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에서 희망을 줍는 광대, 안병대 <셰익스피어 읽어주는 남자> [청춘의 서재]

비극에서 희망을 줍는 광대, 안병대 <셰익스피어 읽어주는 남자> [청춘의 서재]

연효숙 (아주대 연구교수)

 

어두운 무대 한 귀퉁이, 비탄에 잠긴 여배우가 핀 조명을 받으며 주저앉아 있다. 삶의 전부라 여겼던 연인과 이별한 뒤 반쯤 정신을 놓은 듯 보인다. 힘없이 혼잣말을 내뱉던 여배우는 점차 분노와 허탈감, 애증과 모멸감에 몸을 떨며 격앙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온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며 격한 대사를 토해내다 끝내 실신하는 장면이 이 연극의 절정이다. 나는 여배우로 분장한 딸의 눈에서 순간 ‘번쩍!’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배우가 먼저 울음을 터뜨리면 안 돼. 관객의 눈물을 끌어내야지.. 조바심으로 입이 마른다. 절규하며 쓰러진 여배우, 그리고 암전. 관객들의 박수와 함성이 이어지고 내 눈에도 눈물이 고인다. 끝내 눈물 흘리지 않은 채 슬픔과 고통의 연기를 해낸 딸이 자랑스러웠다.

 

청년 ‘햄릿’을 만나 평생의 인연 ‘셰익스피어’를 끼고 살다

 

<셰익스피어 읽어주는 남자>의 저자 안병대 씨의 말처럼 ‘연극은 지독한 중독’이다. 무대 중독에 빠져 지내던 딸과 가슴 졸이며 함께 울고 웃었던 어미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직 어린 십대의 딸이 혹독한 연습을 견뎌내며 수없이 오르내리던 무대, 그것은 땀과 눈물과 고행을 거쳐 새롭게 탄생하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기적 같은 체험이었다. 한바탕 꿈을 꾸듯이 나를 잊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펼치고 나면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져 내리는 무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그곳은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날개 없이도 날아다닐 수 있는 꿈과 상상의 세계이다. 그 무대에 서 본 이, 그 무대를 만들고 꾸민 이, 무대에서 함께 호흡해본 모든 이들은 기꺼이 이 중독에 함께 빠져든다. 셰익스피어를 읽어주며 조용한 발걸음을 이끈 저자는 어느새 훌쩍 무대 위로 뛰어올라 광대로 변신해 있었다.

이 책 프롤로그의 제목처럼 ‘독한 인연은 운명’인가 보다

 

안병대 씨는 ‘햄릿’을 통해 셰익스피어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대학시절 야학활동을 하며 만난 ‘햄릿’은 “낯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손에 금방 잡히지도 않았고, 연하기도 강하기도 달기도 쓰기도 떫기도 맵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날 이후 30년 동안 껴안고 산 셰익스피어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자, 독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햄릿’을 만나 처음 맛 본 인생의 온갖 맛과 냄새와 감촉은 청년 안병대에게 첫사랑이자 영원한 사랑으로 각인되었을지 모른다. 유한하고 변덕스런 인간과의 첫사랑이 아닌 자기 생애의 첫 궤적을 뚫고 들어온 강렬한 체험이기 때문에. 나무 주걱으로 엉덩이를 맞아가며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를 땀과 눈물로 익히고 올라선 소녀의 첫 무대, 나의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을 헌납해 버린 문고판 명작선 50권과의 만남, ‘햄릿’을 만난 저자의 떨림이 나의 추억 속에서도 파문을 일으킨다.

 

원형극장의 회전 무대 관람하듯 입체적인 내용 전개, ‘희망’의 다른 이름, 셰익스피어 비극

 

저자는 셰익스피어에게 고리타분한 학술적 접근으로 다가서지 않고 400년이란 시공간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연출가이자, 배우, 작가, 관객의 입장에서 친근하게 소개한다. 특히 ‘성격 비극’이라 명명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세계로 이끌면서 황홀하고 거친, 그렇지만 발을 빼고 싶지 않을 만큼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숲으로 과감히 이끈다.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셰익스피어에 대해 제대로 된 지식을 갖추지 못한 독자에게 저자의 이 같은 시도는 매우 참신하고 친근하다. 마치 무대 전체가 회전하는 원형 극장에 앉아 무대의 뒷면까지도 흥미진진하게 감상하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한다. 관객의 속마음을 꿰뚫는 노련한 솜씨 덕분에 지루한 줄 모르고 중세 연극에 빠져들 것 같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또 다른 이름의 희망이다’라는 프롤로그의 소제목에서 저자가 왜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몰입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총 37편의 희곡, 4편의 장시, 154편의 소네트를 남긴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작품 중 ‘햄릿’ ‘오셀로’ ‘리어왕’ ‘맥베스’ 4편의 비극을 추려낸 저자는 꿈을 빌어 셰익스피어의 말을 옮긴다. “우주를 움직이는 궁극적인 힘은 완전한 선이지만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언제나 선이 이길 수는 없다” 지뢰처럼 널린 악에 의해 선도 함께 폭발하고 폐허가 된 우주는 새로운 선의 질서로 다시 세워진다는 셰익스피어의 법칙을 전하면서 저자는 선이 제물로 바쳐지는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그토록 강렬한 비극의 세계가 슬프지만 우울하지 않고 그 자체로 희망이 될 수 있어서 비극에 사로잡힌다고 덧붙인다. 나는 이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비극이 그 자체로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셰익스피어는 도대체 인간을 선한 존재로 본 것인가, 악한 존재로 본 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를 이끌고 저자는 다시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직접 답을 찾아보라고.

 

‘햄릿’, 중세를 걷어내고 고통스런 인간의 삶 투영하다

 

‘햄릿’은 표면적으로는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는 아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저자는 ‘당신은 누구인가?’를 묻는 존재론의 철학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세상과 역사에 대한 엄숙한 소명을 스스로 짊어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존재'(114쪽)였던 ‘햄릿’은 부조리한 세상에서 무엇이 진리이고, 진실인가를 묻는 자였다. ‘햄릿’은 마치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온실 속의 화초와 같아서 세상의 악에 맞서 복수를 꿈꾸다 허망하게 쓰러지는 유약한 청춘으로 그려진다. 그는 세상도, 여자도 모두 역겨울 뿐만 아니라 복수를 꿈꾸더라도 마음을 더럽히지 말아야 하는 완벽주의자이며, 죽지도 살지도 못하고 고뇌하기만 하는 우유부단한 인간이다.

그는 그대로 중세시대의 인간이며, 셰익스피어 자신이기도 하다. 16세기 중세의 화두는 ‘신’에 맞서는 ‘인간’의 성찰이 아니었는가. “마음속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말고 엉뚱한 생각일랑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지 마라. 남의 의견은 들어주되, 시비판단은 삼가야 한다”(83쪽)는 ‘플로니어스’의 대사가 운명 앞에서 촛불처럼 흔들리는 ‘햄릿’을 조롱한다. ‘햄릿’은 인간의 비극이 ‘신’과 ‘인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갈등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셰익스피어 비극의 원형이다. 저자는 ‘햄릿’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중세의 어둠을 걷어내고 고통스런 삶을 생생하게 목도하게 한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 반복되는 고통의 삶이 ‘시지프스’를 떠올리게 하는 우리의 삶 자체라고 덧붙인다.

‘죽이고 사랑하리라’ 핏빛 사랑의 파국, 천성만 남은 ‘왕’과 ‘광대’는 다를 바 없다
?”앞으로는 슬픔이 사랑에 따르리라
사랑은 의심에 사로잡혀
시초는 달콤해도 끝내는 쓴맛으로 변하리라” (<비너스와 아도니스> 1136-1138행)

 

비너스의 구애를 뿌리치고 죽음을 맞은 아도니스가 자줏빛 아네모네로 핀 것을 보고 비너스가 한 예언이다. 불멸의 사랑을 꿈꾸는 모든 인간에게 이토록 잔인한 저주는 없을 것이다.

‘죽이고 사랑하리라’는 ‘오셀로’의 소제목은 비너스의 저주보다 더 짙고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긴다. 사랑 자체가 인간을 짧은 행복과 긴 슬픔, 그리고 때때로 피할 수 없는 비극의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든다. 믿으니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걷어치운 사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이 맞는 말일까? 질투와 의심에 눈이 멀어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목 졸라 죽인 ‘오셀로’, 한순간의 광기에 휩싸여 평생토록 사랑한 아내를 목 졸라 죽인 철학자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98~1990)가 문득 겹쳐진다.

흑인 장군이었던 ‘오셀로’의 불같은 성격이 지고지순한 백인 아내 ‘데스데모나’와의 역설적인 사랑을 비극으로 몰아갔지만, 오히려 이들의 파격적인 사랑을 등불 삼아 현대인의 얕고, 약은 사랑을 들추어보게 된다. 나이도, 신분도, 조건도 뛰어넘은 이들의 사랑은 끝내 간교한 ‘이아고’에 의해 파멸의 쓴맛을 보았지만 21세기의 사랑은 시작부터 달콤하지도, 조건을 뛰어넘지도 않기에 방해받지 않고 안전하게 이어진다. 쓴맛을 보지 않는 사랑의 씁쓸함이 더 오래 남는다.

자식에게 버림받고 파탄에 빠지는 가장 불우한 왕 ‘리어 왕’이 등장한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사랑하는 부모에 비해 효도하는 자식이 턱없이 희소하긴 마찬가지였나 보다. 오죽 충성스런 신하, 효도하는 자식이 없었으면 ‘충효’라는 덕목을 유교의 첫째가는 가치로 내세웠을까하는 삐딱한 시선이 생기기도 한다. 백두난발을 하고 광풍 속을 미쳐 날뛰는 ‘리어 왕’을 보면서 죽을 때까지 오래 오래 행복하고 안락하게 살고자 하는 인간의 나약한 희망을 보는 듯해 서글퍼졌다. ‘늙음’은 약한 인간을 더욱 비굴하고 나약하게 만드는데, 그것조차 인정하지 못한 ‘리어 왕’은 마음의 눈을 갖지 못하고 나이 먹은 댓가를 가혹하게 받은 셈이다.

“모든 것을 다 주고 타고난 천성만 남았으니, 왕이나 광대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195쪽)라고 조롱하는 광대의 목소리, “노인이 쓰러지면 젊은이가 일어서는 법이지”(206쪽)라고 내뱉는 에드먼드의 대사가 인생의 비정함을 예리하게 드러낸다. 숨도 멎지 않은 부모의 곁에서 물려받은 재산 다툼으로 혈안이 된 자식들을 보는 일은 이제 놀랍지도 않은 세상이 되어 버렸다.

 

양의 ‘양심’과 이리의 ‘욕망’을 지닌 나약한 인간, 무사는 시대를 바꾸고 광대는 역사를 바꾼다.

어느새 ‘맥베스’를 공연하는 극장으로 우리를 인도한 저자는 셰익스피어와의 대화로 압도해나간다.

 

셰익스피어에게 묻는다.
“악을 제거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셰익스피어가 답한다.
“이 땅에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어쩔 수가 없답니다.”
또 묻는다.
“희망은 없습니까?”
셰익스피어가 답한다.
“양심이 있습니다.”
악마 맥베스가 웃는다. (269쪽)
?

저자는 또 맥베스에게 묻는다.

“인간은 그렇게 나약한 것인가요?”
“양심은 양처럼 온순하고 욕망은 이리처럼 사납소” (276쪽)

 

왕의 살해에 동참하여 함께 손에 피를 묻혔던 아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맥베스’. “인생이란 단지 걸어가는 그림자, 무대 위에 있는 동안은 뽐내고 떠들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가련한 배우에 불과한 것”이라고 읊조린다. 인간의 생에 대한 통찰이 저절로 묻어나는 셰익스피어의 명대사가 아닌가! 셰익스피어는 무대 위에서 뽐내며 떠드는 인간의 유형을 ‘무사’와 ‘광대’ 두 유형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무사는 세상을 움직이나 광대는 무사를 움직인다. 무사는 시대를 바꾸지만 광대는 역사를 바꾼다’는 말로 에필로그를 장식한 저자, 그는 진정한 ‘광대’를 꿈꾸는 자이며, 위대한 ‘광대’였던 셰익스피어를 영원히 잊지 못하는 사람이다.

 

참담한 비극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는 ‘광대’

 

인간을 꿈의 세계로 이끄는 무대, 그 무대를 제멋대로 활보하며 주인공을 빛나게도 하고, 날카로운 유머와 조롱을 날리며 관객을 손안에서 쥐락펴락하는 ‘광대’. 세상을 무대로 삼고, 인간을 배우이자 관객으로 삼아 4백년을 죽지 않고 살아가는 광대 셰익스피어를 만나게 한 또 한 사람의 광대, 그는 저자이다. 무겁고 암울하고 참담한 비극을 소재로 한 무대를 순회하면서도 끝내 ‘희망’을 보게 한 저자의 수고로움이 광대에 버금간다.

주인공인 남자를 파멸로 몰아가는 악한 여자들을 등장시켜 페미니스트들을 열 받게 했을 법한 중세인 셰익스피어의 한계는 동시대 조선에서 횡행하던 ‘여인잔혹사’를 떠올리면 상대적으로 강도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어 깊이 파고들고 싶지 않다. 오히려 중세도, 근대도, 현대도 한참 지난 21세기 한국에서, 강요된 술 접대와 성 접대로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배우의 속절없고 어이없는 이야기는 과연 몇 등급의 비극에 속하는지 셰익스피어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다. 그 여배우의 복수는 ‘햄릿’의 복수보다 더 실현하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이집트의 독재자 ‘카다피’를 보면 아직도 세상은 ‘무사’의 차지인 것만 같고, 일본이 당한 참혹한 비극 앞에서는 ‘희망’을 말하는 것이 오히려 ‘희망고문’을 하는 것이 아닐까 망설여진다. 이 악물고, 두 눈 질끈 감고 버텨도 더욱 모질고 독해지기만 하는 세상에서 우리를 장악하는 비극의 정체를 낱낱이 드러내어 기어이 ‘희망’을 끄집어내라고 말해 주는 셰익스피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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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시대와 철학’ 창간 발기인 선언문 [시대와 철학]

‘(e)시대와 철학’ 창간 발기인 선언문

일시: 2010년 6월 10일

오늘날 한국의 현실은 철학으로 하여금 모든 사회의 지배적 권세와의 관계방식을 반성하고 자신의 위치를 다시 설정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철학이 고전적으로 조용한 사유의 정원을 소요하거나 현대적으로 각종 하청업을 수행하는 데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없는 처지에 서있기 때문이다. 철학은 자신의 여유를 시대의 문제를 비켜가는 피신처로 삼을 수 없게 되었으며, 자기 생존의 절박함에 추동되어 외래사조의 청부업에도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철학은 자기상실과 세계상실의 불행 속에 있다. 그러나 생의 위기를 사유하지 않는 곳에, 극복 의지가 없는 곳에 철학의 위기가 있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의 유입과 군부독재의 등장에 저항한 광주항쟁은 진정한 자유와 연대의 삶에 대한 동경이 삶과 죽음의 문제임을 증명하였다. 고통이 피워낸 이 문제의식은 수많은 청년들을 도래하는 해방에 자신과 인류의 삶의 의미를 걸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철학계의 일부 소장학자들은 철학을 ‘시대의 진정한 혼을 인식하고 실현하는 활동’으로 규정하고「한국철학사상연구회」(1989)를 창립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해방 전후의 우리의 스승들이 지난한 위기에 선 한국 현실을 극복하고자 했던 생의 열정과 사색을 80년대의 정치 경제적 현실의 문맥에서 계승하고자 한 것이었다. 우리의 사상의 교사들은 3.1운동의 자유와 연대의 정신을 계승하여, 신성한 가치의 조명 아래 여러 가지 방식으로 현실을 문제 삼았다. 그들은 비록 자신들의 이론적 작업이 추상적 인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현실로 돌아오고자 하는 실천적 지성을 철학의 포부이자 양심으로 간주했다.

서양학술의 유입에 따라 자연사에 대한 우주적 이해와 현대 엄밀 과학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하더라도, 역사적 인생이 겪는 억압적 고통의 해결은 회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이 참여적 지성의 전통은 현실의 주요문제를 간과하는 지성은 자기를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을 창조하려는 자존심과 자기의식을 저버린 비루한 정신이라는 것을 자각시켜 왔다.

유성의 머리 위에 태양이 빛난 이래, 머뭇거리던 생명체가 최초의 결단으로 눈을 뜬 이후, 인류 혁명사는 자유의 사상만이 인간을 세계와 화해하게 하는 것임을 감격적으로 바라보게 하였다. 그 자유야말로 정신으로 하여금 자신과 세계의 총괄적 변화를 위해 전진하는 고단한 시간의 삶을 기쁨으로 인수하게 하는 것이었다.

지난 날 수많은 청년들은 자신의 계급을 넘어서서 만인의 자유를 위해 민중 운동에 헌신함으로써 소수자들의 정치 경제적 과두제를 전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중국의 실용주의 노선의 등장, 문민정권 이후의 신자유주의 공세, 의회 민주제의 형식적 정상화 및 정보 문화산업의 일상화, 생존 경쟁 이데올로기의 선전 등은 민주의 이름으로 부르주아 독재를 공고하게 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과학적 유물론 철학의 교조주의적이고 사회 공학적인 성격이 자본주의의 통속적 유물론과 친화성이 있으며, 기계적 경직성을 갖고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 대한 반성은 기존의 변증법이 갖고 있는 전체성의 원리가 개체성을 말살하는 억압의 원리라는 통념을 보급시키고, 무명의 평등한 개체들이 주권자라는 관념을 확산시켰다. 영상과 정보 상품의 폭발적 소비 흐름을 타고 개체들의 권력은 사회의 어느 곳에서나, 심지어 광고판이나 말끔해진 공중 화장실에서도 떠다닐 수 있었다.

전체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에 기반한 주체성도 죽었다는 표어로 유행하게 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은 문화생활 양식으로 실증되는 것 같았다. 소외된 소수자를 포함한 개체들의 권리는 유연하게 된 사법부의 법제화에 의해 객관적으로 보장되는 듯했다. 이러한 상황은 참여정부 시절의 신자유주의 완성 단계에 이르기까지 만물의 상품 정보화 조류와 명운을 함께했다. 이처럼 개체들의 권력은 형식적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자본에 의해 왜곡된 형태로 완성되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갔다’. 그리고 그동안 무엇이 왔는가? 서양에서는 가장 흔한, 그래서 닳아빠진 자유 민주적 유물론이 ‘왔다’. 세계는 물건들과 그 관계들의 총체이다. 사회적 개체들은 그것에 의존해서만 자유롭게 존재한다. 이 얼마나 편리하고 내재적이며 유물론적인 세계상인가? 그것은 초월적 종교와 예술과 진보주의도 그 앞에서는 독립성을 상실하고 매혹되는 미끈한 속류 유물론이다. 그리고 그에 기초한 신나는 가상세계가 덤으로 주어졌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생활양식과 이것에 홀린 세계상을 세속적 유물론이라고 판단한 맑스의 견해는 여전히 유효하다. 총체적 물질화와 정신의 전면적 자기소외는 현상적 실재가 가상이라는 고전적 관념을 가상도 실재라고 뒤집는 데에서 경쾌하게 완성된다.

그동안의 한국사회가 누린 민주적 세계상은 정보 상품의 홍수와 개체의 권리, 금융 증권의 생활화와 사적 공간의 법제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경제 권력에 매료되고 국가권력에 호소하는 반(反)주체적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철학은 변증법의 전체성의 원리와 주체성을 두려워하여, 자유 민주적 과두제가 갖는 전체성의 원리와 폭력성에 대한 관심과 탐구를 포기했다.

이러한 무관심은 기존의 자유 민주적 사고가 전체적 일원성과 개체적 다원성이라는 두 개념 사이에서 움직여 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양 전통철학이 논변의 편리를 위해 동일성과 다양성이라는 두 범주에 갇혀 버리기로 작정해온 것과 맥을 같이할 것이다.

이러한 이원적 사고는 변증법적인 전체성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현실에서 작동하는 독재적 전체성에 대한 탐구까지도 버리는 것으로 나아갔다. 이 때문에 우리 스스로, 그간의 민주화 운동에 의해 부분적으로 되찾은 개체성의 권위를 국가와 자본이라는 유서 깊은 전체성에 기대어 회복하고자 함으로써 급진적 주체성을 기각했다.

개체성과 전체성은 사이좋게 공존한다. 지상의 대부분의 나라는 전체성의 위력 하에 개체가 보호받고 배려되는 것을 민주주의라 칭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제는 사회공학자들이 되어 버린 정객들과 기업가들이 뚜렷한 계급의식을 가지고 성장하게 되었다. 사랑받기도 하고 미움받기도 하는 이 시대의 여러 군주들이 의회 민주제에 의해 등장하고 그것 위에 군림하는 것은 철학적으로는 자유 민주주의적 유물론을 배경으로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진보적 학술을 포함한 대부분의 학문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국가의 상업적 관리 속으로 편입되고, 대학은 하청업체가 되었다. 학문 영역은 신자유주의적 정치화와 이데올로기화라는 심각한 재난을 만나게 되었다. 생존의 위협 속에서 국가가 규정한 규격과 형식에 맞추어 주문 제작해야 하는 학자들은 생산량을 문서로 보고해야 하는 스탈린적 노동 생산성의 법칙을 관철시키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거대한 메뚜기 떼가 전진하는 원리가 서로 지체하면 뒤에 오는 자에 의해 먹이가 되는 위험성에 따른 흥분이라면, 우리의 이성은 분명 곤충의 변태적 욕망을 동력으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오랫동안 지적되어 왔으나 자율성과 창의성이 경영논리 속으로 변질된 지금, 이미 관행이 되고 법제화되어 어느 누구도 고치기 어려운 숙환이 되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도 이러한 습관에 한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비판에 의한 철학의 회복이라는 사명에 직면하여,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창조를 미리 봉쇄하는 한국 학술체계의 문제에 직면하여, 시대의 사유로서의 잡지 『ⓔ 시대와 철학』을 사상의 자유 공간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우리의 시대는 밖으로는 정치·경제·과학·문화의 영역이 제기하는 여러 철학적 문제에 대한 탐구와 해결을 요구하고 있으며, 안으로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창출하고 실현하는 주체성에 대한 모색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러한 필요성은, 세상의 바닥과 구석에서 권력이 가한 모든 참사가 전해주는 말없는 자유의 충동을 삶의 진실로 수용할 때, 물질과 생명이 갈등하는 가운데 펼쳐져 있는 세계의 심연의 소리에 귀 기울일 때, 더욱 우리 내면의 양심으로 다가올 것이다.

세계에의 즐거운 몰입 대신 세계에 대한 탐구와 사색으로, 세계를 벗어나는 영혼 대신 현실을 새로운 미래로 생성시키는 주체성을 찾는 데에서 사유는 그 깊이와 폭을 갖게 될 것이다. 시대와 사유가 넘어지느냐, 아니면 일어서느냐는 바로 이 깊이와 폭의 창조에 달려 있을 것이다.

 

‘ⓔ 시대와 철학’ 창간 발기인 일동

강지은 곽노완 구태환 권정임 김광호 김교빈 김문용 김세서리아 김성민 김성우

김수중 김시천 김우철 김원열 김인곤 김재현 김종곤 김호경 김홍경 문성원 박강수

박기순 박민미 박영균 박영미 박영욱 박은미 박정하 박종성 백충용 서도식 서영화

서유석 송석현 송종서 신우현 심의용 심혜련 연효숙 우기동 유현상 이관형 이규성

이병수 이병창 이병태 이상훈 이성백 이순웅 이재원 이정은 이정호 이지영 이철승

이현구 임재진 전호근 정준영 조광제 조민환 조은평 최유진 최종덕 최한빈 한길석

현남숙 홍영두 홍원식 황성혜

(이상 가나다 순 69명)

글: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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