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철학일지(6)[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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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철학일지(6)[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1)

푸코에 이어서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데리다의 해체주의였다. 푸코는 실천적 관점에서 흥미를 불러일으켰고 실제 나중에 정치권에서 친노파를 만들어내는 데 일부분 기여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온 것이 데리다의 해체철학인데, 실천 쪽보다는 오히려 예술과 문학 비평 쪽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데리다의 사상 중에 흥미를 끌었던 개념은 무슨 ‘중심주의’이다. 그의 사상으로부터 ‘이성 중심주의’, ‘유럽 중심주의’, ‘남성 중심주의’ 등 각종 중심주의 개념이 나왔다. 그의 철학은 ‘중심’ 중심주의였다. 이런 개념은 기존의 보수적 지배 사상의 비판일 수도 있으나 당시에는 주로 운동권 사상에 대한 비판으로 해독되었다. 운동권 사상 역시 보수적 사상에 못지않게 이런 각종 중심주의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의 해체적 비판에서 방법론적 핵심 개념은 ‘차연’이라는 개념이었다. 이 개념은 차이와 지연이라는 두 의미를 지닌 합성어인데, 거슬러 올라가면 후기구조주의라는 방법론에서 필연적으로 이끌려 나오는 개념이었다. 후기구조주의에서 모든 구조는 상대적이고 일시적이다. 그 때문에 어떤 것은 하나의 구조로 파악되는 동시 다른 구조로도 파악된다. 순수한 객관적 대상이 없으니, 두 구조는 하나의 지점에서 중첩될 뿐이며, 바로 이렇게 두 구조가 중첩되는 지점을 지칭하는 개념이 곧 차연이었다.

데리다는 머지않아 이런 차연 개념을 포기하고 레비나스 등과 같이 자신의 출발점이었던 현상학적 본질직관 개념으로 돌아가는데, 데리다의 후기 사상은 내가 알기로 한국에서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운동권이 자기를 반성하는데 방법론적인 관점을 주었다. 데리다의 주장은 당시까지도 남아서 투쟁했던 운동권의 진영 안에 수류탄을 깐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진리이고 가치 있다고 믿지 않고서 어떻게 행동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하나의 구조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의 욕망일 뿐이니, 세상은 욕망 사이에 벌어지는 이전투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전투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투쟁에 나설 수는 없었다.

2)

그 외에도 나는 알튀쎄와 같은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자 책을 읽었다. 그의 중층적 결정론이나 구조적 총체성 개념은 명확하다는 느낌을 주기는 했으나 이상하게도 거부감이 느껴졌다. 당시 한국에는 윤소영 교수와 같은 알튀쎄 주의자가 있었고 상당한 영향을 미쳤으나, 나로서는 알튀쎄의 철학이 무언가 가슴에 와닿는 느낌이 없었다.

그 밖에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가인 보드리야르의 책을 읽기도 했다. 그의 소비사회라는 개념이나 시뮬라크르라는 개념은 흥미로웠으나, 그는 사회학자에 가깝고 재치 있다고 생각했으나, 깊이를 느끼지는 못했다. 보드리야르는 나중에 내가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데 기여했다는 점만은 밝히고 싶다.

이렇게 나는 한 십 년 동안을 당시 유행을 좇아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다행히 학교에서 교과목 개편을 하면서 나는 내 마음대로 나의 강의 커리큘럼을 짤 수 있는 권리를 얻었기에 나는 내가 공부하고 싶은 것을 교과목으로 설정해서, 내가 공부하면서 동시에 강의하기도 했으니, 나의 실험적 강의를 참고 들어준 학생들에게 지금 미안하기도 하며 동시에 고맙게도 생각한다.

97년 나는 지쳤다. 마침 학교에서 안식년을 받아 해외로 나가게 되었다. 유럽에서라면 무슨 새로운 전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독일로 떠났다. 유럽에서 나는 97년 겨울 한국이 IMF에 빠지게 되었고 그해 년 말 선거에서 김대중 선생이 당선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3)

IMF로 망하는 것은 어차피 예견되었던 사실이니 당연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어서 곧 김대중 선생의 당선을 알았을 때, 나는 최초로 무거운 중압감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대중 선생이 87년 여름 노동자 대투쟁 시절, 노동운동을 배신했을 때도, 배신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게 그의 진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정권을 잡기만 하면 그는 운동권과 그가 묵시적으로 합의한 경제적 개혁을 달성하리라 믿었다.

이 노선은 박현채 선생이 기초를 잡고 김대중 선생이 널리 알린 대중경제 노선이었다. 그것은 산업의 재편성을 통해 민족경제로 나가는 노선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김대중 선생에 기대했다. 이제 정권을 잡았으니 그는 자신의 대중경제 노선을 실천하리라. 희망이 솟았다.

멀리 독일에서 매일 아침 도서관으로 나가면서 나는 이참에 어설픈 현실참여를 끝내고 학자로서의 나의 길을 다잡아 가리라고 생각했다. 독일 튀빙엔은 참 작은 대학 도시였다. 만물은 고요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5월의 들판이었다. 마치 어릴 때 어머니가 덮어주던 포프린 이불보에 수 놓인 꽃잎들처럼 들판에는 이름 모를 야생 꽃들이 피었다.

나는 튀빙엔 유학생들과 자주 함께 산책하면서, 철학을 공부하는 학자로서 나의 과제가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나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단순히 어떤 철학이 좋아서 하는 것은 철학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철학도 자의식을 가지고 해야 하며, 나의 철학적 자의식이 가리키는 바에 따르자면 철학은 시대의 현실을 극복하는 철학, 실천적 철학이어야 했다.

나는 산책하면서, 내가 10년간 허겁지겁 따라갔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들을 생각해 보았다. 십 년간 그들의 철학이 내게 가르쳐준 것이 무엇인가를 찾으려 했으나 손에 잡히는 것 없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었고, 어떤 진리도 가치도 없었다. 과연 우리는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과거 운동권은 이제 소확행이라는 개념에 빠져들었다. 그게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삶이었다. 소확행이란 곧 와인과 여행, 그리고 약간의 흐트러진 매무새를 의미했다. 하지만 이런 소확행을 즐기려면 어느 정도 중산층적인 물질적 자원이 필요했다. 대학교수로서 나도 이런 소확행의 분위기가 나의 온몸을 휘감고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럴수록 의식적으로 나는 이 분위기에서 빠져나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허무주의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을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다. 푸코나 데리다와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곧 구조주의라는 무기였다. 이 구조주의는 거슬러 올라가면 칸트에 이르고, 언어학이라는 확실한 토대를 갖추고 구조주의 외에도 과학철학(예를 들어 토마스 쿤) 등에서 지지와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더구나 마르크스주의조차 이미 알튀쎄를 통해 구조주의로 전향했다.

구조주의는 후기구조주의에서 보듯이 불가피하게 상대주의와 소확행이라는 삶으로 빠지게 마련인데,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런 고민을 하면서 나는 내가 안식년을 보내고 있었던 튀빙엔 대학교에서 이루어지던 헤겔 논리학 심포지움에 참석하였다. 나는 독일어도 잘 모르면서도 빠짐없이 참석했는데, 그는 마침 헤겔 논리학 3권 개념론 부분을 읽어나갔다. 독일 교수와 대학원생의 세미나에 참여하면서 내가 확실하게 깨달은 것은 헤겔에 관해서라면 그가 모르기는 나와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이었다.

헤겔 강의를 들으면서 다른 한편 도대체 헤겔 철학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고민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곧 헤겔 철학이 어쩌면 구조주의적 방법론을 넘어서는 가능성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생각이었다.

구조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구조 자체의 변화 가능성을 생각해야 했다. 구조주의는 어떤 것을 구조적 좌표 위에 점 찍는 것은 가능했지만 구조가 변동하는 가능성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하나의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의 변화는 우연일 뿐이었다.

그런데 헤겔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발전은 하나의 인식 구조에서 다른 인식 구조로 변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하고 나는 생각했다. 헤겔 정신현상학에서 이행 구조를 밝히게 된다면, 구조가 필연적으로 변동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무릎을 쳤다. 이제 구조주의를 극복하는 길이 보였다. 이렇게 해서 나는 80년대 헤겔 연구에 이어서 10년 만에 다시 헤겔연구로 돌아서게 되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해야 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박사 논문을 통해 정신현상학의 이행과정을 밝혀 보고자 했다. 나는 튀빙엔 대학교 도서관에서 다시 정신현상학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으며 그 가운데 모순이라는 개념에 주목했다. 정신현상학의 이행과정에는 항상 모순이라는 개념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 모순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딜레마로, 어떤 경우에는 자가당착으로 어떤 경우에는 전치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나는 정신의 이행은 모순을 통해 일어난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 감을 바탕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이 논문으로 나중에 귀국한 지 2년 뒤 2000년 겨울에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제목은 ‘정신현상학에서 정신 개념에 대한 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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