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버티지 않는 삶을 위하여(자본론 에세이-6, 제10장: 노동일 ) [내가 읽는 『자본론』]

홀로 버티지 않는 삶을 위하여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인간은 누구나 평생의 고독과 공허함을 안고 살아간다고 한다. 흔히 ‘마음에 구멍이 있다’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무엇이 그 구멍을 채울 수 있을지는 사람마다 주장하는 것이 다 다르다. 어떤 이는 그 구멍이 신(神)의 자리라 하고, 다른 이는 사랑, 혹은 소울메이트의 자리라고 한다. 누구는 자연과 일치하는 삶의 자리라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결코 채워지지 못하기에 그저 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고독이 있는 반면에, 요즘 많은 사람이 느끼고 있는 공허나 외로움은 무척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본다. 현대의 공허는 마음에 구멍이 있는데, 그 구멍을 무언가가, 두꺼운 고무마개 같은 것으로 막고 있어서 질식당하는 느낌이랄까. 구멍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고무마개는 그렇지 않다. 그건 외부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비슷한 감정을 경험하고 있는 친구들끼리 모여 최근 6~7주 동안 일종의 생활 실험을 진행했다. 청년 중 대다수가 여가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넷플릭스, 인터넷 쇼핑 등과 같이 화면을 통한 활동을 하면서 보내는데, 우리는 처음에 그러한 생활방식이 우리 공허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디어에 찌든 ‘한심한’ 우리의 생활습관을 바꾸면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실험의 제목을 ‘화면과 단절하고 새로운 것과 연결하기’로 정하고, 각자의 규칙을 세워 실험을 진행해봤다. 실험의 핵심은 화면을 들여다보는 대신에 세상, 그리고 사람들과 더 연결되어보자는 것이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실험은 실패에 가까웠다.

나는 삶에 있어서 가장 회복하고 싶은 부분이 사람들과의 관계, 혹은 유대감이었기 때문에 실험 기간 최대한 많은 시간을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걸거나 직접 만나거나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시간을 늘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 5일 출근하는 데다, 통근 3시간, 아침에 준비하는 시간과 씻고, 자고, 최소한의 건강을 위해 운동하는 시간을 빼면 24시간 중 내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은 단 3시간밖에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도 수면 시간을 5시간 반으로 잡았을 때 가능한 얘기다. 나는 그 3시간을 주로 녹취록 푸는 알바와 글을 쓰고 강아지와 노는 시간 등에 할애하며 보냈다.

실험을 시작했으니, 이제 그 3시간을 사람에게 할애해야 했다. 나는 친구들이 보고 싶어 평일 저녁에 약속들을 끼워 넣고, 주말까지도 사람들로 꽉꽉 채웠다.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라 당연히 좋았지만, 같이 있는 내내 나를 짓누르는 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친구들과 웃고 떠들면서도 나는 얼른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너무나도 피곤해서 친구들의 이야기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고, 이들의 감정에 제대로 공감도 해주지 못했으며 많은 시간을 내주지도 못했다. ‘내일 출근해야 해서’, ‘집에 가서 또 할 일이 많아서’라는 말들로 늘 아쉽게 헤어져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헤어진 후 홀로 집에 가는 길이면 뭔가 찜찜하고, 함께했음에도 부재(不在)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친구를 만나고 집에 와서는 밀린 일을 하다가 늦게 잠들었다. 그러면, 다음날 출근해서 졸음을 견디려고 몸속에 커피를 계속해서 들이붓는다. 사람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 마음이 더 풍요로울 줄 알았는데, 몸이 안 좋아지고, 머리가 수시로 지끈거렸다. 그러다 보니 정신상태도 그리 온전치 못했던 것 같다. 좋자고 하는 실험이었는데 삶이 더 망가졌다. 그리고 나는 더 외로워졌다.

‘현대인이 살아내야 하는 삶은 우정이고 연대고 뭐고, 불가능한 삶이구나-’라고 생각했다. 마음속 빈 공간을 아무리 채우고 싶어도 불가능한 삶. 이토록 지치고 피곤한데 다른 사람의 삶에 진정으로 귀 기울 힘이 남을까. 사람이 채울 수 없는 공간을 넷플릭스와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과 소비가 채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지?’ 앞이 막막했다. 지금이야 겨우 인턴이라 몇 개월만 지나면 다시 조금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겠지만, 나중에 생계를 위해 노동하게 될 때는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텐데, 그 안에서 내 삶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염려되었다. 사람도, 감각도 흐릿해진 삶을 나는 버텨낼 수 있을까. 그저 화면을 들여다보며 공허함을 견뎌내는 일에 익숙해질까. 수많은 질문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해답을 찾아가던 중 나는 조금 더 무기력해졌다. 처음에는 내 습관과 마음가짐만 바꾸면 덜 외로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여가는 나의 것이 아니었고, 다음날 출근해서 일할 상태로 내 몸을 되돌려놓는 일에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여가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만나거나, 느긋이 앉아 독서를 하는 것 등의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소모해서는 안 되었다. 집에서 충전 중인 핸드폰을 집 밖으로 가져갈 수 없는 것처럼, 나의 몸은 오로지 ‘충전’이라는 것에, 집이라는 공간에 메여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노동을 해야만 하므로 구멍을 채우는 것은 개인의 몫일지 몰라도, 그것을 막고 있는 것은 구조임이 틀림없었다.

내가 쓰는 다이어리의 월간 페이지를 펼쳐놓고 가만히 보고 있으면, 숨이 막혀온다. 31개의 네모난 칸이 기대되고 설레는 날들이 아니라 마치 통과하고 이겨내야 하는 퀘스트(Quest)로 보인다. 언젠가부터 ‘오늘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아침을 맞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어서 끝나길 바라는 매일 매일의 끝에 나는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자유와 우정일까, 풍요로움일까. 혹은 암 덩이처럼 불어나는 고립감뿐일까.

 

『자본론』 제10장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처해있는 상황을 정확히 설명한다. 10장은 ‘노동일’에 관한 장인데, 노동자의 하루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마르크스가 친절히 설명해주는 장이다. 먼저,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노동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고 본다.

 

“노동일은 하루 24시간 전체를 포함하는데, 그중에서 노동력이 다시 봉사하기 위해 절대로 필요한 약간의 휴식시간은 뺀다.”

 

자본가의 시각에 따르면, 노동자는 자기 생에 전체에 걸쳐 노동력 이외에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노동자에게는 물론 휴식과 여가의 시간이 주어지지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시간은 사실 자본의 가치증식을 위해 바쳐지는 충전의 시간이다. 마르크스는 그리하여 우리가 신체의 성장과 건강의 유지에 필요한 시간을 빼앗기고, 신선한 공기와 햇빛을 즐기는 데 필요한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식사마저도 다음 노동을 위한 연료가 될 뿐이다. 마치 기계에 기름을 부어주듯 말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평균 식사시간이 12분뿐이라는 택배 노동자들을 떠올렸다.

마르크스는 자본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직 1 노동일 안에 운동시킬 수 있는 노동력의 최대한도라고 말한다. 그래서 자본가는 노동자를 더 밀어붙이게 되는데, 아예 노동자의 수명을 단축해버리는 것이다. 마치, ‘탐욕스러운 농업경영자’가 토지의 비옥도와 수확량을 맞바꾸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1

토지의 비옥도는 땅의 ‘기(氣)’와 같은 개념이다. 땅의 에너지는 일정량만 있어서, 다음 해 같은 땅에서 농사를 짓고 싶으면 땅의 기운이 전부 소멸하지 않을 방식으로만 농사를 지어야 한다. 작물에 따라, 어떤 땅은 한 번 농사지으면 소모된 기를 회복시키기 위해 7년이 필요하기도 하다. 땅의 힘을 한꺼번에 다 써버리거나, 땅이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으면 그 땅은 죽게 된다.

하지만 농업경영자에게는 땅의 수명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천지에 널려있는 것이 땅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본가 역시 천지에 널린 것이 노동자라고 생각한다. 농업경영자가 땅의 기를 전부 사용해 최대의 이윤을 창출한 후, 죽은 땅을 내버려 두고 새로운 땅을 개척하듯이, 자본가도 노동자의 수명을 길고 가늘게 유지하는 것보다는, 짧고 굵게 끝내려고 한다. 노동자의 노동을 최대한도로 쓰다가, 노동자가 나가떨어지면 다른 노동자로 대체하는 것이 자본가에게는 더 효율적이다. 천지에 널려있는 것이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노예무역에서도 같은 원리가 작동했다. 노예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에, 노예의 노동이 있어야만 지장 없이 생활할 수 있었던 노예 소유자는 노예를 당연히 인간적으로 취급할 수밖에 없었다. 노예가 죽으면 당장 자신의 삶도 지속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예무역이 본격적으로 실시되면서, 노예는 외국의 ‘흑인사육장’에서 값싸게 보충할 수 있는 ‘재료’가 되었다. 재료의 목적이 ‘소모되는 것’이듯, 그때부터 노예의 정신과 육체를 보존하는 대신, 최대한으로 노동력을 짜낸 후, 죽기라도 하면 다른 노예를 사 오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노예무역 이후, 천지에 널린 것이 노예였기 때문이다.

 

“노예의 수명은 그가 생존할 때의 생산성보다 덜 중요하게 되었다”2

 

생명과 맞바꾼 이 노예무역의 효율 중심 원리가 현대를 사는 내게 낯설지 않음이 가슴 아프다. 이 원리는 개인이 삶의 풍부한 면모들을 경험하지 못하게 막을 뿐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 존재의 가치마저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노예무역과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지금까지 수많은 노동자가 죽었고, 2020년 상반기만 해도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만 470명이다. 우리는 스스로 노동자임을 잊고 살아서 ‘노동자가 죽었다’는 말에, 마치 멀리 있는 누군가가 죽은 것처럼 느끼지만, 노동자의 죽음은 친구와 가족의 죽음, 나의 죽음과 같은 말이다. ‘노동자가 죽었다’와 ‘사람이 죽었다’는 같은 말이다. 산재만 불합리한 죽음으로 볼 수 있을까. 자살과 교통사고까지도 모두 다 생산효율이 최우선인 자본주의 체제하의 ‘산재’가 아닐까.

마르크스, 엥겔스와 베를린 TV타워

노동일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읽으며, 다시금 우리의 일상이 얼마만큼이나 우리의 것이 아닌지 실감했다. 그런데 우리는 매일매일 못난 자신만을 스스로 자책하고 있다.

한 가지 이야기로 올해의 마지막 에세이를 마무리하려 한다. 최근에 읽은 홍은전의 『그냥, 사람』3이란 책에는 수많은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장애인이다. 사회는 장애인의 부양의무를 그 가족에게 지운다. 하지만, 장애인이 홀로 생활하고 이동하기 힘든 사회에서 장애인의 부양의무가 지워진 가족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개인들이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을 감당하라고 강요하니 학대와 폭력과 방치가 다반사다. 라면을 끓여 먹다 불이 나서 다친 동생과 세상을 떠난 형의 이야기가 ‘가정사’를 넘어 사회적 문제인 이유, 치솟는 청년 자살의 원인이 청년들의 나약한 ‘멘탈’이 아닌 이유, 택배 노동자가 과로로 사망한 일이 해당 기업의 회장만의 잘못이 아닌 이유는 이 모든 일이 사실, 못난 개인들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 한 개인이 온전히 서기 위해서는 연대하고 보살피는 사회가 필요하다.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그뿐이다. 그리고 같은 이유에서 우리는 (지금은 다소 일그러지긴 했어도)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민주정치를 한다.

만약에 모든 건물과 시설, 교통수단이 장애인이 이용하기 편리한 구조로 되어있었다면, 사회의 돌봄이 가정의 보육 부담을 덜어줬다면, 청년들이 어렸을 적부터 서로 경쟁만 하도록 부추기는 교육과 구조가 아니었다면, 노동자들의 휴식과 안전이 법으로 보장되었다면, 우리는 이토록 홀로 버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토록 많은 죽음이 일상이 되어 무감각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사다난했던 2020년이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2020년은 코로나-19와 장마의 해이기도 했지만, 전태일 열사 50주기이기도 하다. 전태일은 더 이상의 전태일이 생겨나지 않는 사회를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전태일이 있다. 여전히, 우리는 외롭고 아프다.

2021년은 2020년과 달랐으면 좋겠다. 우정과 연대가 가능한 일상의 여유를 위하여, 사람과 자연의 생명을 착취해왔던 자본주의의 효율 중심주의에서 탈피하기 위하여, 노동자의 죽음이 곧 사회의 죽음임을 모두가 알아서 어떤 사람도 일하다 죽지 않는 사회를 위하여, 그리고 그 누구도 홀로 버티지 않아도 되는 ‘우리’가 있는 삶을 위하여.

 

그 첫걸음으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부터 통과시켜야 한다.

 

출처: http://nomoredeath.kctu.org/measure/contents.php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 홈페이지

 

  • 이번 글을 마지막으로 [내가 읽는 『자본론』]의 2020년 연재를 마칩니다. 2021년 다음 연재가 시작될 때까지 잠시 쉽니다.

 


  1. 『자본론』, p.359.

  2. 『자본론』, p.360.

  3. 노들장애인야학에서 교사로 있었던 그가, 그간 한겨레에 투고했던 칼럼들을 모은 책.

6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6회

 

번역: 한길석(한철연 회원)

 

의사소통적 이성 이론

『인식과 관심』은 근대적 지식 형식의 기초를 인식하고자 하였지만 일반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시도였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것은 하버마스가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제시했던 사회적 지식에 관한 역사 맥락적 분석에서 완전히 벗어나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틀어 전념하고자 했던 기획으로 이동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저작이었다. 새로운 기획은 의사소통적 이성 이론인데, 그것은 분화된 인간 지식과 행위의 실제적 토대를 이루는 “미시논리적” 수준과 사회적 근대성을 발생시킨 “거시논리적” 수준 모두를 포괄한다. 근대성은 이러한 토대를 구현하는 실천들이 새로운 제도들과 다양한 형태로 어우러져서 이룩된다.

비판사회이론의 명확한 개념화라는 작업에 있어서 『인식과 관심』의 인간학적 지향을 승인하는 것은 적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언어학, 특히 언어행위이론의 한 분야인 화용론이라는 인접 분과학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는 합리성 이론의 원천을 [언어행위라는] 사회적으로 뿌리내린 일련의 보편적 능력들 속에서 발견하기 위한 시도였다. 언어를 의미 목록으로 여기기보다는 상호주체적 체계이자 조정 행위로 간주하던 하버마스는 어떻게 언어가 실제로 행위 조정에 활용되는지 탐구하였다. 즉 화자와 청자들이 서로 성공적인 의사소통을 이룩하기 위해서 갖춰야 할 핵심적 능력이 무엇인지를 탐구한 것이다 (CES를 볼 것).

이런 발상에 깊은 영향을 준 것은 현대 언어학과 미국 프래그머티즘의 전통이었다. 하버마스는 모든 자연 언어들의 저변에는 보편적인 것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즉 언어행위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매개인 화용론적으로 불가피한 기술과 능력들이 보편적으로 존재하며, 그것없이는 행위 조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라는 화자와 “너”라는 청자의 위치를 자유롭게 번갈아 가며 변환시킴으로써 인칭대명사의 체계 내에서 부여되는 위치를 확정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가정적인 것으로 여기는 능력은 올바른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발언의 타당성을 정당화하는 데에 필요하며, 상호주관적인 언어 행위의 대칭적이면서 호혜적인 요구들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하버마스는 특히 참이라고 주장되거나 정당화된 발언들의 실천적이면서 사회적인 차원을 강조하지만 궁극적으로 그것은 보편적인 능력이라고 주장한다.

하버마스는 그의 초기 저작이래 지속되어왔던 철학과 재구성적 과학들 사이의 밀접한 협업 관계를 대표작인 『의사소통행위이론 (1981 [1984/1987])』에서 마침내 완성된 형태로 주장할 수 있었다. “자리 지키는 자이자 해석자로서의 철학”이라는 논문은 이러한 입장을 요약적을 제시하고 있다.

초기 저작에서 하버마스는 보편적 언어 능력들을 분석하면서 사회적으로 구현된 합리성 이론을 발전시킨다. 이 이론은 성인 화자와 청자들이 집단적 행동을 조정하기 위해 자기 및 상대방에게 부여해야만 하는 언어 능력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버마스는 보편적 언어 능력을 재구성하기 위해 여러 학문 분야를 깊숙이 파고 들었다. 그는 언어학과 행위 및 논의 이론, 발달심리학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이론들과 이에 연관된 인지적이고도 도덕적인 학습 과정에 대한 이론적 연구방법들, (인간의 의사소통을 자연 언어에 숙달되는 것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상호주관적 행위로 분석하는) 언어행위이론 그리고 경험적 근거를 지닌 자연적 논의 이론들까지 섭렵하였다.

『의사소통행위이론』 역시 여러 사회학 분야들의 역사, 구조 그리고 목표에 대한 심오하고도 일관된 문제로 구성되어있다. 거기에는 막스 베버의 합리성으로서의 근대화 이론, 조지 허버트 미드의 상징적 상호작용론, 에밀 뒤르켐의 세속화 및 집단 의식 변형이론 그리고 탈코트 파슨스의 기능주의 이론에 대한 깊이있는 해독이 망라되어 있다. 이처럼 놀랍게도 다양한 지식들을 묶어내게 되면 그 이론은 중심점이나 안내자 없는 상태로 머무르게 되어 이론 기획 전체가 전복될 위험에 이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근대 세계에서의 철학의 역할이 바뀌었다는 하버마스의 입장을 좀 더 넓은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의사소통행위이론』의 이러한 접근 방법은 궁극적으로는 심오한 철학적 시도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론은 근대적 주체와 사회적 삶에 대한 근대적 형식들의 바로 그 구조 안에 존재하는 합리적 행위의 잠재력을 찾아내고, 식별하고, 정교화하려는 목적을 일관되게 유지한다. 이는 언어 능력에 관해 보편 화용론이 작업하던 세부 사항을 통하거나, 해석 사회학에서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방법론적 논쟁을 통하는 등의 모든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럼으로써 이런 [근대사회의 합리적] 잠재력에 대한 주요 위협들을 식별해내고, 이러한 위협들에 대응할 수있는 방법을 나타내 보여준다.

 

하버마스의 지적 영향

 

하버마스가 철학과 사회 영역에 끼친 가장 의미있고도 지속적인 영향은 물론 추산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개략적으로는 소개할 수 있다.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의사소통행위이론』과 『사실성과 타당성』에 이르는 하버마스의 철학 및 정치이론을 다룬 저작들은 2차대전 이후 반세기와 21세기 초에 걸쳐 나타난 서양철학의 변형의 와중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 영향은 다음과 같은 세 측면으로 부각된다.

 

학제적 협력

첫째, 위에서 논의했듯이, 하버마스는 철학에 융합적 학제적 백과사전적으로 광범위하게 접근하면서 철학적 활동의 기존 모델(때때로 이것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풍자되었는데)에 사려깊은 대안을 제시하였다. 철학 활동의 기존 모델은 고독하고도 자아 성찰적인 철학자가 내적 의식의 심연에서 심오한 진리를 불러내는 이미지로 그려졌는데, 이와같은 철학적 활동 방식은 2차대전 이후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유지되어왔다. 하버마스의 철학 저작은 방법론적 고립이라는 이런 이미지를 완전히 등지고 있다. 이제 철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 성과에 관한 다양한 목소리가 오가는 대화의 한 당사자로서 참석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철학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것은 전문적 기술 용어로 된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발견을 공적 토론에 적합하도록 일상 언어로 번역하는데 도움을 제공하는 통역사로서의 책임이거나 필요하다면 그런 공적 토론의 장에서 심판관으로서의 책임을 맡는 일에 그칠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버마스의 철학적 저작은 대중적이다. 아마도 [하버마스의] 이런 철학적 모델은 장구한 세월에 대한 인식을 다루는 역사학이나 제도의 기나긴 역사를 다루는 사회학과 다르다. 이 철학 모델은 자연에 대한 그리고 학문적 혹은 과학적 탐구의 한계에 대한 고도의 자기 성찰성과 자기 인식의 문제를 끈덕지게 다룬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진리에 대해 독점적으로 접근하게끔 하는 원칙과 방법을 모두 단념했다. 진리에 대한 독점적 태도는 여타 관련 학문에서도 결핍된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철학의 본질과 목적을 축소시키는 관점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철학에게 과학의 시대에서도 적합성을 유지하도록 더 나은 기회를 제공하는 방도이기도 하다.

 

이성의 복권

둘째, 하버마스의 철학적 작업은 전체적으로 보자면 이성의 복권으로 대표된다. [앞서 보았듯이] 하버마스는 “자리하는 자 및 번역자로서의 철학”이라는 글에서 이제까지 철학은 여타 학문들이 [자기 영역에서 발견한 사실을] 정당하게 인식할 수 있는지 그리고 다른 학문들이 다양한 인간 문화의 영역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만 하는지에 대해 최종적 판단을 내려주는 역할을 맡아왔다고 허세를 부렸는데 그러한 허세를 포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지만 이 말이 “합리성의 수호자”로서의 철학의 역할을 포기하여야 함을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다.

주체와 이른바 이성적 중핵의 불확정성에 대한 영미 분석적 인식론, 언어철학, 논리학 및 유럽 대륙의 ‘포스트모던’ 이론들의 궤적과는 다르게, 하버마스의 담론이론은 인간이 시도해왔던 모험의 중심에는 이성이 있어야 한다는 고대 철학의 주장을 유보 없이 받아들인다. 나아가 하버마스가 방어하려던 이성이라는 것은 인류의 기본적인 역량이자 재능이다. 우리는 이성이 인간사를 의식적으로 규제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성이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강제적 규범이나 주장들의 원천으로서 간주될 수 있으려면 나름의 근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또한 이성은 토대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자연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즉 인간 이성 및 보편적 주장의 원천으로서의 그것의 지위는 자연적 혹은 사회적 진화의 우연한 과정 속에서 얻은 자연적 결과물로 여겨질 수 없다. 이성이 사회적 개인적 규범들의 정당화 요구에 관한 인식가능한 원천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저 성공 전략이나 타산에나 관련된 합리적 계산 능력에 불과한 게 아니라면 궁극적으로 이성은 규범적인 것이다.

이성의 복권과 관련된 이 두 번째 주장은 [철학은 자리하는 자로서의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는] 첫 번째 주장과 충돌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첫 번째 주장은 철학이 인문학과 사회과학 내 인접 학문과 협력적 상호작용에 나서는 탈신화적 실천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사실 하버마스적 철학의 기획에서 발견되는 독특성은 이 둘[이성에 대한 겸손한 태도와 이성이 인간적 사유와 행위에 있어서 여전히 중심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입장] 간의 조화에서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의 기존 특성과 자율성에서 연유하는 역할과 방법을 가치 절하할 것을 요구하는 [겸손한] 입장은 이성의 중심적 위치를 복권하려는 입장과 조화될 수 있다. 만일 하버마스의 작업이 ‘주체 철학’ 및 ‘의식철학’과 관계를 끊는다는 조건에서라면 말이다. ‘주체 철학’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이성을 자율적 주체의 소유물로 간주하는 입장을 거부하고, 이성이란 단지 상호주관적 상호작용과정에서 도출되는 특성일 뿐이라는 입장을 채택하는 것이다. ‘의식철학’과 관계를 끊는다는 것은 철학적 탐구를 수행하기 위한 본래적 토론장은 자기 성찰적 정신이 수행하는 내적 삶이라고 여겼던 입장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버마스에 있어서 상호작용은 사회 속에서 주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언어를 매개로 한 것인데, 이런 상호작용은 주체들의 [내적] 자기 관계 과정 속에서 도출된 것으로 간주되며 그에 따라서 패턴화한 것이다.

하버마스에게 이성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상호작용, 즉 상호인격적 의사소통을 하면서 근거들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이끌어진다는 것을 요점으로 삼는다. 이런 류의 협동적 의사소통이 성공하려면 관련 담론 절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합의를 지향해야만 한다. 만일 담론 참여자들이 합당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으려면, 이 담론 절차에 관련된 모든 참여자들은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평등, 호혜성, 솔직함 혹은 비기만성 그리고 공정성의 규칙을 채택해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규칙은 궁극적으로는 정당화가 가능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보편적이고 불가피한 조건들로 간주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도덕적 올바름, 정치적 정의 그리고 법적 공정성과 같은 ‘실생활에서 유통되는(downstream)’ 규범적 주장들을 위한 토대로 기능한다.

하버마스의 저 유명한 ‘담론원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규범은 때로는 올바를 수도 있고 그른 것일 수도 있는 행위 계획인데, 이 규범은 그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위에서 언급된 조건들에 의해 조성된 담론 절차 속에서 합의해 낼 수 있을 때에만 정당화되었다고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담론원칙은 합당성(reasonableness)이 정당성(rightness)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담론원칙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지니고 있는 직관을 철학적 용어로 정련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수행할 수 있고 기꺼이 하기도 하는,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어떤 행위 요구지만 잘 실행되지는 않는 요구이기도 하다. 즉 굳이 전문적 자질이 없어도 모든 사람들이 행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올바른 사회에서라면 그들의 정치 체계 내에 될 수 있는 한 정말로 많이 제도화하도록 권고하는 그런 요구인 것이다. 지배는 결국에 가서는 사회의 합리적 잠재력을 좌절시킨다. 그것이 사람들이 서로 강요하는 바 없이 협력 행위를 하도록 하는 기본적 자유를 부정하는 정치 체제와 같은 노골적인 형태든,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자원들을 말라붙게 하여 사람들이 합리적 담론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과 같은 훨씬 음흉한 형태든 상관없이 그러하다. 『공영역의 구조변동』에서 『사실성과 타당성』에 이르는 하버마스의 거대한 연구주제는 이성과 민주주의의 내적 연관을 보여주는 것인데, 이는 계몽 기획에 이바지하려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민주주의는 그저 정치적 권위(political authority)를 지닌 수많은 그럴싸한 경쟁적 정치체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 우연에 의해 잠깐 ‘현재 선호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대안들과 비교해 볼 때 합당한 것이라 할 만 하다. 하버마스는 민주적 삶의 합당성을 철학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헌신하였다. 또한 그에 못지않게 그는 이러한 입장을 모든 적대자들에 맞서 방어해왔다. 이 적대자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들은 아마도 ‘포스트 모던’ 이론가들로서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와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하버마스는 그들이 이성을 통해 민주적 삶을 강건하게 그리고 명백하게 방어하리라는 약조를 포기해 버렸다고 혹독하게 비판하였다(PDM).

이성을 이렇게 의사소통적이면서 절차적이고 형식적인 개념으로 회복시키는 입장은 기존 철학이 지니고 있었던 야망을 위해 입증의 토대를 세우는 것을 열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이, 오늘날의 철학과 사유에 영향을 끼친 하버마스의 핵심 요소는 사회적으로 구현된 상호주관적 이성의 본성을 다시 상상해 보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은 우리 시대에서는 지지하기 어려운 전체론(holism)을 재생하려는 실질적이고 배타적이며 궁극적으로는 교활한 노력과, 합리성 담론을 전적으로 단념하는 풍조(이러한 풍조는 현대적 삶의 형식으로서의 다원주의 문화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다)를 정당화하는 손쉬운 냉소주의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항해해 가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라 하겠다.

 

탈형이상학적 사유

이것[탈형이상학적 사유]은 하버마스의 철학적 영향에 있어서 세 번째 및 마지막 측면으로 소개될만한 것이다. 수십년 간 하버마스는 자기의 철학적 기획을 ‘탈형이상학적(PMT)’이라고 일관되게 규정해왔다. ‘탈형이상학적 사유’는 하버마스의 모든 사유에 있어서 중심 용어이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결여되어 있다. 이 용어는 특별한 철학적 주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저술하는 방법을 위한 넓은 차원의 정신 혹은 전제(postulate)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탈형이상학적 사유는 우선 칸트적 주장을 수반한다. 즉 영혼불멸, 전지전능한 창조주의 존재, 도덕적 의지의 자유의 사실 등의 철학적 형이상학의 전통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답이 가능하며 그러한 문제들은 인간의 끊임없는 관심사임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들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탐구는 우리 인간이 확정적으로 알 수 있는 능력은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조건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나아가 인간 삶의 근본 조건이 무엇인지 인식하고자 하는 관심은 결국에는 인간의 인식 가능성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특정한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추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명확하게는 탈형이상학적인 것에 대한 하버마스의 관점은 변화한 근대세계 안에서의 변화한 철학적 역할과 관련된다. 롤스의 ‘비이상주의적 non-ideal’ 정치이론 작업에서 말하는 것과 유사하게 하버마스는 근대 사회의 현실이 복잡성, 다원주의 그리고 다양성을 향해 극적이고도 돌이킬 수 없게끔 전개되고 있다고 논평한다. 이러한 전개양상은 철학이 정당하게 해명하고자 할 수 있는 문제 설정에 있어서 강력한 제한을 두게끔 한다. 롤스가 근대 민주사회에서는 전체론적 가치 합의 가능성을 배제하게 만드는 불가피한 가치다원주의적 사실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듯이, 하버마스 역시 근대성에 대한 ‘탈중심화된’ 자기 이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근대사회는 삶과 가치와 좋음의 이상과 연관된 기본적 지향에 대한 폭넓은 합의를 강제할 수 있는 현실적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가피한 다원주의의 조건과 좋은 삶에 대한 관념에 대한 갈등 아래서, 근대적 생활형식의 합리성은 오직 갈등을 규제하고 사회적 연대를 산출해내는 합당한 절차 속에서만 구성될 수 있으며, 이러한 합당한 절차들은 민주적 자기지배의 실천과 근대 민주 시민들이 지닌 관용적이고 겸손한 태도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은 의사소통 합리성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근대사회 자체와 마찬가지로 철학이 근대사회적 실존의 합리성을 인식하고 다듬으며, 혹시 가능하다면, 증진시키기는 일을 다시 맡아 보기 위해서는 초월적 지식과 모든 것을 아우르는 의미를 획득하려는 야심을 버려야 한다. 이 임무는 비록 기존의 것에 비해 훨씬 보잘 것 없지만 여전히 중대한 임무다.

 

공적 지식인이자 조언자

하버마스가 2차대전 이후 끼친 광범위한 영향에 대한 논의는 철학 이외의 다른 두 영역에 대한 언급 없이는 끝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하버마스는 철학자로서 이론화했던 ‘정치적 공영역’에 공적 지식인으로 관여하면서 괄목할만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지난 반세기 동안 독일이나 세계 독자들을 대상으로 국제적 사안에 대해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열렸던 회담이나 토론에 하버마스가 참가하지 않은 적은 거의 드물었다.

하버마스가 참여했던 논쟁이 몇 개나 되고 어느 범위까지였는지 세세히 밝히는 것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저 몇몇 부분을 부각시켜보기만 해도 그 영향력은 충분히 가늠해 볼 수 있다. 1950년대 하버마스는 새로운 독일연방공화국이 민주적 지배의 요구를 그저 관용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포용하기 위해 갖춰야할 정치문화의 이행 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핵심적 목소리를 냈다. 교육과정 개혁 문제부터 서독의 국제 협약, 모든 국내 정치적 사안, 전후 배상 및 기념 사업에 관한 정책에 이르기까지 하버마스는 일관되게 열린 사회를 요구해 왔다. 냉전이 종식될 때 하버마스는 독일 통일이 자기 반성적인 토의에 기초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소리 높였고, 통일 이후로는 유럽 연합 내 독일의 역할과 유럽연합의 정치적 통합과 확장의 중요성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논평자로 활약해왔다(DW). 근래에 하버마스는 유전자 기술의 도덕적 정치적 측면에 대한 논쟁과 서유럽의 ‘세속적’ 사회 내 공적 삶에 있어서 종교 및 종교적 가치의 역할에 대한 논쟁에 참여하여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런 여러 개입 과정을 통틀어 보자면, 하버마스의 작업은 공적 철학자이자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통합한 것이라 하겠다. 그는 탈형이상학적인 민주적 세계에서는 좋은 근거들만이 유일하게 궁극적 보증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지난 반세기 동안 하버마스는 활동적 철학자로 활약하면서 국제적으로 널리 분포된 후배 학자들의 지적 성장을 촉진하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하버마스의 이전 제자들은 독일에서는 악셀 호네트, 하우케 브룬트호르스트, 라이너 포르스트, 그리고 미국에서는 토마스 매카시, 세일러 벤하비브, 낸시 프레이저와 같은 이들인데, 사실 이들이 비판이론 ‘3세대’를 구성하고 있다고 할만한 것이다.

 

한철연 2020년 10월 월례발표회 영상 – “리인(利仁)과 안인(安仁) – 윤리적 태도와 이념에 관한 주자의 인식 고찰”(유튜브링크) [월례발표회]

2020년 10월 월례발표회 – “리인(利仁)과 안인(安仁) – 윤리적 태도와 이념에 관한 주자의 인식 고찰”

김나윤(중앙대) 발표 2020.10.22.

 

 

링크:  https://youtu.be/RdOJenOs3Io

사진: http://www.hanphil.or.kr/photo01/view.asp?Page=1&Board_Key=349

 

안녕하십니까? 한철연 학술1부입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0년 10월 월례발표회 줌(ZOOM)진행 영상입니다.

이번 월례발표회는 동양철학 전공자인 김나윤 선생님의 발표와 박영미 선생님의 토론으로 진행됩니다.

 

– 주 제 : 리인(利仁)과 안인(安仁) – 윤리적 태도와 이념에 관한 주자의 인식 고찰

– 발표자 : 김나윤(중앙대 철학과)

– 토론자 : 박영미(한양대 철학과)

– 일 시 : 2020년 10월 22일(목) 오후 4시 ~ 6시

– 오프라인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 온라인 : 줌(ZOOM)

마감알바에 숨겨진 비밀 [내가 읽는 『자본론』]

마감알바에 숨겨진 비밀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필자는 축구를 상당히 좋아한다. 직접 하는 것, 보는 것 모두 좋아한다. 축구 관련 기사들도 자주 찾아본다. 응원하는 팀의 경기는 직접 보거나 하다못해 하이라이트 영상이라도 찾아봐야 직성이 풀린다. 축구팬 최재식에게 축구를 볼 때 가장 짜릿한 순간을 꼽아보라면 추가시간 극적인 동점 혹은 역전골이 터질 때, 연장전의 치열한 공방, 승부차기의 정적을 꼽을 것이다. 아마 필자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그 순간 피치 위의 선수들은 정말 힘들겠지만 팬의 입장에서는 그 힘듦을 이겨내고 한 발짝 더 뛰는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에 열광하게 된다. 축구선수들도 팬들이 있기에 자신들이 존재함을 알 것이고, 그래서 힘들어도 경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극적인 승부를 만든다.

그런데 만약 축구선수들이 경기를 뛴 시간만큼만 돈을 받는다면? 그것도 정규시간 90분 안에서만 돈을 받는다면? 말하자면 축구선수들이 정규시간 90분 중 경기를 뛰는 시간동안은 분당 10,000원의 돈을 받기로 계약한 것이다. 그리고 추가시간과 연장전, 승부차기는 가외시간으로 쳐 돈을 안 받고도 뛰어야 한다. 정규시간 70분 뛴 선수는 700,000원의 돈을 받게 된다. 정규시간 70분경에 교체 투입된 선수는 90분경까지 20분을 뛰고 200,000원의 돈을 받는다. 90분 풀타임을 뛰고 추가시간 5분을 더 뛴 선수는 950,000원이 아닌 900,000원을 받아야 한다.

말이 안 된다. 교체 투입된 선수가 아니고서야 모든 선수들은 경기 막판으로 갈수록 힘든 게 당연하다. 더 힘든 것도 서러운 데 그 시간만큼 돈도 못 받으면 정말 그 선수는 억울해서 어떻게 살까?

상황을 조금 바꿔보자. 축구팬 최재식은 전날 축구장에서 본 명승부에 취한 채 다음 날 아르바이트 작업장에 출근했다. 15시부터 23시까지 서울의 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노동자 최재식으로 일하는 그는 14시 30분에 미리 작업장에 도착하여 업무 준비를 한다. 15시가 되기도 전에 전 타임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돕던 그는 15시부터 같은 시간대 같이 일하는 아르바이트 노동자와 둘이 23시까지 일을 한다. 분명 식당 입구에는 ‘22시 30분 주문 마감, 23시 영업 종료’라고 적혀 있건만, 오늘도 어김없이 22시 31분에 술에 취한 한 무리의 손님이 들어온다. 그나마 오늘 온 손님들은 소주 5병과 함께 1시간 만에 떠나셨다. 손님들이 있을 때 작업장 마감 준비를 했지만, 그래도 30분은 더 마감일을 해야 퇴근할 수 있다. 작업장 문 밖을 나서며 시계를 보니 벌써 23시 57분이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시작할 때 15시부터 23시까지 8시간 분의 임금만 받기로 구두계약을 했기에 추가로 지급받는 임금은 없다. 법은 그렇지 않다지만, 근로계약서 써주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어디 그리 흔하던가. ‘집에 가서 축구게임이나 해야지’ 생각하며 아르바이트 노동자 최재식은 다시 축구팬 최재식으로 변한다.

작업장 마감 시간 아르바이트, 소위 ‘마감알바’는 그 시간대가 아르바이트 시간대 중 최악으로 꼽힌다. 일단 할 일이 많다. 작업장 청소, 하루치 정산(만약 정산을 하다가 장부에 구멍이 나면 아르바이트 노동자 임금에서 깎이기도 한다), 문단속 등등이 모두 마감알바 시간대 아르바이트 직원이 해야 할 일이다. 차라리 일만 많으면 좋겠는데 식당이나 술집 마감알바면 영업 종료 시각이 되어서도 밖으로 나가지 않는 손님들을 잘 달래 집으로 돌려보내는 일도 해야 한다. 이런 일들을 해도 제 시각에 퇴근할 수 있으면 참 다행이다. 이래저래 일들을 하다 보면 원래 퇴근하기로 한 시간대는 훌쩍 지나있기 마련이다. 추가근로수당도 없다. 근로계약서 제대로 쓰고 근로기준법 지키는 아르바이트 자리는 이 나라에 없다시피 하니까. 힘든 일을 많이, 그것도 오래 하면서 돈도 못 받는 시간대의 아르바이트가 바로 마감알바이다. 마치 공짜로 추가시간을 뛴 축구선수처럼 억울할만한 사람들이 마감알바 시간대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인 것이다. 일은 다른 시간대보다 더 힘들 뿐만 아니라 일하는 시간도 한도 없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겉으로는 그냥 힘들게 보이기만 하는 마감알바에 또 다른 비밀이 숨어있다.

비밀 이야기 전에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들은, 아니 더 나아가 일을 하여 돈을 버는 사람들은 왜 일을 할까? 그 이유는 너무나 명확하다. 돈을 벌어야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먹을거리를 사고, 옷을 사고, 집을 사려면 돈이 필요하다. 가끔 놀러 다니고 학비를 충당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애인이랑 데이트하는 것도 다 돈이다.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니 마감알바라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들이 순전히 자기 자신만을 위해 일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사람들도 먹여 살리고 있다. 언뜻 보면 반대로 보일 것이다.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을 고용함으로써 노동자들과 그가 부양해야 할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말이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자. 우리가 순전히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면 고용주들은 왜 우리에게 일자리를 제공할까? 우리가 일을 하는 게 고용주들에게도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들이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게 아닐까? 만약 어떤 노동자가 하루에 10시간을 일한다면 그 10시간을 일해서 만드는 가치 중 순전히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몫이 10시간어치 전부일까? 적어도 5시간 정도의 몫은 고용주들이 가져갈 수 있으니 그들이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사는 것일 터이다.

물론 고용주들도 충분히 똑똑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자기 자신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일을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고용주들은 노동자들이 생산한 가치 중 일부, 노동자들이 어느 정도 본인들의 삶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가치를 노동자들에게 준다. 그리고 그 나머지를 고용주 본인의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삶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시간을 ‘필요노동시간’, 그리고 이 때 행하는 노동을 ‘필요노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고용주, 즉 자본가가 가져갈 가치를 만들어내는 시간을 ‘잉여노동시간’, 이 때 행하는 노동을 ‘잉여노동’이라고 이름 붙였다.

노동자들의 삶을 유지한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간다. 우선 본인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하겠다. 뿐만 아니라 만약 노동자가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면 그 가족의 의식주를 해결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식 교육이나 노후 대비도 신경 써야 한다. 또한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취미나 문화생활을 할 여유도 있어야 하고, 가끔 놀러갈 돈도 있어야 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 본인이 위의 일들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임금을 준다. 그렇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밑에서 일을 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다. 물론 나머지 가치들은 자본가들이 가진 자본을 불리는 데에 들어간다. 그래서 필요노동이든 잉여노동이든 노동자들이 행하는 것이지만, 실상 그 노동을 소유하는 건 자본가들이 된다.

마르크스 『자본론』

‘잉여가치율’이라는 개념이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언급한 개념이다. 마르크스에게 잉여가치율(rate of surplus-value)은 “가변자본의 (중략) 가치증식의 비율 또는 잉여가치의 상대적 크기”1를 뜻한다. 쉬운 말로 풀어서 얘기하자면, 자본이 자기 자신을 불리기 위해서 생산과정에 새롭게 집어넣은 가치를 분모로, 그 결과 새로이 생성된 가치를 분자로 하는 비율이 바로 잉여가치율이다. 100원을 투입하여 200원의 가치가 만들어졌다면, ‘(200-100)/100=1’, 이 경우 잉여가치율은 100%가 된다.

잉여가치율은 사실상 ‘잉여노동/필요노동’과 같다. 그리고 잉여가치율이 커질수록 자본가가 가져가는 몫도 커진다. 그렇다면 자본가는 잉여가치율을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할 것이다. 잉여가치율은 비율이기 때문에 그것의 분모를 줄이거나 분자를 키우면 그 크기가 커지게 되어 있다. 즉 다른 조건이 같다면 필요노동을 줄이거나 잉여노동을 늘릴 때 잉여가치율은 커진다. 여기서는 필요노동을 줄이는 것보다 잉여노동을 늘리는 데에 집중해보자. 작업장 사장에게는 축복이고 마감알바 담당 아르바이트 노동자에게는 비극인 마감알바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우선 필요노동은 거의 고정이라는 점을 알 필요가 있다. 사람이 하루를 살면서 필요한 가치가 널뛰기를 타진 않기 때문이다. 어제는 하루에 필요한 열량이 세 끼 밥으로 충분했는데, 오늘은 열두 끼의 밥을 먹어야 하는 경우는 없다. 즉 필요노동이 고정된 상황에서 노동의 총량을 늘리면 늘어난 노동의 양은 전부 잉여노동의 증가로 이어진다.

이제 노동시간을 늘리면 잉여노동시간이 늘어남을 알게 되었다. 마치 축구경기의 추가시간이나 연장전, 승부차기와 같이 계속해서 그 끝이 미뤄지는 마감알바는 잉여노동시간을 늘리는 데에 최적화된 아르바이트 노동 시간대이다. 물론 여기서 이익을 보는 사람은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아니다. 아르바이트 노동자는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돈을 받고 일하는 시간만 늘어날 뿐이기 때문이다.

마감알바의 비밀은 마감알바 시간대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힘듦이 단지 그 노동자가 일하는 시간에 있음이 아니라, 자신의 주머니에 떨어지는 가치의 양을 늘리기 위해서 행동하는 자본의 본성에 있음을 알 때 드러난다. 그냥 밤에 진상 손님이 와서 마감이 힘들다는 점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진상 손님이 와서 그 진상 손님을 처리하는 아르바이트 노동자에게 수고의 대가가 돌아가는 게 아니라, 결국 그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고용하는 점주에게 이익이 돌아간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는 것이다.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반문할 것이다. ‘대부분의 자영업자들이 하루하루 고단하게 장사해서 먹고 사느라 사장이 직접 마감까지 다 하는데, 그러면 그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물론 나에겐 대답이 있다. 그런 영세자영업자들 위에 또 다른 자본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장사가 조금만 잘 되어도 임대료를 팍팍 올리는 건물주, 손해는 가맹점에게 떠넘기면서 이윤은 악착같이 뜯어가는 프랜차이즈 본사, 오히려 자신들의 소비자에게 갑질하는 거대 유통망, 통 큰 경영을 하겠다면서 좁아터진 골목 한편에 있는 슈퍼 옆에 편의점을 내는 대기업의 골목상권 침투 등등……. 이런 상황에서 영세자영업자들은 마감알바 시간대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다른 이름이다. 자신들이 일해서 번 돈을 거대자본에게 바쳐야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자본주의의 모순은 거대하기만 하고 거창하기만 한 말이 전혀 아니다. 당장 어머니 아버지가 매일 야근에 시달리는 직장인이고, 학교 친구는 매일 마감알바 하느라 등골이 휜다고 신세한탄하며, 자주 가던 단골 식당이 어느새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폐업하는 게 일상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마치 공기와도 같이 우리 곁에 존재한다. 너무 익숙해서 이게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익숙함에 속아버렸다.

익숙함을 거둬내고 세상을 바라보면 지금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땅 위의 모든 게 새로이 보일지도 모른다. 마감알바라는 일상도 알고 보니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있지 않았던가. 새롭게 보이는 세상은 무섭고 낯설게 보일 게다. 그래서 그냥 모른 채 살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상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면 모험을 떠날 필요도 있지 않을까?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나에게 이런 메시지를 던졌다.

잠시 익숙함을 벗어나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글 중간에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유지하는 것에 관해 잠시 언급했다. 언급했듯 삶을 유지하는 것에는 의식주 이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다. 필자는 이 사실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생물인 이상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명활동을 유지하는 게 가장 기본적인 목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사고할 수 있으며 감성을 가지고 타자와 관계 맺을 수 있다면 우리는 의식주 이외의 것도 상상해야 한다. 그런 상상력을 가진 인간들이 서로서로 손잡고 힘을 모을 때,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의지가 실현되어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바뀐 세상에서는 내 친구가 마감알바로 고통 받지도 않을 것이며, 행복하게 장사하던 사장님이 계시던 단골가게가 망하지도 않을 것이다. 일하다 죽고 다치는 사람도 없으리라 믿는다. 그런 세상이 오면 좋겠다.


  1. 칼 마르크스 지음, 『자본론Ⅰ 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286쪽.

우린 모두 특별해 [내가 읽는 『자본론』]

우린 모두 특별해

 

김필진(경희대 철학과)

 

인간은 모두 각자의 고유한 개성과 특별함을 지닌 자립적이고 창의적인 개별 개체들이다. 이러한 점에서 세간의 꽤 많은 감성-에세이들은 개별적 인간 개체의 특수함을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소중히 어루만지며 많은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고 있다. 하나 (개별적 존재자의 자존감을 제고하는 개체적 특별함뿐만 아니라) 기실 모든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특별함을 갖는다. 어떤 개체건 상관없이, 인간 일반이 지니는 고유한 특수함이 있다는 의미다. 인간만의 특별한 성질은 오랜 시간 과학, 신학, 문학, 인문학 등의 학문적 분야를 넘나들며 매우 흥미로운 탐구 소재로 기능해왔다. 오늘 다루어보고 싶은 인간의 특별함은, 독특하게도 경제학적 논의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각각의 상이한 개체성을 지닌 개별적 인간들은 서로 다른 특수한 영역에서 이 사회의 경제적 흐름을 구성하고 있다. 개별적 인간 개체는 그 특수성을 말미암아 세상의 다양한 층위에서 경제적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는 개별 인간 각자의 개인적 사정의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어떠한 종류의 특수한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이라도, 인간이라면, 인간이기만 하면,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유하고 있는 인간의 경제학적 특별함을 찾는 것이 오늘 글의 주목적이기에 그렇다. 논의의 목적의식을 다시금 상기하며, 인류(인간 일반)를 인격적으로 대표하는 한 명의 사람으로서의 ‘인간’씨를 임의로 상상해보자. 우리의 ‘인간’씨는 경제학적으로 어떤 특별함을 가지고 있을까? 분명 그의 특별함은 이 땅의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지닌 특별함일 것이다.

이 사회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의 경제학적 문제들은 경제적 ‘가치’의 생산과 교환, 증식, 축적 등의 복합과 그 순환에 비롯한다. ‘인간’씨는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특별한 성질을 띤다. 우선, 모든 경제학적 논의의 출발이 될 ‘가치’의 생산은, 오로지 ‘인간’씨의 노동 일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인간’씨가 행하는 여러 종류의 노동들의 특수한 구체적 형태(이를테면 망치질하는 노동, 재봉틀을 다루는 노동, 고객을 응대하는 서비스 노동 등)를 잠시 제거했을 때, 우리는 ‘인간’씨의 ‘노동 일반’만이 추상적 형태로 응고되어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노동 일반’이 바로 경제적 가치를 생산해내는 힘의 원천이다. 오로지 인간만이 노동1으로(노동을 통해) 경제적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가치’의 창조는 ‘인간’씨만이 해낼 수 있는 신비하고 특별한 경제적 행위다.

‘인간’씨의 사회적 유용 노동으로 잉태되어 여러 가지 외형의 모습을 드러낸 ‘가치’들은 저마다 상이한 개성과 특수한 쓸모를 자랑한다. 각자의 유용성을 한참 뽐내던 이 ‘가치’들은 이내 본격적으로 자신의 인기를 겨루기를 위한 (가치)교환의 장으로 향할 것이다. ‘인간’씨는 훌륭한 통찰력으로 이 과정을 미리 예측하여 어느 시점부턴 자신에게 필요한 ‘가치’가 아닌 교환을 위한2 ‘가치’를 생산하게 된다. ‘인간’씨가 만든 가치의 겉모습은 매우 다양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교환을 위해 생산되며 실제로 다른 ‘가치’와 교환된다. 타인의 사용을 위해 생산되어 교환의 과정을 거치는 (유용성, 다시 말해 사용가치를 지닌) ‘가치’를 우리는 ‘상품’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인간’씨는 경제적 ‘가치’를 만들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십분 활용하여 다양한 쓸모를 지닌 여러 종류의 상품들을 생산해낸다.

인류 혹은 인간 일반, 즉 ‘인간’씨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특별함은 ‘인간’씨가 만들어내는 상품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인간’씨가 교환의 과정에 조심스레 내미는 상품들을 유심히 살펴보자. ‘인간’씨가 들이미는 대부분의 상품들은 그 탄생 과정과 생산 과정의 성격이 흡사하다. 예컨대, 나무토막이라는 원료를 손에 쥔 ‘인간’씨가 망치와 톱을 비롯한 각종 기계와 장치를 도구로 이용해 나무 테이블이라는 상품을 제작해내는 과정을 상상해보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대다수의 상품들은 위와 같은 형태의 생산 과정과 유사한 단계를 거쳐 생산된다. ‘인간’씨가 노동수단(도구)을 활용하여 노동대상에 투여한 노동을 통해 제작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인간’씨의 여러 상품 중에는 이와는 다른 독특한 방식으로 생산된 특이한 종류의 상품도 존재하며 이 특별한 상품은 우리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이 상품의 이름은 ‘노동력’이다.

‘인간’씨는 경제적 ‘가치’를 만들 수 있는 자신의 특별함을 상품으로 삼는다. ‘노동’을 통해 ‘가치’를 만들 수 있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노동력’이라는 이름의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이다. 단순히 추상적 행위인 ‘노동’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만들 수 있는) ‘노동’의 행위능력과 그 힘을 시간 단위로 상품화한 ‘노동력’을 판매하는 셈이다. ‘인간’씨의 인기 상품 ‘노동력’은 나무 테이블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제작된다. 상품 ‘노동력’은 노동대상이 되는 원료(혹은 천연적 노동대상 or 보조재료)에 노동수단을 도구로 활용해 인간 노동을 투하하는 방식으로 생산된다고 보기 어렵다. 상품 ‘노동력’은 그 힘의 원천인 노동자의 생활 영위와 그 생활의 안정적 재생산을 통해 생산된다. 즉 어느 노동자가 다음날 ‘노동력’을 상품으로 판매 완료할 수 있게끔 이 노동자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쉬게 하는 모든 과정에 투여된 ‘가치’들이 상품 ‘노동력’이 생산될 수 있게 하는 필요조건이 된다. ‘인간’씨의 삶 유지 그 자체가 상품 ‘노동력’의 생산과정이며, ‘노동력’은 ‘인간’씨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함의 상품화로 볼 수 있다.

‘인간’씨의 특별함이 빚어낸 상품 ‘노동력’은 그 제작자와 마찬가지로 매우 특별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인 상품, 예컨대 나무 테이블처럼 평범한 생산과정을 거쳐 탄생한 상품은, 정상적인 교환 거래의 과정에서 자신이 지닌 ‘가치’의 양과 그 비율에 따라 교환되며 거래를 완료한다. 이를테면, 50만큼의 ‘가치’를 내포한 A라는 상품이 거래의 장에 나왔을 때, 25만큼의 ‘가치’를 내포한 B라는 상품 2개와 교환 되거나 100만큼의 ‘가치’를 내포한 상품 C 1/2개와 교환될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상품 A가 지닌 50만큼의 가치를 대표하는 화폐3와 교환될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나무 테이블과 유사한 종류의 탄생 과정을 거친 상품들은 자신이 내포한 자신의 경제적 ‘가치’의 크기와 동일한 크기의 ‘가치’(혹은 같은 크기의 ‘가치’를 지닌 상품 or 화폐) 와 교환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일반이 지닌 특별함의 상품적 화신인 ‘노동력’은 이 지점에서 자신의 특별한 성질을 다시금 암시한다.

물론 ‘인간’씨의 상품 ‘노동력’ 역시도 처음 교환 과정에서 거래될 때에는 자신이 지닌 가치와 같은 크기의 ‘가치’를 그 대가로 지불받기로 한다. 하지만 ‘노동력’이 상품으로서 판매 완료되는 시점은 판매자의 실제적 ‘노동 행위’가 구매자의 의지에 따라 완전히 사용되는 시점인데, 바로 이 시점에서 ‘노동력’의 특별한 성격이 그 실체를 드러낸다. 일반적 거래에서 판매자는 자신의 상품이 지닌 ‘가치’를 구매자의 소유로 넘겨줌으로써 이미 (구매자에게) 지급받은 지불값의 등가를 지불한다. ‘노동력’의 판매자인 노동자는 자신의 상품을 판매한 후, 자신이 직접 ‘노동’함으로써 그 거래(등가의 지불)를 완료한다.4 하지만 웬걸? 노동자가 자신의 상품 판매 과정을 완료하기 위해 행하는 실제 ‘노동’ 과정에서, 상품 ‘노동력’은 판매자가 구매자에게 전달해야 할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내게 된다. 다시 말해, (거래 이행 과정에서) 상품 ‘노동력’은 자신의 값어치이자 스스로 내포한 ‘가치’의 크기보다 더욱 큰 크기의 ‘가치’를 생산해내는 셈이다. 구체적 상황으로 예시 사례를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평균적으로) 1시간에 10만큼의 가치가 만들어지는 사회적 상황을 가정해보자. 이때 노동자가 삶을 유지하는데 사용하는 생활수단에 들어있는 ‘가치’는 30이며, 이를 바탕으로 노동자는 6시간의 노동을 행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실제로 어느 노동자가 구매자에게 자신의 상품 ‘노동력’의 6시간어치를 판매하고 그 대가로 6시간 ‘노동력’이 내포한 가치 30을 돌려받았다고 가정하자. 이 30은 이전에 노동자가 6시간 노동력을 만들어내기 위해 먹고 자고 싸고 입고 휴식한 모든 과정에 체현되어있는 ‘가치’(사회적 유용 노동 시간)의 총합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상품 ‘노동력’의 판매를 마무리하기 위해 구매자의 요구대로 6시간 동안 실제 노동을 행한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렇다. 노동자는 6시간 ‘노동’의 실제 이행 과정에서 60만큼의 ‘가치’를 창조해낸다. 분명히 30만큼의 ‘가치’를 교환하기로 하여 시작된 거래였다. 구매자는 판매자에게 6시간 ‘노동력’을 생산하는데 투여된 가치(노동시간5), 즉 6시간짜리 상품 ‘노동력’의 값어치와 등가의 크기인 30을 지불했다. 노동자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30만큼의 ‘가치’를 지닌 6시간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구매자에게 제공했다. 하지만 ‘인간’씨의 특별한 상품, [노동력]은 판매와 그 구체적 이행 과정에서 자신이 지닌 ‘가치’보다 더욱 큰 가치를 생산해낸다. 30의 ‘가치’는 ‘노동력’의 특별함에 의해 60의 ‘가치’로 증식되었다.6

요컨대, 오직 인간만이 생산할 수 있고, 인간이라면 누구든 상품으로 판매할 수 있는 특별한 상품 ‘노동력’이 이렇게 기이한 ‘가치’의 증식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다. 증식된 ‘가치’는 ‘노동력’을 상품으로 구매한 구매자에게 돌아간다.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 구매자들은 이 오묘한 현상을 진작 꿰뚫고 이처럼 추가적으로 발생한 ‘가치’들을 꾸준히 차곡차곡 축적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요상한 공통점을 지닌 ‘악질 구매자’들이 등장한다. 그 스스로 인간-일반에 속하면서도 미리 포착해낸 ‘인간’씨의 특별함을 이용하려는 자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 악질 구매자들은 대부분의 개체적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 방식과는 다른, 온종일 빈둥대면서도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인간’씨의 특별한 상품이 낳는 ‘가치’ 증식을 파악하고서는 타 개체적 인간들의 일반적(‘인간’씨-스러운) 특성을 몰래 활용해 침대에 누워 배를 불리게 된 것이다.

현실 세상에서 어떤 인간 개체는 위의 거래 속 구매자의 기능을 하게 되고, 또 다른 인간은 ‘노동력’의 판매자로 기능하기도 하며, 그 중간에 위치한 여러 애매한 인간 개체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 주목하고 있는 점은, 그 모든 개체적 인간들의 공통적 특성이다. 인간 일반으로서의 (경제학적) 특별함은, 이 특수한 상품 ‘노동력’을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언제 어디서든 생산해낼 수 있다는 점에 그 핵을 둔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처럼 특별한 상품을 언제 어디서든 만들어 판매할 수 있음은 우리 모두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다시금 곱씹게 한다. 모든 인간은 경제적 ‘가치’의 원천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고 유의미한 존재요, 이 ‘가치’를 언제든 스스로 증식시킬 수 있는 특수한 상품 ‘노동력’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점에서 또한 작지 않은 특별함을 함의하는 바다. 우리는 모두 실로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인류를 구성하는 인간 일반의 이러한 특별함은 매우 독특한 형태로 경제학적 담론의 곳곳에서 포착되며, 경제학적 측면에서의 휴머니즘적 사유의 근거를 구축했다. 이에 노동가치설, 특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서는 ‘인간’씨만의 특별함을 집중적으로 조명함으로써 논의의 기본적 토대를 다져왔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이론을 전개하며, 앞선 논의에서 등장한 상품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설명하여 ‘노동력’이라는 개념이 함의하는 바를 본격적으로 체계화했다. 이들은 ‘노동력’의 구매자이자 증식된 ‘가치’의 주인을 부르주아 계급과 자본가들로 상정하며 자신들의 이론을 구체화하는데, 이때의 자본가들이 바로 앞서 등장한 악질 구매자들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노동력’의 개념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가치’를 만드는 노동계급과 이를 앗아가는 자본가 계급의 대립이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 필연적임을 주장했다. 이들의 분석에 따르면 자본가 계급은 생산수단의 대부분을 독점하거나, 거대한 생산수단으로 언제든 탈바꿈할 수 있을 만한 양의 자본을 지닌 계급이다. 이때 생산수단이란, 앞서 우리가 살펴본 ‘인간’씨의 노동과정에서 노동의 대상과 도구로 기능했던 것들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노동수단으로서의 공장과 기계들, 노동대상으로서의 원료와 천연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본가 계급은 막대한 자본을 손에 쥔 채, 심오하게 머리를 굴린다. 이들은 자본의 일부를 생산수단(노동대상과 노동수단)의 구매에 투여하고, 또 다른 일부는 노동자(앞선 예시에서의 ‘인간’씨가 되는 격)의 특별한 상품 ‘노동력’을 구매하는 데에 투여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에 따르면 자본가가 생산수단에 투여하는 자본의 부분은 ‘불변자본(不變資本 : constant capital)’으로 명명된다. 이는 자본가의 자본 중 생산수단으로 전환된 부분은 생산 과정에서 ‘가치’의 양을 그대로 이전할 뿐 변화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반대로 자본가들이 ‘노동력’으로 전환시키는 자본의 부분은 ‘가변자본(可變資本 : variable capital)’으로 칭해진다. 이는 자연히 ‘노동력’에 투여된 자본의 부분은 등가물을 재생산해내는 것을 넘어서, 초과분(잉여가치)을 생산하며 기존 자본의 ‘가치’ 양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암시하는 셈이 된다. [초과분으로 되는 잉여가치의 정체가 궁금하다면 이 글을 다시 한 번 정독해보라. 이는 선행된 논의에서 이미 살펴본 ‘인간’씨의 ‘가치’ 증식 능력과 정확히 일맥상통한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저서인 정치경제학 비판서 「자본」 Ⅰ 제3편 제8장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를 조금 인용해보도록 하겠다.

 

이와 같이 자본 중 생산수단[원료,보조재료,노동수단]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생산과정에서 그 가치량이 변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자본의 불변부분 또는 간단하게 불변자본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자본 중 노동력으로 전환되는 부분은 생산과정에서 그 가치가 변동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등가물을 재생산하고 또 그 이상의 초과분, 즉 잉여가치를 생산하는데, 이 잉여가치는 역시 변동하며 상황에 따라 크게도 작게도 될 수 있다. 자본의 이 부분은 불변의 크기로부터 끊임없이 바뀔 수 있는 크기로 전환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자본의 가변부분 또는 간단하게 가변자본이라고 부를 것이다.”

 

노동과정의 관점에서는 객체적 요소와 주체적 요소[즉 생산수단과 노동력]로 구별되는 바로 그 자본요소들이 가치증식과정의 관점에서는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으로 구별된다.”

 

위에서 드러나듯,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인간’씨의 특별한 상품에 대해 진작부터 탁월한 이해를 갖고 있었으며, ‘가변자본’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 일반의 신비한 능력과 그 특별함이 낳은 상품 ‘노동력’을 명료화했다. ‘노동력’의 개념은, 나아가, 경제학적 담론 속에 숨어있는 휴머니즘의 요소로서 구실 해왔음이 자명하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인간 일반이 지닌 특별한 성격이 경제학적 문제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분석적으로 해명한 셈이다.

 

다소 갑작스럽지만, 잠시 숨을 고를 겸 ‘맛있는’ 이야기를 좀 할까 한다. 노릇노릇하고 부드러운, 폭신하면서도 고소한 빵을 떠올려보라. 현대인들의 보편적 간편식으로 자리매김한 이 ‘빵’은 어떻게 식품으로서 완성될까? 밀가루와 강력분, 달걀과 이스트, 그리고 약간의 견과류를 모두 더하면 빵이 되는 것일까? 이 재료들을 한곳에 모아두면 당장이라도 빵집에 달려가 구매할 수 있는 따끈따끈하고 몽실몽실한 빵으로 되는 것인지 생각해보자. 우리는 직관적으로, 또 필연적으로 이 같은 추정이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느낀다. 그렇다면 이 재료들을 빵으로 만드는 것은 무언인가. 몇 번이고 언급했던 ‘가변자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렇다. 다름 아닌 인간 일반의 ‘노동력’이 밀가루/달걀/이스트 따위의 불변자본을 ‘빵’이라는 완성된 상품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인간’씨의 특별한 상품 ‘노동력’이야말로 이 사회 모든 경제적 활동의 주역이자 경제적 가치 증식의 원천이 되는 바다. 우리 입안으로 뜨거운 풍미를 안기는 ‘빵’조차도 이 같은 경제학적 비밀을 암시하고 있었다.

서두에 이야기했듯, 기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가지는 특별함을 예리하고 기민하게 체계화하고자 했던 학술적 조류는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차고 넘쳤다. 이 글에서 이미 설명했듯, 경제학적/사회학적 영역에서 일렁였던 휴머니즘의 물결은 마르크스주의를 배제하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인간만의 특별함에 주목한 마르크스주의는 독특한 종류의 휴머니즘을 그 중심축으로 경제학-사회학-정치학-철학을 아우르는 방대한 학문적 발자취를 남겼다. 이들의 사유는 (자본주의가 고도화된) 현대 신자유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씨들에게 작지 않은 의미로 작용하리라.

 

정부의 미등록 이주노동자 강제추방 정책과 맞물려 심각한 노동권 박탈 상황에 처한 이주노동자들의 절규가 서울지방노동청 앞에서 울려 퍼졌다.”

······

이날 기자회견에 모인 이주노동자들은 오후 6시까지 근무하던 사업장에서 이제는 수당도 없이 9시까지 근무하고, 과거보다 적은 월급을 받아도 사업장 이동을 제한하는 고용허가제 때문에 옮길 수도 없다합법화가 이주노동자를 노예로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기자회견 후 이주노동자들은 고용허가제 독소조항에 대한 개정미등록 이주노동자의 합법화를 촉구하는 집회를 가졌다.”7

  

지난해 노동권과 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던 광주·전남지역 청소년들과 이주민들의 사연이 공론화됐다. 이들은 법과 근로자의 권익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 폭언·폭행·체불·성희롱 등에 시달리면서도 생계유지를 위해 열악한 노동 조건에 순응해야만 했다. 청소년·이주민의 노동을 보호할 법적·제도적 장치도 미흡하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임금 체불을 당하거나 최저임금을 받지 못한 청소년이 노동당국에 신고해도 사업주는 밀린 급여만 주면 그만이다. 처벌 규정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도 고용허가제의 사업장 이동 제한노동력 단기순환 정책에 따라 사업주의 권한에 종속되고 있다.”8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 전반에서 항상 ‘자본’과 ‘노동계급’의 필연적 대립을 시사해왔다. 그리고 그 예언에 답변이라도 하듯, (위 기사들의 내용대로)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에서도 ‘가변자본’의 구체적 형태인 ‘노동력’, 그리고 그 ‘노동력’의 소유자이자 판매자인 모든 ‘인간’씨, 즉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처우와 다각적 착취가 이미 참담한 수준에 이르렀다. 축복과도 같은 인간의 특별함은 이를 가변자본으로 착취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는 악질적인 자들에 의해 크게 위협 받고 있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직장인 63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직장인 가운데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해고 및 권고사직을 권유받은 비율은 전체 중 68.1%에 달했다고 22일 밝혔다이들에게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해고시점을 선택하게 했다. 그 결과, 코로나 이후 해고를 당한 비율은 무려 30.2%로 조사됐다. 즉 해고 경험자 10명 중 3명의 해고 시기는 코로나 이후였다는 것이다.”

······

코로나 이후 해고방식으로는 부당해고‘(33.5%), ‘정리해고‘(33.0%), ‘권고사직’(27.9%) 순으로 집계됐다. 특히 부당해고는 사용자가 근로자를 정당한 이유 없이 해고하는 것으로서, 코로나 이후 정당한 해고사유가 없거나 정식 해고절차를 밟지 않은 각종 부당해고에 따라 노사간 분쟁을 겪는 기업도 늘고 있다.”9

 

더욱이 근래에 발생한 코로나-팬데믹과 같은 재난 상황에서는 그 문제가 훨씬 심각하다. 자본의 소유주들께서는 불변자본(생산수단)을 독점하고 계시며, 이를 볼모로 삼아 재난 상황에 고통 받는 가변자본의 주인공들을 더욱 옥죄고 있다. 불변자본은 한 명의 자본가에게 독점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가 계급 일반’의 독점적 소유에 있다. 따라서 자신의 특별한 상품 ‘노동력’을 판매하는 것(가변자본으로 탈바꿈시키는 것) 외에 생계를 연명할 수단이 없는 노동자들은 이 자본가 계급에 완전히 종속된다. 자본가 계급 내의 어떤 특정한 자본가 한 명만이라도 자신의 특별한 상품을 구매해주기를 바라며 -또 이를 통해 삶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해 영위할 수 있기를 바라며- 노동자들은 자본가 곁을 떠나지 못한 채, 줄기차게 구매자-비록 악질적인 구매자일지라도-를 물색할 것이다. 그 어떤 훌륭한 이도 자본가 계급의 바깥에서 거대 불변자본을 굴리며 노동자들과 함께할 수는 없으며, 자본의 소유주들은 이 같은 (불변자본에의) 독점적 지위를 바탕으로 노동자들을 마음껏 부려먹고, 또 물건 다루듯 함부로 대하고 있다. ‘인간’씨의 특별함은 ‘자본’의 성장스토리와 그 역사 속에서 점점 훼손되어왔고, 급기야는 사회적 모순의 핵심적 기제로 기능하며,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에서 이용당하고 있다.

우리는 특별한 존재다. 이 사실은 이미 수없이 설명되고 논의되어왔으며, 오늘 이 글에서도 다시금 인간의 특별함에 대해 길고 긴 서사를 반복했을 뿐이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미 충분히 특별하다. 더욱이 각자의 특수성을 지닌 개별적 존재로서의 개체적 인간은 또 얼마나 특별한가. ‘인간’은 ‘인간’이므로 이미 특별하며, 그에 더하여 한명 또 한명 각각의 특성으로 인해 더욱더 특별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만일 당신이 오늘 하루를 살아내며, 스스로에 대한 어떠한 특별함도 느끼지 못했다면 이는 당신의 문제가 아니다. 당신의 개성이 유별났기에 그러한 것이 아니며, 당신의 정서적 상태가 그 원인적 요소일 가능성 역시도 크지 않다. 어쩌면 이미 당신은 이 사회 속에서 당신의 특별함을 잃어버려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1. 물론 이때의 노동은 사회적으로 유용하게 통용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사회적인 형태의 유용 노동이어야 할 테다.

  2. 사회의 일반적 틀 속에서 불특정 다수의 타인에게 쓸모를 제공하는 ‘가치’를 뜻한다.

  3. ‘화폐’ 역시도 일종의 ‘상품’

  4. 또한, 이때 ‘노동’ 행위와 그 힘의 시간적 양을 상품화한 ‘노동력’의 구체적 유용성(쓸모)은 노동자에 실제적/구체적 ‘노동’ 행위에서 말미암아진다.

  5. 이 경우에 6시간짜리 상품 노동력의 값어치는 30이므로, 6시간 노동을 만들어내기 위하여 노동자의 삶을 재생산하는 데에 3시간(즉 30 만큼의 가치) 분량의 노동시간(가치)이 투여된 셈이다.

  6. 이 같은 현상은 실제 수치와 비율을 달리하더라도 동일한 양상으로 나타난다. 상품 ‘노동력’은 그 스스로의 생산에 투여된 ‘가치(노동시간)’보다 더 큰 ‘가치(노동시간)’을 실제 판매과정(노동과정)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7. “이주노동자, 노동권 침해 심각 – 강제추방과 고용허가제가 부르는 인권침해 사례 발표”(고근예), <인권운동사랑방>, 2004. 02. 04., <https://www.sarangbang.or.kr/hrdailynews/67264>

  8. “[취약계층 노동 실태]<상> 인권·노동권 침해에 내몰리는 청소년들”(신대희 기자), <중앙일보>, 2018. 01. 01., <https://news.joins.com/article/22248863>

  9. “코로나로 인한 직원 해고 잇따라, 부당해고>정리해고>권고사직 순”(김강한 기자), <조선일보>, 2020. 07. 22.,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22/2020072200761.html>

5회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하버마스 읽기: 열한 개의 길 – 5회

한길석(한철연 회원)

 

철학 및 철학의 역할에 대한 재개념화

1980년대 초 “자리하고 있는 자 및 번역자로서의 철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하버마스는 철학이, 특히 칸트와 헤겔에서 정점을 이룬 독일 철학 전통에서 너무나 익숙한 학구적 철학의 역할, 즉 자연 과학이 알 수 있거나 알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적법하게 결정하고 보다 넓은 문화적 학습의 지붕 아래서 어떻게 학문적 지식들이 적법하게 발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 판정하는 재판관의 권위를 휘두르는 스타일은 더 이상 그럴싸한 것으로 주장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MCCA: 1~21).

하버마스는 근대라는 조건에서는 철학은 좀 더 겸손해져야 하지만 여전히 중대한 포부, 즉 재구성적 사회과학을 위해 “자리를 메워 주는” 포부를 지녀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철학이 강한 보편주의적 주장을 지닌 인간 행위에 관한 경험적 이론들을 설명하고 분석하는 공개적 장소를 열어 유지해 주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버마스는 구 계몽주의의 합리성에 대한 설명이 오늘날의 현안에 있어 겸손한 모습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실현 가능한 판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언어 능력에 관한 이론 같은 것들은 세계에 존재하는 이성의 주권적 힘을 칸트와 헤겔이 그러하듯 권위적으로 간단히 억측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성에 대한 강한 경험적 근거들을 이미 제공하고 있는 인간의 기본적 능력들, 즉 우리가 자신과 타인들을 책임 능력이 있는 주체들로 간주할 경우 다른 대안적 능력들에는 결핍되어 있는 기본적 능력들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들의 주요 후보자들은 분명히 언어와 의사소통이다. 그래서 하버마스는 언어와 의사소통을 탐구하는 재구성적 과학들이 자기 이론에 함축된 보편주의적 주장의 의미를 충분히 표현하고 널리 전파할 수 있도록 철학이 보조하고 도와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도우미로서의 역할을 충족하고자 하는 철학은 여타 학문들에게 허가장을 발부하고, 이론으로서의 정당성을 부여하며, 합리성에 대한 고유한 주장을 지성적으로 이해 가능한 형태로 제기하는 법(결국 그것이 [경험적 자기 학문 영역의 좁은 범위를 넘어서게 하는] 보편적 역량들인 것이므로)을 학습시키는 자기 이해자로서의 역할을 그만둬야만 할 것이다.

 

비판이론의 유산과 변형

이와 같은 입장은 하버마스로 하여금 철학의 자기이해에 대해 두 번째로 수정하게끔 하였다. 즉 철학은 과학적 지식이 인간의 문화적 이해 전체와 적절한 관계를 맺도록 방법을 일러주는 주권자적 판관으로서 자임할 것이 아니라, 재구성적 과학들의 전문화되고 기술적인 언어를 시민들이 매일 수행하는 생활 세계의 “통상적” 담론으로 번역하여 그런 지식들로부터 얻은 통찰을 시민들이 의사소통하게 하는 번역자로서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민들이 과학적 진보에 함의된 규범적이고도 정치적인 함축을 발견하는 것은 민주적 공영역에서 논쟁을 벌임으로써 가능하다.

“자리 지키는 자 및 해석자로서의 철학”의 논의에서 함축된 바는 철학이 간직해야 할 분과 학문적 핵심은 자연과학 및 사회과학 등의 병존 분야들과 지속적 대화의 관계를 구성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철학의 목표는 사회이론과의 지속적 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는 일찍이 1950년대부터 하버마스의 고유한 지적 궤적을 안내하고 있는 입장이다.1

유연하고 세심하며 자기 제한적인 철학에 관한 이러한 주장은 분명히 하버마스에게서 기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철학 학위를 받은 후 수년간 언론인 생활을 하던 청년 하버마스가 프랑크푸르트 사회 연구소에서 둥지를 튼(비록 편안한 둥지는 아니었지만) 이유를 설명해 준다. 저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사회이론은 하버마스의 사회적 의식이 명확하면서 학제적 특성을 지닌 철학이라는 입장에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세워진 사회조사 연구소는 철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법학자, 정신의학 및 문학도들이 현대적 사회 병리 현상의 구저와 원천을 넓은 범위에서 연구하기 위해 협력 작업을 했던 곳이었다. 1930년대에 이 연구소는 막스 호르크하이머의 감독 아래 불의, 지배 그리고 억압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고발하려는 목적으로 경험적 사회 연구와 철학적 분석을 통합하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 연구소가 마르크스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구성원 중 공공연한 마르크스주의자는 극소수였다. 호르크하이머는 자유민주주의를 전체주의로 눈에 띄지 않게 이행시킴으로써 자본주의사회를 생존하게 하는 환상과 기만을 폭로하고자 하는 비판이론을 발전시킬 것을 서약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통합시키는 추진력을 보여주면서, 호르크하이머, 테오도르 아도르노, 허버트 마르쿠제, 에리히 프롬, 프리드리히 폴락과 같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구성원들은 사회 병리 현상들이 어떻게 발생하고, 그것이 “거시적”이면서 “미시적인” 수준에서 어떻게 퍼져나가는지 논평하기 위한 독창적인 방법을 만들어냈다. 즉, 한 편으로는 조작되고 억압된 시민 대중이 자기들의 독립성과 정치적 권리를 포기하게 하고 지배에 굴종하도록 만드는 신경증, 정서 및 인지 장애를 개별 주체의 차원에서 연구하면서, 다른 한 편 국가 주도적 시장과 대중의 충성을 강력하게 혼합하여 일당 지배 아래에 둠으로써 약화되던 입헌 민주주의에 대해 제도적 수준에서 연구하였다. 그들은 독일과 미합중국에 존재하는 “권위주의적 인격”을 분석하고 논평하였다. 이것은 반유대주의의 정치적 세력화를 가능하게 한 심리적이면서 사회적인 조건들을 규명하기 위한 시도이자, 표면상으로 사회의 물질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에 헌신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이 이 모두를 부인하도록 만들기 위해 공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숨겨진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학제적 연구 프로그램은 계몽주의적 근대성 속에 내재된 규범적 원천에 경보를 발령하는 일이 거듭되면서 점차 계몽주의적 근대성 기획 전체를 회의하게 되었다. 연구소 구성원들은 1930년대에 이미, 그리고 나치즘의 성공과 세계대전이 코앞에 닥친 게 명확해지던 이후부터 특히 점점 더 암울한 전망의 글을 쓰게 되었다. 전쟁기 저술된 고전적 연구서인 『계몽의 변증법』에서 호르크하이머와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유럽 계몽주의 전통을 인간 이성의 보편적 형식을 바탕으로 한 정의와 평등의 정치적 요구에 대한 원천으로 더 이상 보지 않으려 했다. 대신에 그들은 근대 역사의 시작 이래로, 아니 사실상 인간의 역사가 기록되기 시작하기 전부터 “이성”은 “신화”와 상호 얽힌 상태에서 전개되어왔다고 논평하였다. 자연[혹은 본성]의 힘에 복종하던 주체성을 해방시키도록 독촉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합리성을 계발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합리성은 자연 지배를 통해 인간에게서 자연을 분리시킨 자연에 저항하는 힘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외적 환경 및 인간이 지닌 자연적 충동, 욕구 그리고 갈망으로서의 “내적 본성”으로서의 자연을 길들이고 통제하도록 하던 경향성이 점점 더 가혹하고 교묘한 지배 및 통제의 형태로 갱신을 거듭했다는 것이다(Horkheimer & Adorno 2002).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 사회연구소를 재건하던 1950년대에 이 연구소의 작업에 밑바탕을 이루고 있었던 마르크스주의의 영향력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연구소와 그 구성원들은 사회적 지배의 사회심리학적 차원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계속하면서 독일연방공화국의 불안정한 정치문화 속에서 진보적 역할을 지속하고 있기는 했지만, 철학에 있어서 그들은 종래에 지녔던 급진 정치적 포부를 포기하였다. 철학은 예전의 보수적인 기능, 즉 진리와 미의 전통적 가치들에 해를 끼치는 근대적 사회 현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도록 수호하는 역할로 회귀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전쟁 이후에 있어서는 호르크하이머 자신, 나아가 아도르노조차도 그러했다.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2세대”로 표상되곤 한다. 사회조사연구소의 주요 구성원들의 작업들이 하버마스의 철학적 발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는 점, 그리고 그가 2년 간 아도르노의 조수로서 일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비판이론이 그에게 의심할 수 없는 중요한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이 이론의 영향이 지나치게 과장된 것도 사실이다. 비판이론이 하버마스의 독창적 이론의 성숙에 있어서 긍정적 영향 못지않게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점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프랑크푸르트의 사상이 하버마스에게 이바지한 바는 미묘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

하버마스는 괴팅겐 대학, 취리히 대학, 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1954년 본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주제는 독일 관념론 철학자 쉘링의 역사 철학에 대한 연구였다. 그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연구에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박사 논문을 마치기도 전에 하버마스는 독일철학이 (나치) 시대에 대한 철저한 진단은 고사하고 인지조차 못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자 독일철학과 하이데거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 급진 철학의 전통에 투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그의 대학 시절에는 전수받지 못했던 전통이었다. 1950년대 중반, 그는 서구 마르크스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선구자들과 당대인들의 핵심 저작을 발견하게 되었다. 호르크하이머 및 아도르노는 물론이고 죄르지 루카치, 에른스트 블로흐,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발터 벤야민 그리고 프랑스의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인 장-폴 사르트르와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저작들이었다.

1956년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로 이사해 아도르노의 조수로 일하면서 그의 “교수자격논문”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교수자격논문은 독일에서 대학 교수가 되기 위해 박사 이후에 저술해야 하는 단행본 분량의 논문을 일컫는다. 프랑크푸르트에 머물 무렵, 하버마스와 막스 호르크하이머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호르크하이머는 사실 하버마스를 연구소에서 일하도록 초청한 아도르노의 처분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아도르노에게 쓴 편지에서 젊은 하버마스가 마르크스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아 너무 급진적이어서 연구소의 구성원으로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강한 어조로 주장했다.

호르크하이머는 하버마스의 지도교수가 될 것이 뻔했다. 두 사람은 2년 동안 충돌하였고, 결국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에서 마르쿠르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그는 볼프강 아벤트로트의 지도 아래 교수자격논문을 완성하였다. 아벤트로트는 1950년대 중반 서독의 보수적이자 반공주의 분위기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 교수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던 극소수 학자 중 하나였다.

그의 개인적 어려움과는 별개로,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하버마스의 학문적 관계 역시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계몽의 변증법』이 출판되고 나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결국 철학과 경험적 사회학이 상호 보강 및 이의를 제기하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사회비판이론의 원래 기획을 포기하고, 전통적인 철학 분야에 좀 더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서서히 돌아갔다. 두 사람은 1968년 독일 대학과 도시들을 휩쓸었던 급진적 학생 운동의 목표와 전술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다.2 하버마스는 사회적으로 구현된 인간 합리성의 해방적 차원을 거부하는 지구적 흐름을 수용하기를 거부하였다. 이런 그의 입장은 지성 및 정치적 계몽에 대한 칸트주의에서 발견되는 규범적 요구에 핵심을 두고 있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호르크하이머 및 아도르노의 회의적 저술에 도전하면서 그들의 지적 상속자이자 계속적인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하버마스가 아벤트로트의 지도 아래 생산해 낸 테제는 비판이론과 변증법적 관계를 맺으며 표현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공영역의 구조변동(1962 [1989]) 이라는 제목을 지닌 이 테제는 굉장한 성공을 거두어 하버마스를 서독에서 가장 유망한 철학자이자 지식인 중 하나로 만들었다. 이 책은 그 논지나 방법에 있어서 이성, 자유 그리고 위엄 사이의 내적 연관에 대한 계몽주의의 핵심적 주장—비록 이러한 주장 속에 내재한 철학적 과시물들은 옹호될 수 없는 것이지만—을 보존할 수 있는 사회이론 및 정치 이론을 생산하고자 한 하버마스의 포부를 성공적으로 이행하였다.

하버마스는 살롱, 커피하우스, 클럽, 신문과 같은 18세기 유럽에서 정치적 토론을 벌이던 비공식적 장소의 전개에 대해 분석하였다. 그는 제도화된 정치 체계 바깥에 있던 그러한 비공식적 회합장소들에서 시민들이 생활 속 쟁점들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러한 쟁점들에 대해 토론하여 정치적 여론을 형성함으로써 다양한 민주적 접근 경로를 통해 정치적 여론을 정치 체계에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논평하였다. 이런 정치적 여론의 “풀뿌리”적 원천들은 하버마스가 나중에 의사소통 합리성의 핵심 요소로서 분석한 공개적 담론이라는 절차적 원칙들에 기초하여 운영되었다. 공영역에 참여한 화자와 청자들은 담론에 기꺼이 참여하고자 했으며, 담론 참여자들의 동등한 지위를 인정하고, [그런 담론 과정을 통해 이룩한] 식견을 널리 공유함으로써 합의에 이르고자 했다. 그들은 공정한 이해 지향적 관행을 그 어떤 정치적 입장이나 이해관계보다도 우선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성과 민주주의의 강력한 개념적 상호독립성을 드러내었다는 의미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합리적이고도 민주적으로 담론을 운영하였다. 절차적으로 온당하게 정치적 공영역에 참여한다는 것은 특정한 기술, 식견 그리고 행동을 요구하였다. 민주적 참여는 근거들을 주고받는 담론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 과정을 거친 합의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유럽의 정치적 공영역은 하버마스의 이후 저작이 역사적이기보다는 이론적으로 탐구했던 현상들이었다. 정치적 공영역은 공유된 참여 경험과 태도들이 존재하던 일상적 생활세계와 위계적이고 관료적인 근대 통치 제도 사이를 비집고 열려진 근대적 참여정치의 공간이다. 이 좁고도 깨지기 쉬운 공간은 시민으로서의 주체들이 이해관계의 공유라는 문제에 대해 논하는 비공식적 담론들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의 합리적 행위 능력을 단련하는 경연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공영역의 구조변동』이라는 제목이 함축하듯이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초기 민주적 의사소통의 규범적 토대를 분석하는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공영역의 쇠퇴에 대해 분석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공영역은 19세기와 20세기 무렵 복잡한 관료행정과 고도로 조직된 국가 기구들이 흥기함에 따라 위태롭게 되었다. 이 시기에 국가 권력과 거대 시장 경제는 서로 연결되어 사회적 복잡성에 대응하는 새로운 “조정 매체”가 되었고, 그것들은 발전된 국민국가 사회에서 발생하는 조정 문제들에 대해 점차 세련되고 효율적인 대응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국가 관료행정과 시장 경제 역시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즉 국가와 시장 사이의 협소한 공적 공간을 폐쇄하게 만들어 능동적 시민들을 관료행정의 수동적 고객이나 시장경제의 고객으로 변형시켜버린 것이다.3

하버마스의 초기 저작은 전쟁 기간 동안 저술되었던 비판 이론 “1세대”의 저작들에 퍼져있던 사회 병리에 대한 암울한 전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는 근대 민주 사회의 위기 경향과 구조적 결함이 합리성 자체에 내재한다는 입장을 결코 취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효율적 관료 행정 권력을 실현한 계산적 통제의 합리성 유형과 동등한 시민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수행되던 의사소통적 조정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던 근거를 주고받는 능력의 합리성 유형이 확연히 다르다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철학의 사명이란 이러한 합리성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고 어떻게 민주적 생활 형식의 원천으로 지속될 수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일 뿐이라는 입장을 갖고 있는 하버마스로서는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제공한 근대성 진단과 근본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다. 이 역시 위에서 논했던 철학과 재구성적, 경험적 사회과학의 협업을 위해 설정한 방향이었다.

이후 이어진 수십 년간의 저술에서 하버마스는 사회이론과 여타 재구성적 과학들로 선회하였다. 이는 근대 사회의 병리현상들과 합리성을 탐구하고 합리성의 갱신을 위해 그것에 내재한 잠재성이 무엇인지 연구하기 위한 주된 도구였다. 1960년대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저술인 『인식과 관심』(1968 [1974])에서 하버마스는 철학적 인간학, 역사기록학(historiography) 그리고 심지어 정신분석이론을 포괄하는 수많은 기타 재구성적 과학들로 선회하였다. 이는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보편적 실현 조건으로 작동하는 “인간학적으로 깊게 자리한” 관심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또한 그러한 관심들이 서로 다른 종류의 지식으로 구현되도록 하는 타당성 조건에 기초하여 인식될 수 있고 서로 구분될 수 있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관심들은 인류의 자연사적 역사 과정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특성들로 환원될 수 없으며, 인류에 구현된 다양한 제도들과도 동일시 될 수 없다. 그보다는 인식 구성적 관심들은, 화용론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인간 인식 활동에 연관된 초월적 토대였다.

하버마스는 그러한 관심들이 세 가지로 식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외적 자연을 통제하고 조작하는 기술적 관심, 상호주관적 이해에 내재한 실천적 관심, 다양한 지배, 강제 및 통제 형식으로부터 해방되려는 해방적 관심이 그것이다. 기술적 관심은 과학과 기술공학이 복합되면서 그것의 자체적인 내적 기준에 따라 전문지식, 진리, 성공, 진보로 간주되던 것을 통해 근대에서 꽃피웠다. 실용적 관심은 19세기 정신과학 혹은 인문학으로 통합되었던 일련의 해석학적 분과학문들을 발생시켰다. 이런 학문들은 역사기록학, 문예비평, 문화 연구 같은 것으로서, 연구 대상을 제어하거나 예견할 수 없고 연구 참여자들 간의 이해를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해방적 관심을 설정한 것은 하버마스에게 심각한 문제를 제공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세 번째 관심, 즉 개방적으로 규범적이며 정치적인 관심을 인식한다는 임무는 기술적인 만큼이나 야심만만한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하게도 하버마스가 한 작업은 불필요한 지배 유형을 이해하거나 통제하는 작업이라기보다는 불필요한 지배 유형을 폭로하고 극복하려는 임무에 헌신하면서 여타 지식들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인 영감을 받은 사회 비판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마르크스 못지않게] 프로이트적 정신분석학이 분명한 문제점—(잠재적으로 한 없이 계속되는) 심리치료의 성과가 어떻게 지식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정신분석가와 분석 대상자 간의 근본적으로 비대칭적인 관계가 어떻게 해방의 범형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의미에서 살펴볼 만한 것이라고 주장했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1. 하버마스의 탈초월화된(detranscendentalized) 이성과 탈형이상학적(postmetaphysical) 사유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에 대해서는 이 책의 2장을 보라.

  2. 당시 하버마스가 학생 운동에 어떻게 개입했는지에 대해서는 이 책의 7장에서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3. 이후 하버마스는 이러한 현상들을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라는 용어로 이론화하였다. 이 책의 4장을 보라.

한철연 2020년 8월 월례발표회 영상 – “박세채 『범학전편』의 구성과 특징- 저술을 통한 조선 도통의 재구축”(유튜브링크) [월례발표회]

한철연 2020년 8월 월례발표회 영상 – “박세채 『범학전편』의 구성과 특징- 저술을 통한 조선 도통의 재구축”(유튜브링크) [월례발표회]

링크https://youtu.be/iPgwkp4YGcQ

 

 

한철연 학술1부입니다.

“‘지금, 우리’의 전통철학 – 유학의 현대적 연구”라는 주제로 동양철학 특집으로 2020년 하반기 월례발표회를 총 4회 진행합니다.

그 처음은 김정철 선생님의 지난 8월 발표로 시작합니다.

– 주 제 : 박세채 『범학전편』의 구성과 특징- 저술을 통한 조선 도통의 재구축
– 발표자 : 김정철(한국학중앙연구원)
– 토론자 : 조현웅(한국학중앙연구원)
– 사회자 : 박민철(한철연 학술1부장, 건국대)
– 일 시 : 2020년 8월 1일 오후 3시
– 장 소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강의실
– 방 식 : 비공개 방식(오프라인 촬영 및 영상 업로드)

의사파업과 재활용 분리수거의 공통점(자본론 에세이-5 제8장, 제9장) [내가 읽는 『자본론』]

의사파업과 재활용 분리수거의 공통점(자본론 에세이-5 제8장, 제9장)

 

김보경(경희대 사회학과)

 

지난 8~9월,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및 공공의대 설립 등의 의료정책에 반대하는 의사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한테는 꽤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내가 속한 세대와 나 자신에 대한 성찰도 많이 하고,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에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우리 세대가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를 자꾸만 상상하게 되었다. 그 세상은 결코 좋은 모습이 아니었다.

언론에서 의사파업과 자주 같이 묶이는 것이 ‘인국공 사태’이다. 내가 접한 수많은 칼럼과 기사들에서는 이 두 사건이 같이 언급되며 청년세대의 이기심과 잘못된 공정관념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왔다. 나는 역시 그 비판에 동의했다. 우리 세대가 공정에 대한 개념이 모호한 세대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청년세대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면 거세질수록 나는 조금씩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비난들이 다소 ‘불공정’하다고 생각되었다. 문제는 청년 개개인들의 이기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는 청년세대를 보며 머리를 저었다. ‘이 시국에 어떻게 파업을 할 수 있냐’며, 인국공 사태에 관해서는 ‘같이 살 방법을 모색해야지, 시험으로 얻은 권위만을 진정한 공정으로 생각하는 건 너무 얕은 사고’라며. 하지만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당신들은 우리를 보며 수없이 한숨을 쉬었지만, 당신들이 만들어놓은 경쟁의 틀 안에서 자라야 했던 우리는 가족 안에서, 학교 수업을 받으면서 그동안 얼마나 많은 한숨을 쉬었을까요?

세대들은 서로로부터 독립된 게 아니라서, 다음 세대는 반드시 이전 세대의 거울일 수밖에 없다. 이전 세대가 어떤 가치를 추구했고, 어떤 싸움을 벌여왔느냐에 따라 다음 세대의 모습이 달라진다. 모든 국민에게 충격을 안겨준 이번 의사파업은 코로나19 이전에 국가와 사회, 그리고 기업이 생명을 얼마나 함부로 다뤄왔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코로나19 창궐 이후로 우리 모두가 생명과 연대의 소중함을 체감하게 되었지만, 코로나 이전에는 어땠나? 나는 세월호 사건을 기억한다. 아직도 기업이 안겨준 수십억 빚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쌍용차 노동자들을 떠올린다. 삼성 백혈병 사태를, 가습기 살균제 사태를, 구의역 김 군의 죽음에서 멈추지 않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진 산재, 노동자들의 죽음을, 그 뒤에도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던 무능한 국가를 생각한다. 마땅히 도움 받아야 할 사람들이 사회의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해 다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수많은 약자를 떠올린다. 기성세대에 감히 송구한 발언을 하지만, 내가 본 것은 나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 어떤 윤리와 미덕도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 청년세대가 유일하게 약속받은 것은 1등이 되면 잘 살 수 있다는 보장이었다. 청년세대가 기성세대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1등이 되어야 해고될 걱정 없이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 1등이 되어야 언젠간 내 집을 갖고, 내 집만이 아닌 내 재산을 불릴 수 있는 여러 다른 집도 가질 수 있다는 것. 1등이 되어야 내 목소리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주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는 1등이 되려고 했다.

그러니 청년세대가 가지고 있는 공정의 개념은 당연히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더 빨리, 더 멀리 뛰어야 하는 경주에서는 당연히 그 누구도 옆 사람과 함께 뛰려고 하지 않는다. 청년세대가 잘못된 공정을 쫓고 있다면, 그 공정의 틀을 제공한 기성세대도 함께 반성해야 한다. 공생을 보여준 적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에게 공생을 기대한다는 말인가. 모든 이의 노동이 존중받고, 모든 이의 생명이 존엄한 사회였다면 우리가 이토록 이기적일 필요가 있었을까.

자본론 제8장과 제9장에서 마르크스는 상품의 생산과정 중에 가치가 변하지 않는 ‘불변자본’과 가치가 변하는 ‘가변자본’을 구분하여 착취가 어느 부분에서 이루어지는지 설명한다. 결론은 가변자본 중 노동자의 노동과정에서 잉여가치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즉, 노동자의 몸이 움직이는 동안 노동자는 자신이 버는 임금 이외의 가치들도 창출하는데, 그 가치는 자본가가 다 가져간다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이 자본론의 해설은 아니기 때문에, 마르크스가 거의 마흔 페이지에 걸쳐 설명한 잉여가치 발생 및 착취의 과정을 일일이 설명하진 않겠다. 직접 읽어보길 권장하지도 않는다. 같은 부분을 7시간 동안 붙잡고 있어도 이해가 어려웠던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노동자가 만들어낸 잉여가치를 자본가가 다 가져가더라도, 노동자가 충분히 먹고살고, 또 건강할 수 있는 여건이었다면 그 누구도 불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잉여가치의 발생을 문제 삼았던 이유는 생존을 위한 노동이 노동자의 생존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현실, 착취 때문이었다.

우리 사회에 비추어 보자면, 과로에 시달리는 택배 노동자들(나는 최근에 택배 노동자들이 택배 분류작업을 직접 한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우리나라의 빌어먹을 ‘빠름’에 대한 집착 때문에 값싼 배달료가 목숨 값이 되어버린 배달 플랫폼 라이더들, 방학에도 수업 준비를 하고 연구를 해야 함에도 학기 중에만 월급을 받는 시간강사들 등의 착취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의 이윤 앞에 이들 자신의 안전과 건강은 늘 뒷전이다. 살기 위해 하는 노동이지만, 어쩐지 살기가 너무 힘든 것이다.

비록 긴 시간은 아니지만, 내가 태어나고 ‘의식’이라 부를 만한 것이 생긴 후에 쭉 지켜본 한국 사회는 격변의 사회였다. 하지만 어쩐지 수많은 ‘격변’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담론은 개인의 윤리와 잘못에 대한 논의를 잘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이번 의사파업과 재활용 분리수거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난데없이 재활용 분리수거라니. 조금 뜬금없을 수 있겠으나, 최근에 어떤 기사를 통해 접한 플라스틱 재활용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생산되는 플라스틱 중 아주 낮은 비율만 재활용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그 이유에는 재활용 비용이 너무 비싸다거나, 기업이 플라스틱과 다른 소재를 섞어 재활용이 불가능해진다거나 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플라스틱이 재활용될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열심히 분리수거를 해왔다. 나라에서는 분리수거를 적극 격려하고, 기업에서는 재활용 가능한 플라스틱이라고 선전을 하니 비닐도, 페트병도 열심히 분류하고 음식물이 묻은 플라스틱은 깨끗이 씻어서 배출했다. 플라스틱만이 아니라 종이 같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떼어도 잘 떼어지지 않는 택배 운송장의 마지막 코너까지 긁어내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고, 난감하게 비닐과 종이가 섞인 포장을 둘로 열심히 분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글로벌화 된 기후변화 이슈에 대응하는 것은 윤리적 개인이었고, 개인일 뿐이었다. 국가나 기업은 마치 치어리더처럼 재활용을 격려만 하는 동안 개개인은 환경에 대한 죄의식과 일종의 의무감으로 모든 짐을 짊어졌다.

기후변화 얘기에 아직 충분히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으니, 다시 의사파업으로 돌아가 보겠다. 최근 의대생들이 거부했던 의사 국시를 다시 보게 해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정부는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를 거부했고, 사람들은 고소해했다. ‘그거 봐라, 그러게 누가 그렇게 설치랬니’ 하면서 말이다. 물론, 나도 이제 와서 이미 지나간 의사국시를 허용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윤리적으로 잘못한 죄인’들에 대해 처벌을 내린다는 심정으로 고소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씁쓸해해야 한다.

청년들의 주식투자 열풍에 한탄하는 글들도 요즘 많이 접하게 된다. 집이 없는 청년들은 주식투자를 한다. 누군가가 이미 너무 많은 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청년들 사이에서 또 한창 인기 있는 것은 ‘다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부류의 에세이, 자기개발서이다.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고, 착한 사람이 아니어도 괜찮고, 죽고 싶어도 괜찮고, 우울해도 괜찮고, 가진 게 없어도 괜찮다고 한다. 물론 정말 다 괜찮다. 자신의 감정과 처지를 부정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인지하고, 또 그것에 대해 위로를 받는 것은 중요하다. 문제는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가 아닌 치유라는 것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치유는 없고, 위로만 난무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지금, 이 시국에서도 정부나 정치인들이나 기업들이 하는 말은 다 위로의 공허한 메아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진짜 공정이라느니, 공생이라느니, 경제성장의 회복이라느니 하는 것들 말이다.

개천절, 국무총리는 경축사를 하며 이런 말들을 했다:

 

“정부는 올해 9월 우리의 국가목표로 ‘포용국가’를 선언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유엔총회 연설을 통해 설명하신 대로,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 단 한 명의 국민도 차별받지 않고 더불어 사는 나라가 포용국가입니다. 포용국가로 가려면 정부와 정치가 제도를 만들며 이끌어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께서 일상에서 하실 일도 많습니다. 이웃을 배려하고 약자를 돕는 일이 그것입니다. 포용국가의 길을 정부는 착실히 가겠습니다. 정치와 국민 여러분께서도 동행해 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이것 또한 단군 할아버지께서 꿈꾸신 홍익인간의 길이라고 저는 굳게 믿습니다.”

더 씁쓸해지지 않으려 채널을 돌렸다.

 

『대학(大學)』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치(治)’를 우리는 ‘다스릴 치’로 많이들 생각해왔지만, 「맹자, 마음의 정치학」의 저자이자 영산대학교 자유전공학부 교수인 배병삼 선생님은, 그 ‘치’에는 다스린다는 의미보다 치유한다는 의미가 크다고 한다. 즉,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닌 병든 나라를 치유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국가가 국민에게 위로만 준다면 그것은 그저 나라를 다스리는 것에 불과하다. 최대한 많은 표를 받아 최대한 많은 국민을 다스리려 하는 것이다. 그런 정치는 특정 가치와 방향성을 가지기보다 그때그때 더 커지는 목소리들에 휩쓸리기 쉽다. 하지만 병든 나라를 치유하는 정치는 다르다. 그런 정치는 병든 부분이 어디인지 명확히 짚고, 병이 재발하지 않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하고 미래의 방향성을 설정한다.

87년생의 초선의원인 정의당 장혜연 의원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인국공 문제를 공정 이슈로 보는 것은 담론 바꿔치기에 가깝다. 진짜 근원적 해답은 좋은 일자리가 무엇이냐,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애당초 정규직으로 해야 하는 일을 비정규직으로 쓰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기성세대가 된 86세대에 대해서는 “87년의 정의가 독재에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면 지금의 정의는 불평등과 기후위기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민주화 주인공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잡을 때, 우리 사회의 케케묵은 과제를 청산하고 우리가 맞은 과제들에 용감히 부딪혀갈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한때 변화의 동력이었던 사람들이 어느새 기득권자로 변해 변화를 가로막는 존재가 돼버린 안타까운 현실입니다.”라고 말했다.1

나는 이 글로써 의사파업의 책임을 기성세대에게 전가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게 당신들 잘못이라고 싸움을 거는 것도 아니다. 세대 간 책임을 서로에게 미루기만 하면 또 다른 단절과 또 다른 갈등이 생길 뿐이다. 나는 다만, 이번 사태의 본질이 엘리트주의에 빠진 기득권 청년들과 이들이 속한 집단의 이기심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 사회에 뿌리박힌 시스템이 문제라고. 우리는 코로나19 속에서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의 1등들이 생명과 연대가 아닌 자신들의 기득권만 주장했을 때 우리는 온 국민이 위기에 빠지는 경험을 했다.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맹목적으로 추구해왔던 경쟁교육, 그리고 성장 중심주의를 내려놓아야 할 때다. 실질적으로 공정하고, 실질적으로 평등한 정책들을 세워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이를 확고히 선언하지 않으면, 그리고 그 선언을 이행하지 않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기성세대와 정치권의 결단력 있는 태도를 요구한다. 그리고 그동안 기고만장했던 기업의 책임을 따진다.

마음이 조급하다. 청년이 기성세대가 된 세상은 지금 같지 않아야 한다. 아마 백신이 나오고 인류가 코로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면 우린 다시 예전 그 방식대로 살아나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코로나19 이전의 사회와 같은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감히 솔직해지자면, 기존의 사고방식을 우리 사회가 스스로 버리는데 필요한 시간만큼 코로나가 우리 곁에 머물러주었으면 한다. 1등이 아니어도 건강하고 안전하게 자신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는 노동이, 1등이 아니어도 존엄하다고 가르쳐주는 교육이, 자연을 돌보지 않고는 풍요로울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하고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이, 현실이 될 때까지.

변화하지 않는다면 코로나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변화의 그 날이 너무 멀리 있지는 않았으면 한다.


  1. 2020-10-09, 이정민, 「[이정민의 직격인터뷰] “잘못 인정하는 게 리더, 도덕적으로 책임지는 능력 회복해야: 87년생 초선의원이 86세대에 던지는 고언”」, 『중앙일보』

겉모습이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노동자 [내가 읽는 『자본론』]

겉모습이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노동자

 

최재식(경희대 철학과)

 

1.  어느 여름 날

 

2020년 어느 여름 날, 늦은 아침 집 앞 도로를 달리는 마을버스의 엔진 소리에 잠에서 깼다.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하고 의자에 걸려 있는 옷을 주워 몸에 걸친다. 코로나19가 무서운 나는 가방과 함께 마스크를 챙긴 다음 집 밖으로 나선다. 학교로 향하는 길,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주문한 뒤 텀블러에 받아간다. 정문 옆 대학병원 입구로 의료용품을 실은 수레가 향한다. 그 뒤엔 흰색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학교에 들어서니 길목 곳곳을 서걱서걱 쓰는 빗자루 소리가 들린다. 교통정리를 하는 호루라기 소리를 뒤로 하고 학교 건물로 들어간다. 어차피 수업은 비대면 온라인 수업, 하지만 행정실에 들러야 해서 학교에 왔다. 행정실 방문 전 수업을 듣기 위해 학생회실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켠다. 수업을 들었는지 잠을 잤는지 잘 모르겠다만 수업은 끝이 나고, 행정실로 가서 내가 다음 학기 졸업이 가능한지 마음 졸이며 확인을 받는다. 다행스럽게도 졸업에 별 문제가 없다고 한다. 내가 학교에 바친 돈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이긴 하다. 이제 늦은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식당에 가기는 좀 그렇다. 배달음식어플을 켜고 무슨 음식을 주문할지 고민해본다. 고민은 복잡했지만 답은 언제나 그렇듯 자장면이다. 요청사항에 ‘양파 많이 주세요’라고 적은 뒤 배달이 오기 전 한 숨 자기로 한다. 아차, 배달주소를 잘못 입력했다. 재빨리 음식점에 전화를 건다. ‘경희대학교 문과대학으로 배달 주소 변경할게요. ㅎㅎ’ 조금만 늦었으면 점심 먹으러 다시 집에 갈 뻔 했다. 배달이 왔다. 후루룩 자장면을 먹는다. 다 먹고 그릇을 내놓으려 보니 요즘은 중국음식점도 일회용 그릇을 쓰나 보다. 지구 생태와 환경에 죄를 지었다는 아픔에 눈물을 머금고 쓰레기통에 일회용 그릇을 버린다. 달력을 보니 <e 시대와 철학> 원고 마감일이 코앞이다. 밀린 자본론 에세이 연재 글을 작성하기 시작한다. 밖에서 쓰레기통 비우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떠보니 아침 해가 뜨고 있다. 아까 학생회실 소파에서 10분만 잔다는 게 열 시간이 되었나보다. 내 인생 이래도 괜찮을까?

 

위의 글은 2020년 여름 어느 날을 살아가는 가상의 인물이 쓴 하루 일기이다. (절대 필자 본인 인생을 묘사한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본문에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일기 내용을 보면 참 다양한 형태의 노동과 그 노동을 수행하는 여러 노동자들이 엿보인다.

한 번 간단하게 나열해보자. “버스기사, 바리스타, 택배기사, 의사, 간호사, 미화원, 수위, 강사, 행정교직원, 배달원, 콜센터 직원 등…….” 본문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들만 해도 이정도이다. 이들이 하는 일들은 그 형태도 방법도 결과도 모두 다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같은 이름 아래 묶인다. “노동자”

 

2. 노동자이기 때문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하에서 가치 생산을 위해 쓰이는 노동을 단순화하여 분석한다. 실상 『자본론』 1권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구성하는 상품의 ‘가치’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탐구하는 글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가치의 원천을 ‘노동력’이라 규명하였다. 그 노동력을 투입하여 상품을 생산하는 과정이 ‘노동’이다.

노동은 노동을 행하는 사람과 노동환경의 구성, 노동과정의 끝에 나올 완성품에 따라 다른 형태를 가진다. 마을버스를 운전하는 버스기사와 망가진 에어컨을 수리하기 위해 가정집 출장을 다니는 에어컨 정비공, 이 둘의 노동형태가 다름은 자명하다.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서로 다른 이들 노동은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환원되어 상호 비교·분석된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서, 자본가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본가는 화폐를 새로운 생산물을 형성하는 요소 또는 노동과정의 요소로 기능하는 상품들로 전환시킴으로써, 그리고 죽은 물체에 살아 있는 노동력을 결합함으로써, 가치[대상화된 과거의 죽은 노동]를 자본[자기를 증식하는 가치, ‘가슴속에 사랑의 정열로 꽉 차서’ 일하기 시작하는 활기 띤 괴물]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1 이 과정에서 구체적인 노동의 형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노동이 가치를 증식시켜 자본을 불려준다면 자본가 입장에서는 신경 써야할 게 아무 것도 없다. 그저 노동자들의 노동력이 필요한 만큼 재생산될 수 있게 하면 된다.

다시 다른 입장에서, 이번에는 노동자들의 입장으로 가보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스타일의 옷을 즐겨 입는지, 어떤 장르의 영화를 좋아하는지, 어떤 형태의 노동을 하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자본가들에게 인간 철수, 영희, 바둑이는 없다. 그들은 이 세 명의 인간을 노동자 1, 노동자 2, 노동자 3으로 본다. 노동자들의 노동 여건이 열악한 이유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가치를 자본가와 나눠가져야 하는 이유는, 노동자들이 경제 위기 상황에서 해고당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자본가에게 종속된 ‘노동자’이기 때문이지 ‘방직’노동자라서, ‘청소’노동자라서, ‘IT’노동자라서, ‘사무’노동자라서가 아니다.

 

3. 지역과 업종은 모두 달라도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줄여서 ‘전노협’이라는 단체가 있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건설운동의 영향을 받아 1990년 결성된 단체로, 이름 그대로 전국 노동조합들의 협의회, 상위단체였다. 전노협을 대표하는 ‘전노협 진군가’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 가사 중 ‘지역과 업종은 모두 달라도 / 전노협 깃발 아래 총진군’2이라는 대목을 인용하고자 전노협을 언급했다. 필자의 부족한 깜냥으로 생각하기에, 이 글에서 언급하고자 하는 바를 이 구절이 잘 나타낸다고 봐서이다.

작업장이 어디에 있든, 그 작업장에서 어떤 일을 하든, 그들은 전노협 아래에 뭉치고자 하였다. 이는 활동의 형태가 어떠하든 그 모든 활동들이 노동이고, 그 노동을 하는 모든 이들이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져 포항 제철소에서 쇳물 사이를 누비는 노동자와 광주 자동차공장에서 볼트를 조이는 노동자, 새벽같이 서울 빌딩숲을 오가며 건물 곳곳을 청소하는 노동자와 대전 국가연구단지에서 방사성 물질을 취급하는 노동자들 모두가 같은 노동조합 상급단체 아래에서 서로를 ‘동지’라고 부른다.

앞 2.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자인 이유는 그들이 ‘노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지. ‘어떤’ 노동을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서 투쟁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특정한 노동에 종사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노동자이기 때문에 노동조합을 만들고, 단체교섭을 하고, 파업을 한다.

 

사진출처 http://demos-archives.or.kr/content/306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

 

4. 노동운동을 한다!

 

필자 주변에는 노동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필자 역시 노동 현장 혹은 노동운동 현장을 몇 번 직접 경험했었다. 사람들은 노동현장에서 여러 부류로 나뉜다. 우선 노동현장의 사람들은 크게 노동자와 사용자로 나뉜다. 여기서 사용자는 논외로 치고, 같은 노동자라도 법적으로 어떤 고용형태를 가지냐에 따라 정규직 노동자가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또 노동자들은 어떤 노동을 하느냐에 따라 도입부의 일기에 나온 것처럼 각자 다른 이름을 가진다. 버스를 운전하는 운수노동자는 버스기사, 학교 건물을 청소하는 청소노동자는 청소부, 이렇게. 혹은 노동숙련도에 따라 숙련노동자, 미숙련노동자라는 이름표를 다는 경우도 있다.

노동운동의 큰 목표 중 하나는 이렇게 이질적인 겉모습들을 가진 수많은 노동자들을 하나의 대오로 조직하는 것이다. 노동운동 현장에서 들리는 구호 중 “모든 노동자에게 근로기준법을!”, “모든 노동자에게 노조 할 권리를!”3이라는 구호가 있다. 이 구호는 노동자이지만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우리 사회 곳곳의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구호이자, 사회 주류가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범주의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을 ‘노동’이라는 외연 아래에 한데 묶는 구호이다. 이렇게 많은 노동자들이 하나의 대오로 뭉칠 때 그들은 보다 더 큰 힘을 가진다. 그리고 그 힘은 단지 조직된 모든 노동자 수의 합 그 이상의 시너지로 나타난다.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는 노동의 범위를 넓히고, 노동자 조직이 포괄하는 노동자의 수와 범주를 확장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감히 필자가 노동운동이 그렇게 전개된 이유를 짐작하자면, 쪽수가 곧 힘이고 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할수록 그 조직이 단단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전략이 유효했고 유효한 이유는 각 노동자들이 행하는 노동형태가 모두 다를지라도 그들이 모두 ‘노동’하기 때문이 아닐까?

 

5. “오늘 뒤풀이 비용은 조합비로 결제하겠습니다.”

 

필자도 나름 조직된 노동자의 힘을 직접 느껴 본 적이 있다. 남들이 보기엔 별 거 아니라고 보일 수도 있겠는데, 필자는 회식자리에서 그 힘을 느꼈다. 노동운동 현장을 따라다니다 보면 필자도 투쟁 마무리 회식에 스리슬쩍 합류할 때가 있다. 참 감사하게도 필자는 아직 얻어먹는 위치에 있는 경우가 있다. 돈을 안 버는 학생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그런데 아마 그 현장에 함께했던 노동자 개개인들과 필자가 일대일로 만난다면 이런 일은 드물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리 정기적으로 봉급을 받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선뜻 밥을 사줄 수 있을까? 그분들이 일해서 돈을 번다고 살림이 풍족할 리가 없다. 빠듯한 가계부이지만 그분들이 나 같은 ‘룸펜’에게 밥을 사주실 수 있는 이유는 조직이 있기 때문이다. 위의 회식들은 조직된 노동자들이 임금에서 각출한 조합비로 처리되기 마련이다. 아마 그 조합비가 없었다면 나는 밥을 얻어먹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연재 글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은 현대 한국의 대학생이 쓰는 글’이라는 연재의 주제와 조금은 달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는 이번 연재분의 핵심 글 꼭지였던 『자본론』 제1권 제3편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증식과정〉을 읽으며 노동의 껍데기 그 이면에 존재하는 실제 인간으로서의 노동자가 끊임없이 생각났다. 자본주의가 인류 사회를 장악한 뒤 노동과정에서도, 가치증식과정에서도 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노동력을 담지하고 있는 하나의 살덩어리로만 여겨져 왔다. 그들이 하나의 전인적인 인간 존재가 아니라 노동력의 담지자로 취급당해왔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노동자’로 뭉쳐야만 했다. 노동해방의 세상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 세상을 상상해본다면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노동자’, ‘노동계급’이라는 단어를 역사책에서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노동해방 그 이후에야 사람들은 노동력의 담지자가 아니라 인간 존재 그 자체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본격적으로 노동자로서 생활하고 있지는 않지만, 평소 주변에 노동자 가족, 이웃, 친구를 두고 있는 사람, (99% 확률로) 노동자가 될 사람으로서 느끼는 점들이 많았다. 누군가 이 글을 보고 나에게 공감해주길 바라며 두서없이 그 느낌들을 적어봤다. 그럼에도 아마 많은 사람들은 어떤 ‘노동자’가 아니라 ‘어떤’ 노동자라는 관점의 시각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주변에서 문자 그대로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보았을 때 느낀 그 절망과 공포에 맞서 싸우는 ‘조직된 노동자’들을 존경한다. 그들 중 몇몇은 비교적 편안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노동한다. 자신의 일만 하면 참 편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탄가루 날리는 발전소에서, 쇳물 흐르는 용광로에서, 멈추지 않는 컨베이어벨트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바이러스 감염자들 앞에서 자신을 갈아 넣는 하나의 생명을 외면하지 않는다. 겉모습이 다를지라도 우리 모두는 노동자라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말이다.

스물세 번째 시간, ‘포기’란 없다 [시가 필요한 시간]

시가 필요한 스물세 번째 시간, ‘포기’란 없다

 

마리횬

 

♦ 귀로 읽는 시간-하나(재생버튼을 눌러주세요~)

어제 오랜 친구를 만났어요. 처음 알게 된 때부터로 계산하면 13년, 마지막으로 만난 때부터로 계산하면 약 9년 만에 연락이 되어 만나는 셈이었는데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어렴풋이 상상을 해보기도 했죠. 하지만 친구는 제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전공을 다시 공부했고, 제가 생각지도 못한 분야의 전문인이 되어 있더라구요. 그렇게 되기까지의 친구의 방황과 고민의 시간, 쉽지 않았을 선택의 과정 등을 들으며 한편으로 너무나 신기하기도 했고, 한편으로 이 단계에 오기까지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그 많은 어려움을 견뎌낸 친구가 참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친구를 만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생각난 시 한 편이 있었습니다. 그 시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가져왔습니다. 송경동 시인의 시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입니다.

 

 

먼저 가는 것들은 없다

                                   송경동

 

몇 번이나 세월에게 속아보니

요령이 생긴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계절이라 생각될 때

그때가 가장 여린 초록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 보인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

 

두 번 다시는 속지 말자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사랑은 한 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

 

♦ 귀로 읽는 시간-둘(재생버튼을 눌러주세요~)

이 시의 화자는 아마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중년의 한 사람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시를 읽으면 이 화자는 살면서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적잖이 굴곡진 인생을 산 사람으로 보입니다.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보여서 포기하고 싶었을 때,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었을 때가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죠.

우리도 이런 순간들이 있지 않나요?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도,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도 그런 녹록치 않은 삶을 살아야만 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말합니다. 내가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 될 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지만 그 때가 가장 여린 초록, 그 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이라고 말입니다.

소나무를 한 그루 생각해볼까요? 모든 나무들 중에 특히 소나무는 무수한 세월을 살아가죠. 어느 날, 소나무가 “너무 오래” 살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찾아왔다고 생각해 봅시다. 몇 백 년을 살고 있으니, 이제 왠지 이파리도 좀 시든 것 같고, 볼 품 없다고 느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때가 그 나무에게는 가장 여린 초록의 시간이겠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비하면 말이죠.

시인은 그것을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오년 후, 십년 후의 너의 모습에 비하면 지금이 “가장 여린 초록빛”이라고 말입니다.

 

바늘귀만 한 출구도 안 보인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 매번 등 뒤에

다른 광야의 세계가 다가와 있었다

 

이 시인의 시처럼, 앞이 꽉 막힌 상황에서 나에게는 도대체 출구가 없다고 불평할 때, 사실은 등 뒤에 그저 작은 ‘출입문’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광활한 길이 열려 있는데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쉽고 편하고 안전한 길을 ‘출구’라고 정의해 놓고, 진정한 출구인 ‘광야의 세계’를 너무 쉽게 놓쳐버렸던 것은 아닐까요?

 

두 번 다시는 속지 말자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여름의 시간 기회의 시간

사랑은 한 번도 늙은 채 오지 않고

단 하루가 남았더라도

우린 다시 진실해질 수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예전에 버스에서 들었던 한 라디오 사연이 기억났습니다. 어느 95세 할머니의 사연이었는데, 듣다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95세 할머니가 자신의 인생 목표로 지금 제2외국어 공부를 시작했다는 사연이었거든요. ‘아니 그 늦은 나이에 무슨 외국어를 공부하시려고 하지?’ 싶었는데, 이 분의 사연을 끝까지 듣고는 더 놀랐습니다. 30년 전, 당신이 65세 생일을 맞이했을 때, 그 때는 자신이 이렇게 30년이나 더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고, 이젠 늙었다고 생각하고 그냥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냈다는 겁니다. 그 때 미리 알았더라면 아마 자신은 지금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95세 생일을 맞이했을 거라고.. 그러면서, 이제 10년 후, 자신의 105세 생일이 왔을 때 또 지금처럼 10년 전을 아쉬워하며 후회하지 않기 위해, 지금 새로운 인생을 시작 하련다는 내용의 사연이었습니다. 대단하죠?

이 시의 표현처럼, 세상은 우리를 자주 속이려고 합니다. “넌 안 돼,” “이젠 너무 늦었어,” “네 나이를 생각해라,” “네 나이또래 친구들은 벌써…,” “이제 와서 무슨!” “네가 그럴 능력이 되니” 등등 힘 빠지게 만드는 직접적인 말, 암묵적인 사회적 분위기에 어깨가 짓눌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두 번 다시는 속지 말자는 이 시인의 다짐처럼, 그만 생을 꺾어버리고 싶을 때, 그 때가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보라는 기회의 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뒤를 돌아보면 진짜 내가 가야할 ‘출구’가 있다는 것.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와 함께 들으면 좋을 노래 소개해 드릴게요. <팬텀싱어>라는 프로그램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성악가, 뮤지컬 배우, 일반인들이 모여 노래경연을 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들었던 곡 중에 한 곡 가져 왔습니다. 이탈리아의 국민가수라고 불리는 Renato Zero 원곡의 “L’impossibile Vivere” 라는 제목의 곡인데요, 번역하면 ‘불가능한 삶’이라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노래는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살아내야지”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시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힘 있는 가사가 가슴을 울리는 곡입니다. 어제 만났던 친구에게도 들려주고 싶네요. “살아있음을 느끼는 삶을 살자. 너보다 더 잘해내는 사람은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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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impossibile Vivere – https://youtu.be/HOhsVSmqKuQ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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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팟케스트 <마리횬의 시와 음악공간(2012)>에서 러시아의 시와 노래를 직접 번역하여 소개하는 방송을 진행하였고, 호주 퀸즐랜드주 유일의 한인라디오방송국에서 시를 읽고 생각을 나누는 <시가 필요한 시간(2016-2018)>을 진행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연세대학교에서 노어노문학을 전공하였고, 현재 동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