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국가> 강해 ⑳
[347e]
*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논박이 마무리되자 소크라테스는 그 주장보다도 ‘부정의한 사람의 삶이 정의로운 사람의 삶보다도 더 낫다κρείττω는 주장이 훨씬 더 중요한 논쟁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앞서(344d-e) 소크라테스가 정의에 관한 토론에서 ‘어떤 삶의 방식βίου διαγωγή이 각 개인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가?’라는 물음이야말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차대한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논쟁의 주제가 되었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정치적 차원에서 정치적 강자와 권력지상주의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그가 정의라는 주제를 통해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과연 정의로운 삶이 시민들 각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가의 문제 즉 시민 각 개인들의 삶의 방식과 행복에 관한 문제임을 보여준다. 물론 시민들 모두 폴리스적 존재라는 점에서 개인의 삶의 방식과 정치적 삶의 방식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 플라톤의 <국가>는 전편에 걸쳐서 시종일관 정의 문제를 그 통일적 연관 하에서 유기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을 둘러싸고 벌어진 앞서의 논쟁 또한 그러한 구도 위에서 이루어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짧은 말 한마디에는 앞으로 <국가>가 다루게 될 핵심 주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중대한 함축이 담겨있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최소한 <국가>에서 플라톤이 펼치는 주요 관심사가 오늘날 흔히들 생각하듯 전체주의적 국가주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각 개인들의 행복과 이익에 대한 관심이 그 근본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체제에 관한 논의 또한 그것의 구현 조건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임을 미리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제2권에서 소문자와 대문자의 비유를 통해 정의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 국가 차원으로 확대하는 과정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4-10(348a~349a): 소크라테스 검토방식을 재정비하고 트라쉬마코스에게 정의와 부정의를 각기 덕과 악덕에 연관시켜 묻자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는 고상한 순진성이고 부정의야말로 덕과 지혜라고 답한다.
[348a]
* <국가>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의 논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트라쉬마코스가 논의에 끼어들어 불쑥 던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벌어진 정의와 권력, 권력과 이익에 관한 논쟁(338c-347a)이고, 다른 하나는 앞서 살폈듯이 ‘부정의한 사람의 삶이 과연 정의로운 사람의 삶 보다 나은가?’ 즉 바람직한 삶의 방식에 관한 논쟁(338b-354a)이다. 앞의 논쟁은 기본적으로 트라쉬마코스가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주장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대응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뒤의 논쟁은 비록 트라쉬마코스의 부정의 찬양론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나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정의로운 삶의 방식의 우위를 논증하기 위해 논쟁의 적극적인 방편이자 화두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소크라테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리고 문답이 소크라테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만큼 내용 또한 제2권 이후에서 다루어질 내용을 일정 부분 암시 또는 선취하고 있다는 점도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이다.
*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삶의 방식과 관련한 두 번 째 논쟁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던진 문제와 앞으로 전개할 문답의 방식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를 제쳐두고 글라우콘과 상의하고 있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삶의 방식이라는 보다 적극적 주제를 내세워 자신의 주도하에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보다 확실하게 논파하려는 기세로 글라우콘을 우군으로 끌어들여 함께 검토 방식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정의로운 사람의 삶과 부정의한 사람의 삶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어느 쪽이 더 진실ἀληθής인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글라우콘이 정의로운 사람의 삶이 더 유익하며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납득이 가지 않는다οὐ πείθομαι고 답하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를 어떻게든 납득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함께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 앞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아무리 부정의를 제한 없이 저지를 수 있다 해도 결코 부정의가 정의보다 더 이득이 된다고 결코 자신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이 자기 혼자만은 아니라고 자못 비장하게 언급하고 있다.(345b) 그런데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을 끌어들여 그러한 심정을 가진 사람이 결코 자기 혼자만이 아님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릇된 주장을 논파함에 있어 같은 심정을 가진 사람들끼리 결연한 의지로 함께 연대하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국가> 전체에 걸쳐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과 연대하여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논파를 넘어서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348b]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트라쉬마코스를 납득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아래의 두 가지 검토방식을 제시하고 그 가운데 어떤 방식이 좋을지를 묻는다. 하나는 토론 양쪽이 번갈아가며 각기 유리한 주장과 반론을 제기하고 그 후 판관들이 평결하는 방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제껏 해왔듯 서로 합의를 보아가면서 고찰하는 방식ὥσπερ ἄρτι ἀνομολογούμενοι πρὸς ἀλλήλους σκοπῶμεν 즉 우리 자신들이 재판관들δικασταὶ인 동시에 변론인들ῥήτορες이 되는 방식이다. 이 두 가지 검토방식 중 앞의 것은 이른바 당대 아테네에서 이루어진 재판 절차에 따른 방식이다. 즉 원고가 먼저 연설을 통해 고발 이유를 밝히면 피고가 그에 대한 반론을 펼치고 그런 다음 다시 한 번 공방을 펼치고 나면 그것을 지켜보던 재판관들이 판정을 내리되 형벌이 법으로 정해지지 않은 사건의 경우에는 다수결에 의해 판정을 내리는 방식이다. 이에 비해 나중의 검토 방식은 논의 당사자들은 물론 그것에 더해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까지 토론에 가세해 모두가 판관들이자 변론인들이 되어 서로 합의를 통해 서로가 납득을 하는 보다 강화된 문답법적 검토방식이다. 사실 이 방식들은 일정부분 장단점이 있다. 전자의 방식은 법률에 따른 재판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어떤 형식이건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구속력 있는 결정이 이루어지는 방식인 반면에, 당사자들의 납득 여부에 상관없이 일반 대중으로 구성되는 재판관들에 의해 판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 능력이 중대 관건이 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후자의 방식은 토론자들의 합의하에 검토가 진행되므로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실체적 진실에 다가설 수 있는 검토 방식이기는 하지만, 서로 자기주장만 펼치고 감정까지 내세워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 자체가 불가능한 방식이다. 따라서 이 후자의 검토방식이 가능하려면 검토에 참여한 사람들이 냉철한 이성에 따라 토론의 규칙을 지키고 그에 따라 귀결되는 결론은 자신의 감정과 무관하게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 제안된 두 가지 검토방식 가운데 글라우콘이 마음에 든다고 답한 방식은 두 번째 방식 즉 지금까지 해온 문답 방식에 토론자들이 더해지는 방식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적 방식을 보다 강화한 방식이다. 사실 위 두 가지 방식 가운데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의 경우는 문답법에 기초한 후자의 방식을 선호할 것이고 트라쉬마코스의 경우 연설가인 자신에게 유리한 전자의 경우를 선호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소크라테스에게 전자의 방식은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검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재판정에서는 당사자들의 납득 여부와 상관없이 양쪽 연설을 들은 재판관들의 판단에 따라 판정이 내려질 뿐만 아니라 판정방식 또한 저마다의 주장을 통해 ’좋은 점들을 세어보고 재어 보는 것’ἀριθμεῖν δεήσει τἀγαθὰ καὶ μετρεῖν’ 즉 양적 계산에 따른 다수결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이러한 다수결이었다. 이 부분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재판 과정 전체가 연설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던 당대 민주정 치하의 재판 절차에 대한 플라톤의 불신을 담고 있다. 진실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연설에 휘둘리는 대중들이 재판관이 되어선 안 되며 어디까지나 주장 자체의 정당함을 냉철하게 분별해낼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재판관들인 동시에 변론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테네 재판 방식에 대한 위와 같은 견해는 앎과 분별에 있어 철학자의 배타적 우월성에 대한 플라톤의 믿음을 나타낸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오늘날 플라톤을 반민주주의자이자 엘리트주의로 규정짓는 주된 빌미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세계가 대체로 그러했듯이 아테네 당대에도 교육은 기본적으로 소수 귀족들이나 양반 계급이 갖는 특권이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엘리트주의는 계급적 편향이라기보다는 무지에 대한 지성의 지배를 지지하고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의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에서처럼 충분한 교양을 갖춘 깨어있는 시민들의 자발적이고도 실천적인 정치참여와 그것을 통해 그들이 구현하는 집단 지성의 힘을 플라톤이 직접 경험하였다고 가정한다면 플라톤은 결코 단지 대중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폄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폄하한 것은 본질적으로 대중 자체가 아니라 무지였기 때문이다.
* 소크라테스는 서로 합의를 보아가면서 고찰하는 주체를 우리들σκοπῶμεν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348b) 이는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앞으로의 검토 방식이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등 참관인들을 포함한 보다 강화된 문답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이후 곧바로 실제 논의와 검토 과정에 참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플라톤이 347e에서도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검토 주체를 우리σκεψόμεθα라고 말했던 데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여기서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역시 앞으로 제2권 이후에서 진행될 본격적인 검토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제2권 서두에서부터 이미 확인할 수 있듯이 글라우콘과 아테이만토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소크라테스와 함께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검토에 참여하고 있고, 그 이후에도 ‘우리 자신이 판관들인 동시에 변론인’δικασταὶ καὶ ῥήτορες이라는 표현 그대로 온 힘을 기울여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대한 판관의 역할을 물론 그의 견해를 지지하는 변론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348c]
*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과 검토방식에 대한 대화가 마무리되자 이제 자신이 던진 삶의 방식에 대한 문제를 화두로 꺼내들어 본격적으로 트라쉬마코스와 문답을 재개한다. 사실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자신의 현실론이 논파된 이후(346d) 위축된 듯 입을 다문 채 지금까지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고 검토 방식과 관련해서도 아무런 의견도 내놓고 있지 않다. 자신의 기본 주장이 소크라테스의 강력한 반론에 의해 논박된 것에 따른 위축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적 문답방식에 대한 냉소와 거부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려나 이제 트라쉬마코스는 앞서와 달리 소크라테스의 주도하에 그가 택한 검토방식에 따라 그가 던진 문제에 대해 자신이 대답을 해야 하는 수세적인 지위에 처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요구에 의해 다시 문답에 참여한 이후(348b)에는 거의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수동적으로 대답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 트라쉬마코스와 문답을 재개하면서 우선 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돌아가 트라쉬마코스에게 여전히 ‘완벽한 부정의가 완벽한 정의보다도 더 이득이 된다고 주장하는지’τὴν τελέαν ἀδικίαν τελέας οὔσης δικαιοσύνης λυσιτελεστέραν φῂς εἶναι;’를 확인하듯 묻는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는 당연히 그렇게 주장하고 이미 그 이유도 밝혔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348c]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부정의와 정의 중 하나는 훌륭함(덕, ἀρετὴ)으로 다른 하나는 나쁨(악덕,κακία)으로 일컬을 수 있다면 자기는 정의가 훌륭함(덕)이라고 일컫겠노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는 자기는 여전히 부정의가 득이 되고λυσιτελεῖν 정의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와 정반대οὐναντίον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348d]
* 소크라테스의 견해와 정반대라면 정의는 악덕, 부정의는 덕으로 일컬어야 하지만, 트라쉬마코스는 악덕이란 말 대신에 아주 고상한 순진성(아주 고매한 선의πάνυ γενναίας εὐήθεια)으로, 덕이란 말 대신에 훌륭한 판단εὐβουλία이라고 부르겠다고 말한다.
* εὐήθεια는 좋게는 정직함, 순박함의 뜻을 갖고 있지만 나쁘게는 단순함, 우둔함의 뜻도 갖고 있다. εὐβουλία는 사리분별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자기에게 득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전후사정과 이해관계를 잘 따져 대처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요컨대 트라쉬마코스에 따르면 정의로운 사람은 순진하고 아둔한 사람이고 부정의한 사람이야말로 세상 이해관계에도 밝고 그 유불리에 따라 처신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이에 소크라테스는 부정의한 자가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φρόνιμοί καὶ ἀγαθοὶ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바로 이어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속내를 드러낸다. 즉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란 완벽하게τελέως 부정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나라와 부족을 자신들 밑에 종속시킬 수 있는 사람’οἵ πόλεις τε καὶ ἔθνη δυνάμενοι ἀνθρώπων ὑφ᾽ ἑαυτοὺς ποιεῖσθαι이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트라쉬마코스가 생각하는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란 소매치기 같은 수준의 부정의한 자가 아니라 다름 아닌 통치자 수준에서 부정의한 자 요컨대 참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트라쉬마코스는 논의 주제가 삶의 방식으로 전환되었음에도 그야말로 조금도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부정의 찬양론을 토대로 정치 권력지상주의에 강고하게 매달려 있다.
[348e]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이러한 주장을 의아해하면서ἐθαύμασα 그가 말한 훌륭함과 분별의 문제를 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의 문제로 연결시켜 트라쉬마코스에게 ‘혹시 그렇다면 그 자신 부정의를 덕과 지혜 부류μέρει로, 정의를 그 반대 부류로 간주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이 물음 역시 앞으로 전개할 소크라테스의 논박 전략의 일환으로 던져진 것임에도 트라쉬마코스는 ‘전적으로 그렇게 간주한다’πάνυ οὕτω τίθημι고 동의를 표한다.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한결 더 다루기 어려워(더 까다로워,στερεώτερον) 그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길게 이유를 밝히고 있지만 우리말 역문으로는 금방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 내용을 좀 풀어서 말하자면 아래와 같은 내용일 것이다. 즉 ‘트라쉬마코스가 부정의가 득이 된다λυσιτελεῖν 고 간주하더라도 남들이 그러하듯 실제 속으로는 악덕이고 수치스러운 것αἰσχρὸν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생각은 세간의 통념과도 상통하는 것이라 그런 통념에 따라κατὰ τὰ νομιζόμενα 이렇다 저렇다 무슨 말이든 할 수가 있겠지만, 트라쉬마코스 당신은 통념과도 다르게 그것을 수치스럽기는커녕 아름답고 강력한καλὸν καὶ ἰσχυρὸν 것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하물며 우리들의 생각과는 아예 정반대로 겉으로나 속으로나 부정의를 감히τολμᾶν 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니δῆλος 그러한 대담하고 극단적인 주장에 대해 뭐라 말하기가 아주 힘들다’는 것이다.
* 이 부분은 트라쉬마코스가 얼마나 강고하고도 뻔뻔하게 일상의 통념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기 아집에만 매달리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고대 아테네에서나 오늘날 그 어느 사회나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문제는 세간의 보통 사람이 아니라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혹은 사회 지도층이라고 일컫는 사람들 가운데 이러한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를 없애는 것은 신의 몫이고 우리들이 할 일은 지금의 소크라테스처럼 그들의 주장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치열한 논리와 실천으로 그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349a]
* 소크라테스의 이런 지적에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더 없이 정확하게 알아맞힌다ἀληθέστατα μαντεύῃ고 말한다. ‘알아맞힌다’의 원어μαντεύῃ의 원형동사 μαντεύομαι는 ‘신이 속내까지 다 들여다 볼 정도로 알아맞힌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트라쉬마코스가 제 생각 그대로를 말하고 있음λέγειν ἅπερ διανοῇ을 알게 된 이상, 그 주장을 논의를 통해τῷ λόγῳ 끝까지 검토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는 자기 말과 생각이 일치되는 것으로 여겨지는지 아닌지가 무슨 상관이냐, 어찌되었건 자기가 한 ‘말(주장)에 대해 논박하려는 것 아니냐’οὐ τὸν λόγον ἐλέγχεις;라고 묻고 소크라테스는 그야 상관없다οὐδέν고 말한다.
* 소크라테스는 앞서(346a) 트라쉬마코스에게 어떤 형태로든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게 대답하지 말 것을 요구한 적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가 제 생각 그대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앞서의 요구를 트라쉬마코스가 최소한 충족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자기의 속내는 변함이 없는데 소크라테스가 자기의 말만 가지고 논박하는데 대해 불만을 품고 소크라테스의 그 말에 항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의 반문에 대해 상관없다고 말하고 바로 뒤이어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의 속내는 속내대로, 말은 말 대로 모두 논박할 수 있으므로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결론을 위해서 지금처럼 진실과 관련한 자신의 생각대로 대답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로부터 정의와 덕과 부정의와 악덕과 관련한 기본적인 견해를 확인한 후 이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첫 번째 논쟁에 이어 두 번째 논쟁 즉 ‘과연 부정의한 사람의 삶의 방식은 정의로운 사람의 삶의 방식보다 나은가?“에 대한 논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제1권의 끝까지 이어지는 이 두 번째 논쟁 부분은 아래와 같이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지혜와 관련하여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가?(349b-350c) 2) 힘과 관련하여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가?(350d-352c) 3) 덕과 관련하여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가?(352d-354a)
4-11(349b~350c): 소크라테스 능가개념을 토대로 정의가 덕과 지혜임을 밝히다.
[349b]
*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워낙 대담하고 의아스러운 것이어서 그것이 정말 그의 생각 그대로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예비적인 대화가 마무리 되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게 부정의가 덕과 지혜라는 앞서의 대답을 검토하기 위해 ‘정의로운 사람은 뭔가에서건 정의로운 사람을 능가하고 싶어 한다고 여기는지’ὁ δίκαιος τοῦ δικαίου δοκεῖ τί σοι ἂν ἐθέλειν πλέον ἔχειν; 대답해달라고 말한다. 이 물음은 장차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한 시금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질문이다. 특히 ’능가하고‘πλέον ἔχειν’라는 말이 그러하다. 그러나 아직 트라쉬마코스는 이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능가하고’의 의미를 일상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대답을 이어간다.
* πλέον ἔχειν(pleon echein)은 ‘더 많이 차지한다’, ‘능가한다’, ‘넘어선다’의 의미를 갖는다. 위의 말은 이후부터 350c까지 그것의 명사적 표현인 ‘능가함’, ‘넘어섬’πλεονεκτεῖν으로 바뀌어 사용된다. 트라쉬마코스로선 이제까지 주장해왔듯 부정의한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보다 뭔가를 더 많이 갖는 사람이고 더 강한 사람이므로, ‘능가’라는 말은 부정의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지 정의로운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예의나 찾고ἀστεῖος 순진하기 그지없는εὐήθης 정의로운 사람이 상대가 정의로운 사람이건 부정의한 사람이건 간에 그 누구를 능가하거나 넘어서려 한다는 것은 트라쉬마코스로서는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그는 정의로운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을 능가하고 싶어 하는지를 묻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당연히 ‘아니다’라고 대답하고 올바른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을 ’능가할 자격이 있고‘ἀξιοῖ πλεονεκτεῖν 그것을 정의롭다고 생각할까 하지 않을까’를 묻는다. 이에 대해 트라쉬마코스가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겠지만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묻는 것은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을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지도 않고 그러고 싶어 하지도 않지만, 부정의한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할 자격도 있고 능가하고 싶어하며 그것을 정의롭다고 여긴다는 것’이라 말하고 트라쉬마코스는 ‘그야 그렇겠죠’ ἀλλ᾽ οὕτως, ἔφη, ἔχει. 즉 ‘그런 생각이야 가지고 있겠죠.’라고 답한다.
* 요컨대 이 논의국면에서 소크라테스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래와 같은 것이다. 1) ‘정의로운 자는 정의로운 자를 능가하려하지 않는다.’ 2) ‘정의로운 사람은 부정의한 사람을 능가할 자격도 있고 능가하려는 의지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정의로운 것이라 여긴다’
[349c]
* 그런 다음 소크라테스는 부정의한 자의 경우는 어떠한 가에 대해서 트라쉬마코스로부터 아래와 같은 점을 동의 받는다. 1) 부정의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건 어떤 행위이건 모든 것에 대해 능가할 자격이 있고 능가하려 한다. 2) 부정의한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한, 최대의 것을 얻으려 경쟁한다.’ ἁμιλλήσεται ὡς ἁπάντων πλεῖστον αὐτὸς λάβῃ.
*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로부터 확인한 부정의한 사람의 태도는 비감스럽게도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태도로 강조되는 것이기도 하다. ‘넌 어떤 사람도 넘어설 수 있으며 어떤 것이든 이룰 수 있다. 네가 가질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최대의 것을 얻기 위해 과감히 무한 경쟁에 뛰어 들어라’
[349d]
* 이로써 검토를 위한 테제가 정리 확인되자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바탕으로 앞에서(348d) 트라쉬마코스가 주장한 것 즉, ‘부정의한 사람은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다’φρόνιμοί καὶ ἀγαθοὶ라는 주장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게 시가에 능한 사람μουσικὸν 과 시가를 모르는 사람ἄμουσον 가운데 어느 쪽을 분별력 있는 사람τὸν φρόνιμον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묻는다.
* 시가(詩歌μουσική, mousikē)는 music의 어원으로 종종 음악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그 의미는 말부터가 음악, 예술, 학문의 여신인 뮤즈μουσαι에서 나왔듯이 이를테면 <일리아스>나 <호메로스> 등과 같은 시가를 비롯해서 음악과 연극, 춤 등 일체의 조화와 관련한 예술 영역은 물론 학문적 지식 내지 교양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사실 문자시대 이전에는 삶에 필요한 모든 정보는 구술로 전승되었고 그러한 구술은 노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노래를 의미하는 시가가 μουσική라는 이름으로 지식의 뜻도 가지고 있고 종종 학예(學藝)로 번역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이다. 이에 따라 <일리아스>나 <호메로스> 같은 시가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그들의 사고와 생활방식의 지침을 제시하는 경전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μουσική에 능하다는 것은 곧 지적 능력과 교양을 두루 갖추었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즉 μουσικός(mousikos)는 음악가뿐만 아니라 지식인의 뜻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고대 동양에서 군자가 갖추어야할 교양으로서 여섯 가지 기예(技藝) 즉 육예(六藝)에 음악(樂)은 물론 예(禮), 사(射, 궁술), 어(御, 말 타는 기술), 서(書), 수(數)가 포함되어 있는 것과도 비슷하다.
[349e]
* 이에 대해 트라쉬마코스가 시가에 능한 사람이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소크라테스는 바로 의술에 능한 사람ἰατρικόν도 그와 마찬가지로 분별력 있는 사람인가를 묻고 트라쉬마코스의 동의를 받는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시가에 능한 사람이 리라를 조율할 때 다른 시가의 능한 사람을 능가하려고 하거나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지를 묻고 트라쉬마코스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고 답한다.
* 트라쉬마코스의 대답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시가에 능한 사람이 조율 능력에 능하다 해도 시가가 능한 사람끼리도 능력차이가 있고 그런 이유로 능한 사람끼리도 다른 사람을 능가하여 자기가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트라쉬마코스는 앞에서 부정의한 자는 강한 자로서 모든 것을 능가하려 하고 경쟁도 한다고 말해 놓고서 이제 와서 시가에 능한 사람이 시가에 능한 다른 사람을 능가하려 하지도 능가할 자격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350a]
* 능가개념을 검토의 시금석으로 삼아 펼쳐지는 소크라테스의 이 논박은 350c까지 이어진다. 트라쉬마코스의 동의를 얻어가며 전개되는 그 논박의 진행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온갖 지식ἐπιστήμη 및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와 관련해서도 전문적 지식이 있는 사람τίς ἐπιστήμων은 다른 전문가가 행하거나 말하는 바를 능가하지 않는다. 반면에 전문지식이 없는 자는 다른 전문지식이 없는 자를 능가하려 한다.
[350b]
2) 그런데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ὁ σοφὸς ἀγαθός;이다. 이들은 같은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하려 하지 않지만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하려고 한다. 반면에 못되고 무지한 자ὁ κακός τε καὶ ἀμαθὴς는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반대되는 사람에 대해서도 능가하려고 한다.
3) 부정의한 자도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같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도 능가하려고 한다. 반면에 정의로운 사람은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하려 하지 않지만 같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능가하려 한다.
[350c]
4)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람=지혜롭고 훌륭한 ἀγαθός τε καὶ σοφός 사람, 부정의한 사람=못되고 무지한 자τῷ κακῷ καὶ ἀμαθεῖ.’라는 결론이 나온다.
* 이로써 348e에서 부정의를 훌륭함(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의 부류로 간주했던 트라쉬마코스의 생각은 그 자신의 동의하에 진행된 논의 과정을 통해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논박이 이루어진 것이다.
* 350c에서 ‘정의로운 사람은 지혜롭고 훌륭한 ἀγαθός τε καὶ σοφός 사람, 부정의한 사람은 못되고 무지한 자τῷ κακῷ καὶ ἀμαθεῖ.’라는 결론은 350d에서 ‘정의는 훌륭함(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고 부정의는 악덕κακία과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라는 말로 서로 합의된 것으로 표명된다. 이러한 논의 과정 전체에 기초하여 정의와 부정의 부류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정의의 부류 = 덕ἀρετῆ, 지혜σοφία, 훌륭함ἀγαθόν, 지식 ἐπιστήμη, 유식μαθὴ
부정의의 부류 = 악덕κακία,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 , 무식 ἀμαθὴ
———————-
*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논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가 능가πλεονεκτεῖν라는 개념을 끌어들인 그의 의도와 그가 생각하는 능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보통 ‘ 능가’라는 말을 ‘뛰어난 자가 경쟁에서 상대를 능가한다’할 때처럼 상대를 ‘이긴다’, ‘넘어선다’의 의미로 생각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겐 앞에서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 등에 관해서도 그랬듯이 어떤 기술이 그 기술인 한에 있어서는 기술이 이루는 최고의 것을 제공할 수 있다. 즉 그 기술의 전문가는 그 최고의 것을 달성하는 사람이다. 전문가는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산술에 능한 사람은 산술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 정답을 내놓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정답을 내놓는 사람이 다른 정답을 내놓는 사람을 능가할 필요도 없고 따로 자기가 더 산술 자격이 있다고 말할 것도 없다. 의술의 경우도 전문가라면 질병에 딱 맞는 처방을 내놓는 사람이다. 다른 의사도 그가 전문가인 한 똑같은 처방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에 서로를 능가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시가에 능한 사람이 리라 조율에 있어 다른 시가에 능한 사람을 능가하려하지 않고 또는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전문가들끼리도 수준 차이, 능력의 정도차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만약 해당 기술에 조금이라도 결함이 있는 사람은 이미 전문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요컨대 무언가를 할 줄 안다, 안다는 것은 완전하게 할 줄 한다, 완전하게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플라톤의 앎ἐπιστήμη은 능력δύναμισ과 탁월함ἀρετῆ을 포함한다. 이론과 실천, 지행합일이 진정한 앎인 것이다.
* 플라톤의 이런 사상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설명하면 ‘무엇이 무엇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무엇이 그것으로 정의될 수 있는 고유의 것이 존재하고, 그 무엇과 다른 무엇 사이에는 그것들 서로를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선, 한계선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플라톤은 그 경계선을 peras라고 부른다. 즉 어떤 것의 peras는 그 어떤 것의 내적 규정이다. 그것들 서로에는 모순율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무엇은 그 무엇인 한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그 경계를 넘을 경우 그것은 이미 그 무엇이 아니다.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경우처럼 인간 행위나 기술의 경우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행위나 기술의 경우도 그것이 어떤 행위이고 어떤 기술인 한, 그것을 그것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경계가 있고 그것의 완전성, 최선의 상태를 규정할 수 있는 객관적 척도가 있고 그 척도에 충족한 상태로서 최고의 상태 즉 적도(適度metrion)가 있다. 요컨대 플라톤은 그러한 적도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철학일반의 가치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모든 인간의 행위 특히 도덕적 행위에는 넘어서는 안 될 당위의 척도, 한도가 있다는 도덕 객관주의의 입장인 것이다. 플라톤이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는 한, 그의 주장대로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란 기술에서건 행위에서건 이러한 한도를 정확히 하고 그 한도를 지키는 사람인 반면에 모든 것에 대해 능가하려는 사람은 정해진 한도나 고유의 몫도, 분수도 모르고 제멋대로 행하는 무지한 자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논의 국면 서두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능가 개념은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 어쨌거나 이곳에서 시가에 능한 자가 리라 조율에 있어 시가에 능한 다른 자를 능가하려 하는지를 묻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트라쉬마코스가 능가하려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은 그가 아직도 엄밀론을 견지하고 있다고 전제하면 몰라도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부정의한 사람은 모든 것을 능가하려 하고 경쟁하려 한다는 점에 그가 동의했을 때(349c) 그는 분명 행위나 기술의 한도나 척도 따위를 염두에 두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그의 논박이 성공했다는 것이 그가 논증 과정에서 제시한 생각들 자체의 완전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논박은 행위나 기술의 최고의 상태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대전제가 진실임을 전제한 상태에서 성립할 수 있는 논박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능가라는 시금석 또한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성립하는 시금석이고 논리적인 차원에서 성립하는 시금석일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주장대로 만약 행위나 기능, 기술의 최고상태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전제하면, 당연히 그것을 능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것을 능가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그 대전제의 정당성은 논증되고 있지 않다. 설사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누군가 그것을 실제로 완전하게 인식하거나 완전하게 행위나 기술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지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그 완전성, 그 적도성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증명할 수도 없다. 척도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과 과연 그것이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척도인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수학과 기하학의 경우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척도가 있고 답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아직 풀지 못하고 있는 수학과 기하학 문제도 있을 뿐만 아니라 수학과 기하학 자체도 일정하게 전제를 가지고 있는 학문이다. 하물며 도덕적 정치적 행위의 경우에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플라톤은 그러한 완전한 앎, 완전한 형상적 진리를 직관적으로 체득하는 변증술dialektikē의 능력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그러한 능력을 갖는 철학자가 실제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실제 존재하여 완전한 진리를 한 치의 오차나 실수 없이 모든 국면에서 체득하거나 또 설사 체득했다고 하더라도 그 체득된 것이 과연 완전하고 절대적인 진리인지를 확인 검증하기도 실로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진리를 완전히 체득해낸 완전한 의미의 철학자나 지자의 존재는 현실의 무지와 결핍을 진리로 견인해내기 위한 하나의 지향이자 최선의 목표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의 지는 진리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이 필연적으로 추동하는 지적 긴장과 열망 그 자체인 것이다.
* 완전한 진리의 존재 여부가 이성적 검증 너머의 것이라고 해서 그것에 대한 믿음이나 지향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결단코 아니다. 비록 어떤 것이 완전하지 않다거나 설혹 그것이 갖는 가치가 상대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 보다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 가치의 우열마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가치의 상대화와 등치화는 다른 것이다. 철학은 독단과 아집에 대한 비판적 거부는 물론 다양한 생각과 가치들의 우열의 기준과 근거를 찾아내기 위한 끈질긴 숙고와 천착의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전개되는 소크라테스의 논박도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일방적인 주장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논거와 상대방의 동의와 이해를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런 이성적 바탕위에서 상대의 주장을 검토하고 비판하는 태도야말로 시대를 불문하고 진실에 다가서는 지식인들의 올바른 태도라 할 것이다. 게다가 제1권에서 이루어지는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의 완전성을 드러내는 데에 목표가 있었다기보다는 다만 상대방의 주장이 갖는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데에 목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일단 논박 그 차원에서 분명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적극적으로 논증하지 않은 채 전제되고 있는 행위나 기술과 관련한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생각과 사상 또한 앞으로 보다 정치하게 전개되는 그의 주장을 통해 보다 명료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특히나 그런 과정에서 드러나게 될 그의 사상을 그가 살던 역사적 현실과 관련시켜 즉 시대정신의 살펴볼 경우, 우리는 그가 얼마나 그 시대와 역사, 삶의 진실을 고민한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 고뇌를 바탕으로 얼마나 뛰어난 철학적 성찰과 성취를 이루었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역사와 현실에 대한 치열한 사색과 실천적 모색 그것이야말로 철학 사상이 사상으로서 갖는 진정한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플라톤의 사상이 그 어떤 다른 사상보다도 인류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이 당대의 시대정신으로서만이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는 그야말로 그가 제시한 진정한 앎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도 삶의 진실 특히 정치와 도덕과 관련한 진실은 현실과 역사, 우리의 구체적 삶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