 구경보다 좋은 잔치이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나서도 소크라테스는 지금 누군가에게 그 긴 이야기를 또 전하고 있는 것이다. 가히 소크라테스의 열정과 체력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328b]

* 아테이만토스의 말에 소크라테스가 관심을 보이자 폴레마르코스도 그제야 상황을 깨닫고 그의 말을 거들고 글라우콘도 소크라테스에게 머물기를 권한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함께 폴레마르코스의 집으로 간다. 그곳에는 뤼시아스, 에우튀데모스, 트라쉬마코스, 카르만티데스, 클레이토폰이 이미 와 있었고 뜰에서 제물을 바치고 앉아있는 폴레마르코스의 아버지 케팔로스와 만나 인사를 나눈다.

* 뤼시아스 Λυσίας (약459-약378)는 폴레마르코스의 아우이다. 기원전 404년 형 폴레마르코스와 함께 민주파의 편을 들어 30인 과두정에 맞서다 형은 재산을 몰수당한 후 처형되고 그 자신은 도피하여 죽음을 면했다. 이로써 유복했던 케팔로스 가문은 몰락한다. 무기 제조 판매업을 통해 치부한 신흥 상공인 계급이자 거류외인이었던 케팔로스 집안으로서는 전통적인 농업국가인 스파르타와 과두정 세력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뤼시아스는 기원전 403년 민주파에 의해 30인 과두정권이 무너지자 아테네로 돌아와 유명한 법정 연설문 작성자로 명성을 얻었고 민주파를 적극 지지하였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이 민주파에 의해 희생된다. 플라톤이 <국가>를 저술한 시기가 기원전 375년 경 그러니까 이러한 모든 사태를 목도한 후임을 고려하면 <국가>에서 플라톤이 이미 몰락한 케팔로스 가문을 어떤 시각에서 끌어들이고 있는지를 추정하는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여기 나오는 에우튀데모스Εὐθύδημος는 폴레마르코스의 아우로 플라톤의 대화편 <에우튀데모스>에 나오는 키오스 출신 에우튀데모스와 동명이인으로서 달리 알려진 것이 없다.

* 카르만티데스 Χαρμαντίδης는 훗날 유명한 연설가 이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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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기에는 다소 방해가 되겠으나 텍스트 내용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주요 개념의 원래 의미를 알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아, 앞으로 본 강해에서는 중간 중간 고전 그리스어 원문을 병기할 예정이다. 그리스 로마 시대 고전어 원전 텍스트 대부분이 실려 있는 아래 사이트에 들어가, 저자별 목록에서 ‘Plato’을 찾아서 을 클릭한 후, 플라톤의 <국가> 텍스트(Republic, Greek)와 해당 페이지 및 섹션(327a, 338c 등으로 표기)을 찾아가면 버넷(J. Burnet)판 그리스어 원문과 쇼리(P. Shorey)의 영어 번역, 아담(J. Adam)의 주석 등을 참고할 수 있다. 특히 실린 고전 그리스어 원문의 해당 단어를 클릭하면 자세한 단어별 사전(Liddell & Scott’s Greek-English Lexicon)풀이가 나와 있어, 최소한 고전 그리스어 알파벳 정도만 익힌 분들도 쉽게 해당 개념에 대한 세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Perseus Digital Library, Perseus Collection, Greek and Roman Materials

http://www.perseus.tufts.edu/hopper/collection?collection=Perseus:collection:Greco-Roman

 

“프랑스 혁명과 광장에 선 시민”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④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2018. 8. 13.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

 

제4강. “프랑스 혁명과 광장에 선 시민”

 

강연 : 이지영(이화여대 강사)

후기 : 정선우(한철연 회원)

 

* 프랑스 혁명기에 평민들이 어떻게 정치적 주체로 등장하게 되었는지 살펴본다.

 

“프랑스 대혁명은 과연 성공한 혁명일까? 그 성공과 실패 여부는 과연 누구를 기준으로 평가된 것일까? 프랑스 대혁명 이후 우리는 어떤 변화 속에서 살게 되었을까?”오늘의 강의는 이런 물음들로 시작되었습니다. 강의를 맡은 이지영 교수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이유, 혁명의 전체 과정을 상세히 분석하면서 프랑스 대혁명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해야 하는지 고민해 볼 것을 주문했습니다. 특히 프랑스 대혁명을 ‘민중’의 관점에서 볼 때, 과연 성공한 혁명이라 할 수 있는지를 말이지요.

프랑스 대혁명은 민중이 사회 전면에 등장해 기존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혁했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 자신의 요구나 이익이 거의 반영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또한 독특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이 민중들에 의해서 진행되었지만, 정작 ‘민중 혁명’이기보다는 오히려 ‘부르주아 혁명’ 혹은 ‘시민 혁명’이라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어쩌면 부르주아지들의 이익을 위해서 민중들이 피 흘려 싸웠다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민중은 왜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없었을까요? 왜 프랑스 대혁명은 부르주아지의 이익만을 보장하는 사회·경제적 질서로 이행하는 것에 그쳤을까요? 그 까닭은 아마도 프랑스 대혁명 그 자체에 내재적으로 기인하는 것은 아닐까요? 혁명을 일으켰던 ‘제3신분’의 이질성과 다양성에서 하나의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삼부회의 한 축을 차치하던 ‘제3신분’은 성직자와 귀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즉 부유한 상층 부르주아지부터 법률가, 하급 관료, 장인(직공), 노동자, 농민 및 농노, 빈민 등을 포괄했던 광범위한 신분이었던 것입니다. 봉건적 질서와 신분제를 타파하겠다는 목표만 동일할 뿐, 서로의 욕구나 목적이 완전히 상이했던 것입니다.

결국 혁명의 과정과 그 귀결에서 부유한 상층 부르주아지들이 그토록 원했던 소유권(사유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이 절대적 가치와 이념으로 굳어지게 되었고, 그를 기반으로 새로운 질서가 자리 잡게 됩니다. 소유권 혹은 재산권으로서 자유는 불가침의 기본권으로 확립되었고, 그를 보장하고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자 목적이 된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단지 혁명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혁명을 통해 ‘무엇을 바꾸는가’, ‘누가 바꾸는가’가 결정적인 질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혁명을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혁명으로 인해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물어야 하고, 그것이 정말로 좋은 변화인지, 즉 개선된 것인지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2016년 겨울부터 그 다음 해까지 지속된 이른바 촛불 시민 ‘혁명’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임은 자명합니다.

에이드리언 리치(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1.  <피, 빵, 시>, 에이드리언 리치(上)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

 

정유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1970년 5월 1일 뉴욕에서 열린 ‘제2차 여성연합대회(Second Congress to Unite Women)’에는 전에 없던 긴장이 감돌았다. “연보라색 골칫거리(Lavender Menace)”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은 스무 명의 여성들이 행사장 앞에서 소란을 피우며 훼방을 놓았다. 이 여성들은 주류 페미니즘 운동이 레즈비언들을 차별하는 것에 대해 큰소리로 항의하였다. 티셔츠에 적힌 “연보라색 골칫거리”라는 글귀는 미국에서 제2물결 여성운동을 선도적으로 이끌던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이 레즈비언 운동을 비난하며 연보라색 골칫거리(Lavender Menace)라고 이름붙인 것을 겨냥한 것이었다. 베티 프리단과 그녀가 회장으로 있던 전미여성기구(NOW, National Organization for Women)는 여성의 평등권을 보장받기 위한 운동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이 시기에는 남녀평등 헌법 수정안을 국회에 통과시키기 위한 운동이 가장 주요한 이슈였다. 따라서 전국여성단체의 운동을 주도하던 회원들 중 일부는 레즈비언들이 젠더 이슈보다는 섹슈얼리티를 의제로 내세우는 것이 오히려 여성운동이 확장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주류 페미니즘과 레즈비언 페미니즘이 서로 대립각을 세우는 가운데에서 에이드리언 리치의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Compulsory Heterosexulity and Lesbian Existence)‘이 1980년 <기호들(Signs)>지에 발표되었다. 이 글은 발표와 동시에 논란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이성애를 여성 억압의 주요 원천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레즈비언 페미니즘에 주요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연보라색 골칫거리(LAVENDER MENACE)”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항의하는 여성들

 

여성 억압의 원천으로서 강제적 이성애

에이드리언 리치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에 대한 여성들의 내재적인 욕망을 자연적인 것으로 주어진 것으로 가정하거나 의문시하지 않은 데에 문제를 제기한다. 실제로 많은 여성들은 남성과의 결혼이 아무리 불만족스럽고 억압적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인생에서 불가피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리치가 보기에는 이성애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이자 제도이며, 여성 억압의 근원이다. 남성적 권력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제어하면서 유지된다. 캐틀린 고프(Kathleen Gough)를 인용하면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남성적 권력의 작동 방식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부정하고, 강제적으로 섹슈얼리티를 남성에게 향하도록 하는 것, 여성들의 생산력을 제어하기 위해 여성들의 노동을 명령하고 착취하는 것, 여성들의 아이들을 통제하고, 그녀들에게서 아이들을 빼앗는 것, 여성들을 신체적으로 구속하고, 여성들의 운동을 막는 것, 여성을 남성들 사이의 거래의 대상으로 사용하는 것, 여성들의 창조성을 속박하고, 사회의 지식과 문화적 성과의 거대한 영역에 여성들이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억압의 형태는 단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불평등과 재산 소유의 문제로만은 해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페미니스트들이 여성해방에 이르기 위해서는 단지 남성과 동등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이성애라는 제도에 대해 의문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페미니즘에 있어 ‘대부분의 여성은 선천적으로 이성애자이다’라는 가정은 이론적으로 정치적인 장애물이다. 이러한 가정은 계속 유지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레즈비언 존재가 역사에서 누락되어 왔으며 질병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며, 레즈비언을 고유한 존재로 보기보다는 예외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이며, 만약 당신이 자유롭고 ‘선천적인’ 이성애자로 생각한다면 여성에게 이성애란 ‘선호’가 아닐 수 있고, 오히려 강제적으로 부여되고 관리되고 조직되고 선동되고 유지되어온 것이라고 인식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애를 하나의 제도로 이해하는 데 실패하는 것은 자본주의라고 불리는 경제적 시스템 또는 인종주의라는 계층 질서가 육체적 폭력과 허위의식을 포함한 다양한 힘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성애가 여성의 ‘선호’나 ‘선택’이라는 것에 의문을 던지는 한 걸음을 내딛는 것, 그리고 이어지는 지적이고 감정적인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이성애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페미니스트에게는 특별한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보상은 매우 클 것이다. 그것은 자유로운 생각, 새로운 길로의 탐험, 거대한 침묵으로부터의 균열, 인간적 관계에 대한 새로운 확신과 같은 보상을 가져다 줄 것이다.”

 

레즈비언 존재(lesbian existence), 레즈비언 연속체(lesbian continnum)

강제적 이성애라는 제도 내에서는 레즈비언이라는 존재가 비가시화되고 삭제된다. 이런 가운데에서 레즈비언의 존재를 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리치는 레즈비언주의(lesbianism)이라는 용어보다는 “레즈비언 존재”“레즈비언 연속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한다. 레즈비언 존재라는 말을 통해 리치는 레즈비언이 역사적으로 존재해왔다는 것과 더불어 레즈비언 존재의 의미가 끊임없이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레즈비언 연속체라는 말을 통해 단지 여성이 다른 여성에서 성적으로 이끌리는 것뿐만 아니라 한 여성의 인생이나 역사 속에서 여성들과 동일시해왔던 경험까지로 레즈비언의 의미를 확장시키고자 한다. 이처럼 확장된 의미에서 레즈비언 연속체는 여성들이 우애와 즐거움을 나누는 일상적인 관계의 영역까지 확대된다. 따라서 여성들이 스스로를 레즈비언으로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성들은 가부장제 속에서는 비가시화되고 삭제되고는 하는 레즈비언 연속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레즈비언 연속체의 발견을 통해 여성들은 여성들을 서로서로 북돋아줄 힘을 발견하고 해방의 가능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여성들이 레즈비언 연속체로 존재할 가능성-여자아이가 엄마의 젖을 빠는 것에서부터, 엄마가 된 여성이 어렸을 적 엄마의 모유 냄새를 회상하면서 아이에게 젖을 물릴 때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에 이르기까지, 버지니아 울프가 묘사한 클로이와 올리비아의 관계처럼 함께 실험실을 공유하는 두 여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여성들이 90세에 죽어가는 여성을 쓰다듬어주고 어루만져주는 것에 이르기까지-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레즈비언과 동일시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가 레즈비언 연속체의 안과 밖을 오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즈비언과 페미니스트를 연결하기

후에 에이드리언 리치는 이 글을 썼던 동기에 대해서 “레즈비언과 페미니스트 사이의 틈을 연결하는 다리를 그려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언급했듯 주류 페미니즘은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들을 오히려 자신들이 일궈나가는 정치적 목표에 방해가 되는 존재로 여겼으며, 레즈비언 페미니즘은 주류 페미니즘이 여성해방으로 나아가기는커녕 남성들이 일궈낸 제도 속으로 편입해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을 불만으로 여겨 갈등이 첨예해지는 상황이었다. 이 갈등 속에서 페미니스트이자 레즈비언이었던 리치는 레즈비언의 의미를 확장하여 페미니스트들도 포괄할 수 있는 레즈비언의 의미를 구성하고자 하였으며, 가부장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레즈비언과 페미니스트의 공통적 목표로 설정하였다.

물론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많은 시도였다. 레즈비언의 의미를 여성과 여성들 사이의 일상적 관계 형성, 그리고 심지어 아이와 어머니의 관계로까지 확장시키는 바람에 레즈비언의 고유한 정치적 의미는 오히려 약화되었으며, 레즈비언과 페미니스트를 공통의 젠더 이슈로 연결시키면서 남성 게이와 레즈비언의 동맹 또한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리치의 글은 여전히 현재적이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공적인 사회에서 배제하는 것, 성역할을 고정시키고 임금차별하는 것 외에도 여성이 여성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금지하는 것을 통해 기능한다는 그녀의 주장은 현재에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에게는 언제나 여성을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언제나 사랑해 왔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을 통해 새로운 사랑, 대안적 사랑의 가능성을 여는 것 또한 우리시대의 페미니즘에게 깊은 영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가 수록된 에이드리언 리치의 산문 모음집 <피, 빵, 시(Blood, Bread, and Poetry)>

 

에이드리언 리치의 페미니즘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가 이 발표되던 1980년에 에이드리언 리치는 만 51세였고, 세 아이의 엄마였으며, 동시에 레즈비언이었다. 1950년대까지 최상위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자 유명한 여성 시인으로서 에이드리언 리치는 아내와 엄마로서 충실한 삶을 살고자 하였지만 그렇게 노력하면 할수록 공허함과 무기력함에 시달렸었다. 그러던 중 1966년에 리치의 가족이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리치는 반전운동, 시민권 운동, 그리고 무엇보다 페미니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하면서 리치는 자신의 고립감과 우울감의 원인을 가부장제와 연결시켜 이해하게 되었고, 마침내 남편을 떠났다. 이후 자메이카 출신의 소설가인 미쉘 클리프(Michelle Cliff)와 레즈비언 연인관계를 지속하였다. 뛰어난 시인이었지만 가정이라는 삶 속에 갇혀 있던 그녀에게 페미니즘은 정치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런 점에서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라는 에세이는 그녀의 삶의 전환을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글은 우리에게 여전히 다양한 사랑의 가능성이 가부장제로 인해 보이지 않고 가려져 있으며, 이 숨겨진 사랑의 발견이 우리에게 더 많은 만남과 창조성의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③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6. <국가>의 구성과 전체 구도

 

<국가>는 전체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편지들>을 제외하면 플라톤의 대화편 가운데 이렇게 여러 권으로 나누어진 대화편은 <국가>와 <법률>(12권) 뿐이다. <국가>가 그처럼 10권으로 나누어진 것이 플라톤 자신에 의한 것인지 혹은 그 이후 사람들에 의해서인지,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일부 고전 문헌학자들은 <국가>가 처음에는 6권으로 출간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플라톤 대화편의 전체 목록에 대한 가장 오래된 정보를 전해주고 있는 기원후 1세기 트라쉴로스에 따르면 <국가>와 <법률>은 각각 10권, 12권으로 분할되어 있다. 내용상 구분의 필요성은 차치하고서라도 <국가>와 <법률>이 그렇게 여러 권으로 분할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왜냐하면 두 대화편의 분량은 다른 대화편과 달리 각기 당시 파피로스 두루말이(卷, biblion, volumen) 한 권의 최대 분량(장당 약 가로 37㎝, 세로 23㎝ 크기의 파피로스 20-30개 정도를 이어 붙인 분량)을 크게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콘퍼드(F. M. Cornford)는 <국가>가 10권으로 구성된 것은 고대의 제본 기술상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그것을 논의의 내용과 구조와 연관 지어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1)

콘퍼드의 이러한 주장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동의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제2권에서 4권까지, 제5권에서 7권까지, 제8권과 9권까지는 콘퍼드의 지적대로 각 권의 구분이 무색할 정도로 화제의 연속성이 뚜렷하지만. 제2권, 제5권, 제8권, 제10권 서두 전후를 보면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화제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내용상의 구분이 분명하게 포착되고 있기 때문이다. (1) 우선 제2권 서두에서는 1권에서 트라쉬마코스로 부터 해방된 소크라테스의 소회가 언급되자마자 글라우콘의 새롭게 도전적인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화제가 전환되고 있다. (2) 그리고 제5권 서두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에 대한 논의를 마무리하고 부정의한 나라와 개인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자, 폴레마르코스가 아테이만토스와 귓속말을 나눈 이후 돌연 이의를 제기함으로써 또 한 번 화제가 새롭게 전환된다. 소크라테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 사람 모두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으니 계획된 논의를 이어가기 전에 일단 그 점부터 답해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소크라테스가 직면한 ‘세 가지 파도’(451c-474c)이다. 그리하여 제5권에서 7권까지 그들의 요구에 답하는 방식으로 <국가>의 핵심적인 사상이자 플라톤 철학의 백미이자 가장 난해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철인정치론, 이데아론과 좋음의 이데아 그리고 혼의 전환과 상승, 변증술이 극적으로 제시된다. (3) 그리고 제8권 서두에서는 4권 끝에서 이어가기로 했던 주제로 다시 돌아와 또 한 번 화제가 전환되고 이후 9권까지 부정의한 나라와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리하여 애초 계획한 대로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 부정의한 나라와 개인 그 어느 쪽이 행복한지가 거론되고 이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에 관한 모든 논의가 하늘에 본(paradeigma)으로 바쳐진 것이라고 언급되면서 제9권이 마무리된다. (4) 그리고 제10권에서 시인들과 시의 본질, 영혼 불멸과 정의에 대한 보상을 거론한 후 에르(Er)의 이야기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제10권은 608b, c를 경계로 시인 비판과 영혼 불멸 및 정의의 보상 등으로 내용이 분명하게 양분되어 있어 콘퍼드는 이 부분도 둘로 나누어 <국가>를 내용상 모두 여섯 부분으로 구분하고 있지만, 제10권은 내용상 제1권에 상응하여 제시된 하나의 마무리로서 내적 단일성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제1권이 소크라테스가 앞으로 다룰 도전과 과제이고 제2권에서 9권까지가 그 가운데 넘어서야할 가장 큰 도전으로서 트라쉬마코스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답변이었다면, 제10권은 나머지 도전과제라 할 수 있는 폴레마르코스의 대화에서 제기되었던 시인의 문제와 케팔로스와의 대화에서 제기되었던 선한 사람이 맞이하게 될 사후세계와 보상 문제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답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 정의로운 삶과 행복은 폴레마르코스가 생각하듯이 당대 사람들 모두가 삶의 지표로 여기고 있었던 시와 시인들의 가르침에서는 본질상 결코 담보될 수 없는 것이며, 삶의 보상과 사후 세계에서의 혼의 불멸 또한 케팔로스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재산에 기대서나 가능한 나름의 생활방식이나 기복신앙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론의 내용대로 진실로 참된 덕과 지혜를 수반한 정의로운 삶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한 것임을 소크라테스는 마무리 삼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국가>의 내용 흐름은 마치 큰 산행을 하는 형세와도 같다. 처음 출발점에서는 산행의 이유와 목적을 점검하고(제1권) 준비를 갖춘 후 이상국가의 건설이라는 목적을 향해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의 기본 틀과 덕을 논하며 오르막길을 올라(2권-4권) 정상에 이르러 철학의 기치 아래 이상국가의 핵심이자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철인 정치, 혼의 전환과 상승, 변증술의 토대를 구축하고(5권-7권) 내리막길에 들어서서는 현실의 관점에서 부정의한 나라와 개인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면서 도착점을 앞두고 정의의 우월성을 마지막으로 비교 판정한 후(8권-9권) 산을 내려와 몇 가지 남은 과제들을 정리하고 영혼의 불멸을 음미하며(제10권) 산행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 <국가>의 권별 기본 구도

요컨대, 앞에서 살핀 화제의 흐름과 전환을 고려하면 <국가>의 권별 기본 구도는 크게 다섯 부분(제1권/제2,3,4권/제5,6,7권/제8,9권/제10권)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그처럼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분하는 것에 대해서는 플라톤 연구자들 사이에서 거의 이의가 없다. 그러나 각 부분 별 세부 단락과 그곳에 표제를 다는 방식은 학자들마다 다양하다. 각자 단락을 나누는 기준과 그 내용을 해석하는 관점들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본 강사가 제시한 권별 기본 구도와 표제 그리고 그 세부 단락과 표제 또한 모종의 일반화된 구분이 아니라 국내외 여러 유수 학자들이 제시한 것들을 토대로 본 강사 나름의 관점에 따라 정리· 종합해서 재구성한 것이다.3)

각주 1) M. Cornford, The Republic of Plato, Oxford, 1941. p. v.

각주 2) 에필로그 제10권이 프롤로그 제1권과 상응관계에 있다는 점은 제1권이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듯 별도의 대화편이 아니라,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전체 기술 계획에 따라 쓰여 졌음을 보여준다.

각주 3) 국내 학자로는 아래 책 참고. 김영균, <국가 : 훌륭한 삶에 대한 근원적 고찰>, 살림, 2008. 김인곤, <플라톤 국가>, <철학사상> 별책 제3권 제8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8.

 

Ⅰ. 프롤로그 : 도전과 과제(제1권)

Ⅱ. 정의의 수립: 정의로운 국가와 정의로운 개인(제2권-제4권)

Ⅲ.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왕(제5권-제7권)

Ⅳ. 부정의와 현실 비판 : 부정의한 국가들과 부정의한 개인들(제8권-제9권)

Ⅴ. 에필로그 (제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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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프롤로그 : 도전과 과제 – 정의에 관한 견해들 검토(제1권)

Ⅱ. 본론 1 : 정의의 수립 – 이상국가의 건설(제2권-제4권)

     A. 터파기와 준비 : 문제제기, 방법, 국가의 기원

     B. 정의로운 국가와 정의로운 개인

Ⅲ.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제5권-제7권)

  1. 난관과 고려사항, 가능성
  2. 정의의 실현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
  3.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

Ⅳ.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 – 현실국가 분석(제8권-제9권)

  1. 부정의한 국가들와 부정의한 개인들
  2. 정의의 우월성 – 정의와 행복

Ⅴ. 에필로그 : 시의 본질, 혼의 불명, 정의에 대한 보상(제10권)

 

 

7. <국가>의 전체 내용 세부 구분과 해당 쪽수 및 섹션

 

Ⅰ. 프롤로그 : 도전과 과제 정의에 대한 견해들 검토(1)

 

1. 도입부(327a-328b)

2. 케팔로스의 노년과 재산(328b-331d)

   1) 노년의 즐거움과 생활방식(328b-329d)

   2) 자유와 평화, 생활방식 그리고 재산(331c-d)

3. 폴레마르코스의 정의(331b-336a)

   1) 정의는 각자에게 갚을 것(합당한 것)을 갚는 것이다.(331b-332b)

   2) 시모니데스 정의관 비판(332b~334b)

   3) 기능과 훌륭함(덕) – 정의는 사람을 나쁘게 할 수 없다(334c~336a)

4. 트라쉬마코스의 정의(336b-354c)

   1) “정의는 강자(지배계급)의 이익이다” 검토(338a-347e)

  1. 트라쉬마코스의 등장,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336b~339a) :
  2. 강자의 실수 가능성과 엄밀한 의미의 강자(339b~341a)
  3. 소크라테스의 비판과 트라쉬마코스의 속내(341a~ 344c)
  4. 트라쉬마코스의 현실론 비판과 통치자의 보수(344d~ 347e)

   2) “부정의는 정의보다 강하고 부정의한 삶은 행복한가?” 검토(348a-354c)

  1. 트라쉬마코스 : 정의는 고상한 순진성이고 부정의는 덕과 지혜이다.(348a~350c)
  2. 소크라테스의 비판 : 능가 개념, 정의가 덕과 지혜이다.(349b~350c)
  3. ‘부정의는 강하고 부정의한 삶은 행복하다’라는 주장에 대한 검토(350d~354a)
  4. 마무리와 탄식(354b-354c)

 

Ⅱ. 본론 1 : 정의의 수립 이상국가의 건설(24)

 

A. 터파기와 준비 : 문제제기, 방법, 국가의 기원 (357a-374e)

1.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근본적인 문제 제기(357a-367e)

   1) 글라우콘의 재반론

  1. 좋은 것의 세 가지 종류, 정의는 약자들의 협약(357a-359b)
  2. 귀게스의 반지, 부정의 찬양 (359be-362c)

   2) 아데이만토스의 보완과 요구(362d-367e)

2. 정의를 잘 찾기 위한 방편 : 소문자와 대문자 비유(367e-369a)

3. 국가의 기원과 발달: 원초국가(참된 나라, 돼지들의 나라), 호사스런 나라(369b-374e)

 

B. 정의로운 국가와 정의로운 개인(375a-445e)

1. 정의로운 국가의 수립(375a-434d)

   1) 수호자의 교육(376e-412b)

  1. 시가 교육(376e-403c)

     * 무엇을 말해야할 것인가(376e-392c)

     * 어떻게 말해야할 것인가(392c-398b)

     * 가사, 선법, 리듬(398c-401a)

     * 시가 교육의 목적(401b-403c)

    b. 체육 교육(403c-412b)

   2) 수호자가 갖추어야할 조건들(412b-427c)

  1. 수호자들의 선발과 자격. 건국 신화.(412b-415d)
  2. 수호자들의 생활 방식, 사유재산의 금지.(415d-421c)
  3. 수호자들의 임무(421c-427c)

   4) 정의로운 국가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27d-434c)

2. 정의로운 개인과 영혼(434d-445e)

   1) 혼의 세 부분(434c-441c)

   2) 정의로운 개인의 주요 덕목 : ‘지혜’, ‘용기’, ‘절제’, ‘정의(441c-445e)

 

Ⅲ. 본론 2 : 정의의 실현 조건 철학과 철학자 왕(7)

 

A. 난관과 고려사항, 가능성 : 3개의 파도(449a-474c)

1. 도입부(449a-451c)

2. 첫 번째 파도 : 남자와 여자 양성에서 동일한 직무와 동일한 교육(451c-457b)

3. 두 번째 파도 : 처자의 공유. 전쟁에 관한 일(457b-471c)

4. 세 번째 파도 : 철학자와 권력(471c-474c)

 

B. 정의의 실현 조건 : 철학과 철학자 왕(474c-502c)

1 .철학자에 대한 정의 : 이데아론에 의거한 규정(474c-480a)

2. 철학자의 자질(484a-487a)

3. 철학이 비난 받는 현실(487b-497a)

   1) 철학이 쓸모없게 되는 이유(487b-488e)

   2) 철학이 타락하는 이유(488e-495b)

   3) 철학이 당하는 수치와 철학자의 현실 도피(495c-497a)

4. 철인 정치의 실현 가능성(497a-502c)

 

C. 철인 통치자의 교육 목표와 교과목(502c-541b)

1. 최상의 배움 : 좋음(善)의 이데아(502c-506b)

2. 좋음의 이데아와 태양의 비유(506b-509b)

3. 선분의 비유(509c-513e)

4. 동굴의 비유(514a-521b)

5. 혼의 전환과 참된 실재에로의 상승을 위한 교과목들(521c-541b)

   1) 예비 교과목(521c-531c)

    * 수와 계산. 지성의 활동(521c-526c)

    * 기하학(526c-527c)

    * 입체 기하학(528a-d)

    * 천문학(527d-528a, 528e-530c)

    * 음악 이론(음계론)(530c-531c)

   2) 본 교과목 : 철학적 문답법(변증술 : 디알렉티케)(531c-535a)

   3) 교과목들의 대상과 부과 방법, 시기와 구체적 프로그램(535a-541b)

 

Ⅳ. 본론 3 : 부정의와 현실 비판현실국가 분석(89)

 

A. 부정의한 국가들과 부정의한 개인들

1. 도입부 : 원래 문제로 복귀. 고찰의 방법과 순서(543a-545c)

2. 최우수자 통치로부터 명예정에로의 체제 변동, 명예정과 명예정적 인간(545c -550c)

3. 과두정과 과두정적인 인간(550c-555b)

4. 민주정과 민주정적인 인간, 필요한 욕구와 불필요한 욕구(555b-562a)

5. 참주정과 참주정적인 인간, 불법한 욕구 (562a-576b)

 

B.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 – 정의와 행복(576b-592b)

1. 부정의한 삶이 아니라 정의로운 삶이 행복하다(576b-588a)

   1) 정치체제와 개인이 상호 대응된다는 것에 대한 증명(576b-580c)

   2) 혼의 세 부분에 기초한 증명(580c-583a)

   3) 참된 쾌락과 거짓 쾌락의 구분에 기초한 증명(583b-583a)

2. 부정의가 아니라 정의야말로 이익이다(588b-592b)

 

Ⅴ. 에필로그 : 시의 본질, 혼의 불멸, 정의에 대한 보상(10)

 

1. 시가·연극의 본질에 관한 고찰(595a-608b)

   1) 흉내(모방)과 진리의 관계(595a-603b)

   2) 시에서의 모방 : 이성이 아닌 감정의 모방(603c-605c)

   3) 시의 모방이 혼에 미치는 영향(605c-608b)

2. 혼의 불멸과 정의에 대한 보상(608c-612a)

   1) 혼의 불멸과 혼의 본래 모습(608c-612a)

   2) 현생에서의 정의에 대한 보상(612a-613e)

3. 저승에서의 정의에 대한 보상, 에르의 이야기(614a-621d)

이항로의 위정척사, 당신들만의 진리 [길 위의 우리 철학] – 17

구태환

 

1.

두물머리에서 북한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북한강 지류인 벽계천(檗溪川)이 흐르는 계곡이 나온다. 이 계곡을 따라 한참 들어가면 말 그대로 ‘궁벽한’ 마을이 나온다. 지명이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인 이곳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가 태어나고 죽은 곳으로서, 그의 생가가 남아 있고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그는 61세에 강원도 홍천의 삼포라는 곳으로 잠깐 이사했을 때와,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있던 해에 중앙 정계의 부름으로 한양에 기거했던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 이곳에서 생활했다.

이항로생가 전경

 

독자들은 학창시절에 이항로에 대해서 한번쯤은 이야기를 들어봤을 것이다. 조선말기의 ‘위정척사(衛正斥邪)’ 사상과 운동의 거두로서 말이다. ‘옳음을 지키고 사악함을 배척한다’는 이 구호는 비장함마저 풍기는데, 실제로 그는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비타협적인, 꼬장꼬장한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일까? 생가라고 찾아온 필자 앞에 서있는 거대한 기와집들이 생소하기만 하다. 물론 이러한 느낌이 부유함에 대한 필자의 왜곡된 시선 때문일 수도 있다. 꼿꼿한 선비라고 반드시 궁핍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읊조리듯이 당시 지배층의 부는 일반 백성의 고혈이 농축된 것이 아니던가. 더구나 물산이 풍족할 리 없는 이런 국벽한 시골에 이처럼 거대한 기와집이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거슬린다.

 

2.

이항로는 1792년 2월13일 옛 지명 양근군(楊根郡)에 속한 이곳에서 처사 이회장(李晦章)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세 되던 해 반시(泮試)에, 18세에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했으나 이미 이른 나이부터 관계의 진출을 단념하고, 학문에 몰두했다. 그 결과 22세에 이미 스승을 따르지 않을 정도[不由師承]로 뛰어난 학자가 되었고, 그의 주변에는 수많은 제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그에게 유일한 스승은 중국 송대의 주희(朱熹)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주희에 대한 태도는 다음 언급에서 잘 드러난다.

“하는 말마다 모두 옳은 사람이 주자(朱子-‘주희’에 대한 존칭)이다. 하는 일마다 모두 옳은 사람이 주자이다. 주자는 공자 이래 가장 뛰어난 사람이다. 이때부터 나는 주자의 글을 읽고 그의 뜻을 추구했다. 나는 주자의 말이 아니면 감히 듣지 않았고, 주자의 의도가 아니면 감히 따르지 않았다. … 다른 이들이 저렇다고 하는데 주자가 이렇다고 하면 나는 다른 이들의 견해를 버리고 대신 주자의 견해를 따랐다.”

조선시대의 지배 이념이 성리학이었고, 따라서 성리학의 완성자 주희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은 조선시대의 학자들에게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주희에 대한 태도는 신앙에 가까웠으며, 이항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위정척사’에서 ‘옳음을 지킨다’는 것은 주희의 사상을 견지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주희가 완성한 성리학에서는 우주만물이 원리로서의 이(理)와 질료로서의 기(氣)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원리로서의 이는 절대선(絶對善)으로서 그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 인간의 선한 본성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선한 것은 아니니, 그 이유를 질료로서의 기에서 찾는다. 기는 그 자체로는 선도 악도 아니지만, 그것이 맑은가 탁한가에 따라 그 안에 포함된 원리로서의 이가 잘 드러나는가 그렇지 못한가가 결정된다. 기가 맑아서 이가 잘 드러나면 선한 인간이, 반대로 기가 탁해서 이가 잘 드러나지 않으면 불선한 인간이 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에 부여된 선한 이, 즉 본성을 잘 보존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을 이루는 기를 끊임없이 맑게 수련해야 한다. 그러한 수련의 결과가 이 사회를 지배할 자격을 갖는 군자(君子)이다. 따라서 지배층으로서의 군자는 종교인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할 존재이며, 조선시대의 지배층 사대부에게는 이러한 삶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理)를 기반으로 해서 인간이 따를 도덕률이 나오는데, 그것이 흔히 삼강오륜(三綱五倫)이라고 한다. 이처럼 성리학적 도덕률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제어 수단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있는 이의 발현이다. 따라서 이러한 삼강오륜을 거부하는 것은 사회적 지탄 대상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주의 원리를 거스르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한 우주의 원리인 이가 인간 사회의 변화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즉 이(理)는 불변하는 원리이다. 따라서 불변하는 이에 기반한 삼강오륜은 인간에 내재된 도덕률이기 때문에, 이것을 어기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이항로가 말하는 ‘위정’이란 바로 이러한 삼강오륜의 도덕률을 수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척사’에서 말하는 배척해야 할 ‘사악함’은 이러한 삼강오륜을 거부하는 기독교 세력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문물이다. 즉 기독교 세력이 군신(君臣), 부자(父子), 남녀[부부夫婦], 장유(長幼)의 구분을 무너뜨리니 이들은 짐승과 같은 무리이고, 이러한 무리들이 입은 옷, 타고 온 배, 이들이 사용하는 물건 등은 모두 짐승의 것이다. 따라서 이항로에게 위정척사란 단순히 기존의 학문사상적 체계를 수호를 넘어서는 것이다. 짐승의 삶으로부터 인간의 삶을 지키기 위한 저항인 것이다.

 

3.

청화정사

 

생가의 계단을 올라 문을 지나자 담에 둘러싸인 아담한 방이 나온다. ‘청화정사(靑華精舍)’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생가가 청화산의 서편에 자리 잡았기 때문에 그는 ‘화서(華西)’라는 호를 사용하였고, 자신이 기거하는 방을 이처럼 이름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독서와 사색을 하고, 자신을 찾아오는 선비, 제자들과 함께 학문에 대해, 그리고 당시 시국에 대해 담론했을 것이다.

 

노산사

 

다시 문을 나와 왼편(동쪽)으로 가면 사당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노산사(蘆山祠)이다. 김평묵, 최익현, 유인석 등 그의 제자들이 스승 이항로를 기리며 지은 사당으로서, 원래의 것은 6.25 때 불타고 후일에 다시 지은 것이다. 여기에는 이항로만이 아니라 그가 존경했던 주희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영정과 위폐가 모셔져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항로는 주희를 추앙했는데, 그와 함께 송시열도 매우 존숭하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벽계천이 흐르는 생가 주변을 ‘벽계구곡(檗溪九曲)’이라 하였다. 중국 복건성(福建省) 출신인 주희가 무이산의 계곡을 노래한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송시열이 본떠서 자신이 은거하던 괴산의 계곡을 ‘화양구곡(華陽구곡)’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항로는 바로 이들을 본뜬 것이다.

특히 송시열은 병자호란 이후에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친다)’을 주장하던 이이다. ‘중화’란 중국인들이 자기 문화의 위대성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공자, 맹자, 주희로 이어지는 유학의 정통 문화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했다. 이러한 중화문화는 한족인 명나라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오랑캐 만주족인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차지하게 되어 중국에서는 중화문명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송시열을 비롯한 당시 사대부들의 인식이었다. 더구나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우리를 구원하였고, 그러한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는 병자호란 때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줬으니, 마땅히 우리는 명나라를 존숭하여 청나라를 징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가 망한 마당에 중화문명은 우리 조선에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 특히 조선의 유학자 사대부들에게는 이러한 중화문명을 수호할 임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책임 의식은 이항로에게도 그대로 이어진다.

 

4.

노산사는 야트막한 동산 위에 놓여 있는데, 그 사당 앞에는 동산 위라고 보기에는 제법 넓은 마당이 있다.

이항로의 제자들은 매월 이항로의 집이나 명승지, 사찰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갈수록 제자의 수가 많아졌다. 그래서 앞에서 본 ‘청화정사’에는 많은 제자가 들어갈 수 없었을 것이고, 결국 그의 나이 56에 이곳에 야외교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처럼 궁벽한 곳에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모였을까? 당시에 한양에서 온다고 했을 때, 배편으로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와야 하고, 그후에도 육로로 상당히 험한 산길을 넘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가슴에 학문에 대한 열정, 옳음을 지키려는 열정을 가지고 모인 수많은 학자들이 모여 스승의 강의를 경청하고, 질문하고, 토론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일까. 이 장소의 이름이 제월대(霽月臺)이다. ‘제월’은 ‘비가 막 갠 뒤에 부는 상쾌한 바람과 비가 막 갠 뒤에 나타난 깨끗한 달’을 가리키는 ‘광풍제월(光風霽月)’의 줄임이다. 비온 후의 달처럼 깨끗한 마음을 가진 제자들과 만나, 깨끗한 마음으로 진리를 나누는 곳에 참 어울리는 이름이라 할 것이다.

 

제월대

 

그런데 ‘제월대’라는 글이 새겨진 돌에서는 별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의문은 이곳을 내려가 생가 서쪽에 자리한 ‘기념관’에 들러서야 풀렸다. 원래의 돌이 기념관에 모셔져 있었고, 이것은 모조품인 것이다. 아마도 비바람에 훼손될까 우려하여 그렇게 한 것 같다.

 

5.

다시 서울로 발걸음을 돌린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가 한양에 간 것은 병인양요 때이다. 그 이전에도 조선의 중앙 정부에서는 그에게 여러 차례 관직을 내리지만, 그는 나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자국 선교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는 핑계로 한강의 양화와 서강까지 군함을 몰고 와서 시위를 하는 프랑스의 행태에 75세의 이항로는 결국 정부의 부름에 응하고, 노구를 이끌고 한강에 나가 시찰하기도 한다.

벽계구곡을 떠나 한양 나들이를 했을 때, 그의 눈에는 무엇이 보였을까? 한강에 버티고 선 낮선 배[異樣船]는 그에게 어떻게 보였을까? 아마도 그 배는 짐승같은 놈들의 배로만 보였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저 배가 왜 이곳에 왔는지, 그리고 저 배와 우리 배의 차이가 무엇인지, 저들이 어떻게 저처럼 거대한 배를 그리도 빨리 움직일 수 있는지, 더 나아가 저러한 기술이 조선에 어떠한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지는 않을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름과 틀림은 분명히 다르다. 다름의 반대말은 같음이고 틀림의 반대말은 옳음이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하기에 길게 이야기하면 구차해진다. 하지만 이 다름과 틀림의 문제가 간단하지 않게 다가올 때도 있다. 틀림이란 옳음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옳음의 범위가 좁은 이에게는 이 세상의 일들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것보다는 틀린 것이 많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것들 중에서 틀리지 않은 것이 있음을 인지하기도 하며, 그 순간 그 사람은 지적, 인격적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옳음에 대한 굳건한 확신을 가진 이는 그 옳음의 기준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아니 바꿀 수 없다. 그들은 상대가 왜 나와 다른 행동을 하고 다른 사고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평생동안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를 참이라고 믿는 삶에 대해서 함부로 재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와 다른 생각과 행동에 대해 이해해보고자 하는 노력도 없이 자신의 것만이 옳다는 사고는 매우 위험하다. 아무리 광풍제월의 맑고 깨끗한 의도를 가졌다 하더라도 이러한 사고는 자신과 다른 이를 배척한다. 이러한 태도는 현재에도 우리 세계에도 존재한다. 종교, 사상, 인종, 성적 취향이 자신과 다른 이를 틀렸다고 규정하고 배척하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당신의 진리만이 참인가?

 

기고자: 구태환(상지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최한기의 인체론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배타적 소유권에서 벗어난 ‘인권’의 가능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16.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박영미

<서울자유시민대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8년 네트워크 시민대학 ‘2기’ 수강 안내

한철연 2018년 네트워크 시민대학 ‘2기’ 수강 안내

 

서울특별시평생교육진흥원 자유시민대학의 지원을 받아 진행 중인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강좌의 2기 수강생을 모집합니다.

현재 1기 강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본 강좌는 1기(7월 23일~10월 1일)와 2기(9월 17일~11월 26일)로 나누어 진행하는 바, 9월 중순 이후 2기 강좌 시작 시기가 도래하여 안내 드립니다.


2기 강좌는 09월 17일부터 11월 26일까지(2기) 매주 월요일 7시, 총 10주 동안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에서 진행합니다.

참고로 1기와 2기의 강좌 프로그램(주제)은 동일합니다.

○ 교육 기간 : 2018년 09월 17일(월) ~ 11월 26일(월) 저녁 19:00~21:00
○ 교육 장소 : 서교동 소재 태복빌딩 302호 한철연 강의실(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14) 전화 : 02-332-4301

○ 한철연 오시는 자세한 길 안내는 한철연 홈페이지www.hanphil.or.kr/notice/view.asp?key=162>www.hanphil.or.kr/notice/view.asp?key=162>http://www.hanphil.or.kr/notice/view.asp?key=162 공지 글의 첨부파일 지도를 확인하시면 좋습니다.

○ 수강 대상 : 20세 이상 서울시민(경기도민도 가능)
○ 수강 인원 : 선착순 20명
○ 신청 방법 : 한철연 공식메일 kophil@daum.net으로 성명, 생년월일, 성별, 휴대폰 번호, 이메일을 꼭 적어서 신청해 주세요.

서울 및 수도권 시민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 2기 프로그램 강의별 내용

2기 강좌의 강사들은 1기 강좌와 다름을 알려드립니다.

  • 1주 09.17(월) : 서양 고대 그리스에서의 민주 시민의 탄생
    (고대 그리스의 직접민주주의 역사를 개관해 보고 그것의 현재적 의미와 실현 가능성을 가늠해 본다.)
  • 2주 10.01(월) : 동양 고대 민본주의와 시민
    (춘추전국시대에 제안된 민본주의적 통치 원칙의 규범적 의의를 살펴보고 그것이 과연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과 공존할 수 있는지 살펴본다.)
  • 3주 10.08(월) : 근대 부르주아는 어떻게 시민이 되었는가? 도시공간의 출현, 커피하우스, 살롱(근대에 커피하우스와 살롱의 공간에서 재건된 부르주아적 시민과 고대적 시민이 어떻게 다른지 고찰해 본다.)
  • 4주 10.15(월) : 프랑스 혁명과 광장에 선 시민(프랑스 혁명기에 평민들은 어떻게 정치적 주체로 등장하게 되었는지 살펴본다.)
  • 5주 10.22(월) : 근대 노동자와 21세기 노동자
    (19세기 이후 프롤레타리아는 어떻게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보편적인 정치적 요구로 전환시켰는지 고찰해 본다.)
  • 6주 10.29(월) : 백성에서 시민으로 향하는 여정(동학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의 백성은 어떻게 자립적 시민으로서의 자기 요구를 정치화하였는지 살펴본다.)
  • 7주 11.05(월) : 서울 속의 동학혁명 현장 탐방 – 일시 변동 가능
    (동학혁명의 현장을 직접 탐방함으로써 책 속에 갇힌 역사를 몸의 경험으로 느껴보는 시간을 갖는다.)
  • 8주 11.12(월) : 중국에서 시민 되기의 행로
    (이천년에 걸친 동아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동아시아적 형태의 공화국 역사를 시작한 신해혁명의 의미를 현재적 관점에서 전망해 본다.)
  • 9주 11.19(월) : 근대 여성은 어떻게 시민이 되었나?
    (가부장적 가족 질서와 친밀성 영역의 사적 억압을 정치적 해방의 요구로 전환시킨 여성 운동의 의미를 현대 한국의 현실에서 재음미해 본다.)
  • 10주 11.26(월) : 광화문 광장의 함성, 시민들의 목소리
    종합 토론(촛불정치의 현장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던 혁명 정치의 파편을 제도정치 비판의 관점에서 토론해 본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下)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0. <성의 변증법>, 슐라미스 파이어스톤(下)

 

이지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프로이드의 오해와 진실 가족이라는 이름의 권력 구조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와 착취는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에 기인한 가장 유구한 역사를 가진 억압이자 모든 억압의 근본 구조이다. 따라서 노동, 인종, 동성애자 등의 소수자 억압의 문제는 먼저 여성 억압의 문제가 해결될 때에만 참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파이어스톤은 그 장구한 시간 동안 여성이 남성에 지배를 받아온 장소인 ‘가족’을 먼저 탐색한다. 그는 치명적 오류에도 불하고 프로이드가 이전까지 누구도 보지 못했던 진실을 파악한 사상가임에는 틀림없다고 추켜세운다. 프로이드는 마침내 성sex 즉 섹슈얼리티가 인간 삶의 핵심적 문제임을 파악해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드가 아들과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쟁탈전을 다룬 ‘가족 극장’을 문명화의 본질 동력으로 보고 심리학의 측면에서 이를 다룬 것은 완전하게 헛다리짚은 것이다. 이는 문명의 본질 동력도 아니며 원본능의 심층 심리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권력’의 문제다. 가부장적 가족 및 사회 안에서 작동하며 행사되는 ‘권력’의 사회 맥락 문제다.프로이드는 이것을 보지 못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경쟁하다 힘센 아버지가 사랑의 도구인 페니스를 거세하리라는 거세 공포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에로스적 사랑을 스스로 억압하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 가족 안에서 아버지는 집안의 권력자이며 모두를 지배한다. 그는 가족들을 부양하는 대신 성을 포함하는 여성의 온갖 서비스, 자식들의 존경과 복종을 당연한 대가로 취한다. 어머니는 자식을 낳을수록 더 무력해지며 남편에 대한 경제적 예속은 더욱 심화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지배당하고 자주 학대당하는 어머니에 대한 깊은 애착을 거두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어머니의 감옥 같은 닫힌 세계를 벗어나 드넓고 자유로운 아버지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를 외면한다. 아들은 어머니를 애처롭게 생각하지만 그녀를 벗어나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사람, 아버지의 분신이 되어야만 한다. 어머니 또한 아들을 딸보다 더 사랑한다. 아들에게 끌리는 에로스적 원본능 때문이 아니라 가족 밖 넓은 세계로의 진출을 애초에 사회 구조적으로 차단당한 딸은 자신의 답답한 운명을 그대로 답습할 것이기 때문이다. 딸에겐 별다른 희망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들은 마침내 자유와 권력을 얻을 것이다. 아들은 어머니의 깊은 한숨과 오랜 고통에 대한 보상이자 대리 만족의 대상이다. 이것이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진실이다. 이와 같은 구조는 족외혼이 성립됨에 따라 강화된다. 종족의 여인이 아니라 다른 씨족의 여성을 사랑할 것. 여성은 교환되고 이성애는 공고화된다. 동성애가 병적인 것으로 진단받는 것은 프로이드의 진단처럼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족외혼의 이성애만을 정상으로 수용하고 강제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부장적 가족은 여성 억압과 재생산의 핵심 도구이자 아동 및 성소수자 억압의 근원이다.

 

  • 아동 억압

 

가부장제 가족은 가족 밖 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지배와 차별의 근원이다.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