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신년회 특강 영상: 최종덕 – “면역학의 철학과 코비드-19 이후” (2021년 1월 13일)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신년회 특강

 

주제: 면역학의 철학과 코비드-19 이후

발표: 최종덕(한철연 회원, 상지대 교양학부 명예교수, 독립학자)

일시: 2021년 1월 13일 오후 7시~

장소: ZOOM 온라인 회의

 

2021년도 발표입니다. 당시 사정으로 게재하지 못했다가, 뒤늦게 게재합니다.

여전히 지속되는 2022년 코로나 시국에 시의적절한 내용으로 구성된 강연입니다.

 

출처: 한철연 유튜브 채널 https://youtu.be/E0cmXdcS-H4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3) – 블라우 박사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3) – 블라우 박사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의 핵심 키워드는 ‘방랑’이다. 작품 속에는 이 방랑의 문제와 연관된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쿠니츠키, 블라우 박사, 날뛰는 여인 등이다.

왜 집을 떠나는가? 앞의 글에서 소개한 쿠니츠키라는 인물은 방랑자가 영원히 방랑하게 된 동기를 설명해 준다.

쿠니츠키가 여행 중 들렀던 어느 섬에서 아내와 아이가 사라진다. 그는 아내의 흔적을 찾아 뒤지던 중 아내의 핸드백에서 카이로스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그다음부터 그에게 세계는 카이로스를 가리키는 편집증적 신호이다. 그는 이 카이로스를 찾아 떠난다. 아니 거꾸로 카이로스가 그를 끝없는 방랑의 한 가운데로 불러냈다.

이번에는 블라우 박사라는 두 번째 인물을 보자.

2)

올카 토카르추크의 이 소설에는 생체를 고정하는 기술에 대한 호기심이 이상하리 만큼 집요하게 등장한다. 예를 들어 밀납인형이라든가 미이라, 포르말린 용기에 담긴 동물이나 인간의 신체 부분, 분더카세(Wunderkasse: 기이한 물건의 수집해 놓은 방), 미니아처, 신체를 순간적으로 영원히 얼리는 플라시티네이션(Placitination: 특수 고형화 기술), 사진술 등이다.

이런 호기심은 처음엔 독자들에게 마치 컬트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심지어 그 끔찍한 아름다움 때문에 어떤 섹슈얼한 느낌조차도 발생한다. 아래 인용문을 읽어보라.

“마치 피 묻은 커다란 입술처럼 간이 위를 에워싸고 있다. 자궁의 위쪽으로 연결된 콩팥과 수뇨관도 보인다. 그것들은 맨드레이크의 뿌리를 연상시킨다. 자궁은 눈으로 감상하기에 즐거운 근육이다.”

그러나 작가에게 이런 기술들은 단순한 호기심은 아니다. 그것은 그에게 철학적 의미가 있다. 그것은 카이로스, 방랑이라는 개념과 연관된다. 방랑은 모든 고정된 것, 법칙적인 것, 기계적인 것을 파괴하면서 카이로스를 즉 흐름이고 우연적 만남이며 개별적인 것을 찾아 떠나게 만드는 힘이다.

이런 방랑의 힘에 대립하는 것이 생체를 고정하려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모든 개별적이고 우연하고 흘러가는 것을 다시 영원히 얼어붙게 만든다.

3)

작가는 마침내 움직이는 것을 영원히 고정하고자 하는 인간의 광기를 형상화한다. 블라우 박사가 그런 인물이다. 작가는 2개의 단편에 나누어서 블라우 박사를 서술한다.

블라우 박사는 플라시티네이션 전문 학자이다. 박사는 플라시티네이션 분야에서 지금 최고의 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의대를 나와 의학 박물관에 들어가 유리병에 보관된 신체 장기를 연구한다. 그의 관심은 의학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 장기를 어떤 방식으로 보존했는가에 있다.

그의 목표는 인간의 육체를 완전하게 보관하는 것이다. 고대의 미이라는 인간의 표면만 남기는 것이니 오히려 온전한 육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현대의 플라시티네이션 기술의 발전은 그의 희망을 실현하게 해 주었다.

그의 취미는 사진을 찍는 것이다. 사진 역시 순간을 영원히 보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 관계 한 여성의 질을 사진으로 찍어 보존한다. 그의 희망은 실제의 질을 수집해 유리병에 보존하는 것이다.

“신체의 모든 부위는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모든 인간의 몸은 보존해야 마땅하다. … 만약 블라우박사에게 세상을 창조하도록 했다면 우리에게 별 필요도 없는 영혼은 필멸로 만들고 아마도 육체에 불멸을 허용했을 것이다.”

단편 1은 블라우 박사가 플라시티네이션에 흥미를 느끼게 된 과정을 서술한다. 단편 2에서는 블라우 박사가 몰 교수 부인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으로 찾아가면서 전개된다. 몰 교수는 이 분야에서 블라우 박사를 능가하는 인물이다. 몰 교수의 기법은 같은 동료 학자들에게 비밀이었다.

4)

몰 교수는 사고로 죽었지만 블라우 박사는 그가 남긴 보존 기법을 통해 무언가 배우고자 한다. 몰 교수의 집은 바닷가에 있고 그를 맞이한 부인은 바다에서 수영하다 물에 젖은 몸으로 그를 맞이한다.

하지만 블라우 박사는 그녀의 몸에 무관심하다. 그의 관심은 온통 몰 교수의 집에 있다. 그는 몰 교수의 서재와 실험실을 방문하면서 그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몰래 기록한다.

블라우박사는 몰 교수가 남긴 고양이 플라시티네이션 작품을 보게 된다. 이 고양이는 마치 살아 있을 때와 똑 같이 부드러운 털을 갖고 가볍고 따뜻하다. 마치 살아 있는 고양이가 그렇게 하듯 건드리면 온몸을 웅크리고 펼치고 한다.

몰 교수 부인은 그를 성적으로 유혹하지만, 그는 그런 부인의 유혹이 오히려 불편하다. 부인이 그에게 바다에서 수영하자고 하자 그는 달갑지 않지만, 하는 수 없이 함께 나체로 수영한다. 이야기 마지막에 저녁에 식사 후 와인을 마시며 부인이 그의 손을 잡아 끌자 그는 이를 거부하고 부인의 집을 나간다.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대체 무엇 때문에 살아서 꿈틀대는 늙고 뜨끈뜨끈한 몸뚱이에 자신의 신체 일부를 쑤셔 넣어 가며 따분한 짓을 견뎌야 한단 말인가?”

5)

작가가 창조한 블라우 박사라는 인물은 흥미롭다. 이 인물은 살바도르 달리가 만든 서랍이 달린 비너스라는 조각품을 연상시킨다. 또는 오늘날 자신의 신체를 완벽한 칼날처럼 가다듬는 선남선녀와도 닮았다.

그는 무엇 때문에 살아 있는 육체와의 접촉이 아니라 죽어 있는 신체의 영원한 보존에 관심 가지게 된 것일까? 에리히 프롬이라면 이런 인물을 저장형 성격이라고 하면서 자본가의 성격으로 파악했을 법하다.

작가는 주인공 블라우 박사가 몰 교수 부인의 집으로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떠올렸던 생각을 소개한다. 혹 이 생각과 블라우 박사의 성격이 연관된 것이 아닐까?

“그의 손은 여성의 몸을 통해 수천 번이나 확인한 끝에 그 안에서 어떤 균열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 어쩌면 인체의 내부는 전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할지도 모른다. …. 세상에서 가장 영리한 여행자도 자신의 짐 가방을 이처럼 [우리 몸 안의 장기처럼] 완벽하게 정리하여 꾸릴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블라우 박사는 비행기 안에서 잠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신체에 균열이 없다는 사실이 블라우 박사에게 편안함과 행복감일 주었다는 것이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 (2) – 구멍 뚫린 사내 쿠니츠키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을 읽고 (2) – 구멍 뚫린 사내 쿠니츠키

 

이병창(한철연 회원)

 

1)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 속에는 여러 인물이 나온다. 지하철을 통해 끊임없이 이동하는 노숙자, 인간의 육체를 영원히 보존하려는 집념을 지닌 권력자, 오래전의 첫사랑을 안락사 해 주러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인 등.

그 가운데 쿠니츠키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방랑자가 방랑을 떠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 인물은 소설의 앞 부분에 연속된 두 편의 단편에 걸쳐 등장하고 한참을 뛰어넘어 소설 끝날 무렵 한 편의 단편에 다시 등장한다. 앞의 두 단편의 제목은 <쿠니츠키-물1, 2>이고 마지막 단편의 제목은 <쿠니츠키-대지>이다.

물과 대지라는 대비가 흥미롭다. 물의 이미지는 이 작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2)

첫 번째 단편에서 쿠니츠키는 아내와 세 살 아이와 함께 크로티아를 가로질러 비스섬으로 여행을 갔다. 거기서 아내와 아이가 함께 사라진다. 그는 사흘을 작은 섬에 머무르며 아내와 아이를 찾지만 찾지 못한다.

아내와 아이가 실종된 곳이 섬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섬이란 물, 바다에 갇혀 위태롭게 떠 있는 존재가 아닌가? 그런 섬이라면 언제라도 실종이 일어날 수 있다. 그곳은 세상에 구멍이 뚫리는 약한 곳이다.

두 번째 단편은 아내와 아이를 찾는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는 그 흔적을 찾는다. 그는 아내가 남긴 소지품을 뒤진다. 그리고 핸드백 속에 우연히 남아 있는 ‘카이로스’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이 글자는 그에게 갑작스러운 빛을 비추어준다.

이 글자를 발견한 이후 그는 아내의 소지품을 뒤지면서 마구 내 던진 물품들이 어떤 형상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때 그는 “역겨운 공포의 냄새”를 맡는다.

알 수 없는 존재가 그에게 보내는 신호, 그 신호를 통해 드러나는 시꺼먼 허무의 세계, 세계는 이제 무너졌다. 그 앞에서 그는 공포에 떤다. 이 공포가 역겨운 냄새로 표현된 것이 독특하다.

3)

세 번째 단편에서 밝혀지는 일이지만 그는 편집증 환자로 환상을 보고 있다. 아내와 아이를 잃고 돌아온 다음 어느 날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아파트 벽은 흥건하게 물이 젖는다.

“그는 발목까지 차오르는 물속을 걸어서 자동차로 다가갔다. 차를 타고 좀 더 높은 지역에 있는 이웃 마을로 도망쳐 보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알고 보니 그곳 역시 물의 덫에 갇혀 버렸다.”(504쪽)

물이란 이미지가 이렇게 섬뜩하게 그려진 소설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물이 자주 자살자를 끌어당기는 이유를 알겠다.

그의 환상 속에서 아내와 아이는 돌아와 그에게 그 섬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에 대해 감춘다. 처음에 이게 사실인 것처럼 독자는 속는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이것이 그의 환상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4)

환상 속에서, 그는 아내에게 실종이 일어난 다음의 일에 대해 집요하게 캐묻지만, 아내는 그의 말을 무시한다. 그럴수록 그의 의심은 더 강해진다. 그는 아이를 정신분석학자에게 데려가 무의식을 탐구하려 한다. 하지만 그는 정신분석학자의 음모(?) 때문에 실패한다.

그는 도서관에 들러 사전을 뒤지고 인터넷에 물어 아내의 소지품에서 발견한 ‘카이로스’라는 말의 의미를 탐구한다. 여기에 무슨 단서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카이로스, 이 말은 그에게 만물에는 보이지 않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가 탐구할수록 그의 만물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무언가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보내는 신호가 된다.

“표시 너머에 다른 표시를 가리키는 표시가 있고 다른 표시에서 야기된 표시들이 있었다. 표시의 음모, 표시의 네트워크, 그의 등 뒤에서 표시들끼리 서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무관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게 다 중요했다. 전부 끊임없이 이어지는 커다란 퍼즐이었다.”(515쪽)

5)

아내를 미행했다가 들켜서 아내와 함께 돌아와 집에 들어오는 순간, 현관을 열면서 갑자기 그의 환상이 중단된다. 그의 집에는 아내도, 아이도 없다. 오직 아내가 남겨놓은 옷가지, 아이의 장난감만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그는 그 흔적 사이를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그는 “스스로 벽을 통과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방랑을 떠난다. 알 수 없는 존재가 보내는 그 의미, 그때를 찾아서 말이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9시쯤 그가 진하게 커피를 탄다. 그리고 나서 욕실에 있던 면도용품 일부와 옷장 안에 있던 셔츠 몇 벌, 그리고 바지를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 …. 그는 체코와의 국경을 향해 화살처럼 똑바로 꼿꼿하게 남쪽으로 향했다.”(539쪽)

그저 간단한 여행을 떠나는 듯 그는 떠났다. 체코를 지나야 비스섬으로 갈 수 있다. 세계가 구멍 뚫린, 그 섬 말이다.

6)

여기서 우리는 갑자기 혼란에 빠진다. 마지막 단편 끝에서 그가 비스섬으로 떠난다는 사건은 어쩌면 처음 단편에서 그가 처음 아내와 아이와 함께 비스섬에 도착했다는 사실과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가 아내와 아이를 심문하는 것이 환상이듯이 비스섬에서 아내와 아이가 실종되었다는 사실도 환상이 아닐까?

갑자기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에서 환상인지 모호해진다. 이런 모호성 때문에 그에게 역겨운 냄새가 등장한 것이 아닐까? 하이데거라면 이를 불안이라 했을 것이고 사르트르라면 이를 구토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는 역겨운 냄새를 맡는다.

이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이데거나 사르트르에서 새로운 세계는 진리의 세계이다. 하지만 쿠니츠키 앞에 역겨운 공포의 냄새로 떠오른 세계는 그저 알 수 없는 세계다. 이전의 세계와 새로운 세계 가운데 어느 세계가 현실이고 어느 세계가 환상인지도 알 수 없다.

불안과 구토에서 사람은 구원의 세계로 들어간다. 하지만 역겨운 냄새가 풍기는 모호한 세계에서 그는 방향이 없이 다만 방랑할 뿐이다. 그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노숙자 되고, 세계를 여행하는 여행자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설이 끝나는 곳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이제부터 소설은 방랑하는 인물, 물과 같은 존재와 그런 방랑을 고정하려 드는 존재, 대지와 같은 존재를 탐구하는 서사시가 될 것이다.

이 소설에서 끔찍한 이미지는 흘러가는 존재를 고정하려는 자의 집요한 노력이다. 그는 이를 인체를 투명하게 보존하려는 자의 노력 속에서 발견한다. 다음엔 이 이야기를 들어보자.


 

올가 토카르추크의 『방랑자들』 (1) – 카이로스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을 읽고 (1) – 카이로스

 

이병창(한철연 회원)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을 읽었다. 이 소설은 2019년에 노벨상을 받은 작품이다. 그는 폴란드 태생의 작가라는 것밖에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하지만, 이 소설은 내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다.

소설은 낭만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슐레겔이 그의 철학 단편에서 이상으로 삼았던 문학 형식인 ‘보편 문학’의 원리에 따른다. 이 소설은 수많은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지어 한 인물을 다루는 이야기조차 소설의 여러 부분에 흩어져 있다. 이 소설에 포함된 단편은 그 형식도 갖가지이니, 본래의 소설 즉 이야기도 있고 심리학적 연구나 철학적 단상도 있다. 전체적으로 하나의 중심이 보이지 않으니 슐레겔이 ‘중심이 무한한 소설’이라고 말한 것에 적합하다.

억지로 하나의 중심을 찾으라 하면 아마도 카이로스[kairos]라는 개념이 아닐까 한다. 카이로스는 그리스어로 ‘때’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흘러가는 시간이라는 개념과 다른 또 하나의 시간 개념이다. 예수가 “아직 내 때가 되지 아니 하였나이다”라고 말할 경우 또는 시인 릴케가 ‘가을의 시’에서 “주여 때가 왔습니다”라고 기도할 경우 사용되는 개념이다. 한자어로는 기회라고 번역될 수 있겠다.

이 ‘때’라는 개념은 그리스에서 신격화되었다. 소설의 마지막 쯤에 작가는 그리스 연구자인 한 교수를 등장시킨다. 그는 은퇴한 후 그리스 유적지를 오가는 유람선에서 그리스에 대해 강의하면서 이 카이로스라는 신을 소개한다. 교수는 실제 모델이 되는 이탈리아 토리노 박물관에 소장된 리시포스의 부조를 소개하면서 그 부조와 연관된 포세이디포스의 시를 소개한다. 그 시는 이렇다.

 

“모든 것을 길들이는 카이로스

왜 항상 발돋움을 하고 있는가?

쉼 없이 세상을 뛰어다니고 있으니까.

무엇 때문에 당신의 두 발에는 날개가 달렸는가?

바람과 함께 날아다니기 때문이지.

당신의 오른 손은 무엇 때문에 면도칼을 들었는가?

세상의 모든 날카로운 것보다 더 날카롭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 위한 표시지.

머리카락은 왜 눈을 가렸는가?

나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사람이 내 앞머리를 붙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지.

세상에, 당신의 뒷머리는 왜 하나도 없는가?

한번 지나치면 날개 달린 발로 빠르게 달아나 버리기 때문에

아무리 원해도 그 누구도 날 뒤에서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지.”

 

소설에서 교수는 이 시를 읊고 나서 마침내 그의 때를 얻었다. 그는 발작을 일으켜 죽음에 이르렀다.

이 시는 때, 기회라는 개념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라 하겠다. 눈앞에 보고도 놓친 수많은 기회, 이미 떠나가면 아무리 한탄해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 기회를 생각하면 이해될 것이다.

때라는 개념이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그 개념이 방랑자 개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위의 시에도 카이로스 신은 쉼 없이 세상을 돌아다닌다. 마찬가지로 이 카이로스를 만나기 위해서는 온 세상을 돌아다녀야 하지 않을까? 아마 잠들 수도 없을 것이다. 그가 잠든 사이에 신부가 왔다 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젊은 시절, 방황했던 적이 있다. 무언가를 만나기 위해 그리하여 때를 얻기 위해 잠들지 못하고 늘 거리를 서성거렸다. 지금은 이미 포기했고 병든 삶에 안주한다. 이런 나 앞에서 소설은 그만큼 정신적 충격이었다.

이 작품에서 카이로스가 등장하는 것은 이 작품 중에 세 군데 걸쳐 나누어져 등장한 한 쿠니츠키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서 이다. 이제 쿠니츠키 이야기를 해 보자.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④ [내게는 이름이 없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④

 

글: 행길이(한철연 회원)

 

죽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

 

김훈의 『강산무진』에는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무기력함이 끔찍할 정도로 냉정하게 조탁되어있다. 죽음의 두려움이 주는 고통은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인 경험 중 하나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죽음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인간은 기쁜 인생을 살기 위해 태어났다. 그런데 인간은 두려움 때문에 기쁜 인생을 향유하지 못한다.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두려움은 자기 삶의 최종적 파멸로서의 죽음이다.

에피쿠로스는 죽음이란 살아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작용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은 감각에 의존하는데, 죽으면 이러한 감각을 잃게 된다.” 즉 죽으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기쁘게 되지도 않고, 고통스러워하지도 않게 된다. 우리가 죽게 되면 죽음으로 인해 느껴지는 고통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죽음에 대한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고통이란 죽음을 경험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인데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음에 대한 고통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닥쳤을 때라도 우리는 이미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기에 죽음이 두려운지 조차도 느낄 수 없다. 그러니 죽음이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한순간도 죽음을 경험할 수 없으니 죽음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와 동요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유령과 같은 허상을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의 공포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다.

 

신에 대한 두려움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

 

죽음 다음가는 공포는 신에 대한 공포다. 모두 인간이 어쩔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불행해진 이유가 신이 불경한 자기 행동에 분노하여 징벌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제사장들에게 재물을 제공하면서 신의 전조를 읽어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하여 엄청난 비합리성이 판을 치는 불의한 사회가 되어버린다. 종교적 권고는 심지어 자기 자식을 신에게 공양하는 범죄를 신성한 의례로 여기게 하는 미혹을 유포시키기도 했다. 루크레티우스의 말처럼 “종교로 인해 우리가 이르게 되는 악의 심연(Tantum religio potuit suadere malorum)”은 인간의 삶을 고통에 휩싸이게 만든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신이 인간의 행위에 분노하거나 기뻐하는 등의 감정을 함부로 남발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신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한다.” 신은 불멸의 축복을 받은 존재다. 따라서 그의 불멸성과 축복에 어울리지 않는 속성들, 즉 걱정, 근심, 분노 등을 신에게 갖다 붙이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신은 인간과 같이 근심하거나 걱정에 휩싸이고 분노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자기에게 악한 자들은 신의 징벌을 통해 불행해지고, 자기에게 선한 자들은 신의 축복에 의해 행복해진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고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려는 인간이나 하는 것이지 지성적 존재인 신이 취하는 것일 수 없다. 따라서 신은 우리 인간이 무슨 짓을 하든지 아무런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며, 아무런 징벌도 상도 내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신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즐거움의 항구

 

나이를 먹을수록 활력과 정열은 예전 같지 않다. 의욕은 있으되 청년의 정력적 활동을 따라가기란 역부족이다. 주변에서는 활력을 갖고 젊게 살기 위한 노력을 주문하면서 젊은이들 못지않게 열심히 활동하는 노년들을 보여준다. 이른바 청년 시절의 삶을 노년에서도 반복하기를 권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청년 같이 사는 삶이 과연 행복한 노년의 삶이랄 수 있을까?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젊은 사람을 행복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노인을 행복하다고 해야 한다. 젊은이는 혈기왕성해서 운의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 끌려 다닌다. 하지만 노인은 항구에 정박하듯 제 나이에 닻을 내린다. 하여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경험을 즐거운 일이라 감사히 여기며 [그 경험을] 안전한 곳에 가져다 둔다.”

 

에피쿠로스가 보기에 청년보다는 노인이 더 행복할 수 있다. 청년은 언제나 자기 운수의 행로가 좋은 결과를 가져올만한 방향으로 가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행복을 판별한다. 하지만 노인은 좀처럼 운수의 향방에 따라 자기 인생의 복됨을 결정하지 않는다. 노인은 항구에 굳건히 정박한 배처럼 운수가 어떤 변덕을 부리든 상관하지 않고 굳건히 자신의 경험을 관조하면서 그 속에서 얻은 기쁨을 발견하는 즐거움에 행복감을 느낀다. 비록 새벽잠이 없어서 매번 외로운 아침을 맞이하지만 그로 인해 하루가 시작되는 신비로움을 고요히 응시할 수 있고, 두뇌 활동이 예전 같지 않아 빠른 독서는 하지 못해도 느릿한 독서는 구절마다 배인 의미를 음미할 수 있게 만든다. 젊은 시절 성급하게 놓쳐버린 경험의 다양성은 노년이 주는 완상의 기회 덕분에 새롭게 발견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자신에게 일어났던 좋은 일들을 잊고서 그는 오늘 이미 노인이 되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과거의 즐거움을 기억하는 사람은 젊음을 유지할 수 있지만 새로운 쾌락만 추구하려는 사람은 금세 늙는다는 말이다. 에피쿠로스에게 쾌락이란 대체로 완상과 관조의 경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을 청춘의 즐거움 속에서 살게끔 만든다. 고통의 제거란 생의 경험 속에 내재된 기쁨의 요소를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관조를 통해 자신이 겪은 경험 속에 내재한 좋은 일들을 간수하지 못하고 망각하게 되면 그는 고통의 심연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청년이어도 노년의 고통을 겪는다. 반면에 경험 속에 내재한 좋을 일을 고통의 순간 속에서도 관조할 줄 알면 노인이어도 청년을 살게 된다.

에피쿠로스에게 나이가 듦에도 젊게 사는 인생이란 청년의 삶을 모방하며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노인답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첫 걸음은 나이를 먹으면서 변화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경험을 완상하며 즐거움의 계기를 발견하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 나갈 때 젊은이의 그것과는 다른 삶의 활기를 얻게 될 것이다. 항구에 닻을 놓고 생의 즐거움을 완상하는 것. 이것이 청춘을 사는 노년의 방법이다.

 


 

연재를 마치며 [유운의 전개도 접기]

연재를 마치며

 

이유운

 

저는 지금껏, 이런 연재를 마치는 마지막 글로 ‘연재를 마치며’ 라는 제목을 다는 게 참 멋없고 촌스럽고 성의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마지막 글을 쓰게 되니까, 이 제목만큼 담담하고 모든 걸 말할 수 있는 제목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마지막 연재를 편지 형식으로 대신한다는 것도요. 뻔한 결말이 되어서 아쉽습니다만, 뻔한 게 아니라 구관이 명관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편지라는 건 정말 내밀한 형식의 글이죠. 편지가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필요합니다. 바로 유일의 독자. 물론 저도 카프카나 생로랑이 친구들, 연인들, 사랑과 주고받은 편지가 책으로 나왔을 때 환호했지만, 그 글들은 유일의 수신자가 아니라 제게 읽혔다는 점에서 이미 편지가 아니게 된 셈입니다. 편지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다른 글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제가 쓰는 편지도, 제가 수신자를 모르고 있으며 그 수신자가 유일이 아니라는 점에서 편지가 아니게 되는 셈이지요. 이런 구구절절한 변명을 모두 대면서도 편지로 마지막 인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 방법이 저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 간의 거리를 좁히고, 또 아주 친한 벗인 척 할 수 있는 가장 편리하고도 빠른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마지막 편지로는 이런 말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사랑시를 자주 씁니다. 제 「전개도 접기」라는 연재를 꾸준히 보아준 성실하고 다정한 독자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제 시가 대부분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숨겨진 비유 같은 건 아닙니다. 필름을 덮지 않은 새 휴대폰 화면에 덕지덕지 묻은 지문처럼 그대로 드러나 있으니까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데뷔하고 나서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사랑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니까 그런 것 같아요. 글쎄요, 그건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저는 엉망이 된 세계에서 자꾸 허물어지고 다시 자신을 세우는 인류가 좋습니다. 제가 그런 특성을 가진 종의 한 일원이라고 생각하면 퍽 즐거워집니다. 생물에는 종마다의 특성이 있지 않습니까? 인류의 종적 특성은 허물어지고 다시 서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저는 그 허물어지는 이유도, 세우는 힘도 모두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사랑을 선택한 인류, 전 그런 걸 좋아합니다. (물론 그런 인류 중 한 개체가 저에게 다가와 말을 거는 건 좀, 별개의 일입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정말정말 좋아요. 술을 마시면 저는 이런 이야기들을 자주 합니다. 얇고 흑심이 여기저기 묻은 더러운 손을 흔들며 담배를 피우는 오래 전의 사람을 기억하기도 하고, 저를 연필로만 덧그리는 사람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다른 결의 생각들이 모두 제 안에서 시작된다는 건, 논리적인 사고로는 아무래도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 논리 바깥에 있는(뛰어넘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뭉글뭉글한 것, 시각보단 촉각에 가까운 것, 아폴론보다는 디오니소스에 가까운 그 무언가를 사랑이라고 지칭합니다. 연애로 축소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어디까지 포괄할 수 있을지, 그런 것들을 상상하는 건 퍽 즐겁지 않습니까? 적어도 저는 그래서 시를 쓴답니다.

신기한 건, 전 아무에게도 이 질문을 되돌려 준 적은 없어요.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그 질문을 했을 때 사실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대답할까봐 두렵기도 했고, 그가 한 대답이 저를 실망시키게 되면, 제가 또 뭐라고 그에게 실망했다는 점 때문에 슬퍼질 것 같기도 했고,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궁금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사랑을 뭐라고 정의하는 게 대체 저랑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사랑과 다정이라는 건 아주 다른 결입니다. 그렇지요?) 아마 저와 같은 정의로 사랑을 공유하는 사람은 없을테고 바로 그런 점이 재미있는 건데요. 그래서 사실 전 이런 질문을 하는 게 치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답하는 저는 아주 많은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렇다고 그간 한 많은 인터뷰들을 싫어했다는 건 아닙니다. 치사하다는 건 못된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치사하다’는 어감도 귀엽다고 생각하거든요. 이건 다른 이야긴데, 저는 가끔 ‘내 맘도 몰라주고 정말 치사해.’ 라고 제게 누군가 써준 쪽지를 읽어봅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짝꿍을 같이 하지 않은 어떤 친구에게 받은 쪽지인데요, 옆에는 야무지게 악마도 그려뒀습니다. 왼손잡이였는지 옆으로 죄다 글씨가 번져 있어요. 이렇게 솔직하면서도 하나도 해롭지 않은 애정이 필요할 때 가끔 이 쪽지를 읽어봅니다. 귀엽지요. 사족이 길었습니다. 아무튼, 그래도 가끔, 물어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면, 내가 지금 사랑이 궁금한 게 맞나? 내가 누군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아닌가? 라는 의문이 들어요. 사랑과 저를 혼동한다는 건 슬픈 일이니까, 아무래도 질문하지 않는 편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저께 벗과 한철연에서 연재한 시 중에 가장 최근의 시, 「서울극장-인디아 송-」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사실 이것은 제가 퍽 공을 들이고 있는 『서울극장』 연작시 시리즈 중에 하나인데요, 서울극장은 제가 상경해서 처음으로 마음을 붙인 장소입니다. 사람이 별로 없는, 3시간이 넘는 영화를 보면 허리가 아픈, 단차가 높은 극장에서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을 멀리서 관찰하면 제가 겪고 있는 일들은 가짜가 되었거든요. 그 순간이 소중했어요. 그래서 누구는 영화 감독을 꿈꿀 때, 저는 ‘돈을 많이 벌어서 서울극장을 인수해야겠다’ 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가 적당한 돈을 모으기도 전에 문을 닫았네요. 애석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래서 서울극장에 관련된 시들을 많이 썼습니다. 팝콘 기름 때문에 영화를 보고 나면 손이 반질거리던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언제나 로맨스 영화만 고르던 사람은 어떤 결말을 원해서 자꾸 그런 영화들만 골랐을까, 사실 그 결말에 내가 없는 걸 원했기 때문에 쉼없이 그런 영화들을 골랐던 게 아닐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 길거리에 돌아다니던 술에 취한 늙은 남자들의 얼굴은 어디서 연원했을까, 서울극장이 허물어지고 나면 내가 자주 앉던 의자는 어디에서 소각될까, 이런 질문들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면 슬퍼지니까요, 오래 슬퍼하지 않기 위해서 시를 썼습니다. 시를 쓰고 나면 둥그렇게 헐어버린 마음이 남습니다. 슬픔은 잠시 없어지고요. 저를 슬픔이라는 감정에 한해서 소강 상태로 만들어주는 건, 서울극장 다음으로는 시를 쓰는 순간이 있겠네요.

최근에 자주 꾸는 꿈이 있습니다. 제가 시에서 만들어낸 생명들이 태어나 저를 공격하는 꿈입니다. 보통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시들은 저의 편에 서고, 제가 증오하는 마음으로 쓴 시들은 저를 죽이고 잡아먹으려 들어요. 그 시들이 서로 싸우고 피가 발목까지 고일 정도로 끔찍한 전쟁에서 저는 좀 못되게도, 그걸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은 실제로 아무것도 찢지 않으니까요. 그 꿈을 꾸고 나면 항상 생각합니다. 사랑은 정말 증오보다 강한 걸까? 대부분 사랑시들이 지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허물어진 마음을 세워서 다시 시를 쓰게 하는 건 아무튼 사랑의 일이지만…….

아무튼 제가 여기저기서 허물어지는 과정과 다시 세우는 일들을 시로 썼습니다. 이런 시들을 올리며 저는 꽤 행복했던 것 같은데요, 작가와 독자의 마음은 분리되어야 하니까요. 제가 행복했다는 사실이, 당신의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 거잖습니까? 그래도 즐거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습니다. 마지막 인사는 이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저는 다음 계절, 책이라는 물성을 가지고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당신의 얼굴을 모르지만, 당신은 나의 얼굴을 알게 될 겁니다. 저는 당신의 글을 모르지만, 당신은 제 목소리도 알게 될 겁니다. 저는 아주 멀리도 있고 바로 곁에도 있습니다. 참 멋진 일이지요. ■

 

지금까지 이유운 작가의 코너 [유운의 전개도 접기]를 애독해 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작가의 글들을 또 다른 곳에서 만나보길 고대합니다. 너무 멀리 있지는 말기로~   – 편집주간 –

 


지난 작가 소개 글: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③ [내게는 이름이 없다]

즐거움의 항구: 에피쿠로스의 『쾌락』 – ③

 

글: 행길이(한철연 회원)

 

고통의 제거

 

“우리는 본성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필연적인 육체적 육망들은 충족시키는 반면, 해로운 욕망들은 완강히 거부할 때 우리는 본성에 맞는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부합하는 삶이다. 이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태어나자마자 쾌락을 얻으면 만족하고 고통을 혐오한다. 이는 이성과는 무관하게 본성에 이끌려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는 쾌락주의의 공통적 전제에서 도출되는 입장이다. 고대의 쾌락주의에는 에피쿠로스 학파말고도 아리스티포스의 퀴레네 학파도 있었다. 퀴레네 학파가 육체적 쾌락의 무한한 증진을 추구한 것과 달리 에피쿠로스 학파는 육체적 쾌락 뿐만 아니라 정신적 쾌락도 추구하였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고통이 결핍에서 온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쾌락은 고통의 제거에서 비롯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고통스러운 것들의 제거가 쾌락 크기의 한계이다.” 즉 고통을 제거한 이후에는 더 큰 쾌락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육체적 쾌락을 무한히 증가시키기를 원한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한다. 에피쿠로스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흔히 우리는 육체적 쾌락이 무한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육체는 무한히 지속되지 않는다. 육체가 유한한데 쾌락이 무한할 리는 없다.”

허기라는 고통이 소박한 식사를 통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음식에 대한 욕망을 줄기차게 추구한다. 형태를 달리한 즐거움이 증가된 쾌락의 경험을 제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새로운 형태의 ‘쾌락’을 추구하다보면 새로운 고통에 직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고기의 맛’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쾌락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경우 우리는 성인병이라는 고통을 겪게 된다. 쾌감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무분별하게 추구하게 되면 “쾌락을 가져다주는 수단이 쾌락보다는 고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위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위가 무한한 용량을 가진다’라는 잘못된 의견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라는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을 잘 새겨야 하겠다.

 

소박한 쾌락주의

 

허기와 갈증과 추위와 더위에 시달릴 때 그것의 욕구를 채워주면서 더 이상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춥지도, 덥지도 않게 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만족스러운 쾌감을 느끼게 된다. 고통이 사라짐으로써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의 제거 그것이 곧 쾌락이다. 시시해보이지만 부정하기는 힘든 소박한 사실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 얻은 새로운 형태의 쾌락이 우리를 만족시킨다 해도, 그것을 위해 감수한 노력과 애타는 시간 등을 감안해 우리가 얻은 즐거움의 양을 계산해 본다면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사 그것이 나의 노력과 힘이 아니라 타인의 고통스러운 노동의 성과를 착취해 얻은 기쁨이라 해도, 그가 품고 있는 불만은 공동체적 삶의 즐거움을 반감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에피쿠로스적 관점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의 양이란 우리가 사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을 얻는 것에 국한된다. 진정으로 배고플 때 먹고, 정말로 목마를 때 마셔야만 한다. 그럴 경우에만 진정 쾌감을 얻을 수 있다. 자연적 필요가 아니라 인위적 충동에 의해 쾌락을 추구할 때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고통의 대가도 치러야 한다.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계속 술을 마시고 흥청거리는 일도 아니고, 욕구를 만족시키는 일도 아니며, 물고기를 마음껏 먹거나 풍성한 식탁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삶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선택과 기피의 이유를 스스로 발견하고 잘못된 생각을 몰아내면서 멀쩡한 정신으로 따져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자 가장 큰 선은 사려 깊게 판단하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육체의 자연적 욕구를 충족시킨 이후에는 더 나은 생계를 위해 필요한 수단을 확보하느라 노력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삶은 인위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삶이다. 그것은 삶의 균형을 상실한 사람들이나 할 만한 어리석은 짓이다. 에피쿠로스의 제자 메트로도로스가 말했듯이 “어떤 사람들은 일생 동안 생계 수단을 모은다.” 되도록 많은 재산을 모음으로써 우리가 배고픔, 목마름, 추위 등의 고통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갖고 있다 해도 우리가 육체를 지닌 인간인 이상 우리는 갈증, 허기, 추위 등의 고통에서 영구히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 죽음의 약을 마신 육체적 존재인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존재적 지위를 깨닫지 못하기에 우리는 더 많은 재산을 원한다. 하지만 일단 우리에게 신과 같은 풍요가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의 욕구는 자연적 필요를 채우는 데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자연적 필요를 채우는 데에는 그리 많은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 단지 소박한 몇몇의 것들만 있으면 된다. 이러한 사실을 강렬히 깨달은 사람이라면 욕망의 어리석은 타력에 제 몸과 정신을 맡기지 않고 자기 절제의 의식을 가지면서 살아갈 수 있다.

 

“사치스럽지 않고 단순한 음식에 길들여지는 것은 우리에게 완전한 건강을 주며, 우리가 생활하면서 꼭 필요한 것들에 주저하지 않게 해준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가 사치스러운 것들과 마주쳤을 때 우리를 강하게 만들며, 우리가 행운(tyche)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만들어준다.”

 

자연적 필요를 충족시켰을 때 얻는 쾌락에 만족하는 삶이 익숙해지면 사치스러운 것을 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마음의 동요가 없다면 그러한 행운을 과감히 무시하더라도 번민의 고통을 겪지 않는다. 오히려 홀가분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이러한 기쁨과 쾌락은 오직 인위적 욕구의 절제를 알고, 의연함으로 스스로를 제어하는 이만이 얻게 되는 보상이다.

고전문헌학자 앙드레 보나르는 한 고인의 말을 인용하며 에피쿠로스의 삶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밥 한 술 뜨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등짝을 눕히고 자는 것, 이것이 바로 에피쿠로스다. 그는 새벽이 되면 벌써 비단 친구들뿐만 아니라 제우스 신하고도 토론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것이 적잖은 사람들이 방탕의 화신이자 난봉꾼으로 몰아세운 이의 진면목이다.”


서울극장 ― 인디아 송(1975) / 어둠이 닿기 전에 [유운의 전개도 접기]

서울극장

― 인디아 송(1975)

이유운

 

 

글자의 단위로 해체된 영원의 풍경 앞에

우리가 있다

 

이 사이에서 서로의 배역을 침범할 수 있다

우리는 깨진 단어들을 주워서 서로에게 이름을 붙였지

 

나는 너를 위해 이교도의 신에게 고해하는 자

미움을 가지고 네게 도박을 하고 있어

 

우리는 결국 서로를 세 번 부정할 것이다

 

그런데도

손을 나누어 잡고 팝콘 통에서 가끔 손등을 부딪히고 비슷한 장면에서 자세를 고쳐 앉는 것도 가능했다

 

영화가 끝나면 사이도 배역도 없어지겠지

 

차가운 물에 뺨을 댄 채로

이방인을 예감했다

 

새로 켜진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네 뺨은 결말도 모르고 훌쩍 자랐지

 

헐어 쓰고 버린 마음처럼 매끄럽게

 

너는 그걸 무심하게 바라보는 게 사랑이라고 했지만 글쎄 나는 잘 모르겠어, 새로운 슬픔이나 기쁨, 사랑이나 전쟁을 마음에 더 이상 들이지 않는 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연약한 것을

 

우리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 토론을 하는 대신

서로의 뺨을 만지며 유일이라고 말을 하면서

무심결에 사랑을 너무나 잘 해낼 수도 있었다

 

저기 봐,

우리가 포개진 장면이 나온다

 

애써 익힌 사랑을 다음 세대로 전달하지 않는다는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니

 

내가 배운 건 영화를 위해 진실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

 

너는 입맞춤을 받기 위해 새롭게 만든 이마를 내게 보여준다

검정색 머리카락을 커튼처럼 걷어올리고

 

너는 사라진 것들을 많이 닮았어

너는 대답 대신 웃고 있지

 

희미한 빛 속에서 네 모양을 본다

 

왜 사랑의 장면은 이토록 희고 푸르러야 하는 걸까

 

 

어둠이 닿기 전에

 

 

사랑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는 건 나 자신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는 말과도 같다. 자신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것은 큰 고통과 두려움을 동반한다. 종이접기를 하면 손톱으로 꼭꼭 모서리를 눌러 접어도 뒤집으면 언제나 하얗게 벌어진 부분이 있었다. 내가 내 안으로 들어가 나를 뒤집으면 그런 흰 부분이 너무 많았다. 이기적인 마음, 사랑에 대해 욕심을 부리는 마음, 겁이 많아 이기심과 욕심을 사랑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마음, 그 거짓말이 남긴 흰 자국을 보면서 나는 절대로 누군갈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마음. 그런 마음들은 항상 뒤엉키고 함께 자란다. 아무리 예리한 칼로도 그것을 도려낼 수 없다. 나를 들여다 보는 마음에서 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자란다는 건 애석하고 슬픈 일이다. 시시한 사람이 되기 싫어서 그랬다. 나는 대단하고 비범한 사람이고 싶었는데 나를 뒤집었다가 다시 덮을 때마다 여러 자국이 생기고 나는 조금씩 비참하고 구겨질 뿐 조금도 대단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자국이 남은 종이들은 점차 부드러워지기 마련이다. 뺨에 닿을 정도로 부드러워지면 나는 종이로 태어나 광목이 될 수도 있다. 그런 가능성은 멋진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나의 선생님께 자주 편지로 보냈다. 나는 이 편지들을 오래 읽어본다.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도 이 글이 위로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2018년 11월 15일 오전 2시 49분] 난들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학창 시절은 미래가 자신에게 다가와 있기 때문에 장래의 입장에서 자신이 만나는 사람이나 제도를 진부한 것이고 형편없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또 한편 기존의 언어와 생활 관습을 익히거나 알지 않으면 그들을 넘어설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마치 어린이가 부모의 언어를 배우다가 부모에 항의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 그러니 아무 염려 말고 하고 싶은 연구를 끝까지 해야 한다. 단절은 연속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기존의 진부한 습관을 모르는 사람은 창조적 실천도 할 수 없다. 너는 늙은 세대가 아니니 너그러운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미래는 삼류 정객들의 시대, 덜 떨어진 학자들의 시대가 아닐 것이다. 우리 모두 새로움을 바라보고 있다. 너무 심각하니 그냥 웃어 넘겨도 된다. 지나치게 신경 쓰면 건강에 해로우니 항상 명랑하여라.

 

항상 명랑하여라. 이 어려운 말을 위해 마음을 털어내고 키운다.

 


필자 이유운은 시인이자 동양철학도. 2020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당신의 뼈를 생각하며>로 등단했다. ‘유운(油雲)’은 『맹자』에서 가져온 이름. 별일 없으면 2주에 한 번씩 자작시와 짧은 노트 내용을 올리려 한다. 유운의 글은 언젠가는 ‘沛然下雨’로 상쾌히 변화될 세상을 늠연히 꿈꾸는 자들을 위해 있다.

 

 

 

[제8회 소송학술상] 「슈티르너의 ‘변신'(Metamorphose) 비판의 의미」 – 박종성 회원 / ‘『시대와 철학』 제31권 3호’ 수록 논문

안녕하세요, 웹진 〈(e)시대와 철학〉편집주간입니다.

 

지난 2021년 12월 4일 낮에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철연] 2021년 가을 제61회 정기 학술대회가 줌(zoom) 온라인으로 열렸습니다.

이날 발표와 논평 이후 제8회 소송학술상 시상이 있었습니다.

소송학술상은 소송 송상용 선생님(한림대 명예교수)의 뜻을 이어 한철연 소장 학자들의 학술을 평가하고 고양하기 위해 한철연에서 간행하는 학술지 『시대와 철학』에 최근 2년 동안 수록된 논문 중 우수 논문 한 편을 선정하여 한철연 회원에게 2년에 한 번 수여하는 학술상입니다.

제8회 소송학술상은 박종성 회원이 수상하였습니다.

수상 논문은 

‘「슈티르너의 ‘변신'(Metamorphose) 비판의 의미」 – 박종성 회원 / ‘(『시대와 철학』 제31권 3호’ 수록 논문)입니다.

 

시상은 한철연 김교빈 이사장이 했고, 연효숙 회장이 축사를 전했습니다.

 

박종성 회원 소감

“예 반갑습니다. 일단 너무 감사하구요(웃음), 모르겠습니다. 더 좋은 논문 쓰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더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참고로 상패와 함께 박종성 회원에게 전달한 꽃다발은 연효숙 회장이 발품을 팔아서 직접 구한, 오래오래 잘 시들지 않는 꽃이라고 합니다.^^

축하드립니다.

한국에서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 1806~1856) 연구를 개척하는 선생님의 행보에 회원 모두 관심과 격려의 박수를 드립니다~

 

 

 


슈티르너 연구자인 박종성은 “슈티르너의 ‘유일자'(der Einzige) 개념에 대한 비판적 고찰”(2014)이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지금은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의 소유(Der Einzige und sein Eigentum)』(1845) 번역에 힘쓰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가을 제61회 정기학술대회 영상 [월례발표회·세미나]

한국철학사상연구회 2021년 가을 제61회 정기학술대회

– 주제: 《입장들: 정치경제론, 노동, 사유》
– 일시: 2021년 12월 4일 토요일 오후 1시
– 장소: 온라인(Zoom)방식으로 진행

《입장들 : 정치경제론, 노동, 사유》라는 흥미로운 주제 아래 3인의 발표와 3인의 논평이 준비돼 있습니다.
모든 발표 및 논평이 끝난 후에는 종합 토론 시간이 있습니다. 이후에는 제8회 소송학술상 시상식과 총회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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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술대회 순서 –

개회사: 연효숙 회장(연세대)
개회사: 김교빈 이사장(성균관대)

1부 논문발표 – 사회: 서영화(서울대)
– 발표1 – 김광호(서울시립대): 루소의 정체경제론
– 논평1 – 조은평(상지대)
– 발표2 – 이관형(정치경제연구소 대안): 노동 없는 노동자의 사회
– 논평2 – 조배준(건국대)
– 발표3 – 한길석(중부대): 아렌트의 사유와 도덕
– 논평3 – 남기호(연세대)

2부 종합토론 – 사회: 강지은(서울시립대)

3부 소송학술상 시상식 및 총회 – 사회: 박지용 연구협력위원장(경희대)
– 수상작:
「슈티르너의 ‘변신'(Metamorphose) 비판의 의미」 – 박종성 회원 / ‘『시대와 철학』 제31권 3호’ 수록 논문
「Stirner’s The Meaning of Criticism of “Metamorphose”」 – Park Jongsung
– 시상식 및 총회
– 폐회사: 연효숙 회장

 

• 자료집 다운로드 : http://www.hanphil.or.kr/board04/view.asp?key=8

• 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yD34zqrykk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