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봄 제62회 정기 학술대회 알림

회원 여러분께

안녕하십니까. 곧 거행될 한철연 2022년 봄 제62회 정기 정기 학술대회에 대해 알립니다.

이번 학술대회는 2022년 6월 11일 토요일 오후 1시에 이화여대 포스코관 161호에서

《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라는 주제와 더불어 《이규성 선생님 추모학술제》를 같이 진행할 예정입니다.

온라인(Zoom)으로도 동시진행할 예정하오니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2년 봄 제62회 정기 학술대회

주제: 코로나19 시대와 그 이후 및 이규성 선생님 추모학술제

장소: 이화여대 포스코관 161호 (온라인 동시진행)

시간: 2022년 6월 11일 (토) 오후 1시

Zoom  ID: 812 1485 2828 / 암호: 1234

 


 

[회원동정] 제30회 열암철학상에 (고)이규성 선생님의 저서 선정, 수상(2022년 3월 26일)

조금 늦게 소식을 알려드립니다. 지난 2022년 3월 26일(토) 18시에 건국대학교 새천년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2022 한국철학회 정기학술대회(온오프라인 병행) 자리에서 한철연 회원으로 오랫동안 활동하셨던 (고)이규성 선생님(이화여대 철학과)의 저서 두 권이 제30회 열암철학상에 선정되어 수상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수상작은 아래와 같습니다.

ㅇ 제30회 열암철학상 수상작

  • 『중국현대철학사론: 획득과 상실의 역사』(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2020.6.30.)
  • 『한국현대철학사론: 세계상실과 자유의 이념』(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2.11.5.)
  • 저자: 이규성(전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 교수)

작고하신지 1주기가 되어가는 시기에 열암학술상 수상이 한 시대를 관통한 동양철학자로서 고인의 학술을 평가하는 본격적인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앞으로 한철연 회원들을 비롯하여 많은 연구자들의 후속 연구와 평가가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사)한국철학회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http://hanchul.org/34/11013507

 

보보스(보헤미안 부르주아) 문화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1)

보보족[BoBos]라는 말을 처음 듣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보헤미안 부르주아를 줄여 복수 어미를 붙인 말이다. 이 말은 미국의 작가 대비드 브룩스[D. Brooks]의 저서 ‘보보스[Bobos in pradise]’라는 책 때문에 널리 알려진 말이지만 실상 유럽에서 일찍부터 널리 쓰인 말이라 한다.

브룩스의 저서는 2000년에 발표된 것이다. 이 시기는 1980년대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전성기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전성기는 곧 몰락을 예고한다. 결국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는 몰락의 조짐을 드러냈다.

이런 신자유주의 시대 문화를 흔히 포스트모던 문화라 한다. 브룩스가 보보스라고 일컬은 문화적 현상도 이해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이 다룬 것과 동일한 현상을 다룬다고 보겠다.

90년대 말부터인가 우리에게도 포스트모더니즘 열풍이 불어 필자도 이 문화를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에 빠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포스트모더니즘론이 이 시대 문화의 일반적 특징으로 간주하는 것은 바로 혼종[混種] 현상 또는 혼성 모방 현상이다. 여러 가지 문화적 현상 가운데 일부를 빌어와 뒤섞은 문화라는 뜻이다. 대표적인 예라 한다면 단순하고 기능적이며 추상적인 모더니즘적인 구조에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구상적 형태를 덧붙인 건축을 들 수 있다.

저자 브룩스는 이런 다양한 혼종 문화 가운데 특히 부르주아적이면서 동시에 보헤미안적인 혼종 현상에 주목하면서 이것이 신자유주의 시대, 문화적 현상을 대표한다고 본다. 그 때문에 그는 이런 혼종 문화 현상에 보보 문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2)

부르주아 문화의 특징이란 세속적 욕망에 충실한 것을 기본으로 한다. 초기 부르주아는 개신교적 억압 아래 욕망을 통제하였으나 1871년 파리코뮌 이후 부르주아 전성기에 이르면 점차 부르주아의 욕망은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사치와 방탕이 확산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문화는 이성적 합리성 자체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1950년대 전후 복지국가 시절 전문기술 노동자층이 등장하면서 부르주아 문화는 마침내 대중적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이런 부르주아 문화에 대립하는 보헤미안 문화란 거슬러 올라가면 1830년대 등장한 낭만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낭만주의 문화는 20세기 초 모더니즘 문화로 그리고 1960년대 들어와서 아방가르드 문화로 발전하면서 보헤미안적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이런 보헤미안적 특징이라면 현실 초월적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보헤미안적 특징은 낭만주의나 모더니즘에서는 소수의 지적이거나 예술적인 엘리트의 문화로 남았으나, 60년대 히피 세대에서는 대중적으로 확산했다. 이 시기 만연한 섹스, 대마초, 명상, 록 음악 등은 물질적 욕망의 충족에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세속적 욕망을 초탈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모습은 무정부적이고 자기 파괴적이었다.

이런 두 가지 문화는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기까지 서로 대립적이었다. 보헤미안적인 지식인, 예술가는 부르주아 삶을 경멸했으며 부르주아는 이런 보헤미안을 자기들의 안정된 세계를 허물어뜨리는 질병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브룩스는 1980년대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두 문화가 마침내 융합하면서 보보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3)

브룩스는 두 문화가 융합된 모습을 지식인과 부르주아 양편에서 추적한다. 한편에서 부르주아는 이제 보헤미안적 문화를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기업가는 청바지를 입고 대중 앞에 등장하며, 휴일이면 할리 오토바이를 몰고 질주한다. 이런 기업가는 몇 주간 오지나 농촌을 찾아 고통을 감내하며, 아무도 오지 않을 곳에 통나무 집을 짓고 원시적 삶을 체험한다.

기업은 이제 단순히 유용한 상품, 고도의 기술을 자랑하지 않는다. 기업은 자신이 인류의 이상을 위해 봉사한다고 믿는다. 기업은 온난화 등 환경 위기를 극복하며 세계의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데 기여하며, 자신의 상품은 이제 하나의 예술이라고 말하며 심지어는 부르주아 사회에서 상실된 자연과 사랑, 그리고 영혼까지 찾아주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들 보헤미안적 사업가는 기업의 경직된 조직 체계를 허물며, 조직 인간 대신에 자유로운 개인, 상호 소통하는 열린 공간을 기업 내 창출하고자 노력한다. 이들은 문명의 발전을 거시적으로 보면서 이 시대가 새로운 문명의 시대임을 예를 들어 4차 기술 혁명의 시대라든가, 인류가 우주로 진출하는 시대임을 선지자적으로 고지한다.

브룩스는 이런 보헤미안적 사업가의 특징을 실천적 지혜, 육감적 능력을 의미하는 ‘메티스’라든가, 자기의 물질적 행복이 아니라 자기의 영혼과 사명을 강조하는 ‘고상한 자기 중심주의’라는 말을 통해 규정한다.

4)

거꾸로 지식인(동시에 예술가)은 이제 사회를 초월해 시대의 양심으로서 세상에 대해 분노의 심판을 내리던 선지자적 자세를 버린다. 과거 지식인은 자신의 언어나 예술작품이 그 자체로 사회적 혁명을 만들 거대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지식인은 자신을 세속적 성직자로 간주했으며, 동시에 그는 사회로부터 추방되거나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고 확신했다.

브룩스는 이제 그런 지식인 즉 인텔리겐차는 사라졌다고 본다. 터무니없이 암울한 예감에 사로잡혔던 지식인들은 시대의 변화를 쫓아가지 못해 공룡처럼 소멸했다.

지식인은 이제 자기의 전문 분야에서 부딪힌 문제를 풀어가는 지적인 기술자이다. 그는 자신의 지식이 하나의 유용한 상품이며, 대중의 갈채가 지식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간주한다. 지식인의 가치는 이런 사회적 교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는다.

이제 성공한 지식인이 지식인 스타가 등장했다. 대중적으로 판매되는 그의 상품을 바탕으로 그는 언론과 방송으로 진출하며, 심지어는 TV 연예 코너에 등장하기도 한다.

지식인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전략 전술적으로 판단하며, 학계와 학술회의, 인적 맥락을 조직한다. 이들은 자신의 지식의 상업적 가치를 증대하기 위해 상업적 대중문화 속에 뛰어들어 그것으로 자신의 상품을 포장하며 아예 이런 상업적 대중문화를 자신의 지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5)

신자유주의 시대 문화의 혼종 현상은 인간의 욕망과 관련해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과거 보헤미안은 욕망을 극단화했다. 그들은 욕망을 억압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구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욕망의 만족, 쾌락을 목표로 한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억압의 파괴를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욕망의 억압이 부르주아적 질서 자체의 토대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 대부분은 욕망의 해방 가운데 오히려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보헤미안의 욕망은 곧 죽음에의 충동이었다.

부르주아에게서도 1870년대 이후 사지와 방탕이 확산했기에 마치 보헤미안을 닮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자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다. 보헤미안이 죽음의 충동이었다면 부르주아는 만족을 목표로 했다. 그렇기에 부르주아는 일시적으로 방탕에 빠졌으며 결국 자신을 절제하는 것을 배운다.

보보족의 경우는 마치 보헤미안처럼 욕망을 극단화한다. 그는 과거 부르주아가 꿈꾸지 못한 다양한 욕망에 탐닉한다. 그는 감각을 극대화하는 욕망의 전문가이다. 그렇기에 그의 집에는 전문가 수준에 걸맞은 값비싼 오디오가 있으며 그는 커피를 마시면서도 자신을 커피 전문가라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그의 욕망은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 한계는 그의 건강이다. 그는 자신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가리지 않지만, 그의 건강에 해가 되는 것은 과감하게 단절한다. 그는 보헤미안처럼 록 음악과 명상을 즐기지만, 보헤미안과 달리 술과 대마초에 빠지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을 문화화하듯이 그는 자신의 욕망을 문화화한다. 그는 여느 사도 마조히스트처럼 자신의 욕망을 규칙화하며, 자신의 욕망에 진보적 이상의 색깔을 입힌다. 그는 자신의 욕망이 자연과 공동체, 생태계에 기여한다고 믿는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섹스는 영혼에 도달하는 수단이라 확신한다.

6)

브룩스는 서술에서는 풍자적 요소가 많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 보보스 문화에 대해 긍정적이다. 그는 이런 보보스 문화가 정보화 시대의 산물로 본다. 이 시대 지식이 대중화하면서 또한 지식이 자본화하면서 지식인 전통과 부르주아 전통이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두 문화가 함께 융합하면서 보보스 문화가 이루어졌다. 이런 새로운 보보스 문화는 부르주아의 야만도 보헤미안의 고고함도 버리고 지식인은 상업화하며 반면 부르주아는 욕망에 탐닉한다.

그러나 브룩스는 보보스 문화를 너무 과도하게 긍정하는 것은 아닐까? 포스트모던 문화의 혼종적 특징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사회’를 분석하면서, 부르주아의 보헤미안적 문화는 일종의 기호, 상징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그런 기호나 상징에 진지하지 않기에 그런 기호는 부르주아의 물질적 문화를 은폐하는 기능을 수행할 뿐이다.

지젝 역시 비판적으로 본다. 지젝은 포스트모던 문화는 한편으로는 쾌락 지향적 경향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에는 자기 통제적인 측면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자기 통제적 경향을 일종의 편집증으로 해석했다. 즉 쾌락지향적 성격이 상징적 질서의 해체를 의미한다면, 자기 통제적 측면은 아버지의 이름이 환상 속에 부활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가 부르주아의 보헤미아니즘이 허위라고 비판하는 것이라면 지젝은 보헤미아니즘이 도달하는 자기모순을 지적한 것이 할 수 있겠다. 이런 비판적 분석과 대조해 보면, 브룩스의 해석은 포스트모던 사회의 혼종적 문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신자유주의 시대도 기울어져 간다. 트럼프와 같은 구시대 야만적 자본가 유형의 인물이 대중적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한 시대를 풍미한 보보스 문화도 퇴조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메타버스’ 급부상하는 신개념 가두리> – 이광석의 『피지털 커먼즈』(갈무리, 2021) 서평 [철학자의 서재]

<‘메타버스급부상하는 신개념 가두리>

 

손보미(다중지성의 정원)

 

올해 국내 구글 사용자가 가장 많이 찾은 검색어는 ‘로블록스’였다고 한다. 로블록스는 주식회사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이 제작하고 배급하는 온라인 게임의 이름이다. 그런데 위키백과에 정리된 이 게임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로블록스는 사용자가 게임을 프로그래밍하고, 다른 사용자가 만든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온라인 게임 플랫폼 및 게임 제작 시스템이다.”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은 엄밀히 말해 온라인 게임을 만드는 회사라기보다는 온라인 게임을 만들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드는 회사이고 따라서 ‘로블록스’도 온라인 게임 플랫폼의 이름인 셈이다.

구글 코리아의 검색어 순위 발표에 이어, “어서 학원 가서 게임 배워야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도 떴다. 기사의 주요 내용은 ‘로블록스’에서 아이들이 게임을 제작하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과 수강생이 늘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로블록스를 ‘게임계의 유튜브’라 칭하며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의 주식이 올해 ‘메타버스 대장주’로 불렸었다는 사실로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로블록스를 검색하고 또 이 플랫폼에서 게임을 제작하는 기술을 배우려는 이유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각각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먼저 이 책 『피지털 커먼즈』부터 펼쳐봐야 할 것 같다. 책에 따르면, 현재 특정 기업들의 이름으로 주목받고 있는 온라인 플랫폼은 자본의 가두리치기(인클로저)용 장치들이다.

 

“오늘 ‘메타버스’라 불리는 기술문화 차원의 신생 공간은 또 다른 기술 세례와 축복에도 불구하고 바로 피지털계의 본격적인 인클로저를 알리는 서곡으로 볼 수 있다.” (7)

 

<‘온라인 플랫폼달콤한 신개념 가두리>

 

저자는 신개념 인클로저 장치인 온라인 플랫폼을 양봉장에 비유한다.

 

“플랫폼은 입주자와 이용자에게 차별 없이 놀 자리를 깔아 주고 각종 서비스까지 무료로 제공하는 듯 보인다. 이들 입주자와 이용자 누리꾼은 마치 플랫폼에서 꽃밭 속 꿀벌처럼 자유롭게 데이터를 생성하고 주고받으면서 ‘화분’과 꿀 채집 활동을 한다. 누리꾼은 형식상 자유로워 보이지만, 내용상 플랫폼 임차인에 가깝다. 그날그날 본능에 이끌려 꿀을 채집해 플랫폼 벌통에 채우는 일벌과 같다.” (25)

 

공통의 에너지와 부를 기업의 이윤으로 둔갑시키기 위해 세계 곳곳에 가두리를 치는 일이 물론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 과거와 지금의 다른 점은 그 포획 방식이다. 전통적인 형태의 작업장에서는 그야말로 고통스럽고 억압적인 생산공정을 통해 착취가 이루어지는 데 반해서 신개념 작업장은 마치 양봉자가 벌통으로 꿀벌을 유혹해 수확물을 거둬들이듯, 플랫폼 앱 장치를 통해 일꾼들을 유혹해 억압 없이 자발적 노동을 끌어낸다.

온라인 플랫폼에서의 노동은 어떤 경우에는 심지어 즐거운 놀이와도 같아서 『제국의 게임』의 저자 다이어-위데포드는 이를 ‘놀이노동’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꿀벌이 꿀을 모으는 일이 애초에 양봉장 주인에게 돈을 벌어다 주기 위한 노동이 아니듯이 현재 온라인 플랫폼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활동들, 심지어 놀이라고 불릴만한 즐거운 활동들도 애초에 기업 주주들에게 이윤을 안겨주기 위한 노동이 아니다. 여기에 달콤한 신개념 가두리의 핵심이 있다. 지금 활발히 작동 중인 신개념 인클로저 장치인 온라인 플랫폼 기업들은 수많은 유인책을 통해 놀이를 포함한 생명의 다양한 활동들, 심지어 생명 활동 그 자체를 자본주의적 노동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졌을까?

 

<데이터 사회>

 

책의 표제어로 쓰인 ‘피지털’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피지컬’(물질)과 ‘디지털’(비물질)이 혼합된 지금의 현실을 ‘피지털’이라 부르고 이러한 특성이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세계를 ‘피지털 계’라 부른다. 그런데 ‘피지털’ 그 자체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문제는 오늘날 자본주의 체제가 이 피지털 계에 가두리를 치고 우리의 생명 활동을 자본주의적 노동으로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 자본주의는 플랫폼이라는 장치를 통해 … 인간 산노동은 물론이고 인간 의식과 생체리듬의 데이터 활동을 사유화된 가치 체제로 흡수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6)

 

자본은 무엇 하나 평등하게 자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피지컬과 디지털이 혼합된 피지털 계가 자본주의를 만나면 디지털 세계의 기술 논리로 피지컬 세계의 지형과 배치를 좌우하는 데이터 사회가 된다.

산업사회는 인간의 피지컬 에너지(물리적 힘)가 자본주의의 주요 동력원으로 포획되는 사회였다면, 데이터 사회는 인간의 피지털 에너지(물리적, 인지적 힘)가 주요 동력으로 포획되는 사회다. 즉 데이터 사회는 자본주의에 의해 왜곡된 피지털 계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데이터 사회, 즉 디지털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왜곡된 피지털 질서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현 질서를 향한 강한 문제제기와 함께 새로운 피지털 질서를 만들기 위한 다양한 실험과 실천들이 필요하다. 이러한 대안 실천들을 통칭하는 이름이 바로 ‘피지털 커먼즈’다.

 

<피지털 커먼즈>

 

자본주의의 플랫폼 장치들을 통해 왜곡된 피지털 질서는 20세기말 한때 디지털 혁명으로 크게 번성했던 지식 공유의 디지털 전통을 빠르게 쇠퇴시키고 있다.

 

“동시대 플랫폼 질서는 무한 복제, 비경합성, 한계비용 제로, 익명성 등 아이디어와 지식 공유의 디지털 전통과 크게 배치된다. 영원히 ”자유롭고자 하는“ 디지털 정보의 본성은, 인류의 잠재적 창작의 원천이 되고 복제와 공유를 독려하면서 디지털 ‘자유문화’를 확장하지 않았던가” (95)

 

저자는 플랫폼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대안을 고민할 필요를 역설하며 정부와 기업의 과도하고 무차별적인 데이터 수집과 활용을 제한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요구와 감독이 그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수집된 데이터에 대한 오, 남용을 막기 위해 다중 스스로 펼치는 문화정치 전술 또한 중요한데 대표적인 예로 핵티비즘(데이터 행동주의)이 있다.

데이터 행동주의는 기술시장 논리에 의해 몇몇 소수의 손아귀에서 자본의 구미에 맞춰 이용되고 있는 데이터를 원래 그 데이터의 주인들이 볼 수 있도록, 또 그 데이터들이 다른 질서 속에서 이용될 수 있도록 만천하에 공개하는 활동이다.

 

“‘스노우든 아카이브’는 캐나다 기자, 대학, 시민단체의 공동 연대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이는 글로벌 시민 다중이 언제든 권력의 기록에 접근해 검색하고 데이터를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든 공통의 지식 커먼즈가 되었다.” (98)

 

<피지털 커먼즈는 생태 커먼즈>

 

자본의 인클로저의 다른 이름은 생태계 파괴다. 물론 지금 피지털 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클로저도 마찬가지다.

플랫폼 기업들은 자유롭게 확산하고 다양하게 펼쳐져야 할 비물질적 에너지들을 데이터의 형태로 사로잡아 빅데이터라는 이름으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데이터 센터에 가둬두고 있는데 이 를 유지하는 데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 얼마 전에 구글은 이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데이터 센터를 바다에 집어넣는 실험을 했다. 한 플랫폼 기업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 뭇 생명이 사는 터전인 바다에 뜨겁게 달아오른 거대한 쇳덩이인 자본의 수장고를 집어넣은 것이다.

지금의 플랫폼 기업들은 생태계의 파괴를 더 많은 이윤 추구의 기회로 삼고 있기도 하다. 공기와 땅과 물이 오염되어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없는 그래서 슬퍼야 마땅한 현실이 로블록스 코퍼레이션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더 오랫동안 게임 플랫폼의 세계에 붙잡아 둘 수 있는 기쁜 현실이 된다.

따라서 디지털 사회를 넘어설 대안적 실천을 조직하는 일은 곧 자본의 생태계 파괴에 저항하는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 기후 위기로 대표되는 생태계 문제에 관한 관심 없이는 피지털 커먼즈 운동도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피지털 커먼즈는 곧 생태 커먼즈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적 피지털 질서는 디지털 기술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질서다. 이를 넘어서려면 디지털 기술로 피지컬을 지배하는, 즉 착취하고 수탈하고 결국 죽이는 질서가 아닌 살리는 질서가 필요하다. 이에 저자는 ‘생태/공생 지향의 기술 체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생명 존중 없는 혁신 논리는 생태/공생 지향의 기술 체계와 어울리지 않는다. 위태로운 생태 약자들을 중심에 둔 공생기술 전망이 필요하다. 물론 그 시나리오에는 인간 중심의 지구 구출 시나리오를 넘어서 자본주의 현실에서 타자화된 인간 종을 비롯해 동물, 기계종, 돌연변이, 자연사물 모두를 살리는 공생공락의 차이 속 연대가 요구된다.” (377)

 

목초지에 울타리를 세우고, 강에 댐을 만들고, 갯벌을 메워 공장을 짓고 또 자유로운 디지털 세계에 자본주의적 양봉장이 들어설 때, 자율적인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모든 활동이 자본을 위한 노동으로 전락해 생명을 강탈당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디지털 꿀통 걷어차기>

 

피지털 계는 인간의 감각을 바꾸었다. 각종 디지털 기기와 결합한 인간은 감각과 인식의 확장 속에 있다. 관건은 이 확장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이다. 인간 중심적 사고를 넘어 다양한 객체들과 민주적인 힘을 더욱 확장하는 길로 나아갈 것인가, 혹은 피지컬의 한계를 넘어 무한히 확장하는 ‘인간’ 의식 속에 모든 걸 가둬버릴 것인가.

로블록스 플랫폼에서 게임을 만드는 이들은 과연 어떤 확장 속에 있을까. 당연히 후자이지 않을까? 물론 우리의 삶 곳곳에는 늘 우연적인 만남이 존재하고, 그 어떤 척박한 곳에서도 예상치 못한 마주침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을 칭송하며 기다리기만 하기에는 우리에게 그리 많은 여유가 주어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심각한 생태 재앙 속에 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디지털 꿀통이 선사하는 일시적인 안락함과 즉각적인 쾌락들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는, 그 꿀통을 미련 없이 걷어차고 성공적으로 걷어치워 버릴 수 있는, “다른 삶과 범 생명 공존의 기획”을 만들어야 한다. 모든 방법으로 모두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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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멜랑콜리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영화 멜랑콜리아

 

1)

영화 멜랑콜리아는 감독 라스 폰 트리어의 영화이다. 60년대 프랑스에서 누벨 바그가 등장했을 때, 독일에서는 노이에 키노 바람이 불었다. 이들의 주축은 파스빈더, 헤어쪼그, 벤더스 등이다. 네델란드 출신 라스 폰 트리어도 한세대 후이지만 이들을 계승하는 작가로 간주된다. 그것은 그가 68세대와 공통의 정신적 지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영화 대부분은 아주 독특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그 속에서는 서구 문명에 대한 그의 분노를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국내에서 그를 알리는 데 공헌한 영화인 ‘백치’는 백치를 내세워 정상인의 세계를 조롱하며, 영화 ‘도그빌’은 마피아의 보스가 자기 딸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집단 강간당하자 마을 사람들을 집단으로 징벌하는 법과 불법이 전도된 세계를 보여준다.

영화 ‘멜랑콜리아’는 혜성(그 이름이 ‘멜랑콜리아’다)이 지구와 충돌하여 지구가 종말에 이른다는 종말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전개된다. 지구 종말은 다른 한편, 지구 문명에 대한 분노와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가정된 지구 종말은 실제로는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지구 종말적 상황은 감독이 서구 문명에 대한 자신의 분노와 심판을 드러내기 위한 이야기 장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극 중 두 주인공 쥐스틴과 클레어의 대화 속에서도 드러난다. 쥐스틴은 지구 종말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클레어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구는 사악해, 그러니 애석해 할 필요 없어.”

2)

영화는 도입부에 이어서 주인공 자매의 이름을 따서 1부 쥐스틴(동생) 2부 클레어(언니)로 이루어진다. 구성상 두 주인공이 각기 독립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주인공은 항상 함께하며, 오히려 1부와 2부의 구분은 다루어지는 이야기 주제에 따른다고 하겠다.

1부에서 시종일관 쥐스틴의 결혼식 장면이 펼쳐진다. 1부를 시작하면서 거대한 리무진이 시골의 굴곡진 좁은 도로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힌 모습을 감독은 상당히 길에 보여주는데, 이는 감독이 앞으로 보여줄 서구 문명의 한계를 상징하는 장면이라 하겠다.

쥐스틴은 카피라이터로서 성공적인 경력 여성이다. 이제 막 마이클과 결혼하게 되었으니 행복할 만하다. 하지만 이 결혼식을 계기로 쥐스틴은 정식적 파국에 직면한다. 감독은 쥐스틴을 둘러싼 남자들, 회사 사장,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인 마이클을 스케치하면서 쥐스틴을 파국에 빠뜨린 원인이 무엇인지를 그려낸다.

쥐스틴을 고용한 사장은 쥐스틴이 쏘아붙인 대로 “권력에 눈이 먼 옹졸한 인간”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혼하고서 새로 사귄 애인인 두 명의 베티를 데리고 결혼식장에 온다. 어머니는 딸의 결혼식장에서 결혼이 무슨 필요가 있냐고 말하는 이제는 세상에 지친 여인이다. 그녀가 막 결혼하려는 마이클은 소시민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인물이다. 그는 늙어서 함께 살 과수원 사진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쥐스틴의 갈망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서구 문명의 대표적 두 축인 사회와 가족의 표면적으로 우아하고 화려한 모습 뒤에는 이처럼 끔찍한 모습이 감추어져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감독의 서구 문명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잘 알 수 있다.

쥐스틴이 정신적 파국에 처한 것은 이런 사회적 조건 때문만은 아니다. 감독은 1부에서 쥐스틴이 아버지와 할 얘기가 있다면서 아버지를 붙드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 장면은 그녀가 아버지를 갈망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 갈망은 2부에서 행성이 지구에 다가오면서 쥐스틴이 밤에 나체로 행성과 교감하듯이 누워 있는 모습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때문에 행성이 다가오자 쥐스틴은 오히려 안정된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3)

2부에서는 행성이 다가와 지구와 충돌하는 상황이 그려진다. 2부에서는 쥐스틴보다는 오히려 클레어가 전면에 등장한다.

그녀의 남편 존은 18홀 골프코스를 지닌 대저택에 살면서 천체 관측을 즐기는 자기 과시적 또는 가부장적 인물이다. 클레어는 그런 남편 아래 살면서 결혼식을 진두지휘하는 모습에서 그려졌듯이 가족에 대한 자신의 의무에 철저한 주부이다.

표정이 극과 극을 오가는 쥐스틴과 달리 클레어는 시종일관 무표정하다. 우리는 클레어의 얼굴을 통해 그녀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부장제 아래 주부로서 남들이 보면 부러워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내적으로는 이미 무너지고 있다.

그녀의 삶 어딘가 균열, 틈이 생겼으며 그녀는 이를 철저히 막으면서 살아왔다. 조금도 빈틈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그녀의 꼿꼿한 태도가 거꾸로 그녀가 필사적으로 자신의 균열과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행성이 지구와 다가와 충돌한다는 종말적 상황이 펼쳐지자, 클레어는 더는 자신의 내적인 균열을 틀어막을 힘을 상실하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면 급기야 숨을 쉬지 못하게 된다. 그녀 역시 강박증에 사로잡히며 정신적 파국에 이른다. 그녀는 자살에 필요한 약을 사 놓는다.

4)

정작 최종 충돌 즉 최후의 심판이 가까워졌을 때, 클레어나 쥐스틴보다 존이 먼저 무너진다. 존은 클레어가 사 놓은 약을 먹고 자살하고 만다. 존의 죽음은 서구 문명이 내적으로 얼마나 허약한가를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반면 클레어나 쥐스틴은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 가능성은 클레어의 아들 레오와 쥐스틴의 대화를 통해 미리부터 예고되었던 것이다. 바로 마법의 동굴을 짓는 것이다. 그 모습은 인디언의 텐트 같기도 하고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마법의 동굴에서 레오와 쥐스틴, 클레어는 손을 서로 잡고 다가오는 종말을 기다린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행성 충돌과 대폭발이지만 그 환한 빛은 어쩌면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마법의 동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서구 문명에 대한 감독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마법의 동굴이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비합리적이지만 공동체적인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⑤ [내게는 이름이 없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행길이(한철연 회원)

 

우정, 최고의 기쁨

 

“전 생애에 걸친 축복을 만들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들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을 갖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사람들에게 정치적 혹은 공적 삶을 살지 말 것을 충고하였다. 폴리스적 삶의 양식이 무너진 시대에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쾌락보다는 고통을 가중시킨다. 정치 영역은 이미 권력을 독점한 군주의 손아귀에 장악되었다. 군주는 권력을 분점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칫하면 군주의 지배권을 분할받으려는 시도로 인지되어 파멸의 고통을 면치 못할 수도 있게 된다. 권력을 추구하면서도 군주권을 침해하지 않으려는 줄타기 속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에피쿠로스는 공적 행위인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것은 쾌락의 지속에 손해를 끼치는 것이 되니 적이 생기지 않도록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아갈 것을 권고하였다.

그렇지만 에피쿠로스가 사회생활 자체를 금한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정치적 활동 이외의 사회생활을 통해 얻는 우정은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하다. 우정이 주는 쾌감은 사회생활을 통해 얻는 즐거움 가운데 가장 안전하다는 것이다. 키케로에 따르면, 에피쿠로스는 ‘우정이란 쾌락과 떼어놓을 수 없고, 우정이 없이는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고 두려움 없이 살지도 못하며 심지어 유쾌하게 살 수도 없기에 우정도 갈고 닦아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자기 철학의 기본 입장에서 벗어나는 말을 할 정도로-“모든 우정은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 우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에피쿠로스에게 우정은 인생에 있어서 즐거움의 커다란 원천이었다. 에피쿠로스와 제자들은 그가 근근이 마련한 작은 안뜰에 모여 우정을 나누었다. 그의 정원에서는 어떠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 사회에서는 감히 볼 수 없었던 풍경이 그의 정원에서는 자연스럽게 벌어지기도 했다. 즉 고대 그리스의 고급 창녀들인 헤타이라들이 드나들며 남성 구성원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담론을 나누었던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여성은 더 이상 남성의 노예로 취급되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그의 적대자들은 에피쿠로스를 창녀와 수작이나 부리는 자로 비방하곤 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는 노예와 어린이들(학단 구성원들의 자녀들)도 친구로 대우하면서 상냥한 편지를 남기기도 하였다.

“대지 전체가 고통 속에서 산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 때문에, 우리 인간들은 가장 많은 선물을 선사받았다.” 그것이 바로 우정이다. 모름지기 인간은 누구나 고통의 삶을 경험하다가 끝내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우정은 홀로 맞는 죽음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원천이다. 죽음은 함께 할 수 없다는 고적함의 고통은 누구에게든 보편적이다. 홀로 죽음의 고통이 보편적이라는 각성은 모든 인간을 외로운 존재로 남겨두지 않고 친구로 삼게 하는 동기가 된다.

자유시민들의 우정 어린 공동체라 할 수 있는 폴리스가 소멸한 이후에 우정의 기쁨을 전파할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에피쿠로스의 안뜰은 폴리스의 몰락으로 인해 고립되어 버린 인간들에게 새로운 우정의 공동체를 사적으로 선사하였다. 흔히 우리는 친구들이 반드시 우리를 실제로 도와주기 때문에 우정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정이 지속되는 이유는 실제의 도움보다는 “친구들이 우리를 도와주리라는 믿음”에 있다. 이 믿음이 깨지면 세상은 분열과 고립의 고통으로 넘쳐난다. 아무도 믿을 수 없게 되며 늘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여 불안 속에 살게 된다. 하지만 우정의 삶은 이러한 고립의 환난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준다. 폴리스의 연대적 삶이 소멸된 불안한 상황에서 안전과 평화를 제공해줄 수 있었던 공간은 에피쿠로스가 제안한 우정의 정원이었다. 비록 이 공간은 사적 관계를 기초로 하여 형성된 것이기는 했지만 이를 통해 사람들은 각자도생의 비정함이 초래하는 삶의 고통에 꺾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정원 속에 모인 이들은 우정의 기쁨을 아래와 같이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정이 춤추면서 세상의 주위를 돈다. 그리고 소리친다. 모두 일어나라! 그리고 노래하자! 우리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우리 시대와 에피쿠로스

 

러셀에 의하면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모험 가득한 행복을 좀처럼 얻을 수 없는 세계에나 어울릴 법한 병약자의 철학이었다. 소화불량에 걸리고 싶지 않으면 적게 먹어라. 다음 날 아침이 걱정된다면 과음하지 말라, 정치와 사랑과 격렬한 열정을 동반하는 모든 활동을 삼가라.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운명의 인질이 되지 말라.” 고통에 침잠하지 말고 그 속에 잠재된 쾌락을 능동적으로 관조하는 법을 배우라. “육체의 고통은 분명히 커다란 악이지만, 격심한 고통이라는 것은 짧은 법이고, 길고 긴 고통이라는 것은 정신훈련을 하거나 고통 속에서도 행복한 일들에 대해 생각하는 습관을 들임으로써 참아낼 수 있다.”

어찌보면 소심하기 그지없는 철학이다. 그런 까닭에 얄팍한 위로와 단발적 힐링에 열광하는 부박한 시대에 에피쿠로스는 자칫 힐링의 멘토로 부각될 수 있다. 더구나 시민적 연대의 전통과 사회적 보호의 수단이 점차 훼손되고 있는 와중에 현대인의 고통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에피쿠로스가 살던 시대도 극심한 고통으로 마음을 종잡을 수 없는 고난의 시대였다. 지금과 유사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의 미망은 올바른 해답이 될 수는 없었다. 사회적 고통을 해결해줄 구조적 대응은 요원한 형국이다. ‘위로의 구루’가 재림하여 힐링의 향유를 피워대면 사람들은 언제든 ‘좋아요’를 누르며 힐링을 소비할 태세다. 하지만 에피쿠로스가 제안하는 위로의 즐거움은 ‘좋아요’와 같은 손쉬운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에피쿠로스의 처방은 정신의 자기성숙을 통한 고통의 극복이다. 정신훈련을 통해 굳건한 정신을 가진 주체를 만들어낼 때 비로소 고통도 극복되는 것이다.

우리의 시대에도 같은 방법이 적용될 수 있을까? 시대적 조건이 유사하다는 점에서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과거에 수행했던 역할은 오늘날에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이 얼핏 매력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성향은 다르다. 더구나 사람들은 욕망의 무제한적 표출을 동력으로 작동하는 체제에 너무나 익숙해져버렸다. 욕망의 무분별한 추구로부터 초연해지는 평정한 영혼의 상태(ataraxia)를 권고하는 에피쿠로스가 과연 현대인의 삶을 인도하여 즐거움의 항구에 안착하게 만들 수 있을까? 아무래도 모를 일이다.


<에세이 철학>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에세이 철학>

 

‘에세이 철학’은 “일상을 철학화하고, 철학을 일상화할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철학을 하는 데 있어 굳이 다른 사상가의 철학을 빌려올 필요가 없다. 내가 네이버 <지식 저술가> 프로젝트에 제출한 ‘에세이 철학’의 목표이다.

이러한 목표를 고려한다면 ‘에세이 철학’은 불교의 선(禪)과 맥이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당나라의 선불교는 잘 알다시피 스님들이 염불하는 법당이 아니라 모두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죽은 경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언어에서 불법을 찾는 중국 불교의 새로운 정신이다. 일자무식인 6조 혜능은 홍인 선사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主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르지 않는 곳에서 마음을 낸다)’란 금강경 강론을 듣고 홀연히 깨달음을 얻는다. 이러한 깨달음에는 번거로운 절차도 없고, 온갖 언어 수식도 필요 없다. 오로지 행주좌와 일심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어느 순간에 홀연히 얻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부닥치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자 하는 창조적 정신만이 중요하다. 임제 선사가 말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의 정신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는 칼을 든 사무라이와 그 정신이 맞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에세이 철학’은 일상을 철학화하고 철학을 일상화할 때 그 어떤 다른 철학자들의 사상, 전통적인 철학의 주제들, 동과 서, 옛날과 지금의 수많은 철학자에 올라타거나 그들의 사상을 빌려오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지금 이 순간'(hic et nunc)을 철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일상에서 부닥치는 모든 대상과 경험들을 철학적 텍스트로 삼아 그것을 비판하고 성찰하면서 철학적 통찰의 깊이를 드러내어 준다. 그러므로 ‘에세이 철학’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선의 정신처럼 모든 권위와 우상의 파괴를 시도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이 말한 4대 우상, 즉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언어의 우상’ 외에도 ‘권력과 국가의 우상’ 등 일체의 권위와 우상을 인정하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모든 가치를 부정한 니체의 ‘망치의 철학’을 구현하고자 할 뿐 실체화되고 화석화된 이론에 집착하지 않는다. ‘에세이 철학’은 저 너머의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추상개념들의 몰 주체성도 비판한다.

하지만 ‘에세이 철학’과 ‘선불교’는 근본적으로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불립문자를 추구하는 선은 언어의 끝, 문자의 종언을 주장하는 데 반해, ‘에세이 철학’은 모든 것을 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에세이 철학’을 굳이 선으로 표현한다면 ‘문자선’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21세기에 부활한 선불교의 변형된 형태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문자는 어떤 경우든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문자를 버린다면 문자가 부재하는 그 세계는 이 세계가 아니고 이 세계와 무관한 세계이다. 이 세계를 초월한 깨달음이 소수에게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은 이 세계의 다수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깨달음의 궁극 목적[상구보리(上求菩提)]은 이 세상과 나누기 위함이고[하화중생(下化衆生)],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함(마르크스)이다. 이러한 정신은 동서와 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깨달은 이, 모든 인텔리겐차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동굴 밖으로 나가 빛을 본 계몽된 인텔리겐차는 동굴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의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동굴 속으로 귀환한다. 그런 의미에서 ‘에세이 철학’은 선의 문자화, 선의 일상화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깨달음을 구하고 진리의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가장 현실적인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에세이 철학은 그동안 이 땅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추구해 마지아니했으나 누구도 시도치 못한 ‘우리 철학’의 방법론이자 그 철학 자체이다. 지금까지 ‘우리 철학’을 모색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우리 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화두를 내 걸었으나 문전에서 머뭇거렸을 뿐 누구도 그것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칸트식의 물음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를 못했다. 하지만 내가 수영을 할 수 있는가나 내가 말을 탈 수 있는가는 ‘어떻게’라는 질문을 백날 던져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물속에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면서 배우는 것이고, 말 등에 올라탔을 때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자명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다 보니 그간 ‘우리 철학’을 그렇게 탐구했으면서도 누구도 그런 작업을 구현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에세이 철학은 우리의 시대, 우리의 삶을 대상으로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사유를 가지고 표현하고자 한 우리의 철학이다. 더 이상 그것 바깥을 추구하지 않고, 그것 자체를 사유하고 통찰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에세이 철학은 ‘타자의 철학’이 아니라 그 말의 정확한 의미에서 ‘우리의 철학’이라 할 수 있다.”


필자: 이종철 철학박사

오구라 기조의 『조선사상사』를 읽고…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오구라 기조의 『조선사상사』를 읽고…

 

1.

오구라 기조의 『조선사상사』를 지금 막 다 읽었다. 출간되자마자 화제에 올랐고, 일전에 오구라 기조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리와 기로 해석한 한국사회』라는 책을 읽고 강한 인상을 받은 터라 한 번은 꼭 읽어보고 싶었다. 마침 이 책을 번역한 이신철 선생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동료이고, 그가 책까지 한 권 보내 주어서 그 기회를 앞당길 수 있었다. 아무튼 이 책을 펼쳐 들고 중반까지는 꼼꼼하게 읽었으나 뒤로 갈수록 간략하게 넘기다 보니까 대 여섯 시간 만에 다 읽기는 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책장을 덮은 다음 곰곰히 생각을 했다. 한국인도 아닌 외국인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사상가들뿐 아니라 어쩌면 한국인들이 쓴다 해도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을 인물들까지 들춰내서 세밀하게 쓴 것이 대단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엄청난 연구와 독서의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그 수준이나 성과 여부와 상관없이 조선의 사상사에 대한 저자의 깊은 애정과 그것을 학문적으로 표현해준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싶을 정도이다. 다음으로 일본 학자가 이런 책을 쓰는 동안에 한국의 학자들은 무엇을 했냐는 자괴심마저 들기도 한다. 사실 이 책이 나왔을 때도 주로 호기심 많은 저널리스트만이 크고 작은 관심으로 책을 소개하기도 하고 깊이 있는 서평을 써주었다. 정작 학문적으로 연관이 있는 학자 중에는 누구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 기이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마도 학자적 양심이나 부끄러움 때문이거나 혹은 그마저도 없이 한국의 학자들이 이제 공부도 안 하고 문제의식도 없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의심이 어느 정도 합리성을 띠고 있다는 것이 도대체 한국의 학자들 -특히 인문학자들-은 두더지처럼 자기 구멍만 팔 줄 알지 다른 학자들과 소통이나 논쟁을 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오구라 기조 교수의 책에 대해서도 똑같이 침묵하는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마저 든다. 지난 30여 년 동안 연구자들의 수가 매우 늘어났고 그 수준도 높아졌지만, 그저 논문 기계들처럼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 사냥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다른 학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도통 관심을 가지려 하지 않는 것이 인문학자들의 현실이다. 만일 한국의 인문학계가 이런 학문적 무관심과 불통을 계속한다면 가뜩이나 인문학의 소외 현상을 넘어서 미래가 더욱 암울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서평을 쓰면서 이런 푸념식의 비판부터 하는 나 자신의 마음도 편치는 못하다. 내가 한국학이나 한국철학을 전공하는 학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런 서평을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렇다. 어쨋든 이런 마음을 염두에 두면서 『조선사상사』를 살펴보자.

 

2.

조선의 사상사 전체를 통람한다는 면에서 본다면 이 책의 분량을 많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군신화에서 시작해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부터 고려와 조선 그리고 조선 말기 동학과 개화사상, 식민지 시대의 사상과 북조선의 주체사상과 현대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정치가들과 사상가들의 사상까지 기술하고 문학가들의 작품까지 빠짐없이 빼곡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런 작업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앞서도 이야기를 했듯 저자의 엄청난 독서 외에도 수많은 사상의 내용을 직관적으로 파악해서 간단하고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는 필체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오구라 기조 교수는 전작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리와 기로 해석한 한국사회』에서 보여주었듯 복잡한 현실과 사상을 단순화하는데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필자와 같은 문외한도 신라의 원효와 의상, 고려의 지눌의 돈오점수의 불교, 조선의 태극논쟁, 사단칠정 논쟁, 인심도심논쟁, 인물성동이논쟁 등 수많은 사상의 갈래들을 어렴풋하나마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저자의 명쾌한 설명과 간결한 문체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비록 상세한 내용을 담지 않았더라도 조선 사상사 전체에 대한 소묘를 잘 해냈다는 점에서 빼어난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자신 이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을 다른 이들에게 충분히 권할 만하다는 생각을 가졌다.

 

3.

필자는 이 책 전체를 작은 지면에서 다 다룰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으면서 특별히 저자가 강조한 입장이나 시각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언급해보고자 한다. 첫째로, 오구라 기조 교수는 이 책 모두에서 조선사상사의 특징이 무엇인가에 대해 일본과 비교해서 기술하고 있다. “일본 문화가 외부로부터 도래하는 문화에 대해 브리콜라주(수선)적인 포섭 방법을 취하는 경향이 강”한 반면, 조선은 “외부로부터 도래한 사상이 기존 시스템의 전면적인 개변을 추진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 불교가 사회 변혁을 시도했고, 조선에서는 주자학이 국가의 통치 이념이 되면서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꿨다. 이런 전통은 현대에 들어서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 공산주의라는 사상(주체사상)이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일본과 다르게 조선에서 ‘사상의 혁명적인 정치적 역할’의 크기가 막대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오구라 교수는 이 책을 쓰면서 “순수성, 하이브리드성, 정보, 생명, 영성이라는 다섯 가지 키워드”에 특별히 주목한다고 했다. 조선(이때의 조선은 이성계가 개국한 특수한 의미의 조선이 아니라 단군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을 일컫는 보편적 의미를 띠고 있다) 사상사를 개관한다보면 일본이나 중국의 사상사와 달리 ‘순수성을 둘러싼 격렬한 투쟁’이 강하게 드러나고, 이런 현상은 현대에 와서도 남조선과 북조선 간의 이데올로기 대립, 그리고 저자가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오늘날 한국에서 극단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진영논리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사상의 순수성을 둘러싼 이러한 투쟁은 대개는 중화주의의 틀 안에서 이루어짐으로써 조선 사상의 독창성 결여와 중국에 대한 종속성과 같은 비판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이와는 달리 순수성에 대한 반대의 축에는 불순성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 조선의 주자학이 지배하던 당시에도 양명학과 서학이 다른 사상으로 존재했고, 유불도 3교 내지 샤머니즘을 포함한 4교와 같은 혼연일체형의 ‘하이브리드 사상’이 조선사상을 특징지운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조선시대에 보듯 외래 사상의 유입을 차단하는 ‘정보의 컨트롤’이 지배적이었다. 16세기 말에 서양의 사상과 문물이 대거 동아시아로 밀려 들어 왔을 때 일본에서는 가톨릭 다이묘가 나오거나 남만 사상이 유행했으나 조선의 지배층은 철저하게 이런 정보를 통제했다. 사상의 순수성을 유지하려는 이런 조치는 19세기 말 외래 사상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보여주는 ‘위정척사’ 운동이나 대원군의 쇄국정책, 더 나아가서는 북조선이 주체사상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외부로부터의 사상의 유입을 철저히 통제하는 데서도 잘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전면적인 순수성의 추구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하이브리드성이 하나의 조선 속에 공존한다고 보는 것은 일종의 억지이거나 무리한 해석이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아포리아(aporia)에 직면해서 오구라 교수의 해석의 장점이자 조선사상의 특별한 장점이 드러난다. 오구라 교수는 일견 상호 대립하는 순수성과 하이브리드성, 정보의 통제와 개방 간의 대립을 아우르고 넘어서는 정신의 현상이 조선에는 분명하게 있다고 한다. 그는 이것을 ‘영성’이란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이 신라의 원효의 화쟁사상부터 퇴계의 이기호발설, 그리고 19세기 조선말 경주 지방에서 등장한 최제우의 불여기연과 동학 사상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오구라 교수는 이것을 ‘영성의 네트워크’로 부르고, 이것이 “조선사상사 전체를 움직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동력이 되고 있다”고 까지 확신한다. 그는 자신의 이런 주장을 특별히 뒷받침하기 위해 퇴계와 최제우의 사상적 연결을 경상도라는 특수한 유대까지 거론하면서 강조하고 있다. 오구라 교수는 이런 영성이 순수성을 둘러싼 유별난 투쟁사와 외래 사상 간의 다양성과 공존을 하나로 엮어줄 수 있는 특별한 지지대라고 보는 것이다.

 

4.

그러면 마지막으로 오구라 교수의 이런 입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 나의 생각을 피력해보고자 한다. 먼저 하나의 사상이 한 시대, 한 사회를 완전히 지배하고 개벽한다는 입장부터 보자.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는 특별히 종교적 심성이 강하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종교적 의식 때문에 신라와 고려에서는 불교가 하나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사회를 이끌었고, 조선에서는 성리학의 통치 이념을 제시했다. 근대에 들어와서 새로 유입된 기독교가 유교를 대신하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믿는 대표적인 종교가 되기도 했다. 사실 기독교가 한국에서 이토록 대표적인 종교가 된 현상은 중국과 일본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한국인들의 유별난 종교의식 말고는 달리 설명이 어려울 수도 있다. 이러한 의식의 지반 속에서 그것이 불교이든 유교이든 아니면 기독교이든 시대가 변화하면서 지배적인 이념(이데올로기) 역할을 해왔다고 할 것이다. 만약 이처럼 종교에 대한 귀속 의식이 없다고 하면 어떤 하나의 절대적인 사상이나 종교에 의해 그 사회 전체를 이끌어가는 통치 이데올로기가 나올 수는 없지 않다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 점에서 오구라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조선은 외래 사상에 대해 일본이 자신들의 틀 속에서 수선하고 개량하는 태도 보다는 전면적으로 수용해서 지배 사상으로 만들고, 그것의 동력이 다한다면 새로운 피를 수혈하듯 새로운 사상으로 전면적으로 대체하는 태도를 반복한다고 할 것이다. 때문에 오구라 교수의 일반화에 대해 한국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특별히 반박하기가 어렵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한 시대나 사회 안에서 대립적인 사상이나 종교 혹은 경향이 모순적으로 대립하면서도 그 사회를 파멸로 이끌지 않는 특별한 이유를 조선사상의 ‘영성’에서 찾는 오구라 교수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사실 ‘영성’이란 표현은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말도 아니고 계산적인 이성의 합리성 틀 내에서 파악할 수 있는 개념도 아니다. 이러한 영성은 다분히 종교적 측면이 담겨 있고, 좀 더 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감성과 이성을 넘어선 ‘정신'(Geist/sprit)의 측면에 가깝다. 그러므로 그것은 경험적이고 가시적인 영역을 넘어서려는 인간 정신의 초월성, 상호 대립하고 모순된 것들을 아우르고 넘어설 수 있는 신비와 형이상학적 사유에 가깝다. 그러므로 이런 영성은 사상사적으로 볼 때 장점도 있는 반면에 단점도 적지 않다. 굳이 서양철학의 칸트를 끌어들여 설명한다면 그것은 경험적 직관이나 과학적인 범주를 넘어선 형이상학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성 비판을 통해 이성의 필연적 지식이 가능한 영역과 그것을 넘어선 영역을 구분하고, 과학으로 종교를 재단하려 한다든지 아니면 종교를 가지고 과학을 지배하려 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그런 의미에서 영성은 인간 정신의 초월이자 종교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영성을 과학의 세계 안에서 필연적으로 설명을 할 수는 없어도, 그것은 끊임없이 이성과 감성의 영역 안으로 들어와 그 세계 안에서 설명이 불가능한 것을 설명하고 그 세계 안으로 강력한 에네르기를 불어 넣을 수도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이나 종교적 부흥을 이끌기 위한 영성 운동 같은 경우들이 그렇다. 어느 정도 신비주의의 영역에 맞닿아 있는 이런 영성이 조선사상사를 꿰뚫는 대립물의 화해와 통합의 정신에서 나타나서 끊임없이 사상의 활력을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구라 교수가 영성을 강조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입장으로 볼 때 그것을 ‘영성’이라고 표현한 것 자체가 익숙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앞서 기술한 것처럼 ‘영성’이란 말을 통해 오구라 교수의 취지에 충분히 공감은 하지만 그것을 좀 더 한국인들의 의식 세계를 설명하는 보편적인 언어로 바꾸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불교나 유교 그리고 현대의 기독교는 한국인들에게는 외래 사상이라고 볼 수가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한국인들의 무의식 세계 저변에는 동아시아의 오랜 샤먼의 전통이 깔려 있다. 한국인들의 무의식 속에서 이런 샤머니즘은 외래 사상을 끌어들여 그 속에서 용해하는 거대한 용광로의 불과 같은 역할을 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경우는 샤머니즘과의 친화성이 두드러져 나타나고, 엄격한 성리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조선에서도 왕실 깊숙한 세계나 기층민중의 세계에서 샤머니즘의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오구라 기조 교수는 그것을 특별히 원효의 화쟁사상과 퇴계의 이발호발설, 그리고 최제우의 불연기연 사상에서 보듯 사상적인 대립을 넘어서는 초월적 정신의 수준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특색이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밑바탕에 흐르는 면면한 정신은 동아시아의 샤먼적 전통 (최치원이 말한 풍월도)과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영성’이란 표현보다 ‘샤먼’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상과 철학사 안으로 샤먼의 무의식을 끌어들이려고 한다면 진저리를 칠 사람이 많을 것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오구라 기조 교수의 『조선사상사』를 주마간산 격으로 읽기는 했지만 느끼는 바는 컸다. 이렇게 생각거리를 많이 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의미가 크다. 이 책을 기점으로 한국의 학자들도 사상사와 철학사의 기술에 적극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그동안 서양 사상을 수입하고 중국 사상을 반복하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제 나라의 사상사를 일본 학자의 저술을 통해 배운다는 것은 학문적 자존심도 걸려 있고, 학자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영화 ‘너의 새를 노래할 수 있어’를 보고[흐린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타인의 고통받는 얼굴에 관해

1)

영화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이하 ‘너의 새는’)는 청년의 절망감을 주제로 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제목이 좀 특이한 데, 원래 비틀즈의 노래다. 노래 가사는 ‘너는 너의 새가 노래할 수 있다고 자랑하지만 너는 나를 갖질 생각은 없는 것 같아. 너의 새가 죽더라도 나는 늘 너의 곁에 있는데’라는 뜻으로 보인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 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는 영화의 주제와 직결된다.

이 작품은 일본 작가 사토 야스시의 작품을 영화화한 것이다. 사토 야스시는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이다. 40세 자살했으니, 남긴 작품도 많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으로 내가 접한 것은 딱 한 권 ‘황금옷’이라는 단편집이다. 그 작품집에는 세 단편, ‘황금옷’ 외에 ‘오버 더 펜스’, ‘여름을 쏘다’가 들어 있다.

그의 작품은 많이 영화화되었다. ‘오버 더 펜스’라는 작품도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그 밖에도 ‘그곳에서만 빛난다’라는 영화도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고 한다. 그가 나이 서른 무렵 1980년 경 쓴 작품인 ‘너의 새는’은 2018년 미야케 쇼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영화 ‘너의 새는’은  연애 이야기이다. 여기서 세 명의 주인공이 즉 화자인 나와 사치코, 나의 룸메이트인 시즈오가 등장한다. 배경은 일본의 바닷가 작은 도시이다. 나와 사치코는 작은 서점의 알바생이다. 시즈오는 직장을 구하는 중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세 사람의 연애 이야기이다. 핵심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 ‘나’는 길거리에서 서점의 점장과 함께 가는 사치코를 만난다. 사치코와 ‘나’는 서로 가까워지고 ‘나’는 사치코를 자취방으로 데려온다. 나에게 무언가 기대했던 사치코는 점차 시즈오에게 기대게 된다. 시즈오가 캠핑을 가자 하자 사치코는 따라나서지만, ‘나’는 포기한다. 이미 사치코의 감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치코는 돌아와 ‘나’에게 시즈오와 연인 관계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영화 마지막에 ‘나’는 떠나는 사치코를 쫓아가서 고백한다. 너를 사랑한다고, 그리고 나의 삶은 모두 거짓이었다고.

2)

얼핏 삼각관계 이야기로 볼 수도 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두 남녀 주인공의 성격이 매우 독특하기 때문이다.

우선 남자 주인공을 보자. 화자인 ‘나’는 대학은 졸업했지만, 서점에서 알바를 한다. 그는 달리 취직할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다. 아마도 평생 알바를 할 것 같다. ‘나’는 자신이 사회로부터 밀려난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기꺼이 이를 받아들인다.

‘나’는 성실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인간이다. 직장에 제시간에 나가는 법도 없다. ‘나’는 일도 건성으로 하며 책 도둑을 쫓아가지 않았다는 사장의 책망을 듣고도 “자르고 싶으면 자르시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우리에게 반발이라기보다 오히려 자조 같이 들린다.

‘나’는 세상과 고립적으로 살아간다. ‘나’에겐 다른 친구가 보이지 않는다. 시즈오와는 가깝지만, 필요에 따라서 함께 살 뿐이다. 다만 서로 간섭하지 않는 한에서만 가까이할 뿐이다.

‘나’에게 여자도 마찬가지다. ‘나’는 사치코를 그저 함께 술을 마시거나 당구를 하거나 가벼운 육체적 관계를 맺는 정도로만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나’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듯 보이지만 그것을 벗어날 생각도 없으며 이미 그것이 절망이라는 느낌조차도 사라져 그저 일상이 되었다. 남들이 그런 ‘나’를 비참하게 본다면 ‘나’는 오히려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게 어때서?”

주인공의 이런 처지는 외적은 풍경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영화가 전개되는 계절은 끈적끈적하고 무더운 여름이다. ‘너의 새’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9월이 되어도 10월이 되어도 다음 계절은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 풍경은 사토 야스시의 다른 소설 ‘여름을 쏘다’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표현된다.

“1층 지붕에 가늘고 길게 펼쳐진 그림자 속에서 다리를 접고 쭈그려 앉아 한여름의 햇살이 기세를 누그러뜨릴 때까지 날갯죽지에 얼굴을 묻은 채 꼼짝 않고 버텨 내는 것이다. 그 좁은 그림자 속에 일렬로 늘어서서”

3)

‘너의 새는’이라는 영화는 주인공의 절망감을 표현할 뿐 절망감에 사로잡힌 이유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 단서를 찾자면 우선 작가 자신의 생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토 야스시는 49년 출생이니 아마도 60년대 초 대학을 다녔을 것이다. 이때 일본에서 전후 체제를 비판하는 학생들의 저항운동이 가장 격렬했을 때다. 그의 소설을 보면 그도 이런 운동에 약간은 가담한 걸로 보인다. 70년대 초 적군파 파문 이후 일본 학생운동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리고 돌아온 것은 일본 주식회사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그의 절망의 단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토 야스시의 작품 속에서도 그런 배경을 찾아볼 수 있다. ‘오버 더 펜스’에서 주인공은 도쿄에서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바닷가 고향으로 돌아와 직업훈련을 받고 있다. 그는 무언가 작은 것이더라도 성취하려는 야망을 지닌 교관을 보면서, 도쿄에서 자신이 다니던 회사의 상사를 연상한다.

처음엔 주인공도 일본 주식회사가 감추고 있는 억압을 느끼지 못한다. 그는 그저 일개미처럼 살아갈 뿐이다. 그 억압은 오히려 그의 아내에게 나타난다. 아내는 아이를 낳은 후 우울증을 겪으면서 심지어 아이의 얼굴을 방석으로 눌러 죽이려 한다. 그 때문에 그는 아내와 아이를 친정으로 데려다 준다. 얼마 뒤 아내는 장인을 통해 재출발하겠다면서 편지를 보낸다.

비로소 절망이 그를 사로잡았고 그도 사표를 내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모든 것을 잊으려 한다.

“도쿄 생활이 점점 의식에서 사라져 갔다. 겐이치와 다이시마가 물어오면 도시에서 쫓기며 살아가는 게 넌더리가 났다고 적당히 얼버무렸다. 그러다 보면 그들도 점점 흥미를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나도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깡그리 잊고 말 것이다.”

4)

여자 주인공 사치코도 역시 어떤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치코를 사로잡은 절망감은 사치코가 서점 주인과 맺은 관계에서 볼 수 있다. 사치코는 서점 주인장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관계가 어떤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치코는 이를 잘 안다.

사치코는 헤어지고 싶지만 헤어지는 일조차 쉽지 않다고 말한다. 그것은 서점 주인이 매달리기 때문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전체 맥락은 만일 헤어졌을 때 사치코 자신이 견딜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사치코는 주인공 ‘나’와의 관계를 통해서 서점 주인과의 관계를 벗어나 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나’란 인물과의 관계 역시 어떤 가능성을 보이지 않는다.

사치코는 ‘나’의 그런 반응에 대해 실망하면서 다시 그런 절망적 상황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사치코는 서점에 나가지 않고 시즈오를 불러내 시즈오에게 다가간다. 시즈오는 적어도 사치코와 닮은 점이 있다. 시즈오는 아직 하늘의 별과 숲에서의 고독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사치코는 시즈오를 따라 캠핑에 가고 시즈오와 연인 관계에 이른다. 하지만 이 역시 사치코가 진심으로 기대하는 것을 충족시키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치코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고 그 점에서는 ‘나’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나’의 경우는 자신의 절망을 절망으로 느끼지 않는다. 그저 그런 삶일 뿐이다. 그러나 사치코는 다르다. 아직 자신의 절망적 상황을 벗어나려고는 기대를 그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사치코는 고통스럽다. 사치코가 지닌 내적 고통은 사치코가 시즈오와 함께 노래방에서 부르던 노래에서 조금은 드러난다.

사토 야스시의 다른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은 좀 더 분명하게 자신의 고통을 드러낸다. ‘황금옷’의 여자 주인공 아키는 이혼했다. 남자는 결혼 후에도 다른 여자와 자고 다녔고 그것에 반발하듯 아키 역시 남편의 친구와 더불어 잠을 잤다. 서로 무관심한 상태에서 1년 후 헤어졌다.

그런데 아키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고통스러워 한다. 아키는 이 고통을 억누르고 있어서 평소에는 밝은 모습이다. 하지만 때로 이 고통이 그녀의 빈틈을 비집고 솟구쳐 오른다. 그런 고통은 때로는 정신적인 병이 되어 나타난다. 아키는 자신이 더럽다고 생각하면서 집에 오면 온몸을 거의 강박적으로 깨끗하게 씻는다.

“이렇게 씻잖아. 그러고 나서 바깥으로 나가는 거야. 다시 방으로 돌아오면 도로아미타불이야. 몸이 완전히 더럽혀진 느낌이 들어. 할 수 없이 다시 샤워를 하거나 이렇게 수건으로 닦는 거지.”

‘너의 새는’에서 사치코에게 이런 강박증은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아마도 사치코에게도 이런 모습이 감추어져 있지 않을까 충분히 짐작된다.

5)

‘너의 새는’이라는 영화가 간단치 않은 것은 바로 남녀 주인공이 가진 이런 내적인 풍경 때문이다. 풍경은 공허한 풍경이다. 이런 공허한 풍경 가운데서도 이들 주인공이 오직 하나의 삶의 감각을 보여준다면, 그것은 육체적인 것에서 발견된다.

‘너의 새는’에서 ‘나’와 사치코, 시즈오는 힙합 클럽에 가서 오랫동안 춤을 춘다. 그들의 춤 속에 내적인 갈망이 리듬으로 표현된다. 영화는 그들의 춤추는 모습을 상당히 길게 잡아준다.

사토 야스시의 다른 소설에서도 주인공이 육체적인 것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황금옷’의 주인공은 수영을 즐기며, 작가는 이 모습을 이렇게 그려낸다.

“손발을 한껏 뻗어서 물의 감촉을 즐겼다. 이런 감촉만으로 아키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에게 이 세계는 수영장을 가득 채운 물 같은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

“즐겁게 헤엄쳤다. 아키를 생각했다. 그녀도 이렇게 헤엄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바다에 떠 있다 보면 수영장에서 헤엄치고 싶은 생각이 사라져. 나를 데려와 줘서 고마워.’ 물론 미치오의 말이 옳았다. 아키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적었지만 25미터 거리의 수영장에서 헤엄치 노라면 좁아 터진 수조에서 사육 당하는 물개가 된 기분이었다.”

이들이 육체적 감각에 빠지는 것은 그들이 무언가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절망이 일본 주식회사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그런 일본 주식회사를 넘어선 어떤 사회, 그 속에서의 삶일 것이다. 그들이 오직 기쁨을 발견하는 섹스 역시 그런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런 새로운 사회와 삶은 실현될 수 없다. 그들이 그런 삶을 꿈꾸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이 춤과 수영을 통해 얻는 감각적 즐거움이란 하나의 잔재이다. 이런 잔재는 말라비틀어진 삶의 잔재, 마치 목마를 때 콜라를 마신 듯한 느낌일 뿐이다. 막연하게 또는 무의식적으로 찾아오는 느낌이 그런 것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주인공은 카뮈 이방인의 뫼르소를 닮았다. 그들 주인공은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고립된 채 뜨거운 여름 지중해 해변에서 수영을 즐기는 뫼르소를 연상시킨다.

6)

이제 ‘너의 새는’이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이해해 볼 때다. 사치코가 시즈오와 연인 관계를 맺기로 했다고 말했을 때 ‘나’는 처음에 담담하다가 사치코가 떠나자 갑자기 미친 듯이 달려가 나의 삶은 거짓이었다고 말한다. 이는 ‘나’의 전환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전환이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영화만으로는 그 전환의 계기가 불투명하다. 아마 원작인 소설을 보았다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다행히 지금까지 참조한 사토 야스시의 다른 소설을 통해 그런 전환의 계기가 약간은 드러난다.

‘황금옷’에서 주인공은 아키가 강박적으로 몸을 씻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아키가 약을 먹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어떤 효과를 가진 것인지 관심을 가지게 된다. 주인공에 타인에 대한 관심이 깨어난 것이다. 이 소설은 남자 주인공의 냉담함은 여자 주인공의 고통을 통해 깨어지는 구조를 가진다.

‘너의 새’의 경우에도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영화에서 사치코가 자신의 내면적 고통을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치코가 시즈오와 함께 노래방에서 노래할 때다. 사치코가 부르는 노래는 그 자신의 내면적 고통을 고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때 주인공인 ‘나’는 없었고 오히려 시즈오가 옆에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내면적 고통은 무의식적으로 주인공 ‘나’에게 각인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나’가 화장실에서 동료가 사치코를 비난할 때 갑자기 흥분하여 동료의 머리를 벽에 처박는 장면을 보면 그런 각인의 흔적이 엿보인다.

타인의 고통을 통해 타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는 사토 야스시의 소설 구조는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의 철학을 생각나게 한다. 레비나스는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서 신을 보게 되며 신의 명령을 듣는다.

획득형질도 유전되는 괴이한 사회 [이종철 선생의 에세이 철학]

획득형질도 유전되는 괴이한 사회

 

이종철(연세대)

 

한국인들이 첫 만남에서 빠지지 않고 묻는 말이 있다. 고향이 어디고, 나이가 몇이며(혹은 학번이 어떻게 되고), 학교는 어디를 나왔냐는 거다. 연줄이 중요한 사회다 보니 이런 식으로 고향과 나이 그리고 출신 학교로 상대가 나와 연줄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연줄만 확인하면 좋은데, 문제는 이런 세 가지 연줄에 기초해서 바로 위계(hierachy)를 설정하는 것이다. ‘아, 같은 고향 사람이네’라고 확인이 되면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다. 어제까지 생면부지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웃사촌들보다 더 가까워진다. 아울러 출신 학교를 물으면서 동문 여부만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가방끈의 길이와 레벨까지 평가한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70~80년대는 지방의 명문 국립대들이 있어서 어느 정도 다양성이 있었는데, 요즘 젊은이들은 이른바 인서울 대학과 지잡대로 훨씬 단순화시켜 버린다. 그래서 한국인들의 첫 대면은 단 몇 분이면 이런 견적서를 교환하면서 상대를 내편 네편으로 편 가르고 평가하는 과정이 되어 버린다.

이런 행태는 나이를 많이 먹었건 젊었건, 한국 안에서이건 아니면 유학을 가거나 해외에서 사람들을 만나건 간에 거의 변함이 없다. 한 번은 내가 해외에서 동문 모임에 참석했을 때 그 자리에 주재국 대사의 부인이 동문의 일원으로 참석한 적이 있었다. 외국에서 대사의 지위는 본국의 대통령에 버금갈 정도라 할 수 있고, 그 부인은 이른바 영부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동문회 모임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다. 그녀는 위로 20~30년도 더 된 선배들 틈에 끼여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하고, 비슷한 또래들과 모임 뒤치다꺼리하다가 나중에 전체 사진을 촬영할 때는 뒷자리 옆으로 비켜서 찍었다. 대사 부인으로서 존재감을 전혀 과시하지 못한 것은 안에서나 밖에서나 동문 간 학번에 따른 서열을 무시하지 못한 탓이다.

내가 아는 모 선배 교수는 독일의 대학에서 70~80년대 유학 생활을 할 때 같은 한국 유학생들 모임에서 진저리가 났던 경험을 나에게 토로한 적이 있었다. 공부하러 외국에 나왔으면서도 여전히 한국의 출신 대학을 따지고 학번을 따지면서 끼리끼리 놀더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있었던 지역에는 한국에서 광부로 일하러 온 사람들도 많았는데 그 경우는 가방끈 길이와 직업마저 문제가 됐었다고 한다. 70~80년대는 한국의 유신 독재와 광주의 경험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운동이 해외에서도 적지 않았는데, 그런 진보적인 그룹 안에서도 여전히 학벌과 대학 그리고 학번 등이 보이지 않는 장벽과 차별의 원인이 되곤 했다. 그래서 나중에는 내부에서 출신 학교와 학번을 절대 밝히지 말자는 다짐까지 했다고 한다.

한국인들의 이런 패거리 의식과 서열 의식은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을 불문율처럼 생각하면서 제대하고 나서도 자기들 집단을 과시하는 모자와 군복을 입고 지역마다 치안을 맡는다는 일부 해병대 출신들의 행태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청소년기의 특정 시점에 그저 암기식의 공부를 해서 얻은 점수를 가지고 대학을 들어간 것까지는 그나마 인정해주겠지만, 그것이 평생의 삶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처럼 작동하는 사회도 정말 괴기하게 보일 정도로 문제다.

 

한국에서는 특정 대학 출신 여부가 나중에 박사학위를 받은 후 대학 임용에도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른바 선진국 대학에서는 전공 학과와 학적을 옮길 때마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한국에서는 절대 금물이며 오히려 부정적 평가로 작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를테면 비서울대 출신이 대학원을 서울대로 진학해서 그곳에서 학위를 받거나 아니면 외국 유학을 가서 받은 경우에도 중요한 평가 기준은 학부를 어디 나왔느냐에 있다. 이런 이야기가 전혀 농담이 아닌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몇 년 전 서울대 학부에서 순혈주의 운운하면서 석박사 과정을 다니는 비서울대 출신들을 인정할 수 없다는 식으로 학내 게시판에서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한국에서 최고 명문 대학이라고 하는 곳에서 이렇게 유치 찬란한 출신 논쟁을 하는 것을 보면 그들의 학벌 의식이 저급한 의식 수준 이상으로 무의식적 수준에서까지 작동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철학자 한 분은 자신이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학문적 업적과 활동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에 자리를 못 잡은 이유를 ‘학부를 서울대 나오지 못한 탓’으로 돌려서 말한 적이 있다. 본래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생물학 불변의 법칙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의 정신세계에서는 절대적으로, 그리고 대를 이어 유전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런 괴이한 의식이 포스트 모던 논쟁도 더는 힘을 잃고, 21세기 4차 산업 혁명의 문턱에 들어서서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운운하는 시대에 세대를 불문하고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이상의 얘기들은 절대 꾸며냈거나 과장한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정치권에서 이슈화되고 있다.

 

한림대 출신의 젊은 여성 정치인으로 지난 대선에서 20대 여성의 돌풍을 일으킨 박지현이 민주당의 비대위 공동 위원장을 맡자 그이에게 당장 시비를 거는 말이 20대 여성이라는 말보다 한림대 출신이라는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의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지잡대 출신이 어떻게 SKY가 즐비한 정계에 명함을 내밀 수 있느냐가 그들의 절대 관심사다. 그들에게는 정치를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가방끈이 어떤 색깔이고 얼마나 긴지가 더 중요하다. 천안함 몇 주기를 잘못 말했다고 해서 정치인 자격이 없다는 명분을 제시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지잡대에 대한 경멸이 깔려 있다. 그러나 그런 암기식의 지식은 구글과 빅데이터가 지배하는 시대에 조금의 의미도 없는 것이다. 오직 암기식 교육으로 엘리트 코스를 거친 헛똑똑이들에게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지난 수십 년의 한국 정치사를 돌이켜 보면, 이런 가방끈을 가지고 그동안 유신과 군사정권이 끝난 이래 거의 30여 년 이상을 서울 법대 출신들이 한국 정계를 장악하고 지배해왔다. 하지만 그들은 회전문과 전관예우를 이용해 한국 정치의 보수 기득권 세력을 형성하는 데 앞장섰을 뿐이다. 오히려 이 한국 정치를 개혁하고 선도한 것은 김대중이나 노무현처럼 고졸 상고 출신이 더 큰 역할을 해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치라는 것은 그저 학교에서 암기식으로 배운 지식이나 육법전서를 달달 외어서 잘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다. 정치는 오래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필연적 지식을 다루는 계산적 이성의 수준을 넘어서 인간, 그것도 사회적 인간의 다양한 감정과 정서, 쓰고 단 경험, 대중과의 교감과 리더십, 그리고 고통과 인내심 등 수많은 복합적 변수를 담고 있다. 오죽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는 인생의 쓰고 단 경험을 어느 정도 겪은 50대에 들어서야 알 수가 있다고 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지혜는 필연적 지식을 말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가 아니라 개연적 지식인 독사(doxa)도 포괄하는 프로네시스(pronesis)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나 역시 같은 맥락에서 철학자로서 솔직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정치는 암기식 교육에 일찍부터 길들어진 SKY 출신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일단 이들은 성장 교육의 과정에서 ‘No!’라고 말한다든지 일탈을 경험하지 못한 모범생(범생이)에 가깝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일수록 부모나 선생의 말을 잘 따르는 순둥이일 경우가 많다. 머리가 아주 비상해서 일반적 잣대로 평가하기 어려운 경우를 제외한다면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타자의 명령에 잘 순응하면서 살아왔다. 그러므로 이들은 부모나 선생이 시키는 일을 수동적으로 잘할지 몰라도 자기 스스로 생각한다든지 변화와 개혁을 시도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시대는 수동형의 순응적 인간보다는 능동적이며 주체적, 창의적이 도전적인 인간을 더 많이 필요로 한다. 이런 요구는 특히 정치권에 필요한데 도대체 순둥이들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겠는가?

둘째로, SKY 출신들은 학교의 문턱에 들어서면서 나설 때까지 우수한 학교 성적을 쟁취하기 위한 무수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오로지 자기만 알고 남을 배려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존의 기술이자 법칙으로 귀에 따갑도록 들어왔다. ‘아생살타’(내가 살기 위해서는 남을 죽여야 한다)는 그들의 삶을 지탱해온 제1원칙이다. 성장 과정에서 이런 식의 생존경쟁에 익숙한 이른바 엘리트들에게는 자기 독선적인 이기심이 일반 대중들보다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들은 가정과 학교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서 정반대의 현상이 벌어지면 이해를 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그런 현상이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기가 십상이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과정에서 늘 일등만 꿈꿨던 이들이 자기중심적이고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반면 정치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 타협과 연대 그리고 공생을 요구하는 분야인데, 독선적이고 오만한 인간들이 어떻게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를 만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런 인간들로 채워진 한국의 정계가 타협과 협력보다는 유아독존식의 일방통행과 투쟁으로 점철된 현상을 지난 수십 년 동안의 정치사가 웅변해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들이 끊임없이 현대 세계에서 요구되는 변화와 개혁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SKY 출신의 법조인들이 정계에 들어오는 관문은 대개가 보수고, 들어와서도 대부분은 보수 정당에 터를 잡는 경우가 그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일본의 엘리트 가문이나 학벌 중심의 정치가 대표적으로 그런 경우인데, 오늘날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보면 그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들 엘리트 가문과 학벌 출신의 정치인들이 대를 이어 자민당의 핵심 기득권 세력을 유지하면서 일본의 개혁과 개방을 철저히 외면하고 극우 보수주의로 이끌어 온 결과 이제 일본은 사회 전반의 탄력을 상실하고 이류 국가로 전락하고 있다. 지금 한국 정치가 엘리트 중심을 벗어나 나 가방끈이나 지역을 불문하고 역량 있는 새로운 피를 수혈하지 못한다면 한국 정치도 머지않아 일본의 나쁜 길을 답습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정치는 엘리트주의로 길들어진 SKY 출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일등만 꿈꿨고, 자기중심의 독선에 빠진 하버드 출신의 이준석보다는 한림대 출신의 참신한 여성 정치인 박지현에게 더 큰 기대와 희망을 건다. 형식적인 학벌을 껍데기로 둘러쓰고 온갖 불평등과 차별을 은폐시키고 있는 능력주의를 그 의미도 제대로 모른 채 떠드는 이준석보다는 지역과 대학과 나이와 성의 차별을 온몸으로 깨달으면서 이 사회의 근본문제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무엇을 바꾸고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위해 분투하는 박지현이 한국 사회의 미래 정치의 상징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다가오는 시대에서 대학의 비중은 지금보다 훨씬 더 줄어들 것이다. 학교 안이 아니라 학교 밖이 더 중요해지는 세상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지금 세계적인 기후 변화 운동을 이끄는 어리지만 아주 당찬 여성 스웨덴의 툰베리(Greta Thunberg, 2003년생)가 그런 모습을 앞장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사진: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 출처: https://www.greenqueen.com.hk/7-things-you-didnt-know-about-swedish-teenage-climate-activist-greta-thunberg-gretathegre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