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철학 일지(3)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 일지(3)

1)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석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 내가 어떤 논문을 쓴 것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가지고 석사 논문을 엮어 나가려 했지만, 그 당시 도대체 이빨조차 들어가지 않는 돌덩어리를 그냥 삼키듯이 쓴 것 같다. 부끄러워서인지 그 후 다시 석사 논문을 뒤져 본 적이 없다.

나는 1년 석사를 마치고 결혼도 하고, 다행히 경남대에 자리를 얻어갔다. 그 뒤 2년 반 동안 경남대 있었으나, 박사 과정 수업 때문에 마산에서 서울까지 매번 고속버스를 타고 오르내렸다. 무엇을 가르쳤는지, 무엇을 공부했는지 잘 기억 나지 않는다.

그때 나는 아무리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일단 접어두고 그에 앞서 헤겔의 논리 자체를 이해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턱대고 헤겔의 (대)논리학을 읽어나가기로 했다. 강의와 박사 과정 수업 사이 혼자서, 조금씩 공부해 나갔으나, 이건 정신현상학보다 더 어려워 별 진척은 없었다.

헤겔의 논리학을 읽다가, 헤겔이 미적분학에 관해서 논한 부분을 발견했다. 약 100페이지에 걸친 상당히 긴 부분인데, 펠릭스 마이어 출판사사에서 헤겔 전집을 새로 발간하면서 이 부분은 제거해 버렸다. 다만 논리학 뒷부분에 일종의 이본에 해당하는 것으로 실어 놓았으니, 펠릭스 마이너 사에서는 이 부분의 진위를 약간 의심한 것이 아닐까 한다.

나는 당시 라슨 판 논리학을 읽었는데 여기서는 이 부분이 본문 다음의 추가[Zusatz] 부분에 실려 있어, 일단 이 부분이 헤겔의 논리학의 한 부분을 이룬다는 것은 인정하였다. 당시에는 펠릭스 마이어 판본이 없었으므로 나는 이 부분이 헤겔의 말이라는 것을 믿으면서 이 부분에 굉장한 흥미를 느꼈다.

나는 이때 헤겔의 미적분학을 연구해서 논문으로 발표했다. 나로서는 이 논문을 쓰기 위해 아마 생애 처음으로 진지하게 철학 공부에 몰두했다. 헤겔은 미적분을 다루면서 하나의 문제를 화두로 던졌다. 미적분 계산이 엄밀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계산 자체는 엄밀하지 않는데도 미적분학이 자연을 해석하면서 얻어낸 결과는 성공적인데, 헤겔은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밝히려 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이해하자면 미적분학을 이해해야 했고, 나아가서 헤겔의 수 개념 자체를 이해해야 했다. 헤겔의 수 개념을 이해하자니, 러셀의 수 개념이 생각났고 헤겔의 수 개념과 러셀의 수 개념이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밝혀야 했다. 더구나 이런 수 개념을 통해서 어떻게 미적분학이 출현하며 마지막으로 헤겔의 제기했던 물음 대로, 왜 미적분학의 계산이 엄밀하지도 않으면서 실제로 자연 해석에 무리가 없는지를 알아야 했다.

나로서는 굉장히 힘들게 공부하고, 굉장히 장황한 논문을 작성했다. 아마 지금 이런 논문을 썼다면 어디에도 실리지 못했으리라. 나는 아직도 헤겔의 결론을 이해하지 못한다. 언젠가 이 부분을 다시 읽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다시 읽지 못했다. 다만 헤겔의 사유에서 미적분학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만 어렴풋하게 느낀다. 라이프니츠의 미적분학이 셸링을 통해 헤겔로 전해지면서 미적분학은 헤겔 논리학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논문으로서는 실패했지만, 헤겔의 변증법을 이해하는 단서를 얻은 것으로 나는 만족했다.

2)

이 글을 쓰면서 과거에 내가 남긴 흔적을 찾아보려 했다. 당시 나는 우리나라 처음 나온 삼보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문서를 작성했다. 나중에 이 문서들은 따로 보관했던 것 같다. 아마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그 속에 집어넣었던 것 같다. 지금도 데이터베이스는 남아 있는데, 그것을 띄울 수는 없다. 그때 사용했던 프로그램이 폭스프로라는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인데, 지금은 이 프로그램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386 시대 프로그램이니 혹시 구하더라도 현재 컴퓨터에 구동되지 않을 것이다. 무슨 방안이 나서기까지는 당분간 기억에 의존해서 이 글을 쓸 수밖에 없다.

나는 박사 과정 수업을 들으러 마산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왔다. 그 사이 대학원에는 새로운 세대가 출현했다. 이 세대는 이미 학부 시절에 마르크스주의를 상당히 학습하고 올라온 세대였다.

당시 차인석 교수님이 사회철학을 강의하면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을 소개했다. 주로 하버마스의 철학에 대해 강의하시고 대학원에서도 하버마스의 책 인식과 관심 등을 제자들과 함께 읽었던 것 같다. 새로 대학원에 입학한 후배 세대는 차인석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삼아 사회철학을 주로 연구했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철학을 헤겔에서 찾으려 하기보다 마르크스 자신의 고유한 철학을 찾아내려 했다. 나는 이들과 약간 생각이 달랐다. 마르크스에게 철학은 헤겔의 변증법이었다. 반면 이 후배 세대들에게 마르크스의 철학 즉 유물론이었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관심 또한 시대와 사회에 관한 관심이 철학적으로 우리를 서로 가깝게 했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 한 가지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다. 후배 세대들이 중심이 되어 마르크스의 철학 책 가운데 대표적인 저서인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책을 직접 읽어보자는 선동이 등장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누구도 독일 이데올로기라는 원전을 본 적이 없었다. 그저 그런 책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후배가 차인석 교수님의 댁에 그 책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이때부터 차인석 교수님이 대학원에서 독일 이데올로기를 강독하도록 만들려는 유혹이 시작되었다. 어느 해 연말인지 새해 초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는 차인석 교수님의 댁을 방문해서 자리를 펼쳤다. 우리는 교수님에게 올해는 이 책을 강독하시는 게 좋지 않겠냐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강박 아닌 압박을 가했으니, 교수님이 알고 넘어 가주신 것인지, 아니면 교수님도 하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지만 그해 봄부터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기로 했다. 덕분에 그해 봄 우리는 차인석 교수님이 가진 독일 이데올로기 원전을 복사본으로 한 권씩 얻게 되었다. 교수님은 이 복사본이 다른 곳으로 유출되지 않도록 각 복사본에 번호를 매겨 우리에게 주었다. 내가 받은 복사본은 4번이고, 현재도 그 4번 복사본을 가지고 있다. 내가 독일 이데올로기를 번역했을 때 대본으로 삼았던 책이 바로 이 4번 복사본이다.

이제 대학원에서 우리의 관심은 더 풍부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헤겔 변증법, 하버마스와 같은 사회철학, 마르크스의 유물론 철학 등이 풍성하게 논의되었다. 지금도 이 후배들 모습이 선하다. 그들은 헤겔은 지독하게도 싫어했으나, 선배로서 나에게는 무척이나 잘 대해주었다. 그렇다고 내가 헤겔을 버릴 수도 없었다.

3)

수업을 들으러 서울에 도착하면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학교의 게시판과 벽 등 곳곳에 붙어 있는 대자보를 읽는 것이었다. 그 대자보를 읽는 것은 시대적 현실을 아는 통로였다. 좀더 관심을 가지면 소위 문건이라는 것을 구해 볼 수 있었다.

여러 흥미로운 문건이 있었고 이런 문건을 통해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런 토론과 더불어 새로운 운동 단체가 출현했으니, 이런 토론과 단체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현실의 변화를 보았고 거기에 희망을 보았다. 그때 출현한 문건이나 대자본 내용을 여기에 옮기는 것은 굳이 불필요하리라.

84년도 말경으로 기억한다. 특이한 문건을 하나 발견했다. 거기에는 독특한 철학적 개념이 들어 있었다. 그게 바로 품성 또는 심성이라는 개념이었다. 이 품성, 심성이라는 개념은 유물론적인 연원을 가진 개념이라기보다 낭만주의적 철학의 전통을 잇는 개념이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실존철학의 세대였고 이 시대 철학이란 세계를 과학적으로 이해하려는 것보다 인간을 심정적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하이데거는 불안이라는 심정을, 사르트르는 구토라는 심정을 철학에 끌어들였다. 나는 대학 시절 빠져들었던 심정의 철학과 새로이 등장하는 심성, 품성의 철학이 친연성을 지닌 개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심성과 품성 개념은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엄청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개념은 우선 그 유래가 낭만주의적 철학에서 있는 것 같았으며 더욱이 심성과 품성은 매우 영웅주의적으로 해석되었다. 그것은 유물론적으로 당파성의 개념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적 현실주의적 측면과 충돌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비록 이 개념이 낭만주의적 철학의 전통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에서 인간 자신의 혁명이라는 개념이 있는 만큼 마르크스주의와 결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런 인간 혁명의 개념은 당파성 개념과 달리 계급적인 개념이라기보다, 인간의 심정적 실천적 의지의 측면과 관계된다고 보았다. 또한, 이 개념은 결코 영웅주의적인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사이의 내밀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개념이 등장하면서 대학과 지식인 사이에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니, 앞에서 83-4년도의 사회구성체 논쟁과 더불어 철학 논쟁으로 발전했다.

나는 이런 철학적 논쟁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무언가 커다란 역사적 전환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헤겔이 말했듯이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질 때 날게 되니, 올빼미가 날았다면, 이미 황혼 즉 여명이 다가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철연의 추억 : 나와 한철연’ – 연효숙 편 [나와 한철연] ①

이 코너는 2023년 1월 12일(목) 서교동 소재 한철연 강의실에서 거행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신년회 2부 행사에서 ‘나의 과거의 한철연, 미래의 한철연’이란 주제로 진행한 발표회를 계기로 구성되었다. 이 코너에 게재되는 글들은 ‘내’가 처음 한철연에 들어오게 된 계기와 활동을 돌아보면서 한 개인이 철학 전공자로서 거친 여정뿐만 아니라 한철연이라는 철학 학회의 지난 활동을 되살피는 내용이 될 것이다. 80년대 이후 한국에서 철학함이 무엇이었는지 그 역사의 일부에 자리했던 옛 한철연과 지금의 한철연, 그리고 앞으로 한철연을 생각하며 지금 철학함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

 

한철연의 추억 : 나와 한철연

연효숙(연세대)

 

나는 2023년 1월 12일(목)에 열리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의 신년회 때 세대별 4인 주자들(70년대 세대, 80년대 세대, 90년대 세대, 2000년 이후 세대)의 릴레이 간담회 기획(각 사람이 10분씩 발표)을 현남숙 연구협력위원장으로부터 부탁받았다. 처음에는 이 신년회 간담회 4인 기획이 노년 세대(60세 이상) 회원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줄 알고 좀 주춤거렸다가, 세대별 기획이라는 말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고 흥미로운 기획이라 생각하여 흔쾌히 수락하였다. 주제는 ‘과거의 한철연, 미래의 한철연’. 이 주제야 새로울 것이 없었지만, 세대별로 한다는 것이 새로운 시도였고, 또 간담회 형식이니 자유롭게 생각나는대로 말하면 되는 것이어서 부담이 없었다. 그렇게 한철연 신년회 간담회는 4인의 발표로 끝이 났다. 이어서 송상용 선생님, 김교빈 선생님의 추억담도 있었고 회식이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말한 ‘한철연의 나, 나의 한철연’ 내용은 제대로 기억된 것이었을까? 부분부분 끊기는 희미한 그 시절의 기억을 가다듬다 보니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 4인 릴레이 간담회를 한철연 웹진 <ⓔ 시대와 철학>에 한번 남겨 보면 어떨까 싶은 마음이 생겼다. 마침 진보성 웹진 편집주간이 4인 간담회를 정리하고 있는데 내용을 확인해 달라고 하였다. 나는 망설이다가 내 계획, 즉 직접 내가 이 기억의 내용을 쓰는 것은 어떨까? 또 이 기획을 4인 기획으로 이어서 쓰고, 더 나아가 자유롭게 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쓰면 어떨까? 이렇게 제안했다. 논문 형식의 딱딱한 기록이 아닌, 우리들 각각이 기억하는 그 시절의 기억을 에세이 형식, 르포 형식으로 가볍지만 진솔하게 써 내려 가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집단 기억’의 형식으로 한철연 34년의 역사(1989년부터 2023년까지)를 각각의 기억의 편린 속에서 끄집어내어 콜라주 형식으로 갖다 붙인다면, 그렇게 찢어 붙인 조각 조각들이 우리 시대 한철연의 다면적인 기억이자 추억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작정을 하고 나는 신년회 때 했던 이야기들, 기억들에 덧붙여서 1세대 한철연 회원으로서 추억을 회상해 보고자 한다. 이 기억은 온전히 나의 개인적인 기억이며, 그에 대한 감상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가끔 그 기억에 대한 사실(팩트)이 다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자료적 기억만이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또 이러한 릴레이 기록이 후일에 또 다른 한철연의 기록들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1. 한철연 탄생의 추억

나는 78학번으로 70년대 학번 후반 주자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은 서슬이 퍼런 박정희 독재 정권의 유신 말기로, 캠퍼스에는 알 수 없는 억압과 침묵의 공기가 무겁게 맴돌았다. 1979년 10월 29일 가을에 역사상 초유의 대통령 저격 사건이 일어났고, 믿을 수 없는 속보는 빨리 퍼져 나갔다. 80년 서울의 봄, 광주 항쟁 등 그때 대학생들은 누구나가 다 반정부 데모에 동참했고, 매캐한 최루 가스의 냄새는 지금도 생생하다. 그러다가 소련의 붕괴와 해체, 그리고 진보 진영의 암흑 시절에 나는 당시 한국헤겔학회의 일원이었다. 1988년 가을쯤 광화문에서 헤겔학회 소장파들(유헌식, 이종철, 나)과 서울대를 중심으로 한 사회철학연구실(사철연)의 소장파들(이상훈, 서도식 등)이 양쪽에 다 참여했던 우기동, 양운덕의 매개로 광화문 계단에서 만났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나는 마르크스 등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했고, 칸트, 헤겔 공부를 하면서 어렴풋이 마르크스에 대해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무엇을 논의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나고, 두 단체 회동 시 장소였던 계단의 모습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고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세세한 논의 내용은 기억에 없고 저녁노을을 배경으로 계단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며 얘기했던 그 기억은 나만의 기억일까. 암튼 그 후 두 단체의 통합을 위한 모임은 몇 차례 더 있었다. 그 시절에 대해서는 이병창, 우기동, 이종철, 김교빈 선생님과 전화 통화를 통해 어렴풋이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적지 않은 두 단체 회원들이 마석이었던가 어딘가 교외로 나가 통합에 관한 논의를 더 했었는데, 그중 단체의 작명에 관한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다. 이병창은 ‘사상’이라는 말을 꼭 집어넣어야 한다고 했고(이병창, 나의 기억 동일), 이종철은 ‘실천’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우기동 기억).

그렇게 1988년은 흘러가고, 1989년 3월 25일 두 단체는 통합하여 ‘한국철학사상연구회’라는 이름으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창립총회를 했다. 나도 이 창립총회의 기억은 분명히 있다. 이때 이정호 선생님이 큰 역할을 한 것 아닌가 짐작되며, 선생님과 전화 통화를 해서 확인도 했다. 그리고 창립총회의 사진을 이정호 선생님이 가지고 있으며 내게 보내 준다고 했다. 이렇게 창립총회가 있기까지 두 단체의 통합 과정에 대한 나의 한철연 가장 초기의 장면과 기억이 이제는 아련하고 어렴풋한 ‘한철연의 추억’으로 흐릿하게나마 남아 있다. 아마 내가 더 나이가 든다면 이 장면들은 더욱더 빛바랜 사진인냥 재생도 복원도 어려운 채로 흩어져 버릴지도 모르겠다.

1988년경 광화문 일대(민방위 훈련 중) / 사진출처: 영화 <칠수와 만수>(1988)

 

  1. 학회지의 추억

2023년 올해 따져 보니 내가 한철연과 함께한 세월은 34년째이다. 한철연이 1989년에 공식 출범했는데, 양 단체가 완전히 한철연 속으로 해체되어 융합되어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한국헤겔학회는 이미 임석진 선생님을 중심으로 몇몇 노장파 회원들(이을호, 이병창, 설헌영 등)이 활동을 하고 있었고, 사회철학연구실은 주로 서울대 철학과 72학번(이규성, 이훈, 이영철, 이정호, 이병창, 김수중 등)이 먼저 활동했다(고 들었다). 통합 이후 사회철학연구실은 한철연에 흡수 통합되었고, 한국헤겔학회는 지금도 여전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학회지의 경우, 한국헤겔학회는 1984년에 『헤겔연구』제1호가 나왔으며, 사회철학연구실의 학회지에 대한 사정은 내가 잘 모르겠다. 한철연을 중심으로 하자면, 『시대와 철학』이 무크지 형식으로 1988년, 1989년에 천지출판사에서 나왔고, 이 책 두권은 아마 서교동 태복빌딩에 보관되어 있겠지만 나는 갖고 있지 않다. 한철연의 공식 학회지 『시대와 철학』 제1호는 1990년에 천지출판사에서 발간되었고, 이 책은 나도 갖고 있다. 한철연 20여 년간의 『시대와 철학』 그리고 회원들의 학술활동과 관련된 자세한 논의는 2009년 한철연 2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발표되고 『시대와 철학』제20권 3호에 실린 박영균의 「철학 없는 시대 또는 시대 없는 철학」의 논문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한철연 회원들의 20년간의 주요 학술활동 성과에 대해서는 이철승의 「‘임중(任重)’의 시대정신 발현과 ‘도원(道遠)’의 ‘우리철학’ 정립 문제」와 이정은의 「사회 변혁을 위한 철학적 논의들」의 논문들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시대와 철학』 제1호 1990.6.30. 발행 / 사진출처: 연효숙 회원

 

  1. 연구실의 추억

한철연의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추억은 연구실에 대한 기억이다. 다른 무수한 학회들과 달리 한철연은 고유의 연구 공간인 연구실이 있었다. 이 연구실에서 분과별로 세미나하고, 기조부(이병수, 박영균, 송석현 활동)의 초청으로 외부 강연을 들었던 기억이 여전히 선명하다. 나는 1989년 당시 과천에 살고 있었는데, 처음 한철연의 연구실인 낙성대 연구실까지는 남태령 고개만 넘으면 되는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한층 더 친근감이 갔다. 그러다가 1994년에 ‘논리교육연구실’이 발족되고, 이때부터 신촌, 홍대 연구실 시절이 열리게 되었다. 한철연이 ‘논술 사업’에 참여해야 하느냐 마느냐로 엄청난 논쟁이 있었을 당시 나는 무슨 사정 때문이었는지 참여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6년 학위를 마친 후에 나는 홍대 산울림 소극장 근처에 있었던 ‘논리연구실’에 조광제, 우기동, 홍건영 선생님과 함께 상근하게 되었다. 학위를 마친 후 딱히 장래가 보장되는 자리가 내게 없었기 때문에 이 제안을 별 망설임 없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한동안 한철연 회원들은 논술 첨삭 노동에 매진하면서, 자신의 역량을 자의반 타의반 발휘했다. 이때가 아마도 한철연 역사상, 경제적으로는 비교적 여유 있는, 그러나 연구 역량이 거의 발휘되지 못한 시절이 아닌가 기억된다. 그러다가 한샘의 재정난으로 1999년 한철연의 논술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제2의 낙성대 연구실로 이사 가면서, 다시 연구실 분위기는 차분해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몇 년 후에 윤구병 선생님의 제안으로 현재 서교동의 태복빌딩 3층으로 이사 왔고, 이순웅 당시 연구협력위원장의 열성적 제안으로 한 번의 리모델링을 거쳐 깔끔하게 환골탈태해진 현재의 연구실이 탄생하게 되었다.

 

  1. 분과활동의 추억

한철연과 내가 함께한 세월은 다른 초창기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34년이다. 늘 한철연에 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한철연은 늘 그 자리에 굳건히 있었다. 나는 한철연에 들락날락하며 밀착했다가 거리를 두었다가 하곤 했었다. 한철연에서 내가 소속감을 가장 잘 느낄 수 있었던 활동은 역시 분과 활동이었다. 창립 초기에 내가 기억하고 참여했던 분과는 대표적으로 ‘변증법 분과’였다. 어느 여름에는 명지산으로 분과 엠티를 당일치기로 갔다 왔던 기억도 있다. 이 분과 소속으로 현재까지 한철연에 열심히 나오는 회원은 이병창 선생님밖에 없는 것 같다. 그 이후에 나는 문화변증법 분과에도 소속이 되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두 분과는 현재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내가 한철연에서 동지들과 함께 만들고 가장 애썼던 분과는 ‘여성과철학 분과’였다. 내가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6년에 만들어졌다. 김세서리아, 이정은 등과 의기투합해서 여성과철학 분과를 만들었고, 이때부터 지금까지 여성과철학 분과는 한철연을 27년 이상 굳건히 지킨 분과라고 자부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이 분과에 한 번도 결석 없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고, ‘여성주의’가 우리 사회에서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어떤 직감 때문에 좀 멀리한 시절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여성과철학 분과를 멀리하면 나에게는 특이한 금단 현상이 나타나 얼마간 휴식 후에 다시 복귀하고는 했다. 한철연이 친정집이라면, 여성과철학 분과는 친정엄마와 같은 존재였다. 이후 많은 후배들이 여성과철학 분과에 나처럼 들락날락하며 꽤 적지 않은 성과를 내었다. 지금 나는 여성과철학 분과를 지키는 창립 멤버이자 뒷방 늙은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흐뭇한 기분이다. 최근에는 3-4년 전에 만들어진 ‘근현대 삶 사회 분과’(이른바 복덕방 분과)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김교빈 분과장님과 더불어 한철연 초창기 멤버들의 집합소가 됐지만, 이후 20년은 더 가자 했는데,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가는 분과가 되길 희망한다.

2017년 11월 25일(토) 여성과철학 분과가 진행한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17년 가을 제53회 정기학술대회 광경 / 사진출처: 전호근 회원 facebook계정

 

  1. 한철연 속 나의 궤적

나는 한철연의 창립 멤버이자, 은퇴하지 않는 회원이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은퇴하지 않을 결심’을 했었던 것 같다. 아무리 퇴물처럼 보여도 굳건히 지키는 어느 사찰의 은행나무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철연에서 쓴 감투는 여성과철학 분과의 첫 번째 분과장이다. 이 감투는 꽤 오래갔고 장기집권을 했다. 그러다가 분과장을 김세서리아에게 물려 주고 나는 평회원으로 자유롭게 세미나에 참여했다. 한편 논리교육연구실에 발탁되어 상근연구원(유급)으로 2년여를 지냈고, 그 후 서교동 연구실 시절로 이사 한 후에는 한철연에 잘 나가지 않았다. 어느 토요일 오후 낮잠을 자고 있는데, 느닷없이 이순웅 위원장의 전화가 나를 깨웠다. 걱정 반 불안 반 마음으로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을? 실수한 것?’이라고 자기 검열하면서 이순웅 위원장을 만나러 갔다. 그 자리에서 느닷없이 나는 차기 연구협력위원장 자리를 덜컥 제안받았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뜻밖의 제안에 나는 당황했고, 망설임과 거절 사이에서 고민했다. 이순웅 위원장이 두 번째 왔을 때 나는 삼고초려는 아니지만 결국 그 자리를 수락하고 말았다. 나는 연구협력위원회의 부장 감투도 한 번 쓰지 않고 낙하산 위원장이 되고 말았다. 이게 옳은 결정인가? 하는 많은 망설임도 있었지만, 이 2년 동안의 경험은 내 인생에서 한철연과 맺은 두 번째 소중한 인연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 후 편집위원장 그리고 회장까지 나는 감투를 쓰게 되었고, 흥겨운 마음으로 그 직책들을 수행하였다. 어찌 보면 나는 한철연의 고위직 감투에서 여성으로서는 첫 번째라는 수식어를 몰고 다닌 셈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여기에 여러 가지 함의가 있음은 다들 잘 아실 것 같다.

한철연은 늙어가고 있다. 후배들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학문 후속 세대 문제는 큰 짐으로 남아 있다. 또 한철연의 끝나지 않은 정체성 논의는 한철연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위안 삼아 본다. 21세기 인문학 위기 속에서 한철연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추신, 이 글을 쓰는 데에는 이정호, 김교빈, 이병창, 서유석, 이종철, 우기동, 문성원, 김세서리아 선생님과의 전화 통화 등 큰 도움이 있었음을 밝혀 둔다.)


 

나의 철학 일지(2)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 일지(2)

1)

80년 봄은 논쟁으로 무르익었다. 복학생 그룹과 재학생 그룹의 논쟁, 이는 정치적으로는 즉각적인 정치 투쟁이냐, 대중적인 학내 민주화냐 하는 논쟁이었고, 철학적으로 낭만주의와 현실주의의 대립이었다.

나는 현실주의자의 비판을 내적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현실주의는 옳았지만 낭만주의자로서 나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무언가가 결여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때문에 마음이 요동치는 가운데 나는 어느 날 한 선배가 나에게 선물로 준 석사 졸업 논문을 읽었다. 그 논문 제목은 지금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헤겔 정신현상학 앞부분에 나오는 ‘주인과 노예의 투쟁’을 설명한 것이었다.

석사 논문이니 아주 간략한 것이지만, 나는 이 논문의 내용에서 깊은 충격을 받았다. 헤겔은 이 주노 관계에 대한 서술에서 노예가 어떻게 출현하는가, 그리고 노예가 어떻게 해방되는가를 정신적인 측면에서 그려냈다. 자신의 목숨을 걸었던 주인은 자유를 얻었고, 자신의 목숨을 지키고자 했던 노예는 자유를 잃었다. 향락에 빠진 주인은 거꾸로 노예에 의존하는 존재가 되었고, 거꾸로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자유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역사를 전복시키는 계급투쟁은 알다시피 물질적인 차원에서 힘의 관계이었다. 그런 힘의 관계에서 무언가 결여된 듯한 것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주어졌다. 헤겔에서 주노 관계의 전복은 정신적 투쟁이기 때문이다. 헤겔의 이런 정신적 투쟁이 마르크스의 물질적 계급투쟁보다 나에게는 더 깊고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내가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독일어 원본인 훗셀의 ‘선험적 현상학의 이념’이라는 책을 옆에 끼고 있었다. 내가 헤겔에 전념하게 된 데에는 그해 광주 이후의 정신적 공황 상태가 있어야 했다.

2)

80년 봄은 짧게 끝났다. 5.17 광주에서 자행된 군부의 폭력은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이후로 아무도 다시는 웃음을 웃을 수 없었다. 젊음의 찬란함은 사라졌고 정신적 공황이 지배했다.

학교가 문을 닫은 여름 내내 나는 패배감과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다시 술에 빠져들었다. 8월이 지나면서 어느날 아침 술에 깨서 나는 더는 이렇게 지낼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이때 나는 다시 선배의 논문에서 읽었던 헤겔의 주노 관계를 떠올리게 되었다. 거기서 정신적인 힘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나도 헤겔을 공부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월이 되면서 개학을 하게 되고 다시 대학원 연구실에 선후배들이 되돌아왔다. 당시 학교까지 집이 너무 멀었다. 무려 3시간이 걸렸으니, 나는 어느 선배와 대학원 연구실에 자고 먹고를 반복했다. 급기야 곤로와 담뇨를 가져왔고, 심지어 굴비 한 두름도 창문에 걸어 놓았다. 오직 아르바이트를 하는 한에서만 학교를 나섰다.

이때 어떤 후배가 헤겔을 읽자고 제안했다. 그 후배가 헤겔을 읽자고 했던 것은 나와는 다른 생각이었다. 그 후배는 어느 날 술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형님, 레닌이 말했는데, 헤겔의 변증법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역사를 바꿀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헤겔의 논리학 책을 읽자고 했다.

그는 학부에서는 하이데거 역사철학에 관심을 두었으나, 광주 이후 헤겔로 전향했다. 나와 철학적 이력이 비슷하였기에 우리는 죽이 아주 잘 맞았다. 이렇게 해서 대학원 내에서 헤겔을 공부하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당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직접 연구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과학이고 그 고유한 철학은 헤겔의 철학이니, 철학도는 마땅히 헤겔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 모임이 유지된 논리였다.

헤겔을 읽는 모임의 수는 많지 않았다. 마침 어느 교수님이 해외 안식년을 떠난 후라, 교수님의 방이 비었다. 헤겔 논리학을 읽자는 후배는 그 교수님이 매우 아끼는 제자였다. 귀국한 교수님은 자신의 연구실이 담배꽁초와 술 냄새로 뒤범벅된 것을 보고 기절초풍하여 후배를 자신의 마음에서 추방하여 버렸다.

헤겔을 공부하면서 지도교수도 바뀌게 되었다. 다행히 역사철학을 하시던 이상철 교수님이 우리를 맡아 주셨다. 지금도 간염 때문에 일찍 돌아가신 이상철 교수님의 온화한 얼굴이 기억난다. 교수님이 좀 더 오래 살아 계셨다면 그 후 우리가 겪었던 많은 혼란을 그래도 덜 겪지 않았을까?

3)

9월 찬바람이 들면서 우리는 더욱 진지해졌다. 오직 헤겔만 안다면 역사를 들어 올릴 지렛대를 찾을 수 있다는 메시아적인 신념으로 우리는 헤겔을 읽었다. 하지만 헤겔에 대해서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헤겔을 전공하신 교수님도 없었다. 이상철 교수님도 역사철학을 전공하실 뿐, 헤겔을 아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무턱대고 우리끼리 읽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하루 내내 헤겔을 붙잡고 있었지만, 하루에 한 페이지도 못다 읽을 때가 많았다. 조금만 읽으면 졸려서 책상에 엎드려 잤고, 깨어나서는 우리의 부족한 머리 때문에 역사가 지체되는 것 같은 죄책감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으나 어디서 헤겔을 이해하는 동아줄을 발견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헤겔 원전을 읽다가 도저히 안 되니, 헤겔의 해설서를 찾았다. 당시 많은 학생이 아마도 우리와 유사한 이유에서 헤겔 철학에 관심을 가졌으니 이런저런 헤겔 해설서가 영인되어 판매되었다. 헤겔의 해설서는 주로 서독에서 연구한 업적이었으며, 헤겔의 원전만큼이나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헤겔을 이해하는 데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런 해설서는 헤겔을 관념론자로서 해석하려는 딜타이, 가다머의 전통을 이어받는 것인데 마르크스의 철학을 헤겔에서 발견하려는 우리의 의도와는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지금도 나는 이런 점에서 서독에서 흘러나온 헤겔의 해설서를 불신한다. 그러니 유일하게 가능한 길은 이해가 되든 안 되는 헤겔의 원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자 씩 읽어 나가는 길 밖에 없었다.

이때 도움을 주신 분이 임석진 교수님이었다. 임석진 교수님의 박사 학위 논문을 번역한 후배가 매개되어, 임석진 교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교수님은 자신이 겪은 유학 경험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교수님은 마침 자신이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논리학을 번역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우리를 격려해 주셨다.

우리가 임석진 교수님을 모시고 여러 번 술자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직접 헤겔이 책을 놓고 함께 세미나를 하거나 한 적은 없다. 누구는 이런 모임을 일컬어 일차 헤겔 학회라 하면서 나중에 임석진 교수님을 모시고 헤겔 연구자들이 조직한 헤겔 학회와 구분하는데, 그것은 잘못되었다. 우리는 학회라는 이름을 들을 자격이 없으며, 그저 교수님을 모시고 술자리를 하면서 헤겔연구와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나 충고와 격려를 들었을 뿐이다.

4)

헤겔을 연구하는 것은 내적인 어려움만은 아니었다. 외적인 어려움도 있었는데, 우리의 약간 비밀스러운(사실 비밀이라 할 것도 없었으나,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게 모이거나 공부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헤겔 공부는 곧 외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우선 교수님들이 무척이나 의아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헤겔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그 배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당시 운동권은 마르크스주의를 비밀히 학습하곤 했으니, 그런 모임의 일종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에 우리는 학내에서 갑작스럽게 긴장된 시선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마르크스주의를 위한 철학적 토대를 발견하기 위해 헤겔을 연구한 것은 맞지만, 마르크스주의를 직접 연구한 것은 아니다. 이런 긴장된 시선에서부터 학내에서 여러 불편한 관계가 출현했으나, 그런 것을 굳이 기억할 필요는 없으리라.

철학적으로 더 문제는 당시 철학계를 지배한 아카데미즘이었다. 한국 철학계에서 아카데미즘은 60년대 후반 귀국한 철학 교수, 주로 당시 유럽에 번성하던 언어철학을 공부한 교수로부터 시작된다. 이때 국내에서는 국내 박사 학위 과정이 제도화하면서, 아카데미즘이 출현하였다. 1980년대 대학이 양적으로 팽창하면서(소위 졸정제 때문) 많은 학자가 등장한 것도 이런 아카데미즘의 발전에 기여했을 것이다.

아카데미즘이 강조했던 것은 철학적 언어를 엄격하게 사용하라는 것이었고, 철학적 연구를 논쟁의 방식을 통해 전개해야 한다는 정도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헤겔을 연구하던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이런 식의 아카데미즘에 대해 반발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철학에서 역사와 삶을 구원하는 메시아적인 힘을 발견하려 했는데, 이런 관점에서는 언어는 오히려 시적인 무게를 지닌 것이어야 했으며, 철학적 연구는 역사를 들어 올리는 힘을 지닌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수업시간이나 논문 발표 시간에 아카데미즘을 강조하던 철학 교수님들과 우리는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어리석은 짓이었다. 당시 아카데미즘을 강조하는 교수님들도 나름대로 철학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갖고 계셨을 것이다. 그들은 선배 세대들이 전개했던 소박한 철학 인생관에 가까운 철학에 반발감을 느껴 철학을 이런 소박함에서 구원해 철저한 학문으로서 철학의 명예를 회복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카데미즘에 경도한 철학교수는 그들의 선배들이 지녔던 인생관적 철학의 소박함을 다시 부활하려는 듯한 우리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이다.


김성수 박사 지음, 『서양철학의 역설』(바람꽃, 2023) 서평 – 이병창 [철학자의 서재]

김성수 박사 지음, 『서양철학의 역설』(바람꽃, 2023) 서평 – 이병창

 

이병창(한철연 회원)

 

1)

2023년 1월 28일(토) 오후 2시, 천도교 본당에서 김성수 박사님의 저서 『서양철학의 역설』(바람꽃, 2023)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박사님은 출판에 즈음하여 소회를 말씀하시면서 마지막에 노래를 하나 하겠다고 하면서 가고파를 부르셨다. 박사님은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하셨다. 얼마나 고향이 그리우셨겠는가, 나 역시 박사님의 노래를 들으며 속으로 함께 울었다. 지금도 박사님이 부르던 ‘가고파’ 노래가 마음속에 떠나지 않는다.

박사님은 1936년 태어나셨으니, 지금 86세, 거의 아흔에 가깝다. 연대 철학과 학사와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독일 유학을 떠나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으셨으니, 보통은 한국에 돌아와 어느 대학교에서 교수를 하시다가 이제 은퇴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남북의 분단과 박정희 독재 체제는 박사님의 인생을 한꺼번에 바꾸어 버렸다. 1973년 서울 법대 최종길 교수와 관련된 유럽 거점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1973년부터 국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역만리 독일에서 망명 아닌 망명자의 신세가 되어 외로이 떠돌게 되었다.

박사님은 그 후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창립하면서 90년대 김대중 정권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가 일어나기까지 유럽 전역에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한 생을 바치셨다. 80년대 초 일부 회원들이 국내에 들어올 수 있었지만, 박사님에게 그런 길은 열리지 않았다. 박사님은

그런 가운데서도 『동경대전』을 독일어로 번역하셔서 유럽에 한국의 사상을 전하는 데 진력하였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선 2003년 9월 마침내 국내에 첫발을 디딜 수 있었으나, 정권이 바뀌면 다시 귀국이 금지되었다가 문재인 정부 시절 다시 귀국이 허용되었다. 그 사이 이미 유럽에 삶의 지반이 펼쳐져 있는지라, 박사님은 가끔 귀국할 수 있었을 뿐이니, 그러다 이번에 저서를 국내에서 출판하게 되었으니 그 감회가 얼마나 크셨겠는가.

박사님을 아는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출판기념회는 성황리에 끝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국내에서 박사님과 같이 조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사단법인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후배들이 박사님의 출판을 마음으로 후원하였으니, 박사님도 무척 고맙게 여기시는 듯했다. 이제 박사님의 책을 미리 읽어본 후학으로서 박사님의 저서를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저자 김성수 박사 / 출처: 도서출판 바람꽃 https://blog.naver.com/windflower_books/222992521925

2)

이번에 발간한 철학서 <서양철학의 역설>이라는 책은 제목에서 밝혀진 대로 서양철학이 태어나면서부터 고질적으로 사로잡혔던 역설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역설이란 무슨 문제인가, 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사람은 의아해할 수도 있겠다.

역설이라고 한다면, 영어로는 ‘paradox’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두 가지 주장이 서로 평행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A를 주장하게 되면 그것과 대립하는 주장인 B가 A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그것은 거꾸로 B라는 주장 역시 필연적으로 A라는 주장으로 이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사님은 이를 상호전환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뜻은 대립하는 두 주장이 동시에 성립한다는 뜻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paradox’는 한자어로 역설[逆說] 즉 대립하는 주장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박사님은 이런 역설의 형태로 딜레마, 이율배반[Antinomie], 자가당착, 무한 진행, 순환론과 같은 다양한 형태를 거론하고 있다.

이 역설의 문제는 근대 철학에서 고전주의 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은 칸트가 순수이성 비판 변증론에서 다루었으나 결국 문제를 해결했다기보다는 다른 차원으로 이전해 버리고 말았던 문제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역설의 문제를 철학적 언어가 가지고 있는 모호함 때문이라고 보고 역설을 해결할 명확한 철학적 언어를 끝내 찾지 못하였다.

칸트와 러셀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남겨놓은 역설의 문제를 박사님이 자신의 책에서 포괄적이고도 철저하게 분석하였다. 학문의 길에서 어디서나 그렇듯이 문제를 분류하고 체계화하는 작업은 문제를 극복하는 가장 지름길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 자리에서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역설의 종류나 형태를 일일이 열거하고 소개하는 것은 굳이 필요하지 않아 보인다. 서양철학에 대한 약간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보았던 것일 것이다.

 

3)

박사님의 책 가운데서도 이채로운 것은 문학에서 역설이 소개되어 있다는 것이다. 박사님은 다양한 서양 문학 작품 속에 이런 인간론적 역설이 어떻게 등장하는가를 보여준다. 박사님은 이것을 통해 철학적 역설이 단순히 철학자만의 고답적인 고민에 그치지 않고 사실은 인간 자신의 삶 속에서 그때마다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박사님은 여기서 괴테의 <파우스트>나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그리고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소개한다. 철학적 역설의 문제는 철학자의 소관이니 일단 그들에게 맡긴다고 하더라도 문학 작품에서 나타나는 역설의 문제는 철학적 고민이 삶 속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가를 보여주기에, 이 자리에서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파우스트>에 관해서 약간 상세하게 소개하였으면 한다.

박사님에 의하면 파우스트는 이성과 회의(성찰)을 상징하는 파우스트와 악과 행동을 상징하는 메피스토펠레스 사이의 대립을 그 기본 구도로 한다. 행동 없는 성찰에 지친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으로 감각적 자연 충동을 부여받게 된다. 파우스트는 이성과 감각적 자연 사이의 통일을 확신하면서 메피스토펠레스의 저주를 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

» 1부에서 파우스트는 감각적 충동에 의한 행동으로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충동으로 살아가는 그레첸을 사랑하게 되고 이를 통해 쾌락을 얻다. 하지만 감각적 자연 충동은 자연 자체의 자기모순으로 파괴되고 만다. 파우스트는 사랑을 방해하는 그레첸의 오빠를 살해하고 순진한 그레첸은 자기의 죄 없는 아이를 살해하면서 파국에 이른다. 순진한 자연 충동에 의한 삶은 자기모순을 통해 합리적인 사회질서를 파괴하면서 몰락하게 된다. 감성과 이성의 통일은 여기서 불가능하게 된다.

» 2부에서 파우스트는 고전적 미(美)의 이상인 그리스로 시간 여행을 한다. 그는 고전 그리스에 이르러 헬레나를 사랑하게 된다. 헬레나는 고전적 미를 상징하는 존재이다. 여기서 파우스트는 마침내 이성과 감성적 미의 통일에 이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의 미는 이성적 질서인 자유의 이념을 직접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며, 여기서 개인의 자각적인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폴리스만이 자유롭고 개인은 어디까지나 폴리스를 대신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도 모순이 해결되지 못한다는 사실은 파우스트와 헬레나의 아들인 오이포리온이 하늘을 날려다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을 통해 상징된다.

» 3부에서 파우스트는 근대 세계로 돌아와 제후가 되어 개인의 자유에 기초한 국가를 세우려 한다. 파우스트는 황폐한 자연의 개간을 통해 이성적 질서인 자유와 물질적인 행복이 함께 하는 사회에 이르려 한다. 자연의 개간이 끝나자, 마침내 파우스트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지금 멈추어라’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이 마지막 부분은 파우스트가 바라던 이성과 행복의 통일로 간주한다. 그러나 박사님은 이런 자연의 개간 과정에서 파우스트가 자연 속에 살아가는 노부부를 살해하는 데 주목한다. 노부부는 아마도 자연 자체 곧 신적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사님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곧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니 여기서도 이성과 감성의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4)

이상에서 박사님은 서양철학사에 등장한 다양한 역설을 소개한 다음, 서양철학이 이 역설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발버둥을 쳐 왔는가를 보여준다. 이런 발버둥은 그만큼 역설의 문제가 서양철학을 괴롭혀 왔기 때문인데 박사님은 전반적으로 이런 시도는 실패했다고 말한다.

박사님은 이런 시도를 세 분야로 나누어, 살펴본다. 첫 번째 사변론 분야에서는 사변적인 사유를 통해 역설을 극복하려는 시도인데, 여기에는 초월주의와 에소테릭(비의), 알레테이아(계시)가 속해 있는데, 그 가운데 에소테릭과 알레테이아는 종교적인 차원이니 생략하고 철학적으로는 초월주의가 주목할 만하다. 초월주의란 곧 형이상학적인 방식으로 역설을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박사님이 자신의 저서에서 주목한 것은 화이트헤드, 하르트만, 하이데거와 같은 20세기 형이상학자이다. 유기체 철학자인 화이트헤드는 부분과 전체의 대립을 해소하여 부분이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박사님에 의하면 화이트헤드의 유기적 철학은 다시 비유기적인 철학에 대립하면서 역설을 극복하기보다 역설을 다시 새로운 영역으로 이전했을 뿐이라 한다.

하르트만은 다양한 존재자를 인정한다. 예를 들어 그는 수, 문화 등과 같은 제3의 존재자를 인정하면서 관념적 존재자를 물질적 존재의 반영으로 보는 유물론과 관념적 존재자를 초월적 존재로 보는 관념론의 대립을 극복하려 했으나, 박사님은 이런 시도 역시 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라 한다. 왜냐하면, 제3의 존재 내에 다시 관념적인 수와 같은 것과 물질적인 문화와 같은 것이 대립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이데거는 명제의 진리 이전에 존재의 진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즉 어떤 명제가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존재가 자기를 드러내면서 사실을 사실로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서양철학은 오랫동안 존재 망각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하이데거는 이제 존재를 이르는 새로운 형이상학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이데거는 존재에 이르는 길은 이미 존재 속에 살아가고 있는 현존재[Da-Sein] 즉 실존[Ex-Sistenz]을 거쳐 나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박사님은 하이데거의 존재론 역시 역설을 근본적으로 극복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하이데거 역시 언어의 이분법적 성격을 철학의 전제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박사님은 첫 번째 초월주의 분야에 이어서 협동론 분야에서 등장한 시도를 소개한다. 박사님은 이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하나는 통섭론이고 다른 하나는 통합론이며, 세 번째는 삼분법론이다. 여기서 통섭론이나 통합론은 다양한 과학의 결합을 통해 전체 자연을 포괄적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자연과학에서 등장한 주장이니 생략하고 세 번째 삼분법론은 철학에서 등장한 이론이니 주목할 만하다.

이는 관념과 물질의 대립을 극복하려는 시도인데 스피노자는 물질 실체와 관념 실체를 넘어 무한 존재라는 세 번째 실체를 도입하였고 포퍼는 앞에서 소개한 하르트만처럼 문화의 세계를 가정함으로써 관념적이면서도 동시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세계를 가정했고, 프레게는 의미의 세계를 상정하면서 기호나 지시체와 달리 의미가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세 번째 분야는 반이성주의이다. 여기서는 비합리주의와 반합리주의적 경향이 거론되고 있다. 쇼펜하우어, 니체 등 직관주의적 철학이 그 예이며 비판이론 역시 아도르노에서 보듯이 직관주의를 광범위하게 도입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해체론과 같이 아예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면서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인정하려는 시도를 들어볼 수 있다.

두 번째, 세 번째 분야에서 전개된 역설 극복의 방식과 그 한계에 대해 박사님은 상세하게 분석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이상 다양한 주장은 서양철학이 역설을 어떻게 해결하려 했는가를 보여주는 주장이지만 전체적으로 박사님은 이런 모든 시도 역시 근본적으로 역설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5)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서양철학을 괴롭혀온 역설의 문제를 박사님 자신은 어떻게 극복하려 하는지 살펴볼 차례이다. 이 부분은 이 책의 제1부 3절에서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박사님은 서양철학에서 역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듯이 단지 인간의 사유가 지닌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박사님은 이런 역설을 유럽의 삶과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본다. 그것은 서양철학은 이미 고대에서부터 역설의 문제에 사로잡혔지만, 특히 근대에 들어오면서 역설은 광범위하게 모든 분야에서 펼쳐지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박사님에 의하면 근대의 서양은 한편으로 산업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세계를 식민지화하게 되었다. 상세한 과정이야 다 알고 계실 것이니 여기서 생략하도록 하겠다. 이런 과정에서 서양은 자연과 비서구를 지배하는 가운데 유럽 중심주의, 이성 중심주의가 등장하면서 자연과 감성을 인위와 이성을 통해 지배하려 했고 그 결과 자연과 감성이 인위와 이성에 대립하는 이분법적 사유, 역설적 사유가 등장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박사님은 역설은 이런 유럽 중심주의와 이성 중심주의가 극복되지 않는 한 극복될 수는 없다고 한다.

박사님은 이런 점에서 거꾸로 서구의 지배를 극복하려는 동양의 사회 속에서 이런 이원론적 역설을 극복할 싹, 단초가 놓여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한다. 박사님은 먼저 우파니샤드의 ‘여여[如如]’ 사상에 주목한다.

이런 여여 사상은 범아[凡我 ]일치 사상에서 나오는 것으로 모든 분별을 부정하는 이론이다. 박사님은 스와미시바난다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아는 것과 알려진 것은 하나다. 신과 나는 앎 속에 하나다. 시바와 브라만은 본질적으로 하나다. 고양이와 쥐의 영혼은 하나이다. 해와 달의 본질은 하나다. 오래된 형식 속에 하나의 동질적인 본질만 있을 뿐이다. 이 본질은 절대적이며 사멸되지 않는다. 이 본질이 아트만, 브라만, 무한한 것이다.”

박사님에 의하면 이런 여여 사상은 유럽의 이원론적 사유와 대조되는 것이며 후일 불교의 근본사상이 되었다고 한다. 흔히 불교에서 돌에도 부처가 있다고 하는데, 여여 사상이란 무차별 사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사님은 또한 도가의 무위 사상에도 관심 가진다. 도가에 따르면 도의 인식은 이분법적인 언어의 수단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도의 이식은 이분법적 사유를 좌망[坐忘]을 통해 극복할 때 가능하다. 그리고 도의 내용은 비이분적인 무위의 성격을 가졌다.”(137쪽)

좌망이란 곧 <장자, 대종사> 편에 나오는 심재좌망[心齋坐忘]을 말한다. 그것은 곧 “자기의 신체나 손발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눈이나 귀의 움직임을 멈추고, 형체가 있는 육체를 떠나 마음의 지각을 버리며 모든 차별을 넘어서 대도에 동화하는 것“을 뜻한다.

 

6)

역설과 이원론적 사유를 극복하려는 박사님의 고투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박사님은 결국 동양사상에서 역설을 극복하는 궁극적인 길을 발견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아쉬움을 느낀다. 헤겔과 같은 변증법적 사유도 역설과 이분법적 사유를 극복하는 한 길이 되지 않을까 보는데, 박사님은 이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박사님은 우리 후학에게 중요한 문제의식을 던져주었다. 서양의 제국주의적 지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서양의 이분법적 사유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긴박하고 절실한 요구라는 사실을 박사님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다. 박사님의 문제 제기에 따라 철학하는 후학들도 이런 역설과 이원론적 사유를 극복하고 제국주의적 지배를 끝장내는 길에 나서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플라톤의 <국가> 강해 ㊶ [이정호 교수와 함께하는 플라톤의 『국가』]

플라톤의 <국가> 강해

 

<알림>

2018년 8월 사단법인 정암학당의 상설 강좌로 개설했다가 코로나 때문에 2020년 3월 40강을 끝으로 중단되었던 ‘이정호 교수와 함께 하는 플라톤의 <국가> 강해’를 2023년 2월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다만, 코로나의 위협이 여전히 상존해 있어 직접 강의는 피하고 이곳 웹진에 강의록을 매달 2회 게재하는 방식으로만 강좌가 진행됩니다. 본 강좌는 지금까지 40강을 진행하는 동안 플라톤의 <국가> 전체 10권 중 3권도 다 읽지 못할 정도로, <국가> 텍스트를 한 줄 한 줄 자세하게 읽어가며 아주 장기간 진행되는 일종의 <국가> 정독을 위한 주해서 성격의 강좌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강좌에 참여하는 것도 좋지만 독서 과정 중 안내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만 중간 중간 따로 참고해도 좋을 것입니다.

 

  1. 본론 1 : 정의의 수립- 이상국가의 건설(제2권 – 제4권, 357a-445e)
  2. 터파기와 준비 : 문제제기, 방법, 국가의 기원(357a-374a)
  3. 정의로운 국가와 정의로운 개인(375a-445e)
  4. 정의로운 나라의 수립(375a-434d)

1-1 수호자의 성향(375a-376c)

1-2 수호자의 교육(376c-412b)

1-2-1 시가 교육(376e-403c)

1-2-2 체육 교육(403c-412b)

 

[403d-404e]

* 소크라테스는 시가 교육에 이어 신체단련 교육 즉 체육γυμναστικῇ에 관해 논의를 시작하면서 체육이 목적으로 하는 몸σῶμα의 좋은 상태가 기본적으로 영혼의 탁월함ἀρετῇ에 기초해있음을 밝힌다. 즉 몸이 자신의 탁월함을 통해 영혼을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좋은βέλτιστον 영혼이 자신의 탁월함을 통해 몸을 가능한 한 좋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소크라테스는 생각(마음,διάνοια,dianoia)을 충분히 보살피고 몸과 관련된 일들을 세세하게 살피는 일은 그것(dianoia)에 맡기고 여기서는 체육의 개요만 간략히 제시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403d) 우선 소크라테스는 수호자를 위한 체육 교육에서 지켜야 하는 몇 가지 사항을 아래와 같이 제시한다. 즉 술에 취하는 일은 삼가야 하고(403e) 음식과 관련해서도 한결 정교한κομψός 훈련이 요구된다. 그렇다고 오직 체력만을 위해 잠만 자고 짜인 식단대로만 먹고 지내는 운동선수처럼 되라는 것이 아니다. 되레 그들은 식단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심각한 중병에 걸리기 쉽다. 수호자들은 전쟁이라는 가장 큰 시합의 선수들이므로 늘 개κύων들처럼 깨어 있어야 하고 최대한 예리하게 보고 들어야 하며(404a) 원정 중에 물과 음식들이 자주 바뀌고 기후가 급격히 변화하더라도 건강이 쉽게 나빠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 최선의 체육은 시가와 자매ἀδελφή간이다. 즉 단순하면서도ἁπλός 맞춤한ἐπιεικής 특히 전쟁과 관련된 체육이어야 한다. 그런 것들은 호메로스로부터도 배울 수 있다. 영웅들이 원정 중에 잔치를 하는 경우에 생선, 삶은 고기 말고 오로지 구운 고기만 나온다.(404b) 그릇을 가지고 다니기보다는 불만 사용하는 편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을 잘 간수할 사람 양념 들 그런 모든 것을 멀리해야 한다. 쉬라쿠사의 식탁과 시켈리아의 다채로운 요리, 코린토스의 아가씨들과 친하게 지내서도 안 되며 아티카의 과자들도 멀리해야 한다.(404d) 그런 식생활과 생활방식 전체는 온갖 화음과 장단이 있는 음악과 노래에 비교된다. 다채로움ποικιλία은 방종ἀκολασία과 질병을 낳은 반면, 시가의 단순함ἁπλότης은 영혼 안에 절제σωφροσύνη를 낳고, 신체단련 즉 체육의 단순함은 몸 안에 건강ὑγίεια을 낳는다.(40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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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가 교육이 영혼 즉 정신 교육과 관련 되어 있다면 체육γυμναστικῇ은 신체 즉 몸의 단련과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몸이 좋아지는 것은 영혼의 탁월함에 기초해 있다. 영혼의 분별력, 즉 제대로 된 생각dianoia을 갖고 있는 한, 몸을 좋게 만드는 일은 언제든 가능하지만, 그 역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도 체육 교육의 목적은 신체에 대한 영혼의 지배력이 영혼에 대한 신체의 영향력을 능히 압도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영혼의 교육과 관련한 시가 교육이 자세하게 다루어진 만큼 체육 교육은 개요만이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곳 개요에서도 시가 교육의 요체인 단순함과 절제, 조화가 신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기초로 일관되게 제시되고 있고 반대로 그에 상반하는 다채로움과 방종, 부조화는 몸을 병들게 만드는 근본 원인임이 강조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도 시가 교육과 체육은 원리상 자매간이다.

* 오늘날 씨름 선수들이 그러하듯이 당시에도 레슬링 시합을 전문으로 하는 운동선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운동선수의 훈련 방식과 수호자의 훈련 방식은 전혀 다르다. 이곳에서도 잠만 자는 운동선수와 늘 깨어 있는 수호자가 대비되고 있고 쉬라쿠사의 식단과 코린토스의 아가씨, 아테네의 과자 또한 원정 중의 영웅들에게 체화된 단순 식단과 절제력에 대비되고 있다.

* 다채로움의 원어 ποικιλία은 일차적으로 자수에서 온갖 색깔로 화려하게 수놓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여기서 그것은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가짓수의 요리를 가리키고 반대로 단순함ἁπλότης은 검박한 소식을 가리키지만 단순함에는 질적인 조화의 의미도 있다. 플라톤에게 조화를 갖춘 여럿은 단순함과 통한다.

 

[405a- 406c]

* 그런 연후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은 기본적인 사항이 지켜지지 않아 나라에 방종과 질병이 만연할 경우 ‘법정 연설술’δικανική과 의술ἰατρικὴ이 떠받들어진다고 밝힌다. 그에 따르면 하층민들과 수공예가들뿐만 아니라 자유인마저 최고의 의사들과 재판관δικαστής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나라의 교육이 잘못되고 부끄럽게 되었다는 증거이다.(405a) 남들을 주인δεσπότης이자 판정관κριτής으로 삼아 남들에게서 가져온 것을 정의로운 것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것은 추한αἰσχρός 것이자 무식함ἀπαιδευσία의 큰 증거인 것이다. 그에 따르면 누군가가 피고나 원고로서 일생의 대부분을 법정에서 허비할 뿐만 아니라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모르는 탓에 바로 그 일이 자랑스럽다고 믿는 것보다 부끄러운 것은 없다.(405b) 왜냐하면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은 불의를 저지르고도 벌을 받지 않을 정도로 불의를 저지르는 데 능란하고, 온갖 방향으로 몸을 돌려 빠져나가고 몸을 구부려 온갖 탈출구를 통해 달아나는 데 능숙하고 그것도 사소하고 전혀 가치 없는 것들을 위해서 그런 짓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졸고 있는νυστάζοντος 재판관이 전혀 필요 없도록 자신의 삶을 갖추는 것이 얼마나 더 아름답고 좋은 일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405c)

*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의술이 필요한 이유는 상처나 어떤 계절적인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이지 게으름ἀργία과 생활방식δίαιτα 때문에 생긴 이른바 똑똑한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예’Ἀσκληπιάδης들이 이름 붙인 복부팽만증이니 점막염증Ἀσκληπιὸς같은 것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405d) 그에 따르면, 실제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시대에는 그런 염증 정도의 병들은 병으로 여겨지지도 않아(405e) 하물며 트로이에서 부상당한 에우뤼퓔로스에게 염증을 일으키는 음식 같은 것을 먹여도 비난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체육교사였던 헤로디코스가 자신이 병약해지자 체육을 의술과 섞어 만사 제쳐놓고 오직 자기 병 수발에 전념하여 자신은 물론 다른 많은 사람까지 진 빠지게 하면서(406a) 노년에까지 그저 목숨만을 부지한 이래 어처구니없이 그런 ‘질병 간호술’παιδαγωγικῇ τῶν νοσημάτων까지 오늘날 의술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406b) 아스클레피오스가 이런 종류의 의술을 후손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은 그런 의술에 대해 모르거나 경험이 없어서가 아니라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각자에게 해야 할 일이 하나씩 할당되어 있음에도 평생을 그저 병 치료에만 매달리는 한가로움σχολ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406c-408b]

* 이어서 소크라테스는 우습게도 우리는 각자 해야 할 일이 하나씩 할당되어 있다는 사실을 장인들의 경우에는 간파해 내면서도 부유하고 행복하다고 평가받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한다.(406c) 예를 들어 어떤 목수가 자기가 병에 걸렸을 경우 그는 의술의 처방을 받아 병에서 벗어나는 것은 좋다고 생각하지만, 장기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섭생δίαιτα만 하며 병치레하라고 처방한다면, 그는 그렇게 질병에나 신경 쓰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소홀히 하며 사는 것은 득이 되지 않는다고 당장 말하고(406d) 그런 처방을 하는 의사와 작별하고 평소의 생활방식대로 살아가다 건강해지면 자신의 것을 하면서 살 것이고, 육신을 지탱하기에 무리가 되면, 삶을 마침으로써 성가신 일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말한다.(406e)

* 그러나 반면에 부자ὁ πλούσιος는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즉 어쩔 수 없이 못하게 되면 살 수 없는 일 그런 일은 없지만 포퀼리데스Φωκυλίδες의 말 대로 부자는 덕ἀρετὴ을 익혀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407a) 그런데 한편 신체단련γυμναστικῆ을 넘어서는 ‘몸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심’ἡ περιττὴ ἐπιμέλεια τοῦ σώματος은 거의 모든 일에 대한 최대의 장애물이 된다고 그는 말한다.(407b) 특히 가장 큰 문제는 그러한 몸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심은 배움μάθησις이나 숙고ἐννόησις 등과 관련한 훈련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증세마저 철학 때문이라고 탓을 하게 만들어 이런 종류의 덕(탁월함)을 닦는 일에 장애가 된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몸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늘 아프다는 생각을 하게하고, 몸과 관련해서 한시도 근심걱정을 멈추지 못하게 만들어, 장인들이 기술에 전념하는 데도 걸림돌이 되지만 부자가 덕을 익히는 일에도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407c)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 역시 이 점을 알고서 건강한 몸과 건강한 생활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특정 부위에 국한된 어떤 질병을 가진 경우 이 사람들을 위해 의술을 세상에 알려 그들에게서 질병을 몰아내고는 나랏일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조치했지만, 그들과 달리 몸속이 속속들이 병이 든 사람에 대해서는 치료는 고사하고 섭생법에 매달려 ‘길고도 나쁜 삶을’μακρὸν καὶ κακὸν βίον 살면서 자신들과 유사한 또 다른 자손들을 낳는 일도 없도록 조치했다는 것이다.(407d) 정해진 일과를 지키며 살 수 없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나라에도 득이 되지 않는 사람이므로 ‘치료를 해서는 안 된다’μὴ δεῖν θεραπεύειν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데이만토스는 소크라테스가 아스클레피오스를 정치가πολιτικός로 말씀하신다고 말하고 소크라테스는 그에 수긍하면서(407e) 아스클레피오스의 자식들 또한 트로이에서 그들이 전쟁에 능했을 뿐만이 아니라 앞서 말한 방식으로 의술을 사용하여 판다로스의 화살에 부상당한 메넬라오스를 구해주었음을 전해준다. 즉 그들은 생활방식이 단정한κοσμίος 그런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합당한 치료를 하고 설사 다소 회복에 방해가 되는 음료를 마시더라도 그의 건강이 그것을 이겨내리라 믿고 크게 개의치 않았으며(408a) 반면 체질이 병약하고 무절제한ἀκόλαστος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들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하물며 그들이 미다스 보다 부자라 할지라도 그들을 치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408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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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컨대 몸을 돌보는 체육은 영혼을 돌보는 시가 교육과 마찬가지로 공히 단순함과 절제를 토대로 한다. 플라톤은 이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러한 단순함과 절제라는 기본적인 사항이 갖추어지지 않았을 경우의 폐해를 예시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때 플라톤은 그 단적인 예로 들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니라 당대 아테네에서 크게 발달했던 법정 연설술과 의술이다. 한 마디로 법정 연설술과 의술의 발달은 바람직한 시가교육과 체육교육의 기본 원리, 즉 단순함과 절제가 갖추어지지 못했거나 결여되었기 때문에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당대 아테네 현실에 대한 플라톤의 적나라한 비판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즉 법정 연설술이 발달했다는 것은 건강한 영혼으로 자신이 주인이 되어 옳고 그름을 판별해내야 함에도 자신의 영혼이 병들어 사사건건 분쟁을 일으켜 남들을 재판관으로 삼아 어떻게 하면 벌을 받지 않으면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할 것인가에만 정신이 팔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의술의 발달 역시 당대 많은 아테네인들이 무절제하고 게으른 생활이 몸에 배어 스스로 절제하고 돌보는 능력이 떨어져 사소한 몸의 불편함까지 의술에 의존하다 보니 별의별 의술이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일반적인 의미에서 의술의 발달이 문제가 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이겨낼 수 없는 예기치 않은 다양한 형태의 중병이나 부상에 시달릴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의술이 발달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플라톤이 여기서 비난하는 것은 그런 종류의 의술의 발달이 아니다. 플라톤이 여기서 비판하는 의술이란, 절제를 갖춘 사람이라면 능히 자신의 건강체로 스스로 이겨낼 수 있음에도 사소한 몸의 불편함까지 의술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늘어나면서 발달하게 된 그러한 종류의 의술을 말한다. 실제로 아스클레오피스 시절에는 이런 류의 불편함은 질병으로 여겨지지도 않았고 그에 따라 의술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테네 말기에 들어 그러한 풍토가 만연하다 보니 사람들이 질병에 대한 극복 능력이 점점 떨어져 조그마한 병에도 지레 걱정이 앞서고 몸에 대한 비정상적인 관심이 크게 늘어나 그저 자기 몸을 추스르는 데만 신경을 쓰게 되었고 그에 따라 온갖 종류의 섭생법들이 의술의 하나로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급기야는 헤로디코스가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회복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몸에 집착해 자신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부지하려고 만사 제쳐놓고 오직 자기 병 수발에 매달리는 일종의 연명술 즉 ‘질병 간호술’까지 의술의 이름으로 크게 발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술의 처방 역시 경비가 필요한 만큼 이러한 풍토는 부자일수록 더 큰 관심사가 되어 그만큼 덕을 쌓는데 소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고된 생산 노동에서 비켜서 있을 정도로 부를 갖추거나 지위를 가진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시간적 여유를 공동체를 위한 공력과 덕을 쌓는데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당대 크게 발달한 비정상적인 몸에 대한 관심은 부자들로 하여금 조그마한 몸의 불편함도 참지 못하게 만들어 철학을 공부하면서 생길 수 있는 머리 아픈 일조차 몸의 불편함으로 여기고 그 탓을 철학으로 돌려 덕을 쌓는 일을 더욱 게을리하게 되었다고 플라톤은 개탄한다.

* 소위 단순 연명 기술로서 의술이 크게 발달하는 것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오늘날 국가 간 또는 계층 간 의료 서비스의 분배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의미 있는 반성적 과제를 던져 준다. 사실 생명권은 개인이 누려야 할 인권 관련 기본권이라는 인식 때문에 근대 개인주의 사상이 확립된 이후 상당한 기간 이른바 사회 복지 차원에서 의료 서비스의 분배 영역에서 최소한의 공정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추세는 영국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등장 이후 공공 의료 서비스 체계의 후퇴를 가져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생명권이라는 기본권의 영역에서조차 시장주의의 미명아래 의료 서비스의 불공정한 분배가 나날이 심화하는 추세이다. 게다가 오늘날 더욱 심화한 국가 간 또는 계층 간 빈부의 격차는 의료 서비스의 분배와 관련하여 더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부유한 국가나 계층은 이른바 질병 간호술의 발달과 그에 따른 단순 연명의 욕구마저 채울 수 있지만 가난한 국가나 계층은 그러한 질병 간호술은 고사하고 일상적인 질병들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의료 서비스조차 기대하기 힘들다. 간단한 치료를 통해 충분히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사람들조차 목숨을 잃거나 불구가 되고 마는 일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허다하게 발생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도 오늘날 신자유주의 발달과 융성은 인류사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 플라톤이 체육교육을 이야기하면서 이처럼 법정 연설술과 의술을 끌어들이는 것은 다소 뜬금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곳 논의 역시 그러한 비교를 통해 몸을 돌보는 일과 영혼을 돌보는 일이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바람직한 체육교육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제시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시 말해 그 논의의 본질을 음미해보면 결국은 체육이건 의술이건 몸을 돌보는 것 일체는 궁극적으로 영혼을 돌보는 일과 결코 떨어져 있을 수 없고 떨어져 있어도 안 된다는 일관된 신념이 밑에 깔려 있다.

* 그러나 그 논의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는 의술의 성격과 목적 등에 관한 플라톤의 관념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술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가 너무도 당연시하고 있는 생명 자체의 존엄성과 불가침해성 그리고 그것을 위한 치료와 처방을 요구할 수 있는 개인의 기본적인 권리가 전혀 고려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단적으로 아스클레오피스를 통해 표명한 다음의 명제 즉 “몸속이 속속들이 병이 든 사람에 대해서는 치료는 고사하고 섭생법에 매달려 ‘길고도 나쁜 삶을’ 살게 해서는 안 되며, 정해진 일과를 지키며 살 수 없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나라에도 득이 되지 않는 사람이므로 ‘치료를 해서는 안 된다’는 말에 잘 나타나 있다. 플라톤 역시 어떤 병에 걸린 어떤 목수가 만약 의사로부터 이제 생업은 접고 앞으로 그저 생명만 보전하는 섭생법을 처방받는다면 그 목수는 그것은 거부하고 평소의 생활방식대로 살아가다 건강해지면 자기의 일을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성가신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요컨대 의술은 어떤 종류의 질병이건 그가 하던 일을 정상적으로 할 수 있는 상태로 회복하는 일을 목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며 단순히 목숨만 연명하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요컨대 플라톤에게 연명 치료는 의술이 수행해야 할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다. 죽을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를 받지 말고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당연히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은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역할에 따른 시민적 삶 즉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사회적 일익을 담당할 때만 사람으로서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즉 시민적 삶이 아닌 삶은 이미 삶이 아니다. 회복 불능의 병에 걸려 시민으로서 아무런 자기 역할을 못하고 그저 목숨만 부지 하는 사람은 더 이상 치료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플라톤이 노후에 생업을 접고 최소한의 건강을 보전하며 유유자적하게 사는 삶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도 그 유유자적한 생활이 단순히 몸만을 돌보는 삶이 아니라 영혼을 돌보는 삶이어야 한다. 케팔로스 노인처럼 그저 부에 의존해 자신의 개인적 복락만 추구하는 삶은 결코 바람직한 삶이 아니다. 요컨대 생명의 존엄성이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보존을 통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며 스스로 시민적 삶을 담보할 수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지 그럴 능력이나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의 경우까지 그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따라 의술 또한 오직 회복을 위한 의술이어야 하고 의술의 발달 역시 그러한 의술의 발달이어야 한다.

* 그러나 위와 같은 플라톤의 관점은 생명권이 채 확립되지 않았던 당대의 의식 수준(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인과 장애인을 유기하는 관습이 오랫동안 용인되었다. 테아이테토스 160e 참고)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생명과 관련한 개인들의 자기결정권을 크게 훼손하는 것이다. 아무리 마땅히 지켜야 할 바람직한 당위가 있더라도 그 당위를 위해 누구도 타인에게 죽음을 강요할 수는 없다. 특히 근대 이후 개인의 생명이, 개인이 누려야 할 불가침의 자연법적인 권리로 확립된 오늘날 개인주의적 관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오늘날 사형제 폐지론자들은 설령 죽을죄를 지었어도 죽음을 강요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주장한다. 플라톤 철학이 아무리 격변하는 전란의 시대에 공동체의 보존과 관련하여 기능들의 내적 유기성과 능력에 입각한 분업주의의 관점에 크게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일지라도 그의 주장은 지나치게 과격하고 자의적이며 강압적이다.

* 플라톤 그 자신의 주장과도 부딪친다. 그의 생각대로 사회 또는 개인을 구성하는 내적 부분들이 상호 유기체와도 같은 의존 관계를 형성한다면, 유기체인 생명체가 항상 건강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듯이 사회나 개인 모두 언제든 질병 상태를 맞이할 수 있다. 그리고 유기체는 또 그것까지 감안하여 그것을 치유 극복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다. 건강 상태가 아닌 질병과 같은 문제 상태를 치유하거나 극복하는 기능도 유기체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화나 장애의 문제는 유기체로서 개인에게 현존하는 결핍이고 그에 따라 그 실재하는 결핍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려는 것 또한 유기체로서 개인이 갖는 당연한 욕구이듯이, 사회 또한 상호 의존적 유기체로서 그러한 사회적 결핍들을 현존하는 결핍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정책적 수단을 강구하는 것이 마땅한 책무이다. 그런 점에서 노인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문제와 관련하여 그들이 인간적·사회적 삶을 누릴 수 있는 방안을 찾아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당위를 내세워 생명의 자기 결정권까지 제도적으로 강제하는 플라톤의 방식은 그 자신의 유기체적 기능론의 입장과도 배치되는 것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 다만 사회적 약자들이 당면하는 위와 같은 문제 상황이 아니라 생명체로서 연명 이외에 어떤 것도 욕구하지 않거나 욕구조차 할 수 없는 개인들에 대한 단순 연명을 위한 치료, 특히 그러한 치료를 욕구하는 부유층을 대상으로 크게 발달한 연명 치료술에 대한 플라톤의 비판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일정 부분 논쟁적 시사를 던진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식물인간, 안락사의 문제는 물론 노령화 사회를 맞이하여 심각한 수준의 노인 의료비의 증가와 부양의 한계 나아가 연명치료와 존엄사의 문제 등 의료윤리와 관련한 사회문제에 직면해있다. 전통적인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그 문제 해결의 기본 방향은 제법 분명해 보이기는 하나 오늘날 대체적인 추세는 오히려 안락사와 존엄사를 인정하는 쪽으로 논의의 중심축이 옮겨 가고 있다. 그만큼 시대적 현실 여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의 인정 여부를 결정하는 근거와 관련하여 근대 이후의 관점과 플라톤의 주장과는 결정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다. 플라톤은 개인들의 의사를 넘어서 단순 연명이 갖는 사회적 삶의 무의미성을 근거로 연명치료 제한의 공적인 제도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생명가치의 존엄성과 개인주의가 확립된 오늘날에는 안락사나 의사 조력 자살 자체를 금지하고 있거나 설사 인정하더라도 그것의 결정은 철저히 개인의 자발적인 선택에 맡겨져 있다.

* 그러나 그러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에도 일정 조건 아래에서 연명치료에 대한 개인들의 자발적인 거부 행위가 나날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추세이고 나아가 그러한 개인의 선택을 바람직한 행위로까지 받아들이는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그것이 오히려 인권 친화적이라는 주장까지도 함께 제시되고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사람다운 삶을 규정하는 기준에 경제적 조건이 가히 절대적인 수준에까지 이른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삶의 현실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개인과 가족 관계 등과 관련한 사적인 차원이나 의료 제도와 관련한 문제에서조차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생명권과 의료 서비스 배분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데 무시할 수 없는 고려의 요소가 된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개인들을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근원적 비참성이 개인의 생명권이 구조적으로 도외시되거나 생명가치의 절대성이 무력화되는 가히 전쟁터나 다름없는 수준에까지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게다가 2020년 코로나-19사태가 보여주듯이 이미 현대사회는 생명권과 의료 서비스 분배의 문제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심각한 팬데믹 사회로 진입했기에 더욱 그러하다.

* 그렇다면 플라톤의 생명과 의료윤리에 대한 관점은 오늘날에도 그와 관련한 논쟁점을 구성하는 하나의 유의미한 논거가 될 수 있다. 플라톤의 관점은 온건하게는 양극화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안고 있는 생명권의 보장과 의료 서비스의 배분과 관련하여 균형 있는 공적 해결책의 합리적 근거를 제공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 극단적으로는 개인의 생명권의 문제에 대한 결정과 관련하여 개인들의 사회경제적 부담과 공적 안녕의 명분하에 국가 권력의 자의적인 개입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악용될 위험도 함께 안고 있다. 인권 차원에서 존엄사가 거론되는 비교적 사회복지가 잘 구비된 나라들과 질병과 가난으로 사회 복지 제도가 크게 미비한 나라들이 전혀 다른 이유로 안락사나 의사 조력 자살에 대해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찬성 비율이 높은 것도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안락사에 대한 찬성 비율이 근래 들어 80%를 넘어섰는데 그 찬성 근거들의 하나로 존엄사 및 인권에 대한 증대된 관심도 자리하고 있지만, 치료 및 부양과 관련한 가족들의 고통과 부담 또한 함께 자리하고 있다는 점도 인권과 생존 문제가 갖는 심각한 양면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아무려나 플라톤이 오늘날 살아 있다면 최소한 연명치료의 제한은 물론 그에 따른 안락사와 존엄사의 공적 제도화와 관련해서 쌍수를 들고 찬성할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 체육교육과 시가교육이 건강하고 바람직한 인간상을 구현하기 위한 형성의 방책이라면 앞서 거론된 의술과 재판술은 몸과 혼의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들을 제거하여 늘 몸과 혼의 건강을 유지 회복하기 위한 일종의 배제 방책이다. 가장 이상적으로는 형성의 방책이 완전할 정도로 성공하여 몸과 혼의 질병이 발생하지 않아 의술과 재판술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현실에서 몸과 혼의 질병은 늘 상존하고 그에 따라 의술과 재판술은 한 사회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기술들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앞서 보았듯이 몸과 혼의 질병이라고 해서 그 일체가 의술과 재판술의 대상은 아니다. 플라톤은 질병 가운데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기 역할을 수행할 수준으로 회복 가능한 질병만을 의술과 재판술의 대상으로 제한한다. 부유층들이 생명만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의 의술을 동원하고 그러한 필요에 따라 그것을 위한 온갖 종류의 치료 기술이 개발되는 것은 의술의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의술의 왜곡 또는 퇴보이다. 재판술 또한 마찬가지이다. 재판술을 통해 정의가 관철되어야 함에도 법망을 피해 가는 영리한 법기술이 되레 크게 발달하고 그 수혜 또한 부에 비례하는 것은 재판술의 발전이 아니라 악용이자 타락이다. 플라톤의 이러한 비판은 덕과 영혼이 아닌 감각적 욕망과 이기심에 매몰되어 있는 당대 아테네 현실을 고발한 것이지만, 이미 교육 분야에서조차 빈부의 양극화가 고착화된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일례로 유독 의사와 법률가가 소수의 최상위권 우등생들이 가장 선호하고 또 그들만이 진입 가능한 최고 최상의 직업군으로 꼽히고 있다는 점은 의술과 재판술의 수요 증대와 발전이라는 표피적 현상 이면에 의료 및 사법 서비스 영역에서의 특권화는 물론 우리 사회의 혼과 몸의 질병 수준 또한 그만큼 악화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좌라 할 것이다. (체육교육 2, 다음 강에 계속)


 

나의 철학 일지(1)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나의 철학 일지(1)

1)

나는 최근 정신현상학을 전체적으로 소개하는 책을 냈다. EBS에서 주간하는 시리즈, 고전 해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정신현상학을 소개하는 책이다. 청년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자면, 전체를 꿰뚫는 줄기를 잡아서 내용을 단순화하여야 했다. 그 때문에 고민에 빠졌다. 대체 정신현상학이라는 책이 어떤 잭인가?

정신현상학은 정체를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는 절대정신이 자기를 드러내는 역사적 과정이라고 알려져 있다. 헤겔 자신이 정신현상학의 서문에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절대정신이 무엇인가? 대체 이 문제에 부딪히면 종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더구나 정신현상학의 전개과정은 헤겔 자신의 세계사의 과정과 그렇게 쉽게 상응하지 않으니, 과연 정신현상학이 역사적 과정일까 하는 의문이 들게 된다.

혼란은 절망감을 낳는다. 대체 내가 머리가 나빠서 헤겔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아니면 헤겔이 미친 철학자인가? 이런 고민을 하면서 나는 점차, 대체 내가 왜 정신현상학을 놓지 못하고 대학원 시절인 198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무려 40년간이나 붙잡고 있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날 헤겔을 공부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철학자의 비난을 한몸에 뒤집어쓰는 것과 같다. 거슬러 올라가면 마르크스도 헤겔을 비난한다. 그는 스스로 변증법에 관해서는 헤겔을 계승했으나 이런 변증법을 헤겔의 관념론으로부터는 구출해야 한다고 믿었다. 현대에 이르면 헤겔은 이른바 동일성의 철학자로 비난된다. 그런 말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인 아도르노와 베르그송이나 들뢰즈와 같은 프랑스 철학자가 헤겔을 비판한다. 현대 분석철학에 이르면 헤겔은 언어의 마술에 사로잡힌 둔중한 철학자일 뿐이다.

나는 헤겔을 하면서 주변에 이런저런 철학을 하는 사람을 만나, 이런 비난을 듣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헤겔을 놓지 않았다. 물론 나는 40년간 헤겔만 공부한 것은 아니다. 나는 헤겔의 이해에서 절망감이 들 때마다, 헤겔을 내던지고, 다른 철학으로 빠져들었다. 내가 연구한 대표적인 철학자만 해도 마르크스, 프로이드와 라캉, 영화 철학 등 상당하다. 그런데 그때마다 다시 헤겔로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나는 남들이 누구나 인정하고 거의 비난 조 또는 한심하다는 투로 말하는 헤겔주의자인데, 대체 나를 헤겔로 끊임없이 되돌아가게 만든 그 힘이 대체 헤겔 그리고 정신현상학 어디에서 있단 말인가?

이런 고민을 밝히기 위해 나는 내가 헤겔을 왜 공부하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헤겔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 하는 일지를 작성해 보려 한다. 나의 철학의 일지가 되겠으나, 여기에 무슨 인생의 모험과 같은 인생샷은 없고 그저 머리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때로는 한심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러운 번민만 나열될 뿐이니 흥미는 없을 것이지만, 후일 헤겔을 공부하려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르니, 번잡한 얘기라도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2)

헤겔주의자로서 내가 탄생한 것은 1980년 봄이었다. 나는 당시 대학원에 처음 입학학 신입생이고 한참이나 어린 후배들과 더불어 대학원에서 철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 교정은 박정희 사후 전두환이 군부 권력을 틀어쥐고 국가 권력 장악을 위해 음모를 꾸밀 때였다. 그때 대학 교정에서는 전두환의 음모를 깨닫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막을 힘은 없었다. 학생들이나 재야 지식인들은 전두환의 음모를 막기 위해 거리로 나섰으나, 그것은 전두환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그해 4월이 되자 학생들의 저항 움직임이 서서히 기지개를 켜면서 저항의 시위는 가속화되었다.

대학원에 들어갈 때, 나는 현상학이라는 철학적 방법론을 공부하려 했다. 나는 대학 시절 학부 졸업을 후셀의 현상학의 이념이라는 책을 읽고 썼으며,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 현상학을 가르치시던 윤명노 교수님을 인격적으로 존경하였기에 그분의 밑에서 현상학을 공부하려 하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시 대학원에서는 윤명노 교수님을 대신하여, 한전숙 교수님이 현상학 강좌를 개설했기에 한전숙 교수의 문하생이 되었다.

현상학이 매력적이었던 것은 진리를 직접 인식할 수 있다는 본질 직관이라는 개념에 있었다. 현상학은 이런 본질 직관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언어 의미론으로 들어가서 의미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가르쳤는데, 당시 내가 원했던 모든 것이 딱 거기에 들어 있었다.

내가 이처럼 현상학적 방법론을 연구하기로 결심한 것은 대학 시절부터 실존철학에 깊이 빠져들어 갔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니체의 책을 발췌하여 만든 ‘초인의 철리’라는 책)을 읽었고 대학 시절에는 조가경 선생의 실존철학을 옆에 끼고(당시 나의 영문과 친구는 셰익스피어의 원전을 옆구리에 끼고 있어서 나도 흉내 내려 했던 것 같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아름다운 말에 심취했다. 내 마음속에서 저런 언어가 막힌 것 없이 술술 자유롭게 흘러나오기를 기대했다.

또 나는 문학자로서 사르트르를 흠모했으며 사르트르처럼 살아보려고 밤 새벽까지 술을 먹고, 오전 늦게까지 자기를(당연히 모든 아침 수업은 땡땡이다) 반복했다. 유감스럽게도 사르트르처럼 호텔에서 살 수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나는 사르트르가 ‘현대’라는 비평지에 발표한 철학도 아니고 문학도 아닌 중간 상태의 글을 좋아했다. 그가 쓴 ‘문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은 나의 성서이었고 ‘존재와 무’라는 그 두꺼운, 엉터리 번역 책(을유문화사에서 나온 책이다)을 이해하려고 고투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 끝에 역시 실존철학의 기본적 방법론은 현상학이니 현상학을 이해하기만 하면 모든 게임은 끝이라는 생각으로 현상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3)

그런데 그해 4월 교정이 시위로 흔들리면서 우리 철학과 대학원생들은 점심 때면 교정을 산책하면서 다양한 대자보를 읽었고 저녁이면 술자리를 가지면서 시국과 철학에 대해 이런저런 논쟁을 거듭했다. 그런 가운데 이미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저항의 방법론으로 받아들인 후배들과 괴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를 비롯한 선배 층은 후배 층의 너무 세속적인 말투에 충격을 받았고 반면 그 후배 층으로부터 낭만주의자라는 비난을 뒤집어썼다.

그때 어떤 논쟁이 있었는지를 지금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후배 층이 나에게 낭만주의라는 비난을 했다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남겼다. 왜냐하면, 나 역시 그 즈음해서 낭만주의의 한계를 점차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배 층의 비판은 이런 나의 자각이 마음의 표면으로 솟아오르게 한 역할을 했고, 지금도 나는 나를 그렇게 비판한 후배 층에게 속으로 무척이나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나는 70년대 초반 학번이다. 우리 학번은 내가 대학 4학년 시절 75년 김상진 열사의 의거를 기리는 저항의 봉화를 올렸으나 당시 박정희 정권에 의해 무참하게 유린되고 말았다. 나의 대부분 친구들음 감옥에 끌려갔고 나는 다행히 그런 군홧발을 피해 살아남았다. 그리고 1년 뒤 나는 졸업했고 군에 들어갔다. 그 일년 동안 나의 마음은 비참함으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독재 정권에 대한 무기력감에서 나는 한편으로 절망감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그때 나는 술주정뱅이로 전락했다. 거의 매일 아침에서 저녁까지 나는 술집에 앉아 있었다. 수업은 전폐했고 생활을 위해 대학 4년 내내 끊을 수 없었던 아르바이트는 심지어 술을 먹고 가기도 했으니, 매번 쫓겨나다시피 했고, 다행히 다시 또 얻었다.

나는 지금도 대학 졸업식이 생각난다. 나는 부모님은 졸업식에 참석하고 싶었던 것 같으나 나는 매정하게 졸업식 날짜와 장소를 알려드리지 않았다. 그때 졸업식에 박정희가 참석한다고 해서 보이코트 운동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침부터 술에 취해 졸업식장에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졸업식에 참석한 학생들은 행복했다. 꽃다발을 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당시 대학 졸업생의 취업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옆에는 많은 가족과 애인을 데리고 있었다. 나의 세상에 대한 절망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그날 벤치에 앉아서 졸업식을 하는 학생을 보면서 나는 내가 졌다고 생각했고 나는 무엇을 더하기도 싫었고 이 세상에 남아 있기도 싫었다. 나는 76년 대학을 졸업하자 군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79년 5월 다시 세상에 나왔다.

그때까지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의 논리는 사르트르나 실존철학의 참여 개념에서 나왔다. 그 관성에서 현상학을 공부하기로 했지만, 참여 개념에 기초한 낭만주의적 저항은 실패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참여에 기초한 저항 개념과 다른 논리를 깨달을 수는 없었다. 그때 형은 낭만주의자요 하는 비판은 얼어붙은 내 마음의 빙판을 깨트린 것이다.


사상과 사람: 정지아 작가, 아버지의 해방일지(2)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사상과 사람: 정지아 작가, 아버지의 해방일지(2)

4)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면서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태도도 변화하게 된다. 작가는 원망감을 지니면서 냉소했던 아버지에게서 어릴 때 친밀했던 아버지를 되찾게 된다. 이런 태도의 변화에서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곧 작은아버지와 아버지의 관계이다.

작품 속에 너무 많은 에피소드와 인물이 등장하여 잘못하면 지리멸렬할 수도 있었던 소설을 구해준 것은 바로 아버지와 딸의 관계와 아버지의 작은 아버지의 관계가 서로 뒤얽히면서 전개되는 이야기 구조일 것이다.

작은아버지의 에피소드는 이야기 초반, 중반, 결말에 흩어져 등장하면서 상승하는 곡선을 그리고 있다. 처음 등장하면서 작은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아버지를 원망하는 고주망태였다. 작품 중반에 작가는 작은아버지의 사정을 이해하게 된다. 어린 작은아버지는 면 당 위원장인 아버지를 토벌군에게 자랑하면서 오히려 할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 그런 죄책감이 오히려 아버지에 대한 원망감으로 변한 것이다.

작품의 끝에 작은아버지가 다시 등장하여 아버지의 유골을 껴안고 울면서 마침내 둘은 화해하게 된다. 그런데 작은아버지와의 관계의 발전은 딸인 작가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매개하고 있다. 이 매개가 소설의 2/3 부분에서 출현하면서 소설적 갈등의 전환점을 이룬다. 그 매개는 곧 작가의 가출사건이다.

작가 역시 아버지에 대해 원망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원망감은 아버지 때문에 사회적으로 진출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서 비롯되는 데, 작가는 그 때문에 공부를 폐기하고 소설을 읽으면서 나날을 보낸다. 아버지가 계곡 너럭바위에서 작가가 읽던 소설책을 낫으로 베어버리자 작가는 그 길로 집을 나선다. 그리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길을 끝없이 걸어간다.

이때 작은아버지가 어떻게 안 것인지(아마 어머니의 부탁이 있었지 않았을까?) 자전거를 타고 작가를 따라와 돌아갈 것을 종용하지만 작가는 말을 듣지 않는다. 이때 작은아버지는 작가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질이 암만 가도 끝나들 안 해야”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가족 또는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길은 끝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그것이 사람으로서 삶의 뿌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아버지도 이미 그런 탈출을 모색했지만 그래서 끝내 버리지 못했고, 아버지도 다른 빨치산과 달리 구박받을 줄 알면서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작가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 가족이라는 뿌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이런 뿌리를 운명애처럼 인수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작은아버지의 이 말을 듣고 다시 되돌아선다. 작가는 작은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작은아버지의 등에서 쉰내를 맡는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이 쉰내 같은 게 혈육인가 싶었다. 나를 데리러 오가느라 밴 그 쉰내가 정겨운 듯도 역겨운 듯도 했다.”

정겹기도 하고 역겹기도 한 것이 곧 사람으로서 삶이다. 바로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 작가는 자신의 결혼식이 취소된 사건을 다루는데, 남편 될 사람이 부모의 강압으로 가족이냐 여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는 말을 듣고 작가는 자신이 결단을 내려 결혼을 취소함으로써 담담하게 모든 운명을 인수한다.

5)

작가가 집을 나서려다 돌아선 것이 이 소설에서 결정적인 정점이다. 이 정점 이후 작가는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친밀한 어린 시절의 모습을 되살리게 된다. 작가는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어머니를 기다리던 모습을 회상한다. 어느 날 밤에는 멀리 보이는 불빛을 가리키면서 아버지는 그곳이 응암동 외삼촌 집이라며 거기 외삼촌이 보인다고 한다.

작가는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아버지가 말한 외삼촌을 찾는다. 작가는 아버지의 말을 믿고 멀리 아른거리는 불빛 속에서 응암동 외삼촌의 모습을 찾으려는 딸의 모습을 그려낸다. 딸이 아버지 등 위에서 까치발을 하고 엉덩이를 들어 고개를 내밀어 “어디, 어디”하고 찾는 모습이 무척이나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그 응암동이란 곧 아버지의 말을 통해 작가에게 전해진 유토피아일 것이다.

그 유토피아는 이제 사상적인 유토피아는 아닐 것이다. 그 유토피아는 사람으로서 삶이 살아가는 구례와 같은 유토피아가 아닐까? 이 유토피아의 구체적인 모습은 상세하게 그려지지 않았으나 작가는 두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이 유토피아의 대강을 그려내고 있다.

하나의 에피소드는 곧 클레멘타인의 노래이다. 딸을 홀로 남겨두고 금을 캐러 갔던 아버지는 금을 가지고 돌아와 보니 딸은 이제 찾을 수 없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회한을 담은 이 노래는 작품 속에 반어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 의미는 곧 자기를 버려 두고 금을 캐러 떠난 아버지에 대한 딸의 원망[怨望]과 금은 없더라도 아버지가 자기 옆에 남아 있어 주기를 바라는 딸의 원망[願望]이다.

이 노래는 아버지를 통해 새로운 세대인 노랑머리를 한 소녀에게 전해진다. 작가는 아버지를 잃은 소녀에게 이제 자신의 아버지를 대신하여 아버지가 되어 자신의 아버지가 약속한대로 미용사 시험에 합격하면 술을 사주겠다고 약속한다.

작가가 꿈꾸는 유토피아, 구례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런 아버지가 필요하다. 딸을 결코 홀로 버려 두지 않는 아버지 말이다. 그런 규범은 거꾸로 자식에게도 요구된다. 자식 역시 아버지에게 무조건적인 충직함이 요구된다.

이런 충직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윤학수의 에피소드이다. 윤학수는 지역사회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아버지가 겪은 빨치산의 투쟁사를 연구한다. 그런 학수가 어느 날 아버지의 뺨에 손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보고 흥분하여 동네 경로당으로 쫓아간다. 그러면서 작가의 표현대로 불학무식한 방식으로 아버지에게 손댄 사람을 찾아 혼내려 한다. 아버지는 이 사건 이후 처음으로 학수를 집에 불러 술잔을 내려준다. 학수는 이제 자식으로서 인정받은 것이다.

6)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아버지의 위장 자수에 대한 작가의 재해석이다. 작가는 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산에 올랐다가 다시 내려오면서 새벽 불빛이 켜진 동네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한다. 위장 자수를 하기 위해 산을 내려 갔을 때 “세상은 환한 불빛으로 아버지를 맞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 환한 불빛은 곧 작가가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보았던 응암동의 아른거리는 불빛일 것이다. 이 불빛은 곧 작가가 꿈꾸는 유토피아인 구례를 의미한다. 거기에는 혈육의 쉰내가 정겹기도 하고 역겹기도 하게 피어나는 곳일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 즉 사람으로서 모습을 발견하면서 마침내 자신의 삶을 그동안 무겁게 뒤덮고 있던 원망감을 벗어나게 된다. 작가는 자신을 괴롭힌 것은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야 한다는” 작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 한다.

“쉰 넘어서야 깨닫고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있지 않다는 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 것을.”

7)

많은 독자가 작가의 작품에서 감동하는 것은 작가가 제시하는 사상으로서 삶에 대립하는 사람으로서 삶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사상과 사람은 대립하는 것일까? 사상이 사람을 떠나서 있을 수 있을까? 그것은 게릴라가 민중에서 고립되어서는 한 시라도 존재할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통해 잘 알 수 있지 않을까?

거꾸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사상을 떠난다면, 그런 삶이란 어쩌면 고여서 서서히 썩어가는 연못과 같은 곳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딸을 혼자 두지 않는 아버지나, 불학무식하게 충직한 아들의 이면을 작가는 보아야 하지 않을까?

사람과 사상의 통일은 불가능한 것일까? 적어도 작가가 우리에게 그런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훌륭한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상과 사람: 정지아 작가, 아버지의 해방일지(1)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사상과 사람: 정지아 작가, 아버지의 해방일지(1)

1)

제목에 나온 ‘해방일지’라는 말의 의미를 내가 착각한 것 같다. 작가가 빨치산의 딸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기에, ‘해방일지’란 해방 시기에 작가의 아버지가 겪은 경험을 적은 것으로 이해했다. 작품을 읽다 보니, ‘해방일지’란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작가가 겪은 경험을 적은 글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여기서 해방이란 아버지가 삶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해방이란 사슬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일 텐데, 아버지의 삶을 묶어 놓았던 사슬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작가는 작품의 전반부에서 빨치산이었던 작가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상당히 냉소적인 태도로 그려내고 있다.

작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혁명가로서의 진지함을 평생 잃지 않는다. 작가의 아버지는 평생 이념을 지키며, 전봇대처럼 꼿꼿하게 살다가 끝내 전봇대에 부딪혀 뇌진탕으로 돌아가신다. 작가의 어머니는 사회주의를 “가난한 자가 인간 대접을 받는 사회” 정도로 이해하면서도 성스러운 신념으로 간직하는 데 그것은 풋사랑에 지나지 않는 첫사랑을 평생 기억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작가의 냉소적 시각은 두 빨치산의 혁명적 사상이 지닌 허점을 놓치지 않는다. 작가의 아버지는 몰락한 양반의 후손이며 사회주의 사상을 몸으로 겪기보다는 문자를 통해 배운 의식만 앞선 사회주의자다. 이런 아버지는 농사를 짓지만, 노동은 건성으로 하며 평생 정치적인 관심을 잃지 않는다. 어머니 역시 국졸이지만 그 당시로 본다면 지적인 인텔리에 속한다. 부모님의 대화는 필수적인 것을 빼놓으면 대부분 정세 판단이나 과거 빨치산 체험에 대한 기억일 뿐이다.

이런 아버지에게 그래도 장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유물론적 솔직함에 있다. 작가의 아버지는 자기의 딸인 작가의 외모를 평가하면서 하의 상 정도로 평가한다. 작가 자신은 아버지 평가 덕분에 평생 외모에 관한 관심을 버리게 되어 마음이 홀가분해 졌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 아버지가 “사람 살이에 아주 중요할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놓친 것 같다”라고 평가한다.

이런 빨치산은 자기들만의 세계를 가지고 고립되어 있다. 이 고립된 모습은 빨치산을 아버지로 둔, 장례식장 황 사장과 그 아버지의 동지였던 어머니의 포옹을 작가가 그려낸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저 느닷없는 친밀감과 포용이 퍼스트 클래스에 탄 돈 많은 자들끼리의 유대감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작가의 이런 서술은 너무 신랄해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이다.

2)

작가는 빨치산의 딸로서 사회로부터 무거운 압박감을 느끼면서 이 때문에 부모를 원망한다. 작가는 가능한 한 부모와 사회, 모두에서 떨어져 살고자 하면서 소설가가 된다.

작가는 평생 사회주의자가 아닌 아버지를 알지 못했으나 아버지의 장례식을 겪으면서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은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흩어져 있다가, 장례식을 거치면서 하나로 모여들어 마침내 뚜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아버지의 그러한 모습을 그려내고자 한다.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은 마치 볼레로의 음악처럼 조금씩 더 크게 나타난다. 처음엔 아버지의 지게에 꽂혀 있는 “빨갛게 익은 맹감과 연자주빛 들국화”의 형태로 나타났다. 아버지는 동네 자청 머슴으로서 온갖 일을 도맡아 처리하면서 영자의 암내를 치료하게 하여 결혼할 수 있게 해주며,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경희가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위기를 구해주기도 한다.

마침내 소설의 후반부에 이르면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은 아버지가 살려준 순경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버지는 빨치산 시절 보급 투쟁에서 다락에 숨은 순경을 순경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살려주겠다고 하면서 목숨을 구해주었다. 후일 순경은 빨치산에 가담하겠다고 아버지를 찾아왔으나, 아버지는 오히려 쫓아 보내고 만다. 후일 다시 만난 순경이 그렇게 쫓아 보낸 이유를 묻자 아버지는 이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질 게 뻔한 전쟁이었소. 우리야 기왕지사 나선 몸이제만 그 짝은 사상도 읎고 신념도 읎는디 멀라고 뻔히 질 싸움에 끼울 것이요.”

작가는 이 대목에 이르러 비로소 아버지의 새로운 모습이 눈에 뚜렷하게 들어왔다고 하면서, 처음으로 딸로서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러 본다.

3)

아버지의 옛날 모습은 곧 사회주의 사상의 혁명 전사로서 모습이었다. 이제 새로 나타난 아버지의 모습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사람으로서 모습이다. 작가는 두 아버지의 모습을 사상과 사람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한다.

여기서 작가는 사상과 사람을 대립시키면서 사회주의자가 사상에 사로잡혀 사람을 놓친 것이 아닌가 비판한다. 작가는 거꾸로 사람이야 말로 뿌리에 해당하며, 사상은 그런 뿌리에서 나온 가지에 불과하고 이런 가지는 아무리 잘려 나가도 뿌리는 영원히 남아 있다고 한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런 뿌리를 작가는 구례라는 장소를 통해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구례는 아버지의 고향이었으며 빨치산으로서 전장이었고 또 체포 이후 남들과 달리 돌아온 고향이다. 이곳은 아버지와 같은 빨치산도 살고 그런 빨치산을 토벌한 우익 박한우 선생과 같은 사람도 살고 있다. 월남전에 참전해 다리를 잃고 아버지 같은 사람에 대해 원망감을 지닌 목발 짚은 노인도 산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 세대의 후손들도 아버지의 전쟁에 유산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 때문에 육사에 입학하지 못한 장손자 길수 오빠, 빨치산을 아버지로 둔 황 사장, 어머니의 레포였던 여 동지의 딸인 떡집 언니, 아버지를 존경하는 민주노동당 당원인 박동식, 아버지의 전쟁을 역사로 기록하려는 지역사회연구소 연구원 윤학수, 그리고 아버지의 형제로서 아버지에 원망감을 지닌 작은아버지 등이 모여 산다. 이 속에는 아버지가 자신의 첫 부인의 남동생이나 여동생과 만나는 곳이기도 하고, 어머니 첫 남편의 동생이 아내와 더불어 찾아오기도 하는 곳이다.

그런 구례는 마치 인연의 끈이 촘촘하게 엮여 있으면서 사람으로서 인간의 삶이 전개되는 장소이다.

“구례라는 곳은 어쩌면 저런 기이하고 오랜 인견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엮인 작은 감옥일지도 모른다.”

이 속에서 “사람이니 실수를 하고 … 사람이니 용서도 한다”


[강좌안내] 한철연 회원 출강 안내 <빼앗긴 법치주의 - 정치철학적 고찰>

2023년 겨울방학을 맞아 한철연 회원들의 특강 소식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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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김성우: 빼앗긴 자유, 도둑맞은 공정
2/03 한길석: 참을 수 없는 ‘법치‘의 얄팍함
2/10 한상원: 법/권리의 주체는 누구인가? – 법치국가 담론이 놓치고 있는 것들
2/17 김종곤: 법률적 권력과 국가권력
2/24 전주희: 노동법은 어떻게 노동권을 허물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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