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설렌다, ‘아름답다’는 말 [아이들과 책보며 두런두런]

『아름다운 책』(비룡소)을 소개합니다.(편집자)/

 

『아름다운 책』(클로드 부종 글·그림, 최윤정 옮김, 비룡소 펴냄)

선생님을 생각하면 저 깊은 곳, 가슴 밑바닥부터 저절로 기분 좋게 찰랑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 과거, 현재, 미래까지도 동시에 환하게 빛나는 느낌.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분이 담임선생님이 되셨다. 선생님은 생물을 가르치셨다. 내가 아직까지 과학 쪽을 기웃거리는 데도 그분 영향이 틀림없이 크다. 생물학과 과학을 넘어서, 인간과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첫눈을 뜨도록 친절하게 도닥여주신 분이기도 하다.

그 분 곁에서 자라던 중학 시절은 언제 돌아봐도 내 인생에서 가장 기분 좋게 빛나는 시간이다. 선생님은 염색체, 완두콩, 멘델을 징검다리 삼아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도록 자연스럽게 이끌어주시곤 했다. 언젠가 생물 시간, 선생님은 우리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마음으로 결정해 보는 것도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사람을 설명할 땐 ‘어떤’ 사람이라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는데 그 형용사는 과학 법칙을 넘어서 우리 자신이 만들고 결정할 수 있다는 말씀도 기억난다.

“멋있는 사람, 지혜로운 사람, 훌륭한 사람, 재미있는 사람······. 이제부터 우리 스스로 선택하고 그 길로 나갈 수 있다. 자,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지?”

그 며칠,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사랑하고 깊이 존경하는 선생님의 말씀이니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꽤 여러 날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말을 고르는 일이 곧 내 인생을 결정하는 일 같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아름답다’는 형용사를 조심스레 건져 올렸다.

막상 대답을 찾고 나니 내 안은 순식간에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픈 열망으로 가득 찼다. 그러니까 그 뒤부터 나의 성장기를 감히 말한다면 ‘아름다움을 찾아 헤맨 과정’이라 해도 괜찮겠다. 내 마음은 아름다움과 관련 있는 모든 말과 내용을 모으는 이야기 상자와도 같았다.

눈물이 주르르 흐르거나 가슴이 콩당대는 책을 찾아 읽었고 아름다운 말씨, 아름다운 행동이라면 무엇이든 흉내 내려고 했다. 친구들에겐 다 괜찮다, 너그러이 품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거리에서 불쌍한 사람을 만나면 지켜보고 쫓아가고 가진 푼돈을 털어 주기도 했다.

아름다움을 쫓으면서 내가 어렴풋이 깨달은 건 아름다움은 아무래도 겉에 있는 게 아니라 안에 숨어 있는 것 같다는 사실. 안에서 가만가만 스며나와서는 그 빛과 향기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행복하게 해 준다는 사실. 그런 건 쉬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안타깝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다.

내 작은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는 일조차 만만치 않다는 걸 느낄 즈음, 한 개인의 아름다운 삶과 사회적으로 아름다운 삶 사이에 미묘한 틈이 있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크게 보면 분명 하나이련만 내 깜냥으로는 도무지 통일시킬 수가 없어 분열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러저러한 굴곡을 겪으면서도 절대자에게 신심을 바치듯, 중학 시절 선택한 ‘삶의 잣대’를 마음 깊이 품고 살아온 것 같다. 멋진 말이나 용기 있는 모습, 감동을 주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볼 때면 지금도 아름답단 말이 먼저 나온다. 세상의 구체적인 차이들이 내 감성의 거름망을 거치면 그저 아름답다, 한 마디로 획일화되곤 한다. 나는 점점 더 단순무식하게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하면서 이렇게 나이 들어간다.

어쨌거나 선생님 덕분에 나는 상대적으로 내면에 충실한 삶의 태도를 배웠다. 참 고마운 일이다. 이 외모로 겉에 매달렸다면 틀림없이 절망만 깊었을 터이다. 그나마 결정되지 않았고 그래서 가능성을 많이 지닌 내면을 가꾸는 쪽으로 마음을 돌린 건 다행스런 선택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사람이나 사건을 만나면 가슴이 뛰고 설렌다.

나는 아이들과 만나는 일을 한다. 무슨 공부를 한다, 딱 꼬집어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는 ‘마음공부’를 한다고 얼버무리곤 한다. 마음공부라! 참 멋진 얘기지만 이렇게 외연이 넓어서야 무책임하단 말을 들을 법도 하다. 아이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내가 좋을 때는 “아름답다!”는 말부터 튀어나오는데, 이제 아이들은 으레 그런 줄 알고 자기들이 알아서 분류하고 때로 구체적인 차이를 되묻기도 한다.

아이들과 하는 주된 공부가 책 읽고 토론하고 글 쓰는 일이라지만 소소한 일상을 놓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많다. 수다를 떤다고도 볼 수 있는데, 우리 수다가 삶의 진실 어느 자락에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들면 주저 않고 책을 덮는 편이다. 삶이, 이 세상이 커다랗고 심오한 책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하지만, 내 아이가 책을 많이 읽고 글 잘 쓰길 바라서 데려왔을 부모 입장에서는 속이 탈 때도 많으리라. 수업하는 몇 주 동안이고 책을 읽지 않을 때도 있다. 책을 읽는다 해도 다 큰 아이들과도 그림책을 자주 읽는다.

제목부터가 『아름다운 책』(클로드 부종 글·그림, 최윤정 옮김, 비룡소 펴냄)이라는 그림책이 여기 있다. 유아용으로 분류돼 있는 이 책은 내용이 아주 간단하다.

 

『아름다운 책』중에서

토끼인 형 에르네스트가 길에서 책을 한 권 주워온다. 동생 빅토르는 생전 처음 책을 본다. “그게 뭐 하는 건데?” “책은 읽는 거야. 글씨를 읽을 줄 모르면 그림을 보는 거고.” 형과 동생은 같이 책을 읽는다. 책 속 주인공은 당연히 토끼들이다. 재미나게 구슬치기를 하는 토끼, 용을 때려눕히는 토끼 이야기 같은 것들. “나도 이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빅토르가 책을 보며 꿈을 꾸기 시작한다. “빅토르, 꿈을 꾸는 건 좋아. 하지만 책에 나오는 걸 그대로 다 믿으면 안 돼. 나름대로 판단을 해야지.” 무지무지 큰 토끼가 콩알만한 여우를 갖고 노는 장면을 보니 둘은 기분이 더없이 좋다. 자기들 같은 보통 토끼가 사자와 여우를 훈련시키는 장면에선 “진짜로 이러면 얼마나 좋겠어!” 한숨까지 나온다.

이렇게 둘이 책읽기에 빠져 있을 때 바로 앞에 진짜 여우가 나타난다. ‘크흐흐’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여우. 당장 잡아먹힐 순간인데, 둘이 가진 거라곤 책밖에 없다. “책! 그렇지!” 에르네스트는 책으로 여우를 내려치고는 여우 입에다 책을 쑤셔 넣는다. 여우는 책을 문 채 도망가고 만다. “봤지, 책은 정말 쓸모 있는 거야.” 에르네스트는 때를 놓치지 않고 동생에게 일러준다.

내가 평생을 마음으로 조물락거리며 애지중지한 말 때문인지,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내 마음을 붙잡았다. 책이 우리를 꿈꾸게 하고, 때로 현실을 바로 보게 하고,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다는 걸 두 형제는 책을 보며 직접 겪고 배운다. 형제를 보며 ‘그래, 책은 세상과 삶과 우리 마음 사이에 놓인, 참 재미있고 튼튼하고 믿음직스런 징검다리다’ 생각한다. 그런 생각 끝에 절로 흘러나오는 소리, “책은 참 아름답다!”

작가 클로드 부종은 다른 작품을 봐도 그렇고, 짧은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고 게다가 좋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재주가 있다. 다들 왜 그렇게 책을 읽어야 한다고 아우성인지, 몇 장 안 되는 이야기로 할 말을 다 한다. 현실을 보고, 꿈꾸고, 꿈을 이루기 위해 문제로 달려드는 것. 책을 보며 우리는 이런 힘을 얻는다. 그러니 책을 안 보고 어찌 제대로 살 수 있을까. 책이 지닌 이런 힘을 ‘아름답다’고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나를 기분 좋게 한다.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고맙다, 책들아!
책은 웃음, 천진함, 무, 다정한 저녁들,
텅 빈 충만, 대 숲에 이는 바람의 직계(直系)다.
······
그것들은 내가 먹은 밥, 내가 마신 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느 덧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엄청난 다독가로 알려진 시인 장석주가 한 말이다. 책을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왠지 딱 시인이 되지 싶다. 장석주는 책을 보며 저리도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고 느끼며 몸과 마음을 키운다. 그리고 자라나는 존재가 시키는 대로 시를 쓴다. 그러면서도 장석주는 “엄정하게 말하자면 책읽기에 힘씀은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말 그대로 아주 엄정해서 가슴이 철렁할 정도다. 우리를 잡아먹으려는 여우를 내려치는 것, 책읽기가 결국에는 삶으로,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얘기를 장석주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지도 모른다. 클로드 부종이 재미있고 명쾌하게 책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면, 장석주는 따뜻하면서도 한편 처절하게 책의 힘과 자기 존재의 한계를 고백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책을 읽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를 휘어잡는 힘이 있다. 그래, 존재를 휘어잡는다. 그러니 책을 ‘제대로’ 읽는 사람은 책이 존재가 되고 삶이 되지 않을까. ‘책읽기가 삶으로,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앞서 한 말은 ‘책읽기는 삶으로, 세상으로 나간다’고 바꿔야 정확하지 않을까. 달려드는 여우를 책으로 물리칠 때 책밖에 없었던 건 우연일까.

가만 보니 ‘아름답다’는 말 하나 때문에 『아름다운 책』을 붙잡아서는 쩔쩔매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일치만이 아니라, 내가 부여잡는 아름다움과 이 책이 말하는 아름다움이 다르지 않다는 걸 밝혀 보겠다고 이리 헤매나 보다.

그런데 내 마음을 들여다보니 어떤 이야기를 자꾸 피해가는 느낌이 든다. 말로 하기 힘들 때도 많지만 어떤 건 말로 하고 싶지 않다. 말과 말 사이에 남겨 두고 싶다. 이런 느낌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 책을 읽다가 활자들 사이에 놓인 그 무엇에 사로잡혀 본 적은 없는지. 그건 작가가 만드는 게 아니라 책을 읽는 우리 자신이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이제 그 비슷한 느낌에 기대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수밖에 없겠다.

나는 ‘아름다운 선생님’이 되고픈 꿈이 있다. 『아름다운 책』같이 재미있는 책을 보며 꿈을 키우고 다듬고 아이들과 꿈을 나눈다. 내가 중학교 시절에 만났던 선생님처럼 될 수 있을까? 선생님이 내게 주었던 느낌들을 나도 아이들에게 줄 수 있을까?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나를 만나며 어떤 느낌을 받는지는 자신이 없다. 하지만 나는 아이들이 곁에 있어서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싶었던 옛 꿈을 여전히 꾼다. 아이들과 있어서 감히 나 자신이 아름다운 사건이 되면 좋겠다던 어린 시절 바람을 아직은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요즘은 이렇게 스스로 다독인다. 그저, 아이들이 가끔은 ‘이런 사람 만나서 좋다’는 생각을 하면 좋겠다고. 내가 내 삶을 치장할 소중한 형용사를 선생님과 함께 발견했듯이, 아이들이 자기 빛깔을 살릴 그 무엇을 찾는 시간을 나와 함께 가지는 거라면 참 좋겠다고.

김호경(어린이철학 선생님) /

[아이들과 책보며 두런두런] 잉쯔의 고민

여러분은 혹시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온 경험이 없나요? 주위에 아무도 없는데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오면 아마 누구라도 바짝 긴장하게 될 겁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사람의 겉모습만 봐서는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아저씨가 천사같이 고운 마음씨를 가진 사람일 수도 있고, 예쁜 얼굴로 상냥하게 웃는 아가씨가 실은 유괴범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알려면 겉모습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실제 행동을 봐야 합니다. 걸핏하면 남을 괴롭히고 때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쁜 사람일 테지요. 반대로,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필시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번 다 같이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정말 사람의 행동만 보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확실히 알 수 있을까요? 글쎄요, 꼭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같은 사람, 같은 행동을 두고도 누구는 좋다 하고 누구는 나쁘다고 하는 일이 너무나 자주 일어나니까요.

한번 우리나라 대통령의 예를 들어 볼까요. 이명박 대통령이 지금까지 어떤 말과 행동을 해 왔는지 모르는 국민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있는가 하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도 있습니다. 이렇게 같은 행동, 같은 사람을 놓고 좋다, 나쁘다는 생각이 갈리는 경우를 우리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 일은 생각처럼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황금빛 붉은 태양이 푸른 바다에서 올라오는 것일까요? 그렇지만 태양은 푸른 하늘에서 내려오기도 하잖아요? 나는 바다와 하늘을 구분하지 못하겠어요. 또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도 구분하지 못하겠고요.”

이 말은 [우리는 바다를 보러 간다]라는 중국 동화책에 나오는 주인공 잉쯔가 한 말입니다. 잉쯔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1학년 여자아이입니다. 그리고 잉쯔가 말을 건네고 있는 사람은 마을 어귀에서 우연히 만난 어떤 낯선 아저씨입니다. 잉쯔는 이때 모르고 있었지만, 실은 이 아저씨는 도둑이랍니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값비싼 물건을 이미 여러 번 훔쳤고, 그래서 경찰이 뒤쫓고 있는 사람이지요. 저지른 행동만 놓고 보면 이 아저씨는 분명 나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한 번 다시 생각해 봅시다. 혹시 이 아저씨가 좋은 사람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다시 말해,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인데도 나쁜 행동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여러분도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거짓말은 일반적으로 나쁜 행동이지만, 때로 좋은 마음에서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염려하여 불치병에 걸린 사실을 숨긴다면 바로 그런 경우지요.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상황에 따라서는 살인조차 좋은 마음에서 나온 행동일 수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를 생각해 보세요. 안중근 의사는 우리 민족이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일본의 지도자 이등박문을 살해했습니다. 이 행동은 어디까지나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의로운 마음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이런 예에서 보듯, 사람의 행동만 갖고 섣불리 좋다, 나쁘다를 단언할 수 없는 측면이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잉쯔가 차차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아저씨에게는 잉쯔와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6학년짜리 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동생은 해마다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는 아주 뛰어난 학생입니다. 품은 뜻도 커서, 학교를 졸업하면 바다 건너 외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어 하지요. 그러나 아저씨는 직업도 없고 무척 가난했답니다. 더욱이 늙은 어머니까지 보살펴야 하는 처지라서 동생을 위해 해줄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늙으신 우리 어머니는 희망 없는 나를 위해 우시다가 눈이 멀었단다. 어머니는 지금 내가 개과천선해 집을 잡히고 그 돈으로 조그만 장사를 하고 있는 걸로 알고 계시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줄은 모르신단다. 오직 책만 들고파는 내 동생은 나를 좋은 형이라고 생각하지. 당연하지, 내가 제 학비를 대니까. 지금 난 동생 유학 뒷바라지해 줄 생각밖에 없단다. 그러니 나 좋은 사람 아니냐? 잉쯔, 네 생각에 나는 좋은 사람이니, 나쁜 사람이니?”

아저씨가 왜 도둑이 되었는지 이제 짐작이 가나요? 아저씨는 동생의 유학을 돕고 눈먼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기 위해 도둑질에 나선 겁니다. 그러니 좋은 마음으로 나쁜 행동을 한 거지요.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는 보통 좋은 마음에서 좋은 행동이, 나쁜 마음에서 나쁜 행동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 좋은 마음에서 나쁜 행동이 나온 걸까요?

사실 아저씨의 경우를 잘 살펴보면, 두 가지 생각 또는 두 가지 도덕이 마음 속에서 싸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족을 잘 돌봐야 한다’는 생각과 ‘남의 물건을 훔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그것이지요. 아마 다른 사람들 같으면 두 가지 도덕을 다 잘 지키는 일이 어렵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무일푼인 데다가 직업도 없는 아저씨로서는 둘 다 잘 지킬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하나를 저버리기로 마음먹은 겁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을 가리켜 흔히 딜레마(dilemma)라고 부릅니다. ‘도덕적 딜레마’는 어떤 행동을 선택하든 간에 어떤 도덕을 어길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내 친한 짝꿍이 다른 친구의 물건을 훔치는 걸 내가 봤다고 해 봅시다. 이 경우 나는 짝꿍의 행동을 못 본 척하면 나쁜 행동에 가담하는 꼴이 되고, 그렇다고 사실을 폭로하면 친구를 곤경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우정과 정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저버릴 수밖에 없는 거지요. 잉쯔가 만난 아저씨도 이런 딜레마에 빠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두 가지 도덕이 충돌하더라도 더 중요한 상위의 도덕이 있게 마련이므로 그 도덕을 선택하면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를테면 가족의 안위를 돌보는 일보다 공공의 질서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하므로, 가족을 위해 도둑질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지요. 물론 일리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어느 도덕이 더 우선하는지를 결정하는 일은 생각처럼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안중근 의사의 경우, ‘나라를 구해야 한다’와 ‘살인하면 안 된다’ 가운데 어느 것을 더 상위의 도덕으로 보았을까요? 문제는 안중근 의사의 대답과 간디의 대답이 같은 것일 리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 물음에 대해 정답 같은 게 있을 리 없습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 볼까요. 옛날 중국에서는 죄 지은 부모를 자식이 고발하면 오히려 자식을 사형에 처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국법보다 효도가 훨씬 더 중요한 도덕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에는 그러지 않지요. 그러나 옛날의 도덕보다 오늘날의 도덕이 더 옳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오히려 어느 도덕이 더 중요하고 더 우선하는가는 개인에 따라, 시대에 따라, 문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쉴 새 없이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하고 판단하지만, 그 판단이 맞는지 안 맞는지를 확인할 길은 사실 없습니다. 생각이 같고 판단이 같은 사람을 얼마든지 많이 만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의 판단과 대립되는 다른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이란 없습니다.

요즘 한참 논란이 되고 있는 안락사 문제, 사형 문제, 낙태 문제, 환경개발 문제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 사람들은 제각기 이런저런 이유로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으로 나뉘지만, 궁극적으로 볼 때 어느 쪽 판단이 옳은가를 입증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저 서로가 끊임없이 상대쪽을 설득하는 과정, 그래서 자기쪽이 다수파의 입장이 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고 보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잘 구분하지 못하겠다는 잉쯔의 고백은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거라고 간단히 치부해 버릴 문제가 아닙니다. 잉쯔가 만났던 아저씨는 결국 얼마 못 가 경찰에 붙잡히고 맙니다. 그러나 잉쯔는 경찰에 끌려가는 아저씨를 먼발치에서 보면서도 아저씨가 결코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답니다.

수평선을 자세히 보면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구분할 수 없듯이, 사람 사는 일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쉬 구별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김우철(한우리독서토론논술 연구실장) / admin@admin.com

맹자, 사랑을 이야기하다[천하무적 맹자왈]

외로운 사람들을 위하여

어느 날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더러 명당(明堂)을 허물라고 하는데 허물어 버릴까요? 그냥 둘까요?”

제나라의 명당은 본래 주나라 천자가 동쪽으로 순행(巡行)할 때 제후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그런데 이미 망해가는 주나라의 천자가 다시 순행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선왕 같은 제후가 의당 머물 수 있는 곳도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부숴버리라고 한 모양이다.

맹자의 대답은 의외였다.

“명당은 왕자(王者)가 머무는 곳입니다. 왕께서 만약 왕도정치를 펼칠 생각이 있다면 허물지 마십시오.”

선왕은 솔깃했다. 자기더러 천자가 되라는 말 아닌가. 그래서 왕도정치가 뭔지 알고 싶어졌다.

“왕도정치에 대해 들어볼 수 있겠습니까?”

“늙어서 아내 없는 것을 ‘홀아비[鰥]’라 하고, 늙어서 남편 없는 것을 ‘과부[寡]’라 하고, 늙어서 자식 없는 것을 ‘홀로 사는 사람[獨]’이라 하고, 어려서 부모 없는 것을 ‘고아[孤]’라 합니다.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은 천하에서 가장 가난하고 하소연할 곳 없는 사람들입니다. 문왕께서 왕도정치를 펴실 때 이 네 부류의 사람들을 먼저 보살폈습니다. 시경에도 그 때의 일을 ‘부자들은 괜찮지만 이 외로운 사람들이 가엾다.’고 기록했습니다. 문왕처럼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먼저 돌보는 것이 왕도입니다.”

맹자가 말한 네 부류의 사람들이 이른바 ‘환과고독(鰥寡孤獨)’이다. 여기서 ‘환(鰥)’은 본디 물고기의 일종으로 홀아비는 걱정 근심 때문에 밤에도 눈을 감고 편안히 잠들지 못하는 것이 마치 물고기와 같다는 뜻에서 이름이 그리 붙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하의 세 부류, 곧 과부, 독거노인, 고아가 편히 잠든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홀아비가 그렇듯 이들도 잠 못 이루기는 마찬가지일 터이고 오히려 홀아비는 그 중 사정이 가장 나은 편일 것이다.

선왕의 사랑, 태왕의 사랑

아무튼 이야기를 들은 선왕은 왕도정치가 무슨 자기 재산을 흩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퍼주는 것쯤으로 여겼는지 바로 꼬리를 내린다.

“저도 왕도정치를 하고 싶긴 합니다만 제게는 병이 있어서…”

“무슨 병인지요?”

“저는 재물 욕심이 많습니다.”

선왕의 생각에 자신은 재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재물을 흩어서 백성들을 도와주지 못한다는 뜻이다. 맞는 말이긴 하다. 부자가 천국가기 어렵다는 말이 괜히 생겼겠는가. 그런데 맹자의 대답은 이랬다.

“재물 욕심이요? 그거 좋은 겁니다. 옛날 주나라의 공유도 재물 욕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정착한 사람들은 창고에 곡식을 쌓아 두고 마음 놓고 지내게 했고, 먼 길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양식을 주어서 가져가게 했습니다. 공유는 자기가 재물을 좋아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재물도 늘려주었습니다. 이렇게 한다면 재물을 좋아하는 마음이 왕도정치를 베푸는데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선왕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얼른 또 다른 핑계를 댄다.

“저에게는 또 다른 병이 있습니다.”

“무슨 병인지요?”

“저…, 저는 여자를 밝힙니다.”

선왕의 말인즉 자신은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난한 백성들을 사랑할 겨를이 없다는 거다. 곧 여색을 밝히는 자는 왕도정치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제후로서 체면까지 구기면서 못할 만한 이유를 댄 셈이니 왕도정치 하기가 정말 싫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맹자의 대답은 이랬다.

“그것도 좋습니다! 옛날 주나라의 태왕도 여자를 밝혔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끔찍이 사랑했지요. 시경에도 실려 있습니다. ‘고공단보(태왕)께서 아침에 말을 달려 왔네. 서쪽 물가를 따라 기산(岐山) 아래에 오셨지. 마침내 아내 강녀(姜女)를 데려와 함께 집짓고 행복하게 살았지.’ 태왕이 다스리던 시대에는 안에는 시집 못 가 원망하는 여자가 없었고 밖으로는 옆구리 시린 남자가 없었답니다. 왕께서 만약 여자를 밝히신다면 백성들과 함께 하십시오. 여자를 밝히는 것이 왕도를 펴는 데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

맹자의 말에 따르면 주나라의 태왕은 자신이 여자를 밝히는 마음을 백성에게 미루어갔기 때문에 아예 홀아비와 과부가 생기게 하지 않았다는 거다. 여자를 밝히는 마음은 똑같았지만 한 사람은 칭송받고 또 한 사람은 스스로 부끄러워하기에 족했다.

주지육림과 유상곡수

어찌 재물과 여색의 경우만 그러하겠는가. 놀고 즐기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상(商)나라의 마지막 임금으로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여 나라를 망쳤던 주왕(紂王)은 달기(?己)라는 여인을 사랑하여 매일같이 연회를 베풀고 질탕하게 즐겼다. 사마천은 이때의 일을 ‘술로 못을 만들고 육고기로 숲을 만들었다[以酒爲池 以肉爲林]’고 기록했는데 이른바 ‘주지육림(酒池肉林)’은 여기서 비롯된 고사이다.

그런데 나이어린 성왕을 보좌하여 주나라를 반석에 올려놓아 유가의 성인으로 칭송받고 공자가 꿈에서 자주 만났던 주공 희단(姬旦)도 비슷한 일을 했다. 이른바 주나라의 동쪽 근거지 낙양을 경영하고 나서 유상곡수(流觴曲水)를 만들어 놓고 연회를 베풀며 즐긴 것이다. 유상곡수란 구비진 물가에 앉아서 술잔을 띄우면 술잔이 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물가에 닿으면 그 곳에 앉아 있던 사람이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식으로 노는 거다.

이게 얼마나 운치 있는 놀이인지는 후세에 왕희지가 난정에서 노닐 때 유상곡수에서 술 마시고 시를 지은 데서도 알 수 있고, 신라의 귀족들이 포석정을 만들어 놓고 논 데서도 알 수 있다.

한술 더 떠 조선의 박지원은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공작관(孔雀?)을 짓고 나서 거기에다 물길을 끌어들여 구비진 물길[曲水]을 만들고 연잎을 따서 술잔을 실어 보내면서 놀았으니[摘蓮葉以承杯 以泛以流] 그야말로 유상곡수의 최종 버전이라고 할 만한데 지금은 곡수유상은 말할 것도 없고 공작관의 흔적도 찾을 수 없으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중국 절강성 소흥의 난정(蘭亭), 가이드가 찍어준 사진인데 수평이 맞지 않았다

아무튼 주공이 즐겼다는 유상곡수도 술로 연못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술을 즐겁게 마시기 위해 흐르는 물길을 인공적으로 구불구불하게 만든 것이니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또한 주지육림 못지않게 성대한 연회였음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유상곡수라고 하면 세련된 문화적 행위로 인정받아 후세의 뜻있는 선비들이 앞 다투며 따르려 하고, 주지육림이라고 하면 폭정의 상징으로 여겨 한결같이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비난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난정에 있는 유상곡수, 붉은 글씨로 곡수유상(曲水流觴)이라고 씌어져 있다

 

맹자왈

임금이 백성들의 즐거움을 자기 즐거움으로 여기면 백성들 또한 그 임금의 즐거움을 자기 즐거움으로 여기고, 임금이 백성들의 근심을 자기 근심으로 여기면 백성들 또한 그 임금의 근심을 자기 근심으로 여긴다[樂民之樂者 民亦樂其樂 憂民之憂者 民亦憂其憂].

사랑과 무식은 감출 수가 없다고 한다. 부모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든 결국에는 자기 자식 이야기로 돌아간다. 이것이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부모의 자식 사랑이다. 그런데 맹자는 무슨 이야기에서든 결국 백성들에게로 마음이 가 닿는다. 맹자의 사랑이다.

전호근(철학, 민족의학연구원) /

맹자와 광화문[천하무적 맹자왈]

왕도와 패도의 사이

무력(武力)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문력(文力)?
아니다. 문력은 형용모순이다. 문은 힘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답은 문덕(文德)이다. 무력은 패자(覇者)의 수단이고 문덕은 왕자(王者)의 수단이다. 이 둘의 차이에 대해 맹자만큼 분명하게 이야기한 사람은 없다.

맹자왈

“힘으로 인(仁)을 가장하는 것이 패도이고, 덕으로 인(仁)을 실천하는 것이 왕도이다. 패도는 반드시 나라가 강대해야 할 수 있지만 왕도는 강대함이 필요하지 않다.”

그래서 맹자는 온 천하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도 ‘오직 인의가 있을 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맹자의 왕도는 공자의 덕치와 다르지 않다. 덕치는 결국 무력에 의존하지 않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노나라의 계씨가 부용국이었던 작은 나라를 공격하려 했을 때 공자는 “멀리 있는 사람이 복종하지 않으면 문덕(文德)을 닦아서 스스로 찾아오게 해야지 나라 안에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가?”하고 비판했다. 맹자의 왕도는 공자의 덕치를 이은 것이다. 맹자왈,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면 심복하지 않는다.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억지로 복종하는 것일 뿐.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면 진심으로 따른다. 마치 칠십 명의 제자가 공자를 따르던 것처럼.”

물론 공자도 맹자도 무력보다 문덕이 앞서는 정치가 베풀어지는 세상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들의 소망과는 달리 현실에서 군왕의 자리는 자주 물리적인 힘이 강한 자가 차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력만으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군왕들도 간간이 있었다.

유방, 말에서 내려오다

한나라 고조 유계(劉季)는 본래 ‘먹물’들을 싫어해서 유학자를 만나면 관을 벗겨 오줌을 갈겼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라이벌이었던 항우가 초나라 명문가 출신이었던 것과는 달리 유계는 시정에서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던 무뢰배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가장 친한 친구였던 번쾌는 바로 개를 잡는 개백정이었을 정도다.

아무튼 먹물을 그렇게 싫어하던 유계는 천하를 차지하고 난 뒤 이름을 방(邦)으로 바꾸고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이름 바꾸고 황제가 되어도 달라진 건 별로 없었다. 유방은 신하들과 한 방에서 같이 자기도 했고 그러다 보면 잠결에 신하의 발이 유방의 입에 들어가기도 했다. 또 어쩌다 연회를 베풀기라도 하면 공신들이 저마다 자신의 공을 자랑하다 황제가 있는 자리에서 칼부림을 하기가 일쑤였다.

그런 그에게 만나기만 하면 늘 유가의 시서(詩書)를 이야기한 자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육가였다. 얼마나 자주 시서를 들먹였던지 한번은 유방이 짜증을 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사람인데, 시서 따위를 어디에 쓴단 말이냐?”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습니다. 옛날 탕왕과 무왕은 신하로서 자기 임금을 죽이고 새로 천자가 되었지만, 천하를 얻은 뒤에는 문(文)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 포악한 진나라는 무력에 의지했기 때문에 쉽게 망한 것입니다. 만약 진나라가 인의(仁義)로 천하를 다스렸던들 폐하께서 어떻게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

시변(時變)을 따른 굽은 유자, 황제의 권위를 세우다

생각을 바꾼 유방은 그 때부터 말에서 내려와 유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부하들의 무질서한 모습을 볼 때마다 무력(武力)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이다. 그런 유방의 마음을 파고 든 사람 중에는 숙손통도 있었다. 숙손통은 본래 진나라의 박사로, 2세 황제 호해를 섬기다가 도망쳐 항량의 신하가 되었다가 다시 초나라 회왕을 섬겼다가 회왕이 세력을 잃자 다시 항우를 섬겼다가 항우가 패하자 유방에게 항복한 자다. 그가 유방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릇 유학자란 함께 진취하기는 어렵지만 이룬 것을 지키는 데는 제법 쓸모가 있습니다. 원컨대 신은 노나라의 유생들을 불러 신의 제자들과 함께 조정의 예법을 제정할까 합니다.”
“좋소. 하지만 나같이 글을 잘 모르는 사람도 따라할 수 있도록 쉽게 제정해 보시오.”
이렇게 해서 숙손통은 노나라로 가서 유생 30여명을 조정으로 가게 했다.

그런데 노나라의 유학자 중 두 사람만은 이렇게 말하면서 숙손통을 따르지 않았다.
“당신이 섬긴 군주는 열 명이 넘더군요. 게다가 모두 아첨으로 그들과 가까이했더군요. 지금 천하가 전쟁이 막 끝나서 아직 죽은 이를 장사 지내지도 못했는데 예악을 일으키려 하니 옳지 않소. 예악은 모름지기 백 년이 지난 뒤라야 일으킬 수 있는 것이라오. 그대는 가보시오. 나를 더럽히지 말고!”

숙손통은 그들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비루한 유학자야. 시변(時變)을 모르는구만.”
숙손통을 따라가지 않은 두 명의 유학자가 누구인지 전해지지 않는다. 모름지기 권력자가 부를 때 따라가지 않으면 이름이 전해지기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저들 덕분에 노나라의 유학자 중 30분의 2, 곧 15명 중에서 적어도 한 명은 숙손통 같은 자를 따라가지 않고 자신을 뜻을 지켰다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이 나라의 지식인들 중 저 두 사람 같은 이가 몇 명이나 될까?

그런데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한 숙손통을 두고 사마천은 “때에 맞추어 자신을 바꿈으로써 마침내 한나라의 유종(儒宗)이 되었다[與時變化 卒爲漢家儒宗]. 큰 정직은 굽은 것처럼 보이고, 길은 본래 구불구불한 법[大直若? 道固委蛇]”이라고 칭찬했다. 뒷말은 그대로 두더라도 공안국이나 원고생, 또 동중서나 복생을 놔두고 숙손통을 한나라의 유종이라 했으니 이른 바 유종이라는 자들이 늘 아첨이나 하는 자들임을 사마천은 알았던 걸까?

아무튼 유방은 숙손통을 등용해서 노나라에 전해지던 유가의 예법으로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데 성공했다. 이후 한나라는 고전 텍스트를 적대시했던 진나라와는 달리 고전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적극적인 방식으로 지배를 공고히 한다. 이른바 문치를 내세운 것이다.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전해지는 춘추가 한나라의 천하가 도래할 것이라는 예언서로 둔갑한 것이나 고대 제왕의 치도를 기록한 상서를 국가통치의 전범으로 삼기 위해 제남의 복생으로 하여금 상서를 복원케 한 것도 모두 그런 시도의 일환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시도는 한나라의 정통성을 강화하여 온갖 내외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전한과 후한왕조를 각각 200년씩 존속시키는 대성공을 가져왔다. 한나라를 이어 천하를 차지했던 위(魏)나라, 그리고 위나라를 이은 진(晉)나라, 그리고 동시에 발호했던 수많은 왕조들이 얼마나 쉽게 무너졌는지를 상기한다면 한나라의 정통성이 얼마나 단단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아침에 황제가 되었다가 저녁에 폐위당했다고 말할 정도니 말이다.

이후 중국의 역대왕들은 한나라처럼 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저마다 유가문헌의 권위를 빈 문치를 내세웠다. 이를 테면 아버지를 부추겨 반란을 일으킨 다음 형과 동생을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을 거쳐 황제가 된 당나라 태종은 유가문헌의 통일적인 해석을 위해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역시 쿠데타로 집권한 송태조 조광윤도 문치를 내세워 송나라를 다스렸고, 심지어 이민족으로 중국을 지배한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도 문치를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말만 그랬지 실제로 문치에 성공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무력을 통하지 않고 통치에 성공하는 것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문인이 쓴 글을 빌미로 사람을 죽인 역대의 숱한 문자옥들은 문치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려주고 있다.
하지만 드물게나마 문치에 성공한 나라가 있는데 그 중의 대표를 들라면 조선왕조라 할 수 있다.

문자의 나라, 조선

조선이 문치에 성공했다는 사실은 우선 방대한 기록의 생산, 곧 문자의 생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은 글자수가 5천만 자에 달한다. 5천만자가 어느 정도 분량이냐 하면, 전설의 시대인 황제(黃帝) 때부터 근세에 이르는 청나라 때까지의 역사를 각 왕조별로 기록한 중국의 역사서를 모두 합친 25사보다 1,000만자가 더 많은 양이다. 게다가 실록의 자료가 되었던 승정원일기는 무려 2억 5천만자에 달하니 단일 기록물로서는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실로 엄청난 양의 기록물이다. 게다가 이런 기록의 생산을 담당했던 사관들에게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할 수 있도록 독립적 지위와 익명성을 보장하였으며 수장된 기록은 임금을 포함한 누구도 열람할 수 없게 하여 기록의 공정성을 확보하였다.

조선이 문치의 나라였다는 또 다른 근거로 임금이 매일 참여했던 경연(經筵)을 들 수 있다. 경연은 3정승과 6승지를 비롯한 조정의 주요 대신들이 모두 참여하는 행사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경연청에 모여 사서오경과 통감강목, 성리학 관련 문헌을 읽었는데 특히 사서오경은 주석까지 빠짐없이 통독하였으며 통감강목 등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경연은 제왕을 상대로 한 교육제도의 백미이면서 동시에 정책협의기구 역할도 했는데 임금과 조정의 대신들이 함께 고전을 읽고 난 뒤에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모습은 세계사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로, 상상만 해도 참으로 아름다운 정경이다. 동시대 다른 지역의 최고 권력자들이 주로 어떤 일로 하루를 보냈는지 비교해 보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조선이 문치를 표방한 것은 태조 이성계의 즉위교서에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왕이 되고 난 뒤에 이름을 단(旦)으로 고친 태조는 즉위교서에서 이렇게 밝혔다.
“홀아비, 과부, 고아, 의지할 곳 없는 노인은 왕도정치를 베풀 때 가장 먼저 보살펴야 할 사람들이니 마땅히 불쌍히 여겨 돌보아야 할 것이다. 해당 지역의 관청에서는 굶주리고 궁핍한 사람을 구휼하고 부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라.[鰥寡孤獨 王政所先 宜加存恤 所在官司 賑其飢乏 復其賦役]”
명백하게 왕도(王道)를 천명한 것이다. 이 교서는 정도전이 작성한 것인데 그는 조선왕조를 개창하면서 때에 따라 혁명론과 왕도론을 적절하게 아울러 수용했다는 점에서 맹자의 후예라고 해도 크게 손색이 없다.

사람의 빛, 광화문

조선이 문치의 나라였다는 근거는 또 있다. 조선의 궁궐은 모두 문덕(文德)으로 다스린다는 의미를 정문에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궁궐은 경복궁이다. 규모가 크다 하지만 사다리만 걸치면 누구든지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그리 높지 않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어 군사적인 방어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건축물이다.

일본의 오사카성이나 니조조성이 군사적 침공에 대비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오사카성, ⓒ전호근

게다가 경복궁의 ‘경복(景福)’은 큰 복이라는 뜻으로 시경에 나오는 말인데 덕으로 배부른 사람에 관한 이야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이미 술에 취하고 또 덕으로 배부르니
군자여! 영원토록 너에게 큰 복이 있기를 바라노라.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

이 경복궁의 정문이 광화문인데 광화문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세종 8년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세종 8년에 집현전 수찬에게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정하게 했다고 했고, 근정전(勤政殿) 앞 둘째 문을 홍례(弘禮), 세째 문을 광화(光化)라 했다고 한 기록이 있다.

光化의 ‘光’자는 ‘빛’이란 뜻으로 새기지만 사실은 ‘사람의 빛’이다. ‘光’자의 갑골문은 사람을 뜻하는 ‘人’자의 윗부분이 ‘별 모양’이 그려져 있는데 별 모양은 빛을 묘사한 것으로 光자가 사람에게서 나오는 빛임을 말해준다. 또 고문의 光자는 위에 불을 뜻하는 ‘火’자가 있고 아래에 ‘人’자가 있는 光자가 많이 나오는데 역시 사람의 빛을 나타내는 글자이다. 따라서 광화란 사람의 빛, 곧 덕으로 다스린다는 뜻이다.

경복궁뿐 아니라 창덕궁은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은 홍화문(弘化門), 덕수궁은 인화문(仁化門)이다. 돈화(敦化)는 중용에 나오는 말로 대덕(大德)을 형용한 것이고, 홍화(弘化)는 서경에 나오는 말로 역시 큰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인화(仁化)’의 ‘仁’은 말할 것도 없이 덕의 으뜸이다. 결국 조선 궁궐의 문들은 모두 큰 덕으로 백성들을 감화시킨다는 뜻을 새겨둔 셈이다.

광화문의 현판 글씨를 쓴 사람이 누군지 찾아 봤더니 훈련대장 아무개가 썼고,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문화재청에서 디지털로 복원해서 다시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고종실록에 따르면 애초에 대원군이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사대문의 현판글씨를 모두 무인에게 맡겨 쓰게 했다. 아마도 나라가 외침에 시달려 위태로운 마당에 무인의 힘찬 필치를 빌려 왕실을 위엄을 세우려 했을 것이다.

그런 광화문 현판에 금이 갔다. 그것도 하필 사람의 빛, 곧 문덕을 나타내는 ‘光’자에 금이 간 것이다. 오직 강경 일변도의 대북 정책으로 일관해 오다 결국 무력을 앞세운 분쟁을 초래한 이 정부의 어리석음을 광화문은 알았던 걸까?

 

갈라진 광화문 현판, ⓒ전호근

맹자왈

“어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고운 마음을 아직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미루어 가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미운 마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미루어 간다.[仁者 以其所愛 及其所不愛 不仁者 以其所不愛 及其所愛]”

그리고 또 맹자왈

“다른 사람을 사랑했는데 그 사람과 친해지지 않으면 내가 정말 그를 사랑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하고 다른 사람을 다스렸는데 다스려지지 않으면 내가 슬기로웠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愛人不親 反其仁 治人不治 反其智]”

전호근(철학, 민족의학연구원) /

맹자와 가을[천하무적 맹자왈]

공자의 낙, 장자의 낙

햇살 좋은 가을이다. 지난 여름, 유난히 비가 많았던 탓인지 가을 햇살이 새삼 좋다. 얼마간 만나는 사람한테마다 가을볕을 즐기라는 인사가 절로 나왔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이렇게 좋은 가을날이면 맹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맹자와 가을이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맹자에는 가을의 낭만을 떠올릴 만한 구절이 없다.

공자야 한번 재미에 빠지면 밥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어 늙는 줄도 모른다고 스스로 말한 적이 있으니 가을 꽤나 탓을 법하다. 실제로 공자의 학당에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것은 공자의 개인적 취향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제나라에서 순임금이 작곡했다는 소악을 듣고 석 달 동안 고기맛을 알지 못했다고 했으니 정말 대단한 마니아가 아닌가.

사실 가을의 낭만이라면 아무래도 장자가 제격이다. 송나라 왕안중이 “책을 펼치면 바람소리가 난다.”고 감탄했던 장자 제물론 ‘대지의 노래 천풍부(天風賦)’는 깊어가는 가을밤에 읽으면 머리카락이 쭈뼛하고 소름이 돋는다. 뿐만 아니라 걸핏하면 낭만 중의 으뜸이라 할 맹랑한 이야기〔孟浪之言〕, 황당한 이야기〔荒唐之辭〕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이가 바로 장자다.

그런데 맹자에게는 눈을 씻고 다시 봐도 그런 낭만이 없다. 그러니 맹자가 재미없는 사람이라는 비난도 나름 일리가 있다. 이쯤 되면 맹자를 읽은 사람으로서 뭔가 변명이라도 해야겠다는 의무감이 생긴다.

하긴 맹자야 “임금의 푸줏간에 살찐 고기가 가득하고 마구간에는 살찐 말이 가득한데 백성들의 얼굴에는 굶주린 기색이 역력하고 들에는 굶어죽은 시체가 널려 있다.”고 말했으니 가을의 낭만 따윈 애초에 말도 꺼내기 어렵다.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는데 가을에 빠져 정신 못 차린다면 필경 맹자의 죄인이 될 터.

여민락(與民樂)

곰곰이 생각해보니 공자만큼은 아니지만 맹자도 음악을 좋아했다.

제나라 선왕의 신하 장포가 맹자를 찾아와 이렇게 물었다.
“왕께서 저에게 음악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이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정치에 도움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신다면 제나라는 왕도에 그만큼 가까워졌다 할 수 있습니다.”

맹자는 선왕을 찾아가서 이렇게 물었다.
“들으니 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신다고요?”

선왕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아, 아니. 제가 무슨 클래식을 좋아한다는 게 아니고 그저 요즘 유행하는 세속의 음악을 좋아할 뿐입니다.”
선왕은 맹자한테 또 뭐라 한소리라도 들을까 전전긍긍했다. 맹자는 클래식 음악의 전문가 아니던가.

그런데 맹자의 대답은 의외였다.
“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신다면 그만큼 제나라는 왕도에 가까워진 것입니다. 옛 음악이나 지금의 음악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선왕은 솔깃해졌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맹자가 되묻는다.
“음악을 혼자서 즐기는 것과 여럿이 함께 즐기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즐겁습니까?”

“그야 여럿이 즐기는 게 더 즐겁지요.”

맹자가 또 묻는다.
“그럼 적은 수의 사람과 음악을 즐기는 것과 많은 수의 사람과 음악을 즐기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즐겁습니까?”

“많은 수의 사람과 함께 즐기는 것이 더 즐겁습니다.”

비로소 맹자왈
“잘 아시는군요. 이제 제가 왕을 위해 음악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왕께서 여기서 음악을 연주한다 칩시다. 그런데 백성들이 왕의 음악 소리를 듣고 모두 이맛살을 찌푸리며 ‘우리 임금, 음악 참 좋아하시는구만. 그런데 대체 어찌하여 우리들을 이 지경에 빠뜨렸단 말인가. 부모와 자식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형제와 처자식이 흩어지지 않았는가?’하고 말한다면 이는 다른 까닭이 없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즐기지 않고 임금 홀로 음악을 즐겼기 때문입니다.”

선왕의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맹자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지금 왕께서 여기서 음악을 연주하시는데 백성들이 왕의 음악 소리를 듣고 모두 기뻐하며 ‘참 다행히도 우리 임금님께선 건강하신가 보다. 어쩌면 저렇게도 음악을 잘 연주하실까?’하고 말한다면 이는 다른 까닭이 없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즐겼기 때문입니다.”

“…”
선왕은 대답이 없었다. 물론 선왕뿐만 아니라 맹자가 살던 시대, 그 누구도 ‘백성과 함께 즐기라’는 맹자의 이 말에 호응하지 못했다. 그 대답을 듣기 위해 맹자는 천 년을 기다려야 했다.

 

악양루에 올라 답하다

악양루에서 바라본 동정호, ⓒ전호근

때는 1045년 봄, 그러니까 맹자가 세상을 떠난 지 1,300년도 더 지난 뒤다. 송나라 인종 때의 재상 범중엄은 절친한 친구이자 파릉군 태수였던 등자경(?子京)의 초청을 받고 파릉 최고의 명승지인 동정호 악양루에 올랐다. 동정호는 먼 산을 머금고 긴 강을 삼켜 호호탕탕 끝이 없어 북쪽으로는 무협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소상강에 닿아 있다. 자고로 귀양 가는 나그네와 근심을 품은 시인들이 이곳에 모였으니 아득한 동정호를 바라보는 심정이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장맛비가 끊이지 않아 여러 달 동안 비가 내리며, 사나운 바람이 울부짖고 흐린 물결이 공중을 치며, 해와 별이 빛을 숨기고 산악의 모습이 잠기며, 장사꾼과 여행객들의 자취가 끊어지고 돛이 꺾이고 노가 부러지며, 초저녁부터 날이 캄캄해져 범이 으르렁거리고 원숭이가 운다. 이런 때에 이 누대에 오르면 서울을 떠나 고향을 그리워하고 헐뜯는 말과 비웃음을 두려워하여 눈에 가득한 온갖 것이 쓸쓸하여 감정이 극에 달해 슬퍼할 것이다.

범중엄은 악양루에 올라 먼저 이곳에서 근심에 지쳐 눈물 흘린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 이렇게 이야기했다. 반면 화창한 날 악양루에 올라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는 사람의 마음도 이렇게 헤아린다.

봄기운이 화창하여 경치가 밝고 물결이 고요하며, 위아래의 하늘빛이 오직 푸른색으로 아득하고 모래사장의 흰 새들은 날갯짓하며 내려앉고, 비단 비늘의 물고기가 이리저리 헤엄치고 강둑에 향기로운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며, 혹 긴 연기가 허공에 날리고 밝은 달이 천리를 비춘다. 떠도는 빛은 황금이 뛰는 듯하고 고요한 그림자는 구슬이 잠긴 듯한데, 고기 잡는 이들이 뱃노래를 주고받으니 이 즐거움이 언제 끝날까?

범중엄은 시간을 거슬러 이렇게 악양루에 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다가 사람들의 근심과 걱정을 두루 어루만지던 옛 어진 사람의 자취를 찾아보려 한다.

아! 내 일찍이 옛 어진 사람의 마음을 찾아보니 아무래도 이 두 부류와는 다른 듯하다. 어째서인가? 옛사람은 외물 때문에 기뻐하지 않고 자기 때문에 슬퍼하지 않으니〔不以物喜 不以己悲〕 뜻을 얻어 높은 자리에 앉게 되면 늘 백성들을 근심하고 멀리 떨어져 강호에 머물더라도 나라를 근심한다. 그저 나아가도 근심하고 물러나도 근심뿐이다〔進亦憂 退亦憂〕.

 

범중엄과 등자경 ⓒ전호근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옛 사람에게 물을 것이다. 당신은 도대체 언제 즐기냐고?
범중엄도 그것이 궁금했다. 그런데 그는 궁금한 동시에 이미 대답도 알고 있었다. 범중엄이 들려주는 옛사람의 대답,

천하 사람들의 근심에 앞서서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다 즐거워 한 뒤에 즐거워 할 것이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

범중엄이 말한 옛 어진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맹자다.

맹자의 낙

그러고 보니 제나라 선왕이 맹자를 아름다운 별궁으로 초대한 다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당신 같은 현자도 이런 정취를 즐기나요?”
맹자왈
“임금이 백성들의 즐거움을 자기 즐거움으로 여기면 백성들 또한 그 임금의 즐거움을 자신들의 즐거움으로 여기며, 임금이 백성들의 근심을 자기 근심으로 여기면 백성들 또한 그 임금의 즐거움을 자신들의 즐거움으로 여깁니다. 천하로써 즐기고 천하로써 근심하는〔樂以天下 憂以天下〕 이가 바로 왕자(王者)입니다.”

홀로 즐기지 말고 천하의 백성들과 함께 즐기라는 뜻이다. 맹자한테는 아름다운 음악이나 풍경이 주는 즐거움보다도 그 모든 걸 백성과 함께 하는 즐거움이 더 소중했던 모양이다. 이 가을, 맹자가 여기 오면 낭만을 즐길 길이 없으리라. 맹자는 이상한 낭만주의자다.

전호근(철학, 민족의학연구원) /

공자의 말, 맹자의 말[천하무적 맹자왈]

공자의 바른 말[正言]

노나라의 실권자였던 계강자가 공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도둑질하는 백성들이 많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공자왈
“당신이 도둑질하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상을 주어도 도둑질하지 않을 게요.”
“…”
공자는 노나라에서 벼슬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제자 자로가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모셔서 정치를 하려 합니다. 위나라에 가시면 무슨 일부터 하시겠습니까?”
공자왈
“반드시 윗사람의 명분부터 바로 잡아야지.”
“글세, 이렇다니까. 선생님, 그딴 건 뭣하러 바로 잡습니까?”
“모르면 잠자코 있거라. 명분이 바로 서지 않으면 백성들이 손발 둘 곳이 없어진다.”
“…”
공자는 위나라에서도 벼슬할 마음이 없었나 보다.

 

공자의 초상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공자왈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합니다.”
공자는 제나라에서도 벼슬할 생각이 없었던 게다. 모름지기 통치자를 바로잡으려 하면 벼슬하기 어려운 법이니.

등용되기 위해서 이리 저리 돌려서 말하는 법이 없다. 그게 공자의 바른 말이다.

맹자의 직언(直言)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신하의 도리에 대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신하 말입니까? 동성지신(同姓之臣 : 왕과 같은 성씨로서 신하 노릇하는 사람, 왕과 혈연이기 때문에 때에 따라 왕이 될 수도 있다) 말입니까? 아니면 이성지신(異姓之臣 : 다른 성을 가진 신하) 말입니까?”
“우선 같은 성씨를 가진 신하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맹자왈
“동성지신은 임금이 잘못을 저지르면 간하고 간해도 듣지 않으면 임금을 바꿔 치웁니다.”
“…!”
왕의 얼굴색이 안정을 찾은 뒤에 다시 이성지신에 대해 물었다.
“이성지신은 임금이 잘못을 저지르면 간하고 간해도 듣지 않으면 떠납니다.”
“…”
이러니 맹자가 제나라에서 끝내 벼슬하지 못한 게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제나라 선왕은 맹자에게 어떤 대답을 기대했을까? 아마도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상투적인 대답이었을 게다. 그럼 맹자는 상투적인 말을 전혀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는 않다. 맹자도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했다.

제나라가 등나라에 가까운 설나라에 공격용 성을 쌓자 등나라 문공이 걱정하면서 맹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제나라가 설나라에 성을 쌓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공격해올까 두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맹자왈
“목숨을 걸고 지키든가 아니면 떠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
등나라 문공은 속으로 ‘이것도 조언이라고 하는가?’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봐도 맹자의 이야기는 조언이라기엔 너무나 무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곧이곧대로 일러준 말이다. 도리가 본래 이런 것이다. 도리를 벗어나 뭔가를 하려하면 마침내 상앙이나 이사, 한비자처럼 권모술수에 빠지게 된다.

맹자의 고국인 추나라가 이웃 노나라와 싸워서 패했다.
추나라 목공이 맹자에게 물었다.
“과인의 신하 33명이 이번 전쟁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한 명도 죽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을 죽이자니 이루 다 죽일 수 없고 그대로 두자니 윗사람이 죽는 것을 구하지 않은 것이 미우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맹자왈
“임금께서는 백성들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백성들이 이제야 보복을 한 것입니다.”
“…”
자신의 고향이라고 해서 예외가 없다. 그저 곧이곧대로 대답하니 통치자로서는 당연히 듣기 괴롭다.

상앙의 허튼 소리[浮言]

강대국 진나라의 승상이 되었던 상앙은 일찍이 양나라 혜왕 밑에 있었지만 등용되지 않자 앙심을 품고 진나라 효공을 찾아갔다. 상앙은 효공의 측근이었던 경감의 소개로 효공을 만났다.

첫 번째 대면이 끝나고 나자 효공은 경감에게 “그대가 소개한 자는 미친 놈이야. 어찌 쓸 수 있겠는가?”하고 크게 꾸짖었다. 경감이 그대로 전하자 상앙은 한 번 더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두 번째 만남이 끝나고 나자 효공은 이번에도 경감을 꾸짖었다. 경감이 다시 상앙을 꾸짖자 상앙은 한 번 더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상앙을 세 번째 만나고 난 뒤 효공은 경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소개한 객은 훌륭한 사람이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만하다.”

상앙이 다시 효공을 만났는데 이번에는 며칠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도 효공이 싫증내지 않았다. 나중에 경감이 상앙에게 어떻게 임금의 환심을 얻었느냐고 물었다. 상앙은 이렇게 대답했다.

“처음에 나는 요순의 정치 곧 무위를 근간으로 하는 제도(帝道)정치에 관해 이야기를 했지요. 임금께서 하품을 하며 들은 체 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두 번째 만날 때는 인의를 종지로 삼는 왕도(王道)정치를 이야기했더니 이번에도 임금께서 좋아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세 번째는 힘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패도(覇道)정치에 관해 이야기를 했더니 임금께서 크게 관심을 보이고 좋아하시더군요. 그래서 네 번째 만남에는 다시 가혹한 법률로 백성들을 통치하여 나라를 강하게 하는 법술을 이야기했지요. 그랬더니 저리 좋아하시는 겁니다.”

진나라 효공이 원했던 정치는 어떤 것이었을까? 말 할 것도 없이 ‘강국지술(强國之術)’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상앙이 원했던 정치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런 거 없다. 상앙은 그저 상대가 원하는 대답을 해줄 뿐이다. 그래서 제도, 왕도, 패도, 법치를 차례대로 말한 것이다. 뭐든지 팔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사마천이 그가 한 말을 두고 허튼 소리[浮說]라고 낮추어 볼 만 하다.

한비자의 난언(難言)

상앙이야 출세에 눈이 어두웠으니 그렇다 치고 춘추전국시대를 통틀어 유일한 공족 출신 사상가였던 한비자는 어떨까? 그는 한 마디로 유세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규정했다.

“유세의 어려움은 나의 식견이 유세할 만한가 아닌가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 말재주가 뛰어난가 아닌가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며 내가 말을 잘 못하여 뜻을 제대로 전달하기가 어려운 데 있는 것도 아니다. 유세의 어려움은 오직 유세의 상대인 군주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내 거기에 내 말을 맞추기가 어렵다는 데 있다. 유세의 상대가 고명한 도리를 숭상하는데 실리를 가지고 유세하면 하급의 인물로 보고 천시할 것이다. 반대로 상대가 이익을 좋아하는데 고명한 도리로 유세하면 세상일에 어두운 자라 여겨 거두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유세의 상대가 속으로는 이익을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고명한 도리를 좋아하는데 이런 경우에 고명한 도리로 유세하면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멀리할 것이고, 이런 경우에 실리로 유세하면 몰래 그 계책을 쓰면서도 겉으로는 버릴 것이다…”

그럼 한비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겉으로는 고명한 도리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이익을 챙길 수 있게 유세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무릇 권력자의 변심이란 언제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비자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용(龍)이란 짐승은 유순할 때는 살살 달래서 타고 놀 수도 있다. 하지만 목 아래에 거꾸로 돋아난 비늘 역린(逆鱗)이 있는데 자칫 그걸 잘못 건드리면 반드시 사람을 물어 죽인다.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다. 유세하는 사람이 군주의 역린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유세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유세하는 방법에 밝았던 한비자도 진나라에 갇혀 그 잘난 유세술을 제대로 한 번 펼쳐보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으니 사마천이 슬피 여길 만하다.

하지만 나는 한비자가 자신을 유세술을 펼칠 기회를 가졌다 하더라도 성공하지 못했을 것을 안다. 모름지기 권력자의 변심은 그가 스스로 미자하의 여도지죄(餘桃之罪)에서 말한 것처럼 아무런 까닭이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아래에 있는 사람이 어찌해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아래에서 상대의 기분에 맞추려고 애쓰는 사람은 권력자에게 하절(下節)로 폄하되어 유세에 성공하지 못할뿐더러 설혹 운이 좋아 유세에 성공하더라도 두고두고 오욕의 삶으로 비난받을 것이다.

일찍이 정이천이 신불해나 한비자는 천박하고 비루하다(申韓則淺陋易見)고 낮게 평가한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다 할 것이다.

그럼 뒤따르는 수레가 수십 대에다 수행하는 제자 수백 명과 함께 위세 당당하게 제후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밥 얻어먹으면서도 하고 싶은 말 다 했던 맹자는 어떤 방법으로 유세했을까? 맹자는 일찍이 송구천에게 유세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맹자왈
“남이 알아주더라도 떳떳하고 당당하며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행동할 뿐이다. 옛 사람들은 뜻을 얻어서는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쳤고, 뜻을 얻지 못해서는 몸을 닦아서 세상에 드러났다. 곤궁하면 홀로 자신을 선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 사람들과 함께 선을 실천한다. 곤궁해도 의리를 저버리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고 영달해도 도리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망하지 않는다.”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철학) /

천년의 금서, 맹자[천하무적 맹자왈]

가장 오래된 책의 운명.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금서는 무엇일까? ‘시서’다. 그런데 시서는 가장 오래된 책이기도 하다. 시서는 시경과 서경을 합쳐서 일컫는 말인데, 시경은 기원전 1,000년 무렵부터 민간에 널리 암송되었던 시를 모아놓은 책이고 서경 또한 그 무렵을 전후한 역사 기록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둘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책이자 유가를 대표하는 문헌이기도 하다.

가장 오래된 책과 가장 오래된 금서가 일치한다는 사실은 결국 모든 책은 누구에겐가 금지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음을 일러주는 셈이다. 게다가 그 책들이 유가를 대표하는 문헌이라는 점은 유가의 지향이 어디에 있는지 시사해 주는 바가 있다. 그런데 이 책들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서 금지했던 자는 역설적이게도 시서의 전문가 순자로부터 유가의 세례를 받았던 이사(李斯)였다. 화란의 씨앗은 유가의 내부에서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이사의 말을 빌리면 이 두 책은 ‘옛 것을 가지고 지금을 비난〔以古非今, 道古以害今〕’하기 때문에 제국의 통치에 방해가 된다. 맞는 말이다. 천하가 이미 진나라로 통일된 마당에 이런 저런 말이 많은 유가는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될 수밖에. 게다가 이사는 본디 유가에 맺힌 원한이 있었다.

일찍이 스승 순자에게 유가의 인의가 무용하다고 논쟁을 걸었다가 “근본은 팽겨쳐 두고 말단만 뒤지는 바로 너 같은 자들 때문에 천하가 어지러워지는 것〔今女不求之於本 而索之於末 此世之所以亂也〕”이라고 인격적 모독을 받지 않았던가. 그는 진나라로 떠나면서 순자에게 이렇게 하직 인사를 올렸다.

“부끄럽기는 비천보다 더한 게 없고 슬프기로는 가난보다 더 심한 게 없습니다. 오랫동안 곤궁하게 살면서 세상을 비난하고 이익이 싫다고 하는 일 없이 몸을 맡기는 것은 선비의 본 모습이 아닙니다〔?莫大於卑賤 而悲莫甚於窮困 久處卑賤之位 困苦之地 非世而惡利 自託於無爲 此非士之情也〕.”

스승 순자에게 선비답지 못하다고 칼을 던지고 떠난 셈이다. 순자가 그에게 뭐라고 말해주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진나라를 말세로 규정했던 스승 순자에게 보란 듯이 천하를 진의 제국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자신이 무용하다고 생각했던 인의의 무력함을 직접 보여주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진시황제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말했다〔昧死言〕, 인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떠받드는 책을 불태우고 그 추종자들을 생매장하라고.

죽음을 무릅쓰는 집요함은 아무래도 스승에게 버림 받은 콤플렉스가 작용한 듯하다. 이른바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이렇게 이사의 개인적 한풀이가 강하게 작용해서 일어난 사건이다.

‘분서’는 책을 불태운다는 뜻이고 ‘갱유’는 유학자들을 생매장한다는 뜻이다. 책만 불태우면 될 것을 왜 사람까지 생매장했을까? 문(文)과 헌(獻)을 모두 없애기 위해서다. 흔히 문헌(文獻)으로 붙여 쓰는 ‘문’과 ‘헌’은 본래 ‘전적’과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문자를 담는 가장 훌륭한 매체는 사람이 아닌가.

아무튼 이사는 시황제에게 시서와 백가의 말을 기록한 책은 모두 불태우도록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 불태우지 않을 책으로 의약과 복서 그리고 농사일 따위를 기록한 실용서를 꼽았다.

이 당시 맹자의 책 또한 불태워졌을 것이다. 맹자는 시서백가의 말이 아닌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실용서에 포함되는 책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맹자는 시서처럼 구체적으로 지목되면서 불살라지는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다. 이른바 맹자는 당시까지 시서와 같은 경(經)의 지위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맹자가 경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은 송나라에 접어들어서 당시까지 12경이었던 유가문헌을 13경으로 확정하면서부터이고 맹자의 수난은 맹자가 경으로 확정되고 나서 공자의 사당에 배향되면서 일어났다.

엽기적인 탄압

역사에 기록된 가장 엽기적인 맹자 탄압 사건은 명대에 이르러 일어났다. 주인공은 무한의 권력자였던 명태조 주원장이다. 어느 날 그가 책을 읽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소리치며 신하들에게 명령했다.

“이 늙은이가 지금 살아 있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당장 이 자의 신주를 사당에서 내치고 책을 불태워라.”

그는 무슨 책을 읽고 있었던 것일까? 짐작하는 대로 그는 맹자를 읽고 있었다. 어떤 대목이 그를 그렇게 광분하게 했을까? “임금이 신하를 지푸라기처럼 여기면 신하는 임금을 원수처럼 여긴다〔君之視臣 如土芥 則臣視君 如寇?〕.”고 한 대목!

그가 보기엔 그런 말은 신하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이다. 명령을 내린 뒤 그는 이 문제로 간하는 자가 있으면 대불경죄로 다스릴 것이라고 신하들에게 경고했다. 형벌에 ‘대’자가 붙으면 ‘죽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당시 전당(錢唐)이라는 신하가 ‘죽음을 무릅쓰고’ 그에게 간했다. 주원장이 죽이겠다고 하자 그는 이렇게 받아쳤다.

“신이 맹자를 위해 죽는다면 죽어서 영예가 길이 빛날 것입니다.”

명 태조 주원장의 초상
주원장이 어떤 사람인가? 그는 추한 용모 만큼이나 더러운 성질로 황제가 되는 과정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황제가 되고나서도 족히 5만명은 죽인 사람이다. 게다가 자신이 비천한 시절 절에서 머리 깎고 청소한 이력이 부끄러웠던 걸까. 자신의 빛나는 머리를 풍자한다고 하여 모든 문서에 ‘光’자를 못 쓰게 한 인물이다.

그런데도 전당은 죽을 각오를 하고 맹자의 복권을 위해 간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어쩐 일인지 사람을 밥 먹듯이 죽이던 주원장도 전당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죽이지 않았다. 또 얼마 후 그의 간언을 따라 맹자를 공자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도록 허락하였다. 목숨을 걸고 간했던 전당은 그가 바라던 대로 나중에 맹자의 사당에 배향되어 명조가 망할 때까지 제사를 받아먹었으니 죽지 않고도 영예를 길이 누렸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주원장은 끝내 맹자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당 같은 신하가 목숨을 걸고 간하는데 맹자를 불태우거나 하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한림학사였던 유삼오(劉三吾)를 불러서 맹자 다이제스트, 곧 ‘맹자절문(孟子節文)’을 만들게 했다. 맹자에 있는 글 중 내용이 불온하다 싶은 부분을 삭제하고 검열판을 만든 것이다.

유삼오는 모두 260장인 맹자 중 무려 88개장을 삭제하고 172개장만 남겨두었는데 글자수만 따진다면 거의 절반을 삭제했다. 어떤 대목을 삭제했을까? 맹자가 폭군을 비난하는 대목은 모두 삭제했다. 물론 맹자가 백성이 존귀하다고 한 대목도 삭제했다. 인정을 말하는 대목, 왕도를 말하는 대목도 삭제하고, 혁명을 말하는 대목은 당연히 삭제했다. 맹자 맞아?

그렇게 만든 맹자절문을 과거시험 교과서로 지정했다. 하지만 맹자절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홍무27년(1394)에 반포되어 과거시험 교재로 쓰이다가 영락12년(1414) 성조의 명으로 호광(胡廣) 등이 찬한 사서대전의 맹자를 과거교재로 쓰면서 맹자절문은 세상에서 잊혀졌다. 주원장의 맹자 탄압은 고작 20여 년 만에 끝난 셈이다.

아무튼 절대권력을 원했던 주원장이 맹자를 탄압한 것은 목적에 비추어 볼 때 적절했다 할 것이다. 최소한 맹자가 절대 권력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제대로 알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 나라 공안기관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불온문서 검토대상에 올려놓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탄한 적이 있다. 선정자가 목적에 비추어 책을 제대로 읽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적을 바로 알아본 셈이다. 그런데 이들은 최근에도 21개 도서를 불온서적으로 지정한 적이 있다. 개중에는 이게 왜 불온서적인지 알 수 없는 책도 있었다. 게다가 어떤 지식인은 자기 책이 불온서적으로 지목당하지 않은 것을 두고 자신의 미온적인 삶을 반성하기도 했다.

다른 건 차치하고, 공안기관이 자신들의 목적한 바를 이루려면 이제라도 맹자를 불온서적 목록에 추가해야 하지 않을까?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철학)

맹자의 임금 길들이기[천하무적 맹자왈]

나도 감기 걸려서.

맹자가 막 제나라 왕을 만나기 위해 조정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제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이렇게 전했다.
“과인이 마땅히 선생을 먼저 찾아가서 뵈어야 하겠지만 불행히 감기에 걸려서 바람을 쏘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선생께서 조정으로 나와 주시면 어떨까 하는데 그리해 주실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맹자왈
“마침 저도 감기에 걸려서 조정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다음날 맹자는 동곽씨 집으로 조문하러 간다. 따라 나섰던 제자 공손추가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어제 병으로 조정에 나가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오늘 이렇게 조문하러 가는 것은 아무래도 옳지 않은 듯합니다.”

맹자왈
“어제 병이 오늘은 나았다. 그러니 무엇 때문에 조문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맹자가 조문하러 간 사이 숙소에서는 난리가 났다. 맹자가 아프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제나라 왕이 의원을 보내온 것이다. 제자들은 우선 이렇게 말했다.
“어제 왕명이 있었는데 병 때문에 조정에 나가지 못했다가 오늘 아침 일찍 달려가셨습니다. 지금쯤 아마 도착하셨을 겁니다.”

이렇게 둘러댄 뒤 사람을 풀어 맹자에게 절대 숙소로 돌아오지 마시고 조정으로 가시라고 전했다. 물론 그런다고 조정으로 달려갈 맹자가 아니지만 제자들이 하도 간곡하게 말하는 통에 그대로 숙소로 돌아가지는 않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누구보고 오라 가라 해

맹자의 이 처신을 두고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말이 많았다. 왕은 맹자를 공경했는데 맹자는 왕을 공경하지 않았다는 거다.

[맹자 초상]
맹자왈
“제나라 사람 가운데 나만큼 왕을 공경하는 사람이 없다. 제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왕에게 인의(仁義)를 이야기하지 않는데 그 까닭은 인의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제나라 왕은 함께 인의를 이야기하기에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겨서이다. 그런데 나는 인의가 아니면 왕에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만큼 왕을 공경하는 사람이 없다.”

그러자 경추씨라는 지식인이 이렇게 따졌다.
“그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일찍이 공자께서는 임금이 부르시면 수레가 준비되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달려가셨다는데 당신은 임금이 부르는데도 어찌하여 다른 데로 가신 겁니까?”

맹자왈
“그건 아니지요. 천하에 존귀한 것이 세 가지 있는데 말하자면 벼슬과 나이와 덕망입니다. 조정에서는 벼슬이 최고요, 고을에서는 나이가 제일이고 백성들 다스리는 데는 덕망이 가장 존귀합니다. 지금 제나라 임금이 나보다 나은 것은 그저 벼슬 하나뿐입니다. 어찌 하나 가진 사람이 둘 가진 사람한테 오라 가라 할 수 있습니까?”

이 사건 이후 맹자를 만나고 싶었던 임금들은 모두 먼저 맹자를 찾아간 뒤에야 만날 수 있었다. 예컨대 등나라 문공은 세자였을 적 맹자를 만나기 위해 자기 나라를 떠나 맹자가 머물고 있던 송나라로 가야 했다.

어찌 장창 따위가

물론 맹자의 이런 처신 때문에 맹자가 만나지 못한 임금들도 있다. 노나라 평공이 그랬다. 본디 노나라 평공은 악정극의 소개로 맹자를 만나기로 약속해 두었다. 그래서 막 궁궐 밖으로 나가려 하던 참에 측근이었던 장창이라는 자가 이렇게 말하며 평공을 말렸다.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제후의 신분으로 필부를 만나기 위해 몸을 가벼이 움직이십니까? 맹자가 현자라고 생각해서입니까? 맹자는 현자가 아닙니다. 맹자는 자기 어머니의 상(喪)을 아버지의 상보다 후하게 치른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존귀한데 상례를 치를 때 그것을 무시한 겁니다. 그러니 현자가 아니지요.”

이렇게 해서 평공은 맹자를 만나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맹자의 제자였던 악정극이 들어와 평공에게 왜 맹자를 만나러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평공이 맹자가 현자가 아니라서 만나지 않기로 했다고 말하자 악정극은 이렇게 대꾸했다.
“맹자가 아버지 상을 당했을 때는 아주 가난했고 어머니 상을 당했을 때는 형편이 좀 나아졌기 때문에 상의 후박에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 때문에 현자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평공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고 결국 맹자는 평공을 만나지 못했다. 악정극은 맹자를 만나 이렇게 전했다.
“본디 임금이 선생님을 만나려고 했으나 측근 신하 중에 장창이라는 자가 있어서 임금을 막았습니다.”

맹자왈
“임금이 나를 만나도록 주선한 사람도 있고 그것을 막은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실제로 내가 노나라 임금을 만나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이야. 어찌 장창 따위가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맹자는 자기를 방해한 장창을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문에 장창이 자신을 방해했다고 생각하고 그에 앙심을 품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천하에서 가장 넓은 거처에 산다며 대장부론을 거침없이 펼치는 맹자의 스케일에 걸맞은 처사다. 사소한 일에 앙심을 품고 죽자고 달려들어 인생을 낭비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하늘 탓? 하늘의 뜻!

그렇다고 해서 맹자가 고집 센 늙은이마냥 늘 뻣뻣하게만 군 건 아니다. 제나라 선왕에게 왕도정치의 가능성이 조금은 있다고 생각했던 맹자는 뜻이 맞지 않아 떠나면서도 국경 부근의 마을에서 사흘이나 묵은 뒤에야 제나라를 떠났다. 은근히 선왕이 자신을 붙잡아 주기를 바란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윤사라는 자가 맹자를 이렇게 비난했다.
“천릿길을 찾아와 왕을 만나보고 뜻이 맞지 않아서 떠나는데 어찌하여 사흘 밤이나 묵는가?”

맹자왈
“천릿길을 찾아와 왕을 만난 것은 내가 바라서 그리 한 것이지만 뜻이 맞지 않아서 떠나는 것이 어찌 내가 바란 것이겠는가. 내 어쩔 수 없어 떠나는 것이다. 사흘 밤을 묵고 떠나지만 내 마음으로는 오히려 너무 빠른가 싶다. 왕이 만약 나를 등용한다면 어찌 제 나라 백성만 편안하겠는가.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편안할 것이다. 그래서 왕이 잘못 고치기를 내가 날마다 바란 것이다. 임금에게 간했다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발끈해서 화난 모습을 얼굴에 다 드러내고, 또 떠나게 되었다고 당장 그날 될 수 있는 한 멀리까지 간 뒤에 묵을 곳을 찾는 것은 소인배들이나 하는 일이다.”

맹자가 제나라를 떠나면서 섭섭한 기색을 보이자 충우라는 제자가 이렇게 물었다.
“옛날, 선생님께서는 군자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지금 보니 섭섭해 하시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 때 하신 말씀과 어째서 달리 행동하시는지요.”

맹자왈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보면 오백 년마다 왕도가 천하에 베풀어졌다. 그런데 지금은 왕도가 베풀어진 지 이미 700년이나 지났고 백성들의 왕도에 대한 열망도 어느 때보다 높다. 그런데도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니 어찌 섭섭하지 않겠느냐? 하지만 아무래도 하늘이 아직은 천하를 다스릴 생각이 없나보다. 만약 천하를 다스리고자 한다면 지금 이 시대에 나를 놔두고 그 누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또 뭘 섭섭해 할 것이 있겠는가?”

결국 맹자는 뜻을 얻지 못했고 그런 상황을 하늘의 탓이 아닌 하늘의 뜻으로 돌렸다. 자신이 기회를 얻지 못해도, 그 때문에 왕도가 베풀어지지 않아도 결코 상심하거나 한탄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좌절을 모르는 맹자다.

6.2 지방 선거가 끝났다. MB정권은 선거를 위해 천안함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음을 영웅만들기로 희화화하고, 1번 어뢰의 역사적(?) 발굴로 북한을 선거판에 끌어들이고, 급기야 무상급식을 자신들이 책임지겠다는 각종 기만책을 내놓더니만 결국엔 국민들의 된서리를 맞았다.

자기 지역의 대표 일꾼을 뽑는 지방선거는 태생적으로 보수적 가치를 쫓는 성향이 있다. 그런데도 보수를 자처하는 한나라당이 이번 선거에서 완패했다. 현 정권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다. 맹자에 따르면 하늘의 심판이기도 하다. 맹자는 “하늘은 백성들이 보는 것을 보고 백성들이 듣는 것을 듣는다.”고 했으니. 맹자가 지금 MB정권을 보면 뭐라 할까?

맹자왈
“하늘의 뜻을 따르는 자는 살고 거스르는 자는 죽는다(順天者存 逆天者亡).”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철학) /

맹자의 동문서답[천하무적 맹자왈]

맹자가 동문서답을?

맹자에 관한 가장 오래된 전기는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맹자열전]인데 겨우 137자에 지나지 않는다. 나중에 진시황제가 된 진왕 영정을 암살하려 했던 칼잡이 형가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데 무려 3,000자를 넘게 소비한 사마천이 어째서 맹자에게는 겨우 137자만 할당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137자의 기록만으로도 맹자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기에는 충분하다.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맹자는 세상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깨우친 뒤에 양나라와 제나라에 가서 유세했지만 그들은 모두 맹자의 주장이 현실과 맞지 않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모든 나라가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차지하는 데만 몰두했는데 맹자는 끝내 도덕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맹자는 당시 제후들이 요구에 따르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맹자는 당시 제후들의 질문에 엉뚱한 이야기를 했단 말인가.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여러 회원들과 함께 [맹자]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때 [맹자]를 처음 읽는 후배가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맹자는 늘 왕들이 물은 것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얼결에 ‘맹자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대답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지한 질문에 어리석은 대답을 했구나 싶었다. 아마 질문했던 사람은 내가 무성의한 대답을 한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맹자가 정말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맹자는 정말 고금에 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동문서답의 일인자다. 적어도 당시 군왕들과의 대화에서는.
어디 한 번 예를 들어 보자.

이익은 없다, 인의가 있을 뿐

맹자가 혜왕의 초빙을 받아 양나라에 갔다. 혜왕은 맹자를 반갑게 맞이하며 이렇게 물었다.

“선생께서 천릿길을 멀다 않고 우리나라에 오셨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우리나라를 이롭게 해 주시겠습니까?”

맹자 왈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

이익을 묻는데 인의로 대답한 것이다. [맹자] 개권벽두에 나오는 대목으로 이 주장은 [맹자]가 끝날 때까지 한결 같은 어조로 이어진다. 이익을 버리고 인의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맹자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첫 만남부터 한 대 세게 얻어맞은 혜왕은 이번에는 맹자를 자신의 화려한 별궁으로 초대했다. 아마도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혜왕의 별궁은 울창한 숲 속에 있었는데 높고 화려한 누대 아래에 깊은 연못이 펼쳐져 있었다. 맹자가 도착해 보니 못가에는 백조와 기러기가 느긋하게 날아오르고 고라니와 사슴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혜왕은 그런 자신의 수집품을 돌아보며 이렇게 물었다.

“당신 같은 현자도 이런 걸 즐깁니까?”

맹자 왈
“현자라야 이런 걸 즐길 수 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은 이런 걸 가지고 있어도 즐기지는 못하지요.”

“…”

이번에는 혜왕이 맹자에게 자신의 포부를 이야기했다. 포부라지만 그 당시 군왕들의 속셈은 뻔했다. 이웃나라를 침략하여 영토를 넓히고 결국에는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다. 혜왕은 바로 그렇게 말하진 못하고 돌려 이야기했다.

“본디 우리나라가 천하에서 가장 강했던 나라임은 선생께서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과인의 시대에 이르러 이웃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영토가 깎이고 많은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 한번 설욕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맹자 왈
“사방 백 리의 영토만으로도 왕 노릇 할 수 있습니다.”

“…”

그래도 혜왕은 맹자를 잘 대해주었다. 그래야 지식인들 사이에서 자신의 평가가 좋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던 혜왕이 죽고 난 뒤 새로 왕이 된 양왕은 그런 사실을 잘 몰랐던 모양이다. 맹자를 박대했고 그 결과는 이렇게 처참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내가 양왕을 만났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임금 같질 않고, 가까이 가보니 위엄이 없더군. 그런데 이자가 갑자기 ‘천하가 어떻게 될까요?’ 하고 묻질 않겠나? 아, 그래서 내가 하나로 통일될 것이라고 대답해줬지. 그랬더니 군침을 삼키며 ‘누가 통일할 수 있을까요?’ 묻지 않겠어? 그래서 내가 ‘최소한, 당신 같이 사람 막 죽이는 자는 통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대답해줬지.”

맹자는 양왕을 거의 임금취급하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패도는 아는 게 없어

이번에는 맹자가 제나라 선왕을 만났다. 선왕은 일찍이 패자였던 제나라의 환공에 대해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자신도 그렇게 패자가 되고 싶었을 게다. 그래서 맹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제나라 환공과 진나라 문공의 패업에 관해 들어보고 싶습니다.”

맹자 왈
“공자의 문하에서는 패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수치로 여깁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게 없습니다. 그래도 그만두지 말고 뭔 말이라도 해보라 하시면 왕도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

흔히 상대에게 잘 보이려고 갖다 붙이는 “좋은 질문입니다.” 따위의 수사가 맹자에겐 절대 없다. 도리어 대답하기 전에 안 좋은 질문이라고,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잽을 먼저 날린다. 물론 패도에 대해 물었는데 왕도로 대답했으니 질문에 대답도 안 해 준 셈이다.

선왕의 얼굴은 아마 벌게지지 않았을까? 민망해진 선왕은 할 수 없이 질문을 바꿔서 왕도에 관해 물어봐야 했다.

“저… 저 같이 덕이 부족한 사람도 왕도 정치를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걸 아시는지요?”

“제가 들으니 왕께서 소 한 마리 끌려가는 것을 불쌍히 여겨 소는 놓아주고 양으로 대신하라고 하셨다지요? 그 정도로 어진 마음이면 충분히 왕도정치를 베풀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소가 아까워서 그런 것이라고 비난하지만 저는 왕께서 정말 소가 불쌍해서 그리했다는 것을 압니다.”

“아, 그렇군요. 선생께서 제 마음을 알아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소는 그렇게 아끼면서 어째서 백성들은 아끼지 않습니까?”

“…”

이번에는 어째 잘 나간다 싶더니 결론은 또 선왕이 잘못했다는 말이다. 뭔 말을 못한다. 이래서야 왕의 체면이 영 말이 아니다.

사람같지 않은 자에게 보내는 맹자의 말씀

그래도 양나라 혜왕과 제나라 선왕은 맹자 덕분에 세상에 이름이 알려졌다. 사실 이들은 당시의 군왕들 중에서 그리 뛰어난 이들은 아니었다. 맹자는 높이 평가하지 않았지만 제나라 환공이나 진나라 문공 같은 이들, 그리고 초나라 장왕, 진나라 목공 정도가 당시의 뛰어난 군왕이었다고 할 만하다. 그런데도 양나라 혜왕이나 제나라 선왕의 이름이 이들보다 더 널리 알려진 건 오로지 맹자와 대화를 했기 때문이다. 성현과 대화 상대가 된 이름값을 생각하면 결코 밑지는 장사는 아니다. 욕을 먹었거나 말거나 간에.

요즘도 어떻게 하면 맹자에 한 번 걸쳐서 자기 생각을 이야기 해 볼까 하는 이들이 많다. 얼마 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맹자]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되길 원한다는 메시지를 전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서도 맹자는 단골로 인용되는데 내가 알기로 유시민, 정동영, 정몽준 같은 유명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구의원이나 시의원들도 맹자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한 적이 있다. 효과는 그리 신통찮은 듯하다. 대부분 [맹자]를 엉뚱한 뜻으로 곡해하거나 한자를 잘못 쓰는 등 제대로 읽지 않은 티가 나기 때문이다.

언젠가 이명박 대통령이 맹자에 나오는 말이라면서 “두 사람이 마음을 합치면 그 향기가 난초와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선, 인용한 구절은 맹자가 아니라 [주역]에 나오는 말일뿐더러 내용 또한 소통 부재의 이명박 대통령이 인용할 만한 구절이 아니다.

또 표절작가 전여옥씨는 [일본은 없다]가 표절로 판결나자 심정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맹자를 인용하면서 “하늘은 장차 큰일을 할 사람에게 반드시 시련을 안겨준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스스로 표절이라는 죄악을 저지른 자가 그것이 하늘이 내린 시련이라고 둘러대니 진짜 동문서답하고 앉았다고 할 수밖에. 대체 자신의 표절을 억울한 시련으로 여기는 그런 자가 저지를 ‘큰일’이란 게 뭘까? 그에게 꼭 어울리는 말을 맹자가 이미 하긴 했다.

맹자 왈
“사람 같지 않은 짓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일 수 있겠는가?(不恥不若人 何若人有)”

전호근(민족의학연구원) / admin@admin.com

민중미술 담론 비판(2)[한국현대미술사 개관]

*이전 호에서 이어집니다. 이전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편집자)

2. 민중미술 양식의 문제

민중미술 진영이 모더니즘 미술 진영보다 한 발 앞선 것은 미술이론적인 측면에서 훨씬 더 원리적이면서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1) 구상 미술 문제

민중미술은 그 양식에 있어서 이른바 ‘민중적 리얼리즘’을 제창한다. 여기에서 ‘리얼리즘’은 추상미술 대신 ‘구상 미술’을 지향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미 서구에서 한껏 발달하고 있는 각종 아방가르드적인 기법들을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 그저 여실한 리얼리즘만은 아닐 터이다. 이에 관련해서 최열은 맨 먼저 김윤수의 ‘구상미술론’을 매우 진보적인 이론으로 꼽는다.

“김윤수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매우 진보적인 수준에 도달한 이론이다. 그는 ‘구상미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① 대상(현실)에 대한 인식을 중요시한다. ② 현실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총체적으로 파악한다. ③ 자연의 질서대로가 아니라 의미내용에 따라 화면을 구성한다. ④ 개인의 주관적 ? 정서적 표현을 배제하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역사관이나 세계관과 관련되는 것이다.’ (…) 이것은 사실주의 이론의 빼어난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창작실천의 부재였으며 당시 경향적인 미술가들에게 있어서조차 이 구상미술론이 확고한 창작방법으로 채택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김윤수, 「삶의 진실에 다가서는 새 구상」(『계간미술』, 1981. 겨울)을 참조한 최열의 정리. 최열,『한국현대미술운동사』(돌베개, 1991), 184쪽.)

최열이 소개하고 있는 김윤수의 ‘구상미술론’은 리얼리즘이 소박한 재현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기법의 원리를 핵심적으로 잘 정돈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소련에서 1934년 [사회주의 작가회의]를 통해 그 이후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으로 알려지게 되는 네 가지 규칙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당시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가) 프롤레타리아적일 것 : 예술은 노동자들에 관련된 것이어야 하고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나) 전형적일 것 : 인민의 일상생활의 전형을 담은 장면들을 그려야 한다. 다) 사실적일 것 : 재현적인 의미에서 사실적이어야 한다. 라) 당파적일 것 : 국가와 당의 목적을 지지해야 한다. 등의 네 가지 규칙을 제시했다.

①에서 현실을, 만약 민중을 프롤레타리아로 보고 민중의 현실로 읽는다면, ①은 가)와 바로 직결된다. 그리고 ②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총체적인 파악’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이 바로 나)에서 제시하는 ‘전형성’이다. 또 ③에서 ‘의미내용’은 다)에서 제시하고 있는 ‘재현적인 의미’와 일정하게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④에서 말하는 ‘역사관과 세계관’을 라)에서 말하는 ‘국가와 당’이 관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게 되면, 양쪽이 서로 직결된다.

김윤수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 관한 연구를 하지 않았을 리 없다고 할 때, 김윤수의 ‘구상미술론’은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원칙들을 당시 한국적 상황에 맞게 나름대로 조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김윤수는 서구의 아방가르드적인 것을 일정하게 수용하는 열린 태도를 겸비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니까 초현실주의라든가 포토몽타주와 같은 팝 아트적인 기법들을 일정하게 허용함으로써 민중미술의 지속성을 향한 격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김윤수가 신학철의 몽타주기법을 대단히 높이 산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민중적 순정주의를 제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최열은 다음과 같이 민중미술의 구상미술의 경향에 서구적인 경향이 가미된 것에 대해, 예컨대 표현주의 양식이라든가 극사실주의 양식 혹은 초현실주의 양식을 결합한 것에 대해 이렇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이 경향도 현실을 구체적으로 반영하는 데 실패하고 있었다. 이것은 작가의 세계관적 한계 혹은 현실인식의 한계와 더불어 표현양식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양식의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특징은 그 현실인식의 한계와 결합하여 형상화 작업을 매우 추상적인 데로 빠져 들어가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이들의 작품화면에서 몇몇을 제외하고는, 삶의 구체성, 동시대적인 구체성, 사회적 삶의 총체적 개괄성과 그 인간의 전형성을 찾아보기 어렵다.”(최열(1991), 188쪽.)

이러한 최열의 입장은 민중의 예술적 상상력과 감각이 반드시 도식화된 전형성에 입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한편으로 민중의 예술적 자질 자체를 한정할 뿐만 아니라 폄하하는 우를 범하는 것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다.

2) 민중적 리얼리즘론

구상미술론에 이어 좀 더 구체적으로 민중미술의 양식을 구체화하고자 한 논의가 ‘민중적 리얼리즘론’이다. 이에 관련해서는 민중미술이 노동투쟁의 현장을 지원하는 것이 핵심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 선 라원식의 주장이 들어볼 만하다.

“민족미술의 내용 즉 주제, 제재, 소재는 민족의 현실을 토대로 나와 너의 삶, 우리 모두의 삶 속에서 찾아지는 것 (…) 민중의 미의식, 정서를 체화한 작품, 다시 말해 민중의 꿈과 사랑, 의리와 인정, 분노와 회한, 저항과 절규, 재생과 부활, 희구와 염원 등등을 폭넓게 담아내면서 민중의 인생관, 세계관까지도 깊이 있게 형상화한 작품을 요구한다.”(라원식, 「민족민중미술의 창작을 위하여」(『민중미술』, 공동체, 1985) 중에서. 최열(1991), 219-220쪽에서 재인용.)

오늘날의 정치 상황에서도 알 수 있지만,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한 한국에서의 이른바 진보 진영의 모든 활동들은 설사 계급적인 소외의 체제적인 극복을 그 목적으로 주장한다 할지라도 일정하게 민족의 문제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구도가 마치 비켜가는 쌍곡선처럼 대립되는 측면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양쪽을 함께 아우르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라원식 역시 민족미술의 방향을 대략 제시하면서 민중미술이 표현해야 할 주제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 역시 리얼리즘을 표방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민중의 인생관, 세계관까지도’ 더군다나 ‘깊이 있게 형상화한’ 작품이라야만 진정한 민중적 리얼리즘을 구현한 작품이라 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를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인용문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모르긴 해도 이 점에 있어서 민중미술의 방법론이 가장 힘겨워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튼 이러한 민중적 리얼리즘에 입각한 민족미술 내지는 민중미술을 추구하면서 여러 관련 작가들은 ‘분단’, ‘6 ? 25’, ‘일제강점의 만행’, ‘한국전쟁의 비참함’, ‘광주민중항쟁’, ‘유격대 투쟁’, ‘노동현장의 고통’, ‘농민생활’, ‘4 ? 19’, ‘민족통일’, ‘빈민생활’, ‘이산가족’, ‘신식민성’ 등을 주제로 선택하여 작업에 임했다.

이런 와중에 민속그림이 민중미술에 대해 그 기법이나 내용에 있어서 일정하게 모델로 작동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되고, 그런 차원에서 조선후기 민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이는 이미 1970년 어간에 김지하가 제시한 것이었다. 이에 관해 최열이 전하는 원동석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원동석은 민속그림을 곧바로 민중미술로 보는 시각을 비판하고 역사적 존재로서 민중을 정식화한 다음, ‘민중예술은 역사적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소외의 압제로부터 탈출하려는 총체적 삶의 표현이며, 민속예술에서 그 뿌리를 찾아 공동적 삶의 염원을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규정한 다음 그 뿌리를 조선 후기의 민화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탈춤, 마당굿, 민요와의 접속에서 오늘날 민중예술이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미술에서 ‘민화와 접속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주장한다.”(원동석, 「민중그림은 가능한가」(『일과 놀이 1』, 일과놀이, 1983) 중에서. 최열(1991) 229쪽 재인용 및 참조.)

탈춤, 마당굿, 민요 등은 분명 1980년대 민중예술에서 약방 감초처럼 전국적으로, 특히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끌면서 확산되고 있었다.(이를 당시의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순치시킴으로써 그 근본정신의 뿌리를 잘라내 버리려고 한 것이 이른바 ‘국풍’이었음을 상기하자.) 그렇다면 미술 영역에서 이 같은 성격의 민중예술을 찾아야 할 터인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고, 이에 원동석은 조선조 후기의 ‘민화’를 적극 제시한 것이다. 오늘날 민화가 대중적으로도 여러모로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이에 따른 평가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원동석은 같은 글에서 조선 후기 민화(문인화도 포함)의 양식적 특성을 다음과 같이 추려냈다.

“① 대상의 대소, 비례관계 무시 ② 공간의 상하, 원근의 무시 ③ 공간의 분할과 연속의 임의성 ④ 역원근법과 삼원법의 병용 ⑤ 시점의 이동에 따른 물상전개의 다면화와 물상 표현의 상괘성 이탈 ⑥ 시간의 동시성 표현 ⑦ 주제설정의 이중삼중적 결합에 따른 이미지 복합의 자유로움 ⑧ 색채 표현의 대비효과 및 화면의 평면화에의 복귀 ⑨ 전달의 간결성, 명확성, 즉흥성”(최열(1991) 231쪽에서 재인용)

원동석이 정리하여 제시하고 있는 민화(문인화 포함)의 이런 특징들은 그 자체로 보면, 분명 근대 이후 서양미술사의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대단히 아방가르드하고 그래서 모더니즘적이기도 한 특징들이다.

3. 민중 예술가론

1984년 원동석이 「민중미술의 논리와 전망」이라는 글을 통해, 민중미술에 대해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미술’이라고 규정했을 때 ‘민중에 의한’이란 것을 강조하게 되면 민중이 곧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이에 다음과 같은 사안들이 제기된다.

1) 공동체적 신명 문제

민중미술이 전체 민중예술의 흐름에 동참하면서 그 나름의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할 때,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집단 창작 내지는 집단 미술의 향유 문제였다. 이에 관련된 것 중에 대단히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공동체적인 신명 문제다. 이는 주로 마당놀이를 통한 복합적인 민중예술에서 얻어낸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부산에서 주로 활동을 한 채희완의 연구가 심도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천적 과제는 결속을 강화(예술의 문제와 사회적 삶의 문제 – 지은이)하는 공동체 의식과 적에 대한 대결을 강화하는 갈등의식, 이 두 가지로 요약되는 민중적 사회의식 ? 이는 갈등을 통한 통합을 거쳐 다시금 갈등을 해소하는 것으로 나아가는데 표현상으로서는 풍자적 해학, 해학적 풍자, 웃음과 눈물의 미적 유화, 한을 뚫고 나오는 역동적 신명 등으로 표출된다. ? 의 예술적 승리라는 예술 사회학적 기능을 현실적으로 구체화하는 것으로서 오늘의 사회문제를 공동체적 관점의 표적으로 부각시키고 거기에서 성취된 사회인식을 행동화하는 오늘의 ‘삶의 축제’로 정착시키는 일임에 다름이 아니다.”(채희완, 「역사적 지속성의 질긴 숨결」(『마당』, 1983. 12) 중에서. 최열(1991), 205쪽에서 재인용.)

채희완이 제시하는 민중의식과 이에 의거한 ‘삶의 축제’로서의 민중예술은 궁극적으로 민중의 삶 자체를 가장 넓은 의미의 예술적인 삶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결의가 담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오늘날 작품과 관객 혹은 작가와 관객 간의 상호작용이 없이는 작품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이른바 ‘매체 미술’에서 소폭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채희완이 제시하는 ‘삶의 축제로서의 민중예술’은 아예 전체적으로 상호작용이 관통하는 그런 예술이다.

2) 미술의 주체인 민중

1983년 8월 이후 ‘광자협’(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은 ‘시민미술학교’를 열면서 민중이 미술의 주체임을 선언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시인만이 시를 쓰고 화가만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대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 시대의 바람직한 예술은 다른 사람의 생존의 체험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서로 공유하는 자세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 바야흐로 정직하고 튼튼한 민중예술이 그 형체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최열(1991), 196쪽 참조.)

한편 ‘광자협’의 활동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것으로 보이는 최열은 이렇게 말한다.

“민족과 민중의 관점을 지키고 반민족, 반민중 세력을 비판하는 방식에 있어서 민족과 민중의 잠재된 생명력이라는 정서적 공감대를 얻지 못하는 형식은 내용의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보편적 범주가 아닌 소재적 함정으로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형식을 세련된 기교나 탁월한 회화적 질서 개념이 아니라 민중적 정서를 갖는 내용과 그것을 담는 그릇의 뜻이다.”(최열, 「80년대 미술운동의 한계와 극복」(『시대정신』1권, 일과놀이, 1984) 중에서. 최열(1991), 199쪽.)

그런가 하면, 1983년 7월 창립 예행전을 가지면서 창립된 ‘두렁’은 다음과 같은 입장을 제시한다.

“우리는 미술을 위한 미술이거나 생활에 미를 심기 위한 미술이 아닌 ‘삶에 기여하는 미술’이 되기를 노력한다. 사회와 미술을 유기적 연관 속에서 파악하고, 극단으로 치닫게 하는 이기적 개인주의의 온상인 강조된 전문성을 경계하고, 공동 작업을 지향한다. (…) 개방적인 공동작업과 민중과의 협동적 관계는 전문성의 공동생활과 미술행위의 민주화를 위한 기초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민중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산 그림’을 지향한다.”(두렁, 「산그림을 위하여」(『산그림』, 두렁, 1983) 중에서. 최열(1991) 202-203쪽에서 재인용.)

미술 작업이 전문가들만의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함께 참여하는 가운데 공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창작 집단 ‘두렁’의 이러한 입장은 아방가르드적인 창조 활동을 통해 기왕의 지배적인 체제를 지향하는 일체의 문화예술 활동을 지양하고자 하는 모더니즘적인 정신과 일맥상통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모더니즘이 일부 예술 천재들에 의한 아방가르드를 제시한 것과 완전히 대립된다.

이러한 ‘두렁’의 민중적인 집단 창작 정신은 그 형식에 있어서 오늘날 시민참여형의 공공미술 내지는 사회예술의 선구적인 모범을 보일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는 오늘날의 이러한 미술들이 확보해내지 못하고 겉돌고 있는 심층에서의 삶의 질을 암암리에 선도하고 있다 할 것이다.

4. 대략 정리

민중미술을 둘러싼 여러 담론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예술은 항상 이중적인 긴박감 속에서 그 현존의 가치를 획득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민중적인 삶이 일상에 있어서 체제의존적인 측면이 강한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성립하는 긴박감이다. 이는 예술이 지닌 아방가르드 정신을 뒷받침한다. 다른 하나는 예술이 지닌 감각적인 힘으로써 민중적인 삶을 최대한 끌어들여야 한다는 데서 성립하는 긴박감이다. 이는 어떻게 하면 예술을 민중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도록 할 것인가 하는 데서 성립하는 긴박감이다.

일컫자면, 일정하게 스스로를 민중의 삶으로부터 분리해 냄으로써 오히려 그 민중의 삶으로 스며들어가고, 스스로를 민중의 삶 속으로 깊이 스며들게 함으로써 오히려 미래를 향해 민중의 삶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 내는 것이 예술인 것이다.

이러한 예술과 삶 간의 역리적인 역동성을 가장 신랄하게 드러낼 수 있었고, 또 그렇게 드러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한국의 민중미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민중미술 진영을 형성한 여러 입장들이 이와 관련하여 다양한 스펙트럼을 내보인 것은 물론이다. 그것은 그저 예술을 바라보는 전략적인 관점의 차이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사회적인 맥락에 따른 전술적인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아쉬운 것은 벌써 20-3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 되돌아 볼 때, 민중미술을 둘러싼 여러 담론들이,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한 하나의 학적 체계로 정립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오늘날 신자유주의적인 세계화의 전체 맥락 속에서 최고도의 난맥상을 보이는 한국 미술의 모습을 최소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국의 민중미술이야말로 미술과 구체적인 사회역사적인 삶 간에 목숨을 건 가장 뜨거운 긴장감을 연출했기에, 그 다기한 정신과 실천에 대해 굳건한 예술철학적인 바탕 위에서 학적인 차원으로까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더라면 그 파급력은 예술계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인 영역에까지 크게 미쳤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갖고서 깊은 연구를 할 필요가 있는 까닭이다.

조광제(사)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