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⑧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331d]

* 케팔로스가 소크라테스의 지적에 별다른 이의 없이 순순히 ‘옳은 말씀이다’ὀρθῶς라고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대뜸 정의에 관한 케팔로스의 견해가 ‘정의의 의미 규정’ὅρος δικαιοσύνης은 못된다고 비판한다. 그러자 이 광경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폴레마르코스가 아버지를 변호하기 위해 불쑥 대화에 끼어든다. 이에 케팔로스는 기다렸다는 듯 ‘여러분께 이 논의를 인계한다’παραδίδωμι ὑμῖν τὸν λόγον고 말한 후, 자신은 ‘제물을 보살펴야 한다’ἐπιμεληθῆναι며 웃으면서γελάσας 제물 쪽으로πρὸς τὰ ἱερά 가버린다.

* ἱερός(hieros)는 일차적으로 ‘신성한’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τὰ ἱερά(ta hiera)로 쓰일 경우 ‘제물’을 의미하고, τό ἱερόν(to hieron)으로 쓰일 경우에는 ‘성소(聖所)’, ‘사원(寺院)’을 의미한다. 그리고 케팔로스가 말한 ‘여러분’ὑμῖν은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 혹은 폴레마르코스와 뤼시아스 형제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곁에서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 모두일 수도 있다. ‘보살핀다’의 동사 ἐπιμελέομαι(epimeleomai)는 ‘혼의 보살핌’ἐπιμελήια τῆς ψυχὴς(epimelēia tēs psychēs)으로서 철학을 강조할 때 많이 쓰이는 말이다. ‘혼의 보살핌’을 강조하는 소크라테스와 ‘제물의 보살핌’을 중시하는 케팔로스는 여기서도 대비된다.

* ‘의미 규정’의 원어 ὅρος(horos)는 원래 ‘토지의 경계’, ‘경계석’을 뜻하는 말로 ‘한계’, ‘끝’, ‘기준’, ‘규칙’, ‘목표’라는 뜻도 있고 ‘비율’의 뜻도 있다. 여기서는 ‘정의’(定義)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플라톤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기 대화편에서 줄곧 소크라테스가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라는 물음을 통해 요구하고 있는 것 즉, 탐문 대상의 ‘정의’(定義 definition)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기 대화편 내내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요구는 충족되지 않는다. 물음에 접한 사람들 모두 케팔로스와 마찬가지로 사태의 본질이나 본성이 아닌 구체적 사례나 속성들을 답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소크라테스가 그 대답을 내놓는 것도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대답이 갖는 한계만 폭로하고 있을 뿐이다. 제1권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지속된다. 그러나 제1권 마무리에 가면 마침내 그 폭로의 단계를 넘어서려는 소크라테스의 단호한 의지가 표명된다. 제1권 말미에서 다시 살피겠지만 이것은 플라톤 대화편 전체의 구도뿐만 아니라, 그가 구상하고 있는 <국가>의 전체 논의 계획과 관련하여 제1권이 가지고 있는 중대한 함축을 내포하고 있다.

* 앞서(328c) 케팔로스는 제물을 막 바치고 소크라테스를 맞이했다가 여기서 대화를 접은 후 다시 제물 쪽으로 간다. 그가 다시 제물 쪽으로 간 것이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당황해서인지 제사가 아직 완전하게 끝나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출구가 그쪽에 있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려나 케팔로스가 제물을 바치고 나오면서 대화가 시작되고 또 케팔로스가 제물 쪽으로 가면서 이야기가 끝나는 것도 우리의 눈길을 끈다. 혹시 플라톤은 케팔로스도 트라쉬마코스처럼 문답에 따른 변화를 거부하고 자기가 하고픈 말만 던져놓고 처음 생각과 모습 그대로 자기가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내보이려 한 것일까?

* 오랜만에 소크라테스를 불러놓고 이제는 대화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는 그가 이처럼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것은 어쨌거나 대화가 자기가 기대한 대로 진행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폴레마르코스가 끼어들자 곧바로 논의를 인계하고 자리를 피하려는 모습도 그 때문일 것이다. 사실 케팔로스는 시종일관 재산 관련해서만 캐묻는 소크라테스가 마뜩치 않았지만 훈계의 방식이든 아니든 나름대로 점잖게 충분히 대응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갑자기 소크라테스가 ‘의미 규정’이라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를 들고 나오자 이제 더 이상 문답을 나누기가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정말 대화를 즐기고 소크라테스의 생각이 궁금했다면 자리를 뜨지 않고 남은 사람들의 대화를 경청했을 것이다. 그러나 케팔로스의 관심사는 역시 대화와 배움이 아니라 ‘혼자 말하거나 제물을 보살피는 것’이다.

* 곁에서 대화를 지켜보는 폴레마르코스도 마음이 편치 않아 어떻게든 참견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소크라테스가 ‘의미 규정’을 내세워 아버지를 비판하기에 이르자, 더 이상 부친이 문답을 이어갈 수 없음을 직감하고 바로 대화에 끼어든 것이다. 그런데 이때 폴레마르코스가 부친의 생각에 동조하면서 근거로 내세우는 것 역시 시인(詩人)의 말이다. 폴레마르코스는 ‘적어도 시모니데스의 주장에 어느 점에서 동조하신다면’εἴπερ γέ τι χρὴ Σιμωνίδῃ πείθεσθαι 아버지의 생각이 맞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χρὴ(chrē)는 ‘반드시 해야 한다’, ‘당연히 요구된다’의 의미를 갖는 비인칭 동사이고 그 동작내용을 나타내는 πείθεσθαι(peithesthai)는 ‘설득하다’의 의미를 갖는 πείθω(peithō)의 현재 부정사이다. 그런데 πείθεσθαι가 여격(與格,dative)과 같이 쓰일 경우 그 말은 여격에 해당하는 자에게 ‘복종한다’, 그 자를 ‘믿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는 시모니데스가 여격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을 보다 정확히 옮기면 ‘적어도 시모니데스에게 뭔가 복종해야 한다면’, ‘적어도 뭔가 시모니데스의 말을 믿어야 마땅하다면’으로 옮길 수 있다. 이 말은 폴레마르코스를 비롯해 당대 사람들 모두 시인들의 말은 내용이 어떻든 일단 믿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음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폴레마르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도 그것을 환기시키며 아버지 말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폴레마르코스와의 대화를 통해 소크라테스가 직면해야할 또 다른 도전과제가 다름 아닌 바로 이러한 시인들에 대한 당대인들의 맹목적 믿음이라는 것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다.

* 폴레마르코스는 케팔로스가 논의를 인계하겠다고 하자 ‘그렇다면, 제가 아버님의 모든 것에 대한 상속자 아닌가요?’οὐκοῦν ἐγώ τῶν γε σῶν κληρονόμος;라고 반문한다. 이 말은 단지 ‘자신이 아버지의 상속자’임을 확인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당연히 이미 그는 상속자이다), 그 자신 상속자로서 재산만이 아니라 ‘논의와 생각까지도 이어받는 자’임을 내세우는데 방점이 찍혀 있다. 그러므로 ‘τῶν σῶν κληρονόμος’(tōn sōn klēronomos)를 단순히 ‘당신(아버지)의 상속자’로 옮기기 보다는 τῶν σῶν(tōn sōn)의 의미를 살려 ‘당신(아버지)이 가진 모든 것들의 상속자’라고 옮기는 것이 그 말의 의도에 보다 부합한다. 즉 그 말은 ‘아버지께서 논의를 인계하신다면 제가 아버님의 모든 것에 대한 상속자가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라는 뜻이다.

* 케팔로스는 폴레마르코스의 말에 ‘웃으면서’γελάσας 자리를 떠나고 있는데 이 웃음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혹자는 문답에서 벗어난 케팔로스의 안도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혹자는 케팔로스가 자기 아들이 이름 뜻 그대로(폴레마르코스Πολέμαρχος는 ‘싸움을 이끄는 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문답에 열의를 가지고 잘 대처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혹자는 소크라테스와 젊은이들이 나누는 현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들에 대한 나이든 사람들 일반의 경멸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쩌면 아들 폴레마르코스가 상속자로서 재산만이 아니라 논의까지도 이어받겠다고 나선 것이 기특해서 그랬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가난한 주제에 자기 지혜에 도취해서 감히 당대 거물로 자수성가한 자신을 다그치고 있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가소로움이 실린 것이라 상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려나 단어 하나에 매달려 상상의 나래를 펴고 그 함축을 좇는 것도 플라톤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 아무려나 어떻게든 부친 편을 들려는 폴레마르코스의 태도는 가상해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가 늘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혈연과 가족주의는 양날의 칼이다. 그것이 내포하는 생물학적 맹목성은 가문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증폭시키기도 하지만 혈연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배타성을 증폭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 맹목성으로 인하여 가족들에 대한 감정 일체를 애착이나 집착으로 증폭시켜 때론 가족들 사이를 남보다 더한 사이로 갈라놓기도 하고, 가족 사이에서 일어난 문제들을 해결 불가한 수렁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자식이라고 해서 부친의 생각까지 다 상속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를 잘 보살피는 것은 자식 된 도리로서 마땅한 일 지라도 아버지가 갖고 있는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마저 옳다고 믿고 받드는 것은 결코 도리가 아니다. 이처럼 생물학적 맹목성 또는 당파성은 때론 그 혈연 집단의 이익과 연대를 관철하는 강력한 힘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그 만큼 분별력을 마비시켜 그 집단을 광기로 물들게 하는 독약이 되기도 한다. 물론 실천을 결단할 때가 있고 또 그때가 오면 더 이상 회의하지 않고 의지와 감정을 실어 온몸을 던져야 한다. 그럼에도 그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그렇게 몸을 던지는 순간마저 지성의 끈을 놓지 않는 것 또한 철학의 힘이다. 소크라테스의 삶이 그것을 그 자체로 증명한다. 그의 말 그대로 ‘성찰이 없는 삶은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없는 삶이다’ὁ δὲ ἀνεξέταστος βίος οὐ βιωτὸς ἀνθρώπῳ(<소크라테스의 변명> 38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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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으로 소크라테스와 케팔로스의 대화는 일단락된다. 앞서 이들의 대화는 소크라테스가 케팔로스에게 노령에 대한 심경을 묻는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케팔로스가 생활방식을 거론하자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재산 문제와 연계시켜 연이어 캐묻게 되면서 결국 정의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고 케팔로스가 물러난 후 제1권의 두 번째 대화 국면 즉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러면 이제 소크라테스와 케팔로스의 대화 부분을 마무리하면서 플라톤이 케팔로스를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종합적으로 음미해 보자.

* 소크라테스와 케팔로스의 대화에서 케팔로스의 언급 부분들은 크게 1)소크라테스에게 건네는 인사와 환영의 말(328c-e), 2)‘노령을 수월하게 해주는 유일한 원인으로서 생활방식’(329a-d), 3)‘재산과 훌륭함의 관계’(329e-330a), 4)‘ 상속과 돈의 취득, 재산에 대한 입장’(330b-c), 5)‘재산이 가져다주는 덕에 대해서’(330d-331b) 등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1)에서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를 맞이하며 그 자신이 먼저 찾아가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노라고 말하면서 앞으로 자주 찾아줄 것을 권하고 있지만, 그의 말에는 나이 든 노인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강권조의 말투와 와 훈계조의 과시가 묻어나 있다. 그리고 2)에서는 불행을 노령 탓으로 돌리는 세속의 노인들과 달리 자신은 시인 소포클레스가 그러하듯, 노령임에도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과시하면서 노령을 수월하게 견디는 유일한 원인은 다름 아닌 생활방식임을 주장하고 있다. 3)에서는 생활방식이 재산에 기초한 위안거리 때문이라는 일반 사람들의 지적에 대해 재산과 생활방식 모두가 갖춰지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나름 유연한 태도로 반론을 펴고 있다. 그러나 반론을 통해 재산의 필수성에 대한 속내를 드러냄으로써 생활방식이 유일한 원인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뒤엎는 결과를 초래한다. 가난한 소크라테스를 앞에 두고 재산이 훌륭한 삶의 필수적 조건임을 대놓고 이야기하는 케팔로스의 태도는 다분히 의도적이고 모멸적이다. 그리고 4)에서는 소크라테스에 의해 그 자신 재산을 상속받은 사람이되 그 역시 돈을 자식처럼 여기는 ‘돈 모으는 자’임이 확인되고, 5)에서는 그가 가진 많은 재산을 바탕으로 그가 덕을 본 것들에 대해 자랑하듯 제법 길게 늘어놓는다. 이 가운데 특히 1)과 2), 5)는 재산가로서 자신의 삶을 자랑스레 과시하는 케팔로스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고, 3)과 4)는 소크라테스에 의해 자신의 생각과 주장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음에도 그것을 짐짓 무시하는 케팔로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리고 5)는 재산이 가져다 준 좋은 점으로 정의롭고 경건한 삶을 사례까지 동원하여 길게 이야기하지만 이미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와 경건과는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도 주목할 것은 케팔로스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소크라테스의 지적에 대해서는 어떠한 반응도 없이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2)와 5)의 경우, 언급 분량이 곧이어 이어질 소크라테스와 폴레마르코스의 문답형 대화와 너무나 비교될 정도로 장광설에 가깝다. 두 경우 다 대답의 길이가 버넷판으로 각기 30행에 달하는데 이는 일방적으로 자기 말만 늘어놓는 트라쉬마코스 장광설에 필적하는 분량이다.

* 사실 케팔로스는 일단 겉으로만 보면 이상할 정도로 소크라테스의 집요한 질문에 아주 선선하게 호의적으로 응하고 있다. 게다가 소크라테스의 의도 섞인 지적에도 매번 ‘진실된 말이다’ἀληθῆ(329e, 330c) ‘옳은 말이다’ὀρθῶς(331d)라는 말로 맞장구까지 치고 있다. 어쩌면 케팔로스는 경륜 있는 노인이자 어른으로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도 많이 누그러졌고, 특히 연하의 사람들에 대해서 관대함과 포용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어쩌면 케팔로스가 이제 노령에 접어들면서 판단력도 옛날과 같지 않아 소크라테스의 집요한 의도는 물론이고 문답의 내용들 제대로 눈치 채지도, 이해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이러한 추측들 모두 플라톤이 드러내고자 하는 케팔로스의 모습과는 일정하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우선 평생에 걸쳐 온갖 사람들과 만나며 온갖 이야기를 나누며 온갖 풍파를 다 겪었을 케팔로스의 경륜과 내공을 염두에 둔다면, 케팔로스가 비록 노령이어도 소크라테스의 의도와 그가 제기하는 지적을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늙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타당해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케팔로스가 소크라테스가 하는 말마다 매번 호응하고 옳다는 말을 연발하고 있다고 해서 그가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깊이 이해하고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다고 판단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왜냐하면 누가 보기에도 케팔로스를 대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그리 호의적이지도 않고 지적 또한 케팔로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임이 분명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케팔로스가 시종일관 그리 선선하고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케팔로스 자신 소크라테스의 말에 전혀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반대로 그 자신 소크라테스의 의도를 다 알아차리고 있지만, 그의 지적에 능치 않은 논리로 대응을 했을 경우, 그 자신 어떤 처지에 직면할 지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지레 그 국면을 피하려고 의도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다. 사실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라테스 일행을 막아서고 집으로 데려오는 전후 정황을 되새겨 보면, 케팔로스가 소크라테스를 초대할 목적으로 그리했다고 보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리고 초청 목적 또한 비록 거류외인이지만 자수성가하여 귀족 못지않은 권위와 품위를 갖추고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소크라테스에게 과시하고 싶어서였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래서 케팔로스는 훈계조로 대화를 시작하였으나 곧바로 이러한 자신의 생각이 여의치 않음을 알고 내심 당혹스러웠으나 체면상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수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케팔로스는 그러한 상황에서 의연함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내공은 충분히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노련한 노인들이 짐짓 그러듯 소크라테스가 무슨 말을 하건 태도상으로는 점잖게 받아들이되, 소크라테스의 질문 의도와 상관없이 그냥 자신의 생각만 늘어놓기로 작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이야기를 나누어가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소크라테스에 대한 생각 즉 듣던 바대로 소크라테스가 ‘그저 입만 살아서 살아가는데 별 소용도 없는 논리나 따지려 든다’는 자신의 생각이 역시 맞았다고 내심 쾌재를 부르면서, 그 자신 성공한 어른으로서 게다가 경륜까지 갖춘 사회 원로로서 소크라테스에게 정의와 경건에 대해 한 수 가르치려 들었을지도 모른다.

* 만약 이러한 해석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면 어쨌거나 플라톤은 문답이나 철학적 의미규정 따위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저 귀 막고 자기 생각만 늘어놓는 대표적인 군상으로서 처음부터 케팔로스와 트라쉬마코스 두 사람 모두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폴레마르코스가 소크라테스 일행의 길을 막아서며 체류를 강권하며 설득을 부정하는 장면은 앞서 살폈듯 앞으로 전개될 트라쉬마코스를 드러내기 위한 복선일 뿐만 아니라, 케팔로스까지 포함해서 그들 모두 자신의 약점과 무지를 드러내 보이기 싫어하고,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자기 스타일로 자기가 생각한 것만을 이야기하는 완고한 사람들임을 드러내기 위한 복선일 수도 있다. 물론 두 인물의 스타일은 매우 대조적이다. 둘 다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도, 처음부터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는 사람들이지만, 한 사람은 그런 내색 없이 허투루 속을 드러내지 않고 차분하고 점잖게 처신하고 있고, 또 한 사람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노골적으로 속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시종 일관 공격적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들은 하나같이 공동체적 삶에 등을 진 개인적이고 이기적이며 돈과 권력의 힘을 믿는 그야말로 삶의 진실에 무지하고 혼의 불행을 안고 사는 어리석은 군상들인 것이다.

* 그러나 플라톤이 케팔로스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그의 태도만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당대 기득권층으로서 그가 가진 사고방식이나 가치관이라 할 것이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대화 시작부터 일관되게 케팔로스에 대해 재산 관련해서만 집요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것은 플라톤이 당대 최고의 재산가 케팔로스를 어떤 시선에서 바라보고 있으며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플라톤은 결국 등장인물 케팔로스를 통해 그가 말하는 훌륭한 생활방식이란 다름 아닌 그야말로 재산에 힘입어서나 가능한 것으로서, 자신의 개인적인 안녕과 행복을 위한 나름의 방책일 뿐이며, 그것에 격조까지 내보이기 위한 일종의 생활 속 행위 지침에 불과한 것임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사실 케팔로스 같은 재산가들에게 부(富)πλοῦτος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이미 충분하고, 또 굳이 힘들게 절제해가며 결핍을 견뎌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재산가들은 이미 자족함을 누리고 있다. 물론 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정도의 모습과 태도를 간직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 태도는커녕 격조라고는 눈곱만큼 찾아 볼 수 없는 게다가 눈 하나 까딱함이 없이 적극적으로 나쁜 짓을 저지르는 재산가들도 부지기수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케팔로스를 적극적으로 비난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인다. 그러나 플라톤이 케팔로스 같은 부류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이미 케팔로스가 내세우는 개인적인 수준의 자부심이 아니다. 당대 기득권층이자 신흥 부유층인 케팔로스 정도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단순히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 ‘나는 계율을 어기지 않았음’을 떠벌이며 내세우는 것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내면의 덕과 지혜를 갖추고 있지 않음’, ‘재산과 명망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적극적으로 잘 한 것이 없음’을 뼈아프게 반성하며 부끄러워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플라톤이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자유와 평화’, ‘정의와 경건’이 정말 절박하게 요구되는 이 절대 절명의 위기시대에, 당대 사회경제적 현실의 가장 큰 수혜 계층이자 기득권층이라 할 수 있는 케팔로스 부류의 사람들이, ‘자유와 평화’, ‘정의와 경건’이라는 말을 그저 자신의 개인적 삶의 안녕 차원에서만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그들이 자신들의 삶이 마치 정의롭고 경건한 삶에 일치하는 삶인 양, 아무런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내세우기까지 한다는 것은 정말 더욱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정의는 단순히 그러한 개인의 사사로운 안녕과 행복을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내적인 영혼의 조화를 통해 드러나는 덕과 지혜로서, 그 자체에 의해서건 결과에 따라서건 자신은 물론 공동체 모두의 자유와 평화 그리고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후의 보상 또한 케팔로스가 말하듯 사후의 처벌이 두려워 ‘마지못해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신들과 남에게 빚지지 않는’(331b) 그런 정도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벌을 덜 받으려고 비싼 제물을 바치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적극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대로 ‘평생을 통해 각고의 노력으로 정의가 그 자체로나 결과에서나 늘 좋은 것임을 믿고, 덕과 지혜를 쌓아 가면서 개인의 내면에서나 사회적 삶에서나 하나같이 정의로운 그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 당대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케팔로스는 거류외인을 포함하여 당대 부유층 모두에게 요구된 공적 기부(leitourgia)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케팔로스는 당연히 그런 점을 재산 덕택에 갖게 된 ‘가장 좋은 것’τί μέγιστον ἀγαθὸν이자 명예로 자랑스레 내세울 법하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린 케팔로스는 그것을 입에 올리고 있지 않다. 이 또한 최소한 케팔로스가 실제 그런 공적 기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거나, 이미 플라톤 자신 <국가>에서 케팔로스를 그 만한 수준의 인물로 설정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 아무려나 기타 여러 가지 점에서도 <국가> 도입부에서 케팔로스의 등장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서두에서도 살폈듯이 <국가>의 논의가 마무리되는 제9권에 가면 부정의한 삶에 대한 정의로운 삶의 우월성이 증명된 다음에, 마지막 제10권에 가면 정의로운 사람들에 대한 보상의 문제와 그들의 영혼의 불멸에 대한 문제가 다시 거론된다. 이것은 제1권과 제10권이 서로 주도면밀하게 맞물려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다시 말해 제10권의 그 내용은 제1권에 담긴 여러 가지 도전들 가운데 하나 즉 케팔로스 같은 사람들의 삶의 태도와 사고방식과 그들의 기복적 종교관에 대한 플라톤의 답변인 것이다. <국가> 제1권의 케팔로스 역시 폴레마르코스가 거론한 시인들과 트라쉬마코스와 함께 <국가>라는 플라톤 자신의 거대한 정치철학적 프로젝트 안에서 반드시 비판적으로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될 당대 아테네 현실을 대표하는 인물상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알림> 추석 연휴와 개천절 공휴일을 맞아 정암학당 현장 강의가 휴강함에 따라 웹진 연재도 잠시 쉬었다 10월 중순부터 다시 이어질 예정입니다.

베티 프리단(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3. <여성성의 신화>, 베티 프리단(上)

“가부장제가 만든 신화의 허울을 벗겨내다.”

 

김은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당신이 돌아보고 얼마나 먼지, 또 당신이 얼마나 왔는지 알게 되기 전까지는 얼마나 멀리 가야할지 알 수 없는 법이다…지금 수백, 수천 명의 여성들이 그러는 것처럼, 1963년에 어느 여성이 이 책이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고 말하며 처음으로 『여성성의 신화』에 사인을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나는 이렇게 적어줬다. “새로운 길 위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용기를!” 이 길에서 다시 돌아갈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신의 전 생애를 변화시켰고, 분명 내 생애도 변화시켰다. ”

 

  • 1942년 스미스 대학 입학생과 모나리자 스마일

 

1950년대 미국 동부의 웨슬리 대학을 배경으로 한, ‘모나리자 스마일’이라는 영화가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줄리아 로버츠가 호연을 한, 영화의 주인공 캐서린 왓슨은 미술사 교수로 새로 부임해온다. 하지만, 왓슨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미래가 열린, 학생들의 인생 목표가 결혼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결혼 이외의 다른 삶의 가능성을 그들에게 제시하려 한다.

당시의 대학은 ‘결혼이 최고의 학생을 만든다’라는 표어를 걸고, 여학생을 완벽한 주부로 가는 길로 이끄는 예비 결혼 학교의 기능을 자처했다. 이 교육을 거치면서, 여성은 가정과 직업 중 전자를 선택하는 것이 자신의 미덕이자 의무라고 여기었다. 영화에서 왓슨은 학생들의 지성과 감성 그리고 잠재력을 일깨우고, 이러한 노력은 영화 결론부에 결혼 외에 다른 가능성을 긍정하는 학생들로 결실을 얻는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학생 중 하나는 법대로 진학하는 대신 결혼을 선택하며 말한다. “당신이 믿는 삶을 나까지 원해야 한다고 말하지 말아요. 내가 원하는 삶은 결혼이에요. 원하는 삶을 선택해야 한다고 한 건 당신이 아니었나요?” 결혼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삶이라고 되받아치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 1921. 2. 4. – 2006. 2. 4.)『여성성의 신화』는 시작된다. 바로 영화속 학생과 마찬가지로, 베티 프리단을 비롯한 많은 미국의 여학생들은 졸업 후 결혼을 선택했다. 그 역시 잘 재단된 드레스를 입은, 한 손에는 책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프라이팬을 들고 있는 재원이었다. 멋진 남편의 배우자이자, 귀여운 아이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며, 완벽한 가족의 꿈을 그렸다. 하지만 십여 년이 흐른 뒤, 프리단은 『여성성의 신화』를 통해서 영화 속 결혼을 선택한 그 여성으로 대변되는 많은 여성들의 인생 설계가 정말로 자유로운 선택인 것인가? 그리고 지금 행복할까? 라고 반문한다.

베티 프리단은 10주년 기념판 서문에서 솔직하게 다음과 같이 쓴다. “이 책을 쓰기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여성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을 쓰고 난 후 일생은 달라졌다. 프리단이 말한 것처럼 “내가 이 책을 썼다는 것 자체가 참 믿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내 생애 전체가 이 책을 쓰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 식탁 위에서 글을 쓰다

 

베티 프리단은 일리노이주 피어리어에서 신문기자를 하다 전업주부가 된 어머니 미리엄과 보석상인 아버지 해리 골드스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학년 올 A라는 훌륭한 성적으로 스미스 대학을 우등 졸업한, 프리단은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한다. 대학원 졸업 후 그는 심리학과에서 특별연구원 지위를 제안 받았으나 거절하고, 뉴욕에서 노동 전문 기자로 활동한다. 프리단 역시 경력단절의 아픔을 겪었다.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해고되고, 그 후 여러 잡지에 프리랜서로 글을 기고하지만, 전업 주부가 된 것이다. 프리단은 1957년, 그의 일생을 바꾼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미국의 전형적인 중산층 주부의 삶을 살았다. 모교인 스미스 대학의 15주년 기념 동창회 사업의 일환으로 졸업생 동문 조사를 요청받은 것이다. 프리단은 대학 동창을 대상으로, 졸업 후 변화한 그들 삶에 대한 심층 면접 작업에 착수한다.

면접을 진행하던 당시, 프리단 역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 자신의 열의 없는 삶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프리단은 심층 면접을 통해서 남성과 마찬가지로, 공적 영역에 참가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았으나, 소위 ‘미국 정상 여성’의 이미지와 맞추기 위해, 가정에서 머물 수밖에 없는 여성들, 가정과 사회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성들을 포착한다. 프리단은 그들 중 다수가 주부로서의 생활에 그다지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의 발견은 프리단으로 하여금 다음 질문으로 나아가게 한다. “교육을 받았지만, 왜 여성들은 자신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가. 남편의 아내나 아이의 어머니가 아니라 사람 그 자체로 활동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왜 여성들이 갖는가.”

프리단은 전업 주부의 삶을 살아가면서, 동시에 위에 대한 답을 얻고자 근 5년간 독학으로 도서관을 찾아가 자료를 찾고 여성성의 신화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프리단은 스미스대학 동창생들의 설문조사를 시작으로 고등학생과 대학생, 기혼 여성들을 심도 깊게 인터뷰하고, 각종 매체의 기사와 광고, 전업주부 결혼생활을 추적하면서 방대한 양의 취재와 자료 조사를 실시한다. 또한, 잡지와 광고에 대한 이론과 심리학 저서들을 분석하면서, 사회가 여성들을 어떻게 억압하고 있는지 밝혀낸다.

이 때 그는 사회가 제시한 여성성에는 아내, 어머니로서 여성적 경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러한 여성성은 여성들이 가정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경고한다. 다시 말해, 여성은 정치, 예술, 과학, 크고 작은 사건, 전쟁과 평화 등 어느 것에도 자신을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성은 남성만이 주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소위 여성성에 담긴 의미를 분석하면서, 프리단은 자신이 여성성의 신화에 사로 잡혀, 거짓된 삶을 살아왔음을 자각한다.

여성성을 분석하고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조롱하고 비난했지만, 프리단은 무시하고, 집안일을 하지 않을 때 외에는 항상 글을 썼다. 식탁 위에서 글을 썼고, 거실 소파에서도 글을 썼다. 아이들을 돌보고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글쓰기를 잠시 멈출 때에도 머리 속에서 이어 쓴 후 아이들을 위한 시간을 마치고, 재운 후에 작업을 계속했다.

이제는 여성학의 고전이 된 『여성성의 신화』는 원래 책의 형태가 아니라 르포 형식의 기사로 기획되었다. 하지만, 어떤 잡지도 프리단의 기사를 게재하지 않으려 했다. 그저, 노이로제 있는 주부들에 대한 특수한 이야기로 치부할 뿐,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삼는 잡지에서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다. 여성 잡지 조차, 자신의 세계의 근간인 여성성의 신화를 위협하는 프리단의 글을 거절했다. 하지만, 『여성성의 신화』이 출간되자, 여러 가지 우려와 달리, 초판 발행 3000부가 순식간에 매진되었을 뿐 아니라, 260만부가 넘게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된다. 판매 지수는 갱신되었고, 프리단은 스테디셀러 작가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우선, 『여성성의 신화』는 당시 미국에 결혼한 여성의 40%가 10대였던 1960년대 미국 여성상에 대한 최초의 실증적인 기록이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또한, 방대한 연구는 여성들이 겪는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을 최초로 명백하게 드러냈다. 게다가 이 책은 ‘여성성’이라는 이미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여성에게 부과되는지 그 과정에 대해 충실히 설명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은 당시로는 급진적인 주장을 감히 선언한다. “남편과 아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책은 행복한 현모양처란 없고, 여성은 남편과 육아에서 벗어나 사회적 활동에 뛰어들어 실질적 성평등과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고 강하게 말한다. 책의 울림은 컸고, 수많은 여성들의 삶과 의식에 실질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제2세대 페미니즘 운동의 위대한 서막을 알렸다.

 

  • 여성성의 신화: ‘더 없이 행복한 주부는 왜 그리 불행한가?

 

베티 프리단의 『여성성의 신화』 도입부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등장한다. “왜 교외의 크고 멋진 저택에서 네댓 명의 아이를 기르고 남편을 내조하며, 세간의 인식대로라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야 할 주부들이 불행하다고 느끼는가?” 왜 더 없이 행복한 주부는 그토록 많은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기 자신에 집중하는 순간 이기적이라고 자신을 여기는가? 왜 여성은 자신의 욕망을 죄악시하는가?

프리단이 주요하게 관심을 둔 중산층 백인 주부들은 소위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을 누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에는 온통 공허감과 권태감이 있고, 주부들은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고 여겼다. 프리단은 당시 여성들이 가정주부로서 겪고 있던 내면적 갈등을 자세히 묘사한다. 교외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집에서 살면서, 직장으로 떠나는 남편을 배웅하고, 아이를 학교로 보내고 난 후, 모두 떠난 빈 집에서 홀로 앉아 “이게 정말 행복일까?”라고 회의한다. 마음의 상태와 눈에 보이는 현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주부들은 더더욱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하지만 더더욱 힘든 것은, ‘자신이 선택한’ 이 아름다운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불행은 아무에게나 발설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마음과 현실 사이의 갈등은 오랫동안 침묵의 영역에 머물렀을 뿐 아니라, 여성들을 더욱 더 고통스럽게 했다. 베티 프리단은 미국의 많은 여성들이 이 고통을 겪고 있음을 발견하고,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에 널리퍼진 여성들의 고통을 오직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로 명명한다.

그렇다면,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들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성성이라는 허구적 신화 때문이다. 당시 미국에 만연해 있던 허구의 이미지, 즉 여성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남편을 내조하면서 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통념일 뿐이다.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선택으로 결혼했고, 그러한 여성성을 추구한다고 말했지만, 이는 사실상 어떤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프리단이 책 제목으로 쓴 ‘여성성의 신화’란 결국 말 그대로 실재로는 존재한 적 없는, 여성성과 무관한 그저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신화를 지칭한다. 이러한 여성성의 신화는 각종 매체, 광고, 교육, 학자들이 작위적으로 만들어 낸 현대식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오직 남성 중심적인 학계와 매스미디어가 ‘여성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신화로 만들고 사회 전반에 통용 시켜 여성에게 주입한 것이다. 이 여성성은 그 능력과 상관없이, 여성을 재생산 기관으로만 간주하는 사회가 만들어 냈다.

신화의 힘은 강력하다. 여성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인생 여정 외의 다른 미래를 상상하지 못했다. 주부이자 어머니로서 사는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배운 여성들은 학업을 이어가거나 직업을 가지는 일 없이 이른 나이에 결혼하여 가정주부로 살았다. 이 신화의 강력한 위력 속에서, 주부들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집안일을 하고 자식과 남편을 뒷받침하는 삶을 살면서 동시에 괴로워했다. 또한, 맞벌이로 일하는 여성들은 자신이 일을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엄마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죄책감을 느겼다. 이 신화는 프리단의 시대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기에, ‘여성성’을 사회가 아무리 찬양한다 하더라도, 여성들은 그 ‘여성성’으로 인해 더 억압받고 원인 모를 고통에 시달린다. 프리단은 더 이상 그러한 여성성의 신화로 인해 여성들이 고통받을 필요가 없음을 강력하게 주창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성은 ‘내가 누구이며, 내가 삶에서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것을 죄라고 느껴서는 안 된다. 여성들은 남편과 아이를 넘어서 자기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기를 원하는 것을 이기적이라고 느낄 필요가 없다.”

 

  • 1950-1960년대 미국 여성들

 

그렇다면, 왜 당시 미국 여성들은 사회가 강요한 여성성의 신화를 의심하지 않은 채 받아들이는가? 밀이 여성의 종속을 쓸 당시만 해도, 미국 여성은 영국 여성의 지위에 비해 훨씬 진보한 여성의 권리를 획득했고, 참정권과 재산권 역시 다른 나라 여성들에 비해 먼저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참정권 운동이 끝난 후, 오랜 기간 동안 미국여성운동은 구심점을 찾지 못한 채 표류했다. 여성문제를 제기할 중심을 상실한 미국 여성들은 더 이상 여성운동을 지속시켜 나가지 못했다.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1950년대 아이젠하워 시대의 미국은 데이비드 리스먼이 “고독한 군중”으로 칭한, 순응주의적인 미국 시민들의 사회였다. 이들은 사회에 복종하는 존재들로 자신을 자리 매김한다. 이 시기에, 미국은 ‘풍요한 사회(Affluent Society)’로 불렸고, 뉴딜 정책과 제2차 세계 대전을 통한 경제 성장과 소득의 재분배의 효과로 넓은 중산층이 양산이 된다, 이들 중산층은 동질화(homogenization)된 미국적 가치의 상징이기도 하다.

거대한 기업 조직과 관료 조직이 사회를 지배 하면서, 청년들은 순종적인 소시민을 소망하고, 안정된 직업, 전원 주택, 퇴직 계획과 같은 개인의 안전에 관련된 문제에 주로 관심을 가지는 ‘조용한 세대’가 된다. 이 조용한 세대는 다수의 생활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공유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과 같은 대중 매체의 발달은 이 청년 세대의 욕망을 조직하는데 일조한다. 1960년 초 미국 사회에서 텔레비전 보급은 전체 가정의 90%에 이르게 되었고, 텔레비전이 영상으로 전달하는 메세지는 어린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모든 계층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미디어의 영향이 본격화되면서, 소비자들의 새로운 욕망을 만들고, 소비자들의 기호를 조작한다. 이와 더불어, 교육의 대중화 역시 사회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비할 수 있는 사회 적응의 수단을 제공하는 도구로 작동하는데, 그 과정에는 여남의 데이트 방법, 여남 고정적 젠더 역할, 정상 가족의 가치 같은 것이 포함되었다.

이러한 1950년대와 1960대 초 분위기에서, 미국 사회의 여성 위치는 이전의 여성 해방 운동 시기와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1930년대 미국은 경제 공황을 겪으면서 기혼 여성 취업을 금지하는 입법을 추진했지만, 동시에 전쟁시기에는 여성들의 노동력을 요구했다. 그 사이 많은 여성들은 경제 참여와 가정복귀의 악순환을 경험한다. 이에 따라 기혼여성이 가정 밖에서 일을 하는 것은 남성의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라는 인식이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로 자리잡았다. 전 후, 순응주의적 사회 분위기에서 중산층 여성들은 사회 안정의 보루인 가정을 꾸리는 존재로 제시되었으며, 대중문화는 참된 양육자인 가정의 어머니의 역할만을 여성에게 강조할 뿐이었다. (이창신 저(2004), 미국 여성사, (주) 살림출판사)

이러한 환경이 빚어낸 시대에 살아가는 여성은 자신의 임금은 남성보다 낮고, 임신과 출산을 할 경우 회사를 그만둬야 한다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자기 아이에게 모유 수유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한다. 여성은 “하루를 살아도 아름다운 여성으로 살겠어요”라고 말하는 광고를 자신의 욕망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여성들은 시달리고 있고, 결코 이렇게 사회가 선전하는 여성성 덕분에, 행복할 수는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유일자의 철학은 나다움(Eigenheit)의 철학이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유일자의 철학은 나다움(Eigenheit)의 철학이다.

박종성

 

 

  1. 우리 교육의 주요요소는 도덕적 영향력이다.

 

우리는 앞선 글에서 신성한 것(Heiligen)이 두려운 낯선 것(Unheimlichkeit)이고 초-자아(das Über-Ich)이라는 것에 도달하였다. 이 글에서는 교육의 주요-요소는 도덕적 영향력이라는 것과 고취된 교육은 ‘신성한 것’과 연결되고 우리의 산출로 내맡긴 교육은 ‘소유자’의 교육이라는 점을 밝히면서, 나다움의 철학은 신성한 것에 대한 아무것도 아님(Nichts)을 선언하는 것이라는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유일자의 철학은 나다움의 철학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슈티르너는 헤겔뿐만 아니라 바로 그 당시의 ‘좌파인’, 계몽적 비판가인 포이어바흐와 브루노 바우어와 논쟁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인물, 곧 ‘소유자’의 미래상을 발전시킨다. 대표적으로 헤겔의 주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헤겔은 어린이의 조기에 시작하는 마음의 교양(Bildung)을 다음과 같은 원칙으로 요구한다.

 

“교육(Erziehung)의 주안점은 극기, 훈련에 두어져야 하거니와 극기란 자식의 어리광(Eigenwillen)을 억누르는데 그 의미가 있다. […]그의 가장 고유한 주관성으로서의 이성(Vernünftige)이 어린이에게 싹트지 않으면 안 된다. […]윤리(Sittlichkeit)란 것이 감각적으로 어린이에게 심어져 있지 않으면 안 된다”<G.W.F. Hegel: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 174, 175, Zusätze (Hervorhebung B.A.L.) >

 

잠시 ‘Eigenwillen’ 단어를 살펴보자. 헤겔과 달리 슈티르너는 이 단어를 부정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미 첫 번째 <e시대와 철학> 글에서 설명하였듯이, ‘Eigenwille’을 ‘멋대로 함’으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eigen’(자신의, 자기의)에서 파생된 단어들을 선호하고 이런 단어들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때문에 “자기 의지(Eigenwille), 나다움(Eigenheit)”(186쪽)으로 번역하였다. 또한 그는 ‘자기의지’(Eigenwille)를 ‘자유재량’(Willkür)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한다.(141) 그래서 “자기의지(Eigenwillen)의 지배 자체는 확실히 자유가 아닌 것으로서 가장 완전한 자기 부정(Selbstverleugnung[self-denial])이다.”(172)

 

위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헤겔에 있어서 ‘이성적인’ 인간의 생산은 ‘윤리적 인간’의 생산이고, 헤겔 이후 ‘자유인’이라는 계몽주의자에 있어서는 소위 유적본질(Gattungswesens)의 생산이다.<Der “Eigner” bei Max Stirner, Bernd A. Laska: “Katechon” und “Anarch”. Carl Schmitts und Ernst Jüngers Reaktionen auf Max Stirner. Nürnberg: LSR-Verlag 1997 Stirner-Studien Nr. 3.> 유일자로서의 슈티르너는 모든 측면에서 노력했던 그런 식의 ‘교육’을 근본적인 악으로 인식한다. 더욱이 그런 가장 우스꽝스러운 산물들은 그에게 위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는 초기의 저작에서 “자유로운 인간, 주권을 가진 인물”(freie Personen, souveräne Charaktere)을 주장하는데<Max Stirner: Das unwahre Prinzip unserer Erziehung (1842). In: PKR, S.,77>, 이후의 저작인 『유일자와 그의 소유』에서 더 이상 ‘자유로운’, ‘주권을 가진’, ‘참된’ 등등의 인간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학술적인 경계 설정의 토대에서 ‘소유자’를 말한다. 그는 계몽주의자에 반대하여 “우리 교육의 주요-요소는 도덕적 영향력”(332쪽)이라고 한다. 그리고 “도덕적 영향력”은 “영혼의 구제”(Seelenheil)이다.(77) 나아가 “성직자 냄새가 나는 마음의 효력은 특히 사람들이 빈번히 ‘도덕적 영향력’이라고 부르고 듣는 것에 해당한다.”(88) 좀 더 그의 말을 음미해 보자.

 

도덕적 영향력은 굴복(Demütigung)이 시작되는 곳에서 출발한다. 그렇다, 도덕적 영향력은 바로 이러한 굴욕 그 자체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용기(Mut)의 꺾어버림과 굽힘은 겸손(Demut)에 이른다. 만약 가까이에 있는 암석이 폭발할 때, 내가 어떤 사람에게 도망가라고 큰 소리로 말한다면, 나는 이러한 요구(Zumutung)로 어떤 도덕적 영향력도 행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만약 내가 아이들에게, 네가 식탁에 내놓아진 것을 먹지 않는다면, 너는 배고플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어떤 도덕적 영향력도 아니다. 그러나 만약 내가 그에게, 너는 기도하고, 어른을 존중하고, 십자가를 존경하며, 참 등등을 말하라고 한다면,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일부를 이루고 인간의 사명이다 혹은 심지어 이것은 신의 의지이라고 말한다면, 도덕적 영향력은 완성된다. 그 때에 인간은 인간의 사명에게 굴복해야만 하고, 고분고분해야만 하며, 순종하게 되어야만 하며, 규칙(Regel)과 법으로 세워진 어떤 낯선 것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포기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어떤 더 높은 것굴종해야(sich erniedrigen)만 한다. 곧 자기 비하(Selbsterniedrigung)이다. “제 몸을 낮추는 사람은 찬양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 어떤 경우든, 아이들은 제때에 깊은 신앙심, 신에 귀의함(Gottseligkeit), 존경할 만함으로 독려되어야만 했다. 이를테면 좋은 교육은 어떤 사람에게 “선한 근본 명제”를 가르쳤고 명심시켰으며 억지로 머릿속에 넣어주었고, 억지로 주입시키고 설교하게 되었다.

 

이렇듯 도덕적 영향력은 굴복(Demütigung)이고 겸손(Demut)이며 인간의 사명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낯선 것에 자기 의지를 포기하여 더 높은 것굴종해야(sich erniedrigen)만 하는 것인데, 이는 의지의 포기이고 자기 비하(Selbsterniedrigung)이다. 위에서 사용된 ‘규칙’의 어원은 ‘규칙’ 또는 ‘길이를 재는 자’를 뜻하는 라틴어 regula이다. 특정한 상황 또는 영역에서 따라야 할 방침, 해야 할 행동을 가리키거나 규정하는 공식을 의미한다. 슈티르너는 291쪽에서 규칙, 지배, 법칙을 같은 부류로 본다. 인간, 자유 등등도 이러한 것과 같은 의미로서 그것에 예속되어 있다고 말한다. 결국 그는 규칙을 지배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의지를 포기하고 자기비하를 하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자기비하를 하는가? 우리는 왜 자기비하를 하는가? 고취된 교육을 받아서 그런 것은 아닐까? 그래서 신들린 상태가 돼서 그런 것은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슈티르너의 말을 들어 보자.

 

 

  1. 고취된 교육-‘신성한 것과 우리의 산출로 내맡긴 교육-‘소유자의 것

 

다시 교육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슈티르너는 우리의 교육을 ‘우리에게 감정들을 불어넣는 것’(einzugeben)과 ‘우리의 산출로 내맡기는 것’을 구분한다. 다시 말해 “감정을 나에게 불어넣은(eingeben) 것인가 아니면 감정이 나에게 흥미로운 것인가”고 구분하면서 “후자가 자신의 것, 자기중심적인 것인데, 그 이유는 그것은 나에게 감정으로서 각인하지 않고, 따라하도록 불러주지 않으며, 그리고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에게 감정들을 불어넣는 것’ 다시 말해 “고취되었던 것들을 뽐내고, 나는 그것들을 마치 유산의 배당분(Erbteil)처럼 내 속에 품고, 그것들을 경작하여(kultiviere) 그것들에 의해 신들린 상태(besessen)가 된다.”(70)

 

이를테면 고취되었던 것들을 경작하여 그것들에 의해 신들린 상태가 된다는 슈티르너의 생각에는 문명에 대한 비판이 녹아있다. 문화(kulur)라는 말은 ‘경작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colere에서 나왔다. 예를 들어 루소가 <에밀>에서 “인간은 경작을 통해 식물을 기르고 교육을 통해 인간을 기른다”고 말했다. 이렇듯 경작과 교육은 kulur의 두 의미이다. 그러나 루소는 문명의 진화 과정을 발전으로 보지 않는다.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는 루소의 생각을 이어 받아 원시 문화가 서구 문화에 비해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를 뿐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은 문명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슈티르너와 공명할 수 있는 지점이다. 슈티르너의 문화, 혹은 교육에 대한 관점에서 후퇴한 교육은 고취된 교육이다. 그러니까 감정을 나에게 고취시키는 교육이 아니라, 오히려 ‘감정이 나에게 흥미로운 것’, 이러한 교육은 자신의 것이고, 이때 나는 ‘소유자’인 것이다. 나는 어떤 교육 속에 있는가?

 

또한 ‘신성한 것’이라는 개념은 소유자 모습의 이해를 위한 열쇄이다. “당신이 어떤 존경 혹은 경외(Ehrfurcht)를 품는 모든 것은 신성한 것(Heiligen)이라는 이름을 얻는다.”(78) 따라서 신성한 것은 아이에게 최초에 낯선, 투사된, 내면화된, 규범적 구조로 나타난다. 이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초-자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데, 이는 이전의 글에서 설명하였다. 곧 신성한 것은 모든 교육의 본질적 결과물인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어떠한가? 다시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감정을 나에게 불어넣은(eingeben) 것인가 아니면 감정이 나에게 흥미로운 것인가?” 우리는 한때,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웠다. 아직도 첫 구절은 기억을 한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우리가 때어난 것은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다. 그렇다! ‘사명’이다. 슈티르너 말을 다시 옮기면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때어난 “그 때에 인간은 인간의 사명에게 굴복해야만 하고, 고분고분해야만 하며, 순종하게 되어야만 하며, 규칙(Regel)과 법으로 세워진 어떤 낯선 것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포기해야만 한다.” 지금 현실에서 작동하는 인간의 사명은 무엇일까? 나의 의지를 포기해야만 하는 인간의 ‘사명’말이다!

 

 

  1. 나다움의 철학이여! 신성한 것의 아무것도 아님(Nichts)을 선언하라!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질문해 보자. 왜 신성한 것이 나에게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다음과 같은 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물과 같이, 작은 어린이에게는 아무것도 신성한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성한 것이란 표상(Vorstellung)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좋고 나쁜, 정당하고 부당한” 등등과 같은 것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데(zu Verstand)까지 이미 도달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도의 반성 혹은 현명(Verständigkeit)에서만-종교의 고유한 입장에서-자연스러운 두려움(Furcht)의 자리에 “신성한 두려움”이라는 자연스럽지 않은(다시 말해 생각에 의해서 비로소 내보였던) 경외심(Ehrfurcht)이 들어갈 수 있다. 그것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외부에 어떤 것을 더 강력한, 더 큰, 더 정당한, 더 나은 것 등등으로 간주한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낯선 힘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그 낯선 힘(Macht eines Fremden)을 단순히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확하게 인정하는데, [78]다시 말해 낯선 힘을 시인하고, 그것에게 자리를 내주어, 항복하고, 자신을 속박하도록 한다(헌신, 겸손(Demut), 굴종, 공순 등등)는 것이다.(77-78)

 

슈티르너는 이 “모든 환영의 무리가 유령으로 돌아다닌다.”(spukt)고 말하고 있다.(78) 그렇다면 이러한 신성한 것, 유령이자 ‘정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틀림없이 사람들은 ‘도덕’(Sittlichkeit)이란 말을 자발성(Selbsttätigkeit), 자기결정(Selbstbestimmung)과 동의어로 간주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단어에는 그런 의미가 없다.”(76) 그는 ‘이성적 자기결정’, ‘자기의식’(Selbstbewusstsein)<이 단어는 때로 부정적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정신의 ‘자율성’(Autonomie)(233)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자율성은 한 번만 쓰고 있기 때문에 그와 유사하게 사용하는 ‘자기결정’이라는 말을 살펴봐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은 “자기발전이라든가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몸에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116)고 한다. “질투가 심한 시민적(bürgerlich) 자유주의가 감시하는 ‘개인의 자유’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자유로운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하여 행위가 완전히 나의 것이 되는 것을 결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만 개인들(Personen)의 독립(Unabhängigkeit)을 의미”(117)하고, 다시 말해서 “자기 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한, 자기 자신에 의한 자유[강조는 옮긴이], 그리고 어떤 절대적인 것, 모든 가치의 인정에 따른 자유에 대한 갈망은 우리에게 나다움(Eigenheit)”(172)을 요구한다고 한다. 결국 자율성은 자기결정에 의한 행위가 나의 것이 되는 것이고 자기 자신에 의한 자유이며, 그것이 바로 ‘나다움’이다. 곧 유일자의 철학은 ‘나다움’의 철학이다. 나의 삶을 다른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 나의 삶은 유일하다는 것을 자주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아가 신성한 것에 대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다음과 같이 제공한다. “어떤 존재물(Ding)도 스스로 신성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내가 어떤 것에 대한 신성의 선포(Heiligsprechung)에 의해, 나의 선언, 나의 판단, 나의 무릎 굽히기에 의해, 한마디로 말하면 나의-양심에 의해 신성한 것이다.”(77) 결국의 나의-양심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아리아드네의 실타래는 다시금 ‘나’이다. 곧 “무제약적인 자아”(unumschränktes Ich)로서의 ‘에고이스트(Egoist)가 신성한 것을 ‘덧없음’(Nichtigkeit), ‘아무것도 아님(Nichts)으로 해체’시키는 것이다.(77) 그의 저작 첫 문장과 똑같은 마지막 문장을 보자.

 

“나는 모든 일을 아무것도 아님(Nichts) 위에 놓았다.”(Ich hab’ Mein’ Sach’ auf Nichts gestellt.)

 

달리 말하면 모든 일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님(Nichts)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non ens)이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무(Nichts)의 지위는 슈티르너 철학의 존재론의 핵심을 잘 드러내고 있는 “창조적 무”를 정립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유적 본질의 부정은 창조적 무를 긍정하게 만드는 계기(monent)라고 볼 수 있다. 5쪽에서 잘 드러나듯이 “창조적 무”라는 개념은 부정의 활동을 통하여 끊임없이 창조적인 자아로 회귀하는 과정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자아는 존재할 수 없고 부정의 활동으로 자아는 존재하는 것이다. 창조적 무로서의 유일자는 현실 극복을 위한 부정의 부정이라는 끊임없는 변증법적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양언어에서 sein이 ‘항구적으로 있음’을 의미한다. 파르메니데스는 ‘있다. 그리고 있음이 필연적이다’라는 것을 신념하며 있지 않음(Nichts-Sein)은 인식할 수도 없고 밝혀 보여줄 수도 없다고 보았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자아의 모습을 항구적으로 있음으로 주장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 Nichts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번역하였다. 무엇이라고 규정되거나 고정될 수 없는 아직 아무것도 아닌 그런 존재가 유일자이다. 이렇듯 유일자의 철학은 ‘아무것도 아님’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아무것도 아님’이기 때문에 자유가 성립할 수 있다. 세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자유다! 우리는 자유이다. 그렇기 위해서 세계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어야 한다!

 

‘나다움’의 철학이여! 신성한 것의 아무것도 아님(Nichts)을 선언하라!

 

유림의 정신으로 독립의 길을 걷다, 심산 김창숙 [길 위의 우리 철학] – 19

김세리

 

조선에 한 선비 있으니

벽옹 김창숙이라.

머리는 희었으되

마음은 일편단심

나라 구하려는 생각

그것 말고 무어 있을까.

차라리 독립을 위해

죽은 귀신 될지언정

신탁통치 노예는 절대로 되지 않으리.

인생이란 언젠가

죽게 마련

죽으면 죽었지

욕되게는 살지 않으리.

 

김창숙(金昌淑,1879∼1962)이 노년에 쓴 「신탁 통치」라는 시이다. 자신의 의지, 털끝하나 굽히지 않겠다는 결의가 칼날 같다. 나라의 운명이 어지러운 시절 그는 머릿속에는 오로지 ‘조국’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떳떳한 죽음을 선택하는 기개, 수많은 불의를 물리치고 오직 조국의 앞날만을 걱정하는 애국심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적어도 직접적인 외세의 압력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시절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쩌면 이해 불가의 일들이 아닐까? 아니 시대를 뒤집어 내가 그 시절을 살았던들 그러한 용기와 기백을 가질 수 있었을까. 시대의 어른으로서 민족의 정신적 기둥으로 삶을 살아간 그를 찾아 떠난다.

 

칼날 같은 정신으로 한결같은 그 길위에

_심산 김창숙 기념관 (서울특별시 서초구 사평대로 55)

 

한국 역사에는 애국의 길을 걸었던 수많은 선각자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대의와 정의를 위하여 그들은 스스로 무자비한 혹한의 시간을 선택했다. 그들의 희생으로 지금의 우리가 이렇게 존재한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늘 고마움을 잊지 않아야겠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잊은지 오래며 알지도 못하는 경우가 태반일 것이다.

구국운동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이기도 하였다. 가족의 인연은 물론이며 사적인 소유 모든 것, 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를 온전한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김창숙 또한 그러하다. 파란굴곡의 시대를 살며 그의 심장은 오로지 나랏일을 위하여만 뛰었다. 다른 우국지사들과 다른 면이 있다면 유학자의 정신을 바탕으로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선비로서 학문과 인간적 도덕성을 갖추고 세속의 영화를 탐하지 않고 죽는 그날까지 청렴과 지조를 지켰다.

우선 그의 일대기가 한곳에 담아져있는 심산 김창숙 기념관 돌아보기로 한다. 기념관은 그의 고향인 경북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1974년 심산기념회에 의해 건립)와 서울 서초구 반포동(2011년 서초구에 의해 건립) 두곳에 있다. 서초동 기념관은 반포공원과 서초구민체육센터와 이웃해 있고 기념관에서도 자체적으로 여러 가지 문화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발길이 잦은 편이다. 기념관 입구에 들어서면 왼쪽으로 그의 동상이 마주한다. 무궁화 꽃에 둘러싸여 무릎에는 서책을 놓아두고 조금은 편안하게 앉아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무궁화는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서책은 유학을 상징하는 것일 게이다. 평생을 나라의 일로 달리다가 끝내는 모진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지만 동상이나마 편안하게 앉아계신 모습이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여러 행적을 보여주는 사진 속 표정이나 그의 필체를 통해서 한걸음 한걸음 그의 세계로 걸어 들어가 본다.

 

심산 김창숙 동상

김창숙 기념관 내부 모습

 

‘파리장서(長書) 운동’은 김창숙의 대외적 활동의 첫걸음이었다. 1919년 3월 1일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유림 대표가 한 명도 없음을 보고 심산은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유교가 이번 독립운동에 참여치 않았으니 세상에서 고루하고 썩은 유교라고 매도할 때에 어찌 그 부끄러움을 견디겠는가?”라고 통탄하였다. 유교의 나라에서 유림이 민족대표에서 빠진 것을 치욕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열국 대표들에게 호소해서 국제 여론을 환기시켜 우리의 독립을 인정받도록 한다면 우리 유림도 독립운동의 선구가 됨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보고, 전국의 유림대표를 규합하여 연명으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巴里長書)를 만들어 보낼 계획을 추진하였다. 우선 영남 유림의 영수(領袖)인 곽종석에게 알려 협조를 구하며 파리장서의 작성을 부탁하였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동지들을 파견하여 유림대표들의 지지와 동참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호서유림도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거의 같은 동기와 목적에서 장서를 작성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려고 준비하는 중임을 알게 되어 양측은 공동으로 파리장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137명의 유림대표들의 연명으로, “한민족은 불행히도 그간 일제의 간악한 침략으로 인하여 현재는 노예적 상태에 있지만, 역사적 전통과 현실적 역량에 있어서 충분히 독립자존의 능력을 갖추고 있으므로 인간 및 만물을 통한 독립생존의 원리에 비추고, 또 강화회의에서 실현코자 하는 민족자결원칙에 입각하여 우리 한민족에 대해서도 자주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한 파리장서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도록 결정하였다.

김창숙은 137명의 연명으로 작성된 장서(長書)를 품고 극비리에 중국 상해로 출국했다. 상해에서 동지들과 의논 끝에 독립청원서를 영역(英譯)하여 이미 파리에 가 있는 김규식(金奎植)에게 보내 회의에 제출하게 하고, 김창숙은 중국과의 외교 활동을 위해 상하이에 남았다. 그리고 이 장서를 인쇄하여 중국의 정계와 언론계, 각국의 대사·공사·영사관 그리고 해외 교포들의 거류지와 국내 각 지방 향교에 빠짐없이 우송하였다.

이런 움직임을 인지한 일제(日帝)는 곧 국내 유림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활동을 벌여 500여 명을 체포하였는데, 이것이 이른 바 ‘제1차 유림단 사건’이다. 이는 독립운동에 있어서 유림의 참여라는 의의를 넘어 국내 민중운동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이 독립을 절실하게 염원하고 있음을 세계만방에 전파하였다.

 

혁신유림계의 선각자

_성균관(서울 종로구 성균관로 31)

 

성균관 명륜당

 

유학(儒學)의 산실로 조선시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成均館). 성균관은 단순히 교육만을 담당하는 기관은 아니었다. 유학의 역사에 공헌한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향사(享祀) 역할이 교육 못지않은 중요한 기능이었다. 그래서 성균관 건축은 이른바 전묘후학(前廟後學)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앞쪽에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향사 공간을 앞쪽에 마련하고[대성전(大成殿)] 그 뒤로 교육 공간[명륜당(明倫堂)]을 배치하였다. 명륜당 앞뜰에는 행단(杏壇)을 상징하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우뚝하니 서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머물렀는지 나뭇잎 하나하나에 시간이 모인 듯 거대하고 울창하다. 지금의 우리들에겐 한가하고 여유로운 문화유산이지만, 이곳은 율곡, 다산, 단재에 이어 심산 그리고 지금의 우리에 이르기까지 역대적 발자취가 켜켜이 모아져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김창숙의 유학 정신 또한 이곳이 본향이고, 때로는 의미를 쇠퇴했던 성균관을 바로 잡기 위하여 그는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투쟁의 시절, 온갖 모진 압박과 수난을 버티었던 정신의 모태는 유학 정신의 힘이었다.

명륜당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과 유림의 지도자 김창숙

촬영일: 1948.09.09 서울 성균관, 제공: 우리역사넷

 

 

1927년 12월 재판에서 나석주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사건의 주동자로서, 살인미수, 치안유지법, 폭발물 취급령 위반 등의 죄목으로 14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이 때 당한 혹독한 고문으로 두 다리가 마비되어 하반신이 불구된다. 이후 평생토록 앉은뱅이로 삶을 보내 ‘벽옹(躄翁)’이란 별호를 얻게 된다.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던 김창숙은 병이 악화되어 1929년 5월 대구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병세가 심해 고향으로 옮겼으나 대구지장법원 검사장에 의해 곧 재수감되었다. 그는 오로지 정신력으로 이 시기를 이겨내는데, 몸 성치 못한 와중에도 『자서종요(字書綜要)』를 편찬하였으며, 『육경(六經)』 · 『이정전서(二程全書)』 · 『이학종요(理學宗要)』 등을 읽고 사유하며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심오한 이치를 연구하여 마음의 안정을 구하였다.

옥중 생활 중에도 자신의 의지를 꺾는 일이 없었으니 1933년 새로 부임한 전옥이 김창숙에게 절하기를 강요하자, ”내가 옥에 들어온 지 이미 6~7년이 되었지만 옥리를 보고 머리 한번 까딱하여 절한 일이 없다. 나는 위협으로 내 뜻을 변할 사람이 아니다. 내가 너희들에 대해서 절하지 않는 것은 곧 나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고수함이다. 대저 절은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내가 너희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하며 끝내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당시 안창호와 여운형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이감되어 김창숙과 함께 수감되었다. 당시 쓴 시이다. 창자가 찢어지는 듯한 그의 애절한 마음이 전해진다.

 

7년 세월 이미

죄수로 몸져 누웠으나

나의 본 자세를 지킴은

나쁘지 않았어라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으라니

어찌 차마 말하랴

분통의 눈물이

창자를 찢는구나!

 

교육을 통한 민족정신 고취.

_성균관대학(서울특별시 종로구 성균관로 25-2)

 

1945년 가을. 김창숙은 옥중에서 광복을 맞이한다. 이후 정치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유학의 근대적인 발전에 힘을 쏟게 된다. 시대에 맞는 새로운 유교문화를 일으키고자 하였으며, 일본이 왜곡시킨 유교를 바로 잡으려고 노력 하였다. 일제에 의해 유린되었던 성균관의 복구는 물론이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인재육성을 위한 성균관대학의 설립에 뜻을 두게 된다. 물론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재정이 필요하였고, 당시 열악한 상황에서 재정을 모으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김창숙은 성균관대학의 설립이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균관은 곧 우리나라의 유학을 높이 장려하던 곳이다. 유교가 쇠퇴하면 국가도 따라서 망하고 나라가 망하면 국학도 역시 망한다. 지금 학생 몇몇 사람이 강개하여 유학을 부흥할 뜻이 있어 명륜전문학원을 개인적으로 세웠으나 재정이 궁핍하여 유지할 방법이 없어서 길가에서 호소하다가 장차 해산하게 되었으니 어찌 우리 유교인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진실로 건국의 대업에 헌신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우리 유학문화의 확장에서 시작할 것이다. 진실로 우리 유학문화를 확장하고자 하면 마땅히 성균관대학의 확립으로써 급무를 삼을 것이다. 진실로 성균관대학을 창립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우리 전국 유교인의 힘을 합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장차 전국 유교인이 합치느냐 못하느냐는 성균관대학이 성립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고 장차 성균관대학이 설립되느냐 못하느냐는 건국 대업이 늦느냐 빠르냐를 점칠 것이다.『심산유고(心山遺稿)』

 

성균관대학교 심산 김창숙 동상

 

그는 유학의 가치가 나라 운명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기에 교육의 장을 마련할 수 있는 학교 설립의 일은 무엇보다도 절실하고 급박한 일이었다. 우선 그는 학교 설립을 위한 재원을 만들기 위해 향교 재산을 추심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잘못된 관리 규정을 철폐하고, 향교 재산을 회수하고자 하였다. 1946년 6월 28일 성균관대학기성회(成均館大學期成會)를 발족하고,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그해 9월 25일에 성균관대학을 정식으로 인가받게 된다. 물론 교과과정에 유학과 철학을 각 과에서 기본으로 공부하도록 필수 교양과목으로 지정하였다.

교육은 그 시대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애국운동이었다. 김창숙은 “오늘날 우리의 유교정신은 옛 봉건시대의 진부한 사상을 그대로 답습하려는 것이 아니오, 또한 외래사상이나 문화를 무조건 배척하거나 숭배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직 동서고금을 물론하고 가장 좋은 점만을 절충하여 우리의 고유한 유교정신에 귀납 함양시키려는 바이다.”라고하여 구태의연하고 답답한 교육이 아닌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현실적인 교육을 추구하려는 명백한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말뜻을 가만히 곱씹어 보노라면, 그의 정신 바탕이 유교였기 때문에 그것을 천명하는 것이지, 조국과 민족에게 그것조차 걸림돌이 된다면 과감히 버릴 수 있는 그런 과단성 있는 인물임이 틀림없다. 즉, 그가 원하는 것은 건강한 나라 땅에 건강한 정신의 우리사람들이 사는 것이지, 그 우위의 어떤 절대적인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정문 왼편에서 당당한 그를 만날 수 있다. 하늘을 향해 쭉 펴 올린 오른팔은 우리가 함께 가야할 지향점을 표명하는 듯 힘차고 강렬하다. 바람에 흩날리는 듯한 도포자락은 어떠한 불의에도 대항하여 박차 오르는 의지의 기상이다. 그는 그렇게 그 자리를 비가오나 눈이오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한결같은 의지의 사람으로 남았다.

 

여전히 빛나는 백절불굴(百折不屈) 정신,

_심산 김창숙 묘역 (수유리 산 127-4)

 

심산 김창숙의 묘역

 

1955년 무렵부터 독재 권력과 그 주구들에 의해 소위 성균관 및 성균관대학의 분규가 확산되어 심산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1960년 4·19혁명 직후 성균관에서는 심산을 다시 모시려했으나 이미 기력이 쇠퇴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대표에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5·16으로 그마저 무산되었다. 성균관대학에서 물러난 심산은 곤궁한 생활 속에 여관과 병원을 전전해야 했다. 심산의 곧음과 청렴한 삶의 태도는 대학을 세우고 학장·총장을 지내고서도 셋집에서 여생을 보내게 만들었다. 세인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안되고 안타까울지언정, 유학의 정신에서 보자면 대의를 이루고 정의를 지표삼다가 빈곤하게 사는 삶은 그저 당연한 일이다. 물론 그리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심산은 1962년 5월 10일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84세를 일기로 서거(逝去)하였다. 투철한 선비정신의 소유자요, 불요불굴(不撓不屈)의 위대한 저항 자세와 과감한 행동주의(行動主義)의 표상이었던 심산이 세상을 떠난다. 5월 18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사회장으로 거행된 장례식 후 서울 수유리 산 127-4 묘지에 안장되었다. 묘역은 고요하고 가끔씩 지나는 새들이 지저귈 뿐이다. 격동의 시대를 살았고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나아갈 바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고 움직였던 그. 시대의 참 어른이 존재한다는 것은 든든한 마음줄과 같은 것. 그래서 그 어려운 시절을 함께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김창숙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면서 전통적 원칙을 지켜나갈 때 비로소 대의명분이 세워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마음(心)’에 의한 행동주의, 그리고 시대적 의리에 의한 대의명분론.

평생을 백절불굴(百折不屈) 정신으로 살아낸 떳떳한 유림의 표상.

 

심산 김창숙의 생전 모습

 

 

기고자: 김세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다산 정약용의 소통과 관련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본 분과에서 동학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으며, 다도(茶道)철학과 오감(五感)을 통한 인간미감(人間美感)을 연구 중에 있다.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16.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박영미
  17. 이항로의 위정척사, 당신들만의 진리 [길 위의 우리 철학] – 17: 구태환
  18. 한국 현대 철학의 주목받지 못한 변방, 함석헌 [길 위의 우리 철학] – 18: 유현상

“중국에서 시민 되기의 행로 – 중국의 시민 부재와 유교 이데올로기” –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⑧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2018. 9. 10.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

 

제8강. 중국에서 시민 되기의 행로 – 중국의 시민 부재와 유교 이데올로기

 

강연 : 송종서(경희대 강사)

후기 : 김상애(한철연 회원)

 

* 이천년에 걸친 동아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동아시아적 형태의 공화국 역사를 시작한 신해혁명의 의미를 현재적 관점에서 전망해 본다.

 

요즘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 한국의 근대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미스터 션샤인은 ‘공자 왈, 맹자 왈’과 ‘똘스또이’가 공존하는, 즉 전통사회에 서구 문물이 수입되어 공존하던 대한제국시대의 의병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의병을 ‘조선의 주권을 위해 투쟁한 이들’로 그립니다.

 

오늘의 강연 주제는 근대 중국의 “시민”이었는데요, 특히 근대 한국에서는 의병 투쟁과 같은 아래로부터의 정치 개혁, 즉 시민의 정치참여가 존재했는데, 왜 근대 중국에서는 그러한 시민이 부재했을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중국의 근대는 아편전쟁(1840)을 기점으로 합니다.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정치가, 혁명가들이 서구에서 들여오고자 한 것은 과학과 민주주의였습니다. 그러나 유교 전통과 무관한 이 서양의 두 문물은 백성들에게 너무나도 생경한 것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평민들의 거부와 더불어 당시 발발한 청일전쟁(1894~1895)의 패배로, 서구의 낯선 문물은 중국에 정착하기 어려웠지요.

 

이후 중국에서는 진보진영의 주도로 오사신문화운동(五四新文化運動, 1917~1927)이라는 일종의 구국, 계몽운동이 일어납니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이전의 근대화가 실패한 원인을 대중의 자각의 부재에서 찾았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은 “대중이 스스로 자각하여, 스스로 변화를 추구하게 하는 근본적 변혁운동”을 추구하였습니다. 오사운동을 주도하던 지식인들은 대중이 과학과 민주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을 낡은 전통의 핵심에 있는 유학으로 보고, 유교를 타도하여 근대화를 이루어내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사회문화 깊숙이 자리한 유교 이데올로기와 향촌 자치로 전통 농업사회를 유지해온 중국에서 근대화에 필수적인 “동원력(국가 권력이 농업사회의 잉여자산과 자원을 유효하게 흡수하여 현대적 국방과 공업 투자로 전환하고 그 결과 공업화를 실현하는 능력, 그리고 방대한 인력 자원을 동원해서 현대적 군사력을 세우는 능력)”을 생성하기는 무척 제한적이었습니다.

 

현재 중국은 본디 농민이 주도하는 공산주의 혁명을 위한 마오쩌둥 사상의 개념이었던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공식적 체제 이념으로 삼고 있습니다. 앞서 제기한 질문, 즉 “왜 근대 중국에는 시민이 부재했는가?”에 대한 대답은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중국은 그 나라 특색에 맞는 올바른 정치체제, 즉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발전시키고자 하였으며, 민중 스스로 시민보다는 공산당원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⑦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4(330d~331d): 케팔로스와 노령의 즐거움과 재산과의 관계를 논하다가 정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330d]

*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가 점잖게 생활방식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집요하리만치 재산에 관련해서만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케팔로스는 노령을 수월하게 견디게 해주는 것으로 생활방식 외에 재산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생활방식이 유일한 원인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뒤엎는다. 그리고 연이어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가 재산에 대한 애착이 없는 것 같다고 말은 하지만 그 또한 현재, 돈을 자신의 작품인양 애착을 갖고 있는 ‘돈을 모으는 자’οἱ χρηματισάμενοι임을 환기시킨다. 그리고 그 바탕 위에서 케팔로스에게 그렇게 모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덕을 본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τί μέγιστον οἴει ἀγαθὸν ἀπολελαυκέναι τοῦ πολλὴν οὐσίαν κεκτῆσθαι를 연이어 묻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가 말하는 생활방식이 자신의 개인적 안녕을 위한 소극적 방책이자 결국 재산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드러내 보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케팔로스는 그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아예 상관없다고 여기는지, 재산이 가장 값어치 있다고 여기게 하는 것들을 제법 상세하게 늘어놓는다.

* 먼저 케팔로스는 누구나 노령에 접어들어 죽음을 앞두게 되면 ‘두려움과 근심’δέος καὶ φροντὶς이 생기고 그 동안 웃음거리로 여겼던καταγελώμενοι, ‘저승’과 관련해서 전해오는 여러 이야기 이를테면 ‘이승에서 올바르지 않은 짓을 저지른 자는 저승에서 그 벌을 받아야 한다’ὡς τὸν ἐνθάδε ἀδικήσαντα δεῖ ἐκεῖ διδόναι는 이야기도 진짜인가 싶어 마음이 괴로워진다στρέφω고 말한다.

* 여기서 저승의 원어는 ‘하데스’Ἅιδης이다. 하데스는 제우스, 포세이돈과 함께 세계 분할 즉 하늘, 바다, 땅을 누가 맡을 것인가를 정하는 자리에 참여한 최초의 신이다. 여기서는 ‘사후에 혼들이 가는 지하세계’의 의미로 쓰였다. 추첨에 의해 이루어진 영역 배당과 상호 불가침은 운명(Moira) 앞에서 그들이 행한 맹서대로 신들 사이의 관계를 지배하는 율령이다. 제우스조차 아들 사르페돈의 죽음을 막지 못한다. 사람의 죽음은 하데스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를 어기는 행위는 즉각적으로 네메시스(nemesis)의 응징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이 죽음을 앞두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신들조차 피해갈 수 없는, 부당한 행위에 대한 심판이 사후일지라도 반드시 실행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케팔로스가 전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인과응보에 관한 관념은 위와 같은 신화적 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330e]

* 그래서 사람들은 그제에서야 ‘이전에 무슨 일로 어떤 이에게 정의롭지 못한 일을 한 적이 있는지 스스로 따져 보며 곰곰이 생각하게 되고’ἀναλογίζεται ἤδη καὶ σκοπεῖ εἴ τινά τι ἠδίκησεν 그 결과 자기가 ‘정의롭지 못한 일’ἀδικήματα을 많이 저질렀다고 생각되는 자들은 겁에 질린 채 잠도 잘 못 이루고 불길한 예감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고 케팔로스는 말한다. 여기서 ‘스스로 따져 보며 곰곰이 생각하다’의 동사 ἀναλογίζομαι와 σκοπέω의 일차적 의미는 각각 ‘계산하다’와 ‘살펴보다’이다. 과거 타인에게 저지른 행위들을 말 그대로 ‘세어 보며 확인하는 것’이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내면을 되돌아보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331a]

* 그러나 ‘정의롭고 경건하게 인생을 산 사람’ὃς ἂν δικαίως καὶ ὁσίως τὸν βίον διαγάγῃ의 경우는 그러한 걱정이나 두려움 없이 노령에 들어서도 즐겁고 밝은 희망이 늘 함께 있으면서 핀다로스의 말처럼 ‘유쾌한 희망’γλυκεῖά이 노년의 부양자γηροτρόφος가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도 케팔로스는 자기 생각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습관처럼 시인의 말을 인용한다. * 인용된 핀다로스의 시에서 ‘유쾌한 희망’의 원어 γλυκύς는 ‘delightful’의 의미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달콤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사멸하는 인간들의 변덕스런 마음을 으뜸으로 조종하는 게 희망인지라’ἐλπὶς ἃ μάλιστα θνατῶν πολύστροφον γνώμαν κυβερνᾷ에서 ‘사멸하는’의 원어 θνητός는 죽지 않는 신과 대비하여 ‘죽는 존재로서 인간’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그리고 ‘조종하는’의 원어 κυβερνάω는 플라톤이 정치술을 선장의 기술로 비유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핀다로스는 사멸하는 인간의 변덕스런 마음을 으뜸으로 조종하는 게 희망ἐλπὶς이라고 말을 하지만 플라톤은 인간의 삶을 으뜸으로 조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성’νόῦς(nous)이다. 그럼에도 희망 또한 중요하다. 희망은 미래와 관련된 것이지만 희망의 위대함은 미래가 아니라 희망을 갖는 현재에서 나온다.

* 핀다로스(Πίνδαρος Pindaros 기원전 522-443)는 그리스 서정시에 발군의 발자취를 남긴 시인으로서 테베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보이오티아 지방 귀노스케팔라이(Kynoskephalai) 출신 명문 귀족이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당대 귀족과 참주(僭主)들에게 초빙되어 그들을 위한 합창송가의 가사를 헌정할 정도로, 젊은 시절부터 왕족과 귀족들의 후원과 총애를 받으며 귀족 사회를 찬미하는데 정열을 바쳤다. 그는 귀족정이 몰락하고 민주정이 들어선 이후에도 기원전 6세기 말의 귀족들의 삶을 기리며 그들의 삶과 자부심, 종교적 신앙을 찬양하고 미화하는 노래를 지었다. 그의 시가 신과 영웅들의 장대함과 고귀한 영혼의 부활을 절규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다행히 그의 절규는 풍부한 창조력으로 승화되어 후세에 ‘핀다로스풍(風)’이라 불리는 송가(頌歌ode)의 완성자로 평가될 정도로 신과 영웅. 경기 우승자들 및 이상적인 인간상을 찬양하는 불후의 명시들을 남기는 원동력이 되었다. 여기에서 인용된 그의 시는 핀다로스의 토막글 214로 분류되어 전승되고 있다.

* 케팔로스가 생활방식을 이야기 하면서 소포클레스, 데미스토클레스, 핀다로스를 인용하고 있는 것에도 다분히 플라톤의 숨은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포클레스는 케팔로스처럼 무기제조업으로 발흥한 가문 출신이면서 그가 선망하는 귀족이고, 데미스토클레스는 원래 시민이 아니었으나 클레이스테네스의 시민 확대 정책에 의해 간신히 시민권을 획득한 후 최고 권력에 이른 사람이고, 또 핀다로스는 자기가 꿈꾸는 귀족들의 풍요롭고도 품격 있는 삶, 승자들의 삶을 찬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 재산의 소유가 가져다주는 가장 큰 가치에 대한 케팔로스의 답을 통해 드디어 ‘정의(正義)’δικαιοσύνη에 관한 어휘들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재산의 가장 큰 가치는 바로 사람들에게 ‘정의롭고 경건한’δίκαιος καὶ ὅσιος 삶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물론 이곳에서도 케팔로스는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도리를 아는 사람에게’τῷ ἐπιεικεῖ서나 가능한 것이라고 조건을 붙인다. 여기서 ‘도리를 아는 사람’으로 번역된 말의 원어는 τὸ ἐπιεικής인데 이 말은 앞에서 절도와 자족이라는 생활방식을 갖춘 ‘훌륭한 사람’에 쓰인 말과 같은 말이다. 여기서도 정의롭고 경건한 삶의 조건으로 ‘재산의 소유’τὴν τῶν χρημάτων κτῆσιν와 도리가 함께 거론되고 있다. 이렇듯 재산의 소유와 훌륭한 생활방식을 하나의 조건으로 줄곧 병존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케팔로스의 주장은 나름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 이곳에서도 텍스트의 일부 내용이 수정되어 있다. 옥스퍼드 구판에는 ‘훌륭하고 절도 있는 이’τῷ ἐπιεικεῖ καὶ κοσμίῳ’로 나타나 있지만 신판에서는 ‘절도 있는 이’καὶ κοσμίῳ’가 빠지고 그냥 τῷ ἐπιεικεῖ만 살려 ‘도리를 아는 사람’으로 번역하고 있다. 새로운 판본이 발견된 것일까? 아니면 케팔로스의 태도가 절도와 상관없어 보였기 때문일까?

 

[331b]

* 그러나 이제 주목할 것은 이후 케팔로스가 말하는 ‘정의롭고 경건한 삶’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다. 케팔로스는 ‘재산의 소유가 가장 값어치 있다’τὴν τῶν χρημάτων κτῆσιν πλείστου ἀξίαν εἶναι고 여기게 하는 사례로서 ‘마지못해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τὸ γὰρ μηδὲ ἄκοντά τινα ἐξαπατῆσαι ἢ ψεύσασθαι 또는 ‘신께 제물을 빚지거나 남한테 재물을 빚진 채로 저승으로 가 버리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일이 없도록 해주는 것’μηδ᾽ αὖ ὀφείλοντα ἢ θεῷ θυσίας τινὰς ἢ ἀνθρώπῳ χρήματα ἔπειτα ἐκεῖσε ἀπιέναι δεδιότα을 들고 있다. 그런데 두 가지 삶의 태도들 모두 ‘무엇을 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삶의 방식이 아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극적인 삶의 방식에 머물러 있다. 게다가 두 가지 태도의 동기 모두 적극적인 도덕적 당위와 정당성에 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다만 개인의 안녕과 사후의 평안을 바라는 개인적 소망과 관련되어 있다. 첫째 태도에 나타나는 정직의 덕목 역시 내적 자발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ἄκοντά 저지르는 거짓말’을 피하는 수준의 것이고. 둘째 태도 역시 ‘채무 상환’에 대한 적극적인 도덕적 의지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당대 아테네에서 채무 미상환이 초래하는 비참한 결과와 그에 따른 사후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다.

* 사실 아테네인들에게 ‘채무’의 의미는 단순히 ‘빚을 진다’의 의미를 훨씬 넘어서 있다. 이미 종교가 생활인 그들에게 제물을 빚지는 것은 불경을 의미했다는 점에서도 당연히 심각한 일이었겠지만 일상의 채무와 관련해서도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 있다. 왜냐하면 소규모 자영농으로 근근이 생활을 유지하는 대부분의 아테네 시민들에게 채무 미상환의 종말은 토지의 상실을 의미했고 토지의 상실은 곧 시민권의 상실이라는 ‘신분의 박탈’ 그 자체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케팔로스가 재산이 가져다주는 가장 큰 값어치의 하나로 왜 ‘채무 상환 능력’을 들고 있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참고로 고대 그리스의 식민 활동은 강자들의 적극적인 침략의지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신분 피박탈자, 토지 상실자 내지 가난한 자들의 불가피한 해외 이주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원전 소크라테스가 의신(醫神)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갚아달라고 유언을 남긴 것을 두고 ‘인생이라는 질병’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감사 표시라는 등 여러 해석이 있지만(아테네에서는 질병에서 벗어나면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어떤 이에게 그것은 말 그대로 유언에 포함할 만한 중대사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 이곳에서 ‘빚을 진다’를 나타내는 동사ὀφείλω가 단순히 ‘빚을 지다’라는 채무행위를 나타내는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반드시 갚아야 한다.’라는 의무의 뜻을 함께 가지고 있는 까닭도 채무에 대한 당대의 아테네인들의 의식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이에 따라 이 단어는 앞으로 문맥에 따라 ‘갚아야 한다’는 말로도 번역된다.

* 결론적으로 케팔로스에 따르면 ‘재산의 소유’’ἡ τῶν χρημάτων κτῆσις가 가져다주는 큰 기여는 재산을 소유한 사람으로 하여금 위와 같은 훌륭한 생활방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즉 그것이야말로 ‘부가 제일 쓸모 있게 되는 경우’πλοῦτον χρησιμώτατον εἶναι이다. 그러나 케팔로스가 말하는 ‘정의롭고 경건한 삶’은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일단 ‘정의로운 마음 상태’, ‘경건한 마음 상태’라는 내면의 의식 상태와는 무관하게 외적으로 드러난 행위와 관련한 것들이다. 사실 경건ὅσιος의 일차적 의미가 ‘신들이 정한 계율들을 잘 지키는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최대한 거짓말을 피하고 계율에 따라 제물도 잘 바치고 신에게나 남에게 빚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케팔로스의 말대로 정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의롭고 경건한 삶’이란 케팔로스가 말하는 그러한 외적인 행위에서뿐만 아니라 ‘내면의 조화’ 즉 내적인 혼의 상태에서의 자유와 평화, 덕과 지혜를 동반하는 삶이다. 물론 케팔로스도 ‘분별 있는 이에게’ἀνδρὶ νοῦν ἔχοντι라는 조건을 붙이고는 있지만, 케팔로스가 말하는 그것은 내면의 혼의 조화, 덕과 지혜에 기초한 분별νόος이라기보다는 그가 고백하고 있는 그대로 계율에 기초한 자기 규율적 생활 습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을 준수하려는 동기 또한 적극적인 덕에 따른 실천의지에서가 아니라 앞서 살폈듯 자신의 개인적 소망에서 나온 것이고, 분별 또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짐짓 내세우는 남들에게 내보이기 위한 격조와 품위 차원에서 요구된 것이다.

 

[331c]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도대체 그가 말하는 ‘정의롭고 경건한 삶’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기나 하고 그런 말을 하는지 정식으로 제대로 캐묻고 싶어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 관심사를 보다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 정의에 관한 케팔로스의 생각을 본격적으로 검증하기 시작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의 정의관을 정의δικαιοσύνη는 ‘정직함ἀλήθεια과 남한테서 받은 것은 갚는 것’τὸ ἀποδιδόναι ἄν τίς τι παρά του λάβῃ으로 단순화한 후 그 규정의 허점을 파고들기 시작한다. 마침내 이 부분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이 대화편의 주제가 전면에 등장한다.

* 소크라테스는 먼저 정의가 그러한 것이라고 한다면, ‘어떤 사람에게서 멀쩡했을 때의 친구로부터 무기를 맡았다가 그가 미친 상태로 와서 그것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경우’εἴ τις λάβοι παρὰ φίλου ἀνδρὸς σωφρονοῦντος ὅπλα, εἰ μανεὶς ἀπαιτοῖ, ὅτι οὔτε χρὴ τὰ τοιαῦτα ἀποδιδόναι ‘그런 것을 돌려주어서도 안 되거니와 그런 걸 되돌려 주는 사람이 그리고 더 나아가 그와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진실을 죄다 말해 주려고 드는 사람이 결코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οὔτε χρὴ τὰ τοιαῦτα ἀποδιδόναι, οὔτε δίκαιος ἂν εἴη ὁ ἀποδιδούς, οὐδ᾽ αὖ πρὸς τὸν οὕτως ἔχοντα πάντα ἐθέλων τἀληθῆ λέγειν라고 말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지적은 케팔로스에게 괜한 트집을 잡아 그를 곤혹스럽게 만들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예시는 다만 정의를 정의(定義) 또는 ‘의미 규정’하려고 할 때, 케팔로스가 하듯 단순하게ἁπλῶς 사례들을 내세워 규정하려들 경우 반드시 예외적 사례에 직면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데 있다. 소크라테스에게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대상이 갖는 우연적 속성이나 사례들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본질을 묻는 것이다.

* 무기상인 케팔로스에게 무기를 예로 들어 설명하는 것도 흥미를 끈다.

“서울 속의 동학혁명 현장 탐방” –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⑦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2018. 9. 8. 종로 일대 탐방

 

제7강. 서울 속의 동학혁명 현장 탐방

 

강연 : 윤태양(건국대 연구교수)

후기 : 김상애(한철연 회원)

 

* 동학혁명의 현장을 직접 탐방함으로써 책 속에 갇힌 역사를 몸소 경험해 느껴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번 주에는 곳곳에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흔적이 남아있는 종로 일대를 윤태양 교수의 이야기와 함께 ‘서울 속의 동학혁명’을 테마로 걷는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귀금속 종합매장으로 변모하였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관이었던 단성사 자리에 그보다 더 예전에 담긴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탐방을 시작하였지요. 단성사 터에는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 1827∼1898)이 고문을 받았던 좌포도청(左捕盜廳)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둑을 잡으려고 만든 좌포도청이 조선 후기에 주로 타 당파의 정적을 제거하고 천주교도를 탄압하는 등 사회·정치적 사안에 관련된 인물을 취조하거나 형을 집행하던 용도로 쓰였다고 합니다. 종로3가 9번 출구 벽면에 새겨진 처형되기 직전 최시형의 모습을 보니, 민중을 나라의 주인으로 삼고, 모두가 한울님을 모신 평등한 존재임을 강조했던 그의 정신이 느껴졌습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운현궁입니다. 운현궁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거처하던 곳입니다. 이 장소가 동학혁명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궁금했는데요. 동학혁명의 지도자였던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이 흥선대원군과 대화를 나눈 곳이 바로 운현궁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전봉준이 운현궁에 문객으로 3년 정도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이를 두고 연구자들은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정권 장악을 위해서 서로를 필요로 하여 밀약을 맺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고종 부부와 민비 척족세력의 부정부패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공동의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동시에 민비 척족 세력은 임오군란의 군인들과 동학혁명의 농민들이 모두 분노했던 대상이었습니다. 서울의 유명 유적지가 동학혁명의 지도자였던 전봉준과 관련 있었다는 점이 매우 새롭게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운현궁 바로 맞은편으로 길을 건너면 수운회관과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36호인 천도교 중앙대교당(1921년 건립), 그리고 세계어린이 운동 발상지 기념비가 함께 있습니다. 동학 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어린이날을 만든 것으로 알려진 방정환(方定煥, 1899~1931)이 이 곳에 거점을 두고 독립운동과 어린이 운동 등 여러 활동을 해나갔다고 합니다. 참, 소파 방정환은 손병희의 사위라고 하는 군요. 어린이를 존중할 대상, 인격으로 보는 평등 의식의 바탕에 바로 동학의 근본정신이 있었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하게 느껴졌습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인사동을 거쳐 들른 곳은 태화빌딩입니다. 이 빌딩 앞에는 ‘삼일독립선언유적지’라 적힌 커다란 기념비와 동판으로 제작된 독립선언문이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유혈사태가 우려된다는 이유로 따로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은 뒤 경무총감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 경찰에 자진 투항한 장소가 지금의 태화빌딩이 있는 자리에 있던 고급 음식점 태화관이었다고 합니다.

종각역 앞 전봉준 동상을 끝으로 답사를 마무리했습니다. 이 동상이 세워진 바로 그 자리가 전봉준이 처형당한 전옥서 터입니다. 동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전옥서 자리를 알리는 표지석이 있습니다. 이 동상은 촛불혁명의 시대를 맞아, 전봉준과 동학혁명 세력이 추구했던 저항정신을 기리고자 2018년 4월에 만들어졌습니다.

 

정부의 부정부패와 가진 자들의 횡포에 저항한 농민군들, 식민지배 시기에 민족해방을 꿈꾸고,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했던 어린이의 권리를 회복하고자 했던 천도교 지식인들, 마지막으로 2016년 겨울, 전봉준의 저항 정신과 공명하는 촛불혁명까지, 오늘 동학혁명의 유적지를 둘러보며 동학이 그저 어떤 하나의 사상이나 종교가 아니라,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는 저항운동으로 지속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⑥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2-2(329a~329d) : 케팔로스의 대답 노년의 즐거움은 노령이 아닌 생활방식에서 온다.

[329a]-[329d]

* 케팔로스는 대부분의 경우 노인들은 자신이 불행한 탓을 노령γῆρας으로 돌리고 한탄을 하지만, 자신의 경우 노년은 소포클레스의 노년이 보여주듯 갖가지 욕망에서 벗어나 평화와 자유εἰρήνη καὶ ἐλευθερία를 누리는 시기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진짜 탓이 아닌 것을 탓하고 있다는 것이다.

[329a]

* ‘성적인 쾌락과 관련해서 그리고 술잔치나 경축 행사 또는 이런 등속에 속하는 다른 여러 것과 관련해서’. 여기서 언급된 ‘경축행사’εὐωχία는 ‘마음껏 먹고 노는 잔치’를 뜻한다. [329b]까지 묘사되고 있는 왕년에 대한 회고와 자랑, 성적 쾌락, 음주가무 등 왕성하게 먹고 놀던 시절에 대한 향수, 분노와 회한, 나이타령 등 고대 아테네 노인들의 모습은 2500년이 지난 오늘날의 노인들의 모습과 놀랄 정도로 일치한다.

* 여기서 말하는 속담παροιμία은 ‘동갑내기가 동갑내기를 즐겁게 해 준다’ἥλιξ ἥλικα τέρπει는 속담으로서 <파이드로스> 240c, <니코마코스 윤리학> 1161b34에도 나온다. <뤼시스> 214a, <프로타고라스> 337d, <향연> 195b에도 비슷한 의미를 갖는 말이 나온다.

* 이처럼 ‘끼리끼리 지내거나 노는 것’은 친한 사람들끼리 속내를 다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신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자주 언급하는 소통과 거리가 멀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열린 관계를 가로 막는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끼리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고 그래서 서로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생각을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한다는 공동체적 삶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서로에게 다가 가 상대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삶의 진실은 일상의 안일과 타자에 대한 배타성이 결국은 우리 모두를 불행으로 이끄는 것임을 일러 준다. 플라톤은 삶의 진실을 제대로 아는 한, 그런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앎을 이끄는 지성이야말로 일상의 타성을 거부하고 인생에 대한 참된 앎과 실천을 견인하는 힘이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을 담보하는 토대인 것이다. ‘앎이 곧 도덕이자 행복’이라는 그의 유명한 명제도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플라톤에게 실천을 담보하지 않는 앎은 앎이 아니다.

 

[329b]

* 케팔로스는 노령이 불행κακός의 ‘진짜 탓’τὸ αἴτιον αἰτιᾶσθαι이 아님을 자신의 경우를 근거로 주장하고 자기 생각을 뒷받침하기 위한 구체적 예시로 시인 소포클레스의 경우를 끌어들인다.

* 소포클레스(Σοφοκλες 기원전 496년~406)는 아이스퀼로스(기원전 525~456), 에우리피데스(기원전 484 -406)와 함께 그리스 비극 3대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아테네 북서쪽 콜로노스(Kolonos)에서 무기 제조업으로 부를 축적한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는 청년시절 살라미스 해전 승리를 축하하는 무대의 선창자로 뽑혀 배우로도 유명했고 기원전 468년 디오니소스 축제 비극 경연에서 스승인 아이스퀼로스를 제치고 우승한 뒤 아테네 최고의 비극작가로서 18번에 걸쳐 우승을 차지했다. 평생 동안 그는 <안티고네>, <오이뒤푸스 왕>을 비롯해 130편에 이르는 비극을 썼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의 비극에서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 비극의 원인으로 등장하고 종족(genos)보다 가족(oikos)이 크게 부각되어 있다. 또한 특별하게도 그는 기원전 441년에 장군(strategos)으로 선출되어 페리클레스와 함께 사모스 전쟁에 출정하기도 했고 기원전 443년에는 델로스 동맹의 자금을 관리하는 재무관(hellēnotamias)으로 활동하는 등 다방면에서 명망을 누렸다. 그리고 기원전 413년 시켈리 원정이 실패한 후 아테네의 위기관리를 위해 꾸려진 특별자문위원회에서 위원직(probouloi)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때 그의 나이가 84세였음을 고려하면 그는 평생 동안 아테네 정치 문화계의 존경받는 원로로서 귀족과 인민 모두에게서 두루 신망을 얻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려나 소포클레스가 무기제조업자에 종사하는 귀족 가문의 아들이자 당대 최고의 명망가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케팔로스에게 소포클레스가 어떤 존재로 받아들여졌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 남는다.

* 아테네인들에게 시가와 시인들의 말은 전통적으로 가장 믿을 만한 권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아테네인들은 지식인이건 일반인이건 누구든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뒷받침하려면 거의 습관적으로 시가와 시인들의 말을 인용하곤 했다. 그래서 노령과 관련해서 케팔로스 역시 그 자신 가장 선망했을 법한 소포클레스를 인용하고 있고 그의 아들 폴레마르코스도 소크라테스와 논쟁하면서 시인 시모니데스를 인용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주요 사상 담론을 좌지우지하는 사람들도 문학자 또는 극작가들이라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아무려나 시인들과 소피스트들이 주름잡고 있는 당대의 그러한 지적 풍토는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극복해야할 주요 목표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 점은 폴레마르코스가 시모니데스를 인용할 때 좀 더 다루기로 한다.

 

[329c]

* 케팔로스는 온갖 불행의 탓을 노령으로 돌리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자신의 사례와 소포클레스의 사례를 기초로 반박한다. 불행은 노령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소포클레스가 말하는 ‘성적 쾌락이라는 광포한 주인ἄγριον δεσπότην으로부터의 해방’은 몸이 늙어 성기능의 저하되어 ‘욕망이 뻗침을 그치고 수그러듦에 따라’ἐπειδὰν αἱ ἐπιθυμίαι παύσωνται κατατείνουσαι καὶ χαλάσωσιν 주어진 수동적인 자유와 평화이다. 그러니까 소포클레스의 해방 또한 기본적으로는 노령이 가져다 준 것이다. 케팔로스는 불행을 노령 탓으로 돌리는 노인들을 비난하고 소포클레스를 치켜세우지만, 소포클레스의 평화 역시 노령 때문임을 고려하면 일단 노령 자체가 불행의 원인이 되거나 평화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 ‘그것에서 벗어났다는 게 정말 더할 수 없이 기쁜 일일세. 흡사 광포한 어떤 주인한테서 도망쳐 나온 것만 같거든’ἁσμενέστατα μέντοι αὐτὸ ἀπέφυγον, ὥσπερ λυττῶντά τινα καὶ ἄγριον δεσπότην ἀποδράς. 현대 생리학에 의하면 특히 남성의 경우, 노인이 되어도 성적 욕망은 크게 줄어들지 않는다. 성적 기능만 저하될 뿐이다. 그러므로 노인들의 성기능 저하는 해방의 기쁨 보다는 대부분 열패감, 무력감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심리는 고대 그리스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노인의 비극은 그가 늙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젊다고 여기는 데 있다. 그렇게 본다면 노령이 자연스럽게 욕망을 줄어들게 한다는 식의 소포클레스의 말은 노령의 즐거움을 아이러니컬하게 표현한 것이라 해도 최소한 속마음 그대로를 말한 것은 아니다. 만약 정말로 그가 자유와 평화를 누렸다면 그는 존재하는 육체적 욕망을 어떠한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이겨냈기 때문일 것이다.

* 케팔로스도 소포클레스의 그 말이 실은 그의 삶의 태도에서 나온 것임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다. 케팔로스 말대로 불행과 관련해서건 평화와 관련해서건 노령이 진짜 탓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케팔로스는 자유와 평화를 가능케 하는 진짜 원인으로 그런 수동적 해방이 아닌 다른 것을 제시한다.

 

[329d]

* ‘이런 것들과 관련해서도, 그리고 친척들과 연관된 일들과 관련해서도 한 가지 탓이 있을 뿐이니’ καὶ τούτων πέρι καὶ τῶν γε πρὸς τοὺς οἰκείους μία τις αἰτία ἐστίν. 여기서 ‘이런 것들’은 노령이 가져다 준 성적 쾌락으로부터의 해방을 이야기하는 소포클레스의 경우와 온갖 불행을 노령 탓으로 돌리는 일반 사람들의 경우 모두를 포함한다. 그리고 ‘친척들과 연관된 일들’이란 329a에서 언급된 노인들의 신세한탄과 불평들, 노인이 된 자신을 업신여기는 친척들의 태도를 말한다. 요컨대 불행이건 평화이건 그 어느 것이건 사람들은 모두 그 원인을 나이 탓으로 돌리고 있지만, 케팔로스는 이제 불행이건 자유와 평화건 각자의 생활 방식τρόπος을 유일한 원인μία τις αἰτία으로 제시한다. 노령기에 맞이하는 불행은 나이 탓이 아니라 그 자신 가지고 있는 생활방식의 탓이라는 것이다. 노령일지라도 절도와 만족κόσμιος καὶ εὔκολος이라는 훌륭한 생활방식을 갖추고 있으면 지쳐도 적당히 지칠 정도로 견뎌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 그런 사람에게는 노령도 젊음도 다 견디기 힘들다’εἰ δὲ μή, καὶ γῆρας καὶ νεότης χαλεπὴ τῷ τοιούτῳ συμβαίνει는 것이다.

* 케팔로스가 말한 생활방식의 원어 τρόπος는 사람에게 쓰일 경우 삶의 방식(a way of life, habit), 습관 혹은 성격(character, temper)을 뜻하고 그 내용으로서 ‘절도와 만족’은 각각 아래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절도 κόσμιος : 방정함, 몸가짐이 바름, 앞뒤 분간이 있음, 만족 εὔκολος 쉽게 만족함, 평온함, 유유자적함, 선선함. 요컨대 이 문맥에서 τρόπος는 ‘어떤 것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이나 태도 또는 성격’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 이러한 케팔로스의 생각은 사태의 진짜 원인을 단순히 노령이라는 외적인 요소에서 찾지 않고 노령을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와 연관 지어 생각한다는 점에서 나름의 삶에 대한 성찰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보통 말하듯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사태에 대한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노령도 마음먹기에 따라 견디기 힘든 불행의 원인일 수도 있고 소포클레스처럼 평화의 원인일 수도 있으며, 젊음 또한 절도와 자족의 태도를 갖추고 있으면 행복의 원인이 될 테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노인이건 젊은이건 육체적 욕망과 그것을 좇지 못하는 현실과의 간극을 이겨내지 못해 방종과 문란함에 빠져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 물론 마음먹기가 모든 영역에서 다 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음먹기는 기본적으로 나의 주관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원인 때문에 발생하는 사태와 관련해서는 마음먹기가 통하지 않는다. 물론 사태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그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달리할 수는 있을지라도 사태 자체의 진행을 바꿀 수는 없다. 아무리 배고픔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마음먹어도 배고픔이 계속 되는 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와 달리 마음먹기에 따라 사태 자체의 객관적 진행을 바꾸어 놓는 경우도 많다.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인식과 태도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그럼에도 종종 이러한 경우에서마저도 주어진 현실을 있는 그대로 감내하면서 오히려 마음먹기를 통해 수동적으로 상황에 적응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마음은 편해질 수 있어도 변화와 개선을 가로 막는 장애물로 작용하여 오히려 현존하는 모순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거나 악용될 수 있다. 사적인 영역에서는 모든 일을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은 바람직할 수 있다. 그러나 공적인 영역에서 그것은 바람직한 변화를 가로막는 아주 무책임한 일이 될 수도 있다.

* 케팔로스가 자유와 평화의 진짜 원인으로 절도와 만족이라는 생활방식을 제시하자 소크라테스는 찬사를 보낸다. 사실 케팔로스의 그러한 태도는 사태의 진실을 파악함에 있어 단순히 구상적인 사례들의 제시에 의지하지 않고, ‘나’라는 주관을 중심에 두고 생활방식이라는 개념적 사고에 기초하여 판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식 주관과 자의식, 추상적 사고에 눈을 뜨기 시작한 당대의 시대정신에도 어울리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의 그러한 태도가 칭찬할 만한 일이긴 하지만, 문제는 오랜 전쟁으로 공동체가 처한 위기 상황에서 ‘자유와 평화’라는 주제가 나라와 개인의 정의라는 정치·사회적 문제의식과 유리된 채, 단순히 자신의 사적인 안녕과 행복을 위한 방편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사실 플라톤은 케팔로스 부류가 말하는 안녕과 행복 또한 덕의 수행을 통해 체득된 내적 영혼의 조화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실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보통 내보이고 싶어 하는 일종의 격조 있는 삶을 위한 나름의 자기 규율적 생활습관 정도로 그리고 있다.

* 상당수의 학자들 특히 영국 출신 학자들은 그들의 전통 자체가 경험적 지혜를 중시해서인지 이곳에 나타난 케팔로스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갖춘 사람으로서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를테면 네틀쉽(R. L. Nettleship)은 그를 한 세대의 경험 많은 선한 사람으로 평가하고 철학은 이 경험을 비판의 대상이 아닌 학습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만약 케팔로스를 문답 대상으로 삼았다면 옳은 일이 아닐 것이라는 키케로의 말까지 그는 인용한다. 하물며 그를 572e이하에서 언급되고 있는 ‘참주의 욕망과도 같은 거칠고 잔인한 주인’을 스스로 제거한 사람으로까지 칭찬한다. 그리고 그의 종교적 신념도 통속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소박하고 순수한 신념으로 평가하고 있다.

* 그러나 텍스트는 이들의 바람과 달리 너무도 명백하게 케팔로스를 학습의 대상이 아닌 문답의 대상으로 그리고 있다.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젊잖게 생활방식을 강조하는 케팔로스에게 무안할 정도로 시종일관 그의 재산에만 초점을 맞추어 꼬치꼬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것은 플라톤이 케팔로스와의 대화를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플라톤의 주요 관심사가 케팔로스 개인의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기보다는 그가 대표하는 당대 기득권층, 특히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의 태도와 사고방식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플라톤이 왜 케팔로스를 <국가> 도입부의 주요 등장인물로 나오게 했는지, 왜 그가 장차 비판과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통로 또한 그것에 있을 것이다.

 

2-3(329e~330c): 노령을 수월하게 견디게 해주는 것이 과연 생활 방식인가 아니면 재산인가?

 

[329e]

*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의 속내를 살피기 위해 ‘노령을 수월하게 견디어 내는 것’ἡγεῖσθαί σε ῥᾳδίως τὸ γῆρας이 과연 생활방식 때문인지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이 믿고 있듯이 실제로는 육체적 욕망을 해소해줄 수 있을 정도의 위안거리를 가능케 하는 재산 때문인지를 충동질하듯 다그쳐 묻는다. 여기서 ‘충동질하다’ἐκίνουν . κινεῖν라는 말은 ‘움직이다’라는 의미 외에 ‘휘 젓는다’, ‘재촉하다’라는 뜻으로 문답과정에서 대답을 촉구하고 자극시키기 위해 자주 쓰이는 말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에 대해 학습의 자세가 아니라 의심을 갖고 뭔가를 따지는 문답의 자세로 임하고 있는 것이다. <뤼시스> 223 A, 크세노폰의 <회고> IV 2. 2. 아리스토파네스 <구름> 745 참고.

* 여기서 ‘위안거리’παραμυθία란 말은 정신적, 물질적 위무 방안까지를 포함하여 당면한 난관을 해결할 수 있는 방책 모두를 포함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재산이 이러한 위안거리를 보다 쉽게 얻는 데 분명 도움을 준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에도 더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크게 다를 게 없다.

* ‘하기야 그들의 주장에도 일리는 있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들이 생각하는 만큼은 아니다.καὶ λέγουσι μέν τι, οὐ μέντοι γε ὅσον οἴονται’.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지적이 당돌하다고 느껴졌을 법도 한데 점잖게 그리고 유연하게 질문에 답을 한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케팔로스가 경직되고 고집스런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기보다는 일단 겉으로는 나름 노련함과 내공을 갖춘 경륜 있는 노인임을 보여준다.

 

[330a]

* 케팔로스는 세리포스인과 테미스토클레스 일화를 인용하여 일반인들의 생각에 반론을 제시한다. 세리포스는 에게해에 위치한 조그만 섬이다. 이 일화와 관련해서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Histories apodexis)> 8권 125장 참고

* 일화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세리포스 사람은 테미스토클레스의 고명함이 테미스토클레스 자신 때문이 아니라 나라 때문이라고 헐뜯는다, 이에 대해 테미스토클레스는 내가 세리포스인이어도 고명할 수 없었을 것이고 세리포스인 네가 아테네인이어도 고명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대응한다. 테미스토클레스의 대답에는 아테네와 테미스토클레스 자신의 우월함과 세리포스와 세리포스인에 대한 폄하가 깔려있다. 이 일화를 케팔로스의 의도에 맞추어 생활방식과 재산과 관련시켜 풀어쓰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아무리 테미스토클레스 내가 훌륭한 생활방식을 갖고 있다할지라도 가난한 세리포스에서 태어났다면 고명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네같이 저급한 생활방식을 가진 세리포스사람은 아무리 부자나라 아테네에서 태어난다할지라도 결코 고명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케팔로스는 이 말을 재산과 노령을 견디는 것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도 적용한다. 즉, 아무리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가난하면 노령을 견디기 힘들고, 그 자신 훌륭하지 못하면 아무리 부자일지라도 노령을 견디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처럼 케팔로스는 노령을 수월하게 견디게 해주는 것으로 재산과 훌륭한 생활방식을 함께 병치시키는 방식으로 그의 생각에 대한 일반인들의 비판을 피해간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 이 말은 생활방식 이외에 재산을 추가 병치시킴으로써 앞서 노령을 수월하게 하는 유일한 원인이 생활방식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기도 하다. 나중에 그 생활방식 역시 기본적으로 재산에 크게 의존해 있음이 드러난다.

* ‘훌륭한 사람’ὁ ἐπιεικὴς이란 말의 원어 ἐπιεικής는 기본적으로 ‘적합한’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에서처럼 사람을 가리켜 쓸 때에는 ‘능력 있는’, ‘친절하고 선한’, ‘합리적이고 공정한’의 뜻을 가지고 있다.

* 여기서 ‘훌륭하지 못한 사람은 부유하다 할지라도 쉬 자족하게 되지 못할 것이다’οὔθ᾽ ὁ μὴ ἐπιεικὴς πλουτήσας εὔκολός ποτ᾽ ἂν ἑαυτῷ γένοιτο라는 케팔로스의 말은 ’훌륭하지 못한 사람은 결국 재산을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지 않거나 어떤 경우에도 쉬 자족을 못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훌륭하지 못한 사람의 경우만 말하면 이 점은 플라톤의 생각이기도 하다. 그러나 케팔로스가 인용하고 있는 세리포스인 일화는 훌륭한 데모스토클레스도 가난한 세리포스에서 태어났더라면 그리되지 못했을 것임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가난하면서도 훌륭함을 유지하고 노령도 잘 견뎌내는 사람, 즉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 동양식의 청빈한 선비상은 마치 불가능한 경우인 듯 아예 경우의 수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케팔로스가 소크라테스와 같은 삶을 이해하지도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경험도 경험 나름이다. 선대로부터 부를 이어받은 케팔로스 같은 부류는 그런 경험을 해보지도 이해하려 하지도 또 이해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소크라테스가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를 면전에 두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매우 악의적이 아닐 수 없다. 듣는 소크라테스야 물론 의연했겠지만 이 모습을 그리고 있는 플라톤으로서는 모욕이 앞섰을 것이다. 만약 플라톤이 케팔로스를 자기 말대로 실제 ‘절도 있는’ 인물로 평가했다면, 최소한 ‘소크라테스 선생님 같은 경우는 아주 특별하고도 예외적인 경우’라는 말 정도는 케팔로스의 입에 오르게 했을지도 모른다.

 

[330b]

*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의 도발적 질문에 대해 자신이 왜 생활방식을 중시하는 지를 예시를 동원하여 나름 균형을 갖추고 논리적으로 해명을 하고 있다. 사실 이 정도면 소크라테스도 그의 생활방식과 관련한 주제에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해 질문을 이어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에 대해서는 어떤 관심도 내 보이지 않고 곧바로 재산가τις χρηματιστὴς 케팔로스의 재산 상속οὐσίαν κέκτημαι παραλαβὼν과 형성과정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말하는 생활방식이 실제로는 재산에서 나온 것임을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생활방식이 아닌 재산과 관련한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추가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앞 질문에 이어 계속되는 도전적 질문에 당황할 만도 한데 케팔로스는 여전히 점잖음을 유지하며 그 질문에 선선히 응한다.

 

[330c]

*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도전은 계속된다. 이후의 소크라테스의 언급 또한 케팔로스를 칭찬하는 형식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케팔로스의 속내를 드러내기 위한 아이러니이다. 우선 케팔로스가 재산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칭찬은 기실 케팔로스가 가진 재산이 기본적으로 상속재산임을 드러내기 위한 말이다. 그리고 그 이후 재산을 스스로 취득한 자들이 갖는 재산욕에 대한 서술 역시 케팔로스가 재산을 상속한 자이긴 하나 그것을 토대로 제 손으로 당대 최고의 갑부의 자리에 오른 사람인만큼, 케팔로스 또한 재산욕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케팔로스는 이러한 의도를 모른 채 소크라테스의 말을 칭찬으로 여기고 그의 말에 진실된ἀληθῆ 말씀이라고 호응한다. 이 또한 아이러니이다.

* 이곳에는 ‘스스로 재물을 취득하지 않은 이들’οἳ μὴ αὐτοὶ κτήσωνται과 ‘몸소 재물을 취득한 사람들’οἱ δὲ κτησάμενοι, ‘재물을 모은 사람들’οἱ χρηματισάμενοι이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몸소 재물을 취득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 보다 ‘곱절이나 재물에 애착을 갖고 있다’διπλῇ ἀσπάζονται αὐτά고 말한다. 그 이유는 ‘재물을 모은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그들은 마치 시인들이 자신들의 시에 대해서 그리고 아버지들이 자식들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듯이 그런 식으로 재물에 대해 ‘자신들의 작품처럼 열성을 보이는’σπουδάζουσιν ὡς ἔργον데다가 또 ‘다른 사람들’οἱ ἄλλοι이 그러하듯이 재물의 효용성κατὰ τὴν χρείαν에 대해서도 애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런 식으로 몸소 ‘재물을 모은 사람들’은 사귀기조차 힘든 사람들χαλεποὶ καὶ συγγενέσθαι이고 부(富)τὸν πλοῦτον이 외에 ‘아무것도 좋게 말하려 들지 않는다’οὐδὲν ἐθέλοντες ἐπαινεῖν고 힐난한다.

* ‘곱절이나 재물에 애착을 갖고 있다’에서 ‘곱절’에 해당하는 말 διπλῇ를 ‘이중의 이유 때문에’(a double reason)로 번역하는 사람(P. Shorey)도 있다. 일반인들처럼 재물의 효용성에서 뿐만 아니라 그에 더해 재물을 그 자체 자신의 작품으로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냥 ‘곱절’의 의미로 번역하고 있다.

* 여기서 ‘재물을 모은 사람들’은 ‘몸소 재물을 취득한 사람들’이되, 재물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재물을 마치 자기 자식인양 그 자체로 애착을 갖는 어느 정도 재물을 모든 재산가를 의미할 것이다. 단순히 취득 방법에서 ‘몸소 재물을 취득한 사람들’로만 제한하면 ‘땀 흘려 자기 손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 모두가 ‘사귀기 힘들고 그저 부만 칭송하는 부정적인 부류의 사람들’이 되고, 오히려 ‘제 힘으로 재물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들’이 ‘재산에 애착을 갖고 있지 않은 나름 긍정적인 부류의 사람들’이 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땀 흘려 제 손으로 재물을 취득한 사람들을 힐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부를 축적하여 마치 시인이나 아버지가 제 작품이나 자식들을 본능적으로 애착을 갖듯 재물 그 자체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힐난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부분에 나오는 세 부류들 모두를 ‘제 손으로 취득했느냐 아니냐’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두 ‘큰돈을 소유하고 있는 부류들’ 즉 재산가들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경우 ‘다른 사람들’οἱ ἄλλοι은 재산가가 아닌 일반 사람들일 것이다.

* ‘돈을 버는 사람들’οἱ χρηματισάμενοι에 쓰인 동사 χρηματίζω가 ‘돈을 모으다’라는 의미 외에 ‘금전 관련일로 협상하다’, ‘사업을 벌이다’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이들은 아마 당대 상업이나 무역업을 통해 부를 쌓은 신흥 부유층들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케팔로스도 비록 상속 재산에 힘입었기는 하지만 자식에게 상속 재산 못지않을 부를 물려 줄 정도로 상공업을 통해 제 손으로 부를 일군 신흥 부유층이다. 그것도 당대 최고의 부유층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플라톤의 비판은 케팔로스 개인 보다는 아테네의 급격한 사회변화를 가져다 준 상업주의 풍조와 그에 기대 부를 축적한 신흥 부유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할 것이다.

* 플라톤이 재산가가 재물에 대해 갖는 애착을 시인과 부모가 각기 자신의 시와 자식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착과 동렬에 놓은 것도 매우 흥미롭다. 기본적으로 용도보다는 본능적이다시피 그 자체에 집착하는 행태를 드러내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혹시 재산가의 금전만능주의, 부모들의 생물학적 가족이기주의, 당대 시인들의 독선적 아집을 동급의 부정적 집착으로 바라본 플라톤의 속내를 드러낸 것은 아닐까?

* 노령이건 젊음이건 수월하게 견디게 하는 유일한 원인이 생활방식이라는 케팔로스의 주장은 문답을 통해 ‘아무리 생활방식이 훌륭하더라도 재산이 없으면 견디기 힘들다’는 것으로 바뀐다. 케팔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경륜을 갖춘 노인답게 나름 유연하고도 균형 있게 답을 했다고 여기지만 노령과 젊음을 수월하게 견디게 해주는 원인에 재산을 추가시킴으로써 생활방식이 유일한 원인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케팔로스가 말하는 생활방식도 실질적으로는 재산에 기초한 것임을 의심하고 또 재산에 초점을 맞추어 또 추가적인 질문을 던진다.

“백성에서 시민으로 향하는 여정 – 동학농민혁명과 동학사상” –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기 ‘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⑥

2018 네트워크 시민대학1동서양을 아우르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

2018. 8. 27. 서교동 한철연 강의실

 

제6강. 백성에서 시민으로 향하는 여정 – 동학농민혁명과 동학사상

 

강연 : 구태환(상지대 초빙교수)

후기 : 정선우(한철연 회원)

 

* 동학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의 백성은 어떻게 자립적 시민으로서의 자기 요구를 정치화하였는지 살펴본다.

 

조선 말기는 신분제적 봉건 질서의 부조리와 모순이 극심하고, 외세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본격화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백성들(민중들)은 이중으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으로는 탐관오리의 득세와 삼정(三政)의 문란 등으로 인한 터무니없이 과중한 세금 탈취를 당하였고, 밖으로는 일본과 서구 등의 외세가 조선의 이권(利權)과 지배권을 노리며 다툼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동학사상과 동학혁명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등장한 것입니다. 특히 동학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된 동학사상은 시대적 문제에 대한 민중의 대응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당시 현실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개혁하기 위해 ‘다시 개벽(開闢)’을 외쳤고, 모든 사람이 똑같이 귀하고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확립하였습니다. 당시, 오랫동안 조선을 지배했던 성리학적 이념은 지배 질서를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불과하게 되었고, 불교나 도교 또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새로운 세상, 즉 다시 개벽을 위한 새로운 도를 찾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게 오랜 수행과 수양 끝에 얻어낸 도가 바로 ‘시천주’입니다. ‘시천주’는 ‘한울님을 내 몸에 모심’을 뜻합니다. 한울님은 우주 만물을 이루는 기(氣) 가운데 가장 지극한 기로, 우주 만물의 근원이 됩니다. 그러한 한울님은 우리 모두가 모시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사람은 신분, 빈부, 성별, 연령과 무관하게 모두 동등하게 귀한 존재입니다. 각종 차별과 폭력은 시천주를 깨닫지 못한 채 저지르는 악행이라는 주장으로 귀결됩니다. 여성, 어린이, 노인, 빈민, 천민 등은 모두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로, 한울님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러한 입장은 동학사상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평등의식과 존중의식을 잘 보여줍니다. 결국 동학사상에 따르면, 모든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해야 하며, 나아가 우주 만물이 곧 시천주라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집니다. 만민평등, 나아가 만물평등 사상으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동학사상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놓여 있던 당시 현실에서 민중들이 가지고 있던 간절한 열망과 치열한 문제의식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했던 지배층의 안일한 태도와 다르게,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면서도 그것이 혹시나 외세 침략에 빌미를 제공하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 그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동학혁명은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는 핑계로 쓰였고, 청일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정말 안타깝고 씁쓸한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현대 철학의 주목받지 못한 변방, 함석헌 [길 위의 우리 철학] – 18

유현상

 

둘리네 동네의 어느 골목

가느다란 봄비가 내리는 날 도봉구 쌍문동으로 향했다. 그런데 쌍문역 4번 출구로 나와 조금 걷다보니 이곳이 바로 둘리네 동네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갑자기 생각난 것은 아니고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희동이가 길 안내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이 동네는 8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무대이기도 했다. 사실 쌍문동은 지나가기만 했지 돌아다녀 본 것은 처음이다. 둘리를 보니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개성 없이 확장된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지역을 알릴만한 소재의 빈곤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해서 서운한 감정도 생긴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다. 쌍문역에서 800미터 정도 거리에 있다고 희동이가 알려주었다. 그곳은 개성 없이 확장된 서울의 여느 주택가와 다를 바 없는 골목에 자리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는 목적지를 찾느라 주의 깊게 보지 않아서 몰랐는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골목 어귀에 고만고만한 규모의 분식집들이 여러 개 보이는 것이 조금 다른 풍경이었다. 요즘에는 학교 근처에도 문구점이나 분식집이 그저 한두 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가보다. 그러고 보니 완만한 골목 맨 윗자리에는 유치원부터 초·중·고등학교가 다 몰려 있었다. 정의여중고 입구 교차로에서 정의여중고 방향의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 조금 올라가다 오른쪽 작은 골목으로 조금 들어가니 목적지가 나타났다.

평안북도 용천이 고향이니 함석헌(1901~1989)의 생가 등을 찾는 것은 현재로서는 불가하니 그의 삶의 흔적은 그가 마지막에 살았던 곳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설령 통일이 된다고 해도 북한 지역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을 듯도 하다. 다만 그가 다녔던 평양고보 자리나 평안북도 정주에 있던 옛 오산학교 자리나 나중에 확인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그의 마지막 거처는 지금 ‘함석헌 기념관’으로 변경해서 운영되고 있다. 원래 함석헌은 용산 원효로의 있는 작은 집에서 오랫동안 거주하였다. 지금 기념관으로 운영되고 있는 집은 차남 함우용 내외의 집이었다. 도봉구는 이곳을 2015년 9월 함석헌 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친지들의 도움으로 6.25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원효로 작은 집이 욕심 없이 소박한 삶을 살았던 함석헌을 보여준다면, 서울의 변두리 끝자락 쌍문동의 집은 강단철학에서 외면받아 온 한국 철학의 변방을 상징한다고 한다면 다소 지나친 생각일까?

 

(사진 1. 함석헌 기념관 )

 

우선 들어간 곳은 맨 아래 층에 위치한 작은 전시실 ‘씨ㅇ·ㄹ 갤러리’였다. 전시 내용은 ‘붓글씨로 만나는 함석헌’ 전이었다. 함석헌이 남긴 글의 내용을 여러 사람이 붓글씨로 표현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워낙 많은 글과 시를 남겨 그의 글귀나 시를 소재로 서예전을 기획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쉬운 발상이라고 생각되었다. 사전에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씨 갤러리’에서는 다양한 기획의 함석헌 관련 전시를 하는 모양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을 위해서는 무료 대관도 해준다고 되어 있었다. 왠지 내부 통로를 이용하는 것은 정식 방문을 하는 느낌이 안 들어서일까 위로 향하는 내부 계단이 있었으나 굳이 바깥으로 나가 정문 출입구로 향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작은 마당에 들어서니 기념관 안내판이 있었고 2층 현관 옆에는 함석헌의 묘비가 있었다.

 

(사진2 – 함석헌 묘비, 함석헌 기념관)

 

원래는 경기도 연천에 있던 묘를 2006년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할 때 묘비는 이곳 기념관으로 옮겼다고 안내하고 있다. 2층은 안내 데스크와 전시를 위한 공간이다. 전시공간에 들어서자 맞은 편 벽에 제일 먼저 연보가 펼쳐져 있다. 이어 안쪽으로 들어가니 거실이었을 공간에 육필원고와 함석헌이 발행한 ‘씨의 소리’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더 안 쪽 방은 영상전시실이었는데 이곳에서는 함석헌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들의 영상 자료를 계속 상영하고 있다. 함석헌이 사용한 방에는 자그마한 앉은뱅이 책상에 성경책이 자리를 하고 있다. 그렇지! 그는 스스로 한국교회의 이단자임을 자처하였지만 평화운동가이자 시인인 함석헌은 무엇보다도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종교사상가였다. 그의 소박한 책상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성경이었다.

 

(사진 3 – 함석헌 서재의 성경책, 함석헌 기념관 )

 

저항과 사상혁명의 길

함석헌의 고향인 평안북도 용천은 일반인들에게는 2004년 용천역 폭발사건으로 더 잘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함석헌이 고향의 참사를 들었더라면 참담한 심정을 금치 못하였으리라. 일본의 패망에 뒤이은 한반도의 해방은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고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고난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것은 함석헌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북한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은 함석헌에게 반공세력에 대한 정탐 요구를 했다. 이를 거부한 함석헌은 소련군에 의해 두 차례 더 옥고를 치른 후 북한에서의 삶을 뒤로 한 채1947년 3월 가족들을 두고 홀로 월남한다.

소련군의 탄압을 피해 월남했건만 그 이후의 삶 역시 함석헌에게는 녹록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가 제 자리를 잡지 못하였으며, 그의 삶 전체는 독재와 타락한 문명에 대한 저항으로 채워지게 된다. 함석헌이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계기는 5ㆍ16군사 쿠데타 이후였다.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퀘이커리즘에 대한 연구를 마치고 1963년 독일에 들러 안병무를 만나고 난 후 귀국한 함석헌은 본격적으로 5ㆍ16군사 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의 부당성을 알리는 강연 활동을 한다.

1970년에 함석헌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독재정권과의 싸움을 계속했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박정희정권만이 아니라 비겁과 나약에 빠진 지식인들과 언론을 거침없이 질타했다. 1971년 7월부터 1988년 5월까지는 오랜 동안 노자와 장자에 대한공개 강좌를 열기도 했고, 1973년부터는 여기에 더해 퀘이커리즘과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을 만들어 교육 활동에 함썼다. 비록 기독교적인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다른 종교에 대해 관용적이고 개방적인 관점을 지니고 있었던 함석헌은 1967년에 이르러서야 그 전부터 호의를 갖고 지켜 본 퀘이커교도가 된다. 하지만 퀘이커리즘에 대한 연구는 그 전부터였다. 그가 퀘이커 교도가 된 계기는 한국 기독교 사회에서의 고립되었던 자신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고 인류 평화와 사회 정의 실현을 중시하는 퀘이커리즘의 정신 때문이기도 하다.

1970년대의 함석헌의 주요 활동은 반유신 활동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974년 11월에는 김대중, 윤보선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협의화 공동의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76년 3월 1일에는 김대중, 윤보선, 안병무, 이문영, 이태영, 이우정, 서남동, 문익환, 문동환 등과 더불어 박정희의 퇴진을 주장하는 이른바 ‘3ㆍ1 구국선언’ 등에 참여해 또 다시 옥고를 치르게 된다. 박정희 정권과의 투쟁 가운데서도 함석헌은 당시 열악한 노동 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앞장서기도 했다.

군사독재와의 싸움은 박정희가 죽고 난 후에 5공화국에서도 이어진다. 비록 전두환정권에 의해 씨알의 소리와 같은 비판적 잡지와 언론이 폐간되기도 했으나 강연 등의 활동은 계속 이어갔다. 또한 고령의 나이에 그의 활동이 그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지만 권위주의 독재 정권하에서 수많은 민주 인사들에게 그는 정신적인 버팀목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함석헌의 저항의 정신은 종교를 절대화하려는 태도에도 항거한다. 그에 따르면 종교도 절대화하는 순간 거짓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자꾸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이 종교의 절대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적 삶은 끊임없이 절대적 진리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데, 상대적 시간에 머물면서 현재를 절대화하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이다. 현재를 절대화하는 것은 ‘뜻’에 근접할 수 없다. 그러한 삶은 생의 역동성을 유지할 수 없다. 진리를 향해가는 박진성이 결여된 종교에 불과한 것이다. 종교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은 ‘나’라는 과거의 자아가 마치 본래적 자기라는 것을 규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 생성하면서 참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참나를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항거는 곧 나는 스스로 나이고자 하는 데서 나온다. 사람은 인격이므로 무엇을 다 한대도 인격의 자주성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인격의 자주성은 자연의 경로라 할 수 있다. 자연의 경로는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한 씨앗이 썩어 새싹이 움트기 위해서는 자신을 덮고 있는 흙과 돌에 항거하고, 병아리는 자신의 둘러싼 껍질에 저항해야만 한다.

 

(사진 4 – 1965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 때의 함석헌, 함석헌 기념관)

 

함석헌은 「씨ㅇ·ㄹ혁명의 꿈」(1980)에서 자신의 철학을 ‘씨ㅇ·ㄹ철학’으로 소개했다. 씨ㅇ·ㄹ이라는 말은 알맹이나 핵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근원이나 본질이다.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저항과 비판은 유신시대에로까지 이어지는데, 그의 비판의 칼날은 유신을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5·16 군사쿠데타가 있기 이전에 발생한 4·19혁명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4·19실패의 원인에 대해 학생이 시작했지만 민중의 혁명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그 실패는 결국 민중의 죄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여기서 말하는 민중 즉 사람이란, 함석헌 자신의 표현대로 하면 ‘맨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생이나 군인이나 다 맨 사람 위에 덧 입혀진 옷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사람 아닌 학생, 군인, 정치인 등등의 정체성은 어떤 특정한 입장에 있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맨 사람이 아니고 자신이 입은 정체성으로 만나면 제도에 그 자리에 붙게 된다고도 한다. 함석헌은 특권 없는 제도는 없으며, 혁명은 제도를 없애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군인이 일으킨 혁명, 학생이 일으키는 혁명은 참 혁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이 함석헌의 생각이었다.

맨 사람이 아닌 특정한 입장을 가진 사람에 의한 혁명은 순전한 자발성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제도화된 입장에 따른 이해관계는 행동을 강제하는 경향을 지니게 마련이다. 비단 외적인 강제에 의한 행동만이 아니라 내적인 강제 역시 자발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법이다. 우리가 노예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제도나 법률에 의해 타인의 강제에 따른 노예가 된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 안에 존재하는 이해관계나 입장에 의해서만 행동한다면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 삶에 대해서 내가 주체로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함석헌이 그래서 참다운 혁명은 사상의 혁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민중이 자각할 수 있도록 하는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다. 민중 스스로 자신이 삶의 주체로 서야 한다는 것이 사상 혁명의 내용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함석헌의 실천은 씨의 소리발간으로 구체화 된다. 씨의 소리발간은 독재 정권에 대한 함석헌의 정치적 저항이자 언론운동이기도 했다. 즉 그것은 독재에 대한 투쟁이었고 민중의 사상 혁명을 이끌기 위한 선동이었다. 함석헌은 자신이 말하는 민중이 주체가 되는 삶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일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러한 변화의 의미와 성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일대 변화란 그래서 하는 생각이다. 변(變)도 화(化)도 다 달라진다는 뜻인데 변은 달리짐 중에서도 갑자기 달라짐을 가리키는 말이다. 변자(變字)밑에 있는 ‘文’이 그것을 표시한다. 그것은 작대기를 들고 두들기는 것을 그린 것이다. 즉 힘을 넣어서 급히 달라지게 만든다는 뜻이다. 거기 더해 화(化)는 질적으로 아주 전의 모습이 없이 달라짐,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화학적인 변화를 뜻한다. 화의 한편인 ‘인’은 사람이라는 인(人)자인데. 이쪽의 ‘匕’는 인을 뒤집어 놓아서 죽은 것을 표시하는 자다. 죽으면 아주 달라진다. 우리말로 되졌다는 말이다.”

 

사실상 함석헌이 말하는 변화란 현재의 삶의 방식과 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전복, 즉 혁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혁명은 씨의 스스로함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생명의 원리를 스스로 함에 있다고 본 함석헌의 사유는 다분히 노장의 세계관을 연상시킨다. 노장 사상은 인간의 도덕적 질서를 강조하는 유가 사상과는 달리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하며 인위적인 삶보다는 자연에 따르는 삶을 강조한다. 여기서 자연은 저절로 그러한 세계이자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산학교 시절부터 이어져 온 노장 사상에 대한 관심은 함석헌의 사상이 씨에로 귀결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함석헌은 도덕경에서 인위적이지 않은 도의 길을 강조하는 데에 주목하였다. 또한 이상적인 통치자란 씨들이 생활에 최소한의 간섭만 하기 때문에 씨들은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통치자라고 보았다. 그러는 가운데 씨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함’의 방식으로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스스로 함’은 자연이고 함석헌에게 자연은 필연이었다. 따라서 민중들인 씨들에 위한 일대 변화 역시 필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자연은 자유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고, 자유는 스스로(自)가 스스로의 까닭(由)인 것이다. 따라서 함석헌이 말하는 사상 혁명이란 스스로(自)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씨ㅇ·ㄹ이 스스로 함에 의해 실천할 수 있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씨은 생명의 자발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자발성이라 함은 생명의 원동력을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그 자체로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자발성은 외부의 강제를 배척하는 원리이다. 오랫동안 백성, 신민, 국민 등으로 불린 민(民)은 자발성의 주체가 아닌 다스림의 대상이었다면 씨은 제도와 문명에 귀속된 것이 아닌 자유롭고 자발적인 삶의 주체를 은유하는 것이다.


(사진 5- 씨ᄋᆞᆯ의 소리, 함석헌 기념관)

 

함석헌이 주장하는 저항의 또 다른 의미는 선악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적 투쟁이다. 그는 인격이란 자유하는 것이라고 보고 자아의식을 가지고 자주하는 의지로써, 내 뜻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이러한 자유에는 한이 없다는 것이 함석헌의 생각이다. 선악의 문제가 도덕적 개념이기는 하지만 함석헌에게 그것은 보통의 윤리의 의미가 아니다. 생명의 선악이요 존재의 선악이다. 함석헌은 선을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이라고 보고, 악은 그 자유를 방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저항의 철학」 이라는 글에서 함석헌은 “인격은 선악의 두 언덕을 치며 물살을 일으켜 흘러나가는 정신의 흐름이다. 물이 언덕은 아니요, 인격이 선악도 아니다. 그러나 흐름은 두 언덕을 쳐서만 있는 것이요, 인격의 발전은 선악의 싸움을 해서만 있다. 선이 무엇인가?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이요. 악이 무엇인가? 그 자유를 방해하는 것밖에 다른 것 아니다. 사람은 악과 맞서고, 뻗대고, 걸러내고, 밀고 나가서만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함석헌의 자유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경로를 방해하는 일체의 억압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의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강력한 해방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함석헌의 사유는 우리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참고할만한 중요한 인문적 성찰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의 사유 안에는 모든 제도적 억압에 대한 저항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억압에 대한 저항 의식이 담겨 있다.

 

(사진 6 – 비폭력저항주의자 함석헌, 함석헌 기념관)

 

4.19 묘역에서

함석헌 기념관을 둘러보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민자치공간으로 꾸며진 곳을 빼고는 1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인근에 있는 수유리 국립 4.19민주 묘역에 들러 보았다. 문득 함석헌의 묘지를 대전 현충원으로 옮긴 이유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함석헌이 마지막으로 머물러 기념관이 된 곳 인근에 자리한 4.19묘역이 더 적절했을 성 싶기 때문이다. 대전에는 서훈 취소가 되어 마땅한 인사들의 무덤도 즐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함석헌은 과연 그런 자들과 머물기를 바랬을까?

평일이고 비가 조금씩 와서 그런지 참배객 등의 방문자들은 많지 않았다. 그 나마 몇몇 사람들은 그 옷차림새로 보아 인근 지역 주민들로 보였다. 4.19 기념탑에서 개인적인 간단한 참배를 하고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4.19 당시의 각종 자료와 화보가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 유독 눈에 들어오는 장면은 초등학생들의 시위참가를 기록한 사진이다. 함석헌은 4.19가 성공하지 못한 이유가 맨 사람의 혁명이 아니었고 학생의 옷을 입은 혁명이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이 새삼 떠올랐다. 당시 초등학생들의 시위사진을 보면 함석헌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말이야 초등학생들이지 그들이 무슨 학생의 옷을 입었으며 왜 맨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인가? 4.19혁명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함석헌의 지적은 4.19를 주도한 학생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미완의 혁명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것은 아니었을까?

 

(사진 7 – 4.19에 참가한 초등학생의 시위, 4.19기념관)

 

 

기고자: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블로그진 ‘길 위의 우리철학’은 한국현대철학을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한국현대철학분과’에서 만든다. ‘길’은 과거로부터의 역사이기도 하고, 오늘의 삶이기도 하고, 미래로 열린 희망이기도 하다. 그 위에 서서 우리는 언제나 어느 길이 더 나은 길인지, 바른 길인지 생각하고 선택한다. 그렇게 ‘길’은 지향志向이기도 하고, 그래서 철학이기도 하다. 한국현대철학분과는 앞으로 월 2회 블로그진을 통해 우리철학이 서 있었던 길, 우리철학이 만들었던 길을 이야기 하려고 한다.

 

  1. 광장에 서다 – 촛불의 승리 그리고 박정희 시대의 종언 [길 위의 우리 철학] -1 : 박영미
  2. 대통령 탄핵, 그 후 – 박은식(朴殷植)의 개혁론, 독립운동, 임시정부 [길 위의 우리 철학] – 2 : 이지
  3. 송곡의 길가에서 최시형을 만나다 [길 위의 우리 철학] –3 : 구태환
  4. 붉은 얼굴의 경계인(境界人), 신남철 [길 위의 우리 철학] – 4 : 이병태
  5. 어린이를 노래하는 방정환을 만나다[길 위의 우리 철학] – 5 : 김세리
  6. 국가의 철학, 철학의 부재(不在), 안호상 – [길 위의 우리 철학] – 6 : 박민철
  7. 정치의 중심에서 주변을 배회한 타고난 근대인 몽양(夢陽) 여운형 [길 위의 우리 철학] – 7 : 유현상
  8. 우리, 나라, 사랑 – 윤치호와 관련한 애국에 대한 단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8 : 배기호
  9. 서일- 잊혀진 어느 무장투쟁 사상가의 초상 [길 위의 우리 철학] – 9: 김정철
  10. 현상윤, 최초의 근대적 체제의 조선사상사를 짓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0: 윤태양
  11. 구도와 구세의 길, 운명적 불화 – 한용운 [길 위의 우리 철학] – 11: 송인재
  12. 태백산에서 최후를 맞은 서양철학 1세대, 박치우 [길 위의 우리 철학] – 12: 조배준 
  13. 시대정신을 찾는 여정의 첫 발걸음: 신채호와 서울 [길 위의 우리 철학] – 13: 진보성
  14. 큰 이룸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간 삶의 철학자, 도산 안창호 [길 위의 우리 철학] – 14: 배기호
  15. 밑바닥에서 진리를 찾은 이- 장일순 [길 위의 우리 철학] – 15: 구태환
  16. 서재필과 개화운동, 계몽을 통해 근대를 꿈꾸다 [길 위의 우리 철학] – 16: 박영미
  17. 이항로의 위정척사, 당신들만의 진리 [길 위의 우리 철학] – 17: 구태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