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미즈, 반다나 시바(上)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1. <에코 페미니즘>, 마리아 미즈, 반다나 시바 (上)

 

이지영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의 등장과 그 맥락

 

에코 페미니즘(ecofeminism)은 세계에 존재하는 주요 억압들이 언어적, 상징적 의미들과 깊은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성찰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의식과 무의식을 결정하는 ‘기본 사고틀’에 의해 세계와 인간에 대해 사유하고, 사유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에코 페미니즘은 인간 중심의 단순한 자연 보호 개념이나, 가장 큰 근본 모순을 보지 못하는 남성 중심적 생태주의(ecology)에서 벗어나야 함에 주목한다. 여성의 관점에서 생태계가 처한 문제를 바라보고 논의할 때 생태계가 처한 위기의 본질적 위기를 고찰하고 근본 문제 해결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태주의는 단순한 자연 보호의 호소에서 시작했다. 근대 산업 사회가 초래한 자연 파괴와 이로부터 예견되는 미래의 황폐함에 대한 경고는 서구의 경우 이미 194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핵 위험, 각종 오염 물질, 산업 폐기물, 무분별한 개발 등 유해하고 치명적인 물질들 및 기술들이 공기, 토양, 강, 바다를 오염시키며 파괴하고 있으며 이러한 자연 파괴는 결국 ‘우리 인간’의 생존과 지속적 발전에 큰 가시적 위협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 인간, 자손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런 오염, 파괴 물질을 정화시키거나 안전하게 처리할 기술을 개발하고 환경 파괴를 저지해야한다는 호소는 근대 산업 사회 구성원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 보호의 입장이 근대적 ‘인간 중심’의 표피적인 사고에 불과함을 지적하며 ‘생태 중심적’ 혹은 ‘생물 중심적’ 사고로 자연을 바라봐야함을 말하는 심층 생태주의가 등장한다. 이 생태주의는 자연이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한다는 기본 가정, 망상을 버릴 것을 촉구한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며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다. 인간은 이 커다란 생명체 위에 존재하며 군림하는 존재일 수 없다. 인간은 다른 여타 비인간 생명들과 동일하게 이 지구라는 거대 생명체를 구성하는 부분들의 작은 하나일 뿐이며 모든 부분들은 모두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970년대, 자연이 총제적인 하나의 유기체이듯이 인간 세계의 억압들이 상호 깊은 관련을 맺고 있으며 하나의 해방이 또 다른 종류의 해방들과 무관하게 얻어질 수 없다는 의식 아래 자연 해방과 여성 해방을 동일 맥락에서 바라봐야만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생태학이 간과한 지점이 이 연관성이며 심층 생태학자들이 말하는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 중심’이 아니라 ‘남성 중심주의’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인간에 의한 자연 착취, 지배 전략이 남성에 의한 여성 지배 정당화 맥락과 본질적 유사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자연과 여성에 대한 평가 절하가 한층 더 강화되긴 하지만, 이성/신체, 정신/정서, 문명/자연, 남성/여성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와 전자의 후자에 대한 가치 우월성은 플라톤 이후 서구 지성사의 기본 아이디어였던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출산하는 재생산 능력과 자연의 재생산 역량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남성보다 여성을 자연에 보다 가까운 존재로 바라봐온 것에 주목해왔다. 여성은 자연화되고 자연은 여성화되어 사유되고 상상되어 왔다. ‘어머니 자연’, ‘여자는 땅, 남자는 하늘’ 등의 표현이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이분법의 계열화 목록이 상호 포괄적인 것이거나 동등한 권리를 가진 것으로 개념화되기보다, 나아가 사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연에서 기원한 것임을 인식하는 방향이 아니라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수용되어왔고 문명, 남성…계열의 목록이 자연, 여성…계열의 목록에 속하는 것들을 지배할 자격을 가지는 것으로 정당화되어 왔다는 것에 있다.

앞으로 살펴볼 마리아 미스(1931 ~), 반다나 시바(1952. 11. 5 ~)『에코 페미니즘』 또한 이와 같은 자연과 여성의 본성 연관성 및 동일한 착취, 지배, 억압의 맥락을 수용한다. 생태주의는 여성의 문제와 함께 논의되어야만 하고 여성은 자연의 일부이자 자연과 함께 남성중심주의에 의해 고통당하는 당자자로서 생태계 보호의 주체가 되고 있으며 또 되어야만 한다.

 

  • 3 세계 여성과 1 세계 여성의 만남 – 반다나 시바 & 마리아 미스

 

여성주의 생태학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에코페미니즘』은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제 3세계인 인도 여성인 반다나 시바와 대표적 제 1 세계인 독일 여성인 마리아 미스의 공저로 탄생했다(1993).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이 지점에 놓여 있을 것이다. 반다나 시바는 핵물리학자 출신으로 환경 문제 연구와 운동에 투신하여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마리아 미스는 사회학자로 자본주의의와 더불어 여성, 환경, 제 3세계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제 3 세계와 제 1세계 사이에는 깊은 심연이 놓여 있다. 기반하고 있는 입장과 지역성의 간극 즉 독일 여성과 인도 여성으로서, 서로 다른 맥락 속에 놓인 구체적인 여성이라는 커다란 ‘정체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이 차이를 경쟁과 투쟁, 착취, 억압, 지배의 원인으로 놓고 대적하기보다 공동의 기반을 찾아 생태계의 위기를 ‘함께’ 논의하기로 한다. ‘차이와 다양성’은 대립과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는 사실, 서로 차이나는 것들의 공존과 상호 연결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살아 숨 쉬는 생태계의 기반임에 이 두 사람이 공감하고 의견을 함께 했기 때문이다.

이 둘은 우선 생태 문제가 여성 및 아동 문제와 달리 논의될 수 없는 것임에 동의한다. 그리고 자연과 여성이 동일한 맥락 아래에서 특히 서양 근대 남성 가부장제, 남성 중심주의에 의해 착취되고 평가 절하되어 왔음에 동의한다. 현재 생태계가 처한 위기의 근본 원인이 바로 서양 근대 남성 가부장제인 것이다. 서양 근대 남성 중심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근대성의 성격이 남성으로 하여금 자연 위에 군림하며 자연을 착취하고 파괴하고 조작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수용하게 이끌었다. 파괴되는 생태 속에서 같이 신음하고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극심하게 고통 받는 것은 여성과 그 여성이 돌보는 아이들이다.

 

  • 서구 근대성과 남성 중심주의

 

앞서 언급했던 문명/자연, 남성/여성, 이성/감성, 정신/신체, 백인/유색인종의 상호 배타적, 전자의 후자에 대한 우월적 이분법은 비단 서구 근대만의 특성은 아니다. 이는 서구 플라톤의 사고 체계가 이후 사상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유지되어 왔다. 그런데 데카르트가 『성찰』을 통해 ‘생각하는 나의 존재’를 만학의 토대로 선언한 이래 이러한 이분법은 더욱 강화된다. 인간은 개인으로 원자화되고 이런 원자적 개인의 합리성, 의지, 자율성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이에 얽힌 커다란 문제는 우선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서구 근대가 자연을 기계로 파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생명체를 포함하여 자연을 구성하는 것들은, 물리적 인과 법칙들 안에서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운동한다. 이 운동에는 목적도 의미도 없다. 자연이라는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는 것은 분해 가능한 무의미한 부분들이며 이와 반대로 이 부분들을 결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 조작 대상들이다. 이러한 기계적 자연관은 자연을 하나의 조작 대상, 물리적 기계와 유사한 것으로 파악하게 만들었다. 인간 앞에 놓인 미래는 자연의 법칙을 알아내는 인간 이성을 잘 사용하고 발전시키는 것에 있다. 또 다른 커다란 문제는 이 서구 근대가 찬양하는 ‘인간 이성’에서 여성, 비백인은 제외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루쏘에 이르는 서구 주요 사상가들의 저서에 의해 분명히 드러나듯 이 ‘생각할 줄 아는 존재’는 백인 성인 남성에 한정된다. 여성, 아동, 비백인은 자연적 존재로서 취급하며 지도 편달과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근대적 인간관과 자연관이 자본주의와 결합하면서 개발 명목의 ‘자연 즉 여성적인 것’에 대한 착취, 억압, 통제가 정당화되면서 만연하게 된 것은 지당한 일일 것이다.

 

  • 기존 주류 페미니즘 비판 여성적인 것, 자연, 신체의 재개념화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는 서구 1세계 페미니즘의 큰 줄기들을 비판적 맥락에서 고찰한다. 그중 하나인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시몬느 드 보브와르(1908. 1. 9 ~1986. 4. 14)에 대한 비판은 사실 이젠 페미니즘을 아는 이들에겐 상식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이 비판의 맥락은 다양한 여성주의 운동과 파이어스톤의 래디컬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확장시켜 고찰해 볼 수 있게 만든다. 페미니즘에 관심을 둔 이들에겐 많이 알려진 것을 다루는 이 절에서의 논의보다 훨씬 큰 쟁점의 시발점이 될 수 있는 이 비판은 이어지는 다른 절에서 다루겠다.

보브와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선언으로 페미니즘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보브와르는 남성이 여성을 타자화(의식의 대상화)하는 방식을 통해 스스로를 의식적 주체로 설정하였음을 지적한다. 이때 남성은 자유로운 정신으로, 여성은 재생산하는 신체로 개념화된다. 신체로서의 여성은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그들에 의해 강제된 것이다. 보브와르는 이 여성이 이 신체의 주박에서 벗어나 남성과 같은 정신의 존재가 될 때 자유를 획득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는 이러한 주장이 여성 내부에서 진행된 신체, 자연의 타자화가 남성 중심의 정신/신체, 문명/자연의 배타적 이분법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를 강화하고 확대 재생산시키는 사유임을 지적한다. 자연, 신체, 여성의 타자화, 평가 절하는 페미니즘 안에서도 행사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됩니다 – 

나다움과 국가기계의 힘 관계 [유령(Spuk)을 파괴하는 슈티르너(Stirner)]

나다움과 국가기계의 힘 관계

 

박종성(한철연 회원)

 

1. 왜 나답지 못하는가?

 

우리는 앞서 유일자의 개념을 통하여 유일자는 나다움을 추구하는 자라고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나다움을 요구하는 것은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한, 자기 자신에 의한 자유에 대한 갈망이 일어난다.[172] 그렇다면 자기결정에 대한 갈망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그것은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 때문에 일어나는 갈망이다. 자기결정에 대한 갈망은 자기부정에 대한 부정이다. 또한 슈티르너가 이해하는 ‘자기부정’은 ‘자기폐지’이고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Uneigennützigkeit)[65, 228]이며 자신의 자아를 부인하는 사람[220]이다. 나아가 가장 완전한 자기 부정은 자신의 의지, 자기의지(Eigenwillen)의 지배 자체이다.[172] 결국 나다움은 자신의 자아를 인정하는 사람이다. 달리 말하면 유일자는 ‘구속되지 않은 자아’(das zügellose Ich)이며 우리 근원이고, 항상 우리 내부의 비밀로 남아있다.[219]

그런데 자기부정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그것은 “나의 단념(Resignation), 나의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 나의 용기 없음(Mutlosigkeit)에 의해 –겸 손(D e m u t)”[슈티르너는 여러 가지 강조를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이렇게 철자를 늘려 쓰는 것도 일종의 강조 표현이다.]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344] 그러니까 자기부정은 그 자체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순적 관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쪽이 강해지면 다른 쪽은 약해지는 것을 모순으로 본다면, 자기부정은 자신의 ‘단념’, ‘용기 없음’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슈티르너는 다시금 나다움을 찾기 위해 “자신의 대담한 행위, 자신의 의지, 자신의 가차 없음과 두려움 없음”으로 자신을 이끈다.[220]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다. 나다움의 철학은 ‘자기부정’, ‘자기폐지’, ‘자기에게 유용하지 않음’에서 자기인정, 자기실현, 자기에게 유용함으로, 자신의 의지로 향하고 있다. 나다움의 철학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답게 살지 못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나의 문제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나다움의 철학이 ‘충동’(Trieb)과 어떻게 연결되어 논의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자기를 벗어난 노력과 염려(Sorgen)는 자기폐지(Selbstauflösung)를 추구하는 잘못 이해하고 있는 충동(Trieb) 이외는 아무것도 아니다.(39)

 

먼저 위 문장을 음미해 보자. 슈티르너는 분명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충동’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슈티르너가 말하는 제대로 이해된 충동이 있다는 것인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앞 문장만으로 이해하면, 우선 자기를 벗어난 노력과 염려는 ‘자기폐지’이다. 그리고 앞서 보았듯이 자기폐지는 자기부정이고 나다움의 포기이다. 그러니까 자기실현은 자기를 벗어나지 않은 노력과 염려이며, 이것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충동이고 나다움의 실현을 위한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제대로 이해된 충동은 자기중심적 염려와 노력이다.

 

2. 나다움은 자기중심적 충동(Trieb), 자신을 추구하는 충동이다.

 

‘충동’이란 단어로 표상되는 것, 이를테면 성충동의 ‘충동’ 개념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와 같은 충동 개념을 괄호치고 먼저 슈티르너가 말하는 충동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주된 목적이다. 그가 말하는 충동 개념을 더 확장하여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을 확인해 보자. 그가 말하는 충동은 다양하게 논의된다. 말하자면 충동은 “자신을 추구하는 충동들”(selbstsüchtigen Trieben)”[107]이 자기중심적 염려와 노력이고 제대로 된 충동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나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규칙 없고 법칙이 없는 충동(Trieben), 욕망, 소망, 열정이라는 일종의 심연(Abgrund)은 광명과 인도의 빛(Leitstern)없는 일종의 카오스이지 않는가!(178)

 

슈티르너는 인간에 대한 흔하고 전통적인 질문에 위와 같이 대답한다. 그에게 충동은 “규칙 없고 법칙이 없는 충동(Trieben), 욕망, 소망, 열정”이다. 질서보다는 혼돈을 자신의 충동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인간에 대한 물음에 이렇게 다양하게 대답하는 것, 심지어 ‘일종의 심연’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단일한 인간존재에 대한 규정을 피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말하는 존재론이 ‘창조적 무’라는 것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충동 개념은 ‘동기’(Antriebe)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나아가 그는 소크라테스부터 시작되는 마음의 정화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충동을 ‘가장 다양한 욕망’(Gelüste/appetites)의 그릇일 뿐이라고 한다.[18][Gelüste의 어원인 Lust의 의미는 쾌감, 유쾌; 즐거움, 욕망 등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충동은 ‘동기’이고 “자신을 추구하는 충동들”, ‘자기중심적 충동’이고 자기중심적 염려와 노력이며 “규칙 없고 법칙이 없는 충동(Trieben), 욕망, 소망, 열정”, 곧 “일종의 카오스”, ‘가장 다양한 욕망의 그릇’이다. 이것이 제대로 된 충동이다. 그런데 충동의 문제와 관련되어 다음 글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충동은 ‘힘’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제, 자기중심적 충동(Trieb)이 충분한 힘(Kraft,강조는 옮긴이)을 갖지 못한 어떤 개인의 경우에, 그는 가족의 요구에 어울리는 결혼에 따라 결혼하고, 가족의 입장과 조화를 이루는 어떤 자세를 취한다 기타 등등.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가족을 공경 한다.’(242)

 

3. 자기중심적 충동은 충분한 힘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러한 충동에 결정적인 것은 ‘힘’의 문제라는 것이다. “자기중심적 충동(Trieb)이 충분한 힘을 갖지 못한 어떤 개인의 경우에, 그는 가족의 요구에 어울리는 결혼에 따라 결혼”을 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충동은 ‘힘’과 맞닿아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충동 그 자체만으로는 자기중심적 충동, 자신을 추구하는 충동들이 현실화 될 수 없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결국 나다움, 자기실현은 힘의 소유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유한 힘의 현실화를 통하여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슈티르너의 책 제목이 ‘유일자와 그의 소유’라는 것을 떠올려 보자. 그러면 유일자는 힘의 소유자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힘(Macht)-그것은 나 자신이고, 나는 힘이 있는 자(Mächtige)이고 힘의 소유자(Eigner)이다.”[231] 나다움은 –소유자(Eigners)의 묘사일 뿐이다.[188] “나는 나의 권능(Gewalt)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유일자(Einzigen)로 이해할 때, 나는 나의 힘의 소유자이다.”(412) 또한 자유는 자기결정(Selbstbestimmung)에 의한[172] 것이고 이것이 나다움이다. 이렇게 볼 때, 나다움은 항상 힘의 형태로 드러난다.

그런데 위에서 말하는 “그는 가족의 요구에 어울리는 결혼에 따라 결혼하고, 가족의 입장과 조화를 이루는 어떤 자세”는 무엇일까? 그것은 ‘효성’이라 할 수 있다. 혹은 지금까지의 교육과 교양, 도덕적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나의 요구가 아니라, ‘가족의 요구’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내 위에서 나를 지배하는 어떤 힘, 이러한 것이 신성한 것이다. 어떤 힘이 이렇게 신성한 것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신성한 것이 그 자체로 신성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들이 그렇게 인정하고 그렇게 자신들이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신성한 것을 자신의 지배자로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은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앞서 확인했듯이 유일자, 혹은 나다움은 ‘나의 권능의 소유자이다.’ 그런데 “소유자 자신은 유일자 속에서 자신의 창조적인 무(Nichts)로 되돌아간다.”[412] 나다움을 지배하는 지배적인 어떤 것은 창조적 무라는 슈티르너의 존재론에서 해체되고 지양된다. ‘창조적 무’라는 개념을 아래의 글과 함께 음미해 보자.

 

나는 매순간마다 자신을 그때그때 최초로 정립하거나 창조하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를 전제하지 않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립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할 뿐이고, 내가 나 스스로를 정립하는 순간(Moment)에만 다시 내가 정립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해 나는 창조자인 동시에 창조자의 창조물인 것이다.[167]

 

자아는 전제되지 않고 매 순간 스스로를 정립하는 순간에만 정립된다. 이러한 자아의 창조적인 힘으로 자아가 정립됨으로써만 자아는 존재한다. “자아라는 존재의 핵심은 그 자기 자신을 정립하는 힘이고 이러한 힘에 따라서 자신의 창조물로서 자신을 정립하는 것이다.”[R. Ruzicka, Selbstentfremdung und Ideologie, Zum Ideologieproblem bei Hegel und den Junghegelianern, Bonn 1977, S. 96] 유일자는 끊임없는 창조적 무에서 생성, 소멸, 다시 생성하는 것이다. 자아의 힘은 소유이고 나에게 소유를 주는 자아의 힘이 자기 자신이며, 자아의 힘은 자아의 힘에 의하여 나의 소유라는 자아를 정립한다.

 

나의 힘(Macht)은 나의 소유(Eigentum)이다.

나의 힘은 나에게 소유를 준다.

나의 힘은 나 자신이고 나의 힘에 의하여 나의 소유이다.[203]

 

이 말을 거꾸로 뒤집으면 자아의 힘과 비아(非我)의 힘의 관계에 의하여 자아로 정립할 수도 있고 자아로 정립될 수도 없다. 비아의 대표적인 모습은 국가, 곧 국가기계, 경찰행정이다.

 

4. ‘구속되지 않은 자아와 국가기계

 

앞서 확인했듯이 유일자는 여러 가지 모습을 나타난다. 요약하면 유일자는 나다움을 추구하는 자이다. 그리고 나다움은 자기결정에 의한 것이다. 자기결정은 자유이다. 이렇게 보면, 나다움은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나아가 나다움은 소유자의 묘사일 뿐이라는 점이다. 나다움을 추구하는 모습 중 하나가 ‘구속되지 않은 자아’(das zügellose Ich)[219]이다. 이 말의 의미를 좀 더 살펴보면, “자신의 대담한 행위, 자신의 의지, 자신의 가차 없음과 두려움 없음으로 인간을 인도하는 사람”[220]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다움, 힘, 자유의 문제와 국가 사이의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가의 의무, 국가의 자기유지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유로운 활동에 대한 억제이다.

 

국가기계(Staatsmaschine)는 자신의 고유한 동기(Antriebe)를 결코 따르지 않는 단일한 정신의 톱니바퀴 장치(Räderwerk)를 움직이기 때문이다. 모든 자유로운 활동을 저지하기 위하여 국가는 국가의 검열, 국가의 감시, 경찰 행정에 의해 억압을 할 수 있고, 이러한 억제(Hemmung)를 국가의 의무로 간주하는데, 그 이유는 억제가 자기유지(Selbsterhaltung)의 참된 의무이기 때문이다.”[250]

 

이처럼 국가는 자기 결정하는 유일자처럼 자신의 동기를 따르지 않는다. 국가는 ‘단일한 정신의 톱니바퀴 장치’를 움직이므로 ‘국가기계’이다. 자기유지가 국가의 참된 의무이다. 국가의 자기유지는 검열, 감시, 경찰 행정에 의한 억압으로 드러난다. 말하자면 자유가 나다움이고 ‘자기결정’이라면 국가는 검열, 감시, 경찰 행정에 의한 ‘자기유지’이다. <계몽의 변증법>에서 자기유지(Selbsterhaltung)는 인간의 역사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자기유지는 자기파괴로 이어진다. 이런 맥락에서 국가의 자기유지는 나다움의 파괴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잠시 주목할 만한 것은 ‘경찰 행정’이다. 이 말은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데, 슈티르너가 말하는 경찰 행정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경찰 행정”(Polizei)에 속하는 것은 군인, 모든 종류의 관료, 예를 들어 사법부, 교육 등등, 간단히 말해 모든 국가기계이다.[126] 여기서 말하는 ‘경찰 행정’(Polizei)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찰’이 아니다. “‘Polizei’은 흔히 경찰을 의미하지만 18세기에는 좀 더 넓은 의미로 씌어졌는데, 오늘날의 내정(內政)이라든지 국가행정이라고 할 만한다.”(강성화, 『헤겔 『법철학』』,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3, 99쪽)

이렇게 볼 때, 슈티르너가 말하는 경찰 행정은 국가기계이다. 그런데 여기서 경찰 행정이 단일한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국가권력이 하나로 집약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국가기계는 권력이 아니라 권력‘들’이다. 국가기계의 힘은 다양한 힘으로 편재된다. 따라서 유일자는 다양한 힘으로 편재된 힘들과의 관계 속에 끊임없는 ‘반역자’일 수밖에 없다. 힘들이 두루 퍼져 어느 곳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나다움의 추구 또한 단일한 형태로 나타날 수 없다. 푸코 또한 이러한 힘들의 편재 때문에 혁명보다는 저항을 권고했다.

또한 슈티르너는 국가기계, 곧 경찰 행정을 자기 내면의 감시, 양심의 문제와 연결시킨다. “인간을 일종의 ‘비밀-경찰 행정-국가’(Geheimen-Polizei-Staat)로 만들어왔다. 간첩과 엿듣는 사람인 ‘양심’은 마음의 모든 가벼운 움직임을 감시하고, 모든 생각과 행동은 인간에 ‘양심의 문제’, 다시 말해 경찰 행정의 일(Polizeisache)이다.”[97쪽] 여기서 국가기계는 우리가 앞서 보았던 국가기계의 의무, 곧 감시, 검열, 경찰 행정에 의한 억압이라는 ‘처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과는 다른 맥락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외형적인 처벌에서 내면적인 훈육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유명한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의 ‘팬옵티곤(panopticon)’을 떠올릴 수 있다. 경찰 행정은 벤담의 팬옵티곤처럼 내면의 감시자로 보편화된다. 철두철미하게 완전히 경찰 행정의 성품(Polizeigesinnung)을 꽂아 넣는 사람은 자신의 자아를 부인하는 사람, ‘자기부정’(Selbstverleugnung)을 연습하는 사람이다.[220]

다시금 질문해 보자! 나는 얼마나 나다운가? 나는 자유를 추구하는가? 나는 자기결정적인 존재인가? 나는 자기결정적인 나의 힘을 가지고 있기는 한 것인가? 나는 내 안에 또 다른 경찰 행정의 품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분명한 것은 “내가 ‘순종해야’(kuschen)만 하는 동안에” “국가가 광채가 나는 데 반해, 나는 결핍에 시달린다.”[234]는 것이다. 힘의 관계에서 나의 힘과 국가의 힘은 이렇듯 모순적이다. 국가의 자기유지는 나다움의 자기부정이다. 자기부정은 나다움이 아니고 자기부정의 부정이 나다움이다. 국가의 자기유지의 부정이 나다움이다.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안내

안녕하세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진행되는 윤구병 선생님 강좌를 알려드립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과 성원 바랍니다.

 

윤구병 선생님과 펼치는 철학 마당

 

우리나라 철학 사상계의 어른이신 윤구병 선생님을 모시고 동서양 철학과 사상에 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선생님의 사상적 편력과 깊이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 많이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1. 일정 : 2019년 2월, 4월, 6월, 8월, 10월, 12월(격월 셋째 토요일 총 6회)
  2. 장소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서울 마포구 동교로 114 태복빌딩 302호)
  3. 형식 : 각 마당별 정해진 주제에 관해 선생님께서 1시간 말씀 하시고 주제별로 따로 모신 철학 연구자들과 2시간 좌담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그 후 참가하신 분들과 대화도 나누고 뒤풀이도 가질 예정입니다.

 

<일정과 주제>

 

<2월 마당> 사회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 주제 : 서양 고대 철학에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의 문을 연 사람들 I

–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 원자론자들 –

* 일시 : 2019년 2월 16일(토요일) 오후 2시

*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매 회별로 7-8분을 따로 모십니다)(가나다순)

김인곤, 양호영, 이병창, 이규성, 정준영, 한경자 선생님

 

<4월 마당> 사회 : 이정호(정암학당 이사장)

* 주제 : 서양 고대 철학에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의 문을 연 사람들 II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노스, 스토아학파 –

* 일시 : 2019년 4월 20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6월 마당> 사회 : 김교빈(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 주제 : 인도철학에서 ‘같잖은 생각을 한 사람들’

– <반야심경>, <중론> 등

* 일시 : 2019년 6월 15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8월 마당> 사회 : 이규성(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 주제 : 중국철학에서 나타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유가철학, 도가철학, 선불교철학 –

* 일시 : 2019년 8월 17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10월 마당> 사회 : 김교빈(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 주제 : 한국철학에서 나타난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원효, 화담, 경허 –

* 일시 : 2019년 10월 19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12월 마당> 사회 : 이병창( 전 동아대학교 철학과 교수)

* 주제 : 현대 동서양철학에서 나타나는 ‘같잖은 생각(nothos logos)들’

– 베르그송, 들뢰즈, 박홍규 등 –

* 일시 : 2019년 12월 21일(토요일) 오후 2시. 함께 이야기 나눌 분들은 추후 안내

 

주관 : 윤구병 철학 마당 준비 모임(김교빈, 류종렬, 서유석, 이규성, 이병창, 이정호, 최종덕)

후원 :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단법인 정암학당

문의 및 연락처 : 이정호(jungam@knou.ac.kr)

주디스 버틀러(下) [페미니즘 고전을 찾아서]

 

20.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下)

 

이승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 반근본주의적 연합의 정치

 

이리가레는 남근로고스 중심적 언어에서 여성들은 재현불가능성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뜻이 명료한 일의적 의미화의 언어 안에서는 여성의 성적 차이는 지칭되거나 규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들은 ‘하나’가 아닌 다수의 성이다. 나아가 이리가레는 여성을 ‘타자’로 지칭하는 보부아르에 반대하면서 ‘남성=주체 대 여성=타자’라는 변증법적 인식에는 인간 안에 어떤 본질적 속성이 있을 거라고 미리 단정짓는 ‘본질(실체)의 형이상학’이 전제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버틀러는 이리가레의 성적 차이의 이론이 인간에 대한 본질주의나 결정론에서 벗어나게 해 주며 나아가 남성적 의미화 경제의 획일성을 비판할 근거를 줌으로써 페미니즘적 비평의 다양한 가능성을 열게 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뒤이어서 이리가레가 ‘타자의 문화’를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확대사례로 포함하는 방식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인식론적 제국주의’의 일종임을 밝히고자 했다. 즉 사회적 관계 안에서 전개되는 여러 권력작용들을 ‘남근로고스 중심주의’라는 단일한 기호로 비판하는 것은 ‘적을 단일한 형태로 동일시하는’ 전략이며, 이것은 ‘페미니즘 자체의 전체화’를 방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권력의 식민화는 항상 남근중심적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며, 그 안에는 인종적․계급적․이성애중심적 권력생산 작용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은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와의 관계 안에서만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다양성” 속에서 배치되는 가운데 생산되며, 그래서 이는 여성운동 안에서조차 무수한 형태의 권력관계의 효과로 생산된 ‘여성’들이 있음을 수용하는, 즉 통일성을 전제하지 않는 ‘연합의 정치학’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방향을 취하게 만든다.

“페미니스트의 행동은 안정되고 통일되고 합의된 정체성으로부터 설정되어야 한다는 강압적 기대만 없다면, 이 행동은 더 빨리 출발할 것이고, 이는 수많은 “여성들”에게 훨씬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 여성 범주는 영원히 미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연합의 정치학에 대한 이런 반근본주의적 접근방식은 ‘정체성’이 하나의 전제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것이 형성되기 이전의 연합집단의 형태나 의미를 알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 열린 연합은 당면한 목적에 따라 번갈아 제정되고 또 폐기되는 정체성을 주장할 것이다.(113)”

 

  • 복종위반의 양가성과 삶의 욕망

 

보부아르가 젠더가 구성적이라는 점을 이해하면서도 더 나아가지 못했던 것은 몸(그리고 ‘성’)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에서 기인할 것이다. 버틀러가 보기에 푸코는 여기서 벗어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데, 푸코에게 몸은 오로지 권력관계의 맥락에서만 담론으로서 의미를 획득하며, 따라서 ‘성’은 일관된 정체성을 부여하는 규제적 관행, 즉 섹슈얼리티를 이성애로 안정화시키는 법적․규범적 장치를 통해 생산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푸코의 계보학적 탐구는 욕망이 단순히 금지나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억압되었다고’ 간주하게 만드는 담론적 생산과정을 통해 특정한 형태로 반복적으로 생산된다는 점을 제시한다. 근친상간 금기로 대표되는 금지의 이면에서 인간들은 자신들이 억압되었다고 간주한 이성애 욕망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함으로써 문화적으로 인정받는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버틀러가 보기에 푸코에게는 스스로의 관점과도 모순되는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양성인간 ‘에르퀼린 바르뱅’의 욕망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페니스(혹은 확대된 클리토리스)를 갖고 태어난 그래서 ‘여자’의 성을 부여받은 에르퀼린은 수녀원에서 만난 소녀들과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한’ 수녀들에게 연애감정을 느끼는 죄의식으로 괴로워했다. 에르퀼린은 자신이 작은 성기를 갖고 있음을 고백하고 당국으로부터 합법적인 남자의 권리를 부여받지만 이후 의사와 판사의 신체규정에 따라 법적 격리조치된 이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푸코는 바르뱅이 여자에서 남자로의 변신 전에는 사법적․규제적 성 범주의 압력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쾌락’을 향유했다고 보는데, 버틀러는 이렇게 “비정체성의 행복한 중간지대”를 설정하는 푸코의 논의는 섹스와 정체성의 범주를 초월하는 유토피아적인 쾌락의 세계가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며, 따라서 섹슈얼리티를 형이상학적으로 물화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에르퀼린의 양성구유의 몸과 그/녀의 성적 쾌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버틀러는 에르퀼린의 몸과 쾌락은 일의적인 의미를 부과하는 법담론 내에서 생산된 것이면서도 동시에 법담론의 언어로는 규명될 수 없는 모호한 양가성으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에르퀼린의 욕망은 한편으로 자매와의 섹슈얼리티를 금지시키는 수녀원의 제도적 명령(‘동성애 금지’)에의 위반으로 구성(‘동성애 감정’)되면서 다른 한편 자매들의 몸이 자신과는 ‘다르다’는 것(따라서 ‘비동성애적 욕망’)을 느낀다. 사라라는 이름의 ‘자매’와의 하룻밤 뒤 에르퀼린은 ‘이성애가 내포된’ 소유와 승리의 언어(“바로 그 순간부터, 사라는 내 것이었다!!”)를 말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이성애 규범 내에서 작동하는 남성적 특권을 ‘찬탈’하고 그 특권을 모방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녀의 욕망은 푸코가 생각한 ‘비정체성의 지대’가 아니라, 이성애 규범체제에 복종한(즉 이성애적 정체성을 형성한) 결과이면서도 동시에 아직 권리상 여자인 상황에서 그 규범을 위반한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복종․위반․굴절․혼란이 교차하는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려 했는데, 이러한 정체성 형성은 그/녀가 규범체제 한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삶의 자리를 확보하려는 것, 즉 “살기 위한 욕망, 삶이 가능해지도록 만들려는 욕망, 그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려는 욕망에서 행해진 것”(63)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버틀러는 바로 이렇게 정체성이 생산되는 그 자리에서 대안이 전개될 존재론적 지위를 확인한다, 즉 ‘삶을 욕망하는 한, 그들은 모두 자신에게 강제된 권력체제 한가운데에서도 늘 전복의 가능성을 남겨둔다.’

“젠더의 ‘통일성’은 강제적 이성애의 실천효과이다. 이 실천의 힘은 배타적 생산장치를 통해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의 상대적 의미를 제한하기도 하고 그 의미들의 융합과 재의미화가 일어나는 전복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이성애주의와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의 권력체제가 그들의 논리, 형이상학, 당연시된 존재론의 지속적 반복을 통해 스스로를 증식하고자 한다고 해서, 반복 자체가 멈춰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반복이 정체성의 문화적 생산이라는 기제로서 지속된다면 다음과 같은 핵심적 질문이 등장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전복적 반복이 정체성 자체의 규제적 관행을 문제삼을 것인가?(145-146)”

 

  • 구성적 외부로서의 우울증

 

그렇다면 이러한 강제적 이성애 체제 안에서 그것을 벗어나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버틀러는 그것을 정신분석학의 ‘우울증’ 논의를 통해 해명하고자 했는데, 그녀와 유사한 입지점을 가진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분석․비평함으로써 ‘우울증’의 확장된 개념틀을 확보하고자 했다.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모체에 대한 기원적 관계의 억압을 필요로 한다는 라캉의 서사에 도전하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라캉과는 반대로 그녀는 ‘기호계’가 기원적 모성의 몸 때문에 생겨난 언어 차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를 통해 기호계는 상징계 안에서 영원히 전복의 원천으로 작동한다. 이 점에서 크리스테바의 전략은 라캉의 상징계에 맞서 ‘기호계’를, 아버지 법에 맞서 ‘시적언어’를 대치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버틀러가 보기에 이러한 크리스테바의 전략은 몇 가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첫째, 크리스테바가 시적언어로 아버지 법을 대체하려고 노력하는 그만큼 불가피하게 그 법의 안정성을 전제하고 그 체계를 확정짓는다는 점, 둘째, 크리스테바는 모성적 몸이 문화보다 앞서 있는 의미와 본질성을 지닌다고 말하는데, 그에 따라 모성은 물화되고 모성의 변이가능성을 사전에 배제할 수밖에 없다는 점, 셋째, 크리스테바는 상징계가 억압하는 일차적 충동(모성적 충동)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 충동의 현실화로 ‘아이의 옹알이’나 ‘정신병자의 방언’처럼 상징계 바깥에 놓여있는 영역을 설정하는데, 문제는 그녀가 동성애를 모성으로의 귀환으로 보는 만큼 ‘동성애=정신병’이라는 전제를 아무 문제의식없이 수용하게 된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버틀러는 이렇게 크리스테바의 한계와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그녀가 ‘근친상간 금기’와 ‘동성애 금기’가 아이의 젠더를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문을 개방한다는 점을 긍정한다. 프로이드는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했을 때 주체가 보이는 심리적 반응을 애도와 우울증으로 구분해 설명한 바 있다. 상실된 대상을 분명히 이해하고, 대상에 대한 사랑에 머무는 ‘애도’와 달리, 상실된 대상이 분명하지 않으며, 상실을 통해 자아의 형성으로 나아가며 또한 대상에 대한 사랑이 증오로 변모하기도 하는 ‘우울증’은, 크리스테바에게서는 엄마에 대한 딸의 사랑이 근친상간과 이성애 금기를 통해 형성된 상실감을 내면화시키는 기제로 설명된다. 여자아이의 정체성은 모성적 몸에 대한 일종의 상실․결여가 되며, 아이의 에고는 모체와의 분리에 우울증적으로 반응한 결과 ‘특정한 정체성’을 형성한다. 버틀러는 이러한 크리스테바의 관점이 그녀가 모성성을 우울증과 동일시함으로써 ‘젠더 정체성의 형성’을 설명할 근거는 제공하면서도, 그것이 왜 이성애적 틀 안에서의 젠더 생산과정에 동성애의 거부/보존이 지속적으로 작용하는지를 이해하는 방향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음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크리스테바는 아버지 법을 금지 개념에만 독점적으로 한정시키기 때문에 아버지 법이 특정 욕망을 자연스러운 충동의 형태로 생성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 그녀가 표현하고자 하는 여성의 몸은 그 자체 법에 의해 생산되는 구성물이고, 그것은 법의 토대를 약화시키게 되어 있다.”(261) 버틀러는 이성애 규범을 통해 배제되는 동성애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정신병으로 귀착하는 것만도 아닌 ‘주체의 내부로 진입해’ 매 순간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모든 이들의 내면에서 그들의 정체성(및 규범)을 흔들리게 만든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했다. 따라서 버틀러에게 우울증을 앓는 젠더 주체의 몸은 이성애 중심주의가 배제했던 동성애를 불완전하게 합체한 사람들이며, 따라서 ‘젠더’는 이성애 규범을 신체로 통합하지만 항상 그 규범이 실패하고 거부됨으로써 형성된 내 안의 타자(즉 ‘구성적 외부’)인 것이다.

“젠더 정체성은 자신을 몸에 암호화하고 사실상 살아있는 몸과 죽은 몸을 결정하는, 상실의 거부를 통해 설정될 것이다. 반은유적 활동으로서의 합체는 몸 위에 혹은 몸 안에 상실을 문자그대로 새겨넣어서 몸의 사실성으로, 즉 몸이 문자적 진리로서 ‘성’을 갖게 되는 수단으로 나타난다. 주어진 ‘성감’대에서의 쾌락과 욕망을 금지하거나 그 위치를 설정하는 행위야말로 몸의 표면을 가득 채운 일종의 젠더 특정적 우울증이다.”

 

  • 수행적, 전복적 패러디와 페미니즘의 영원성

 

수많은 페미니스트 이론과 문헌에서는 행위 뒤에 행위자(‘여성 주체’)가 있다고 가정하곤 한다. 행위주체 없이는 어떤 행위도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사회의 지배관계를 변화시킬 저항의 추동력도 주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니크 위티그 역시 행위작용의 장소로 주체와 개인을 상정하는 입장 안에 있다. 그럼에도 그녀의 이론이 이전보다 진일보한 것은 그녀가 젠더의 수행적 구성은 문화의 물질적 실천 속에서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이다. 위티그가 보기에 성의 이분법적 규제는 강제적 이성애 제도의 재생산이라는 목적을 수행하는데, 그 속에서는 오로지 여성 젠더만이 언어적으로 존재한다. 예를 들어 강제적 이성애 안에서 남성이 보편적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는 그만큼 젠더에는 오로지 여성만이 남게 되는데, 예컨대 각종 직업들의 표시에서 ‘여의사’, ‘여교수’, ‘여기자’가 말해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겠다. 위티그는 이러한 표식이 제도에 효과적으로 저항하는 실천들에 의해 삭제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생각의 전제에는 ‘섹스’가 언어적 허구이며, 이 허구를 유지하기 위해 이성애제도는 강제적 규범으로 작동한다는 점이 담겨 있다. 따라서 위티그에게 섹스와 젠더는 차이가 없으며 섹스 범주는 그 자체 권력관계 속에서 젠더화된 범주로 이해된다. 위티그의 이러한 발상은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형태의 주체성을 확립할 동등한 기회가 언어 안에서 주어질 수 있으며, 그래서 여성들로 하여금 발화를 통해 자신에게 부과된 물화된 ‘성’을 벗어날 가능성을 열어두게 한다. 그 결과 위티그는 ‘문학작품도 전쟁기계처럼’ 작동할 수 있으며, 이 전쟁의 주된 전략은 여성, 레즈비언, 게이들이 ‘말하는 주체의 위치’를 선점하는 데 있다고 본다. 버틀러는 이러한 위티그의 관점은 오직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관점을 취해야만 또 전세계를 레즈비언화해야만 강제적 이성애 질서가 파괴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귀결된다고 보는데, 문제는 이러한 ‘도전적 제국주의 전략’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성애에 참여하고 있으며, 또한 그 안에서 억압을 반복하고 강화한다는 것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성애가 완전한 위치변경을 필요로 하는 체계라는 바로 그 이유로 인해 이성애주의를 재의미화할 가능성 자체는 거부되며, 따라서 위티그의 이론에서는 이성애에 대한 근본적 순응인가 총체적 거부인가라는 양자택일만 남게 된다. 또한 버틀러는 이러한 위티그의 저항전략에는 강제적 이성애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동성애’가 상정될 수밖에 없으며, 그만큼 이성애와 퀴어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도 보장되지 않는 근본적 단절만이 남게 된다고 점을 지적한다. 버틀러는 이러한 위티그의 생각에 맞서 “이성애 자체는 강제적인 법이기도 하지만 또한 필연적인 코미디이기도 하다. … 나는 이성애가 강제적인 체계이자 내재적 희극, 즉 그 자체에 대한 지속적 패러디로 보는 동시에 어떤 대안적인 게이/레즈비언 관점으로 보려는 통찰을 이성애 쪽에 제시하고 싶다”(315)고 말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버틀러만의 고유한 저항전략 개념(즉 ‘전복적 패러디’)이 도출된다고 말할 수 있겠다.

“권력은 거부될 수도, 철회될 수도 없다. 다만 재배치될 뿐이다. 사실 나의 견해는, 게이와 레즈비언의 실천에 대한 규범적 핵심은 권력의 완전한 초월이라는 불가능한 환영보다는, 권력의 전복적이고 패러디적인 재배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따라서] 효과적인 전략은 정체성의 범주 자체를 전유하고 재배치하는 가운데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단지 ‘성’에 대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체성’의 자리에 다양한 성적 담론이 집중된다는 것을 표명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어떤 형식이 되건 간에, 성의 범주를 영원히 문제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다.”(318-319, 326)

이런 점에서 버틀러의 ‘패러디’ 개념은 강제적 이성애 체제 안에서 그것이 부과하는 규범에 대한 재이용․재의미화를 염두하는 것이며, 그만큼 그러한 저항전략은 담론 이전의 형이상학적 실체를 상정하지도, 나아가 저항 이후의 유토피아적 낭만화로도 귀결되지 않는 진정한 ‘내재주의’의 성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재주의’는 권력작용이 있는 곳에서는 그 어떤 장소나 시간, 어떠한 위치에서도 저항과 전복이 가능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영구혁명’ 모델로 귀결되며, 그래서 페미니즘 정치의 새로운 대안을 확립하게 해준다. 이러한 대안적인 페미니즘 정치에 대해 버틀러는 마지막으로 젠더 트러블의 결론에서 다음과 같이 최종 정리한다.

“페미니즘의 ‘우리’는 언제나 그리고 오로지 환영적 구성물에 불과하다. 이 환영적 구성물은 자신의 목적이 있지만, 그 용어의 내적 복잡성과 불확정성을 부정하고, 또 그것이 동시에 재현하고자 하는 구성물의 일부를 배제해야만 자신을 구성한다. 그러나 이처럼 빈약하고 환영적인 ‘우리’라는 위상이 절망의 원인은 아니며, 최소한 절망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이 범주의 근본적인 불안전성은 페미니즘의 정치적 이론화에 대한 근본적 제약을 문제시하며, 젠더와 몸뿐 아니라 정치학 자체를 다르게 배치할 길을 연다.”

 

  • 2회에 걸쳐 연재된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은 여기까지 입니다.
  • 다음부터는 마리아 미즈와 반다나 시바의 <에코 페미니즘>이 연재됩니다. 🙂 많은 기대 바랍니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㉒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4-13(352d~354a) :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잘 살고 행복한가?’에 대한 검토

 

[352d]

* 이제 검토하기로 했던 마지막 문제가 남아있다.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훌륭하게 살고 행복한가?ἄμεινον ζῶσιν οἱ δίκαιοι τῶν ἀδίκων καὶ εὐδαιμονέστεροί εἰσιν;’ 이 논의는 예사로운 것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어떤 생활방식으로 살아가야만 하는가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οὐ γὰρ περὶ τοῦ ἐπιτυχόντος ὁ λόγος, ἀλλὰ περὶ τοῦ ὅντινα τρόπον χρὴ ζῆν.

* ‘나중에 검토해보도록 제의했던 문제이오만 이제 이를 검토 해보야만 되겠소.’ὅπερ τὸ ὕστερον προυθέμεθα σκέψασθαι, σκεπτέον. 역문에서 ‘나중에 검토해보도록 제의했던’ 부분이 앞에서 어디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혹시 347e에서 언급된 ‘나중에 다시 또 검토하기로 했던 문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정치적 차원에서 정의가 강자의 이익인가라는 문제라는 점에서 내용 상 맞지를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 언급에 바로 이어서 제기된 문제 즉 그 ‘정의는 강자의 이익인가’라는 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었던 문제 즉 ‘부정의는 정의보다 나은 것인가?’라는 삶의 방식과 관련한 문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지금 검토해야할 문제가 곧 ‘삶의 방식’에 관한 문제라고 직접 언급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원문 ὕστερον을 ‘나중’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그 다음에 이어서’의 뜻으로 옮기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즉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논쟁 ‘다음으로 그것에 이어서 우리가 검토하기로 제기했었던’ 문제 즉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지,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지’를 이제 검토보아야 되겠다는 것을 말한다. 이 문제는 344e에서도 논의의 핵심과제로서 강조되었고 347e에서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논제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과제로 거론되었고 또 여기에서도 소크라테스에 의해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물론 이 문제는 앞에서 덕과 지혜 차원에서 힘과 능력 차원에서 검토된 바 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제껏 우리가 말한 것을 근거로’도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대로 분명하다’φαίνονται μὲν οὖν καὶ νῦν, ὥς γέ μοι δοκεῖ고 말을 한다. 그러나 이것에 관한 논의는 앞에서도 수차 강조되었듯 ‘예사로운 문제가 아니므로’ ‘한층 더 잘 검토해 보아야할’ἔτι βέλτιον σκεπτέον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앞서 정의가 덕과 지혜 그리고 힘에 있어서 낫다는 것을 토대로 ‘왜 정의로운 삶이 부정의한 삶보다 훌륭하고 이득이 되며 행복한가’를 두 번째 논쟁의 세 번째 논제이자 마무리 논제로 검토하려는 것이다.

* 이 문제에 대한 검토를 위해 우선 소크라테스는 말(馬)ἵππος의 기능을 예로 들어 기능ἔργον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352e]

* 우선 소크라테스는 기능이란 즉 ‘어떤 것이 그것으로써만 할 수 있는 또 가장 잘 할 수 있는 그런 것’ὃ ἂν ἢ μόνῳ ἐκείνῳ ποιῇ τις ἢ ἄριστα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눈의 기능은 보는 것, 귀의 기능은 듣는 것이다.

 

[353a]

* 단검이나 칼 등 베는 여러 가지로도 물론 포도나무 가지를 자를 수 있지만 전정용 낫δρέπανον 만큼 훌륭하게 자르지 못하는 한, 전정용 낫의 기능이 곧 포도나무 가지를 자르는 것이다. 이렇듯 ‘그것만이 뭔가를 해낼 수 있거나 또는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그것이 가장 훌륭하게 해낼 수 있는 그런 것이 각각의 기능이다.’τοῦτο ἑκάστου εἴη ἔργον ὃ ἂν ἢ μόνον τι ἢ κάλλιστα τῶν ἄλλων ἀπεργάζηται

 

[353b]

* 기능이 부여되어 있는 각각의 것에는 훌륭함(덕)ἀρετὴ도 있다. 눈, 귀 등 각각이 다 제 고유의 훌륭한 상태(훌륭함, 덕)를 가지고 있다.

 

[353c]

* 각각은 그 ‘특유의 훌륭한 상태’(οἰκεία ἀρετή)에 의해 그 기능을 훌륭하게καλῶς 수행하지만, 나쁜 상태(나쁨κακία)에 의해서는 그 기능을 나쁘게κακῶς. 수행한다.

* 요컨대 어떤 것의 기능ἔργον은 ‘어떤 것이 그것으로써만 할 수 있는 또 가장 잘 할 수 있는 그런 것’이고 훌륭함(덕)ἀρετὴ은 그 기능이 탁월하게 구현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훌륭함(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 자신의 고유한 기능을 ‘스스로 탁월하게 구현할 줄 알고’ 그래서 ‘그 특유의 탁월한 상태τῇ οἰκείᾳ ἀρετῇ로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 상태는 그 기능의 대상에 대해 탁월하게 작용한다는 측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눈의 덕’은 언제나 가장 잘 볼 수 있는 시력을 스스로 유지하게 하는 힘이자 그에 따라 대상을 가장 탁월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비되는 악덕 (나쁨κακία)은 그와 같은 덕을 앗기거나στερόμενα 결여하고 있는 나쁜 상태이자 기능의 저하에 따라 나쁜 작용을 하여 대상과 관련하여 나쁜 결과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이를테면 ‘눈의 악덕’은 시력을 결여한 상태로서 나쁜 시력 때문에 대상을 잘못 보거나 틀리게 보는 것 즉 사물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능력의 결핍 내재 부재를 말한다. 참주는 덕을 가장 결핍한 가장 나쁜(악덕을 가진) 자로 그에 따른 부작용 즉 부정의를 최대로 야기하는 자이다.

[353d]

*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같은 이치가 적용된다면 영혼ἢ ψυχῇ에도 기능이 있다. 즉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통솔하는 것), 심사숙고 하는 것τὸ ἐπιμελεῖσθαι καὶ ἄρχειν καὶ βουλεύεσθαι 그리고 사는 것τὸ ζῆν 등이 혼의 특유한 기능이다.

 

[353e]

* 그렇다면 위와 마찬가지로 나쁜 상태의 혼으로서는 잘못 다스리고 보살피겠지만 훌륭한 상태의 혼으로서는 이 모든 일을 ‘잘 해내게’εὖ πράττειν 될 게 필연적이다.

* ‘그런데 앞서 정의는 혼의 훌륭한 상태(ἀρετή훌륭함, 덕)이지만 부정의는 나쁜 상태(나쁨, 악덕κακία)라는 점이 동의되었다.

* 그렇다면 결국 정의는 혼의 기능을 훌륭한 상태가 되게 함으로써 정의로운 혼과 정의로운 사람은 잘 살게εὖ βιώσεται 되겠지만, 부정의한 사람은 잘못κακῶς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잘 사는 사람ὅ εὖ ζῶν이 복 받고 행복하며μακάριός τε καὶ εὐδαίμων’ 잘못 사는 사람은 그 반대이다.

 

[354a]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사람이 행복하고 부정의한 자는 불행하다ὁ μὲν δίκαιος ἄρα εὐδαίμων, ὁ δ᾽ ἄδικος ἄθλιος고 말하고 트라쉬마코스는 마지못해 그것에 동의한다.

* 결국 이 모든 논의를 토대로 소크라테스는 행복εὐδαιμονία이 이득이고 불행ἄθλιόν은 이득λυσιτελής이 아니므로 결국 ‘부정의는 정의보다 결코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 이로써 검토와 논박이 모두 마무리된다. 트라쉬마코스는 자기가 말한 대로 검토과정에 순순히 수긍하고 결국 자기주장의 반대로 귀결되자 ‘벤디스 여신 축제일Βενδίδεια을 당신의 축하 잔치로εἱστιάσθω 삼으라’고 비아냥대며 말을 마친다.

 

————-

 

*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이상의 마지막 검토 부분에서도 의미 있게 음미할 부분이 적지 않다.

1) 353e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혼의 덕이고 부정의는 혼의 악덕’임이 앞에서 동의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앞 어디에도 그런 부분은 없다. 다만 350d에서 ‘정의는 훌륭함(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이고, 부정의는 악덕κακία과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라는 점은 마지못해서 이기는 하지만 서로 동의한 것으로 언급된다. 그러나 ‘정의는 덕이다’라는 말과 ‘정의는 혼의 덕이다’라는 말은 다른 말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능가와 관련한 두 번째 검토에서 동의된 결론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정의는 혼의 덕이다’라는 말도 당연히 동의된 것으로 여겼을 수 있다. 왜냐하면 앞서 능가 관련 검토에서 ‘정의가 덕이다’라는 결론은 아래의 의미를 이미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i) 정의는 능가가 필요 없는 그 자체로 훌륭한 상태, 적도의 상태인 동시에 그것을 관철시키는 기능이다. ii) 정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 즉 정의로운 사람은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상태와 기능들을 최선의 상태로 구현하게 만든다. iii) 그러므로 정의로운 사람은 자신 내부의 혼의 상태와 기능도 당연히 최상의 훌륭한 상태로 만든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능가와 관련한 두 번째 검토의 결과로 주어진 결론으로서 그 검토 과정 그 자체가 모종의 한도와 경계의 존재를 전제하고 성립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 논증 자체가 완전한 것인지 아닌지는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2) * 설사 정의가 혼의 덕이라고 합의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앞에서 각 기능들은 눈과 귀, 포도나무 전정용 낫이 그렇듯이 그것들의 훌륭한 상태로서 덕을 가지고 있다. 즉 기능과 덕은 일대일로 대응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되었듯이 혼은 여러 가지 기능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정의는 그러한 혼들 가운데 어떤 기능에 대응하는 것인가? 덕이 기능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라면 정의가 혼의 덕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고 그렇다고 정의만이 유일하게 여러 가지 덕을 갖는 것이라고 말을 해도 뭔가 앞뒤가 맞지 않거나 지금까지의 논변만으로는 일단 증명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언급 상의 내적 불일치 내지 논거의 부족함이 가져다주는 의문은 이곳에서 명시적으로 해명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정의는 혼의 덕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과연 아무런 근거 없이 그냥 이곳에서 불쑥 내던져진 말일까? 우리는 이와 관련한 의문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비록 명시적으로 답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앞에서 언급된 내용들을 잘 헤아려 보면 ‘정의가 혼의 덕이다’라는 말이 어떤 맥락과 근거에서 나오게 된 것인지를 일정 부분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 우선 소크라테스는 정의의 힘을 거론하면서 그 힘을 어떤 집단이 공동으로 일을 도모하고자 할 때 그들에게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주는 힘으로 언급하고 있고 흥미롭게도 개인도 그 여럿으로 구성된 집단의 연장선상에서 설명하고 있다.(351e-352a) 이것은 앞서도 설명하였듯이 소크라테스 자신 개인의 영혼 자체가 여럿으로 구성되었음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소크라테스의 생각은 앞으로 영혼 3분설의 형태로 제시된다. 즉 혼은 개인에게 하나의 혼이되 그것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하부의 혼들이 또 있는 것이고 정의는 그 여러 가지 혼들에게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주어 그것의 총화로서 개인의 혼이 일을 잘 도모할 수 있게 해주는 덕인 것이다. 즉 정의는 덕이자 지혜이면서 공동의 일을 도모하는 여럿에게 합심과 우애를 갖게 하는 능력으로서 개인 내부의 여러 혼들에게 합심과 우애를 갖게 하여 그것들로 구성된 혼이 훌륭한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상태 즉 혼의 덕을 가질 수 있게끔 하는 덕인 것이다. 요컨대 정의는 개인의 여러 혼들이 각기 가지고 있는 덕들을 합심과 우애로써 조화를 이루게 하여 그것들로 구성된 혼으로 하여금 온전한 덕을 가지게 하는 덕인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정의는 나라나 집단 차원에서는 구성인 또는 계층들의 기능과 덕을, 그리고 개인차원에서는 개인 내부의 혼의 기능과 덕들을, 합심과 우애로써 한 나라, 한 마음으로ὁμονοοῦντα αὐτὸν ἑαυτῷ(352a) 조화 통합시키는 덕인 것이다. 굳이 영혼 3분설을 내세우지 않고 두 번째 논쟁과 관련하여 소크라테스가 수행한 앞부분 검토 내용만 가지고도 위와 같은 내용은 충분히 추론 가능하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내용들에 비추어 볼 때 비록 그곳에서 혼이라는 표현은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있지 않았지만, 소크라테스가 ‘정의가 혼의 덕’이라고 말하는 내용이 결코 비약이라거나 아무런 근거 없이 내던져진 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3) 위의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소크라테스가 혼의 특유한 기능들로 언급하고 있는 것들 즉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통솔하는 것), 심사숙고 하는 것τὸ ἐπιμελεῖσθαι καὶ ἄρχειν καὶ βουλεύεσθαι 그리고 사는 것τὸ ζῆν’ 등(353d)과 관련해서도 의미 있게 음미해볼 만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 이 부분 역시 영혼의 여러 부분들과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기능들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한다면, 이곳에서 언급된 혼의 기능들 또한 앞으로 <국가> 전체를 통해 거론될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을 구성하는 계층들과 혼들의 역할 내지 기능들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자 나아가 그것들과 일정부분 대응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ἄρχειν은 군사적으로 군대를 지휘, 통솔하는 것command, 행정적인 관리govern의 뜻도 있다)은 철학자 왕을 보조하고 시민들을 보살피는 수호자 계층의 기능을 함축하고 있고, ‘심사숙고’βουλεύεσθαι는 수호자들 가운데에서 선발된 철학자왕의 역할을 함축하며, ‘사는 것’τὸ ζῆν(to zēn)의 연관 동사 ζάω(zaō)가 기본적으로 생명 활동 및 생활을 유지 보존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생산자 계층의 기능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또 그것은 개인 영혼에서 이성과 기개와 욕구의 기능과도 일정 부분 대응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혼ψυχῇ은 이미 호메로스 시절 이래 ‘목숨’의 뜻도 가지고 있다.

4) * 이러한 논의들을 토대로 소크라테스는 결국 두 번째 논쟁의 마지막 논제 즉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보다 행복하다는 주장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논증한다. i) 혼에는 여러 기능들이 있다’(353d) ii) 혼의 덕은 그 기능을 잘 해낼 게εὖ πράττειν 필연적이다(353e) iii) 그러므로 혼의 덕은 앞서 언급한 모든 일들 즉 보살피거나 다스리는 것, 심사숙고하는 것, 사는 것들 그 모든 일들을 훌륭하게 해내게 될 게 필연적이다.(353e) iv)앞서(353b) ‘정의는 혼의 덕’(350d)임이 동의되었다.(353e) v) 그러므로 정의로운 혼과 정의로운 사람은 잘 살게εὖ βιώσεται 되며 그처럼 잘 사는 사람ὅ εὖ ζῶν은 복 받고 행복하게 된다.(354a) vi)그리고 부정의한 사람은 위와 동일한 방식의 논증을 통해 불행하다는 것이 밝혀진다.(354a)

* 우선 이 논증은 트라쉬마코스의 동의를 얻은 것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추론 상의 어색함이나 비약이 있다고 판단되지 않는다. 내용적으로도 자신을 잘 보살피고 다스리며 잘 심사숙고하고 잘 사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보다 훌륭하고 행복하게 산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v)에서 마지막 결론을 내리면서 ‘훌륭하게 잘 사는 것’에서 곧바로 ‘복 받고 행복한 삶’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 있다. 물론 그 말만 떼어서 보면 ‘훌륭하게 잘 사는 것’이 곧 ‘복 받고 행복한 삶’이라 것에 크게 어색함은 없다. 그러나 의문이 드는 이유는 앞에서 ‘사는 것’τὸ ζῆν이 혼의 기능들 전체가 아니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로 언급되고 있는데다가 그것의 의미가 일종의 ‘생명 활동이자 생활’이라고 한다면 그 기능을 ‘훌륭하게 잘 한다’는 것에서 ‘복되고 행복한 삶’이 곧바로 추론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말은 ‘생물학적으로 신체적으로 건강하게 잘 사는 것’에서 곧바로 사람의 ‘복되고 행복한 삶’을 추론하는 오류를 범한 것으로 비쳐질 수 있다. 사실 ‘사는 것’이 혼의 기능의 전체가 아니라 하나라는 이유에서도 그렇지만 우리말에서 ‘잘 사는 것’이라는 말의 의미가 갖는 애매함 때문에도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v)에서 언급되고 있는 ‘정의로운 혼과 정의로운 사람이 잘 산다’는 말의 의미는 내용적으로 혼의 기능들 가운데 하나로서 ‘사는 것’만을 ‘잘 한다’의 의미가 아니라, 혼의 기능들 모두를 잘 해냄으로써 심신 모두에 걸쳐 ‘훌륭한 삶, 훌륭한 생애를 보낸다’εὖ βιώσεται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리스어 원문 상으로도 앞서 ‘사는 것τὸ ζῆν’(353d)이 다소 넓은 의미에서의 ‘산다’live를 나타내는 ζάω(zaō, live, be alive) 동사 연관어로 쓰인 것에 비해 이곳에서는 ‘생애를 보내다’pass one’s life의 의미가 좀 더 두드러지는 βιόω(bioō)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곧 이어서 ‘잘 사는 사람’ὅ εὖ ζῶν(ho eu zōn)을 나타낼 때는 ζάω(zaō) 동사 연관어를 다시 쓰고 있어 일관성은 결여하고 있지만 ζάω(zaō) 동사의 의미가 포괄적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이미 ‘잘 사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혼의 기능들 모두를 잘 해내는 것이라는 것이 iii)과 iv)에서 충분히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내용적으로 크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는 없어 보인다. 요컨대 ‘잘 사는 것’의 의미를 혼의 기능의 하나인 ‘사는 것’을 잘 하는 것만으로 국한해서 이해할 필요는 없다.

* 아무려나 여기서 소개되고 있는 덕ἀρετή과 기능ἔργον에 기초한 논증방식들은 앞으로 소크라테스가 전개하는 논증들의 핵심적인 특징들을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논증들을 통해 정의는 나라건 개인이건 그것이 가지고 있는 상호 의존적인 다양한 기능들을 최선의 상태로 조직해내는 합목적인 조직 원리이자 힘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4-14(354b-354c) : 마무리와 탄식

 

[354b]

* 이상으로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와의 논쟁은 모두 마무리된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모두 논파된 것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이러한 문답의 귀결을 벤디스 여신의 축제일에 선생을 위한 축하 잔치로 삼으라고 마지막까지 빈정거린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자기에게 상냥하게πρᾶος 대해 준데다 사납게 대하길 그만둔 덕분이라고 점잖게 응수한다.

*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이제까지의 대화가 실은 흡족하지 못했고οὐ μέντοι καλῶς 그 탓이 자기에게 있다δι᾽ ἐμαυτὸν고 말한다. 마치 식탐하는 사람들이 앞에 나온 음식을 적절히 즐기기도 전에, 뒤에 나오는 음식을 낚아채듯 받아먹었다고 자신의 태도를 후회한다. 즉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도 전에 그것이 나쁨(악덕κακία)이며 무지ἀμαθία인가 아니면 지혜σοφία이며 훌륭함(덕ἀρετή)인가를 검토하기 시작했고 또 ’부정의가 정의보다 이익이다‘라는 주장이 제기되자 참지 못하고 또 그 문제에 대한 검토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354c]

*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결국 지금의 나로서는 그동안의 대화를 통해 아무것도 알게 된 것이 없는 꼴이 되었다’ὥστε μοι νυνὶ γέγονεν ἐκ τοῦ διαλόγου μηδὲν εἰδέναι고 탄식하고 정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서는 그것이 일종의 덕인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을 지닌 이가 불행한지 아니면 행복한지’ὁ ἔχων αὐτὸ οὐκ εὐδαίμων ἐστὶν ἢ εὐδαίμων도 알 가망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로써 <국가> 1권이 끝난다.

 

——————–

 

* 국가 제1권의 마무리를 장식하는 이 부분에도 짧지만 의미심장한 시사가 포함되어 있다.

1)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대부분의 전기 대화편 대부분은 ‘그것은 무엇인가ti esti’를 문제 삼으면서도 답은 제시되지 않은 채 그것의 일부 속성이나 사례들로 답하고 있는 것들이 갖는 한계 내지 그것의 무지함을 드러내는 수준에서 마무리되고 있다. 이를테면 <에우튀프론>은 경건이 무엇인가에 대해 답을 얻을 때까지 문답을 이어가기를 간청하는 소크라테스를 뿌리치고 에우튀프론이 급히 갈 데가 있다고 자리를 뜨는 형식으로 그냥 아포리아 상태로 끝나고 있고, <라케스>도 용기가 무엇인가에 관한 문답이 난관에 봉착하자 뤼시마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답을 간청하지만 자신도 똑같이 난관에 빠졌으니 최고로 훌륭한 선생을 만나 답을 구해야한다고 조언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그리고 <프로타고라스>도 고르기아스와 소크라테스 모두 논의가 뒤죽박죽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고 있으며, <뤼시스> 역시 아동 뤼시스와 메넥세노스와의 문답이 난관에 봉착하자 거기에서 좀 더 나이든 사람을 끌어들여 문답을 이어가려 하나 아동의 보호자와 형제들이 그들을 데려가려고 하는 바람에 아포리아 상태에서 문답이 마무리되고 있다. 게다가 중기 대화편으로 알려진 <메논>에서는 문답이 아포리아 상태에 있음에도 <에우튀프론>과 달리 아예 소크라테스가 급한 일이 있다고 먼저 자리를 뜨는 형식으로 논의가 끝나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국가> 제1권 또한 ‘정의가 무엇인가’를 알아내기 전에 부차적인 논의로 옮겨간 것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그 자신을 탓하는 형식으로 논의가 마무리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일부 플라톤 학자들은 <국가> 제1권을 아예 전기 대화편의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트라쉬마코스>라는 독립된 작품으로 간주하고 있고, 또 어떤 학자들은 전기에 저술된 대화편이되 다만 플라톤이 <국가>를 구상하면서 내용 구성의 필요에 따라 그 내용을 약간 고쳐 <국가>의 서론으로 갖다 붙인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국가> 제1권은 전기 대화편들과 같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적극적인 규정을 내놓지 않은 채 끝나고 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전기 대화편과 다른 특징들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국가> 전체적인 계획과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으면 해명하기 어려운 점들이 상당 수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점에서 <국가> 제1권은 전기에 저술된 독립된 대화편이 아니라 플라톤의 주도면밀한 구상 아래 <국가>의 서론으로서 가장 적합한 내용과 형식으로 쓰여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할 것이다.

2) 그러면 <국가> 제1권이 전기 대화편과 다른 특징들은 무엇이며 그것은 플라톤의 <국가> 전체 내용 또는 플라톤의 <국가> 전체 구상과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전기 대화편들은 대부분의 경우, 문답이 난관에 봉착한 이후 상대방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 갖는 의미 즉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는 의미 있게 부각되는 반면 소크라테스 스스로 자신이 적극적으로 답을 내놓을 태세는 내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아내기도 전에 그건 내버려 둔 채로 부차적인 문제에 대한 검토에 착수한 것에 불만족을 표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불만족을 표명하는 것 자체는 전기 대화편에서의 그의 모습과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문제는 불만족을 표명하되 그 앎을 위한 검토를 내버려 둔 탓을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라케스>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자신도 똑같이 난관에 빠졌다고 자기를 탓하고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자신 또한 답을 내놓을 수 없다는 ‘무지의 지’를 고백하는 수준이다. 사실 플라톤은 전기 대화편에서 문답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 그렇게 된 탓을 자신에게 돌리며 후회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 보다는 오히려 무지의 지를 고백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그려내며 그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무지의 지를 고백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곳에는 답을 알아내기 전에 부차적인 것에 대한 검토로 휩쓸려 들어간 소크라테스 자신의 뼈아픈 자책과 후회 나아가 탄식이 담겨 있다. 정의에 대한 앎이 트라쉬마코스로부터 주어질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곳에서의 그의 탄식은 문답을 통해 그 자신 정의를 드러내거나 납득시킬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닐 수 없다. 소크라테스가 음식을 즐기는 순서에 비유하여 다루어야할 문제를 내버려둔 채 자제를 못하고οὐκ ἀπεσχόμην 부차적인 문제에 휩쓸려 들어갔다고 후회하는 것 역시 그 자체로 트라쉬마코스의 공격적이고도 파괴적인 주장이 갖는 문제의 심각성과 더불어 그 대안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플라톤 자신의 근심과 위기의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야말로 이제 상대방 주장에 대한 논파나 무지의 지의 고백이 능사가 아니라 상대방의 주장을 압도하고 남을 만한 적극적인 정의에 대한 앎의 생산 내지 구축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나로서는 그동안의 대화를 통해 아무것도 알게 된 것이 없는 것이 되었소”(354b)라는 소크라테스의 고백은 제1권의 논의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수행해왔던 전기 대화편의 논의 방식 전체에 대한 통렬하고도 전면적인 자기비판과 더불어 이제 부정의에 대한 논파를 넘어 정의에 대한 적극적인 대안 구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의지와 열망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3)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의지를 보여주는 장면은 제1권 곳곳에 드러나 있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소크라테스의 문답이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논파만이 목적이었다면 문답은 첫 번째 논쟁 즉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강력한 반박만으로도 충분히 달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정의와 이익과 관련한 권력지상주의의 입장은 물론 부정의 찬양론 일반에 대한 반박이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득과 행복을 논제로 두 번째 문답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논쟁에서 트라쉬마코스는 더 이상 논쟁의 상대가 아니다. 오히려 트라쉬마코스의 고분고분한 모습은 이제 문답의 목적이 논파가 아닌 다른 것에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두 번째 문답에서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논파를 목적으로 하기 보다는 자신이 앞으로 대안으로 내놓을 정의론의 핵심 키워드를 짧게나마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제2권 이후의 논의를 예고하는 소크라테스의 이러한 태도 전환은 첫 번째 논쟁과정에서 트라쉬마코스의 적나라한 속내를 확인한 이후부터(347e) 감지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충분히 논파되었음에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트라쉬마코스를 보며 이제 더 이상 그와 정의에 관해 논파를 목적으로 문답을 나누는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통감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를 배제한 채 글라우콘과 그러한 부류들을 납득시키기 위한 보다 강화된 검토 방식을 상의한 후 그 방침에 따라 트라쉬마코스를 다시 불러 자신의 주도하에 자신이 내건 논제를 화두로 문답을 이끌어 가고 있다. 그리고 논제 또한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반박의 형식을 띠고는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덕과 지혜, 정의의 성질로서 합심과 우애, 어중간한 상태의 정의, 혼의 덕에 대한 주장 등을 적극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정의에 관해 앞으로 자기가 내세울 내용을 예고하고 준비하는 단계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플라톤은 자신 그러한 구도에 맞추어 두 번째 논쟁에 들어와서 부터는 트라쉬마코스를 더 이상 소크라테스의 문답에 대해 적극적인 반박하거나 대응하는 문답의 상대가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벌이는 판에서 단순히 수긍과 부정만을 표명하는 소극적인 참여자로 묘사하고 있다. 글라우콘을 끌어들여 검토 방식을 다시 논의하고 앞으로 함께 논의의 판관이자 변론인들이 되자고 언급할 때부터(348b) 이미 정의에 관한 적극적인 앎의 구축이 선언되고 있으며 두 번째 논쟁은 그것을 위한 준비와 포석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국가> 제1권을 통해 플라톤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는 제1권이 이름 그대로 제1권이라는 사실 자체로부터 주어진다. 제1권은 모든 전기 대화편들처럼 난관에 직면한 상태에서 마무리되기는 하지만 전기 대화편들 모두는 그냥 그것으로 종결되고 마는데 반해, <국가> 제1권은 이미 제1권이라는 이름 그것으로 종결이 아닌 그것의 극복과 적극적인 정의를 건설하기 위한 시작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국가> 제1권은 논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이다.

* 플라톤은 전기 대화편을 통해 ti esti(What is it?)라는 탐문방식이 갖는 가치와 의미를 충분하게 보여주면서 그 자신도 스스로에게 그러한 물음을 던지며 나름의 답을 구축해 왔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중기 대화편 이후 플라톤은 ti esti라는 탐문방식을 상대방의 무지의 지를 깨닫게 하는 방편 수준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 이제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는 보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하물며 정의와 행복의 문제는 그 자신 평생의 철학의 과제로 매달려 왔던 문제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정의와 행복의 문제라는 필생의 과제와 관련해서 더 이상 상대방 주장의 한계만을 폭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분명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국가>를 설계하고 집필하였음에 틀림없다. 그의 제1권 마지막 말대로 그에 대한 분명한 답이 나오지 않는 한, 정의로운 사람이 과연 행복한지 아니면 불행한지 알 도리도 없고 그에 따라 그것을 구현할 가망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플라톤의 <국가> 제1권은 기본적으로 정의에 대한 앎을 적극적으로 펼쳐 보이려는 그의 계획과 그것을 위한 준비 작업을 담아내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플라톤은 제1권을 통해 앞으로 맞닥트리게 될 심각한 현실 국면 즉 그가 대적하려는 부정의한 세력들이 얼마나 강력하고도 뿌리 깊은 현실적 완고성을 가지고 있는지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사실 트라쉬마코스가 제1권 내내 보여주고 있는 부정의하고도 탐욕적인 입장은 논파는 차치하고 웬만한 대안으로는 결코 파괴되거니 대체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현실을 압도하고 있다. 그야말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직면하고 있는 중차대한 심각성은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들의 뿌리 깊은 탐욕은 비록 논파는 될지언정 결코 파괴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플라톤이 당대 소피스트를 대표하는 최고의 수사학자인 트라쉬마코스와 당대 기득권자를 대표하는 시인들과 신흥 부유층인 케팔로스를 소환하여 그들의 탐욕과 무지를 차분하고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는 것도 <국가> 제1권이 담고 있는 또 하나의 중차대한 함축이 아닐 수 없다. ‘정의는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와 탄식의 배경에는 그의 이와 같은 문제의식이 깔려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제 ‘정의는 무엇인가?’라는 탐문은 단순히 논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트라쉬마코스와 같은 불의한 기득권 세력들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그들이 지배하는 구체적인 현실을 변혁해내는 힘이자 대안으로 제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쇠망기에 접어든 아테네의 현실 한 가운데에서 <국가>를 구상하고 써내려간 플라톤의 기본 의도이자 목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1권은 그러한 전체적인 구도 아래에서 왜 그것이 기본목적이 되어야 하는가를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넘어서야할 과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중차대한 의미를 갖는 토대이자 서론이라 할 것이다. 요컨대 제1권 마지막에서 다시 환기되고 있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이제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혼의 구축’이야 말로 더 이상 미룰 수도 없고 미루어서도 안 되는 절대 절명의 과제임을 알리는 플라톤 자신의 선언이자 다짐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제2권 이하에 대해 제1권이 갖는 함의이다. 이렇게 제2권 이하를 기약하며 제1권은 여기서 끝난다.

 

– 플라톤의 <국가> 제1권 강해 끝 –


* 2018년 8월 1일부터 2019년 1월 23일까지 총22회에 걸쳐 정암학당에서 진행된 <국가> 제1권 강해가 마무리됨에 따라 잠시 방학을 한 후, 2019년 3월 6일부터 제2권 강해를 다시 시작합니다. 이곳 웹진 강의론 역시 2019년 3월 중순부터 다시 재개됩니다.

인간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 백종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철학자의 서재]

인간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백종현,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칸트를 읽기 위해선 다른 건 필요 없고 엉덩이 근육과 인내가 필요하다. 둘 다 갖지 못한 나 같은 자는 그냥 포기하는 게 맞을 거다. 하지만 좋은 책이 나와서 그러지도 못하겠다. 백종현 선생님의 칸트 3대 비판서 특강이 책 한권으로 나온 것. 요즘은 공부를 하지 않기도 어려운 세상이다. 3대 비판서라 함은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말한다. 주옥같이 어려운 책들, 우리가 인생 살면서 고민도 안하고 포기하는 책들 되겠다.

 

그런데 이 책을 일단 읽게 되면 없던 욕망이 생긴다. 칸트를 읽어봐야겠다는 무모한 욕망 말이다. 2백페이지 조금 넘는 작은 책이라 정신 바짝 챙기면 누구나 읽을 수 있다. 저 세 비판서는 각각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순수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실천이성비판>,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판단력비판>를 다룬다.

 

칸트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해보자. 인간은 ‘이성적 동물’로 정의되는데 문제는 이성과 함께 ‘동물성’이 있다는 것이다. 동물은 어쩌면 그저 동물성만 있으니 문제될 게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이성’을 놓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인간 이성의 한계다.

 

인간 이성은 신에 대해 논할 수 있는가. 신은 인간을 넘어서는 존재인데 말이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신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있는 것은 공간과 시간 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p. 94). 칸트는 신과 영혼 같은 것은 인간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이라 보았다. 인간 이성, 인간의 주관이 알 수 있는 것만을 취급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한다. 칸트 이전에는 인간 이성 밖에 대상이 그 자체로 있다고 봤지만 이제 그런 것은 인간이 알 수 없고 우리 감각 지각에 들어오는 것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세계와 잠자리나 개구리가 보는 세상은 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보는 세계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단순히 인간중심적 사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거칠게 말해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이러한 인간 이성의 한계를 다룬다.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무엇을 다룰까. 인간 이성이 이렇게 한계가 있다면 이제 인간 이성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있는’ 것만을 보고 느끼고 알 수 있다면 세상은 참 심심하지 않겠는가. 아직 있지 않은 것을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실천’이다. 지금이야 장난감이 많지만 나 어릴적만 해도 장난감이 없으면 나뭇가지를 꺾어서 총도 만들고 지팡이도 만들며 놀았다. 하나의 ‘실천’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실천에는 ‘의지’(p. 140)가 들어간다. 그런데 칸트는 실천 중에는 인간이 마땅히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선’이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악’이다. 당연한 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당연한 걸 우리가 모두 실천한다면 세상에는 사기도 악도 범죄도 없을 것이다.

 

칸트는 이렇게 ‘선’을 실천할 인간의 능력을 ‘자유’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결국 ‘악’을 행하는 자는 ‘자유’가 없는 자라는 뜻이 된다. 어릴 때 엄마 주머니에서 잔돈 훔쳐본 자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들키면 혼날 텐데 하면서 하루 종일 자유롭지 못하고 안절부절 했음을. 기껏해야 떡볶이를 사먹기 위해서였을 텐데 나는 그 대가로 내 자유를 빼앗긴 셈이다. 칸트는 이런 자연적 요인, 감각적 요인(경향성Neigung : inclination)에 지배받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요즘 먹방 프로그램이 많은데 인간의 감각(미각)에만 너무 치중하는 것 같다. 생각해볼 문제다. 칸트가 보기에 인간은 먹방에만 종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런 경향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유로운 존재다. 당연히 이게 중요하다. 그러면 이 자유를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 무엇을 해야만 할까.

 

인간은 자기 경향성, 동물성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고 이때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 수 있게 된다. 이때의 의지가 ‘선의지’이다. 칸트에게 선의지는 어떤 행위를 오로지 의무이기 때문에 행하는 것이다(p. 161). 그래서 칸트의 도덕법칙은 명령형이다. 살인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와 같은 정언명령들이 그렇다. 이러한 도덕적 행위들의 원리를 ‘인간 존엄성의 원칙’이라 한다(p. 173).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만 대우해야 하며 존엄한 존재는 교환도 안 되고 바꿀 수도 없다(p. 175). 그런데 우리 현대 사회는 인간조차 노동력 상품으로, 자신을 팔아야 하는 존재로 자꾸만 전락시키고 있다. 문제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사회에서 인간에게 자유가 있을 수 없고 자발성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유를 희망한다. 이제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라는 문제를 다룬 것이 <판단력비판>이다. 칸트는 판단력이 이론이성(<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실천이성비판>)을 잇는 다리라고 생각했다(p. 234). 인간은 이성과 의지 둘 다를 지니고 있는 존재이지 이 둘을 칼로 자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칸트는 이 둘을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이 둘이 판단력에 의해 통일이 되는 것인데 그것은 ‘최고선’이라는 이념에 의해서다. 칸트에게는 자연성, 경향성의 자연 세계가 도덕의 세계처럼 움직여야 한다고 보았고 그 상태가 최고선의 상태라고 보았다. 기독교 성서 중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대목이 있다. 저자는 ‘지상에 세워진 천국’이 칸트가 희망했던 ‘최고선의 상태’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세계적으로는 난민 문제를 비롯해서, 용산참사도 그렇고 일터에서 안전의 문제로 죽어나가는 젊은 노동자들의 문제도 그렇고 우리가 사는 지상에는 희망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지상에 천국은 어떻게 세울 수 있을까. 특별히 악하게 살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는 희망을 주고 있는가, 아니면 절망만을 주고 있는가. 생각해봐야 한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도 대등한 인격(p. 158)으로 정당하게 대우받으며 인간 존엄성을 누릴 권리가 있다. 모든 인간은 목적이기 때문이다. 나는 갑이고 너는 을이 아니다. 각자의 우리는 대체불가능하고 자유로운, ‘대등한’ 인격체이다. 그 옛날, 칸트도 알고 있었던 것을 왜 우리는 아직도 모르는 것일까. 알고 있지만 모른 척 하는 것일까.

 

얼마 전 모 신문사 사장의 손녀가 운전기사에게 폭언을 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칸트가 인간이 대등하다고 말한 지가 1780년대라고 치면 기함(氣陷)할 노릇이다. 칸트가 꿈꾸었던 세계는 아직 오지 않은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꿈꾸어야 한다. 더 좋은 세상에 대해 꿈꾸지 않는다면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이라도 칸트를 꺼내 읽어야 하는 이유인지 모른다.

 

칸트를 읽는다는 것, 거의 고문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과 ‘다른 사유’를 하려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새로 배워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쉬운 것만 하고 사는 것도 재미없지 않은가. 어려운 것에 도전하고 깨지고 박살나는 살아있는 경험이 고프기도 하다. 새해 <순수이성비판>부터 도전해보려 한다. 무모하고 무한한 도전일지라도.

 

-글, 엄진희(시인, 문학평론가)

주디스 버틀러(上) [페미니즘 고전들을 찾아서]

 

19. <젠더 트러블>, 주디스 버틀러 (上)

 

이승준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여성과 철학 분과)

 

 

“젠더의 의미를 둘러싼 현대 페미니즘 논쟁은 이 시대를 이끌다가 다시 특정한 의미의 트러블에 도달했다. 마치 젠더의 불확정성이 결국 페미니즘의 실패를 보여주는 정점이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트러블이 있다고 해서 이처럼 부정적인 가치를 수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 나는 트러블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떻게 최고의 트러블을 일으킬 것인지, 또 그렇게 하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인지가 중요한 과제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서문(73-74쪽[한글판])

 

1956년 헝가리와 러시아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주디스 버틀러(1956. 2. 24 ~)는 1990년 <젠더 트러블>의 출판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페미니즘에서 정치철학, 윤리학, 퀴어이론, 문학이론에 걸쳐 자신의 작업을 이어간 버틀러는 정체성과 주체성 형성의 문제를 뼈대로 삼아 젠더․섹스․폭력․언어 등에 대한 여러 새로운 논쟁적 입장을 제출함으로써 오늘날 미국 내에서 가장 주목받는(버틀러를 패러디하면 ‘트러블을 일으키는’) 철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문제는 그녀가 일으킨 트러블이 단지 기존의 관성처럼 받아들이던 법적․언어적 개념들이나 사고형태들만을 뒤흔든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내부에도 불편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젠더 트러블>에서 버틀러는 현존하는 권력구조 안에서 우리가 정체성을 통해 주체가 되는 과정을 추적하는데, 그 속에서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가 모두 법과 제도의 이차적 결과물이며 나아가 그것들을 구분짓는 경계 역시 문화적역사적 구성물임을 폭로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녀는 자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자연적․필연적 토대란 없으며 그러한 토대를 상정하는 이론을 ‘실체(혹은 본질)의 형이상학’으로 비판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말처럼 ‘여성’ 정체성이 이처럼 언제나 유동적․불확정적이며, 그래서 심지어 페미니스트들 안에서도 ‘여성’의 의미를 동일하게 고정시킬 수 없다면, 여성을 억압하는 체제는 무엇이며, 또 그에 맞서 저항하는 토대는 무엇인지를 규정하기가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남게 될 것이다. 즉 페미니즘의 안정적 기반을 동일하게 규정할 수 없다면(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는 운동의 측면에서나 이론의 측면에서 어떤 가능성을 갖게 되는가?

 

  • 섹스/젠더/욕망으로 분할된 인식틀에 대한 비판

 

‘젠더’라는 용어가 현재와 같이 통용되게 된 것은 시몬 드 보부아르(1908. 1. 9 ~ 1986. 4. 14)<제2의 성>에서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선언한 이후부터일 것이다. 즉 ‘여성적인 것’이 생물학적 성과는 달리 문화적․사회적 과정에 의해, 다시 말해 젠더화된 규범을 강제로 부과하는 과정에서 ‘형성’되고 ‘만들어 진’ 것이라는 비판적 문제의식이 발전된 결과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서 보면 섹스는 생물학적 몸의 차이, 젠더는 문화적․사회적 동일시 양식, 섹슈얼리티는 성적 행위가 유래하는 근원적 욕망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구별짓고 분리시킨 인식론적 틀은 이후 여성운동이 성장할 수 있는 추동력을 제공했고 페미니즘의 여러 형태의 이론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기도 했다. 섹스와 젠더가 일치하지 않는다면 몸의 차이에 기초해 여성에게 부과했던 기존의 여러 속성들(예컨대 모성성, 수동성, 감정적임, 연약함 등)이 사회적인 제도나 규범이 낳은 이데올로기적 산물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그 결과 여성으로 하여금 성역할이나 직업선택에서의 고정성을 탈피할 계기를 주며, 나아가 또한 섹스와 섹슈얼리티가 분리될 수 있다면, 이성애에 기초한 정상가족체제의 필연성 역시 허구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버틀러의 작업의 독특함은 바로 이러한 분리의 인식(보부아르로부터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여러 페미니스트들을 지배하는 인식) ‘안에서’ ‘그에 맞서는’ 근본적이면서도 내재적인 비판을 전개한다는 점에 있다. 첫째, 보부아르의 생각, 즉 사람은 몸과 그 몸에서 비롯된 ‘성’을 갖고 태어나지만 성이 젠더의 필연적․인과적 원인은 아니며 젠더는 신체적 외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면, 설혹 성이 생물학적으로 둘(남자와 여자)로 분류된다 할지라도, 젠더가 둘이어야 할 필연성은 나오지 않으며 섹슈얼리티의 형태 역시 특정한 형태로 한정될 이유는 없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부아르는 젠더를 논할 때 늘 두 형태(남성성과 여성성)를 상정하곤 하는데 이는 그녀 역시 젠더를 이분법적 틀로 이해하고 있으며, 따라서 젠더가 섹스를 반영하거나 모방하는 관계에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95) 둘째, 보부아르는 담론 이전의 해부학적 사실”(99)로서 즉 어쩔 수 없는 ‘자연적 소여’로 받아들이곤 하는데, 만일 그렇다면 염색체와 호르몬의 상태를 통해 우리에게 몸의 차이가 두 가지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확인시키려 하는 무수한 담론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 그 이전에 임산부의 뱃속 아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인하고자 하는 그 무수한 담론들은 무엇이며 심지어 이런 성별감별의 담론들은 왜 종종 그 감별조차 실패하곤 하는가?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보부아르의 주장과 달리 ‘몸’은 늘 담론 안에 감싸여져 있으며, 그 담론들을 통해서야 비로소 어떤 특정한 형태로 생산된다는 점에서 ‘자연적 소여’일 수가 없다. 셋째, 보부아르는 ‘주체’가 언제나 이미 남성적인 것이고 나아가 보편적인 것과 결합되어 있음을 폭로하면서 이를 여성적 ‘타자’와 구분하는데, 이를 통해 그녀(그리고 여러 페미니스트들)는 추상적인 인간이나 주체의 담론에 늘 도사려 있는 남성중심적 인간주의를 근본적으로 비판할 계기를 주었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보부아르가 ‘인간’이라고 하는 담론의 장에서 여성의 몸을 “부인되고 멸시당한 체현(embodiment)”(105)으로, 나아가 보편적 규범 바깥에 있는 것으로 전제되는 만큼 의미화 가능성이 차단되는 것으로 보고, 그 결과 해방의 가능성은 의미화되지 않은(남성적 규범에 물들지 않은) 여성의 몸을 자유의 도구로 이해할 때 발생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주장에서 보부아르는 은연중에 ‘남성 의미화 對 여성 비의미화’, ‘남성=주체=문화=정신 對 여성=타자=자연=몸’이라고 하는 플라톤과 데카르트 등이 전개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하며, 그래서 남성중심적 인간주의를 비판하는 뒷문으로 역설적이게도 이리가레가 말한 ‘남근로고스 중심주의’를 끌어들일 여지를 남기게 된다. 이러한 인식 하에서는 결국 ‘여성성’을 규범적으로 배제된 영역에 영원히 묶이게 만듦으로써 암묵적으로 젠더 위계의 체계를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페미니즘의 정치의 일체의 해방적 가능성을 스스로 유폐시키는 것일 수 있을 것이다.

 

  • 열린 복합물로서의 젠더와 삶의 박탈

 

버틀러는 이처럼 ‘섹스/젠더/섹슈얼리티를 분리시키는 인식’이 한편으로는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을 성장시킨 효과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젠더에 대한 이분법적 규범(남성성/여성성)의 고착화’, ‘담론 이전의 영역으로의 몸의 실체화․물신화’, ‘여성성의 항구적 타자화 및 배제’ 등의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을 비판함으로써 젠더와 몸뿐 아니라 페미니즘 정치학 자체를 다르게 배치할 길을 열고자 했다. 그런 점에서 버틀러는 섹스가 (1차적․본질적인) 자연과 관계되고 젠더가 (2차적․인위적인) 문화와 관계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고, 섹스는 이미 젠더이며 그런 점에서 섹스와 젠더(나아가 섹슈얼리티)는 모두 문화적 구성물임을 강조하는데 그 결과, 그녀의 관점에서 젠더는 “그 총체성이 영원히 보류되어서, 주어진 시간대에 완전한 모습을 갖출 수도 없는 어떤 복합물[로서] … 다양한 집중과 분산을 허용”(114)할 가능성의 영역으로 열릴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버틀러가 이처럼 ‘섹스가 이미 젠더이고 젠더를 열린 복합물’로 이해하게 될 때, 문제는 그럼 섹스/젠더/섹슈얼리티라는 견고한 개념을 통해 확보되는 ‘정체성’(특히 ‘젠더 정체성’)의 의미는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가 남게 될 것이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만일 버틀러의 논의대로 젠더 정체성이 비일관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통해 일정한 자리를 배치받는 ‘인간’으로서의 터전, 아니 인간 그 자체의 존재론적 지위 및 문화적 인식 가능성이 위협받게 될 것이며, 그 결과 ‘인간’으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문제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생물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미리 주어진 규범적 이분법, 즉 여성이나 남성으로 고착되지 않는다’로 대변되는 급진적 (탈)젠더정치는 ‘그럼 넌 사회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인간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으니 그 안정적 자격을 박탈당할 것이다’라는 공포스러운 박탈정치를 예고하게 만든다. 버틀러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인간으로서 ‘인식된다는 것’의 의미와 그것에 내포된 권력관계를 분석할 필요를 제기하면서 프랑스 페미니즘과 후기구조주의 이론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했다.

 

  • 이리가레푸코위티그크리스테바의 수용 및 대결

 

버틀러는 정체성을 규정하는 이론으로서 크게 4가지 입장, 즉 타자를 재생산하며 그 안에서 자신을 발전시키는 ‘하나의 남성성만이 정체성으로서 존재한다’는 뤼스 이리가레(1930. 5. 3 ~)의 입장, 남성성이든 여성성이든 ‘정체성 범주는 널리 확산된 섹슈얼리티의 규제적 경제체제의 산물’이라는 미셸 푸코(1926. 10. 15 ~ 1984. 6. 25)의 입장, 강제적 이성애 상황에서 ‘정체성은 언제나 여성적’이라는 모니크 위티그(1935. 7. 13 ~ 2003. 1. 3)의 주장, 마지막으로 ‘상징계(아버지 법)에 자리한 남성 정체성의 위치를 기호계(모체에서 비롯된 시적 언어)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고자 했던 쥘리아 크리스테바(1941. 6. 24 ~)의 비판적 정신분석학의 입장 등이 있는데, 버틀러는 이 4가지 입장의 정체성 규정과 이론적 의의 및 한계를 제시하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결론을 통해 페미니즘 이론 및 정치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했다.

첫째, 앞서 언급했던 보부아르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전도시키는 이리가레의 성차이론은 한편으로 서구문화의 관습적 재현체계 안에서 여성은 주체모델로 이해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점에서 여성들은 보부아르가 생각했던 것처럼 ‘항상 이미 남성적인 주체의 단순한 부정(타자)’으로는 이해될 수 없으며, 따라서 여성은 주체도 타자도 아닌, 이분법적 대립으로는 재현 및 환원될 수 없는 차이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여성=몸 對 남성=이성’을 은연중에 전제하는 보부아르 역시 지배적인 남성성, 남근로고스 중심주의 담론을 효과적으로 은폐하는 데 일조하는 것으로 비판된다. 둘째, 푸코가 보기에 본질적인 섹스의 문법은 이분법의 각 용어에 인위적인 내적 일관성을 부여할 뿐 아니라 양성 간의 인위적인 이분법 관계 또한 강요한다. 이처럼 섹슈얼리티를 이분법적 성범주로 규제하는 것은 이성애적․재생산적․법의학적 헤게모니를 파열시키는 섹슈얼리티의 전복적 다양성을 억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셋째, 보부아르의 연속선상에 있는 위티그가 보기에 성에 대한 이분법적 규제는 강제적 이성애 제도의 재생산이라는 목적을 수행한다. 그래서 그녀는 강제적 이성애주의의 전복이 자유로운 인간의 산출이라는 진정한 휴머니즘을 열며, 에로스 경제의 확대가 섹스/젠더 그리고 정체성의 허상을 깨뜨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위티그는 여성들에게 보편적 주체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섹스’의 허상을 파괴할 것을 요구하면서 그 자리에 새로운 제3의 젠더를 세우자고 말하는데, 이는 결국 레즈비어니즘을 긍정하는 전략으로 소급된다. 넷째, 크리스테바는 라캉의 ‘아버지 법’이 모든 언어적 의미화 구조(즉 ‘상징계’)를 구성하는 보편원리로 기능하면서 모체에 대한 아동의 근본적 의존과 기원적 리비도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고 보았다. 결국 상징계는 모체와의 기원적 관계를 거부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지는데, 이러한 억압의 결과로 나타나는 ‘주체’는 억압적 법을 전달하는 메신저나 옹호자가 되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라캉의 서사에 도전하면서 기원적인 모성의 몸으로 생겨난 언어차원인 기호계가 상징계 안에서 영원히 전복의 원천으로 기능하며, 따라서 다원적 의미와 기호의 비종결성이 지배적인 시적언어를 통해 ‘상징계’ 질서를 대체할 것을 제안한다. 이러한 입장들에 대한 버틀러의 분석 및 비판은 (지면의 한계상) 거칠지만 다음과 같은 간단한 도식의 형태로 정리될 수 있다.

 

이리가레 푸코 위티그 크리스테바
규범과 정체성 규정 ․ 남성로고스 중심주의

․ 남성적 성만이 존재하며 여성은 남성적 성과의 차이로서만 기능

․ 이성애 중심주의

․ (남자든 여자든) 성범주는 섹슈얼리티의(이성애)의 규제적 효과

․ 강제적 이성애

․ 남성은 보편적 인간으로 등록되며 따라서 여성만이 성범주로 표시(ex.여의사)

․ 언어적 의미화 구조(상징계)

․ 아버지 법으로서의 상징계와 다원적 의미가 억압되는 母體(및 시적언어)

의의 ․ 여성의 오인 혹은 재현불가 능성으로 인한 ‘하나이지 않은 성‘의 가능성

․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와주체와 타자의 변증법 비판

․ 주체 개념에 전제된 실체 형이상학 및 인간주의 비판

․ 정체성의 기원을 제도․담론․ 실천의 효과로 봄으로써 성범주(섹스)가 역사적으로 특정한 섹슈얼리티 양식을 통해 구성된다는 계보학적 접근의 가능성

․ 금기가 담론을 통한 효과로 작용하며 금기를 권력관계 속에서 읽어내면서도 금기의 생산성을 설정한다는 점

․ 성의 자연성이 허구적임을 폭로하며 섹스가 상상적

구성물이며, 젠더화된 범주로 산출된다는 점을 폭로

․ 섹스의 허구성을 근원적인 언어적 존재론(모두에게 동등한 기회가 부여된다는 것)을 통해 극복할 가능성

․ 라캉과 정신분석학의 근본적 전제로서의 상징계를 전복할 가능성 제공

․ 모성적 몸에 가해지는 아버지 법의 단성적 의미화 기제를 다원적 의미로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

․ 강제적 이성애 체제가 우울증과 비체화를 요청하는 인식적 가능성의 개방

한계 ․ 남근로고스 중심주의 비판을 통해 적을 단일화하는 인식론적 제국주의 설정.

․ 하지만 ‘식민화’는 남성성으로부터만 비롯되지 않으며, 인종, 계급, 이성애중심주의와 교차하면서 작동.

․ 양성인간 에르퀼린 바르뱅의 일기에 대한 해석에서 은연중에 드러나는 동성애적 인식을 주어진 것으로 전제

․ 바르뱅의 쾌락을 ‘비정체성의 행복한 중간지대‘로 이해할 때 드러나는 이상적 해방관 및 그에 따른 섹스와 정체성의 낭만화

․ 모든 발화에서 흠없는 매끈한 정체성을 요구

․ 대안으로 설정되는 ‘전세계적 레즈비언화’가 지닌 도전적 제국주의의 위험성

․ 레즈비어니즘이 가진 이성애 질서와의 근본적 단절 따라서 이성애내에서의 재의미화 가능성이 차단됨.

․ 의미 이전과 이후의 설정

․ 기호계의 시적언어를 통해 전복하고자 하는 아버지 법의 상징적 의미화에 의존

․ 문화에 앞서는 모성을 설정함으로 인한 모체의 자연주의화

․ 모성본능의 목적론 설정

 

  • 주디스 버틀러 (上)편은 여기까지 입니다 –
  • (下)편도 기대해주세요 🙂

플라톤의 『국가』 강해 ㉑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4-12(350d~352c): ‘부정의는 강하다라는 주장에 대한 검토

 

[350d]

* 소크라테스의 논박으로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결국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이곳에서의 그의 모습은 문답의 귀결에 트라쉬마코스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마지못해 동의하는 장면은 앞에서도 수차례 나오지만 이곳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는 ‘질질 끌려가다가 가까스로 그것도 엄청나게 땀까지 뻘뻘 흘리다가ἑλκόμενος καὶ μόγις, μετὰ ἱδρῶτος θαυμαστοῦ ὅσου’ 동의하고 있다.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른ἐρυθριῶντα 모습은 소크라테스도 전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한 모멸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교만하고 뻔뻔한 자일수록 그가 느끼는 수치의 강도 또한 그만큼 큰 것이다.

*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전혀 봐 줄 기세 없이 트라쉬마코스를 몰아세운다. 그는 첫 번째 논제에 대한 논박은 그렇게 해결 본 것으로 치고οὕτω κείσθω 곧바로 두 번째 논제 즉 ‘부정의가 더 강하다ἰσχυρὸν εἶναι τὴν ἀδικίαν’라는 주장을 검토하려 한다.

 

[350e]

*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불만을 터트리지만 기세는 꺾여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말을 하려 하면 어차피 ‘대중 연설’δημηγορεῖν을 할 거라고 여길 터이니 내가 내 식으로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게 해 주던가 아니면 당신 좋을 대로 질문이나 하라‘고 말한다.

* 앞서 살폈듯이 검토 방식에 관한 논의에서 연설에 의한 방식은 아예 배제된 데다가 그 논의에 개입조차 못할 정도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강한 반박에 크게 위축되어 있다. 여기서도 입으로는 자신도 할 말이 있고 또 말을 하게 허락해 달라고 요구는 하고 있지만 이미 트라쉬마코스는 주눅이 든 상태이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수사학자이자 연설가임을 자부하는 그가 그것을 드러낼 리가 없다. 그런데 반박할 능력은 없고 그렇다고 수긍하기도 싫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통상의 경우가 그러하듯 비아냥거리는 일이다.

* 그래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에게 질문을 하면 자기는 노파γραῦς의 이야기를 들어주듯 좋다εἶεν거나 아니라고만 대답하겠노라고 빈정거리듯 말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강자에 빌붙어 그들에게 굽실거리는 지식인들이 남들 앞에서 자기를 변명할 때 늘어놓는 부정직하고 비겁한 태도를 그 역시 잘 보여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문답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지가 없음을 이미 알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에게 그래도 대답만은 솔직히 하라고 당부하는 것은 두 번째 논제 역시 자신의 검토 방식에 따라 논의를 이끌고 가겠다는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 문답에 주도권을 잃은 트라쉬마코스는 그저 소크라테스 마음에 드는 말이나 해주겠다고 다시 빈정거리고 소크라테스는 바로 두 번째 논박을 시작한다.

 

[351a]

* 소크라테스는 먼저 ‘부정의가 보다 강하다’는 주장을 논박하려는 것은 부정의와 비교하여 정의가 어떤 성질의 것인지를ὁποῖόν τι τυγχάνει ὂν 충분하게 논의해 보기 위한 것임을 밝힌다. 즉 정의가 지혜와 훌륭함(덕)σοφία τε καὶ ἀρετή이라면 지혜와 덕이 가지고 있는 성질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정의가 부정의보다 강하다는 것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351b]

* 이를 위해 소크라테스는 먼저 트라쉬마코스가 가장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최선의 나라로 여기고 있는, 즉 가장 부정의한 나라가 과연 강한지를 묻는다. 이 물음에는 정의를 갖추고 있지 않은 부정의한 나라가 강한 힘을 가질 수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담고 있다. 역시나 트라쉬마코스는 이내 그것을 부정하고 그 나라가 그럴 수 있는 것은 부정의를 갖추고 있어 그런 것임을 재차 주장한다.

* 여기서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가장 부정의한 나라 즉 ‘다른 나라들을 부당하게 굴복하게 하여 예속화를 시도하고, 실제로 그렇게 해서 많은 나라를 휘하에 속국화해서 갖고 있는 나라’πόλιν ἄδικον εἶναι καὶ ἄλλας πόλεις ἐπιχειρεῖν δουλοῦσθαι ἀδίκως καὶ καταδεδουλῶσθαι, πολλὰς δὲ καὶ ὑφ᾽ ἑαυτῇ ἔχειν δουλωσαμένην는 분명 페리클레스 이후 부당하게 다른 폴리스들을 예속화하고 스스로를 제국화한 아테네를 가리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국가>를 집필하던 기원전 375년경은 물론 <국가>의 대화시기로 상정되고 있는 기원전 410년 전후는 아테네 제국이 쇠망기에 접어든 시기이다. 플라톤은 이미 아테네가 결코 강한 힘을 유지할 수 없고 쇠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서 같은 민족 형제 나라들을 부당하게 침탈하고 학살까지 서슴지 않는 아테네 제국주의를 염두에 두고 있다.

 

[351c]

* 소크라테스는 앞서 그가 당부한(350e) 대로 트라쉬마코스가 속내 그대로 말하는 것에 대해 칭찬을 한 후, 흥미롭게도 나라와 군대στρατόπεδον는 물론 하물며 강도단λῃστὰς이나 도둑κλέπτας의 무리까지 예로 들어, 어떤 집단이 ‘부정의하게 공동으로κοινῇ 뭔가를 도모할 경우에 만약 그들 내부에서 자기들끼리 ‘서로에 대해 부정의한 짓을 저지른다면’εἰ ἀδικοῖεν ἀλλήλους 과연 도모하는 일을 제대로 수행πρᾶξαι할 수 있을지를 묻는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수행해낼 수 없을 거라 대답한다.

 

[351d]

* 이어 소크라테스는 ‘자기들끼리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한결 더 잘 해낼 수 있는지를 묻고 그에 대해서도 그렇다는 동의를 얻는다.

* 이로써 어떤 집단이 부정의한 짓을 도모하면서 서로에게 부정의한 짓을 저지를 경우 서로 간에 ‘대립과 증오, 다툼’ ἢ στρατόπεδον ἢ λῃστὰς ἢ κλέπτας을 초래하여 결국 그들이 도모하는 일을 그르치며, 반대로 합심과 우애를ὁμόνοιαν καὶ φιλίαν 다하면 그들이 도모하는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음이 서로에게서 확인된다. 이로써 351a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고자 하는 지혜와 훌륭함(덕)σοφία τε καὶ ἀρετή으로서 정의가 가지고 있는 성질이란 ‘합심과 우애’를 담보하는 것임이 드러난다. 요컨대 정의로운 사람은 합심과 우애를 이루는 능력이 있으므로 그가 속한 단체나 자기 자신이 추구하는 일을 해냄으로써 그 단체나 자신을 강하게 만들지만 부정의한 사람은 그런 능력이 없고 증오와 불화만 일으켜 그가 속한 단체나 자기가 추구하는 일을 그르쳐 그 단체나 개인을 약화시키고 만다는 것이다.

* ‘그러니까 부정의의 기능ἔργον이 그런 것이라면 자유민들 사이에서건 노예들 사이에서건ἐν ἐλευθέροις τε καὶ δούλοις 서로를 증오하고 대립하게 만들고μισεῖν καὶ στασιάζειν 그들로 하여금 함께 어우러져 일을 해낼 수 없게 만든다.’ 이러한 언급 또한 5세기말의 극심한 혼란과 분열에 빠진 아테네를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부정의의 기능’이라는 말을 두고 부정의가 마치 고유한 기능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해할 필요는 없다. 고유한 기능은 덕을 갖고 있지만 부정의는 그것을 결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부정의의 기능이라는 말은 그냥 부정의가 일으키는 어떤 나쁜 작용을 말한다.

 

[351e]

* 나아가 소크라테스는 부정의가 두 사람 사이에서도 생겨 그들끼리는 물론 정의로운 사람과도 적이 되고 만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그런 여러 사람들의 경우 말고 개인 한 사람 안에서 부정의가 생길 경우ἑνὶ ἐγγένηται ἀδικία에도 부정의가 조금도 힘δύναμιν을 잃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고 말하고 트라쉬마코스도 그에 동의를 표한다.

 

[352a]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앞의 논의를 토대로 집단ἔθνος과 개인εἷς의 경우로 나누어, 부정의가 그곳 각각에 깃들 경우 어떤 힘을 갖는지를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우선 나라, 씨족, 군대 같은 단체의 경우 부정의가 갖는 힘δύναμις이란 1) 대립과 불화τὸ στασιάζειν καὶ διαφέρεσθαι를 통해 뭔가를 해낼 수 없게ἀδύνατον 만든다. 2) 각기 스스로에 대해서, 대립되는 모든 것에 대해서 ἑαυτῷ τε καὶ τῷ ἐναντίῳ παντὶ καὶ τῷ δικαίῳ 그리고 정의로운 것에 대해서 적ἐχθρὸν이 되게 만든다. 그리고 개인의 경우 부정의가 갖는 힘이란 본성상 1) 자기 자신에 갈등과 불화στασιάζοντα καὶ οὐχ ὁμονοοῦντα를 일으켜 아무것도 해낼 수 없게ἀδύνατον 만든다. 2) 자기 자신에 대해서, 올바른 사람들에 대해서 적이 되게 만든다.

* 소크라테스는 부정의가 갖는 힘을 설명하면서 위와 같이 집단의 내부와 개인의 내면을 각각 동일한 차원에서 대응시키고 있다. 이것이 갖는 의미는 이글 말미에서 따로 살피기로 한다.

 

[352b]

*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준다는 주장을 편 후 ‘한데 보시오. 신들θεόι도 어쨌든 정의롭다’고 말하고 그에 따라 정의로운 자는 신들에 대해 친구φίλος가 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그리스 신들의 모습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냥 ‘정의롭다’라고 말한 것이라면 몰라도 정의를 합심과 우애의 성질을 갖는 것으로 묘사한 직후에 언급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신들은 결코 합심과 우애의 신들이라 단정하기 힘들다. 이 점을 고려하면 여기서 소크라테스의 언급은 소크라테스 나름의 새로운 신관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에게 신들 모두는 <티마이오스>에서 강조하고 있듯 우주와 인간을 조화롭고 아름답게 창조한 선하고 정의로운 존재이며 마땅히 그래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플라톤은 <국가> 본론에 들어가 수호자들에 대한 시가 교육을 통해 신들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꾀한다. 이런 점에서도 짧은 언급이지만 이 또한 앞으로 펼쳐질 주장에 대한 시사를 담고 있다.

* 트라쉬마코스는 논의가 이렇게 마무리되어가자 아예 자기는 반론을 펴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논의를 마음대로 즐기라’εὐωχοῦ τοῦ λόγου θαρρῶν고 말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지금처럼 남은 문제에 대해서도 지금처럼 대답하여 ‘이 향응을 흡족하게’τῆς ἑστιάσεως ἀποπλήρωσον 해달라고 말한 후 아래와 같이 결론을 내린다.(352b-c)

1) 정의로운 사람들이란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으로서σοφώτεροι καὶ ἀμείνους더 유능하게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들δυνατώτεροι πράττειν이다.

2) 부정의한 사람들이란 서로 어우러져 일을 해낼 수 없는 사람들οὐδὲ πράττειν μετ᾽ ἀλλήλων οἷοί 이다.

3) 이들이 부정의한 사람들인 채로 함께 어우러져 무슨 일을 ‘박력 있게’(효과적으로, 열심을 다해ἐρρωμένως, ῥώννυμι의 분사형) 해내는 것으로 우리가 말할 경우에, 그것은 전혀 진실ἀληθὲς 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전적으로 부정의한 자들이었다면, 이들은 서로 삼가는ἀπέχω 일도 없었을 것인즉 이들 사이에는 그마나 어떤 형태의 정의가 깃들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352c]

* 그런데 위 3)의 언급과 그 이후 이어지는 소크라테의 말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3)의 내용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이들’은 부정의한 사람들로서 앞에서 언급한 대로 함께 어우러져 무슨 일을 박력 있게 해내지 못하는 사람들임에도, 이어지는 후반부 언급에서는 뭔가 서로 삼가기도 하고 그나마 어떤 형태의 정의도 깃들어 있어 뭔가를 해내기도 하는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일치와 문장전후의 문맥을 고려하면 ‘그것은 전혀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οὐ παντάπασιν ἀληθὲς λέγομεν라는 역문은 재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역문의 경우 παντάπασιν(altogether, wholly)을 ‘전혀’로 옮겨 앞의 내용을 전면부정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내용상 ‘전면적으로’ 옮겨 앞의 내용을 부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판단된다. 상당수의 영역본(G.M.A. Grube, P. Shorey)도 그 부분을 부분 부정으로 번역하고 있다.(what we say(our statement) is not altogether true) 여기서 말한 부정의한 자들의 경우 철두철미하게 부정의한 자들이 아니라 어중간한 상태의 부정의한 자ἀδικίᾳ ἡμιμόχθηροι ὄντες,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석하여 그 부분을 다시 풀어서 옮겨보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때 부정의한 사람들도 함께 협력하여 일을 해내는 경우가 있다고 말을 하는데 그건 전적으로 다 맞는 말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정말 전면적으로 부정의한 사람들이었다면 서로에게 삼가기는커녕 공격적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이 서로 협력하여 일을 해냈다고 한다면 그나마 그들에게는 어떤 형태의 정의가 깃들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

 

*이로써 트라쉬마코스와의 두 번째 논쟁의 두 번째 논제 즉 트라쉬마코스의 ‘부정의한 사람이 정의보다 강한 사람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검토가 마무리된다. 그런데 이 두 번째 논제와 관련해서도 음미해보아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1) 우선 트라쉬마코스의 태도에 관해서이다. 앞서 살폈듯이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과 관련한 논쟁에서는 물론, ‘부정의는 정의보다 낫다’와 관련한 두 번째 논쟁에서도 예외 없이 소크라테스에 의해 논파 당한다. 그것도 문답 하나하나 서로 합의하에 이루어진 논쟁이라는 점에서 거의 완벽한 수준의 논박이다. 보통의 경우 논쟁의 귀결이 이 정도라면 한 쪽은 자신의 견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여전히 부정의가 이익을 가져다주고 지혜와 덕은 물론 힘까지 갖춘 것임을 흔들림 없이 고수하고 있다. 그런데 왜 소크라테스는 논파를 해도 태도를 바꾸지 않는 그와 문답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 혹시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와 관련한 첫 번째 논쟁에서 트라쉬마코스가 엄밀론에서 현실론으로 태도를 바꾸는 등 태도를 일관성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다가 결국 논리에서 밀리자 목욕탕에서 물을 붓듯 자기 속내를 쏟아냈을 때부터 소크라테스는 이미 그가 문답의 방식으로 논파는 되어도 설득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실제로 텍스트를 잘 들여다보면 우리는 첫 번째 논쟁과 관련하여 트라쉬마코스가 쏟아낸 마지막 항변을 분수령으로 문답에 임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달라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속내를 확인한 후 크게 분노하여 그를 강력하게 반박한 후, 두 번째 논쟁에서는 아예 그를 제쳐두고 글라우콘을 끌어들여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를 어떻게든 납득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채택한다. 그런 후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서 자신이 훨씬 중요하다 생각하는 논제를 자신의 주도하에 두 번째 논쟁의 화두로 내세운 후, 곁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트라쉬마코스를 다시 끌어들여 문답을 진행하고 있다. 물론 두 번째 논쟁 역시 문답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리고 있는 두 번째 논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트라쉬마코스는 형식적으로 문답에 참여할 뿐 이미 문답을 나눌 의지도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왜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트라쉬마코스를 다시 불러 들여 문답을 이어가게 하고 있을까? 혹시 플라톤이 의도하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두 번째 논쟁 국면은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논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논박의 결과조차 인정하지 않는 트라쉬마코스 같은 부류들의 실체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들에 대한 논파를 넘어서 그들을 원천적으로 압도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앞으로 플라톤이 내세우고자 하는 정의의 속성을 일부나마 미리 보여주려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두 번째 논쟁에서 정의가 부정의보다 낫다는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덕과 지혜, 합심과 우애의 힘 그리고 더 잘 살게 해주는 것 즉 행복은 앞으로 <국가> 2권 이후에서 플라톤이 펼치게 될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이 갖추고 있는 핵심적인 덕목들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것 역시 <국가> 본론에 대한 준비로서 플라톤이 부여한 제1권이 갖는 함축이라 판단된다. 제1권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함축과 관련해서는 트라쉬마코스와의 모든 논쟁이 마무리된 후 소크라테스가 제1권에서의 논의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다루게 될 것이다.

2) * 게다가 이곳에서 플라톤이 정의가 갖는 힘을 논하면서 집단과 개인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는 것도 위에서 언급한 앞으로 <국가> 본론에서 펼칠 플라톤의 계획의 일단을 미리 드러내는 것으로서 나름의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덕과 지혜로서 정의가 갖는 성질로서 합심과 우애를 거론하며 집단은 물론 개인의 경우까지 끌어들이고 있다. 사실 합심과 우애를 이야기하면서 집단의 경우를 예시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집단이나 단체는 서로 다른 여러 사람들이 공동의 목적을 도모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흥미롭게도 합심과 우애가 중요하게 문제되는 영역으로 개인의 내적 영역도 끌어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개인 내부에 공동의 목적을 도모하는 서로 다른 여러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해야 가능한 주장이다. 플라톤은 여기서 그러한 전제를 아무런 설명 없이 당연한 것으로 두고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생활 속에서 심적 갈등을 경험하고 그에 따라 우리 안에 소박한 수준에서 이를테면 하얀 마음, 검은 마음 즉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있다는 등 서로 다른 욕망의 요소들을 이야기하곤 한다. 기독교 역시 우리 안에 신의 형상(Imago Dei)은 물론 영성 상실에 따른 원죄의 존재와 그것에 대한 죄의식이 자리 잡고 있고 그것은 신의 은총에 의해 극복되어야할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선과 악, 죄와 은총은 서로 대립적인 것들로서 우리 안에서 서로 합심과 우애를 나눌 대상들은 아니다. 이에 비해 플라톤이 말하는, 개인의 내적 영역에서 서로 다른 것들은 대립적이고 배타적인 것들이 아니라 서로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들이다. 실제로 플라톤은 <국가>를 통해 나라와 우리 안에 서로 다른 계층과 욕망들을 거론하면서 그것들이 서로 합심하고 우애가 있어야 정의로운 나라와 개인이 된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여기서 개인을 끌어들이고 아무런 전제도 없이 개인 내면에서 서로 다른 요소들끼리의 합심과 우애를 거론하고 있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국가> 2권 이후에 펼쳐질 영혼 3분설의 내용을 미리 선취하여 예고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 나라 또는 개인의 내면을 구성하는 여럿들이 서로 적대적인 것인지 그래서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제거 혹은 변모되어야 마땅한지 아니면 그것들은 서로 의존적인 것이어서 그대로의 모습을 갖는 것이되 다만 관계를 잘 맺어 조화와 공존을 이루는 것이 마땅한지의 문제는 철학사를 통해 다양한 입장과 관점을 가지고 대립해 왔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는 타도하거나 심판해야할 죄악 또는 계급이 존재하고 그것들의 존재 자체가 부정의이지만, 플라톤이나 프로이트는 관계맺음의 원리와 목표는 다르지만 그것들은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할 실재하는 현실 조건들이다. 부정의와 정신의 분열은 그것들의 존재가 아니라 그것들 서로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무지와 일탈의 소산들이다.

3) * 이곳의 논의 내용에서 의미 있게 주목할 것이 하나 더 있다. 소크라테스가 흥미롭게도 ‘기본적으로 부정의하지만 어떤 형태의 정의가 깃들어 있는 상태’ 즉 ‘어중간한 상태의 못된 자들’τὰ ἄδικα ἀδικίᾳ ἡμιμόχθηροι ὄντες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352c) 사실 소크라테스는 지금까지 첫 번째 논쟁에서 정의와 부정의를 구분할 때도, 그리고 또 두 번째 논쟁의 첫 번째 논제에서 지혜와 무지를 구분할 때도 각각 엄밀한 의미에서의 정의와 그 결핍태로서의 부정의, 결코 능가할 수 없는 객관적 진리로서의 지혜 자체와 그 결핍태로서의 무지를 2분법의 잣대로 엄격하게 나누어 설명해왔다. 이에 따라 정의와 부정의, 지혜σοφία와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 덕ἀρετῆ과 악덕κακί은 서로 대립되는 양극단을 의미했다.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구분은 두 번째 논쟁, 두 번째 논제에 들어오면서 ‘강도단이나 도둑의 무리들도 뭔가를 공동으로 도모할 경우 서로에 대해 부정의한 짓을 저지르면 그 일을 조금도 수행해내지 못하지만,(351c) 만약에 그들이 자기들끼리 서로에 대해 부정의한 짓을 하지 않는다면 한결 더 잘 해낼 수 있다’(351d)고 말하면서부터 뭔가 달라지고 있다. 즉 ‘집단 전체는 비록 정의롭지 못한 일을 도모해도 집단 구성원들끼리는 정의로운 일을 한결 더 잘 해내는 상태’ 즉 한 집단에 정의와 부정의가 함께 존재하는 다시 말해 전적으로 정의로운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부정의한 것도 아닌 것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논제를 마무리하면서 플라톤은 마치 의도적이라고까지 할 정도로 이러한 내용을 더욱 부연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실 논제를 제시한 처음 의도대로 힘에 있어 정의의 우위를 설명하는 것만을 목표로 삼았다면 정의로운 집단과 부정의한 집단, 정의로운 개인과 부정의한 개인만 비교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왜 강도나 도둑 같은 집단까지 끌어들여 어중간한 상태의 정의, 어중간한 상태의 부정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혹시 이것마저도 앞서와 같이 앞으로 <국가>에서 다룰 논의를 위한 준비로서 플라톤이 제1권에 부여한 예고이자 함축이 아닐까? 사실 앞서 1)에서도 언급했듯이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거침없고 무분별할 정도의 탐욕적 속내를 확인한 이후, 트라쉬마코스에 대한 강력한 반박을 통해 그의 반론 의지를 잠재운 데에다, 보다 강화된 검토 방식으로 자신의 핵심 관심사와 관련한 두 번째 논제를 꺼내들어 자신의 주도하에 논쟁을 이끌고 있다. 그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이곳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이미 논박과 논파의 단계를 넘어 그들을 압도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안 구축의 차원에서 냉철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앞으로 정의와 일의 수행 능력에 관한 문제를 다루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 사실 우리들은 보통 현실 생활에서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을 말할 때 특정 사람과 그룹을 칼같이 나누어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정의롭다거나 부정의하다고 말하지 않거니와, 개인적으로도 자기를 언제나 정의롭다거나 언제나 부정의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정의와 부정의를 혼동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이곳에서 현실에서의 어중간한 정의와 어중간한 부정의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완전한 정의와 그 반대로서의 완벽한 수준의 철저한 부정의의 구분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완전한 정의와 그것의 결핍태로서 부정의는 분명 존재하되 플라톤은 이제 그것의 결핍태로서 부정의의 다양한 현실 양태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플라톤이 인용하고 있듯이(351b-d) 어떤 집단이 부정의한 일을 공동으로 도모하지만 구성원들끼리는 합심과 우애가 있어 한결 더 일을 잘 해내는 경우도 그러한 양태들 가운데 하나이고, 또 극단적으로 참주가 자신은 철저히 부정의하지만 시민들을 완전히 속여 시민들 모두 참주를 정의로운 자로 착각한 채 서로 합심과 우애를 다해 참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경우도 그러한 다양한 현실 양태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플라톤이 <국가>를 통해 극복하려는 것, 압도하려는 것은 기본적으로 현실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그와 같은 부정의의 다양한 현실 양태들이다. 플라톤 철학을 현실 구제론이라 부르는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이다. 물론 그럼에도 지금까지 수행된 완전한 정의와 그 결핍태를 나누는 이분법은 여전히 요구된다. 왜냐하면 부정의한 현실일수록 부정의를 정의로부터 분리하고 구분하기 위한 확고한 정의의 기준과 푯대는 언제든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나라와 개인 차원에서 완벽한 정의의 실체를 완벽하게 구축해내는 일과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여 현실의 정의로운 나라와 정의로운 개인을 실질적이고 실천적으로 구현해내는 일은 별개의 과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정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고 각 인간에게서 어떻게 현상 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필수적이고, 이제 그것을 위해서는 그 어중간한 상태에 대한 보다 면밀한 분석과 이해 또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서의 ‘어중간한 정의’에 대한 언급은 실로 소크라테스의 냉철하고도 균형 있는 현실 인식을 반영함과 동시에 이것 역시 예비적인 수준에서 앞으로 펼쳐질 그의 정치철학의 일단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4) 그리고 그것은 <국가> 본론에 들어가서 살피게 되겠지만 존재론적으로도 존재(to on)와 무(無)(mē on) 그 중간에 있는 무규정적 존재(apeiron)에 대한 플라톤의 숙고와 성찰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전통적으로 무규정적인 존재는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는 관점에서 부동의 일자(一者, hen)를 주장하는 자들과 존재자 일체를 무 혹은 또 다른 차원의 존재로서 생성(gignōmenon)으로 환원하려는 자들 모두에게서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그러한 비판은 곧 무규정자에 대한 인식으로서 현실 인식을 사변에 예속시키는 것으로서 본말이 전도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정당한 존재론적 지위를 부여하되 현실의 무규정성이 허무주의로 방치되지 않고 역동적인 선과 아름다움(agathos kai kallos)으로 승화할 수 있도록 존재를 인식하는 능력이자 그곳에로의 부단한 운동력으로서 우주 영혼과 인간 영혼의 내적 본질을 직시하고 그것을 구명하여 현실의 나라와 개인에서 그것을 구현해내는 일을 그 자신의 철학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플라톤 존재론의 핵심과제 내지 관심사는 형상(Idea)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무규정자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이해에 있다할 것이다. 즉 철학의 관제는 존재와 무(無)사이에 있으면서 어떠한 단절도 받아들이지 않는 연속과 관계맺음 그 자체로서 무규정자를 어떻게 차별화하고 그러한 성질을 갖고 있는 현실 존재자들이 형상적 존재로부터 어떤 거리를 두고 어떤 수준에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인식해내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존재와 무규정자의 온전한 관계에 대한 인식이자 그 인식이 곧 실천을 필연적으로 담보하는 한, 그것으로 진리 존재로 육박해 들어가는 불굴의 정신이자 지적 실천으로서의 철학 그 자체였던 것이다.

5) * 아무려나 두 번째 논쟁에서 두 번째 논제 즉 부정의는 정의보다 강하다는 주장은 정의가 합심과 우애를 가진다는 것에 기초하여 논박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정의가 합심과 우애를 가져다주는 것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현실의 경우들을 보면 오히려 부정의가 정의보다 강하고 그에 따라 부정의가 정의를 이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를테면 역사에서도 부정의한 군주나 독재자가 엄혹한 군기를 내세워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병사들을 향해 패배하면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하여 그것에 두려움을 느낀 병사들이 사력을 다해 싸워 정의로운 군대를 무찌르는 경우도 수없이 많다. 트라쉬마코스도 이곳에서 가장 부정의한 자 즉 참주가 지배하는 나라가 정의로운 나라보다 강하다는 것을 끝까지 고수하고 있다. 이를테면 참주가 지배하는 나라는 그가 참주인 한, 시민을 통제하고 예속화시키는 힘과 권력이 있어 법률도 자기 이익에 맞추어 자기 마음대로 제정한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시민적 의무 차원의 정의감 때문이건 법률 위반이 가져다주는 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건 법률을 준수한다. 즉 그들로서는 정의로운 일을 한다. 이런 나라는 부정의한 짓을 도모하는 집단이라 할지라도 참주들의 억압에 의해 대립과 갈등이 철저하게 통제되어 있고 때로는 참주의 명령에 따라 일치단결하여 나라가 목표로 하는 일을 해낼 수도 있다. 개인들 역시 스스로를 국가의 법률을 준수하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자부하며 내적 갈등을 겪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최근까지도 일상의 착하고 선량하며 나라의 법률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아무런 갈등이나 거리낌 없이 하물며 자발적으로 부정의한 독재자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행태를 목도하고 있다.

* 이 밖에도 부정의한 나라나 개인이 정의로운 나라나 개인을 압도하고 지배한 역사적 증거들은 넘치고도 남는다.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오늘날에서조차 설득력을 얻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덕과 지혜와 상관없이 합심과 우애를 ‘집단을 강하게 만드는 조직 원리’로 생각하는 깡패집단의 논리는 비감스럽게도 오늘날 근대정치 사상사에서 마치 상식이라도 되는 양 국가 및 권력을 정당화하는 당연하고도 적극적 근거로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를테면 마키아벨리즘은 시민의 동의나 도덕과 상관없이 전제 군주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해 국가와 시민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야말로 통치 권력이 추구해야할 최고의 목표로 주장하고 있고, 또 홉스주의 또한 개인들은 모두 오로지 이기적인 자기 보전욕구만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신들의 안전한 삶의 보전을 위해 강력한 통제 권력을 자발적으로 원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시민들은 상호 계약의 형식으로 강권 국가를 수립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오늘날 정의는 그러한 폭력성과 비참성을 인간 사회의 불가피한 숙명으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다만 그것을 최소화하기 위한 이해관계 및 갈등의 조정책이라는 소극적 원리로 여겨져 ‘정의는 곧 개인들의 이해관계 및 갈등의 조정 내지 부정의에 대한 응징’이라는 근대 이후의 정의 관념을 형성하는 데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그리하여 현대의 권력가들은 고대의 참주 못지않게 부역 지식인들의 주도면밀하고도 충성스런 지원을 받아가며 보다 강력한 통제와 착취 기술은 물론 정의의 평판까지 얻게 해주는 고차원의 기술을 치열하게 연마하고 발전시켜가면서 더더욱 강고한 권력을 구축해가고 있다.

* 정의만이 합심과 우애를 발생시키고 일도 잘 수행해냄으로써 나라와 개인을 더 강하게 만든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오늘날 많은 사람에게서 말과 명분에서만 우위를 점할 뿐 순진한 사람들의 소망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정의를 덕과 지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합심과 우애의 근원이자 공동체와 개인을 강하게 만드는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현실과 역사를 직시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내뱉는 잠꼬대 같은 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사를 통해 삶의 진실과 역사의 진보를 일구어 온 사람들에게 이러한 패배주의적 냉소와 그럴듯한 담론들 모두는 권력에 빌붙어 기득권에 안주하는 지식 판매상들이 주구장창 늘어놓는 비겁한 자기변명이자 거짓 구호일 뿐이다. 현실 기득권자들은 공동체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가치의 상대성과 중립을 미명으로 현실 권력을 정당화하고 자유와 정의와 진리를 호도하는 작태를 거듭하며 안존을 도모해왔으나 장구한 인류의 역사는 그들의 권력과 영화, 부와 명예, 거짓과 위선이야말로 한 순간의 거품과도 같은 것이자 그 자신은 물론 그들의 자손들 모두에게 영원한 수치이자 멍에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2400여 년 전 이미 그러한 불의와 거짓과 탐욕에 맞서 지성으로 고양된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합심과 우애어린 협동과 나눔이 경쟁과 대립, 증오와 차별보다 강함을 역설하며 우리들 모두에게 ‘순진한 사람들의 희망과 당위가 어때서!’, ‘트라쉬마코스가 말하는 고상한 순진성γενναία εὐήθεια이면 어때서!’, ‘그래서 그게 혼이 아닌 몸의 손해이고 죽음이라면 어때서!’라고 외치고 있다. 그리고 그 자신 이미 오래 전 그렇게 외치며 기득권자들이 건넨 독배를 들이켰지만 누구도 그를 결코 패배자라 부르지 않는다.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이미 본성적으로 선과 정의에 대한 믿음을 갖고 태어나 그것의 구현을 욕구할 수밖에 없는 우주적 존재이다.

* 선과 정의, 진실과 자유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철학의 존재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러한 믿음을 전파하고 그것의 구현을 향한 힘과 희망을 키워가는 일은 그 자체로 우리 철학적 실천의 본질이자 근원이다. 철학은 그 자체로 불의에 대한 절망과 패배의식을 단호히 거부하는 힘이자 그 절망과 어둠을 뚫고 나갈 빛에 대한 열망이자 사랑이다. 그 열망과 사랑은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우리들을 불의에 대적하는 전장에로 다가서게 한다. 입장의 상대화는 다만 그런 입장이 결코 만만하지 않은 힘으로 아니 강고한 힘으로 우리가 소망하는 철학과 진실과 정의를 가로막고 있다는 걸 직시하게 해주는 것 정도로 유효할 따름이다. 요컨대 철학의 역사와 현실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두 입장이 서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왔고 그 싸움에 의해 인간의 삶과 행복이 보전되느냐 유린되느냐가 걸려 있는 것이 현실인 만큼, 우리의 철학은 우리가 어떤 입장에 설 것인지를 판가름하고 결심하고 실천하게 하는 영원한 토대이자 보루이다. 우리가 진정 철학을 하는 한, 철학은 왜 우리가 소크라테스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직관적으로 깨닫게 하고 분연히 일어서게 한다. 억압과 거짓과 독단에 순응하는 철학은 이미 그 자체로 가짜 철학이다. 소크라테스적 정신이야말로 철학자들이 영원히 서 있어야할 지고의 당파성이자 가장 순수하고 강력한 당파성이다. 우리의 공부와 사색이 소크라테스의 철학의 우위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근거라고 한다면 우리는 단순한 텍스트 내용에 대한 이론적 사색에 머물러 플라톤 사상의 우열여부만을 논하지 말고 그것의 실천적 전략도 함께 모색하고 정치투쟁도 감행해가면서 그의 철학과 사상을 더욱 심화 발전시켜 역사와 현실에서 그 우위를 증명하기 위한 싸움에 전력을 다해야할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믿음에 기초한 열망과 당위는 여전히 중요하다. 신영복 선생이 이야기 했듯이 친분과 혈연 등 사적인 인간관계도 중요하지만 불의한 권력과 싸우는 입장의 같음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마르크스가 철학의 요체는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라 말했지만 이미 플라톤 철학은 그 자체로 이미 정의와 진리를 향한 지적인 긴장과 분투의 철학이다. 플라톤의 열망 이상의 정열이 우리 안에서 불같이 끝까지 타오를 수 있도록 플라톤을 읽는 우리 또한 늘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도 우리의 <국가> 강해는 학술임과 동시에 격정을 동반하는 다짐이기도 한 것이다. 철학은 무지와 탐욕에 휘둘려 가며 현실에 안주하는 자에게는 하염없이 시대착오적이고 불온한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⑳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347e]

*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논박이 마무리되자 소크라테스는 그 주장보다도 ‘부정의한 사람의 삶이 정의로운 사람의 삶보다도 더 낫다κρείττω는 주장이 훨씬 더 중요한 논쟁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앞서(344d-e) 소크라테스가 정의에 관한 토론에서 ‘어떤 삶의 방식βίου διαγωγή이 각 개인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가?’라는 물음이야말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차대한 문제임을 강조하고 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논쟁의 주제가 되었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은 정치적 차원에서 정치적 강자와 권력지상주의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이 말은 그가 정의라는 주제를 통해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과연 정의로운 삶이 시민들 각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가의 문제 즉 시민 각 개인들의 삶의 방식과 행복에 관한 문제임을 보여준다. 물론 시민들 모두 폴리스적 존재라는 점에서 개인의 삶의 방식과 정치적 삶의 방식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서 플라톤의 <국가>는 전편에 걸쳐서 시종일관 정의 문제를 그 통일적 연관 하에서 유기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을 둘러싸고 벌어진 앞서의 논쟁 또한 그러한 구도 위에서 이루어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럼에도 이곳에서 언급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짧은 말 한마디에는 앞으로 <국가>가 다루게 될 핵심 주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중대한 함축이 담겨있다. 소크라테스의 말은 최소한 <국가>에서 플라톤이 펼치는 주요 관심사가 오늘날 흔히들 생각하듯 전체주의적 국가주의 철학과는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각 개인들의 행복과 이익에 대한 관심이 그 근본을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 체제에 관한 논의 또한 그것의 구현 조건을 모색하는 차원에서 제기되는 것임을 미리 예고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제2권에서 소문자와 대문자의 비유를 통해 정의 문제를 개인 차원에서 국가 차원으로 확대하는 과정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되고 있다.

 

4-10(348a~349a): 소크라테스 검토방식을 재정비하고 트라쉬마코스에게 정의와 부정의를 각기 덕과 악덕에 연관시켜 묻자 트라쉬마코스는 정의는 고상한 순진성이고 부정의야말로 덕과 지혜라고 답한다.

 

[348a]

* <국가> 제1권에서 소크라테스와 트라쉬마코스의 논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트라쉬마코스가 논의에 끼어들어 불쑥 던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벌어진 정의와 권력, 권력과 이익에 관한 논쟁(338c-347a)이고, 다른 하나는 앞서 살폈듯이 ‘부정의한 사람의 삶이 과연 정의로운 사람의 삶 보다 나은가?’ 즉 바람직한 삶의 방식에 관한 논쟁(338b-354a)이다. 앞의 논쟁은 기본적으로 트라쉬마코스가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주장에 대해 소크라테스가 대응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뒤의 논쟁은 비록 트라쉬마코스의 부정의 찬양론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나 소크라테스가 그것을 정의로운 삶의 방식의 우위를 논증하기 위해 논쟁의 적극적인 방편이자 화두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소크라테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리고 문답이 소크라테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만큼 내용 또한 제2권 이후에서 다루어질 내용을 일정 부분 암시 또는 선취하고 있다는 점도 우리가 주목해야할 점이다.

* 그런데 흥미롭게도 소크라테스는 삶의 방식과 관련한 두 번 째 논쟁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던진 문제와 앞으로 전개할 문답의 방식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를 제쳐두고 글라우콘과 상의하고 있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삶의 방식이라는 보다 적극적 주제를 내세워 자신의 주도하에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보다 확실하게 논파하려는 기세로 글라우콘을 우군으로 끌어들여 함께 검토 방식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정의로운 사람의 삶과 부정의한 사람의 삶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어느 쪽이 더 진실ἀληθής인지를 묻는다. 이에 대해 글라우콘이 정의로운 사람의 삶이 더 유익하며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납득이 가지 않는다οὐ πείθομαι고 답하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를 어떻게든 납득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함께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 앞서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가 아무리 부정의를 제한 없이 저지를 수 있다 해도 결코 부정의가 정의보다 더 이득이 된다고 결코 자신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런 심정을 가진 사람이 자기 혼자만은 아니라고 자못 비장하게 언급하고 있다.(345b) 그런데 이곳에서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을 끌어들여 그러한 심정을 가진 사람이 결코 자기 혼자만이 아님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릇된 주장을 논파함에 있어 같은 심정을 가진 사람들끼리 결연한 의지로 함께 연대하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는 <국가> 전체에 걸쳐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과 연대하여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논파를 넘어서 정의로운 나라를 세우는데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348b]

*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에게 트라쉬마코스를 납득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아래의 두 가지 검토방식을 제시하고 그 가운데 어떤 방식이 좋을지를 묻는다. 하나는 토론 양쪽이 번갈아가며 각기 유리한 주장과 반론을 제기하고 그 후 판관들이 평결하는 방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제껏 해왔듯 서로 합의를 보아가면서 고찰하는 방식ὥσπερ ἄρτι ἀνομολογούμενοι πρὸς ἀλλήλους σκοπῶμεν 즉 우리 자신들이 재판관들δικασταὶ인 동시에 변론인들ῥήτορες이 되는 방식이다. 이 두 가지 검토방식 중 앞의 것은 이른바 당대 아테네에서 이루어진 재판 절차에 따른 방식이다. 즉 원고가 먼저 연설을 통해 고발 이유를 밝히면 피고가 그에 대한 반론을 펼치고 그런 다음 다시 한 번 공방을 펼치고 나면 그것을 지켜보던 재판관들이 판정을 내리되 형벌이 법으로 정해지지 않은 사건의 경우에는 다수결에 의해 판정을 내리는 방식이다. 이에 비해 나중의 검토 방식은 논의 당사자들은 물론 그것에 더해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까지 토론에 가세해 모두가 판관들이자 변론인들이 되어 서로 합의를 통해 서로가 납득을 하는 보다 강화된 문답법적 검토방식이다. 사실 이 방식들은 일정부분 장단점이 있다. 전자의 방식은 법률에 따른 재판의 방식이라는 점에서 어떤 형식이건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구속력 있는 결정이 이루어지는 방식인 반면에, 당사자들의 납득 여부에 상관없이 일반 대중으로 구성되는 재판관들에 의해 판정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설 능력이 중대 관건이 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후자의 방식은 토론자들의 합의하에 검토가 진행되므로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실체적 진실에 다가설 수 있는 검토 방식이기는 하지만, 서로 자기주장만 펼치고 감정까지 내세워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 자체가 불가능한 방식이다. 따라서 이 후자의 검토방식이 가능하려면 검토에 참여한 사람들이 냉철한 이성에 따라 토론의 규칙을 지키고 그에 따라 귀결되는 결론은 자신의 감정과 무관하게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 제안된 두 가지 검토방식 가운데 글라우콘이 마음에 든다고 답한 방식은 두 번째 방식 즉 지금까지 해온 문답 방식에 토론자들이 더해지는 방식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적 방식을 보다 강화한 방식이다. 사실 위 두 가지 방식 가운데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의 경우는 문답법에 기초한 후자의 방식을 선호할 것이고 트라쉬마코스의 경우 연설가인 자신에게 유리한 전자의 경우를 선호할 것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소크라테스에게 전자의 방식은 결코 받아들이기 힘든 검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재판정에서는 당사자들의 납득 여부와 상관없이 양쪽 연설을 들은 재판관들의 판단에 따라 판정이 내려질 뿐만 아니라 판정방식 또한 저마다의 주장을 통해 ’좋은 점들을 세어보고 재어 보는 것’ἀριθμεῖν δεήσει τἀγαθὰ καὶ μετρεῖν’ 즉 양적 계산에 따른 다수결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이러한 다수결이었다. 이 부분은 두말할 나위 없이 재판 과정 전체가 연설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던 당대 민주정 치하의 재판 절차에 대한 플라톤의 불신을 담고 있다. 진실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연설에 휘둘리는 대중들이 재판관이 되어선 안 되며 어디까지나 주장 자체의 정당함을 냉철하게 분별해낼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재판관들인 동시에 변론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테네 재판 방식에 대한 위와 같은 견해는 앎과 분별에 있어 철학자의 배타적 우월성에 대한 플라톤의 믿음을 나타낸 것이지만 다른 한편 그것은 오늘날 플라톤을 반민주주의자이자 엘리트주의로 규정짓는 주된 빌미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세계가 대체로 그러했듯이 아테네 당대에도 교육은 기본적으로 소수 귀족들이나 양반 계급이 갖는 특권이었음을 고려하면 플라톤의 엘리트주의는 계급적 편향이라기보다는 무지에 대한 지성의 지배를 지지하고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의 발전된 민주주의 국가에서처럼 충분한 교양을 갖춘 깨어있는 시민들의 자발적이고도 실천적인 정치참여와 그것을 통해 그들이 구현하는 집단 지성의 힘을 플라톤이 직접 경험하였다고 가정한다면 플라톤은 결코 단지 대중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폄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폄하한 것은 본질적으로 대중 자체가 아니라 무지였기 때문이다.

* 소크라테스는 서로 합의를 보아가면서 고찰하는 주체를 우리들σκοπῶμεν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348b) 이는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앞으로의 검토 방식이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등 참관인들을 포함한 보다 강화된 문답방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이후 곧바로 실제 논의와 검토 과정에 참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플라톤이 347e에서도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검토 주체를 우리σκεψόμεθα라고 말했던 데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여기서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역시 앞으로 제2권 이후에서 진행될 본격적인 검토를 염두에 둔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제2권 서두에서부터 이미 확인할 수 있듯이 글라우콘과 아테이만토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대변하는 방식으로 소크라테스와 함께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에 대한 검토에 참여하고 있고, 그 이후에도 ‘우리 자신이 판관들인 동시에 변론인’δικασταὶ καὶ ῥήτορες이라는 표현 그대로 온 힘을 기울여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대한 판관의 역할을 물론 그의 견해를 지지하는 변론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348c]

* 소크라테스는 글라우콘과 검토방식에 대한 대화가 마무리되자 이제 자신이 던진 삶의 방식에 대한 문제를 화두로 꺼내들어 본격적으로 트라쉬마코스와 문답을 재개한다. 사실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쳐 자신의 현실론이 논파된 이후(346d) 위축된 듯 입을 다문 채 지금까지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고 검토 방식과 관련해서도 아무런 의견도 내놓고 있지 않다. 자신의 기본 주장이 소크라테스의 강력한 반론에 의해 논박된 것에 따른 위축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적 문답방식에 대한 냉소와 거부감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려나 이제 트라쉬마코스는 앞서와 달리 소크라테스의 주도하에 그가 택한 검토방식에 따라 그가 던진 문제에 대해 자신이 대답을 해야 하는 수세적인 지위에 처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의 요구에 의해 다시 문답에 참여한 이후(348b)에는 거의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수동적으로 대답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 트라쉬마코스와 문답을 재개하면서 우선 소크라테스는 처음으로 돌아가 트라쉬마코스에게 여전히 ‘완벽한 부정의가 완벽한 정의보다도 더 이득이 된다고 주장하는지’τὴν τελέαν ἀδικίαν τελέας οὔσης δικαιοσύνης λυσιτελεστέραν φῂς εἶναι;’를 확인하듯 묻는다. 이에 트라쉬마코스는 당연히 그렇게 주장하고 이미 그 이유도 밝혔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348c]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부정의와 정의 중 하나는 훌륭함(덕, ἀρετὴ)으로 다른 하나는 나쁨(악덕,κακία)으로 일컬을 수 있다면 자기는 정의가 훌륭함(덕)이라고 일컫겠노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는 자기는 여전히 부정의가 득이 되고λυσιτελεῖν 정의는 그렇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와 정반대οὐναντίον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348d]

* 소크라테스의 견해와 정반대라면 정의는 악덕, 부정의는 덕으로 일컬어야 하지만, 트라쉬마코스는 악덕이란 말 대신에 아주 고상한 순진성(아주 고매한 선의πάνυ γενναίας εὐήθεια)으로, 덕이란 말 대신에 훌륭한 판단εὐβουλία이라고 부르겠다고 말한다.

* εὐήθεια는 좋게는 정직함, 순박함의 뜻을 갖고 있지만 나쁘게는 단순함, 우둔함의 뜻도 갖고 있다. εὐβουλία는 사리분별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자기에게 득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전후사정과 이해관계를 잘 따져 대처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요컨대 트라쉬마코스에 따르면 정의로운 사람은 순진하고 아둔한 사람이고 부정의한 사람이야말로 세상 이해관계에도 밝고 그 유불리에 따라 처신도 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이에 소크라테스는 부정의한 자가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φρόνιμοί καὶ ἀγαθοὶ이란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그러자 트라쉬마코스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바로 이어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속내를 드러낸다. 즉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란 완벽하게τελέως 부정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나라와 부족을 자신들 밑에 종속시킬 수 있는 사람’οἵ πόλεις τε καὶ ἔθνη δυνάμενοι ἀνθρώπων ὑφ᾽ ἑαυτοὺς ποιεῖσθαι이라고 말한다. 한 마디로 트라쉬마코스가 생각하는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란 소매치기 같은 수준의 부정의한 자가 아니라 다름 아닌 통치자 수준에서 부정의한 자 요컨대 참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트라쉬마코스는 논의 주제가 삶의 방식으로 전환되었음에도 그야말로 조금도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부정의 찬양론을 토대로 정치 권력지상주의에 강고하게 매달려 있다.

 

[348e]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이러한 주장을 의아해하면서ἐθαύμασα 그가 말한 훌륭함과 분별의 문제를 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의 문제로 연결시켜 트라쉬마코스에게 ‘혹시 그렇다면 그 자신 부정의를 덕과 지혜 부류μέρει로, 정의를 그 반대 부류로 간주하는 것인지’를 묻는다. 이 물음 역시 앞으로 전개할 소크라테스의 논박 전략의 일환으로 던져진 것임에도 트라쉬마코스는 ‘전적으로 그렇게 간주한다’πάνυ οὕτω τίθημι고 동의를 표한다.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한결 더 다루기 어려워(더 까다로워,στερεώτερον) 그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길게 이유를 밝히고 있지만 우리말 역문으로는 금방 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 내용을 좀 풀어서 말하자면 아래와 같은 내용일 것이다. 즉 ‘트라쉬마코스가 부정의가 득이 된다λυσιτελεῖν 고 간주하더라도 남들이 그러하듯 실제 속으로는 악덕이고 수치스러운 것αἰσχρὸν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생각은 세간의 통념과도 상통하는 것이라 그런 통념에 따라κατὰ τὰ νομιζόμενα 이렇다 저렇다 무슨 말이든 할 수가 있겠지만, 트라쉬마코스 당신은 통념과도 다르게 그것을 수치스럽기는커녕 아름답고 강력한καλὸν καὶ ἰσχυρὸν 것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하물며 우리들의 생각과는 아예 정반대로 겉으로나 속으로나 부정의를 감히τολμᾶν 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니δῆλος 그러한 대담하고 극단적인 주장에 대해 뭐라 말하기가 아주 힘들다’는 것이다.

* 이 부분은 트라쉬마코스가 얼마나 강고하고도 뻔뻔하게 일상의 통념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기 아집에만 매달리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고대 아테네에서나 오늘날 그 어느 사회나 이런 극단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문제는 세간의 보통 사람이 아니라 지식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혹은 사회 지도층이라고 일컫는 사람들 가운데 이러한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를 없애는 것은 신의 몫이고 우리들이 할 일은 지금의 소크라테스처럼 그들의 주장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치열한 논리와 실천으로 그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349a]

* 소크라테스의 이런 지적에 트라쉬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더 없이 정확하게 알아맞힌다ἀληθέστατα μαντεύῃ고 말한다. ‘알아맞힌다’의 원어μαντεύῃ의 원형동사 μαντεύομαι는 ‘신이 속내까지 다 들여다 볼 정도로 알아맞힌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트라쉬마코스가 제 생각 그대로를 말하고 있음λέγειν ἅπερ διανοῇ을 알게 된 이상, 그 주장을 논의를 통해τῷ λόγῳ 끝까지 검토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트라쉬마코스는 자기 말과 생각이 일치되는 것으로 여겨지는지 아닌지가 무슨 상관이냐, 어찌되었건 자기가 한 ‘말(주장)에 대해 논박하려는 것 아니냐’οὐ τὸν λόγον ἐλέγχεις;라고 묻고 소크라테스는 그야 상관없다οὐδέν고 말한다.

* 소크라테스는 앞서(346a) 트라쉬마코스에게 어떤 형태로든 결론에 이를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과 어긋나게 대답하지 말 것을 요구한 적이 있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가 제 생각 그대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앞서의 요구를 트라쉬마코스가 최소한 충족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트라쉬마코스는 자기의 속내는 변함이 없는데 소크라테스가 자기의 말만 가지고 논박하는데 대해 불만을 품고 소크라테스의 그 말에 항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의 반문에 대해 상관없다고 말하고 바로 뒤이어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의 속내는 속내대로, 말은 말 대로 모두 논박할 수 있으므로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결론을 위해서 지금처럼 진실과 관련한 자신의 생각대로 대답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로부터 정의와 덕과 부정의와 악덕과 관련한 기본적인 견해를 확인한 후 이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주장에 대한 첫 번째 논쟁에 이어 두 번째 논쟁 즉 ‘과연 부정의한 사람의 삶의 방식은 정의로운 사람의 삶의 방식보다 나은가?“에 대한 논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제1권의 끝까지 이어지는 이 두 번째 논쟁 부분은 아래와 같이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진다. 1) 지혜와 관련하여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가?(349b-350c) 2) 힘과 관련하여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가?(350d-352c) 3) 덕과 관련하여 부정의가 정의보다 나은가?(352d-354a)

 

4-11(349b~350c): 소크라테스 능가개념을 토대로 정의가 덕과 지혜임을 밝히다.

 

[349b]

*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이 워낙 대담하고 의아스러운 것이어서 그것이 정말 그의 생각 그대로인지를 확인하기 위한 예비적인 대화가 마무리 되자,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게 부정의가 덕과 지혜라는 앞서의 대답을 검토하기 위해 ‘정의로운 사람은 뭔가에서건 정의로운 사람을 능가하고 싶어 한다고 여기는지’ὁ δίκαιος τοῦ δικαίου δοκεῖ τί σοι ἂν ἐθέλειν πλέον ἔχειν; 대답해달라고 말한다. 이 물음은 장차 트라쉬마코스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한 시금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질문이다. 특히 ’능가하고‘πλέον ἔχειν’라는 말이 그러하다. 그러나 아직 트라쉬마코스는 이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능가하고’의 의미를 일상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대답을 이어간다.

* πλέον ἔχειν(pleon echein)은 ‘더 많이 차지한다’, ‘능가한다’, ‘넘어선다’의 의미를 갖는다. 위의 말은 이후부터 350c까지 그것의 명사적 표현인 ‘능가함’, ‘넘어섬’πλεονεκτεῖν으로 바뀌어 사용된다. 트라쉬마코스로선 이제까지 주장해왔듯 부정의한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보다 뭔가를 더 많이 갖는 사람이고 더 강한 사람이므로, ‘능가’라는 말은 부정의한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지 정의로운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예의나 찾고ἀστεῖος 순진하기 그지없는εὐήθης 정의로운 사람이 상대가 정의로운 사람이건 부정의한 사람이건 간에 그 누구를 능가하거나 넘어서려 한다는 것은 트라쉬마코스로서는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그는 정의로운 사람이 정의로운 사람을 능가하고 싶어 하는지를 묻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당연히 ‘아니다’라고 대답하고 올바른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정의로운 사람이 부정의한 사람을 ’능가할 자격이 있고‘ἀξιοῖ πλεονεκτεῖν 그것을 정의롭다고 생각할까 하지 않을까’를 묻는다. 이에 대해 트라쉬마코스가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겠지만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묻는 것은 ‘정의로운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을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지도 않고 그러고 싶어 하지도 않지만, 부정의한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할 자격도 있고 능가하고 싶어하며 그것을 정의롭다고 여긴다는 것’이라 말하고 트라쉬마코스는 ‘그야 그렇겠죠’ ἀλλ᾽ οὕτως, ἔφη, ἔχει. 즉 ‘그런 생각이야 가지고 있겠죠.’라고 답한다.

* 요컨대 이 논의국면에서 소크라테스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아래와 같은 것이다. 1) ‘정의로운 자는 정의로운 자를 능가하려하지 않는다.’ 2) ‘정의로운 사람은 부정의한 사람을 능가할 자격도 있고 능가하려는 의지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정의로운 것이라 여긴다’

 

[349c]

* 그런 다음 소크라테스는 부정의한 자의 경우는 어떠한 가에 대해서 트라쉬마코스로부터 아래와 같은 점을 동의 받는다. 1) 부정의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건 어떤 행위이건 모든 것에 대해 능가할 자격이 있고 능가하려 한다. 2) 부정의한 사람은 모든 것에 대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한, 최대의 것을 얻으려 경쟁한다.’ ἁμιλλήσεται ὡς ἁπάντων πλεῖστον αὐτὸς λάβῃ.

* 소크라테스가 트라쉬마코스로부터 확인한 부정의한 사람의 태도는 비감스럽게도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태도로 강조되는 것이기도 하다. ‘넌 어떤 사람도 넘어설 수 있으며 어떤 것이든 이룰 수 있다. 네가 가질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최대의 것을 얻기 위해 과감히 무한 경쟁에 뛰어 들어라’

 

[349d]

* 이로써 검토를 위한 테제가 정리 확인되자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바탕으로 앞에서(348d) 트라쉬마코스가 주장한 것 즉, ‘부정의한 사람은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다’φρόνιμοί καὶ ἀγαθοὶ라는 주장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우선 소크라테스는 트라쉬마코스에게 시가에 능한 사람μουσικὸν 과 시가를 모르는 사람ἄμουσον 가운데 어느 쪽을 분별력 있는 사람τὸν φρόνιμον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묻는다.

* 시가(詩歌μουσική, mousikē)는 music의 어원으로 종종 음악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그 의미는 말부터가 음악, 예술, 학문의 여신인 뮤즈μουσαι에서 나왔듯이 이를테면 <일리아스>나 <호메로스> 등과 같은 시가를 비롯해서 음악과 연극, 춤 등 일체의 조화와 관련한 예술 영역은 물론 학문적 지식 내지 교양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사실 문자시대 이전에는 삶에 필요한 모든 정보는 구술로 전승되었고 그러한 구술은 노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노래를 의미하는 시가가 μουσική라는 이름으로 지식의 뜻도 가지고 있고 종종 학예(學藝)로 번역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이다. 이에 따라 <일리아스>나 <호메로스> 같은 시가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그들의 사고와 생활방식의 지침을 제시하는 경전과 같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므로 μουσική에 능하다는 것은 곧 지적 능력과 교양을 두루 갖추었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즉 μουσικός(mousikos)는 음악가뿐만 아니라 지식인의 뜻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고대 동양에서 군자가 갖추어야할 교양으로서 여섯 가지 기예(技藝) 즉 육예(六藝)에 음악(樂)은 물론 예(禮), 사(射, 궁술), 어(御, 말 타는 기술), 서(書), 수(數)가 포함되어 있는 것과도 비슷하다.

 

[349e]

* 이에 대해 트라쉬마코스가 시가에 능한 사람이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고 대답하자 소크라테스는 바로 의술에 능한 사람ἰατρικόν도 그와 마찬가지로 분별력 있는 사람인가를 묻고 트라쉬마코스의 동의를 받는다.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시가에 능한 사람이 리라를 조율할 때 다른 시가의 능한 사람을 능가하려고 하거나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지를 묻고 트라쉬마코스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고 답한다.

* 트라쉬마코스의 대답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시가에 능한 사람이 조율 능력에 능하다 해도 시가가 능한 사람끼리도 능력차이가 있고 그런 이유로 능한 사람끼리도 다른 사람을 능가하여 자기가 최고가 되려고 노력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트라쉬마코스는 앞에서 부정의한 자는 강한 자로서 모든 것을 능가하려 하고 경쟁도 한다고 말해 놓고서 이제 와서 시가에 능한 사람이 시가에 능한 다른 사람을 능가하려 하지도 능가할 자격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350a]

* 능가개념을 검토의 시금석으로 삼아 펼쳐지는 소크라테스의 이 논박은 350c까지 이어진다. 트라쉬마코스의 동의를 얻어가며 전개되는 그 논박의 진행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온갖 지식ἐπιστήμη 및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와 관련해서도 전문적 지식이 있는 사람τίς ἐπιστήμων은 다른 전문가가 행하거나 말하는 바를 능가하지 않는다. 반면에 전문지식이 없는 자는 다른 전문지식이 없는 자를 능가하려 한다.

 

[350b]

2) 그런데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은 지혜롭고 훌륭한 사람ὁ σοφὸς ἀγαθός;이다. 이들은 같은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하려 하지 않지만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하려고 한다. 반면에 못되고 무지한 자ὁ κακός τε καὶ ἀμαθὴς는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반대되는 사람에 대해서도 능가하려고 한다.

3) 부정의한 자도 같은 사람에 대해서도 같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도 능가하려고 한다. 반면에 정의로운 사람은 같은 사람에 대해서는 능가하려 하지 않지만 같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능가하려 한다.

 

[350c]

4)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람=지혜롭고 훌륭한 ἀγαθός τε καὶ σοφός 사람, 부정의한 사람=못되고 무지한 자τῷ κακῷ καὶ ἀμαθεῖ.’라는 결론이 나온다.

* 이로써 348e에서 부정의를 훌륭함(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의 부류로 간주했던 트라쉬마코스의 생각은 그 자신의 동의하에 진행된 논의 과정을 통해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논박이 이루어진 것이다.

* 350c에서 ‘정의로운 사람은 지혜롭고 훌륭한 ἀγαθός τε καὶ σοφός 사람, 부정의한 사람은 못되고 무지한 자τῷ κακῷ καὶ ἀμαθεῖ.’라는 결론은 350d에서 ‘정의는 훌륭함(덕)과 지혜ἀρετῆ καὶ σοφία고 부정의는 악덕κακία과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라는 말로 서로 합의된 것으로 표명된다. 이러한 논의 과정 전체에 기초하여 정의와 부정의 부류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정의의 부류 = 덕ἀρετῆ, 지혜σοφία, 훌륭함ἀγαθόν, 지식 ἐπιστήμη, 유식μαθὴ

부정의의 부류 = 악덕κακία, 무지ἀνεπιστημοσύνη , 무식 ἀμαθὴ

———————-

*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논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가 능가πλεονεκτεῖν라는 개념을 끌어들인 그의 의도와 그가 생각하는 능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보통 ‘ 능가’라는 말을 ‘뛰어난 자가 경쟁에서 상대를 능가한다’할 때처럼 상대를 ‘이긴다’, ‘넘어선다’의 의미로 생각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겐 앞에서도 엄밀한 의미에서의 통치자,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술 등에 관해서도 그랬듯이 어떤 기술이 그 기술인 한에 있어서는 기술이 이루는 최고의 것을 제공할 수 있다. 즉 그 기술의 전문가는 그 최고의 것을 달성하는 사람이다. 전문가는 그런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산술에 능한 사람은 산술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 정답을 내놓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정답을 내놓는 사람이 다른 정답을 내놓는 사람을 능가할 필요도 없고 따로 자기가 더 산술 자격이 있다고 말할 것도 없다. 의술의 경우도 전문가라면 질병에 딱 맞는 처방을 내놓는 사람이다. 다른 의사도 그가 전문가인 한 똑같은 처방을 내놓을 것이기 때문에 서로를 능가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시가에 능한 사람이 리라 조율에 있어 다른 시가에 능한 사람을 능가하려하지 않고 또는 능가할 자격이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전문가들끼리도 수준 차이, 능력의 정도차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만약 해당 기술에 조금이라도 결함이 있는 사람은 이미 전문가가 아니라고 말한다. 요컨대 무언가를 할 줄 안다, 안다는 것은 완전하게 할 줄 한다, 완전하게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플라톤의 앎ἐπιστήμη은 능력δύναμισ과 탁월함ἀρετῆ을 포함한다. 이론과 실천, 지행합일이 진정한 앎인 것이다.

* 플라톤의 이런 사상을 존재론적 관점에서 설명하면 ‘무엇이 무엇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무엇이 그것으로 정의될 수 있는 고유의 것이 존재하고, 그 무엇과 다른 무엇 사이에는 그것들 서로를 구분하는 명확한 경계선, 한계선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플라톤은 그 경계선을 peras라고 부른다. 즉 어떤 것의 peras는 그 어떤 것의 내적 규정이다. 그것들 서로에는 모순율이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무엇은 그 무엇인 한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그 경계를 넘을 경우 그것은 이미 그 무엇이 아니다.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경우처럼 인간 행위나 기술의 경우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행위나 기술의 경우도 그것이 어떤 행위이고 어떤 기술인 한, 그것을 그것으로 정의할 수 있는 경계가 있고 그것의 완전성, 최선의 상태를 규정할 수 있는 객관적 척도가 있고 그 척도에 충족한 상태로서 최고의 상태 즉 적도(適度metrion)가 있다. 요컨대 플라톤은 그러한 적도가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철학일반의 가치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모든 인간의 행위 특히 도덕적 행위에는 넘어서는 안 될 당위의 척도, 한도가 있다는 도덕 객관주의의 입장인 것이다. 플라톤이 그러한 입장에 서 있는 한, 그의 주장대로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이란 기술에서건 행위에서건 이러한 한도를 정확히 하고 그 한도를 지키는 사람인 반면에 모든 것에 대해 능가하려는 사람은 정해진 한도나 고유의 몫도, 분수도 모르고 제멋대로 행하는 무지한 자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논의 국면 서두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능가 개념은 정의로운 사람과 부정의한 사람, 분별 있고 훌륭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이다.

* 어쨌거나 이곳에서 시가에 능한 자가 리라 조율에 있어 시가에 능한 다른 자를 능가하려 하는지를 묻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트라쉬마코스가 능가하려 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고 있는 것은 그가 아직도 엄밀론을 견지하고 있다고 전제하면 몰라도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부정의한 사람은 모든 것을 능가하려 하고 경쟁하려 한다는 점에 그가 동의했을 때(349c) 그는 분명 행위나 기술의 한도나 척도 따위를 염두에 두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그의 논박이 성공했다는 것이 그가 논증 과정에서 제시한 생각들 자체의 완전성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논박은 행위나 기술의 최고의 상태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대전제가 진실임을 전제한 상태에서 성립할 수 있는 논박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능가라는 시금석 또한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성립하는 시금석이고 논리적인 차원에서 성립하는 시금석일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주장대로 만약 행위나 기능, 기술의 최고상태가 객관적으로 실재한다고 전제하면, 당연히 그것을 능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것을 능가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그 대전제의 정당성은 논증되고 있지 않다. 설사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누군가 그것을 실제로 완전하게 인식하거나 완전하게 행위나 기술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지 달성했다고 하더라도 그 완전성, 그 적도성을 객관적으로 확인하고 증명할 수도 없다. 척도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과 과연 그것이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척도인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수학과 기하학의 경우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척도가 있고 답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아직 풀지 못하고 있는 수학과 기하학 문제도 있을 뿐만 아니라 수학과 기하학 자체도 일정하게 전제를 가지고 있는 학문이다. 하물며 도덕적 정치적 행위의 경우에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물론 플라톤은 그러한 완전한 앎, 완전한 형상적 진리를 직관적으로 체득하는 변증술dialektikē의 능력을 제시하고는 있지만 그러한 능력을 갖는 철학자가 실제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실제 존재하여 완전한 진리를 한 치의 오차나 실수 없이 모든 국면에서 체득하거나 또 설사 체득했다고 하더라도 그 체득된 것이 과연 완전하고 절대적인 진리인지를 확인 검증하기도 실로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진리를 완전히 체득해낸 완전한 의미의 철학자나 지자의 존재는 현실의 무지와 결핍을 진리로 견인해내기 위한 하나의 지향이자 최선의 목표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의 지는 진리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이 필연적으로 추동하는 지적 긴장과 열망 그 자체인 것이다.

* 완전한 진리의 존재 여부가 이성적 검증 너머의 것이라고 해서 그것에 대한 믿음이나 지향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결단코 아니다. 비록 어떤 것이 완전하지 않다거나 설혹 그것이 갖는 가치가 상대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바람직한 것과 바람직하지 않은 것, 보다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 가치의 우열마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가치의 상대화와 등치화는 다른 것이다. 철학은 독단과 아집에 대한 비판적 거부는 물론 다양한 생각과 가치들의 우열의 기준과 근거를 찾아내기 위한 끈질긴 숙고와 천착의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서 전개되는 소크라테스의 논박도 그러한 작업의 일환이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일방적인 주장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논거와 상대방의 동의와 이해를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런 이성적 바탕위에서 상대의 주장을 검토하고 비판하는 태도야말로 시대를 불문하고 진실에 다가서는 지식인들의 올바른 태도라 할 것이다. 게다가 제1권에서 이루어지는 트라쉬마코스 주장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소크라테스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의 완전성을 드러내는 데에 목표가 있었다기보다는 다만 상대방의 주장이 갖는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데에 목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곳에서의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일단 논박 그 차원에서 분명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소크라테스가 적극적으로 논증하지 않은 채 전제되고 있는 행위나 기술과 관련한 소크라테스, 플라톤의 생각과 사상 또한 앞으로 보다 정치하게 전개되는 그의 주장을 통해 보다 명료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특히나 그런 과정에서 드러나게 될 그의 사상을 그가 살던 역사적 현실과 관련시켜 즉 시대정신의 살펴볼 경우, 우리는 그가 얼마나 그 시대와 역사, 삶의 진실을 고민한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그 고뇌를 바탕으로 얼마나 뛰어난 철학적 성찰과 성취를 이루었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역사와 현실에 대한 치열한 사색과 실천적 모색 그것이야말로 철학 사상이 사상으로서 갖는 진정한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게다가 플라톤의 사상이 그 어떤 다른 사상보다도 인류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그의 사상이 당대의 시대정신으로서만이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는 그야말로 그가 제시한 진정한 앎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도 삶의 진실 특히 정치와 도덕과 관련한 진실은 현실과 역사, 우리의 구체적 삶을 통해 증명되는 것이다.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⑤ 권리 대 권리의 충돌, 이율배반과 비판 [침몰하는 대학]

강사법 시행과 우리 현실에 대한 릴레이 기고-⑤

 

권리 대 권리의 충돌, 이율배반과 비판

 

박종성(한철연 회원, 건국대)

 

 

새해가 밝았다. 우리는 새해가 되면 서로에게 인사한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러나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인사를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은 시혜적이지 않는가! 마치 무슨 은혜라도 받으라는 것으로 들린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사회보장은 국가, 사회가 우리에게 무엇을 베풀어주는 것, 시혜, 은혜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의 의무, 책무이다. 사회계약론적 관점에서도 그러하다. 이런 이유로 오래 전부터 나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 대신에 “새해 복 많이 만드세요.”라는 말로 새해 인사를 한다. 내가 나를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과연 ‘나는 나인가’라는 의문 때문이기도 하다.

잠시 신문 기사를 상기해 보자. “지난 11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내년 8월 1일부터 시행되는 강사법은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는 대학과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강사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온 문제다. (<교수신문> 946호, 2018년 12월 3일 자 참조)”

 

모순과 이율배반

 

위 신문에 나오는 강사법과 관련된 상반된 주장을 정리해 보자. 먼저 대학의 주장은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 이 주장에 대항해서(contra/Wider) 강사들은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diction/spruch). 권리 대 권리의 충돌, 곧 모순(contradiction/Widerspruch)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상품교환이라는 틀 속에서 노동력의 구매자(학교)와 판매자(강사)는 각각 주장과 주장, 옳음과 옳음, 각각의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는 주장, 곧 권리(nomos)와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주장, 곧 권리(nomos)는 상품교환의 규칙 속에서 이율배반(Antinomie)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양자의 관계는 적대관계(Antagonismus)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모습을 칼 맑스는 자본의 일반정식(M-C-M′)에서 ‘평균 노동일’을 둘러싼 구매자의 권리와 판매자의 권리의 충돌로 드러나는 모순과 이율배반을 밝히고 있다. 노동력을 구매한 학교는 노동력의 지출을 늘리는 방향을 취할 것이고 노동력을 판매한 강사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함부로 쓰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전자는 노동력의 지출을 늘려 잉여가치를 만들어 내고자 하기 때문이고, 후자는 잘못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했다가는 다시 자신의 노동력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품교환 틀 속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말하자면 강사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함부로 사용하게 되는 것은 착취로 나타날 것이고 대학의 입장에서 구매한 노동력의 지출은 잉여가치로 간주될 것이다. 같은 사건이 착취와 잉여가치라는 두 가지 입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맑스가 잉여가치를 착취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상품교환의 규칙 또한 당파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맑스는 이러한 이율배반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먼저 권리와 권리의 충돌, 그 모순을 재판하는, 혹은 판단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더 이상 이성(logos)이 아니라, 오히려 ‘힘’이다. 다시 말해 더 이상 논리(logos)가 작동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본의 일반정식(M-C-M′)에 자기 증식하는 가치라는 자본은 허위이고 가상이라는 점이다. 맑스가 변증법(Dialektik)을 사용하는 것은 바로 이 가상과 허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가상의 이면에는 노동력의 지출을 둘러싼 투쟁이 있다. 노동시간을 둘러싼 적대관계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강사법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의 문제를 모순, 이율배반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순의 해소는 ‘힘’이라는 맑스의 견해와 지난 3일 부산대 시간강사 파업 17일 만에 ‘고용안정’ 합의안을 도출하였다는 기사는 공명하고 있다. 한 쪽의 힘이 커지면 다른 쪽의 힘은 작아진다. 이것이 모순이다.

 

역설과 비판

 

그런데 우리는 강사법을 둘러싼 모습 속에서 역설(paradox)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사법과 관련하여 대학의 견해(doxa)는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한다.’이다. 이것에 대항해서 반대방향, 다른 방향(para)의 견해, 이를테면 강사들의 견해인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생겨나는 것, 이것이 역설(paradox)이다. 다시 말해 강사법은 교육의 다양성을 저해하는 것이고 처우개선이 고등교육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다양성의 저해’이고 ‘교육의 질 향상’이다. 한 쪽의 견해가 커지면 다른 쪽의 견해도 커진다.

이 역설을 통한 비판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삶의 위기(crisis) 때문에 비판을 하는 것이다. 18세기 유행어였던 ‘비판’(criticism, critique, Kritik)의 어원은 그리스어 krino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구별하다(differentiate), 선택하다(select), 판단하다(judge), 결정하다(decide)”이다. 우리의 삶의 위기에 대해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비판과 위기를 생활화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고’,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며, 어떠한 비판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인지 ‘판단하여’,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비판은 삶을 교정하는 비판임과 동시에 삶을 넘어서는 이행으로서의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전 맑스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체”를 강조하였다. 현재 우리 사회는 바로 그러한 시간성과 역사성 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맑스가 역설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단순히 ‘교정’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역설을 보여주었듯이 말이다.

 

가치의 거울에 비친 강사들의 삶

 

일찍이 맑스는 가치형태에 대한 연구에서 등가형태에 대한 착각을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설탕 한 봉지의 무게가 추에만 있는 고유한 성격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설탕 한 봉지의 무게는 설탕 한 봉지와 추와의 사회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적 관계인가에 따라 설탕 한 봉지의 가치가 변화되듯이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강사들, 곧 비정규직의 삶의 가치는 사회적 관계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진다. 강사법을 둘러싼 힘의 관계는 그러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상품 세계의 한 시민이 되기 위해 살아간다. 그러면서 상품으로서의 우리들의 가치는 등가형태인 ‘가치의 거울’, ‘대상성’, ‘가치영혼’, ‘유령적 대상성’으로 ‘나타난다.’ 말하자면 나의 가치로 마주하고 있는 ‘대상성’이 자연적 속성과 상관없듯이, 강사들은 그 자신의 자연적 속성으로 비정규직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비정규직이다.”라는 것은 ‘나=비정규직’인데, 이는 내가 비정규직의 유전자를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치가 비정규직이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상품으로서의 강사들이 일반적 가치형태로 자신의 가치를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맑스의 비유로 말하자면, “개인 A가 개인 B에게 왕으로 섬김을 받으려면 B의 눈에 왕이 A의 몸으로 나타나야”한다. 이것은 B의 포기, 굴복이다. 달리 말하면 상품-가치-일반적 등가형태는 시민-주권-군주(정부)의 모습과 유사하다. 상품의 가치 표상이 일반적 등가형태이듯 시민의 주권 표상은 군주(정부)이다. 이 관계에서 시민의 주권 표상이 곧 군주라는 것은 군주에 시민이 복종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번 강사법과 관련된 권리들의 충돌 속에서, 강사들의 입장에서 보면, 강사들은 상품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가치를 ‘불안정 노동자’로 표현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나마 ‘상품 강사들’은 능동적이다. 반면에 대학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강사들)가 자신의 가치를 ‘불안정 노동자’로 인정받으면서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명확히 수동적이다.

베드로가 바울을 통해서 자신을 마주했듯,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무엇을 마주하고 있는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우리네 삶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나의 결단인가, 아니면 비정규직이라는 단일한 등가형태로 우리네 삶의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나의 굴복인가?

 

카뮈의 <반항하는 인간>의 글귀가 떠오른다. “나는 저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다른 한편에선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프레디 머큐리의 말이 떠오른다.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