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나는 반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박종성(한철연 회원)

 

인형의 집에서 노라와 반역자인 유일자

 

노르웨이의 극작가이자 시인인 헨릭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은 그이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인형의 집』에서 아버지나 남편의 인형이 아니라 자신이 주체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는 노라의 이야기를 한다. 왜 갑자기 슈티르너에 대한 글을 쓰면서 입센을 언급하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입센의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노라’의 모습이 ‘유일자’의 모습, 곧 나다움의 추구와 닮아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나 남편의 인형인 노라는 슈티르너가 말하는 노라의 ‘체내화’(Verleiblichung/incorporation)라고 할 수 있다.(407) 슈티르너는 이러한 신성화(Heiligung)에 대한 반역으로 탈신성화 혹은 신성 모독(Entheiligung)을 주장했다. 신성모독은 곧 나다움을 찾아가는 길의 첫걸음이다. 그렇다면 입센은 이 희곡에서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가출을 선택하는 ‘노라’를 통해 무엇을 강조하고 싶었을까? 그것은 자아 각성과 자아실현의 중요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염상섭은 입센의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를 차용한다. 그의 문학에서 노라를 자아 각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면 노라는 슈티르너가 주장하는 자의식, 자기중심적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염상섭의 초기 문학에서 그는 “가네코 우마지의 자연주의 개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개성’이라는 개념에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의 ‘반역자’라는 개념을 접합하여, 개성의 자각을 사회의 억압기제에 대한 ‘반역’으로 변형시키면서 정치 미학적 색채를 가미한다.… 주인공 이인화는 냉소적 이성의 소유자로 지성과 행동이 분열되어 있는 인물이다. 그는 동경에서 경성으로 여행하는 동안 제국 일본의 다양한 억압기제를 확인하고, ‘자기 반역’을 통한 주체 재정립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이인화는 정자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세계사적 전환기에 반역자로 거듭나야 함을 역설한다.”(민족문학사연구 / 52권, 권철호)

이를 통해 우리에게 그동안 너무나 시,공간적으로 멀게만 느껴졌던 유일자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가까운 시간과 공간에서 만날 수 있었다.

 

 

혁명인가 반역인가!

 

먼저 다시금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자아로서의 내가 나를 가치 있게 만들(verwerte) 때, 내가 나 자신의 가치(Wert)를 나에게 줄 때, 그리고 내 자신의 값(Preis)을 스스로 만들 때, 그때에만 집단 빈곤은 없어질 수 있다. 나는 번영하기 위해서(um emporzukommen) 반드시 저항해야(empören) 한다.”(282)

 

저항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을 때, 자신의 가치를 만들지 못할 때, 그러한 경우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불만으로 시작하는 것은 반역이다. 그는 우선 슈티르너는 ‘혁명과 반역’(Revolution und Empörung)을 구분하다. 그리고 혁명은 상황의 전복, 국가와 사회의 기존 조건 안에서 혹은 단순한 위치의 전복이며, 따라서 정치적 또는 사회적 행위라고 말하고, 반역은 불가피한 결과로서 실질적인 환경의 변화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환경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불만에서 시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단순한 위치의 전복’을 경험했는가? 우리의 역사에서 몇 번의 혁명이 있었고 그 혁명을 속에서는 우리는 어떤 존재였고, 지금은 또한 어떠한가? 우리는 여전히 그것에 만족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슈티르너는 “반역(Empörung)이라는 말을 그 말의 어원학상의 의미와 관련하여 선택한 것이고, 또한 형법에서 금기시된 좁은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주석 96) ‘empor’는 부사로 “위로, 높이”라는 뜻이고 분리동사의 전철로, ‘위로·높이’의 뜻이다. 동사 ‘empören’은 ‘올리다, 누구에게 반항하다’라는 뜻이다. ‘개’라는 말과 연결되는 견유(犬儒)학파의 디오게네스(키니코스학파의 디오게네스를 슈티르너도 인용한 바 있다)의 기념비에 새겨진 개처럼 낮은 것을 높이고 높은 것은 낮추는 것처럼 말이다. 앞서 보았듯이, 기존에 높은 것은 고정관점, 위계질서 등인데, 슈티르너는 바로 이것을 낮추고자 겸손하지 말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무관심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아울러 지금 개처럼 낮은 것은 바로 우리 개개인들, 유일자들, 노동하며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이들이다. 따라서 유일자를 무(無) 위에 놓는다는 것은 유일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므로, 지금 현실에서 개처럼 낮은 유일자를 ‘높게’(empor) 하는 것이 유일자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은 이윤, 자유로운 경쟁을 주창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개개인들의 가치를 추구하여 나다움을 실현하는 것이다.

결국 슈티르너는 반역의 의미를 다시금 유일자의 철학이 추구하는 나다움으로 연결시킨다. 제도보다는 자기 자신을 설계하는 유일자의 모습을 그는 나다움을 찾는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나다움이라는 표현은 자기 소유자임을 뜻하고 있다. 그리하여

 

“반역은 무장봉기(Schilderhebung)가 아니라 제도(Einrichtungen)로부터 야기되는 여러 가지 사항을 고려하지 않고 일어서는 개인의 어떤 반항(Erhebung), 어떤 번영(Emporkommen)이다. 혁명은 새로운 제도를 목표로 한다. 반역은 더 이상 우리를 설계하도록(einrichten) 내버려두는(lassen) 것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스스로를 설계하는 것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354)

 

위 문장에서 ‘제도’(Einrichtungen)와 ‘설계하다’(einrichten)라는 단어로 언어유희를 하고 있다. “반역은 더 이상 우리를 설계하도록(einrichten) 내버려두는(lassen) 것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스스로를 설계하는 것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앞 문장은 설계하는 것을 ‘내버려두는(lassen)’이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문장을 거꾸로 읽으면 삶을 설계하는 것은 나 자신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슈티르너는 반역을 “현존하는 것(Bestehende)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곧 “나의 목표는 기존질서의 전복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은 나의 고양(Erhebung)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나에게 그리고 나의 나다움(Eigenheit)에 어떤 자기중심적인 나다움(Eigenheit)이라는 올바로 상태”를 부여하고자 한다. 그는 계속하여 나다움을 주장한다. “반역(Empörung)은 기운을 차리는 것을 요구하거나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것(emporzurichten)을 요구한다.”(같은 곳) “가난한 사람들이 –반항하고(empören), 떨쳐 일어나고(emporbringen), 일어설 때(erheben), 그들은 단지 자유롭게 되고 소유자가 될 것이다.”(288)

결론적으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혁명보다 반역이고, 반역은 반항(Erhebung)이고 우리 스스로를 설계하는 것, 곧 번영(Emporkommen)이다. 그래서 “나는 번영하기 위해서 반드시 저항해야 한다.”(282) 다시 말해 자신의 번영(Emporkommen)을 위한 반항(Erhebung)이고 번영하기 위해서(um emporzukommen) 반드시 저항해야(empören) 하는 것이다. 나아가 나다움이라는 소유자가 되는 것은 반항하고(empören), 떨쳐 일어나고(emporbringen), 일어설 때(erheben) 가능한 것이다.

 

 

반역자의 소리 없는 아우성

 

익숙한 가치를 다르게 평가할 줄 알 때, 그때야 비로소 반역은 가능할 것이다. 당연한 일이라고 간주하지 않는 재치와 용기가 필요하다. 이미 슈티르너가 주장했듯이, 신성한 것은 낯설고 친숙한 것이다. 신성한 것은 두 대립적 규정이 통일되어 있다. 따라서 신성한 것은 운동이고 모순으로 이해된다. 이로부터 가치체계가 소리 없이 굳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칠 때, 반역은 시작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데카르트)라는 테제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변주되었다. “나는 의지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셸링) “나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카뮈) 그렇다면 슈티르너에게는 어떻게 변주될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반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슈티르너를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그를 익살꾸러기 광대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역사 속에서 계속하여 이어져 내려오는 분노의 외침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러저러한 온갖 고정관념과 위계질서로 얽힌 그물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고 충고하고 도덕적 영향력을 고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해보자. “너나 잘 하세요” 대립으로 드러난 경멸!

 

 

경멸받지 말고 나를 경멸하는 것에 대해 경멸하라!

 

니체는 국가, 시대, 계급, 문화의 한계에 갇혀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에 대한 지독한 경멸과 구토감이 초인을 향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하는데(프리드리히 니체, 박성현 옮김,『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심볼리쿠스, 2012, 19쪽 주석 참조), 마찬가지로 슈티르너도 모든 신성한 것들, 곧 국가, 민족, 자유, 도덕 등등에 대해 신성모독과 경멸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와 그리스도 시대는 대립적인 목표를 끝까지 추구한다. 그런데 전자는 실재를 이상화하려하고(idealisieren), 후자는 이상을 실현하려하며, 전자는 ‘신성한 정신’을 얻으려고 애쓰고, 후자는 ‘거룩한 육체’를 얻으려고 애쓴다. 따라서 전자는 실재에 대한 둔감으로, 곧 ‘세계경멸’(Weltverachtung)로 종결한다. 그러나 후자는 이상(Idealen)의 벗어던짐으로, 곧 ‘정신의 경멸’(Geistesverachtung)로 끝나게 될 것이다.”(407)

 

그는 ‘세계경멸’과 ‘정신의 경멸’을 넘어서는 ‘자기극복’(Selbstüberwindung)(375)을 주장한다. 이와 유사한 것이 니체가 말하는 ‘건너가기’라고 할 수 있다. 곧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이다.(『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21) 이렇게 보면, ‘자기극복’은 ‘내려가기’와 같은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다. 니체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하려는 행위를 ‘내려가기’(Untergang)로 표현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미덕을 존중하는 사람을 저는 사랑합니다. 미덕은 내려가기를 감행하겠다는 의지이며 초인에 대한 갈망을 담고 날아가는 화살이기 때문입니다.”(같은 책, 22) 니체에게 이 단어는 반복되는 말로 중요한 개념이다. 그런데 슈티르너에게 이 단어를 변증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의 사물을 대립된 두 개의 규정의 통일로서 파악하는 방법을 변증법이라고 한다면, 슈티르너가 비판하는 추상적인 것(민중,인류)과 구체적인 것(나)은 대립된 것이다.

 

“민중과 인류의 가라앉음(Untergang)은 나를 떠오름(Aufgange)으로 초대할 것이다.”(238)

 

나다움의 가라앉음은 “나의 단념(Resignation), 나의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 나의 용기 없음(의기소침Mutlosigkeit)에 의해 -겸손(Demut)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344) 결국 나의 가라앉음은 인류의 떠오름이고 그것은 겸손이라는 나의 단념과 나의 자기부정에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므로, 나의 떠오름, 나다움의 떠오름을 위해서는 겸손을 벗어나야 한다. 자기극복은 나의 떠오름이고 세계극복(Weltüberwindung)(25)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현실적인 측면에서 맑스의 파악으로 본다면, 자본의 잉여가치 창출의 떠오름은 나의 가라앉음이다. 유일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유일자=비인간적 인간이다. 유일자=나다움이다. 따라서 유일자의 ‘부정’은 인간이고 인간다움이 아니다. 그러므로 거꾸로 인간다움의 ‘부정’은 나다움이다. 따라서 유일자는 나다움의 긍정을 위하여 인간다움을 부정해야 한다. 유일자는 상이한 사람이다. 유일자의 부정은 인간이다. 그래서 상이한 사람들의 부정은 인간이다. 다시 말해 비동일성의 부정은 인간이다. 곧 비동일성의 부정은 동일성이다. 결국 인간은 비동일성의 동일성이다. 칼 맑스가 물신숭배를 비판하는 것과 형식적으로 공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적인 노동이 다양한 노동과 교환된다는 것, 곧 추상적 인간노동의 대상화, 다시 말해 교환가치 속에서 상이한 노동과의 동일성은 비동일성의 추상성이기 때문이다.

유일자를 비동일성이라고 이해한다면, 비동일성의 부정, 곧 자기극복의 모습은 유일자의 또 다른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경건하지 않음’(Unehrerbietigkeit)과 ‘뻔뻔스러움’(Frechheit)을 유일자의 태도로 제시하는데, 다시 말해 신성한 것에 맞서는 유일자의 태도는 조롱(Spott), 욕설(Schmähung), 경멸(Verachtung), 의심(Bezweiflung) 등등 이다. 경멸의 내용은 여러 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는 경멸받고 있는 것, 경멸하고 있는 것을 제시하면서 거꾸로 경멸받지 않아야 하는 것, 경멸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니체는 ‘거대한 경멸’의 대상으로 행복, 미덕, 이성, 정의, 연민 등을 거론한다.

그런데 슈티르너는 이러한 유일자의 태도를 말하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 경멸하고 있다는 것, 그것 자체를 무(無)로 되돌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는 훨씬 더 신성한 것에 대한 근원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아님, 무관심,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어린이 같은 사람의 태도는 대상을 경멸하고 있다는 것, 곧 주체가 대상과 여전히 관계 맺고 주체가 그 대상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과는 근원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대상 자체를 사유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생각하지 않음’이다. 신성함은 신성함에 대한 선포로 성립된다. 그러므로 신성모독은 신성함에 대한 무관심으로도 가능하다.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