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패턴과 수신인 미상 / 나의 다이애나에게 [유운의 전개도 접기]

    무너지는 패턴과 수신인 미상

 

이유운

 

들립니까? 말하겠습니다

지금은 계속해서 무너지는 중입니다

괴기하고 아름다운 모양으로 무너지는 저를 구경하러 사람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아주 많이요

다들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 나에게는 좀 우습기도 해요

무너지고 나면 나는 더 이상 금이 갈 수가 없으니 내가 여기서 가장 단단한 존재일 텐데

나를 타고 넘어가는 연인들이 있습니다

내 핏줄을 우두둑 뜯어내며 철골로 된 반지를 만들어주겠다고 속삭여요 “이건 끊어지지도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을거야”

다 거짓말이죠 제가 바로 그 증거니까

이상하게 나와 당신을 닮았어요 그 연인들

서로를 부르는 이름을 듣고 싶은데 이름 없이 입만 맞추고 있어요 그 축축하고 슬픈 소리…….

무너질 때 우는 건 부끄럽고 못된 일이라서 입술 안 쪽을 꼭 깨물고 있어요 비린내가 나요 뭔가를 잡아 먹은 사람처럼

당신은 나에게 왜 이렇게 자주 무너지고 있느냐고 물었었지요 부스러기와 먼지가 너무 많이 날린다고 코를 풀면서 무너지는 나 때문에 비염이 도무지 낫지를 않는다고

그냥 그런 거 있잖아요, 나도 낫지 않는 병이 있을 수도 있고

내가 그런 병일수도 있고

있고

없고

방금 무너지고 있는 나의 가장 내밀한 곳으로 연인들이 들어와 앉았어요

서로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그래, 이런 곳이 필요하지

나는 귀를 기울이는데 내가 무너지는 소리가 너무 커서 잘 들리지가 않아요

마지막 연인 같아, 부럽다 우리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우리도 무너지는 누군가 안에 들어 앉아서 서로 이름을 최초로 부르고 좋아하는 색깔을 물었어요 그거 엄청난 비밀이잖아요, 당신은 파란색을 좋아한다고 했고

눈을 감았다 떠요 그때 눈동자가 파란색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깨지기 쉬운 유리 거품처럼

거품 바깥으로 연인을 봐요

우리가 함께 모욕하고 돌 던질 수 있는 유일한 과거

그런데 그 때 우리가 앉아 있던, 무너지던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이제야 이런 게 궁금하다니 나도 참 못됐어요 물론 당신도 마찬가지

우리는 닮았으니까

입술을 뒤집고 네모난 이를 모두 드러내 보여줘요

나는 그렇게 웃을 줄 몰라서 일부러 입술을 누르는 그 장난이 좋았어요

이렇게 웃을 때 뭔가가 한꺼번에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납니다

푸른 소리

들려요?

이 소리가 부럽고 궁금했지요?

내가 무너져야 이런 소리가 납니다

이제

다 무너졌습니다

도망쳐도 좋아요

또 편지할게요

 

 

 

  

나의 다이애나에게

 

 

    잠깐 인천에 살았을 때의 이야기이다. 동네 근처에는 해체 작업 중인 건물들이 많았다. 삼사층 짜리의 작은 빌라들을 부수고 아파트들을 짓는 작업이 한창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어린 내가 다 알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공사는 빨리 진행되지 않았다. 나는 그 황폐한 풍경이 좋았다. 도시 한복판에 시간이 멈춘 것처럼 황량하게 뼈를 드러내고 있는 건물들. 나는 반쯤 무너진 건물들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사람 같았다.

    그런 건물들은 아이들에게 좋은 아지트가 되었다. 어느 건물에 들어가도 바닥에는 본드와 봉투, 그리고 브랜드가 다른 몽당만한 담배 꽁초들이 어지럽게 버려져 있었다. 손톱보다 짧아진 담배 꽁초를 보면서 나는 신기해했다. 이렇게까지 짧게 태운 담배는 처음 본다. 나는 아빠나 삼촌이 버리는 담배보다 훨씬 짧은 담배 꽁초들을 보면서 그 꽁초에 입술을 댄 사람을 상상하기도 했다.

    나는 보통 햇빛이 사선으로 들어오는 오전 즈음에 그런 건물 안에 들어가 앉아 있는 걸 좋아했다. 조용했다. 내가 이 세계의 마지막 생존자 같았다. 그 때 읽은 책이 참 이상하게도 기억에 오래 남는다. 예를 들면 최승자의 ‘내 청춘의 영원한.’ 나는 이 시를 모두 외울 수 있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아무도 없는 무너진 건물의 뱃속에서 연극배우처럼 서서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위로 햇빛이 내려앉았다. 간지럽고 따뜻했다. 세상이 멸망해도 햇빛은 여전히 따뜻할 거라고 생각하면 멸망이나 죽음 같은 것들이 두렵지 않았다.

 

괴로움

외로움

그리움

 

    나는 이 세 가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담배가 입술을 델 정도로 짧게 피우는 자들이 이런 세 가지 움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상상했다. 나는 어린 자가 그렇듯 그 세 가지 움을 가지고 있을 나를 상상했고 그 상상 속의 나는 언제나 사랑을 하고 있어서 좋았다. 그러니까 나는 비참한 어른이 되기를 꿈꿨던 것이다.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트라이앵글. 나는 그 발음을 좋아했다. 입이 쫙 벌어지는 그 발음. 나는 이 시를 외우고 무너지는 건물 안을 빙글빙글 돌았다. 부서지는 계단에 누워서 바나나 우유를 마시고 옥상 문 앞에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점심 즈음이 지나면 그 곳에서 나왔다. 옷에 묻은 먼지를 털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살인마처럼 깊은 비밀을 간직한 것 같은 쾌감에 빠졌다.

    나는 그걸 ‘건물’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건물보다는 어떤 다른 이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이건 정말 처음 말하는 내 비밀인데,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 무너지는 건물에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인천 부평구의 황폐한 건물에 멋들어진 아가씨 같은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유는 그때 내가『빨간 머리 앤』을 열심히 읽었기 때문이다. 나는 끝에 e가 붙은 앤처럼 발랄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재주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꿈치 끝이 포동포동한’ 귀엽고 예쁜 친구인 다이애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갈까마귀 같은 검은 철골을 드러내고 있는 건물에 다이애나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가 나의 가장 친한 벗이라고 여겼다. 조금 부끄럽고 웃긴 일이다. 하지만 그건 멋진 일이었다. 나는 다이애나의 품 안에서 처음 시를 읽었다. 내가 막역하다고 생각하는 존재의 안에서 처음으로 시를 읽는다는 건, 아무튼 멋진 일 중에 하나니까 말이다.

    그리고 어른이 된 나는 이 때를 떠올린다. 어린 내가 함부로 꿈꿨던 비참한 어른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부드러운 목에 대고 숨을 오래 그리고 느리게 쉰다. 어른이 된 나는 비참한 어른보다 이런 방식으로 숨을 쉬는 고대 생물이 되는 것을 꿈꾸기로 한다. 이것도 처음 말하는 비밀이다. 나는 최근에도 종종 다이애나의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을 자주 상상했다. 다이애나와 나는 함께 폐건물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곳에 숨어드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그들은 대부분 추방자들이다. 이방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같은 얼굴과 눈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사랑이나 젊음을 이유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려고 뛰어내린 자들이다. 나와 다이애나에게로. 나는 내가 쓴 것이 분명한 편지들을 그들의 어깨 너머로 훔쳐본다. 나를 이렇게나 멀리서 바라본다. 이런 것들이 보통 어른이 하는 일인지는 잘 모르지만 이런 것을 편지에 모두 적어 넣는 일은 어른의 일일 수 있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연효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의 ‘철학과 비판(이종철 저서)’ 서평에 답함 “새로운 철학을 하는 계기가 되고 동력이 될 수 있기를…” [철학자의 서재]

연효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의 ‘철학과 비판(이종철 저서)’ 서평에 답함
“새로운 철학을 하는 계기가 되고 동력이 될 수 있기를…”

 

이종철(연세대)

 

♦ 2021년 6월 12일 브레이크 뉴스(Break News)에 실린 이종철 박사의 기고 글(https://www.breaknews.com/813273)을 필자의 허락을 얻어 웹진 〈ⓔ 시대와 철학〉에 게재함을 알립니다. 게재를 허락한 이종철 선생님과 브레이크 뉴스에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연효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이하 필자)이 쓴 서평 “이종철 저서 ‘철학과 비판’-새로운 철학적 글쓰기를 향한 거침없는 도전?”은 저자가 주창한 에세이 철학을 반기는 목소리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이런 글쓰기가 오늘 날 전문화된 학계에서 생존이 가능할까라는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나는 전문적인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이는 이런 반응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본다. 취지는 동의하지만 과연 그런 글쓰기가 현실적으로 -이른바 학계에서- 생존 가능할 수 있을까? 전문 연구자들이 이런 형태의 철학적 글쓰기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을까? 이런 글쓰기의 의미가 무엇이고, 그것의 현실적 위상을 어떻게 자리 매김할 수 있을까? 이런 반응은 충분히 가능할 뿐더러 당연하기도 하다.

필자는 내가 일관되게 주장하는 철학과 현실의 관계, 현실로부터 유리된 철학의 위상, 오늘 날 학자들이 행하는 일상적인 철학 활동이 오퍼상이나 고물상과 다르지 않느냐는 나의 비판에 대해 일정 부분 동의하고 있다. 이런 나의 문제 제기는 기존 철학자들에 대해 일종의 정체성을 요구하는 작업이고, 이런 물음을 통해 자신들의 철학 활동에 대해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정체성의 위기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제기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 서양 철학을 연구한다는 것의 의미, 현대의 한국에서 고대 중국과 한국의 철학을 연구하는 의미, 현실을 포괄하면서도 현실과 유리된 철학의 의미, 나아가서는 지금 이 땅에서 철학한다는 것의 의미 등등 오늘 날 우리에게 도대체 철학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유도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종합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전문화된 논문 속에서 제기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 그런 맥락에서 에세이 철학의 형식을 통한 문제 제기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철학은 늘 회의와 반성 그리고 비판을 통해 이루어지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나의 문제 제기는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에세이 철학은 기존의 철학적 글쓰기에 대한 대안적 작업은 아니다. 다만 철학적 글쓰기가 한 방향으로 치우치다 보니 놓치고 있는 자유로운 철학의 정신을 되살리고자 하는 것이다. 내용이 그것을 드러내가 위해 적합한 형식을 요구하듯, 형식은 내용은 일정하게 규정하고 제한할 수 있다. 전문적인 논문은 논문대로 그 나름의 역할과 의미를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에세이 철학의 형식은 아카데믹한 글쓰기를 넘어서 다양한 주제들을 상대로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일단 에세이 철학은 전문적인 철학의 테두리를 넘어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철학의 문제들을 끄집어 낼 수 있으며, 주석에 대한 부담을 덜고서 얼마든지 자유롭고 현실 비판적으로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된다. 그 점에서 에세이 철학은 형식의 개방성을 열어 줄 수 있다. 이런 형식의 개방은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진행되어 왔던 철학적 글쓰기에 대한 보완적 형태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전문적인 철학 논문들과 달리 이런 글들이 실릴 수 있는 지면을 확보하기가 아직은 요원하다는 점에도 있다.

필자는 에세이 철학을 ‘도전과 모험’으로 규정한다. 이런 철학은 분명히 전문가 집단의 관행을 넘어서 있다. 이런 예외적 활동에 대해 기존의 전문가 집단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침묵과 무시, 혹은 무관심으로 일관할 것인가, 아니면 미미하지만 새로운 불씨가 되고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 필자는 에세이 철학을 ‘대중적인 글과 전문적인 글쓰기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로도 생각하고, ‘업계와 비업계 사이의 경계인의 위치’에서 쓰는 글쓰기로도 생각한다. 저자의 이런 시도에 대해 ‘무모한 시도로 그칠지 아니면 새로운 글쓰기의 한 문화로 자리 잡을지’에 대해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다. 전문가 집단에서 볼 때 한편으로는 우려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대하는 양면적 감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나의 시도가 ‘철학의 현실에 커다란 파문을 던진 것’을 인정하고, 이것이 ‘철학의 비판적 기능을 회복하고, 새로운 철학적 글쓰기를 위한 논쟁’의 불쏘시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한 것 자체에 위안을 삼고 싶다. 필자가 그 파문이 찻잔 속의 미동에 그칠지, 거대한 파도가 될지는 그 누구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고 한 점에 대해서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모든 새로운 시도가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철학과 비판-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향해>에 대해 산발적이지만 적지 않은 서평을 여러 동료 철학자들이 해주었다. 좋은 책이 나와도 1년 내내 서평 하나 없는 학계의 현실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관심만으로도 그 반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서평이 앞으로도 얼마만큼 이어질지, 그리고 그것들을 매개로 새로운 논쟁이 발생할 수 있을지는 지금 예단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동료 학자의 연구 결과에 대해 이렇게 반응을 하면서 철학의 문제들을 우리 내부로 끌어안으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철학을 하는 계기가 되고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일전에 아직은 밝힐 수 없지만 모 신문에서 9개의 질문을 받고 A4 용지 7장 분량의 답변서를 제출한 적이 있다. 내 책의 내용을 가지고 꼼꼼하게 분석하고 질문지를 작성한 것 자체가 나의 생각을 다듬는데 한 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의 답변서가 조만간에 그 신문에 실리게 되면 내 책을 이해하는데 한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장문의 서평을 통해 <철학과 비판>이 갖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을 잘 드러내준 연효숙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께 감사를 드린다. jogel4u@outlook.com

 

*필자/이종철

철학박사.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근간 “철학과 비판”의 저자. 칼럼니스트.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이다. * Below is the [full text] of an English article translated from the above article as’Google Translate’.

 

In response to the review of ‘Philosophy and Criticism (Book of Lee Jong-cheol)’ by Yeon Hyo-sook, president of the Korean Philosophical and Thought Research Association

“I hope that it will become an opportunity and a driving force for a new philosophy…”

-Dr. Jongcheol Lee

 

The book review “Lee Jong-cheol’s book ‘Philosophy and Criticism’ – a relentless challenge for a new philosophical writing?” written by Yeon Hyo-suk, president of the Korean Philosophical and Thought Research Association (hereafter, the author) It raises the question of whether such writing can survive in today’s specialized academia. I think this kind of reaction from a professional researcher’s point of view is very natural. I agree with the purpose, but can such writing realistically – in the so-called academia – survive? Can professional researchers pay attention to this form of philosophical writing? What is the meaning of such writing, and how can we establish its realistic status? Such a reaction is not only possible, but also natural.

I agree to some extent with my criticisms of whether the relationship between philosophy and reality, which I consistently insist on, the status of philosophy separated from reality, and whether the daily philosophical activities of today’s scholars are different from those of Opus and antique dealers. My questioning like this is a task that demands a kind of identity from the existing philosophers, and it can be an opportunity to look back on their philosophical activities through these questions. An identity crisis can be posed from several perspectives. The meaning of studying Western philosophy in East Asia, the meaning of studying ancient Chinese and Korean philosophies in modern Korea, the meaning of a philosophy that encompasses reality and separates it from reality, and furthermore, the meaning of philosophizing in this land. It can induce a fundamental reflection on what it means to do philosophy for us. However, it is difficult to raise such a comprehensive and fundamental question in a specialized paper. In that context, raising a problem through the form of an essay philosophy is meaningful enough. Since philosophy has always been a work of skepticism, reflection, and criticism, my questioning can be meaningful in itself.

Essay philosophy is not an alternative work to the existing philosophical writing. However, it is intended to revive the spirit of free philosophy that has been lost because philosophical writing is biased in one direction. Just as content requires an appropriate form to reveal it, form can define and limit content in a certain way. A professional thesis has its own role and meaning, just like the thesis. Similarly, the format of the essay philosophy can go beyond academic writing to help you write freely and creatively on a variety of topics. First of all, essay philosophy can bring out philosophical problems in daily life beyond the boundaries of professional philosophy, and it helps to relieve the burden of commentary and write freely and critically in reality. In that respect, the essay philosophy can open up the openness of the form. This type of openness can be a complementary form to the philosophical writing that has been unilaterally carried out so far. The problem is that, unlike professional philosophical papers, it is still far from secure a space for these articles to be published.

I define my essay philosophy as’challenge and adventure’. This philosophy clearly goes beyond the practice of the professional community. How can the existing expert group accept this exceptional activity? Will it be consistent with silence, ignorance, or indifference, or will it be a small but new spark and spark? I think of the essay philosophy as ‘a tight line between popular writing and professional writing’, and I think of it as writing written in ‘the position of the borderline between industry and non-industry’. Regarding the author’s attempts, he does not withdraw his uneasy gaze about whether it will be a reckless attempt or whether it will be established as a new writing cultur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expert group, the two-sided feeling of concern on the one hand and expectation on the other is understandable. However, acknowledging that my attempt ‘had a great ripple on the reality of philosophy’, and hoping that this could ‘restore the critical function of philosophy and ignite a debate for a new philosophical writing’, is comforting in itself. want to take It remains to be seen whether the ripple will be just a small movement in a teacup or a huge wave, as no one knows at this time. Not all new attempts will be satisfied with the first drink.

So far, several fellow philosophers have written sporadic, but not a few, book reviews on <Philosophy and Criticism – Essay Towards the Resurrection of Philosophy>. Considering the reality of academia where there are no book reviews throughout the year even if a good book is published, this interest alone can have a huge impact. It is difficult to predict how long these book reviews will continue in the future, and whether new debates may arise through them. However, I believe that trying to embrace the problems of philosophy within us while reacting to the research results of fellow scholars in this way can itself be an opportunity and a driving force for a new philosophy. I can’t reveal it yet the other day, but I was asked 9 questions from a certain newspaper and submitted 7 A4 paper-sized answers. The meticulous analysis of the contents of my book and the preparation of the questionnaire itself can be very helpful in refining my thoughts. If my answer will be published in the newspaper sooner or later, it will be of much help in understanding my book. Finally, I would like to thank Yeon Hyo-sook, president of the Korean Philosophy and Thought Research Association, for revealing the various problems of <Philosophy and Criticism> through a long review. jogel4u@outlook.com

 

*Writer/Lee Jong-cheol

Doctor of Philosophy. Yonsei University Humanities Research Institute. Author of the foundational “Philosophy and Criticism”. columnist.


▼ 연효숙 한국철학사상연구회장의 지난 글 바로가기

화분 / 분갈이 [유운의 전개도 접기]

화분 / 분갈이

 

이유운

 

화분

 

 

    아이를 낳아본 적은 없었고 살아 있는 것을 가지고 싶었다 마음껏 미워할 수 있도록, 되도록 끊임없이 자라는 것으로 이런 마음은 숨기고 제안을 한다 화분 좀 사러 갈까 꽃이 피는 걸로, 알잖아, 집에 녹색이 없어서

 

    잎과 뿌리를 매만지고 구운 화분이 정말로 숨을 쉬는지 손바닥으로 그것을 쥐어보고 나의 방을 위해 골몰하는 너의 옆얼굴 만약 내가 작은 식물을 데려와 네 이름을 붙이고 너를 기르는 것처럼 그것을 사랑하게 된다면 그래도 우리는 부서지는 것을 사랑할 수 있을까

 

    둥글고 앞으로 휜 꽃받침

    이 꽃 너랑 닮았다

    네가 기울여 열중하는 모습 같아,

    너는 아무렇지 않게 나의 비밀을 말하고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는데, 왜 모든 일은 다 이렇게 노력해야만 하는 결말이 될까 책상에 엎드려서 어린 잎맥을 매만진다

 

    여기

    던져져 있는 나

    그 앞의 어린 식물

 

    장마에는 물을 주지 않아도 된대, 공기가 습해서. 간편한 생활 방식에 나는 경악하고 나는 얼마나 복잡한 방법으로 비슷하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늠한다

 

    창문을 연다

    베란다 주변에 빗물이 고여서 썩기를 바라고

 

    곧 무언가가 사라질 것이다

 

 

 

분갈이

 

 

    분갈이를 했다. 위 사진은 ‘하트호야’ 고 물론 개별적이고 사적인 이름 또한 가지고 있는 나의 식물친구다. 이 식물은 아주 느리게 자란다고 했는데, 그래도 두 마디나 자라서 분갈이를 할 때를 맞이했다. 화분을 퍽 오랫동안 세심하게 골라서 분갈이를 해줬다. 얇은 플라스틱 화분에서 하트호야를 위로 쭉 뽑아낼 때, 뿌리에서 흙이 후두둑 떨어졌다. 뭔갈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고 마치 피를 처음 본 의사처럼 긴장했다.

    화분에 흙을 꾹꾹 눌러 채우며 어떤 생명을 책임지는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 슬프고 무섭고 무거운 일이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가 계속 강아지며 고양이를 키웠기 때문에 생명이 내 주변에 있는 게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좋아한다. 그 보드라운 털과 나만 바라보는 이성 이전의 사랑을 사랑하지 않고서 나는 배길 수 없다. 그 순박하고 순진한 눈동자에 내가 비치는 모습을 보면 너무 좋다. 평온하다.

    그 생명들이 십 년 전후로 죽을 때, 나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슬프고 마음이 아렸지만 그게 전부였다. 주 보호자가 아니라서 나는 슬픔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이 나의 뺨을 핥을 때 내가 이들의 죽음을 책임지지 않아도 되어서, 그래서 나는 간편하게 그들을 사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늙어서 병원에 다니고 치매에 걸려 가리지 못하는 배설물을 치우는 것은 주 보호자인 할머니의 몫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들과 산책을 하고 예쁘다고 끌어 안아 주는 피상적인 사랑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사랑은 즐거운 취미에 가깝다.

    서울로 올라오고 혼자 살면서 나는 나의 주 보호자가 되었다. 아직 아무것도 키워보지 못했던 내가 정말 까다롭고 거슬리는 생명인 나를 키워야 했다. 제때 밥을 먹이고 적당한 때에 운동을 시켜주고 좋아하는 책과 음악을 제공해주고 적절히 사랑해주고 세심하게 살펴야 했다. 나와 너무 가까이 있는 나는 너무 괴롭다. 이 생명은 나에게 너무 컸다. 무거웠다. 귀찮았다. 전부 내던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뒷산 수녀원에 올라가서 오디를 따고 가르쳐주는 식물들의 이름만으로 살고 싶었다. ‘싶었다’ 라고 말하는 이유는 결국 단 한 번도 그러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거라는 증거다.

    그래서 다른 생명을 책임질 생각은 절대 하지 않으려 했다. 세심함은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가에 대한 증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면에서 두 번 실패했다. 나는 자주 다른 생명과 내가 함께 살기를 바라고, 그러면서도 그것에 대한 깊고 끈질긴 책임감에 대해서는 쉽사리 잊어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 화분을 들일 때는 조금 달랐다. 나를 위해 골라준 식물친구를 받아들면서 나는, 이런 어린 식물을 나에게 골라주는 마음을 상상할 수 있었다. 나는 새 화분을 들이며 점을 치지는 않았지만1 이 식물이 죽지 않고 오래 자라는 동안 나는 어디까지 자랄 수 있는지를 생각했다.

 

    사랑이 나에게 주는 넓은 시야를 상상한다.

    그러므로 아직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아직 멀었고

    모두 닿지 않았다.

 

    비가 온다.

    잠시 후 만날 나의 연인에게

 

    나는 너의 이름을 붙인 화분의 흙 밑둥을 눌러주며 네 이마 사이를 입술로 누르는 상상을 했다 아주 많이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1. 권나무, 화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봄 제60회 정기학술대회 영상(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과 공동학술대회)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봄 제60회 정기학술대회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과 공동주최

주제: 《민주주의와 포퓰리즘, 그 해석의 정치철학적 스펙트럼》
일시: 2021년 6월 5일 토요일 오후 12시 50분 시작
장소: 온라인(Zoom)방식으로 진행
《민주주의와 포퓰리즘, 그 해석의 정치철학적 스펙트럼》이라는 시의성 있는 주제 아래 2부에 걸쳐서 총 6개의 발표와 논평으로 진행

– 학술대회 순서 –

개회사: 연세대 인문학연구원장 김장환(연세대)
개회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이사장 김교빈(성균관대)

1부 민주주의와 포퓰리즘 / 사회: 김은주(서울시립대)
포퓰리즘과 포스트 트루스 – 한길석(중부대) / 논평: 조배준(건국대)
포퓰리즘의 이중성과 민주주의의 민주화 – 한상원(충북대) / 논평: 김성우(상지대)
신체적 수행성과 정치적 대중 주체의 형성 – 조주영(충북대) / 논평: 이지영(이화여대)

2부 헤겔과 아렌트 / 사회: 이관형(정치경제연구소 대안)
혁명적 반혁명 – 헤겔의 프랑스 혁명 진단 – 남기호(연세대) / 논평: 이정은(상명대)
악의 평범성과 민주주의 – 이승준(동국대) / 논평: 조은평(상지대)
아렌트를 통해 본 페미니즘과 민주주의 – 정유진(서강대) / 논평: 주현(건국대)

3부 종합토론 / 사회: 서영화(한신대)

폐회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 연효숙(연세대)

 

  • 학술대회 자료집 다운로드 : http://www.hanphil.or.kr/board04/view.asp?key=7
  • 유튜브 링크: https://youtu.be/8b4–wR4m4c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5월 월례발표회 영상 “현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권력구성과 포스트 민주주의”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5월 월례발표회 영상 “현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권력구성과 포스트 민주주의”

 

학술1부에서 기획한 2021년 2월부터 5월까지의 월례발표회는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들’ 1]이라는 기획 아래 총 네 번의 발표가 예정되었고 이번 5월이 마지막 차례 발표입니다.

주 제 : 현실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권력구성과 포스트 민주주의

발표자 : 이원혁(서울시 인재개발원)

토론자 : 김성우(상지대학교)

일 시 : 2021년 5월 31일(월) 오후 4시 ~ 6시

장 소 : 온라인 줌 회의실

 

동영상 링크: https://youtu.be/xf9yOTi5IpM

예스터데이 / 어제에서 언제나 어제가 되는 오늘 [유운의 전개도 접기]

예스터데이 / 어제에서 언제나 어제가 되는 오늘

 

이유운

 

예스터데이

 

전화가 오랫동안 울리지 않으면

차라리 전보를 치던 때가 사랑하기 편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예스터데이에 갔다

아득한 창가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보러

 

내가 전화를 기다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내가 이 곳으로 올 것을 알고 있었고

내가 자신의 바지 밑단이 말린 모양 때문에 고장나기를 원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 사람

 

그는 머리를 풀고 셔츠를 벗으면서

나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내 이름도 모르고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나는 앉기 전에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해야겠다고 말한다

휴대폰 따위는 만지지 않아야 사랑하는 사이니까

 

반들거리는 창가에서

금방 튀긴 팝콘을 먹고 맥주를 따고 오프너를 만지면서

생각

했다

 

일기장을 너무 함부로 펼쳐놨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던 뒷목의 문신도 너무 헐렁한 옷을 입고 있다

 

이런 고통을 이야기하려면 알콜중독자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상담을 위해 그리고 다시 술을 마실 수 있기 위해 구걸을 하기 위해

철 지난 스키복을 덮고 길거리에 누워야 하는 결말이 정해져 있을지도

 

그래도 위인들의 일기장은 언제나 출간되니까

 

위인이 되려면 뭐든 해야 하잖아

레몬을 먹고 인상을 찌푸리지 않거나

동시에 스물여덟 명과 연애를 하거나

혀로 체리꼭지를 묶거나

 

예스터데이가 흘러나온다

 

그는 휴대폰을 충전하는 나의 등 뒤에 있고

나는 발뒤꿈치로 그의 앞까지 걸어가고

불 좀 빌립시다 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은 사랑 좀 빌립시다, 목숨 좀 빌립시다 구걸하고 싶었지만

 

녹내장에 걸린 늙은 고양이와

슬개골이 다친 강아지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가장이었으므로

한 번도 나를 가여워해보지도 못했고

나를 가여워해달라고 구걸해보지도 못했다

 

뒤에서 그가 부른다 아직 멀었어요?

 

아직 멀었어요 내겐 사랑도 구걸 같아요

어떻게 걸어야 할 지도 모르겠고

자기소개를 할 때는 여전히 지옥 같아요

그러니까 아직 멀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먼 사람은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기 때문에

등을 돌리면서 고고하게 웃는다

기다렸어요? 하고서

 

 

 

 

어제에서 언제나 어제가 되는 오늘

 

 

오래된 공간을 좋아한다. 그 공간에 얽힌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들은 오래된 엽서처럼 나에게 오래 있다. 오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서대문구에서 내게 가장 친숙하고 오래된 장소는 ‘예스터데이’다. 카카오맵에 따르면‘예스터데이’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성산로 531, 2층에 위치한 호프, 요리주점이다. 원래는 경양식집이었고, 카페로 바뀌었다. 그리고 내가 처음 그 곳에 갔을 땐, 지금처럼 호가든 여섯 병과 나초를 한 세트로 엮어 파는 곳이었다. 깊이 안 쪽으로 몸을 둥글게 말고 앉아야 하는 커다란 소파 같은 의자, 언제 와도 비슷한 플레이리스트, 베티가 찍혀 있는 냅킨들. 나에게 가장 오래된 예스터데이의 장면들이다.

나는 이 곳에서 처음으로 나의 언니들과 선생님을 만났다. 축하할 일이나 함께 만날 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이 곳에서 만났다. 나는 이 곳에서 환풍구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며 많은 것들을 싫어하는 법을 배웠다. 병을 빙글빙글 흔들어 적당하게 호가든을 따르는 법을 배웠다. 어떤 혁명은 누군가를 지독하게 죽일 수 있다는 것을 배웠고 이렇게나 슬프고 험난한 세상에서도 명랑하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웠다. 그것은 언니들과 선생님이 나 대신 슬픔을 먼저 맞아주기 때문에 그랬다.

대학원에 와서 가장 신기한 것은 ‘세미나’였다. 세미나에서 더듬더듬 낯선 말들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읽는 법을 배우는 것도 신기했지만 제일 신기한 것은 다들 나를 먹인다는 것이었다. 커피를 사주고, 밥을 사주고, 술을 사주고, 책을 사주고, 연필을 깎아줬다. 보답은 공부를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물론 나는 가끔 세미나에서 도망을 쳤고 ‘훌륭한 사람’이라는 말이 마음 어딘가에 뻑적지근하게 걸려서 불편했던 적도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무튼 나는 성실한 학생은 절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생각해보면 언니들이 나보다 엄청나게 넉넉했을 리도 없는데, 그들은 나를 먹이는 데에 절대로 인색하지 않았다. 밝고 너른 눈으로 나를 봐주는 언니들의 둥근 눈동자를 생각하면 힘이 난다. 내게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으려는 고집과 태도를 만들어준, 성실하고 그래서 생각하면 조금 슬퍼지는 언니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신뢰를 보낸다. 그들이 많이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을 슬프게 만드는 것이 예스터데이에서 마감 시간에 나오는 ‘예스터데이’ 노래 외에는 없었으면 좋겠다.

엽서처럼 오래 된 사람들을 떠올릴 때 그들과 자주 있었던 장소는 아주 중요하다. 눈치 챘는 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글에서 일부러 ‘공간’과 ‘장소’라는 말을 번갈아 혼용해서 썼다. 적확하게 단어를 골라 쓰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철학 연구자가 최대한 빨리 타파해야 할 아주 나쁜 버릇이다. 하지만 나는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는 단어들을 여러 개 늘어놓은 다음 그 단어를 상상하기 좋은 다른 나라의 언어나 옛날 사람들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고약한 취미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나는 ‘공간’이라는 단어의 한자 표기를 좋아한다. 空間. 빈 것 사이. 숲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바람 소리가 사실 나무가 흔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나무 사이의 빈 공간이 흔들리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무서울 정도로 짙은 초록색 나무들이 가득한 숲을 상상한다. ‘장소’ 라는 단어에는 유난히 일본어가 어울린다. 장소(場所). ばしょ. 조금 웃긴 말이지만 그 발음을 할 때마다 모아지는 입술의 모양이 귀여워서 그렇다.

 

장소란 말은 슬프다. 가변적이니까.

버스를 타고 서대문구를 지날 때마다 꼭 예스터데이의 간판을 확인한다. 야자수가 반짝거리는 촌스러운 간판에 불이 들어와 있는 것을 확인해야 마음이 놓인다. 예스터데이가 몇 번 변했다는 사실은 나에게 약간의 불안을 야기한다. 저 곳에서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우고 “너는 말이다, 좀 우울하지 않느냐. 희망을 가진 존재는 명랑해야 한다. 명랑함에서 희망이 나온다! 혁명이라는 것도, 영원이라는 것도. 생의영원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어디서 온 것 같으냐. 명랑한 눈! 명랑한 태도에서 온 것이다.” 라고 말했던 선생님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리고 선생님의 손에 자꾸 땅콩이며 안주를 쥐어주고 “네가 벌써 스물아홉이야? 나는 아직두 네가 스물다섯 같애.”하고 웃는 언니의 얼굴. 내 손등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고개를 숙이고 몰래 웃던 연인의 얼굴. 내 사랑의 형태들을 모두 이해했던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예스터데이가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라게 된다.

 

장소란 말은 즐겁다. 가변적이니까.

「예스터데이」는 정말로 예스터데이에서 썼다. 사랑의 앞에 있을 때 어쩔 줄 모르던 마음을 담아 썼다. 술을 마시면 솔직해진다고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더 거짓말을 하고 싶어진다. 아무렇지 않은 척, 내게 사랑이 별 것 아닌 척, 그에게 내가 목매지 않은 척. 다 거짓말이다. 사랑이 별 것 아닐 리가 없다. 나는 그런 것들도 누가 가르쳐 주었으면 하고 바랐지만 이런 것은 내가 스스로 나아가 먼저 맞아야 할 슬픔이나 두려움이었다.

나는 사랑을 시작할 때 못된 버릇이 있다. 자꾸 그와 함께 할 영원을 상상한다. 오래 참는 사랑이 온유할 거라는 오랜 가르침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을 생각하다 보면 순간을 놓친다. 소홀해진 순간들이 결국 깨지는 것은 나 때문인데 나는 그것을 견디질 못한다. 사랑이 나에게 이와 같은 무서운 얼굴로 다가올 때 이 시를 썼다. 내게 가장 사랑스러운 공간에서 이토록 나에게 무서운 시를 썼다는 것이 모순적이다.

하지만 예스터데이는 내게 언제나 무언갈 배울 수 있는 공간이므로 나는 이 무서운 시에 기꺼이 예스터데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지금의 나는 연인에게서 성실하게 순간을 잡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이 배움의 과정에서는 누구보다 성실하고 탁월한 학생이 되기를 원한다.

「예스터데이」가 너무 슬픈 시라는 벗의 말에 나는 정성껏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 구절을, 베티가 인쇄된 예스터데이의 냅킨 뒤에 써서 주었다.

 

“너는 슬픈 시를 쓰는구나.

슬픔이 시가 되었으니 안 슬퍼야 할 텐데.

시가 된 슬픔은 어느 다른 나라로

잠시 여행을 간 거야.

어느 날 건강히 다시 돌아올 거란다.”

 

                                                                                  ― 박시하, 「일요일」

 

 

너무 슬픈 시라는 것은 없다. 영원한 슬픔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믿는다. 어떤 것들은 영원할 거라고 쉽게 믿었다. 믿는다는 건 어떤 태도니까. 그런 태도를 오래 취하고 있으면 그런 행동을 하게 되고 시간이 오래 지나면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된다. 그래서 나는 신실하게 무언가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믿음이 깨진다는 말은 너무 무책임하다. 믿음은 잠깐 멈출 수 있다. 같은 자세도 오래 취하면 온 몸이 저리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산산조각난다고 하면, 그건 너무 쉽고 게으른 설명이다. 조금씩 자세와 태도를 바꾸어 가면서 믿음을 지속한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면 처음의 태도와 퍽 달라져 있지만 그것도 믿음이다. 오디세우스의 배 모순 논리 같지만 사실이다. 믿음은 사실이니까.

 

명랑한 태도.

어떤 것들은 영원할 거라고 믿는 태도로.

어떤 것들은 영원하고

영원하다고 믿는 태도는 신실하다.

나는 너무 염려하지 않는 삶을 믿는다.

 

 

작가의 말

twt @writecloudpen

6월 13일을 기억하며.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가난의 현실적인 미묘함에 관하여, <기생충> [톡,톡,시네톡]

 

가난의 현실적인 미묘함에 관하여, <기생충>

 

양윤영(한국방송통신대학교 재학)

 

우리 집은 가난했다. 내가 성인이 되면서부터는 조금 나아졌지만, 학창 시절 내내 나에겐 차상위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그게 부끄러웠냐면 꼭 그렇진 않았다. 차상위여서 지원받는 것도 있었고, 공부에는 관심이 없던 내가 집이 가난해 학원을 못 가는 것을 핑계로 하고 싶은 것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를 특성화로 간 이유도 빨리 취업을 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대학을 갈 필요가 없어서 수능을 준비하지도 않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온종일 텔레비전을 봤다. 나는 가난한 가운데에 제법 즐겁게 살았다. 마치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기택네 집이랑 비슷했다. 가장 완벽한 계획은 무계획이라는 기택의 말처럼 나는 특별히 계획을 세우거나 뭘 바라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 어차피 그래봤자 이룰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다 내게 꿈이 생겼다. 웹툰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중·고등학교를 보내는 동안 한국만화계는 웹툰으로 넘어가면서 시장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전까지 만화가를 꿈꾸는 것이 내게는 사치라고 생각했는데, 점차 커지는 웹툰 시장을 보니 이곳이라면 충분히 뛰어들어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림을 배울 돈이 없었다. 입시학원만 해도 한 달에 50만 원은 드는데, 우리 집은 그 돈을 낼 형편이 안 되었다. 혼자서 연습하기엔 재능이 없었다. 선을 어떻게 그어야 하는지, 색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도서관에서 빌린 만화 작법서를 아무리 읽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다른 쪽으로는 재능이 있었는데, 이야기를 쓰는 능력이었다. 내가 만든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면, 다들 재밌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문제가 내 발목을 잡았다. 만화를 공부하거나 그릴 시간이 부족해진 것이다. 스무 살이 되면서 나는 회사에 다녀야만 했다. 내가 일을 그만둔다고 집안이 힘들어지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벌어야 더 나아지는 것은 분명했다. 만화에 신경 쓸 시간은 당연히 줄어들었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지만, 내가 봐도 내 만화의 작품 수준은 너무 낮았다. 나는 계속 투고했고, 계속 떨어졌다. 그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내게 시간과 돈이 충분했다면 어땠을까 계속 가정해보았다. 그건 좀, 비참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건 비단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 주변에 재능이 아주 뛰어난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림이라는 기술을 익히기 위해 돈을 지불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점점 더 뒤처진 것이다. 그 차이는 처음엔 별거 아닌 것 같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가속되었다. 그리고 결국 깨달았다. 가난한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건, 그냥 내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는 것을.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의 가족들이 박 사장의 집에 하나하나 들어갈 때, 처음에는 그 상황이 코믹하고 재밌게 그려진다. 기택네는 박 사장네를 놀리기도 하고, 착하고 멍청하다며 비웃기도 한다. 그러나 박 사장네는 부자다. 비가와도 공기가 맑아질 테니 좋다고 생각해도 되는, 멍청해도 문제없이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지위에 있다. 그에 비해 기택네는 생각해야 하고, 남을 속여야 한다. 그것이 가난의 속성이다. 비가 와 집이 침수되었을 때, 기정의 표정은 씁쓸하다. 그전까지 기정은 남을 비웃을 여유가 있었지만, 비가 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온통 난리가 난 집, 구정물이 역류하는 변기에 앉았을 때야 자신에게 솔직해진 것이다. 자신이 사는 곳, 그곳의 사라지지 않는 냄새, 올라오는 변기 물. 기정은 박 사장네 식구들을 속인 동시에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을지 모른다. 자신이 정말 제시카라고 말이다. 행복한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현실은 늘 더 끔찍하다.

 

<기생충>이 가난을 다룬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더욱 주목받은 이유는 바로 이 점이 아닐까. 진짜 가난한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현실적인 미묘함을 잘 잡아내는 것은 무척 어렵지 않은가. 영화의 마지막을 보며, 나는 기우가 기택에게 보내는 편지가 이루어질 법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는 그게 어떤 것보다도 비참한 소망이라는 생각에 조금 슬퍼졌다. 가난은 그 무엇보다도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물론 나는 그 감정에서 벗어나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지만, 뒤를 돌아보면 20대 초 돈과 시간을 만화에 투자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 속상해하는 지망생이 있다.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사실, 우리 집의 재정이 그 이후 나아졌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고 가세가 더욱 기울어졌다면 아마 나는 만화를 완전히 포기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면 씁쓸해질 수밖엔 없다. <기생충>의 그 결말처럼.


 

두 번째 글 – 19세기 동아시아 [좌충우돌 우리철학 읽기] (2)

좌충우돌 우리철학 읽기 : 두 번째 글

19세기 동아시아

 

박영미(한철연 회원)

 

사진1 ‘흑선’ │ 출처 위키피디아

 

 

  1. 새로운 시대

 

동아시아의 근대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밀접하게 연관되어 한 국가에 국한해서 이야기하기 어렵다. 또한 한 중 일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근대의 모습은 함께 봤을 때 우리 자신을 보다 잘 볼 수 있게 하기도 한다. 동아시아 근대를 이야기 하면 항상 전제되는 물음이 있다. ‘근대란 무엇인가?’ ‘근대의 시작은 언제인가?’ 사실 이 두 물음은 하나이다. ‘근대를 어떻게 규정하는가’로부터 ‘근대의 시작이 언제인지’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의 동아시아 근대에 관한 이야기를 이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지는 않겠다. 『코렐젝의 개념사 사전』 서두에서 수십 년간의 개념사 연구에서 ‘근대’ ‘근대적’ ‘근대성’처럼 자주 다루어졌던 개념은 없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근대’는 오랫동안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고 그만큼 그 정의가 매우 넓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개념으로부터 글을 시작하는 무모한 도전(?)은 하지 않으려 한다. 시대에 대한 규정으로부터가 아닌 이전과는 분명히 다른 사건들과 사유들을 읽고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근대’를 구성하고자 한다. 그러다보면 연재의 마지막쯤에 우리의 근대에 대해 얼마간 정리해서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19세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사건은 서양이 가진 물리적 힘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는 함선의 출현과 그들과의 충돌(전쟁)이다. 그렇기에 동아시아 3국은 모두 예외 없이 근대의 기점을 서양과의 충돌에 두고 있다. 1840년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 1853년 일본에 대한 미국 페리함대의 개항 요구, 1860~70년대 한국과 프랑스 미국 일본의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이다. 특히 함선에 포함된 거대한 철제 증기선은 누구도 보지 못했던 배였다. 일본에서는 이 배를 ‘흑선黑船’이라고 불렀다. ‘검은 배’라는 명명은 단순히 색을 묘사한 것만이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공포, 즉 거대한 힘을 목도한 후의 무서움과 그 힘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투영된 것이었다. 각기 시기는 달랐지만 한 중 일이 경험한 사건은 동일했다. 그러나 대응은 동일하지 않았다. 공포는 동일했지만 그 배경과 강도는 달랐기 때문이다. 일본은 서양 제국주의의 힘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기에 더 두려워했고, 중국은 자신의 힘을 과신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한국은 무지했거나 중국에 기댈 수 있다고 믿고 아무런 대비 없이 문을 걸어 잠갔다.

 

 

  1. 19세기 동아시아가 걸었던 길

19세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양과 전면적으로 충돌 한 것은 중국이었다. 아편 매매를 둘러싼 중국과 영국의 대립은 결국 1840년 아편전쟁을 야기한다. 중국은 광주부터 영파 상해에 이르는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패퇴한 후 마침내 1942년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남경조약에 조인하고 개항을 한다. 이후 청조 타도를 외친 태평천국운동(1851~1864)에 의한 내적 충돌과 두 번째 아편전쟁(1860)으로 영 ·프 연합군에 의해 북경의 원명원이 불타는 외적 충격을 겪고서야 중국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변화를 모색한다. 1860~90년대 초반의 양무洋務운동과 1890년대 중반 이후의 변법變法운동을 통해 본 중국의 서양 수용과 변화의 양상은 비교적 단계적이고 점진적이다. 양무운동은 체제의 안정과 부국강병을 목표로 제한적인 서양의 기술의 수용과 변화만을 허용했고, 서구 열강의 지배가 가속화되고 결국 일본과의 전쟁(청일전쟁)에서 패한 후에야 서양과 같은 근대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 전면적인 서양의 수용과 개혁이 시도되었다. 이때 양무운동을 이끈 집단은 청조의 관료들이었고, 변법운동을 이끈 집단은 젊은 지식인들이었다. 변법운동도 결국 실패했지만 이들의 도전과 한계는 중국 사회 전체의 틀을 바꾸기를 꿈꾸고 실행한 혁명(신해혁명)을 배태한다.

중국이 개항과 그 이후에도 서양과 계속 충돌했던 것에 반해 일본의 개항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1853년 에도 만에 미국 태평양 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출현한다. 페리는 이듬해 초 다시 와서 국교를 수립할 것과 기항지를 제공할 것을 요구했고, 막부는 요구를 수용해 1854년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1858년 미일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패배한 것에 대해 당사자였던 청이나 조선에 비해 일본은 큰 위기의식을 가졌다. 당시 국제 정세 정보를 수집하면서 서구 열강의 움직임과 아편전쟁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고, 농민 분규와 재정 악화로 어려움에 직면했던 막부는 쇄국을 포기하고 개항을 결정한다. 그리고 적극적 개국開國론자들과 내정 개혁을 주장하는 양이攘夷론자들에 의해 빠르게 변화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250여 년간 유지되었던 막부체제에서 일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 전환하고, 막부-번 체제의 한 축이었던 지방 권력과 무사 중심의 신분 제도 및 징병 제도를 폐지한다. 그리고 곧바로 서구 여러 나라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그들의 문명을 직접 보며 새로운 국가 건설을 구상한다(이와쿠라 사절단). 1889년 메이지헌법을 제정하고 입헌군주제 국가를 건립한 후, 러일전쟁 한국병합의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길을 걷는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 서양이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조선은 뒤늦게 서양과 여러 차례 충돌하고 일본에 문을 연다. 국경을 접하게 된 러시아는 1864년 압록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했고, 1866년 천주교도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던 병인교난에서 이루어진 선교사 살해의 책임과 조약 체결을 요구하는 프랑스 해군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한다(병인양요). 같은 해 통상을 요구하며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탄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서양 군대의 위력을 실감한 조선은 서양의 기술을 통한 군비강화를 꾀한다. 그렇지만 1871년 최신 무기로 무장한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했을 때 조선군은 구식 총포와 활로, 무기가 없는 자는 맨주먹으로 싸웠다(신미양요). 이때는 중국은 자강自强을 위해 양무운동에 힘쓰고, 일본은 스스로 자신들의 정치체제를 바꾸던 시기였다. 고종의 친정을 계기로 쇄국을 유지하던 조선의 대외정책은 비로소 변화했고, 1876년 일본 1880년대 서양 열강과 잇달아 조약을 체결하며 굳게 닫혔던 문을 연다. 준비되지 않은 채 맞이한 거대한 변화는 이미 임계점에 이른 내부의 문제들을 증폭시켰다. 내적 외적 갈등은 계속 중첩되었고(임오군란 갑신정변),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은 당시 조선이 직면했던 문제들이 무엇인지, 그 해결 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줬다. 뒤늦게 변화의 필요를 자각하고 여러 집단에서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위태롭게 서 있다 미끄러지기 시작한 한국은 멈추지 못하고 피식민被植民에 이른다.

 

사진2 신미양요의 미군 │ 사진출처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4147126

 

 

  1. 시대를 이끈 힘에 관한 단상

 

19세기 동아시아가 걸었던 길을 한 걸음 물러서 보다보면 이 시대를 이끈 힘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긴다. 가장 먼저 눈이 가는 것은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이다. 일본은 흑선에 가졌던 공포가 컸던 만큼 그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빠르게 정치체제를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1871년에는 미국과 유럽에 조약 개정 교섭과 시찰을 위한 사절단을 파견한다. 목표했던 조약 개정은 실패했지만 사절단은 1년 10개월 동안 서양 12개국을 돌며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직접 보고 이를 통해 자신들이 건립하고자 하는 새로운 국가를 기획했다. 100여 명의 사절단에는 젊은 관료들뿐 아니라 46명의 유학생이 포함되었다(여성 5명). 그 다음으로 눈이 가는 것은 중국의 변법운동이다. 청일전쟁의 패배, 일본의 근대적 발전에 자극 받은 강유위를 중심으로 한 젊은 지식인들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양무운동을 비판하며 서양의 정치와 사상의 수용을 통한 중국 사회의 변화를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1898년 무술변법으로 실현되었으나 결국 보수파에 의해 좌절된다. 변법운동은 좌절됐지만 이후 강유위 엄복 양계초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국가가 주도했고 변법운동은 지식인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동일하지는 않지만, 능동적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한 위로부터 작동한 시대의식이었다는 점은 같다.

한국에도 이들과 동일한 인식과 실천을 한 이들이 있었다. 그렇지만 눈에 띄는 것은 동학농민전쟁이다. 새로운 시대의 한 축을 관료나 지식인뿐 아니라 농민도 담당한 것이다. 19세기 중반 농민 반란의 빈번한 발생은 동아시아의 공통적 현상이었다. 하지만 1894년 동학농민전쟁처럼 농민이 전면에 나와 국가와 충돌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동학농민전쟁과 자주 비교되는 중국의 태평천국운동은 농민이 주도하지는 않았다). 종교적 성격과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반박도, 이전의 농민 반란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반박도 모두 어느 정도 타당하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19세기 동아시아의 격변에 서양과의 충돌이라는 외부적 요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심각한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이들이 내부적 요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위로부터 작동한 시대의식은 외적 요인을 시대의 중심에 놓고 이를 통해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정치 경제 사회적 모순을 혹독하게 겪어야 했던 농민들에게 이와 같은 해결 방식은 너무 요원했고 상황은 절박했다. 동학농민전쟁에서 농민들은 직접 교조 신원부터 그들이 겪고 있는 부당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의 요구 그리고 척왜양斥倭洋까지 주장했다. 이는 위로부터 작동한 시대의식과는 분명 다른, 자생적으로 변화의 필요성을 체득하고 실천한 아래로부터 작동한 시대의식이었다.

 

 

 

▪ 우리 근현대의 공간2 : 인천 개항 박물관

인천 개항 박물관은 개항기 일본 제1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개항 이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여러 근대문물과 관련 자료가 정리되어 있다. 바로 옆 건물이 인천 개항장 근대 건축 전시관이고, 멀지않은 곳에 인천 차이나타운이 있다.

 

사진3 인천개항박물관1 │ 사진출처 필자

 

사진4 인천개항박물관2 │ 사진출처 https://www.incheonopenport.com/museum/111

 

사진출처 필자

사진출처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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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필자

새로운 철학적 글쓰기를 향한 거침없는 도전? 이종철 선생님의 『철학과 비판 –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위해』를 읽고서

새로운 철학적 글쓰기를 향한 거침없는 도전?

이종철 선생님의 철학과 비판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위해를 읽고서

 

연효숙(한철연 회원)

 

철학자는 기술자, 아이들, 놀이꾼, 장사꾼처럼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불편한 글쓰기의 효과는 어디까지 미칠까? 고통, 폭력과 죽음에 직면하여 철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종철 선생님(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상임연구원)의 신간 『철학과 비판-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위해』는 460여 쪽의 분량으로 제법 두툼한 책이다. 사실 『철학과 비판』이라는 큰 제목은 철학 전공자에게는 낯설지 않은 개념이어서, 처음엔 시큰둥했다. 그런데 부제가 흥미롭다. 에세이 철학의 부활? 여러 철학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저자가 염두에 둔 철학자들은 몽테뉴, 파스칼, 마르크스, 벤야민, 니체 그리고 아도르노 등이다. 이들의 글쓰기는 저자 말대로, 논문 형식을 빌지 않고 자유로운 글쓰기를 통해 삶과 현실에 대해 정신적 통찰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점들이 이 책에도 구현되고 있는가?

책 전체를 넘기다 보니 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점이 있다. 거의 주석과 참고문헌이 없다. 일단 어떤 전문적인 철학 연구서나 논문들 묶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말랑말랑한 신변잡기? 일기와도 같은 글쓰기? 이런 의문을 갖고 책을 읽어 나갔다.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 책은 대중서처럼 보이지만 전문적인 식견의 수준을 지닌 책이었다. 대중서와 전문 연구서의 모호한 갈림길에 있는, 그 경계에서 왔다 갔다 하는 하나로 규정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철학이 현실을 떠나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주장을 일관되게 써 내려가고 있다. 이 현실은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삶의 현장이다. 철학이 대중에게 외면받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현실에서 동떨어져 알 듯 모를 듯 현학적인 말로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탁상공론을 떠나 전제와 구속에 얽매이지 않고 창의적으로 생각하며 공리공담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연구 공간의 섬에 고매한 척 홀로 떠있는 고독한 철학자가 아니라, 기술자, 아이들, 놀이꾼, 장사꾼처럼 현실적으로 사유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일갈한다. 충분히 공감되는 이야기이다. 현실을 떠난 사유,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간섭받고 자신의 고민과 민낯을 삭제하여 동, 서양 텍스트 수입 오퍼상으로 전락한 철학 전공자들에게 퍼붓는 저자의 목소리, 귀 기울이고도 남는다. 다만 철학 전공자들이 몸담은 또 다른 진공 같은 현실에 이 목소리는 잘 스며들지 않는다.

저자는 글을 쉽게 쓴다. 술술 잘 읽힌다.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글이 쉬우면서도 깊이와 창의성이 있다.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꿈꾸는 이 책은 대중들의 눈높이에는 약간 높을 수 있으나 문턱은 높지 않다. 전문가들은 왜 이렇게 글을 쉽게 쓰지 못했을까? 그렇다고 철학의 특정 분야에 한정된 몇몇 전문가들만이 이해하는, 암호 같은 글들을 써 왔던 철학 전공자들을 폄훼할 필요는 없다. 종종 논문 심사를 위해 철학 전공자들의 논문들을 읽을 때, 나도 숨이 턱턱 막힐 때가 있다. 비전공자들은 읽기조차 어려운 암호 같은 글들이 계속 만들어지는 이유는 기성 학계가 요구하는 수준과 관행이 있기 때문인데, 아마 에세이 철학 글쓰기를 하면 거의 탈락일 것이다. 저자처럼 에세이식으로 논문을 쓴다면 어떠한 연구비 지원도 받지 못할 것이니 말이다. 이것이 우리를 옥죄는 또 하나의 현실이자 딜레마이다.

이종철 지음, 『철학과 비판 –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위해』, 도서출판 수류화개, 2021년 6월 1일 발간.

또 하나 인상 깊은 ‘글의 효과’ 중, 글의 최대 효과는 ‘불편함을 주는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 정말 공감이 간다. 불편하고 심지어 불쾌감을 주는 글은 처음에는 분노의 감정이 일지만, 다시 곱씹어 생각하면 나를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글쓰기는 잘 시도하지 않는다.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인심을 잃어서까지 공격적으로 글을 썼다가는 이 업계에서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이다.

서양 철학 전공인 나는 십여 년 전부터 동아시아, 동양 철학, 한국, 중국, 일본 등에 관심을 가졌다. 나는 서양에서 일어난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은 대충 얼개를 다 알고 있는데, 동아시아,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는 특별히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문득 서양 철학의 텍스트를 열심히 연구해 왔던 나 자신의 공허한 모습을 뒤늦게 보게 되었다. 서양 철학의 공부가 다 헛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서양 철학 연구에서 ‘나의 고민과 문제’와 ‘우리의 현실’을 절실하게 적시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동아시아, 한국의 현실과 역사에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나의 고민과 문제가 현실에 저절로 반영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현실을 외면해 온 나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돌아볼 계기는 충분히 될 것이다. 저자의 생각도 이런 맥락과 통하지 않을까 싶어서 ‘동아시아 사상’의 대목이 훨씬 더 잘 읽힌다. 물론 서양 철학을 거의 평생 연구해 온 저자에게 동양 철학의 고매한 수준을 기대할 필요는 없다. 왜 서양 철학 연구자인 저자가 『논어』, 『주역』, 『장자』와 같은 동양고전에 관심을 가졌는지, 저자에게 불교는 또 어떤 의미인지를 가늠해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또 하나 울림을 주는 대목은 ‘고통, 폭력과 죽음’에 대해 쓴 대목이다. 이제까지 철학은 이성과 진리, 논리 등에 대해서만 이야기했고, 감성, 죽음, 고통, 폭력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했다. 철학이 이런 문제들을 외면해 왔지만, 저자는 고통, 참사, 폭력 등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여기에는 밥벌이의 고단함도 같이 묻어 나온다. 저자가 철학 연구를 계속하면서도 생활의 기반을 지원해 주는 확실한 철밥통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번역 작업에서 빚어지는 저자의 고단한 노동, 생활고 등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을’들의 노동이 다 고단하듯이, 비정규직 철학 연구자들에게 밥벌이를 위한 노동은 정말 지겨우나 필수적인 우리의 또 다른 현실이기도 하다.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향한 저자의 도전과 모험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저자는 철학 하는 집단, 전문가 철학 전공 연구자들의 관행을 얼마나 어떻게 비판하고 있는가? 한국사회의 탐구에서, 특히 ‘한국학자들의 이중성’, ‘일본철학사전’ 등의 논평에서 그 논조의 강도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논평에 대해 기성 학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전처럼 그저 침묵과 무시, 무관심으로 치부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책은 일단 작지만, 반향이 있어 보인다. 독자들의 반응인지, 철학 전공자들의 반응인지는 아직까지 잘 분간되지 않는다. 이 반향이 불씨가 되어 더 멀리 퍼져 나가 들불처럼 번질 것인지, 불씨가 파삭 사그라들지는 좀 두고 봐야 할 것이다.

주석 없는 철학적 글쓰기는 가능한가? 이렇게 글쓰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글쓰기는 대중적인 글과 전문적인 글쓰기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말하는 것인가? 업계와 비업계 사이의 경계인의 위치에서 쓰는 글쓰기를 말하는 것일까? 저자의 이러한 시도는 과연 무모한 시도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글쓰기의 한 문화로 자리 잡을 것인가? 이에 대해 나 자신도 자신 있게 답을 내놓기는 힘들다. 자신의 문제로 철학 하고자 했던, 철학의 출발점에서 가졌던 나의 문제의식이, 철학 전문 전공자로 키워지면서 희미한 기억처럼 빛바래졌고, 현실은 또 냉혹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저자처럼 에세이 철학을 시도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저자는 우리의 철학의 현실에 커다란 파문을 던진 것은 분명하다. 그 파문이 찻잔 속의 미동에 그칠지, 거대한 파도가 될지는 그 누구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에세이 철학을 향한 글쓰기는 불안, 두려움, 고통에 직면해 있는 현대인들에게 공감을 줄 수 있을까? 철학이 대중들에게 외면받는 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대중들에게 전혀 공감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감정, 고독, 불안, 두려움 등에 대해 공감과 위안을 원한다. 물론 다른 인문사회 과학에서도 이런 문제들에 많은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은 어떤가? 여전히 철학 전공자들은 자신만의 높은 울타리 속에서 타인의 고통, 약자, 소외된 자, 이민자, 국외자들의 목소리를 외면해 온 것은 아닐까? 이런 소리 없는 아우성들을 듣지 않으려는 기성 철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에세이 철학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저자에게 되묻는다.

에세이 철학은 시대의 목격자, 고발자, 기록인의 역할을 담지(擔持)할 수 있을까? 철학 연구자들의 자화상으로 보이는 한 대목이 특히 눈에 띈다. 1980년대에 탄생한 여러 철학회의 탄생 비화를 적은 기록은 그 시대 철학을 하던 청년들의 고민을 생생하게 담아서 진한 울림을 준다. 내가 속한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탄생 비화에 대한 기록도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다. 1989년 ‘사회철학연구실’과 ‘한국헤겔학회’가 만나서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탄생하고, 다른 여러 학회로 이합집산 되었던 기록을 저자가 전하고 있다. 나도 이 과정에 잠깐 참여한 기억이 있다. 벌써 30년도 넘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그 당시 우리 젊은 시절, 그 시대의 치열한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어서 감회가 새롭다.

이제 남는 문제와 물음은 제자리이다. 철학은 무엇이고 철학자는 누구이며 그 역할은 무엇인가? 예전에 어떤 선배한테 들은 이야기가 퍼뜩 떠오른다.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주석 없이는 한 줄도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즉 권위 있는 철학자들의 책을 인용하지 않은 채, 오롯이 자신만의 이야기와 주장을 쓸 수 없었다는 고백이다. 그 이야기가 지금까지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숙제이기 때문이다. “철학함”은 “나의 철학함”인가? 그래서 많은 동·서양 문헌들을 소개하고 진열하여 지식을 파는 오퍼상이 되기를 멈추고 “진짜 철학자 되기”가 가능할 것인가? 이것이 에세이 철학의 목표일까? 저자의 바람대로 ‘에세이 철학’이 부활할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에세이 철학의 부활을 응원하면서, 저자가 주장하는 철학의 비판적 기능, 더 신랄하고 적나라한 고발 등을 통해 새로운 철학적 글쓰기를 위한 논쟁의 불씨가 훨훨 타오르기를 희망해 본다.


▼ 위의 글에 대해 『철학과 비판』의 저자 이종철 박사가 쓴 답글 바로가기

투명하고 무거운 / 사랑의 모양은 네모 [유운의 전개도 접기]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왔다.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투명하고 무거운 / 사랑의 모양은 네모

 

이유운

 

투명하고 무거운

 

 

그러면 우리는 도래하자

이해할 수 없는 시제와 선언

 

    “나는 나의 기원 이런 말들은 자주 소리내어 말할 필요가 있었다 사랑하는 입술을 매만져본다 아직 멸망이 오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아서 멍든 복숭아와 풋내가 나는 무화과의 껍질을 벗기는 네 손을 본다 춤추는 나무나 빛무리 같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아무것도 미워하지 않아

 

    네가 만진 나의 부분들은 아주 단단해졌어 나는 이걸 사랑이라고 자랑하고 다닌단다 이제 네가 만지지 않은 부분은 눈동자 뿐 연약하고 언제나 젖어 있는 이 검은 동그라미

 

돌아가는 테이프

오토리버스

또 돌아가는 테이프

멈추는 장면마다

어디선가 자라온 사랑으로 불거진 네 손가락 마디

 

손이 데일 것 같이 차갑기도 한

너무 가깝게 있어서 만지기가 어려워

 

    둥근 어깨. 깨무는 둥근 이. 남는 둥근 자국. 모두 만지며 사랑이 둥글다고 배우는. 둥글고 슬픈 학습

 

무릎을 꼭 붙이고 함께 앉아 있다

기울어진 모양으로

내기 하자. 더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일어나기로.

 

 

 

    사랑의 모양은 네모

 

 

    어렸을 적 가장 좋아하던 영화 세 편을 나열하면 지금의 인생과 취향을 알 수 있다는 말이 한창 트위터에 돌았었다. 나는 그 말이 조금 꺼림직하고 소름이 끼쳤다. 뭐, 당연하게도 그 명제의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그런 거다.

    그 말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렸을 때부터 내가 좋아하는 영화 세 편을 꼽아 보자면 《8월의 크리스마스(1998년, 허진호 감독)》, 《클래식(2003년, 곽재용 감독)》,《해피투게더(1997년, 왕가위 감독)》다. 너그럽게 다섯 편까지 허락해준다면 《퐁네프의 연인들(1991년, 레오스 카락스 감독)》과《쉬리(1999년, 강제규 감독)》도. 이 영화들로만 보면, 지금의 나는 내가 농담처럼(사실 아니지만) 자주 하는 말인, 나를 ‘사랑의 헐값에 팔아넘기는’ 어른처럼 자란 것 같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지원이 정원에게 ‘왜 결혼 안 했어?’ 라고 물었을 때, 정원이 웃으면서 ‘너 기다리느라고.’하고 대답하는 장면이다. 미소를 지으며 이 말이 꼭 사랑 고백이 아니라는 것처럼 가볍게 대답하는 정원의 얼굴. 나는 정원의 그 얼굴과 목소리에서 진한 사랑과 그리움을, 그토록 짙고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투명하게 말할 수 있는 표정을 보았다. 그때부터 나는 그런 어른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오래도록 투명하고 무거운 사랑의 모양을 가질 수 있는 어른. 하트 모양이 아니라 네모난 사랑의 모양을 가지고 있는 어른.

 

    나는 나에게 처음으로 사랑의 모양을 알려 준 어른과 그가 나를 사랑한 풍경을 떠올린다.

 

    정성스레 닦고 말린 오래된 선풍기가 돌아가는 사아악, 사아악 소리. 꼭 숲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다. 비가 오고 있다. 축축한 여름. 바람과 나를 찾는 숨이 함께 분다. 손톱을 깎고 버린다. 저것을 주워 먹고 내가 될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 아직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어린 내가 있다. 마루에 볼을 대고 눕는다. 차가운 바람. 햇빛이 따갑지 않아서 눈을 가늘게 뜨면 그 사이로 나뭇잎과 창문 살의 모양과 색으로 빛이 들어온다. 나보다 먼저 태어난 손이 내 눈꺼풀 위로 손차양을 만들어준다.

 

    내 눈가에 얼룩처럼 남은 기미와 주근깨를 만져본다. 그렇게 그 손이 나를 자주 가려주었는데도 햇빛과 시간의 자국은 생겼다. 아무리 내가 어딘가 숨는다 하더라도 사랑이 나를 찾아내듯.

 

    나는 이렇게 사랑받고 컸다. 이 때는 아직 사랑의 모양이 없었다. 빛무리처럼 춤을 추고 있을 뿐이었다.

 

    어렸을 때 살던 오래된 동네의 그보다 더 오래된 건물에는 유호철물이 있었다. 일층에는 유호철물, 이층에 진실다방과 당구장이 있었고 삼층에는 전당포와 창문에 검은 종이를 바른 알 수 없는 방이 있었다. 그 위로는 철문이 항상 굳게 닫혀 있어서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했다. 가끔 그 위로 올라가려고 하면 이층의 진실다방 이모가 고개를 내밀고 나를 불렀다.

거기 가면 안 돼.

뭐 있는데?

    진실다방 이모는 대답 대신 모나카를 줬다. 어른들은 진실을 감추는 댓가로 나에게 단 것들을 줬다. 진실다방 이모만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나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진실다방 이모의 멋쩍은 웃음과 그가 주었던 모나카의 단 맛이 떠오른다. 혀가 떫다. 진실다방 이모의 기울어진 아몬드 모양의 눈. 움켜쥐면 타원 모양으로 우그러질 것 같은 그 모양이 사랑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유호철물은 주인 아저씨 아들의 이름이 유호라서 유호철물이었다. 유호는 나보다 아홉 살이 많았고 차이나 칼라 교복을 입었다. 유호는 종종 나를 자전거 뒷좌석에 태워줬다. 유호의 자전거는 쌀집 자전거여서 뒷좌석이 판판하고 바른 모양이었다. 그 뒷좌석에 앉아 유호의 등에 얼굴을 대면 햇빛 냄새가 났다. 나는 유호가 햇빛으로 만들어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유호는 내가 종종, ‘난 커서 너랑 살 거야.’라고 말하면 곤란한 것처럼 웃었다. 어린 내 앞에서 거짓말은 하기 싫고 솔직해질 필요도 없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를 볼 때 보통 유호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내가 《8월의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유호와 정원이 닮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둘 다 살구비누를 쓸 것 같다. 비누로 머리를 감아 뻣뻣해진 머리카락 끝에서 여름 냄새가 날 것만 같다.

 

    유호의 등에서 나던 햇빛 냄새가 이상할 정도로 나이가 들면서 점점 뚜렷해진다. 나는 시력이 나빠서 안경을 쓰지 않으면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이 둥근 알사탕 모양처럼 보인다. 그런 모양으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사랑이 처음 만들어졌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했고 무언가를 사랑했다. 쉽게 사랑하고 자주 사랑했지만 어떤 사랑의 형태에도 능숙해본 적은 없다. 그래서 내가 받아온 사랑의 연원을 떠올릴 때마다, 이토록 희고 단단한 사랑을 받아왔는데 왜 지금의 나는 그런 사랑의 모양을 가지지 못했는지 나를 탓하고는 한다. 어린 눈 위로 손차양을 만들어주는, 거짓말 대신 모나카를 주는, 등에서 햇빛 냄새가 나는 그런 사랑과 내 마음의 모양이 달라서 가끔 놀란다.

 

    아직까지는 둥근 모양이 되는 사랑을 배우고 있다. 학습의 과정은 자주 슬프고 오래 사랑스럽다. 점차 네모낳게 단단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나의 마음은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지 않고 바닷가에 한참 서 있던 사람의 어깨처럼 엉망으로 껍질이 벗겨진 모양이다. 하지만 이렇게 훼손된 마음도 섬세하게 마련할 수 있다. 나는 이 훼손된 마음을, 섬세하게 마련한 모양을, 시라고 부른다.

 

 

 

 

 

이유운 withwho_@naver.com

그렇다고 해서 온종일 사랑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화여대에서 철학을 공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