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효숙 지음, 『모어의 유토피아 – 왜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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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효숙 지음, 『모어의 유토피아 – 왜 유토피아를 꿈꾸는가』 [EBS 오늘 읽는 클래식]

 

이병태(한철연 회원, 경희대)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모어의 『유토피아』는 ‘지나치게’ 유명하다. 한 번 읽어보라는 권유가 심드렁하게 여겨질 정도로. 더욱이 ‘세탁’이나 ‘교육’ 프랜차이즈의 이름에 작품명의 라임이 남아 있어 ‘유토피아’란 말 자체가 식상하기까지 하다. 고전치고는 내용도 짧고 쉽기에, 한 권 읽어냈다는 서푼짜리 정복감 외에 그다지 인상적인 독후감도 남지 않는다. 사실 모어의 『유토피아』에 다가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이처럼 과한 낯익음에 있다.

연효숙의 『모어의 유토피아』처럼 소상한 안내서가 빛을 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저 식상한 인상을 벗겨 『유토피아』가 흥미롭기 그지 없는 작품임을, 그리고 지성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자산인지 깨닫도록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1장 ‘이상 국가를 꿈 꾼 토마스 모어’, 2장 ‘『유토피아』 읽기’, 3장 ‘철학의 이정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토피아』 탄생의 역사적 배경은 물론 중요한 문제의식까지 꼼꼼하게 짚어낸다. ‘유토피아’에 대한 모어의 상상은 그 자신의 삶과 분리할 수 없기에 “모어의 유토피아”란 제목 또한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다. 더욱이 모어의 삶, 그리고 그 배면의 역사적 변화를 가장 앞에 배치하고 또 상세하게 설명함은 작품의 진면목에 좀 더 깊이 있게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친절하고도 긴요한 배치다.

모어는 근대세계가 급부상하는 격변의 역사를 온 몸으로 관통했던 인물이다. 성속의 대체라는 거대한 역사적 변화가 그의 삶을 통해 극적으로 함축되기 때문이다. 카톨릭의 오랜 종교적 가치를 보듬으면서도 관용적이었던 그의 윤리적 삶은 실제로 헨리8세의 막강한 세속적 권력과 충돌하면서 종지부를 찍게 되었으니 말이다. 우리로 치면 영의정쯤이라 할 수 있는 상서경(Lord Chancellor)의 지위에 있었음에도, 즉 온갖 사회적 수혜를 받을 수 있었음에도 토마스 모어는 오히려 그러한 불평등의 뿌리와 이를 심화하고 있는 당대의 역사적 변화를 지극히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돈과 힘의 위세가 종교적 윤리의 고삐를 벗어던짐으로써 심화되는 새로운 시대의 위험성, 그리고 이같은 변화 속에서 뭇 백성들에게 들이닥친 생존의 위기는 비판을 넘어 반드시 부정되어야 할 문제였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가 길지 않은 허구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진지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는지를 차분하고 깔끔하게 보여준다.

일신의 안녕을 등진 치열한 문제의식은 모어로 하여금 전례가 없는 이상사회의 청사진을 그려내도록 한 바탕이었다. 그의 ‘유토피아’가 배고픔과 질병의 고통, 죽음의 공포를 단순 부정했던 종교·신화의 이상향과 판이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근대적 유토피아의 상상은 생산의 풍족함과 분배의 공평성, 모두의 평등과 연대를 가능하게 할 실질적 기반까지 모색하고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모어의 ‘유토피아’는 기복적 피안의 흐릿한 꿈과 차별화되는 것이다. 『모어의 유토피아』는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도록 이끈다.

나아가 『모어의 유토피아』는 『유토피아』가 지닌 지성사적 가치를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책 말미(3장 ‘철학의 이정표’)에 연관된 고전들을 소개함으로써 모어의 상상력과 문제의식을 고대와 중세, 다시 근대와 현대로 이어지는 지성사적 계보 하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하는 까닭이다. 주지하다시피 모어의 『유토피아』는 플라톤의 『폴리테이아』를 잇고 있으며 이는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어의 유토피아』는 마르크스, 캉유웨이, 에른스트 블로흐, 발터 벤야민까지 나란히 연관 저작으로 배열하여 보여준다. 이는 지성사를 통해 이어진 이론의 계보가 부단한 것이었음을 적절하게 환기하는 것이나 사실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처럼 면면한 지성사적 계보 너머로,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 사회에서 유토피아를 향한 희망이 결코 중단된 적이 없음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소유와 인정을 둘러싼 불평등, 그리고 그에 대한 투쟁은 여전하다. 그래서 『모어의 유토피아』는 친절한 입문서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다. 모어가 넘어서고자 했던 현실의 질곡이 500년 세월이 무색할 만큼 변함없음을, 따라서 ‘희망’ 또한 그치지 않음을 애써 일깨우고 있는 까닭이다.


서평자 이병태: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사)한철연 한국현대철학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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