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철학일지(7)[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Spread the love

나의 철학일지(7)

1)

앞에서 박사학위 논문에 관해 이야기했다. 내가 재직했던 학교에서 승진의 조건으로 요구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했던 짓이기는 하지만, 철학에 대해 내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한번 정리해보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그 생각이란 곧 당시 유행하던 구조주의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내가 박사 논문의 주제로 헤겔 책 가운데 정신현상학을 택했던 것은 정신현상학의 서론(Einleitung]에 나오는 회의의 길이라는 개념 때문이었다. 나는 이 개념이야 말로 구조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라는 믿었다.

헤겔은 회의의 길을 설명하면서, 물 자체란 의식 자체를 넘어서 있기에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물 자체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의식에 대해서 나타나는 물 자체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그런 특정한 의식을 넘어선다면, 그 의식에 대해 물 자체로 나타난 것조차, 넘어서게 되며, 이제 새로운 의식에서는 과거 물 자체로 여겨진 것조차 하나의 계기로 포괄될 수 있다고 하였다.

어떤 의식이 물 자체에 부딪혔을 때, 그것이 모순적인 경험이다. 왜냐하면, 그때 부딪히는 물 자체는 그런 특정 의식에서는 이렇게 규정할 수도 없고 그 반대로 규정할 수 없는 것 즉 이율배반이나 딜레마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의식에 나타나는 모순 경험은 실재 즉 물 자체에 대해 의식이 부딪히는 원초적인 경험이다.

헤겔은 이런 원초적인 모순 경험을 통해 의식은 새로운 형태의 의식으로 역사적으로 발전하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모순을 통해 나가는 길을 헤겔은 서론에서 ‘회의의 길’이라고 불렀으며, 이런 회의를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진리를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정신현상학이 이렇게 모순을 통해 나가는 회의의 길이라고 한다면, 이 길은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나가는 길이며, 영원히 최종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는 열린 길이 아닐 수 없다.

2)

내가 논문에서 추구했던 것은 모순을 통해 나가는 회의의 길이 실제로 정신현상학에서 발견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였다. 나는 헤겔 정신현상학을 처음부터 샅샅이 읽어 나가면서, 과연 모순의 경험이 어떻게 의식의 발전에 기여하는가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기쁘게도 나는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이 발전하는 변곡점마다 다양한 형태의 모순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런 모순은 다양한 모습으로 감추어져 있었는데, 이율배반이나 딜레마는 물론이며, 계몽주의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절대적 자유의 공포’나, 칸트 비판에서 나오는 ‘전치’, 또 낭만주의 비판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영혼’조차 모순 개념의 변장된 구체적인 형태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물론 박사학위 논문 자체에서 구조주의 한계를 거론한 것은 아니었다. 박사학위 논문은 그저 정신현상학에서 회의의 길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회의의 길이 확립된다면, 이것을 통해 구조주의가 극복될 길이 열릴 것으로 기대했다. 또한 나는 내가 발견한 바로 이 길이 마르크스가 주장한 유물론적 변증법의 길을 말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박사학위 논문을 심사받는 과정 중에 나의 이런 기대는 심사위원들이 가지고 있는 헤겔에 대한 선입견과 정면으로 충돌되었다. 일반적으로 헤겔의 변증법적 발전은 개념이 자기를 대상화하며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면서 전개하는 길이었다. 이 때문에 헤겔의 변증법은 일반적인 것에서 개별적인 것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이며, 당연히 이런 길은 마침내 자기 자신에 도달하면서 끝나게 되는 폐쇄된 길이었다.

사실 정신현상학 서문에 나오는 여러 가지 표현들은 이런 관념론적 해석의 길을 확인해주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심사위원들에게 이런 서문에 나오는 길 즉 관념 변증법의 길은 논리학과 같은 학문에서 전개되는 길이며 이 길은 학문에 이르는 도정에 있는 정신현상학의 길과는 구분된다고 역설하였으나, 심사위원들은 나의 주장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런 의문에 답하기 위해 서문에서 설명한 관념 변증법의 길과 서론에서 설명한 회의의 길을 매개할 가능성을 찾아보았다. 나는 곧 정신현상학에서 ‘형태’와 ‘계기’라는 개념이나 ‘내면화’와 ‘시간화’라는 개념을 발견하면서, 이 개념이 두 가지 대립하는 길을 매개해 준다고 생각하면서 논문을 보완하였다.

이런 보완의 덕분인지, 다행히 심사위원들은 나의 주장을, 비록 자신들은 인정하기 어렵지만, 하나의 실험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여 주면서 논문은 통과될 수 있었다. 나는 마치 헤겔이 아니라 나 자신이 진리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것처럼 기뻐했다. 나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내가 마치 학문적으로는 새로이 태어나는 것처럼 느꼈다.

4)

간신히 90년대 이후 전개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을 극복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상의 흐름은 또다시 변화했다. 21세기로 들어가면서, 1990년대 서구 사상을 지배했던 후기구조주의의 흐름도 퇴조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상의 물결이 밀어닥쳤는데 내가 보기에 두 가지 흐름이었다. 하나는 들뢰즈와 같은 미분적 차이의 철학이었고 다른 하나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이었다.

흔히 들뢰즈나 라캉은 푸코와 데리다와 같이 프랑스 출신 사상가이었으므로, 그냥 프랑스 철학을 통칭되었으나, 내가 보기에는 전혀 다른 흐름의 사상이었다. 왜냐하면, 푸코와 데리다가 후기구조주의에 기초해서, 상대주의적 결론에 이르면서 어떤 객관적 가치나 진리의 존재를 부정햇지만, 들뢰즈나 라캉의 경우는 이와 달리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들뢰즈는 가장 원초적인 미분적인 감각적 경험이 모든 진리의 기초이었다. 그의 이런 입장은 욕망 개념을 서술한 ‘앙티 외디푸스’라는 책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났다. 거기서 그는 욕망이란 원초적인 미분적인 욕망이 무한히 적분되면서 출현하는 것이라고 보면서 욕망은 결핍이 아니라 곧 생산이라고 하였다. 그의 이런 논리는 전반적으로 진리 개념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라캉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라캉 역시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무의식을 진리의 기초로 보았다. 라캉은 이때 무의식이라는 개념보다는 ‘대타자의 말’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라캉적인 해석이었다.

들뢰즈나 라캉은 진리를 인식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구조주의가 부딪힌 상대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사실 들뢰즈나 라캉이 푸코나 데리다보다 먼저 나타난 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또는 세계적으로) 오히려 푸코나 데리다 뒤에 유행하게 된 것도 이런 까닭이 아닌가 생각했다. 즉 사람들이 이 시대에 이르러 객관적 가치와 진리를 부정하는 구조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런 상대주의를 극복하려는 갈망이 사람들이 들뢰즈나 라캉으로 향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5)

나는 들뢰즈나 라캉이 등장한 것은 곧 신자유주의 붕괴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2008년 미국에서 경제위기는 30년간 세계를 제패한 미국의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일거에 폭로했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세계 곳곳에서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 쏟아졌고 ‘나는 분노한다는’ 함성이나 신자유주의의 본산인 ‘월가를 점령하라’는 운동이 전 세계에 펼쳐졌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자유주의는 김대중 선생의 IMF 극복 노선을 타고 들어왔으며, 노무현 정권의 경제 개혁을 통해 번성하게 되었다. 특히 노무현 정권은 삼성에게 나라의 경제에 대한 진단을 맡겼으며,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을 세계 금융 허브로 만들고,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압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노무현 정권이 정권을 다시 보수 진영으로 넘기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부동산 투기 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금융 허브를 만든다고 하면서 금융개방을 가속화했는데, 그 때문에 당시 신자유주의 시대 낮은 금리로 떠돌던 과잉 화폐(특히 일본 자본)가 한국으로 쏟아져 들어왔으니, 기술적 발전이 정체되면서 투자처를 찾지 못한 과잉 화폐는 부동산 투기에 몰려들었다. 그러니 노무현 정권이 실패하게 된 진짜 원인은 다름 아닌 그가 추진했던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 아니었을까?

노무현 정권이 말기 전개된 세계적 금융위기는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파산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으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적 민주정권 즉 노무현 정권의 실패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와 더불어 전 세계적으로 또한 한국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후기구조주의도 쇠퇴했으며, 이에 대체하여 새로운 시대를 모색하는 철학적 흐름도 등장했다. 바로 그것이 곧 들뢰즈의 철학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관심의 폭발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